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박물관의 전시 


◎ 역사박물관이란? 

- 역사박물관이란 단지 일반적으로 역사적 자료라고 말하는 물질만을 취급하는 것 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간의 역사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 고고박물관, 역사박물관, 한 인물의 일대기를 전시한 박물관, 조세박물관, 철도박 물관 등 한 분야의 역사를 전시하는 박물관 등 역사적 변천을 주제로 한 박물관 등이 역사박물관에 속한다. 

- 역사박물관은 박물관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 역사박물관의 전시목적 

- 역사박물관은 실체가 없는 역사의 환영을 쫓는 곳이 아니라 실물자료를 중심으로 객관적이고 명확한 역사의 실체를 붙잡아 그 역사에 관한 해석이나 평가에 의한 역사적 의의를 제시하는 것, 즉 역사기술을 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역사박물관의 전시 

역사박물관의 전시는 어떤 사관에 기초를 두고, 어떤 특정한 사료에 의해서 어떤 특정한 역사적 의의를 표명하는 하나의 역사기술이다. 그러므로 그 목적이나 관 점에 따라서 구성되는 여러 조건이 필요하게 되고, 그에 수반해서 각종 방법이나 수단 등이 강구되게 된다. 이 중 靜的전시와 動的전시가 대표적이다. 


◎ 靜的전시 

- 정적 전시는 역사 현상의 복원을 위하여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자료들을 점과 선, 면으로서 파악하여 전시하는 것을 말한다. - 따라서, 특정한 역사 해석이나 정설이 된 기존의 개념을 전제로 사료를 병렬하는 것으로 끝내거나, 어떤 특정한 역사현상을 회화처럼 기록하는 것에 그치는 경향 이 있다. 

- 또 사료의 물질로서의 측면을 중시한 나머지, 물질 중심의 전시에 그쳐 역사의 주체인 인간을 간과하기 쉽다. 

- 점으로서의 파악은 역사적 사실을 점으로서 파악한 것으로 여기에는 개별전시와 상징전시가 있다. 

- 개별전시는 개개의 사료가 갖는 존재 의의나 가치를 특별한 역사적 사실로 형상 화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명한 사람의 문서를 전시하는 것으로 당시 그 사람 과 집안의 흥망을 얘기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는 그 주인공의 이름과 그 업적 이 유명하므로 물질로서의 그 문서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여서, 역사 전 시로서는 주객이 전도되어 있다. 

- 상징전시는 어떤 역사적 사실을 말할 때 다수의 자료를 통해 그 역사과정이나 의 의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 중의 대표적 자료를 단독으로 전시하여 그 배경에 있는 역사적 사실의 전체를 상징적으로 연상시키는 것이다. 전시자료나 전시가 단독적인 점에서 개별전시와 비슷하다. 

- 선으로서의 파악은 역사적 사실을 점으로서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점과 점을 연 결한 선으로 파악한 것으로 분류전시와 계통전시가 있다. 

- 분류전시는 전시 자료의 성격이나 의의를 파악하기 위해 비슷한 전시품의 형태, 재질 따위의 요소를 파악하고 이를 분석하고 분류하여 전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 면 형식 분류된 토기를 모아 이를 연대기적으로 보여주는 전시가 해당된다. 하지 만 분류만 되고 그 자체가 의의를 가지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 계통전시는 사료를 분류 및 분석한 분류전시를 총괄적, 조직적으로 정리한 것으 로 분류전시의 발전적 형태이다. 

- 면으로서의 파악은 점 및 선으로 파악된 전시의 집합이나 복합으로 분포전시와 양상전시를 들 수 있다. - 분포전시는 역사 현상의 지역성이나 분포권 또는 역사 현상의 발생과 발전의 중 심지, 파급 범위 등을 나타내기 위한 전시로 유적분포도 또는 성곽이나 영토의 배치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 양상전시는 역사현상이나 사료를 하나의 통합으로 보고 그들 전체의 유기적인 관 련성에 의해 당시의 상황을 복원하려는 전시방법이다. 예를 들면 민속 전시 등에 서 농가의 생활양식이나 생산형태를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파노라마 전시가 양상 전시라 할 수 있다. 


◎ 動的전시 

- 동적 전시는 역사 현상을 생성-발전-소멸이라는 변화의 과정으로 보고 이를 전 시로 구현한 것이다. 즉 역사 양상의 단순한 복원만이 아니라 그 자료를 남긴 당 시 인간집단의 의지나 지향성까지도 파악하고자 하는 전시이다. - 이러한 동적전시에는 행동으로서 파악한 전시, 역사해석으로 파악한 전시, 역사 의의의 제시로서 파악한 전시 등이 있다. 

- 행동으로서의 파악은 역사적 현상과 사실 등을 인간의 행동으로서 파악하는 것으 로 변천전시와 영역전시가 있다. 

- 변천전시는 전시 자료의 변화과정과 그것을 이용한 사람들의 생활이나 문화활동 의 변화를 보여주는 전시이다. 따라서 전시 자료의 변화과정을 보여주는 계통전 시의 발전적 형태라 할 수 있다. 

- 영역전시는 분포전시처럼 단순히 개별적인 역사 현상이나 자료를 어느 순간적 시 점에서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집단의 행동 궤적이나 그 문화활동의 범위 등 을 동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또한 변천전시가 시간적인 움직임을 나타내는데 비해 영역전시는 공간적인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 역사해석으로서의 파악은 역사 전시를 역사해석의 관점으로 전시한 것으로 역사 적 사실이나 자료의 변화나 추이를 표현하는 경우 그 변화를 단지 현상적으로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가 어떠한 이유에서 나온 것인지를 밝히는 인과전시 와 전시자료를 남긴 인간집단의 지향성을 파악하여 이를 전시에 반영하려는 지향 전시가 있다.

 - 하지만 원인과 결과 및 해당 인간집단의 지향성을 보여주는 관련 전시자료가 거 의 없기 때문에 이 류의 전시는 많은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 역사의의의 제시로서의 파악은 역사 전시의 본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어떠한 역사전시도 역사적 의의의 제시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여기에는 문제제기적 전시, 가설제시적 전시, 공동연구적 전시가 있다.

 - 문제제기적 전시는 기존 인식에 대한 재검토나 수정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지적하 여 새로운 문제점이나 의의가 찾고자 하는 전시이다. 물론 그 의의의 해명은 관 람자에게 맡겨야 한다. 

- 가설제기적 전시는 역사의의를 찾기 위해 모든 학설은 정설이 아니라 항상 가설 에 불가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가설제기적 전시는 전시 담당자 스스 로가 학계 발표 등 축적한 연구 성과를 토대로 가설을 제시하고 이를 전시로 구현하는 것을 말한다. 전시품의 연구를 통해 이루어지는 박물관의 학술적 특별전 등이 이 전시 유형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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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령목 2016. 12. 15. 22:56

1. 전시기획서의 작성 

◎ 전시기획서의 중요성 

- 전시기획서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전시의 전제조건이라 할 만큼 매우 중요하다. 하 지만 이러한 전시기획서의 중요성은 폄하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수준 낮고 피상 적인 전시연출로 이어지게 되고, 원만하지 못한 준비 과정과 불만족스러운 결과를 낳게 된다. 전시의 성공여부는 전시 기획서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성공적인 전시가 되기 위해 전시기획서는 해답을 필요로 하는 합의된(때로는 일 방적으로 부관된) 문제들을 담는 도구여야 한다. 전시기획서는 전시가 밟게 되는 전 과정에 걸쳐 참고가 되므로 문서의 형태를 갖추어야 한다. 


◎ 전시기획서의 역할 

- 전시기획서는 디자이너와 큐레이터 모두에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전시기획서는 디자이너에게는 전시의 디자인에서 해결할 문제들을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기능을 하며, 전시를 제안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명확히 하고 전시의 성격에 대한 분명한 결정을 돕는 역할을 한다. 


◎ 전시기획서의 작성 

- 일반적으로 전시기획서는 전시 주제에 대한 전문가 즉 큐레이터나 소장품 관리자 등이 작성하게 된다. 하지만 전시 기획이 여러 사람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한 분야에 대한 여러 명의 전문가가 참여하기도 하고, 교육담당자나 디 자이너, 마케팅 담당자 등 각기 다른 분야의 전문가가 참여하여 기획하기도 한 다. 요즘은 효율적이고 적극적인 관람객 유치를 위해 전시 기획에 마케팅의 역할 이 강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 또한 전시기획서 작성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 박물관의 정책 특히 전시 정책을 숙지하고 있어야 하며 이를 근거로 전시 기획에 임하여야 한다. 


◎ 전시기획서의 작성 단계 

- 첫째, 특정 주제의 전시를 개최할 필요성이 제기되거나 전시 아이디어가 비공식 적으로 논의된다. 

- 둘째, 논의된 전시 주제 또는 아이디어는 전시 제안서 또는 간략한 보고서의 형 태로 문서화된다. 이 문서에는 전시의 명칭(안), 목적, 주제와 내용, 주관객층, 시기, 장소, 대략적인 예산 등을 포함시킨다. 

- 셋째, 제안서를 박물관 내외의 관련자들에게 널리 알려 의견을 구한다. 

- 넷째, 박물관의 전시위원회(있을 경우), 관련 부서장, 관장 등이 제안서를 검토한다.

- 다섯째, 제안서가 수용되면, 타당성 조사를 실시한다. 

- 여섯째, 타당서 조사 완료 후 기획서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전시 기획 단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2차시의 전시정책과 전시기획에 있음) 



2. 전시기획서의 내용 

전시기획서는 목차가 일목요연하고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어야 하며, 누구나 편리하게 읽을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구성된 설명서의 형식을 띠어야 한다. 본문 뒤에는 부록의 형태로 전시에 사용되는 텍스트나 전시물 등에 대한 자세한 자료를 첨부할 수 있다. 기획서에는 다음과 같은 항목들이 포함된다. 


◎ 전시의 제목과 성격 

- 전시의 제목이 전시기획서의 첫 페이지를 장식해야 한다. 만약 제목이 확정되지 않았다면 가제목으로 대신한다. - 전시의 제목은 전시의 성패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시는 제목만 들어도 그 전 시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루브르박물관’전, ‘페르시아문명’전 등 제목 자체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 - 전시의 제목은 관념적인 것을 피하고 누구나 알 수 있는 일반적인 용어를 선택하 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관삼을 끌기 위해서는 진부한 용어는 피해야 한다. 

- 전시의 성격을 설명할 때에는 그 전시가 기능면에서 어떤 종류에 해당하는지를 언급해야 한다. 특히 전시가 심미적인지 환기적인지 아니면 교훈적인지 등의 전 시의 기능적 접근법이 무엇인지를 명시해야 한다.

 - 전시의 성격이 전반적으로 어떠한 것인가를 언급하기 위해 전시의 주된 성격, 전 시 환경 조성에 대한 생각, 필요한 전시 시설 등에 대한 정보도 언급할 수 있다. 


◎ 전시의 목적 

- 전시의 목적은 이해하기 쉽도록 구체적인 취지와 목표에 대해 세부적인 항목으로 나열하여 기술하여야 한다. 전시의 목적으로 교육, 홍보 등에 대한 내용을 언급 할 수 있으며 때로는 정치적 차원의 내용을 언급할 수도 있다. 독도에 대한 한일간의 영유분쟁이 심할 때 독도에 대한 전시를 하는 것은 정치적 차원의 전시라 할 수 있다.

 - 전시의 목적 설정 후에는 그 목적에 알맞은 목표 달성치를 정해야 한다. 목표를 관람객 유치에 둘 것인지 아니면 이익창출에 둘 것인지 등 목표 달성치를 정해야 한다.

 - 국내외 관람객들에게 문화향수 기회 제공, 우리문화의 우수성 홍보 등에 그 목적 이 있는 국공립박물관의 경우 많은 관람객 유치가 목적이 될 수 있으며, 이익창 출을 목적으로 하는 사립박물관의 경우 목표 달성치를 이익과 관련지어 정해야 한다. 즉 관람객 유치외에도 문화상품 판매 등이 목표가 될 수 있다. 

- 전체적인 전시의 목적 외에도 전시의 각 부문마다 개별적인 목표를 정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 전시제안의 맥락 

- 전시를 제안하는 이유를 박물관의 내부적인 맥락과 박물관 외부적인 맥락을 나누어 설명하여야 한다. 즉 전시의 역할을 기관 내외부적인 차원에서 제시하여야 한다. 

- 내부적인 맥락으로는 박물관의 전반적인 정책 특히 전시정책에 어떻게 부합하는 지 설명해야 한다. 따라서 해당 전시와 박물관의 전체적인 전시 일정과 출판물 등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설명하여야 한다. 

- 외부적인 맥락으로는 박물관이 몸담고 있는 지역사회 또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박 물관 역할을 고려하여 전시 제안에 따른 이유를 설명하여야 한다. 이는 박물관의 사회적 역할과도 관련되는 것으로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 테마와 컨셉 - 전시의 전체적인 테마와 컨셉, 소주제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테마와 소주제들 간의 관계도 명시하여야 한다. 다이어그램 형식의 도표로 작성해도 무방하다. 


◎ 전시의 내용과 줄거리 

- 전시의 테마와 컨셉에서 전시의 소주제를 차례로 설명한다. 소주제의 개념과 주 요 목표, 대략적인 구성, 전시품 목록 등을 제시한다. 여기에는 각 주제에 해당 하는 패널이나 라벨의 텍스트의 초안도 함께 수록한다. 텍스트의 초안은 업무가 진행되면서 보충될 수 있다.

- 또한 기획서에 포함되지 않은 개별 전시품의 캡션이나 주요 전시품의 자세한 설 명이 보충될 수도 있다. 


◎ 주관람층에 대한 정보 

- 기획서에는 다음과 같은 주관람층에 대한 정보를 담아야 한다. - 관람객의 연령대 : 연령대에 따라 신체 및 심리적 특성이 다른데, 이에 따라 전시 방법 또는 디자인이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어린이 또는 노인의 관람객을 위주로 한 전 시는 전시방법, 내용, 시설면에서 큰 차별성이 있어야 한다. 또한 연령대에 따라 인 체공학적인 배려를 하여야 한다. 관람객의 신체에 맞게 눈높이 및 각종 시설의 크기 를 조절하여야 한다. 

