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벼락치기로 만들어서 기대도 안했는데 설마하고 봤지만 역시 탈락

by 초령목 2011. 5. 20. 02:18

역사논술(이경희) (1).hwp

첨삭지도


민족구심체를 찾아서

초령목

5월 중 가장 푸르다는 어린이날에 와룡고등학교 역동에서 우리의 민족구심체를 찾는 체험활동을 가지기로 하고 신청을 접수받았다. 나도 어차피 집에서 뭐하겠냐는 생각에 냉큼 신청을 했다. 하지만 막상 아침에 일어나니 ‘남들 다 쉬는데 우린 공부라니…….’라는 불만 섞인 생각도 들었으나 이미 신청을 했으니 때는 늦었다.

답사 전 내가 찾은 민족구심체, 자아의식

신청을 왜 했을 까라는 후회도 많이 했으나 공부를 안 해오면 노래를 부르게 한다는 협박공지를 받아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결과는 이런 물음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가서 뭘 배울 수 있는가? 정답은 나 자신을 알자라는 자아의식이었다. 역사왜곡에 대한 대항의 해답을 제시해주는 근본적인 대안이자 역사유물을 통해 선조와 나 사이의 교감을 연결해주는 고리가 바로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자아의식밖에 더 있을까? 만약 선생님께서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 이렇게 대답을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회는 오지 않았다.

선사시대 우리조상들의 구심체, 암각화

언제나 달릴 줄만 알았던 버스가 멈추는 방법을 드디어 터득했나보다. 버스가 멈춰선 곳은 고령 양전동 암각화가 있는 곳이었다. 암각화하면 울산 반구대 밖에 몰랐는데 나에겐 이런 암각화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런데 막상 보니 이 암각화가 낯설지 않았다. 예전에 대가야 박물관에서 이 암각화 모형을 본 기억이 났다. 아, 그게 이거군.

주위를 둘러보니 들판이었고 저 멀리서 강의 형태를 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옛날에는 이 바위근처까지 물이 왔었다. 수십만 년에서 수백만 년 동안 퇴적되며 강이 이 바위로부터 멀어졌다는데 이 바위는 멀어지는 강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한편으로는 자연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말을 이제야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암각화는 일명 인면암각화라고 불린다. 바위에 새겨진 그림이 인간의 얼굴처럼 생겼다는데 이 암각화를 처음 보는 사람은 결코 ‘아 이건 인면암각화구나’라고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사각형에 막대 같은 것이 달린 것이 인면이고 원같이 있는 것이 동심원문양인데 4개가 있다. 이 문양이 과연 인면일까라는 의문이 들어 여러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았다. 과거에 여기까지가 강이었으니 그 문양들이 수중생물을 의미하며 당시 수렵․채집사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인면이라고 불리는 문양 옆에 막대의 수가 다 다른 것으로 보아 달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저것은 인면이라 불리는 문양은 가면을 의미하고 동심원은 태양을 의미하여 제사를 지내던 곳이 아닐까? 여러 대화가 오고갔으나 우리는 확실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것을 말할 때 마다 모순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저 암각화는 백년에 걸쳐 만들어 졌을 수도 있고 천년에 걸쳐 만들어 졌을 수도 있다. 단지 도화지 안이라는 특정한 틀 안에 있는 그림이기에 우리는 ‘저것이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구나.’ 라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암각화 위에는 별자리를 의미하는 홈이 파져있다. 아마 이 별자리를 조사해보면 이 암각화가 최소 몇 만 년 전에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보는 우주는 언제나 팽창하고 빛의 속도가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기에 과거라고 불리는 그 시절의 우주와 현재라고 불리는 지금의 우주(하지만 이것도 과거지만)를 비교하면 알아볼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사례로 은천군에 있는 고인돌에 구멍이 134개가 파여져 있었는데 여기서 발견되는 별자리는 자미원, 직녀, 구진, 북극오성, 정수(쌍둥이 자리), 삼수(오리온 자리) 등이 있는데 기원전 3200년경의 하늘로 추정할 수 있었다. 또 용덕리 10호 고인돌 별자리는 그 당시 북극점이 용자리의 알파별이 라는 것을 보여주고 이 고인돌이 만들어진지 1500년 후의 고인돌인 지석리 고인돌에서는 북극점에 해당하는 별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북극점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이런 바위에서 별자리의 발견은 천문학적,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것인데 여기서 이런 별자리가 발견됐으니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나도 이 별자리 구멍을 실제로 보고 싶었지만 바위 위를 볼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보려 노력을 했으나 실패하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다음 행적지로 가야했다.

