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시대의 시대구분 

 

목 차

 

 

 

 

1. 들어가며

2. 후삼국시대의 개창시기에 관하여

3. 후삼국시대의 시대구분

4. 맺으며

5. 참고문헌

 

1. 들어가며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전 국토가 혼돈에 휩싸이던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당연 그 시대를 상징하는 영웅들이 역사서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데. '춘추전국시대'로 대표되는 중국에게는 유비 · 조조 · 손권이라는 영웅이, '센고쿠 시대'로 대표되는 일본에게는 오다 노부나가 · 토요토미 히데요시 ·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영웅들이 있었다. 우리가 당대에 직접 살아보지 않아 그들의 위엄을 직접 느낄 수는 없지만 이들의 일대기는 오늘날까지도 영화와 소설 속 주인공으로 부활하여 우리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렇다면 같은 동아시아국가로서 중국과 일본과 같은 대격동의 시대가 과연 우리나라에서는 존재했을까?

한국에서는 후삼국시대가 바로 그것이며 '진훤 · 궁예 · 왕건'등과 같은 걸출한 위인이 등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후삼국시대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까지 후삼국시대를 표현하는 또 다른 말은, 신라 하대 혹은 나말여초였다. "50년도 안되는 이 시기를 과연 '시대'라고 불러도 되는 것일까?" 라는 생각에 그저 남북국시대와 고려시대 사이의 과부기적인 짧은 시대로 치부해왔다. 실제로 대부분의 역사개념서에서 후삼국시대는 신라와 고려라는 거대한 왕조를 사이에 두고 고대국가에서 중세국가로의 전환기에 존재했던 시대라는 내용을 담은 한 두장의 설명으로 끝내어왔다.

길게만 느껴졌던 소설 삼국지의 배경인 중국의 삼국시대는 실제로는 220~28060년이 겨우되는 역사이며. 일본의 전국시대라 불리는 센고쿠 시대는 1467년에 시작하여 1573년까지 106, 100년의 역사를 가졌다. 이처럼 동아시아의 혼란기는 100년도 안 되는 기간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한 시대와 한 시대 사이를 잇는 중요한 시대라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우리 한국은 어떠한가. 후삼국시대만큼은 박한 평가가 내려진다. 후삼국시대로 정의되는 892년부터 936년까지의 44년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의 36년보다도 더욱 긴 기간으로 결코 짧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일본의 대격동의 시기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것과 비교하여 볼 때 무관심한 대우를 받아왔다.

후삼국시대는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영웅들이 반세기에 공존했던 유일한 시기이자, 진훤, 궁예, 왕건 말고도 기훤, 양길, 능창등 수많은 영웅들이 자기의 세력을 자유롭게 과시하던 때였다. 우리는 이 시기 이후로 더이상 영웅들이 공존하던 때를 떠올릴 수가 없다.

본고는 후삼국 시대에 대한 재평가를 바라며 이 논문에서는 시기를 구분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후삼국의 시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나누어 보려고 시도한 사람은 없었다. 크게 진훤, 궁예의 시대와 진훤, 왕건의 시대로 구분 짓기도 하나, 본고는 후삼국시대의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하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후삼국시대를 전기, 중기, 후기 세 개의 시기로 구분하고자 한다.

 

2. 후삼국시대의 개창시기에 관하여

 

후삼국시대라고 정의되는 기간에 대해서는 보편적으로 진훤이 후백제를 세운 892년부터 왕건이 완전한 삼국통일을 이루어낸 936년까지로 보고 있다. 많은 역사개념서들과 교과서에서는 견훤은 892년 완산(전주)을 도읍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백제라고 칭함으로써 후삼국시대의 서막을 올렸다정도로만 간단히 후삼국시대의 개창을 서술하고 있다. 이는 한국에서는 새 시대의 개창에 대한 관점이 신국가 건설에 있기 때문에 진훤의 후백제 건국에 꽤나 높은 상징성을 부여한 것이었다.

그러나 후삼국시대의 시작을 진훤의 후백제 건설로 설정해놓으면 뭔가 애매한 구석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진훤이 공식적으로 후백제의 부활을 표방한 것은 무진주에서 완산주로 옮긴 900년으로, 892년의 건국 선언은 다른 호족들이 자칭 성주, 장군으로 부른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후고구려가 건국됨에 따라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정립된 901년부터를 진정한 의미로 후삼국시대가 열렸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지도 모른다.

달리 말하자면, 관점을 바꾸면 후삼국시대의 개창시기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다른 국가들을 참고할 수 있다. 한국과 같이 대격동의 시기를 겪은 중국과 일본은 새로운 국가에 초점을 두기 보다는, 그 혼란의 시기를 야기한 특정 사건에 초점을 두고 있다. 중국의 경우 기원전 770, 견융족에 의해 주나라가 도읍을 동주로 옮기자 주 왕실이 약화되어 각각의 제후국들은 주왕실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하여 주왕조의 천도를 춘추전국시대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1467년 경제적 문제에 쇼군 계승 논란이 겹쳐져 일어난 오닌의 난 이후로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다하여 오닌의 난을 일반적으로 센고쿠 시대의 서막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후삼국시대의 개창시기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볼만한 가치가 있다. 이에 따라 본고는 889, 원종애노의 난을 후삼국시대의 시작에 기점이 되는 사건으로 보는 바이다.