- 예상 관람 인원 : 전시장의 수용 가능 인원 및 관람객이 평균 전시장에 머무는 시간 에 대한 예측을 통해 전시장의 공간 구성, 동선, 통로의 넓이 등을 계획해야 한다. 또한 단체 관람을 권장할 만한 전시일 경우 이에 부합되는 전시공간을 조성해야 한 다. 

- 관람 동기 : 전시 주제에 대한 관심 여부에 따라 관람 동기가 강한 관람객과 약한 관 람객이 있는데 이 둘을 상대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으므로 이를 잘 구별해야 한다. 

- 관람객의 지식수준 : 전시 내용에 대해 많은 사전 지식과 정보를 갖춘 관람객과 그렇 지 못한 관람객을 대상으로 삼는 전시 방법은 매우 다르다. 

- 성별 : 관람객의 성별을 고려하여 전시의 내용이나 접근법을 조정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 신체적 장애 : 휠체어 통로와 같은 지체 장애인을 위한 기본적인 편의 시설도 고려되 어야 한다. 또한 장애의 종류에 따라 접근 방식이 달라진다.(예 높이가 다른 바닥면 이 있는 전시장의 경우 이런 요소를 고려하여야 한다.)

 - 관람객의 사회적 배경과 언어 : 전시의 주관객층에게 익숙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또한 문화적인 관습도 고려되어야 한다. - 이 외에도 지능이나 독서 수준 등 테스트하기 전에는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도 전시 성격에 따라서는 가끔 전시기획서에 명기되어야 한다. 


◎ 디자인 

- 박물관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개발한 독자적인 시각 디자인적 스타일을 갖고 있다. 스타일은 작게는 인쇄물 또는 진열장에 사용되는 텍스트의 디자인에 해당하고 크게는 모든 전시공간 및 박물관에 총체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시각적 이미지에 해당된다.

- 이는 박물관 로고의 통일이나 패널, 라벨 등을 통일하는 CI(Corporate Identity 박물 관 이미지 통일) 또는 VI(visual identity, 시각 이미지 통일)와 상통한다.

- 상설전의 경우 이러한 CI나 VI를 포함시킬 수 있지만 기획전의 경우 각 기획전의 성 격에 맞는 이미지를 필요로 한다. 


◎ 전시기간과 순회전 여부 

- 전시기간을 명시해야 한다. 이는 전시 재료나 구조의 선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 순회전 여부를 명시해야 한다. 다른 개최지에서 순회전으로 개최될 경우 이에 따른 전시 디자인이 필요하며 전시재료 또한 참고가 되어야 한다. 

- 전시물의 재사용 여부 또한 명시해야 한다. 전시물을 일정 기간 보관하였다 재사용하는 경우에는 이를 전시 디자인 구성이나 전시 재료 선택 시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전시장소와 도면 

- 전시장소와 전시장소에 대한 전시도면이 필요하다. 

- 전시장소 도면에는 출입구의 위치, 대형 작품을 위한 통로, 전력 공급량이나 시설 등 에 대한 언급이 필요하다. 


◎ 예산

 - 전시의 성격과 주제에 알맞은 전시 연출에 소요되는 예산을 명시하여야 한다. 

- 소요예산은 시장조사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산출하여야 한다. 또한 예산 낭비를 줄일 수 있도록 전시장 공사, 전시홍보물 제작, 전시그래픽 제작, 도록 발간, 전시품 운송 등 항목을 세분화하여 작성하여야 한다. 


◎ 보안

- 특별히 주의를 요하는 전시물에 대한 개별적인 언급과는 별도로 기본적인 보안 및 안 전 조치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CCTV에 의한 보안 또는 안전요원의 전시장 상주 등 보안 방법의 차이에 따라 전시공간 구성이 달라질 수 있다. 


◎ 보존 

- 전시물 전반에 대한 보존 방법이 수록되어야 한다. 이와 함께 특수한 전시물에 대한 개별적인 주의사항도 필요하다. 


◎ 진행 일정

 - 전시 진행 일정이 명시되어야 한다. 전시 진행 단계에 따른 상세한 진행 일정이 있어 야 한다. - 진행 일정은 전시 진행 과정을 체크할 수 있어 체계적인 전시 진행을 가능하게 한다. 


◎ 전시평가 

- 전시를 평가하는 방법과 기준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앞서 전시 목적에서 언급 한 것처럼 전시의 기본적 취지와 세부 목표가 평가 기준이 될 수 있다. 


◎ 교육프로그램 운영 

- 전시와 관련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 계획이 포함되어야 한다. 

- 교육프로그램은 전시를 제3자의 입장에서 관람하는 차원이 아니라 당사자가 되어 직 접 전시를 체득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특히 전시품을 직접 만들어 보거나 활동지를 통해 전시를 관람하는 체험프로그램은 전시의 주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 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이다.

- 교육 담당 부서가 있을 경우 세부적인 일정과 방법은 교육 담당부서와 협의하여 결정 한다. 


◎ 전시부대 행사

- 개막식과 강연회 등 전시 부대행사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 개막식은 장소와 일시, 참석자 등이 포함되어야 하며 필요할 경우 공연 등 이벤트도 추가될 수 있다. 이벤트의 경우 전시 주제와 상응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 강연회 역시 장소와 일시 등이 포함되어야 하며 이는 보다 깊이 있는 전시 해설을 위 해 개최되며 관련 외부 전문가를 초청하여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전시 기획자가 강연을 하기도 한다. 


◎ 도록 발간 

- 전시도록의 수록 내용과 발간 부수 등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 여기에는 어떤 종이로 만들 것인지, 어떤 형태로 만들 것인지, 얼마만한 크기로 만들 것인지, 도록 구성과 편집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도록의 컨셉은 전시의 성격과 어느 정도 일치되어야 한다.(예를 들면 한지로 만들어진 고문서 관련 전시일 경우 도록에 사용되는 종이를 한지로 제작한다든지, 전시품이 대부분 가로로 긴 사경(寫經) 전시일 경우 전시품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도록 도록의 형태를 가 로로 길게 제작한다든가 하는 경우이다.) 

- 최종적인 편집 디자인은 추후 도록 발간 과정을 거치면서 디자인팀과 협의하여 결정한다. 


◎ 문화상품 개발 - 어떤 문화상품을 개발할 것인가를 명시해야 한다. 문화상품은 전시품을 복제하거나, 형상을 캐릭터화하거나 이미지화하는 등 관람객이 전시 관람을 마친 후에도 전시에 대한 여운을 가질 수 있도록 개발되어야 한다. - 특히 문화상품의 고객층 중 외국인의 수도 상당하기 때문에 개발에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문화의 우수성 홍보 등 우리의 국제적인 경쟁력 강화 또는 이미 지 개선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 홍보 

- 전시의 성패는 홍보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획서에 홍보 방법과 계획이 포 함되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전시라도 홍보에 실패하면 많은 관람객을 유치하기 힘들다. - 홍보 부서가 있을 경우 세부적인 일정과 방법은 홍보부서와 협의하여 결정한다.



 * 상기의 항목들이 전시기획서에 모두 포함되는 것은 아니며 각 전시의 성격에 맞게 가감될 수 있다. 또한 박물관의 성격과 형평에 맞게 조절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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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령목 2016. 12. 10. 22:57

나. 박물관에서의 시장 세분화

 박물관의 시장 환경은 거시적 관점에서 박물관이 속한 전반적인 정치·사회· 경제·문화 환경 을 의미하며, 미시적 관점에서는 공급자로서 제공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박물관과 이를 상용하는 소비자(관람객)로 구성된 ‘시장 환경’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시장 세분화를 하는 적합한 한 가지 방법은 없다. 하나의 시장은 박물관 시장 기회 관점에서 다양한 변수를 통해 세분화 될 수 있다. 박물관에서 시장을 세분화 할 수 있는 방법은 성별에 따른 세분화, 미학적 관심 또는 교육 적 관심에 따른 세분화, 편익에 따른 세분화, 관람 기대 수준에 따른 세분화, 충성도에 따른 세분화, 준비도에 따른 세분화, 관람 빈도에 따른 세분화, 전시 참여 방식에 따른 세분화 등 이 있다.

 • 성별에 따른 세분화 
가장 대표적인 시장 세분화는 성별에 따른 시장 세분화이다. 박물관의 경우 여성 관람객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편이다. 하지만, 박물관 관람의 경우 집단 소비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남성 관람객도 실제 마케팅 대상, 즉 표적 시장에 포함되어야 한다. 
• 미학적 관심 또는 교육적 관심에 따른 세분화 
시장 세분화 표적 시장의 선정 제품 포지셔닝 마케팅 믹스 3 박물관의 시장 세분화는 일반 상품 마케팅 접근과 달리 미적인 태도를 기준으로 한 접근이 매우 높은 가치를 갖는다. 어떤 전시이든 그 전시에 대해 미학적으로 상당한 지식과 관심을 가진 관람객과 그렇지 못한 관람객이 있다. 미학적 지식과 관심이 높은 관람객에게 필요한 것은 전시와 관련된 상세 정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관람객에게는 작가나 작품에 대한 상세 설명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 편익에 따른 세분화 
어떤 관람객들은 전시에 출품한 작가나 전시물의 명성 등 전체적인 전시의 질적 수준에 비 중을 둔다. 시장 세분화의 기준으로 이러한 질적 수준에 비중을 두는 소비자들은 주로 입장 권의 가격을 고려하는, 즉 경제성을 따지는 관람객과 구분될 수 있다. 가격을 중요시하는 관람객이라면 입장권 가격이 얼마이고 할인 혜택이 제공되는지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또 다른 경우로 관람 외적인 서비스나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에 관심을 갖는 관람객도 있다. 이들은 모처럼의 가족 외출이나 여가 활동의 일환으로 관람을 하기 때문에 주차 시설이나 박물관의 접근성, 주변의 편의 시설 등에 관심을 갖는다. 또한 가족 동반 관람의 경우, 부모 들은 전시가 자녀들에게 어떠한 교육적 혜택을 제공할 것인지도 함께 고려하게 될 것이다. 
• 관람 기대 수준에 따른 세분화 
관람 기대 수준에 따른 세분화는 편익에 따른 세분화와 유사하지만, 동기 측면에서 본다면 본질적으로 다르다. Ø 관람객을 관람기대수준에 따라, Ø 주변에 박물관이 있어서 특별한 동기나 목적 없이 박물관을 방문하는 관람객, Ø 관광객처럼 여행 일정에 박물관 관람이 포함되어 자발적이지는 않지만 타인의 의도 나 계획에 따라 방문하는 관람객, Ø 자발적으로 분명한 관람 의도를 갖고 방문하는 관람객, Ø 관람경험이 갖고 반복해서 관람하는 관람객 으로 분류했다. 
• 충성도에 따른 세분화 
충성도에 따른 세분화는 특정 박물관이나 작가나 작품 등에 대한 소비자의 특정 선호도를 반영한 것이다. 애버크롬비와 롱헐스트(Abercrombie & Longhurst, 1998)의 경우에는 충성도 에 따라 관람객을 문화소비자(culture consumer), 문화애호가(culture fan), 문화열광자 (culture cultist), 문화광신자(culture enthusiast), 소극적인 문화생산자(culture petty producer)의 집단으로 구분했다. 문화소비자는 일요일 오후에 한 박물관을 방문하고, 문화애호가는 모네 전시를 관람한다. 문화열광자는 회원에 가입해서 모네에 관한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한다. 문화 광신자는 인상 4 파에 대해 연구하며 모네 작품을 전시하는 타 박물관을 관람하고, 모네의 작품을 수집하는 열성을 보인다. 따라서 어떤 장르나, 작가, 경향에 집착하며 집중적인 구매력을 보이는 관람객의 세분 시장 이 존재한다. 특정한 내용의 전시에 대해 열정을 보이는 관람객 집단을 대상으로 마케팅을 한다면 일반적인 마케팅과는 차별화된 마케팅 전략을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 준비도에 따른 세분화
어떤 전시이든 그 전시에 대한 관람객들의 자세는 단계적으로 구분될 수 있다. 즉 그 전시 에 대해 아직 모르고 있는 불인지 단계, 그 전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인지단계, 전시 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는 정보보유단계, 전시 관람을 고려하는 관심보유단계, 좀 더 적극 적으로 구매할 의사를 갖고 있는 구매의사 보유단계, 실제로 구매를 하려는 구매 희망 단계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이러한 관람객별로 차별적인 마케팅 전략을 세워 접근해 갈 수 있으며, 각 관람객별로 제공되는 정보의 내용이 다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각 단계에 있는 집단의 시장 세분화가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준비도를 근거로 세분화 하면 열성집단(enthusiasts), 관심집단(interested), 비 참여/무관심집단(non-interested/non-attenders)로 구분된다. 열성 집단(enthusiasts)은 기 존의 박물관 체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갖고 있는 가장 적극적인 수요자 계층이며, 문화 수용 능력이 높고, 자발적으로 회원에 가입하여 박물관의 전시나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 한다. 관심 집단(interested)은 자신이 관심 있는 작가나 작품, 또는 특정 박물관의 관람을 선호한다. 비참여/ 무관심 집단(non-interested/ non-attenders)은 박물관 관람 경험이 거의 없거나 기존의 관람 경험이 부정적인 관람객, 심리적, 경제적, 신체적 여건을 갖고 있지 못한 집단 이다. 이들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방문하기보다는 동물원이나 놀이동산, 또는 스포츠 관람 과 같이 문화 예술 경험 이외의 영역에서 여가 시간을 보내기를 즐겨 한다. 열성집단은 구매의사 보유단계와 구매 희망단계의 마케팅 전략, 관심집단은 인지단계, 정보보유단계, 관심보유단계의 마케팅 전략, 비참여·무관심집단은 불인지 단계의 전략으로 접근해야 한다.
 • 관람 빈도에 따른 세분화 
소비자는 이용도에 따라서는 비이용자(nonusers), 이용 빈도가 낮은 이용자(light users), 이 용 빈도가 중간 정도의 이용자(medium users), 이용빈도가 높은 이용자(heavy users)로 구 분될 수도 있고, 비이용자, 이전의 이용자, 잠재 이용자, 초보 이용자로 나눌 수도 있다. 관람빈도에 의한 세분화는 박물관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식이다. 5 
• 전시 참여 방식에 따른 세분화 
세릴(Beverly Serrell, 1996)은 관람객의 전시를 관람하는 방식에 따라 관람객 계층을 스트리 커(streakers), 샘플러 혹은 브라우져(sampler or browsers), 스터디어(studiers) 세 집단으로 세분했다. 스트리커의 사전적 의미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알몸으로 달리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세릴 은 몇몇 전시물 앞에서만 잠시 머무르며, 전시를 빠른 속도로 관람하는 관람객을 지칭하는 데 이 용어를 사용했다. 샘플러 또는 브라우져에 속하는 관람객들은 스트리커 보다는 관람 소요시간이 길며 그들의 관심을 끄는 작품 앞에서는 비교적 오랜 시간을 관람하는데 소요한다. 스터디어의 성향을 띠는 관람객들은 거의 모든 전시물에 관심을 보이며, 동시에 평균 관람 시간 보다 더 오랫동안 관람에 열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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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급 정학예사

