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오원춘, 그리고 개그에서 자주 사용되는 연변어.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조선족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조선족의 연변어를 개그의 주소재로 사용하며 가난하고 희화화된 것에 웃으며 그들을 비웃고 있으며 보이스피싱과 오원춘을 통해 조선족이 부정적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선족을 부정적으로 떠올리면서도 그들을 까내리고 있을 것이다.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서는 중국인, 한국에서는 한국인. 상황에 따라 자신의 국적을 바꾸는 박쥐같은 그 조선족의 이중성. 그것이 한국인이 조선족을 싫어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우리는 조선족은 ‘중국인’이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즉 조선족을 우리와 같은 한민족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우리가 조선족을 굳이 다른 민족으로 인식할 필요는 전혀 없지만 그럼에도 조선족은 우리에게 부끄러운 먼 친척 취급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국대신 중국을 택하는 조선족에게 실망하기도 섭섭해 하기도 한다. 조선족 입장에서는 한국의 밀고 당기기, 속된말로 밀당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사실 조선족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욕먹을 이유는 없다. 일제강점기 중에서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해내고, 한반도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간섭을 피해 올라가 그곳에서 정착을 하기도 한 곳이다. 어찌 보면 우리에게 조선족사람들은 국가의 은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나라의 국민이 다른 나라로 가서 부끄러운 짓을 할 때면 그것이 곧 국가의 이미지가 되어버린다. 또 원래 인간이란 백번 잘해도 한번 잘못한 것만을 기억하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조선족의 일부가 한국에 와서 저지른 어떠한 사건들이 조선족의 이미지가 되어버렸다. 그것이 우리가 조선족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주된 이유다. 일제강점기는 이미 먼 옛날의 일이고 현재는 다른 세상이며 이 세상에서 조선족들이 우리에게 해를 주기 때문에 그들에게 감사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간도는 우리땅’이라고 주장을 하곤 한다. 한반도의 1.5배 크기의 땅과 그곳에 매장된 엄청난 양의 자원은 생각만으로도 우리를 웃음짓게 한다. 하지만 조선족을 차별하고 무시하면서도 간도를 우리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도 뻔뻔한 짓이 아닐까?

 지금 현재 간도의 주인은 중국, 아니 더 정확하게는 그 중국에서도 가장 큰 소수민족으로 자치구를 형성하고 생활하고 있는 조선족이다. 수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고된 차별을 이겨내며 돈을 벌고 중국의 가족들에게 보낸다. 그 차별 속에서 이를 갈며 번 돈으로 중국에 있던 조선족 아이들은 중국의 학교에 다녀 완벽한 중국인으로 성장하여 사회에 나온다. 또 중국의 정책으로 이미 조선족 자치구 내의 조선족의 수도 줄고 있으며, 세대가 거듭될수록 한국에 대해 애틋한 마음을 가진 조선족들도 줄어들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조선족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약화되고, 악화되어 가고있는데 지금 당장 조선족과 한국사이의 거리감도 해결하지 못한 채 우리들은 태연히 “간도는 우리땅”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간도를 주장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조선족과 긴밀한 관계가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얼마전 한 조선족이 한국의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우승을 했던 일이 있었다. 당시 그 오디션 프로그램의 우승자가 누가될 것인가가 전 국민적 관심사였고, 시스템상 우승자를 뽑기 위해서는 시청자들의 호응과 지지가 있어야 했는데 바로 그 조선족이 우승을 한 것이다. 이에 한국 언론은 물론 중국 내 조선족 사회도 열광하며 기뻐했다. 한 조선족 청년의 우승이 조선족과 한국사이의 오해와 편견을 조금이나마 해결해버린 것이다.

 이 사례를 통해 우리는 조선족과 문화적인 교류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지금 현재 한국사회에서의 조선족의 모습은 부정적이다. 그것은 조선족의 참모습을 모르는 우리이기 때문에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온 착각일수도 있다. 그런 착각을 해결하기 위해, 또 조선족 사회 내에서도 사라져가는 한국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어넣어 주기위해서 조선족과의 교류가 시급하다고 본다. 우리가 진정 간도를 찾기를 원한다면 간도에 사는 조선족들을 우리의 편으로 아니 우리의 민족으로서 인정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통일을 지향하는 우리에게 조선족과의 화합은 북한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족 사람들도 남북의 통일을 바라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국경선은 맞대고 있는 남한과 조선족의 화합은 북한에게도 평화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조선족과 북한, 그리고 남한은 한 핏줄임에는 분명하다. 한반도의 핏줄이 백두대간을 넘어 민족의 시작인 만주지방까지 닿는 것. 남한과 북한, 그리고 조선족의 화합은 한반도와 간도의 결합을 넘어 한민족의 오랜 바람일지도 모른다.




by 초령목 2012. 9. 9. 17:01

 2010년부터 매년 동아리 책자를 발행하고 있는 우리 동아리, 역동에서는 올해는 간도와 조선족들에 대한 내용을 중점으로 다룰 예정입니다. 동아리 선생님께서 당초 우리의 뿌리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중국을 통해 백두산 등반을 하였는데 그덕분에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그때부터 "아 이 조선족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한국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 후 간도에 사는 조선족과 우리 민족과의 관계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더불어 독도에 가려 우리가 잊고있던 '간도'라는 땅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계기로 와룡고등학교 역사논술동아리, 역동에서 우리땅 간도를 찾기 위하여 경일대학교 경산캠퍼스를 찾았습니다. 경일대학교에서는 '간도론·독도론'이라는 강좌를 전국에서 최초로 개설하고 최근 역사와 영토 분쟁으로 갑론을박하는 독도와 간도가 우리땅임을 증명하여 강좌를 듣는 수많은 학생들에게 우리역사의 자긍심을 일깨우고 있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갑작스러운 방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환영하기위해 손수 현수막까지 제작해준 경일대학교의 정성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간도를 알고있다고 자부할 수는 있습니다. 적어도 '간도'라는 땅의 존재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렇기에 네이버 온라인 기부 해피빈을 통해서 간도를 되찾기 위해 제 모든 해피빈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 자신도 간도를 잘 알고있다고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간도를 되찾기 위해 홍보하는 사이트에서 소개하는 간도는 저를 충족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저에게 "어째서?"라는 궁금증만 유발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저에게는 간도라는 땅은 '우리땅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왜 우리땅인지는 모르겠다."라는 역설적인 호기심을 일으키는 땅이었습니다.

 그렇게 저의 간도에 대한 관심이 식어갈 무렵 때마침 경일대학교에서 '간도론'이라는 강의를 듣게 되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간도를 연구하는 홍영희 교수님을 통해서 그동안 잊혀져왔고 몰랐던 간도에 대해서 상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는 눈으로 읽기엔 길고 지루한 간도의 역사를 우리에게 호소력있는 목소리로 들려주셨습니다. 교수님의 이야기에 저도 의외로 간도에 대해서 무지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간도는 그저 한반도보다 약간 큰 크기에 조선족들이 대부분 살고있는, 또 3000년동안 고조선-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우리 민족의 발상지자 활동지였다는 사실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간도는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간도가 원래는 島(섬 도)자를 쓰는 두만강에 있는 하중도라는 사소한 것부터 이미 많은 서양국가들이 간도를 우리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신뢰할 수 있는 지도까지 간도를 알고있었다고 생각했던 저에게 모두 처음듣는 생소한 이야기였습니다. 교수님이 들려주는 간도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1600년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가 대륙을 정복하게 된 후 간도라는 땅을 신성시 여기며 중립화 하였습니다 .즉, 간도를 포함한 만주지역이 공터가 되어 버린것이죠. 이때 우리민족은 그 간도라는 땅에 들어가 먼저 개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청나라와 조선사이의 국경선이 불분명하게 되자 1712년 양국은 서로 만나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서 국경선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 이 백두산 정계비에 적힌 '동위압록 서위토문'이라는 글귀가 200년 동안 청과 조선의 충돌을 일으켜버립니다. 그 당시에 청나라의 명으로 서양 선교사가 그린 지도를 보면 간도땅이 조선의 땅으로 명백히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는 서위토문이라는 글귀가 두만강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은 당연히 토문을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이 토문이라는 글귀의 해석에 따라 조선은 북방영토를 얻거나 잃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기록들에 의하면 '토문'이라는 글귀는 보통 토문강을 의미하고 있었고, 백두산 정계비를 세울 당시 석퇴라는 돌무더기를 세워 강이 범람할때를 방지하여 국경선을 확실히 하였는데 이 석퇴가 토문강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증거들을 종합하여 볼때 조선의 주장은 당연하였지만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었던 조선이 강력하게 주장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1905년 을사조약으로 주권을 거의 빼앗긴 조선은 청일간의 1909년 간도협약을 통해 간도를 완전히 빼앗겨 버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을사조약 자체가 늑약이라 불릴 만큼 실효성을 잃어버리는 무효성 조약이었기에 1909년 간도협약역시 무효라고 주장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중국땅이고 또 남북이 서로 갈라진 상태에서 북한과 중국의 관계, 또 국력차이를 생각해볼때 우리가 지금 간도를 우리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시기상조일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국민들이 간도를 너무 당연히 중국땅이라 생각하는것이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과연 국민들이 이런 단편적인 역사만 알고있다면 그렇게 간단하게 중국땅이라고 여길 수 있을까?

