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 정권, 왕건의 왕위 찬탈

1. 서론

2. 본론

(1) 정사 속 왕건의 쿠데타

(2) 왕건의 쿠데타 그 후

(3) 전설속의 궁예

3. 결론

4. 참고문헌

 

 

 

1. 서론

신라 말기와 고려 초 사이에 존재했던 50년 남짓한 짧은 시대, 후삼국시대는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역사시대이다. 우리나라의 왕조들은 대부분 500년이 넘어가는 유구한 역사들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후삼국시대만큼은 그렇지 않다. 후삼국시대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일본의 전국시대와 더불어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영웅들이 반세기에 공존했던 유일한 시기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견훤, 궁예, 왕건 말고도 기훤, 양길, 능창 등 수많은 영웅들이 자기의 세력을 과시하며 자유로웠던 시기였단 말이다. 이것이 필자가 후삼국시대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 중 하나이다. 우리는 이 시기 이후로 더 이상 영웅들이 공존하던 때를 떠올릴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시대를 공부하다보면 우리나라의 다른 역사에서 느낄 수 없는 독특함을 맛볼 수 있다.

 

후삼국시대의 영웅들 중에서도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을 뽑으라면 바로 궁예이다. 어렸을 적, 이재범 교수의 슬픈 궁예라는 책을 읽으면서 궁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여태껏 세간에 알려진 폭군의 이미지와는 큰 차이를 보인 책의 관점에 흥미를 느끼며 필자 또한 궁예를 비롯한 후삼국시대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특히 궁예는 후삼국시대를 구성했던 다른 영웅, 특히 신라 무장출신의 견훤이나 송악 출신의 호족 왕건과 달리 지지기반이 전혀 없는 사람이 순수 자신의 능력만으로 후삼국시대 최강의 국가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그야말로 자수성가의 전형이 아닐 수가 없다.

 

그래서 필자는 궁예 정권의 몰락이 아쉽게만 느껴졌다. 그것도 궁예가 가장 신봉하던 왕건에 의하여 찬탈당한 궁예의 유산이 하마터면 왕건에 의하여 무너질 뻔 한 것에 대해서 약간은 황당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실제로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후 십여 년 동안은 견훤의 후백제군에게 휘둘리는 모습만 보였기 때문이다. 역사서에 기록된 왕건의 모습은 성군 그 자체이며, 궁예의 폭정에 못 이겨 충동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 사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본다. 과연 왕건은 정말로 보이는 대로 성인(聖人)이었을까?

 

 

 

 

2. 본론

고려사, 삼국사절요, 전설 등과 관련된 인용구는 있는 그대로 적는 게 낫다고 판단하여 부득이하게 인터넷에서 가져왔습니다.

 

(1) 정사 속 왕건의 쿠데타

필자는 오직 정사에 기록된 내용만으로 왕건의 쿠데타가 정당했는 지, 혹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일치하는 지에 대하여 추측해 보겠다.

 

육월 을묘에 이르러 기장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이 몰래 모의하고 야반에 태조의 집에 가서 다 같이 추대할 뜻을 말하니 태조가 굳게 거절하여 허락하지 않는지라 부인 유씨가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입히고 제장이 부축하여 밖으로 나와서 사람을 시켜 달려가며 소리쳐 [왕공이 이미 의기를 들었다.]라고 하니 이에 분주히 달려오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먼저 궁문에 이르러 복을 치며 떠들석하게 기다리는 자가 또한 만여 명이나 되었다. 궁예가 이를 듣고 놀래어 말하기를 [왕공이 차지하였으니 나의 일은 이미 끝났구나 하며 이에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미복으로 북문을 빠져나가 도망가니 내인이 궁을 청소하고 신왕을 맞이하였다. 궁예는 암곡으로 도망하여 이틀 밤을 머물렀는데 허기가 심하여 보리 이삭을 몰래 끊어 먹다가 뒤이어 부양(강원도 평강)민의 살해한 바가 되었다.

-고려사-

 

위의 기록은 고려사의 내용이다. 고려사절요에서도 이와 같은 기록이 서술되어 있지만 내용에는 차이가 없다. 다만 궁예의 폭정에 대해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 성리학자들이 궁예를 폄하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사료들을 종합하여 볼 때 정사 속 왕건의 쿠데타 과정이자, 궁예의 최후는 다음과 같다.

 

우선 서남해지방의 수달이었던 능창을 생포한 왕건을 크게 칭찬하면서 왕건을 신임하게 된다. 물론 애초에 후고구려 개국에 큰 도움을 주었던 송악 호족의 아들이 예쁘게 안보일 리가 없었겠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그 능력 또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후고구려는 날로 번창하여 한반도 3분의 2나 되는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궁예는 날이 갈수록 더더욱 포악해져 가면서 자신의 아들과 부인을 무참히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궁예는 관심법을 이용하면서 반역을 꾀한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 왔는데 하루는 왕건마저 의심하여 그를 죽이려 하다 최응의 지혜로 겨우 죽임을 모면하게 된다. 이후 왕창명의 거울사건이라는 신화와도 같은 일이 벌어지는데 이는 후대에 위조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생략하고, 그 다음에 일어난 사건이 위 사료에 나타난 왕건의 쿠데타이다.

 

, 왕건의 쿠데타는 궁예의 폭정에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궁예의 의심 병이 왕건에게까지 닿자 그것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낀 왕건이 주위의 바람에 충동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묘사가 되어있다. 그런데 정사 속에 기록된 사료에는 몇 가지 의문이 남아있다.

 

 

첫째, 궁예가 진정으로 왕건을 죽이려 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궁예(弓裔)가 불법(不法)을 많이 자행하니, 그의 아내 강씨(康氏)가 정색(正色)하고 간()하였다. 궁예가 미워하여 말하기를,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姦通)을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강씨가 말하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궁예가 말하기를, "내가 신통력(神通力)으로 보았다." 하고, 쇠공이를 불에 달구어 그 음문(陰門)을 찔러 죽였으며 두 아들도 아울러 죽였다. 이때에 궁예가 반란죄(叛亂罪)로 무함하여 날마다 수백 명을 죽었으며 장상(將相)으로서 살해된 자가 열 명에 여덟, 아홉에 이르렀다.

-삼국사절요-

 

보는 것과 같이 삼국사절요에는 위와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궁예가 관심법을 사용하면서 반역의 죄를 꾀했다고 몰아붙일 때는 상대가 아무리 부인한다고 하더라도 열에 아홉은 죽였던 것이 바로 궁예였다. 그것은 자신의 아내인 강씨부인에게도 해당이 되었던 이야기다. 그러나 위와 똑같은 상황에서 왕건에게만큼은 그러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건이 그렇지 않고 반역을 꾀했다는 점을 인정하자 궁예는 잘못을 뉘우쳤다며 크게 기뻐하고 왕건에게 상을 내리기까지 한다. 상식적으로 왕건과 같은 거물급 장수가 반역을 모의했다고 했을 때 그를 죽여 버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궁예는 그러하지 않았고, 이는 오히려 왕건에게 위기의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궁예는 그만큼 왕건을 신임하여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왕건은 궁예의 생각만큼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둘째, 왕건은 이미 옛날부터 역모를 준비하고 있었다.