▪ 2급 정학예사 자격을 취득한 후 다음 각 호의 기관(이하 “경력인정대상기

관“이라 한다)에서의 재직경력이 7년 이상인 자

1. 국립중앙박물관

2. 국공립박물관

3. 국립현대미술관

4. 공립미술관

5. 국립민속박물관

6. 박물관·미술관 학예사 운영 위원회가 등록된 사립박물관·사립미술관, 등록

된 대학박물관·대학미술관 및 외국박물관 등의 기관 중에서 인력·시설·자

료의 관리실태 및 업무실적에 대한 전문가의 실사를 거쳐 인정한 기관


2급 정학예사

▪ 3급 정학예사 자격을 취득한 후 경력인정대상기관에서의 재직경력이 5년 

이상인 자


3급 정학예사

1. 박사학위 취득자로서 경력인정대상기관에서의 실무경력이 1년 이상인 자

2. 석사학위 취득자로서 경력인정대상기관에서의 실무경력이 2년 이상인 자

3. 준학예사 자격을 취득한 후 경력인정대상기관에서의 재직경력이 4년 이

상인 자

4. 국공립 및 등록 박물관․미술관에서 학예사로 재직한 경력은 경력인정대상기관 여부에 관계없이 재직경력으로 인정한다. 

5. 실무경력의 경우 국공립 박물관․미술관 또는 경력인정대상기관에서의 비정규직, 일용직, 조교, 인턴쉽, 학예분야 자원봉사 등의 경력을 인정한다.

6. 박물관․미술관이 아닌 행정관청, 문화재발굴법인 등에서의 실무경력은 인정하지 않는다. 단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시행규칙 별표2에 준하는 박물관․미술관 시설을 갖춘 행정관청의 경우는 별도의 심의를 통해 실무경

력의 인정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7. 실무경력기간은 전일제 근무(1주일 5일 이상, 오전9시∼오후6시)를 기본으로 하고, 시간제 근무의 경우 1년을 총 2,000시간으로 한다. 

8. 실무경력 시기는 학위 취득시기 또는 준학예사 자격시험 합격시기와 선후관계 구분이 없다.

9. 신규 박물관 및 미술관의 경우 등록일부터 실무경력을 산정한다. 

10. 국공립 및 사립, 대학 박물관 및 미술관은 관장명의의 실무경력 증명서가 인정된다.


준학예사
1.「고등교육법」에 따라 학사학위이상을 취득하고 준학예사 시험에 합격한 자로서 경력인정대상기관에서의 실무경력이1년 이상인 자
2.「고등교육법」에 따라 전문학사학위 이상을 취득하고 준학예사 시험에 합격한 자로서 경력인정대상기관에서의 실무경력이 3년 이상인 자
3. 제1호와 제2호에 따른 학사 또는 전문학사학위를 취득하지 아니하고 준학예사 시험에 합격한 자로서 경력인정대상기관에서의 실무경력이 5년 이상인 자
4. 국공립 및 등록박물관․미술관에서 학예사로 재직한 경력은 경력인정대상기관여부에 관계없이 재직경력으로 인정한다. 
5. 실무경력의 경우 국공립박물관․미술관 또는 경력인정대상기관에서의 비정규직, 일용직, 조교, 인턴쉽, 학예분야 자원봉사 등의 경력을 인정한다. 
6. 박물관․미술관이 아닌 행정관청, 문화재발굴법인등에서의실무경력은인정하지 않는다. 단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시행규칙 별표2에 준하는 박물관․ 미술관시설을 갖춘 행정관청의 경우는 별도의 심의를 통해 실무경력의 인정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7. 실무경력기간은 전일제 근무(1주일 5일 이상, 오전9시~오후6시)를 기본으로 하고, 시간제 근무의 경우 1년을 총1,000시간으로 한다. 
8. 실무경력 시기는 학위취득시기 또는 준학예사 자격시험 합격시기와 선후 관계구분이 없다. 
9. 신규 박물관 및 미술관의 경우 등록일부터 실무경력을 산정한다. 
10. 국공립 및 사립, 대학박물관 및 미술관은 관장명의의 실무경력 증명서가 
인정된다.

경력인증대상기관
1. 국공립박물관 및 미술관은 법적 경력인정대상기관이다. 
2. 사립․대학 등록박물관 및 미술관을 대상으로 신청기관에 한하여 심의하여 실무경력을 인정한다. 
3. 사립일 경우 등록된 박물관, 미술관으로서 인력․시설․자료의 관리실태 및 업무 실적이 향후 학예사 자격을 취득하고자 하는 자의 실습과 실무연수에 적합하다고 학예사운영위원회가 인정한 기관이다. 
4. 인력은 학예사자격증을 소지한 전문직원(관장포함)이 2인 이상 있어야한다. 
5. 3급 정학예사 1명당 실습 및 실무연수 각 2명, 준학예사는 1명당 실습 및 실무연수 각 1명씩을 인정한다. 6. 소장품 도록 또는 특별전시 도록, 연구보고서 발간 여부 및 상설전시여부를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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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령목 2016. 12. 3. 23:05

박물관 교육프로그램의 유형
 일반적으로 박물관의 교육프로그램은 장소에 따라 분류하면 관내 교육과 관외 교육으로 나누어진다
. 관내 교육은 강연·강좌·세미나 등 강의식 위주의 프로그램과, 전시물에 대한 안내 및 해석인 가이드 투어 혹은 셀프 가이드 투어와 전시실 설명, 체험 학습 위주의 워크숍 등으로 구성될 수 있다.
관람객 계층별로 분류하면 일반 대중을 위한 공공프로그램(청소년 강좌, 어린이 교육프로그램, 주부 강좌, 노인대학, 관광안내원 강좌), 가족 단위 프로그램, 학교 연계 프로그램, 연령별, 관심별, 여가 시간의 활용도 등에 따라 주부, 직장인, 노인, 연구활동을 원하는 전문인 등을 위한 프로그램을 별도로 기획한다.

 국내 거주 외국인 대상 프로그램, 장애인 프로그램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안내원 양성교육과 자원봉사자 양성, 박물관 전문 인력 재교육프로그램이 포함된다. 그 밖에 지역 및 생활문화환경에 따라 도시·농촌·어촌·산간·도서 프로그램 등이 있다.


 관외 프로그램으로서 전시회나 교육프로그램에 특정 지역의 관람객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지역사회 주민의 공통적인 관심사와 관련된 주제를 설정함으로써 교육적·계몽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관외 프로그램은 순회 전시, 학교 대여 서비스, 행사 및 활동 프로그램 등이 있다. 순회 전시는 기존에 박물관에서 기획했던 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서 기존의 소장품을 보충하거나 박물관의 봉사 영역을 확장시키기 위해 새로운 자료를 제공해 준다. 국내외유적과 박물관·미술관을 탐방하는 고적 답사 프로그램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는 현재 관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다양한 교육프로그램과 관외 프로그램을 통해 박물관의 교육 기능을 확장시켜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관람객 계층을 개발하고 그들에게 효과적인 방법을 통해 더 좋은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1) 전시 안내(guided tours)
전시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한 안내와 오리엔테이션 해설 등의 활동이다. 오리엔테이션의 경우는 영상을 이용하여 전시의 개괄적인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을 절약하면서도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안내는 관내 직원이 담당하기도 하고 도슨트를 활용하기도 하는데, 도슨트는 전시 개막 전에 교육 담당자로부터 전시회에 대한 기초교육을 받은 후에 활동한다.


2) 전시 설명회(gallery talk)
대부분의 박물관은 이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주로 30분 내지 한 시간가량 학예연구원, 관련 학자, 또는 도슨트들이 관람객을 대상으로 상설전시나 기획전시의 전시물을 설명한다.


3) 강좌(lecture)
강좌는 정기강좌와 특별강좌로 대별된다. 정기강좌는 박물관 소장품이나 전시와 관련된 주제에 대해 진행하며, 특별강좌는 이와 관련된 저명한 강사를 외부에서 초빙하여 실시하는 것으로 이를 강연이라고 한다. 강좌는 집단적인 학습 형태를 띠기 때문에 청중의 지적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행해진다. 강연과 강좌는 체계적인 지식의 전달, 명료한 개념전달, 흥미 유발의 장점을 갖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대상을 정확히 구별하여 실시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박물관 전문인력 양성 교육’, 국립민속박물관의 민속문화특설 강좌’, ‘청소년 민속 강좌’, 국립현대미술관의 미술관학 강좌가 여기에 속한다. 외국의경우에는 직장인들이 점심 시간을 활용하여 전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브라운백 런치 렉처(brown bag lunch lecture)’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 교사를 위한 프로그램은 견학이나 대여 프로그램을 효과적으로 지도할 수 있도록 하는 연수, 학교 교육과 박물관 교육의 아이디어를 교환, 교육 자료의 공동개발, 공동 프로젝트를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학생을 위한 프로그램은 학년별로 프로그램을 구분하여 박물관 견학, 현장 학습,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공동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4) 현장 학습(field trip)
현장 학습은 실습, 문화 탐방 등의 내용으로 박물관에서 전문 강사를 초빙하여 이루어진다박물관에서는 발굴 현장이나 유적지를 답사한다. 예를 들면, 국립민속박물관의 청소년 민속탐방’, ‘외국인 청소년 민속 탐방등이 여기에 속한다.


5) 오디오 가이드(audio guide)
오디오 가이드는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교사와 함께 전시 작품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며 관람객들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자유 답변식의 질문을 제시하고, 관람객들이 작품을 평가하고 전시 전반에 대해 종합적인 안목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오디오 가이드는 워크맨 카세트 플레이어를 작은 이어폰으로 연결하여 사용하거나, 트랜지스터 라디오처럼 신호를 받는 리모콘 모양의 좀 커다란 막대기 형식을 사용하기
도 한다
.
녹음 내용은 학예연구원이 대본을 쓰고, 교육 담당자는 관람객이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개념과 용어를 사용하였는지를 감수하여 수정 보완한 뒤 내레이터가 스튜디오에서 녹음하고 편집한다.


6) 비디오 프로그램(video program)
비디오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제작 인력과 장비, 공간이 구비되어야 한다. 공간의 경우에는 전시장과 분리된 시청각교육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소음이나 관람객의 병목 현상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비디오 프로그램은 박물관에 대한 소개, 교육프로그램 안내, 작품 및 작가의 삶, 제작 기법 등에 관한 내용을 수록하여 전시 작품 감상을 어떠한 방식으로 보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관람객에게 제시하여 준다.


7) 학교연계프로그램(school program)
학교 교육과의 연계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박물관의 소장품이나 전시와 관련하여 학교 연계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박물관과 학교와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박물관 교육 담당자는 학교 교사들과의 접촉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여 박물관을 활용하여 미술 교육이나 역사 교육 내용과 접목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형식적이고 조직적인 학교 수업과는 달리 박물관 학습은 비형식적이며 자유롭고, 질 높은 정보와 발견, 도전, 즐거움을 경험하기 때문에 자발적인 학습동기를 유발 시키는데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교사들에게 도록, 워크 쉬트(worksheet), 슬라이드, 비디오 매체와 같은 교육용 자료를 지원하거나, 학교에 유물 대여 서비스를 제공한다. 적극적인 방법으로는 박물관과 협동으로 그룹 프로젝트를 운영하여 함께 전시를 기획하거나, 박물관에서 학교 단체 관람과 자유토론을 통해 학생들의 창의성과 미술 감상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학교 연계 프로그램은 1차적으로는 박물관의 현장 실습, 2차적으로는 교실 내에서의 심화학습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학교 연계 프로그램은 자칫하면 학교나 박물관 어느 한쪽에 편중된 교육으로 흘러갈 수 있으므로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8) 교사 연수 프로그램(teachers workshop)
교사 연수 프로그램은 초등교사를 대상으로 일선 교육 현장에서 미술 지도를 직접 담당하고 있는 초등교사들에게 미술 이론과 실기를 포함한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케 함으로써 교사들의 교육 지도 능력 향상과 바람직한 미술 문화 기반 조성을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초등교사 미술 연수를 운영하고 있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중등교사 문화 연수를 운영하고 있다.


