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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령목 2014. 5. 19. 21:03

*성리학자, 철학자 


정조가 똑똑하고 공부하기를 좋아해 성리학 분야에 뛰어났기 때문에 신하들을 오히려 가르칠 정도였는데 
정약용과의 성리학토론에서 한 번도 이겨본적이 없다고 함. 
1000여권의 유교경전을 놓고 연구했던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였음. 

- 내강중용강의, 내강모시강의, 희정당대학강의 


*서학자 

서학에도 조예가 깊어서 성경도 공부했음. 


*역학자 

백련사의 주지스님은 스스로를 조선 최고의 역학자라고 자부했지만 
정약용을 만난 이후 정약용에게 배움을 받기 위해 매일 정약용을 찾아갔음. 

- 역학서언 


*문학가, 한문학자, 문예비평가 

이미 7살 부터 시를 지었고('산'이라는 시가 전해짐) 10살 이전에 지은 시를 모은 삼미자집이라는 책을 냄 
농민의 참상이나 사회현실을 한시로 지으면서 조선후기의 한시에 영향을 끼침. 
또한 어린시절 홍역을 치료해준 이헌길이라는 의사의 전기(몽헌집)를 집필함. 

- 다산시문집 


*역사학자 

강역고라는 역사서를 통해 역사의 해석과 비판이 무엇인지 저술함. 


*지리학자 

조선 최고의 지리서 택리지를 지은 이중환의 스승임. 
아방강역고에서 고조선에서 발해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강역의 역사를 각종의 문헌에서 기록을 뽑아 고증하고? 
자신의 견해를 첨부하여 그 내력을 자세히 밝히고 있음. 
고조선과 발해 외에 한사군, 삼한(마한, 진한, 변한)의 위치를 다루고, 
옥저, 예맥, 말갈, 발해의 순으로 북방 여러 나라의 위치와 역사도 함께 검토. 
또한 지리 고증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고조선 이래의 역대의 강역과 수도, 하천 등의 위치를 
새롭게 밝혀 잘못 기록된 지리서에 수정을 가했음. 

- 아방강역고, 대동수경 


*정치학자, 행정가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주민자치), 농민의 토지균점,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 
끊임 없는 부정부패와 공직자의 청렴, 사명감을 중요시 여겼고 이러한 제도들의 실천을 더 중요시 여김. 

- 목민심서 : 목민관의 사례모음집 
흠흠신서 : 목민심서 집필 중 형법 집행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이 부분만 따로 확대하여 지은 책 
경세유표 :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를 실제 정치와 행정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지은 책 


*경제학자 

세법, 경제 제도 개혁 주장,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상공업이 중요하다고 주장. 

- 경세유표 


*형사, 법의학자 

살인사건을 조사하여 범인을 밝혀내고 억울한 사람의 누명을 벗겨주기도 함 
흠흠신서라는 저서를 통해 자신이 맡았던 사건을 기록했음. 


*건축가, 토목공학자, 기계공학자, 과학자, 발명가 

배다리와 기중기, 수원화성 설계 제작 
과학이 인간사회의 진보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여 
서양과학기술을 배울 수 있는 이용감이라는 관청을 두자고 제안. 
자전설을 주장하며 천동설을 비판하는 근거를 마련. 
빛의 굴절에 관한 서적을 읽었고 렌즈에 대한 소개를 했으며 
근시와 원시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정도. 


*의사 

순조가 병이 들었는데 어의들이 모두 고치지 못하자 정약용을 불러 치료하게 함. 
조선 최고의 의사였음. 
홍역의 치료에 관한 마과회통 저술하고 종두법을 실험했음. 

- 마과회통, 촌병혹치(약을 구하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쉬운 처방법을 집필) 


*법학자 

형법의 체계와 법률 적용을 검토 


*국문학자 

여러 분야의 어휘를 한자와 한글로 대비해 물명고라는 사전을 편찬. 
속담과 방언을 정리함 


*번역가, 편집가 

논어, 맹자, 춘추, 대학, 중용 등의 서적을 해석, 편집함 


*문화학자 

우리나라의 예법, 상법을 정리한 상례사전등을 집필 
(왜 예송논쟁이라고 효종이 죽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 가지고 싸웠던거 있잖아요. 
그거보고 빡치셔서 집필하심. 결론적으로 송시열 디스) 


*음악학자 

우리 나라의 음악이론·성률·악기 등의 기록을 고증한 음악서 악서고존 편찬 


*교육학자 

아이들 교재인 소학주천 집필




율곡 이이

연암 박지원

정조

세종

이가환

장영실

by 초령목 2014. 4. 30. 20:23

한민족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통일 중국제국에 대규모 원정을 건 왕

발해 무왕

 



고조선부여고구려신라백제고려 등 한민족 국가가 중국을 격퇴한 적이 있으나


대부분 수성전으로 몰아내거나 청야전술을 기본으로한 우주방어전이었습니다.