처음 태조의 나이 삼십에 꿈을 꾸었는데 구층 금탑이 바다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스스로 그 위에 올라갔었다.

-고려사-

 

위의 기록은 왕건의 입장에서 윤색된 고려사의 한 내용이다. 왕건이 일찍부터 제왕이 될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미화한 내용인 듯한데, 이 짧은 기록은 왕건의 인물됨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왕건이 일찍부터 치밀하게 역모를 준비했다는 구체적인 자료가 되기도 한다. 학계나 일반인들 사이에서나 궁예는 왕건이 아니더라도 어느 누군가에게 반드시 쫓겨나야 할 인물로 각인되어왔다. 그러나 위의 사료는 사실 왕건이 30세 때부터 왕이 되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장기간 역모를 꾀했음을 전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9층 금탑이란 신라 황룡사 9층탑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 천하를 평정한다는 염원의 현실적 표현으로 이는 곧 제왕의 운명을 암시한다. 또 고려사 최응전에서 태조가 최응에게 옛날에 신라가 9층탑을 만들고 드디어 통일의 위업을 이룩했다. 이제 개경에 7층탑을 건조하고 서경에 9층탑을 건축하여 현묘한 공적을 빌려 여려 악당들을 없애고 삼한을 통일하려 하니...”라고 한 것을 보면 왕건은 9층 금탑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곧 왕건이 바다 한가운데 솟은 9층 금탑에 오르는 꿈을 꾸었다는 것은, 왕이 되어 천하를 평정하겠단의지를 비유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금탑이 바다 가운데서 올라왔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대를 받았다는 의미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이 짧은 기록은 왕건이 아랫사람들에게 추대되어 왕위에 오른다는 의미를 내포하였지만, 그 진실은 왕건의 역모 계획을 알려준다고 할 수 있다.

 

왕건이 30세때 금탑의 꿈을 꾼 시기는 906년으로 왕건가가 궁예에 투항한 지 10년째가 되는 해이다. 기록상으로 이 시기에는 왕건과 궁예 사이에는 아무런 마찰이 없던 해로서, 오히려 왕건과 궁예가 콤비를 이루어 후삼국시대 최대영토를 차지한 국가를 이룩한 시기였다. 그런데 왜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왕이 될 생각을 했던 것일까? 이는 필자의 개인적인 추측이다. 왕건의 탄생설화를 보면 왕건이 태어난 시기는 이미 나말의 혼란한 사회로 곳곳에서 호족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때였다. 그의 아버지 왕융은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는데, 당시 유명했던 도선에게 명당자리를 얻어왔는가 하면, 유력한 호족이었던 궁예의 밑에 자진하여 들어가기까지 한다. 이러한 가정 분위기 속에서 이미 오랜 옛날부터 왕건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언젠가는 자신도 왕이 되기를 꿈꾸지 않았을까. 그런 와중에 궁예가 포악해져 갔던 것은 왕건에게 호재였을지도 모른다.

 

 

 

(2) 왕건의 쿠데타 그 후

이번에는 과연 왕건의 쿠데타가 정당했는지에 대하여 조사해보았다. 만약 민중이나 내부 세력의 지지를 받았으면 궁예의 평가가 어떻든 왕건의 쿠데타는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왕건은 즉위 이튿날인 정사일에 조서를 반포하여 궁예의 폭정을 규탄하면서 이것을 교훈 삼아 화합의 정치로 밝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뜻을 천명했다. 즉위한 지 사흘 째 되는 날에는 한찬 총일에게 명하여 청주 지역의 민심을 얻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의 죄를 모두 풀라 명하였고, 기반이 취약했던 왕건은 궁예 정권의 관료들을 일단은 껴안고 있어야 했다.

 

궁예의 말년의 행보를 보면 확실히 궁예에게 등을 돌린 사람은 많았다. 그래서 왕건의 쿠데타에 동조하고 같이 일어선 사람들 또한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또한 분명 존재했다.

 

구월 을유에 순군이 임춘길 등이 모반하다가 복주하였다. 경인에 순군랑중 현율로 병부랑중을 삼았다. 계사에 전 시중 구진으로 나주도대행대시중을 삼았는데 구진이 전 임금 때 오랫동안 노고하였으므로 써 가기를 즐거하지 않으니 왕이 불쾌하게...

-고려사-

 

위의 기록처럼 왕건의 즉위년에 곧바로 모반이 일어났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왕건은 궁예를 축출하고 제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궁예 세력은 온존하게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 궁예 세력도 모르게 치밀하게 준비되었던 모반이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마군장군 환선길이었다. 환선길은 왕건을 추대하여 권력을 잡게 한 공신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왕건은 그를 믿고는 항시 날래고 용맹스러운 군사들을 거느리고 왕궁을 숙위하게 하였다. 환선길은 여러날을 뜬 눈으로 지새우며 왕궁을 숙위하다가 모처럼 집에 들렀다. 그때 환선길의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퉁명스러운 투로 따지듯 말했다. “당신의 대주와 능력은 남보다 훨씬 나으므로 사졸들이 복종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큰 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권은 다른 사람에게 있으니 부끄럽지 않습니까!” 여기서 남이나 다른사람은 모두 왕건을 가리키고 있는 말인데 순간 환선길은 내심으로 자신과 왕건을 저울질해본다. 환선길은 내심으로 아내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왕건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모반을 꾀하지만 용기가 부족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처럼 왕건은 궁예 세력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세력에게 조차도 그 정당성을 의심을 받는 처지가 된다. 그래서 사실상 왕건의 권력은 중앙만 움켜쥐었을 뿐이지 변방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궁예가 말년에 장악했던 웅주지방의 이흔암은 쿠데타가 일어나자마자 후백제에 투항하였고, 그 외 많은 지역의 호족들이 왕건에게 벗어나 후백제로 투항하게 된다.

 

이를 볼 때 왕건의 쿠데타는 완벽히 준비되지 못한 반쪽자리 쿠데타였다고 보인다. 실제로 궁예시절 그 강력했던 군사력이 밀집되지 못하여 그 후 십 수 년 동안은 후백제 견훤에게 압도당해 심지어는 죽기직전까지 갔으니 말이다.

 

 

 

(3) 전설속의 궁예

궁예는 과연 백성들에게 버림받은 왕이었을까? 정사속의 기록에 따르면 왕건에게 쫓겨난 궁예가 산에서 숨어 살다가 배고픔을 못이기고 마을로 내려왔는데, 마을 백성들이 괴물인줄 알고, 혹은 궁예임을 알아보고 돌팔매질을 하면서 죽였다고 기록되어있다.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비운의 최후가 아닐 수가 없다. 그러나 전설 속의 궁예는 다르다. 과연 왕건의 쿠데타는 정당했던 것일까? 민중의 입장을 반영하지 않고 오직 중앙 권력 투쟁에 의한 결과가 왕건의 쿠데타가 아니었을까?

