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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5.04 27. 순헌황귀비 엄씨 1
- 2011.12.24 세종대왕은 ‘앉아있는 종합병원’이었다
- 2011.11.13 궁예, 불교국가의 이루지 못한 꿈
- 2011.10.29 [O2/커버스토리]國弓 미스터리… 작지만 강한 ‘최종병기’
- 2010.10.22 궁예와 왕건, 진정한 역사의 승자는?
조선 마지막 황태자 어머니
뛰어난 지혜와 인품으로
궁인서 황귀비까지 출세
아관파천 이끈 숨은 주역
“인재 불사가 나라의 미래”
진명·명신여학교 등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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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고종 32년) 10월. 조선의 국모가 시해됐다. 일본의 사주를 받은 흉도들의 짓이었다. 이날 새벽 일본군과 경찰의 비호 아래 궁궐에 침입한 흉도들은 곧장 명성왕후의 침실을 습격했다. 조선 침략의 걸림돌인 명성왕후를 제거할 목적이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신음하던 조선의 국모는 그렇게 일본의 칼 끝에서 무참히 스러졌다. ‘을미사변(乙未事變)’은 당시 극에 달했던 일본의 횡포를 극명하게 드러낸 치욕적 사건인 동시에, 역사상 유례없는 비극으로 일컬어진다.
아내를 잃은 고종은 두려움에 떨었다. 일본인 무뢰배들이 궁궐 한복판에서 왕비를 죽이는 상황에, 왕이 언제든 목숨을 잃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종은 무엇보다 사람이 절실했다. 누구 하나 마음 놓고 의지할 곳 없는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믿을 수 있는 사람, 죽은 명성왕후의 빈자리를 대신해 늘 곁에 머물며 왕의 안위를 보살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
고종은 지난 세월을 더듬어 한 사람을 기억해 냈다. 한때 승은을 입었으나 명성왕후의 질투로 궁 밖으로 쫏겨난 여인, 바로 엄 상궁이었다.
비록 박색에 일개 궁인의 신분이었지만 영민한 두뇌와 판단력, 그리고 후덕한 인품은 따를 자가 없었다. 못생긴 외모에도 왕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던 요인이 바로 남다른 내면에서 비롯된 매력에 있었던 셈이다. 명성왕후 역시 이런 엄 상궁을 몹시 아꼈기에, 그녀가 남편 고종의 승은을 입자 더 큰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고 전해진다. 명성왕후는 그녀를 즉시 처단해 목숨을 거둘 것을 명했지만 고종의 만류 덕에 엄상궁은 목숨만은 부지한 채 궁 밖으로 쫓겨났었다.
고종의 다급한 부름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꼭 10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특히 명성왕후가 서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등장한 ‘과거의 여인’인 만큼 왕실의 환영을 받지 못했음은 당연지사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엄씨는 재입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국정에 간여하며 뇌물을 받는다는 소문이 퍼져 사람들의 미움을 사기까지 했다.
“(왕이) 엄씨를 불러 입궁토록 했는데 변란이 있은 지 불과 5일밖에 지나지 않아서였다. 임금이 해도해도 너무하다고 서울 사람들이 모두 한탄했다. 엄씨는 외모는 물론, 권모와 지략이 민후(명성왕후)와 같았으며 곧 국정에도 간여하여 뇌물을 받았다.”
현명하기 이를 데 없었다는 엄상궁이 뇌물로 구설에 오르다니, 과연 어찌된 연유일까. 소문은 엄상궁이 인적이 드문 시간이면 가마를 타고 출궁하는데서 시작됐다.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왕실에 연줄을 대려는 사람들이 친가에 두고 간 뇌물들을 가지러 나간다”고 쑥덕댔고 ‘엄상궁 뇌물설’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왕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일본 경찰들도 엄상궁의 출궁은 별 다른 검사 없이 통과시키기 일쑤였다. 출궁이 잦아질 수록 엄상궁이 쥐어주는 푼돈 모으는 재미가 쏠쏠한 터였다.
그러나 사실 엄상궁의 잦은 출궁은 일본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횡포는 나날이 심해져만 갔으며, 특히 고종은 일본의 등쌀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조선을 지켜내기는커녕 일본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꼴이 될 것이 자명했다. 영민한 엄상궁이 이런 고종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직접 뇌물을 수거하러 간다는 소문을 퍼트린 것도 궁을 자유롭게 나갈 수 있는 초석을 미리 닦기 위함이었다. 엄상궁의 지략이 빛을 발할 순간이 곧 찾아왔다.
명성왕후가 세상을 떠난 지 4개월이 지난 어느 새벽. 살며시 궁궐 문이 열리고 가마가 나타났다. 가마에 타고 있던 궁인이 두둑한 돈주머니를 건넸고, 일본 경찰들은 피식 웃으며 가마를 통과시켰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엄상궁의 출궁이었다.
