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웅이라는 교수가 쓴 고전소설 줄거리 집성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고전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해서 정리해 놓은 책인데,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은 얼마나 될까요? 무려 856종입니다. 그리고 이 책이 나온 게 십여 년 전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도 발견한 소설, 그리고 조희웅 교수가 미처 책에 실지 못한 소설들이 더 있을 것을 생각한다면, 고전소설은 거의 천 여 종에 이릅니다.


고전소설 작가들은 우리들에게 알려진 사람이 많지 않지만, 조선 후기는 소설의 시대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조선만의 현상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많은 나라가 소설의 시대를 맞아 이야기가 풍성해졌죠.

옛날에 소설을 즐기던 방식은 몇 가지 있습니다. 필사해서 보는 것입니다. 저작권이 없던 시대라 필사하면서 내용이 마음에 안 들면 자기 마음에 들게 내용도 바꿨죠. 그래서 탄생하는 게 이본입니다. 그리고 이웃집에 책이 있으면 빌려 보는 일도 있었죠. 이웃집 아낙네에게 소설 좀 빌려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도 남아 있답니다. 또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이야기 들려주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도 있었고, 길거리로 나가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답니다. 이를 전기수라고 하죠. 조수삼의 추재기이에는 이런 증언이 있습니다.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노인은 동대문 밖에 산다. 언문(諺文)으로 쓴 이야기책을 입으로 줄줄 외우는데 <숙향전>(淑香傳), <소대성전>(蘇大成傳), <심청전>(沈淸傳), <설인귀전>(薛仁貴傳) 따위의 전기소설들이다. 매달 초하루에는 청계천 제일교(第一橋) 아래 앉아서 읽고, 초이틀에는 제이교(第二橋) 아래 앉아서 읽으며, 초사흘에는 이현(梨峴)에 앉아서 읽고, 초나흘에는 교동(校洞) 입구, 초닷새에는 대사동(大寺洞) 입구, 초엿새에는 종루(鐘樓) 앞에 앉아서 읽었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기를 마치면 초이레부터는 거꾸로 내려온다. 아래로 내려갔다가 올라가고, 올라갔다가 또 내려오면 한 달을 마친다. 달이 바뀌면 또 전과 같이 한다.

노인이 전기소설을 잘 읽었기 때문에 몰려들어 구경하는 사람들이 노인 주변을 빙 둘러 에워쌌다. 소설을 읽어가다 몹시 들을 만한, 가장 긴장되고 중요한 대목에 이르면 갑자기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다음 대목을 듣고 싶어서 앞다투어 돈을 던지면서 ‘이게 바로 돈을 긁어내는 방법이야!’라고 했다."




전기수의 절단신공을 이때는 요전법이라고 불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결정적인 순간에 이야기를 딱 끊어서 다음을 궁금하게 하는 방법은 변함이 없었던 것이죠. 조선 시대에는 지금보다 문맹자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소설책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전기수는 소설을 즐길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소설책을 읽을 수 있어도 전기수가 실감 나게 이야기를 꾸미는 것을 듣고 싶었을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건도 있었죠.



"옛날 한 남자가 있었는데 종로 거리의 담배가게에서 소설책 읽는 것을 듣다가 영웅이 크게 실의(失意)한 대목에 이르렀다. 문득 눈초리를 찢고 침을 뱉더니 담배 써는 칼을 잡아 소설책 읽는 사람(讀史人)을 쳐서 그 자리에서 죽였다. 왕왕 맹랑하게 죽는 일과 우스운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전기수가 얼마나 실감나게 이야기를 했으면, 영웅(다른 기록에는 임경업이라고 합니다)이 좌절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흥분해서 전기수를 죽이는 엽기적인 사건까지 있었을까요. 이런 극단적인 사례는 아니지만, 요즘 드라마에서 악역 하는 배우를 실제로 보면 욕하는 아줌마, 할머니들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업도 유행했습니다. 영화 음란서생에 세책업의 모습을 일부 엿볼 수 있는데, 현재의 도서대여점처럼 소설책을 빌려주면서 이익을 얻는 곳이었습니다. 채제공 같은 분은 여편네들이 살림은 안 하고, 소설책 읽느라 가산 탕진한다고 한탄할 정도로(물론 소설을 안 좋게 봤던 높으신 분들의 시각이 들어갔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세책업은 유행했습니다.

또 값싼 목판본 소설을 판매하기도 했죠. 이건 방각본이라고 불립니다. 방각본 소설은 실제 소설 내용을 압축한 일종의 다이제스트판이라고 할 수 있어요. 대체로 판매 지역은 서울, 안성, 전주였는데, 판매지역에 따라서 경판본이니 안성본이니 완판본이니 했답니다. 이것은 판매를 높이기 위해서 일부러 내용을 줄이고, 글자도 줄이고, 몇몇 방법을 동원했는데, 지역에 따라서 내용 편차가 좀 있습니다. 춘향전 같은 경우 경판본은 상당히 짧은데, 완판본은 장편 수준으로 꽤 길죠. 우리가 흔히 보는 춘향전은 완판본인 경우가 많답니다.

소설을 읽는 건 높으신 분들도 예외가 아니라서 궁중에까지 흘러들어갑니다. 현재 창덕궁 낙선재에 소설을 쌓아 놓고 읽었는데, 이 소설들이 대장편인데다가 유일본인 경우도 많아서 연구자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고 하더라고요. 완월회맹연 같은 소설은 무려 180권 180책으로 현재의 웬만한 대하소설보다 훨씬 방대한 분량입니다. 특정 가문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몇 세대에 걸쳐서 이어내는 구성의 소설이 이때 많이 유행했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고전소설들은 현존하는 고전소설들의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이것만 읽고 아, 고전소설은 이렇다 저렇다 인상비평 하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고 코끼리는 어떻게 생겼다라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닐까요? 문학이라는 것이 쉽게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기준에 맞추느냐에 따라서 작품 평가가 달라지니까요.


by 초령목 2014. 9. 4. 23:56

고구려의 궁궐

 고구려 왕궁터로 알려진 것은 길림성 집안현의 국내성 터와 평양시 대성 구역의
안학궁터, 평양성(장안성)의 궁성터 등이다. 고구려는 도읍을 통구에서 대성산 
일대의 평양으로, 다시 장안성 일대의 평양으로 옮기면서 국가의 발전과 상응하
는 도성과 궁성을 갖추었다. 초기에는 평서오가 산성을 유기적으로 관련짓되 일
정한 거리를 두고 따로 건설하였다. 그러나 장안성에서는 이들을 결합한 평산성
을 쌓고 그안에 체제를 갖춘 도시를 형성하여 일반 백성들도 성 안에서 살게하 
였다. 현재 국내성이나 장안성 내성의 궁궐터는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이며 다만
안학궁만이 발굴 조사되어 고구려 전성기 궁궐 건축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성
국내성은 기원전 37년부터 427년까지의 고구려 궁성이다. 이 기간동안 이곳이 
고구려 전기의 명실상부한 왕궁이었다. 이 성 안에서 현재 도시가 자리잡고 있
는 관계로 고구려 시대의 성 안 시설물 포치를 자세히 알기 어렵다. 다만 성 안
의 서북쪽에서 고구려 시기의 주춧돌이 나와서 당시에 큰 건물이 세워져 있었
음을 말하여 준다. 또 붉은 색의 고구려 기와들이 많이 나왔고 성 안의 큰 길로
는 성문들을 서로 연결하는 동서 남북의 두길이 있었다.
성벽은 잘 다듬어진 방추형 돌로써 네모나게 쌓았는데 그 둘레는 약 3800여 미
터이며 현존 성벽의 높이는 약 5내지 6미터인 것으로 보인다.

 

 
 
안학궁성
안학궁성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직후인 427년 무렵에 대성산성과 함께 건설
되어 지금 평양시에 해당하는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긴 586년까지 고구려 후기
의 왕궁이 있었던 곳이다.
장수왕은 평양 천도 뒤, 줄곧 이 궁에 거처하였고, 국내성과는 달리 주변에 강
력한 군사시설들을 갖추고 있었다.
안학궁성은 성벽 한 변의 길이가 622미터, 넓이 약 38만 평방미터나 되는 웅장
한 토성으로 돌과 흙을 섞어서 벽을 쌓았고 성벽 안에는 성벽을 따라 약 2미터
너비로 포장된 순환도로를 냈다.
또 성벽의 문들을 연결한 도로, 궁정과 화랑, 못, 조산등 규모가 크고 화려한 
건축물과 시설물이 있었다.