 

전설 속의 궁예의 최후는 절대 비굴하지 않았다. 왕건의 군사 역모가 있던 날, 왕은 자신의 나라 도읍지를 마지막으로 순방한 것 같다. 그날 밤 왕은 남문을 통해 도성을 빠져 나왔다. 숨을 가다듬고 재기를 위해 찾아갔던 첫 피신처는 도성 서남쪽의 중어성. 평원 한가운데 세운 도성의 전략적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세웠던 12개 산성 가운데 한 요새다. 현재 위치는 철원읍 대마리. 왕은 이 요새를 버리고 더 서쪽으로 나가 현 연천군 신서면 승양리의 역시 외곽성인 승양산성으로 들어갔다. 또다른 외곽성 보개산성(현 포천군 관인면)은 승양산성의 동쪽에 있었다. 그러나 왕은 어느새 더 동쪽의 명성산성(현 펄원군 갈말읍)으로 들어가 최후 보루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산성에서 군대를 해산한다. 그리고 통곡하는 군사들을 뒤로하고 홀로 북쪽으로 떠난다. '명성이란 말뜻을 굳이 풀이한다면 '큰 울음소리'. 훗날 사람들은 그때 군사들이 슬피 울었다고 해 그 산성을 '울음산성', 산성이 있는 그 산을 '울음산'이라고 불렀다. 명성산성에서 해산했지만 충성스러운 많은 군인들이 왕이 걸어간 길을 뒤따라 군탄리까지 왔다. 왕은 "나를 따르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궁예가 강변에서 한탄했다는 한탄강을 건너가 버렸다. 훗날 사람들은 그곳이 바로 그때 '군사들이 슬피 울며 탄식한 곳'이라며 '군탄'은 거기서 유래했다고 해석했다. 갑천은 평강 하갑리 동북쪽의 작은 내. 왕은 자신의 정예병들을 양성하던 검불량 군사훈련장을 지나 삼방협의 깊은 골짜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결했다.

-울음산 설화-

 

울음산 설화에 따르면 정사 속에 기록된 궁예와의 모습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정사 속 궁예는 왕건의 쿠데타에 저항하지 못하고 바로 포기하여 도망간 왕으로 비춰지나, 이 울음산 설화에서는 끝까지 왕건에게 저항하다가 끝내 하늘의 뜻이 자신에게 없음을 알고 해산했다고 전한다. 그 말을 전해들은 군사들은 모두 슬피 울어 그때부터 명성산의 다름 이름이 울음산이 되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궁예를 따른 병사들이 존재했던 점, 또 이 전설이 끝까지 구전되어 오늘날까지 내려온 점을 미루어 볼 때 궁예가 왕권을 탈취당할 만큼 폭군이었는가에 대하여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점이 있는데 왕권을 탈취 당한 이후 궁예의 행로가 전설 속에서는 의외로 명확하다는 점이다. 궁예왕의 행로는 보개산성-명성산성-운악산성-평강지역으로 이어진다. 궁예왕 일행과 왕건군과의 항쟁은 오랜 세월을 요한다. 운악산성에서 궁예왕 일행은 반 년 이상 왕건군과 항쟁을 했다고 한다. 여기에 평강에서 채록된 지명전설까지 합하면 궁예의 항쟁기간은 훨씬 길어진다. 평강에 있는 문고장, 전중평, 사청산들의 흔적은 평강시절의 궁예 왕국이 적어도 십년 남짓 존속되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고암산을 진산으로 정했기로 300년 도읍을 정하고(905) 왕위에서 물러나기까지 13, 나머지 17년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 거신가. 전설 속의 궁예는 그의 백성, 군대들과 언제나 함께 있다. 울음산에서도 군신이 함께 울고, 식물도 바위도 함께 울어 그 울음소리가 지금까지 계속된다. 그 외 많은 지명전설들이 궁예왕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며 함께 그 고통을 느끼고 있다. 만일 궁예가 문헌자료에서처럼 끔찍한 살인마이고 악인의 전형이었다면 왕의 행동에 대해 그들을 기억하기 위한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을 볼 때, 민심을 동반하고 있던 궁예왕의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왕건의 쿠데타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2. 결론

현재 남아있는 고려에 관한 사료들은 모두 왕건과 그 후손들의 시각에 의하여 각색된 내용들뿐이다. 필자는 이러한 내용들을 정리해보면서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과연 왕건의 쿠데타에는 정당성이 있었는가?

 

정사 속에서 각색된 왕건의 이야기에 조차도 숨기지 못했던 것은 왕건은 이미 오래전부터 역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점이고, 또 궁예는 상상 이상으로 왕건을 신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 왕건의 쿠데타가 성공한 이후, 곧바로 전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난 점은 궁예 정권의 몰락이 비정상적으로 일어났음을 추측해볼 수 있고, 이러한 점은 전설 속에서는 궁예를 옹호하고 있었다는 것에서 판단할 수 있다.

 

쿠데타 과정에서 왕건은 궁예 세력을 완전히 포섭하지 못하여, 한명이라도 더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항상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또 백성들또한 궁예를 그리워하고 있었기에 세금은 1/10으로 낮추는 등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럼에도 민심은 하나로 뭉쳐지지 못해 후백제에게 압도당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점에서 미루어볼 때, 왕건의 쿠데타는 지방 세력 몰래 중앙에서 급진적으로 일어난 역모라는 것이다. 궁예 세력의 대부분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 굴복시켰던 지방에 존재했었으나, 왕건 세력은 송악지방과 중앙 왕실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마자 지방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몇몇 호족들은 후백제에게 투항을 한점을 볼 때, 이는 분명 중앙 호족, 관리의 일방적인 왕위 찬탈로 보인다.

 

필자는 궁예에 대한 재조명과 더 나아가서 왕건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왕건은 혼인정책으로 호족들을 통합하는 등 당장에는 좋은 결과를 낳았지만, 사후 일어날 혼란에 대해서 무책임하게 대응했다. 하마터면 궁예를 몰아내고 이루어낸 왕조를 자신의 씨앗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덕분에 한 세기도 못가고 멸망시킬 뻔했다는 점을 생각해봐야한다.

 

 

 

4. 참고자료

고려사

고려사절요

삼국사기

삼국사절요

 

이재범 슬픈 궁예, 푸른역사

철원군, 태봉국철원정도기념사업회 태봉국 역사문화 유적

이도학 궁예, 진훤, 왕건과 열정의 시대, 김영시




by 초령목 2014. 11. 8. 18:46

조희웅이라는 교수가 쓴 고전소설 줄거리 집성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고전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해서 정리해 놓은 책인데,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은 얼마나 될까요? 무려 856종입니다. 그리고 이 책이 나온 게 십여 년 전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도 발견한 소설, 그리고 조희웅 교수가 미처 책에 실지 못한 소설들이 더 있을 것을 생각한다면, 고전소설은 거의 천 여 종에 이릅니다.


고전소설 작가들은 우리들에게 알려진 사람이 많지 않지만, 조선 후기는 소설의 시대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조선만의 현상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많은 나라가 소설의 시대를 맞아 이야기가 풍성해졌죠.

