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초령목 2012. 5. 23. 22:22

고조선 건국신화

하늘에서 환웅이 내려와 우리나라 태백산 부근에 자리를 잡았다.그 소식을 들은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와서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럳자 환웅은 100일동안 빛을 안보고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으면 인간으로 되게 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동굴밖으로 나갔고 곰은 사람이 되어 환웅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 곰을 웅녀라고 부르는데 이 웅녀가 아기를 낳는데 이아이가 바로 단군이다. 단군을 커서 고조선을 세운다.

 

부여의 건국신화(검색)

옛날 북방에 탁리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 왕이 사냥하러 나갔다 온 후 왕의 몸종이 임신을 하게 되었다. 몸종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왕이 죽이려 하자, 몸종이 말하기를 달걀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후 몸종이 아들을 낳았는데, 왕이 미워하여 아기를 돼지우리에 버리게 하였더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죽지 않게 하였고, 마구간에 버렸더니 이번엔 말이 또 입김을 불어 죽지 않게 하였다. 

이러하자 왕이 기이하게 여겨 아기를 그 어머니에게 기르게 하였으니, 그가 바로 동명이다. 동명은 성장하여 활을 잘 쏘았는데, 왕이 나라를 빼앗기게 될 것을 두려워 하여 군사로 하여금 동명을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남쪽으로 달아나 시엄수가에 이르렀는데, 탄식하며 활로 물을 치자 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놓아 주어 무사히 건너게 되었고, 그 길로 남쪽 땅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부여를 건국하였다.

 

고구려 건국신화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가 결혼을 하여 낳은 아들이 주몽이다.

유화가 자기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을 때 동부여의 왕 금와왕이 이 유화를 보고 자신의 궁으로 데리고 왔다.

유화가 궁에 있을 때 아이를 낳았는데 그게 알이였다. 금와는 안좋은 징조라며 돼지우리에 버리고, 직접 깨보려고 했지만 다 실패했다. 금와는 포기하고 다시 알을 유화에게 돌려주었는데 거기서 주몽이 태어났다.

주몽은 어렸을 때부터 금와의 사랑을 받고 자랐는데 커서 다른왕자은 주몽만 편애한다고 주몽을 죽이려고 했다.

유화는 그 얘기를 듣고 주몽을 도망치게 했다. 주몽은 마리, 협보, 오이와 함께 도망을 치다가 강에서 다른왕자들에게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나는 천제의 아들이고, 하백의 외손자다"라고 하니 자라들이 올라와 주몽이 강을 건너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주몽은 소서노와 결혼을 하여 고구려를 세우게 된다.

 

백제의 건국신화

고구려 동명왕(주몽)은 부여에 있던 예씨부인과 결혼하였다. 고구려에 있을 때는 소서노와 결혼을 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왕위를 물러받을 줄알았는데 부여에 있던 예씨부인의 아들인 유리가 고구려에 와버렸다. 그러자 비류와 온조는 자기들이 왕위를 물러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왕의 허락을 받아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 때 많은 신하들과 백성들이 따라왔다. 신하들이 지금의 서울부분에 나라를 세우자고 했다. 온조는 그말을 듣고 나라를 세우려고 했지만 비류는 자신은 바다쪽이 좋다며 미추홀(지금의 인천)에 나라를 세웠다. 이때 온조의 나라는 '십제'였다. 후에 다시 두 형제들이 만났다. 그런데 비류는 온조의 나라 백성들이 잘 사는 것을 보고 후회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나라는 습하고 짜서 곡식들이 자라지 않아 백성들이 못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류는 후회를 하고 자살을 하고 온조는 비류의 땅까지 차지하여 나라이름을 '백제'로 고쳤다.

 

신라의 건국신화

마한부분에 여섯마을의 촌장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들을 돌바줄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하늘에게 빌었다. 이에 그들이 높은 소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아래 나정 우물가에 번개불같은 이상한 기운이 땅에 닿도록 비치고 있었다. 흰 말 한 마리가 땅에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을 찾아가 조사해 보았다. 거기에는 알이 하나있었는데 알이 깨며 아기가 나왔다. 그러자 여섯마을 촌장들은 아기가 깨고 나온 알의 모양이 박처럼 생겼다고 해서 '박'씨로 지었고 이름을 혁거세라고 지었다. 아이가 크자 잘생긴 외모에 용맹함까지 있어 그를 왕으로 세웠다. 그리고 계룡의 옆구리에서 태어난 아기도 있었는데 이 아기의 이름을 알영이라 지었다. 박혁거세와 알영은 결혼을 하여 신라를 다스렸다.

 

가야의 건국신화(검색)

하늘에서 황금알 여섯 개가 내려왔는데, 국가가 되기전 가야지역의 촌장들이 모여 "거북아 거북아 네 머리를 내 놓아라. 안그러면 구워먹겠다"... 라고 하니 여섯개의 알이 깨어났고, 그 중 맨 먼저 수로왕이 나와서 가락국(금관가야)의 왕이 되고, 이어서 다른 다섯 개의 알에서 나온 사람은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가야 왕들 가운데 수로왕이 첫째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초기에는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가 연맹의 주도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로왕은 인도에서 온 공주와 결혼을 하고 150살이 넘도록 살았다.

 

통일신라와 발해의 건국신화는 없습니다.

