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건국신화

하늘에서 환웅이 내려와 우리나라 태백산 부근에 자리를 잡았다.그 소식을 들은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와서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럳자 환웅은 100일동안 빛을 안보고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으면 인간으로 되게 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동굴밖으로 나갔고 곰은 사람이 되어 환웅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 곰을 웅녀라고 부르는데 이 웅녀가 아기를 낳는데 이아이가 바로 단군이다. 단군을 커서 고조선을 세운다.

 

부여의 건국신화(검색)

옛날 북방에 탁리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 왕이 사냥하러 나갔다 온 후 왕의 몸종이 임신을 하게 되었다. 몸종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왕이 죽이려 하자, 몸종이 말하기를 달걀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후 몸종이 아들을 낳았는데, 왕이 미워하여 아기를 돼지우리에 버리게 하였더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죽지 않게 하였고, 마구간에 버렸더니 이번엔 말이 또 입김을 불어 죽지 않게 하였다. 

이러하자 왕이 기이하게 여겨 아기를 그 어머니에게 기르게 하였으니, 그가 바로 동명이다. 동명은 성장하여 활을 잘 쏘았는데, 왕이 나라를 빼앗기게 될 것을 두려워 하여 군사로 하여금 동명을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남쪽으로 달아나 시엄수가에 이르렀는데, 탄식하며 활로 물을 치자 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놓아 주어 무사히 건너게 되었고, 그 길로 남쪽 땅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부여를 건국하였다.

 

고구려 건국신화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가 결혼을 하여 낳은 아들이 주몽이다.

유화가 자기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을 때 동부여의 왕 금와왕이 이 유화를 보고 자신의 궁으로 데리고 왔다.

유화가 궁에 있을 때 아이를 낳았는데 그게 알이였다. 금와는 안좋은 징조라며 돼지우리에 버리고, 직접 깨보려고 했지만 다 실패했다. 금와는 포기하고 다시 알을 유화에게 돌려주었는데 거기서 주몽이 태어났다.

주몽은 어렸을 때부터 금와의 사랑을 받고 자랐는데 커서 다른왕자은 주몽만 편애한다고 주몽을 죽이려고 했다.

유화는 그 얘기를 듣고 주몽을 도망치게 했다. 주몽은 마리, 협보, 오이와 함께 도망을 치다가 강에서 다른왕자들에게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나는 천제의 아들이고, 하백의 외손자다"라고 하니 자라들이 올라와 주몽이 강을 건너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주몽은 소서노와 결혼을 하여 고구려를 세우게 된다.

 

백제의 건국신화

고구려 동명왕(주몽)은 부여에 있던 예씨부인과 결혼하였다. 고구려에 있을 때는 소서노와 결혼을 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왕위를 물러받을 줄알았는데 부여에 있던 예씨부인의 아들인 유리가 고구려에 와버렸다. 그러자 비류와 온조는 자기들이 왕위를 물러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왕의 허락을 받아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 때 많은 신하들과 백성들이 따라왔다. 신하들이 지금의 서울부분에 나라를 세우자고 했다. 온조는 그말을 듣고 나라를 세우려고 했지만 비류는 자신은 바다쪽이 좋다며 미추홀(지금의 인천)에 나라를 세웠다. 이때 온조의 나라는 '십제'였다. 후에 다시 두 형제들이 만났다. 그런데 비류는 온조의 나라 백성들이 잘 사는 것을 보고 후회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나라는 습하고 짜서 곡식들이 자라지 않아 백성들이 못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류는 후회를 하고 자살을 하고 온조는 비류의 땅까지 차지하여 나라이름을 '백제'로 고쳤다.

 

신라의 건국신화

마한부분에 여섯마을의 촌장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들을 돌바줄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하늘에게 빌었다. 이에 그들이 높은 소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아래 나정 우물가에 번개불같은 이상한 기운이 땅에 닿도록 비치고 있었다. 흰 말 한 마리가 땅에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을 찾아가 조사해 보았다. 거기에는 알이 하나있었는데 알이 깨며 아기가 나왔다. 그러자 여섯마을 촌장들은 아기가 깨고 나온 알의 모양이 박처럼 생겼다고 해서 '박'씨로 지었고 이름을 혁거세라고 지었다. 아이가 크자 잘생긴 외모에 용맹함까지 있어 그를 왕으로 세웠다. 그리고 계룡의 옆구리에서 태어난 아기도 있었는데 이 아기의 이름을 알영이라 지었다. 박혁거세와 알영은 결혼을 하여 신라를 다스렸다.

