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우리는 후삼국시대라 하면 후고구려, 후백제, 그리고 신라, 이 삼국만 생각하기 쉽상이다. 어찌보면 이름자체에 삼국을 강조하는 듯 하지만 후삼국시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을 주연으로 발해라는 조연이 함께 역사를 이어가던 시대다. 후삼국시대의 역사는 889년(원종·애노의 난) 또는 891년(후백제 건국)을 시작으로 고려가 삼국을 완전 통일한 936년까지 (889년 기준) 47년이다.

 기원전 57년 신라가 건국되고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를 멸망 시킨 후, 676년 당나라군을 몰아내고 마침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하지만 698년 고구려 유민출신인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게 되며 한반도는 다시 남과 북, 두개의 나라로 분열하게 된다.(물론 발해는 한반도에 거점을 뒀다기보다는 만주에 거점을 뒀지만) 발해는 약 200년간 존속하며 거란에 의하여 926년에 멸망하게된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후삼국시대와 발해의 쇠퇴시기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이다. 후삼국시대의 시작이 890년대라고 하지만 실은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한 901년이 진정한 시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 900년대에 발해는 귀족들의 탐락과 사치로 거란족을 포함한 소수민족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후삼국시대를 신라의 탐락과 쇠퇴의 산물로만 이해해왔다. 사실 후삼국의 성립 자체가 한반도 내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신라가 삼국통일 후 300년간의 평화를 유지해온 금성의 평화를 겪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고인 물은 썩게 되는 법. 신라는 300년간의 평화를 제도적 발전으로 이룩하지 못하고 그저 왕위쟁탈을 행하는데 시간을 허비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조금 더 깊이 파고 들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신라가 어떻게 300년간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발해의 변화였다. 알다시피 발해는 당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고구려의 유민들이 일으킨 난이었다. 



 
세조 29년(696) 거란의 이진충(李盡忠)이 영주(營州 - 조양시)도독을 죽이고 당(唐)에 반란을 일으켰다.

 31년 이보다 앞서 이진충이 당의 북경을 함락시키는데 왕이 태자 조영을 보내 계성(계城 -天津市)를 점령하였다.


유득공 『발해고』

여기서 나오는 세조는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 대조영은 태조로 기록.




 위의 기록과 같이 대조영은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키고 당나라가 돌궐의 힘을 빌어 1년만에 겨우 진압을 할 수 있었던 어려운 상황에서 말갈의 여러부족들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그렇기에 발해는 당나라와 항시 적대적일수밖에 없었으며,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에 대해서도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발해의 성립으로 인하여 나당전쟁으로 사이가 벌어졌던 당나라와 신라는 다시 동맹을 맺고 발해를 공격하기도 했는데 발해는 이러한 전쟁속에서 힘을 키우며 꾸준히 성장해나갔다.


 

삼국사에서 말하기를, 의봉 3년 고종 현술에 고려의 남은 세력들이 서로 모여 북쪽의 태백산 아래 의지하였다. 나라 이름을 발해라 하였다. 개원20년 경에 명황이 장수를 보내 토벌하였다. 또한 성덕왕 32년 현종 갑술, 발해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의 등주를 침범하였다. 이에 현종이 토벌하였다. 신라고기에 말하기를 고려의 옛 장수 조영은 대씨이다. 남은 병사들을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발해라 하였다.

일연 『삼국유사』



  위의 기록과 같이 당은 발해를 큰 위협세력으로 파악하여 군대를 보내 토벌하려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발해역시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에 적대심이 남아있기에 무왕대에 이르러 장문휴로 하여금 당나라의 등주(산둥지방)을 공격하라 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당의 요청으로 신라가 발해를 공격한적도 있었는데 발해는 두 적국의 위협을 막아내며 그 결과 발해 선왕때는 해동성국이라 불릴정도로 번영하며 당나라에게 위협을 주는 존재가 되었다.

 발해가 이렇게 강성할 때 신라는 왕권이 가장 강했던 신라 중대(무열왕~혜공왕)였다. 신라 중대는 신라 역사상 최초로 진골이 왕이된 시대이며, 더불어 삼국통일, 나당전쟁 이후 내외의 커다란 위협없이 많은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또한 유교를 도입하여 전제 왕권을 형성하였으며 6두품을 등용하여 다른 진골과 대립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황금의 시대를 열어가게 되는 신라의 전성기였다. 특히 경덕왕때 치세가 극에 달해 제반, 제도, 관직을 당 제도로 개편하고, 전국의 행정체제 및 행정단위의 명칭을개혁하며 행정구역을 9주 5소경으로 나누었다. 또 불교 중흥에도 노력하였는데 불국사,석굴암이 완공된 때도 이때였으며, 세계 최고의 종이라 불리는 성덕대왕신종(봉덕사 종)이 주조된때도 이때였다. 당시 경덕왕의 치세가 얼마나 대단했냐면 삼국사기에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


 

 현종이 오언십운시(五言十韻詩)를 몸소 짓고 써서 왕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신라 왕은 해마다 조공을 잘 행하고 예악과 대의명분을 잘 실천하므로 시 한 편을 지어 주노라.』 하였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우주는 해와 별[景緯]로 나뉘어 있지만, 
만물은 중심축[中樞]에 물려 있도다. 

