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사이 우리는 흔히 그 시대를 '후삼국시대'라 부른다. 하지만 필자는 이 명칭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왜 '후삼국시대'인가

왜 발해는 되고 가야는 안되는가?

왜 우리는 사국시대라 부르지 않는가?

 알다시피 고구려, 백제, 신라가 공존했던 시기에 가야라는 작은 나라가 존재가 했다. 하지만 우리는 가야가 있었음에도 가야가 건국되었던 42년부터 멸망했던 562년까지 단 한차례도 사국시대라 부르지 않았다. 왜일까?
 
 가야는 철의 제국이라 불릴만큼 철이 풍부했고 한동안 신라보다 국력이 컸다. 신라에 쳐들어가서 신라가 위기에 빠진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가야는 중앙집권화에 실패하고 소국연맹체로만 500여년을 이어왔다. 가야와 마찬가지로 초기의 고구려, 백제, 신라는 연맹왕국였다. 그러나 고구려, 백제, 신라는 소국 연맹체에서 탈바꿈하여 중앙 집권적 국가로 발전하는데 성공했다. 각 연맹의 맹주국들은 세력이 강해지자 자신들의 힘을 바탕으로 주변의 소국을 통합한 뒤 직접 통치를 시행했다. 그에 반해 가야는 힘이 가장 강한나라를 연맹의 대표로 삼는 '맹주국'만이 멸망할때까지 존재했을 뿐이다.

 어느 한 국가가 주위 소국보다 비교할수 없을 만큼 강하거나 선진문물을 받아들였으면 그들도 중앙집권국가로의 발전을 이룩할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철로 유명한 변한의 12소국들이 발전하여 가야연맹이 되었다. 그래서 가야 소국에서도 각각의 철기문화가 발달되었다. 그덕에 딱히 통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고 무력으로 연맹의 통일을 이룰수 있었으냐? 그것도 아니였다. 연맹 중 가장 힘이 세던 맹주국에게도 맹주국(전기:금관가야, 후기:대가야)과 힘이 대등하던 나라가 존재했는데 아라가야의 존재는 통일을 방해하는 두번째 이유였다. 실제로 금관가야가 무너진 후 후기가야를 이끌던 국가는 대가야로 알고 있으나 사실 후기가야는 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과 아라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남북으로 나누어져있었다

 또 삼국사기에서도 가야에 관한 기사는 많이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삼국사기는 삼대국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라 일부 불필요한 기록을 누락시켰을 가능성도 있으나 가야 500년 역사를 생각해보면 백제와 신라와의 접촉이 많았을텐데 그에 관한 기록이 터무니 없이 적었다. 그에반해 대국이었던 신라와 백제 사이의 접촉기록은 눈에 띄게 많았다. 그만큼 가야가 대국들 사이에서 소외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기에는 아에 백제의 속국처럼 되어버렸다.

 가야 연맹체에 속해있던 소국들은 각기 정치적인 독자성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다른 지역과 통합을 이루지 못하여 국가가 발전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리하여 삼국과의 경쟁에 특히 약소국 신라와의 경쟁에서 조차 도태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가야는 삼국에 끼어들지 못하게 되었다. 가야와 비슷한 나라가 494년에 멸망한 부여이다. 부여 역시 약 700년간 존속했던 나라나 끝까지 중앙집권하에 실패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마한의 잔여세력도 300~400여년까지는 존재했었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은 '연맹왕국'이었다는 것이다.
 가야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사국시대로 넣자고 주장하면서 부여라는 나라를 알면서도 왜 500년까지 존재했던 부여는 왜 사국시대라 주장하지 않는가? 또 마한의 잔여세력들 또한 백제에 의해 멸망되기 전까지는 한반도 내에 존재했었는데 왜 그들에 대해서는 아무소리도 못하는 것인가?
 
 가야가 신라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았다면 신라말기에 '후가야'라는 나라도 생기지 않았을까? 아니면 가야를 표방한 나라가 있었으나 너무 작아서 기록되지 않았고, 삼국시대의 가야처럼 여러 가야가 생겨 서로와 경쟁을 하다 전부 멸망했을까? 
 