 

고려 왕건의 탄생신화(검색)

왕건의 아버지 용이 한씨와 결혼하여 송악산 남쪽 기슭에 살림을 차렸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선(신라말 도참사상으로 유명했던 승려)이 그들을 찾아왔다. 도선은 용의 집앞을 지나며, 집터는 좋지만 방향이 틀렸어. 남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장차 왕이 될텐데... 말했다. 아내에게서 소식을 들은 용은 급히 도선을 쫓아갔다. 도선은 용건이 쫓아오자 그에게
"내가 일러주는 대로 집을 지으면 천지의 대수에 부합하여 내년에는 반드시 슬기로운 아이를 얻을 것입니다. 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왕건이라고 하십시오"
용은 그가 시킨 대로 집을 젓고 살았더니 그들부터 아내에게 태기가 있었고 열달뒤에 아이를 낳으니 아이가 바로 태조 왕건 이었다

 

조선 건국신화(검색

이성계는 고려시대의 무장이였다. 아버지 이자춘이 공을 많이 세워서 자신에게 그것들이 모두 돌아갔다.

이성계가 왕이 될것을 처음 알려준 것은 무학대사이다. 서까래 세개를 짊어지고 나오는 꿈을 꾼 이성계는 무학대사에게 찾아가 꿈 해석을 부탁했는데 무학대사는 그것이 왕이 될 징조라고 했다.

그리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통해 조선이 건국되었다.





지식인에서 이런 질문이 맨날 올라오길래 내가 만들어서 펴뜨려졌는데 원작자를 못알아보는 사람들이 어디서 봤다고 욕먹는다. 아 슬프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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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 창세가  (0) 2011.08.28
by 초령목 2012. 5. 21. 20:23

【제9회 전국 중․고등학생 우리역사 바로 알기 대회 조사보고서】

조선시대의 자기주도학습에 대한 조사

- 과거의 교육에서 오늘날 교육문제를 풀다 -

(제출일) 2011. 5. 30

(작성자 성명) 이 경희

(지도교사) 이 미영

대구 OO고등학교 O학년


주제 선정 이유

지난 2010년 필자는 가족과 모처럼 여행을 갔다. 전적으로 필자의 의견에 따라 이른바 ‘향교여행’을 떠났다. 대구향교를 시작으로 여러 서원을 거쳐 현풍향교로 끝을 맺는 이 여행에서 아직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곳도 많았으나 존재는 하지만 내비게이션으로 검색을 하면 전혀 다른 곳으로 안내를 하는 서원도 있었다.

이렇게 되자 이름뿐인 문화재로 방치되어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필자는 답사이후 대구의 조선시대 교육기관들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게 되었다. 우리는 대구향교라는 곳만 알뿐 나머지 서원, 서당 등은 전혀 알고 있는 것이 없지 않는가? 이에 필자는 대구시의 향교, 서원, 서당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조선시대 교육기관을 조사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외침과 내분의 상황에서도 국가를 이끌어 나간 인재들이 어떠한 교육을 받았는지 궁금하였다.

세계화라는 흐름 속에서 무한경쟁에 빠져있는 대한민국을 보며 인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다행히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전 세계와 비교를 해보아도 손색이 없고 이를 증명하듯 전국에 수많은 학교와 학원이 있다. 하지만 이 교육열과는 모순되게도 정작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인재는 부족한 듯 보인다. 조선에서는 어떻게 인재가 계속 출연할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은 이 물음에서 나왔다.

조사 진행 절차

① 향교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대구시의 향교와 서원을 답사했다.

(대구향교-칠곡향교-현풍향교로 가던 중 있던 여러 서원들)

② 대구시의 교육기관에 흥미를 느껴 대구시 조선시대 교육기관에 대해 조사를 해보게 되었다.

③ 대구시 조선시대 교육에 대해 조사를 해보니 조선 전체의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어 조선시대 여러 교육기관과 교육내용을 조사하였다.

④ 오늘날의 교육에는 인재를 보기가 힘든데 조선시대 당시에는 인재가 끊임없이 나왔다는 것에 흥미를 느껴 주제를 오늘날의 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조선시대 교육이 해결해 줄 거란 믿음으로 주제를 바꿨다.

내용 요약

현대의 교육과 조선시대의 교육에서 목적과 내용을 살펴보고 그 차이점을 찾아 현대의 교육문제를 풀고자 한다. 현대에는 경쟁심리로 인해 자율적으로 연구하는 것보다는 타율적으로 밀려서 공부하게 되는 경우가 많으며, 정작 깊이있는 연구가 필요한 대학교 시절에는 자율성을 놓아버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공부를 하더라고 아는 즐거움보다는 불안감과 강박증에 많이 시달렸기 때문이다. 즉, 자기주도학습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율적으로 공부를 하는 자기 주도적 학습이 공부에 훨씬 도움 된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경쟁심으로 인한 타율적인 학습은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는데 방해가 되는 존재이다. 그에 반해 현대보다 훨씬 가난했던 조선시대에는 인재의 대가 끊이지 않고 계속 나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조선시대의 교육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조선시대가 양난이후에도 망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조선이 인재양성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조선 태종대에 전국에 빠짐없이 향교를 설립했고, 성균관, 사부학당 등을 설치했다. 군주들의 그 같은 관학교육 진흥책에 의해 조선왕조는 비교적 빠른 기간에 많은 인재를 확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 각지에 초급교육기관인 소규모 서당들이 설립된 것도 인재양성에 큰 기여를 했다.

조선은 ‘교육열’보다 ‘학습열’이 높았던 것이다. 조선 시대의 공부는 참된 ‘나’를 찾아가는 긴 도정이며, 공부를 통해 인간의 마음에 있는 참된 본성을 회복하고 성인의 세계에 이르고자 하는 치열한 자기극복의 과정이었다. 즉, 공부는 ‘나아감’과 ‘물러섬’에 대한 고민이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는 성균관, 향교, 서원, 서당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들은 각각 기능은 달라도 제사와 인재육성이라는 뜻에는 일맥상통이었다. 성균관은 국립중앙대학이고, 향교는 국립지방학교이며, 서원은 사립지방학교였다. 그들의 교육은 대체로 스스로 공부를 하게 만들도록 도와주었다.