구슬과 비단은 천하에 두루 퍼져 있어, 
산 넘고 물 건너 장안(長安)으로 몰려든다. 

생각하니 푸른 뭍은 아득히 떨어져 있으나, 
오랜 세월 중국을 부지런히 섬겼도다. 

멀고 멀리 땅이 다한 그 곳, 
푸르디 푸르게 이어진 바다의 구석에 있음에도 
명분과 의리의 나라로 일컬어지니, 
어찌 산과 물이 다르다 하겠는가? 

사신은 돌아가 풍속과 가르침을 전하고, 
사람들은 찾아와 법도를 익혔네. 

의관(衣冠)을 갖춘 이는 예절을 받들 줄 알고, 
충성과 신의가 있는 자는 유학(儒學)을 높일 줄 아는구나. 

성실하도다! 하늘이 이를 굽어볼 것이며 
어질도다!  덕행은 외롭지 않으리라. 

가지고 있는 깃발은 작목(作牧)과 같고, 
후한 선물은 생추(生芻)에 비할 만하다. 

푸르고 푸른 지조 더욱 소중히 하여, 
바람과 서리에도 늘 변하지 말지라!』 

황제가 촉(蜀)지방에 가 있을 때 신라는 천리 길을 멀다 않고 황제가 있는 곳[行在所]까지 찾아가 조회하였으므로, 그 지극한 정성을 가상히 여겨 시를 지어 준 것이다. 시 구절 중에 『푸르고 푸른 지조 더욱 소중히 하여, 바람과 서리에도 늘 변하지 말지라!』 한 것은 어찌 옛날 시 구절의 『모진 바람이 있은 뒤에야 굳센 풀을 알게 되고, 어지러운 세상이라야 곧은 신하를 알 수 있다.』라는 의미가 아닐까? 선화(宣和) 연간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부의(金富儀)가 시를 새긴 판본을 가지고 변경(汴京)에 가서 관반학사(舘伴學士) 이병(李邴)에게 보였다. 이병이 황제에게 올리니 황제가 양부(兩府)와 여러 학사들에게 돌려 보인 후 황제의 의견을 전하여 “진봉시랑(進奉侍郞)이 올린 시는 틀림없는 명황(明皇)의 글씨다.”라 하면서 감탄해 마지않았다. 

김부식 『삼국사기』9권 경덕왕 15년(756)



 비록 자주적인 측면에서 비판을 받을 수 있는 내용이긴 하나 당의 황제가 친히 신라에 시를 지어 보냈다는 점이 흥미롭다. 신라와 당의 돈독한 관계를 확인함과 동시에 경덕왕의 치세를 잘 보여주는 기사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신라는 발해의 개혁과 함께 추락하기 시작한다. 발해가 변화를 시작한 때는 우리나라 역사상 3번째로 긴 재위기간을 채운 임금이자 발해의 3대왕인 문왕때였다. 문왕은 문화개혁을 통해 발해의 제도를 개선해 나가기 시작했다. 무려 54년에 걸친 점진적인 개혁의 결과 당과의 화해에 성공하며 당으로부터 발해를 정식국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문왕은 당나라의 3성 6부를 기본 뼈대로 한 독자적인 중앙 통치 기구를 만들어 운용하였으며 행정조직(5성 15부 62주) 정비, 군사제도 개편, 불교 발전 등에 힘썼다. 신라와도 관계를 개선하여 신라길이라는 무역로를 통해 교류하기도 했다. 특히 문왕은 당과 친하게 지내면서도 스스로 하늘의 자손이라 칭했을정도로 자주적인 모습을 보였다. 

 문왕의 가장 큰 업적은 자주성을 지킨 와중에도 당나라와 유연한 정책을 피기하면서 관계 개선에 성공하고 문치국가로서의 변화에 큰 공헌을 끼쳤다는 점이다. 비록 문왕 다음대의 선왕때 해동성국이라 불릴정도로 왕성한 영토 확장을 했던 발해지만 문왕때의 여러 제도들을 바탕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결국은 완벽한 문치국가로 탈바꿈하는데 이르게 된다. 그리고 문왕이 이룩해놓은 당나라와의 관계개선은 후에 발해의 무역로를 통해 당나라와의 원할한 교류를 가능케 만들었으며 비록 아직 사이는 좋지 않지만 신라와도 신라길이라는 무역로를 만들어 100년만의 민족 교류가 이루어졌다.