잃어버린 역사 ‘가야’의 구심체

나는 가야라는 나라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중학교 때 근 2개월 동안가야라는 신비의 제국에 흥미를 느껴 여러 책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우리 역사서에 가야를 다룬 책은 삼국유사이다. 그 후에 만들어 진책들은 대부분 삼국유사의 기록을 기본으로 두고 서술했을 것이다. 500년 역사를 기록하는데 조선은 수백 수천 권의 책을 썼는데 고작 삼국유사라는 몇 권의 책만으로 가야를 알자는 것이 황당하기만 하다. 언제 유득공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삼국사가 있어야 마땅한데 고려가 이것을 지은 것은 옳다. 부여 씨가 망하고 고 씨가 망하자 김 씨는 남쪽을 차지했고, 대 씨는 그 북쪽을 차지하고서 이름을 발해라고 했는데, 이것이 남북국 이다. 그러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도 고려가 이를 쓰지 않았으니 잘못이다.” 그 이에 앞서 누군가 가야의 역사를 기록했다면 그 신비의 제국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아쉽기만 하다. 우리가 아는 철의 제국 가야는 그저 500년 역사의 일부분일 뿐이다.

성씨의 구심체, 개실마을․한개마을

꽃이 피는 아름다운 골 산 같은 나비가 날아오는 곳, 조의제문으로 유명한 김종직의 5대손이 피신하던 곳, 뒤에는 선비를 상징하는 대나무 숲이 있고 앞에는 명산이 있는 풍수적으로 명당에 위치한 그곳이 바로 선산김씨의 종가 개실마을이다.

이곳은 종가답게 효를 강조한다. 이 효를 잘 실천했기에 죽어서 3품의 관직을 얻은 사람도 이 마을에 있다고 한다. 효의 기본적인 조건 두 가지가 있는데 편찮은 부모님의 배변은 맛보며 누워 계실 때에는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나누어 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조건을 보며 과연 이것이 그들이 추구했던 진정한 효인가를 생각해본다. 부모의 소원은 예나 지금이나 자식이 잘되는 것이다. 그런 자식이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며 그들의 부모에게 준다고 하면 어느 부모가 덥석 받고 싶어 할까? 오히려 자식에게 가는 미안함으로 빨리 죽어버리기를 바라지는 않을까? 또 이 효의 기본적인 조건을 악용하여 관직에 오르려 했던 사람들도 만만치 않던 걸로 기억한다. 그들은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버려서 나라에서 효자비를 세우면 보상을 얻어내기도 했다. 두 가지가 만약 진정 저 두 가지가 효의 기본이라고 하면 나는 내 자식이 손가락을 자르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죽을지언정……. 하지만 자기를 희생하면서도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에게 보답하는 옛 효의 정신은 계승받아 마땅하다.

중국 황실의 방은 9999개, 조선 왕실의 방은 999개, 일반백성들의 최대 방은 99개……. 이곳은 무려 99개의 방이 있는 마을이다. 마을 어르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르신께서 한곳한곳 설명을 해주셨는데 그의 말에서는 큰 자부심이 느껴졌다.

1이 아닌 큰 나루 마을, 새마을 운동전까지 사람 2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작았던 길을 가진 곳이 성산이씨의 집성촌인 한 개마을이다. 이곳을 돌면서 옛사람의 정성과 지혜를 느낄 수 있었다. 물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소나무를 못 옆에 두게 하면서도 결코 시들게 하지 않는 표현 할 수없는 신비함, 자식의 공부를 쉽게 할 수 있도록 지은 집! 아니 그들의 자식사랑! 개실마을에서는 효와 같은 정신을 강조했다면 한개마을에서는 위인들이 가진 정신을 강조했다. 대표적인 예로 자신이 호위하던 사도세자를 살리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하며 영조에게 감히 말을 하던 이 석문을 들 수 있다. 그는 지금으로 치자면 감히 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중위가 별 4개 달린 분 앞에서 명령불복종을 했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자신의 목숨보다도 신의를 소중히 여긴 그의 정신! 아니 그라는 인물 자체를 우리는 알아야 하며 본받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아파트라는 위로만 뻗는 현대사회보다 마을이라는 나무의 뿌리처럼 가지처럼 뻗은 옛 선조들의 그 마을이 우리에게는 더 좋은 환경이 되지는 않을까?

답사 후 내가 찾은 민족구심체, 공동체

답사 동안 내가 돌아다니던 곳은 옛 신석기인들이 함께 사냥하고 함께 먹고 함께 자던 그 향기가 배여 있던 암석화와 함께 마을을 이루어 볼 거 안볼 거 다보고 살아가던 마을들이었다. 우리 민족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우리는 하나라는 그 정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지금 우리에게는 그런 정신이 남아있는가? 우리에게는 나만이 존재하지는 않은가?

by 초령목 2011. 5. 20. 02:15


동북아시아의 역사 왜곡ing

초령목

중국과 일본은 우리나라와 상당히 인접해있다. 그래서 세계인들은 우리를 유교문화권이라고도 하고 한자문화권이라고도 하며 동북아시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그들과 우리는 닮은 점이 많으며 서로 협력해야 할 점도 많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그들과 갈라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입고 있는 옷들을 하나 둘씩 빼앗아 입고 있기 때문이다.