 저는 이 모든 사실은 당연히 우리가 처음들을 수 밖에 없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소리치지만 정작 우리 국민들은 그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뿐 왜 우리땅인지 그 역사조차 상세하게 알고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미 우리나라에서 전국민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독도도 이런데 하물며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간도의 역사를 알고있는 사람, 아니 간도라는 땅을 알고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교수님은 그렇게 우리를 일깨워 주셨고 저도 간도를 다시 한번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간도는 빙산의 일각, 바다속에서 조그맣게 튀어나온 빙산만 보고서 간도에 대해 잘 안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참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도 아직까지도 예전에 느꼈던 그 호기심을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만큼 저는 간도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싶었습니다.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며 저는 중간중간 떠오르는 호기심을 노트에 적어놓으며 강의를 경청하며 끝나길 기다렸습니다. 물론 교수님의 강의가 끝난 후 보여준 간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제 궁금증 일부가 해결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저를 충족시키지는 못했습니다.

 강의가 끝나자 저는 교수님에게 수년간 묵혀두고 저를 괴롭힌 그 궁금증을 방출했습니다. 제가 물어볼 것은 많았지만 시간은 없었습니다. 어찌보면 제가 하는 질문은 무례하게도 교수님의 간도론에 반박하는 꼴이 될 수도 있지만 그분만이 저의 궁금증을 해결해줄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기에 무례함을 감수하고 교수님께 여쭈었습니다. 다행히 교수님은 시간이 없는 와중에도 흔쾌히 제 질문에 답을 해주셨습니다.

 첫째, 팔레스탄인이 유대인에 의해 쫓겨나서 국제적으로 동정표를 받고있다. 그 지역은 수천년 전에 유대인들이 왕국을 건설하고 살던 곳이었고 그 후 수백, 수천년을 팔레스탄인이 살아오다가 유대인에 의해 갑작스럽게 빼앗긴 땅이다. 간도도 수천년간 우리민족의 원천지이자 우리민족의 활동지이지만 발해를 끝으로 우리민족이 발을 붙인 적이 없었고, 한민족이 떠난 그 자리에는 대신 청나라의 조상인 여진족들이 수백년간 살던 곳이었고 지금은 그 여진족들이 중국의 소수민족화가 되었는데 우리가 과연 유대인처럼 간도를 우리땅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둘째, 간도가 서양인들에 의해 지도에 우리 영토로 기록된 것은 몇몇 있다. 하지만 그 간도가 우리나라가 제작한 지도에 나온 것은 본적이 없다. 그나마 남아있는 지도는 대한제국시대에 비로소 우리 영토로 표시되었다. 즉 외국사례는 있으나 우리나라에는 사례가 없다. 이는 조선 백성들이 스스로 넘어가서 개간한 것과 별개로 조선정부는 간도에 대해서 별로 신경쓰지 않은 것이 아닌가? 실제로 조선이 간도에 대하여 청나라에 본격적인 항의를 한것은 1800년대 후반, 조선이 개화를 하기 시작할 때였다. 조선정부조차도 무시했던 간도를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셋째, 하나의 근거가 되는 백두산 정계비가 말하는 땅은 북간도 지역이다. 즉, 서위토문이 토문강이 맞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북간도 지역만을 우리의 영토로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서간도, 동간도를 포함한 간도전체지역을 어떻게 우리나라 영토로 주장할 수 있는것인가?

  저의 질문에 교수님이 답변을 해주셨습니다만 정확한 답변은 얻지 못했습니다. 정확한 답변을 듣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번째, 세번째 질문은 아주 약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의 영조가 이미 압록강과 두만강너머의 간도지역까지 간섭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와있었다는 것에서 조선이 간도에 대해 그렇게 무지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주었습니다. 또 백두산 정계비 말고도 여러 간도가 우리땅임을 증명하는 자료가 많아 종합적으로 본다면 간도지역 역시 우리땅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번 간도론에서 안타까운 점은 아직까지도 저의 호기심은 아직 완벽하게 해결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간도라는 땅에 대해서 다시한번 느끼고, 알게된 것만큼은 큰 수확이라고 생각됩니다. 적어도 와룡고등학교의 역동만큼은 간도에 대해서 대한민국의 다른 누군가보다도 훨씬 간도에 대해서 알게되는 것이니 대한민국 0.1%가 된 기분입니다. 당초 선생님이 계획하셨던 조선족과 한민족, 그리고 간도의 관계에 대해서는 얻은것이 없어 아쉽지만 저는 그것만큼의 큰 수확을 거뒀다고 확신합니다. 좋은 강의를 들려주셨던 홍영희 교수님과 경일대학교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간도론의 홍영희 교수님.




by 초령목 2012. 9. 7. 01:13
by 초령목 2012. 5. 30. 00:05

 한 때 인터넷에 퍼진 글이 있다. 바로 등산용품 전문회사로 유명한 노스페이스 사장이 남긴 어록이었는데 그 말이 "한국 학생들은 정말로 산을 좋아하나 보다" 이 말을 한 이유는 유난히 노스페이스 점퍼가 한국 학생들에게 많이 팔려나가서 한 말이다. 하지만 실상은 "노스페이스 점퍼가 다른 점퍼보다 방한효과가 더 잘되는 것 같다"는 이유였다. 이에 한 네티즌은 이런 댓글을 달았다. "노스페이스가 한국 학생들에게 잘 팔리는 것은 우리나라 교육이 산으로 가기 때문이다. 분명 그 네티즌이 웃자고 한 말이었으나 많은 네티즌들은 그 댓글에 "감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답글을 달면서 그 네티즌의 센스에 감탄했다.

"우리 미국은 한국의 교육열을 배워야 합니다!" 미국 대통령 오버마가 한 말이다.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한국이라는 동아시아의 조그마한 나라를 배워야 한다는 것은 고맙지만 우리나라 실상을 보면 '미국이 미치려 하나보군'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건 필자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이 역시 네티즌들이 먼저 생각했다. 2010년, 한 연구 자료에 의하면 한국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느끼는 행복감이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가장 낮게 나타났단다. 학업 성취, 교육 참여, 학업 열망 등을 평가한 교육 부문에서는 벨기에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높은 점수가 나왔지만, 자신이 ‘행복하다’고 답한 학생들은 20개국 평균 84.8퍼센트에 크게 못 미치는 55.4퍼센트 수준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네티즌들이 한국의 교육을 믿지 못하는 것인가? 무엇이 학생들이 한국의 교육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세계 물리학의 천재 아인슈타인이 대학시절 수학천재였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하지만 그런 아인슈타인은 현대 한국에 태어난다면 그냥 수학만 잘하는 놈일 뿐 대학에 들어가기는 사실상 어려울 것이다. 한국에서는 전 영역 1등급이 아니라면 상위대학에 들어가기는 힘들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는 미래를 책임질 천재인재보다는 전체적인 평균보다 우수한 사람을 뽑는다. 입학사정관제로 그렇게 버리는 인재들을 뽑는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 수는 입학사정관제도가 사람들에게 광고 된 것에 비해선 뽑는 수는 상당히 미미하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 버린 천재들이 얼마나 될까?