옛날에 소설을 즐기던 방식은 몇 가지 있습니다. 필사해서 보는 것입니다. 저작권이 없던 시대라 필사하면서 내용이 마음에 안 들면 자기 마음에 들게 내용도 바꿨죠. 그래서 탄생하는 게 이본입니다. 그리고 이웃집에 책이 있으면 빌려 보는 일도 있었죠. 이웃집 아낙네에게 소설 좀 빌려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도 남아 있답니다. 또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이야기 들려주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도 있었고, 길거리로 나가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답니다. 이를 전기수라고 하죠. 조수삼의 추재기이에는 이런 증언이 있습니다.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노인은 동대문 밖에 산다. 언문(諺文)으로 쓴 이야기책을 입으로 줄줄 외우는데 <숙향전>(淑香傳), <소대성전>(蘇大成傳), <심청전>(沈淸傳), <설인귀전>(薛仁貴傳) 따위의 전기소설들이다. 매달 초하루에는 청계천 제일교(第一橋) 아래 앉아서 읽고, 초이틀에는 제이교(第二橋) 아래 앉아서 읽으며, 초사흘에는 이현(梨峴)에 앉아서 읽고, 초나흘에는 교동(校洞) 입구, 초닷새에는 대사동(大寺洞) 입구, 초엿새에는 종루(鐘樓) 앞에 앉아서 읽었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기를 마치면 초이레부터는 거꾸로 내려온다. 아래로 내려갔다가 올라가고, 올라갔다가 또 내려오면 한 달을 마친다. 달이 바뀌면 또 전과 같이 한다.

노인이 전기소설을 잘 읽었기 때문에 몰려들어 구경하는 사람들이 노인 주변을 빙 둘러 에워쌌다. 소설을 읽어가다 몹시 들을 만한, 가장 긴장되고 중요한 대목에 이르면 갑자기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다음 대목을 듣고 싶어서 앞다투어 돈을 던지면서 ‘이게 바로 돈을 긁어내는 방법이야!’라고 했다."




전기수의 절단신공을 이때는 요전법이라고 불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결정적인 순간에 이야기를 딱 끊어서 다음을 궁금하게 하는 방법은 변함이 없었던 것이죠. 조선 시대에는 지금보다 문맹자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소설책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전기수는 소설을 즐길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소설책을 읽을 수 있어도 전기수가 실감 나게 이야기를 꾸미는 것을 듣고 싶었을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건도 있었죠.



"옛날 한 남자가 있었는데 종로 거리의 담배가게에서 소설책 읽는 것을 듣다가 영웅이 크게 실의(失意)한 대목에 이르렀다. 문득 눈초리를 찢고 침을 뱉더니 담배 써는 칼을 잡아 소설책 읽는 사람(讀史人)을 쳐서 그 자리에서 죽였다. 왕왕 맹랑하게 죽는 일과 우스운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전기수가 얼마나 실감나게 이야기를 했으면, 영웅(다른 기록에는 임경업이라고 합니다)이 좌절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흥분해서 전기수를 죽이는 엽기적인 사건까지 있었을까요. 이런 극단적인 사례는 아니지만, 요즘 드라마에서 악역 하는 배우를 실제로 보면 욕하는 아줌마, 할머니들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업도 유행했습니다. 영화 음란서생에 세책업의 모습을 일부 엿볼 수 있는데, 현재의 도서대여점처럼 소설책을 빌려주면서 이익을 얻는 곳이었습니다. 채제공 같은 분은 여편네들이 살림은 안 하고, 소설책 읽느라 가산 탕진한다고 한탄할 정도로(물론 소설을 안 좋게 봤던 높으신 분들의 시각이 들어갔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세책업은 유행했습니다.

또 값싼 목판본 소설을 판매하기도 했죠. 이건 방각본이라고 불립니다. 방각본 소설은 실제 소설 내용을 압축한 일종의 다이제스트판이라고 할 수 있어요. 대체로 판매 지역은 서울, 안성, 전주였는데, 판매지역에 따라서 경판본이니 안성본이니 완판본이니 했답니다. 이것은 판매를 높이기 위해서 일부러 내용을 줄이고, 글자도 줄이고, 몇몇 방법을 동원했는데, 지역에 따라서 내용 편차가 좀 있습니다. 춘향전 같은 경우 경판본은 상당히 짧은데, 완판본은 장편 수준으로 꽤 길죠. 우리가 흔히 보는 춘향전은 완판본인 경우가 많답니다.

소설을 읽는 건 높으신 분들도 예외가 아니라서 궁중에까지 흘러들어갑니다. 현재 창덕궁 낙선재에 소설을 쌓아 놓고 읽었는데, 이 소설들이 대장편인데다가 유일본인 경우도 많아서 연구자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고 하더라고요. 완월회맹연 같은 소설은 무려 180권 180책으로 현재의 웬만한 대하소설보다 훨씬 방대한 분량입니다. 특정 가문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몇 세대에 걸쳐서 이어내는 구성의 소설이 이때 많이 유행했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고전소설들은 현존하는 고전소설들의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이것만 읽고 아, 고전소설은 이렇다 저렇다 인상비평 하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고 코끼리는 어떻게 생겼다라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닐까요? 문학이라는 것이 쉽게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기준에 맞추느냐에 따라서 작품 평가가 달라지니까요.


by 초령목 2014. 9. 4. 23:56

고구려의 궁궐

 고구려 왕궁터로 알려진 것은 길림성 집안현의 국내성 터와 평양시 대성 구역의
안학궁터, 평양성(장안성)의 궁성터 등이다. 고구려는 도읍을 통구에서 대성산 
일대의 평양으로, 다시 장안성 일대의 평양으로 옮기면서 국가의 발전과 상응하
는 도성과 궁성을 갖추었다. 초기에는 평서오가 산성을 유기적으로 관련짓되 일
정한 거리를 두고 따로 건설하였다. 그러나 장안성에서는 이들을 결합한 평산성
을 쌓고 그안에 체제를 갖춘 도시를 형성하여 일반 백성들도 성 안에서 살게하 
였다. 현재 국내성이나 장안성 내성의 궁궐터는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이며 다만
안학궁만이 발굴 조사되어 고구려 전성기 궁궐 건축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성
국내성은 기원전 37년부터 427년까지의 고구려 궁성이다. 이 기간동안 이곳이 
고구려 전기의 명실상부한 왕궁이었다. 이 성 안에서 현재 도시가 자리잡고 있
는 관계로 고구려 시대의 성 안 시설물 포치를 자세히 알기 어렵다. 다만 성 안
의 서북쪽에서 고구려 시기의 주춧돌이 나와서 당시에 큰 건물이 세워져 있었
음을 말하여 준다. 또 붉은 색의 고구려 기와들이 많이 나왔고 성 안의 큰 길로
는 성문들을 서로 연결하는 동서 남북의 두길이 있었다.
성벽은 잘 다듬어진 방추형 돌로써 네모나게 쌓았는데 그 둘레는 약 3800여 미
터이며 현존 성벽의 높이는 약 5내지 6미터인 것으로 보인다.

 

 
 
안학궁성
안학궁성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직후인 427년 무렵에 대성산성과 함께 건설
되어 지금 평양시에 해당하는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긴 586년까지 고구려 후기
의 왕궁이 있었던 곳이다.
장수왕은 평양 천도 뒤, 줄곧 이 궁에 거처하였고, 국내성과는 달리 주변에 강
력한 군사시설들을 갖추고 있었다.
안학궁성은 성벽 한 변의 길이가 622미터, 넓이 약 38만 평방미터나 되는 웅장
한 토성으로 돌과 흙을 섞어서 벽을 쌓았고 성벽 안에는 성벽을 따라 약 2미터
너비로 포장된 순환도로를 냈다.
또 성벽의 문들을 연결한 도로, 궁정과 화랑, 못, 조산등 규모가 크고 화려한 
건축물과 시설물이 있었다.

