궁예와 왕건, 진정한 역사의 승자는?
철원향토사연구회 운영위원장 김 영 규
1. 머리말
지난 2005년 철원군에서는 태봉국(泰封國) 철원정도 1100주년을 맞이해 국내외 역사학자들을 대거 초치하여 태봉국과 궁예(弓裔) 관련 학술 세미나를 개최하고 연구 및 저술 활동을 지원한 바 있다. 2년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집중적인 조사연구 지원으로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 과도기니 나말여초(羅末麗初)니 하여 그간 소외되었던 분야를 주목받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당시 참여했던 발표자나 연구자, 토론자 대부분이 태봉국과 궁예에 관한 문헌 사료가 절대 부족하고 극히 제한되어 있어 단기간에 다양하고 깊이 있는 연구 성과를 기대하는 것에는 회의적이었다.
지자체가 지원한 기간이 짧아 관련 유물이나 유적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접근이 미비하고, 궁예도성을 비롯한 태봉국 관련 주요 유적이 접근이 불가능한 DMZ 안에 분포하는 관계로 더 이상의 연구진척은 무리였다.
이는 후삼국(後三國) 정립기인 태봉국의 존립시기가 20여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과도기이자 쟁패(爭覇)의 시기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문제인 것은 기존에 존재하는 1차 사료인 三國史記, 三國遺事, 高麗史 등에 나타난 태봉국과 궁예 관련 기록이 다소 부정적으로 왜곡되고 편협한 시각으로 기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역사가 승자(勝者)의 기술(記述)이라고 하지만 반대편에 섰던 패자들의 행적과 성향을 너무 심하게 왜곡하였다.
당시 학회 참가자들도 이런 왜곡된 1차 사료를 어느 정도나 인정해야할지 진정성 문제로 갑론을박(甲論乙駁)이 심했고 오히려 궁예를 동정(?)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강원도에서는 유일한 도읍지였던 철원군 주민들은 대동방국(大東邦國)을 지향하고 주체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엄격한 신라골품제사회에서 소외되었던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하는 새로운 세상을 연 태봉국이 18년 짧은 왕조로 끝난 점을 애석하게 생각한다.
지금도 철원에는 부하들의 반란으로 권좌에서 쫓겨나 한탄강을 건너서 명성산(일명 울음산)에 숨어들어 항전하다가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는 궁예전설이 내려온다. 이에 미처 이루지 못한 궁예의 꿈은 무엇인지, 태봉국은 왜 단명했는지, 어떤 역사적 의의가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뒤를 이어 고려를 건국한 왕건과는 자라난 환경이나 후원 세력, 정치적 성향에서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진정한 역사의 승자는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태봉국과 궁예 관련 기술(記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삼국시대 역사 연구의 핵심 사료인 三國史記를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우리 역사학계에서도 논쟁거리였다.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 라는 투쟁론을 주창하고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를 지은 독립 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사학자인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1880-1936) 선생은 김부식 이래 내려오는 지배자 중심, 왕조 중심 사대주의 사관(史觀)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우리가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기록들이 기본적으로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특히 '古代의 一, 二 史家가 자기의 好惡대로 아무 책임감 없이 지은 것이 문제라고 하였는데 이는 고려사와 삼국사기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이 조선과 고려의 건국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편찬된 것인 이상 거기에는 일정하게 정치적 목적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궁예의 신라왕자설에 대해서 전면적. 본질적으로 의심을 표명했다. 신채호는 '高麗史官이 구태여 世達寺 一個 乞僧 궁예를 가져다가 고귀한 신라 황궁의 왕자로 만들었다고 보고, 그 이유를 정변을 통해 국왕 궁예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왕건의 혁명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함이었다고 하였다. 즉 궁예를 아버지에 대해 불효하며, 宗國에 대해 不忠하였던 인물로 묘사함으로써 그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인물로 만들었다는 것으로 이 모든 것이 김부식의 계획된 의도라는 것이다.
신채호의 비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古來로 전통적인 역사서는 述而不作 원칙만큼은 지켜졌다고 하니 있는 사실은 그대로 기록했고 없는 것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정치적 선택으로 다소 과장된 점은 인정하되 사실과 내용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난맥상이 태봉과 궁예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겪는 어려움이기도 하다.