 

 그렇다면 대학에 들어가는 그 평균 이상의 사람들은 과연 정말 인재일까? 그것도 의문이다. 사실 그들 중 대부분은 사교육으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인재가 아닌가? 누구에게나 자신이 좋아하는 과목, 잘하는 과목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고 매년 30:1의 경쟁을 뚫기 위해서는 잘하는 과목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그것을 보완하기위해서는 무엇인가가 필요로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첫 번째, 사교육이다.

서울 지역 일반고(외고·과고·예고 등 특목고 제외) 출신 합격생은 모두 686명으로, 이 가운데 강남 3구 출신이 292명이었다. 이는 서울 지역 전체 합격자의 42.5%를 차지했다. 최근 3년 동안에 가장 높은 비율이라고 한다. 강남 3구를 제외하고 합격자가 가장 많은 곳은 노원구(57명)로 송파구와 같았다. 이어 강서구(40명), 양천구(39명)와 강동구(39명) 등의 순이었다. 사교육의 영향을 많이 받는 강남 3구와 노원구 등의 합격자가 다른 곳보다 월등히 많다는 것은 결국 사교육의 영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위에서 보는 통계와 같이 서울대 신입생에는 사교육으로 유명한 강남지역 학생들이 50%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대학교가 하나의 커리어가 된지 10년이 더 흘렀다. 대학교라는 자격증이 없다면 취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만족을 못하고 있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대학이라는 자격증이 필요한데 그 자격증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결국 사교육을 이용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한국의 학생들에게 학부모들에게 사교육을 부추기고 있는 것인가?

 

 사교육의 첫 번째 이유는 부모이다. 좋게 말하면 부모가 자신의 아이가 잘되길 바라는 사랑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내 아이만 잘되면 된다는 경쟁심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현재의 고등학생의 부모님은 농업사회였다. 비교적 가난했던 그 시기 부모님들은 학교에 돌아오자마자 가방은 집어던지고 부모를 도와 일을 해야 했다. 공부를 하고 싶어 했던 사람들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연필대신 괭이를 들어야 했던 그 시절의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에게는 연필만 잡게 해주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이 너무 과열되었다. 이왕 연필 잡는거 남들한테는 지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를 학원에 보낸다. 아이가 학원에 보내자 성적이 쭉 오르니 주위에 있던 학부모들도 학원의 효과를 느끼며 자신의 아이도 학원에 보낸다. 그리고 한두 개 다니니 티도 나지 않아 여러 개를 보내 아이들이 학부모보다 더 바쁜 일상을 보내게 된다. 학부모라는 고래들의 욕심과 경쟁에 학생이라는 새우 등만 터지는 꼴이 되었다.

 사교육의 두 번째 이유는 학원이 학부모를 유혹한다. 옛날에 한 시사 프로그램에서 학원의 폐단에 대하여 조사를 해보았다. 유학을 갔다 오며 한국에 와서도 여러 영어대회에서 상을 탄 한 학생을 위장시켜 한 학원의 레벨테스트를 받게 했다. 분명 무난하게 상위레벨을 받을 거라 예상했지만 아이는 그 아이의 수준을 생각한다면 터무니없게도 낮은 레벨을 받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다른 아이들과의 경쟁에서 지게 됩니다.” 나중에 이 아이의 이력을 밝힌 뒤 학원원장에게 이런 결과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학원원장은 당황했지만 이렇게 말했다. “학생을 끌기위한 수단입니다.” 학원에서는 이런 식으로 학부모의 불안함을 이용하여 사교육을 부추기고 있다.

 사교육의 세 번째 이유는 공교육의 모순된 점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동시에 존재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게 가능하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 교육에서는 존재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사교육이고 공산주의는 바로 공교육이다. 사교육은 학생들의 이목을 끌기위해 개인 연구소 직원 전원을 문제를 만드는데 투입하고 그렇게 만든 문제의 80%를 버리면서까지 최고의 문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왜냐하면 사교육시장에서는 눈에 띠는 사람만 살아남기 때문이다. 즉 사교육은 노력한 만큼 대가가 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학생들이 사교육에 흥미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에 반해 공교육은 그 반대이다. 사교육의 강사들은 자신들의 시간을 수업준비로 투자할 시간이 있지만 우리나라 교사들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다. 내가 선생인가 일반 사무직인가 헷갈릴 정도로 서류가 많이 내려온다고 한다. 그리고 학교 선생은 오히려 열심히 노력하려고 하면 욕을 먹기도 한다. 어차피 오는 월급은 비슷비슷하고 교사경력에 달려있으니 열심히 할 필요도 없가 있냐는 것이다. '괜히 당신이 열심히 하면 내가 욕먹는다' 라며.. 학생들도 수준이 천지차별이니 누구에 맞춰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학생들은 점점 공교육에 흥미를 잃게 되고……. 이런 모순된점에 공교육에 대한 실망감을 느끼고 사교육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다.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 공교육보다 민주주의 사교육이 더 인기있는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두 번째, 대학의 전문성이 사라져 하나의 자격증으로 변했다. 과거 학부모 시절에는 농업사회라는 이유로 대학을 못 갔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 당시 대학은 정말로 ‘지식인’들만 다닐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만큼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어려웠다. 1990년까지만 하더라도 대학 진학률이 33%에 그친 것에 반해 2008년에 들어서는 83%를 찍었고 지금도 80% 내외를 유지하고 있다. 대학이 정말로 하나의 커리어가 된 것이다. 서울대학교라는 자격증은 너무나도 큰 이름값을 한다. 그래서 자신의 적성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점수에 맞는 서울대학교 과를 낸다. 나는 적성이 영문과인데 서울대학교에 맞는 점수가 국문과이다. 그러면 국문과로 간다는 것이다. 대학의 이름값이 곧 취직 성공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대학의 문제점은 대학에 신입생을 뽑았으면 전문적으로 배우게만 해도 모자랄 판에 등록금도 얼마나 비싼지 1년 대학 다니고 1년 휴학하고 1년 다니고 1년 휴학하고……. 또 이런 등록금을 어디에 쓰고 있는가? 최근 등록금반값으로 문제가 많은데 정말 깨끗하게 쓰고 있다면 사용내역을 공개하면 된다. 하지만 대학에서는 공개 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베일 속에서 겨우 벗겨진 말로는 부동산을 샀다고도 한다. 등록금을 비싸게 받아놓고 학생의 권리는 생각도 하지 않으며 대학교 배만 채우게 하는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가 인재를 키울 수 있는 것인가? 정말 교육은 우리나라 최고의 사업 중에 하나인가 보다.

 

 세 번째, 학생들에게 무한경쟁을 강요한다. 최근에 우리를 충격으로 몰았던 카이스트 영재 자살사건이 있다. 사건의 원인은 바로 새로 총장이 오면서 학생들에게 경쟁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등급별로 징벌적 등록금을 내는데 커트라인 학점이 되지 않으면 차등적으로 등록금을 추가로 내는 것이다. 카이스트가 가장 좋았던 자율학습이 이런 제도의 실시로 사라지게 되었고 활발하던 동아리 활동이 대부분의 회원들이 뒤쳐지지 않기위한 공부로 인해 제대로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또 학점에 미달한 학생들이 결국 자살로 이어진 비극적인 사건이다. 또 다른 예가 있다. 영재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시사프로그램에 나왔는데 영재원의 장점은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걸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학생들이 만족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점은 이 영재원에서도 경쟁을 한다는 것이다. 개개인의 능력을 키워주는 곳에서 학생 200여명을 다시 모아놓고 그 안에서 또다시 경쟁을 해야 한다. 경쟁이 치열해서 매학기 마다 자신이 쓴 필기노트가 사라졌다고 하는 영재원 학생들도 많다. 그들은 왜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또 경쟁을 해야 하냐며 의아해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왜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일까?