중국에 대해 선제공격을 한 것은 중국 분열시기를 이용하여  단기간 치고 빠지기가 주류.


연나라와 아웅 다웅 하던 고구려도 연나라에게 영혼까지 털릴뻔하기도 하고


북위가 하북을 통일하자 얌전히 눈치 보는 형세로 굳어집니다하북통일만 해도 국력과 회전에서의 전투력의 압도적


인 열세를 인정하고 수성전우주방어전으로 대응합니다그런데


무려 전중국을 통일한 제국에 대해 선제 공격과 전쟁을 건 유일한 나라가 있으니 바로 발해입니다.


당나라 전쟁에 앞서 상황을 보자면


===========================



 



 1결집기(719~724)  엄청난 정벌사업의 시작

발해의 각 배후에 있던 동북방의 여러 유목민세력들을 치기 시작.


719년 구다족을 쳐서 복속시킴

7

20년 개마족을 격파한뒤 복속시킴.

전까지 당은 발해를 인근 부족 추장집단세력으로 치부하며 개무시했으나 개마족과 구다족을 병탄한 이후부터 좋지 않은 눈초리로 보기시작신라 또한 발해와 긴장이 고조.



발해 건국 초기 골치 아프게 했던 유구실위 기마 세력을 월희읍루불열 등지에서 모조리 제압하므로서 해결무왕은 단 5년만에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배후의 모든적을 때려부수고 있었던 것.



또한 지방행정체계를 "도독", "제사(혹 자사)", "수령"으로 두었으며조정체제와 "건민책령제"를 통하여 백성들의 생활안정을 시키고경제안정을 도모하는 것들을 골자로 하는 국력의 전반적인 결집기.

 



 2팽창기(724~731)

- 725년 발해 내부에 잔존하고 있던 무왕의 정적 세력들이 무왕을 폐위하고자 쿠데타를 일으키나 무왕은 살아남음.

오히려 이걸 계기로 무왕은 건국 초 암암리에 숨어있던 자신의 자리를 노리던 군벌이나 정적들을 일거에 제거 소탕하고 왕권을 강화하게 됨이를 바탕으로 골칫거리였던 726년 흑수말갈 정벌에 나섬


흑수말갈을 기병군단을 대파하고 흑수말갈의 대칸 예속리기의 목을 벰말갈의 군마와 양질의 기병들을 흡수.발해는 서서히 팽창기에 접어듬.




이에 당나라는 긴장하게 됨그 이전까지 근방의 흔한 유목민 추장세력쯤으로 여겼던 발해가 거침없이 주변을 병탄하여 세력을 불리고 있었기 때문.

무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요동 정벌에 나서 전 고구려의 각 요새들을 차례차례 탈환하여 당군을 축출하고 727 730년까지 요동정벌을 완성당은 발해를 더 이상 좌시하지않고 물밑 작업에 들어가고.. 이에 드디어 발해 당의 전쟁의 서막이 오름

 

=======================

 

732
발해 무왕이 장문휴(張文休)가 이끈 수군을 보내어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공격하여 자사 위준(韋俊)을 죽임(등주 공격)
*출전 : <<구당서>>, <북적열전발해말갈

733
당나라의 요청으로 발해 공격을 위해 김사란(金思蘭)이 이끈 신라군이 출동하였으나 눈이 많이 와서 철수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성덕왕 32 7

 

733
발해 무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 마도산(馬都山일대를 공격함(마도산 전투)
*출전 : <<신당서>>

 ----------------------------------------------------

 

 

 

발해가 대조영에 의해 건국되면서 당나라는 발해를 국가로 인정해 주다가

719년 대조영이 죽고 무왕(대무예) 2대왕에 오르면서부터

 

당나라가 발해를 돌궐,거란,흑수말갈과 동급으로 대함.

(당시 돌궐,거란,흑수말갈은 정식 국가라고 안보고 부족으로 구분했음.

