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 정권, 왕건의 왕위 찬탈

1. 서론

2. 본론

(1) 정사 속 왕건의 쿠데타

(2) 왕건의 쿠데타 그 후

(3) 전설속의 궁예

3. 결론

4. 참고문헌

 

 

 

1. 서론

신라 말기와 고려 초 사이에 존재했던 50년 남짓한 짧은 시대, 후삼국시대는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역사시대이다. 우리나라의 왕조들은 대부분 500년이 넘어가는 유구한 역사들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후삼국시대만큼은 그렇지 않다. 후삼국시대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일본의 전국시대와 더불어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영웅들이 반세기에 공존했던 유일한 시기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견훤, 궁예, 왕건 말고도 기훤, 양길, 능창 등 수많은 영웅들이 자기의 세력을 과시하며 자유로웠던 시기였단 말이다. 이것이 필자가 후삼국시대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 중 하나이다. 우리는 이 시기 이후로 더 이상 영웅들이 공존하던 때를 떠올릴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시대를 공부하다보면 우리나라의 다른 역사에서 느낄 수 없는 독특함을 맛볼 수 있다.

 

후삼국시대의 영웅들 중에서도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을 뽑으라면 바로 궁예이다. 어렸을 적, 이재범 교수의 슬픈 궁예라는 책을 읽으면서 궁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여태껏 세간에 알려진 폭군의 이미지와는 큰 차이를 보인 책의 관점에 흥미를 느끼며 필자 또한 궁예를 비롯한 후삼국시대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특히 궁예는 후삼국시대를 구성했던 다른 영웅, 특히 신라 무장출신의 견훤이나 송악 출신의 호족 왕건과 달리 지지기반이 전혀 없는 사람이 순수 자신의 능력만으로 후삼국시대 최강의 국가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그야말로 자수성가의 전형이 아닐 수가 없다.

 

그래서 필자는 궁예 정권의 몰락이 아쉽게만 느껴졌다. 그것도 궁예가 가장 신봉하던 왕건에 의하여 찬탈당한 궁예의 유산이 하마터면 왕건에 의하여 무너질 뻔 한 것에 대해서 약간은 황당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실제로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후 십여 년 동안은 견훤의 후백제군에게 휘둘리는 모습만 보였기 때문이다. 역사서에 기록된 왕건의 모습은 성군 그 자체이며, 궁예의 폭정에 못 이겨 충동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 사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본다. 과연 왕건은 정말로 보이는 대로 성인(聖人)이었을까?

 

 

 

 

2. 본론

고려사, 삼국사절요, 전설 등과 관련된 인용구는 있는 그대로 적는 게 낫다고 판단하여 부득이하게 인터넷에서 가져왔습니다.

 

(1) 정사 속 왕건의 쿠데타

필자는 오직 정사에 기록된 내용만으로 왕건의 쿠데타가 정당했는 지, 혹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일치하는 지에 대하여 추측해 보겠다.

 

육월 을묘에 이르러 기장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이 몰래 모의하고 야반에 태조의 집에 가서 다 같이 추대할 뜻을 말하니 태조가 굳게 거절하여 허락하지 않는지라 부인 유씨가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입히고 제장이 부축하여 밖으로 나와서 사람을 시켜 달려가며 소리쳐 [왕공이 이미 의기를 들었다.]라고 하니 이에 분주히 달려오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먼저 궁문에 이르러 복을 치며 떠들석하게 기다리는 자가 또한 만여 명이나 되었다. 궁예가 이를 듣고 놀래어 말하기를 [왕공이 차지하였으니 나의 일은 이미 끝났구나 하며 이에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미복으로 북문을 빠져나가 도망가니 내인이 궁을 청소하고 신왕을 맞이하였다. 궁예는 암곡으로 도망하여 이틀 밤을 머물렀는데 허기가 심하여 보리 이삭을 몰래 끊어 먹다가 뒤이어 부양(강원도 평강)민의 살해한 바가 되었다.

-고려사-

 

위의 기록은 고려사의 내용이다. 고려사절요에서도 이와 같은 기록이 서술되어 있지만 내용에는 차이가 없다. 다만 궁예의 폭정에 대해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 성리학자들이 궁예를 폄하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사료들을 종합하여 볼 때 정사 속 왕건의 쿠데타 과정이자, 궁예의 최후는 다음과 같다.

