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인물열전 궁예전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궁예는 5월 5일에 외가에서 출생하였다고도 한다. 그 때 옥상에 긴 무지개와 같은 흰 빛이 하늘에 까지 닿았다. 이것이 상스러운 일이라 하여 궁예는 버려졌는데 그 과정에서 평생에 잊지못할 상처를 눈에 박았다. 그 후로 유모에 의해 길러지다 출생의 비밀을 듣고 10여세에 절에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암시를 받게 된다. 전국에서 난이 일어나자 양길의 휘하로 들어가 그에게 인정을 받아 힘을 키우고 명주를 중심으로 독립을 하여 후고구려라는 새로운 왕국을 세웠다. 처음 후고구려를 다스릴 때는 왕건이라는 든든한 후원자가 그를 도와주어 백제와 신라와 비교하여 적수가 없었다. 게다가 공평무사한 그의 성격에 병사들의 믿음을 샀고 정치까지 잘하였으니 백성들이 그의 보호를 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자 난폭해지며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죽이고 관심법이라며 신하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점차 궁예의 민심은 잃어갔고 상대적으로 훨씬 인자하고 궁예가 가장 총애했던 왕건쪽으로 민심이 기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궁예가 왕건까지 의심하자 이를 보다 못한 왕건과 그의 부하들이 결국 쿠데타를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이 후고구려의 새로운 왕이되고 국호도 고려로 바꾸었다.

 그리고 바로 궁예의 죽음. 여기서 정사와 야사의 기록이 달라진다. 물론 지금 정사에 적힌 기록들도 연구를 하다보면 과장되고 궁예를 깎아내리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많이 보이나 지금은 궁예의 죽음에 대한 야사와 정사의 차이를 알아보기 위해 글을 쓰므로 생략하겠다.


궁예, 정사속의 죽음

  정사속의 궁예의 죽음은 처참하다. 고려사에는 궁예의 죽음을 이렇게 전한다.

 육월 을묘에 이르러 기장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이 몰래 모의하고 야반에 태조의 집에 가서 다 같이 추대할 뜻을 말하니 태조가 굳게 거절하여 허락하지 않는지라 부인 유씨가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입히고 제장이 부축하여 밖으로 나와서 사람을 시켜 달려가며 소리쳐 [왕공이 이미 의기를 들었다.]라고 하니 이에 분주히 달려오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먼저 궁문에 이르러 복을 치며 떠들석하게 기다리는 자가 또한 만여명이나 되었다. 궁예가 이를 듣고 놀래어 말하기를 [왕공이 차지하였으니 나의 일은 이미 끝났구나 하며 이에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미복으로 북문을 빠져나가 도망가니 내인이 궁을 청소하고 신왕을 맞이하였다. 궁예는 암곡으로 도망하여 이틀 밤을 머물렀(신숙)는데 허기가 심하여 보리 이삭을 몰래 끊어 먹다가 뒤이어 부양(강원도 평강)민의 살해한 바가 되었다.

 정사속에 그는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피산길에 보리이삭을 훑어 먹다가 농민에게 붙들려 돌에 맞아 죽은 인격 파탄자로 나오고 있다. 다른 역사서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전하는것으로 보아 아마 모두 하나의 역사서를 참고하여 썼을 것이다. 아마 부양 백성들은 자신들이 죽인 사람이 애꾸눈의 괴물로 알았을 것이다. 궁예가 죽는 순간까지도 그가 한때 자신들을 돌봐주던 왕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채....

 즉 정사속의 궁예는 대부분의 우리가 알고 있는 '폭군 궁예'의 통쾌한 최후의 모습이었다.


궁예, 야사속의 죽음


 비참하게 죽었던 정사와는 달리 야사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진행된다. 정사속에서는 그저 인격파탄자로 비참한 죽음을 당했던 그지만 야사에서는 그는 끝까지 왕건과 싸워 항전한 왕으로 그려진다.

 전설 속의 궁예의 최후는 절대 비굴하지 않았다. 왕건의 군사 역모가 있던 날, 왕은 자신의 나라 도읍지를 마지막으로 순방한 것 같다. 그날 밤 왕은 남문을 통해 도성을 빠져 나왔다. 숨을 가다듬고 재기를 위해 찾아갔던 첫 피신처는 도성 서남쪽의 중어성. 평원 한가운데 세운 도성의 전략적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세웠던 12개 산성 가운데 한 요새다. 현재 위치는 철원읍 대마리. 왕은 이 요새를 버리고 더 서쪽으로 나가 현 연천군 신서면 승양리의 역시 외곽성인 승양산성으로 들어갔다. 또다른 외곽성 보개산성(현 포천군 관인면)은 승양산성의 동쪽에 있었다. 그러나 왕은 어느새 더 동쪽의 명성산성(현 펄원군 갈말읍)으로 들어가 최후 보루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산성에서 군대를 해산한다. 그리고 통곡하는 군사들을 뒤로하고 홀로 북쪽으로 떠난다. '명성이란 말뜻을 굳이 풀이한다면 '큰 울음소리'. 훗날 사람들은 그때 군사들이 슬피 울었다고 해 그 산성을 '울음산성', 산성이 있는 그 산을 '울음산'이라고 불렀다. 명성산성에서 해산했지만 충성스러운 많은 군인들이 왕이 걸어간 길을 뒤따라 군탄리까지 왔다. 왕은 "나를 따르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궁예가 강변에서 한탄했다는 한탄강을 건너가 버렸다. 훗날 사람들은 그곳이 바로 그때 '군사들이 슬피 울며 탄식한 곳'이라며 '군탄'은 거기서 유래했다고 해석했다. 갑천은 평강 하갑리 동북쪽의 작은 내. 왕은 자신의 정예병들을 양성하던 검불량 군사훈련장을 지나 삼방협의 깊은 골짜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결했다.              www.dmzline.com/23

