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건국신화

하늘에서 환웅이 내려와 우리나라 태백산 부근에 자리를 잡았다.그 소식을 들은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와서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럳자 환웅은 100일동안 빛을 안보고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으면 인간으로 되게 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동굴밖으로 나갔고 곰은 사람이 되어 환웅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 곰을 웅녀라고 부르는데 이 웅녀가 아기를 낳는데 이아이가 바로 단군이다. 단군을 커서 고조선을 세운다.

 

부여의 건국신화(검색)

옛날 북방에 탁리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 왕이 사냥하러 나갔다 온 후 왕의 몸종이 임신을 하게 되었다. 몸종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왕이 죽이려 하자, 몸종이 말하기를 달걀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후 몸종이 아들을 낳았는데, 왕이 미워하여 아기를 돼지우리에 버리게 하였더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죽지 않게 하였고, 마구간에 버렸더니 이번엔 말이 또 입김을 불어 죽지 않게 하였다. 

이러하자 왕이 기이하게 여겨 아기를 그 어머니에게 기르게 하였으니, 그가 바로 동명이다. 동명은 성장하여 활을 잘 쏘았는데, 왕이 나라를 빼앗기게 될 것을 두려워 하여 군사로 하여금 동명을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남쪽으로 달아나 시엄수가에 이르렀는데, 탄식하며 활로 물을 치자 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놓아 주어 무사히 건너게 되었고, 그 길로 남쪽 땅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부여를 건국하였다.

 

고구려 건국신화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가 결혼을 하여 낳은 아들이 주몽이다.

유화가 자기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을 때 동부여의 왕 금와왕이 이 유화를 보고 자신의 궁으로 데리고 왔다.

유화가 궁에 있을 때 아이를 낳았는데 그게 알이였다. 금와는 안좋은 징조라며 돼지우리에 버리고, 직접 깨보려고 했지만 다 실패했다. 금와는 포기하고 다시 알을 유화에게 돌려주었는데 거기서 주몽이 태어났다.

주몽은 어렸을 때부터 금와의 사랑을 받고 자랐는데 커서 다른왕자은 주몽만 편애한다고 주몽을 죽이려고 했다.

유화는 그 얘기를 듣고 주몽을 도망치게 했다. 주몽은 마리, 협보, 오이와 함께 도망을 치다가 강에서 다른왕자들에게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나는 천제의 아들이고, 하백의 외손자다"라고 하니 자라들이 올라와 주몽이 강을 건너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주몽은 소서노와 결혼을 하여 고구려를 세우게 된다.

 

백제의 건국신화

고구려 동명왕(주몽)은 부여에 있던 예씨부인과 결혼하였다. 고구려에 있을 때는 소서노와 결혼을 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왕위를 물러받을 줄알았는데 부여에 있던 예씨부인의 아들인 유리가 고구려에 와버렸다. 그러자 비류와 온조는 자기들이 왕위를 물러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왕의 허락을 받아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 때 많은 신하들과 백성들이 따라왔다. 신하들이 지금의 서울부분에 나라를 세우자고 했다. 온조는 그말을 듣고 나라를 세우려고 했지만 비류는 자신은 바다쪽이 좋다며 미추홀(지금의 인천)에 나라를 세웠다. 이때 온조의 나라는 '십제'였다. 후에 다시 두 형제들이 만났다. 그런데 비류는 온조의 나라 백성들이 잘 사는 것을 보고 후회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나라는 습하고 짜서 곡식들이 자라지 않아 백성들이 못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류는 후회를 하고 자살을 하고 온조는 비류의 땅까지 차지하여 나라이름을 '백제'로 고쳤다.