 

 
 
장안성
장안성은 552년에 쌓기 시작해 586년에 완공된 성이다. 국내성과 안학궁성은
통치 계급의 주거 지역만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쌓았으므로 일반 주민들
은 성 밖에서 살았다. 
그러나 후기의 도성인 장안성은 도시 주민들이 모두 성 안에서 살게 되면서 
크게 쌓은 성이다.
장안성은 북성, 내성, 중성, 외성등 4개의 성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둘레는 
23킬로미터, 성 안 총면적은 1186만 평방미터에 이르는 큰 성이다. 


백제의 궁궐

 백제는 수도가 있던 지역을 중심으로 제1기 한성시대, 제2기 웅진시대, 제3기 사비시대 등 3기로 나눠 살펴본다.

 

제1기 한성시대
기원전 18년부터 서기 475년까지이다. 현재까지 한성시대의 왕성 위치 및 유적에 대해서는 거의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의하면 궁안에는 회나무를 심었고 우물과 연못을 두었으며 궁으 서쪽에는 활쏘는 대를 조성하는 등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제2기 웅진시대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475년부터538년까지 60년 사이이다. 동성왕은 20년 동안 왕위에 있었으며 한성으로부터 내려온 귀족 세력과 웅진성 지역의 신흥 귀족세력을 조정하여 왕권의 신장을 꾀하였다. 곧 우두성을 비롯한 5개성을 쌓는가 하면 웅진서 안 궁궐 동쪽에 임류가이라는 고층 누각을 지어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 만큼 왕권을 안정시켜다 무녕왕 때에는 왕권이 재확립된 듯 중국의 양나라에로부터 영동대장군 곧 중국의 동쪽 을 평안하게 만들었다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이때의 궁궐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그가 죽은 뒤 축조된 무녕왕릉의 건축술로 미루어 볼 때 상당히 높은 수준의 왕궁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제3기 사비시대
사비시대로 도성의 존재에 대한 확증이 없는 상태이다. 다만 문헌상 주목되는 것으로는 무왕 때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는 망해루와 의자왕이 왕궁 남쪽에 세웠다는 망해정 및 의자왕이 지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수리했다는 태장궁 등이 있다. 또 무왕 35년에 궁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 들였으며 못가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못안에 방정선산을 모방하여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의 궁궐

 신라는 기원전 57년부터 935년까지 56대 992년 동안 존속한 고대 국가로서 7세기 중엽에 이르러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여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다. 신라는 통일 전후로 여섯시기로 나누어 살펴본다. 

 
| 제1기 | 제2기 | 제3기 | 제4기 | 제5기 | 제6기 | 발해궁궐|
 
제1기 

제1기는 기원전 57년부터 356년까지로 연맹 왕국의 완성기로 부를 수 있다. 신라 최초의 지배자인 혁거세는 금성을 쌍아 경성으로 삼았으며, 5대 파사니사금 22년 월성을 쌓고 왕이 이곳으로 옮겨 거쳐하였다. 또 기원전 32년에는 금성 안에 궁실을 지었는데 314년에는 처음으로 궁궐이란 용어를 사용하였으나 그 의미는 궁실과 같다. 금성 안에는 그 시기에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등으로 구분되어 불린 지배자가 거쳐한 궁궐이 있었고 우물과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제2기 

356년부터 514년에 걸친 시기로 귀족 국가 태동기로 불리며 이 시기 지배자의 호칭을 따라 마립간 시대라고도 한다. 이 시기의 궁궐은 앞 시기에 비하여 많이 확대, 발전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궁성에 대하여는 "487년에 월성을 수리한 뒤 이듬해 금성 에서 월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496년에 중수하였다"라는 정도의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한편 제 2기에 왕권이 얼마나 강화되었는지는 이 시기에 축조된 대규모의 고분 곧 황남대총, 금관총, 천마총 등과 출토 유물을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다. 

제3기 

514년 654년까지로 귀족세력의 연합기로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시기이다. 이때 궁궐에 대한 기록으로는 두가지가 주목되는데 첫째, 날이 가물자 왕이 정전을 피하여 남당에 나아가 정치를 하였다는 기록과 둘째, 진평왕 7년에 대궁, 양궁, 사량궁등 3궁의 일을 모두 맡아보게 하였다는 기록이다. 위에서 정전은 월성 안 궁궐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데 514년 법흥왕이 즉위했다는 자극전이나 651년이 기록에서 나오는 조원전이 이 정전인 듯하다. 또 정월 초하루에 왕이 조원전에 나아가 백관들의 신년 축하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어 궁궐안에서 신년 의례가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제4기 

654부터 780년 까지이며 통일신라의 황금시대이다. 문무왕은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통일을 이룩하였을 뿐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함으로써 얻게 된 막대한 재물과 노동력을 활용하여 경주를 통일 왕조으 수도답게 변모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경주의 도시 전체를 일신시키려던 계획은 실현하지 못했지만 선왕으로부터 물려받은 궁궐을 장려하게 수리하는 한편 새로운 궁궐로서 동궁을 창조하였다. 한편 문무왕은 재위 후반부인 14년 이후부터 21년 숨을 거둘때까지 줄곧 궁궐을 확대하거나 새로운 궁을 짓는데 몰두 하였다. 최종적으로 경성 전체를 새롭게 만들려고 하였을 정도로 신라의 궁궐 건축사에서 가장 주목받을 업적을 남겼다. 또 문무왕 14년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고 화초를 심고 진기한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서 못은 안압지인 것으로 짐작된다. 안압지 주변의 건물터는 형식과 규모로 보아 대규모의 궁궐이 이곳에 조성되어 있었음을 보여 주며 특히 월성과 가까운 못 남쪽에도 많은 건물 터가 남아 있어서 월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전체가 한 궁궐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제5기 

780년부터 889년까지의 호족 세력 등장기로 신라의 쇠퇴가 빠르게 진행 된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궁궐을 새로 짓거나 도성을 보강하는 공사를 크게 벌인적은 없으며 건물 하나를 세우거나 궁궐 안 중요 건물을 중수하는 것이 고작 이었다. 다만 사찰 건축으로 봉은사, 해인사, 황룡사 9층탑이 이 시기에 이룩되었다 

제6기 

889년부터 935년까지의 내란기로 신라의 멸망기다. 전국 도처에 군웅들이 할거하여 지방의 통제가 불가능하였고 왕국의 수비도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그 가운데 견훤과 궁예는 각기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세우고 왕을 칭하고 도읍지를 정하여 궁궐을 짓기까지 하였다. 918년에 궁예를 쓰러뜨리고 즉위한 태조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 고치고 송악에 서울을 정하였다. 이리하여 1천년 고도로서 찬란한 문화를 남겼던 경주는 지방의 한 도시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통일신라 왕조의 중심이었던 월성, 동궁 및 여러 궁궐들도 버려지게 되었다. 

발해궁궐 

발해는 통일신라와 같이 7세기 말기부터 10세기 전기에 걸쳐 한반도와 만주 지방에 남북의 형세를 이루어 존재하던 왕조이다. 발해의 역사에 대해서는 그들 스스로가 남긴 역사책이 없고 멸망뒤 고려로 망명해온 유민들조차 역사를 기록하지 않아 자세한 사항은 고려의 문헌을 통해서만 추측이 가능하다. 현재 남아 있는 상경 용청부의 석등과 장륙불상, 또 온돌과 굴뚝을 갖춘 살림집 등을 통해 그 시기에 만간의 살림짐에도 온돌이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등은 고구려의 자를 사용하여 제작한 것으로6.3미터의 화사석을 중심으로 지은 것이다. 