신라 하대는 진골 귀족간의 왕위 쟁탈전으로 경주를 중심으로 사치와 향락의 풍습이 만연하여 지방에 대한 착취가 가혹해졌다. 이에 따라 농민들은 점차 신라의 체제에 대해 반발을 품기 시작했는데 중앙의 정치는 문란해져가고, 중앙에서 이탈한 낙향귀족들이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며 신라 사회에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진훤과 궁예가 서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을 때, 호족을 비롯한 수많은 농민들이 그것에 동조하여 그들을 왕으로 인정한 것만 봐도 신라 하대의 사회가 얼마나 문란해졌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농민 봉기는 이미 헌덕왕 대부터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이에 따른 해결책을 조정에서는 제시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근이 잇따르고 중앙의 조세 독촉이 겹쳐지자 농민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기만 했다. 원종애노의 난은 조정에 대한 납부를 거부하고, 반발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 최초의 농민 봉기였다. 또한 삼국사기와 여러 사서들에 기록 될만큼 신라 사회에 끼친 파급력은 엄청났다.

삼국사기에는 원종애노의 난을 이런 식으로 서술해놓았다.

 

3. 나라 안의 여러 주와 군에서 공물과 세금을 보내지 않아 창고가 비고 국가재정이 궁핍하였다. 임금이 사람을 파견하여 독촉하니, 이로 인하여 도처에서 도적이 봉기하였다. 이때 원종(元宗), 애노(哀奴) 등이 사벌주(沙伐州)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나마 영기(令奇)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사로잡게 하였으나, 영기가 적들의 보루를 보고 두려워하여 진군하지 못하였다. 촌주(村主) 우연(祐連)이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임금이 칙명을 내려 영기의 목을 베고, 나이가 10여 세에 불과한 우연의 아들에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촌주가 되게 하였다.

 

그 경과가 어떠하였는지는 정확히 기술되어있지는 않으나, 2년 후인 891, 양길이 신라 북쫑 땅을 습격했다는 사실에서 원종애노의 난이 완전히 진압된 것이 아니라 다른 반란군의 무리에 흡수되거나 통합되어 신라 정부에 대한 압박을 가세하는데 동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원종애노의 난이 성공적으로 진압이 되었다면, 그 잔존세력을 청산하는 기사가 존재해야했다. 그러나 오히려 892, 반란세력을 토벌하러간 진훤이 신라를 배신하여 새로이 백제를 건국하기에 이른다. 이는 신라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었음을 반증하며 원종과 애노의 난이 신라 사회에 엄청난 파급력을 전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신라 국가의 지배질서나 국가의 통치력이 원종애노의 난으로 붕괴된 것은 아니지만, 붕괴되기 시작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다. 신라말은 대규모로 조직화된 농민군이 전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봉기하여 신라가 이를 수습하는데 실패하면서 통치 기반이 와해되기에 이른다. 신라는 말기에 그 영향력이 경주 인근지역으로 축소되는데, 이는 신라의 정치체제가 중앙과 지방에서 발생된 모순을 통제하거나 회복하지 못하고, 신라의 지배질서를 부정하는 세력이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신라의 소경은 대복속민 정책의 하나로 설치되었는데 복속 지역의 거주민을 회유하는 한편 지배층들을 원거주지에서 이주 시켜 다른 지역에 정착시킴으로써 상하가 연결될 수 있는 고리를 지역적으로 분할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대복속민 정책의 일환으로 설치된 소경은 중앙의 통제가 해이해지면 언제라도 반신라적인 경향으로 바뀔 소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실제로 양길, 진훤같은 인물들은 이러한 소경을 거점으로 삼아 성장해나갔다. 농민봉기는 시작부터 정치투쟁을 목표로 하지 않았으나 제반 사회 여건과 저항세력의 의식이 변화됨에 따라 왕조체제를 부정하는 변혁 운동으로 전환하게 된다. 소규모의 산발성의 띄고 있던 진성여왕 대의 농민봉기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전개되며 야심을 가진 정략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반신라의 목적의식을 띤 집단으로 발전한다. 착취에 반발하여 발생한 원종애노의 난으로부터 진훤에 의해 후백제가 건설되기까지는 고작 3년으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농민 봉기를 수습하지 못한 신라는 당시 사회적 역사적 조건과 조응하여 삼국으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후삼국시대는 889년에 발생한 원종애노의 난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3. 후삼국시대의 시대구분

 

시대를 나누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다. 조선과 같이 사회정치적인 변화를 계기를 가져다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 짓기도 한다. 또한 고려처럼 문벌귀족(전기), 무신세력(중기), 권문세족(후기)등의 집권세력을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 지을 수도 있다. 그 기준이 무엇이든 전환을 맞은 왕조는 이전과는 다른 문화를 창조하고, 흥망성쇠의 과정을 거치며 재탄생되는 것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구분은 왕조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수백 년간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공존했던 삼국시대는 전기, 후기를 따질 명확한 기준을 잡기가 어렵기 때문에 각 왕조별로 전기, 중기, 후기를 따로 설정하고 있다. 하지만 비록 채 50년도 안되는 짧은 역사를 지닌 후삼국시대는 오히려 그 짧은 역사 때문에 비교적 시대 구분에 용이한 편이다. 본고는 여기서 후삼국시대의 개창을 889년으로 설정한 후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해보겠다.

 

1) 후삼국시대 전기

원종·애노의 반란이 일어난 후 신라 각지의 호족들은 신라와의 독립을 선언하며 자신들을 장군, 성주라 일컫기 시작했다. 후삼국시대 전기는 진훤과 궁예가 활약하기 이전, 혹은 활동 초기의 시대이다.