신라와 발해, 남북국시대
 불과 5년전까지만 해도 통일신라시대로 불러야 하나 남북국시대로 불러야하나 논쟁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통일신라시대라는 용어보다 남북국시대라는 용어을 비교적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라는 명칭의 탄생을 보면 남북국시대로 진작에 바꾸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가 찬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있던 1925년,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사편수화'라는 단체가 만들어진다.그런데 바로 이단체가 신라와 발해에 해당하는 시기를 '통일신라시대'라 부르기로 결정한다.즉 식민지 시절의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이후의 신라가 최초로 '통일신라'라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일본 학자들은 우리 역사를 정리하면서 당시의 사건을 '신라의 반도 통일'로 표현하였다.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한 것이 아니라 한반도만을 통일했다고 본것이다.따라서 한반도 밖의 역사는 한국의 역사가 아니게 되었다.당연히 발해사는 한국사에서 제외되었다.결국 '통일신라'는 우리의 역사를 작고 초라하게 만들려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해 만들어진 용어인 셈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인


 그렇다면 발해가 작은나라인가? 그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고구려를 계승한나라가 바로 발해이다. 그것은 일본왕에게 보낸 친서를 보면 확인할수 있는데 "고려국왕"이라는 말을 썼다. 게다가 신라가 그렇게 섬기던 당나라와 전쟁을 불사하고 결국 살아남으며 당에게 해동성국이라고도 불렸다. 또 영토면에서도 고구려보다도 땅을 더 넓혔다. 또 발해는 가야와는 달리 당, 신라, 왜, 거란 등 5개의 무역길을 만들어 경제적인 여건도 좋았다. 그 무역길로 여러 문화를 수용할수도 있었다. 발해가 문치국가가 된 후에는 당나라에서 유학을 하며 신라와의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   
 가야와는 다르게 발해는 지배층(고구려인)과 피지배층(말갈인)의 구분이 확실했다. 또 왕이 존재해 중앙집권화가 가능했고 심지어는 연호도 사용했다. 가야와 발해의 가장 큰 차이는 가야는 연맹국에 불과한 소국들의 모임이었지만 발해는 고구려라는 당대 최고의 나라의 후예임을 자처했음을 알린것이다.
 
 또 통일신라라는 말과는 무색하게 진정한 통일을 이룩한것도 아니었다. 신라말기 신라의 전국토에서 호족이라 불리는 그 지역의 유력세력들이 스스로를 장군, 성주라 칭했다. 그리고 여러 고구려, 백제의 부흥국이 세워졌다. 또 신라는 5소경이라는 것을 설치했는데 이는 김해등의 옛 백제, 고구려후예를 이주시켜 거기서 살게하며 자치를 허락했는데 이는 신라의 중앙통제력이 약해지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었다. 다시말해서 통일신라는 외형적인 통일에 불과했지 정신적인 통일은 이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니 불가능했었다. 신라의 보수적인 골품제와 시대가 지나도 그 모순을 인정하지 않고, 백성들의 고난은 생각하지 않고 왕이 되는 생각만 하던 신라 지배층이 틀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위키사전에서 남북국시대의 명칭문제를 자세히 다루고 있어 이하 생략하겠다.

조선 전기에는 이 시기를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시대로 인식하지 않았다. 이는 신라가 정통 왕조라는 《삼국사기》의 사관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에 따라 신라 중심으로 서술된 역사에서는, 북측의 발해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졌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한국사, 또 만주의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발해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를 통하여 역대의 사가들이 발해사를 한국사에 편입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 등장하였다. 실학자 유득공은 《발해고》(渤海考)에서 고구려가 망한 후 남쪽에 신라가 있었고 북쪽에는 발해가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이를 '남북국'이라 하였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이 시기를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시대라고 불렸으나, 1970년대 이후로 발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980년대 들어 남북국 시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또한 학계 일부에서는 최초의 통일을 신라가 아닌 고려가 이루었다고 보기도 한다.


후삼국시대의 새이름의 필요성

앞에서는 가야와 발해의 시대적 구분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자 그럼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발해는 926년에 멸망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후삼국시대라고 정의하는 시기인 892~936년 사이에 들어가게 된다. 거기다 발해가 가야 같은 소국이냐 그것도 아니다. 무려 200년간 존속했던 나라이자 '남북국시대'의 북국이 아닌가? 후삼국시대로 불리게 되면서 남북국시대라는 명칭으로 되찾은 발해를 후삼국시대에서 또 잃어버리게 되는 모순이 생겨버리게 되었다. 발해가 삼국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서일까? 그렇지는 않다. 궁예는 발해와 외교활동을 했으며 신라는 발해와 동맹까지 하게된다. 또 발해가 멸망하자 발해왕자를 포함하여 유민들이 모두 고려로 내려오게 된다. 그리고 그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멸시하게된다. 이것을 보면 발해와 삼국의 연관성이 많아 보인다.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후삼국시대의 명칭문제에 대해서 전혀 생각해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후삼국시대를 대체할 명칭은 없을까?