본 글은 철원지역에서 향토사 조사연구 활동하며 읽었던 태봉국 및 궁예 관련 서적 3~4권의 내용과 강원대학교 대학원 도서관의 관련 도서 3권의 내용을 주제에 맞게 발췌하여 정리하였다.“태봉국의 궁예왕은 실패한 왕이다." 혹은 “고려의 왕건이 진정한 승리자다."라는 말에 다소 공감은 하나 동의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태봉국은 왕건의 고려를 탄생시키는 정치 사회적 모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태봉국이 없었다면 고려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시대적으로 환경과 역할이 서로 달랐을 뿐이다. 출신 배경과 자라난 환경이 근본적으로 달랐기에 그들 각각의 정치성향과 능력은 역시 다르게 표출되었다. 각기 자신의 강점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우고 나라를 세워 국가를 경영했지만 전체를 보고 아우르는 시각이나 장기적인 비전이 고려 왕건이 더 미래지향적이고 시의 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궁예나 왕건 둘 다 역사적으로 윈윈한 성공한 조합이며 이제 그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들을 적시해 보겠다. 사실 역사에서 승자와 패자라는 용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어쩌면 후대 역사 記述家들이나 호사가들이 입맛에 따라 붙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유독 궁예와 왕건이라는 두 인물에게 이러한 비교와 수식어가 많이 따라 붙는다. 이 글을 통해 이러한 연유를 알아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이다.
2. 마이너리티 궁예
궁예는 신라말기 권력다툼에서 버려진 비운의 왕자이다. 한 해에도 몇 번씩 왕이 살해되고 바뀌는 진골가문 내 피비린내 나는 왕위쟁탈전이 한창 벌어질 때 태어났다. 버려진 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하다가 세달사(世達寺, 영월 흥교사)에서 수도승으로 청년기를 맞는다.
이에 궁예는 신라에 대해서 철저하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신라를 멸망시켜 병합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경주의 신라 왕실과 진골귀족을 멸망시켜야할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신라 골품제사회의 해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궁예가 신라에 대해서 철저하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데에는 그가 왕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의해 쫓겨나게 되어 왕자 신분으로서의 특권을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골품제사회의 규범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입장에 있었다.
따라서 그는 골품제 사회가 해체된 후의 새로운 사회규범과 사회 정치체제를 제시하기가 어려웠다.
궁예는 왕자 신분이라는 유리한 입장을 이용하여 몰락하거나 도태된 낙향 진골귀족을 중심으로 호족세력을 결집하였다. 그는 寧越 溟州(강릉) 淸州 公州 등지의 호족세력을 결집해 중요한 세력기반으로 삼았다.
영월의 궁예세력으로는 승려 출신인 종간(宗?)과 평창 제천 호족 출신인 김대금(金大黔), 귀평(貴平) 등이 있다. 명주 호족 김순식(金順式)과 청주 호족 견금(堅金), 임춘길(林春吉), 진선(陳瑄), 선장(宣長) 형제, 공주의 환선길(桓宣吉), 이흔암(伊昕巖) 등은 궁예의 핵심세력들이다. 이들 지역 호족세력은 대체로 신라의 몰락한 낙향 진골귀족계 호족세력으로 정치적 사회적 성격이 궁예와 동병상련으로 동일했다.
즉, 양자는 반 신라왕실의 입장에서 골품제사회의 해체에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골품제사회의 규범이나 신라적 전통에 익숙하여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보수적인 체질의 소유자였기에 결국 신라 정치체제 전통을 이어받아 전제왕권을 추구하였고 새로운 사회규범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실제로 궁예는 911년 전후해 미륵신앙(彌勒信仰)에 근거한 神政的 전제주의를 추구하였고 915년 무렵에는 공포정치에 의하여 전제왕권을 확립했다. 그의 전제왕권 추구는 일반 농민에게 과중한 노역과 세금이 부과되어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했고 결국 멀어졌다.
사실 당시는 더 많은 호족세력을 끌어 모아 통일 왕조를 수립해야할 시기로서 전제왕권을 추구하기에는 이른 시기였다. 이른 전제왕권 추구는 호족세력의 반발을 초래하여 몰락으로 귀결되었다. 당시 호족세력과의 연합을 포기하고 전제정권을 추구한 것은 그의 출신에 따른 한계이기도 했다.
이는 왕건의 호족연합정책과 뚜렷이 대비된다.
궁예의 초창기 후원 호족세력은 寧越 溟州(강릉) 淸州 公州 등 내륙지역을 중심으로 한 小京이나 州治 출신들이었다. 이들 지역은 대체로 내륙지역으로서 농업이 주요한 경제적 기반이었는데, 이는 변경지역의 농업이나 상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적 기반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후삼국 통일전쟁에는 막대한 전쟁비용이 필요했는데 내륙지역의 호족이나 농민들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이렇게 농업경제와 陸軍力에만 의존한 호족세력으로 후삼국 쟁패전에서 주도권을 잡는 것은 무리였다. 그리하여 이들 외에 지금의 경기 북부와 황해도에 해당되는 패서(浿西)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한다.