 

 네 번째, 학생들의 학습의욕이 사라지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그건 생각을 안해봐도 답은 쉽다. 유럽에 있는 학교에 대한 뉴스를 봤다. 그 학교는 수업 한번하고 쉬는 시간이 30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최근에 네덜란드의 고등학교에서 학교 수업시간을 늘리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네덜란드 고등학생들이 일어나서 시위를 했는데 얼마나 늘렸나 했더니 한국시간으로 오후 5시까지 수업시간을 늘렸다고 한다.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이 소리를 들으면 웃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전 7시쯤에 학교에 가서 빠르면 밤 10시에 집에 온다. ‘집은 잠만 자는 곳’이라는 농담이 괜히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또 학원 여는 시간을 10시로 줄이기 전까지만 해도 새벽 1~2시까지 공부하는 학생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즉 하루의 3/4를 강제로 공부하는데 보내고 있다. 웬만한 노동자 하루일과 저리가라다. 또 우리나라 학교의 수업시간과 쉬는 시간을 비교해보면 기가 막힌다. 초·중·고 수업시간은 각각 40분·45분·50분이다. 그런데 쉬는 시간은 10분으로 통일 되어있다. 그리고 몇 해 전에는 초등학교 쉬는 시간을 5분으로 줄이는 학교로 논란이 일어난 적도 있다. 과연 1시간 수업 10분 휴식으로 얼마만큼의 효율을 볼 수 있을까? 또 우리나라 과목의 예체능 비율이 너무나도 낮다. 학교에게 과목선택의 자유를 주면서 대부분의 학교들은 체육시간을 줄이고 영어나 수학시간을 늘렸다. 여자라면 체육시간이 줄었다면 좋아하겠지만 사실 체육시간은 학교에서 공부로 지치고 굳은 몸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음악이나 미술시간도 학교에서 자신의 굳은 머리와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컴퓨터로 쇠약해진 체력으로 기초체력검사에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은 한국 학생들의 체력으로 고등학교를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지 그것이 진짜 미스터리다.

 

 

 이러한 교육의 문제점들로 인해 현대우리사회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대학에 입학하지 못해 '난 인생 망쳤다 이제 막살자'라고 느끼며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며 공부를 너무 잘해서 혹은 공부를 너무 못해서 왕따를 당해 사회로부터 소외감을 받는 사람들도 생기고 있다. 교육의 의미가 변색되어 현대사회 전체의 기강이 흔들리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장 근본이 되는 인간들의 정신을 고쳐야 하며 그 정신을 고치기 위해서 교육을 개혁해야한다. 채워져 있었다. 물론 그것이 점진적 개혁이 될 것인지 급진적 개혁이 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필자는 약간의 해결책을 제안한다. 

 

 첫 번째, 진로교육을 초·중·고로 확대한다. 독일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진로를 결정하고 그에 맞춰 상급 학교 진학을 준비한다.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가 적성검사와 상담을 거쳐 진로를 결정한다. 초등학교 4학년까지만 보는 게 너무 짧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을 보면 사정이 다르다. 초·중학교는 그저 ‘워크 넷이나 커리어 넷가서 검사를 한번 해보아라.’가 끝이다. 결국 고등학교에 와서야 실질적으로 진로교육을 시작한다는 말인데 그러면 그냥 봐도 너무 이른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더 쉽게 말하자면 사회로 나가기 직전의 마지막 3년에 진로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게 독일의 진로선택보다 더 짧고 말이 안 돼 보이지 않은가? 우리나라의 진로교육계획은 말로만 초등학교부터 시작된다고 하지만 그것을 행동에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이들을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이 12년이나 된다. 그러면 아이의 성향과 적성을 파악해 수준별 교육이 아닌 적성별 교육을 실현시킬 수 있다.

 

 두 번째, 공교육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쉬는시간이나 예체능 시간을 늘린다. 15시간 공부에 쉬는시간은 고작 3시간 남짓 그것도 수업시간 1시간과 1시간 사이의 10분. 이 시간으로는 학생들이 제대로 쉬기도 그렇다고 배운 내용을 복습하기에도 뭔가 부족한 시간이다. 이런 시간에서 무슨 효율성을 바라는가? 야구에서도 한 유망한 선발투수를 2~5선발 없이 5경기를 연속으로 9이닝 완투를 했다고 해봐라. 그 선수는 팔에 과부하가 걸려 야구를 접어야 할 수도 있다. 그 선발투수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1~5선발을 놓으며 적어도 1주일에 한 번씩 등판시키고 5~7이닝을 던지게 하고 마운드를 내려가게 해보아라. 그러면 팀에서도 이 유망주의 팬들은 열광하고 구단에서도 선수 건강에 무리 없이 키울 수 있고 경기에서 승리를 거둘 수도 있다. 교육에서도 똑같다. 지금 교육은 학생이라는 선발을 쉬는 날 없이 매 경기마다 9이닝 풀로 돌리고 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결국 학생은 과부하가 걸려 공부에 흥미를 잃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1주일의 선발들이 쉴수 있는 기간만큼은 아니더라도 쉬는시간은 늘려야 할것이다.

 또 체육시간은 이런 과부하 된 몸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데 너무 비율이 낮다. 컴퓨터를 할 때에도 매 시간에 10분씩은 몸을 풀라고 했다. 그런데 컴퓨터는 하루 종일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 반해 학생들은 공부를 하루 종일 해야 한다. 그런데 그 몸을 풀 시간은 너무 부족하다. 체육수업을 통해 신체적인 교육과 동시에 몸을 재생시킬 수 있다. 또 미술과 음악을 통해 정신적인 교육과 뇌를 활성화 시킬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세 번째, 대학에서는 평균보다는 그 학생의 잠재된 능력을 볼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거나 입학사정관제도를 확대한다. 우리나라에 많은 인재들은 자기들의 능력을 알든 모르든 죽어가고 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것은 현재는 입학사정관제로 신입생을 뽑는 비율이 조금씩 높아져가고 있어 현재는 신입생의 10%정도를 입학사정관제로 뽑고 있으며 신입생 절반에서 더 많게는 신입생 전체를 입학사정관제로 뽑는 학교가 생기기도 했다.

 

 네 번째, 조선시대의 공부에 대한 의지를 배워야한다. 조선시대에는 인재양성을 국가정책으로 삼았기 때문에 왕마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신하들이 많이 나왔다. 심지어 임진왜란의 수습을 못한 무능력한 왕이라 불리는 선조마저도 그의 주위에는 유성룡이라던가 이이 등의 재상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인재양성이라는 이름하에 타율성의 강제적인 공부를 하고 있기에 그토록 바라던 인재가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예전에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이 조선선비들에게는 가장 큰 꿈이었기에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공부를 했다. 조선 선비들의 삶을 보면 흡사 유럽에 있던 수도원의 생활을 방불케 할 정도로 규칙적인 삶을 살아왔다. 조선시대 최고의 대학교인 성균관에서는 유생들이 자신을 질책하는 돌 위에 서서 스스로를 때리며 공부에 집중을 하기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는 과연 스스로 의자위에 서며 자신을 때리며 공부를 할 만큼의 의지가 있을까? 조선시대에는 그런 의지가 유교적인 생각 충·효·예·의에서 나왔다. 부모를 대하는 태도를 스승을 대하는 태도처럼 스승을 대하는 태도를 왕을 대하는 태도처럼 그런 정신으로 공부를 했으니 인재가 안 나올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스승을 왕처럼 보는데 어느 학생이 집중을 하지 않을까?