 이에 '슬픈 궁예'의 저자이신 이재범 교수는 '전국시대' 혹은 '호족시대'라는 명칭을 쓰자고 제안한다. 필자는 호족시대가 마음에 들지만 그렇게 하면 발해라는 나라가 빠지게 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필자가 생각해본 것이 '독립부흥시대'이다. 독립부흥시대는 신라 말기 반신라적인 새로운 나라가 신라에 독립하여 세워지거나 옛 고구려, 백제, 가야등의 후예들이 그들의 부활을 내세우며 부흥국을 세웠었다는 점에서 이름을 지었다.
 하지만 이 시대가 나타난 연도는 이재범 교수(892년)와는 다르게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난 889년부터 왕건이 통일한 936년까지를 新후삼국시대라 부르고 싶다.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난 이후로 호족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했고, 이 사건을 시작으로 전국에 장군이라 칭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충분히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난 그 해(889)를 新후삼국시대의 시작으로 한다고 해도 별 지장은 없어보인다. 이렇게 되면 후삼국시대의 역사는 889~936년으로 47년, 원래의 후삼국시대보다 3년이 더 추가된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의 혼란시기와 비교해도 될만큼의 긴 역사를 가질 수 있게되고 근 50년에 가까워져 반세기의 역사라 불러도 무방해진다.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난 889년부터 왕건이 통일한 936년까지 47년간의 新후삼국시대, 필자는 이 시대를 더 좋은 명칭이 나오기까지 부르기로 했다. 모든 사람이 통일신라시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남북국시대로 바뀌어 졌듯이, 사람들이 후삼국시대의 모순되는 점을 지적하고 새로운 명칭이 생기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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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 시대의 재조명

 중국이나 일본이나 그들에게는 전 국토가 떠들석 했던 그런 시대가 있었다. 중국은 '삼국시대'라 불리던 시대에 유비 · 조조 · 손권이라는 영웅이, 일본에게는 '센고쿠 시대'의 오다 노부나가 · 토요토미 히데요시 ·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영웅이 있다. 이렇게 동아시아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났던 시대가 우리나라에는 과연 없었을까? 

 우리나라에도 전국시대를 생각하게하는 시대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부르던 '후삼국시대'이다. 여기서는 동아시아의 영웅들과 비교할 수 있는 인물들이 나타나니 바로 '진훤 · 궁예 · 왕건'이다.

 우리는 보통 후삼국시대라 불리는 이 시기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50년도 안되는 이 시기를 과연 '시대'라는 명칭을 붙여도 될까?" 라는 생각에 그저 비교적 컸던 남북국시대와 고려시대 사이의 작은 시대로 떠올린다. 실제로 몇몇 역사책들을 보면 삼국시대가 끝나면 바로 고려시대로 넘어가고 후삼국시대는 그 중간에 한 두장 설명하는 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과연 후삼국시대는 우리가 무시해도 될만큼의 비중이 작은 시대였을까?

 길게만 느껴졌던 소설 삼국지의 배경인 중국의 삼국시대는 실제로는 220~280년 60년이 겨우되는 역사이다. 일본의 전국시대라 불리는 센고쿠 시대는 1467년에 시작하여 1573년까지 106년, 약 100년의 역사를 가졌다. 이처럼 동아시아의 혼란시기는 100년도 안되는 시간을 가지고 있지만 전부 그 나라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혼란시기인 후삼국시대만큼은 우리에게 외면을 당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후삼국시대는 892년부터 936년까지의 44년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의 36년보다도 더욱 긴 시간이다. 1945년 광복 후 지금까지도 우리가 일제의 치욕을 기억하는 것을보면 44년의 시간이 결코 짧다고 느껴서는 안된다.