9) 움직이는 박물관(mobile museum)
움직이는 박물관은 대형 버스에 박물관의 유물을 싣고 다니면서 박물관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지역에서 전시회를 진행하는 박물관 관외활동의 하나이다. 영국에서는 리버풀과 같은큰 도시나 기타 소도시에서 모두 성공적으로 이러한 프로그램을 활용하고 있으며, 오스트레일리아와 스웨덴에서는 대형 버스가 아닌 기차로 유물을 이동하여 전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문화 접촉 빈도의 증진을 통해 건전한 시민정신 함양과 대중적 문화 향수 기회의 확대를 취지로 찾아가는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다. 이는 미술품 감상 기회가 국민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상화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공공시설인 문화예술회관, 문화의 집, 병원, 교도소 등의 공공기관과 승강장, 지하철역, 대합실 등의 장소를 이용하고 있다. 문화 소외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문화 향수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확대하며, 지역간 문화 격차 해소를 위해 실시하는 찾아가는 박물관은 1990년부터 전시 전용 차량을 마련하여 지역문화 행사장 및 인근 초·중등하교, 근로자복지, 장애자 수용시설 등 지리적·시간적 제약으로 박물관을 찾기 어려운 주민·학생·근로자 등을 직접 찾아가 우리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다. 20008월에는 지하철 7호선 개통을 기념해서울시 도시철도 공사와 인포아트코리아가 함께 전시를 기획하여 지하철을 미술관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프로젝트는 7호선 전동차 8량에 각각의 주제를 설정하여 작가들에게 지하철내부와 외부를 꾸미게 하여 우리나라 근·현대사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을 이용하여 이미지를 만들고, 이것을 통해 관람객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역사인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하였으며, 미술관 관람객과의 접근성을 꾀하는데매우 성공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10) 가족 프로그램(family program)
온 가족이 휴일이나 주말에 함께 즐길 수 있는 이벤트 형식의 프로그램으로서 어린이를 동반한 부모들이 함께 가족 단위별로 참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가족 프로그램은 다양한 관람객 계층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 5월 가정의 달 및 청소년의 달을 맞이하여 어머니와 자녀가 박물관에 대해 함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5월부터 10월까지 매주 토요일 엄마와 함께 박물관을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있다. 교육 내용은 박물관 공부, 전시실 학습 및 문화재 모형 만들기 등이 포함되어 있다미국의 현대미술관(MOMA)아트 사파리(Art Safari)' 프로그램은 매우 성공적인 가족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박물관에서 직접 진행되며, 집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아트 사파리 온라인(Art Safari Online)을 함께 제공하고 있다.


11) 어린이 교육프로그램(children program)
어린이 교육프로그램은 초등학생들이 박물관의 소장품을 감상하고, 이를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펼침으로써 작품 감상 능력과 창의력을 배양하고 더 나아가 문화적 정서를 함양하는데목적을 둔다. 이러한 어린이 교육프로그램은 단순한 실기만이 아닌 작품 감상, 자기 평가 등의 비평 능력도 함께 향상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미술 교육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미술 교육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이 프로그램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는 색칠하기, 퍼즐, 퀴즈 등 어린이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내용을 수록한 안내 책자를 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어린이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대표적인 박물관으로서는 삼성 어린이박물관을 들 수 있다. 삼성 어린이박물관은 95년 개관 이후 매년 40여만명 이상의 관람객들이 방문하고 있으며, 9개 주제 11개의 전시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박물관에서는 피카소처럼 그리기’, ‘텔레비전에 내가 나온다면 정말 좋겠네’, 등을 비롯하여 영유아 놀이학교, 열린 연극학교과학교실, 미술학교, 박물관학교, 영상제작학교 등의 다양한 특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국립현대미술관은 미술관이랑 나랑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아트선재센터에서는 어린이들에게 다소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미술관을 엉뚱하고 장난스러운 미술놀이를 통해 즐거운 공간으로 만든 어린이 교육프로그램인 작가와 함께 하는 미술관은 놀이터를 운영하고 있다이 프로그램의 특징은 현재 활발하게 활동 중인 작가들이 참여하여 어린이들에게 미술관 관람 예절과 그림 감상, 작가의 개성에 따른 독특한 실기교육을 한다는 점이다. 또한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기존의 미술교육이 가진 일방적이고 계몽적인 내용 전달 위주의 교육이 아니라 자유롭고 즐거운 상상을 펼칠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아울러 어린이뿐만 아니라 함께참여한 부모들을 위한 미술교육 프로그램도 제공하여 가족 단위의 미술관 관람을 유도하고낯설고 어렵기만 한 현대미술에 대한 거리감을 좁힐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12) 장애인 프로그램(program for the disabled)
자발적으로 박물관을 관람하기 어려운 신체 장애인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누구에게나 박물관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청각 장애인을 위해서는 수화 통역 전시 설명회를 제공하고, 시각 장애인을 위해서는 점자로 텍스트나 레이블을 별도로 제작하여 박물관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아울러 휠체어를 박물관 입구에 비치하여 관람이 쉽도록 배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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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령목 2016. 11. 5. 22:50

다. 박물관에서 사용하는 주요 용어

박물관이 수행하는 기능과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용어들이 있다. 각각의 전문용어들이 지니고 있는 의미에 대한 이해는 박물관 설립자 혹은 설립 의도가 있다


◎ 주요 용어의 정의

 

- 오브제, 사물, 물건(Object)

물질적이고 삼차원의 형태를 가진 모든 종류의 물체(예: “이 종이 봉투에는 3개의 오브제가 들어있다.”) 


- 박물관 오브제(Museum object)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수집된, 박물관의 소장품에 속한 오브제. 예를 들어 카세트테이프가 그 안에 무엇이 녹음되어 있는가에 상관없이 카세트테이프로서 수집되었다면, 이는 박물관 오브제라고 할 수 있다. 


- 표본(Specimen)

보통 박물관 오브제와 동의어로 쓰이나 예증(example)또는 견본(sample)의 의미를 함축

하고 있다. (예:“퇴적암 전시에는 석회암 표본이 필요하다.”) 


- 유물(Artifact)

1) 수공으로 제작된 오브제, 또는 인간이 고의적인 의도로 선택하고 사용한 자연물.

(예를 들어 부적의 의미로 지니고 다닌 하얀 자갈도 유물이 될 수 있다.)

2) 문화적 표본

(예: “그 고고학자는 유물을 발굴하기 위해 암석층을 조사하였다.”)


- 미술품, 아트 오브제(Art object)

미학적 가치를 지닌 유물

(예; “박물관 벽에 나 있는 이 구멍들은 아트 오브제를 걸 자리이다”) 


- 예술작품(Work of art)

인간이 창조한 것으로 미학적인 가치가 있는 것

(예:모든 예술작품이 반드시 아트 오브제는 아니다. 한 예로 교향악은 예술 작품이 지만 만질 수 있는 사물은 아니므로 아트 오브제는 아니다.) 


- 소장품(Collections/ Collection )

1) Collections : 박물관이 연구나 참고를 위한 잠재적 가치 때문에 또는 미학적 교육적 중요성으로 인해 취득하여 보존하고 있는 오브제들

2) Collection : 공통적인 특성이나 중요성을 지닌 소장품의 한 단위. 예를 들어 메트 로폴리탄 미술관의 애넌버그 콜렉션(The Annenberg Collection)은 애 넌버그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한 인상파 계열의 작품을 일컫는 것이다. 


-취득(Accession)

박물관과 소장품의 출처 간의 한 번의 거래를 통해 습득한 한 점 이상의 오브제, 또는 그러한 거래 자체

(예 : “우리 박물관은 10번의 취득을 통해 총 218개의 오브제를 보유하게 되었다. 가장 최근의 취득은 1년 전에 있었는데 수 천개의 나비 표본 등으로 구성되었다.”) 


- 등록(Registration)

취득물에 영구번호를 배당하고 이를 일정한 시스템에 의거해 기록하는 것

(예: “취득물은 등록되자마자 대학원생들에게 연구목적으로 이양되었다.”)


- 목록화(Cataloguing)

오브제를 체계화된 분류 시스템에 의해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범주에 할당하는 것

(예 : “이 의자는 시민 전쟁 시대의 아이템으로 목록화되는 동시에 전 주지사 저택의가구류로 목록화되었다.) 


- 진열(Display)

관람자가 오브제 자체에 대해 갖고 있는 관심에 따라 오브제를 배치하여 보여주는 것

(예 : “백화점 쇼윈도에 구두를 진열하였다.”) 


- 전시(Exhibit)

진열보다는 좀 더 중요성과 전문성을 내포한 의미이다. 관람자를 교유가고자하는 의도에서 어떤 개념이나 메시지를 전시하는 것. 또는 미술전시의 경우 학식을 갖춘 전문인에 의해 미술작품들을 하나의 단위로 보여주도록 기획된 것. 따라서 이는 한 전시회(exhibition)일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다.

(예: “박물관은 전시(exhibit)를 준비함에 있어서 오브제와 레이블을 활용한다.” “이번빅토

리아미술전시회(exhibition)에는 동판화도 전시(exhibit)된다.”) 


- 전시 레이블, 설명문 (Lable)

전시에서 무언가 구분을 짓고 설명하고 알리기 위해 글로 쓰여진 것. 사인(sign)이나 타이박물관 설립과 운영틀(title), 캡션(caption), 텍스트(text)등으로도 불린다. 종종 레이블은 전시에서 오브제 자체보다도 더 큰 교육적 효과를 낼 수 있다. 


- 전시회, 전람회(Exhibition)

교육적, 혹은 미학적인 의도를 갖도록 고안된 일정한 연속성에 따라 관람객들이 한 단위에서 다른 단위로 옮겨가면서 관람할 수 있도록 예술적, 역사적, 과학적, 기술적인 성격을 지닌 오브제들을 조합해 놓은 것. 내용을 설명하고 관람자의 주의를 끌기 위해 레이블이나 기타 그래픽적인 보조 수단(그림이나 도표 등)을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한 전시회에는 몇 개의 분리된 전시를 포함할 수 있는 충분한 면적을 필요로 하며 협소한 주제보다는 다소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는 경우가 많다.

(예: “관장은 이집트 미술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 아트 쇼(Art show)

미술품의 일시적인 진열. 보통은 다수의 현대 작가들의 비형식적인 회화 전시를 이른다. 


- 아트 갤러리(Artgallery)

1) 미술품을 매매하는 상업 공간(화랑)

2) 종합 박물관내에서 미술품을 전시하는 전시 공간

3) 미술관

‘갤러리’라는 용어는 오브제의 소유 여부에 관계없이 미술품의 전시 행위를 강조하는 장소의 의미로 쓰인다.

(예: “미술 교사 A씨는 퇴직 후 시내에 그가 가르친 학생들의 작품을 취급하는 갤러리를 열었다”) 


- 미술관(Art museum)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미술 분야를 다루는 박물관. 특별히 미술관의 경우 소장품의 소유권과 보존의 개념이 강조 된다.

(예: “동양 자기에 관한 한 가장 훌륭한 소장품은 A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 종합박물관(General museum)

미술만을 혹은 역사나 지질 분야만을 다루지 않고 몇 가지 또는 모든 분야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박물관

(예: “이 박물관의 관장은 인류학자이고 그의 어시스턴트는 역사학자이다. 그러나 이 박물관은 종합박물관이기 때문에 미술 전문 큐레이터도 고용할 것이다.”) 


- 인사이클로피딕박물관(Encyclopedic musem)

일종의 종합 박물관으로 시간이나 공간 그리고 수집품의 범위나 주제에 있어 특별한 제한을 두지 않고 모든 분야를 폭넓게 포괄하는 박물관

(예: “이 인사이클로피딕 박물관의 일부 주제들은 다소 깊이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모든 방문객들의 흥미에 부흥할 수 있다는 정당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 사적지, 역사지구(Historic building or site)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건물이나 장소, 종종 유명한 위인이나 사건등과 연관된 경우가 많으며 그에 대한 유물들을 전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 식물원(Botanical garden)

식물의 연구와 전시를 위해 식물을 과학적으로 재배하는 곳. 온실이 있는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다. 


- 수목원(Arboretun)

나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식물원


- 식물표본관(Herbarium)

식물 표본의 체계적인 콜렉션


- 동물원(Zoological garden, Zoological park, Zoo)

살아있는 동물들을 연구, 전시할 목적으로 양육하는 전문적으로 디자인되고 관리되는 단지 많은 경우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들을 보존하는 역할을 한다. 


- 수족관(Aquarium)

수중 동물을 수집해 놓은 탱크가 갖추어진 건물


- 어린이박물관(Children's museum)

어린이들을 위해 설립된 박물관으로 모든 것이 아동의 신체 크기와 정신 연령에 맞게 축소되거나 조정된다. 보통 초등학교 교사들과 유아교육 전문가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하며 취미활동반과 동화구연반 등 어린이의 흥미를 유발하는 종합적인 활동을 제공한다. 


- 천체 투영관(Planetarium)

돔 모양으로 된 천장에 미세한 빛을 영사하여 별자리와 혹성들을 보여주는 프로젝터를 갖춘 건물, 또는 이러한 설비를 관리하는 기관


- 자연학습장(Nature center)

자연 학습을 위한 옥외 설비로서 전시, 교육프로그램을 위한 설비와 서비스를 갖춘 현장학습장


- 방문객센터(Visitor center)

사적지나 자연보호 지역의 해석을 위한 시설. 보통 작은 강당과 전시장, 안내 데스크가 갖추어져 있다. 국립공원관리소, 산림관리소, 공원관리 부서, 또는 기타 관광객을 관리하는 기관 등에 의해 설립된다. 


- 과학관(Science center)

우주 탐험이나 착시 체험, 텔레비전 등 물리 과학의 신기하고 흥미로운 측면을 강조한 일종의 영구적인 전시회(전시형태는 축소판 박람회라고 할 수 있다.) 


- 아트센터(Art center)

한 지역사회가 운영하고 기본적으로 그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문화공간. 각종 미술 강좌를 개설하고 지역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며 그 밖의 지역사회에 관계된 미술 활동을 위한 곳. 흔히 음악회, 영화상영 등의 공연예술도 포함된다. 미술관과는 달리 아트센터의 경우 일반적으로 영구 소장은 하지 않는다. 


- 도슨트(Docent)박물관 설립과 운영

원래는 대학의 정규 교수가 아닌 강사를 지칭하는 용어. 요즘에는 일반적으로 박물관의 작품을 설명하는 자원봉사 안내원으로 사용된다. 