쉽게말해 당나라의 흔한 유목민 추장호구)

 

 

 

무왕은 즉위하자마자 동북쪽으로 영토를 확장시켜 나갔음

(신당서에 보면 "동북의 오랑캐들이 발해를 두려워 했다"라고 나옴)

 

722년 흑수말갈 부족장이 발해 영향권 안해 있어야 하는데 당과 내통하기 시작.

당은 파죽지세의 발해를 장차 멸망시킬 계획을 가지고 말갈 부족장에게 벼슬을 내리고 당의 관을  설치하는등 . 말갈과 연합하여 장차 발해를 양쪽에서 압박하려함

 

 

 

 

 

사진에서 보이듯이 당과 흑수말갈이 친목질을 하면서 발해는 위험을 느끼게 됨

(일명 샌드위치 당할까봐..)

 

※돌궐과 거란은 발해와 우호적 관계였고 당과는 적대관계여서 괜찮음.

 

그래서 흑수말갈에게 당이랑 친목질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데도

흑수말갈은 무시하고 발해한테는 조공도 안바침

(당나라한테는 굽신굽신)

 

결국 725년 당나라는 흑수말갈에 관청을 설치하고 관료를 파견시켜 다스리기 시작했음.

사실상 당나라가 흑수말갈을 흡수하게 된거임

 

 

이에 분노한 무왕은 왕위계승자인 대도리행(무왕 아들)을 당에 보내어

흑수말갈한테 관심 꺼달라고 부탁함

 

하지만 당 현종은 걍 무시;;

 

 

무왕은 큰 그림을 그려볼 때 이 사건을 좌시하게 될 경우 장차 발해의 존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것을 알았음나라의 국운을 걸고 세계제국 당과 맞설 것을 결심하고 

가장 신뢰하는 장수 대문예(무왕 동생)에게 흑수말갈 토벌군 사령관에 임명함.

 

근데 대문예는 입장이 달랐음. (당시 대문예는 당에 9년간 있으면서 당의 국력과 저력을 알고 있었고 당의 문화에 흠뻑 빠져든 친당파)

 

 

 

 

 

무왕(대무예) "흑수말갈은 이제 당나라속국이 되었으니 당과 연합하여 발해를 공격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흑수말갈 토벌해야함니가 가서 조지고 와라"

 

 

 

 

 

 

 

 

 

대문예형님 지금 장난하십니까당나라는 발해의 몇배에 달하는 군사를 보유했다구요

아무일도 아닌데 괜히 흑수말갈 건드렸다가 발해 멸망할일 있어요??

 

(대문예는 당에서 8년동안 생활한 경험이 있어서 친당파였음)

 

 

 

 

무왕 "개소리말고,  지금 안치면 우리가 망함니가 언능 가서 토벌하고 와라"

 

 

결국 대문예는 흑수말갈 토벌군 사령관으로 강제임명되고 흑수말갈을 토벌하기위해 동북으로 향했음.

 

 

하지만 국경지대에서 싸움은 안하고 계속 무왕한테 못싸우겠다고 상소를 올림.

(상소 내용: "아무래도 이건 하극상임 나 못하겠음")

 

 

빡친 무왕은 대문예를 소환하기로 하고 

대신 사촌형 대일하를 토벌군 사령관으로 보냄.

 

 

 

근데 소환하기로 한 대문예가 발해로 안오고 당으로 망명해버림;;;

 

 

 

그리구선 당 현종 밑으로 들어감.

 

 

당 현종은 대문예를 발해 내정간섭에 써먹으려고

 

 

환대하며 벼슬까지 내림..

 

 

 

그리고 무왕한테

 

"대문예도 넘어왔는데 우리 당나라랑 너희 발해랑 임금 신하 관계로 친하게 지내지??"

 

이런내용의 국서를 보냄 

 

 

 

 

 

 

 

 

당황한 무왕은 단호한 결정을 내리고 이렇게 답문을 보냄

 

 


 

"당에 망명한 순간부로 그는 내 동생이 아니다그를 죽여라"

 

 

 

 

 

 

당 현종은 약점잡힌 무왕이 굽히고 들어올줄 알았는데

 

예상외의 단호한 답변을 보고 당황함..

 

 

 

 

그래서 "대문예를 죽이기 위해 멀리 귀양보냈다."

 

라고 구라치고 지방에 숨겨놓음.