그런데 이날 출궁에 일본 경찰들이 미처 눈치재지 못했던 또 다른 동행자가 있었으니, 바로 고종과 세자(숙종)였다. 왕을 태운 가마는 궁궐을 벗어나기가 무섭게 러시아 공사관으로 내달렸다. 아관파천(俄館播遷), 조선의 왕을 일본의 손아귀에서 안전하게 구출해 주권을 되찾기 위한 전략이었다.
엄상궁의 가마 속에 고종이 숨어 있었음을 알게 된 일본은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이미 고종은 안전하게 러시아 공관에 도착, 모든 주도권은 러시아로 넘어간 후였다. 엄상궁의 치밀한 계획 하에 고종을 일본의 손아귀에서 구출하려는 위험천만한 계획이 거짓말처럼 성공한 셈이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엄상궁은 고종의 무한한 신뢰를 받았음은 물론, 친러세력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입지를 본격적으로 굳혀가기 시작했다.
고종의 총애는 나날이 깊어졌고 급기야 엄상궁은 마흔넷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아들을 출산하기에 이른다. 이 아들이 훗날 영친왕이자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이은이다. 대한제국의 뒤를 이을 황자의 출산으로 엄상궁의 지위는 급속히 높아졌다. 이틀 만에 귀인으로 책봉, 한순간 정5품 지밀상궁에서 종1품으로 출세했을 뿐 아니라, 1900년에는 후궁 품계 중 가장 높은 신분인 순빈 칭호를 받으며 고종의 정식 후궁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일부 신하들은 명성왕후의 뒤를 이어 엄씨를 황후로 승봉할 것을 요청하는 등 그녀를 전격 지원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정부 의정 윤용선 등이 올린 상소 기록이 전해진다.
“순빈 엄씨는 좋은 명성이 미치는 바 천성이 온화하고 자애로우며 규범이 정숙할 뿐 아니라 자신을 낮추어 높은 사람을 넘어서지 않고 새 사람으로서 오랜 사람 앞에 나서지 않아 얌전하고 겸손하다는 소문이 많으니 응당 신분을 높여야 한다.”
“참으로 한결같은 덕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지난번 나라가 위태로운 때 폐하를 돕고 황태자(순종)를 보호하느라 많은 수고를 했다. 제사를 받들때는 공경심을 한껏 다했으며 이미 폐하의 총애를 받아 황태자(영친왕)까지 낳음으로써 자손이 끝없이 번성할 경사를 열어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 같은 평가는 아관파천 이후 엄씨를 향한 왕실의 인식이 더없이 긍정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엄씨는 이렇듯 왕과 신하들의 인정을 받으며 미천한 궁인에서 순빈으로, 다시 순비로, 또 황귀비로 신분이 승격되는 등 궁인 출신으로서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비록 죽은 명성왕후와 동급인 왕후의 신분엔 오르지 못했지만 고종이 죽는 날까지 또다른 왕후를 정하지 않았기에 엄씨는 사실상 조선의 국모나 다름없는 지위를 누렸던 셈이다.
못생긴 외모와 천한 신분에도 그녀가 이토록 출세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무엇보다 내면의 아름다움과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나 정치적 요인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버릴 각오로 아관파천을 성공시킨 지략과 담대함은 여느 왕실여성에게 찾아보기 힘든 남다른 면모임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엄씨는 조선의 미래를 위해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교육자이기도 했다. 그녀는 왕실재산을 희사해 교육 불사에 매진했다. 당시 조선에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선교를 목적으로 설립한 신식 학교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었는데, 엄씨는 이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고 여성 교육에 대한 사회적 욕구를 적극 수용, 민족 여성 교육의 장을 활짝 열었다.
1906년 진명여학교와 숙명여학교의 전신 명신여학교 설립이 대표적이다. 엄씨는 진명여학교 설립을 위해 경선궁 재산인 강화군의 토지와 임야 111만여평과 부천의 토지 77만평, 창선궁 터 1300여평 등을 기꺼이 보시했으며, 명신여학교 설립을 위해 명문가 부녀들로 구성된 후원회를 조직했다. 1907년에는 사재를 털어 경영난에 부딪힌 양정의숙을 구제하고 운영경비를 지급하는 등 다방면에 도움을 전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녀는 교육만이 조선의 미래를 밝힐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 확신했을 터다. 이런 교육을 향한 엄씨의 신념은 영친왕의 유모였던 최송설당에게도 영향을 미쳐, 김포고등학교 창립을 이끄는 기반이 된다.
최송설당과의 인연은 엄씨가 신심 깊은 불자였음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최송설당은 영친왕이 태어난 순간부터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기 전 10여년간 유모로 살았다. 최송설당이 봉은사에서 기도를 하다가 엄씨의 동생과 맺은 친분으로 입궁했다는 기록은 두 여성의 인연이 불교에 기반하고 있음 보여준다.
한편 엄씨가 이미 오래전부터 최송설당을 알고 있었을 것이란 견해도 있다. 승은을 입고 궁에서 쫓겨나 부산의 한 사찰에 몸을 의탁했던 시기, 마찬가지로 사찰에 머물던 최송설당과 만나 도반의 인연을 맺었을 것이란 추측이다.