 후삼국시대는 남북국시대와 고려시대 사이에 끼여있기 때문에 무시를 받아야 하는게 아니라 이 시기에 있기때문에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이다. 그래야만 신라의 멸망 원인과 고려의 성립 원인을 쉽게 이해할수가 있을 것이다. 그저 신라가 멸망했기 때문에 고려가 건국되었다라는 단순한 생각은 버려야 할것이다.44년의 역사는 짧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44년동안 후백제라는 나라와 후고구려라는 나라가 건설되었으며 궁예 18년의 태봉과 992년간 명맥을 이어오던 신라가 망했다. 그 짧은 시기에 이렇게 많은 국가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진 것은 우리나라 역사에 거의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아마 고조선이 멸망하고 난 후에도 이런 혼란시기가 있었을 수도 있다.) 후삼국시대의 중요성은 그렇게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중국의 삼국시대에 대해서는 유비,조조,손권 등의 인물을 외우면서 적벽대전 등 유명한 전투가 많으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일본의 전국시대도 정명가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같은 일본의 영웅이 임진왜란이라는 큰 사건을 일으켰기때문에 일본의 전국시대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그저 안타까운 뿐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위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태봉국의 궁예는 1000년동안의 중국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깨기위해 분열중이었던 중국과는 외교를 벌이지 않고 태봉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세우고자 했었다. 그래서 중국 대신 거란과의 외교로 여러 물건을 하사했다.(이에 대해서도 일본 칠지도같이 논란이 많음) 이와 반대로 진훤같은 경우에는 동아시아 세계의 질서에 맞춰 중국과의 수교를 통해 외교적 우위를 차지해 통일의 유리한 고지를 찾으려고 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신라말기의 혼란시대였다. 골품제의 한계를 느끼고 더이상 빛을 찾을 수 없는 6두품세력들과 세금으로 고통받던 농민들과 삼국통일이라는 허물안에 살아있던 백제와 고구려의 혼이 마침내 터진 시기이다. 사실 신라는 정신적인 통일을 이룩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지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있었다. 그리고 결국 원종애노의 난으로 반란이 일어나자 이와 동시에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신라의 통제권은 수도권으로 축소되었다.

 여기까지가 신라말기의 모습이다. 그리고 진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궁예가 태봉을 세우자 후삼국이라는 시대가 열리게된다. ...후삼국 역사에 대해서는 생략...그리고 신라가 항복을 하고 후백제가 진훤의 군사에 의해 멸망되자 마침내 고려가 민족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후삼국에 대한 언급이 짧았기에 후삼국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태까지 보던 신라말기의 사회 모순부터 고려통일까지의 시기가 바로 후삼국시대이다.

 고려와 조선의 경우를 보면 급진하게 조선을 세우다 보니 뭔가 부자연스럽게 고려왕조를 멸망시킨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신라와 고려의 경우에는 이 후삼국시대가 있었기에 한나라에서 다른나라로 왕조의 교체가 자연스러울 수 있었다. 

 후삼국시대는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영웅들이 반세기에 공존했던 유일한 시기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진훤, 궁예, 왕건 말고도 기훤, 양길, 능창등 수많은 영웅들이 자기의 세력을 과시하며 자유로웠던 시기였단 말이다. 이것이 필자가 후삼국시대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 중 하나이다. 우리는 이 시기 이후로 더이상 영웅들이 공존하던 때를 떠올릴수가 없다. 이 시기가 너무나도 짧았다는 것이 그저 아쉬울 뿐이다.

 필자가 후삼국시대에 가장 흥미를 느낀 이유가 바로 고대와 중세의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전쟁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고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다 주지 않는 역사의 황무지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개척하지 않은 땅을 내가 개척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혹시 알수 있을까? 내가 이렇게 연구를 하다보면 언젠가는 이분야 최고의 전문가가 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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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도성 남대문 석등(石燈) 사진은 이미 오래 전 원본이 사라졌다. 철원군지(鐵原郡誌)는 천 번도 더 찍어냈을 복사판 사진을 싣고 있었다. 어느 책에 나온 우표딱지만한 흑백사진을 잡아 늘릴 수 있는데까지 확대한 게 틀림없었다. 사진 속으론 모래바람이 불고 있었다. 피사체는 작은 구멍들이 가득 뚫려 있었다. 제주도 돌하루방 같았다. 철원도 제주도처럼 현무암 대지 위에 올라앉아 있는 '곰보돌'의 고장이다. 그 사진만으로는 석등은 조악한 그 곰보돌 조각에 불과했다. 애꾸눈 궁예왕이 지천으로 나뒹구는 '곰보 바위'하나를 들어다가 아무렇게나 쓱쓱 깎아 도성 남대문 앞에 턱 세워 놓았을것만 같았다.