 

우선 서남해지방의 수달이었던 능창을 생포한 왕건을 크게 칭찬하면서 왕건을 신임하게 된다. 물론 애초에 후고구려 개국에 큰 도움을 주었던 송악 호족의 아들이 예쁘게 안보일 리가 없었겠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그 능력 또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후고구려는 날로 번창하여 한반도 3분의 2나 되는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궁예는 날이 갈수록 더더욱 포악해져 가면서 자신의 아들과 부인을 무참히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궁예는 관심법을 이용하면서 반역을 꾀한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 왔는데 하루는 왕건마저 의심하여 그를 죽이려 하다 최응의 지혜로 겨우 죽임을 모면하게 된다. 이후 왕창명의 거울사건이라는 신화와도 같은 일이 벌어지는데 이는 후대에 위조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생략하고, 그 다음에 일어난 사건이 위 사료에 나타난 왕건의 쿠데타이다.

 

, 왕건의 쿠데타는 궁예의 폭정에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궁예의 의심 병이 왕건에게까지 닿자 그것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낀 왕건이 주위의 바람에 충동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묘사가 되어있다. 그런데 정사 속에 기록된 사료에는 몇 가지 의문이 남아있다.

 

 

첫째, 궁예가 진정으로 왕건을 죽이려 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궁예(弓裔)가 불법(不法)을 많이 자행하니, 그의 아내 강씨(康氏)가 정색(正色)하고 간()하였다. 궁예가 미워하여 말하기를,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姦通)을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강씨가 말하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궁예가 말하기를, "내가 신통력(神通力)으로 보았다." 하고, 쇠공이를 불에 달구어 그 음문(陰門)을 찔러 죽였으며 두 아들도 아울러 죽였다. 이때에 궁예가 반란죄(叛亂罪)로 무함하여 날마다 수백 명을 죽었으며 장상(將相)으로서 살해된 자가 열 명에 여덟, 아홉에 이르렀다.

-삼국사절요-

 

보는 것과 같이 삼국사절요에는 위와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궁예가 관심법을 사용하면서 반역의 죄를 꾀했다고 몰아붙일 때는 상대가 아무리 부인한다고 하더라도 열에 아홉은 죽였던 것이 바로 궁예였다. 그것은 자신의 아내인 강씨부인에게도 해당이 되었던 이야기다. 그러나 위와 똑같은 상황에서 왕건에게만큼은 그러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건이 그렇지 않고 반역을 꾀했다는 점을 인정하자 궁예는 잘못을 뉘우쳤다며 크게 기뻐하고 왕건에게 상을 내리기까지 한다. 상식적으로 왕건과 같은 거물급 장수가 반역을 모의했다고 했을 때 그를 죽여 버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궁예는 그러하지 않았고, 이는 오히려 왕건에게 위기의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궁예는 그만큼 왕건을 신임하여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왕건은 궁예의 생각만큼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둘째, 왕건은 이미 옛날부터 역모를 준비하고 있었다.

처음 태조의 나이 삼십에 꿈을 꾸었는데 구층 금탑이 바다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스스로 그 위에 올라갔었다.

-고려사-

 

위의 기록은 왕건의 입장에서 윤색된 고려사의 한 내용이다. 왕건이 일찍부터 제왕이 될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미화한 내용인 듯한데, 이 짧은 기록은 왕건의 인물됨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왕건이 일찍부터 치밀하게 역모를 준비했다는 구체적인 자료가 되기도 한다. 학계나 일반인들 사이에서나 궁예는 왕건이 아니더라도 어느 누군가에게 반드시 쫓겨나야 할 인물로 각인되어왔다. 그러나 위의 사료는 사실 왕건이 30세 때부터 왕이 되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장기간 역모를 꾀했음을 전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9층 금탑이란 신라 황룡사 9층탑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 천하를 평정한다는 염원의 현실적 표현으로 이는 곧 제왕의 운명을 암시한다. 또 고려사 최응전에서 태조가 최응에게 옛날에 신라가 9층탑을 만들고 드디어 통일의 위업을 이룩했다. 이제 개경에 7층탑을 건조하고 서경에 9층탑을 건축하여 현묘한 공적을 빌려 여려 악당들을 없애고 삼한을 통일하려 하니...”라고 한 것을 보면 왕건은 9층 금탑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곧 왕건이 바다 한가운데 솟은 9층 금탑에 오르는 꿈을 꾸었다는 것은, 왕이 되어 천하를 평정하겠단의지를 비유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금탑이 바다 가운데서 올라왔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대를 받았다는 의미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이 짧은 기록은 왕건이 아랫사람들에게 추대되어 왕위에 오른다는 의미를 내포하였지만, 그 진실은 왕건의 역모 계획을 알려준다고 할 수 있다.