 

신라의 건국신화

마한부분에 여섯마을의 촌장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들을 돌바줄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하늘에게 빌었다. 이에 그들이 높은 소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아래 나정 우물가에 번개불같은 이상한 기운이 땅에 닿도록 비치고 있었다. 흰 말 한 마리가 땅에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을 찾아가 조사해 보았다. 거기에는 알이 하나있었는데 알이 깨며 아기가 나왔다. 그러자 여섯마을 촌장들은 아기가 깨고 나온 알의 모양이 박처럼 생겼다고 해서 '박'씨로 지었고 이름을 혁거세라고 지었다. 아이가 크자 잘생긴 외모에 용맹함까지 있어 그를 왕으로 세웠다. 그리고 계룡의 옆구리에서 태어난 아기도 있었는데 이 아기의 이름을 알영이라 지었다. 박혁거세와 알영은 결혼을 하여 신라를 다스렸다.

 

가야의 건국신화(검색)

하늘에서 황금알 여섯 개가 내려왔는데, 국가가 되기전 가야지역의 촌장들이 모여 "거북아 거북아 네 머리를 내 놓아라. 안그러면 구워먹겠다"... 라고 하니 여섯개의 알이 깨어났고, 그 중 맨 먼저 수로왕이 나와서 가락국(금관가야)의 왕이 되고, 이어서 다른 다섯 개의 알에서 나온 사람은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가야 왕들 가운데 수로왕이 첫째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초기에는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가 연맹의 주도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로왕은 인도에서 온 공주와 결혼을 하고 150살이 넘도록 살았다.

 

통일신라와 발해의 건국신화는 없습니다.

 

고려 왕건의 탄생신화(검색)

왕건의 아버지 용이 한씨와 결혼하여 송악산 남쪽 기슭에 살림을 차렸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선(신라말 도참사상으로 유명했던 승려)이 그들을 찾아왔다. 도선은 용의 집앞을 지나며, 집터는 좋지만 방향이 틀렸어. 남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장차 왕이 될텐데... 말했다. 아내에게서 소식을 들은 용은 급히 도선을 쫓아갔다. 도선은 용건이 쫓아오자 그에게
"내가 일러주는 대로 집을 지으면 천지의 대수에 부합하여 내년에는 반드시 슬기로운 아이를 얻을 것입니다. 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왕건이라고 하십시오"
용은 그가 시킨 대로 집을 젓고 살았더니 그들부터 아내에게 태기가 있었고 열달뒤에 아이를 낳으니 아이가 바로 태조 왕건 이었다

 

조선 건국신화(검색

이성계는 고려시대의 무장이였다. 아버지 이자춘이 공을 많이 세워서 자신에게 그것들이 모두 돌아갔다.

이성계가 왕이 될것을 처음 알려준 것은 무학대사이다. 서까래 세개를 짊어지고 나오는 꿈을 꾼 이성계는 무학대사에게 찾아가 꿈 해석을 부탁했는데 무학대사는 그것이 왕이 될 징조라고 했다.

그리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통해 조선이 건국되었다.





지식인에서 이런 질문이 맨날 올라오길래 내가 만들어서 펴뜨려졌는데 원작자를 못알아보는 사람들이 어디서 봤다고 욕먹는다. 아 슬프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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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 창세가  (0) 2011.08.28
by 초령목 2012. 5. 21. 20:23

역사논술(이경희) (1).hwp

첨삭지도


민족구심체를 찾아서

초령목

5월 중 가장 푸르다는 어린이날에 와룡고등학교 역동에서 우리의 민족구심체를 찾는 체험활동을 가지기로 하고 신청을 접수받았다. 나도 어차피 집에서 뭐하겠냐는 생각에 냉큼 신청을 했다. 하지만 막상 아침에 일어나니 ‘남들 다 쉬는데 우린 공부라니…….’라는 불만 섞인 생각도 들었으나 이미 신청을 했으니 때는 늦었다.