그러나 석등은 일본이 1940년 7월 30일자로 국보 118호로 지정했던 키 280cm 짜리 화강암 돌조각이다. 철원의 궁예도성은 신라의 도읍지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이나 석가탑보다도 2세기 후에 축조됐다. 따라서 그 석등은 석가탑이나 다보탑보다도 더 정교하고 품위있게 다듬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석등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으며 이젠 국보도 아니다. 그 석등처럼 태봉국의 왕 궁예(弓裔. ?~918)도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모습으로 역사 속에 남아 있다.

후삼국 시대는 44년 만에 막을 내렸다. 궁예는 그 가운데 단 18년 동안 태봉을 통치했다. 그리고 그 후 역사는 더 드라마틱한 사건들을 만들며 10세기나 진행됐다. 왕의 치적을 들춰내며 그의 사상이나 철학을 들먹이기에 1천 년 전은 너무 오래 된 일다. 그러나 나는 궁예 나라의 옛 수도 철원을 갈 때마다 역사가 그를 너무 깔아 뭉갰다고 생각했다.

우선 철원평야 사람들을 '왕을 돌로 쳐 죽인 백성의 후손들'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려사는 그때 백성에게 피살되던 궁예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918년 6월) 이리하여 (궁예가) 변복을 하고 도망쳐 나가니 궁녀들이 궁 안을 깨끗이 하고 태조(왕건)를 맞아들였다. 궁예는 산골로 도망하였으나 이틀밤이 지난 후 배가 몹시 고파서 보리이삭을 잘라 훔쳐 먹다 바로 부양(평강) 백성들에게 살해됐다. 궁예는 평강 땅 삼방(三防)에서 너무 배가고파 보리이삭을 훑어 먹다 밭일을 하던 농사꾼들에게 들켰다. 농사꾼들은 그를 돌로 쳐 죽였다.」

역사는 이 사실을 기록하면서 '폭정과 괴벽의 엉터리 애꾸눈 왕을 장수나 군졸도 아닌 무지렁이들이 통쾌하게 교살했다'고 행간 곳곳에서 속삭이고 있다. 그리고 궁예가 누구냐고 묻는 이들에게 '왕은 애꾸눈의 장애인이었고, 자신을 메시아라고 여긴 미륵신앙의 광신도였으며 부인과 자식을 쳐죽인 정신분열증 환자였다. 결국 피신길에 보리이삭을 훑어 먹다가 농민에게 붙들려 돌에 맞아 죽은 인격 파탄자였다'고 세뇌시키고 있는 것이다. 고려 개국공신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그렇게 궁예를 깍아내려야만 했을 것이다. 왕건의 군사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이미 궁예는 죽었지만, 몇 번이고 다시 죽여 다시 살아나지 못하게 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미륵의 세상을 갈망하던 하층농민들이 미륵불을 돌로 쳐 죽인 무지함, 백성이 왕을 쳐 죽이 대역죄, 즉 자식이 어버이를 쳐 죽인 패륜을 고스란히 철원 사람들의 옛 조상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있었다. 그것은 강자의 횡포였다. 그리고 중대한 실수였다. 철원 사람들은 궁예가 그의 최후를 당당하게 맞았다는 전설을 따로 간직하고 있었다.