1860년, 녹둔도가 러시아와 청나라의 베이징조약으로 러시아의 영토가 됨

1909년, 간도를 일본이 철도부설권과 탄광 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인해서 강제로 청나라에게 넘어감

2002년,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로 만들기 위해 동북공정을 시작

2005년,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만들기 위해 다케시마의 날 제정.

우리는 기억해야한다. 녹둔도는 400년간 우리 조선의 땅이었고, 간도는 우리 민족의 발원지로서 수천 년간 점유해왔던 곳이며, 근대 조선과 청나라가 봉금지대를 설정 무인지대인 상태에서 우리 민족이 먼저 들어가 피땀 흘려 개간한 곳이며 또 고구려는 우리의 시조 고조선을 계승한 부여의 핏줄인 주몽이 세운 우리의 역사이다. 독도는 신라 지증왕때 이사부가 정복한 땅이며 현재까지도 우리나라의 영토이다.

이런 역사와 영토분쟁 속에서 동북공정과 독도 영유권 문제는 분쟁을 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순전히 자신들의 욕심으로 인한 억지이다. 남의 땅과 역사는 어떻게든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와 땅은 돌려받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역지사지를 모르는 이들의 왜곡을 이해할 수가 없지만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지켜야할 의무가 있다.

과거의 왜곡과 역사 왜곡

과거의 왜곡은 새로운 왕조에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특정 국가만 편애한다던가 특정인물의 영웅적인 면모만 보여줬다. 예를 들면 궁예를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왕건은 기록에는 모든 백성들이 환영을 하고 반겼으며 궁예를 추악한 폭군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지 얼마되지 않아 반란이 일어난 것을 보면 왕건이 부당한 방법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것, 즉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기록에는 ‘성군 왕건 납시오’만 기록하고 있다. 또 삼국사기를 기록한 김부식은 신라계 사람이고 사대주의를 믿는 사람이라 신라를 편애하며 글을 썼다. 그 덕에 신라에 불리하다거나 사대에 어긋난 것이 있다면 기록을 삭제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또 다른 예로 황희와 맹사성은 조선에서 검소하고 최고의 영의정으로만 알고‘만‘있겠지만 사실 그들은 황희의 사위가 범죄를 저질렀을 때 그 사건은 덮었을 뿐 아니라 황희는 뇌물과 비리로 24년간 탄핵을 많이 받은 인물이다. 이런 것이 과거의 왜곡이다.

역사 왜곡은 과거의 왜곡과 무척 다르다. 과거에는 특정 누군가를 부각시키기 위해 왜곡과 조작을 했지만 역사왜곡은 역사 자체를 다르게 해석한다. 중국은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고구려가 우리나라의 역사라는 것을 인정했으나 한족 특유의 新중화사상, 즉 ‘세상의 중심은 중국이다.’가 또다시 일어났다. 중국 주위에 있는 나라와 중국이 한번이라도 정벌했던 나라는 모두 자기의 역사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가 우리나라‘만’의 역사 → 장수왕의 평양 천도 전후로 천도 전은 중국의 역사로 천도 후는 한국의 역사로 인정하게하며 부분적으로 자신의 역사로 만들어가기 시작 → 현재는 고구려 자체를 자신의 역사라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현대 왜곡, 새로운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고조선 ⊃ 부여 ⊃ 고구려 ⊃ 발해, 고려) ⊂ 중국, (한반도 남부, 독도) ⊂ 일본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로 인정하게 되면 대한민국 교과서는 다시 써야한다. 고구려는 부여를 계승했고 부여는 고조선을 계승했다. 반대로 백제는 고구려계가 세웠고 고려와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했다. 그런데 우리의 시조는 단군왕검, 즉 고조선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역사는 신라와 조선으로 축소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하자면 고조선에서 내려온 이주민이 삼한을 발전․건국했으니 우리의 역사는 없는 것이다! 무섭지 않은가? 우리나라 역사 전체가 사라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가 중국의 한 지방, 소수민족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게 된다. 이미 칭키스칸의 대제국이었던 몽골과 몽고족은 중국과 전혀 상관없는 민족이지만 중국의 역사로 들어가 버렸다. 사실 중국 고유민족인 한족이 세운 나라는 별로 없다. 고조선 이후 한나라 ․ 당나라 ․ 송나라만이 한족이 세운나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저 나라들 말고 중국대륙을 차지했던 나라는 모두 중국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벌써부터 중국의 왜곡이 아무도 모르게 우리의 머릿속에 박혀있었던 것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내가 생각했던 현대 왜곡의 개념을 옛날부터 사용했다. 바로 일본서기라는 일본 최고(最古)의 역사서에 들어있다. 그 당시 기술력은 “한국 * (발톱의 때 * 새 발의 피 * 사막의 오아시스 * 로또 당첨확률 * 번개 맞을 확률 * 나와 지문이 같은 사람을 만날 확률) = 일본의 기술력” 이였는데 무려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고 한다. 물론 임나일본부가 한반도에 존재했기는 했지만 그것은 가야에 있던 일본인 사신들이 사는 곳이다. 게다가 임나일본부에 있던 사람들은 일본국왕보다 가야 왕의 말을 더 잘 들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백제가 칠지도를 무려 ‘받쳤다’고 한다. 그 당시 최최선진국에다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백제따위는 천을 걸치고 다니던 일본에게 칠지도를 ‘받치는’ 하찮은 나라라고 한다. 또 광개토대왕릉비에 있던 아주 유명한 글을 이렇게 해석했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 등을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는 훼손된 글자)).”