- 역사협회(Historical society)

특정한 지역의 인간의 발자취에 대한 중요한 지식을 발견 ․ 보존하고, 보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 문서 보관, 도서, 출판, 보존, 박물관 업무 등에 관련된 다양한 부서를 갖추고 있는 경우도 있다. 중요한 점은 역사협회는 오브제를 수집해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박물관’과는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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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령목 2016. 10. 28. 23:22

궁예 정권, 왕건의 왕위 찬탈

1. 서론

2. 본론

(1) 정사 속 왕건의 쿠데타

(2) 왕건의 쿠데타 그 후

(3) 전설속의 궁예

3. 결론

4. 참고문헌

 

 

 

1. 서론

신라 말기와 고려 초 사이에 존재했던 50년 남짓한 짧은 시대, 후삼국시대는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역사시대이다. 우리나라의 왕조들은 대부분 500년이 넘어가는 유구한 역사들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후삼국시대만큼은 그렇지 않다. 후삼국시대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일본의 전국시대와 더불어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영웅들이 반세기에 공존했던 유일한 시기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견훤, 궁예, 왕건 말고도 기훤, 양길, 능창 등 수많은 영웅들이 자기의 세력을 과시하며 자유로웠던 시기였단 말이다. 이것이 필자가 후삼국시대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 중 하나이다. 우리는 이 시기 이후로 더 이상 영웅들이 공존하던 때를 떠올릴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시대를 공부하다보면 우리나라의 다른 역사에서 느낄 수 없는 독특함을 맛볼 수 있다.

 

후삼국시대의 영웅들 중에서도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을 뽑으라면 바로 궁예이다. 어렸을 적, 이재범 교수의 슬픈 궁예라는 책을 읽으면서 궁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여태껏 세간에 알려진 폭군의 이미지와는 큰 차이를 보인 책의 관점에 흥미를 느끼며 필자 또한 궁예를 비롯한 후삼국시대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특히 궁예는 후삼국시대를 구성했던 다른 영웅, 특히 신라 무장출신의 견훤이나 송악 출신의 호족 왕건과 달리 지지기반이 전혀 없는 사람이 순수 자신의 능력만으로 후삼국시대 최강의 국가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그야말로 자수성가의 전형이 아닐 수가 없다.

 

그래서 필자는 궁예 정권의 몰락이 아쉽게만 느껴졌다. 그것도 궁예가 가장 신봉하던 왕건에 의하여 찬탈당한 궁예의 유산이 하마터면 왕건에 의하여 무너질 뻔 한 것에 대해서 약간은 황당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실제로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후 십여 년 동안은 견훤의 후백제군에게 휘둘리는 모습만 보였기 때문이다. 역사서에 기록된 왕건의 모습은 성군 그 자체이며, 궁예의 폭정에 못 이겨 충동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 사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본다. 과연 왕건은 정말로 보이는 대로 성인(聖人)이었을까?

 

 

 

 

2. 본론

고려사, 삼국사절요, 전설 등과 관련된 인용구는 있는 그대로 적는 게 낫다고 판단하여 부득이하게 인터넷에서 가져왔습니다.

 

(1) 정사 속 왕건의 쿠데타

필자는 오직 정사에 기록된 내용만으로 왕건의 쿠데타가 정당했는 지, 혹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일치하는 지에 대하여 추측해 보겠다.

 

육월 을묘에 이르러 기장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이 몰래 모의하고 야반에 태조의 집에 가서 다 같이 추대할 뜻을 말하니 태조가 굳게 거절하여 허락하지 않는지라 부인 유씨가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입히고 제장이 부축하여 밖으로 나와서 사람을 시켜 달려가며 소리쳐 [왕공이 이미 의기를 들었다.]라고 하니 이에 분주히 달려오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먼저 궁문에 이르러 복을 치며 떠들석하게 기다리는 자가 또한 만여 명이나 되었다. 궁예가 이를 듣고 놀래어 말하기를 [왕공이 차지하였으니 나의 일은 이미 끝났구나 하며 이에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미복으로 북문을 빠져나가 도망가니 내인이 궁을 청소하고 신왕을 맞이하였다. 궁예는 암곡으로 도망하여 이틀 밤을 머물렀는데 허기가 심하여 보리 이삭을 몰래 끊어 먹다가 뒤이어 부양(강원도 평강)민의 살해한 바가 되었다.

-고려사-

 

위의 기록은 고려사의 내용이다. 고려사절요에서도 이와 같은 기록이 서술되어 있지만 내용에는 차이가 없다. 다만 궁예의 폭정에 대해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 성리학자들이 궁예를 폄하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사료들을 종합하여 볼 때 정사 속 왕건의 쿠데타 과정이자, 궁예의 최후는 다음과 같다.

 

우선 서남해지방의 수달이었던 능창을 생포한 왕건을 크게 칭찬하면서 왕건을 신임하게 된다. 물론 애초에 후고구려 개국에 큰 도움을 주었던 송악 호족의 아들이 예쁘게 안보일 리가 없었겠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그 능력 또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후고구려는 날로 번창하여 한반도 3분의 2나 되는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궁예는 날이 갈수록 더더욱 포악해져 가면서 자신의 아들과 부인을 무참히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궁예는 관심법을 이용하면서 반역을 꾀한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 왔는데 하루는 왕건마저 의심하여 그를 죽이려 하다 최응의 지혜로 겨우 죽임을 모면하게 된다. 이후 왕창명의 거울사건이라는 신화와도 같은 일이 벌어지는데 이는 후대에 위조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생략하고, 그 다음에 일어난 사건이 위 사료에 나타난 왕건의 쿠데타이다.

 

, 왕건의 쿠데타는 궁예의 폭정에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궁예의 의심 병이 왕건에게까지 닿자 그것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낀 왕건이 주위의 바람에 충동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묘사가 되어있다. 그런데 정사 속에 기록된 사료에는 몇 가지 의문이 남아있다.

 

 

첫째, 궁예가 진정으로 왕건을 죽이려 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궁예(弓裔)가 불법(不法)을 많이 자행하니, 그의 아내 강씨(康氏)가 정색(正色)하고 간()하였다. 궁예가 미워하여 말하기를,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姦通)을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강씨가 말하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궁예가 말하기를, "내가 신통력(神通力)으로 보았다." 하고, 쇠공이를 불에 달구어 그 음문(陰門)을 찔러 죽였으며 두 아들도 아울러 죽였다. 이때에 궁예가 반란죄(叛亂罪)로 무함하여 날마다 수백 명을 죽었으며 장상(將相)으로서 살해된 자가 열 명에 여덟, 아홉에 이르렀다.

-삼국사절요-

 

보는 것과 같이 삼국사절요에는 위와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궁예가 관심법을 사용하면서 반역의 죄를 꾀했다고 몰아붙일 때는 상대가 아무리 부인한다고 하더라도 열에 아홉은 죽였던 것이 바로 궁예였다. 그것은 자신의 아내인 강씨부인에게도 해당이 되었던 이야기다. 그러나 위와 똑같은 상황에서 왕건에게만큼은 그러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건이 그렇지 않고 반역을 꾀했다는 점을 인정하자 궁예는 잘못을 뉘우쳤다며 크게 기뻐하고 왕건에게 상을 내리기까지 한다. 상식적으로 왕건과 같은 거물급 장수가 반역을 모의했다고 했을 때 그를 죽여 버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궁예는 그러하지 않았고, 이는 오히려 왕건에게 위기의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궁예는 그만큼 왕건을 신임하여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왕건은 궁예의 생각만큼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둘째, 왕건은 이미 옛날부터 역모를 준비하고 있었다.

처음 태조의 나이 삼십에 꿈을 꾸었는데 구층 금탑이 바다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스스로 그 위에 올라갔었다.

-고려사-

 

위의 기록은 왕건의 입장에서 윤색된 고려사의 한 내용이다. 왕건이 일찍부터 제왕이 될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미화한 내용인 듯한데, 이 짧은 기록은 왕건의 인물됨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왕건이 일찍부터 치밀하게 역모를 준비했다는 구체적인 자료가 되기도 한다. 학계나 일반인들 사이에서나 궁예는 왕건이 아니더라도 어느 누군가에게 반드시 쫓겨나야 할 인물로 각인되어왔다. 그러나 위의 사료는 사실 왕건이 30세 때부터 왕이 되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장기간 역모를 꾀했음을 전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9층 금탑이란 신라 황룡사 9층탑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 천하를 평정한다는 염원의 현실적 표현으로 이는 곧 제왕의 운명을 암시한다. 또 고려사 최응전에서 태조가 최응에게 옛날에 신라가 9층탑을 만들고 드디어 통일의 위업을 이룩했다. 이제 개경에 7층탑을 건조하고 서경에 9층탑을 건축하여 현묘한 공적을 빌려 여려 악당들을 없애고 삼한을 통일하려 하니...”라고 한 것을 보면 왕건은 9층 금탑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곧 왕건이 바다 한가운데 솟은 9층 금탑에 오르는 꿈을 꾸었다는 것은, 왕이 되어 천하를 평정하겠단의지를 비유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금탑이 바다 가운데서 올라왔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대를 받았다는 의미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이 짧은 기록은 왕건이 아랫사람들에게 추대되어 왕위에 오른다는 의미를 내포하였지만, 그 진실은 왕건의 역모 계획을 알려준다고 할 수 있다.

 

왕건이 30세때 금탑의 꿈을 꾼 시기는 906년으로 왕건가가 궁예에 투항한 지 10년째가 되는 해이다. 기록상으로 이 시기에는 왕건과 궁예 사이에는 아무런 마찰이 없던 해로서, 오히려 왕건과 궁예가 콤비를 이루어 후삼국시대 최대영토를 차지한 국가를 이룩한 시기였다. 그런데 왜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왕이 될 생각을 했던 것일까? 이는 필자의 개인적인 추측이다. 왕건의 탄생설화를 보면 왕건이 태어난 시기는 이미 나말의 혼란한 사회로 곳곳에서 호족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때였다. 그의 아버지 왕융은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는데, 당시 유명했던 도선에게 명당자리를 얻어왔는가 하면, 유력한 호족이었던 궁예의 밑에 자진하여 들어가기까지 한다. 이러한 가정 분위기 속에서 이미 오랜 옛날부터 왕건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언젠가는 자신도 왕이 되기를 꿈꾸지 않았을까. 그런 와중에 궁예가 포악해져 갔던 것은 왕건에게 호재였을지도 모른다.

 

 

 

(2) 왕건의 쿠데타 그 후

이번에는 과연 왕건의 쿠데타가 정당했는지에 대하여 조사해보았다. 만약 민중이나 내부 세력의 지지를 받았으면 궁예의 평가가 어떻든 왕건의 쿠데타는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왕건은 즉위 이튿날인 정사일에 조서를 반포하여 궁예의 폭정을 규탄하면서 이것을 교훈 삼아 화합의 정치로 밝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뜻을 천명했다. 즉위한 지 사흘 째 되는 날에는 한찬 총일에게 명하여 청주 지역의 민심을 얻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의 죄를 모두 풀라 명하였고, 기반이 취약했던 왕건은 궁예 정권의 관료들을 일단은 껴안고 있어야 했다.

 

궁예의 말년의 행보를 보면 확실히 궁예에게 등을 돌린 사람은 많았다. 그래서 왕건의 쿠데타에 동조하고 같이 일어선 사람들 또한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또한 분명 존재했다.

 

구월 을유에 순군이 임춘길 등이 모반하다가 복주하였다. 경인에 순군랑중 현율로 병부랑중을 삼았다. 계사에 전 시중 구진으로 나주도대행대시중을 삼았는데 구진이 전 임금 때 오랫동안 노고하였으므로 써 가기를 즐거하지 않으니 왕이 불쾌하게...

-고려사-

 

위의 기록처럼 왕건의 즉위년에 곧바로 모반이 일어났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왕건은 궁예를 축출하고 제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궁예 세력은 온존하게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 궁예 세력도 모르게 치밀하게 준비되었던 모반이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마군장군 환선길이었다. 환선길은 왕건을 추대하여 권력을 잡게 한 공신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왕건은 그를 믿고는 항시 날래고 용맹스러운 군사들을 거느리고 왕궁을 숙위하게 하였다. 환선길은 여러날을 뜬 눈으로 지새우며 왕궁을 숙위하다가 모처럼 집에 들렀다. 그때 환선길의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퉁명스러운 투로 따지듯 말했다. “당신의 대주와 능력은 남보다 훨씬 나으므로 사졸들이 복종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큰 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권은 다른 사람에게 있으니 부끄럽지 않습니까!” 여기서 남이나 다른사람은 모두 왕건을 가리키고 있는 말인데 순간 환선길은 내심으로 자신과 왕건을 저울질해본다. 환선길은 내심으로 아내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왕건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모반을 꾀하지만 용기가 부족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처럼 왕건은 궁예 세력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세력에게 조차도 그 정당성을 의심을 받는 처지가 된다. 그래서 사실상 왕건의 권력은 중앙만 움켜쥐었을 뿐이지 변방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궁예가 말년에 장악했던 웅주지방의 이흔암은 쿠데타가 일어나자마자 후백제에 투항하였고, 그 외 많은 지역의 호족들이 왕건에게 벗어나 후백제로 투항하게 된다.

 

이를 볼 때 왕건의 쿠데타는 완벽히 준비되지 못한 반쪽자리 쿠데타였다고 보인다. 실제로 궁예시절 그 강력했던 군사력이 밀집되지 못하여 그 후 십 수 년 동안은 후백제 견훤에게 압도당해 심지어는 죽기직전까지 갔으니 말이다.

 

 

 

(3) 전설속의 궁예

궁예는 과연 백성들에게 버림받은 왕이었을까? 정사속의 기록에 따르면 왕건에게 쫓겨난 궁예가 산에서 숨어 살다가 배고픔을 못이기고 마을로 내려왔는데, 마을 백성들이 괴물인줄 알고, 혹은 궁예임을 알아보고 돌팔매질을 하면서 죽였다고 기록되어있다.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비운의 최후가 아닐 수가 없다. 그러나 전설 속의 궁예는 다르다. 과연 왕건의 쿠데타는 정당했던 것일까? 민중의 입장을 반영하지 않고 오직 중앙 권력 투쟁에 의한 결과가 왕건의 쿠데타가 아니었을까?