그 중 서원은 경상도 지역에 밀집돼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한국 5대서원이 경북에 있고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살아남은 서원이 가장 많은 곳도 경상도였다. 대구와 경북지방은 유교적인 정신이 널리 퍼진 지역이었다. 경북지방에 널리 퍼져있었던 서원도 유교정신이 퍼져 있었다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또 주목해야 할 것은 유교적인 씨족마을 즉 종가가 경상도 지역에 2/3이나 밀집되어있다는 것이다. 유교는 충·효·예·의를 강조하는 학문이다. 또 씨족마을은 대체로 양반들이 모여 살았다. 그 당시 양반들은 향약을 통해 유학을 보급하던 중심세력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자제들에게 유교정신을 강조하고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많은 인재들이 경상도에 나올 수 있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교육에 대해서는 여러 말들이 많다. 우리는 이러한 교육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그 해답은 조선시대의 교육문화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 교육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경상도, 더 나아가 대구에 살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선조들의 뜻과 지혜를 배워 대한민국의 인재로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목 차

Ⅰ. 서론 ……………………………………………………………… 1

Ⅱ. 본론 ……………………………………………………………… 1

1. 현대의 교육 ……………………………………………………… 1

1) 현대의 교육열

(1) 한국의 교육열

(2) 대구시의 교육열2) 현대의 교육목적

3) 현대의 교육내용

2. 조선시대의 교육 ……………………………………………………… 3

1) 조선시대의 교육열

2) 조선시대의 교육목적

3) 조선시대 대구의 교육기관

(1) 꿈의 대학 성균관

(2) 글의 문리를 깨우치던 서당

(3) 정치 참여의 길을 찾던 서원

(4) 관리의 꿈을 키우던 향교

대구향교

현풍향교

4) 조선시대의 교육내용

3. 조선시대와 현대의 교육 비교 ……………………………………… 12

Ⅲ. 결론 ……………………………………………………………… 13

Ⅰ. 서론

대학(大學), 큰 교육이라는 뜻과는 무색하게도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의 의미가 달라져있다. 대학은 단지 직업을 갖기 위한 한국만의 하나의 이력, 자격증에 불과하다. 대학 진학률이 80%에 달하지만 정작 공부를 하려고 대학에 들어가면 공부를 하기보다는 아르바이트로 시간을 쪼개가며 대학 등록금을 내기에 더 바쁘다. 이런 대한민국의 교육현실에서 우리가 인재를 기대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흔히 말하는 SKY에 입학한 학생들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들은 스스로 공부하며 자기만의 공부법을 터득했다고 한다. 그들은 타율적인 교육보다는 자율적인 공부를 강조한다. 학부모들은 그들의 말을 들으며 혹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아이에게 학원이니 과외니 하며 사교육을 부추기고 있다. 학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의 경쟁과 이기기를 원하며 타율적인 공부를 하는 학원에 등록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부모를 이기지 못하고 타율적인 공부를 강제로 하고 있다. 그들의 성적은 오를지 몰라도 학부모들은 이런 공부로 자신의 아들을 국가가 원하는 인재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우리나라를 인재부족국가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생각을 해보자. 우리보다도 훨씬 가난했던 조선시대에는 적어도 세도정치 전에는 인재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끊임없이 나왔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Ⅱ. 본론

1. 현대의 교육

1) 현대 교육의 목적

얼마 전 필자는 교육과학기술부 사이트를 둘러보다가 메뉴에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다. 우리나라의 교육이념을 찾을 수 없었다. 예로부터 내려온 ‘홍익인간’의 교육이념은 세계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은 이념이지만,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그 이념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공부해서 좋은 직장을 가져야 남들만큼, 아니 남들보다 잘 살수 있다는 부모들의 교육은 과도한 경쟁을 부르고 급기야 우리나라가 교육목표를 잃은 것조차 인식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이런 시대에 정말 필요한 교육이념은 무엇일까? 나 혼자 잘 살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여 함께 잘 살기 위한 공부. 바로 ‘홍익인간’이 아닐까?

2) 오늘날 한국의 교육열

리나라의 학구열은 OECD 평균 사교육비와 한국의 사교육비를 비교하는 통계 1을 봐도 알 수 있다. OECD 평균은 0.7%인데 반해 우리나라 평균은 2.9%로 4배가량 더 높았다. 이에 반해 공교육비 지출은 GDP 대비 4.2%로 OECD 국가 평균(5.1%)에도 못 미쳐 대조를 이뤘다. 사교육비 지출이 많은 탓인지 OECD의 국제학력평가에서는 읽기(2위),수학(2위),과학(3위) 등 모든 영역에서 최상위 수준을 보였다.