 

 

 현재 한국의 교육(敎育)아닌 교육(絞戮:목매 죽다)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니 많은 원인이 나왔다. 이것 외에도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사실 요즘은 우리나라 교육에 대하여 말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학생체벌 금지로 인한 교권추락, 교권추락으로 인한 교사폭행, 등록금 반값시위 등 요즘 한국 교육에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게 보니 아직 개혁의 초기단계라 그런 것 같다. 원래 개혁의 초기에는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 불만을 하루빨리 보완·개선해서 이런 개혁의 성공이 적어도 내 밑의 후배에서부터는 성공하여 교사도 학생도 마음 편히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경희.hwp


첨삭지도

by 초령목 2012. 5. 30. 00:00
by 초령목 2011. 9. 29. 16:10

하늘아래 두 개의 태양

1학년 이 경희, 장 성현, 박 영락

 우리나라에 대왕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누구인가? 열에 다섯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을 생각할 것이고 나머지 다섯은 조선의 세종대왕을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같은 대왕이지만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한명은 전쟁의 왕으로써 ‘대왕’으로 칭해졌으며 또 한명은 훈민정음 등 우리나라 과학과 문화에 영향을 준 왕으로써 ‘대왕’에 칭해졌다. 그들은 무엇이 다르기에 1600년이 지난 오늘까지, 60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대왕이라 칭송받고 있는 것일까? 하늘아래 두 태양은 없다지만 이 두명의 대왕들 앞에서는 그 말이 무색해 진다.

무武 광개토대왕(374~413) 

무(武)하면 떠오르는 대왕은 누구일까? 여러 왕들이 생각날 수도 있겠으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왕은 한명이다. 고구려의 19대왕이자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룬 광개토대왕이다.

 

‘광개토대왕’은 약칭

사실 광개토대왕이 그의 묘호로 알고있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그의 묘호는 상당히 길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을 줄여 광개토태왕 혹은 호태왕이라고 한다. 또 재위 시의 칭호는 영락대왕(永樂大王)이었는데, '영락(永樂)'은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최초의 연호로 알려져 있다. 팔방미인(八方美人) 광개토대왕 팔방으로 영토확장

장수는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야 한다- 드라마 '광개토대왕' -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하면 역시 영토 확장이라 할 수 있다. 일생동안 성64개의성과 1400개의 촌을 무너트렸으며 동으로 훈춘, 남으로 아산만에서 동으로 죽령 북서쪽으로 랴오허강(요하강) 이동의 만주지방 대부분에 해당하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한반도 내에서는 호우명그릇에서 볼 수 있듯이 신라에 고구려의 영향을 미치게 하여 보호국화 한다. 백제에 대해서는 원수라 여기며 강하게 몰아붙였다. 광개토대왕의 증조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백제의 공격에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396년에는 대대적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아리수 이북의 58개 성, 700여 개 촌락을 공략하고 위례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제 아신왕이 항복하여 노예가 되겠다고 하며 아신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명을 인질로 받았다. 400년 백제-가야-왜가 동맹을 하여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요청을 했다. 광개토대왕은 군대를 보내 왜를 격침했으며 가야의 맹주권이 금관가야에서 대가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광개토대왕이 일생동안 상대한 국가는 백제, 후연, 숙신, 가야,왜,동부여 등이었으며 이 중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격파하고 백제를 속국화 시켰으며 가야의 맹주권을 바뀌게 하였다. 그리고 숙신과 동부여는 정벌하여 고구려의 깃발을 꽂았으며 후연의 침입을 막아내며 동북아 1인자로 우뚝 서게 했다.

웅장한 광개토대왕릉비의 웅장한 기록   

  광개토 대왕이 죽은 2년 후 장수왕 3년(414년)에 세워졌으며 높이는 6.39미터, 글자는 모두 1,775자의 웅장한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은 광개토대왕의 비밀을 찾을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대국의 건설자가 백제와 후연과 싸우다 일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동북아의 제왕치고는 허무한 죽음이 아닐수 없다. 그렇기에 광개토대왕릉비의 가치는 여기서 빛난다. 예를들면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왜의 침입을 받은 신라가 고구려에 도움을 청했고 고구려군대를 본 왜군이 겁을 먹고 퇴각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또 이 광개토대왕릉비에서 고구려의 문장력 볼 수 있다.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엄은 온 세상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자 백성이 모두 생업에 힘쓰고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풍족해졌으며, 온갖 곡식이 가득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나 보다.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었다.

왕의 은택과 위엄, 부강하고 풍족한 나라를 이렇게 간명하게 쓰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이때는 5세기 초이다. 한문의 쓰임이 그다지 자유롭거나 널리 퍼져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 문장에서 마지막의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었다’의 원문은 ‘안가기국(晏駕棄國)’이다. 여기서 안가(晏駕)를 직역하면 ‘임금의 수레가 늦는다’고 하게 되는데, 왕의 죽음에 붙이는 무척 높은 수준의 말 꾸밈이다. 이런 문장구사력은 우연의 소산이 아니다. 당대 고구려의 문명이 국력의 신장과 함께 이렇게 올라와 있었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다만 이 웅장한 광개토대왕릉비에 논란이 되는 곳이 있다. 여러가지가 있으나 가장 논란이 되는 구절이 바로 이것이다. 중요한 글자가 훼손되었기 때문에 한일간의 의견차가 있었다. 신묘년에 왜 나라가 쳐들어오자,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가 왜를 쳐부쉈다. 그런데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로 쳐들어가) 그들의 백성으로 삼으려 했다. 6년 곧 병신년에 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토벌했다. 이 구절을 일본학자들이 임나일본부(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는 설)의 증거로서 일본 학자들은, “신묘년에 왜 나라가 쳐들어오자,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가 왜를 쳐부쉈다. 그런데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로 쳐들어가) 그들의 백성으로 삼으려 했다.”는 대목을 세 글자가 없는 상태에서, “신묘년에 왜 나라가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치고 백성으로 삼았다.”라고 번역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고구려가 신라를 돕기 위해 왜를 물리친 이야기이며 한 학자가 이 훼손된 글자를 복원하며 현재는 잘 마무리된 상태라 볼 수 있다.

그의 정복활동에 감춰진 국내통치

삼국사기에 따르면 광개토 대왕은 392년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지었는데 이는,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한 소수림왕의 정책을 계승한 것으로 국가와 백성들의 정신적 통일을 꾀하기 위한 종교정책의 일환이다. 아홉 개의 절을 평양에 창건했다는 사실은 평양의 중요성도 인식케 한다.  406년 궁궐의 중축과 수리는 커져가는 국가의 규모와 정치의 효율성을 위한 조치로 보이며, 408년 7월 나라 동쪽에 독산성 등 여섯 개의 성을 쌓고 평양 주민을 이주시킨 조치 역시 매우 의미심장한 하나 평양에 대해서도 모종의 조치가 뒤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주 정책을 실시한 바로 그 다음 달인 8월에 왕이 친히 남쪽 지방을 순행하고 있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아들 장수왕이 427년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것도 광개토대왕 때 이미 그 시초가 마련되었기에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평양의 중요성이 광개토대왕 때에 와서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도 위 짤막한 기록들에서 확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은 이러한 의미있는 국내통치와 국외정책를 통해 영토확장과 국내안정을 동시에 도모했고, 결과적으로 그 아들인 장수왕대에 고구려의 최대 전성기가 연출되었으며, 이백년간의 태평성대가 이루어진 기초가 되었다.

우리가 아직도 광개토대왕을 ‘대왕’이라 부르는 이유는 수천 년간 만주를 달렸던 옛날의 영광을 아직도 잊지 않았다는 그리움과 그 만주를 발판으로 우리나라를 ‘중국’이라는 당대 최강의 나라에 맞서 우리가 하늘이라는 자주적인 천하관을 가졌다는 자부심이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그를 광개토‘대왕’이라 부르는 것은 아닐까?


문文
세종대왕(1418∼1450)

 지금 당장 지갑을 열어 배추잎 1장을 꺼내보면 그 잎에서 온화하게 웃고있는 한명의 위대한 왕이 보일것이다. 그는 문(文)을 떠나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왕이자 조선의 위대한 성군, 조선의 4대왕 세종이다.