 

가야의 건국신화(검색)

하늘에서 황금알 여섯 개가 내려왔는데, 국가가 되기전 가야지역의 촌장들이 모여 "거북아 거북아 네 머리를 내 놓아라. 안그러면 구워먹겠다"... 라고 하니 여섯개의 알이 깨어났고, 그 중 맨 먼저 수로왕이 나와서 가락국(금관가야)의 왕이 되고, 이어서 다른 다섯 개의 알에서 나온 사람은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가야 왕들 가운데 수로왕이 첫째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초기에는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가 연맹의 주도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로왕은 인도에서 온 공주와 결혼을 하고 150살이 넘도록 살았다.

 

통일신라와 발해의 건국신화는 없습니다.

 

고려 왕건의 탄생신화(검색)

왕건의 아버지 용이 한씨와 결혼하여 송악산 남쪽 기슭에 살림을 차렸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선(신라말 도참사상으로 유명했던 승려)이 그들을 찾아왔다. 도선은 용의 집앞을 지나며, 집터는 좋지만 방향이 틀렸어. 남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장차 왕이 될텐데... 말했다. 아내에게서 소식을 들은 용은 급히 도선을 쫓아갔다. 도선은 용건이 쫓아오자 그에게
"내가 일러주는 대로 집을 지으면 천지의 대수에 부합하여 내년에는 반드시 슬기로운 아이를 얻을 것입니다. 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왕건이라고 하십시오"
용은 그가 시킨 대로 집을 젓고 살았더니 그들부터 아내에게 태기가 있었고 열달뒤에 아이를 낳으니 아이가 바로 태조 왕건 이었다

 

조선 건국신화(검색

이성계는 고려시대의 무장이였다. 아버지 이자춘이 공을 많이 세워서 자신에게 그것들이 모두 돌아갔다.

이성계가 왕이 될것을 처음 알려준 것은 무학대사이다. 서까래 세개를 짊어지고 나오는 꿈을 꾼 이성계는 무학대사에게 찾아가 꿈 해석을 부탁했는데 무학대사는 그것이 왕이 될 징조라고 했다.

그리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통해 조선이 건국되었다.





지식인에서 이런 질문이 맨날 올라오길래 내가 만들어서 펴뜨려졌는데 원작자를 못알아보는 사람들이 어디서 봤다고 욕먹는다. 아 슬프구나

'역史보는 나무 > 신화,전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함흥 창세가  (0) 2011.08.28
by 초령목 2012. 5. 21. 20:23

후삼국 시대의 재조명

 중국이나 일본이나 그들에게는 전 국토가 떠들석 했던 그런 시대가 있었다. 중국은 '삼국시대'라 불리던 시대에 유비 · 조조 · 손권이라는 영웅이, 일본에게는 '센고쿠 시대'의 오다 노부나가 · 토요토미 히데요시 ·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영웅이 있다. 이렇게 동아시아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났던 시대가 우리나라에는 과연 없었을까? 

 우리나라에도 전국시대를 생각하게하는 시대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부르던 '후삼국시대'이다. 여기서는 동아시아의 영웅들과 비교할 수 있는 인물들이 나타나니 바로 '진훤 · 궁예 · 왕건'이다.

 우리는 보통 후삼국시대라 불리는 이 시기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50년도 안되는 이 시기를 과연 '시대'라는 명칭을 붙여도 될까?" 라는 생각에 그저 비교적 컸던 남북국시대와 고려시대 사이의 작은 시대로 떠올린다. 실제로 몇몇 역사책들을 보면 삼국시대가 끝나면 바로 고려시대로 넘어가고 후삼국시대는 그 중간에 한 두장 설명하는 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과연 후삼국시대는 우리가 무시해도 될만큼의 비중이 작은 시대였을까?

 길게만 느껴졌던 소설 삼국지의 배경인 중국의 삼국시대는 실제로는 220~280년 60년이 겨우되는 역사이다. 일본의 전국시대라 불리는 센고쿠 시대는 1467년에 시작하여 1573년까지 106년, 약 100년의 역사를 가졌다. 이처럼 동아시아의 혼란시기는 100년도 안되는 시간을 가지고 있지만 전부 그 나라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혼란시기인 후삼국시대만큼은 우리에게 외면을 당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후삼국시대는 892년부터 936년까지의 44년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의 36년보다도 더욱 긴 시간이다. 1945년 광복 후 지금까지도 우리가 일제의 치욕을 기억하는 것을보면 44년의 시간이 결코 짧다고 느껴서는 안된다.

