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말의 정치 동향 : 고려 건국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아내까지도 무참하게 살해했던 애꾸눈의 폭군.

이 말은 '궁예'라는 역사적 인물을 대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수식어이다. 이합집산의 혼란한 후삼국 시대에 여러 호족들을 평정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궁예는 어쩌면 역사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폭군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 관한 평가를 단순히 이런 말로 결정을 내리기에는 몇 가지 미비한 점이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한 인물에 대해 평가를 할 때 반드시 검토해야 할 사항이 있다. 즉 당대의 정치적 또는 사회경제적 토대, 그리고 민중들의 의식 수준과 사회 사상(또는 종교 사상)이 어떠한 밑거름이 되었는가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만일 궁예가 일반적인 선입견대로 단순한 폭군으로만 살았다면 그가 어떻게 여러 호족들과 민중들의 호응을 받으며 국가를 세울 수 있었는가에 대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궁예에 대해 평가를 내릴 때 한 가지 잣대만을 사용한다면 온당한 역사적 실체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궁예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라 말기의 정치 현상부터 진단해보아야 한다.(여기서는 '통일신라'라는 보편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한다. 뒤에서 설명을 하겠지만 필자는 신라가 3국을 진정한 의미에서 '통일'했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사건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신라말 호족 세력인 김헌창과 동아시아 무역권을 장악했던 장보고 등을 먼저 살펴본다면 궁예의 반란이 지닌 역사적 의미에 대해 좀더 구조적인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만주와 한반도에 나타난 고대국가는 원래 여러 호족 세력들의 연합체였다. 그 연합체가 왕을 중심으로 하여 노예제 사회를 이루면서 대토지 소유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계급 분화 현상은 신라 말기에 와서 극대화되었다. 후삼국이 성립되는 시기인 9세기의 신라 귀족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토지를 더 많이 차지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뒤에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의 집안 역시 대토지를 소유한 가문이었다는 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경주를 중심으로 한 권세가들은 물론이고 각 지역의 호족들은 자연경제의 핵인 토지를 얼마나 많이 차지하느냐에 따라 정치적 지위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중소 토지소유자와 소농민들의 토지를 싼값에 사들이거나 강제로 빼앗아 자기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따라서 호족들이 사병을 키우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이른바 대농장이 형성되어 대부분의 농민(또한 당시 인구의 거의가 농민이었다.)들이 소작농이나 심할 경우 노비로 전락하는 일이 허다하게 벌어졌다. 자연히 생계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져 걸식 생활을 하거나 유랑인들끼리 모여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토지의 집중으로 정전제가 무너진 가운데 과다한 조세와 공납, 부역 등으로 농민들은 날이 갈수록 궁핍해졌다.
이러한 토지 집중화 현상은 약화된 신라 왕권 내의 정치적 암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8세기를 전후로 신라 왕실에서는 서로 다른 핏줄을 타고난 왕자를 중심으로 호족들간에 권력 싸움이 자주 벌어졌다. 즉 최고 권력인 왕위 계승 싸움이 치열했다는 뜻이다. 8세기 중엽 이후인 혜공왕 때에는 '대공의 난'을 발단으로 하여 96각간이 서로 혈투를 벌이는 극심한 혼란이 계속되었고, 이에 따라 귀족들의 세력 다툼도 치열해졌으나 선덕왕이 즉위함에 따라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흔히 선덕왕 때부터를 신라 하대라고 부른다. 선덕왕은 중앙 귀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신라 하대의 정권은 귀족간의 연립 정부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곧 불씨가 되어 신라 왕실은 걷잡을 수 없는 정권 쟁탈전에 휘말리게 된다. 통계적으로만 봐도 하대 150년 동안 스무 번이 넘게 왕이 교체되었고, 즉위한 지 몇 달도 안 되어 암살되는 경우도 많았다.
9세기에 들어 왕위 쟁탈전은 더욱 심화되어 싸움의 규모도 점점 커지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김헌창의 반란(822년)이다.

김헌창의 반란 : 지방 호족들의 봉기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웅천주(공주)의 도독 김헌창은 자기의 아버지인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이유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국호를 장안이라고 하고 건원하여 경운 원년이라고 하였다. 무진(광주), 완산(전주), 사벌(상주)의 4주 도독과 국원(충주), 서원(청주), 금관(김해)의 사신들과 여러 군현의 수령을 위협하여 자기 부하로 삼았다. (중략) 김헌창은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김헌창은 단순히 정치적 권력 싸움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를 세웠다는 것이다. 원성왕계 귀족들과 무열왕계 귀족 사이의 왕권 다툼이라는 평가가 내려져 있는 이 반란은 중앙에서 파견된 토벌군에 의하여 중요 거점인 웅진성이 함락되고 김헌창의 자살로 끝나고 말았지만 신라 말기에 있었던 여러 반란 사건 가운데 당시의 정치 동향을 해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일개 귀족이 국가를 세울 정도로 신라 말기의 정치 분화 현상은 극대화되어 있었다. 김헌창의 반란 후 견훤의 후백제, 궁에의 후고구려 건국도 이러한 맥락에서 일어났다.
김헌창의 아버지 김주원은 785년에 선덕왕이 죽자 무열왕계 왕족 중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자가 되어 측근 귀족들에 의해 왕위에 오르려 하였지만 김경신(후에 원성왕이 됨)이 정변을 일으키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그는 세력 싸움에서 밀려나 명주(강릉)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의 아들 김헌창은 반대 계파가 왕위에 있을 때에도 중앙 관직에서 계속 활동하였다. 당시의 실력자인 상대등 김언승과 쌍벽을 이룰 정도의 세력을 거머쥐게 되었다. 그러나 김언승이 원성왕 계열인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자 그는 자연히 중심 세력에서 밀려나 웅천주 도독으로 전보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주변으로 밀려난 김헌창은 자기 아버지인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하였다. 김경신의 정변으로 부당하게 왕권을 빼앗겼다고 본 김헌창은 지지세력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는 순식간에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에 거점을 마련하였다. 그가 짧은 시간에 광범위한 지역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해당 지역에 이미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존재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주목할 점은 이 지역이 옛백제의 땅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신라 정부는 옛백제 땅에 살고 있는 호족들의 불만을 무마할 만한 정통성이나 견제력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헌창은 잘 훈련된 중앙 군대를 이길 만한 군사력을 지니지 못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김헌창의 반란이 일반 민중들의 지지를 별로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애초부터 왕위 쟁탈전에 초점을 두었던 반란이었기에 병졸로 동원된 양민들이 그를 위해 적극적인 싸움에 나설 가능성은 그만큼 희박했던 것이다. 이것이 뒤에 일어난 견훤이나 궁예의 난과 구별되는 큰 차이점이다. 도탄에 빠진 농민들을 위한 정치적 구호마저 역사 자료에는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김헌창의 반란 이후 지방 호족들은 중앙정부에 대해 더욱 불만을 갖게 되어 신라는 구심점을 점차 상실해가기 시작하였다.
이 반란 사건을 볼 때 신라 말의 왕실은 민중들의 삶은 도외시한 채 계열간의 왕위 쟁탈전으로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따라 국가의 존립 자체도 큰 위기를 맞고 있었던 것이니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는 신라 정부의 정통성부터 의심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갔다. 이러한 가운데 오히려 지방 세력 가운데 중앙 왕권을 대신할 만큼 막강한 군사력과 권력을 지닌 인물들이 나올 정도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장보고이다.