궁예전설은 노인들을 통해 구전되기도 하고, 철원군지에 기술돼 있기도 했다. 어떤 노인들은 전설 속의 '궁예'를 '궁예대왕'이라고 지칭했다. '궁예대왕', 그 지칭은 철원사람들의 불명예, '미륵을 죽인 무지함과 왕을 죽인 대역죄, 자식이 어버이를 죽인 패륜'에 대한 항변같기도 했으며 책에서 배운 정사(正史)를 엉터리라고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전설 속의 궁예의 최후는 절대 비굴하지 않았다. 왕건의 군사 역모가 있던 날, 왕은 자신의 나라 도읍지를 마지막으로 순방한 것 같다. 그날 밤 왕은 남문을 통해 도성을 빠져 나왔다. 숨을 가다듬고 재기를 위해 찾아갔던 첫 피신처는 도성 서남쪽의 중어성. 평원 한가운데 세운 도성의 전략적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외곽에 세웠던 12개 산성 가운데 한 요새다. 현재 위치는 철원읍 대마리. 왕은 이 요새를 버리고, 더 서쪽으로 나가 현 연천군 신서면 승양리의 역시 외곽성인 승양산선으로 들어갔다. 또 다른 외곽성 보개산성(현 포천군 관인면)은 승양산성의 동쪽에 있었다. 그러나 왕은 어느새 더 동쪽의 명성산성(현 철원군 갈말읍)으로 들어가 최후 보루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산성에서 군대를 해산한다. 그리고 통곡하는 군사들을 뒤로하고 홀로 북쪽으로 떠난다. '명성'(鳴聲)이란 말뜻을 굳이 풀이한다면 '큰 울음소리'. 훗날 사람들은 그때 군사들이 슬피 울었다고 해 그 산성을 '울음산성', 산성이 있는 그 산을 '울음산'이라고 불렀다. 명성산성에서 해산했지만 충성스러운 많은 군인들이 왕이 걸어간 길을 뒤따라 군탄리까지 왔다. 왕은 "나를 따르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한탄강을 건너가 버렸다. 훗날 사람들은 그 곳이 바로 그때 '군사들이 슬피 울며 탄식한 곳'이며 '군탄'은 거기서 유래했다고 해석했다. 갑천(甲川)은 평강 하갑리 동북쪽의 작은 내. 왕은 자신의 정예병들을 양성하던 검불랑 군사훈련장을 지나 삼방협의 깊은 골짜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결했다.

육당 최남선도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철원 지방에서 채록한 궁예 최후의 전설을 '풍악기유'에 이렇게 실었다.
「남루한 차림의 고려왕(궁예)이 발 붙일 땅을 찾기 못하고 심벽한 석을 찾아 삼방 골짜기로 들어왔다. 삼봉 최고지에 올라 은피하여 재도할 땅을 둘러 볼 즈음 문득 한 스님을 만나 혹시 용잠호장할 땅이 없겠느냐고 물으니, 스님이 말하기를 이 속에를 들어와서 살길을 찾는 것은 어리석다고 했다. 이에 크게 절망하고 그 곳에서 깊은 연못을 향해 그대로 몸을 던지니 물에는 빠지지 아니하고 우뚝 선 채로 운명했다.」

http://www.dmzline.com/tag/궁예?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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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style="border-style: solid; border-color: rgb(48, 88, 210); border-width: 0px 0px 1px;" bgcolor="#3058d2" width="1%"><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ulim;">&nbsp;</span></span></td>
<td style="border-style: solid; border-color: rgb(48, 88, 210); border-width: 0px 0px 1px;" width="99%"><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rgb(48, 88, 210);"><span style="font-family: Gulim;">&nbsp;</span></span><font color="#c8056a"><strong><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ulim;"><span style="color: rgb(48, 88, 210);"> </span><br />

</span></span></strong></font></td>
<td style="border-style: solid; border-color: rgb(48, 88, 210) rgb(48, 88, 210) rgb(255, 70, 197); border-width: 0px 0px 1px;" width="100%"><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ulim;">&nbsp;</span></span></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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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운에서 금강산 들어가는 철도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 삼방역이라는 역이 하나 있다고 한다. 근데 그 역건너에 큰 돌담굴이 하나 있다고 한다. 그 돌담굴이 궁예의 무덤이라 한다. 그것이 왜 궁예의 무덤이라 하면 왕건의 군사들이 치열하게 쫓아 오면서 쏘니까는 이 궁예가 웬만한 화살은 맞으면은 그냥 쑥 뽑아서 던지는 그런 장사였다. 그런데 하도 많이 쏘아서 장사도 지치니까는 상나무 아름드리 겿에 가서 기대고 섰다. 하도 치열하게 화살을 던지니까는 궁예가 고슴도치 모양으로 몸에 꽃혔는데 안쓰러진다는 것이다. 이상해서 가서 보았더니 죽어있었다. 발길로 차도 안 넘어가고 목에다 뭘 두르고 잡아 당겨도 안넘어졌다.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장사는 역시 죽어서도 장사구나 별짓을 다해도 안넘어지니까는 그냥 선 채로 돌로 쌓아 묻어서 궁예의 무덤을 돌로 묻어서 궁예의 무덤이 그렇게 되었다. 결국 눕지도 못하고 죽은것이었다.
- 화현면 설화 광대소라는 이름이 비석에 새겨진 것을 보고 묻자 해준 이야기


펑강군 복계역 북쪽으로 하갑리, 상갑리라는 마을이 있다. 궁예가 패해 북쪽으로 도주하다 하갑리에선 아래 갑옷을 벗고 도주하다, 상갑리에선 윗 갑옷을 벗고 도주했다 해서, 하갑리, 상갑리라 했다 한다.