출궁 당시 엄씨의 정확한 행보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당시 왕실 체계상 엄씨가 동생의 추천만으로 외부인을 왕자의 유모로 삼아 궁에 들일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점에서 일면 설득력이 있다.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 의지했던 인간적 교류를 나눈 도반이라면, 다시 만난 순간 그에 따른 신뢰와 반가움 또한 남다른 측면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엄씨는 평생 궁 밖 세상을 모르고 살다가 최송설당을 만나 비로소 불교에 깊이 매료됐던 것은 아닐까.
실제 엄씨는 이후에도 조선이 위태로울 때면 부처님의 위신력에 마음을 기댔다. 1900년 중반 을사늑약으로 주권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자, 개인재산을 보시해 경전을 간행하는가 하면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보수하는 등 각종 불사를 일으켰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막막한 상황, 일말의 희망을 불교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다.
엄씨는 개인적인 신앙도 남달라 아들을 낳기 전에는 북한산 무량사를 원찰로 삼아 약사여래불과 탱화를 봉안하고 100일기도를 올렸다고도 전해진다. 어찌보면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그녀의 신심을 다한 기도 덕에 늦게 본 애틋한 자식인 셈이다. 때문인지 엄씨는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아들을 향한 그리움 때문에 죽음을 맞았다는 설도 전해진다. 공식사인은 장티푸스지만, 당시 신문보도에는 영친왕이 일본 군복을 입고 훈련을 받다가 주먹밥을 먹는 사진을 본 충격으로 죽음을 맞았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조선 마지막 황태자의 어머니이자 한낱 궁인에서 황귀비까지 파격적인 신분상승을 했던 여인 엄씨. 그녀는 못생기고 천한 신분의 후궁이었지만 이를 뛰어넘는 지혜와 담대함, 현숙함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비록 알려지진 않았지만 조선의 마지막 순간, 인재불사를 통해 희망의 불씨를 당긴 선구자였다는 점에서 그 삶의 여적은 적잖은 감동을 전한다.
http://beopbo.com/news/view.html?section=93&category=99&no=75326
세종대왕은 ‘앉아있는 종합병원’이었다 (0) | 2011.1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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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불교국가의 이루지 못한 꿈 (0) | 2011.11.13 |
[O2/커버스토리]國弓 미스터리… 작지만 강한 ‘최종병기’ (0) | 2011.10.29 |
궁예와 왕건, 진정한 역사의 승자는? (0) | 2010.10.22 |
집현전으로 쓰였던 경복궁.
왕의 이동식 변기.
27. 순헌황귀비 엄씨 (1) | 2013.05.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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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불교국가의 이루지 못한 꿈 [2008.09.26 제728호] |
[박노자의 거꾸로 본 고대사] 승자의 역사 속에서 잔혹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고려의 창립자… 전면적 ‘명예 회복’의 날은 올 것인가 |
왕건 쿠데타의 정당성 입증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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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발탁해준 궁예를 제거해 쿠데타로 왕권을 탈취한 태조 왕건의 왕조를 섬겼던 사가들이 그려놓은 궁예의 이미지는 ‘캐리커처’에 가깝다. 예컨대 <삼국사기>의 궁예는 ‘태생적 악인’으로 묘사된다. 신라 왕의 서자로 태어났는데, 날 때부터 이빨이 있는데다 단옷날에 태어나 흉측한 징조들을 나타내니 일관(日官·주술을 담당하는 신라 관료)의 권유로 왕실에서 죽이려 함에도 우연히 살아남아 죽임을 피하는 과정에서 애꾸눈이가 된 것이다. 어릴 때부터 ‘미친 버릇’이 있어 품행이 단정치 못해 유모에게서도 버림받아 승려가 되지만, 계율을 지키지 못해 도적 양길의 부하가 돼 신라 말기의 난세를 틈타 호족으로 몸을 일으킨다. 901년에 스스로 후고구려의 왕임을 선포하고 나서 부석사에 걸려 있는 신라 왕의 초상에 칼부림을 하고 신라 귀순자들을 모조리 죽이는 등 신라에 대한 광적인 증오심을 보인다.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하고 불교의 이상적 군주인 전륜성왕인 것처럼 보배로운 금색 왕관을 쓰고 요망한 말만 담겨 있는 경전 20여 권을 짓는데, 그의 불교론에 반대하는 승려 석총을 때려죽인다. 그 다음에 그에게 간언을 한 부인을 “당신이 간통했다는 걸 신통력으로 알았다”고 하여 음부를 찔러 잔혹하게 죽이고, ‘보살’로 칭해졌던 두 아들도 죽인다. 그에게 죽임을 당하는 이들이 평민에 이르기까지 다수가 되니 이를 더 이상 차마 보지 못한 왕건은 918년에 “어쩔 수 없이” 뭇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그를 제거하고 스스로 임금이 된다. <삼국사기> ‘궁예전’의 내용을 간추리면 대체로 이렇게 왕건 쿠데타의 ‘절대적 정당성’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골자가 될 것이다.