이 시기에는 전국적으로 반란세력과 도적떼들이 떼거지로 난립하고 있었는데 사벌의 아자개, 죽주의 기훤, 북원의 양길과 후백제를 개창한 진훤이 역사서에 실릴정도로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반란세력이 존재했으나 활발히 세력확장을 펼치고 있었던 양길, 기훤, 아자개 등과는 달리 실력이 없거나, 자신의 거점을 중심으로 조용히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중소세력들은 서로간의 상호공존과 견제를 반복하면서 세력을 통합하려는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후삼국시대 전기부터 사실상 삼국은 이미 성립되어있었다고 봐야한다. 양길이 신라 북부지역을, 후백제를 세운 진훤이 전라도일대를 일찌감치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비록 서라벌일대로 영향력이 축소되긴 했으나 신라 왕실또한 건재하고 있었다. 진성여왕의 방탕한 생활로 점점 국운은 기울어가고 있었으나 아직까지 신라에는 반란을 진압할 군사력과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둘 통제력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통제력은 점점 서라벌 주위로 축소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최강자는 북원의 양길이었다. 양길은 강원도 일대의 북원을 중심으로 성 30여개를 차지했는데 특히나 신라 중앙의 통제가 약해지면 언제라도 반신라적인 경향으로 바뀔 소지가 있는 5소경 중 2(북원, 국원)을 차지했다는 점에서 후삼국시대의 역사에서 그의 존재에 대해 짐짓 재평가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또한 892년 기훤의 밑에 있던 궁예가 그에게 투탁할 때 원회와 신훤이 함께 찾아왔는데, 특히 원회라는 인물은 5소경 중 하나인 중원에서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다. 사서에 기록될 정도로 신라에서도 경계하고 있던 실력자들이 대거 양길에게 투탁투항한 것은 신라 하대에서 그의 존재가 신라왕이상으로 높았을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훗날 남부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고 있던 진훤으로부터 비장(裨將) 벼슬을 받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진성왕 5(890)에 첫 등장하며. 헌강왕 2(898) 궁예에게 무너질 때까지 신라의 북부지역을 거의 지배하듯이 하고 있었다. 그의 몰락은 궁예를 너무 믿은 나머지 그에게 군사를 쥐어준 것으로부터 시작하며 이는 후삼국시대 중기로의 이행을 야기해왔다.

진훤의 아버지인 아자개는 이미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나기 전부터 상주지역에서 난을 일으키며 성주를 자칭한 인물이었다. 아자개가 난을 일으킨 상주는 신라와 굉장히 인접한 지역이었는데 918년 고려의 왕건에게 투항할때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보아 그의 세력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진훤은 아버지의 밑에 들어서지 않고 신라 관군출신으로 서남해 지방 방위에 공을 세워 비장(裨將)이 되었는데,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진성왕 5(892) 반기를 들고 일어나 여러 성을 공략하고, 무진주(광주)를 점령하여 독자적인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섣불리 왕이라는 칭호를 쓰지는 않아 다른 이름으로 대체하다가 효공왕 4(900)에 완산주에 입성한 견훤은 백제 의자왕의 울분을 씻겠다는 뜻을 내보이며 비로소 백제왕을 칭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양길에게 비장의 관직을 제수하거나 중국 강남의 오월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관계를 맺는 등, 개국 초기부터 외교에 힘썼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후삼국시대 전기는 원종과 애노가 난을 일으킨 889년에서 시작하여 궁예가 901년에 후고구려를 건국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된다(889~900, 11). 이 시기에는 양길의 강세가 돋보이며, 신생국가 후백제 성립되고 본격적인 후삼국시대의 시작에 앞서 호족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규합하면서 새로운 시대로 이행되기 시작한다.

 

2) 후삼국시대 중기

898, 궁예의 성장을 경계하던 양길이 여러 성주들과 함께 비뇌성에서 그를 제거하려 했으나, 오히려 습격당해 패배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로 인해 양길의 휘하에 있던 많은 패권이 궁예에게 넘어가게 되면서 양길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된다. 반대로 그 패권을 물려받은 궁예는 901년 송악에서 왕건 부자를 만나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후삼국시대 중기에 들어서게되면서 신라는 이제 허물뿐인 국가가 되어버린다. 진훤과 궁예를 비롯한 많은 호족들은 신라에 대한 적개심을 적극적으로 표출해보였고,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기 전의 옛 유민들에게 부활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점차 백성들의 신망을 받게 된다. 옛 고구려 유민인 왕건 부자들과 결합하여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는 신라의 부석사에 가서 신라왕의 초상을 칼로 그어버리며 신라적 적개심을 그대로 내보였으며, 같은 시기는 아니지만 후백제의 진훤은 포석정에서 음주가무를 즐기던 경애왕을 자결케 하고 경순왕 김부를 새롭게 왕으로 삼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후고구려와 후백제의 치열한 세력다툼이 빛난 때였다. 우리에게도 꽤나 익숙한 진훤과 궁예, 그리고 왕건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면서 마치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전쟁을 펼친다. 궁예는 끊임없는 정복활동을 전개하며 후백제군을 공주 이남지역으로 철수시켰다. 공주가 백제 부흥의 중심지임을 생각할 때 궁예의 기세를 진훤이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이 시기의 육지전쟁이 해상전투보다 알려진 바가 많이 없으나 확실한 것은 궁예의 세력이 진훤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결론적으로 후삼국시대 중기의 패자(覇者)는 왕건을 등에 업은 궁예였다. 양자간의 치열했던 전투는 단 한번, 909년 왕건이 기습적으로 한반도 서남해지역을 공략하한 나주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후고구려가 한반도의 패권을 손에 쥐게 된다. 당시 서남해지역은 후백제에게 있어서 중국교류로로 중요한 거점이었지만, 이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던 별칭 수달, 능창이 끊임없이 교란을 펼치면서 서남해지역의 호족들을 완전히 규합시키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건에게 나주전투에서 패배하고, 능창조차 궁예의 손에 죽게 되면서 서남해지역의 패권이 후고구려에게로 넘어가게 되어버린 것이다. 나주는 후백제의 수도와 가까운 곳이었기에 훗날 다시 재탈환할 수 있었으나 서남해지역은 끝내 탈환하지 못하였다. 왕건은 서남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후백제의 대중통교를 차단하였다. 이를테면 왕건은 9066월 광주 염해현에서 진훤이 오월(吳越)에 보내는 선박을 나포하였다. 진훤은 후삼국의 세력경쟁에서 대외 주도권을 잡기위하여 오월과의 통교에 주력하였고 대중외교에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왕건은 진훤의 대오월 통교를 차단하여 진훤의 외교정책을 방해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과의 교통로가 끊이고 북으로는 궁예의 군대가 남진해오고, 남으로는 서남해지역의 왕건 부대가 북진해올 수 있는 위협 속에서 후백제는 결국 궁예 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다.