고려의 궁궐

 10세기 초에 건국된 고려는 고대 국가의 분열상을 극복, 민족의 재통일을 시도하지만 발해의 영토는 이 시기에 상실된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목표 아래 개성을 도읍지로 선택하고 평양에도 성을 쌓는 등 몇 차례 궁궐을 짓기도 하였다. 고려의 정궁은 후삼국시대에 태봉이 쌓았던 발어참성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태조 2년 에 그 자리에 새롭게 창건되었다. 성종대를 거치면서 왕권이 강화되고 모든 법제가 정비되면서 현종 초기에 새롭게 지은 궐은 규모도 커지고 형식과 제도도 더욱 완비된 모습으로 발전되었다. 이 때는 궁성 안에 여러 전각들도 각각의 기능들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건덕전, 유사시에 왕이 거처하는 원덕전, 궁정을 편전하는 선정전, 태자 의 거처인 좌춘궁등이다. 한편 의종(1146-1170)은 고려시대의 궁궐 건축사에서 가장 기억될 만한 인물이다. 그는 지은 궁궐에 거처하기를 꺼려하였고 풍수지리 및 도참설을 신봉하여 수많은 개인의 집을 빼았아 이궁으로 만들어 옮겨 다니면서 호화로운 건축과 조원을 여러 곳에 만들었다. 의종은 무신의 난으로 쫓겨나고 무신이 집권 하는 시기에는 왕의 권력이 크게 실추되고 궁궐의 중건도 부진하였다. 이 후 잦은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는 등 고려의 궁궐은 많은 수모를 겪는다. 서긍의 '고려도경'을 참고하면 고려의 궁궐은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명당자리를 궁궐터로 선정하였기 때문에 경사가 가파른 언덕을 그대로 활용하여 높은 기단을 쌓아 높이의 차이를 극복하고 정전을 비롯한 주요 거눌은 4면에 행각을 둘러 폐쇄적인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웅장한 건물들이 언덕을 따라 올라가면서 겹겹이 포개져 있는 모습은 송악과 어우려져 장관을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 선 의 궁 궐

1. 조 선 전 기

2. 조 선 후 기

유 수 희(94)

이 땅에 정치적 지배자가 생겨나고 나라가 세워지면서부터 지배자의 거처인 궁궐과 함께 정치, 문화, 종교의 중심지로서 도읍이 건설되었다. 그러기에 궁궐은 지나 온 2000년 왕조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 유산으로서 한국사에서 민족 문화의 전통과 창조적 계승을 살리는 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자산이다.

여기에서는 태조 초에 건설되어 600여 년 동안 수도로서 명맥을 이어 온 한성의 궁궐들의 조성된 과정과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변천하는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참고로 조선시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를 경계로 하여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특히 궁궐은 임진왜란 때 전부 불에 타 없어진 것을 그 뒤에 다시 지었기 때문에 이를 전후한 두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1. 조 선 전 기

조선 전기는 1392년에서 1592년(선조25)까지의 200년 동안으로 고려로부터 계승되어 온 문화를 극복하고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바탕으로 양반관료 사회를 형성해간 시기이다. 그런데 왕실은 국왕 중심의 집권 체제를 추구한 반면 유신(儒臣)들은 관료 중심의 정치 운영을 이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왕권(王權)과 신권(臣權) 사이에는 항상 긴장과 갈등이 있었다. 궁궐 건축을 짓는 과정에서도 꼭 필요한 건물 말고는 짓지 말도록 간청하는 것이 관료(사헌부와 사간원의 言官)들의 임무였으므로 왕은 그들과 대립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검소하고 질박한 건물로 짓도록 왕에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왕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요구는 최고 통치자의 거처이기도 한 궁궐을 마음대로 지을 수 없게하는 지나친 간섭으로 여겨졌다. 관료들은 유교에서 규정한 성군(聖君)이 되기를 왕에게 요구하는 한편, 평소에는 경연(經筵)을 통하여 역사상 왕도 정치를 행한 임금들의 치적(治績)을 교육하고, 특히 그들의 거처인 궁궐이 검소하고 누추하기까지 하였다는 고사를 들려 주곤 하였다. 따라서 조선 전기의 궁궐 건축사는 성리학적 군주관에 입각한 제약된 상황아래 전개되었다. 더구나 태조 이성계는 고려 왕조의 신하라는 위치에서 혁명을 통하여 여러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앞 시대의 왕들처럼 신비로운 존재로도, 절대적인 권력을 쥔 존재로도 생각되지 않았다. 다만 민심과 하늘의 뜻을 받아들여 왕위에 오른 지배자로 생각되었다.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에 명시되어 있는 국도(國都)의 구성원리에는 전조후시(前朝後市;궁궐을 중심으로 그 앞쪽에는 정치를 행하는 관청을 놓고 뒤쪽에는 시가지를 형성함), 좌묘우사(左廟右社;궁궐을 중심으로 그 왼쪽에는 왕실 조상의 사당인 종묘를 놓고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배치함)가 있다. 또 궁궐의 구성원리로는 전조후침(前朝後寢;궁궐은 앞쪽에 정치를 하는 장소인 조정을 두고 뒤족에 임금을 비롯한 왕실의 거처인 침전을 배치함)과 3문3조(三門三朝;궁궐은 전체를 3개의 독립된 구역으로 분할하여 각 구역을 울타리로 둘러막고 각 구역 사이에는 문을 두어 연결시킴)가 있다. 이같은 제도적 규정(周制)이 한성의 도성 및 궁궐 계획에 사용되었다는데 이는 어겨서는 안될 법칙이라기보다 이상적 규범으로서 하나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졌다.

경복궁성은 도성 한복판에 있지 않고 북서쪽에 치우쳐 있으며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궁성 남쪽의 큰 길 좌우에는 의정부, 6조, 사헌부, 삼군부 등 주요관청을 배치 하였고, 그 남쪽 동서로 뚫린 큰 길(동대문과 서대문을 잇는길, 지금의 종로)에 시장을 열어 시가지를 형성하였다. 종묘와 사직을 각각 경복궁성의 왼쪽과 오른쪽에 놓았으나 등간격으로 대칭이 되도록 배치하지는 않았다. 또 도시 전체를 둘러싸는 외성을 평지에 장방형으로 쌓지 않고 한성분지를 외호(外護)하고 있는 백악산, 응봉, 인왕산, 타락산, 남산의 등성이에 산성형식으로 지형에 맞게 쌓았다. 결과적으로 周制를 의식하였으되 한성의 지형과 풍수적 명당터를 더 존중하여 도성을 계획하였음을 알 수 있다.

* 경복궁의 구성. 배치

태조4년(1395) 9월 29일의 {태조실록} 기사에는 창건당시 경복궁의 규모 배치, 각 건물의 기능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곧 연침(燕寢), 동소침(東小寢), 서소침(西小寢), 보평청(報平廳)등 내전 건물과 정전, 동서각루(東西角樓), 주방, 등촉인자방(燈燭引者房), 상의원(尙衣院), 양전사옹방(兩殿司壅房), 상서사(尙書司), 승지방(承旨房), 내시다방(內侍茶房), 경흥부(敬興府), 중추원(中樞院), 삼군부(三軍府), 동서누고(東西樓庫)등 390여칸이 준공되었다.

{주례}의 궁실제도인 3문3조 를 적용하여 창건당시 경복궁의 배치원리를 알아보면 먼저 3조는 연조, 치조(또는 내조), 외조를 말하는데 연조는 왕과 왕비 및 왕실일족이 생활하는 사사로운 구역으로 연침, 동소침, 서소침 등 3채의 침전이 연조에 속한다. 치조는 임금이 신하들과 더불어 정치를 행하는 공공적인 구역으로서 정전(正殿;조례를 거행하고 법령을 반포하며 조하를 받는 곳)과 편전(偏殿;중신들과 국정을 의논하는 곳)으로 이루어지므로 보평청과 정전이 여기에 속한다. 외조는 조정의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이 배치되는 구역으로 주방이하 동서누고까지가 여기에 속한다. 창건 당시에 궁궐이름을 경복궁이라고 명명하였던 정도전은 각 건물의 이름과 이름을 지은 의의를 임금께 올렸는데, 연침을 강녕전(康寧殿), 동소침을 연생전(延生殿), 서소침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고 연침 남쪽의 보평청을 사정전(思政殿), 정전을 근정전(勤政殿), 동쪽누를 융무루(隆武樓), 전문(殿門)을 근정문, 남쪽문인 오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고 하였다.