장보고의 반란 : 해상 무역의 중심지, 청해진

장보고는 사실상 신라 중앙정부를 능가하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 국가 안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는 그의 일생과 당시 정치 상황을 연관시켜 검토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장보고가 태어난 연도는 불확실하다. 사망 연도는 846년(문성왕 8년)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는 신라 말기의 호족이며 대상인이었다는 일반적인 평가와는 달리 당시의 민중들에게는 영웅적인 존재였음이 분명하다. 부패한 왕실의 무능력함에 혐오감을 느낀 민중들은 장보고의 민족적이고 대국적인 활동에 동조하여 스스로 민병이 되기도 하였다.
장보고의 본명은 궁복 또는 궁파로서 그 뜻은 '활보' 즉 '활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사회적 출신 성분이 어떠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여러 자료를 검토해볼 때 일반 평민 출신이거나 또는 천민일 수도 있다. 뒤에서 볼 수 있듯이 직접 왕에게 청해진 설치를 건의하고 왕의 승인을 받아 청해진 책임자가 되는 것으로 봐서는 6두품 이하의 신분을 갖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 모두가 추정일 뿐이다. 어쨌든 장보고라는 이름은 중국 당나라에 건너가 활동할 때 만난 대성 장씨를 따서 쓴 것이라고 한다.
그의 성장 과정이나 이와 관련된 자료는 그리 많지 않지만 짐작하건대 어려서부터 무예에 재능을 나타내었고 바닷가에서 태어난 탓에 물에 매우 익숙하였던 것 같다. 청년기에 접어들어 풍운의 뜻을 품고 잠수에 명수라고 알려져 있는 친구 정년과 함께 당나라에 건너갔다. 그곳에서 장보고는 온갖 난관을 헤쳐나가며 생활하다가 서주에 있는 무령군에 입대하여 무술 장교가 되었다.
당과 신라는 교류가 잦아 신라인이 당나라 군사가 되는 일이 그리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장보고는 이곳에서 군 생활에 복무하면서 여러 가지를 눈여겨 보았지만 그 중에서도 당나라 군대의 특성과 조직 체제 등을 관심있게 관찰하였다. 당시 당나라에는 각지에 절도사가 할거하고 있었기에 지방에 따라 군대의 특성이 조금씩 달랐다. 장보고는 그러한 지방 군벌의 속성과 군대 양성 방법 등의 이론적인 것이나 갖가지 병법에 대해서도 실제 경험을 통하여 몸에 익히게 되었다.
당시 중국의 동해안 지역에는 남으로는 양자강 하구 주변에서 북으로는 산동성 등주에 이르는 지역에 신라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른바 신라방이라는 것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8세기 중엽을 전후해서 신라와 당 사이의 국제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장보고도 쉽게 당나라 군대에 입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에 진출한 신라인들의 수는 점차 증가하여 해안 지역은 물론이고 도심에 거주하는 신라인들도 생겨나 자치구역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구역을 신라방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단순히 구역의 명칭이 아니라 당나라 내에 거주하는 신라인들의 권리나 생활을 밑받침해주는 정치적 구실도 하였다. 신라방의 구성을 보면, 총책임자를 총관이라고 불렀고 그 밑에 전지관이라는 직책이 있어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중국어에 능통하여 신라인과 당인간의 교섭에 나서기도 했다.
반면에 시골에 자리잡은 경우에는 촌락을 총괄하는 자치 행정기관인 구당신라소를 세워 일정 지역 내에 있는 신라인들을 다스렸다.
그렇다고 당나라 지방관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런 가운데 마찰이 생기기도 하였지만 신라인들의 자치 지역은 보통 신라인들의 손에 의해 꾸려나갔다.
특히 도심에 설치된 신라방의 사람들은 상업, 운송업, 조선업, 무역업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중에는 특별히 연안 운송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도 있었고, 양주, 소주, 명주 등지에서 아라비아, 페르시아 상인들과도 교역을 넓힘은 물론이고 중국과 신라, 일본 등 동아시아를 오가면서 국제 무역을 직업으로 삼는 자들도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라인들의 왕성한 활동으로 당시 동아시아의 해상 무역은 전성기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해안 지역 출신으로 바다에 익숙하였던 장보고 역시 번창하고 있는 해상 무역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국외 신라인들의 활동은 활발한 반면 당나라는 물론이고 신라도 중앙 집권력이 극히 약화되었다. 거의 매년마다 흉년과 기근 등 자연 재해에 시달려 유랑민들이 많아졌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도적이 되어 각지에서 횡행하였다. 바다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해적은 신라 해안에 자주 나타나 주민들을 마구 잡아가 중국의 중원지방에 노예로 팔았다. 무역선 역시 언제나 해적의 위협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을 직접 체험한 장보고는 신라인이 노예로 팔려가는 극심한 현실에 분노하였다. 장보고는 여러 조사 끝에 중국과 신라, 그리고 일본을 잇는 해상권이 안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국제 무역에 대한 지식을 다져나갔다.
이렇게 장보고는 스스로 해상권을 통괄하고, 신라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세력을 가져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장보고가 이러한 결론을 내린 정치적 배경은 물론 신라 왕실의 부패와 무능에 있었다.
장보고는 마침내 828년(흥덕왕 3년) 중국 본토에서 활동하겠다는 애초의 계획을 과감히 버리고 귀국하였다. 장보고는 왕에게 남해와 동지나해상의 교통 요충지인 완도에 해군기지, 즉 진을 건설하여 서해 무역로를 감시해야 한다고 강력히 건의하였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장보고의 말을 듣고 실행할 만한 군사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진골귀족 세력간의 대립이 심화되어 선덕왕 이후 귀족연립 정권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던 중앙정부로서는 완도까지 적극적인 통치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장보고의 입장에서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었다. 남은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장보고가 직접 군대를 조직하여 해상권을 장악하는 일뿐이었다.
이러한 내용으로 왕의 승인을 받아낸 장보고는 완도를 중심으로 한 인근 지방민들을 모아 민병대를 조직해 나가기 시작하였다.(당시 진을 담당할 수 있는 자격은 6두품 이상이어야 했다. 이런 점을 볼 때 장보고가 어느 정도 왕실과 관련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장보고의 민병대는 얼마 안 가 1만여 명으로 크게 늘어나게 되었고 장보고는 이에 자신감을 갖고 완도에 '바다를 깨끗이 한다'는 뜻을 지닌 청해진을 건설하였다. 사실 진을 설치한 것은 장보고가 처음은 아니었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기 이전의 진만 보아도 658년(태종무열왕 5년) 북진, 782년(선덕왕 3년) 패강진 등이 이미 있었다. 그러나 장보고의 청해진은 앞서 세운 다른 진과는 전혀 성격이 다를 뿐 아니라 그 주체도 상이하였다.
그래서 청해진은 설치 때부터 장보고를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세력 형성의 근거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신라의 군사력은 매우 미약해서 실제로 경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 외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한 국가의 군대라기 보다는 왕의 사병과 같은 위치로 전락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귀족들이나 호족들은 저마다 사병을 양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분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중앙 군대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에게 내려진 청해진대사라는 벼슬도 신라 관직체계에서는 없는 별도의 직함이었던 점도 이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청해진을 설치한 장보고는 본격적으로 해적 소탕작전에 나섰다. 그는 뛰어난 전략으로 해적을 물리쳤고 때로는 회유를 통하여 해적 세력을 와해시켰다. 장보고는 이러한 눈부신 활동으로 동지나해 일대의 해상권을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장보고의 해적 소탕 이후 신라인들은 해적들의 피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해상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장보고는 당-신라-일본을 잇는 해상권을 평정하여 국제 무역을 주도해 나갔다.
당시 신라를 중심으로 해상 무역이 발달하게 된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신라 초기 정권이 안정됨에 따라 귀족들이 여러 호사품을 찾게 된 이유도 한몫 거들었다. 그리고 신라 등지에서 중국으로 보내는 조공이 오가는 중에 사무역도 동시에 발전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조공도 무역의 하나로 편입될 정도였고, 일본의 경우에는 753년 외교 단절 이후 교역 물품이 희귀해져 반대급부적으로 두 나라간에 사무역이 더욱 성행하였다. 또한 발해가 북쪽에 안정된 국가를 세워 서해 북쪽 연안에서 시작하여 중국의 동해 북부 연안까지 자유스러운 해상 유통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점차 해상 교통수단도 발달하여 해상 무역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8세기 중엽 이후 일본과 거래할 때 신라 무역상들이 수출했던 물품 내용을 보면, 구리거울 등 금속제품과 모직물 등의 신라산 물품은 물론이고 향료, 염료, 안료 등을 비롯한 당 및 당을 중개지로 한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 지역 특산품 등이 있다. 신라상인은 그 대가로 풀솜과 비단 등을 가져갔다.
당나라와의 교역에서도 통일기 전에는 주로 특산품이 수출되었으나 통일기 이후에 접어들어서는 고급 직물과 비단 및 금은 세공품 등 고가품이 수출되었다. 또한 당시 신라귀족들이 애용하였던 향료 등 동남아시아 및 서남아시아산 물품들도 신라상인의 중개무역으로 수입된 것이었으니 이를 통해 사무역이 얼마나 성행했는가를 알아볼 수 있다.
장보고 역시 해적을 평정한 뒤에는 직접 무역에 나선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다룬 무역선도 대체로 이러한 물품들과 피혁제품, 문방구류들을 취급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장보고는 무역 활동을 통해 재력도 갖추게 되어 당시 신라 왕실에 버금가는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장보고가 외교 교섭까지 시도하였던 것은 이러한 물질적 기반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청해진을 중심으로 지방 호족으로 자리잡은 장보고는 840년(문성왕 2년)에 이르러서는 무역선과 함께 회역사를 파견하여 일본 조정에 서신과 공물을 보내었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일본이 거부 반응을 보여 별다른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지만 무역은 계속되었다. 그만큼 양국간의 사무역은 정치적인 관계를 떠나서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당나라에 대해서는 견당매물사라는 외교관의 책임 아래 교관선을 보내어 청해진이 교역의 중심지임을 홍보하는 한편 물품 내용 등 여러 무역 실무를 체계화시켜 해상 무역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회역사와 견당매물사라고 불렀던 교역사절을 파견하였던 것은 그가 일반 무역상인과는 달리 독자적인 세력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이를 통하여 장보고는 중앙정부를 대신하여 국제 무역을 관장한다는 것을 주변 국가에게 널리 알리려 했던 것이다. 일본의 지방관과 엔닌이라는 승려가 장보고에게 서신을 보내어 안정 보장을 요청했던 것은 일본.신라.당을 잇는 장보고의 해상 교통로가 당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시사해주는 점이다.
청해진을 중심으로 세력을 안정시킨 장보고는 중국에 있는 신라인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산동성 문등현 적산촌에 법화원을 건립하고 모든 운영비를 지원하였다. 이 법화원은 상주하는 승려가 30여 명이 되었고, 연간 500석을 추수할 수 있는 장전도 갖게 되었다.
법회 때에는 한꺼번에 250여 명이 참석하였던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장보고의 세력은 중국 동해안의 신라인 사회에도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청해진에 필요한 사람을 쓸 때에는 당시 관직의 절대 기준인 골품제와 같은 기존의 신분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유능한 인재들을 발굴, 스스로 자기 능력을 적극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
장보고가 큰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또다른 배경에는 당시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하고 있던 농민 등을 받아들인 데에 있다. 자연 재해 등으로 민중들은 기본적인 터전마저 잃어버리고 사방으로 떠돌기 일쑤였다. 가령 예를 들자면, 812년(헌덕왕 7) 흉년이 들자 170여 명의 유민들이 바다 건너 중국의 저강 지역까지 들어가 먹을 것을 구할 정도였으며 이 무렵 일본에도 수백 명이 건너가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구의 대거 이동은 사회 구조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극히 약화되어 흉년 등 자연 재해가 닥쳐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황폐한 고향을 떠난 빈민들은 새 터전을 찾아 외국이나 바다로 무작정 떠났다. 따라서 빈민들의 눈에는 장보고의 청해진이 적절한 피난처로 보였을 것이다.
장보고는 이렇게 찾아온 빈민들을 규합하고 새로운 활동 무대를 얻기 위해 모여든 인재들을 포용하여 8세기 이래 왕성하였던 신라인의 해상 활동 능력을 적극 활용, 조직화함으로써 그의 세력은 급속도로 성장해 나갔다.
이제 강력한 군대와 많은 선박을 보유하고 부를 축적하여 당시 가장 큰 지방 세력으로 자리잡아감에 따라 중앙정부의 정치적 분쟁에도 자연 관여하게 되었다.
중앙정부가 분열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성덕왕 때부터이다. 선덕왕 재위 기간인 8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중앙의 왕위 쟁탈전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었다. 장보고도 이 싸움에 휩쓸려들어가게 되었으니 그때가 흥덕왕대 이후의 일이었다. 이때의 일로 인해 장보고의 운명도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836년(흥덕왕 11년, 즉위 후 마지막 해이기도 하다.) 어느 날, 경주에서 왕위계승 분쟁에서 패배한 김우징(왕족으로서 뒤에 신무왕이 된다.) 등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청해진으로 피난해왔다. 왕족이 청해진을 피난처로 삼을 정도로 이미 장보고는 중앙정부와 버금가는 세력을 갖고 있었다.
2년 뒤인 838년(희강왕 3) 수도에서 재차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터져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였다. 이 정변을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한 김우징은 날마다 온갖 감언이설로 장보고를 설득하였다. 장보고는 사실 중앙정치에 관여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는 오직 18년 동안 지켜온 청해진을 중심으로 신라가 해상 무역의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는 일만이 관심사였다. 그러나 정권욕에 사로잡혀 있던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구국의 차원에서 거사를 일으켜야 한다고 다그쳤다. 김우징은 2년간 청해진에서 지내면서 장보고의 군사력이 얼마나 막강한 것인가를 실제로 보았기 때문에 그 힘을 자기의 정치적 야심에 이용하려고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그동안 정치에는 별다른 관여를 하지 않았던 장보고이지만 신라 왕실이 얼마나 부패해 있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청해진에서는 기울어져가는 신라의 국운을 다시 일으키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도 역시 인식하고 있었다.
결국 장보고는 김우징이 제시한 '구국적 결단'이라는 명분에 걸려들고 말았다. 장보고는 김우징에게 자기 군대를 내주었다. 김우징은 장보고의 군대를 이끌고 청해진을 나와 경주를 공격하였다. 결국 김우징은 반란에 성공하여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가 바로 신라 45대 왕인 신무왕이다.
비록 장보고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경주를 치진 않았지만 사실상 장보고는 자기 군대를 동원시켜 반란을 일으킨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개입으로 인해 장보고의 운명은 크게 뒤바뀌게 되었다.
정변 이후 신무왕은 장보고의 공을 높이 사 그를 감의군사로 임명하였다. 이 관직은 신라의 군사권을 총괄하는 고위직이었다. 청해진은 그동안 생사 고락을 같이해온 정년이 맡게 되었다. 마침내 장보고는 중앙정부에서 정식으로 공직을 맡게 됨으로써 중앙에 진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막강한 군사력과 정치 권력을 모두 갖추게 된 셈이다.
그런데 장보고의 후원자인 신무왕은 즉위한 지 1년도 안 되어 죽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신라 46대 왕인 문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렇지만 문성왕은 장보고의 기세에 눌려 마음대로 군대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장보고는 직접 중앙정치에 관여하면서 신라 왕실의 정변이 왕권이 약화된 틈을 타 사병들을 갖고 있는 주변 왕족들의 농간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다. 따라서 왕실의 군대가 강해야만이 정권이 안정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장보고는 이러한 정세 판단에 따라 공식적으로 해군력을 장악하기 위해 진해장군의 자리도 차지하였다.
이에 따라 왕족과 귀족들은 장보고를 경계하고 그를 축출할 기회만 엿보게 되었다. 그래도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당과 일본 등과의 교역을 더욱 넓혀나갔다.
그렇게 6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장보고가 군사력을 장악함에 따라 정치도 안정되어 갔다. 그러나 주변 왕족과 귀족들의 정치적 공작도 만만치 않았다. 장보고는 군사력만으로는 정변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없다고 판단, 다른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자기 딸을 문성왕의 두 번째 왕비로 삼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자 다른 왕족, 귀족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만일 장보고가 왕실의 외척이 된다면 자신들의 입지가 그만큼 약화된다는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반대 세력들은 다음과 같이 왕에게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부부의 길은 매우 큰 윤리입니다. 예전을 돌아보아도 왕비를 잘못 택하여 나라까지 망한 일이 허다함을 알 수 있습니다. 나라의 존망이 여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어찌 함부로 왕비를 택할 수 있겠습니까? 궁복은 원래 섬 사람입니다. 이런 천한 신분의 딸이 어떻게 왕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시간이 갈수록 장보고와 귀족 사이의 알력은 극한 대립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금방이라도 큰 정변이 일어날 것 같은 삼엄한 분위기가 정치권을 맴돌고 있었다. 반대 세력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막강한 군대를 갖고 있는 장보고와 정치적 싸움을 벌이는 것은 불리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렇다고 무력으로 장보고를 제거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고심 끝에 장보고를 직접 살해하기로 결심하였다.
반대 세력들은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을 투항자로 위장하여 보내 장보고를 안심시킨 뒤 그를 암살하고 말았다. 파란만장했던 장보고의 생애가 어처구니 없이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장복고가 죽은 후 청해진 세력은 점점 기울기 시작하였다. 장보고가 암살된 뒤에도 그의 아들과 부장 이창진의 주도하에 청해진 세력은 얼마간 유지되었다. 이 때에도 일본에 무역선과 회역사를 보내어 교역을 계속하는 등 장보고가 이루어놓은 해상 무역권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곧이어 염장을 비롯한 귀족들의 사병 등으로 구성된 중앙연합군의 토벌 작전에 휘말려 청해진 시대는 완전히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때가 846년 경의 일이었다.
잔존 세력이 다시 봉기할 것이 두려운 중앙정부는 851년(문성왕 13년)에 청해진의 주민들을 벽골군(전라북도 김제)에 강제 이주시키고, 청해진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장보고의 해상 활동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장보고가 꿈꾸었던 것은 동지나해를 중심으로 신라를 세계 무역을 주도하는 대국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이런 연상선에서 그의 정치 개입을 이해할 때 비로소 장보고가 왜 외척이라는 정치적 전술까지 동원하게 되었는지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대체로 우리 민족의 활동 범위를 논할 때 바다를 따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기껏해야 이순신 장군의 여러 대첩을 중요시 여길 뿐이다. 그런 차원에서 봤을 때 기울어져가는 민족의 국운을 바로세우려 했던 장보고의 노력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일이었다. 결국 그의 반란이 실패로 끝남으로써 신라는 더욱 부패의 내리막길로 치닫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장보고는 김우징의 반란에 가담함으로써 일차적으로 무력 쿠데타에 동조한 결과가 되었으며 뒤에 왕권 안정을 위해 군사권을 장악하여 점진적인 정치 변혁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수구 세력의 음모에 말려 장보고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변혁은 단순히 개인의 정치적 욕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청해진으로 몰려오는
빈민들과 유민들을 보면서 신라가 얼마나 썩어 있는가를 직접 체험하였다. 그리고 왕족들이나 귀족들의 경제적 수탈 행위도 이제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극에 달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두 번에 걸친 정치 변혁 시도는 이러한 당대의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서였다. 장보고를 개인적 욕망을 채우는 정치적 야심가이며 모반자로 묘사한 {삼국사기}의 시각은
시정되어야 한다.