후삼국시대 중기는 왕건이 서남해지역을 정복함에 따라 후백제가 후고구려에게 끌려다는 모습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으며, 반대로 후고구려의 궁예정권은 한반도의 2/3을 차지하게 되면서 명실상부한 한반도의 패주로 자리잡게 된다. 이 시기는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한 901년부터 왕건에 의해 궁예가 축출되고, 고려가 건국되는 918년에 막을 내리게된다(901~918, 17).

 

3) 후삼국시대 후기

 

육월 을묘에 이르러 기장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이 몰래 모의하고 야반에 태조의 집에 가서 다 같이 추대할 뜻을 말하니 태조가 굳게 거절하여 허락하지 않는지라 부인 유씨가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입히고 제장이 부축하여 밖으로 나와서 사람을 시켜 달려가며 소리쳐 [왕공이 이미 의기를 들었다.]라고 하니 이에 분주히 달려오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먼저 궁문에 이르러 복을 치며 떠들석하게 기다리는 자가 또한 만여 명이나 되었다. 궁예가 이를 듣고 놀래어 말하기를 [왕공이 차지하였으니 나의 일은 이미 끝났구나 하며 이에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미복으로 북문을 빠져나가 도망가니 내인이 궁을 청소하고 신왕을 맞이하였다. 궁예는 암곡으로 도망하여 이틀 밤을 머물렀는데 허기가 심하여 보리 이삭을 몰래 끊어 먹다가 뒤이어 부양(강원도 평강)민의 살해한 바가 되었다.

-고려사-

고려사에 등장하는 궁예의 최후는 그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고를 낭비하고, 관심법으로 사람을 함부로 죽여 끝내 왕건에 의해 축출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궁예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많지만 결론적으로 외부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의 왕건에 의해 궁예 정권이 몰락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궁예에 이어 왕위에 오른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며 주변 호족과 신라를 포용하는 정책을 펼친다.

그러나 건국 후백제에게 밀리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중기 때는 내내 후백제를 압도하던 고려는 왕건의 쿠데타 후, 궁예를 따르던 많은 호족들에 후백제에 투항하거나 왕건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하며 고려 사회는 급속도로 불안정해졌다. 후백제와의 첫 전투인 조물성 전투에서 치열한 양상을 보였지만 927년 경애왕을 죽이고 돌아가던 후백제를 공격한 공산전투에서 고려군이 대패함에 따라 930년 고창전투 이전까지 고려는 후백제에게 압도당한다. 고창전투 이후부터는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는 형태가 고려가 통일하기 직전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후삼국의 최후 승자가 누가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왕건의 전쟁과 관련된 흔적들이 아직까지도 남아 오늘날 전국곳곳에 지명으로 굳어있다. 이처럼 후삼국시대 후기에는 후백제와 고려의 치열한 공방전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후삼국시대의 판도를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935년 천년왕국 신라가 고려에게 항복함과 동시에 경쟁자였던 후백제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진훤이 고려에 귀부해온 것이다. 이미 934년 운주성 전투에서 한번 승기를 잡았던 고려는 이러한 행운을 바탕으로 936년 일리천전투에서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삼국시대의 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다.

후삼국시대 후기는 우리나라 전쟁사에 있어서 짧은 기간에 수많은 전투가 다발적으로 일어난 때였다. 고려는 쿠데타 이후 후유증으로 한동안 후백제에게 열세를 보였으나, 결론적으로 신라의 항복과 후백제의 내분이라는 행운이 겹치면서 삼국통일을 이룩한다. 이 시기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918년에서 후백제가 멸망하고 삼국을 통일한 936년까지이며 또, 936년을 끝으로 후삼국시대는 막을 내리면서 고려왕조 500년의 역사가 새롭게 펼쳐지게 되었다(918~936, 18).