 

 

근데 얼마못가 무왕이 구라라는것을 알아차리게 되고

 

국서에 유례없는 내용을 써 넣음 

 

"큰나라는 신의를 보여야 하거늘 어찌 속일수가 있소이까바라건데 예전의 청대로 그를 죽여주십시오"

 

 

 

생긴지 30년 갓 지난 신생국가가

동아시아를 장악한 당나라의 임금한테

구라쟁이라고 꾸짓은거임;;

 

 

 

 

당 현종도 뻘쭘해서 당분간 발해에게 아무것도 못했으나

 

 

 

728 4,

왕위 계승자였던 대도리행이 당에서 갑자기 사망하게 되면서

 

 

당나라의 태도는 180도 변해버림.

 

발해에게 협박하기 시작하게 됨

 

"내가 지금껏 참아왔으나 너희 나라가 점점 기어오르는것 같구나

왕위 계승자도 죽은마당에 대문예를 후계자로 정하도록 해라.

한그러면 무슨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발해의 왕권 자체가 흔들릴수 있는 상황

 

무왕은 결단을 내려야 했음.

 

 

이렇게 당나라의 속국이 될 것인지

 

아니면 당에 맞서야 할지..

 

 

 

결국 무왕은 압록강으로 군사를 이동시키고

 

 

박작구라는 포구에 발해군을 집결시켰다.

 

 

당나라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무왕은 장문휴장군에게 당 정벌을 명하고

 

장문휴 는 수개월동안 군선과 군사를 정비해 출격 준비를 마쳤다.


 

 

 

732 9월 드디어 출격 명령이 내려졌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해외 원정이 시작된 것이다.

 

 

  

 

 

목적지는 중국 산동반도.(저기 당이라고 쓰여있는곳 바로 옆이 '장안'이라는 당나라 수도였음)

등주라는 지역이었다.

 

 

(등주의 모습 성 자체가 배를 정박하는 수성이라 전투하기 까다로움.)

 

등주는 당시 북방지역에서 가장 큰 항구로 무역의 거점이었고.

동시에 당나라 수군의 핵심 요충지였다.

 

(전국의 조선기술자들이 이곳에 집결했으며 물자를 들이고 군선을 만드는것 모두가 등주에서 이루어졌을 정도)

 

 

그런 요충지를 공격하는것은 매우 위험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큰 치명타를 줄수 있는 장소였다.


2부


장문휴의 등주 원정과 무왕의 마도산 전투



장문휴 장군은 선단과 군단을 정비 드디어 당나라 원정을 시작했다.



 

 

목적지는 중국 산동반도.(저기 당이라고 쓰여있는곳 바로 옆이 '장안'이라는 당나라 수도였음)

등주라는 지역이었다.

 

 

(등주의 모습 성 자체가 배를 정박하는 수성이라 전투하기 까다로움.)

 

등주는 당시 북방지역에서 가장 큰 항구로 무역의 거점이었고.

동시에 당나라 수군의 핵심 요충지였다.

 

(전국의 조선기술자들이 이곳에 집결했으며 물자를 들이고 군선을 만드는것 모두가 등주에서 이루어졌을 정도)

 

 

그런 요충지를 공격하는것은 매우 위험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큰 치명타를 줄수 있는 장소였다.



고구려를 멸망시킬때 출발했던 당나라의 함대 역시 이곳에서 출발했다.


 

발해군의 작전은 기습적인 상륙작전과 선제공격





732 9 5일 발해군은 마침내 등주를 침공했다.




 

 

 

 

 

 

 


 

그 결과 등주 일대의 군사와 행정을 총괄하던 등주자사 위준을 죽임

(포로로 잡은것도 아니고 그자리에서 죽여버림)

 

 

당황한 당 현종은 급하게 장수와 토벌군을 보냈지만 발해군이 다 전멸시킴;

 

 

 

 

결국 당나라는 

 



신라의 선덕왕(27대 선덕여왕과는 별개인물, 37대 왕)에게 벼슬까지 높혀주면서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발해를 공격해 달라고 부탁했고

 

 

 



 

당 현종이 직접 장수까지 지명해서 싸우게 함김유신 장군의 손자 김윤중)

 

 

 

 

 

 

신라는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발해를 공격하러 북상함.

(일명 빈집털이)

 

 

등주에 머물던 발해군은 부랴부랴 본토로 돌아오게 되고..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신라가 날씨를 핑계로 싸우지도 않고 공격을 포기함

(눈이 너무 많이와서 춥다고 고스란히 돌아감)

 

 

 

 

당은 발해를 직접 공격하기로 하고 비수를 뽑아듬.