쿠데타로 집권한 무인치고 제거된 정적을 욕하지 않는 경우가 있겠는가? 박정희에게 장면 정권의 시대가 ‘무질서·부패·무능’의 시대였다면, 김일성은 박헌영을 ‘미제의 고용 간첩’으로 만들었다. 다행히도 장면과 박헌영 쪽의 사료가 남아 있기에 장면이 (박정희 자신과 달리) 개인적 부패를 전혀 하지 않았던 사실과 경제발전 계획을 수립하는 등 상당한 통치력을 민주적으로 발휘했다는 사실, 그리고 박헌영이 스탈린주의적 도그마에 빠져 있긴 해도 근본적으로 열성적 노동계급 혁명가였다는 사실을 확연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두 패자와 달리 궁예에게는 현존하는 자신의 기록이 없다. 그래서인지 전통 시대에는 물론 근대에 접어들어도 그에 대한 이렇다 할 ‘재평가’가 이뤄지지 않았다.
신채호는 그에게 다소 무관심했지만, 안확(1886~1946)은 “고구려에 대한 인민의 향수를 교묘히 이용하여 신라를 분열시킨 폭력적 야심가” 정도로 취급했다(<조선문명사>, 1923). 타성의 탓인지 이병도(1896~1989)와 같은 근대 강단 사학의 거목들마저도 왕건 쪽의 ‘흑선전’에 불과한 사료를 별 비판 없이 받아들여 “미륵을 자칭하고 극도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위경(僞經)이나 짓고 부녀자까지도 가혹하게 죽이는 궁예”에 대한 왕건의 쿠데타를 사실상 두둔해주었다(<한국사 고대편>, 1959). 비판정신이 강한 이기백(1924~2004) 선생은 궁예가 후고구려의 국가적 제도를 제대로 정비한 점이나 7세기 중반 이후의 신라 전제왕권을 모방하기 위해 숙청 등 폭력적 방법을 불가피하게 썼다는 점 등을 인정해주었지만 “자기 합리화를 위해 불교의 신비적 요소를 이용한” 궁예가 결국 “폭군으로 전락”해 왕건에 의해 제거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됐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한국사신론>, 1967). ‘민중’의 존재에 눈을 뜬 198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초적(草賊) 등 신라 말기 반란적 민초들에게 기댔던 궁예에 대한 긍정적 관심이 고조됐다. 그러나 7년 전에 안방을 정복하다시피 한 사극 <태조 왕건> 속의 궁예는 멋진 카리스마의 소유자였지만, 여전히 ‘폭군’의 면모를 지녔다. 그만큼 궁예를 ‘인격 말살’시킨 <삼국사기> 이후 기록들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이 기록들을 부정할 만한 궁예 쪽 기록은 현존하지 않지만, 고려시대의 궁예 관련 기술에선 역사적 맥락과의 모순과 노골적 편향 등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승려 석총·신라 귀순자들을 죽인 이유<삼국사기>에는 궁예가 ‘신라 왕의 궁녀의 아들’이라고 돼 있는데, 헌안왕(재위 857~861)인지 경문왕(재위 861~875)인지 편찬자 본인도 잘 모른다고 털어놓는다. 실제 왕자였다면 그 계통에 대한 분명한 자료가 남았을 법한데, <삼국사기> 기록이 왔다갔다 하는 점으로 봐서는 아마도 항간에서 떠도는 소문 이상의 근거가 없었을 것이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흉측한 징조가 일어나 왕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다는 이야기는 주몽신화 등을 연상시키는 일종의 ‘전도된 영웅탄생담’이다. 주몽신화만큼이나 주인공의 ‘태생적 비범함’이 부각되지만, 주인공은 애당초부터 마땅히 당해야 할 죽임을 우연히 비켜간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궁예는 결국 승려가 될 수밖에 없는 몰락한 진골 귀족이 아니었을까 짐작하게 되는데, 그는 계율이나 어기는 속칭 ‘땡땡이’는 분명 아니었다. 사찰에서 아무것도 못 배웠다면 과연 20여 권의 불경을 지을 수 있었겠는가? 신라의 왕들 중에 불교적 저술을 직접 남겼다는 이가 없는데, 군주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불교적 저술에 정력을 쏟은 궁예는 실제로 그 시대에는 비상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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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승려 석총은 <삼국유사>에서 유명한 진표율사(8세기)의 계승자로 언급된 석충과 동일한 인물로 추측되는데, 궁예는 진표나 석충처럼 법상종에 속했음에도 그 계통을 달리했다. 자신의 아들들에게 아미타보살과 관음보살을 의미하는 이름(신광보살·청광보살)을 준 궁예의 불교가 미륵과 아미타, 관음 중심이었다면 진표의 불교는 미륵과 지장보살 신앙을 중심으로 했다. 석총(석충)의 살해를 합리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둘 사이에 나름의 모순이 진작부터 존재해온 이상 단순히 ‘화나서 죽인’ 건 아니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또한 <삼국유사>에서 석충이 왕건과 내통했던 인물로 묘사되는 점까지 감안하면 석총(석충)의 살해에 왕건 세력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의미가 깔려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석총(석충)이 희생된 반면에, 명주(강릉) 호족 김순식의 아들인 승려 허월이나 승려 출신의 종간(宗侃) 등 수많은 불승이나 승려 출신들은 궁예를 끝까지 지켰다. 