 

4. 맺으며

 

본고는 후삼국시대의 시기를 구분지어 보았으나 각 시기별에 해당되는 상세한 내용은 다루지 못했다. 후삼국의 역사가 비록 50년이 채 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36년의 일제강점기보다는 훨씬 긴 역사이다. 여러 사정에 따라 그 역사를 대강 훑어보기로 하자는 생각으로 이 논문을 작성하였다.

본고는 이 논문에서 후삼국시대의 개창시기에 대해서 동아시아 여려국가들과 비교하며 새롭게 제시해보았다. ‘신국가 건설에 초점이 맞춰진 우리나라와는 달리 중국과 일본의 경우 그 시대가 도래되도록 만든 특정 배경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에 그들과 같은 관점에서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난 889년을 후삼국시대의 개창시기로 주장해보았다.

또한 후삼국시대를 크게 세 시기로 구분했는데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전기시대는 수많은 반란세력들이 난립한 와중에 이미 거대한 세력을 형성한 양길과 진훤, 그리고 여전히 건재한 신라가 공존하던 때였다. 중기시대에는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와 후백제의 진훤을 중심으로 대강의 흐름에 대해서 설명해보았다. 후기시대에는 궁예를 축출한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후백제의 진훤과 치열한 공방전 끝에 후삼국시대를 통일한 때이다.

이처럼 후삼국시대는 인물을 중점으로 파악한다면 시대구분이 뚜렷하게 가능한 편이다. 지금부터는 한가지 제안을 해보고자 한다. 조금 주제를 벗어난 말이라지만 본고는 후삼국시대를 구분지으면서 단 한차례도 발해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후삼국시대는 889~936년까지 존속했다. 이 시기는 신라 말기에 해당하는데, 926년까지 북쪽에 발해가 존속해 있어 이른바 남북국시대로 불렸으므로, 926년 이전까지 포함해 후삼국시대로 보는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문제점이 있다. 발해가 삼국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서일까? 그렇지도 않다. 궁예는 발해와 외교전을 벌였고, 신라는 발해와 동맹한 사이였다. 또 발해가 멸망했을 때, 발해왕자를 비롯한 발해 유민들을 포용한 것도 후삼국시대의 고려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후삼국시대의 명칭문제에 대해서 전혀 생각해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후삼국시대를 대체할 명칭은 없을까?

슬픈 궁예의 저자이신 이재범 교수는 후삼국시대의 명칭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며 '전국시대' 혹은 '호족시대'라는 명칭을 쓰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호족시대라는 명칭에서도 역시 발해가 제외되는 느낌이 강하다. 본고는 임의로 신라 말기 반신라적인 새로운 나라가 신라에 독립하여 세워지거나 옛 고구려, 백제, 가야등의 후예들이 그들의 부활을 내세우며 부흥국을 세웠었다는 의미로 '독립부흥시대'로 지어보았다.

후삼국시대는 결코 짧은 역사를 지닌 시기가 아니다. 한국 왕조의 특성상 한 왕조가 적어도 500년동안 유지되고, 몇 번씩 침략해오던 외세를 방어하는 것이 전쟁의 전부였다. 그러나 후삼국시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한 전국시대로, 중국과 일본의 전국시대처럼 난세의 영웅들이 등장해 자웅을 겨루는 역사이다. 단순히 신라 하대의 혼란으로 빚어진 고대와 중세의 연결고리로 보기에는 역사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아쉬운 소재가 아닐 수 없다. 후삼국시대의 재평가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5. 참고자료

 

문헌자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고려사

고려사절요

 

학술자료

권영오, 신라하대와 신라말, 역사와경계 제90, 2014.3, 39-79 (41 pages)

 

도서자료

이재범, 슬픈 궁예푸른역사, 200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11.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1996

이도학, 궁예진훤왕건과 열정의 시대김영시, 2000

임용환, 한국고대전쟁사3. 부흥웅동과 후삼국혜안, 2012

강봉룡, 바다에 새겨진 한국사한일미디어, 2005

 

인터넷자료

네이버 블로그, Juwang (2014.02.17) “원종애노의 난과 진성여왕

http://blog.naver.com/hmjin80/120207755543

네이버 지식백과 - 원종·애노의 난 [元宗哀奴]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원종·애노의 난 [元宗哀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위키백과 - 견훤

네이버 블로그, 학당 (2004.06.04.) “후삼국시대

http://blog.naver.com/micro21c/20002966110

네이버카페 삼국지 도원결의, 만력대제 (2012.06.02.) “후삼국 시대 전투

http://cafe.naver.com/sam10/309004






'후삼국史보는 나무 > 소개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후삼국시대 새 이름의 필요성  (1) 2010.10.29
후삼국시대의 재조명  (0) 2010.10.29
by 초령목 2013. 1. 5. 15:05
 남북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사이 우리는 흔히 그 시대를 '후삼국시대'라 부른다. 하지만 필자는 이 명칭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왜 '후삼국시대'인가

왜 발해는 되고 가야는 안되는가?

왜 우리는 사국시대라 부르지 않는가?

 알다시피 고구려, 백제, 신라가 공존했던 시기에 가야라는 작은 나라가 존재가 했다. 하지만 우리는 가야가 있었음에도 가야가 건국되었던 42년부터 멸망했던 562년까지 단 한차례도 사국시대라 부르지 않았다. 왜일까?
 