연조, 치조, 외조는 각기 회랑으로 둘러싸인 폐쇄적 중정(中庭)형식을 취하면서 남에서 북으로 연속되어야 하는데 {태조실록}의 기사를 참조하여 창건 당시의 배치도를 추정해보면 3문3조라는 원리를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3문3조로 이루어진 궁실 전체를 다시 궁성으로 둘러싸고 거기에 동문(건춘문), 서문(영추문), 남문(광화문, 2층누문)을 설치한 다음 남문 앞쪽 대로(大路)좌우에는 의정부, 삼군부, 6조, 사헌부 등 관청을 나란히 배치하였다.

창건 당시의 경복궁은 전체 규모가 천 칸에도 훨씬 못 미치는 390여 칸에 불과한 점, 반면에 중추원, 삼군부 등을 궐안에 배치한 점, 궁성 안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좌하기 위한 최소한의 부서로서 상의원, 사옹방, 상서사, 승지방, 내시다방 등만을 둔 점 등, 몇가지 측면에서 왕권이 강화되기 전, 유신들이 추구하던 재상 중심의 정치 운영에 적합하도록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태조때 창건한 경복궁은 세종때에 이르러 비로소 왕궁다운 궁궐이 되었으며 이후 100여년 뒤인 명종8년(1553)까지는 거듭 발전하여 조선 전기에 이룩된 궁정 문화를 총체적으로 담고 있었다. 그러나 명종8년의 화재로 정전·편전 일곽을 제외한 내전 일곽이 모두 불에 타 이듬해에 대대적으로 중건하였으나 그것마저 임진왜란때 완전히 소실되었다.

* 창덕궁과 창경궁

태종, 세종대를 거치면서 점차로 정치가 안정되고 권력이 왕에게로 집중되면서 경복궁 내부에는 건축상 많은 변화가 일어나며, 경복궁 동쪽 종묘 옆에는 이궁인 창덕궁까지 생긴다. 곧 태종 때에는 경회루를 짓고 주변에 못을 파서 군신의 연회 장소를 마련하였고 세종 때에는 동궁, 후궁(後宮), 혼전(魂殿), 학문 연구 기관 및 후원(後苑)까지 완비하여 이른바 법궁체제(法宮體制)를 완성하였다. 또 주요 전각뿐만 아니라 문에도 고유한 이름이 붙여진다.

편전인 사정전(思政殿;창건 때는 보평청) 좌우에 만춘전(萬春殿), 천추전(千秋殿)을 더 지었고, 연침인 강녕전 일곽 뒤쪽에 새로 교태전(交泰殿), 함원전(含元殿)을 비롯하여 자미당(紫薇堂), 인지당(麟趾堂), 청연루(淸燕樓), 종회당(宗會堂), 송백당(松栢堂) 등 후궁을 지었다. 동궁은 세자가 백관의 조회를 받는 계조당(繼照堂)과 서연(書筵)및 시강(詩講)을 받는 자선당(資善堂)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 후원에는 못을 파고 주변에 나무를 심었으며 취로정(翠露亭) 등 정자를 세웠다.

태종5년(1405)에 세워진 창덕궁은 처음에 외전 74칸 내전 118칸 규모로 지어졌으나 이후에 광연루, 진선문, 금천교, 돈화문(정문), 집현전, 장서각 등이 증설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정침청(艇寢廳), 동서침전(東西寢殿), 수라간(水喇間), 사옹방, 탕자세수간(湯子洗手間)등 내전을 비롯하여 편전, 보평청, 정정, 승정원청 등이 있었다고 한다.

창덕궁 옆에는 옛 수강궁(壽康宮;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한 뒤에 거처하던 궁, 1419년 창건)터에 성종14년(1483)에 창건된 창경궁이 있다. 성종은 왕실의 어른으로서 정희왕후(세조비이자 성종의 할머니), 소혜왕후(덕종비이자 성종의 어머니), 안순왕후(예종비이자 성종의 작은 어머니)와 창덕궁에 함께 거처하였는데 이들을 위하여 따로 궁궐을 지어 창경궁이라 하였다. 일종의 대비궁인 셈이다. 그래서 경복궁과 창덕궁이 남향으로 배치된 것과는 달리 창경궁은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창경궁에는 정전인 명정전(明政殿)과 편전인 문정전(文政殿)을 비롯하여 인양전, 경춘전, 통명전, 양화당, 여휘당, 환경전, 수녕전, 환취정 등 많은 내전 건물이 있었으나 역시 임진왜란때 모두 소실되었다.

조선 전기 정치 활동의 주 무대이자 역사의 현장이며 궁정 문화의 결정체였던 3궁궐은 북궐(北闕;경복궁), 동궐(東闕;창덕궁과 창경궁은 한 궁성안에 있었으므로 합쳐서 하나의 궁궐로 부름) 등으로 불렸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모두 흔적도 없이 불타버렸다.

2) 조선후기

조선 전기에 이룩된 높은 수준의 문화적 성과들은 임진왜란으로 거의 다 파괴되고 소멸되었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입은 타격도 대단히 심각한 것이어서 외형적으로나마 이를 회복하는 데에 반세기 이상의 시간이 걸렸으며 전란으로 입은 피해를 극복하고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는 단계에 이르는데 1세기가 걸렸다.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위기 상황에서도 종묘와 왕의 거처인 궁궐은 가장 먼저 재건되어야 할 목표로 생각되었다. 종묘와 경복궁을 재건하기 위하여 선조38년(1605)부터 진행된 중건 계획은 다음 순서로 마련되었다.

첫째, 춘추관에서 건국 초기와 성종때의 공사및 명종8년부터 9년까지의 경복궁 중건 공사등에 관한 문서와 기록을 등서(騰書)로 묶어서 임금과 해당관청인 공조에 보냈다.

둘째, 공사를 담당할 기구로서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하고, 등서를 참고하여 구체적인 계획을 입안하였다.

그리하여 1606년에는 궁핍한 재정과 민생고를 감안하여 경복궁의 중심 일곽만을 먼저 짓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608년까지 종묘만을 중건하였을 뿐 경복궁 중건은 실현시키지 못했다. 그대신 창덕궁재건 공사를 시작하여 1609년에 준공하였다. 여러차례 논의에도 불구하고 경복궁 중건은 실현하지 못한 채 조선후기에 경복궁을 대신하여 정궁 역할을 한 것은 창덕궁이었다. 광해군은 다시 1615년에 창경궁을 중건하고 뒤이어 인경궁과 경덕궁을 창건하였으나 인경궁은 인조때 헐려서 창경궁과 창덕궁을 지을 때 이용되었고 흔적도 남지 않았다.

경희궁(경덕궁을 고침)은 1620년(광해군12)에 완공되었는데 빛을 보지 못하다가 4년뒤인 1624년부터 280여년동안 여러 왕들의 거처로서, 조선 후기 역사의 현장으로서 창덕궁과 더불어 그웅장한 모습을 지켜 오다가 1910년의 한일합방 직전부터 일본인들에 의하여 강제로 철거되기 시작하여 얼마 안가서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다.

경복궁 터는 그대로 둔채 창덕궁는 정궁, 경희궁은 이궁으로 사용되었으며 창경궁은 창건당시의 대비궁이라는 용도를 벗어나서 창덕궁을 옆에서 보좌하는 궁궐로서 활용돠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한 궁성 안에 있어서 동궐이라고 불렸던 것에 대하여 경희궁은 서궐,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정궁인 경복궁은 북궐이라고 불렸다.

궁궐 안의 건물들은 해당 관청의 철저한 관리와 보호를 받았으므로 때맞추어 수리되었다. 또 왕들은 저마다 새로운 건물을 첨가하면서 궁궐의 면모를 부분적으로나마 바꾸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동궐과 서궐은 각각 수천 칸 규모로서 100여 채의 복잡, 다양한 건물을 갖춘 대궐로 발전하였다.

19세기 초까지 꾸준하게 발전해 온 동궐과 서궐은 1829년 서궐의 화재를 시작으로 창경궁(1830년), 창덕궁(1833년)이 차례로 대규모 화재를 당하여 정전·편전·침전 등 주요부분이 불탄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 광해군 인조대를 거치면서 재건된 궁궐이 또 200여년 만에 한꺼번에 소실된 것이다.

