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 정권, 왕건의 왕위 찬탈

1. 서론

2. 본론

(1) 정사 속 왕건의 쿠데타

(2) 왕건의 쿠데타 그 후

(3) 전설속의 궁예

3. 결론

4. 참고문헌

 

 

 

1. 서론

신라 말기와 고려 초 사이에 존재했던 50년 남짓한 짧은 시대, 후삼국시대는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역사시대이다. 우리나라의 왕조들은 대부분 500년이 넘어가는 유구한 역사들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후삼국시대만큼은 그렇지 않다. 후삼국시대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일본의 전국시대와 더불어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영웅들이 반세기에 공존했던 유일한 시기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견훤, 궁예, 왕건 말고도 기훤, 양길, 능창 등 수많은 영웅들이 자기의 세력을 과시하며 자유로웠던 시기였단 말이다. 이것이 필자가 후삼국시대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 중 하나이다. 우리는 이 시기 이후로 더 이상 영웅들이 공존하던 때를 떠올릴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시대를 공부하다보면 우리나라의 다른 역사에서 느낄 수 없는 독특함을 맛볼 수 있다.

 

후삼국시대의 영웅들 중에서도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을 뽑으라면 바로 궁예이다. 어렸을 적, 이재범 교수의 슬픈 궁예라는 책을 읽으면서 궁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여태껏 세간에 알려진 폭군의 이미지와는 큰 차이를 보인 책의 관점에 흥미를 느끼며 필자 또한 궁예를 비롯한 후삼국시대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특히 궁예는 후삼국시대를 구성했던 다른 영웅, 특히 신라 무장출신의 견훤이나 송악 출신의 호족 왕건과 달리 지지기반이 전혀 없는 사람이 순수 자신의 능력만으로 후삼국시대 최강의 국가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그야말로 자수성가의 전형이 아닐 수가 없다.

 

그래서 필자는 궁예 정권의 몰락이 아쉽게만 느껴졌다. 그것도 궁예가 가장 신봉하던 왕건에 의하여 찬탈당한 궁예의 유산이 하마터면 왕건에 의하여 무너질 뻔 한 것에 대해서 약간은 황당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실제로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후 십여 년 동안은 견훤의 후백제군에게 휘둘리는 모습만 보였기 때문이다. 역사서에 기록된 왕건의 모습은 성군 그 자체이며, 궁예의 폭정에 못 이겨 충동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 사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본다. 과연 왕건은 정말로 보이는 대로 성인(聖人)이었을까?

 

 

 

 

2. 본론

고려사, 삼국사절요, 전설 등과 관련된 인용구는 있는 그대로 적는 게 낫다고 판단하여 부득이하게 인터넷에서 가져왔습니다.

 

(1) 정사 속 왕건의 쿠데타

필자는 오직 정사에 기록된 내용만으로 왕건의 쿠데타가 정당했는 지, 혹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일치하는 지에 대하여 추측해 보겠다.

 

육월 을묘에 이르러 기장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이 몰래 모의하고 야반에 태조의 집에 가서 다 같이 추대할 뜻을 말하니 태조가 굳게 거절하여 허락하지 않는지라 부인 유씨가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입히고 제장이 부축하여 밖으로 나와서 사람을 시켜 달려가며 소리쳐 [왕공이 이미 의기를 들었다.]라고 하니 이에 분주히 달려오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먼저 궁문에 이르러 복을 치며 떠들석하게 기다리는 자가 또한 만여 명이나 되었다. 궁예가 이를 듣고 놀래어 말하기를 [왕공이 차지하였으니 나의 일은 이미 끝났구나 하며 이에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미복으로 북문을 빠져나가 도망가니 내인이 궁을 청소하고 신왕을 맞이하였다. 궁예는 암곡으로 도망하여 이틀 밤을 머물렀는데 허기가 심하여 보리 이삭을 몰래 끊어 먹다가 뒤이어 부양(강원도 평강)민의 살해한 바가 되었다.

-고려사-

 

위의 기록은 고려사의 내용이다. 고려사절요에서도 이와 같은 기록이 서술되어 있지만 내용에는 차이가 없다. 다만 궁예의 폭정에 대해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 성리학자들이 궁예를 폄하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사료들을 종합하여 볼 때 정사 속 왕건의 쿠데타 과정이자, 궁예의 최후는 다음과 같다.

 

우선 서남해지방의 수달이었던 능창을 생포한 왕건을 크게 칭찬하면서 왕건을 신임하게 된다. 물론 애초에 후고구려 개국에 큰 도움을 주었던 송악 호족의 아들이 예쁘게 안보일 리가 없었겠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그 능력 또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후고구려는 날로 번창하여 한반도 3분의 2나 되는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궁예는 날이 갈수록 더더욱 포악해져 가면서 자신의 아들과 부인을 무참히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궁예는 관심법을 이용하면서 반역을 꾀한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 왔는데 하루는 왕건마저 의심하여 그를 죽이려 하다 최응의 지혜로 겨우 죽임을 모면하게 된다. 이후 왕창명의 거울사건이라는 신화와도 같은 일이 벌어지는데 이는 후대에 위조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생략하고, 그 다음에 일어난 사건이 위 사료에 나타난 왕건의 쿠데타이다.

 

, 왕건의 쿠데타는 궁예의 폭정에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궁예의 의심 병이 왕건에게까지 닿자 그것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낀 왕건이 주위의 바람에 충동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묘사가 되어있다. 그런데 정사 속에 기록된 사료에는 몇 가지 의문이 남아있다.

 

 

첫째, 궁예가 진정으로 왕건을 죽이려 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궁예(弓裔)가 불법(不法)을 많이 자행하니, 그의 아내 강씨(康氏)가 정색(正色)하고 간()하였다. 궁예가 미워하여 말하기를,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姦通)을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강씨가 말하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궁예가 말하기를, "내가 신통력(神通力)으로 보았다." 하고, 쇠공이를 불에 달구어 그 음문(陰門)을 찔러 죽였으며 두 아들도 아울러 죽였다. 이때에 궁예가 반란죄(叛亂罪)로 무함하여 날마다 수백 명을 죽었으며 장상(將相)으로서 살해된 자가 열 명에 여덟, 아홉에 이르렀다.