 

 
 
장안성
장안성은 552년에 쌓기 시작해 586년에 완공된 성이다. 국내성과 안학궁성은
통치 계급의 주거 지역만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쌓았으므로 일반 주민들
은 성 밖에서 살았다. 
그러나 후기의 도성인 장안성은 도시 주민들이 모두 성 안에서 살게 되면서 
크게 쌓은 성이다.
장안성은 북성, 내성, 중성, 외성등 4개의 성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둘레는 
23킬로미터, 성 안 총면적은 1186만 평방미터에 이르는 큰 성이다. 


백제의 궁궐

 백제는 수도가 있던 지역을 중심으로 제1기 한성시대, 제2기 웅진시대, 제3기 사비시대 등 3기로 나눠 살펴본다.

 

제1기 한성시대
기원전 18년부터 서기 475년까지이다. 현재까지 한성시대의 왕성 위치 및 유적에 대해서는 거의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의하면 궁안에는 회나무를 심었고 우물과 연못을 두었으며 궁으 서쪽에는 활쏘는 대를 조성하는 등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제2기 웅진시대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475년부터538년까지 60년 사이이다. 동성왕은 20년 동안 왕위에 있었으며 한성으로부터 내려온 귀족 세력과 웅진성 지역의 신흥 귀족세력을 조정하여 왕권의 신장을 꾀하였다. 곧 우두성을 비롯한 5개성을 쌓는가 하면 웅진서 안 궁궐 동쪽에 임류가이라는 고층 누각을 지어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 만큼 왕권을 안정시켜다 무녕왕 때에는 왕권이 재확립된 듯 중국의 양나라에로부터 영동대장군 곧 중국의 동쪽 을 평안하게 만들었다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이때의 궁궐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그가 죽은 뒤 축조된 무녕왕릉의 건축술로 미루어 볼 때 상당히 높은 수준의 왕궁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제3기 사비시대
사비시대로 도성의 존재에 대한 확증이 없는 상태이다. 다만 문헌상 주목되는 것으로는 무왕 때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는 망해루와 의자왕이 왕궁 남쪽에 세웠다는 망해정 및 의자왕이 지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수리했다는 태장궁 등이 있다. 또 무왕 35년에 궁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 들였으며 못가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못안에 방정선산을 모방하여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의 궁궐

 신라는 기원전 57년부터 935년까지 56대 992년 동안 존속한 고대 국가로서 7세기 중엽에 이르러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여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다. 신라는 통일 전후로 여섯시기로 나누어 살펴본다. 

 
| 제1기 | 제2기 | 제3기 | 제4기 | 제5기 | 제6기 | 발해궁궐|
 
제1기 

제1기는 기원전 57년부터 356년까지로 연맹 왕국의 완성기로 부를 수 있다. 신라 최초의 지배자인 혁거세는 금성을 쌍아 경성으로 삼았으며, 5대 파사니사금 22년 월성을 쌓고 왕이 이곳으로 옮겨 거쳐하였다. 또 기원전 32년에는 금성 안에 궁실을 지었는데 314년에는 처음으로 궁궐이란 용어를 사용하였으나 그 의미는 궁실과 같다. 금성 안에는 그 시기에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등으로 구분되어 불린 지배자가 거쳐한 궁궐이 있었고 우물과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제2기 

356년부터 514년에 걸친 시기로 귀족 국가 태동기로 불리며 이 시기 지배자의 호칭을 따라 마립간 시대라고도 한다. 이 시기의 궁궐은 앞 시기에 비하여 많이 확대, 발전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궁성에 대하여는 "487년에 월성을 수리한 뒤 이듬해 금성 에서 월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496년에 중수하였다"라는 정도의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한편 제 2기에 왕권이 얼마나 강화되었는지는 이 시기에 축조된 대규모의 고분 곧 황남대총, 금관총, 천마총 등과 출토 유물을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다. 

제3기 

514년 654년까지로 귀족세력의 연합기로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시기이다. 이때 궁궐에 대한 기록으로는 두가지가 주목되는데 첫째, 날이 가물자 왕이 정전을 피하여 남당에 나아가 정치를 하였다는 기록과 둘째, 진평왕 7년에 대궁, 양궁, 사량궁등 3궁의 일을 모두 맡아보게 하였다는 기록이다. 위에서 정전은 월성 안 궁궐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데 514년 법흥왕이 즉위했다는 자극전이나 651년이 기록에서 나오는 조원전이 이 정전인 듯하다. 또 정월 초하루에 왕이 조원전에 나아가 백관들의 신년 축하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어 궁궐안에서 신년 의례가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제4기 

654부터 780년 까지이며 통일신라의 황금시대이다. 문무왕은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통일을 이룩하였을 뿐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함으로써 얻게 된 막대한 재물과 노동력을 활용하여 경주를 통일 왕조으 수도답게 변모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경주의 도시 전체를 일신시키려던 계획은 실현하지 못했지만 선왕으로부터 물려받은 궁궐을 장려하게 수리하는 한편 새로운 궁궐로서 동궁을 창조하였다. 한편 문무왕은 재위 후반부인 14년 이후부터 21년 숨을 거둘때까지 줄곧 궁궐을 확대하거나 새로운 궁을 짓는데 몰두 하였다. 최종적으로 경성 전체를 새롭게 만들려고 하였을 정도로 신라의 궁궐 건축사에서 가장 주목받을 업적을 남겼다. 또 문무왕 14년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고 화초를 심고 진기한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서 못은 안압지인 것으로 짐작된다. 안압지 주변의 건물터는 형식과 규모로 보아 대규모의 궁궐이 이곳에 조성되어 있었음을 보여 주며 특히 월성과 가까운 못 남쪽에도 많은 건물 터가 남아 있어서 월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전체가 한 궁궐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제5기 

780년부터 889년까지의 호족 세력 등장기로 신라의 쇠퇴가 빠르게 진행 된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궁궐을 새로 짓거나 도성을 보강하는 공사를 크게 벌인적은 없으며 건물 하나를 세우거나 궁궐 안 중요 건물을 중수하는 것이 고작 이었다. 다만 사찰 건축으로 봉은사, 해인사, 황룡사 9층탑이 이 시기에 이룩되었다 

제6기 

889년부터 935년까지의 내란기로 신라의 멸망기다. 전국 도처에 군웅들이 할거하여 지방의 통제가 불가능하였고 왕국의 수비도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그 가운데 견훤과 궁예는 각기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세우고 왕을 칭하고 도읍지를 정하여 궁궐을 짓기까지 하였다. 918년에 궁예를 쓰러뜨리고 즉위한 태조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 고치고 송악에 서울을 정하였다. 이리하여 1천년 고도로서 찬란한 문화를 남겼던 경주는 지방의 한 도시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통일신라 왕조의 중심이었던 월성, 동궁 및 여러 궁궐들도 버려지게 되었다. 