즉, 김부식은 우리가 읽을 수 없는 궁예의 불교적 저술들을 ‘요망하다’고 폄하했지만, 과연 동시대 불자들의 입장에서도 그랬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본인이 속했던 법상종과 경쟁 종파이던 화엄종의 사찰 부석사에서 궁예가 신라 왕의 초상화를 칼로 찢었다는 점이나 신라 귀순자들을 죽였다는 점 등은 얼핏 괴상해 보이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납득할 수 있는 면들도 없지 않다. 예컨대 주로 초적, 즉 신라의 극심한 세금 독촉을 참지 못해 정든 고향을 떠나 떠돌이가 된 민중으로 구성된 군대를 지지 기반으로 삼았던 궁예가 과연 민중에게 혐오스러운 존재가 된 신라 귀족들의 귀순을 받아들이기가 쉬웠겠는가? 당시에 ‘귀순자’란 일반 백성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었음을 잊지 말기 바란다. 태조 왕건이야 신라 귀족들의 귀부를 잘 받아주었지만, 그는 초적들의 도움을 받아온 반란자 궁예와 달리 ‘정통’ 지방 호족 출신이었다는 점도 기억해둬야 한다. 궁예가 부인 한 명과 아들 둘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현대의 독자에게 충격적인 ‘포악함’으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왕건 쿠데타의 쉬운 성공이 보여주었듯이 지방 호족의 영토를 직접 통제할 수 없는 궁예 왕권의 기반은 사실상 꽤 취약했다. 그만큼 궁예는 언젠가 있을지 모를 정변에 대한 경각심을 늘 늦출 수 없었던 것이고, 처가 쪽이 세력화돼 자신에게 불리하게 움직일 것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계책을 채택할 만한 이유는 있었을 것이다. “간언을 드리는 부인의 음부를 찔러 잔혹하게 죽였다”는 설정은 후대의 유교주의적인 조작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부인과 아들들의 처형을 사실로 인정한다 해도 신라 말의 혼란기라는 잔혹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일인 만큼 “폭군만이 할 수 있는 짓”이라고 보기 어렵다. 당시에는 그것도 ‘정치’였다.
측천무후를 벤치마킹?
김부식부터 이병도까지 궁예가 “미륵을 자칭했다”는 것을 “민중의 미신을 이용하는 요망한 행위”로 취급해왔다. 그런데 정치의 불교화 자체는 그 시대에 그렇게까지 특출한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궁예가 태어나기 약 1세기 전에 일본에서 궁예와 같은 법상종에 속하는, 그리고 궁예 못지않게 신비주의에 관심을 보였던 승려 도쿄(道鏡·700~772)가 효겸여황의 애인이 되어 불교에 기반하는 일련의 정책을 폈다가 결국 스스로 천황이 되려는 야심이 문제가 되어 실각당해 귀양가게 된 일이 있었다. 또한 당나라의 여황인 측천무후(則天武后·624~705)도 690년에 중국사에서 유일무이한 여황제가 됐을 때 궁예와 비슷한 모양으로 ‘전륜성왕’을 자칭하고 미륵신앙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자신이 ‘미륵불의 화신’이라는 설을 퍼뜨려 ‘일체 중생을 제도할’ 미래불인 자신의 즉위를 합리화하려 한 것이다. 아직 연구되지 않은 주제지만, 사실 궁예가 꽤나 의도적으로 측천무후를 ‘벤치마킹’해서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디자인한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측천무후의 측근 승려 중에서는 그를 위해 위경을 지어주고 아부하는 무리들도 있었지만 그의 비호하에서 법장(法藏·643~712)과 같은 화엄학의 거장들이 중국 불교를 크게 일으키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측천무후의 사례를 이용해 자신을 유교적 성인(聖人)이 아닌 미래의 부처, 고난에 빠진 중생에게 열반의 희망을 주는 미륵불로 규정한 궁예의 불교가 꼭 ‘요망’하기만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신라 말기의 실정, 진골 귀족 정권의 혹독한 가렴주구, 그리고 혼란기의 처참한 살육에 지치고 평등과 안락의 새 시대를 열망했던 민초들에게 사실 유교적인 엄숙주의·도덕주의보다는 군주가 종교적인 ‘구세’까지 약속해주는 불교적인 ‘종교 국가’가 더 가까이 와닿았을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궁예의 불교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것이었다. 물론 그가 민초들의 ‘평등과 안락에의 갈망’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도쿄도, 측천무후도, 궁예도 실패했다. 미천한 평민들의 발탁이라든가 각종의 종교적인 민심 수습책 등 꽤나 이례적인 정책을 폈던 그들에 비해 동아시아 사회의 기득권층은 차라리 ‘안정적인’ 유교적 통치를 선호했다. 정치적 실패는 역사학자들에 의한 ‘인격 말살’로 이어졌는데, 이는 ‘천황의 계통을 단절시킬 뻔한 도쿄’나 ‘폭군 궁예’의 경우에 특히 심했다. 중국에서도 최근에 와서야 측천무후의 대담한 왕권 탈취가 양성평등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일면의 긍정적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과연 한국 역사학에서도 이색적인 불교적 통치자 궁예에 대한 전면적 ‘명예 회복’의 날이 올 것인가?