사교육비에 많은 돈을 쓰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나라가 경쟁사회이기 때문에 남들에게 적어도 뒤쳐지진 않기 위해 자연스럽게 교육열이 높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를 증명하듯 통계 2을 보면 많은 학생들이 사교육에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있으며 매년 사교육 규모가 커지고 있다. 또 필자가 참고로 들고 온 통계 2에 생략된 부분을 보면 우리나라 학생은 여러 과목들을 사교육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구시의 학구열은 오늘날의 과거급제자라고 부를 수 있는 서울대 합격자 배출한 고등학교를 전국의 고등학교와 비교해본다면 알 수 있다. 1999-2008까지의 전국 고등학교 서울대학교 합격자 수 누적 통계를 보면 서울·경기 지역을 제외한 非수도권 순위를 비교해보면 1위 포항제철고등학교(209, 전국 14위)와 3명차이로 2위에 경신고등학교(206, 전국 15위)가 위치해있다. 또 전국 고등학교의 서울대 배출 100위권에 대구 고등학교가 8개나 있었다. 이는 대전(7), 부산(4), 광주(2), 인천(2), 울산(1)보다도 많은 수치였다.

대구시 교육열의 완전체를 보여주는 수성구는 대구의 강남이라 불릴 정도로 전국적에서 인정할 만큼 유명하다. 옆의 그림 1을 보면 수성구 일반계고의 졸업생 합격자 수가 지역 평균의 2배를 넘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더 눈에 띠는 것은 수성구 사교육이 대구시의 평균의 약 1.5배에 달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교육덕에 많은 학생들이 보다 좋은 학교로 진학을 할 수도 있겠지만,

학생들은 과도한 학습량 속으로 내몰리고 학습의욕을 잃게 된다. 또한 부모들은 교육비 충당을 위해 가정교육에 소홀할 수도 있다고 본다. 이것으로 국가가 원하는 인재를 얻을 수 있을까?

3) 현대 교육의 내용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걸 배워서 어디에 써 먹어?’이다. 이는 학문을 통해서 길러지는 인성보다도 학문자체의 지식을 평가하고 채점하는 부분에 중요성을 둔 잘못된 결과이다.

또한 근대의 학문은 전공분야별로 세분화되어 그 내용은 깊어졌으나 전공분야간의 통합을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숲 속의 나무를 하나씩 들여다보다가 숲을 보는 안목을 기를 수 없었다. 현대에 와서 통합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제시되고는 있지만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본다.

2. 조선시대의 교육

1) 조선시대 교육의 목적

가만히 생각하오니, 인재는 정치를 잘하게 하는 본원이요, 학교는 사람을 만드는 터전입니다. 그러므로 역대에서 모두 이것을 중하게 여겼으나, 예로부터 학교가 흥왕할 때와 퇴폐할 때가 있고, 인재가 풍성하고 쇠잔할 때가 있음은 모두 일으킴과 양성함의 여하에 달린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5년 8월 22일

선왕조가 임진왜란의 엄청난 타격을 입고도 망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조선왕조가 세계 근세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518년이라는 장구한 수명을 견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사람의 수명은 육체의 건강에 의해 좌우되고, 건강은 건전한 정신에 의해 보장되는 법이다. 병들고 썩은 정신에서 건강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나 국가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조선왕조의 기적적 현상은 건전한 정신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올바른 교육에 의해 건전한 가치관을 지닌 인재를 부단하게 양성한 것이 토대가 되었다.

조선왕조는 신왕조 개창의 명분과 이념을 유학에 뿌리를 둔 성리학(性理學)에 두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한 국가 체제 확립은 왕조의 존립을 좌우하는 시급한 과제였다. 조선왕조가 건국 초부터 이를 구현할 수 있고 폭넓게 보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재 양성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에는 고려왕조의 멸망이 지식인의 양성은 등한시한 채 소수의 문벌귀족들만 권력과 부를 세습함으로써 초래된 것이라는 인식도 작용하고 있었다.

문무(文武) 두 과거(科擧)는 한 가지만 취하고 한 가지는 버릴 수 없으니 중앙에는 국학(國學)과 지방에는 향교(鄕校)에 생도(生徒)를 더 두고 강학(講學)을 힘쓰게 하여 인재를 양육하게 할 것이다. 그 과거(科擧)의 법은 본디 나라를 위하여 인재를 뽑았던 것인데, 그들이 좌주(座主)니 문생(門生)이니 일컬으면서 공적인 천거로써 사적인 은혜로 삼으니, 매우 법을 제정한 뜻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1년, 7월 28일

태조는 즉위 원년(1392) 전국의 모든 고을에 빠짐없이 향교를 건립하여 지방학생을 교육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1398년에는 성리학적 이념 강화와 고급인력 양성을 위해 개성과는 별도로 서울에 성균관을 건립했다. 태종도 각 고을에 파견되는 수령들이 학교교육에 매진하도록 하기 위해 그것을 그들의 근무성적에 반영하는 조치를 취하고, 서울에 다시 사부학당을 건립했다. 군주들의 그 같은 관학교육 진흥책에 의해 조선왕조는 비교적 빠른 기간에 많은 인재를 확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 각지에 초급교육기관인 소규모 서당들이 설립된 데다. 향교와는 별도로 사립 중등학교인 서원이 속속 건립되어 학생들은 인격 함양과 함께 과거시험을 위한 다양한 학문을 전수받을 수 있게 되었다.

2) 조선시대의 교육열

오른쪽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성균관 기숙사 앞에는 돌이 하나 있다. 이 돌은 유생이 시험을 잘못 보았을 때 올라가 스스로를 견책하는 돌이다. 성적이 잘 안 나왔을 때 이 돌에 올라가 자신의 종아리를 쳤다고 하는데 이것은 가장 수준 높은 교육인 자율 교육을 실행에 옮긴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은 교육열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사회였다. 선비 한 사람 한 사람은 치열한 구도자처럼 학문에 열중했으나, 수만 장의 고문서를 뒤져도 교육열로 지금처럼 사회적 물의가 일어난 예는 발견되지 않는다. 향교는 언제나 비어 잡초가 무성하고, 성균관은 생원들을 불러 모으기에 급급했다. 서당에서 훈장들은 아동들을 열심히 지도했으나, 치맛바람이 일어나거나 학력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길러내지도 않았다. 조선은 ‘교육열’보다 ‘학습열’이 높았던 것이다. 조선 시대의 공부는 참된 ‘나’를 찾아가는 긴 도정이며, 공부를 통해 인간의 마음에 있는 참된 본성을 회복하고 성인의 세계에 이르고자 하는 치열한 자기극복의 과정이었다. 즉, 공부는 ‘나아감’과 ‘물러섬’에 대한 고민이었다는 것이다.