 

전설 속의 궁예의 최후는 절대 비굴하지 않았다. 왕건의 군사 역모가 있던 날, 왕은 자신의 나라 도읍지를 마지막으로 순방한 것 같다. 그날 밤 왕은 남문을 통해 도성을 빠져 나왔다. 숨을 가다듬고 재기를 위해 찾아갔던 첫 피신처는 도성 서남쪽의 중어성. 평원 한가운데 세운 도성의 전략적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세웠던 12개 산성 가운데 한 요새다. 현재 위치는 철원읍 대마리. 왕은 이 요새를 버리고 더 서쪽으로 나가 현 연천군 신서면 승양리의 역시 외곽성인 승양산성으로 들어갔다. 또다른 외곽성 보개산성(현 포천군 관인면)은 승양산성의 동쪽에 있었다. 그러나 왕은 어느새 더 동쪽의 명성산성(현 펄원군 갈말읍)으로 들어가 최후 보루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산성에서 군대를 해산한다. 그리고 통곡하는 군사들을 뒤로하고 홀로 북쪽으로 떠난다. '명성이란 말뜻을 굳이 풀이한다면 '큰 울음소리'. 훗날 사람들은 그때 군사들이 슬피 울었다고 해 그 산성을 '울음산성', 산성이 있는 그 산을 '울음산'이라고 불렀다. 명성산성에서 해산했지만 충성스러운 많은 군인들이 왕이 걸어간 길을 뒤따라 군탄리까지 왔다. 왕은 "나를 따르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궁예가 강변에서 한탄했다는 한탄강을 건너가 버렸다. 훗날 사람들은 그곳이 바로 그때 '군사들이 슬피 울며 탄식한 곳'이라며 '군탄'은 거기서 유래했다고 해석했다. 갑천은 평강 하갑리 동북쪽의 작은 내. 왕은 자신의 정예병들을 양성하던 검불량 군사훈련장을 지나 삼방협의 깊은 골짜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결했다.

-울음산 설화-

 

울음산 설화에 따르면 정사 속에 기록된 궁예와의 모습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정사 속 궁예는 왕건의 쿠데타에 저항하지 못하고 바로 포기하여 도망간 왕으로 비춰지나, 이 울음산 설화에서는 끝까지 왕건에게 저항하다가 끝내 하늘의 뜻이 자신에게 없음을 알고 해산했다고 전한다. 그 말을 전해들은 군사들은 모두 슬피 울어 그때부터 명성산의 다름 이름이 울음산이 되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궁예를 따른 병사들이 존재했던 점, 또 이 전설이 끝까지 구전되어 오늘날까지 내려온 점을 미루어 볼 때 궁예가 왕권을 탈취당할 만큼 폭군이었는가에 대하여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점이 있는데 왕권을 탈취 당한 이후 궁예의 행로가 전설 속에서는 의외로 명확하다는 점이다. 궁예왕의 행로는 보개산성-명성산성-운악산성-평강지역으로 이어진다. 궁예왕 일행과 왕건군과의 항쟁은 오랜 세월을 요한다. 운악산성에서 궁예왕 일행은 반 년 이상 왕건군과 항쟁을 했다고 한다. 여기에 평강에서 채록된 지명전설까지 합하면 궁예의 항쟁기간은 훨씬 길어진다. 평강에 있는 문고장, 전중평, 사청산들의 흔적은 평강시절의 궁예 왕국이 적어도 십년 남짓 존속되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고암산을 진산으로 정했기로 300년 도읍을 정하고(905) 왕위에서 물러나기까지 13, 나머지 17년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 거신가. 전설 속의 궁예는 그의 백성, 군대들과 언제나 함께 있다. 울음산에서도 군신이 함께 울고, 식물도 바위도 함께 울어 그 울음소리가 지금까지 계속된다. 그 외 많은 지명전설들이 궁예왕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며 함께 그 고통을 느끼고 있다. 만일 궁예가 문헌자료에서처럼 끔찍한 살인마이고 악인의 전형이었다면 왕의 행동에 대해 그들을 기억하기 위한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을 볼 때, 민심을 동반하고 있던 궁예왕의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왕건의 쿠데타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2. 결론

현재 남아있는 고려에 관한 사료들은 모두 왕건과 그 후손들의 시각에 의하여 각색된 내용들뿐이다. 필자는 이러한 내용들을 정리해보면서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과연 왕건의 쿠데타에는 정당성이 있었는가?

 

정사 속에서 각색된 왕건의 이야기에 조차도 숨기지 못했던 것은 왕건은 이미 오래전부터 역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점이고, 또 궁예는 상상 이상으로 왕건을 신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 왕건의 쿠데타가 성공한 이후, 곧바로 전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난 점은 궁예 정권의 몰락이 비정상적으로 일어났음을 추측해볼 수 있고, 이러한 점은 전설 속에서는 궁예를 옹호하고 있었다는 것에서 판단할 수 있다.

 

쿠데타 과정에서 왕건은 궁예 세력을 완전히 포섭하지 못하여, 한명이라도 더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항상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또 백성들또한 궁예를 그리워하고 있었기에 세금은 1/10으로 낮추는 등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럼에도 민심은 하나로 뭉쳐지지 못해 후백제에게 압도당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점에서 미루어볼 때, 왕건의 쿠데타는 지방 세력 몰래 중앙에서 급진적으로 일어난 역모라는 것이다. 궁예 세력의 대부분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 굴복시켰던 지방에 존재했었으나, 왕건 세력은 송악지방과 중앙 왕실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마자 지방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몇몇 호족들은 후백제에게 투항을 한점을 볼 때, 이는 분명 중앙 호족, 관리의 일방적인 왕위 찬탈로 보인다.

 

필자는 궁예에 대한 재조명과 더 나아가서 왕건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왕건은 혼인정책으로 호족들을 통합하는 등 당장에는 좋은 결과를 낳았지만, 사후 일어날 혼란에 대해서 무책임하게 대응했다. 하마터면 궁예를 몰아내고 이루어낸 왕조를 자신의 씨앗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덕분에 한 세기도 못가고 멸망시킬 뻔했다는 점을 생각해봐야한다.

 

 

 

4. 참고자료

고려사

고려사절요

삼국사기

삼국사절요

 

이재범 슬픈 궁예, 푸른역사

철원군, 태봉국철원정도기념사업회 태봉국 역사문화 유적

이도학 궁예, 진훤, 왕건과 열정의 시대, 김영시




by 초령목 2014. 11. 8. 18:46

조희웅이라는 교수가 쓴 고전소설 줄거리 집성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고전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해서 정리해 놓은 책인데,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은 얼마나 될까요? 무려 856종입니다. 그리고 이 책이 나온 게 십여 년 전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도 발견한 소설, 그리고 조희웅 교수가 미처 책에 실지 못한 소설들이 더 있을 것을 생각한다면, 고전소설은 거의 천 여 종에 이릅니다.


고전소설 작가들은 우리들에게 알려진 사람이 많지 않지만, 조선 후기는 소설의 시대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조선만의 현상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많은 나라가 소설의 시대를 맞아 이야기가 풍성해졌죠.

옛날에 소설을 즐기던 방식은 몇 가지 있습니다. 필사해서 보는 것입니다. 저작권이 없던 시대라 필사하면서 내용이 마음에 안 들면 자기 마음에 들게 내용도 바꿨죠. 그래서 탄생하는 게 이본입니다. 그리고 이웃집에 책이 있으면 빌려 보는 일도 있었죠. 이웃집 아낙네에게 소설 좀 빌려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도 남아 있답니다. 또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이야기 들려주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도 있었고, 길거리로 나가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답니다. 이를 전기수라고 하죠. 조수삼의 추재기이에는 이런 증언이 있습니다.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노인은 동대문 밖에 산다. 언문(諺文)으로 쓴 이야기책을 입으로 줄줄 외우는데 <숙향전>(淑香傳), <소대성전>(蘇大成傳), <심청전>(沈淸傳), <설인귀전>(薛仁貴傳) 따위의 전기소설들이다. 매달 초하루에는 청계천 제일교(第一橋) 아래 앉아서 읽고, 초이틀에는 제이교(第二橋) 아래 앉아서 읽으며, 초사흘에는 이현(梨峴)에 앉아서 읽고, 초나흘에는 교동(校洞) 입구, 초닷새에는 대사동(大寺洞) 입구, 초엿새에는 종루(鐘樓) 앞에 앉아서 읽었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기를 마치면 초이레부터는 거꾸로 내려온다. 아래로 내려갔다가 올라가고, 올라갔다가 또 내려오면 한 달을 마친다. 달이 바뀌면 또 전과 같이 한다.

노인이 전기소설을 잘 읽었기 때문에 몰려들어 구경하는 사람들이 노인 주변을 빙 둘러 에워쌌다. 소설을 읽어가다 몹시 들을 만한, 가장 긴장되고 중요한 대목에 이르면 갑자기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다음 대목을 듣고 싶어서 앞다투어 돈을 던지면서 ‘이게 바로 돈을 긁어내는 방법이야!’라고 했다."




전기수의 절단신공을 이때는 요전법이라고 불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결정적인 순간에 이야기를 딱 끊어서 다음을 궁금하게 하는 방법은 변함이 없었던 것이죠. 조선 시대에는 지금보다 문맹자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소설책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전기수는 소설을 즐길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소설책을 읽을 수 있어도 전기수가 실감 나게 이야기를 꾸미는 것을 듣고 싶었을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건도 있었죠.



"옛날 한 남자가 있었는데 종로 거리의 담배가게에서 소설책 읽는 것을 듣다가 영웅이 크게 실의(失意)한 대목에 이르렀다. 문득 눈초리를 찢고 침을 뱉더니 담배 써는 칼을 잡아 소설책 읽는 사람(讀史人)을 쳐서 그 자리에서 죽였다. 왕왕 맹랑하게 죽는 일과 우스운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전기수가 얼마나 실감나게 이야기를 했으면, 영웅(다른 기록에는 임경업이라고 합니다)이 좌절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흥분해서 전기수를 죽이는 엽기적인 사건까지 있었을까요. 이런 극단적인 사례는 아니지만, 요즘 드라마에서 악역 하는 배우를 실제로 보면 욕하는 아줌마, 할머니들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업도 유행했습니다. 영화 음란서생에 세책업의 모습을 일부 엿볼 수 있는데, 현재의 도서대여점처럼 소설책을 빌려주면서 이익을 얻는 곳이었습니다. 채제공 같은 분은 여편네들이 살림은 안 하고, 소설책 읽느라 가산 탕진한다고 한탄할 정도로(물론 소설을 안 좋게 봤던 높으신 분들의 시각이 들어갔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세책업은 유행했습니다.

또 값싼 목판본 소설을 판매하기도 했죠. 이건 방각본이라고 불립니다. 방각본 소설은 실제 소설 내용을 압축한 일종의 다이제스트판이라고 할 수 있어요. 대체로 판매 지역은 서울, 안성, 전주였는데, 판매지역에 따라서 경판본이니 안성본이니 완판본이니 했답니다. 이것은 판매를 높이기 위해서 일부러 내용을 줄이고, 글자도 줄이고, 몇몇 방법을 동원했는데, 지역에 따라서 내용 편차가 좀 있습니다. 춘향전 같은 경우 경판본은 상당히 짧은데, 완판본은 장편 수준으로 꽤 길죠. 우리가 흔히 보는 춘향전은 완판본인 경우가 많답니다.

소설을 읽는 건 높으신 분들도 예외가 아니라서 궁중에까지 흘러들어갑니다. 현재 창덕궁 낙선재에 소설을 쌓아 놓고 읽었는데, 이 소설들이 대장편인데다가 유일본인 경우도 많아서 연구자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고 하더라고요. 완월회맹연 같은 소설은 무려 180권 180책으로 현재의 웬만한 대하소설보다 훨씬 방대한 분량입니다. 특정 가문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몇 세대에 걸쳐서 이어내는 구성의 소설이 이때 많이 유행했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고전소설들은 현존하는 고전소설들의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이것만 읽고 아, 고전소설은 이렇다 저렇다 인상비평 하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고 코끼리는 어떻게 생겼다라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닐까요? 문학이라는 것이 쉽게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기준에 맞추느냐에 따라서 작품 평가가 달라지니까요.


by 초령목 2014. 9. 4. 23:56

고구려의 궁궐

 고구려 왕궁터로 알려진 것은 길림성 집안현의 국내성 터와 평양시 대성 구역의
안학궁터, 평양성(장안성)의 궁성터 등이다. 고구려는 도읍을 통구에서 대성산 
일대의 평양으로, 다시 장안성 일대의 평양으로 옮기면서 국가의 발전과 상응하
는 도성과 궁성을 갖추었다. 초기에는 평서오가 산성을 유기적으로 관련짓되 일
정한 거리를 두고 따로 건설하였다. 그러나 장안성에서는 이들을 결합한 평산성
을 쌓고 그안에 체제를 갖춘 도시를 형성하여 일반 백성들도 성 안에서 살게하 
였다. 현재 국내성이나 장안성 내성의 궁궐터는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이며 다만
안학궁만이 발굴 조사되어 고구려 전성기 궁궐 건축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성
국내성은 기원전 37년부터 427년까지의 고구려 궁성이다. 이 기간동안 이곳이 
고구려 전기의 명실상부한 왕궁이었다. 이 성 안에서 현재 도시가 자리잡고 있
는 관계로 고구려 시대의 성 안 시설물 포치를 자세히 알기 어렵다. 다만 성 안
의 서북쪽에서 고구려 시기의 주춧돌이 나와서 당시에 큰 건물이 세워져 있었
음을 말하여 준다. 또 붉은 색의 고구려 기와들이 많이 나왔고 성 안의 큰 길로
는 성문들을 서로 연결하는 동서 남북의 두길이 있었다.
성벽은 잘 다듬어진 방추형 돌로써 네모나게 쌓았는데 그 둘레는 약 3800여 미
터이며 현존 성벽의 높이는 약 5내지 6미터인 것으로 보인다.

 

 
 
안학궁성
안학궁성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직후인 427년 무렵에 대성산성과 함께 건설
되어 지금 평양시에 해당하는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긴 586년까지 고구려 후기
의 왕궁이 있었던 곳이다.
장수왕은 평양 천도 뒤, 줄곧 이 궁에 거처하였고, 국내성과는 달리 주변에 강
력한 군사시설들을 갖추고 있었다.
안학궁성은 성벽 한 변의 길이가 622미터, 넓이 약 38만 평방미터나 되는 웅장
한 토성으로 돌과 흙을 섞어서 벽을 쌓았고 성벽 안에는 성벽을 따라 약 2미터
너비로 포장된 순환도로를 냈다.
또 성벽의 문들을 연결한 도로, 궁정과 화랑, 못, 조산등 규모가 크고 화려한 
건축물과 시설물이 있었다.