조선후기의 궁궐 건축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경복궁 중건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270여년동안 아무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경복궁 중건은 흥선 대원군에 의하여 마침내 시도되었다. 그는 순조, 헌종, 철종대(1800-1863)의 이른바 세도정치기를 거치면서 땅에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궁극적으로는 조선왕조를 부흥시키는 방편의 하나로 경복궁 중건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이미 왕조라는 봉건 체제가 해체되고 있었다. 특히 양반 관료층이 극도로 부패한 상황에서 대다수 농민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도적이 되어야 할 만큼 조선 사회는 뿌리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왕조 사회의 해체가 이미 크게 진전된 시기에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궁궐 중건을 대대적으로 시도한 것은 시대 착오였음이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중건된 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마지막 기념비이다.

경복궁은 1865년에 중건 계획을 세우고 건물을 설계할 때에 동궐과 서궐이 많이 참조되었다. 다만 이때의 동궐과 서궐의 건물은 대부분 1830년에 중건된 것이었고, 이때 건설공사에 참여한 기술자들 가운데에는 1865년 이후의 경복궁 중건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도 있다.

1865년(고종2)4월부터 시작된 공사는 2년 7개월만인 1867년 11월에 대체로 끝난다. 그러나 1872년까지는 마무리 공사가 계속되었으며 이해 9월에 영건도감이 해체됨으로써 중건공사가 완료되었다. 공사비는 773만 6,898냥에 이르렀는데 거의 전부를 원납전(願納錢)이라는 이름으로 모금하거나 반강제적으로 징수하였기 때문에 백성의 고통은 아주 컸다.

궁성의 둘레가 1,813보 높이가 20여 자이며 건물의 총 칸수는 7,481칸에 이르고 행각이나 장랑(長廊)을 제외한 단독 건물만도 150여 채가 넘는 방대한 규모의 궁궐이었다. 그 뒤 경복궁은 1873년과 1876년 두 차례 일부 화재를 당하기도 하였다. 한편 1873년에는 향원정과 신무문(北門)사이에 건청궁이라는 후궁을 지었고 1888년에는 대균모의 중건 공사를 시행하였으며 1893년에는 신무문 밖 후원에 경농제(慶農齊)와 大有軒)을 지었다.

어려운 시기에 백성들의 노역과 재물로 건설된 경복궁은 왕조 부흥의 터전이 되지 못한 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았긴 뒤 파괴 변형 왜곡되었다. 조선 총독부 청사를 바로 경복궁 정전인 근정전 앞에 세웠다. 수많은 건물들이 헐리고 현재에는 10여 채의 건물만이 보존되어 있다.

경복궁의 중건 이후에도 경운궁(慶運宮) 중건이 2차례나 시행되었다. 경운궁은 임진왜란 직후에 잠시동안 궁궐로 사용되다가 창덕궁 및 창경궁이 중건된 뒤에는 더 이상 왕의 거처로 쓰이지 않았는데, 20세기 초에 와서 다시 중요한 궁궐로 부각되었다. 왜냐하면 경복궁 안에까지 일본인들이 침입하여 왕비를 살해한 사태에 처하게 되자, 당시 주변에 외국 공사관들이 밀집해 있던 경운궁으로 왕실이 피신하기 위하여 대규모 건축 공사를 벌여 왕궁다운 궁궐로 변모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경운궁은 전통적인 궁궐 건축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외세의 개입이 심화되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한국의 건축도 일본화, 서양화의 길로 치닫게 된다. 일본에 의하여 왕위에서 강제로 쫓겨난 고종은 이 경운궁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꾸고 여기서 남은 생애를 울분 속에서 보냈다. 덕수궁이란 이름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처럼 고유 명사가 아니며 왕위를 물려준 상왕(上王)이 거처하던 궁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는 보통명사이다.

조선시대에는 삼국시대 이래 고려로 계승되어 온 궁궐 건축사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성리학을 통하여 들어온 제도와 사상을 전통에 융합시켜 새로운 형식의 궁궐 건축을 창조하였다. 경복궁이 조선 궁궐의 기본형이라고 하면 창덕궁과 경희궁, 창경궁은 변형으로 이해된다.

by 초령목 2014. 5. 25. 02:48

*성리학자, 철학자 


정조가 똑똑하고 공부하기를 좋아해 성리학 분야에 뛰어났기 때문에 신하들을 오히려 가르칠 정도였는데 
정약용과의 성리학토론에서 한 번도 이겨본적이 없다고 함. 
1000여권의 유교경전을 놓고 연구했던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였음. 

- 내강중용강의, 내강모시강의, 희정당대학강의 


*서학자 

서학에도 조예가 깊어서 성경도 공부했음. 


*역학자 

백련사의 주지스님은 스스로를 조선 최고의 역학자라고 자부했지만 
정약용을 만난 이후 정약용에게 배움을 받기 위해 매일 정약용을 찾아갔음. 

- 역학서언 


*문학가, 한문학자, 문예비평가 

이미 7살 부터 시를 지었고('산'이라는 시가 전해짐) 10살 이전에 지은 시를 모은 삼미자집이라는 책을 냄 
농민의 참상이나 사회현실을 한시로 지으면서 조선후기의 한시에 영향을 끼침. 
또한 어린시절 홍역을 치료해준 이헌길이라는 의사의 전기(몽헌집)를 집필함. 

- 다산시문집 


*역사학자 

강역고라는 역사서를 통해 역사의 해석과 비판이 무엇인지 저술함. 


*지리학자 

조선 최고의 지리서 택리지를 지은 이중환의 스승임. 
아방강역고에서 고조선에서 발해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강역의 역사를 각종의 문헌에서 기록을 뽑아 고증하고? 
자신의 견해를 첨부하여 그 내력을 자세히 밝히고 있음. 
고조선과 발해 외에 한사군, 삼한(마한, 진한, 변한)의 위치를 다루고, 
옥저, 예맥, 말갈, 발해의 순으로 북방 여러 나라의 위치와 역사도 함께 검토. 
또한 지리 고증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고조선 이래의 역대의 강역과 수도, 하천 등의 위치를 
새롭게 밝혀 잘못 기록된 지리서에 수정을 가했음. 

- 아방강역고, 대동수경 


*정치학자, 행정가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주민자치), 농민의 토지균점,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 
끊임 없는 부정부패와 공직자의 청렴, 사명감을 중요시 여겼고 이러한 제도들의 실천을 더 중요시 여김. 

- 목민심서 : 목민관의 사례모음집 
흠흠신서 : 목민심서 집필 중 형법 집행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이 부분만 따로 확대하여 지은 책 
경세유표 :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를 실제 정치와 행정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지은 책 


*경제학자 

세법, 경제 제도 개혁 주장,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상공업이 중요하다고 주장. 

- 경세유표 


*형사, 법의학자 

살인사건을 조사하여 범인을 밝혀내고 억울한 사람의 누명을 벗겨주기도 함 
흠흠신서라는 저서를 통해 자신이 맡았던 사건을 기록했음. 


*건축가, 토목공학자, 기계공학자, 과학자, 발명가 

배다리와 기중기, 수원화성 설계 제작 
과학이 인간사회의 진보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여 
서양과학기술을 배울 수 있는 이용감이라는 관청을 두자고 제안. 
자전설을 주장하며 천동설을 비판하는 근거를 마련. 
빛의 굴절에 관한 서적을 읽었고 렌즈에 대한 소개를 했으며 
근시와 원시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정도. 


*의사 

순조가 병이 들었는데 어의들이 모두 고치지 못하자 정약용을 불러 치료하게 함. 
조선 최고의 의사였음. 
홍역의 치료에 관한 마과회통 저술하고 종두법을 실험했음. 