답사 전 내가 찾은 민족구심체, 자아의식

신청을 왜 했을 까라는 후회도 많이 했으나 공부를 안 해오면 노래를 부르게 한다는 협박공지를 받아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결과는 이런 물음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가서 뭘 배울 수 있는가? 정답은 나 자신을 알자라는 자아의식이었다. 역사왜곡에 대한 대항의 해답을 제시해주는 근본적인 대안이자 역사유물을 통해 선조와 나 사이의 교감을 연결해주는 고리가 바로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자아의식밖에 더 있을까? 만약 선생님께서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 이렇게 대답을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회는 오지 않았다.

선사시대 우리조상들의 구심체, 암각화

언제나 달릴 줄만 알았던 버스가 멈추는 방법을 드디어 터득했나보다. 버스가 멈춰선 곳은 고령 양전동 암각화가 있는 곳이었다. 암각화하면 울산 반구대 밖에 몰랐는데 나에겐 이런 암각화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런데 막상 보니 이 암각화가 낯설지 않았다. 예전에 대가야 박물관에서 이 암각화 모형을 본 기억이 났다. 아, 그게 이거군.

주위를 둘러보니 들판이었고 저 멀리서 강의 형태를 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옛날에는 이 바위근처까지 물이 왔었다. 수십만 년에서 수백만 년 동안 퇴적되며 강이 이 바위로부터 멀어졌다는데 이 바위는 멀어지는 강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한편으로는 자연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말을 이제야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암각화는 일명 인면암각화라고 불린다. 바위에 새겨진 그림이 인간의 얼굴처럼 생겼다는데 이 암각화를 처음 보는 사람은 결코 ‘아 이건 인면암각화구나’라고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사각형에 막대 같은 것이 달린 것이 인면이고 원같이 있는 것이 동심원문양인데 4개가 있다. 이 문양이 과연 인면일까라는 의문이 들어 여러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았다. 과거에 여기까지가 강이었으니 그 문양들이 수중생물을 의미하며 당시 수렵․채집사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인면이라고 불리는 문양 옆에 막대의 수가 다 다른 것으로 보아 달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저것은 인면이라 불리는 문양은 가면을 의미하고 동심원은 태양을 의미하여 제사를 지내던 곳이 아닐까? 여러 대화가 오고갔으나 우리는 확실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것을 말할 때 마다 모순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저 암각화는 백년에 걸쳐 만들어 졌을 수도 있고 천년에 걸쳐 만들어 졌을 수도 있다. 단지 도화지 안이라는 특정한 틀 안에 있는 그림이기에 우리는 ‘저것이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구나.’ 라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암각화 위에는 별자리를 의미하는 홈이 파져있다. 아마 이 별자리를 조사해보면 이 암각화가 최소 몇 만 년 전에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보는 우주는 언제나 팽창하고 빛의 속도가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기에 과거라고 불리는 그 시절의 우주와 현재라고 불리는 지금의 우주(하지만 이것도 과거지만)를 비교하면 알아볼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사례로 은천군에 있는 고인돌에 구멍이 134개가 파여져 있었는데 여기서 발견되는 별자리는 자미원, 직녀, 구진, 북극오성, 정수(쌍둥이 자리), 삼수(오리온 자리) 등이 있는데 기원전 3200년경의 하늘로 추정할 수 있었다. 또 용덕리 10호 고인돌 별자리는 그 당시 북극점이 용자리의 알파별이 라는 것을 보여주고 이 고인돌이 만들어진지 1500년 후의 고인돌인 지석리 고인돌에서는 북극점에 해당하는 별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북극점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이런 바위에서 별자리의 발견은 천문학적,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것인데 여기서 이런 별자리가 발견됐으니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나도 이 별자리 구멍을 실제로 보고 싶었지만 바위 위를 볼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보려 노력을 했으나 실패하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다음 행적지로 가야했다.