퇴계 이황, 순암 안정복을 비롯해 화담 서경덕, 남명 조식, 교산 허균, 다산 정약용. 책이 다루고 있는 6인의 선인은 자기만의 방법론으로 공부를 했지만 공통점을 갖고 있다. 남명 조식이 남긴 글을 보자. “살아있는 법은 모름지기 마루 아래 수레바퀴 깎는 사람이 이해했나니, 다섯 수레 책의 의미도 무사(無邪)한 가지 속에 있었네.” 모든 공부는 삶과 함께 해야 사심이나 악의가 없다는 뜻이다. 화담 서경덕은 “멈출 곳에 멈추는 방법을 찾는 것이 공부”라고 말했다. 그의 시조 ‘술회(述懷)’에는 이런 공부철학이 잘 드러난다.

책 읽던 그 옛날엔 세상 다스리는 일에 뜻도 두었건만

달을 노래하고 바람을 읊으니 정신이 맑아지네.

공부가 의심하지 않음에 이르니 쾌활함을 알게 되고

헛되이 백 년 사는 사람만은 면하게 되었네.

화담 서경덕 “술회(述懷)”

이황은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철학담론만을 일삼았다는 오해도 받고 있지만 그의 일기와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무엇보다도 일상의 삶을 중요시했고 유혹이 많은 일상을 지키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식은 ‘목이 빳빳한 선비’라는 평가를 받으며 세상과 한 발짝 떨어져 지냈지만 세상을 향한 고민을 져버린 적이 없었다. 역사의식과 실천을 중요하게 여기며 공부가 공허해지지 않는 길은 결국 세상을 품는 마음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허균은 당대에 ‘세상과 불화한 자’라는 평가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과감히 관념에 맞서 인간을 감성과 미학적 상상력의 대상으로 바라보려 했다. 안정복은 공부를 여공(女工)의 '공(工)'자와 같고 부(夫)자는 농부(農夫)의 ‘부(夫)’자와 같아 여공이 부지런히 길쌈을 하고 농부가 농사에 힘쓰듯 공부를 해야 한다고 풀이했다. 다산 은 이론적인 앎과 실천적인 익힘이 동시에 이뤄져야 참된 앎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3) 조선시대 대구의 교육기관

“사람의 도리를 익혀 자기 몸에 젖게 한 뒤에 부드러운 모습으로 남을 가르쳐서 마치 하얀 종이에 물이 스며들듯이 상대방의 마음속에 가르침이 젖어들게 하는 사람”위의 글이 유교의 기본이념인 유(柔)·유(濡)·윤(潤)이다. 유(濡)는 스며들다·젖다의 뜻이며, 윤(潤)은 (물에 젖어) 붇다·윤택하다는 뜻이다. 세 글자 모두 '젖다'와 관련이 있는데 이것은 곧 옛 어진 이가 가르친 도(道)를 배우고 익혀서 자기 몸에 젖게 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을 유라고 했고, 유에는 '선비', '학자'라는 뜻도 들어 있다.

선시대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 중심의 사회이다. 또 유교에서는 교육이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이 매우 컸던 만큼 이를 위한 교육제도 역시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조선에서는 그런 교육기관으로 국립학교인 성균관을 시작해서 사부학당, 향교, 서원, 서당 등이 있었다. 각각 이름은 다르나 공자를 향해 제사를 지내는 석전제와 유교를 배워 역사에 남을 위인을 배출하자는 인재양성에서는 그 뜻이 일맥상통 이였을 것이다.

대구·경북의 교육기관을 예로 든다. 앞으로 나올 표는 경북으로 범위를 확대하면 문화재가 너무 많아져 대구시 문화재 현황만 나타낸다.

(1) 꿈의 대학 성균관

균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은 유생(儒生)으로 불렸으며, 이들의 생활은 엄격하고도 질서 있는 것이었다. 유생들의 하루 일과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경전을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였으며, 특히 유교를 공부하는 학생으로서의 명예를 소중히 여겼다. 책을 읽을 때에는 그 뜻을 명확하게 이해하여 그 속에 들어있는 깊은 뜻을 깨달을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하였다. 그들은 일상생활 속에서도 윤리도덕을 철저히 지키며 교수에게는 깍듯이 예의를 갖추는 등 국가의 장래를 맡아 나갈 인재로서 소홀함이 없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성균관에서는 공부하는 게 수월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외출은 잘 되지 않았던 반면 시험은 한 달에 30회 이상이었다니 수험생들의 스트레스가 대단했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나라에서 대주고 공부만 시키는데 학생들을 나태하게 내버려 둘 수 없었을 겁니다. 학생들은 그야말로 밥 먹고 공부만 한 것 같습니다”

이 글에는 우리나라의 쉬지 않는 근성과 입시 스트레스가 이미 조선시대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최고 국립대학이었던 성균관은 군역을 면제해주고 먹이고 재워주며 간간히 용돈도 주었다고 한다. 적어도 공부를 하는데 불편함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오늘날의 학생들은 대학에 가서도 생계걱정을 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시대는 뒤떨어져도 공부환경만은 지금의 대한민국보다는 좋았던 것이다.