- 마과회통, 촌병혹치(약을 구하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쉬운 처방법을 집필) 


*법학자 

형법의 체계와 법률 적용을 검토 


*국문학자 

여러 분야의 어휘를 한자와 한글로 대비해 물명고라는 사전을 편찬. 
속담과 방언을 정리함 


*번역가, 편집가 

논어, 맹자, 춘추, 대학, 중용 등의 서적을 해석, 편집함 


*문화학자 

우리나라의 예법, 상법을 정리한 상례사전등을 집필 
(왜 예송논쟁이라고 효종이 죽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 가지고 싸웠던거 있잖아요. 
그거보고 빡치셔서 집필하심. 결론적으로 송시열 디스) 


*음악학자 

우리 나라의 음악이론·성률·악기 등의 기록을 고증한 음악서 악서고존 편찬 


*교육학자 

아이들 교재인 소학주천 집필




율곡 이이

연암 박지원

정조

세종

이가환

장영실

by 초령목 2014. 4. 30. 20:23

한민족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통일 중국제국에 대규모 원정을 건 왕

발해 무왕

 



고조선부여고구려신라백제고려 등 한민족 국가가 중국을 격퇴한 적이 있으나


대부분 수성전으로 몰아내거나 청야전술을 기본으로한 우주방어전이었습니다.


중국에 대해 선제공격을 한 것은 중국 분열시기를 이용하여  단기간 치고 빠지기가 주류.


연나라와 아웅 다웅 하던 고구려도 연나라에게 영혼까지 털릴뻔하기도 하고


북위가 하북을 통일하자 얌전히 눈치 보는 형세로 굳어집니다하북통일만 해도 국력과 회전에서의 전투력의 압도적


인 열세를 인정하고 수성전우주방어전으로 대응합니다그런데


무려 전중국을 통일한 제국에 대해 선제 공격과 전쟁을 건 유일한 나라가 있으니 바로 발해입니다.


당나라 전쟁에 앞서 상황을 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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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결집기(719~724)  엄청난 정벌사업의 시작

발해의 각 배후에 있던 동북방의 여러 유목민세력들을 치기 시작.


719년 구다족을 쳐서 복속시킴

7

20년 개마족을 격파한뒤 복속시킴.

전까지 당은 발해를 인근 부족 추장집단세력으로 치부하며 개무시했으나 개마족과 구다족을 병탄한 이후부터 좋지 않은 눈초리로 보기시작신라 또한 발해와 긴장이 고조.



발해 건국 초기 골치 아프게 했던 유구실위 기마 세력을 월희읍루불열 등지에서 모조리 제압하므로서 해결무왕은 단 5년만에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배후의 모든적을 때려부수고 있었던 것.



또한 지방행정체계를 "도독", "제사(혹 자사)", "수령"으로 두었으며조정체제와 "건민책령제"를 통하여 백성들의 생활안정을 시키고경제안정을 도모하는 것들을 골자로 하는 국력의 전반적인 결집기.

 



 2팽창기(724~731)

- 725년 발해 내부에 잔존하고 있던 무왕의 정적 세력들이 무왕을 폐위하고자 쿠데타를 일으키나 무왕은 살아남음.

오히려 이걸 계기로 무왕은 건국 초 암암리에 숨어있던 자신의 자리를 노리던 군벌이나 정적들을 일거에 제거 소탕하고 왕권을 강화하게 됨이를 바탕으로 골칫거리였던 726년 흑수말갈 정벌에 나섬


흑수말갈을 기병군단을 대파하고 흑수말갈의 대칸 예속리기의 목을 벰말갈의 군마와 양질의 기병들을 흡수.발해는 서서히 팽창기에 접어듬.




이에 당나라는 긴장하게 됨그 이전까지 근방의 흔한 유목민 추장세력쯤으로 여겼던 발해가 거침없이 주변을 병탄하여 세력을 불리고 있었기 때문.

무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요동 정벌에 나서 전 고구려의 각 요새들을 차례차례 탈환하여 당군을 축출하고 727 730년까지 요동정벌을 완성당은 발해를 더 이상 좌시하지않고 물밑 작업에 들어가고.. 이에 드디어 발해 당의 전쟁의 서막이 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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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2
발해 무왕이 장문휴(張文休)가 이끈 수군을 보내어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공격하여 자사 위준(韋俊)을 죽임(등주 공격)
*출전 : <<구당서>>, <북적열전발해말갈

733
당나라의 요청으로 발해 공격을 위해 김사란(金思蘭)이 이끈 신라군이 출동하였으나 눈이 많이 와서 철수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성덕왕 32 7

 

733
발해 무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 마도산(馬都山일대를 공격함(마도산 전투)
*출전 : <<신당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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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가 대조영에 의해 건국되면서 당나라는 발해를 국가로 인정해 주다가

719년 대조영이 죽고 무왕(대무예) 2대왕에 오르면서부터

 

당나라가 발해를 돌궐,거란,흑수말갈과 동급으로 대함.

(당시 돌궐,거란,흑수말갈은 정식 국가라고 안보고 부족으로 구분했음.

쉽게말해 당나라의 흔한 유목민 추장호구)

 

 

 

무왕은 즉위하자마자 동북쪽으로 영토를 확장시켜 나갔음

(신당서에 보면 "동북의 오랑캐들이 발해를 두려워 했다"라고 나옴)

 

722년 흑수말갈 부족장이 발해 영향권 안해 있어야 하는데 당과 내통하기 시작.

당은 파죽지세의 발해를 장차 멸망시킬 계획을 가지고 말갈 부족장에게 벼슬을 내리고 당의 관을  설치하는등 . 말갈과 연합하여 장차 발해를 양쪽에서 압박하려함

 

 

 

 

 

사진에서 보이듯이 당과 흑수말갈이 친목질을 하면서 발해는 위험을 느끼게 됨

(일명 샌드위치 당할까봐..)

 

※돌궐과 거란은 발해와 우호적 관계였고 당과는 적대관계여서 괜찮음.

 

그래서 흑수말갈에게 당이랑 친목질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데도

흑수말갈은 무시하고 발해한테는 조공도 안바침

(당나라한테는 굽신굽신)

 

결국 725년 당나라는 흑수말갈에 관청을 설치하고 관료를 파견시켜 다스리기 시작했음.

사실상 당나라가 흑수말갈을 흡수하게 된거임

 

 

이에 분노한 무왕은 왕위계승자인 대도리행(무왕 아들)을 당에 보내어

흑수말갈한테 관심 꺼달라고 부탁함

 

하지만 당 현종은 걍 무시;;

 

 

무왕은 큰 그림을 그려볼 때 이 사건을 좌시하게 될 경우 장차 발해의 존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것을 알았음나라의 국운을 걸고 세계제국 당과 맞설 것을 결심하고 

가장 신뢰하는 장수 대문예(무왕 동생)에게 흑수말갈 토벌군 사령관에 임명함.

 

근데 대문예는 입장이 달랐음. (당시 대문예는 당에 9년간 있으면서 당의 국력과 저력을 알고 있었고 당의 문화에 흠뻑 빠져든 친당파)

 

 

 

 

 

무왕(대무예) "흑수말갈은 이제 당나라속국이 되었으니 당과 연합하여 발해를 공격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흑수말갈 토벌해야함니가 가서 조지고 와라"

 

 

 

 

 

 

 

 

 

대문예형님 지금 장난하십니까당나라는 발해의 몇배에 달하는 군사를 보유했다구요

아무일도 아닌데 괜히 흑수말갈 건드렸다가 발해 멸망할일 있어요??

 

(대문예는 당에서 8년동안 생활한 경험이 있어서 친당파였음)

 

 

 

 

무왕 "개소리말고,  지금 안치면 우리가 망함니가 언능 가서 토벌하고 와라"

 

 

결국 대문예는 흑수말갈 토벌군 사령관으로 강제임명되고 흑수말갈을 토벌하기위해 동북으로 향했음.

 

 

하지만 국경지대에서 싸움은 안하고 계속 무왕한테 못싸우겠다고 상소를 올림.

(상소 내용: "아무래도 이건 하극상임 나 못하겠음")

 

 

빡친 무왕은 대문예를 소환하기로 하고 

대신 사촌형 대일하를 토벌군 사령관으로 보냄.

 

 

 

근데 소환하기로 한 대문예가 발해로 안오고 당으로 망명해버림;;;

 

 

 

그리구선 당 현종 밑으로 들어감.

 

 

당 현종은 대문예를 발해 내정간섭에 써먹으려고

 

 

환대하며 벼슬까지 내림..

 

 

 

그리고 무왕한테

 

"대문예도 넘어왔는데 우리 당나라랑 너희 발해랑 임금 신하 관계로 친하게 지내지??"