잃어버린 역사 ‘가야’의 구심체

나는 가야라는 나라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중학교 때 근 2개월 동안가야라는 신비의 제국에 흥미를 느껴 여러 책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우리 역사서에 가야를 다룬 책은 삼국유사이다. 그 후에 만들어 진책들은 대부분 삼국유사의 기록을 기본으로 두고 서술했을 것이다. 500년 역사를 기록하는데 조선은 수백 수천 권의 책을 썼는데 고작 삼국유사라는 몇 권의 책만으로 가야를 알자는 것이 황당하기만 하다. 언제 유득공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삼국사가 있어야 마땅한데 고려가 이것을 지은 것은 옳다. 부여 씨가 망하고 고 씨가 망하자 김 씨는 남쪽을 차지했고, 대 씨는 그 북쪽을 차지하고서 이름을 발해라고 했는데, 이것이 남북국 이다. 그러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도 고려가 이를 쓰지 않았으니 잘못이다.” 그 이에 앞서 누군가 가야의 역사를 기록했다면 그 신비의 제국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아쉽기만 하다. 우리가 아는 철의 제국 가야는 그저 500년 역사의 일부분일 뿐이다.

성씨의 구심체, 개실마을․한개마을

꽃이 피는 아름다운 골 산 같은 나비가 날아오는 곳, 조의제문으로 유명한 김종직의 5대손이 피신하던 곳, 뒤에는 선비를 상징하는 대나무 숲이 있고 앞에는 명산이 있는 풍수적으로 명당에 위치한 그곳이 바로 선산김씨의 종가 개실마을이다.

이곳은 종가답게 효를 강조한다. 이 효를 잘 실천했기에 죽어서 3품의 관직을 얻은 사람도 이 마을에 있다고 한다. 효의 기본적인 조건 두 가지가 있는데 편찮은 부모님의 배변은 맛보며 누워 계실 때에는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나누어 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조건을 보며 과연 이것이 그들이 추구했던 진정한 효인가를 생각해본다. 부모의 소원은 예나 지금이나 자식이 잘되는 것이다. 그런 자식이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며 그들의 부모에게 준다고 하면 어느 부모가 덥석 받고 싶어 할까? 오히려 자식에게 가는 미안함으로 빨리 죽어버리기를 바라지는 않을까? 또 이 효의 기본적인 조건을 악용하여 관직에 오르려 했던 사람들도 만만치 않던 걸로 기억한다. 그들은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버려서 나라에서 효자비를 세우면 보상을 얻어내기도 했다. 두 가지가 만약 진정 저 두 가지가 효의 기본이라고 하면 나는 내 자식이 손가락을 자르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죽을지언정……. 하지만 자기를 희생하면서도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에게 보답하는 옛 효의 정신은 계승받아 마땅하다.

중국 황실의 방은 9999개, 조선 왕실의 방은 999개, 일반백성들의 최대 방은 99개……. 이곳은 무려 99개의 방이 있는 마을이다. 마을 어르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르신께서 한곳한곳 설명을 해주셨는데 그의 말에서는 큰 자부심이 느껴졌다.

1이 아닌 큰 나루 마을, 새마을 운동전까지 사람 2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작았던 길을 가진 곳이 성산이씨의 집성촌인 한 개마을이다. 이곳을 돌면서 옛사람의 정성과 지혜를 느낄 수 있었다. 물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소나무를 못 옆에 두게 하면서도 결코 시들게 하지 않는 표현 할 수없는 신비함, 자식의 공부를 쉽게 할 수 있도록 지은 집! 아니 그들의 자식사랑! 개실마을에서는 효와 같은 정신을 강조했다면 한개마을에서는 위인들이 가진 정신을 강조했다. 대표적인 예로 자신이 호위하던 사도세자를 살리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하며 영조에게 감히 말을 하던 이 석문을 들 수 있다. 그는 지금으로 치자면 감히 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중위가 별 4개 달린 분 앞에서 명령불복종을 했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자신의 목숨보다도 신의를 소중히 여긴 그의 정신! 아니 그라는 인물 자체를 우리는 알아야 하며 본받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아파트라는 위로만 뻗는 현대사회보다 마을이라는 나무의 뿌리처럼 가지처럼 뻗은 옛 선조들의 그 마을이 우리에게는 더 좋은 환경이 되지는 않을까?