비록 장보고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는 신라 말기 각지에서 등장하는 호족 세력의 선구적 존재가 되었으며, 나아가 후삼국 시대를 열어준 장본인기도 하다.

궁예의 반란

이상에서 봤을 때 김헌창의 난이 왕실 찬탈전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본다면 장보고는 당시 민중들의 세력을 규합하여 부패한 중앙정부에 대항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전대의 반란을 배경으로 후삼국 시대가 열린 것이며 궁예 역시 신라 말기의 극심한 혼란 가운데 등장한 호족이었던 것이다.
후고구려의 건국자인 궁예가 태어난 해는 불분명하다. 그의 성은 김씨라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신라 제 47대 헌안왕이고, 어머니는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궁녀였다. 일설에는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헌안왕의 핏줄이라는 것이 정설로 굳어져 있지만, 어느 설을 따르더라도 그가 왕족 출신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적자가 아닌 서자로 태어났다는 데에 있었다. 서자라는 차등적인 위치에 있었기에 그의 운명은 정권 다툼의 소용돌이에 말려 왕실에서 배제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의 탄생 설화를 살펴보면, 5월 5일에 외가에서 출생하였다고 했는데 일관이 말하기를, 단오날에 태어난 데다가 나면서부터 이가 나고 또한 이상한 빛까지 나타내므로, 장차 국가에 막대한 해를 입힐 인물이라고 왕에게 고하였다. 왕은 이를 믿고 죽일 것을 명하자 사자가 그 집에 가서 강보에 싸인 아이를 빼앗아 다락 밑으로 던졌다. 이때 유모가 다락 밑에 숨어 있다가 아이를 받았는데 그만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설화는, 그가 신라 왕족이었으나 왕실의 격렬한 정권 싸움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그뒤 유모의 손에서 남의 눈을 피해 자라게 된 궁예는 후에 세달사라는 절에 출가하여 선종이라는 법명까지도 얻게 되었다. 여기서 잠시 세달사라는 절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삼국사기}에 따르면 세달사는 고려 중기에는 흥교사라고 개칭되었다. 정확한 소재지는 강원도 영월군에 있는 대화산이다.
나중에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면서 숭유억불 정책을 쓸 정도로 삼국시대 이래로 불교는 정치와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궁예가 자칭 미륵불이라고 부른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세달사 역시 여러 지방 호족들과 정치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성장기를 보낸 추방된 왕자 궁예는 후에 세력을 확장할 때 이 일대 호족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토대를 자연스럽게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 중앙 권력에서 밀려난 호족들은 궁예가 한때 왕자의 신분이었음을 알고서는 쉽게 호응했던 것이다.
당시의 신라 왕실은 극도로 쇠약해져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대두하였다.
거듭되는 흉년으로 인하여 국고가 탕진되어 889년(진성여왕 3년)에 과도하게 세금을 독촉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농민들이 유랑민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들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도적떼로 둔갑하고 말았다.
그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인로 기훤과 양길이 있었는데 성인이 된 궁예는 891년에 기훤의 부하로 들어가 뜻을 키우려 하였으나 기훤이 자신을 냉대하자, 이듬해인 892년에는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다.
양길은 궁예의 출신 성분을 알고는 그를 환대하였다. 그의 신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뒤 궁예는 양길의 군사를 나누어 받아 원주, 치악산, 석남사를 거쳐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천(예천) 내성(영월) 울오(평창) 등 여러 현과 성을 정복하고 894년에는 명주에 이르렀다. 이때 그 무리가 3,500명이나 되었다고 여러 역사 기록들이 전하고 있다.
궁예는 어느 정도 자기 세력이 확정되자 이들을 14대로 편성하여 자기 세력 기반으로 삼았고, 추종자들은 그를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장군이라는 명칭은 단순히 군사적 지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사회로 치자면 일정한 지역을 다스리는 최고 권력자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궁예는 양길의 도움을 발판으로 삼아 어느새 새로운 인물로 부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저족(인제), 생주(화천), 철원 등을 점령하자, 군세가 매우 강성해져 인근 지역의 무리들 가운데는 스스로 항복하여 궁예의 부하가 되려는 호족들도 생겨날 정도였다. 이에 궁예는 기반 세력이 다져지자 양길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어나갔다.
896년 경 임진강 연안을 공력하여 개성에 있던 왕건 부자의 투항을 받고 승령(지금의 장단 북쪽, 토산 남쪽), 임강(장단)과 지금의 개풍군 풍덕 주변 등의 여러 현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이듬해에는 공암(양평) 금포(김포) 형구(강화) 등도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 궁예의 세력권 남쪽인 국원(충주) 등 30여 성을 취한 양길이 궁예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여 오히려 패망하고 말았다.