 

왕건이 30세때 금탑의 꿈을 꾼 시기는 906년으로 왕건가가 궁예에 투항한 지 10년째가 되는 해이다. 기록상으로 이 시기에는 왕건과 궁예 사이에는 아무런 마찰이 없던 해로서, 오히려 왕건과 궁예가 콤비를 이루어 후삼국시대 최대영토를 차지한 국가를 이룩한 시기였다. 그런데 왜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왕이 될 생각을 했던 것일까? 이는 필자의 개인적인 추측이다. 왕건의 탄생설화를 보면 왕건이 태어난 시기는 이미 나말의 혼란한 사회로 곳곳에서 호족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때였다. 그의 아버지 왕융은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는데, 당시 유명했던 도선에게 명당자리를 얻어왔는가 하면, 유력한 호족이었던 궁예의 밑에 자진하여 들어가기까지 한다. 이러한 가정 분위기 속에서 이미 오랜 옛날부터 왕건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언젠가는 자신도 왕이 되기를 꿈꾸지 않았을까. 그런 와중에 궁예가 포악해져 갔던 것은 왕건에게 호재였을지도 모른다.

 

 

 

(2) 왕건의 쿠데타 그 후

이번에는 과연 왕건의 쿠데타가 정당했는지에 대하여 조사해보았다. 만약 민중이나 내부 세력의 지지를 받았으면 궁예의 평가가 어떻든 왕건의 쿠데타는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왕건은 즉위 이튿날인 정사일에 조서를 반포하여 궁예의 폭정을 규탄하면서 이것을 교훈 삼아 화합의 정치로 밝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뜻을 천명했다. 즉위한 지 사흘 째 되는 날에는 한찬 총일에게 명하여 청주 지역의 민심을 얻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의 죄를 모두 풀라 명하였고, 기반이 취약했던 왕건은 궁예 정권의 관료들을 일단은 껴안고 있어야 했다.

 

궁예의 말년의 행보를 보면 확실히 궁예에게 등을 돌린 사람은 많았다. 그래서 왕건의 쿠데타에 동조하고 같이 일어선 사람들 또한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또한 분명 존재했다.

 

구월 을유에 순군이 임춘길 등이 모반하다가 복주하였다. 경인에 순군랑중 현율로 병부랑중을 삼았다. 계사에 전 시중 구진으로 나주도대행대시중을 삼았는데 구진이 전 임금 때 오랫동안 노고하였으므로 써 가기를 즐거하지 않으니 왕이 불쾌하게...

-고려사-

 

위의 기록처럼 왕건의 즉위년에 곧바로 모반이 일어났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왕건은 궁예를 축출하고 제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궁예 세력은 온존하게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 궁예 세력도 모르게 치밀하게 준비되었던 모반이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마군장군 환선길이었다. 환선길은 왕건을 추대하여 권력을 잡게 한 공신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왕건은 그를 믿고는 항시 날래고 용맹스러운 군사들을 거느리고 왕궁을 숙위하게 하였다. 환선길은 여러날을 뜬 눈으로 지새우며 왕궁을 숙위하다가 모처럼 집에 들렀다. 그때 환선길의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퉁명스러운 투로 따지듯 말했다. “당신의 대주와 능력은 남보다 훨씬 나으므로 사졸들이 복종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큰 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권은 다른 사람에게 있으니 부끄럽지 않습니까!” 여기서 남이나 다른사람은 모두 왕건을 가리키고 있는 말인데 순간 환선길은 내심으로 자신과 왕건을 저울질해본다. 환선길은 내심으로 아내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왕건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모반을 꾀하지만 용기가 부족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처럼 왕건은 궁예 세력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세력에게 조차도 그 정당성을 의심을 받는 처지가 된다. 그래서 사실상 왕건의 권력은 중앙만 움켜쥐었을 뿐이지 변방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궁예가 말년에 장악했던 웅주지방의 이흔암은 쿠데타가 일어나자마자 후백제에 투항하였고, 그 외 많은 지역의 호족들이 왕건에게 벗어나 후백제로 투항하게 된다.