궁예(弓裔·?-918년)는 896~898년간에 철원(구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후 궁예는 901년 당나라에게 괴멸당한 고구려를 다시 일으켜 보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 일환으로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연호를 무태(武泰)로 바꾼다. 그 후 1년 뒤(905년) 구철원 북쪽 30리 거리인 풍천원 들판(지금의 철원과 평강 사이 비무장지대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리고 911년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泰封)이라 칭한다.

그러나 궁예는 풍천원 들판에다 거대한 도성을 축조하면서 강제로 노역에 끌려온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지지세력들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청주 지역을 너무 편애하게 된다. 그러자 경기 북부 호족들이 반기를 들고 궁예의 부하였던 왕건을 앞세워(877-943) 918년 궁예를 몰아낸다.   

훗날 궁예가 왕건의 군사에게 쫓겨 진을 친 곳이 명성산이다. 이 때 궁예가 이 산에서 철원쪽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겨 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하여 ‘울음산’으로 불리었고, 궁예가 강변에서 한탄했다 하여 ‘한탄강’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궁예와 명성산이 관련된 전설은 매우 많다. 산정호수 옆 두 개의 봉우리는 궁예가 올라가 망을 보았다는 곳이고, 등룡폭포 위 샘터 이름이 궁예약수, 자인사에서 궁예가 기도를 올렸다는 전설, 정상에서 강포리쪽으로 이어지는 궁예능선은 왕건의 공격을 피해 항거하며 쌓았다는 성터와 궁예왕이 숨었었다는 궁예왕굴 등 이 남아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고려사에는 ‘궁예가 평강과 안변 사이 험준한 지형인 삼방협으로 도망을  갔을 때 배가 고파 보리이삭을 끓여 먹다가 평강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이 지방 주민들로부터 전해지는 전설은 ‘궁예가 삼방협에서 우연히 만난 어느 중이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는 이런 협곡에 들어와 살아남겠다는 것이 어리석다”고 말하자 궁예는 “드디어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 높은 곳에서 의연하게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조선 말기에 제작된 지도인 청구도에는 삼방협 위치에 궁왕묘(弓王墓)가 그려져 있다. 또 1924년 최남선이 쓴 풍악기유(楓嶽記遊)에는 궁예왕 무덤흔적을 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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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style="border-style: solid; border-color: rgb(48, 88, 210); border-width: 0px 0px 1px;" bgcolor="#3058d2" width="1%"><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ulim;">&nbsp;</span></span></td>
<td style="border-style: solid; border-color: rgb(48, 88, 210); border-width: 0px 0px 1px;" width="99%"><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rgb(48, 88, 210);"><span style="font-family: Gulim;">&nbsp;</span></span><font color="#c8056a"><strong><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ulim;"><span style="color: rgb(48, 88, 210);"> </span><br />

</span></span></strong></font></td>
<td style="border-style: solid; border-color: rgb(48, 88, 210) rgb(48, 88, 210) rgb(255, 70, 197); border-width: 0px 0px 1px;" width="100%"><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ulim;">&nbsp;</span></span></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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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가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던 철원은 화산대지입니다. 따라서 철원에서 가장 흔한 돌인 현무암의 특징은 용암덩어리가 공기중에서 식으면서 빠져나간 가스의 흔적으로 인한 구멍이 숭숭뚫린 현무암 화산석과 관련한 궁예의 일화는 어느날 왕건과 싸우고 궁으로 돌아오던 궁예가 개울을 건너던중 우연히 이 현무암을 발견하곤 돌에 뚫린 수많은 구멍이 벌래가 돌을 파먹었다고 생각하곤 스스로의 자격지심 으로 돌을 벌래가 파먹다니 이런 해괴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니 아~ 나의 운명이 다 하였구나라고 자조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옵니다.




 

by 초령목 2010. 10. 23.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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