참고문헌:
1. ‘철원환도 이전의 궁예정권 연구’ 강문석, <역사와 현실> 57호, 2005년 9월, 241~273쪽
2. “궁예의 미륵세계” 김두진, <한국사 시민 강좌> 제10집, 1992, 19~37쪽
3. ‘궁예와 그 미륵사상’ 양경숙, 국민대 석사학위 논문, 1988
4. ‘태봉국형성과 궁예의 지지기반’ 오영숙, 숙명여대 석사학위 논문, 1985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342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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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를 당기면 활과 나는 하나가 된다. 손끝은 파르르 떨리지만 정신은 오로지 과녁을 향하고 마음은 차분해진다. 황학정의 장동열 접장이 시위르 당기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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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향토사연구회 운영위원장 김 영 규
1. 머리말
지난 2005년 철원군에서는 태봉국(泰封國) 철원정도 1100주년을 맞이해 국내외 역사학자들을 대거 초치하여 태봉국과 궁예(弓裔) 관련 학술 세미나를 개최하고 연구 및 저술 활동을 지원한 바 있다. 2년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집중적인 조사연구 지원으로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 과도기니 나말여초(羅末麗初)니 하여 그간 소외되었던 분야를 주목받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당시 참여했던 발표자나 연구자, 토론자 대부분이 태봉국과 궁예에 관한 문헌 사료가 절대 부족하고 극히 제한되어 있어 단기간에 다양하고 깊이 있는 연구 성과를 기대하는 것에는 회의적이었다.
지자체가 지원한 기간이 짧아 관련 유물이나 유적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접근이 미비하고, 궁예도성을 비롯한 태봉국 관련 주요 유적이 접근이 불가능한 DMZ 안에 분포하는 관계로 더 이상의 연구진척은 무리였다.
이는 후삼국(後三國) 정립기인 태봉국의 존립시기가 20여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과도기이자 쟁패(爭覇)의 시기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문제인 것은 기존에 존재하는 1차 사료인 三國史記, 三國遺事, 高麗史 등에 나타난 태봉국과 궁예 관련 기록이 다소 부정적으로 왜곡되고 편협한 시각으로 기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역사가 승자(勝者)의 기술(記述)이라고 하지만 반대편에 섰던 패자들의 행적과 성향을 너무 심하게 왜곡하였다.
당시 학회 참가자들도 이런 왜곡된 1차 사료를 어느 정도나 인정해야할지 진정성 문제로 갑론을박(甲論乙駁)이 심했고 오히려 궁예를 동정(?)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강원도에서는 유일한 도읍지였던 철원군 주민들은 대동방국(大東邦國)을 지향하고 주체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엄격한 신라골품제사회에서 소외되었던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하는 새로운 세상을 연 태봉국이 18년 짧은 왕조로 끝난 점을 애석하게 생각한다.
지금도 철원에는 부하들의 반란으로 권좌에서 쫓겨나 한탄강을 건너서 명성산(일명 울음산)에 숨어들어 항전하다가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는 궁예전설이 내려온다. 이에 미처 이루지 못한 궁예의 꿈은 무엇인지, 태봉국은 왜 단명했는지, 어떤 역사적 의의가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뒤를 이어 고려를 건국한 왕건과는 자라난 환경이나 후원 세력, 정치적 성향에서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진정한 역사의 승자는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태봉국과 궁예 관련 기술(記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삼국시대 역사 연구의 핵심 사료인 三國史記를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우리 역사학계에서도 논쟁거리였다.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 라는 투쟁론을 주창하고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를 지은 독립 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사학자인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1880-1936) 선생은 김부식 이래 내려오는 지배자 중심, 왕조 중심 사대주의 사관(史觀)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우리가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기록들이 기본적으로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특히 '古代의 一, 二 史家가 자기의 好惡대로 아무 책임감 없이 지은 것이 문제라고 하였는데 이는 고려사와 삼국사기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이 조선과 고려의 건국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편찬된 것인 이상 거기에는 일정하게 정치적 목적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궁예의 신라왕자설에 대해서 전면적. 본질적으로 의심을 표명했다. 신채호는 '高麗史官이 구태여 世達寺 一個 乞僧 궁예를 가져다가 고귀한 신라 황궁의 왕자로 만들었다고 보고, 그 이유를 정변을 통해 국왕 궁예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왕건의 혁명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함이었다고 하였다. 즉 궁예를 아버지에 대해 불효하며, 宗國에 대해 不忠하였던 인물로 묘사함으로써 그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인물로 만들었다는 것으로 이 모든 것이 김부식의 계획된 의도라는 것이다.