이렇게 불과 몇년 동안에 파죽지세로 궁예가 세력권을 형성할 수 있었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첫째는 지방 호족들의 자발적인 참여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앞에서 본 세달사가 위치한 영월에는 궁예의 외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탄생 설화가 말그대로 설화라면 그는 노비 출신의 유모의 품에서 자라났다기 보다는 몰락한 진골귀족인 그의 외가집에서 성장하였다는 주장이 더 타당성이 있다. 외가는 왕권 계승 싸움이 계속되자 궁예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는 열 살이 조금 넘은 궁예를 절에 출가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이 절을 중심으로 김헌창의 아버지인 김주원계의 세력 근거지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삼국사기} 등 여러 사료들을 검토해 볼 때 금방 알 수 있다. 또한 중앙 권력 싸움에서 밀려난 여러 호족들이 김헌창의 반란 실패 이후 영월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였다는 것도 사료에 나타나 있다. 즉 궁예가 군사를 일으키자 그동안 정부에 대해 쌓인 불만을 일시에 터뜨려 왕족 출신인 궁예를 지지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일은 명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명주는 김주원이 권력 중심부에서 밀려난 후 좌천된 곳이기도 하다. 김주원계는 이곳을 중심으로 지방 호족들을 자기 세력으로 삼았고 궁예의 등장으로 이들은 반정부 투쟁을 벌일 태세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청주에서도 궁예는 막강한 지지 세력을 갖게 되었다. 청주에서도 역시 명주나 영월 지방처럼 중앙에서 밀려난 호족들이 궁예를 중심으로 다시 군사를 정비하고 반정부 대열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층부의 호응만으로는 후고구려 건국을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김헌창의 경우와 별로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민심을 빨리 알아차렸다. 토지의 독점으로 파탄에 빠진 일반 민중들에게 자신의 정통성을 심어주기 위해서 궁예가 내세운 정치 이데올로기는 옛고구려의 강역을 수복하는 일이었다.
삼국시대의 신라는 당나라라는 외세와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애초부터 신라는 백제에 더 관심이 많았다. 게다가 당나라는 오래 전부터 넘본 고구려 땅을 정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즉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차지하고 대신 당나라에게 고구려의 대부분 지역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연합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두 나라 사이에 일종의 밀약이 오갔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종전 후 신라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쪽 고구려 땅은 당나라가, 대동강 이남은 신라가 차지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이것은 당태종과 신라 문무왕 사이의 공식적인 언약이기도 했다.
이렇게 볼 때 신라는 단순히 백제와 고구려 일부를 흡수 통합한 것에 불과했다. 통합 당시 신라는 자국만의 힘이 아닌 외세를 끌어들이는 역사적 과오를 범함으로써 두고두고 민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궁예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가 옛고구려의 강역을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내세웠을 때 민중들은 그를 지지하고 나섰다. 정통성을 상실한 국운을 다시 세우자고 민중들은 궁예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민중들은 단순히 궁예의 구호에 호응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라 왕실에 대한 전면 부정이 극대화되어 고구려 부흥 운동의 차원까지 나아갔던 것에 불과하다. 민중들이 궁예를 지지했던 이유는 중앙정부의 수탈이 심화되어 이에 저항하기 위해 궁예를 중심으로 뭉쳤던 것이다.
호족과 농민 사이에 신라 왕실에 대한 불신이 공감대를 형성한 셈이다.
899년(효공왕 3년)에 송악군 일대를 점령한 궁예는 왕건을 보내어 양주, 견주를 복속하고, 그 다음 해에도 광주, 춘주, 당성(화성군 남양 일대), 청주, 괴양(괴산) 등을 평정함으로써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 유역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그 공으로 왕건에게 아찬이라는 벼슬을 주었다. 그리고 901년에 송악(개성)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워 후고구려라고 국호를 정하였다. 또한 자신이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누차 강조하였다. 그는 실제로 대동강을 넘어 평양까지 쳐올라가 정복하였으며 공공연하게 북쪽 고구려의 옛땅을 수복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라고 하였다. 그 해 7월 청주인 1천 호를 철원으로 옮겨 그곳을 서울로 정하고 상주 등 30여 현을 차지하게 되자 공주장군 홍기가 투항하여 왔다.
905년 수도를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긴 궁예는 연호인 무태를 성책으로 고쳤다. 이즈음에 평양 성주 금용이 투항하여 옴으로써 평양 일대의 지역도 차지하게 되었다.
그 뒤 궁예는 세력이 강성해졌음을 믿고 신라를 병합하려는 뜻을 품고 신라를 멸도라 부르게 하였다. 911년에 연호를 다시 수덕만세라 고치고, 국호를 태봉이라 하였다. 이때 왕건은 해로를 타고 내려가 금성(후에 나주라 불렀다.)을 정복하였는데, 이후 서해의 해상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옛백제 지역에서 일어난 견훤을 위협하기도 했다.
913년에는 연호를 다시 정개라 고쳤다. 이 무렵 궁예는 폭군이 되었고, 그를 반대하고 왕건을 지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고 현재 남아 있는 사료들은 전하고 있다. 정사의 기록에 따르면, 918년에 궁예의 폭정에 반대하여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일어나 그를 왕위에서 축출하였다.
왕위에서 쫓겨난 궁예는 변장을 하고 도망가다가 부양(평강)에서 피살당함으써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그렇다면 궁예는 단순히 후고구려를 세운 뒤 정권 유지에 급급하여 폭군으로 변한 뒤 왕건을 지지하는 세력에 의해 축출된 것일까. 그러나 그의 활동에 대한 평가는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또한 정사를 사실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그가 폭군으로 변했다는 결정적인 근거나 계기, 그리고 그 과정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궁예에 대한 평가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통치자