 


 

대문예를 중심으로 발해 토벌군을 꾸려서 무왕과 맞서게 만든거임 

 

 

 

 

 

당의 장수가 된 대문예는 동족을 향해 칼을 휘둘렀고 명백한 반역자가 되버렸음

 

이에 무왕은 암살단을 조직해

대문예를 죽이도록 계획하여 당나라 낙양 한복판에서 암살을 시도함.

 

결과는 Fail..

 

하지만 당나라 도시 한복판에서 발해 자객의

암살시도가 일어난것에 빡친 당 현종은

 

발해의 자객을 모두 잡아 처형시킴

 

(이 결과 대문예는 발해 토벌에 겁을먹고 숨어버림

 

 

그리고 무왕은 다시한번 결단을 내리게 됨.

 

 

저번에는 해로를 통한 공격이었고

 

이번에는 육로를 통한  공격을 계획한거임

 

 

 

 

 

733

 

 

 

 

 

 

육로를 통한 공격바로 마도산 전투였음

 

 

이번에는 장수에게 임명하지 않고 무왕이 직접 친정, 친히 군단을 이끌고 당나라로 진격.

 

 

당나라는 마도산 일대를 지키기 위해 계속 군사를 파병했지만

 

 

파병하는 족족 왕이 직접 이끄는 막강 기병 발해군에게 발려버림


(밑빠진 독에 물 붙기)

 

 

(그것도 그냥 이긴게 아니라 한번 전투가 있을때마다 당나라군만 6000명에서 10000명씩 죽어남)


 한국역사국가중 회전에서 중국제국을 이렇게 대파하면서 학살한 경우는 유일, 고구려조차 관구검에게 회전에서 전멸당할뻔하고 수성전으로 변화

 

 

 

 

 

 

 

발해군과의 전투에 임했던 당나라 장수는 당시 전투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결국 마도산 일대의 당나라 군사는 모두 전멸했고

 

무왕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만리장성 부근까지 쾌진격한다.

 

발해군이 만리장성까지 육박한 상황에서

 

남은 당군의 생존자 수는

전면전도 할수 없을정도로 발해군보다 못 미쳤다.

 

결국 당나라 군은 발해군과의 전면전과 토벌시키려던 목적을 포기하고

 (토벌은 둘째치고 지들이 죽게 생겼는데ㅋ)

 

 

 

 

지형지물(마도산 일대는 돌이 많음)을 이용해 버티기에 들어갔다.

 

 

당나라군은 돌을 이용해

400리에 이르는 장벽을 쌓고 마도산에서 꼼짝 않고 버텼다.

 

 

 

 

 

한참동안 마도산에서 당나라군과 발해군은 대치하게 되고


회전에서는 동아시아의 패자였던 당나라군을 그야말로 학살하며 대파하던 발해였지만,

당나라가 돌성벽과 요새로 우주방어하자 고전하게 된다. (응? 뭔가 중국과 한국국가 전략이 바뀐듯한데;)


신생국 발해로서는 수십에 이르는 대군을 장기화 주둔하기 부담스러웠고,


당또한 일개 부족 추장국으로 개무시하던 발해의 막강한 군사력을 당한터라..



 

결국 당 현종은 무왕에게

발해를 개별 국가로 인정하는 것과

내정간섭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게된다.

 

 

그 결과 발해는 당의 영향을 받지 않은 발해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으며

더불어 70년 뒤 발해는 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최 전성기 당시 발해는 해동성국이라 불리게 됨)

 

 

 

그리고 등주 공격을 계기로 741년까지 흑수말갈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지 못했다.

무왕은 당시 최강대국 당나라를 상대로 전쟁도 마다치 않는 정책을 펼침으로써당나라가 발해를 결코 얕잡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마무리: 736년 무왕과 당나라는 서로 화해하게 되고 737년 무왕의 아들인 대흠무가 3대왕에 오르면서 당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게 됨

 

 

 

 ---------------------------------

 

요약

 

발해 건국자 대조영이 죽으면서 당나라가 발해한테 빵셔틀 하라고 협박함

빡친 무왕이 선제공격함(한민족 역사상 최초의 해외원정이자 전쟁시기도 아닌 평화시대에 선제공격이었음)

결국 당나라가 발해 인정하고 발해는 고유의 문화를 키울수 있었음

 


 

 

 

자료참고 : 한국사 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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