 후삼국시대는 남북국시대와 고려시대 사이에 끼여있기 때문에 무시를 받아야 하는게 아니라 이 시기에 있기때문에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이다. 그래야만 신라의 멸망 원인과 고려의 성립 원인을 쉽게 이해할수가 있을 것이다. 그저 신라가 멸망했기 때문에 고려가 건국되었다라는 단순한 생각은 버려야 할것이다.44년의 역사는 짧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44년동안 후백제라는 나라와 후고구려라는 나라가 건설되었으며 궁예 18년의 태봉과 992년간 명맥을 이어오던 신라가 망했다. 그 짧은 시기에 이렇게 많은 국가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진 것은 우리나라 역사에 거의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아마 고조선이 멸망하고 난 후에도 이런 혼란시기가 있었을 수도 있다.) 후삼국시대의 중요성은 그렇게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중국의 삼국시대에 대해서는 유비,조조,손권 등의 인물을 외우면서 적벽대전 등 유명한 전투가 많으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일본의 전국시대도 정명가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같은 일본의 영웅이 임진왜란이라는 큰 사건을 일으켰기때문에 일본의 전국시대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그저 안타까운 뿐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위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태봉국의 궁예는 1000년동안의 중국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깨기위해 분열중이었던 중국과는 외교를 벌이지 않고 태봉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세우고자 했었다. 그래서 중국 대신 거란과의 외교로 여러 물건을 하사했다.(이에 대해서도 일본 칠지도같이 논란이 많음) 이와 반대로 진훤같은 경우에는 동아시아 세계의 질서에 맞춰 중국과의 수교를 통해 외교적 우위를 차지해 통일의 유리한 고지를 찾으려고 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신라말기의 혼란시대였다. 골품제의 한계를 느끼고 더이상 빛을 찾을 수 없는 6두품세력들과 세금으로 고통받던 농민들과 삼국통일이라는 허물안에 살아있던 백제와 고구려의 혼이 마침내 터진 시기이다. 사실 신라는 정신적인 통일을 이룩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지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있었다. 그리고 결국 원종애노의 난으로 반란이 일어나자 이와 동시에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신라의 통제권은 수도권으로 축소되었다.

 여기까지가 신라말기의 모습이다. 그리고 진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궁예가 태봉을 세우자 후삼국이라는 시대가 열리게된다. ...후삼국 역사에 대해서는 생략...그리고 신라가 항복을 하고 후백제가 진훤의 군사에 의해 멸망되자 마침내 고려가 민족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후삼국에 대한 언급이 짧았기에 후삼국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태까지 보던 신라말기의 사회 모순부터 고려통일까지의 시기가 바로 후삼국시대이다.

 고려와 조선의 경우를 보면 급진하게 조선을 세우다 보니 뭔가 부자연스럽게 고려왕조를 멸망시킨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신라와 고려의 경우에는 이 후삼국시대가 있었기에 한나라에서 다른나라로 왕조의 교체가 자연스러울 수 있었다. 

 후삼국시대는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영웅들이 반세기에 공존했던 유일한 시기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진훤, 궁예, 왕건 말고도 기훤, 양길, 능창등 수많은 영웅들이 자기의 세력을 과시하며 자유로웠던 시기였단 말이다. 이것이 필자가 후삼국시대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 중 하나이다. 우리는 이 시기 이후로 더이상 영웅들이 공존하던 때를 떠올릴수가 없다. 이 시기가 너무나도 짧았다는 것이 그저 아쉬울 뿐이다.

 필자가 후삼국시대에 가장 흥미를 느낀 이유가 바로 고대와 중세의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전쟁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고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다 주지 않는 역사의 황무지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개척하지 않은 땅을 내가 개척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혹시 알수 있을까? 내가 이렇게 연구를 하다보면 언젠가는 이분야 최고의 전문가가 될 수 있을지…….  

'후삼국史보는 나무 > 소개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후삼국시대의 구분  (0) 2013.01.05
후삼국시대 새 이름의 필요성  (1) 2010.10.29
by 초령목 2010. 10. 29. 17:59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