후삼국이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은 호족들의 대거 등장과 더불어 농민들의 항쟁이 만연되었기 때문이다. 김헌창의 반란 등이 단순히 왕위 쟁탈전에 불과하여 민중들의 호응을 별로 받지 못했던 반면, 구조적 모순이 극대화되면서 호족과 농민들은 신라 왕조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갔다는 것은 앞에서도 살펴본 바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한 궁예는 891년에 양길의 휘하에서 자립하여 후고구려를 세운 뒤 918년에 이르기까지 약 28년 동안 통치하다가 멸망하였다. 그러나 궁예의 통치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고려사> 등 종래의 사료들은 대체로 폭군적인 면을 부각시켜 부정적인 평가로 일관하고 있다. 즉, 궁예는 원래 성격이 포악하고 의심이 많아 915년에 올바른 정치를 건의하는 부인 강씨와 그 소생의 두 아들을 죽여버린 일도 있다고 한다. 그뒤 궁예는 자기 자리에 불안감을 가져 의심이 더욱 많아지고 성급해져 남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독심술을 터득하였다는 이유로 신하들을 위협, 살해하였다는 것이다. 왕건 역시 궁예로부터 두 마음을 품고 있다는 혐의를 받아 결국 궁예와 왕건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왕건 일파는 궁예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면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원정하여 금성(나주) 등지를 정벌하였다고 한다.
고대나 중세 때 정변이 일어날 경우 사회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왕조의 변화를 예고하는 도참 설화가 떠도는 것이다. 궁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민심을 잃은 궁예에 대해 그의 멸망을 예언하는 도참 설화가 각처에 만연하게 되었다. 철원에 사는 상인 왕창근이라는 자가 한 백발 노인을 통해 거울을 사서 걸어 놓았더니, 거울에 시구가 나타났다. 그 내용을 분석해보니 궁예의 멸망과 왕건의 등장을 예언하고 있었다.
또한 궁예는 매우 미신적으로 불교를 신봉하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하고 머리에는 금책을 쓰고 방포를 입고 다녔다. 궁예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두 아들을 청광보살, 신광보살이라 불러 마치 자기 가족은 모두 해탈한 부처처럼 자처했던 것이다.
밖에 행차할 때에는 항상 백마를 타고 비단으로 말머리와 꼬리를 장식하였으며, 어린 소년과 소녀들이 깃발과 향과 꽃 등을 들고 앞에서 인도하였고 비구승 2백여 명은 범패를 부르고 염불하면서 뒤를 따랐다고 한다. 가히 교주의 모습을 상상케하는 대목이다.
또한 그는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지었는데 그 말이 요망하여 모두 불도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궁예가 지었다는 불경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고려사>에 의하면, 궁예는 어느 정도 세력 기반을 닦자 국내를 통합하기도 전에 갑자기 혹독한 폭정으로 민중을 다스렸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민중을 수탈하여 그를 따르는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국토는 황폐해졌는데도 자신이 머무는 왕궁만은 매우 웅장하게 지었다. 또 법도나 제도는 지키지 않고 노역은 끊일 사이가 없어 점차 원망과 비난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궁예에 대한 평가를 당시의 형편을 그대로 알려주는 자료로써 이해하려는 견해도 있다. 왜냐하면 도적의 무리로 편성된 궁예의 지배 세력은 그 성격을 바꿀 시간도 없이 패망하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도적이 성행한 이유는 신라 왕실의 부당한 세금 징수와 호족들의 토지 겸병으로 유랑하는 농민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예의 무리는 농민군적인 성격이 강했다.
또한 다른 지방 호족과 같이 자신의 세력 기반을 가지지 못하고 도적의 무리로서 출발한 궁예의 세력 기반에는 분명한 한계성이 있다는 지적도 앞서 본 바와 같이 잘못된 시각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초기 활동 당시부터 각 지역 호족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특히 세달사나 영월을 중심으로 궁예는 확고한 세력 기반을 갖출 수 있었다.
출생 과정부터 이미 신라 정부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궁예는 신라에 대한 강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901년 부석사에 갔을 때 신라왕의 초상화를 보고 이를 칼로 쳐서 없앴다고 한다. 이러한 반신라적 성향은 반정부적 무리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였고, 토지를 빼앗겨 유랑하다가 도적으로 몰락한 무리들이 궁예의 세력 밑으로 모여든 것은 궁예와 마찬가지로 반신라적인 성향이 강했기에 가능한 현상이었다. 즉, 궁예를 중심으로 민중 세력이 형성됨으로써 신라 고대사회가 해체되는 속도가 한층 빨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신라의 반민중성에 대항한 궁예의 등장으로 민중 세력의 결집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궁예의 국가 통치 능력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에 대한 역사 기록 가운데 일부는 사실이라고 전제했을 때, 국가를 운영하거나 질서를 회복하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이 없었으므로 토지 겸병 등 토지제도나 수취제도를 개선하지 못한 면도 있었다. 즉, 경륜 부족으로 그는 조금씩 포악한 왕으로 변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또 나라를 세운 뒤에도 연호와 국호를 자주 고쳤다고 하는 것은, 한 나라를 이끌어갈 정치 이념이 뚜렷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는 지적도 타당하다. 이러한 지적은 앞서 말한 현실 개혁을 단행하지 못한 궁예의 실정과 맞물려 있다. 따라서 점차 호족 세력을 결집해 내면서 뚜렷한 유교적 정치 이념과 선종 승려 및 6두품 지식인층까지 포섭하였던 왕건이 전면에 부상하게 된 결과를 가져왔다. 즉, 지배층은 자신들의 이익을 담보해 주면서도 일면 현실 개혁을 추진하여 민중들의 불만을 무마할 수 있는 강력한 왕을 원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궁예에게는 통치 이념이 전혀 없었던 것일까.
<고려사> 등 사료에 나타난 궁예에 대한 평가는 우선 그가 포악한 왕이었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그가 내세운 미륵불 사상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미륵불 사상은 무엇인가. 대체로 관음보살을 중시하는 불교는 해탈 등 자기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이것이 극대화되면 지배 계층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 의식을 약화시킬 수 있는 구실을 하게 된다. 그러나 미륵불 사상은 도탄에 빠진 현실을 구하기 위해 미래불인 미륵이 이 땅에 온다는, 사회 개혁적인 요소가 매우 강하다.
따라서 최고권력자가 이러한 개혁 사상을 주장했다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비록 궁예는 왕건처럼 견실한 정치적 이념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는 현실을 개혁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직까지도 그가 왜 난폭한 짓을 자행하게 되었는지 그 동기에 대해서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 또한 왕건의 고려 건국이 합리화되기 위해서는 궁예가 완전한 폭군으로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있음을 감안할 때 궁예에 대한 평가는 재검토되어야 한다.
정리하자면, 궁예는 지나치게 종교를 강조하는 등 이상주의적 이념을 내세워 왕권 강화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현실적인 개혁을 추진할 만한 지식인층을 확보하지 못했고, 또한 그의 왕권 강화에 반발한 일부 호족들이 왕건을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궁예는 축출당하고 말았다. 따라서 그가 원래부터 성격이 난폭하여 폭군이 되었다는 단순한 시각은 교정되어야 한다. 궁예가 고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근거지인 한강 유역을 먼저 차지한 정책이나 자기를 지지하는 호족들에게 관직을 주는 등 행정체제를 정비해나갔으며, 이러한 궁예의 뛰어난 통솔력에 끌린 호족들이 사방에서 그를 지지하고 나섰다는 것은 궁예의 긍정적인 면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점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궁예는 이상주의적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해 구체적인 현실 개혁을 단행하지 못하였으며, 왕권 강화 과정에서 그의 이념을 반대하는 왕건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 그룹과 대립하다가 그들의 세력에 밀려 축출당하고 만 것이다. 이러한 대립 과정에서 궁예는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폭정을 일삼았다고 이해한다면 그의 난폭한 행동에 대해 좀더 구조적인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후삼국史보는 나무 > 후삼국시대 관련 펌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달 능창  (0) 2010.10.24
수달장군 능창  (0) 2010.10.24
궁예, 진훤, 왕건의 비교  (0) 2010.10.23
궁예 전설  (0) 2010.10.23
후삼국시대의 주변국 상황  (0) 2010.10.08
by 초령목 2010. 10. 23. 22:47

1. 서론

견훤은 상주 가은현의 농민출신이었다. 본래의 성은 이씨였는데 뒤에 견씨로 성을 삼았다고 한다. 그는 체구가 크고 유달랐으며 의기가 충만하여, 군인이 되어 서남해 방면에서 싸울 때에는 용감하게 항상 다른 군사에 앞장섰으므로 그 공로에 따라 비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진성여왕의 실정과 기근으로 백성이 유리하고 도적이 봉기하자, 견훤은 큰 뜻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남지방의 주현을 쳐서 반란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한편 궁예는 신라 헌안왕의 서자로서 성이 김씨인데 어떠한 사정에 의하여 죽게 된 것을 유모가 안고 도망가서 몰래 길렀는데, 이 사건 때에 실수로 한 눈이 멀게 되었다. 아마도 그는 정권 다툼에 희생되어 지방으로 물러난 자였던 것 같다.

왕건의 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오대조인 호경이 북쪽으로부터 와서 개성지방에 자리잡은 것으로 되어있다. 그의 선조 중에서 가장 활발한 무역활동을 전개하고 또 큰 성공을 거둔 것은 그의 조부인 작제건(作帝建)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용건과 손자인 왕건 때까지도 계속하여 개성 지방을 지배해 왔으며 또 이들은 대대로 주위의 호족들과 혼인관계를 맺어 그 세력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견훤이나 궁예는 모두 신라계통 출신이므로 두 사람이 고구려나 백제의 전통과는 관계가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견훤과 궁예는 각각 백제와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했다. 그리고 개성의 호족 출신이었던 왕건은 궁예의 수하에 있다가 일어나 결국 고려를 건국하게 된다.

2. 견훤의 재해석

① 견훤의 본래이름 및 출생설화

진훤의 이름은 지금까지 견훤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옥편을 찾아보면 '질그릇 견(甄)'에는 '견' 혹은 '진'으로 발음이 나와 있다. 그러므로 견훤이나 진훤으로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지만 사실 진훤으로 읽는 게 타당하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역사학자인 순암 안정복이 저술한 『동사강목』은 '진훤'으로 읽어야 한다고 밝혀 놓았다. 많은 전적(典籍)을 토대로 저술한 일종의 백과사전인 『문헌비고』에도 진훤의 이름 앞 글자의 음이 '진(眞)'임을 밝히고 있다. 또 고창 병산전투와 관련된 현지 전설에서 진훤이 지렁이로 변해서 숨었던 모래를 '진모래'라고 일컫고 있다. '견모래'가 아닌 '진모래'인 점에서도 당시 그를 진훤으로 불렀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보다 분명한 것은 『완산견씨세보(完山甄氏世譜)』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우리 성(姓) 글자인 '甄'의 음은 본래 '진'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후백제의 진훤왕이 나라를 잃은 이후, 고려 왕조에서 우리 진씨가 재기부흥할 것을 두려워하고 염려하여 힘으로 항상 모멸의 해를 가하고자 했다. 그런 까닭에 우리 선조들은 다시는 세력을 규합하지 못하고 끝내는 나라를 일으켜 재건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우리 가문은 점점 이름을 내는 것 없이 세상을 피하여 숨어서 삶을 도모했기에, '진'음이 변하여 '견'음으로 읽었다. 그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 후손들은 '견'음을 사용하였다. 그 '甄'음은 시종 한 글자였으나 변혁되었으니 모두 견씨 가문의 성쇠의 운(運)에 기인한 것이었다. 무릇 우리 후손들은 이에 의심없이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견훤이 아니라 진훤으로 읽는 게 백번 타당함을 알 수 있다. 최근 이름 앞의 성으로 읽을 때는 '진'으로 불러야 하기에 진훤으로 발음하는 게 옳다는 견해도 나왔다. 그렇지만 앞서 언급하였듯이 현재 소수 성씨로서 '견'씨가 있지만 진씨가 아니라 견씨로 읽기 때문에 수긍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진훤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가. 진훤은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아차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한 부잣집 딸에게 밤마다 자주색 옷을 입은 사내가 다녀가곤 했다고 한다. 그 딸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찾아온 남자의 옷자락에 바늘을 꽂았다. 이튿날 바늘에 꿰인 실을 따라 갔더니 담장 밑에 있는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춤에 바늘이 찔려 있더라는 거였다. 이 설화는 진훤이 곧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기실은 그 이름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진훤이라는 이름을 경상도에서는 '진훠이'로 읽게 된다. 이는 지렁이의 경상도 방언인 '지러이'와 서로 통하는 것이다. 요컨대 지렁이를 연상시키는 진훤이라는 이름 때문에 그 관련 출생 설화가 생겨난 게 아닐까?