 

이런내용의 국서를 보냄 

 

 

 

 

 

 

 

 

당황한 무왕은 단호한 결정을 내리고 이렇게 답문을 보냄

 

 


 

"당에 망명한 순간부로 그는 내 동생이 아니다그를 죽여라"

 

 

 

 

 

 

당 현종은 약점잡힌 무왕이 굽히고 들어올줄 알았는데

 

예상외의 단호한 답변을 보고 당황함..

 

 

 

 

그래서 "대문예를 죽이기 위해 멀리 귀양보냈다."

 

라고 구라치고 지방에 숨겨놓음.

 

 

근데 얼마못가 무왕이 구라라는것을 알아차리게 되고

 

국서에 유례없는 내용을 써 넣음 

 

"큰나라는 신의를 보여야 하거늘 어찌 속일수가 있소이까바라건데 예전의 청대로 그를 죽여주십시오"

 

 

 

생긴지 30년 갓 지난 신생국가가

동아시아를 장악한 당나라의 임금한테

구라쟁이라고 꾸짓은거임;;

 

 

 

 

당 현종도 뻘쭘해서 당분간 발해에게 아무것도 못했으나

 

 

 

728 4,

왕위 계승자였던 대도리행이 당에서 갑자기 사망하게 되면서

 

 

당나라의 태도는 180도 변해버림.

 

발해에게 협박하기 시작하게 됨

 

"내가 지금껏 참아왔으나 너희 나라가 점점 기어오르는것 같구나

왕위 계승자도 죽은마당에 대문예를 후계자로 정하도록 해라.

한그러면 무슨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발해의 왕권 자체가 흔들릴수 있는 상황

 

무왕은 결단을 내려야 했음.

 

 

이렇게 당나라의 속국이 될 것인지

 

아니면 당에 맞서야 할지..

 

 

 

결국 무왕은 압록강으로 군사를 이동시키고

 

 

박작구라는 포구에 발해군을 집결시켰다.

 

 

당나라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무왕은 장문휴장군에게 당 정벌을 명하고

 

장문휴 는 수개월동안 군선과 군사를 정비해 출격 준비를 마쳤다.


 

 

 

732 9월 드디어 출격 명령이 내려졌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해외 원정이 시작된 것이다.

 

 

  

 

 

목적지는 중국 산동반도.(저기 당이라고 쓰여있는곳 바로 옆이 '장안'이라는 당나라 수도였음)

등주라는 지역이었다.

 

 

(등주의 모습 성 자체가 배를 정박하는 수성이라 전투하기 까다로움.)

 

등주는 당시 북방지역에서 가장 큰 항구로 무역의 거점이었고.

동시에 당나라 수군의 핵심 요충지였다.

 

(전국의 조선기술자들이 이곳에 집결했으며 물자를 들이고 군선을 만드는것 모두가 등주에서 이루어졌을 정도)

 

 

그런 요충지를 공격하는것은 매우 위험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큰 치명타를 줄수 있는 장소였다.


2부


장문휴의 등주 원정과 무왕의 마도산 전투



장문휴 장군은 선단과 군단을 정비 드디어 당나라 원정을 시작했다.



 

 

목적지는 중국 산동반도.(저기 당이라고 쓰여있는곳 바로 옆이 '장안'이라는 당나라 수도였음)

등주라는 지역이었다.

 

 

(등주의 모습 성 자체가 배를 정박하는 수성이라 전투하기 까다로움.)

 

등주는 당시 북방지역에서 가장 큰 항구로 무역의 거점이었고.

동시에 당나라 수군의 핵심 요충지였다.

 

(전국의 조선기술자들이 이곳에 집결했으며 물자를 들이고 군선을 만드는것 모두가 등주에서 이루어졌을 정도)

 

 

그런 요충지를 공격하는것은 매우 위험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큰 치명타를 줄수 있는 장소였다.



고구려를 멸망시킬때 출발했던 당나라의 함대 역시 이곳에서 출발했다.


 

발해군의 작전은 기습적인 상륙작전과 선제공격





732 9 5일 발해군은 마침내 등주를 침공했다.




 

 

 

 

 

 

 


 

그 결과 등주 일대의 군사와 행정을 총괄하던 등주자사 위준을 죽임

(포로로 잡은것도 아니고 그자리에서 죽여버림)

 

 

당황한 당 현종은 급하게 장수와 토벌군을 보냈지만 발해군이 다 전멸시킴;

 

 

 

 

결국 당나라는 

 



신라의 선덕왕(27대 선덕여왕과는 별개인물, 37대 왕)에게 벼슬까지 높혀주면서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발해를 공격해 달라고 부탁했고

 

 

 



 

당 현종이 직접 장수까지 지명해서 싸우게 함김유신 장군의 손자 김윤중)

 

 

 

 

 

 

신라는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발해를 공격하러 북상함.

(일명 빈집털이)

 

 

등주에 머물던 발해군은 부랴부랴 본토로 돌아오게 되고..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신라가 날씨를 핑계로 싸우지도 않고 공격을 포기함

(눈이 너무 많이와서 춥다고 고스란히 돌아감)

 

 

 

 

당은 발해를 직접 공격하기로 하고 비수를 뽑아듬.

 


 

대문예를 중심으로 발해 토벌군을 꾸려서 무왕과 맞서게 만든거임 

 

 

 

 

 

당의 장수가 된 대문예는 동족을 향해 칼을 휘둘렀고 명백한 반역자가 되버렸음

 

이에 무왕은 암살단을 조직해

대문예를 죽이도록 계획하여 당나라 낙양 한복판에서 암살을 시도함.

 

결과는 Fail..

 

하지만 당나라 도시 한복판에서 발해 자객의

암살시도가 일어난것에 빡친 당 현종은

 

발해의 자객을 모두 잡아 처형시킴

 

(이 결과 대문예는 발해 토벌에 겁을먹고 숨어버림

 

 

그리고 무왕은 다시한번 결단을 내리게 됨.

 

 

저번에는 해로를 통한 공격이었고

 

이번에는 육로를 통한  공격을 계획한거임

 

 

 

 

 

733

 

 

 

 

 

 

육로를 통한 공격바로 마도산 전투였음

 

 

이번에는 장수에게 임명하지 않고 무왕이 직접 친정, 친히 군단을 이끌고 당나라로 진격.

 

 

당나라는 마도산 일대를 지키기 위해 계속 군사를 파병했지만

 

 

파병하는 족족 왕이 직접 이끄는 막강 기병 발해군에게 발려버림


(밑빠진 독에 물 붙기)

 

 

(그것도 그냥 이긴게 아니라 한번 전투가 있을때마다 당나라군만 6000명에서 10000명씩 죽어남)


 한국역사국가중 회전에서 중국제국을 이렇게 대파하면서 학살한 경우는 유일, 고구려조차 관구검에게 회전에서 전멸당할뻔하고 수성전으로 변화

 

 

 

 

 

 

 

발해군과의 전투에 임했던 당나라 장수는 당시 전투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결국 마도산 일대의 당나라 군사는 모두 전멸했고

 

무왕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만리장성 부근까지 쾌진격한다.

 

발해군이 만리장성까지 육박한 상황에서

 

남은 당군의 생존자 수는

전면전도 할수 없을정도로 발해군보다 못 미쳤다.

 

결국 당나라 군은 발해군과의 전면전과 토벌시키려던 목적을 포기하고

 (토벌은 둘째치고 지들이 죽게 생겼는데ㅋ)

 

 

 

 

지형지물(마도산 일대는 돌이 많음)을 이용해 버티기에 들어갔다.

 

 

당나라군은 돌을 이용해

400리에 이르는 장벽을 쌓고 마도산에서 꼼짝 않고 버텼다.

 

 

 

 

 

한참동안 마도산에서 당나라군과 발해군은 대치하게 되고


회전에서는 동아시아의 패자였던 당나라군을 그야말로 학살하며 대파하던 발해였지만,

당나라가 돌성벽과 요새로 우주방어하자 고전하게 된다. (응? 뭔가 중국과 한국국가 전략이 바뀐듯한데;)


신생국 발해로서는 수십에 이르는 대군을 장기화 주둔하기 부담스러웠고,


당또한 일개 부족 추장국으로 개무시하던 발해의 막강한 군사력을 당한터라..