(2) 글의 문리를 깨우치던 서당

당은 지금의 초등학교와 비슷한 입문 단계의 사설 교육기관이었다. 서당교육은 밑의 서원교육과 상호 연결되었으며, 일년 내내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하과와 같은 특별 교육 활동이 중심을 이루었다. 서당은 관료로의 진출을 위한 일종의 예비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교육 방법은 이미 배운 글을 소리 높여 읽고 그 뜻을 질의 응답하는 방법인 강(講)으로, 암송 낭독하는 배강(背講)과 책을 보고 낭독하는 면강(面講)등이 있었다. 학동의 능력에 따라 완전 학습을 지향하였으며, 글의 문리를 깨치는 방법에 주력하였다. 계절에 따라 교과 내용을 달리하고, 학동의 연령에 맞추어 놀이를 통한 학습방법을 시행하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서당교육에 관한 여러 가지 진흥책을 펼쳤으나, 조선 말기에 이르러 점차 서당의 교육 내용이 부실하고 형식에 그치게 되었다. 결국 서당은 나름대로의 교육적 기능에 앞서 문자를 해독하는 교육 수준에 그치다가 19세기 말에 이르러 근대화 정책의 흐름에 따라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대구에서는 문화재 등록된 서당은 성재서당, 독암서당, 고산서당으로 총 3개이고 경북은 도산서당 등 총 7개이다.(문화재 등록)

종목

명칭

소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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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9호

성재서당 盛才書堂

대구 동구

인천채씨성재종중

2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2호

독암서당獨岩書堂

대구 동구

최웅태외 4명

3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5호

고산서당孤山書堂

대구 수성구

서병연

(3) 정치참여의 길을 찾던 서원

원은 사립지방학교이다. 서원에는 성균관이나 향교처럼 사당이 있는데 그 전체 구조는 향교와 같다. 공부하는 강당이 가운데에 있고 기숙사는 강당 양쪽에 위치한다. 그리고 사당은 강당 뒤에 있는데 이런 구조가 여느 향교와 같다는 것이다. 이 서원은 자기들이 표본으로 하고 싶은 스승을 모셔야 하니 이 스승의 연고지에 세우게 된다. 이 점과 관련해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그 스승이 생존 시에 자신을 모시고 있는 서원을 세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서원이 독자성을 갖고 정착하게 된 주요 계기는 퇴계 이황에 의한 서원 설립운동이었다. 그는 교화의 대상과 주체를 일반 백성과 사림으로 나누었다. 그러면서 실효를 거두기 위해 우선 도학(道學)을 천명하고 이를 밝혀야 한다고 하였다. 퇴계는 이를 담당할 주체를 사림(士林)으로 보고, 이들의 습곡을 바로 잡아 학문의 방향을 올바르게 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서원의 독자적 역할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한 셈이다. 퇴계는 이같이 향교에 의한 관학 아카데미즘의 한계를 지적하고, 이후 많은 서원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서당의 교육은 성리학적이고 도학적인 것이 중심을 이루었다. 관학과 달리 서원 교육은 사학 특유의 자율성과 특수성이 존중되었다. 교육 방법은 원규에 의한 규제와 원생 자신의 자율적인 실천 및 학습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 졌다. 교수 방법으로는 배운 글을 소리 높여 읽고 의리를 문답하는 강(講)이 기본이었다. 오늘날의 경우처럼 원생들의 출석 여부를 확인하고 학업 성적을 평가하며 독서 지침을 마련하기 위한 생활기록부도 있었다.

종목

명칭

소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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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보물  제350호

도동서원강당사당부장원道東書院講堂祠堂附墻垣

대구 달성군

서흥김씨종중(유림)

1-2

사적  제488호

도동서원道東書院

대구 달성군

달성군(달성군수)

3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1호

예연서원禮淵書院

대구 달성군

포산곽씨문중

4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호

귀암서원숭현사龜岩書院崇賢祠

대구 북구

달성서씨대종회

서당의 제향의 봄과 가을에 치르는 엄격한 향사는 선현을 통해 바람직한 인간상을 제시하는 행사였다. 향사에 참례하는 자격을 정하고 사람을 뽑는 절차도 사회 교육적 의미가 있었다. 제향기능은 선현을 모시는 사묘(四廟)의 역할이다. 서원에 배향하는 인물은 향촌사회를 교화하기 위해 학덕이 크게 뛰어나거나 충절과 의리로써 모범이 될 만한 경우에 한정하였다. 조선 왕조는 이에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서원의 설립을 지원하였다.

대구시의 서원은 3개이고 경북지역의 서원은 12개이다.(문화재 등록)

대구·경북에는 서원이 많았다. 명종 19년(1564) 연경서원이 처음 건립된 이래 향촌 유생들을 중심으로 서원건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후 대구에서는 1605년 김굉필을 제향한 이 도동서원이 설립된것을 비롯해 이강서원, 구암서원, 표충사, 예연서원, 낙빈서원 등 많은 서원들이 건립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나라의 5대 서원인 병산서원(안동), 도산서원(안동), 소수서원(영주), 옥산서원(경주), 도동서원(대구)이 모두 경북지방에 있다는 것이다. 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살아남은 47개의 서원 중 14개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서원이 살아남은 곳이 경상도에 위치해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경북지방이 교육을 중시하며 인재양성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4) 관리의 꿈을 키우던 향교

교는 성균관의 하급 관학(官學)으로서 유교문화 위에서 설립·운영된 교육기관으로, 국가가 유교문화이념을 수용하기 위해 중앙의 지방에 세운 국립지방학교이다.