 

 
 
장안성
장안성은 552년에 쌓기 시작해 586년에 완공된 성이다. 국내성과 안학궁성은
통치 계급의 주거 지역만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쌓았으므로 일반 주민들
은 성 밖에서 살았다. 
그러나 후기의 도성인 장안성은 도시 주민들이 모두 성 안에서 살게 되면서 
크게 쌓은 성이다.
장안성은 북성, 내성, 중성, 외성등 4개의 성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둘레는 
23킬로미터, 성 안 총면적은 1186만 평방미터에 이르는 큰 성이다. 


백제의 궁궐

 백제는 수도가 있던 지역을 중심으로 제1기 한성시대, 제2기 웅진시대, 제3기 사비시대 등 3기로 나눠 살펴본다.

 

제1기 한성시대
기원전 18년부터 서기 475년까지이다. 현재까지 한성시대의 왕성 위치 및 유적에 대해서는 거의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의하면 궁안에는 회나무를 심었고 우물과 연못을 두었으며 궁으 서쪽에는 활쏘는 대를 조성하는 등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제2기 웅진시대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475년부터538년까지 60년 사이이다. 동성왕은 20년 동안 왕위에 있었으며 한성으로부터 내려온 귀족 세력과 웅진성 지역의 신흥 귀족세력을 조정하여 왕권의 신장을 꾀하였다. 곧 우두성을 비롯한 5개성을 쌓는가 하면 웅진서 안 궁궐 동쪽에 임류가이라는 고층 누각을 지어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 만큼 왕권을 안정시켜다 무녕왕 때에는 왕권이 재확립된 듯 중국의 양나라에로부터 영동대장군 곧 중국의 동쪽 을 평안하게 만들었다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이때의 궁궐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그가 죽은 뒤 축조된 무녕왕릉의 건축술로 미루어 볼 때 상당히 높은 수준의 왕궁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제3기 사비시대
사비시대로 도성의 존재에 대한 확증이 없는 상태이다. 다만 문헌상 주목되는 것으로는 무왕 때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는 망해루와 의자왕이 왕궁 남쪽에 세웠다는 망해정 및 의자왕이 지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수리했다는 태장궁 등이 있다. 또 무왕 35년에 궁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 들였으며 못가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못안에 방정선산을 모방하여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의 궁궐

 신라는 기원전 57년부터 935년까지 56대 992년 동안 존속한 고대 국가로서 7세기 중엽에 이르러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여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다. 신라는 통일 전후로 여섯시기로 나누어 살펴본다. 

 
| 제1기 | 제2기 | 제3기 | 제4기 | 제5기 | 제6기 | 발해궁궐|
 
제1기 

제1기는 기원전 57년부터 356년까지로 연맹 왕국의 완성기로 부를 수 있다. 신라 최초의 지배자인 혁거세는 금성을 쌍아 경성으로 삼았으며, 5대 파사니사금 22년 월성을 쌓고 왕이 이곳으로 옮겨 거쳐하였다. 또 기원전 32년에는 금성 안에 궁실을 지었는데 314년에는 처음으로 궁궐이란 용어를 사용하였으나 그 의미는 궁실과 같다. 금성 안에는 그 시기에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등으로 구분되어 불린 지배자가 거쳐한 궁궐이 있었고 우물과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제2기 

356년부터 514년에 걸친 시기로 귀족 국가 태동기로 불리며 이 시기 지배자의 호칭을 따라 마립간 시대라고도 한다. 이 시기의 궁궐은 앞 시기에 비하여 많이 확대, 발전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궁성에 대하여는 "487년에 월성을 수리한 뒤 이듬해 금성 에서 월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496년에 중수하였다"라는 정도의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한편 제 2기에 왕권이 얼마나 강화되었는지는 이 시기에 축조된 대규모의 고분 곧 황남대총, 금관총, 천마총 등과 출토 유물을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다. 

제3기 

514년 654년까지로 귀족세력의 연합기로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시기이다. 이때 궁궐에 대한 기록으로는 두가지가 주목되는데 첫째, 날이 가물자 왕이 정전을 피하여 남당에 나아가 정치를 하였다는 기록과 둘째, 진평왕 7년에 대궁, 양궁, 사량궁등 3궁의 일을 모두 맡아보게 하였다는 기록이다. 위에서 정전은 월성 안 궁궐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데 514년 법흥왕이 즉위했다는 자극전이나 651년이 기록에서 나오는 조원전이 이 정전인 듯하다. 또 정월 초하루에 왕이 조원전에 나아가 백관들의 신년 축하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어 궁궐안에서 신년 의례가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제4기 

654부터 780년 까지이며 통일신라의 황금시대이다. 문무왕은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통일을 이룩하였을 뿐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함으로써 얻게 된 막대한 재물과 노동력을 활용하여 경주를 통일 왕조으 수도답게 변모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경주의 도시 전체를 일신시키려던 계획은 실현하지 못했지만 선왕으로부터 물려받은 궁궐을 장려하게 수리하는 한편 새로운 궁궐로서 동궁을 창조하였다. 한편 문무왕은 재위 후반부인 14년 이후부터 21년 숨을 거둘때까지 줄곧 궁궐을 확대하거나 새로운 궁을 짓는데 몰두 하였다. 최종적으로 경성 전체를 새롭게 만들려고 하였을 정도로 신라의 궁궐 건축사에서 가장 주목받을 업적을 남겼다. 또 문무왕 14년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고 화초를 심고 진기한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서 못은 안압지인 것으로 짐작된다. 안압지 주변의 건물터는 형식과 규모로 보아 대규모의 궁궐이 이곳에 조성되어 있었음을 보여 주며 특히 월성과 가까운 못 남쪽에도 많은 건물 터가 남아 있어서 월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전체가 한 궁궐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제5기 

780년부터 889년까지의 호족 세력 등장기로 신라의 쇠퇴가 빠르게 진행 된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궁궐을 새로 짓거나 도성을 보강하는 공사를 크게 벌인적은 없으며 건물 하나를 세우거나 궁궐 안 중요 건물을 중수하는 것이 고작 이었다. 다만 사찰 건축으로 봉은사, 해인사, 황룡사 9층탑이 이 시기에 이룩되었다 

제6기 

889년부터 935년까지의 내란기로 신라의 멸망기다. 전국 도처에 군웅들이 할거하여 지방의 통제가 불가능하였고 왕국의 수비도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그 가운데 견훤과 궁예는 각기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세우고 왕을 칭하고 도읍지를 정하여 궁궐을 짓기까지 하였다. 918년에 궁예를 쓰러뜨리고 즉위한 태조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 고치고 송악에 서울을 정하였다. 이리하여 1천년 고도로서 찬란한 문화를 남겼던 경주는 지방의 한 도시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통일신라 왕조의 중심이었던 월성, 동궁 및 여러 궁궐들도 버려지게 되었다. 

발해궁궐 

발해는 통일신라와 같이 7세기 말기부터 10세기 전기에 걸쳐 한반도와 만주 지방에 남북의 형세를 이루어 존재하던 왕조이다. 발해의 역사에 대해서는 그들 스스로가 남긴 역사책이 없고 멸망뒤 고려로 망명해온 유민들조차 역사를 기록하지 않아 자세한 사항은 고려의 문헌을 통해서만 추측이 가능하다. 현재 남아 있는 상경 용청부의 석등과 장륙불상, 또 온돌과 굴뚝을 갖춘 살림집 등을 통해 그 시기에 만간의 살림짐에도 온돌이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등은 고구려의 자를 사용하여 제작한 것으로6.3미터의 화사석을 중심으로 지은 것이다. 


고려의 궁궐

 10세기 초에 건국된 고려는 고대 국가의 분열상을 극복, 민족의 재통일을 시도하지만 발해의 영토는 이 시기에 상실된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목표 아래 개성을 도읍지로 선택하고 평양에도 성을 쌓는 등 몇 차례 궁궐을 짓기도 하였다. 고려의 정궁은 후삼국시대에 태봉이 쌓았던 발어참성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태조 2년 에 그 자리에 새롭게 창건되었다. 성종대를 거치면서 왕권이 강화되고 모든 법제가 정비되면서 현종 초기에 새롭게 지은 궐은 규모도 커지고 형식과 제도도 더욱 완비된 모습으로 발전되었다. 이 때는 궁성 안에 여러 전각들도 각각의 기능들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건덕전, 유사시에 왕이 거처하는 원덕전, 궁정을 편전하는 선정전, 태자 의 거처인 좌춘궁등이다. 한편 의종(1146-1170)은 고려시대의 궁궐 건축사에서 가장 기억될 만한 인물이다. 그는 지은 궁궐에 거처하기를 꺼려하였고 풍수지리 및 도참설을 신봉하여 수많은 개인의 집을 빼았아 이궁으로 만들어 옮겨 다니면서 호화로운 건축과 조원을 여러 곳에 만들었다. 의종은 무신의 난으로 쫓겨나고 무신이 집권 하는 시기에는 왕의 권력이 크게 실추되고 궁궐의 중건도 부진하였다. 이 후 잦은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는 등 고려의 궁궐은 많은 수모를 겪는다. 서긍의 '고려도경'을 참고하면 고려의 궁궐은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명당자리를 궁궐터로 선정하였기 때문에 경사가 가파른 언덕을 그대로 활용하여 높은 기단을 쌓아 높이의 차이를 극복하고 정전을 비롯한 주요 거눌은 4면에 행각을 둘러 폐쇄적인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웅장한 건물들이 언덕을 따라 올라가면서 겹겹이 포개져 있는 모습은 송악과 어우려져 장관을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 선 의 궁 궐

1. 조 선 전 기

2. 조 선 후 기

유 수 희(94)

이 땅에 정치적 지배자가 생겨나고 나라가 세워지면서부터 지배자의 거처인 궁궐과 함께 정치, 문화, 종교의 중심지로서 도읍이 건설되었다. 그러기에 궁궐은 지나 온 2000년 왕조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 유산으로서 한국사에서 민족 문화의 전통과 창조적 계승을 살리는 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자산이다.

여기에서는 태조 초에 건설되어 600여 년 동안 수도로서 명맥을 이어 온 한성의 궁궐들의 조성된 과정과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변천하는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참고로 조선시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를 경계로 하여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특히 궁궐은 임진왜란 때 전부 불에 타 없어진 것을 그 뒤에 다시 지었기 때문에 이를 전후한 두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1. 조 선 전 기

조선 전기는 1392년에서 1592년(선조25)까지의 200년 동안으로 고려로부터 계승되어 온 문화를 극복하고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바탕으로 양반관료 사회를 형성해간 시기이다. 그런데 왕실은 국왕 중심의 집권 체제를 추구한 반면 유신(儒臣)들은 관료 중심의 정치 운영을 이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왕권(王權)과 신권(臣權) 사이에는 항상 긴장과 갈등이 있었다. 궁궐 건축을 짓는 과정에서도 꼭 필요한 건물 말고는 짓지 말도록 간청하는 것이 관료(사헌부와 사간원의 言官)들의 임무였으므로 왕은 그들과 대립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검소하고 질박한 건물로 짓도록 왕에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왕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요구는 최고 통치자의 거처이기도 한 궁궐을 마음대로 지을 수 없게하는 지나친 간섭으로 여겨졌다. 관료들은 유교에서 규정한 성군(聖君)이 되기를 왕에게 요구하는 한편, 평소에는 경연(經筵)을 통하여 역사상 왕도 정치를 행한 임금들의 치적(治績)을 교육하고, 특히 그들의 거처인 궁궐이 검소하고 누추하기까지 하였다는 고사를 들려 주곤 하였다. 따라서 조선 전기의 궁궐 건축사는 성리학적 군주관에 입각한 제약된 상황아래 전개되었다. 더구나 태조 이성계는 고려 왕조의 신하라는 위치에서 혁명을 통하여 여러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앞 시대의 왕들처럼 신비로운 존재로도, 절대적인 권력을 쥔 존재로도 생각되지 않았다. 다만 민심과 하늘의 뜻을 받아들여 왕위에 오른 지배자로 생각되었다.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에 명시되어 있는 국도(國都)의 구성원리에는 전조후시(前朝後市;궁궐을 중심으로 그 앞쪽에는 정치를 행하는 관청을 놓고 뒤쪽에는 시가지를 형성함), 좌묘우사(左廟右社;궁궐을 중심으로 그 왼쪽에는 왕실 조상의 사당인 종묘를 놓고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배치함)가 있다. 또 궁궐의 구성원리로는 전조후침(前朝後寢;궁궐은 앞쪽에 정치를 하는 장소인 조정을 두고 뒤족에 임금을 비롯한 왕실의 거처인 침전을 배치함)과 3문3조(三門三朝;궁궐은 전체를 3개의 독립된 구역으로 분할하여 각 구역을 울타리로 둘러막고 각 구역 사이에는 문을 두어 연결시킴)가 있다. 이같은 제도적 규정(周制)이 한성의 도성 및 궁궐 계획에 사용되었다는데 이는 어겨서는 안될 법칙이라기보다 이상적 규범으로서 하나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졌다.

경복궁성은 도성 한복판에 있지 않고 북서쪽에 치우쳐 있으며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궁성 남쪽의 큰 길 좌우에는 의정부, 6조, 사헌부, 삼군부 등 주요관청을 배치 하였고, 그 남쪽 동서로 뚫린 큰 길(동대문과 서대문을 잇는길, 지금의 종로)에 시장을 열어 시가지를 형성하였다. 종묘와 사직을 각각 경복궁성의 왼쪽과 오른쪽에 놓았으나 등간격으로 대칭이 되도록 배치하지는 않았다. 또 도시 전체를 둘러싸는 외성을 평지에 장방형으로 쌓지 않고 한성분지를 외호(外護)하고 있는 백악산, 응봉, 인왕산, 타락산, 남산의 등성이에 산성형식으로 지형에 맞게 쌓았다. 결과적으로 周制를 의식하였으되 한성의 지형과 풍수적 명당터를 더 존중하여 도성을 계획하였음을 알 수 있다.