신채호의 비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古來로 전통적인 역사서는 述而不作 원칙만큼은 지켜졌다고 하니 있는 사실은 그대로 기록했고 없는 것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정치적 선택으로 다소 과장된 점은 인정하되 사실과 내용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난맥상이 태봉과 궁예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겪는 어려움이기도 하다.
본 글은 철원지역에서 향토사 조사연구 활동하며 읽었던 태봉국 및 궁예 관련 서적 3~4권의 내용과 강원대학교 대학원 도서관의 관련 도서 3권의 내용을 주제에 맞게 발췌하여 정리하였다.“태봉국의 궁예왕은 실패한 왕이다." 혹은 “고려의 왕건이 진정한 승리자다."라는 말에 다소 공감은 하나 동의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태봉국은 왕건의 고려를 탄생시키는 정치 사회적 모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태봉국이 없었다면 고려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시대적으로 환경과 역할이 서로 달랐을 뿐이다. 출신 배경과 자라난 환경이 근본적으로 달랐기에 그들 각각의 정치성향과 능력은 역시 다르게 표출되었다. 각기 자신의 강점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우고 나라를 세워 국가를 경영했지만 전체를 보고 아우르는 시각이나 장기적인 비전이 고려 왕건이 더 미래지향적이고 시의 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궁예나 왕건 둘 다 역사적으로 윈윈한 성공한 조합이며 이제 그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들을 적시해 보겠다. 사실 역사에서 승자와 패자라는 용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어쩌면 후대 역사 記述家들이나 호사가들이 입맛에 따라 붙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유독 궁예와 왕건이라는 두 인물에게 이러한 비교와 수식어가 많이 따라 붙는다. 이 글을 통해 이러한 연유를 알아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이다.
2. 마이너리티 궁예
궁예는 신라말기 권력다툼에서 버려진 비운의 왕자이다. 한 해에도 몇 번씩 왕이 살해되고 바뀌는 진골가문 내 피비린내 나는 왕위쟁탈전이 한창 벌어질 때 태어났다. 버려진 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하다가 세달사(世達寺, 영월 흥교사)에서 수도승으로 청년기를 맞는다.
이에 궁예는 신라에 대해서 철저하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신라를 멸망시켜 병합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경주의 신라 왕실과 진골귀족을 멸망시켜야할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신라 골품제사회의 해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궁예가 신라에 대해서 철저하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데에는 그가 왕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의해 쫓겨나게 되어 왕자 신분으로서의 특권을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골품제사회의 규범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입장에 있었다.
따라서 그는 골품제 사회가 해체된 후의 새로운 사회규범과 사회 정치체제를 제시하기가 어려웠다.
궁예는 왕자 신분이라는 유리한 입장을 이용하여 몰락하거나 도태된 낙향 진골귀족을 중심으로 호족세력을 결집하였다. 그는 寧越 溟州(강릉) 淸州 公州 등지의 호족세력을 결집해 중요한 세력기반으로 삼았다.
영월의 궁예세력으로는 승려 출신인 종간(宗?)과 평창 제천 호족 출신인 김대금(金大黔), 귀평(貴平) 등이 있다. 명주 호족 김순식(金順式)과 청주 호족 견금(堅金), 임춘길(林春吉), 진선(陳瑄), 선장(宣長) 형제, 공주의 환선길(桓宣吉), 이흔암(伊昕巖) 등은 궁예의 핵심세력들이다. 이들 지역 호족세력은 대체로 신라의 몰락한 낙향 진골귀족계 호족세력으로 정치적 사회적 성격이 궁예와 동병상련으로 동일했다.
즉, 양자는 반 신라왕실의 입장에서 골품제사회의 해체에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골품제사회의 규범이나 신라적 전통에 익숙하여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보수적인 체질의 소유자였기에 결국 신라 정치체제 전통을 이어받아 전제왕권을 추구하였고 새로운 사회규범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실제로 궁예는 911년 전후해 미륵신앙(彌勒信仰)에 근거한 神政的 전제주의를 추구하였고 915년 무렵에는 공포정치에 의하여 전제왕권을 확립했다. 그의 전제왕권 추구는 일반 농민에게 과중한 노역과 세금이 부과되어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했고 결국 멀어졌다.
사실 당시는 더 많은 호족세력을 끌어 모아 통일 왕조를 수립해야할 시기로서 전제왕권을 추구하기에는 이른 시기였다. 이른 전제왕권 추구는 호족세력의 반발을 초래하여 몰락으로 귀결되었다. 당시 호족세력과의 연합을 포기하고 전제정권을 추구한 것은 그의 출신에 따른 한계이기도 했다.
이는 왕건의 호족연합정책과 뚜렷이 대비된다.
궁예의 초창기 후원 호족세력은 寧越 溟州(강릉) 淸州 公州 등 내륙지역을 중심으로 한 小京이나 州治 출신들이었다. 이들 지역은 대체로 내륙지역으로서 농업이 주요한 경제적 기반이었는데, 이는 변경지역의 농업이나 상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적 기반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후삼국 통일전쟁에는 막대한 전쟁비용이 필요했는데 내륙지역의 호족이나 농민들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이렇게 농업경제와 陸軍力에만 의존한 호족세력으로 후삼국 쟁패전에서 주도권을 잡는 것은 무리였다. 그리하여 이들 외에 지금의 경기 북부와 황해도에 해당되는 패서(浿西)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한다.