답사 후 내가 찾은 민족구심체, 공동체

답사 동안 내가 돌아다니던 곳은 옛 신석기인들이 함께 사냥하고 함께 먹고 함께 자던 그 향기가 배여 있던 암석화와 함께 마을을 이루어 볼 거 안볼 거 다보고 살아가던 마을들이었다. 우리 민족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우리는 하나라는 그 정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지금 우리에게는 그런 정신이 남아있는가? 우리에게는 나만이 존재하지는 않은가?

by 초령목 2011. 5. 20. 02:15
 남북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사이 우리는 흔히 그 시대를 '후삼국시대'라 부른다. 하지만 필자는 이 명칭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왜 '후삼국시대'인가

왜 발해는 되고 가야는 안되는가?

왜 우리는 사국시대라 부르지 않는가?

 알다시피 고구려, 백제, 신라가 공존했던 시기에 가야라는 작은 나라가 존재가 했다. 하지만 우리는 가야가 있었음에도 가야가 건국되었던 42년부터 멸망했던 562년까지 단 한차례도 사국시대라 부르지 않았다. 왜일까?
 
 가야는 철의 제국이라 불릴만큼 철이 풍부했고 한동안 신라보다 국력이 컸다. 신라에 쳐들어가서 신라가 위기에 빠진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가야는 중앙집권화에 실패하고 소국연맹체로만 500여년을 이어왔다. 가야와 마찬가지로 초기의 고구려, 백제, 신라는 연맹왕국였다. 그러나 고구려, 백제, 신라는 소국 연맹체에서 탈바꿈하여 중앙 집권적 국가로 발전하는데 성공했다. 각 연맹의 맹주국들은 세력이 강해지자 자신들의 힘을 바탕으로 주변의 소국을 통합한 뒤 직접 통치를 시행했다. 그에 반해 가야는 힘이 가장 강한나라를 연맹의 대표로 삼는 '맹주국'만이 멸망할때까지 존재했을 뿐이다.

 어느 한 국가가 주위 소국보다 비교할수 없을 만큼 강하거나 선진문물을 받아들였으면 그들도 중앙집권국가로의 발전을 이룩할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철로 유명한 변한의 12소국들이 발전하여 가야연맹이 되었다. 그래서 가야 소국에서도 각각의 철기문화가 발달되었다. 그덕에 딱히 통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고 무력으로 연맹의 통일을 이룰수 있었으냐? 그것도 아니였다. 연맹 중 가장 힘이 세던 맹주국에게도 맹주국(전기:금관가야, 후기:대가야)과 힘이 대등하던 나라가 존재했는데 아라가야의 존재는 통일을 방해하는 두번째 이유였다. 실제로 금관가야가 무너진 후 후기가야를 이끌던 국가는 대가야로 알고 있으나 사실 후기가야는 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과 아라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남북으로 나누어져있었다

 또 삼국사기에서도 가야에 관한 기사는 많이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삼국사기는 삼대국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라 일부 불필요한 기록을 누락시켰을 가능성도 있으나 가야 500년 역사를 생각해보면 백제와 신라와의 접촉이 많았을텐데 그에 관한 기록이 터무니 없이 적었다. 그에반해 대국이었던 신라와 백제 사이의 접촉기록은 눈에 띄게 많았다. 그만큼 가야가 대국들 사이에서 소외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기에는 아에 백제의 속국처럼 되어버렸다.