② 견훤의 정치 스타일

견훤은 신라에 대한 적대감으로 후삼국 상호간의 냉정한 국제관계수립이라는 적절한 정책을 갖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다. 특히 경애왕 4년(927) 경주를 습격하여 왕과 관료들을 무수히 죽이고 왕비와 궁녀들을 욕보이거나 약탈을 자행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고 돌아간 것은 바로 견훤의 대신라 감정과 이에 대한 정책의 한계를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라에 대한 적대가 감정적이 아닌 정책적인 것이었다면 이때 견훤으로서는 신라를 평정, 장악하고 위무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당시의 상황으로 볼때 왕건의 고려는 세력이 매우 약할 때였다. 그러나 이 일이 있고 난 이후 신라의 민심은 대신라 우호정책을 표방한 고려에 완전히 기울어져 버린다.

국가를 창건한 진훤은 관부를 설치하고 직무를 두었다. 그런데 어떤 연구자는 '그 내용을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휘하에 있던 신하들이 이찬. 파진찬. 아찬과 같은 신라의 관등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을 볼 때 신라와 크게 다른 것이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아울러 '견휜은 백제 유민들의 백제 부흥 의지를 이용만 하였을 뿐 이에 대한 대책과 배려에 힘쓰지 않았다'고 비판하였다.

특히 왕이 된 후 견훤은 자신의 한미한 세계를 신라왕실로 연결하여 윤색한 흔적도 보이는데, 그 정치적 식견과 역사적 성격이 기본적으로 궁예와 크게 다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관련 서적을 찾다보니 나온 흥미로운 내용이 있는데, 두 번째 리포트인 ‘9산 선문’ 과도 관련된 자료가 있어 여기에 함께 실어 본다.

전주로 천도한 이후 견훤은 실상사의 안봉화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실상사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적극적으로 하였는데 그것은 견훤이 신라로부터 사상적으로 자립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910년 안봉화상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견훤이 의도하였던 것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918년 왕건이 즉위하자 대안사를 주도하던 윤다가 왕건에게 갔으며 가지산문 역시 왕건의 수중하에 들어갔다. 사정이 이러한 가운데 경보가 귀국하자 그를 국사로 삼아 선종을 중심으로 한 불교계의 재편을 서둘렀다. 견훤 정권과 선종 불교와의 관계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신라말 최고의 선종 산문이라 할 수 있는 가지산문과 동리산문 그리고 실상산문을 그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그리고 성주산문이나 굴산문과 연결된 경보를 국사로 삼아 산문과 유기적인 연결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또한 상주 출신의 선승이 귀국하는 것을 도왓는데 이는 희양산문과 연계를 위한 것이었다. 이렇듯 견훤 정권은 당시 유행하던 선종 불교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선종 산문이나 선승들은 국가를 유지하는 하나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3. 궁예의 재조명

① 사료 분석

수십개의 군웅이 난립하던 시기, 그 혼란을 극복하고 일어선 궁예가 겨우 보리삭을 훔쳐먹다가 부양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는 치욕스러운 최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공이 이미 의기를 들었다”하니, 나라 사람으로 달려오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먼저 궁문에 이르러 북을 치고 떠들며 기다리는 자도 역시 만여 명이나 되었다.   궁예는 이 소식을 듣고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미복으로 북문을 빠져 나가서 바위 골짜기로 도망하였다가 조금후에 부양 백성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 민중들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 철원에서 아직까지 내려오는 궁예를 기리는 제사인 태봉제가 있다는 것만 보아도, 민중들은 그를 폭군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설화는 궁예의 최후도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바로 궁예가 자살했다는 것이다. 궁예와 왕건의 최후 격전지인 보개산성, 그리고 궁예와 그의 부하들이 최후에 통곡했다는 명성산. 그리고 궁예는 결국 자살하거나, 혹은 그의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궁예의 두 얼굴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는 병사들과 동거동락을 같이한 성군의 모습, 또 하나는 참소를 믿어 마구 사람들을 죽인 폭군, 그리고 부인과 두 아들을 죽인 매정한 아버지의 모습까지도 보인다. 성군과 폭군의 엇갈리는 모습. 같은 기록인데도 이렇게 상반된 두 기록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예에 관한 이야기는 고려 전기에 간행된 『삼국사기』(궁예전)에 처음 보인다. 여기에서 궁예는 부인에게 간통죄를 뒤집어씌워 그녀 소생의 두 아들과 함께 죽인 나쁜 왕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고려 후기에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에도 궁예는 '포악하고 방자'한 왕으로 기록되어 『삼국사기』의 기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이 개국된 뒤 편찬된 『고려사』는 고려의 건국과정을 서술하면서 왕건의 전사로 궁예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하다.

그때에 궁예가 반역이라는 죄명을 억지로 만들어 죽인 자가 하루에도 백여 명에 이르러 장수나 정승으로서 해를 입은 자가 십중팔구였다. 궁예는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미륵관심법을 체득하여 부녀들의 음행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 만일 나의 관심법에 걸리는 자가 있으면 곧 엄벌에 처하겠다' 라고 했다. 그는 드디어 3척이나 되는 쇠방망이를 만들어놓고 죽이고 싶은 자가 있으면 곧 그것을 달구어 여자의 음부를 찔러 연기가 입과 코로 나오게 하여 죽였다. 이리하여 부녀들이 모두 벌벌 떨었으며 원망과 분한의 날로 심하였다.

이외에 궁예에 관해 기록된 고문헌은 일부 가문의 족보에 수록된 것을 제외하면 더 이상 없다. 궁예와 동시대 인물인 견훤의 이야기는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궁예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일연은 궁예가 고려를 세웠다는 사실만 연표에 간단히 기록해두었을 뿐이다.

896년 철원에 도읍하고 국호를 고려로 정한 궁예는 임금을 칭하며 관제를 신설한다. 이후 국호를 대동방국과 통일천하를 각각 뜻하는 마진과 태봉으로 잇따라 바꾼 사실을 책은 자주와 민족단합을 모색하려는 의지의 발현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골품제 대신 능력에 따른 관직등용제도를 신설한 것이나 독자 연호 사용과 거란과의 적극적인 통교정책 등도 궁예의 혁명가적 성향을 보여주는 것으로 재조명된다. 심지어 지은이는 원주-영주-명주-간성-한계령-인제-철원-서해로 이어지는 정벌로를 `궁예의 길'이라 명명하고 국토개척자라는 별호를 주기까지 한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대부분의 기록은 궁예를 악인으로 평가하고 있고 이러한 내용은 지금까지도 궁예에 대한 인식을 지배하고 있다. 흔히 '정사'라고 불리는 국가의 공식 역사 편찬은 국가 권력의 전유물이었던 만큼 그 의지에 맞게끔 재편집되었고, 이 과정에서 세속적 권력의 패배자들은 변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진 반면 승자의 목소리만 남아 당당하게 군림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궁예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로 지목된다.

② 재평가

말년 과대 망상, 정신분열증 등에 시달렸으며 잔혹하기 이를 데 없이 백성들을 죽여나간 폭군으로서 궁예는 지금껏 평가되어 왔다. 그의 애꾸눈은 이러한 그의 성품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점지되어 있었던 것임을 증명하는 수단처럼 여겨졌었다. 하지만 이런 잔혹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가 한 때 신라, 후백제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땅을 다스렸다는 사실까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신이 이상하여 스스로 멸망을 자초했다는 그가 어떻게 그토록 폭넓은 지역에 걸쳐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었단 말인가. 비록 그 과정에서 왕건이 굉장한 능력을 발휘한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미륵으로 칭하고, 자신의 가족들을 보살로 여긴 것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았던 그 당시의 정황으로 보았을 때 그가 미쳤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수도, 연호 등을 계속해서 변경해나가는 과정은 때때로 궁예가 보여준 정신착란의 결과로 이야기되어지곤 했었다. 하지만 연호에서 느껴지는 기풍은 역사 속에서 거의 존재치 않았던 중국 사대주의로부터의 해방이었으며, 자주적 외교의 천명이었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당의 도움을 등에 업었던 것, 후백제와 고려가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중국에 의지했던 것과 달리, 궁예는 혼란스러운 중국 정세를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계, 백제계 등 복잡한 성향을 지닌 이들을 한데 어우르는 과정에서 그는 다른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고, 이는 왕권을 보다 강고히 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이 민중에게 주었던 부담감과 어우러져 실각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서술한 저서들을 찾아보긴 어려운 듯하다. 탄생에서부터 왜곡되게 묘사되었던 궁예의 생애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서술만이 남아있었다. 보리를 뜯어먹다 자신이 다스리던 주민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정권을 상실하고 자신의 생명마저도 부지하지 못하는 초라한 실패자로서의 궁예의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하지만 그가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닌, 자신의 운명이 다한 줄 알고 자결하였다는 설은 그에 대한 재조명의 필요성을 일으키고 있다.