발해궁궐 

발해는 통일신라와 같이 7세기 말기부터 10세기 전기에 걸쳐 한반도와 만주 지방에 남북의 형세를 이루어 존재하던 왕조이다. 발해의 역사에 대해서는 그들 스스로가 남긴 역사책이 없고 멸망뒤 고려로 망명해온 유민들조차 역사를 기록하지 않아 자세한 사항은 고려의 문헌을 통해서만 추측이 가능하다. 현재 남아 있는 상경 용청부의 석등과 장륙불상, 또 온돌과 굴뚝을 갖춘 살림집 등을 통해 그 시기에 만간의 살림짐에도 온돌이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등은 고구려의 자를 사용하여 제작한 것으로6.3미터의 화사석을 중심으로 지은 것이다. 


고려의 궁궐

 10세기 초에 건국된 고려는 고대 국가의 분열상을 극복, 민족의 재통일을 시도하지만 발해의 영토는 이 시기에 상실된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목표 아래 개성을 도읍지로 선택하고 평양에도 성을 쌓는 등 몇 차례 궁궐을 짓기도 하였다. 고려의 정궁은 후삼국시대에 태봉이 쌓았던 발어참성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태조 2년 에 그 자리에 새롭게 창건되었다. 성종대를 거치면서 왕권이 강화되고 모든 법제가 정비되면서 현종 초기에 새롭게 지은 궐은 규모도 커지고 형식과 제도도 더욱 완비된 모습으로 발전되었다. 이 때는 궁성 안에 여러 전각들도 각각의 기능들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건덕전, 유사시에 왕이 거처하는 원덕전, 궁정을 편전하는 선정전, 태자 의 거처인 좌춘궁등이다. 한편 의종(1146-1170)은 고려시대의 궁궐 건축사에서 가장 기억될 만한 인물이다. 그는 지은 궁궐에 거처하기를 꺼려하였고 풍수지리 및 도참설을 신봉하여 수많은 개인의 집을 빼았아 이궁으로 만들어 옮겨 다니면서 호화로운 건축과 조원을 여러 곳에 만들었다. 의종은 무신의 난으로 쫓겨나고 무신이 집권 하는 시기에는 왕의 권력이 크게 실추되고 궁궐의 중건도 부진하였다. 이 후 잦은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는 등 고려의 궁궐은 많은 수모를 겪는다. 서긍의 '고려도경'을 참고하면 고려의 궁궐은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명당자리를 궁궐터로 선정하였기 때문에 경사가 가파른 언덕을 그대로 활용하여 높은 기단을 쌓아 높이의 차이를 극복하고 정전을 비롯한 주요 거눌은 4면에 행각을 둘러 폐쇄적인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웅장한 건물들이 언덕을 따라 올라가면서 겹겹이 포개져 있는 모습은 송악과 어우려져 장관을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 선 의 궁 궐

1. 조 선 전 기

2. 조 선 후 기

유 수 희(94)

이 땅에 정치적 지배자가 생겨나고 나라가 세워지면서부터 지배자의 거처인 궁궐과 함께 정치, 문화, 종교의 중심지로서 도읍이 건설되었다. 그러기에 궁궐은 지나 온 2000년 왕조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 유산으로서 한국사에서 민족 문화의 전통과 창조적 계승을 살리는 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자산이다.

여기에서는 태조 초에 건설되어 600여 년 동안 수도로서 명맥을 이어 온 한성의 궁궐들의 조성된 과정과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변천하는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참고로 조선시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를 경계로 하여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특히 궁궐은 임진왜란 때 전부 불에 타 없어진 것을 그 뒤에 다시 지었기 때문에 이를 전후한 두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1. 조 선 전 기

조선 전기는 1392년에서 1592년(선조25)까지의 200년 동안으로 고려로부터 계승되어 온 문화를 극복하고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바탕으로 양반관료 사회를 형성해간 시기이다. 그런데 왕실은 국왕 중심의 집권 체제를 추구한 반면 유신(儒臣)들은 관료 중심의 정치 운영을 이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왕권(王權)과 신권(臣權) 사이에는 항상 긴장과 갈등이 있었다. 궁궐 건축을 짓는 과정에서도 꼭 필요한 건물 말고는 짓지 말도록 간청하는 것이 관료(사헌부와 사간원의 言官)들의 임무였으므로 왕은 그들과 대립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검소하고 질박한 건물로 짓도록 왕에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왕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요구는 최고 통치자의 거처이기도 한 궁궐을 마음대로 지을 수 없게하는 지나친 간섭으로 여겨졌다. 관료들은 유교에서 규정한 성군(聖君)이 되기를 왕에게 요구하는 한편, 평소에는 경연(經筵)을 통하여 역사상 왕도 정치를 행한 임금들의 치적(治績)을 교육하고, 특히 그들의 거처인 궁궐이 검소하고 누추하기까지 하였다는 고사를 들려 주곤 하였다. 따라서 조선 전기의 궁궐 건축사는 성리학적 군주관에 입각한 제약된 상황아래 전개되었다. 더구나 태조 이성계는 고려 왕조의 신하라는 위치에서 혁명을 통하여 여러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앞 시대의 왕들처럼 신비로운 존재로도, 절대적인 권력을 쥔 존재로도 생각되지 않았다. 다만 민심과 하늘의 뜻을 받아들여 왕위에 오른 지배자로 생각되었다.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에 명시되어 있는 국도(國都)의 구성원리에는 전조후시(前朝後市;궁궐을 중심으로 그 앞쪽에는 정치를 행하는 관청을 놓고 뒤쪽에는 시가지를 형성함), 좌묘우사(左廟右社;궁궐을 중심으로 그 왼쪽에는 왕실 조상의 사당인 종묘를 놓고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배치함)가 있다. 또 궁궐의 구성원리로는 전조후침(前朝後寢;궁궐은 앞쪽에 정치를 하는 장소인 조정을 두고 뒤족에 임금을 비롯한 왕실의 거처인 침전을 배치함)과 3문3조(三門三朝;궁궐은 전체를 3개의 독립된 구역으로 분할하여 각 구역을 울타리로 둘러막고 각 구역 사이에는 문을 두어 연결시킴)가 있다. 이같은 제도적 규정(周制)이 한성의 도성 및 궁궐 계획에 사용되었다는데 이는 어겨서는 안될 법칙이라기보다 이상적 규범으로서 하나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졌다.

경복궁성은 도성 한복판에 있지 않고 북서쪽에 치우쳐 있으며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궁성 남쪽의 큰 길 좌우에는 의정부, 6조, 사헌부, 삼군부 등 주요관청을 배치 하였고, 그 남쪽 동서로 뚫린 큰 길(동대문과 서대문을 잇는길, 지금의 종로)에 시장을 열어 시가지를 형성하였다. 종묘와 사직을 각각 경복궁성의 왼쪽과 오른쪽에 놓았으나 등간격으로 대칭이 되도록 배치하지는 않았다. 또 도시 전체를 둘러싸는 외성을 평지에 장방형으로 쌓지 않고 한성분지를 외호(外護)하고 있는 백악산, 응봉, 인왕산, 타락산, 남산의 등성이에 산성형식으로 지형에 맞게 쌓았다. 결과적으로 周制를 의식하였으되 한성의 지형과 풍수적 명당터를 더 존중하여 도성을 계획하였음을 알 수 있다.