 가야 연맹체에 속해있던 소국들은 각기 정치적인 독자성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다른 지역과 통합을 이루지 못하여 국가가 발전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리하여 삼국과의 경쟁에 특히 약소국 신라와의 경쟁에서 조차 도태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가야는 삼국에 끼어들지 못하게 되었다. 가야와 비슷한 나라가 494년에 멸망한 부여이다. 부여 역시 약 700년간 존속했던 나라나 끝까지 중앙집권하에 실패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마한의 잔여세력도 300~400여년까지는 존재했었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은 '연맹왕국'이었다는 것이다.
 가야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사국시대로 넣자고 주장하면서 부여라는 나라를 알면서도 왜 500년까지 존재했던 부여는 왜 사국시대라 주장하지 않는가? 또 마한의 잔여세력들 또한 백제에 의해 멸망되기 전까지는 한반도 내에 존재했었는데 왜 그들에 대해서는 아무소리도 못하는 것인가?
 
 가야가 신라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았다면 신라말기에 '후가야'라는 나라도 생기지 않았을까? 아니면 가야를 표방한 나라가 있었으나 너무 작아서 기록되지 않았고, 삼국시대의 가야처럼 여러 가야가 생겨 서로와 경쟁을 하다 전부 멸망했을까? 
 

신라와 발해, 남북국시대
 불과 5년전까지만 해도 통일신라시대로 불러야 하나 남북국시대로 불러야하나 논쟁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통일신라시대라는 용어보다 남북국시대라는 용어을 비교적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라는 명칭의 탄생을 보면 남북국시대로 진작에 바꾸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가 찬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있던 1925년,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사편수화'라는 단체가 만들어진다.그런데 바로 이단체가 신라와 발해에 해당하는 시기를 '통일신라시대'라 부르기로 결정한다.즉 식민지 시절의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이후의 신라가 최초로 '통일신라'라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일본 학자들은 우리 역사를 정리하면서 당시의 사건을 '신라의 반도 통일'로 표현하였다.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한 것이 아니라 한반도만을 통일했다고 본것이다.따라서 한반도 밖의 역사는 한국의 역사가 아니게 되었다.당연히 발해사는 한국사에서 제외되었다.결국 '통일신라'는 우리의 역사를 작고 초라하게 만들려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해 만들어진 용어인 셈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인


 그렇다면 발해가 작은나라인가? 그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고구려를 계승한나라가 바로 발해이다. 그것은 일본왕에게 보낸 친서를 보면 확인할수 있는데 "고려국왕"이라는 말을 썼다. 게다가 신라가 그렇게 섬기던 당나라와 전쟁을 불사하고 결국 살아남으며 당에게 해동성국이라고도 불렸다. 또 영토면에서도 고구려보다도 땅을 더 넓혔다. 또 발해는 가야와는 달리 당, 신라, 왜, 거란 등 5개의 무역길을 만들어 경제적인 여건도 좋았다. 그 무역길로 여러 문화를 수용할수도 있었다. 발해가 문치국가가 된 후에는 당나라에서 유학을 하며 신라와의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   
 가야와는 다르게 발해는 지배층(고구려인)과 피지배층(말갈인)의 구분이 확실했다. 또 왕이 존재해 중앙집권화가 가능했고 심지어는 연호도 사용했다. 가야와 발해의 가장 큰 차이는 가야는 연맹국에 불과한 소국들의 모임이었지만 발해는 고구려라는 당대 최고의 나라의 후예임을 자처했음을 알린것이다.
 
 또 통일신라라는 말과는 무색하게 진정한 통일을 이룩한것도 아니었다. 신라말기 신라의 전국토에서 호족이라 불리는 그 지역의 유력세력들이 스스로를 장군, 성주라 칭했다. 그리고 여러 고구려, 백제의 부흥국이 세워졌다. 또 신라는 5소경이라는 것을 설치했는데 이는 김해등의 옛 백제, 고구려후예를 이주시켜 거기서 살게하며 자치를 허락했는데 이는 신라의 중앙통제력이 약해지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었다. 다시말해서 통일신라는 외형적인 통일에 불과했지 정신적인 통일은 이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니 불가능했었다. 신라의 보수적인 골품제와 시대가 지나도 그 모순을 인정하지 않고, 백성들의 고난은 생각하지 않고 왕이 되는 생각만 하던 신라 지배층이 틀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위키사전에서 남북국시대의 명칭문제를 자세히 다루고 있어 이하 생략하겠다.