-삼국사절요-

 

보는 것과 같이 삼국사절요에는 위와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궁예가 관심법을 사용하면서 반역의 죄를 꾀했다고 몰아붙일 때는 상대가 아무리 부인한다고 하더라도 열에 아홉은 죽였던 것이 바로 궁예였다. 그것은 자신의 아내인 강씨부인에게도 해당이 되었던 이야기다. 그러나 위와 똑같은 상황에서 왕건에게만큼은 그러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건이 그렇지 않고 반역을 꾀했다는 점을 인정하자 궁예는 잘못을 뉘우쳤다며 크게 기뻐하고 왕건에게 상을 내리기까지 한다. 상식적으로 왕건과 같은 거물급 장수가 반역을 모의했다고 했을 때 그를 죽여 버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궁예는 그러하지 않았고, 이는 오히려 왕건에게 위기의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궁예는 그만큼 왕건을 신임하여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왕건은 궁예의 생각만큼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둘째, 왕건은 이미 옛날부터 역모를 준비하고 있었다.

처음 태조의 나이 삼십에 꿈을 꾸었는데 구층 금탑이 바다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스스로 그 위에 올라갔었다.

-고려사-

 

위의 기록은 왕건의 입장에서 윤색된 고려사의 한 내용이다. 왕건이 일찍부터 제왕이 될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미화한 내용인 듯한데, 이 짧은 기록은 왕건의 인물됨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왕건이 일찍부터 치밀하게 역모를 준비했다는 구체적인 자료가 되기도 한다. 학계나 일반인들 사이에서나 궁예는 왕건이 아니더라도 어느 누군가에게 반드시 쫓겨나야 할 인물로 각인되어왔다. 그러나 위의 사료는 사실 왕건이 30세 때부터 왕이 되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장기간 역모를 꾀했음을 전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9층 금탑이란 신라 황룡사 9층탑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 천하를 평정한다는 염원의 현실적 표현으로 이는 곧 제왕의 운명을 암시한다. 또 고려사 최응전에서 태조가 최응에게 옛날에 신라가 9층탑을 만들고 드디어 통일의 위업을 이룩했다. 이제 개경에 7층탑을 건조하고 서경에 9층탑을 건축하여 현묘한 공적을 빌려 여려 악당들을 없애고 삼한을 통일하려 하니...”라고 한 것을 보면 왕건은 9층 금탑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곧 왕건이 바다 한가운데 솟은 9층 금탑에 오르는 꿈을 꾸었다는 것은, 왕이 되어 천하를 평정하겠단의지를 비유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금탑이 바다 가운데서 올라왔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대를 받았다는 의미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이 짧은 기록은 왕건이 아랫사람들에게 추대되어 왕위에 오른다는 의미를 내포하였지만, 그 진실은 왕건의 역모 계획을 알려준다고 할 수 있다.

 

왕건이 30세때 금탑의 꿈을 꾼 시기는 906년으로 왕건가가 궁예에 투항한 지 10년째가 되는 해이다. 기록상으로 이 시기에는 왕건과 궁예 사이에는 아무런 마찰이 없던 해로서, 오히려 왕건과 궁예가 콤비를 이루어 후삼국시대 최대영토를 차지한 국가를 이룩한 시기였다. 그런데 왜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왕이 될 생각을 했던 것일까? 이는 필자의 개인적인 추측이다. 왕건의 탄생설화를 보면 왕건이 태어난 시기는 이미 나말의 혼란한 사회로 곳곳에서 호족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때였다. 그의 아버지 왕융은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는데, 당시 유명했던 도선에게 명당자리를 얻어왔는가 하면, 유력한 호족이었던 궁예의 밑에 자진하여 들어가기까지 한다. 이러한 가정 분위기 속에서 이미 오랜 옛날부터 왕건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언젠가는 자신도 왕이 되기를 꿈꾸지 않았을까. 그런 와중에 궁예가 포악해져 갔던 것은 왕건에게 호재였을지도 모른다.

 

 

 

(2) 왕건의 쿠데타 그 후

이번에는 과연 왕건의 쿠데타가 정당했는지에 대하여 조사해보았다. 만약 민중이나 내부 세력의 지지를 받았으면 궁예의 평가가 어떻든 왕건의 쿠데타는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왕건은 즉위 이튿날인 정사일에 조서를 반포하여 궁예의 폭정을 규탄하면서 이것을 교훈 삼아 화합의 정치로 밝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뜻을 천명했다. 즉위한 지 사흘 째 되는 날에는 한찬 총일에게 명하여 청주 지역의 민심을 얻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의 죄를 모두 풀라 명하였고, 기반이 취약했던 왕건은 궁예 정권의 관료들을 일단은 껴안고 있어야 했다.

 

궁예의 말년의 행보를 보면 확실히 궁예에게 등을 돌린 사람은 많았다. 그래서 왕건의 쿠데타에 동조하고 같이 일어선 사람들 또한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또한 분명 존재했다.

 

구월 을유에 순군이 임춘길 등이 모반하다가 복주하였다. 경인에 순군랑중 현율로 병부랑중을 삼았다. 계사에 전 시중 구진으로 나주도대행대시중을 삼았는데 구진이 전 임금 때 오랫동안 노고하였으므로 써 가기를 즐거하지 않으니 왕이 불쾌하게...

-고려사-

 

위의 기록처럼 왕건의 즉위년에 곧바로 모반이 일어났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왕건은 궁예를 축출하고 제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궁예 세력은 온존하게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 궁예 세력도 모르게 치밀하게 준비되었던 모반이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마군장군 환선길이었다. 환선길은 왕건을 추대하여 권력을 잡게 한 공신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왕건은 그를 믿고는 항시 날래고 용맹스러운 군사들을 거느리고 왕궁을 숙위하게 하였다. 환선길은 여러날을 뜬 눈으로 지새우며 왕궁을 숙위하다가 모처럼 집에 들렀다. 그때 환선길의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퉁명스러운 투로 따지듯 말했다. “당신의 대주와 능력은 남보다 훨씬 나으므로 사졸들이 복종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큰 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권은 다른 사람에게 있으니 부끄럽지 않습니까!” 여기서 남이나 다른사람은 모두 왕건을 가리키고 있는 말인데 순간 환선길은 내심으로 자신과 왕건을 저울질해본다. 환선길은 내심으로 아내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왕건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모반을 꾀하지만 용기가 부족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처럼 왕건은 궁예 세력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세력에게 조차도 그 정당성을 의심을 받는 처지가 된다. 그래서 사실상 왕건의 권력은 중앙만 움켜쥐었을 뿐이지 변방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궁예가 말년에 장악했던 웅주지방의 이흔암은 쿠데타가 일어나자마자 후백제에 투항하였고, 그 외 많은 지역의 호족들이 왕건에게 벗어나 후백제로 투항하게 된다.