 가야는 철의 제국이라 불릴만큼 철이 풍부했고 한동안 신라보다 국력이 컸다. 신라에 쳐들어가서 신라가 위기에 빠진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가야는 중앙집권화에 실패하고 소국연맹체로만 500여년을 이어왔다. 가야와 마찬가지로 초기의 고구려, 백제, 신라는 연맹왕국였다. 그러나 고구려, 백제, 신라는 소국 연맹체에서 탈바꿈하여 중앙 집권적 국가로 발전하는데 성공했다. 각 연맹의 맹주국들은 세력이 강해지자 자신들의 힘을 바탕으로 주변의 소국을 통합한 뒤 직접 통치를 시행했다. 그에 반해 가야는 힘이 가장 강한나라를 연맹의 대표로 삼는 '맹주국'만이 멸망할때까지 존재했을 뿐이다.

 어느 한 국가가 주위 소국보다 비교할수 없을 만큼 강하거나 선진문물을 받아들였으면 그들도 중앙집권국가로의 발전을 이룩할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철로 유명한 변한의 12소국들이 발전하여 가야연맹이 되었다. 그래서 가야 소국에서도 각각의 철기문화가 발달되었다. 그덕에 딱히 통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고 무력으로 연맹의 통일을 이룰수 있었으냐? 그것도 아니였다. 연맹 중 가장 힘이 세던 맹주국에게도 맹주국(전기:금관가야, 후기:대가야)과 힘이 대등하던 나라가 존재했는데 아라가야의 존재는 통일을 방해하는 두번째 이유였다. 실제로 금관가야가 무너진 후 후기가야를 이끌던 국가는 대가야로 알고 있으나 사실 후기가야는 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과 아라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남북으로 나누어져있었다

 또 삼국사기에서도 가야에 관한 기사는 많이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삼국사기는 삼대국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라 일부 불필요한 기록을 누락시켰을 가능성도 있으나 가야 500년 역사를 생각해보면 백제와 신라와의 접촉이 많았을텐데 그에 관한 기록이 터무니 없이 적었다. 그에반해 대국이었던 신라와 백제 사이의 접촉기록은 눈에 띄게 많았다. 그만큼 가야가 대국들 사이에서 소외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기에는 아에 백제의 속국처럼 되어버렸다.

 가야 연맹체에 속해있던 소국들은 각기 정치적인 독자성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다른 지역과 통합을 이루지 못하여 국가가 발전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리하여 삼국과의 경쟁에 특히 약소국 신라와의 경쟁에서 조차 도태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가야는 삼국에 끼어들지 못하게 되었다. 가야와 비슷한 나라가 494년에 멸망한 부여이다. 부여 역시 약 700년간 존속했던 나라나 끝까지 중앙집권하에 실패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마한의 잔여세력도 300~400여년까지는 존재했었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은 '연맹왕국'이었다는 것이다.
 가야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사국시대로 넣자고 주장하면서 부여라는 나라를 알면서도 왜 500년까지 존재했던 부여는 왜 사국시대라 주장하지 않는가? 또 마한의 잔여세력들 또한 백제에 의해 멸망되기 전까지는 한반도 내에 존재했었는데 왜 그들에 대해서는 아무소리도 못하는 것인가?
 
 가야가 신라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았다면 신라말기에 '후가야'라는 나라도 생기지 않았을까? 아니면 가야를 표방한 나라가 있었으나 너무 작아서 기록되지 않았고, 삼국시대의 가야처럼 여러 가야가 생겨 서로와 경쟁을 하다 전부 멸망했을까? 
 

신라와 발해, 남북국시대
 불과 5년전까지만 해도 통일신라시대로 불러야 하나 남북국시대로 불러야하나 논쟁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통일신라시대라는 용어보다 남북국시대라는 용어을 비교적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라는 명칭의 탄생을 보면 남북국시대로 진작에 바꾸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가 찬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있던 1925년,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사편수화'라는 단체가 만들어진다.그런데 바로 이단체가 신라와 발해에 해당하는 시기를 '통일신라시대'라 부르기로 결정한다.즉 식민지 시절의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이후의 신라가 최초로 '통일신라'라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일본 학자들은 우리 역사를 정리하면서 당시의 사건을 '신라의 반도 통일'로 표현하였다.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한 것이 아니라 한반도만을 통일했다고 본것이다.따라서 한반도 밖의 역사는 한국의 역사가 아니게 되었다.당연히 발해사는 한국사에서 제외되었다.결국 '통일신라'는 우리의 역사를 작고 초라하게 만들려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해 만들어진 용어인 셈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인


 그렇다면 발해가 작은나라인가? 그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고구려를 계승한나라가 바로 발해이다. 그것은 일본왕에게 보낸 친서를 보면 확인할수 있는데 "고려국왕"이라는 말을 썼다. 게다가 신라가 그렇게 섬기던 당나라와 전쟁을 불사하고 결국 살아남으며 당에게 해동성국이라고도 불렸다. 또 영토면에서도 고구려보다도 땅을 더 넓혔다. 또 발해는 가야와는 달리 당, 신라, 왜, 거란 등 5개의 무역길을 만들어 경제적인 여건도 좋았다. 그 무역길로 여러 문화를 수용할수도 있었다. 발해가 문치국가가 된 후에는 당나라에서 유학을 하며 신라와의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   
 가야와는 다르게 발해는 지배층(고구려인)과 피지배층(말갈인)의 구분이 확실했다. 또 왕이 존재해 중앙집권화가 가능했고 심지어는 연호도 사용했다. 가야와 발해의 가장 큰 차이는 가야는 연맹국에 불과한 소국들의 모임이었지만 발해는 고구려라는 당대 최고의 나라의 후예임을 자처했음을 알린것이다.
 