조선 전기에는 이 시기를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시대로 인식하지 않았다. 이는 신라가 정통 왕조라는 《삼국사기》의 사관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에 따라 신라 중심으로 서술된 역사에서는, 북측의 발해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졌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한국사, 또 만주의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발해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를 통하여 역대의 사가들이 발해사를 한국사에 편입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 등장하였다. 실학자 유득공은 《발해고》(渤海考)에서 고구려가 망한 후 남쪽에 신라가 있었고 북쪽에는 발해가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이를 '남북국'이라 하였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이 시기를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시대라고 불렸으나, 1970년대 이후로 발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980년대 들어 남북국 시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또한 학계 일부에서는 최초의 통일을 신라가 아닌 고려가 이루었다고 보기도 한다.


후삼국시대의 새이름의 필요성

앞에서는 가야와 발해의 시대적 구분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자 그럼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발해는 926년에 멸망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후삼국시대라고 정의하는 시기인 892~936년 사이에 들어가게 된다. 거기다 발해가 가야 같은 소국이냐 그것도 아니다. 무려 200년간 존속했던 나라이자 '남북국시대'의 북국이 아닌가? 후삼국시대로 불리게 되면서 남북국시대라는 명칭으로 되찾은 발해를 후삼국시대에서 또 잃어버리게 되는 모순이 생겨버리게 되었다. 발해가 삼국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서일까? 그렇지는 않다. 궁예는 발해와 외교활동을 했으며 신라는 발해와 동맹까지 하게된다. 또 발해가 멸망하자 발해왕자를 포함하여 유민들이 모두 고려로 내려오게 된다. 그리고 그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멸시하게된다. 이것을 보면 발해와 삼국의 연관성이 많아 보인다.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후삼국시대의 명칭문제에 대해서 전혀 생각해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후삼국시대를 대체할 명칭은 없을까?

 이에 '슬픈 궁예'의 저자이신 이재범 교수는 '전국시대' 혹은 '호족시대'라는 명칭을 쓰자고 제안한다. 필자는 호족시대가 마음에 들지만 그렇게 하면 발해라는 나라가 빠지게 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필자가 생각해본 것이 '독립부흥시대'이다. 독립부흥시대는 신라 말기 반신라적인 새로운 나라가 신라에 독립하여 세워지거나 옛 고구려, 백제, 가야등의 후예들이 그들의 부활을 내세우며 부흥국을 세웠었다는 점에서 이름을 지었다.
 하지만 이 시대가 나타난 연도는 이재범 교수(892년)와는 다르게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난 889년부터 왕건이 통일한 936년까지를 新후삼국시대라 부르고 싶다.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난 이후로 호족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했고, 이 사건을 시작으로 전국에 장군이라 칭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충분히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난 그 해(889)를 新후삼국시대의 시작으로 한다고 해도 별 지장은 없어보인다. 이렇게 되면 후삼국시대의 역사는 889~936년으로 47년, 원래의 후삼국시대보다 3년이 더 추가된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의 혼란시기와 비교해도 될만큼의 긴 역사를 가질 수 있게되고 근 50년에 가까워져 반세기의 역사라 불러도 무방해진다.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난 889년부터 왕건이 통일한 936년까지 47년간의 新후삼국시대, 필자는 이 시대를 더 좋은 명칭이 나오기까지 부르기로 했다. 모든 사람이 통일신라시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남북국시대로 바뀌어 졌듯이, 사람들이 후삼국시대의 모순되는 점을 지적하고 새로운 명칭이 생기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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