 

이를 볼 때 왕건의 쿠데타는 완벽히 준비되지 못한 반쪽자리 쿠데타였다고 보인다. 실제로 궁예시절 그 강력했던 군사력이 밀집되지 못하여 그 후 십 수 년 동안은 후백제 견훤에게 압도당해 심지어는 죽기직전까지 갔으니 말이다.

 

 

 

(3) 전설속의 궁예

궁예는 과연 백성들에게 버림받은 왕이었을까? 정사속의 기록에 따르면 왕건에게 쫓겨난 궁예가 산에서 숨어 살다가 배고픔을 못이기고 마을로 내려왔는데, 마을 백성들이 괴물인줄 알고, 혹은 궁예임을 알아보고 돌팔매질을 하면서 죽였다고 기록되어있다.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비운의 최후가 아닐 수가 없다. 그러나 전설 속의 궁예는 다르다. 과연 왕건의 쿠데타는 정당했던 것일까? 민중의 입장을 반영하지 않고 오직 중앙 권력 투쟁에 의한 결과가 왕건의 쿠데타가 아니었을까?

 

전설 속의 궁예의 최후는 절대 비굴하지 않았다. 왕건의 군사 역모가 있던 날, 왕은 자신의 나라 도읍지를 마지막으로 순방한 것 같다. 그날 밤 왕은 남문을 통해 도성을 빠져 나왔다. 숨을 가다듬고 재기를 위해 찾아갔던 첫 피신처는 도성 서남쪽의 중어성. 평원 한가운데 세운 도성의 전략적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세웠던 12개 산성 가운데 한 요새다. 현재 위치는 철원읍 대마리. 왕은 이 요새를 버리고 더 서쪽으로 나가 현 연천군 신서면 승양리의 역시 외곽성인 승양산성으로 들어갔다. 또다른 외곽성 보개산성(현 포천군 관인면)은 승양산성의 동쪽에 있었다. 그러나 왕은 어느새 더 동쪽의 명성산성(현 펄원군 갈말읍)으로 들어가 최후 보루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산성에서 군대를 해산한다. 그리고 통곡하는 군사들을 뒤로하고 홀로 북쪽으로 떠난다. '명성이란 말뜻을 굳이 풀이한다면 '큰 울음소리'. 훗날 사람들은 그때 군사들이 슬피 울었다고 해 그 산성을 '울음산성', 산성이 있는 그 산을 '울음산'이라고 불렀다. 명성산성에서 해산했지만 충성스러운 많은 군인들이 왕이 걸어간 길을 뒤따라 군탄리까지 왔다. 왕은 "나를 따르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궁예가 강변에서 한탄했다는 한탄강을 건너가 버렸다. 훗날 사람들은 그곳이 바로 그때 '군사들이 슬피 울며 탄식한 곳'이라며 '군탄'은 거기서 유래했다고 해석했다. 갑천은 평강 하갑리 동북쪽의 작은 내. 왕은 자신의 정예병들을 양성하던 검불량 군사훈련장을 지나 삼방협의 깊은 골짜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결했다.

-울음산 설화-

 

울음산 설화에 따르면 정사 속에 기록된 궁예와의 모습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정사 속 궁예는 왕건의 쿠데타에 저항하지 못하고 바로 포기하여 도망간 왕으로 비춰지나, 이 울음산 설화에서는 끝까지 왕건에게 저항하다가 끝내 하늘의 뜻이 자신에게 없음을 알고 해산했다고 전한다. 그 말을 전해들은 군사들은 모두 슬피 울어 그때부터 명성산의 다름 이름이 울음산이 되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궁예를 따른 병사들이 존재했던 점, 또 이 전설이 끝까지 구전되어 오늘날까지 내려온 점을 미루어 볼 때 궁예가 왕권을 탈취당할 만큼 폭군이었는가에 대하여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점이 있는데 왕권을 탈취 당한 이후 궁예의 행로가 전설 속에서는 의외로 명확하다는 점이다. 궁예왕의 행로는 보개산성-명성산성-운악산성-평강지역으로 이어진다. 궁예왕 일행과 왕건군과의 항쟁은 오랜 세월을 요한다. 운악산성에서 궁예왕 일행은 반 년 이상 왕건군과 항쟁을 했다고 한다. 여기에 평강에서 채록된 지명전설까지 합하면 궁예의 항쟁기간은 훨씬 길어진다. 평강에 있는 문고장, 전중평, 사청산들의 흔적은 평강시절의 궁예 왕국이 적어도 십년 남짓 존속되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고암산을 진산으로 정했기로 300년 도읍을 정하고(905) 왕위에서 물러나기까지 13, 나머지 17년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 거신가. 전설 속의 궁예는 그의 백성, 군대들과 언제나 함께 있다. 울음산에서도 군신이 함께 울고, 식물도 바위도 함께 울어 그 울음소리가 지금까지 계속된다. 그 외 많은 지명전설들이 궁예왕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며 함께 그 고통을 느끼고 있다. 만일 궁예가 문헌자료에서처럼 끔찍한 살인마이고 악인의 전형이었다면 왕의 행동에 대해 그들을 기억하기 위한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을 볼 때, 민심을 동반하고 있던 궁예왕의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왕건의 쿠데타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2. 결론

현재 남아있는 고려에 관한 사료들은 모두 왕건과 그 후손들의 시각에 의하여 각색된 내용들뿐이다. 필자는 이러한 내용들을 정리해보면서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과연 왕건의 쿠데타에는 정당성이 있었는가?

 

정사 속에서 각색된 왕건의 이야기에 조차도 숨기지 못했던 것은 왕건은 이미 오래전부터 역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점이고, 또 궁예는 상상 이상으로 왕건을 신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 왕건의 쿠데타가 성공한 이후, 곧바로 전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난 점은 궁예 정권의 몰락이 비정상적으로 일어났음을 추측해볼 수 있고, 이러한 점은 전설 속에서는 궁예를 옹호하고 있었다는 것에서 판단할 수 있다.

 

쿠데타 과정에서 왕건은 궁예 세력을 완전히 포섭하지 못하여, 한명이라도 더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항상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또 백성들또한 궁예를 그리워하고 있었기에 세금은 1/10으로 낮추는 등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럼에도 민심은 하나로 뭉쳐지지 못해 후백제에게 압도당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점에서 미루어볼 때, 왕건의 쿠데타는 지방 세력 몰래 중앙에서 급진적으로 일어난 역모라는 것이다. 궁예 세력의 대부분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 굴복시켰던 지방에 존재했었으나, 왕건 세력은 송악지방과 중앙 왕실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마자 지방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몇몇 호족들은 후백제에게 투항을 한점을 볼 때, 이는 분명 중앙 호족, 관리의 일방적인 왕위 찬탈로 보인다.