왜구들이 왜 저렇게 해석을 할까? 저게 왜색(倭色)인가? 이해를 못하겠다.

그리고 나오는 화제의 독도, 그들은 독도를 그토록 탐내는가? 사실 대한제국 까지도 독도를 한국 땅이라 인정했나니 러일전쟁 직후에 승리의 땅이라며 강제로 일본 땅으로 편입시켜버렸다. 그 후 2차 대전 패전 후 독도를 돌려받았지만 한번 먹으니 맛있다면서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재밌는 점은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그렇게 받고 싶어 하는 북방 4개 섬은 일본이 2차 대전 패전 후 러시아가 강제로 빼앗은 거라고 한다. 이 내용 왠지 뭔가와 비슷한데?

처음에도 말했지만 중국과 일본은 역지사지라는 단어를 모르는 듯싶다.

우리는 힘은 강하지만 결코 강하지 않다.

뭔가 말이 되면서도 말이 안 되는 듯 한 소제목이다. 말 그대로이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G20 안에 들 정도로 절대 약한 나라는 아니지만 우리주위에 있는 나라에 비해 우리는 한없이 약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리 맞고 저리 맞으며 역사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배운다고 한다. 현재는 과거에서부터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과거의 실수를 잃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보면 우리민족은 참으로 운이 없는 민족이다. 분명 우수한 민족인데 단군할어버지께서 위치를 잘못 잡으셨다. 옛날에 읽었던 책에서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다.

한국이 아프리카에 있었다면 지역의 맹주로 군림할 터인데, 하필이면 세계 4대강국(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을 뜻하는 것 같다) 주변에 위치하여 약소국의 설움을 받는다고 한다. 이는 공간적인 요인이 한 나라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중요한 요소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우리역사를 왜곡하게 되는 날이 올지 모른다.

우리가 역사 왜곡의 심각성을 모른다면 우리의 다음세대의 다음세대는 우리 고구려를 배우면서도 전 세계는 고구려를 중국역사,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세뇌될 때, 우리만이 진실을 알고 있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는 우리가 그들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일본과 중국의 교과서에 자신들의 역사라고 적어놓는다. 그리고 그 교과서로 배우는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세뇌를 당하며 당연히 ‘아, 이건 우리역사인데 저 밑에 조그마한 나라가 자꾸 자기 것이라고 우기네?’ 라며 애국심을 자극시키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배운 아이들이 자라서 진실을 알게 되도 그 진실을 부정한다. 그러면서 또다시 진실을 조작하면서 증거를 만들어 낼 것이다.

이러한 중국과 일본의 도발에 우리나라의 대응은 아직 미흡한 것 같다. 교과서에서도 고등학교는 근현대사를 중시한다. 우리나라의 특성상 중학교 때까지 실컷 놀고 본격적으로 공부하는 때는 고등학교이다. 그러면 자연히 고구려의 역사와 독도의 역사의 관심을 덜 갖게 되고 모르게 된다.

동아리 가입을 위한 과제로 시작했지만 생각만 하고 있던 역사왜곡을 글로 써보니 더 심각하게 느껴진다. 괜히 이렇게 써서 흔히 말하는 ‘뻘글’이 될까봐 걱정된다. ‘내가 너무 짧게 쓴 건가?’, ‘내가 너무 심각하게 쓴 건가?’, ‘내가 의도에 완전히 벗어나서 쓴 건가?’ 등의 온갖 생각이 떠돌고 있다. 역사 왜곡에 대한 내 생각을 중점적으로 쓰다 보니 자료가 없다고 문자가 오면 뭐라 할말이 없다.

동북아시아의 역사 왜곡ing = 동북아시아의 역사왜곡은 현재 진행형이다. 결코 현재완료형이 아니다.

by 초령목 2011. 5. 20.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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