* 경복궁의 구성. 배치

태조4년(1395) 9월 29일의 {태조실록} 기사에는 창건당시 경복궁의 규모 배치, 각 건물의 기능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곧 연침(燕寢), 동소침(東小寢), 서소침(西小寢), 보평청(報平廳)등 내전 건물과 정전, 동서각루(東西角樓), 주방, 등촉인자방(燈燭引者房), 상의원(尙衣院), 양전사옹방(兩殿司壅房), 상서사(尙書司), 승지방(承旨房), 내시다방(內侍茶房), 경흥부(敬興府), 중추원(中樞院), 삼군부(三軍府), 동서누고(東西樓庫)등 390여칸이 준공되었다.

{주례}의 궁실제도인 3문3조 를 적용하여 창건당시 경복궁의 배치원리를 알아보면 먼저 3조는 연조, 치조(또는 내조), 외조를 말하는데 연조는 왕과 왕비 및 왕실일족이 생활하는 사사로운 구역으로 연침, 동소침, 서소침 등 3채의 침전이 연조에 속한다. 치조는 임금이 신하들과 더불어 정치를 행하는 공공적인 구역으로서 정전(正殿;조례를 거행하고 법령을 반포하며 조하를 받는 곳)과 편전(偏殿;중신들과 국정을 의논하는 곳)으로 이루어지므로 보평청과 정전이 여기에 속한다. 외조는 조정의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이 배치되는 구역으로 주방이하 동서누고까지가 여기에 속한다. 창건 당시에 궁궐이름을 경복궁이라고 명명하였던 정도전은 각 건물의 이름과 이름을 지은 의의를 임금께 올렸는데, 연침을 강녕전(康寧殿), 동소침을 연생전(延生殿), 서소침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고 연침 남쪽의 보평청을 사정전(思政殿), 정전을 근정전(勤政殿), 동쪽누를 융무루(隆武樓), 전문(殿門)을 근정문, 남쪽문인 오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고 하였다.

연조, 치조, 외조는 각기 회랑으로 둘러싸인 폐쇄적 중정(中庭)형식을 취하면서 남에서 북으로 연속되어야 하는데 {태조실록}의 기사를 참조하여 창건 당시의 배치도를 추정해보면 3문3조라는 원리를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3문3조로 이루어진 궁실 전체를 다시 궁성으로 둘러싸고 거기에 동문(건춘문), 서문(영추문), 남문(광화문, 2층누문)을 설치한 다음 남문 앞쪽 대로(大路)좌우에는 의정부, 삼군부, 6조, 사헌부 등 관청을 나란히 배치하였다.

창건 당시의 경복궁은 전체 규모가 천 칸에도 훨씬 못 미치는 390여 칸에 불과한 점, 반면에 중추원, 삼군부 등을 궐안에 배치한 점, 궁성 안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좌하기 위한 최소한의 부서로서 상의원, 사옹방, 상서사, 승지방, 내시다방 등만을 둔 점 등, 몇가지 측면에서 왕권이 강화되기 전, 유신들이 추구하던 재상 중심의 정치 운영에 적합하도록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태조때 창건한 경복궁은 세종때에 이르러 비로소 왕궁다운 궁궐이 되었으며 이후 100여년 뒤인 명종8년(1553)까지는 거듭 발전하여 조선 전기에 이룩된 궁정 문화를 총체적으로 담고 있었다. 그러나 명종8년의 화재로 정전·편전 일곽을 제외한 내전 일곽이 모두 불에 타 이듬해에 대대적으로 중건하였으나 그것마저 임진왜란때 완전히 소실되었다.

* 창덕궁과 창경궁

태종, 세종대를 거치면서 점차로 정치가 안정되고 권력이 왕에게로 집중되면서 경복궁 내부에는 건축상 많은 변화가 일어나며, 경복궁 동쪽 종묘 옆에는 이궁인 창덕궁까지 생긴다. 곧 태종 때에는 경회루를 짓고 주변에 못을 파서 군신의 연회 장소를 마련하였고 세종 때에는 동궁, 후궁(後宮), 혼전(魂殿), 학문 연구 기관 및 후원(後苑)까지 완비하여 이른바 법궁체제(法宮體制)를 완성하였다. 또 주요 전각뿐만 아니라 문에도 고유한 이름이 붙여진다.

편전인 사정전(思政殿;창건 때는 보평청) 좌우에 만춘전(萬春殿), 천추전(千秋殿)을 더 지었고, 연침인 강녕전 일곽 뒤쪽에 새로 교태전(交泰殿), 함원전(含元殿)을 비롯하여 자미당(紫薇堂), 인지당(麟趾堂), 청연루(淸燕樓), 종회당(宗會堂), 송백당(松栢堂) 등 후궁을 지었다. 동궁은 세자가 백관의 조회를 받는 계조당(繼照堂)과 서연(書筵)및 시강(詩講)을 받는 자선당(資善堂)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 후원에는 못을 파고 주변에 나무를 심었으며 취로정(翠露亭) 등 정자를 세웠다.

태종5년(1405)에 세워진 창덕궁은 처음에 외전 74칸 내전 118칸 규모로 지어졌으나 이후에 광연루, 진선문, 금천교, 돈화문(정문), 집현전, 장서각 등이 증설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정침청(艇寢廳), 동서침전(東西寢殿), 수라간(水喇間), 사옹방, 탕자세수간(湯子洗手間)등 내전을 비롯하여 편전, 보평청, 정정, 승정원청 등이 있었다고 한다.

창덕궁 옆에는 옛 수강궁(壽康宮;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한 뒤에 거처하던 궁, 1419년 창건)터에 성종14년(1483)에 창건된 창경궁이 있다. 성종은 왕실의 어른으로서 정희왕후(세조비이자 성종의 할머니), 소혜왕후(덕종비이자 성종의 어머니), 안순왕후(예종비이자 성종의 작은 어머니)와 창덕궁에 함께 거처하였는데 이들을 위하여 따로 궁궐을 지어 창경궁이라 하였다. 일종의 대비궁인 셈이다. 그래서 경복궁과 창덕궁이 남향으로 배치된 것과는 달리 창경궁은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창경궁에는 정전인 명정전(明政殿)과 편전인 문정전(文政殿)을 비롯하여 인양전, 경춘전, 통명전, 양화당, 여휘당, 환경전, 수녕전, 환취정 등 많은 내전 건물이 있었으나 역시 임진왜란때 모두 소실되었다.

조선 전기 정치 활동의 주 무대이자 역사의 현장이며 궁정 문화의 결정체였던 3궁궐은 북궐(北闕;경복궁), 동궐(東闕;창덕궁과 창경궁은 한 궁성안에 있었으므로 합쳐서 하나의 궁궐로 부름) 등으로 불렸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모두 흔적도 없이 불타버렸다.

2) 조선후기

조선 전기에 이룩된 높은 수준의 문화적 성과들은 임진왜란으로 거의 다 파괴되고 소멸되었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입은 타격도 대단히 심각한 것이어서 외형적으로나마 이를 회복하는 데에 반세기 이상의 시간이 걸렸으며 전란으로 입은 피해를 극복하고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는 단계에 이르는데 1세기가 걸렸다.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위기 상황에서도 종묘와 왕의 거처인 궁궐은 가장 먼저 재건되어야 할 목표로 생각되었다. 종묘와 경복궁을 재건하기 위하여 선조38년(1605)부터 진행된 중건 계획은 다음 순서로 마련되었다.