 

필자는 궁예에 대한 재조명과 더 나아가서 왕건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왕건은 혼인정책으로 호족들을 통합하는 등 당장에는 좋은 결과를 낳았지만, 사후 일어날 혼란에 대해서 무책임하게 대응했다. 하마터면 궁예를 몰아내고 이루어낸 왕조를 자신의 씨앗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덕분에 한 세기도 못가고 멸망시킬 뻔했다는 점을 생각해봐야한다.

 

 

 

4. 참고자료

고려사

고려사절요

삼국사기

삼국사절요

 

이재범 슬픈 궁예, 푸른역사

철원군, 태봉국철원정도기념사업회 태봉국 역사문화 유적

이도학 궁예, 진훤, 왕건과 열정의 시대, 김영시




by 초령목 2014. 11. 8. 18:46

*나주전투(909)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로 굳혀진 판도는 후삼국시대로 정립된다. 후고구려와 후백제는 패권을 다투며 국지전을 펼친다. 이 와중에 왕건은 나주를 재차 공격하면서 허를 찌른다. 진도와 고이도를 공략한 왕건은 더 깊숙이 내습하며 견훤의 배후를 뒤흔든다. 그러자 견훤은 수군을 이끌고 왕건을 압박, 수적으로 불리했던 왕건군은 한때 수축되지만 왕건의 지휘 아래 움직인 수군은 화공을 펼쳐 후백제의 수군을 격파시킴으로서 백제의 배후를 계속 교란할 수 있게 되었다.


*공산전투(927.9)
견훤은 신라 급습하여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죽이는 쾌거를 이룬다. 그러자 왕건은 신라의 구원 소식을 받고 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급히 출동한다. 그리고 왕건은 견훤이 돌아가는 길목을 지키다가 견훤을 기습하는 전략을 세운다. 공산 동수를 지키고 있던 왕건은 견훤의 군대를 만나자 기습하였으나 오히려 견훤의 군대에게 전멸당했으며 장군 신숭겸은 왕건을 구하고 전사, 이외 김락 등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대승을 한 견훤은 이후 고창전투 이전까지 고려를 압도하게 된다.



*고창전투(930.1)
견훤에게 번번히 패하며 밀리고 있던 왕건은 고려의 고창성이 견훤에게 포위되자 다시한번 견훤과 일전을 맞는다. 한 달을 넘기며 계속된 전투는 왕건에게 점점 불리해졌다. 그때 고창의 호족 김선평, 권행 등이 고려를 지원하면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된다. 이로써 견훤의 군대는 참패하고 이 격전으로 8천명이 전사, 참모 김악 등이 잡히고 말았다. 이 전투 이후 다시 전세는 역전되어 왕건이 후삼국의 패권을 잡게된다.



*운주성 전투(934.9)
전세가 점점 왕건쪽으로 기울면서 왕건의 공세는 더 거세진다. 왕건이 운주성을 공격하자 진훤은 
갑사 5천을 이끌고 운주성에서 맞섰다. 견훤은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위해 휴전을 제의했으나 왕건은 거부, 오히려 유금필에게 기병을 보내 견훤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그 결과 휴전을 노렸던 견훤의 군대는 격파당했고 3천명이 전사, 견훤의 참모 종훈, 의사 훈겸, 용장 최필, 상달이 생포되었다. 이로써 왕건은 패권주도를 더욱 굳혀나갔고 더불어 통일의 승기를 잡게되었다.


*일리천 전투(936.9)
견훤을 쫓아내어 왕위를 얻은 신검은 후백제의 다수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노린 왕건은 항복한 견훤을 위시하고 국가의 총력을 다해 일리천에서 국운을 건 일전을 벌인다. 왕건의 군대가 8만명이 넘었을만큼 후삼국역사상 가장 많은 대군을 동원한 통일전투는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전투는 견훤을 내쫓은 신검에게 불만을 품은 장병들이 고려에 항복하면서 신검의 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고 결국 신검이 항복하면서 전란은 끝이 났다.

by 초령목 2013. 7. 6. 17:41

 흔히 우리는 후삼국시대라 하면 후고구려, 후백제, 그리고 신라, 이 삼국만 생각하기 쉽상이다. 어찌보면 이름자체에 삼국을 강조하는 듯 하지만 후삼국시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을 주연으로 발해라는 조연이 함께 역사를 이어가던 시대다. 후삼국시대의 역사는 889년(원종·애노의 난) 또는 891년(후백제 건국)을 시작으로 고려가 삼국을 완전 통일한 936년까지 (889년 기준) 47년이다.

 기원전 57년 신라가 건국되고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를 멸망 시킨 후, 676년 당나라군을 몰아내고 마침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하지만 698년 고구려 유민출신인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게 되며 한반도는 다시 남과 북, 두개의 나라로 분열하게 된다.(물론 발해는 한반도에 거점을 뒀다기보다는 만주에 거점을 뒀지만) 발해는 약 200년간 존속하며 거란에 의하여 926년에 멸망하게된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후삼국시대와 발해의 쇠퇴시기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이다. 후삼국시대의 시작이 890년대라고 하지만 실은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한 901년이 진정한 시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 900년대에 발해는 귀족들의 탐락과 사치로 거란족을 포함한 소수민족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후삼국시대를 신라의 탐락과 쇠퇴의 산물로만 이해해왔다. 사실 후삼국의 성립 자체가 한반도 내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신라가 삼국통일 후 300년간의 평화를 유지해온 금성의 평화를 겪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고인 물은 썩게 되는 법. 신라는 300년간의 평화를 제도적 발전으로 이룩하지 못하고 그저 왕위쟁탈을 행하는데 시간을 허비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조금 더 깊이 파고 들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신라가 어떻게 300년간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발해의 변화였다. 알다시피 발해는 당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고구려의 유민들이 일으킨 난이었다. 



 
세조 29년(696) 거란의 이진충(李盡忠)이 영주(營州 - 조양시)도독을 죽이고 당(唐)에 반란을 일으켰다.

 31년 이보다 앞서 이진충이 당의 북경을 함락시키는데 왕이 태자 조영을 보내 계성(계城 -天津市)를 점령하였다.