 또 통일신라라는 말과는 무색하게 진정한 통일을 이룩한것도 아니었다. 신라말기 신라의 전국토에서 호족이라 불리는 그 지역의 유력세력들이 스스로를 장군, 성주라 칭했다. 그리고 여러 고구려, 백제의 부흥국이 세워졌다. 또 신라는 5소경이라는 것을 설치했는데 이는 김해등의 옛 백제, 고구려후예를 이주시켜 거기서 살게하며 자치를 허락했는데 이는 신라의 중앙통제력이 약해지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었다. 다시말해서 통일신라는 외형적인 통일에 불과했지 정신적인 통일은 이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니 불가능했었다. 신라의 보수적인 골품제와 시대가 지나도 그 모순을 인정하지 않고, 백성들의 고난은 생각하지 않고 왕이 되는 생각만 하던 신라 지배층이 틀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위키사전에서 남북국시대의 명칭문제를 자세히 다루고 있어 이하 생략하겠다.

조선 전기에는 이 시기를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시대로 인식하지 않았다. 이는 신라가 정통 왕조라는 《삼국사기》의 사관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에 따라 신라 중심으로 서술된 역사에서는, 북측의 발해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졌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한국사, 또 만주의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발해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를 통하여 역대의 사가들이 발해사를 한국사에 편입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 등장하였다. 실학자 유득공은 《발해고》(渤海考)에서 고구려가 망한 후 남쪽에 신라가 있었고 북쪽에는 발해가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이를 '남북국'이라 하였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이 시기를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시대라고 불렸으나, 1970년대 이후로 발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980년대 들어 남북국 시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또한 학계 일부에서는 최초의 통일을 신라가 아닌 고려가 이루었다고 보기도 한다.


후삼국시대의 새이름의 필요성

앞에서는 가야와 발해의 시대적 구분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자 그럼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발해는 926년에 멸망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후삼국시대라고 정의하는 시기인 892~936년 사이에 들어가게 된다. 거기다 발해가 가야 같은 소국이냐 그것도 아니다. 무려 200년간 존속했던 나라이자 '남북국시대'의 북국이 아닌가? 후삼국시대로 불리게 되면서 남북국시대라는 명칭으로 되찾은 발해를 후삼국시대에서 또 잃어버리게 되는 모순이 생겨버리게 되었다. 발해가 삼국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서일까? 그렇지는 않다. 궁예는 발해와 외교활동을 했으며 신라는 발해와 동맹까지 하게된다. 또 발해가 멸망하자 발해왕자를 포함하여 유민들이 모두 고려로 내려오게 된다. 그리고 그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멸시하게된다. 이것을 보면 발해와 삼국의 연관성이 많아 보인다.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후삼국시대의 명칭문제에 대해서 전혀 생각해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후삼국시대를 대체할 명칭은 없을까?

 이에 '슬픈 궁예'의 저자이신 이재범 교수는 '전국시대' 혹은 '호족시대'라는 명칭을 쓰자고 제안한다. 필자는 호족시대가 마음에 들지만 그렇게 하면 발해라는 나라가 빠지게 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필자가 생각해본 것이 '독립부흥시대'이다. 독립부흥시대는 신라 말기 반신라적인 새로운 나라가 신라에 독립하여 세워지거나 옛 고구려, 백제, 가야등의 후예들이 그들의 부활을 내세우며 부흥국을 세웠었다는 점에서 이름을 지었다.
 하지만 이 시대가 나타난 연도는 이재범 교수(892년)와는 다르게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난 889년부터 왕건이 통일한 936년까지를 新후삼국시대라 부르고 싶다.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난 이후로 호족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했고, 이 사건을 시작으로 전국에 장군이라 칭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충분히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난 그 해(889)를 新후삼국시대의 시작으로 한다고 해도 별 지장은 없어보인다. 이렇게 되면 후삼국시대의 역사는 889~936년으로 47년, 원래의 후삼국시대보다 3년이 더 추가된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의 혼란시기와 비교해도 될만큼의 긴 역사를 가질 수 있게되고 근 50년에 가까워져 반세기의 역사라 불러도 무방해진다.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난 889년부터 왕건이 통일한 936년까지 47년간의 新후삼국시대, 필자는 이 시대를 더 좋은 명칭이 나오기까지 부르기로 했다. 모든 사람이 통일신라시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남북국시대로 바뀌어 졌듯이, 사람들이 후삼국시대의 모순되는 점을 지적하고 새로운 명칭이 생기기를 기대해본다.


'후삼국史보는 나무 > 소개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후삼국시대의 구분  (0) 2013.01.05
후삼국시대의 재조명  (0) 2010.10.29
by 초령목 2010. 10. 29. 19:12

후삼국 시대의 재조명

 중국이나 일본이나 그들에게는 전 국토가 떠들석 했던 그런 시대가 있었다. 중국은 '삼국시대'라 불리던 시대에 유비 · 조조 · 손권이라는 영웅이, 일본에게는 '센고쿠 시대'의 오다 노부나가 · 토요토미 히데요시 ·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영웅이 있다. 이렇게 동아시아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났던 시대가 우리나라에는 과연 없었을까? 

 우리나라에도 전국시대를 생각하게하는 시대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부르던 '후삼국시대'이다. 여기서는 동아시아의 영웅들과 비교할 수 있는 인물들이 나타나니 바로 '진훤 · 궁예 · 왕건'이다.