平山朴氏와 왕건가로 대표되는 浿西호족세력이 궁예에 귀부(歸附)하여 고려(후고구려) 건국 초기 지배영역을 확대했다. 898년 浿西道 및 漢山州 관내 30여성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어 국도를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겼다.
궁예의 송악 천도는 패서지역 호족과의 적극적인 연결을 도모한 것이었고 北原(원주) 國原(충주)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양길의 위협도 감안한 것이다. 송악 천도 다음해인 899년 궁예는 패서호족들의 지원을 받아 양길을 물리치고 남한강 상류지역을 장악한다.
이로써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북부 지역에 걸치는 중부지역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고 901년 국호를 고려라 정하고 스스로 명실상부한 왕이 되었다.
궁예는 904년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905년 송악에서 철원으로 환도(還都 혹은 移都)한 후 전제왕권을 추구하게 된다.
철원환도(還都)는 송악이나 패서 호족세력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 전제왕권을 확립하기위한 조치였다. 그는 패서호족과의 연결을 포기하고 대신 청주세력을 전제왕권의 후원세력으로 활용하였다.
궁예의 강력한 정치적 세력기반인 청주호족은 당시 강경파 온건파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중앙정치세력으로 진출한 강경파가 궁예의 전제왕권을 떠받들었는데 이들은 다른 기타 호족세력에 대해 배타적이었다.
청주호족 중 온건파도 일정하게 궁예정권을 지지하였으나 궁예정권 말기에 강경파에 밀려서 정치적 입지가 좁아졌다. 패서지역 호족세력을 중심으로 한 많은 호족세력이 궁예의 전제왕권 추구에 반발하였고 이들의 반발은 궁예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당시 전국 각지에는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한 강력한 호족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후삼국 사이의 주도권 쟁패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족세력과의 연합을 포기하고 전제왕권을 추구하였다는 것은 사실상 무모한 정치행태였다.
浿西豪族은 대부분 고구려의 후예다. 신라하대에 패서지방 개척은 경덕왕 7년(748)에 시작되어 헌덕왕 18년(826)에 완료되었고, 평산 곡산 해주 황주 재령 등 14군현을 설치하였다.
신라정부는 선덕왕 3년(782) 平山에 패강진(浿江鎭)을 설치하여 북변수비(北邊守備)의 본영으로 삼았다. 패강진은 다른 군진과 같이 순수한 군단이 아니라 州, 小京 등과 동등한 하나의 독립된 행정단위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하여 패강진은 패서지방 즉 예성강 이북의 광범위한 변방지역을 관장하는 특수한 행정구역이었고 진성여왕 무렵 농민항쟁이 전국적인 내란상태로 확대되면서 중앙정부 통제를 벗어나 지방호족세력 수중으로 넘어갔다.
당시 패강진에는 設鎭과 동시에 신라정부에서 민호를 이주시켰는데 이 민호는 軍戶的 성격을 가진 것으로서 둔전병이라고 할 수 있는 토착적 항구적 지방군이었다. 패강진의 군관 조직이 패강진 관하의 모든 군현을 분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패서지역 전역의 민호가 屯田兵적인 토착의 지방민이었다고 볼 수 있다.
패강진 지역에서 이러한 군사적 조직을 통하여 급속히 성장한 지방 세력이 박직윤(朴直胤)으로 그는 大毛達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이 지역이 고구려의 故土이고 대모달이란 칭호를 사용한 것을 보면 신라정부 지배권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했음을 알 수 있다.
9세기 중기 평산박씨는 상당한 군진세력으로 성장했고 그의 아들 박지윤(朴遲胤) 代에는 패서지방의 유력한 호족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평산박씨를 비롯한 패서호족들은 895년 무렵 궁예에 귀부해 궁예가 패서지역을 장악하는데 크게 협력한 것을 계기로 궁예의 중요한 지지 세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평산박씨는 궁예치하에서 자손이 번성하고 세력기반이 확대되어 그 후 왕건 대에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평산박씨는 지방관으로서 溟州 竹州 등으로 이동하여 다니다가 마침내 平州에 정착하여 패강진의 군사적 조직을 통해 패서지역의 유력한 호족으로 성장하였다.
이런 평산박씨의 호족화는 군진세력이 호족세력으로 성장한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평산박씨는 궁예에 귀부하여 궁예가 패서지역을 장악하고 13진을 설치하여 궁예 세력기반으로 삼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어 평산박씨는 일찍부터 연관관계에 있었던 왕건가문과의 인연으로 하여 궁예 말년에 왕건과 결합하였다. 그 뒤에 평산박씨는 다른 패서호족들과 함께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집권하는데 협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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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순헌황귀비 엄씨 (1) | 2013.05.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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