유득공 『발해고』

여기서 나오는 세조는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 대조영은 태조로 기록.




 위의 기록과 같이 대조영은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키고 당나라가 돌궐의 힘을 빌어 1년만에 겨우 진압을 할 수 있었던 어려운 상황에서 말갈의 여러부족들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그렇기에 발해는 당나라와 항시 적대적일수밖에 없었으며,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에 대해서도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발해의 성립으로 인하여 나당전쟁으로 사이가 벌어졌던 당나라와 신라는 다시 동맹을 맺고 발해를 공격하기도 했는데 발해는 이러한 전쟁속에서 힘을 키우며 꾸준히 성장해나갔다.


 

삼국사에서 말하기를, 의봉 3년 고종 현술에 고려의 남은 세력들이 서로 모여 북쪽의 태백산 아래 의지하였다. 나라 이름을 발해라 하였다. 개원20년 경에 명황이 장수를 보내 토벌하였다. 또한 성덕왕 32년 현종 갑술, 발해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의 등주를 침범하였다. 이에 현종이 토벌하였다. 신라고기에 말하기를 고려의 옛 장수 조영은 대씨이다. 남은 병사들을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발해라 하였다.

일연 『삼국유사』



  위의 기록과 같이 당은 발해를 큰 위협세력으로 파악하여 군대를 보내 토벌하려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발해역시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에 적대심이 남아있기에 무왕대에 이르러 장문휴로 하여금 당나라의 등주(산둥지방)을 공격하라 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당의 요청으로 신라가 발해를 공격한적도 있었는데 발해는 두 적국의 위협을 막아내며 그 결과 발해 선왕때는 해동성국이라 불릴정도로 번영하며 당나라에게 위협을 주는 존재가 되었다.

 발해가 이렇게 강성할 때 신라는 왕권이 가장 강했던 신라 중대(무열왕~혜공왕)였다. 신라 중대는 신라 역사상 최초로 진골이 왕이된 시대이며, 더불어 삼국통일, 나당전쟁 이후 내외의 커다란 위협없이 많은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또한 유교를 도입하여 전제 왕권을 형성하였으며 6두품을 등용하여 다른 진골과 대립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황금의 시대를 열어가게 되는 신라의 전성기였다. 특히 경덕왕때 치세가 극에 달해 제반, 제도, 관직을 당 제도로 개편하고, 전국의 행정체제 및 행정단위의 명칭을개혁하며 행정구역을 9주 5소경으로 나누었다. 또 불교 중흥에도 노력하였는데 불국사,석굴암이 완공된 때도 이때였으며, 세계 최고의 종이라 불리는 성덕대왕신종(봉덕사 종)이 주조된때도 이때였다. 당시 경덕왕의 치세가 얼마나 대단했냐면 삼국사기에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


 

 현종이 오언십운시(五言十韻詩)를 몸소 짓고 써서 왕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신라 왕은 해마다 조공을 잘 행하고 예악과 대의명분을 잘 실천하므로 시 한 편을 지어 주노라.』 하였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우주는 해와 별[景緯]로 나뉘어 있지만, 
만물은 중심축[中樞]에 물려 있도다. 

구슬과 비단은 천하에 두루 퍼져 있어, 
산 넘고 물 건너 장안(長安)으로 몰려든다. 

생각하니 푸른 뭍은 아득히 떨어져 있으나, 
오랜 세월 중국을 부지런히 섬겼도다. 

멀고 멀리 땅이 다한 그 곳, 
푸르디 푸르게 이어진 바다의 구석에 있음에도 
명분과 의리의 나라로 일컬어지니, 
어찌 산과 물이 다르다 하겠는가? 

사신은 돌아가 풍속과 가르침을 전하고, 
사람들은 찾아와 법도를 익혔네. 

의관(衣冠)을 갖춘 이는 예절을 받들 줄 알고, 
충성과 신의가 있는 자는 유학(儒學)을 높일 줄 아는구나. 

성실하도다! 하늘이 이를 굽어볼 것이며 
어질도다!  덕행은 외롭지 않으리라. 

가지고 있는 깃발은 작목(作牧)과 같고, 
후한 선물은 생추(生芻)에 비할 만하다. 

푸르고 푸른 지조 더욱 소중히 하여, 
바람과 서리에도 늘 변하지 말지라!』 

황제가 촉(蜀)지방에 가 있을 때 신라는 천리 길을 멀다 않고 황제가 있는 곳[行在所]까지 찾아가 조회하였으므로, 그 지극한 정성을 가상히 여겨 시를 지어 준 것이다. 시 구절 중에 『푸르고 푸른 지조 더욱 소중히 하여, 바람과 서리에도 늘 변하지 말지라!』 한 것은 어찌 옛날 시 구절의 『모진 바람이 있은 뒤에야 굳센 풀을 알게 되고, 어지러운 세상이라야 곧은 신하를 알 수 있다.』라는 의미가 아닐까? 선화(宣和) 연간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부의(金富儀)가 시를 새긴 판본을 가지고 변경(汴京)에 가서 관반학사(舘伴學士) 이병(李邴)에게 보였다. 이병이 황제에게 올리니 황제가 양부(兩府)와 여러 학사들에게 돌려 보인 후 황제의 의견을 전하여 “진봉시랑(進奉侍郞)이 올린 시는 틀림없는 명황(明皇)의 글씨다.”라 하면서 감탄해 마지않았다. 

김부식 『삼국사기』9권 경덕왕 15년(756)



 비록 자주적인 측면에서 비판을 받을 수 있는 내용이긴 하나 당의 황제가 친히 신라에 시를 지어 보냈다는 점이 흥미롭다. 신라와 당의 돈독한 관계를 확인함과 동시에 경덕왕의 치세를 잘 보여주는 기사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신라는 발해의 개혁과 함께 추락하기 시작한다. 발해가 변화를 시작한 때는 우리나라 역사상 3번째로 긴 재위기간을 채운 임금이자 발해의 3대왕인 문왕때였다. 문왕은 문화개혁을 통해 발해의 제도를 개선해 나가기 시작했다. 무려 54년에 걸친 점진적인 개혁의 결과 당과의 화해에 성공하며 당으로부터 발해를 정식국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문왕은 당나라의 3성 6부를 기본 뼈대로 한 독자적인 중앙 통치 기구를 만들어 운용하였으며 행정조직(5성 15부 62주) 정비, 군사제도 개편, 불교 발전 등에 힘썼다. 신라와도 관계를 개선하여 신라길이라는 무역로를 통해 교류하기도 했다. 특히 문왕은 당과 친하게 지내면서도 스스로 하늘의 자손이라 칭했을정도로 자주적인 모습을 보였다. 