 우리는 보통 후삼국시대라 불리는 이 시기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50년도 안되는 이 시기를 과연 '시대'라는 명칭을 붙여도 될까?" 라는 생각에 그저 비교적 컸던 남북국시대와 고려시대 사이의 작은 시대로 떠올린다. 실제로 몇몇 역사책들을 보면 삼국시대가 끝나면 바로 고려시대로 넘어가고 후삼국시대는 그 중간에 한 두장 설명하는 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과연 후삼국시대는 우리가 무시해도 될만큼의 비중이 작은 시대였을까?

 길게만 느껴졌던 소설 삼국지의 배경인 중국의 삼국시대는 실제로는 220~280년 60년이 겨우되는 역사이다. 일본의 전국시대라 불리는 센고쿠 시대는 1467년에 시작하여 1573년까지 106년, 약 100년의 역사를 가졌다. 이처럼 동아시아의 혼란시기는 100년도 안되는 시간을 가지고 있지만 전부 그 나라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혼란시기인 후삼국시대만큼은 우리에게 외면을 당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후삼국시대는 892년부터 936년까지의 44년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의 36년보다도 더욱 긴 시간이다. 1945년 광복 후 지금까지도 우리가 일제의 치욕을 기억하는 것을보면 44년의 시간이 결코 짧다고 느껴서는 안된다.

 후삼국시대는 남북국시대와 고려시대 사이에 끼여있기 때문에 무시를 받아야 하는게 아니라 이 시기에 있기때문에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이다. 그래야만 신라의 멸망 원인과 고려의 성립 원인을 쉽게 이해할수가 있을 것이다. 그저 신라가 멸망했기 때문에 고려가 건국되었다라는 단순한 생각은 버려야 할것이다.44년의 역사는 짧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44년동안 후백제라는 나라와 후고구려라는 나라가 건설되었으며 궁예 18년의 태봉과 992년간 명맥을 이어오던 신라가 망했다. 그 짧은 시기에 이렇게 많은 국가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진 것은 우리나라 역사에 거의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아마 고조선이 멸망하고 난 후에도 이런 혼란시기가 있었을 수도 있다.) 후삼국시대의 중요성은 그렇게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중국의 삼국시대에 대해서는 유비,조조,손권 등의 인물을 외우면서 적벽대전 등 유명한 전투가 많으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일본의 전국시대도 정명가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같은 일본의 영웅이 임진왜란이라는 큰 사건을 일으켰기때문에 일본의 전국시대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그저 안타까운 뿐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위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태봉국의 궁예는 1000년동안의 중국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깨기위해 분열중이었던 중국과는 외교를 벌이지 않고 태봉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세우고자 했었다. 그래서 중국 대신 거란과의 외교로 여러 물건을 하사했다.(이에 대해서도 일본 칠지도같이 논란이 많음) 이와 반대로 진훤같은 경우에는 동아시아 세계의 질서에 맞춰 중국과의 수교를 통해 외교적 우위를 차지해 통일의 유리한 고지를 찾으려고 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신라말기의 혼란시대였다. 골품제의 한계를 느끼고 더이상 빛을 찾을 수 없는 6두품세력들과 세금으로 고통받던 농민들과 삼국통일이라는 허물안에 살아있던 백제와 고구려의 혼이 마침내 터진 시기이다. 사실 신라는 정신적인 통일을 이룩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지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있었다. 그리고 결국 원종애노의 난으로 반란이 일어나자 이와 동시에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신라의 통제권은 수도권으로 축소되었다.

 여기까지가 신라말기의 모습이다. 그리고 진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궁예가 태봉을 세우자 후삼국이라는 시대가 열리게된다. ...후삼국 역사에 대해서는 생략...그리고 신라가 항복을 하고 후백제가 진훤의 군사에 의해 멸망되자 마침내 고려가 민족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후삼국에 대한 언급이 짧았기에 후삼국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태까지 보던 신라말기의 사회 모순부터 고려통일까지의 시기가 바로 후삼국시대이다.

 고려와 조선의 경우를 보면 급진하게 조선을 세우다 보니 뭔가 부자연스럽게 고려왕조를 멸망시킨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신라와 고려의 경우에는 이 후삼국시대가 있었기에 한나라에서 다른나라로 왕조의 교체가 자연스러울 수 있었다. 

 후삼국시대는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영웅들이 반세기에 공존했던 유일한 시기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진훤, 궁예, 왕건 말고도 기훤, 양길, 능창등 수많은 영웅들이 자기의 세력을 과시하며 자유로웠던 시기였단 말이다. 이것이 필자가 후삼국시대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 중 하나이다. 우리는 이 시기 이후로 더이상 영웅들이 공존하던 때를 떠올릴수가 없다. 이 시기가 너무나도 짧았다는 것이 그저 아쉬울 뿐이다.

 필자가 후삼국시대에 가장 흥미를 느낀 이유가 바로 고대와 중세의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전쟁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고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다 주지 않는 역사의 황무지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개척하지 않은 땅을 내가 개척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혹시 알수 있을까? 내가 이렇게 연구를 하다보면 언젠가는 이분야 최고의 전문가가 될 수 있을지…….  

'후삼국史보는 나무 > 소개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후삼국시대의 구분  (0) 2013.01.05
후삼국시대 새 이름의 필요성  (1) 2010.10.29
by 초령목 2010. 10. 29. 17:59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