 

이를 볼 때 왕건의 쿠데타는 완벽히 준비되지 못한 반쪽자리 쿠데타였다고 보인다. 실제로 궁예시절 그 강력했던 군사력이 밀집되지 못하여 그 후 십 수 년 동안은 후백제 견훤에게 압도당해 심지어는 죽기직전까지 갔으니 말이다.

 

 

 

(3) 전설속의 궁예

궁예는 과연 백성들에게 버림받은 왕이었을까? 정사속의 기록에 따르면 왕건에게 쫓겨난 궁예가 산에서 숨어 살다가 배고픔을 못이기고 마을로 내려왔는데, 마을 백성들이 괴물인줄 알고, 혹은 궁예임을 알아보고 돌팔매질을 하면서 죽였다고 기록되어있다.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비운의 최후가 아닐 수가 없다. 그러나 전설 속의 궁예는 다르다. 과연 왕건의 쿠데타는 정당했던 것일까? 민중의 입장을 반영하지 않고 오직 중앙 권력 투쟁에 의한 결과가 왕건의 쿠데타가 아니었을까?

 

전설 속의 궁예의 최후는 절대 비굴하지 않았다. 왕건의 군사 역모가 있던 날, 왕은 자신의 나라 도읍지를 마지막으로 순방한 것 같다. 그날 밤 왕은 남문을 통해 도성을 빠져 나왔다. 숨을 가다듬고 재기를 위해 찾아갔던 첫 피신처는 도성 서남쪽의 중어성. 평원 한가운데 세운 도성의 전략적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세웠던 12개 산성 가운데 한 요새다. 현재 위치는 철원읍 대마리. 왕은 이 요새를 버리고 더 서쪽으로 나가 현 연천군 신서면 승양리의 역시 외곽성인 승양산성으로 들어갔다. 또다른 외곽성 보개산성(현 포천군 관인면)은 승양산성의 동쪽에 있었다. 그러나 왕은 어느새 더 동쪽의 명성산성(현 펄원군 갈말읍)으로 들어가 최후 보루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산성에서 군대를 해산한다. 그리고 통곡하는 군사들을 뒤로하고 홀로 북쪽으로 떠난다. '명성이란 말뜻을 굳이 풀이한다면 '큰 울음소리'. 훗날 사람들은 그때 군사들이 슬피 울었다고 해 그 산성을 '울음산성', 산성이 있는 그 산을 '울음산'이라고 불렀다. 명성산성에서 해산했지만 충성스러운 많은 군인들이 왕이 걸어간 길을 뒤따라 군탄리까지 왔다. 왕은 "나를 따르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궁예가 강변에서 한탄했다는 한탄강을 건너가 버렸다. 훗날 사람들은 그곳이 바로 그때 '군사들이 슬피 울며 탄식한 곳'이라며 '군탄'은 거기서 유래했다고 해석했다. 갑천은 평강 하갑리 동북쪽의 작은 내. 왕은 자신의 정예병들을 양성하던 검불량 군사훈련장을 지나 삼방협의 깊은 골짜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결했다.