 문왕의 가장 큰 업적은 자주성을 지킨 와중에도 당나라와 유연한 정책을 피기하면서 관계 개선에 성공하고 문치국가로서의 변화에 큰 공헌을 끼쳤다는 점이다. 비록 문왕 다음대의 선왕때 해동성국이라 불릴정도로 왕성한 영토 확장을 했던 발해지만 문왕때의 여러 제도들을 바탕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결국은 완벽한 문치국가로 탈바꿈하는데 이르게 된다. 그리고 문왕이 이룩해놓은 당나라와의 관계개선은 후에 발해의 무역로를 통해 당나라와의 원할한 교류를 가능케 만들었으며 비록 아직 사이는 좋지 않지만 신라와도 신라길이라는 무역로를 만들어 100년만의 민족 교류가 이루어졌다.

▲ 발해 5경

 발해는 총 5번의 도읍지 천도를 했는데 698년 홀한성이라는 성을 쌓아 동모산에 거점을 뿌리박은 것이 첫번째 도읍지였다. 동모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중경쪽에 있는것으로 추측된다. 그후 48년간 도읍의 역할을 하다가 문왕대에 이르러 천도를 단행한다. 756년 상경용천부로 도읍을 옮긴 것이다. 이는 755년 당나라의 운세가 기울면서 안록산의 난이 큰 혼란을 가져오자 발해는 당나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북쪽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천도는 신라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위의 지도에서 보다시피 발해의 새로운 도읍인 상경은 중경에 비해 만주쪽으로 치우쳐있다. 즉 발해가 신라에 대한 견제와 신라의 발해에 대한 전쟁의 두려움이 소멸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신라는 급변한다. 비록 발해가 수도를 천도한 756년은 신라 왕권의 최고봉이었던 경덕왕때였으나 765년 다음왕으로 오른 혜공왕대에 이르러 전쟁의 위협과 경덕왕의 치세로 짓누르고 있었던 귀족들의 기세가 드디어 양지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혜공왕이 즉위하자 귀족들은 노골적으로 혜공왕의 자리를 노렸다. 전대 경덕왕의 치세에 눌리고 살아야 했던 귀족들이었지만 혜공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는 것이 그들을 자극해버린 것이다. 태후의 섭정 기간동안 경덕왕의 전제주의를 기반으로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귀족세력의 반발을 살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왕과 귀족들의 세력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그 결과 786년 일길찬 대공의 모반, 770년 대아찬 김융의 모반, 775년 이찬 김은거의 모반등, 귀족에 의해 왕권은 끊임없이 위협당했다. 마침내 780년 김지정의 반란 과정에서 김양상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난군에 의해 왕과 왕비가 피살당하게 된다. 그리고 김양상이 신라의 새로운 왕,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신라 중대의 종말과 동시에 신라 하대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신라하대에는 발해가 완전 문치국가로 탈바꿈됨으로써 동아시아 3국(당나라, 발해, 신라)에는 평화의 시대가 이룩된다. 하지만 이 시대는 무武력의 전쟁이 아닌 문文력의 전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발해 유학생들이 당나라의 외국인관직시험에서 신라 유학생들을 넘어서게 되자 신라가 당나라에 불만을 토한 것이 신라와 발해의 신경전이었을정도로였다. 이 시대의 가장 큰 적은 당나라도, 발해도, 신라도 아닌 해적들이었는데 장보고라는 걸출한 위인이 이를 진압하면서 일단락 되는 듯 했으나 신라의 뻘짓(?)으로 무산되었다. 


 하지만 신라하대의 시작은 신라 비극의 시작을 의미했다. 신라하대 155년동안에 왕이 20명이나 교체될 정도로 신라는 나라안팍의 안위를 걱정하기보다는 왕위쟁탈에 눈을 밝혔다. 그리고 결국 진성여왕대에 이르러서야 귀족들의 횡포를 못이긴 여러 영웅들이 난을 일으켜 후삼국시대가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후삼국시대의 시작은 신라와 발해의 쇠퇴기이자 당나라의 멸망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당나라는 200년간의 평화동안 동아시아 최강국의 자리를 유지해 나갔으나 제도의 헛점과 무능한 황제와 간신배의 등장으로 901년 멸망해버렸다. 당나라가 멸망하자 대륙에서도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여러나라로 분열되어 5대10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한반도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당시 신라가 얼마나 쇠약했던지 신라의 통치범위가 고작 금성주위로 국한되었을 정도였다. 심지어 금성과 아주 가까웠던 상주에서 아자개가 봉기를 일으켰는데 신라는 그것을 막을 힘조차 없었다. 후삼국이 시작되자 신라왕의 초상을 칼로 베었던 궁예는 노골적으로 반신라적인 성격을 보였고, 후백제왕 진훤에게는 신라왕이 살해될 정도로 쇠락하였다. 발해 역시 신라와 마찬가지로 지배세력의 내분으로 피지배층이던 소수민족에 대한 통치력이 약해지자 거란이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차례대로 발해는 거란에 의하여 926년, 신라는 고려에 의하여 935년 멸망하였다.


by 초령목 2013. 1. 20. 17:15

발해가 멸망할 때 後三國의 영웅들은 무엇을 했나? 
 

 I. 
  668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한 후 30년 뒤인 698년 고구려 유장 대조영은 
그 지역에 발해를 건국하였다. 한때 당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얻었던 발해는 926 
년 정월 거란의 야율아보기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북방의 漢族이나 북방 민족들의 한반도 
침략을 방어하는 방파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필자의 견해로는 발해가 쇠퇴하고 거란족이 발 
흥할 때가 고구려 멸망이후 한민족이 다시 북방의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최초의 好機였다 
고 판단된다. 후삼국시대를 살았던 한국인들의 고구려 古土에 대한 관심과 미련은 21세기를 
사는 우리 세대보다 훨씬 더 강열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 후백제, 통일신라가 각축을 벌 
린 후삼국시대의 분열, 대립의 현실은 훨씬 냉혹했다. 21세기에도 아직 분단을 극복하지 못 
한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후삼국의 3傑들(궁예, 왕건, 견훤)이 발해 멸망기에 무엇을 했 
는지를 재조명해 보면서 역사의 교훈을 얻어보자. 
 