첫째, 춘추관에서 건국 초기와 성종때의 공사및 명종8년부터 9년까지의 경복궁 중건 공사등에 관한 문서와 기록을 등서(騰書)로 묶어서 임금과 해당관청인 공조에 보냈다.

둘째, 공사를 담당할 기구로서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하고, 등서를 참고하여 구체적인 계획을 입안하였다.

그리하여 1606년에는 궁핍한 재정과 민생고를 감안하여 경복궁의 중심 일곽만을 먼저 짓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608년까지 종묘만을 중건하였을 뿐 경복궁 중건은 실현시키지 못했다. 그대신 창덕궁재건 공사를 시작하여 1609년에 준공하였다. 여러차례 논의에도 불구하고 경복궁 중건은 실현하지 못한 채 조선후기에 경복궁을 대신하여 정궁 역할을 한 것은 창덕궁이었다. 광해군은 다시 1615년에 창경궁을 중건하고 뒤이어 인경궁과 경덕궁을 창건하였으나 인경궁은 인조때 헐려서 창경궁과 창덕궁을 지을 때 이용되었고 흔적도 남지 않았다.

경희궁(경덕궁을 고침)은 1620년(광해군12)에 완공되었는데 빛을 보지 못하다가 4년뒤인 1624년부터 280여년동안 여러 왕들의 거처로서, 조선 후기 역사의 현장으로서 창덕궁과 더불어 그웅장한 모습을 지켜 오다가 1910년의 한일합방 직전부터 일본인들에 의하여 강제로 철거되기 시작하여 얼마 안가서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다.

경복궁 터는 그대로 둔채 창덕궁는 정궁, 경희궁은 이궁으로 사용되었으며 창경궁은 창건당시의 대비궁이라는 용도를 벗어나서 창덕궁을 옆에서 보좌하는 궁궐로서 활용돠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한 궁성 안에 있어서 동궐이라고 불렸던 것에 대하여 경희궁은 서궐,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정궁인 경복궁은 북궐이라고 불렸다.

궁궐 안의 건물들은 해당 관청의 철저한 관리와 보호를 받았으므로 때맞추어 수리되었다. 또 왕들은 저마다 새로운 건물을 첨가하면서 궁궐의 면모를 부분적으로나마 바꾸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동궐과 서궐은 각각 수천 칸 규모로서 100여 채의 복잡, 다양한 건물을 갖춘 대궐로 발전하였다.

19세기 초까지 꾸준하게 발전해 온 동궐과 서궐은 1829년 서궐의 화재를 시작으로 창경궁(1830년), 창덕궁(1833년)이 차례로 대규모 화재를 당하여 정전·편전·침전 등 주요부분이 불탄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 광해군 인조대를 거치면서 재건된 궁궐이 또 200여년 만에 한꺼번에 소실된 것이다.

조선후기의 궁궐 건축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경복궁 중건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270여년동안 아무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경복궁 중건은 흥선 대원군에 의하여 마침내 시도되었다. 그는 순조, 헌종, 철종대(1800-1863)의 이른바 세도정치기를 거치면서 땅에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궁극적으로는 조선왕조를 부흥시키는 방편의 하나로 경복궁 중건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이미 왕조라는 봉건 체제가 해체되고 있었다. 특히 양반 관료층이 극도로 부패한 상황에서 대다수 농민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도적이 되어야 할 만큼 조선 사회는 뿌리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왕조 사회의 해체가 이미 크게 진전된 시기에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궁궐 중건을 대대적으로 시도한 것은 시대 착오였음이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중건된 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마지막 기념비이다.

경복궁은 1865년에 중건 계획을 세우고 건물을 설계할 때에 동궐과 서궐이 많이 참조되었다. 다만 이때의 동궐과 서궐의 건물은 대부분 1830년에 중건된 것이었고, 이때 건설공사에 참여한 기술자들 가운데에는 1865년 이후의 경복궁 중건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도 있다.

1865년(고종2)4월부터 시작된 공사는 2년 7개월만인 1867년 11월에 대체로 끝난다. 그러나 1872년까지는 마무리 공사가 계속되었으며 이해 9월에 영건도감이 해체됨으로써 중건공사가 완료되었다. 공사비는 773만 6,898냥에 이르렀는데 거의 전부를 원납전(願納錢)이라는 이름으로 모금하거나 반강제적으로 징수하였기 때문에 백성의 고통은 아주 컸다.

궁성의 둘레가 1,813보 높이가 20여 자이며 건물의 총 칸수는 7,481칸에 이르고 행각이나 장랑(長廊)을 제외한 단독 건물만도 150여 채가 넘는 방대한 규모의 궁궐이었다. 그 뒤 경복궁은 1873년과 1876년 두 차례 일부 화재를 당하기도 하였다. 한편 1873년에는 향원정과 신무문(北門)사이에 건청궁이라는 후궁을 지었고 1888년에는 대균모의 중건 공사를 시행하였으며 1893년에는 신무문 밖 후원에 경농제(慶農齊)와 大有軒)을 지었다.

어려운 시기에 백성들의 노역과 재물로 건설된 경복궁은 왕조 부흥의 터전이 되지 못한 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았긴 뒤 파괴 변형 왜곡되었다. 조선 총독부 청사를 바로 경복궁 정전인 근정전 앞에 세웠다. 수많은 건물들이 헐리고 현재에는 10여 채의 건물만이 보존되어 있다.

경복궁의 중건 이후에도 경운궁(慶運宮) 중건이 2차례나 시행되었다. 경운궁은 임진왜란 직후에 잠시동안 궁궐로 사용되다가 창덕궁 및 창경궁이 중건된 뒤에는 더 이상 왕의 거처로 쓰이지 않았는데, 20세기 초에 와서 다시 중요한 궁궐로 부각되었다. 왜냐하면 경복궁 안에까지 일본인들이 침입하여 왕비를 살해한 사태에 처하게 되자, 당시 주변에 외국 공사관들이 밀집해 있던 경운궁으로 왕실이 피신하기 위하여 대규모 건축 공사를 벌여 왕궁다운 궁궐로 변모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경운궁은 전통적인 궁궐 건축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외세의 개입이 심화되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한국의 건축도 일본화, 서양화의 길로 치닫게 된다. 일본에 의하여 왕위에서 강제로 쫓겨난 고종은 이 경운궁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꾸고 여기서 남은 생애를 울분 속에서 보냈다. 덕수궁이란 이름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처럼 고유 명사가 아니며 왕위를 물려준 상왕(上王)이 거처하던 궁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는 보통명사이다.

조선시대에는 삼국시대 이래 고려로 계승되어 온 궁궐 건축사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성리학을 통하여 들어온 제도와 사상을 전통에 융합시켜 새로운 형식의 궁궐 건축을 창조하였다. 경복궁이 조선 궁궐의 기본형이라고 하면 창덕궁과 경희궁, 창경궁은 변형으로 이해된다.

by 초령목 2014. 5. 25.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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