향교의 연원은 유교문화이념이 소개되는 때부터 비롯되지만, 향교가 적극적으로 설립된 것은 숭유억불과 유교문화이념을 정치이념으로 표방한 조선시대부터이다. 조선왕조는 유교문화이념을 수용하여 지방 사회질서를 유교문화 논리에 접목시키며, 과거제 운영을 유교 교육과 연계시키려 했다. 이러한 사회문화의 기초기구로서의 기능을 담당한 것이 향교이다. 따라서 국가는 군현제(郡縣制)의 정비와 함께 지방 수령들에게 향교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보호·육성을 촉구했으며, 이를 위한 재정적 지원도 적극적으로 했다. 따라서 향교는 지방 수령의 책임 하에 그 운영이 활성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수령의 적임자조차 부족한 상황 하에서 교관까지 선임한다는 것은 여의치 않았으므로, 교관의 파견이 법제도대로 활성화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제적 조치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생원·진사 또는 경학 지식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라도 관리를 선발하여 임시로 교관직에 보임하려고 노력했다. 이처럼 조선왕조는 향교 교육을 위해 여건의 불리함을 감수하면서도 교관의 파견에 많은 노력을 했다. 이는 조선왕조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널리 보급시키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향교의 기능은 첫째 교육을 통해 백성을 문맹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큰 목적과 둘째 지역전통문화활동의 근거지로서의 선도역할과 셋째 공자님을 위시한 여러 성현군자와 큰 스승을 모셔 제례를 올림으로써 예절의식을 널리 확산하고, 도덕적 인간상 구현 및 각인의 자아성취와 바람직한 행동의 변화를 추구하는 교육 목표를 분명히 하였다.

종목

명칭

소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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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

대구향교대성전大邱鄕校大成殿

대구 중구

대구향교재단

2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6호

칠곡향교대성전漆谷鄕校大成殿

대구 북구

칠곡향교

3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7호

현풍향교대성전玄風鄕校大成殿

대구 달성군

경북향교재단

향교는 전국적으로 설치되었던 공립학교이기에 경북을 비롯한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하고 있다.

① 대구향교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신라 이래의 불교 정책을 억제하고 일상 생활 예절의 근본이 되는 유학을 널리 펴고 백성들을 무지로부터 해방하여 단군의 개국이념인 홍익인간을 실현하고자 국민교화정책을 펼쳤다. 그래서 1398년에 전국 234개 군현에 향교를 세웠다. 대구향교도 태조의 정책으로 이때 생겨난 학교이다.

현재 중구 남산동에 자리하고 있는 대구향교는 일제시대인 1932년 이전된 것이다. 이전 당시 대성전 등 기본 건물을 갖추었으나 생도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는 건립하지 못했다. 이는 당시 대구 유림단의 항일운동이 격심하여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활용될 것을 우려한 일제의 방해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해방 후에도 서구

식 교육이 지배하는 경향으로 인해 이들 건물은 건립되지 못하다가, 1990년에서야 비로소 동재·서재가 낙육재와 함께 건립되기에 이르렀다.

② 현풍향교

현풍향교의 설립연도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던 것으로 봐서 조선전기에는 설립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諸生의 先祖와 先父도 이 誠意였으니 대대로 하나같은 誠意가 金石이라도 가히 뚫을 것이니 그런 까닭에 끝까지 옮긴 후에 말게되니 지금은 학교를 옮길 것이니 진실로 능히 학교를 옮기는 誠意를 自家의 工夫에에 옮긴다면 誠意가 이르는 곳에 어떠한 일이라도 이루지 못하리요. 낮이나 밤이나 修業하여 뜻을 돈독히 하고 행도에 힘써서 항상 前賢에 이르지 못함을 羞恥로 삼아 勉勉이하여 마지아니한다면 지금의 어지러운 것이 특별히 옛날의 鄒魯之鄕이 된 데로 변하여 곧 風習을 옮기어 學校를 옮기기를 같이 하면 자못 손바닥을 뒤엎는 것 보다 더 쉽게 이르게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을까 만약 학교를 옮기는데 정성을 쓰고 爲己에는 精誠을 쏟지 않으면 依然히 這般의 사람이 학교를 비록 옮겼다 하더라도 옮기지 않음과 같으니 舊基의 좋은 것을 그 능히 夫人으로 하여금 알게 할까 果實이 나무에 있어 따지 않으면 입에 들이지 못하는 것은 常理인 것이라 하여 諸生들이 일어나서 대답하여 왈 삼가이 命令을 듣습니다 라 하거늘 이에 記文을 지었노라.

                        己卯(서기1759 英祖35)年 초여름 하순에 태수 김광태 지음

위의 글이 현풍향교의 김광태기적비에 새겨진 내용이다. 김광태가 1749년에 향교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낡은 현풍향교를 이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4) 조선시대의 교육내용

조선시대는 성리학이라는 학문을 중심으로 발전한 나라이다. 성리학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인간 자율성이 확대해 온 철학의 자취’이다. 이것이 조선시대의 철학이며 이 철학은 인간 자신의 의지와 실행력에 초점을 맞춰진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즉 인간의 자율성이 성리학을 발전시켰다는 뜻이 된다. 또 성리학은 우주의 생성 원리와 인간의 선천적 본성을 종합적으로 탐구하는데 이는 우리 인간을 하나의 부분이 아니라 우주전체와 관련지었다는 뜻이다. 조선은 알다시피 유교의 나라였다. 유교는 충·효·예·의 정신이 강조되었을 것이고 이러한 인성교육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학생들의 정신적인 성숙을 이룩했다. 유교는 이러한 수기치인(修己治人)을 기본이념으로 하고 있는데 개인의 도덕적 수양에서 출발하여 다른 사람에게까지 그 영향을 끼쳐 결국 사회 전체가 유교적 가치에 동화되는 이상적인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그런데 유교적 소양을 갖춘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유교 경전 및 역사에 해박하고 문장을 잘 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즉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지름길이자 유일한 길이었다. 결과적으로 과거시험을 통한 입신양명(立身揚名)은 유교의 핵심적인 실천 윤리인 효(孝)를 실천하는 것이었고, 관리가 되어 임금을 보좌하여 국가를 잘 운영하는 것은 충(忠)의 구현이기도 하였다.