II. 
  발해가 멸망하기 직전 9세기말부터 10세기 전반기의 동북아시아는 하나의 전환기라고 할 
것이다. 안사의 난 이후 쇠퇴하기 시작한 唐제국은 황소의 대난을 겪으면서 907년에 멸망하 
고 후량이 들어서면서 五代十國(907-960)의 분열시대가 시작되었다. 한편 한반도 내에서는 
후삼국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신라가 쇠퇴일로를 걷고 있었고 견훤의 후백제와 궁예의 태 
봉(고려의 왕건)이 세력다툼을 벌이던 시기이다. 발해의 서쪽에서 일어난 거란이 발해의 쇠 
퇴와 중원의 분열로 인해 갑짜기 큰 나라가 되고 있었다. 거란은 옛부터 요하 상류에 흘러 
가는 시라무렌강가에서 발흥한 東胡계통의 퉁구스와 몽고의 혼혈족으로 알려졌는데, 907년 
야율아보기가 제위에 올라 점차 세력을 확장하면서 북중국으로 진출하는 한편, 동쪽으로 발 
해를 위협하였다. 그는 임기 말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도모할 새로운 야망을 품었다. 
그래서 916年 신책(神冊)이란 연호를 사용하고 자칭 황제라 하고 임황(臨潢, 熱河省)을 皇都 
로 정하고,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이때 영역은 확대되어 발해와 상접하게 되자 발해와 본 
격적인 전쟁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한편 후삼국 중에서 가장 영토를 넓힌 궁예의 고려는 정치판도에 큰 파란이 일어나고 있 
었다. 905년 궁예는 청주에서 만난 策士 아지태의 권고를 받아들여 송악에서 다시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고려에서 마진이라 정하였다. 이는 고려 호족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강행한 일이라 결국 궁예 몰락의 신호탄이 되었다. 청주지방의 1천호를 이주시키고 궁궐을 
수축하는 동안 많은 세금과 부역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호족과 농민들의 강한 반발을 받았던 
것 같다. 궁예가 사용한 국호(901년 고려, 904년 마진, 911년 태봉)를 분석해 보면 자주적인 
성격을 강하게 풍기고 있지만, 정권의 불안정을 또한 내포한 것이었다. 913년 청주파내부에 
서 서로 참소, 모함하는 분열이 생기는 소위 "아지태 사건"이 발생했다. 왕건은 이 사건에서 
아지태를 척결하면서 호족들의 신망을 한 몸에 얻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궁예는 대외관계 
에서, 특히 거란에 대해서는 별다른 적대적 입장을 보이지 않고 있다. <요사>에 의하면, 
915년에 궁예가 거란에 보검을 바치면서 조공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아마도 궁예는 그가 추 
진한 정치숙청으로 말미암은 정치적 혼란을 외교적 관심이전을 통해 극복하려했던 것 같다. 
그리고 918년 왕건에 의해 축출되기 3,4개월 전에 두 차례에 걸쳐 거란에 사신을 파견하였 
던 것도 이런 내부 정세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결국 고려 호족들은 918년 왕권과 결탁하여 궁예를 축출하였다. 그러나 왕건은 환선길, 이 
흔암 등 장수의 반란을 겪어야 했고, 공주 이북 30여성이 다시 후백제에 귀부했다는 점에서 
왕건은 초기에 내부 분란을 정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왕건은 이듬 해 수도를 철원 
에서 송악(개성)으로 옮기고, 년호를 天授라 하였다. 
  고려의 정권교체에 따른 후유증을 지켜본 후백제 견훤은 두 번이나 실패한 대야성 정복의 
꿈을 키워갔다. 그는 920년 대야성을 공격하여 무너뜨리면서, 후백제의 통일정책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925년 12월 후백제의 견훤은 후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後唐 조정으로부터 
'백제왕'임과 食邑 2,500호의 통치자임을 인정받게 되었다. 
  한편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후삼국의 분쟁의 틈을 충분히 이용한 것 같다. 그는 神冊元年 
(916) 정월 황제 즉위 이후 바로 서방 諸國(제국) 공격을 준비하여 오다가 그해 7월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돌궐, 토혼, 당항, 소번, 沙陀諸部(사타제부)를 쳐서 곧바로 평정하고 그 개 
선하였다. 그는 궁예가 축출되었을 918년에는 생산의 요충지인 요동의 정복을 완료했다. 그 
후 발해를 도모하기 위하여 장기 관찰을 한 결과 발해국 내분소식을 접하고 바로 전면 공격 
전을 선언하였다. 야율아보기는 드디어 925년 12월 발해의 수도를 대규모 병력을 동원, 기습 
하여 발해의 부여성을 함락시키고 말았다. 高王이후 200여년동안 해동성국이란 칭호를 받았 
던 대국 발해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926년 정월 1달만에 어이없이 멸망하고 말았다. 
  발해가 거란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해 주변국의 지원을 얻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여러 곳 
에서 감지된다. 거란의 핍박을 경계하여 925년경에는 발해가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結援하 
였음이 {契丹國志}(권1)에 보이고 있다. 이보다 앞서 921년에는 발해가 고려와 외교관계를 
맺고 아울러 通婚하였던 듯한 기록이 {資治通鑑} 권285에 보이고 있다. 만일 이 기록이 신 
빙성이 있다면 발해는 거란과의 전쟁에서 신라와 고려에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양국으로부 
터 군사적 지원은 받지 못한 것 같다. 
  