 
독서광 세종
"충녕은 책을 너무 읽어 눈에 진물이 다 나는구나. 눈이 다 나을때까지 충녕이 책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방안에 있는 책을 모두 치우도록 하여라." 책 안읽는 놈 치고 잘된놈 없고 잘된놈 치고 책 안읽는 놈 없다. 이 말을 증명하 듯 '잘된 놈'에 속하는 세종은 독서광이었다. 어릴적 한번 본 책을 100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던 세종의 책읽기 습관으로 왕세자였던 태종을 닮아 호전적인 성격이었던 양평대군을 밀어내고 왕위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세종은 임금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현명한 선비들을 많이 모은 집이라는 뜻의 '집현전'이라는 학술기관을 만들며 여러 학자들과 토론을 하기도 했다. 세종과 여러 말을 나누던 학자들도 세종의 학식에 감탄을 했다고 하니 세종이 선천적으로 영특한 것일수도 있겠으나 그는 후천적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책을 읽는 그의 생활에서 나온것일 것이다.


가갸거겨 훈민정음우리말이 중국말과 달라서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 뜻을 담아서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어 내놓으니, 모든 사람이 쉽게 깨우쳐 날로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함이다.-훈민정음 반포-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훈민정음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과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정신이 담겨져 있다. 법은 있으나 읽을줄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우리말로 된 글로 그들을 깨우치고 싶었던 세종의 애민과 중국, 일본은 물론 주위의 나라들이 각자 고유만의 글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민족의 글을 만들었던 애국이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게한 계기가 되었다.훈민정음은 세종이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에게 정치를 맡기고 여러 언어학 책을 읽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례적으로 '왕이 친히 만들었다"라 전한다. 여태껏 신하들과 함께 만들었다면 신하의 이름과 함께 나열을 했다. 하지만 이 훈민정음만은 달랐던 것이다. 훈민정음을 만들자 마자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던 세종이 고집했던 그 훈민정음은 현대에는 크고 밝은 글이라는 '한글'로 명칭이 바뀌며 자음과 모음을 합쳐 하나의 글자로 총 11172자를 쓸 수 있다. 이는 중국, 일본은 물론 영어조차도 불가능한 일이다.


조선의 르네상스 세종시대

세종대왕의 또다른 업적은 조선 과학기술에 혁명적인 발전을 가져주었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여러방면에서 천재라고 한다. 일화로는 박연이 세종 앞에서 편경을 연주할 때 세종이 한 음의 소리를 지적한다. 편경을 살펴보니, 먹줄 선이 덜 갈려 있었고, 때문에 제대로 된 소리가 나지 않았다. 편경에서 먹줄 두께는 반음 10분의 1의 차이를 가져온다. 그의 천부적인 음악감을 통해 맹사성에게 향악을 박연에게 아악을 정리하여 조선 음악의 기틀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세종도 손수 정간보라는 조선 고유의 악보를 만들었다. 그의 활동은 예술에 머물지 않았다. 훈민정음처럼 백성을 실질적으로 돕기위해 천문학 부분에서 혼천의 등을 설치하며 발전시켰으며 농사직설이라는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책을 만들었으며 또 장영실이라는 조선 최고의 발명가를 통해 자격루(물시계),암부일부(해시계)와 같은 시계, 측우기 등을 만들게 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쉽게 하였다.


전쟁왕 세종武와 文으로 나누어 세종이 文을 대표하는 왕으로 나왔다고 하여 그가 文에서만 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국방강화는 큰 임무였다. 북쪽으로는 김종서로 하여금 여진이 있는 땅에 4군 6진을 개척하게 하였다. 여담이지만 여기에도 일화가 있다. 세종대왕이 책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임금이자 백성들을 사랑하는 임금이라 그의 철학또한 달랐다. 그는 관리가 불편할수록 백성이 편해진다고 생각하여 관리들에게 부담을 주며 일을 시켰다. 그 중 김종서가 세종이 내주는 일을 버티지 못하여 자진해서 여진을 정벌하겠다고 하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찌되었든 이런 세종의 노력으로 북쪽지역을 안정시킴과 동시에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가지게 되었다. 남쪽으로는 왜구의 노략질로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자 이종무를 시켜 대마도를 정벌하게 했다. 대마도가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하였으나 왜의 노략질이 심해지고 이곳이 소굴이 되자 세종이 정벌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비록 일본에서 군사를 총동원하여 방어를 하려 노력하여 대마도 전체를 토벌할수는 없었으나 그들에게 큰 타격을 주며 회군하였다.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보였던 그를 보면 그에게는 조선이라는 우물이 너무 좁았을 것 같다. 하지만 오히려 우리에게는 세종이라는 선물을 받음으로써 우리민족이 문화민족으로 발전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세종에게 미안함과 동시에 감사함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그것을 알기에 아직까지도 그를 세종‘대왕’이라 부르는 것은 아닐까?


하늘에는 태양이 하나이며 우리에게는 광개토대왕이라는 태양과 세종대왕이라는 태양 2개가 존재한다. 하늘 아래 2개의 태양이 존재할 수는 없으나 태양은 우리에게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밤이라는 어두움을 없애주지 않는가? 그들에게는 송구스럽지만 우리에게는 하루 24시간을 낮으로 만들어주는 2개의 태양이 오히려 자랑스럽다.

우리가 10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왕들을 제치고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을 ‘대왕’이라 부르는 것은 그들처럼 특출한 새로운 ‘대왕’의 출현을 바라는 우리들의 바람 때문이지는 않을까? 우리의 소망대로 새로운 ‘대왕’이 출연하여 그들의 빈자리를 채워줬으면 좋겠다.

by 초령목 2011. 9. 8. 14:45

역사논술(이경희) (1).hwp

첨삭지도


민족구심체를 찾아서

초령목

5월 중 가장 푸르다는 어린이날에 와룡고등학교 역동에서 우리의 민족구심체를 찾는 체험활동을 가지기로 하고 신청을 접수받았다. 나도 어차피 집에서 뭐하겠냐는 생각에 냉큼 신청을 했다. 하지만 막상 아침에 일어나니 ‘남들 다 쉬는데 우린 공부라니…….’라는 불만 섞인 생각도 들었으나 이미 신청을 했으니 때는 늦었다.

답사 전 내가 찾은 민족구심체, 자아의식

신청을 왜 했을 까라는 후회도 많이 했으나 공부를 안 해오면 노래를 부르게 한다는 협박공지를 받아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결과는 이런 물음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가서 뭘 배울 수 있는가? 정답은 나 자신을 알자라는 자아의식이었다. 역사왜곡에 대한 대항의 해답을 제시해주는 근본적인 대안이자 역사유물을 통해 선조와 나 사이의 교감을 연결해주는 고리가 바로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자아의식밖에 더 있을까? 만약 선생님께서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 이렇게 대답을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회는 오지 않았다.

선사시대 우리조상들의 구심체, 암각화

언제나 달릴 줄만 알았던 버스가 멈추는 방법을 드디어 터득했나보다. 버스가 멈춰선 곳은 고령 양전동 암각화가 있는 곳이었다. 암각화하면 울산 반구대 밖에 몰랐는데 나에겐 이런 암각화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런데 막상 보니 이 암각화가 낯설지 않았다. 예전에 대가야 박물관에서 이 암각화 모형을 본 기억이 났다. 아, 그게 이거군.