3. 조선시대와 현대의 교육 비교

현대와 조선시대 교육의 가장 큰 차이는 자율적으로 공부를 하는 자기주도적 학습을 하느냐이다. 현대에는 자율적인 학습보다는 타율적으로 강제로 공부를 시키며 ‘공부 하는 이유’를 이해시키지 못한다. 게다가 그 높은 교육열에도 불구하고 그 교육열을 경쟁에 이기기 위해 사교육이라는 것으로 학생들에게는 ‘강제’교육에 불과한 타율적인 학습에 쓴다는 것이다. 현대 학생들은 학문자체의 ‘지식’을 배우고 있지 그 학문이 진정으로 원하는 ‘정신’으로 길러지는 인성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또 현대에는 공부를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조선시대와 비교를 할 때 공부의 효율 면에서 떨어지게 된 이유이다.

이에 반해서 조선시대는 어릴 때부터 유교적 정신을 통해 익혀온 인성교육이 그들이 자율적인 공부를 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그 높은 교육열을 독서와 자기 성찰로 시간을 보냈다. 이것은 꽉 막힌 현대의 도시생활과 비교해서 확 트인 자연경관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런 자연경관을 보며 마음을 가라앉히며 책을 읽어 집중력도 향상 시켰을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학문을 ‘지식’으로만 보지 않고 실천을 하는 ‘정신’으로도 보았다. 그것이 그들이 존경하던 공자와 맹자가 강조하던 것이기 때문이다. 또 조선시대에는 공부를 하나의 놀이 ‘문화’였다. 당시 경쟁심은 서로에게 상호작용을 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서로에게 시를 짓고 읊으며 칭찬을 하거나 지적을 했다. 그러면서 서로의 우정과 학문의 깊이는 깊어져만 갔다.

Ⅱ. 결론

알다시피 조선시대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 국가였다. 유교는 무엇인가? 인(仁)과 예(禮)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적인 학문이다. 그런데 성리학이 무엇인가? 인간의 본성을 공부하는 존재의 의미를 알기위한 철학적인 학문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의미를 찾기 위해 항상 책을 읽고 또 읽었다. 또 교육과 인재양성을 위해 전국적으로 향교를 세웠다. 그곳에서는 공부도 했겠지만 인성교육도 했다. 조선인들은 인성교육을 통해 충·효·예·의를 배웠다. 어쩌면 이런 성리학적 이념과 인성교육을 통한 정신적인 자세가 조선을 인재의 바다로 만든 결정적인 이유가 아니었을까?

우리나라는 사교육에 의존한 타율적인 공부를 하는데 반해 조선시대는 이미 500년 전부터 자율적인 공부를 하고 있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자율적인 공부가 훨씬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이미 증명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학원이라는 사교육에 목을 매달리고 있다.

한 시사프로그램에서 학원들이 학부모들을 유혹하는 실태에 대해 몰래 조사해봤다. 그런데 황당한 결과가 나왔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미국인들과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한데다 영어대회에서 여러 상을 탄 한 학생을 위장시켜서 학원 레벨테스트를 봤더니 그 아이 수준에는 터무니없이 낮은 레벨이 나왔다. 그리고는 학부모에게는 “이 정도는 부족하다. 이 상태면 다른 아이들에게 많이 밀릴 것이다.”라며 학부모님들의 걱정과 불안을 심화시키고 있었다. 이것이 요즘 학원의 폐단이라면 폐단이다. 어떻게든 돈을 벌기위해 학생들을 끌기위해 학부모의 불안 심리를 이용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그런 자율적인 공부는 인성교육에서 나왔다. 그런 인성교육은 어디서 나왔는가? 물론 조선이 유교 국가이기에 어디서든 배울 기회가 많았겠으나 대개는 가정에서부터 배웠다. 요즈음 부모들은 너무 자식들을 사랑한다는 구실로 너무 오냐오냐하며 키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정녕 자식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에게 인성교육을 접할 기회를 주어야 할 것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옛 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안다. 이것이 무엇인가? 조선시대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조선시대=옛날 것, 오래된 것,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조선시대의 것 중 뛰어난 것이 있다면 받아들이는 게 당연하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런데 오히려 현대에서 그런 실수를 하고 있다면 우리는 과거를 통해 배워야 하지 않을까?

참고자료

조선왕조실록

대구·경북역사연구회 - ‘역사속의대구, 대구사람들’

한국역사연구회 -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성균관 홈페이지 http://www.skkok.com/

대구향교 홈페이지 http://daeguhyanggyo.cafe24.com/

현풍향교 홈페이지 http://hyeonpung.skk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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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선통과 후 방학직전 7월 14일 국사편찬위원회로 먼 횡단을 했으나 본선 광탈의 슬픔 

by 초령목 2011. 9. 16.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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