4. 왕건

궁예의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하는 것은 왕건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왕건의 등장과 더불어 궁예는 반인륜적인 행동과 잔혹성을 드러내며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러한 몰락 과정은 왕건의 반궁예적인 행위에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지배집단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처음 태조 나이 20세 때 꿈을 꾸었는데, 9층 금탑이 바다 가운데서 그 위에 올라가보았다. 위의 기록은 왕건의 입장에서 윤색된『고려사』의 한 부분이다. 왕건이 일찍부터 제왕이 될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미화한 내용인 듯한데, 이 짧은 기록은 왕건의 인물됨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왕건이 일찍부터 치밀하게 역모를 준비했다는 구체적인 자료가 되기도 한다. 학계나 일반인들 사이에서나 궁예는 왕건이 아니라도 어느 누군가에게 반드시 쫓겨나야 할 인물로 각인되어왔다. 그러나 위의 사료는 사실 왕건이 30세때부터 왕이 되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장기간 역모를 꾀했음을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의 궁예는 도적의 무리를 이끈 우두머리이며, 백성을 괴롭히고 나라를 어지럽힌 흉인에 불과한 것으로 그려진다. 태봉을 건국한 건국주로서의 궁예는 온데간데없고, 단지 백성들을 괴롭힌 인물로 평가절하 되고 있다. 이것은 고려의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

지금까지 견훤과 궁예를 재조명하는데 중점을 둔 것은 사실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왜곡되고 폄하된 패자(敗者)들의 조명 또한 필요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왕건을 반대로 필요이상 깎아내리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개창한 왕건의 성공 요인 또한 비중있게 다뤄져야 할 것이다.

왕건은 그가 가지고 있던 세력과 공적을 바탕으로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 여러 장수의 추대형식을 거쳐 궁예를 제거하고 왕위에 올라 고려를 세웠다. 왕건은 출신지역으로나 출신기반의 성격으로 보아 견훤이나 궁예와 달리 어느정도 지역적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며, 후삼국시대의 모든 경쟁세력 가운데에서 지방호족세력이 갖추어야 할 역사성에 가장 충실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왕건은 왕위에 오른 뒤 일차적으로 표방한 것이, 백성들의 수취체계 정비였는데, 이는 적어도 왕건의 경우 당시 사회혼란의 근본적 원인이 가혹한 고대적 수취체계에서 야기된 경제모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당시의 여러 지방세력들은 외형적으로는 반신라적 또는 반골품제적 성향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지만, 그 본질은 신라사회가 가지고 있는 시대적 모순에 저항하고, 나아가 다른 역사적 성격의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즉 당대의 사회혼란의 과정이 고대적 사회의 모순으로부터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던 역사적 변동의 과정이었음을 알고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이러한 역사성을 충실히 반영해야 내외의 모든 민중과 호족 세력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고 결국 역사의 승자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후삼국시대 여러 강대세력 중에서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왕건이 자기시대의 변화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가장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또 이에 충실히 대응했기 때문이다.

5. 결론

용장 견훤, 덕장이자 지장인 왕건, 그리고 궁예, 이 세 사람을 동시에 비교할 만한 자료나 이들의 행적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은 형편이지만 궁예가 공평무사한 지휘관이었다면 그에 비해 견훤은 통솔보다는 지휘를 더 중시했던 인물이었고, 왕건은 지휘보다는 통솔에 더 관심을 가졌던 지휘관이었을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신라 무장 출신의 견훤, 대호족 출신의 왕건에 비해 궁예는 열악한 처지에서 몸을 일으켰으므로 무엇이든 완벽을 기하지 않고서는 자기 기반을 확보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점에서 지휘와 통솔을 구사하는데 중점을 두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상시 역사를 읽을 때 언제나 의문 나는 것은 선한 것은 지나치게 선하고 악한 것은 지나치게 악하다는 것이다. 당시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의 저작이 비록 권선징악의 좋은 뜻에서이기는 하나 오늘날 사람들은 평지상에서 간과하여 말하기를 '선한 사람은 진실로 의당히 저래야 하지만 악한 사람은 어떻게 이 정도로 악할까' 한다. 기실 선한 것 가운데도 악이 있고 악한 것 가운데도 선이 있는 것이어서 당시 사람도 실로 시비를 가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거취를 잘못하여 조소를 받고 죄악을 범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성호(星湖)는 선악의 포폄을 역사학의 목적으로 생각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을 단순히 선악의 면으로만 해석하려는 태도에 반대하였던 것이다. 역사는 승자만을 기억한다.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을지라도 말년이 성공적이지 못한 이들은 그로 인해 모든 업적이 낮추어 평가된다. 그리고 때로는 단순한 낮춤의 수준을 넘어선 의도적인 폄하에 의하여 전혀 다른 인물로 각색되기도 한다. 우리의 역사는 업적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에 우선한 옳고 그름의 시비가 존재하는 듯하다. 그에 따라 한 사람은 어떠한 단점도 지니지 않은 고결한 존재로 부각되는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너무도 추한 존재로 묘사된다. 궁예는 후자에 속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를 평가하는 역사서들의 대다수는 왕건의 고려 건국 정당성 확보라는 과업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의도적으로 그를 폄훼한 듯이 보인다. 그렇기에 역사는 그 역사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확인 하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과거 통일신라라는 명칭으로 불리던 신라가 발해의 존재에 대한 고찰로 인하여 남북국 시대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듯이, 이 견훤, 궁예, 왕건의 세력다툼이 있던 시대에 대해서도 또한 새로운 시각이 요구된다. 그와 동시에 그들에 대한 평가도 다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출판부, 1990.
박용운 외, 『한국사 12』, 국사편찬위원회, 1993.
이재범, 『슬픈 궁예』, 푸른역사, 2000.
조현설, 「궁예이야기의 전승양상과 의미」, 『우리 역사인물전승 2』, 집문당, 1997.
이도학, 『궁예, 진훤, 왕건과 열정의 시대』, 김영사, 2000.
박한설,「왕건세계의 무역활동에 대하여」,1965.

'후삼국史보는 나무 > 후삼국시대 관련 펌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달장군 능창  (0) 2010.10.24
신라 말기의 반란  (0) 2010.10.23
궁예 전설  (0) 2010.10.23
후삼국시대의 주변국 상황  (0) 2010.10.08
후 삼국시대 역사  (0) 2010.10.08
by 초령목 2010. 10. 23. 14:55

궁예도성 남대문 석등(石燈) 사진은 이미 오래 전 원본이 사라졌다. 철원군지(鐵原郡誌)는 천 번도 더 찍어냈을 복사판 사진을 싣고 있었다. 어느 책에 나온 우표딱지만한 흑백사진을 잡아 늘릴 수 있는데까지 확대한 게 틀림없었다. 사진 속으론 모래바람이 불고 있었다. 피사체는 작은 구멍들이 가득 뚫려 있었다. 제주도 돌하루방 같았다. 철원도 제주도처럼 현무암 대지 위에 올라앉아 있는 '곰보돌'의 고장이다. 그 사진만으로는 석등은 조악한 그 곰보돌 조각에 불과했다. 애꾸눈 궁예왕이 지천으로 나뒹구는 '곰보 바위'하나를 들어다가 아무렇게나 쓱쓱 깎아 도성 남대문 앞에 턱 세워 놓았을것만 같았다.

그러나 석등은 일본이 1940년 7월 30일자로 국보 118호로 지정했던 키 280cm 짜리 화강암 돌조각이다. 철원의 궁예도성은 신라의 도읍지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이나 석가탑보다도 2세기 후에 축조됐다. 따라서 그 석등은 석가탑이나 다보탑보다도 더 정교하고 품위있게 다듬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석등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으며 이젠 국보도 아니다. 그 석등처럼 태봉국의 왕 궁예(弓裔. ?~918)도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모습으로 역사 속에 남아 있다.

후삼국 시대는 44년 만에 막을 내렸다. 궁예는 그 가운데 단 18년 동안 태봉을 통치했다. 그리고 그 후 역사는 더 드라마틱한 사건들을 만들며 10세기나 진행됐다. 왕의 치적을 들춰내며 그의 사상이나 철학을 들먹이기에 1천 년 전은 너무 오래 된 일다. 그러나 나는 궁예 나라의 옛 수도 철원을 갈 때마다 역사가 그를 너무 깔아 뭉갰다고 생각했다.

우선 철원평야 사람들을 '왕을 돌로 쳐 죽인 백성의 후손들'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려사는 그때 백성에게 피살되던 궁예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918년 6월) 이리하여 (궁예가) 변복을 하고 도망쳐 나가니 궁녀들이 궁 안을 깨끗이 하고 태조(왕건)를 맞아들였다. 궁예는 산골로 도망하였으나 이틀밤이 지난 후 배가 몹시 고파서 보리이삭을 잘라 훔쳐 먹다 바로 부양(평강) 백성들에게 살해됐다. 궁예는 평강 땅 삼방(三防)에서 너무 배가고파 보리이삭을 훑어 먹다 밭일을 하던 농사꾼들에게 들켰다. 농사꾼들은 그를 돌로 쳐 죽였다.」

역사는 이 사실을 기록하면서 '폭정과 괴벽의 엉터리 애꾸눈 왕을 장수나 군졸도 아닌 무지렁이들이 통쾌하게 교살했다'고 행간 곳곳에서 속삭이고 있다. 그리고 궁예가 누구냐고 묻는 이들에게 '왕은 애꾸눈의 장애인이었고, 자신을 메시아라고 여긴 미륵신앙의 광신도였으며 부인과 자식을 쳐죽인 정신분열증 환자였다. 결국 피신길에 보리이삭을 훑어 먹다가 농민에게 붙들려 돌에 맞아 죽은 인격 파탄자였다'고 세뇌시키고 있는 것이다. 고려 개국공신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그렇게 궁예를 깍아내려야만 했을 것이다. 왕건의 군사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이미 궁예는 죽었지만, 몇 번이고 다시 죽여 다시 살아나지 못하게 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미륵의 세상을 갈망하던 하층농민들이 미륵불을 돌로 쳐 죽인 무지함, 백성이 왕을 쳐 죽이 대역죄, 즉 자식이 어버이를 쳐 죽인 패륜을 고스란히 철원 사람들의 옛 조상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있었다. 그것은 강자의 횡포였다. 그리고 중대한 실수였다. 철원 사람들은 궁예가 그의 최후를 당당하게 맞았다는 전설을 따로 간직하고 있었다.