 남루한 차림의 고려왕(궁예)이 발 붙일 땅을 찾지 못하고 심벽한 석을 찾아 삼방 골짜기로 들어왔다. 삼봉 최고지에 올라 은피하여 재도할 땅을 둘러 볼 즈음 문득 한 스님을 만나 혹시 용잠호장할 땅이 없겠느냐고 물으니, 스님이 말하기를 이 속세를 들어와서 살길을 찾는 것은 어리석다고 했다. 이에 크게 절망하고 그 곳에서 깊은 연못을 향해 그대로 몸을 던지니 물에는 빠지지 아니하고 우뚝 선 채로 운명했다.  - 육당 최남선 '풍악기유'

 궁예가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던 철원은 화산대지이다. 따라서 철원에서 가장 흔한 돌인 현무암의 특징은 용암덩어리가 공기중에서 식으면서 빠져나간 가스의 흔적으로 인한 구멍이 숭숭뚫린 현무암 화산석이다. 이와 관련한 궁예의 일화는 어느날 왕건과 싸우고 궁으로 돌아오던 궁예가 개울을 건너던 중 우연히 이 현무암을 발견하곤 돌에 뚫린 수많은 구멍이 벌레가 돌을 파먹었다고 생각하곤 스스로의 자격지심으로 "돌을 벌레가 파먹다니 이런 해괴한 일이 있다니! 아~ 나의 운명이 다하였구나"하고 자조하였다는 일화가 전해내려온다.

 철원에서 금강산 들어가는 철도가 하나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 삼방역이라는 역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근데 그 역 건너에 큰 돌담굴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래 그 돌담굴이 궁예의 무덤이다 그래 그렇게 거기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 왜 그 돌담굴을 궁예의 무덤이라고 하느냐면은 그 왕건의 군사들이 치열하게 쫓아 오면서 쏘니까는 이 궁예가 웬만한 화살은 맞으면은 그냥 쑥 뽑아서 던지는 그런 장사였대요. 근대 하도 많이 쏘아서 장사도 지치니까는 상나무 아름드리 곁에 가서 기대고 섰더라는 거야. 그래 하도 치열하게 화살을 던지니까는 그래 궁예가 고슴도치 모양으로 몸에 꽂혔는데 안 쓰러지더래는 거야. 그래 하도 이상하다. 그래 가서 보았더니 죽었더래는 거야. 발길로 차도 안 넘어가고 그래 목에다 뭘 두르고 잡아 당겨도 안 넘어진다는거아. 그래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래 장사는 역시 죽어서도 장사구나. 그래 별짓을 다 해도 안 넘어지니까는 그냥 선 채로 돌로 싸아서 묻어서 궁예의 무덤을 돌로다 묻어서 궁예의 무덤이 그렇게 되었다. 그래 눕지도 못하고 죽은거지. 그래 쓰러지지가 않으니까는. - 화현면 설화

또 명성산에는 산정호수 옆 두개의 봉우리에 궁예가 올라 망을 보았다는 곳이있고, 등룡폭포 위 샘터이름이 궁예약수, 자인사에서 궁예가 기도를 올렸다는 전설, 정상에서 강포리쪽으로 이어지는 궁예능선은 왕건의 공격을 피해 항거하며 쌓았다는 성터와 궁예왕이 숨었었다는 궁예왕굴 등이 남아있다.

 이처럼 야사속의 궁예는 결코 비겁하지 않았다. 그는 명성산을 기점으로 왕건에 끝없이 항쟁하다 더이상 희망이 없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천명에 따르던 왕이었다. 또 울음산 등의 별칭을 통해 궁예의 리더십과 그의 포용력이 왕건에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궁예라는 영웅은 단지 왕건이라는 영웅에게 정치적으로 패배한 비운의 왕이었다. 그가 죽자 모두가 기뻐한 것이 아니라 슬퍼했다고 하니 영웅 궁예의 억울함을 알만하다. 이를 뒷받침 해주듯이 왕건의 쿠데타가 성공하자 실제로 궁예를 따르던 많은 호적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심지어 고려와 적대관계였던 후백제에 까지 항복을 하는 호족들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야사속의 이야기를 전부 믿으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승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역사라면 야사의 기록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야사속에는 민중의 소망과 정사에서는 알려져서는 안될 진실이 담겨 있기때문이다.

 






by 초령목 2012. 4. 5.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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