 

결국 당 현종은 무왕에게

발해를 개별 국가로 인정하는 것과

내정간섭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게된다.

 

 

그 결과 발해는 당의 영향을 받지 않은 발해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으며

더불어 70년 뒤 발해는 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최 전성기 당시 발해는 해동성국이라 불리게 됨)

 

 

 

그리고 등주 공격을 계기로 741년까지 흑수말갈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지 못했다.

무왕은 당시 최강대국 당나라를 상대로 전쟁도 마다치 않는 정책을 펼침으로써당나라가 발해를 결코 얕잡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마무리: 736년 무왕과 당나라는 서로 화해하게 되고 737년 무왕의 아들인 대흠무가 3대왕에 오르면서 당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게 됨

 

 

 

 ---------------------------------

 

요약

 

발해 건국자 대조영이 죽으면서 당나라가 발해한테 빵셔틀 하라고 협박함

빡친 무왕이 선제공격함(한민족 역사상 최초의 해외원정이자 전쟁시기도 아닌 평화시대에 선제공격이었음)

결국 당나라가 발해 인정하고 발해는 고유의 문화를 키울수 있었음

 


 

 

 

자료참고 : 한국사 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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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령목 2014. 2. 27. 12:55



by 초령목 2013. 3. 28. 01:55

호부견자(虎父犬子)라더군요. 호랑이 아비에 개 같은 자식. 하하...... 
그럼 나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그 자리에서 제안을단호히 거절하고 잡혀 죽었야했나요? 영웅 아버지 처럼 위대하고 영광스럽게? 
사실 아버지는 재판도 받고 가시는날까지 시끌벅적 하기라도했지만, 나는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그야말로 개죽음 아니었을까요? 
내 형은 7살 나이에 자기가 왜 당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독을 먹고 죽어버렸죠. 나도 그렇게 죽으란 말입니까? 
아무도 기억 못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런 죽음을? 왜? 내가 안중근의 아들이어서? 

왜 나는 안준생으로 살 수 없었죠? 
왜 나는 내 삶을 선택할 기회도 없이 이런 운명에 던져져야 했죠? 
아버지는... 아버지는 자신이 선택한 거잖아요. 그래서 죽은 거잖아요. 
그런데 왜 나는 내 선택이 아닌 아버지의 선택 때문에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까? 
왜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아버지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통째로 망가져야 합니까? 

나라를 팔고 아비를 판 더러운 자식... 
친일파... 
번졀자... 

뭐라 욕해도 상관없어요. 내가 괴로워할 때 아무도 내게 손 내밀지 않았잖아요. 나를 욕할 자격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요. 
그렇게 버려둘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무슨 권리로... 

내 아들은 의사입니다. 미국에서 제법 성공했고, 주위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잘 살고 있죠. 
내가 사람들의 경멸을 받으며 모은 돈으로 가족을 부양한 덕분에, 내 자식들은 사람답게 살 수 있었던 겁니다. 

우습지 않나요? 
영웅의 아들은 개 같은 삶을 살고, 
그 변절자의 자식은 다시 성공하고. 

아버지는 나라의 영웅이었지만 가족에겐 재앙이었죠. 
나는 나라의 재앙이지만 내 가족에겐 영웅입니다. 

                        -소설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 中-



by 초령목 2013. 3. 16. 18:12

원자폭탄에 희생된 조선의 왕자를 아십니까?

조선의 마지막 왕조. 고종황제의 손자이자 의친왕(고종황제 아들)의 차남. 이우 왕자.

참 반듯하니 얼굴도 미남이시다. 지금시대에 영화배우 뺨칠 정도로.




1912년에 태어나 1945년 생을 마감한 이우 왕자.

그 영화같이 짧은 인생 속의 그의 업적은 고개를 숙이게 한다. 

일화를 하나 소개하자면, 

조선인을 사랑한, 조선인에게 따스했다던 이 분. 


일본군들이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에 작전 도로를 내면서 땅을 가로챈 후 보상을 해주지 않아

그 지방의 농부들이 이우 왕자에게 호소했다고. 





이 호소를 들은 이우 왕자는 그 즉시 사령부로 달려가 공사 취소를 요구. 

이를 들어줄리 없는 일본인. 공사 취소요구를 거절하자 이우 왕자는 

그 일본인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며 이렇게 말했다고. 

"황족이며 공작인 나는, 너 하나 죽여도 감옥에 가지 않는다. 즉시 죽여주마"

이 위협으로 이우 왕자는 결국 목적을 달성. 



일본은 황제의 자손인 이우 왕자에게 '일본여성'과 결혼할 것을 강요. 

독립운동가인 유동렬의 딸과 정혼한 상태였으나, 황족과 독립투사 가문의 결혼을 일제가 강렬히 반대.

조선인과의 결혼을 고집한 이우 왕자는 결국 친일파 대신의 손녀와 결혼하는 것으로 타협. 


 

대한 제국의 황복으로서 일제의 요주 감시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굽힘이 없었으며,

일본말이 아닌 조선말을 사용하고, 술자리에서는 당시 금지곡인 '황성옛터' 노래를 불렀다고. 

일제의 장교로 근무한 이우 왕자는 동기인 이형석에게 

"일본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 우리 군복을 입고 당당히 살 때까지 기다리라"

조선의 황족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늘 잊지 않고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고.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추진했던 이우 왕자.

직접 비밀 결사대를 조직, 일본군 정보 참모라는 직위를 통해 얻어낸 고급정보들을 

독립군들에게 전달해주며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줌과 동시에 정신적 지주로 활약. 


치밀하게 준비한 일본의 관동군과의 전투계획을 눈치 챈 일본이 

그의 보직을 교육참모로 변경, 일본 히로시마에 발령을 내게 되고. 

히로시마 전출을 거부하며 한국 배속 청원을 넣고 버텼으나, 청원을 거절당하며 히로시마 행에 오름.



히로시마에 첫 출근하던 1945년 8월 6일. 이 날, 미국의 원자폭탄이 투하. 

이에 부상을 입은 이우 왕자는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도쿄의 전문병원으로 옮겨저 상태가 호전되어가고 있었는데

옮겨진 그 날밤, 34살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 

일각에서는 일제에 의해 독살된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으나, 진실은 밝혀진바 없음. 



당시 이우 왕자를 간호하였던 한 일본인 간호사는 

"그 분은 매우 큰 분이셨다. 아마도 그분이 살아 계셨더라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라고 했다고


이우 왕자의 시신은 경기도 마석에 모셔졌고, 그의 장례식은 1945년 8월 15일. 

이우 왕자는 조국의 해방을 죽어서야 맞이하게 되었다.

by 초령목 2013. 1. 30. 21:34



by 초령목 2012. 7. 21. 14:10

 

 이완용을 찌른 이재명은

 

운집한 구경꾼들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면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일본 경찰에 잡혀간 뒤에도 ..

 

서울지방재판소에서 방청석을 향하여 열렬한 언변으로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라. “

 

 연설을 하는가 하면,

 

일본인재판장이 “피고와 같이 흉행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하고 묻자

 

눈을 부릅뜨고

 

 “야만 섬나라의 불학무식한 놈아!

너는 흉자만 알았지 의자는 모르느냐.

 나는 흉행이 아니고 당당한 의행을 한 것이다.” 하고

 

 고함을 쳤다. 

그뒤 재판이 계속되어 재판장이 “그러면 피고의 일에 찬성한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하고

묻자 “2000만 민족이다. “  말한다,

 

그러자 

창밖에서 “옳다!” 하는 소리와 함께 흥분한 방청객들이 유리창을 부수었다. 

또, 재판장을 호령하여

 

 “야만 왜종들은 퇴청시켜라. 그리고 창밖에 나열한 한국인을 모두 입장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의 심문에 대답하지 않겠다.” 하고

 노기를 띠었다. 

그에게 사형이 선고되어서 공소하였으나 사형이 확정되자,

 재판장을 꾸짖어 “왜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을 빼앗기는 하나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

 

1910년 9월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 순국 직전에

"나는 죽어 수십만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

란 말을 남겼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20살이었다고 한다.


by 초령목 2012. 6. 5. 00:48
by 초령목 2012. 5. 23.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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