궁예전설은 노인들을 통해 구전되기도 하고, 철원군지에 기술돼 있기도 했다. 어떤 노인들은 전설 속의 '궁예'를 '궁예대왕'이라고 지칭했다. '궁예대왕', 그 지칭은 철원사람들의 불명예, '미륵을 죽인 무지함과 왕을 죽인 대역죄, 자식이 어버이를 죽인 패륜'에 대한 항변같기도 했으며 책에서 배운 정사(正史)를 엉터리라고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전설 속의 궁예의 최후는 절대 비굴하지 않았다. 왕건의 군사 역모가 있던 날, 왕은 자신의 나라 도읍지를 마지막으로 순방한 것 같다. 그날 밤 왕은 남문을 통해 도성을 빠져 나왔다. 숨을 가다듬고 재기를 위해 찾아갔던 첫 피신처는 도성 서남쪽의 중어성. 평원 한가운데 세운 도성의 전략적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외곽에 세웠던 12개 산성 가운데 한 요새다. 현재 위치는 철원읍 대마리. 왕은 이 요새를 버리고, 더 서쪽으로 나가 현 연천군 신서면 승양리의 역시 외곽성인 승양산선으로 들어갔다. 또 다른 외곽성 보개산성(현 포천군 관인면)은 승양산성의 동쪽에 있었다. 그러나 왕은 어느새 더 동쪽의 명성산성(현 철원군 갈말읍)으로 들어가 최후 보루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산성에서 군대를 해산한다. 그리고 통곡하는 군사들을 뒤로하고 홀로 북쪽으로 떠난다. '명성'(鳴聲)이란 말뜻을 굳이 풀이한다면 '큰 울음소리'. 훗날 사람들은 그때 군사들이 슬피 울었다고 해 그 산성을 '울음산성', 산성이 있는 그 산을 '울음산'이라고 불렀다. 명성산성에서 해산했지만 충성스러운 많은 군인들이 왕이 걸어간 길을 뒤따라 군탄리까지 왔다. 왕은 "나를 따르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한탄강을 건너가 버렸다. 훗날 사람들은 그 곳이 바로 그때 '군사들이 슬피 울며 탄식한 곳'이며 '군탄'은 거기서 유래했다고 해석했다. 갑천(甲川)은 평강 하갑리 동북쪽의 작은 내. 왕은 자신의 정예병들을 양성하던 검불랑 군사훈련장을 지나 삼방협의 깊은 골짜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결했다.

육당 최남선도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철원 지방에서 채록한 궁예 최후의 전설을 '풍악기유'에 이렇게 실었다.
「남루한 차림의 고려왕(궁예)이 발 붙일 땅을 찾기 못하고 심벽한 석을 찾아 삼방 골짜기로 들어왔다. 삼봉 최고지에 올라 은피하여 재도할 땅을 둘러 볼 즈음 문득 한 스님을 만나 혹시 용잠호장할 땅이 없겠느냐고 물으니, 스님이 말하기를 이 속에를 들어와서 살길을 찾는 것은 어리석다고 했다. 이에 크게 절망하고 그 곳에서 깊은 연못을 향해 그대로 몸을 던지니 물에는 빠지지 아니하고 우뚝 선 채로 운명했다.」

http://www.dmzline.com/tag/궁예?page=1

<table style="border-collapse: collapse; width: 634px; height: 31px;" bgcolor="#ffffff" cellpadding="1" cellspacing="1">
<tbody>
<tr>
<td style="border-style: solid; border-color: rgb(48, 88, 210); border-width: 0px 0px 1px;" bgcolor="#3058d2" width="1%"><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ulim;">&nbsp;</span></span></td>
<td style="border-style: solid; border-color: rgb(48, 88, 210); border-width: 0px 0px 1px;" width="99%"><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rgb(48, 88, 210);"><span style="font-family: Gulim;">&nbsp;</span></span><font color="#c8056a"><strong><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ulim;"><span style="color: rgb(48, 88, 210);"> </span><br />

</span></span></strong></font></td>
<td style="border-style: solid; border-color: rgb(48, 88, 210) rgb(48, 88, 210) rgb(255, 70, 197); border-width: 0px 0px 1px;" width="100%"><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ulim;">&nbsp;</span></span></td>
</tr>
</tbody></table>

철운에서 금강산 들어가는 철도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 삼방역이라는 역이 하나 있다고 한다. 근데 그 역건너에 큰 돌담굴이 하나 있다고 한다. 그 돌담굴이 궁예의 무덤이라 한다. 그것이 왜 궁예의 무덤이라 하면 왕건의 군사들이 치열하게 쫓아 오면서 쏘니까는 이 궁예가 웬만한 화살은 맞으면은 그냥 쑥 뽑아서 던지는 그런 장사였다. 그런데 하도 많이 쏘아서 장사도 지치니까는 상나무 아름드리 겿에 가서 기대고 섰다. 하도 치열하게 화살을 던지니까는 궁예가 고슴도치 모양으로 몸에 꽃혔는데 안쓰러진다는 것이다. 이상해서 가서 보았더니 죽어있었다. 발길로 차도 안 넘어가고 목에다 뭘 두르고 잡아 당겨도 안넘어졌다.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장사는 역시 죽어서도 장사구나 별짓을 다해도 안넘어지니까는 그냥 선 채로 돌로 쌓아 묻어서 궁예의 무덤을 돌로 묻어서 궁예의 무덤이 그렇게 되었다. 결국 눕지도 못하고 죽은것이었다.
- 화현면 설화 광대소라는 이름이 비석에 새겨진 것을 보고 묻자 해준 이야기


펑강군 복계역 북쪽으로 하갑리, 상갑리라는 마을이 있다. 궁예가 패해 북쪽으로 도주하다 하갑리에선 아래 갑옷을 벗고 도주하다, 상갑리에선 윗 갑옷을 벗고 도주했다 해서, 하갑리, 상갑리라 했다 한다.


궁예(弓裔·?-918년)는 896~898년간에 철원(구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후 궁예는 901년 당나라에게 괴멸당한 고구려를 다시 일으켜 보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 일환으로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연호를 무태(武泰)로 바꾼다. 그 후 1년 뒤(905년) 구철원 북쪽 30리 거리인 풍천원 들판(지금의 철원과 평강 사이 비무장지대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리고 911년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泰封)이라 칭한다.

그러나 궁예는 풍천원 들판에다 거대한 도성을 축조하면서 강제로 노역에 끌려온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지지세력들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청주 지역을 너무 편애하게 된다. 그러자 경기 북부 호족들이 반기를 들고 궁예의 부하였던 왕건을 앞세워(877-943) 918년 궁예를 몰아낸다.   

훗날 궁예가 왕건의 군사에게 쫓겨 진을 친 곳이 명성산이다. 이 때 궁예가 이 산에서 철원쪽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겨 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하여 ‘울음산’으로 불리었고, 궁예가 강변에서 한탄했다 하여 ‘한탄강’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궁예와 명성산이 관련된 전설은 매우 많다. 산정호수 옆 두 개의 봉우리는 궁예가 올라가 망을 보았다는 곳이고, 등룡폭포 위 샘터 이름이 궁예약수, 자인사에서 궁예가 기도를 올렸다는 전설, 정상에서 강포리쪽으로 이어지는 궁예능선은 왕건의 공격을 피해 항거하며 쌓았다는 성터와 궁예왕이 숨었었다는 궁예왕굴 등 이 남아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고려사에는 ‘궁예가 평강과 안변 사이 험준한 지형인 삼방협으로 도망을  갔을 때 배가 고파 보리이삭을 끓여 먹다가 평강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이 지방 주민들로부터 전해지는 전설은 ‘궁예가 삼방협에서 우연히 만난 어느 중이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는 이런 협곡에 들어와 살아남겠다는 것이 어리석다”고 말하자 궁예는 “드디어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 높은 곳에서 의연하게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조선 말기에 제작된 지도인 청구도에는 삼방협 위치에 궁왕묘(弓王墓)가 그려져 있다. 또 1924년 최남선이 쓴 풍악기유(楓嶽記遊)에는 궁예왕 무덤흔적을 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table style="border-collapse: collapse; width: 634px; height: 31px;" bgcolor="#ffffff" cellpadding="1" cellspacing="1">
<tbody>
<tr>
<td style="border-style: solid; border-color: rgb(48, 88, 210); border-width: 0px 0px 1px;" bgcolor="#3058d2" width="1%"><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ulim;">&nbsp;</span></span></td>
<td style="border-style: solid; border-color: rgb(48, 88, 210); border-width: 0px 0px 1px;" width="99%"><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rgb(48, 88, 210);"><span style="font-family: Gulim;">&nbsp;</span></span><font color="#c8056a"><strong><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ulim;"><span style="color: rgb(48, 88, 210);"> </span><br />

</span></span></strong></font></td>
<td style="border-style: solid; border-color: rgb(48, 88, 210) rgb(48, 88, 210) rgb(255, 70, 197); border-width: 0px 0px 1px;" width="100%"><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ulim;">&nbsp;</span></span></td>
</tr>
</tbody></table>

궁예가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던 철원은 화산대지입니다. 따라서 철원에서 가장 흔한 돌인 현무암의 특징은 용암덩어리가 공기중에서 식으면서 빠져나간 가스의 흔적으로 인한 구멍이 숭숭뚫린 현무암 화산석과 관련한 궁예의 일화는 어느날 왕건과 싸우고 궁으로 돌아오던 궁예가 개울을 건너던중 우연히 이 현무암을 발견하곤 돌에 뚫린 수많은 구멍이 벌래가 돌을 파먹었다고 생각하곤 스스로의 자격지심 으로 돌을 벌래가 파먹다니 이런 해괴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니 아~ 나의 운명이 다 하였구나라고 자조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옵니다.




 

by 초령목 2010. 10. 23. 1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