▲ 발해 5경

 발해는 총 5번의 도읍지 천도를 했는데 698년 홀한성이라는 성을 쌓아 동모산에 거점을 뿌리박은 것이 첫번째 도읍지였다. 동모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중경쪽에 있는것으로 추측된다. 그후 48년간 도읍의 역할을 하다가 문왕대에 이르러 천도를 단행한다. 756년 상경용천부로 도읍을 옮긴 것이다. 이는 755년 당나라의 운세가 기울면서 안록산의 난이 큰 혼란을 가져오자 발해는 당나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북쪽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천도는 신라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위의 지도에서 보다시피 발해의 새로운 도읍인 상경은 중경에 비해 만주쪽으로 치우쳐있다. 즉 발해가 신라에 대한 견제와 신라의 발해에 대한 전쟁의 두려움이 소멸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신라는 급변한다. 비록 발해가 수도를 천도한 756년은 신라 왕권의 최고봉이었던 경덕왕때였으나 765년 다음왕으로 오른 혜공왕대에 이르러 전쟁의 위협과 경덕왕의 치세로 짓누르고 있었던 귀족들의 기세가 드디어 양지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혜공왕이 즉위하자 귀족들은 노골적으로 혜공왕의 자리를 노렸다. 전대 경덕왕의 치세에 눌리고 살아야 했던 귀족들이었지만 혜공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는 것이 그들을 자극해버린 것이다. 태후의 섭정 기간동안 경덕왕의 전제주의를 기반으로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귀족세력의 반발을 살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왕과 귀족들의 세력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그 결과 786년 일길찬 대공의 모반, 770년 대아찬 김융의 모반, 775년 이찬 김은거의 모반등, 귀족에 의해 왕권은 끊임없이 위협당했다. 마침내 780년 김지정의 반란 과정에서 김양상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난군에 의해 왕과 왕비가 피살당하게 된다. 그리고 김양상이 신라의 새로운 왕,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신라 중대의 종말과 동시에 신라 하대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신라하대에는 발해가 완전 문치국가로 탈바꿈됨으로써 동아시아 3국(당나라, 발해, 신라)에는 평화의 시대가 이룩된다. 하지만 이 시대는 무武력의 전쟁이 아닌 문文력의 전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발해 유학생들이 당나라의 외국인관직시험에서 신라 유학생들을 넘어서게 되자 신라가 당나라에 불만을 토한 것이 신라와 발해의 신경전이었을정도로였다. 이 시대의 가장 큰 적은 당나라도, 발해도, 신라도 아닌 해적들이었는데 장보고라는 걸출한 위인이 이를 진압하면서 일단락 되는 듯 했으나 신라의 뻘짓(?)으로 무산되었다. 


 하지만 신라하대의 시작은 신라 비극의 시작을 의미했다. 신라하대 155년동안에 왕이 20명이나 교체될 정도로 신라는 나라안팍의 안위를 걱정하기보다는 왕위쟁탈에 눈을 밝혔다. 그리고 결국 진성여왕대에 이르러서야 귀족들의 횡포를 못이긴 여러 영웅들이 난을 일으켜 후삼국시대가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후삼국시대의 시작은 신라와 발해의 쇠퇴기이자 당나라의 멸망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당나라는 200년간의 평화동안 동아시아 최강국의 자리를 유지해 나갔으나 제도의 헛점과 무능한 황제와 간신배의 등장으로 901년 멸망해버렸다. 당나라가 멸망하자 대륙에서도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여러나라로 분열되어 5대10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한반도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당시 신라가 얼마나 쇠약했던지 신라의 통치범위가 고작 금성주위로 국한되었을 정도였다. 심지어 금성과 아주 가까웠던 상주에서 아자개가 봉기를 일으켰는데 신라는 그것을 막을 힘조차 없었다. 후삼국이 시작되자 신라왕의 초상을 칼로 베었던 궁예는 노골적으로 반신라적인 성격을 보였고, 후백제왕 진훤에게는 신라왕이 살해될 정도로 쇠락하였다. 발해 역시 신라와 마찬가지로 지배세력의 내분으로 피지배층이던 소수민족에 대한 통치력이 약해지자 거란이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차례대로 발해는 거란에 의하여 926년, 신라는 고려에 의하여 935년 멸망하였다.


by 초령목 2013. 1. 20.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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