-울음산 설화-

 

울음산 설화에 따르면 정사 속에 기록된 궁예와의 모습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정사 속 궁예는 왕건의 쿠데타에 저항하지 못하고 바로 포기하여 도망간 왕으로 비춰지나, 이 울음산 설화에서는 끝까지 왕건에게 저항하다가 끝내 하늘의 뜻이 자신에게 없음을 알고 해산했다고 전한다. 그 말을 전해들은 군사들은 모두 슬피 울어 그때부터 명성산의 다름 이름이 울음산이 되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궁예를 따른 병사들이 존재했던 점, 또 이 전설이 끝까지 구전되어 오늘날까지 내려온 점을 미루어 볼 때 궁예가 왕권을 탈취당할 만큼 폭군이었는가에 대하여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점이 있는데 왕권을 탈취 당한 이후 궁예의 행로가 전설 속에서는 의외로 명확하다는 점이다. 궁예왕의 행로는 보개산성-명성산성-운악산성-평강지역으로 이어진다. 궁예왕 일행과 왕건군과의 항쟁은 오랜 세월을 요한다. 운악산성에서 궁예왕 일행은 반 년 이상 왕건군과 항쟁을 했다고 한다. 여기에 평강에서 채록된 지명전설까지 합하면 궁예의 항쟁기간은 훨씬 길어진다. 평강에 있는 문고장, 전중평, 사청산들의 흔적은 평강시절의 궁예 왕국이 적어도 십년 남짓 존속되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고암산을 진산으로 정했기로 300년 도읍을 정하고(905) 왕위에서 물러나기까지 13, 나머지 17년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 거신가. 전설 속의 궁예는 그의 백성, 군대들과 언제나 함께 있다. 울음산에서도 군신이 함께 울고, 식물도 바위도 함께 울어 그 울음소리가 지금까지 계속된다. 그 외 많은 지명전설들이 궁예왕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며 함께 그 고통을 느끼고 있다. 만일 궁예가 문헌자료에서처럼 끔찍한 살인마이고 악인의 전형이었다면 왕의 행동에 대해 그들을 기억하기 위한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을 볼 때, 민심을 동반하고 있던 궁예왕의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왕건의 쿠데타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2. 결론

현재 남아있는 고려에 관한 사료들은 모두 왕건과 그 후손들의 시각에 의하여 각색된 내용들뿐이다. 필자는 이러한 내용들을 정리해보면서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과연 왕건의 쿠데타에는 정당성이 있었는가?

 

정사 속에서 각색된 왕건의 이야기에 조차도 숨기지 못했던 것은 왕건은 이미 오래전부터 역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점이고, 또 궁예는 상상 이상으로 왕건을 신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 왕건의 쿠데타가 성공한 이후, 곧바로 전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난 점은 궁예 정권의 몰락이 비정상적으로 일어났음을 추측해볼 수 있고, 이러한 점은 전설 속에서는 궁예를 옹호하고 있었다는 것에서 판단할 수 있다.

 

쿠데타 과정에서 왕건은 궁예 세력을 완전히 포섭하지 못하여, 한명이라도 더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항상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또 백성들또한 궁예를 그리워하고 있었기에 세금은 1/10으로 낮추는 등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럼에도 민심은 하나로 뭉쳐지지 못해 후백제에게 압도당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점에서 미루어볼 때, 왕건의 쿠데타는 지방 세력 몰래 중앙에서 급진적으로 일어난 역모라는 것이다. 궁예 세력의 대부분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 굴복시켰던 지방에 존재했었으나, 왕건 세력은 송악지방과 중앙 왕실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마자 지방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몇몇 호족들은 후백제에게 투항을 한점을 볼 때, 이는 분명 중앙 호족, 관리의 일방적인 왕위 찬탈로 보인다.

 

필자는 궁예에 대한 재조명과 더 나아가서 왕건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왕건은 혼인정책으로 호족들을 통합하는 등 당장에는 좋은 결과를 낳았지만, 사후 일어날 혼란에 대해서 무책임하게 대응했다. 하마터면 궁예를 몰아내고 이루어낸 왕조를 자신의 씨앗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덕분에 한 세기도 못가고 멸망시킬 뻔했다는 점을 생각해봐야한다.

 

 

 

4. 참고자료

고려사

고려사절요

삼국사기

삼국사절요

 

이재범 슬픈 궁예, 푸른역사

철원군, 태봉국철원정도기념사업회 태봉국 역사문화 유적

이도학 궁예, 진훤, 왕건과 열정의 시대, 김영시




by 초령목 2014. 11. 8.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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