주위를 둘러보니 들판이었고 저 멀리서 강의 형태를 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옛날에는 이 바위근처까지 물이 왔었다. 수십만 년에서 수백만 년 동안 퇴적되며 강이 이 바위로부터 멀어졌다는데 이 바위는 멀어지는 강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한편으로는 자연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말을 이제야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암각화는 일명 인면암각화라고 불린다. 바위에 새겨진 그림이 인간의 얼굴처럼 생겼다는데 이 암각화를 처음 보는 사람은 결코 ‘아 이건 인면암각화구나’라고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사각형에 막대 같은 것이 달린 것이 인면이고 원같이 있는 것이 동심원문양인데 4개가 있다. 이 문양이 과연 인면일까라는 의문이 들어 여러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았다. 과거에 여기까지가 강이었으니 그 문양들이 수중생물을 의미하며 당시 수렵․채집사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인면이라고 불리는 문양 옆에 막대의 수가 다 다른 것으로 보아 달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저것은 인면이라 불리는 문양은 가면을 의미하고 동심원은 태양을 의미하여 제사를 지내던 곳이 아닐까? 여러 대화가 오고갔으나 우리는 확실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것을 말할 때 마다 모순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저 암각화는 백년에 걸쳐 만들어 졌을 수도 있고 천년에 걸쳐 만들어 졌을 수도 있다. 단지 도화지 안이라는 특정한 틀 안에 있는 그림이기에 우리는 ‘저것이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구나.’ 라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암각화 위에는 별자리를 의미하는 홈이 파져있다. 아마 이 별자리를 조사해보면 이 암각화가 최소 몇 만 년 전에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보는 우주는 언제나 팽창하고 빛의 속도가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기에 과거라고 불리는 그 시절의 우주와 현재라고 불리는 지금의 우주(하지만 이것도 과거지만)를 비교하면 알아볼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사례로 은천군에 있는 고인돌에 구멍이 134개가 파여져 있었는데 여기서 발견되는 별자리는 자미원, 직녀, 구진, 북극오성, 정수(쌍둥이 자리), 삼수(오리온 자리) 등이 있는데 기원전 3200년경의 하늘로 추정할 수 있었다. 또 용덕리 10호 고인돌 별자리는 그 당시 북극점이 용자리의 알파별이 라는 것을 보여주고 이 고인돌이 만들어진지 1500년 후의 고인돌인 지석리 고인돌에서는 북극점에 해당하는 별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북극점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이런 바위에서 별자리의 발견은 천문학적,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것인데 여기서 이런 별자리가 발견됐으니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나도 이 별자리 구멍을 실제로 보고 싶었지만 바위 위를 볼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보려 노력을 했으나 실패하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다음 행적지로 가야했다.

잃어버린 역사 ‘가야’의 구심체

나는 가야라는 나라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중학교 때 근 2개월 동안가야라는 신비의 제국에 흥미를 느껴 여러 책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우리 역사서에 가야를 다룬 책은 삼국유사이다. 그 후에 만들어 진책들은 대부분 삼국유사의 기록을 기본으로 두고 서술했을 것이다. 500년 역사를 기록하는데 조선은 수백 수천 권의 책을 썼는데 고작 삼국유사라는 몇 권의 책만으로 가야를 알자는 것이 황당하기만 하다. 언제 유득공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삼국사가 있어야 마땅한데 고려가 이것을 지은 것은 옳다. 부여 씨가 망하고 고 씨가 망하자 김 씨는 남쪽을 차지했고, 대 씨는 그 북쪽을 차지하고서 이름을 발해라고 했는데, 이것이 남북국 이다. 그러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도 고려가 이를 쓰지 않았으니 잘못이다.” 그 이에 앞서 누군가 가야의 역사를 기록했다면 그 신비의 제국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아쉽기만 하다. 우리가 아는 철의 제국 가야는 그저 500년 역사의 일부분일 뿐이다.

성씨의 구심체, 개실마을․한개마을

꽃이 피는 아름다운 골 산 같은 나비가 날아오는 곳, 조의제문으로 유명한 김종직의 5대손이 피신하던 곳, 뒤에는 선비를 상징하는 대나무 숲이 있고 앞에는 명산이 있는 풍수적으로 명당에 위치한 그곳이 바로 선산김씨의 종가 개실마을이다.

이곳은 종가답게 효를 강조한다. 이 효를 잘 실천했기에 죽어서 3품의 관직을 얻은 사람도 이 마을에 있다고 한다. 효의 기본적인 조건 두 가지가 있는데 편찮은 부모님의 배변은 맛보며 누워 계실 때에는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나누어 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조건을 보며 과연 이것이 그들이 추구했던 진정한 효인가를 생각해본다. 부모의 소원은 예나 지금이나 자식이 잘되는 것이다. 그런 자식이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며 그들의 부모에게 준다고 하면 어느 부모가 덥석 받고 싶어 할까? 오히려 자식에게 가는 미안함으로 빨리 죽어버리기를 바라지는 않을까? 또 이 효의 기본적인 조건을 악용하여 관직에 오르려 했던 사람들도 만만치 않던 걸로 기억한다. 그들은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버려서 나라에서 효자비를 세우면 보상을 얻어내기도 했다. 두 가지가 만약 진정 저 두 가지가 효의 기본이라고 하면 나는 내 자식이 손가락을 자르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죽을지언정……. 하지만 자기를 희생하면서도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에게 보답하는 옛 효의 정신은 계승받아 마땅하다.

중국 황실의 방은 9999개, 조선 왕실의 방은 999개, 일반백성들의 최대 방은 99개……. 이곳은 무려 99개의 방이 있는 마을이다. 마을 어르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르신께서 한곳한곳 설명을 해주셨는데 그의 말에서는 큰 자부심이 느껴졌다.

1이 아닌 큰 나루 마을, 새마을 운동전까지 사람 2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작았던 길을 가진 곳이 성산이씨의 집성촌인 한 개마을이다. 이곳을 돌면서 옛사람의 정성과 지혜를 느낄 수 있었다. 물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소나무를 못 옆에 두게 하면서도 결코 시들게 하지 않는 표현 할 수없는 신비함, 자식의 공부를 쉽게 할 수 있도록 지은 집! 아니 그들의 자식사랑! 개실마을에서는 효와 같은 정신을 강조했다면 한개마을에서는 위인들이 가진 정신을 강조했다. 대표적인 예로 자신이 호위하던 사도세자를 살리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하며 영조에게 감히 말을 하던 이 석문을 들 수 있다. 그는 지금으로 치자면 감히 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중위가 별 4개 달린 분 앞에서 명령불복종을 했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자신의 목숨보다도 신의를 소중히 여긴 그의 정신! 아니 그라는 인물 자체를 우리는 알아야 하며 본받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아파트라는 위로만 뻗는 현대사회보다 마을이라는 나무의 뿌리처럼 가지처럼 뻗은 옛 선조들의 그 마을이 우리에게는 더 좋은 환경이 되지는 않을까?

답사 후 내가 찾은 민족구심체, 공동체

답사 동안 내가 돌아다니던 곳은 옛 신석기인들이 함께 사냥하고 함께 먹고 함께 자던 그 향기가 배여 있던 암석화와 함께 마을을 이루어 볼 거 안볼 거 다보고 살아가던 마을들이었다. 우리 민족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우리는 하나라는 그 정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지금 우리에게는 그런 정신이 남아있는가? 우리에게는 나만이 존재하지는 않은가?

by 초령목 2011. 5. 20. 02:15


동북아시아의 역사 왜곡ing

초령목

중국과 일본은 우리나라와 상당히 인접해있다. 그래서 세계인들은 우리를 유교문화권이라고도 하고 한자문화권이라고도 하며 동북아시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그들과 우리는 닮은 점이 많으며 서로 협력해야 할 점도 많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그들과 갈라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입고 있는 옷들을 하나 둘씩 빼앗아 입고 있기 때문이다.

1860년, 녹둔도가 러시아와 청나라의 베이징조약으로 러시아의 영토가 됨

1909년, 간도를 일본이 철도부설권과 탄광 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인해서 강제로 청나라에게 넘어감

2002년,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로 만들기 위해 동북공정을 시작

2005년,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만들기 위해 다케시마의 날 제정.

우리는 기억해야한다. 녹둔도는 400년간 우리 조선의 땅이었고, 간도는 우리 민족의 발원지로서 수천 년간 점유해왔던 곳이며, 근대 조선과 청나라가 봉금지대를 설정 무인지대인 상태에서 우리 민족이 먼저 들어가 피땀 흘려 개간한 곳이며 또 고구려는 우리의 시조 고조선을 계승한 부여의 핏줄인 주몽이 세운 우리의 역사이다. 독도는 신라 지증왕때 이사부가 정복한 땅이며 현재까지도 우리나라의 영토이다.

이런 역사와 영토분쟁 속에서 동북공정과 독도 영유권 문제는 분쟁을 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순전히 자신들의 욕심으로 인한 억지이다. 남의 땅과 역사는 어떻게든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와 땅은 돌려받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역지사지를 모르는 이들의 왜곡을 이해할 수가 없지만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지켜야할 의무가 있다.