平山朴氏와 왕건가로 대표되는 浿西호족세력이 궁예에 귀부(歸附)하여 고려(후고구려) 건국 초기 지배영역을 확대했다. 898년 浿西道 및 漢山州 관내 30여성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어 국도를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겼다.
궁예의 송악 천도는 패서지역 호족과의 적극적인 연결을 도모한 것이었고 北原(원주) 國原(충주)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양길의 위협도 감안한 것이다. 송악 천도 다음해인 899년 궁예는 패서호족들의 지원을 받아 양길을 물리치고 남한강 상류지역을 장악한다.
이로써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북부 지역에 걸치는 중부지역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고 901년 국호를 고려라 정하고 스스로 명실상부한 왕이 되었다.
궁예는 904년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905년 송악에서 철원으로 환도(還都 혹은 移都)한 후 전제왕권을 추구하게 된다.
철원환도(還都)는 송악이나 패서 호족세력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 전제왕권을 확립하기위한 조치였다. 그는 패서호족과의 연결을 포기하고 대신 청주세력을 전제왕권의 후원세력으로 활용하였다.
궁예의 강력한 정치적 세력기반인 청주호족은 당시 강경파 온건파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중앙정치세력으로 진출한 강경파가 궁예의 전제왕권을 떠받들었는데 이들은 다른 기타 호족세력에 대해 배타적이었다.
청주호족 중 온건파도 일정하게 궁예정권을 지지하였으나 궁예정권 말기에 강경파에 밀려서 정치적 입지가 좁아졌다. 패서지역 호족세력을 중심으로 한 많은 호족세력이 궁예의 전제왕권 추구에 반발하였고 이들의 반발은 궁예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당시 전국 각지에는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한 강력한 호족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후삼국 사이의 주도권 쟁패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족세력과의 연합을 포기하고 전제왕권을 추구하였다는 것은 사실상 무모한 정치행태였다.
浿西豪族은 대부분 고구려의 후예다. 신라하대에 패서지방 개척은 경덕왕 7년(748)에 시작되어 헌덕왕 18년(826)에 완료되었고, 평산 곡산 해주 황주 재령 등 14군현을 설치하였다.
신라정부는 선덕왕 3년(782) 平山에 패강진(浿江鎭)을 설치하여 북변수비(北邊守備)의 본영으로 삼았다. 패강진은 다른 군진과 같이 순수한 군단이 아니라 州, 小京 등과 동등한 하나의 독립된 행정단위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하여 패강진은 패서지방 즉 예성강 이북의 광범위한 변방지역을 관장하는 특수한 행정구역이었고 진성여왕 무렵 농민항쟁이 전국적인 내란상태로 확대되면서 중앙정부 통제를 벗어나 지방호족세력 수중으로 넘어갔다.
당시 패강진에는 設鎭과 동시에 신라정부에서 민호를 이주시켰는데 이 민호는 軍戶的 성격을 가진 것으로서 둔전병이라고 할 수 있는 토착적 항구적 지방군이었다. 패강진의 군관 조직이 패강진 관하의 모든 군현을 분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패서지역 전역의 민호가 屯田兵적인 토착의 지방민이었다고 볼 수 있다.
패강진 지역에서 이러한 군사적 조직을 통하여 급속히 성장한 지방 세력이 박직윤(朴直胤)으로 그는 大毛達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이 지역이 고구려의 故土이고 대모달이란 칭호를 사용한 것을 보면 신라정부 지배권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했음을 알 수 있다.
9세기 중기 평산박씨는 상당한 군진세력으로 성장했고 그의 아들 박지윤(朴遲胤) 代에는 패서지방의 유력한 호족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평산박씨를 비롯한 패서호족들은 895년 무렵 궁예에 귀부해 궁예가 패서지역을 장악하는데 크게 협력한 것을 계기로 궁예의 중요한 지지 세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평산박씨는 궁예치하에서 자손이 번성하고 세력기반이 확대되어 그 후 왕건 대에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평산박씨는 지방관으로서 溟州 竹州 등으로 이동하여 다니다가 마침내 平州에 정착하여 패강진의 군사적 조직을 통해 패서지역의 유력한 호족으로 성장하였다.
이런 평산박씨의 호족화는 군진세력이 호족세력으로 성장한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평산박씨는 궁예에 귀부하여 궁예가 패서지역을 장악하고 13진을 설치하여 궁예 세력기반으로 삼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어 평산박씨는 일찍부터 연관관계에 있었던 왕건가문과의 인연으로 하여 궁예 말년에 왕건과 결합하였다. 그 뒤에 평산박씨는 다른 패서호족들과 함께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집권하는데 협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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