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령목 2010. 10. 24. 10:53

능창은 어떤 인물인가?
오늘은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은데, 능창은 지금으로부터 1,000여 년 전 10세기에 활약했던 인물입니다. 고려 건국시기 왕건이 궁예의 부하로 활약하던 당시에 서남해안을 장악하고 있던 해상세력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견훤, 왕건, 궁예 등에 빛이 가려져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장보고의 뒤를 이은 이 지역의 해상영웅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장보고의 뒤를 이었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흔히 완도 청해진을 중심으로 국제무역을 통한 해상왕국을 건설했던 장보고가 사망한 후 이 지역 해양세력의 명맥이 끊긴 것으로 이야기되는 데, 능창의 존재를 통해 해양문화, 해상세력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능창은 전시상황이 아니었을 때는 서남해안의 해상 지리적 여건을 이용한 무역선단을 이끄는 그런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능창이 활동했던 주 근거지 어디였나?
목포 북항 쪽과 마주보고 있는 현재 신안군에 속한 압해도를 중심으로 인근 해역에 해상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해양사에서 완도에 장보고가 있었다면, 압해도에는 능창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능창의 존재를 증명할 만한 어떤 역사적인 기록이 있습니까?
능창은 일명 수달이라고 불렀는데, 섬 출신으로 바다 전투 수전(水戰)을 잘하여 수달(水獺)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역사서인 고려사에 기록을 통해 남아 있는 내용입니다. 다만 역사기록에는 능창을 일컬어 도적이니 적수니 하는 표현이 되어 있는데, 이는 승리자인 왕건의 입장에서 역사기록이 서술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상무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왕건이 궁예의 부하로 들어가서 신임을 얻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나주를 비롯한 이 일대의 해상세력을 장악한 공로 때문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능창은 왕건의 최대의 라이벌이었고, 맞상대하기 어려운 존재였다는 것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왕건의 라이벌이었다고 했는데, 두 사람이 전투를 벌인 적이 있는지?
두 사람이 전면전을 벌인 적은 없습니다. 능창이 왕건의 침입에 대비해 주변 세력을 규합하는 도중에 그만 왕건의 부하에게 생포 당하고 말았는데, 고려 건국의 역사과정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것 장면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구체적으로 상황을 설명해주시죠?
이와 관련된 내용이 고려사 태조 즉위년 기사에 실려 있습니다.
[왕건이 드디어 이 일대까지 진출하였는데, 압해현(壓海縣)의 능창(能昌)이 도망친 자들을 불러모으고 인근 세력들과 결탁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왕건(태조)이 말하기를 "능창이 이미 내가 올 것을 알고 반드시 도적과 함께 변란을 꾀할 것이니 비록 소수라고 하더라도 만약에 힘을 아우르고 세력을 합하여 앞을 막고 뒤를 끊으면 승부를 알 수 없는 노릇이니 헤엄을 잘 치는 자 십 여인으로 하여금 갑옷을 입고 창을 가지고 작은 배로 밤중에 나룻가에 나아가 왕래하며 일을 꾸미는 자를 사로잡아서 그 꾀하는 일을 막아야 될 것이다"라며 지시를 내렸습니다.
여러 장수들이 다 이 말을 따랐는데, 과연 밤중에 섬 사이를 지나는 조그마한 배가 있어 이를 잡아보니 그 안에 바로 능창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왕건은 당시 자신의 상관이었던 궁예에게 능창을 잡아 보냈는데, 궁예가 크게 기뻐하여 능창의 얼굴에 침을 뱉고 말하기를 "해적(海賊)들은 모두가 너를 추대하여 괴수라고 하였으나 이제 포로가 되었으니 어찌 나의 신묘한 계책이 아니겠느냐" 하며 여러 사람 앞에서 목베었다.]({高麗史} 卷1 太祖世家1 즉위전 기사)
이 기록은 912년에 능창이 압해도를 근거로 왕건과 대립하다가 결국 왕건에게 생포되어 제거되는 과정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만약 이때 능창이 왕건에게 붙잡히지 않았다면, 고려건국의 역사는 다시 쓰여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고려 건국과정에 우리지역과 관련된 그런 일화가 숨어있었군요. 그런데 다른 섬도 많은데 능창의 근거지가 압해도였던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압해(押海 혹은 壓海)' 압해'란 '바다를 제압한다'는 의미로서, '바다를 청소한다'는 의미의 '청해(淸海)'와 비슷한 맥락의 지명입니다. 이름에서부터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는데, 고대부터 서남해역의 요충지에 해당하는 곳이었다고 보여집니다.
능창이 왕건과 대립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능창을 견훤의 부하로 보려는 견해도 있으나 능창은 견훤과도 대립한 압해도의 독자적인 해양세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압해도 해양세력과 관련된 역사적인 일화는 고려말 몽고군의 침입을 물리친 사례에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고려말에 몽고군이 압해도를 침입했던 적이 있었나요, 간단히 소개를 해주시죠.
고려말 세계를 정복했던 무적의 몽고군도 고려를 정복시키는데, 상당한 애를 먹었습니다. 고려정부가 강화도로 천도하여 바닷길을 사수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몽고가 이를 눈치채고서, 서남해 해로의 요충지인 압해도를 공략할 계획을 세웠습니다.기록에 의하면 1256년 당시 몽고의 총사령관 차라대(車羅大)는 전함 70여 척이라는 대규모 함대를 직접 동원하여 압해도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압해도 사람들은 대포 두 개를 큰 배에 장치하고 바다 위에서 몽고군가 싸울 준비를 이미 하고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결국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몽고의 장수 차라대는 압해도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高麗史節要}) 남아 있기도 합니다.
몽고군이 압해도를 공격하려 했던 것은 그만큼 압해도가 서남해 도서지역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고 있고, 당시의 압해도 주민들의 해양세력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반영한다고 하겠습니다.



재미있는 일화들을 들었는데, 압해도에 이와 관련된 유적들이 남아 있는 것이 있는지?
꼭 능창과 관련된 유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압해도에는 송공산성을 비롯해서 해안가 토성, 거대한 선돌, 고인돌 등 이 지역의 해양문화, 해상세력의 유적들이 상당 수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유적을 잘 활용하면 압해도의 해양문화를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좋은 자산이 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