과거의 왜곡과 역사 왜곡

과거의 왜곡은 새로운 왕조에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특정 국가만 편애한다던가 특정인물의 영웅적인 면모만 보여줬다. 예를 들면 궁예를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왕건은 기록에는 모든 백성들이 환영을 하고 반겼으며 궁예를 추악한 폭군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지 얼마되지 않아 반란이 일어난 것을 보면 왕건이 부당한 방법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것, 즉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기록에는 ‘성군 왕건 납시오’만 기록하고 있다. 또 삼국사기를 기록한 김부식은 신라계 사람이고 사대주의를 믿는 사람이라 신라를 편애하며 글을 썼다. 그 덕에 신라에 불리하다거나 사대에 어긋난 것이 있다면 기록을 삭제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또 다른 예로 황희와 맹사성은 조선에서 검소하고 최고의 영의정으로만 알고‘만‘있겠지만 사실 그들은 황희의 사위가 범죄를 저질렀을 때 그 사건은 덮었을 뿐 아니라 황희는 뇌물과 비리로 24년간 탄핵을 많이 받은 인물이다. 이런 것이 과거의 왜곡이다.

역사 왜곡은 과거의 왜곡과 무척 다르다. 과거에는 특정 누군가를 부각시키기 위해 왜곡과 조작을 했지만 역사왜곡은 역사 자체를 다르게 해석한다. 중국은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고구려가 우리나라의 역사라는 것을 인정했으나 한족 특유의 新중화사상, 즉 ‘세상의 중심은 중국이다.’가 또다시 일어났다. 중국 주위에 있는 나라와 중국이 한번이라도 정벌했던 나라는 모두 자기의 역사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가 우리나라‘만’의 역사 → 장수왕의 평양 천도 전후로 천도 전은 중국의 역사로 천도 후는 한국의 역사로 인정하게하며 부분적으로 자신의 역사로 만들어가기 시작 → 현재는 고구려 자체를 자신의 역사라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현대 왜곡, 새로운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고조선 ⊃ 부여 ⊃ 고구려 ⊃ 발해, 고려) ⊂ 중국, (한반도 남부, 독도) ⊂ 일본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로 인정하게 되면 대한민국 교과서는 다시 써야한다. 고구려는 부여를 계승했고 부여는 고조선을 계승했다. 반대로 백제는 고구려계가 세웠고 고려와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했다. 그런데 우리의 시조는 단군왕검, 즉 고조선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역사는 신라와 조선으로 축소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하자면 고조선에서 내려온 이주민이 삼한을 발전․건국했으니 우리의 역사는 없는 것이다! 무섭지 않은가? 우리나라 역사 전체가 사라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가 중국의 한 지방, 소수민족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게 된다. 이미 칭키스칸의 대제국이었던 몽골과 몽고족은 중국과 전혀 상관없는 민족이지만 중국의 역사로 들어가 버렸다. 사실 중국 고유민족인 한족이 세운 나라는 별로 없다. 고조선 이후 한나라 ․ 당나라 ․ 송나라만이 한족이 세운나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저 나라들 말고 중국대륙을 차지했던 나라는 모두 중국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벌써부터 중국의 왜곡이 아무도 모르게 우리의 머릿속에 박혀있었던 것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내가 생각했던 현대 왜곡의 개념을 옛날부터 사용했다. 바로 일본서기라는 일본 최고(最古)의 역사서에 들어있다. 그 당시 기술력은 “한국 * (발톱의 때 * 새 발의 피 * 사막의 오아시스 * 로또 당첨확률 * 번개 맞을 확률 * 나와 지문이 같은 사람을 만날 확률) = 일본의 기술력” 이였는데 무려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고 한다. 물론 임나일본부가 한반도에 존재했기는 했지만 그것은 가야에 있던 일본인 사신들이 사는 곳이다. 게다가 임나일본부에 있던 사람들은 일본국왕보다 가야 왕의 말을 더 잘 들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백제가 칠지도를 무려 ‘받쳤다’고 한다. 그 당시 최최선진국에다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백제따위는 천을 걸치고 다니던 일본에게 칠지도를 ‘받치는’ 하찮은 나라라고 한다. 또 광개토대왕릉비에 있던 아주 유명한 글을 이렇게 해석했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 등을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는 훼손된 글자)).”

왜구들이 왜 저렇게 해석을 할까? 저게 왜색(倭色)인가? 이해를 못하겠다.

그리고 나오는 화제의 독도, 그들은 독도를 그토록 탐내는가? 사실 대한제국 까지도 독도를 한국 땅이라 인정했나니 러일전쟁 직후에 승리의 땅이라며 강제로 일본 땅으로 편입시켜버렸다. 그 후 2차 대전 패전 후 독도를 돌려받았지만 한번 먹으니 맛있다면서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재밌는 점은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그렇게 받고 싶어 하는 북방 4개 섬은 일본이 2차 대전 패전 후 러시아가 강제로 빼앗은 거라고 한다. 이 내용 왠지 뭔가와 비슷한데?

처음에도 말했지만 중국과 일본은 역지사지라는 단어를 모르는 듯싶다.

우리는 힘은 강하지만 결코 강하지 않다.

뭔가 말이 되면서도 말이 안 되는 듯 한 소제목이다. 말 그대로이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G20 안에 들 정도로 절대 약한 나라는 아니지만 우리주위에 있는 나라에 비해 우리는 한없이 약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리 맞고 저리 맞으며 역사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배운다고 한다. 현재는 과거에서부터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과거의 실수를 잃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보면 우리민족은 참으로 운이 없는 민족이다. 분명 우수한 민족인데 단군할어버지께서 위치를 잘못 잡으셨다. 옛날에 읽었던 책에서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다.

한국이 아프리카에 있었다면 지역의 맹주로 군림할 터인데, 하필이면 세계 4대강국(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을 뜻하는 것 같다) 주변에 위치하여 약소국의 설움을 받는다고 한다. 이는 공간적인 요인이 한 나라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중요한 요소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우리역사를 왜곡하게 되는 날이 올지 모른다.

우리가 역사 왜곡의 심각성을 모른다면 우리의 다음세대의 다음세대는 우리 고구려를 배우면서도 전 세계는 고구려를 중국역사,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세뇌될 때, 우리만이 진실을 알고 있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는 우리가 그들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일본과 중국의 교과서에 자신들의 역사라고 적어놓는다. 그리고 그 교과서로 배우는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세뇌를 당하며 당연히 ‘아, 이건 우리역사인데 저 밑에 조그마한 나라가 자꾸 자기 것이라고 우기네?’ 라며 애국심을 자극시키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배운 아이들이 자라서 진실을 알게 되도 그 진실을 부정한다. 그러면서 또다시 진실을 조작하면서 증거를 만들어 낼 것이다.

이러한 중국과 일본의 도발에 우리나라의 대응은 아직 미흡한 것 같다. 교과서에서도 고등학교는 근현대사를 중시한다. 우리나라의 특성상 중학교 때까지 실컷 놀고 본격적으로 공부하는 때는 고등학교이다. 그러면 자연히 고구려의 역사와 독도의 역사의 관심을 덜 갖게 되고 모르게 된다.

동아리 가입을 위한 과제로 시작했지만 생각만 하고 있던 역사왜곡을 글로 써보니 더 심각하게 느껴진다. 괜히 이렇게 써서 흔히 말하는 ‘뻘글’이 될까봐 걱정된다. ‘내가 너무 짧게 쓴 건가?’, ‘내가 너무 심각하게 쓴 건가?’, ‘내가 의도에 완전히 벗어나서 쓴 건가?’ 등의 온갖 생각이 떠돌고 있다. 역사 왜곡에 대한 내 생각을 중점적으로 쓰다 보니 자료가 없다고 문자가 오면 뭐라 할말이 없다.

동북아시아의 역사 왜곡ing = 동북아시아의 역사왜곡은 현재 진행형이다. 결코 현재완료형이 아니다.

by 초령목 2011. 5. 20.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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