* 경복궁의 구성. 배치

태조4년(1395) 9월 29일의 {태조실록} 기사에는 창건당시 경복궁의 규모 배치, 각 건물의 기능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곧 연침(燕寢), 동소침(東小寢), 서소침(西小寢), 보평청(報平廳)등 내전 건물과 정전, 동서각루(東西角樓), 주방, 등촉인자방(燈燭引者房), 상의원(尙衣院), 양전사옹방(兩殿司壅房), 상서사(尙書司), 승지방(承旨房), 내시다방(內侍茶房), 경흥부(敬興府), 중추원(中樞院), 삼군부(三軍府), 동서누고(東西樓庫)등 390여칸이 준공되었다.

{주례}의 궁실제도인 3문3조 를 적용하여 창건당시 경복궁의 배치원리를 알아보면 먼저 3조는 연조, 치조(또는 내조), 외조를 말하는데 연조는 왕과 왕비 및 왕실일족이 생활하는 사사로운 구역으로 연침, 동소침, 서소침 등 3채의 침전이 연조에 속한다. 치조는 임금이 신하들과 더불어 정치를 행하는 공공적인 구역으로서 정전(正殿;조례를 거행하고 법령을 반포하며 조하를 받는 곳)과 편전(偏殿;중신들과 국정을 의논하는 곳)으로 이루어지므로 보평청과 정전이 여기에 속한다. 외조는 조정의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이 배치되는 구역으로 주방이하 동서누고까지가 여기에 속한다. 창건 당시에 궁궐이름을 경복궁이라고 명명하였던 정도전은 각 건물의 이름과 이름을 지은 의의를 임금께 올렸는데, 연침을 강녕전(康寧殿), 동소침을 연생전(延生殿), 서소침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고 연침 남쪽의 보평청을 사정전(思政殿), 정전을 근정전(勤政殿), 동쪽누를 융무루(隆武樓), 전문(殿門)을 근정문, 남쪽문인 오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고 하였다.

연조, 치조, 외조는 각기 회랑으로 둘러싸인 폐쇄적 중정(中庭)형식을 취하면서 남에서 북으로 연속되어야 하는데 {태조실록}의 기사를 참조하여 창건 당시의 배치도를 추정해보면 3문3조라는 원리를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3문3조로 이루어진 궁실 전체를 다시 궁성으로 둘러싸고 거기에 동문(건춘문), 서문(영추문), 남문(광화문, 2층누문)을 설치한 다음 남문 앞쪽 대로(大路)좌우에는 의정부, 삼군부, 6조, 사헌부 등 관청을 나란히 배치하였다.

창건 당시의 경복궁은 전체 규모가 천 칸에도 훨씬 못 미치는 390여 칸에 불과한 점, 반면에 중추원, 삼군부 등을 궐안에 배치한 점, 궁성 안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좌하기 위한 최소한의 부서로서 상의원, 사옹방, 상서사, 승지방, 내시다방 등만을 둔 점 등, 몇가지 측면에서 왕권이 강화되기 전, 유신들이 추구하던 재상 중심의 정치 운영에 적합하도록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태조때 창건한 경복궁은 세종때에 이르러 비로소 왕궁다운 궁궐이 되었으며 이후 100여년 뒤인 명종8년(1553)까지는 거듭 발전하여 조선 전기에 이룩된 궁정 문화를 총체적으로 담고 있었다. 그러나 명종8년의 화재로 정전·편전 일곽을 제외한 내전 일곽이 모두 불에 타 이듬해에 대대적으로 중건하였으나 그것마저 임진왜란때 완전히 소실되었다.

* 창덕궁과 창경궁

태종, 세종대를 거치면서 점차로 정치가 안정되고 권력이 왕에게로 집중되면서 경복궁 내부에는 건축상 많은 변화가 일어나며, 경복궁 동쪽 종묘 옆에는 이궁인 창덕궁까지 생긴다. 곧 태종 때에는 경회루를 짓고 주변에 못을 파서 군신의 연회 장소를 마련하였고 세종 때에는 동궁, 후궁(後宮), 혼전(魂殿), 학문 연구 기관 및 후원(後苑)까지 완비하여 이른바 법궁체제(法宮體制)를 완성하였다. 또 주요 전각뿐만 아니라 문에도 고유한 이름이 붙여진다.

편전인 사정전(思政殿;창건 때는 보평청) 좌우에 만춘전(萬春殿), 천추전(千秋殿)을 더 지었고, 연침인 강녕전 일곽 뒤쪽에 새로 교태전(交泰殿), 함원전(含元殿)을 비롯하여 자미당(紫薇堂), 인지당(麟趾堂), 청연루(淸燕樓), 종회당(宗會堂), 송백당(松栢堂) 등 후궁을 지었다. 동궁은 세자가 백관의 조회를 받는 계조당(繼照堂)과 서연(書筵)및 시강(詩講)을 받는 자선당(資善堂)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 후원에는 못을 파고 주변에 나무를 심었으며 취로정(翠露亭) 등 정자를 세웠다.

태종5년(1405)에 세워진 창덕궁은 처음에 외전 74칸 내전 118칸 규모로 지어졌으나 이후에 광연루, 진선문, 금천교, 돈화문(정문), 집현전, 장서각 등이 증설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정침청(艇寢廳), 동서침전(東西寢殿), 수라간(水喇間), 사옹방, 탕자세수간(湯子洗手間)등 내전을 비롯하여 편전, 보평청, 정정, 승정원청 등이 있었다고 한다.

창덕궁 옆에는 옛 수강궁(壽康宮;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한 뒤에 거처하던 궁, 1419년 창건)터에 성종14년(1483)에 창건된 창경궁이 있다. 성종은 왕실의 어른으로서 정희왕후(세조비이자 성종의 할머니), 소혜왕후(덕종비이자 성종의 어머니), 안순왕후(예종비이자 성종의 작은 어머니)와 창덕궁에 함께 거처하였는데 이들을 위하여 따로 궁궐을 지어 창경궁이라 하였다. 일종의 대비궁인 셈이다. 그래서 경복궁과 창덕궁이 남향으로 배치된 것과는 달리 창경궁은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창경궁에는 정전인 명정전(明政殿)과 편전인 문정전(文政殿)을 비롯하여 인양전, 경춘전, 통명전, 양화당, 여휘당, 환경전, 수녕전, 환취정 등 많은 내전 건물이 있었으나 역시 임진왜란때 모두 소실되었다.

조선 전기 정치 활동의 주 무대이자 역사의 현장이며 궁정 문화의 결정체였던 3궁궐은 북궐(北闕;경복궁), 동궐(東闕;창덕궁과 창경궁은 한 궁성안에 있었으므로 합쳐서 하나의 궁궐로 부름) 등으로 불렸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모두 흔적도 없이 불타버렸다.

2) 조선후기

조선 전기에 이룩된 높은 수준의 문화적 성과들은 임진왜란으로 거의 다 파괴되고 소멸되었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입은 타격도 대단히 심각한 것이어서 외형적으로나마 이를 회복하는 데에 반세기 이상의 시간이 걸렸으며 전란으로 입은 피해를 극복하고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는 단계에 이르는데 1세기가 걸렸다.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위기 상황에서도 종묘와 왕의 거처인 궁궐은 가장 먼저 재건되어야 할 목표로 생각되었다. 종묘와 경복궁을 재건하기 위하여 선조38년(1605)부터 진행된 중건 계획은 다음 순서로 마련되었다.

첫째, 춘추관에서 건국 초기와 성종때의 공사및 명종8년부터 9년까지의 경복궁 중건 공사등에 관한 문서와 기록을 등서(騰書)로 묶어서 임금과 해당관청인 공조에 보냈다.

둘째, 공사를 담당할 기구로서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하고, 등서를 참고하여 구체적인 계획을 입안하였다.

그리하여 1606년에는 궁핍한 재정과 민생고를 감안하여 경복궁의 중심 일곽만을 먼저 짓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608년까지 종묘만을 중건하였을 뿐 경복궁 중건은 실현시키지 못했다. 그대신 창덕궁재건 공사를 시작하여 1609년에 준공하였다. 여러차례 논의에도 불구하고 경복궁 중건은 실현하지 못한 채 조선후기에 경복궁을 대신하여 정궁 역할을 한 것은 창덕궁이었다. 광해군은 다시 1615년에 창경궁을 중건하고 뒤이어 인경궁과 경덕궁을 창건하였으나 인경궁은 인조때 헐려서 창경궁과 창덕궁을 지을 때 이용되었고 흔적도 남지 않았다.

경희궁(경덕궁을 고침)은 1620년(광해군12)에 완공되었는데 빛을 보지 못하다가 4년뒤인 1624년부터 280여년동안 여러 왕들의 거처로서, 조선 후기 역사의 현장으로서 창덕궁과 더불어 그웅장한 모습을 지켜 오다가 1910년의 한일합방 직전부터 일본인들에 의하여 강제로 철거되기 시작하여 얼마 안가서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다.

경복궁 터는 그대로 둔채 창덕궁는 정궁, 경희궁은 이궁으로 사용되었으며 창경궁은 창건당시의 대비궁이라는 용도를 벗어나서 창덕궁을 옆에서 보좌하는 궁궐로서 활용돠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한 궁성 안에 있어서 동궐이라고 불렸던 것에 대하여 경희궁은 서궐,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정궁인 경복궁은 북궐이라고 불렸다.

궁궐 안의 건물들은 해당 관청의 철저한 관리와 보호를 받았으므로 때맞추어 수리되었다. 또 왕들은 저마다 새로운 건물을 첨가하면서 궁궐의 면모를 부분적으로나마 바꾸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동궐과 서궐은 각각 수천 칸 규모로서 100여 채의 복잡, 다양한 건물을 갖춘 대궐로 발전하였다.

19세기 초까지 꾸준하게 발전해 온 동궐과 서궐은 1829년 서궐의 화재를 시작으로 창경궁(1830년), 창덕궁(1833년)이 차례로 대규모 화재를 당하여 정전·편전·침전 등 주요부분이 불탄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 광해군 인조대를 거치면서 재건된 궁궐이 또 200여년 만에 한꺼번에 소실된 것이다.

조선후기의 궁궐 건축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경복궁 중건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270여년동안 아무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경복궁 중건은 흥선 대원군에 의하여 마침내 시도되었다. 그는 순조, 헌종, 철종대(1800-1863)의 이른바 세도정치기를 거치면서 땅에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궁극적으로는 조선왕조를 부흥시키는 방편의 하나로 경복궁 중건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이미 왕조라는 봉건 체제가 해체되고 있었다. 특히 양반 관료층이 극도로 부패한 상황에서 대다수 농민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도적이 되어야 할 만큼 조선 사회는 뿌리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왕조 사회의 해체가 이미 크게 진전된 시기에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궁궐 중건을 대대적으로 시도한 것은 시대 착오였음이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중건된 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마지막 기념비이다.

경복궁은 1865년에 중건 계획을 세우고 건물을 설계할 때에 동궐과 서궐이 많이 참조되었다. 다만 이때의 동궐과 서궐의 건물은 대부분 1830년에 중건된 것이었고, 이때 건설공사에 참여한 기술자들 가운데에는 1865년 이후의 경복궁 중건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도 있다.

1865년(고종2)4월부터 시작된 공사는 2년 7개월만인 1867년 11월에 대체로 끝난다. 그러나 1872년까지는 마무리 공사가 계속되었으며 이해 9월에 영건도감이 해체됨으로써 중건공사가 완료되었다. 공사비는 773만 6,898냥에 이르렀는데 거의 전부를 원납전(願納錢)이라는 이름으로 모금하거나 반강제적으로 징수하였기 때문에 백성의 고통은 아주 컸다.

궁성의 둘레가 1,813보 높이가 20여 자이며 건물의 총 칸수는 7,481칸에 이르고 행각이나 장랑(長廊)을 제외한 단독 건물만도 150여 채가 넘는 방대한 규모의 궁궐이었다. 그 뒤 경복궁은 1873년과 1876년 두 차례 일부 화재를 당하기도 하였다. 한편 1873년에는 향원정과 신무문(北門)사이에 건청궁이라는 후궁을 지었고 1888년에는 대균모의 중건 공사를 시행하였으며 1893년에는 신무문 밖 후원에 경농제(慶農齊)와 大有軒)을 지었다.

어려운 시기에 백성들의 노역과 재물로 건설된 경복궁은 왕조 부흥의 터전이 되지 못한 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았긴 뒤 파괴 변형 왜곡되었다. 조선 총독부 청사를 바로 경복궁 정전인 근정전 앞에 세웠다. 수많은 건물들이 헐리고 현재에는 10여 채의 건물만이 보존되어 있다.

경복궁의 중건 이후에도 경운궁(慶運宮) 중건이 2차례나 시행되었다. 경운궁은 임진왜란 직후에 잠시동안 궁궐로 사용되다가 창덕궁 및 창경궁이 중건된 뒤에는 더 이상 왕의 거처로 쓰이지 않았는데, 20세기 초에 와서 다시 중요한 궁궐로 부각되었다. 왜냐하면 경복궁 안에까지 일본인들이 침입하여 왕비를 살해한 사태에 처하게 되자, 당시 주변에 외국 공사관들이 밀집해 있던 경운궁으로 왕실이 피신하기 위하여 대규모 건축 공사를 벌여 왕궁다운 궁궐로 변모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경운궁은 전통적인 궁궐 건축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외세의 개입이 심화되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한국의 건축도 일본화, 서양화의 길로 치닫게 된다. 일본에 의하여 왕위에서 강제로 쫓겨난 고종은 이 경운궁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꾸고 여기서 남은 생애를 울분 속에서 보냈다. 덕수궁이란 이름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처럼 고유 명사가 아니며 왕위를 물려준 상왕(上王)이 거처하던 궁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는 보통명사이다.

조선시대에는 삼국시대 이래 고려로 계승되어 온 궁궐 건축사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성리학을 통하여 들어온 제도와 사상을 전통에 융합시켜 새로운 형식의 궁궐 건축을 창조하였다. 경복궁이 조선 궁궐의 기본형이라고 하면 창덕궁과 경희궁, 창경궁은 변형으로 이해된다.

by 초령목 2014. 5. 25.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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