III. 
  그런데 이 당시 위기에 처한 발해를 보면서 거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고려의 왕건의 숨 
은 의중이 무엇이었던가? 고려의 왕권은 과연 건국초기부터 거란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을까? 결코 아니었다. 925년 주물성(경북 안동 또는 상주 부근) 전투를 전후로 하여 고 
려는 후당과 거란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하는 등 대외정책에서 저자세의 모습을 보인다. 
그 이유는 첫째로 고려가 주도하는 통일전쟁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함이었다. 고려가 거란 
에 호감을 사기 위해 준비한 외교 선물로서는 그해 9월 발해장군 申德 등이 그들의 정치내 
분으로 고려에 내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발해내부에 관한 중요 정세를 전달한 것으 
로 추정된다. 거란으로서는 크게 환영할 것으로 그들이 발해 정벌의 시기를 결정하는데 크 
게 도움을 얻은 것이다. 실제로 거란이 발해의 정치 혼란을 이용하여 "先帝[태조]가 발해인 
들의 틈을 타서 공격하여 싸우지도 않고 이겼다"는 『요사』를 통해서도 알수 있다. 거란은 
922년에 먼저 사신을 파견하여 발해견제를 위한 고려의 협조를 요청했었고, 고려의 사신을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 
  고려가 거란과의 관계 개선에 신경을 쓴 이유는 두 번째 이유는 거란의 국제적 위치 상승 
이라는 국제역학관계의 변화였다. 거란은 고려 사신이 오기 1년 전에 이미 토혼(吐渾), 당항, 
돌궐, 등의 정벌작업을 벌였는가 하면, 大食國에서도 조공사신이 다녀갔다. 그리고 고려사신 
이 다녀갔던 925년 2월에도 대원수 요골(堯骨)이 당항을 경략하고, 北府宰相 소아고지(蕭阿 
古只)가 燕과 趙를 경략하고 돌아오는 등, 그 국력의 강성함은 주변 여러 나라들이 인정하 
고 있는 터였다. 그래서 고려도 이제는 거란의 국제적 위치를 인정하고 그들과 교섭을 원하 
는 적극외교를 펼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되는 사실은 신라가 발 
해를 돕겠다던 약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란에 조공사를 파견하였다는 사실이다. 신라 
도 거란의 국력상승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것은 거란의 발해 침략을 고려, 신라 모두가 묵인, 방조함으로써, 거란의 발해멸망 
을 도와주는 결과는 낳고 말았다. 고려는 발해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926년(2월 20일) 거란 
에 사신을 파견했다.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거란을 "無道의 나라"로 규정한 942년의 
태도와는 전혀 다르다. 발해의 멸망 전후를 영토확장의 호기로 활용하지 못한 주된 원인은 
주물성 전투에서 보았듯이 925년 이후 전개된 고려와 후백제간의 팽팽한 세력균형 때문이었 
다.

<원대신문> 

by 초령목 2013. 1. 20. 16:46

후삼국시대의 시대구분 

 

목 차

 

 

 

 

1. 들어가며

2. 후삼국시대의 개창시기에 관하여

3. 후삼국시대의 시대구분

4. 맺으며

5. 참고문헌

 

1. 들어가며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전 국토가 혼돈에 휩싸이던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당연 그 시대를 상징하는 영웅들이 역사서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데. '춘추전국시대'로 대표되는 중국에게는 유비 · 조조 · 손권이라는 영웅이, '센고쿠 시대'로 대표되는 일본에게는 오다 노부나가 · 토요토미 히데요시 ·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영웅들이 있었다. 우리가 당대에 직접 살아보지 않아 그들의 위엄을 직접 느낄 수는 없지만 이들의 일대기는 오늘날까지도 영화와 소설 속 주인공으로 부활하여 우리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렇다면 같은 동아시아국가로서 중국과 일본과 같은 대격동의 시대가 과연 우리나라에서는 존재했을까?

한국에서는 후삼국시대가 바로 그것이며 '진훤 · 궁예 · 왕건'등과 같은 걸출한 위인이 등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후삼국시대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까지 후삼국시대를 표현하는 또 다른 말은, 신라 하대 혹은 나말여초였다. "50년도 안되는 이 시기를 과연 '시대'라고 불러도 되는 것일까?" 라는 생각에 그저 남북국시대와 고려시대 사이의 과부기적인 짧은 시대로 치부해왔다. 실제로 대부분의 역사개념서에서 후삼국시대는 신라와 고려라는 거대한 왕조를 사이에 두고 고대국가에서 중세국가로의 전환기에 존재했던 시대라는 내용을 담은 한 두장의 설명으로 끝내어왔다.

길게만 느껴졌던 소설 삼국지의 배경인 중국의 삼국시대는 실제로는 220~28060년이 겨우되는 역사이며. 일본의 전국시대라 불리는 센고쿠 시대는 1467년에 시작하여 1573년까지 106, 100년의 역사를 가졌다. 이처럼 동아시아의 혼란기는 100년도 안 되는 기간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한 시대와 한 시대 사이를 잇는 중요한 시대라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우리 한국은 어떠한가. 후삼국시대만큼은 박한 평가가 내려진다. 후삼국시대로 정의되는 892년부터 936년까지의 44년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의 36년보다도 더욱 긴 기간으로 결코 짧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일본의 대격동의 시기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것과 비교하여 볼 때 무관심한 대우를 받아왔다.

후삼국시대는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영웅들이 반세기에 공존했던 유일한 시기이자, 진훤, 궁예, 왕건 말고도 기훤, 양길, 능창등 수많은 영웅들이 자기의 세력을 자유롭게 과시하던 때였다. 우리는 이 시기 이후로 더이상 영웅들이 공존하던 때를 떠올릴 수가 없다.

본고는 후삼국 시대에 대한 재평가를 바라며 이 논문에서는 시기를 구분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후삼국의 시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나누어 보려고 시도한 사람은 없었다. 크게 진훤, 궁예의 시대와 진훤, 왕건의 시대로 구분 짓기도 하나, 본고는 후삼국시대의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하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후삼국시대를 전기, 중기, 후기 세 개의 시기로 구분하고자 한다.

 

2. 후삼국시대의 개창시기에 관하여

 

후삼국시대라고 정의되는 기간에 대해서는 보편적으로 진훤이 후백제를 세운 892년부터 왕건이 완전한 삼국통일을 이루어낸 936년까지로 보고 있다. 많은 역사개념서들과 교과서에서는 견훤은 892년 완산(전주)을 도읍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백제라고 칭함으로써 후삼국시대의 서막을 올렸다정도로만 간단히 후삼국시대의 개창을 서술하고 있다. 이는 한국에서는 새 시대의 개창에 대한 관점이 신국가 건설에 있기 때문에 진훤의 후백제 건국에 꽤나 높은 상징성을 부여한 것이었다.

그러나 후삼국시대의 시작을 진훤의 후백제 건설로 설정해놓으면 뭔가 애매한 구석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진훤이 공식적으로 후백제의 부활을 표방한 것은 무진주에서 완산주로 옮긴 900년으로, 892년의 건국 선언은 다른 호족들이 자칭 성주, 장군으로 부른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후고구려가 건국됨에 따라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정립된 901년부터를 진정한 의미로 후삼국시대가 열렸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지도 모른다.

달리 말하자면, 관점을 바꾸면 후삼국시대의 개창시기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다른 국가들을 참고할 수 있다. 한국과 같이 대격동의 시기를 겪은 중국과 일본은 새로운 국가에 초점을 두기 보다는, 그 혼란의 시기를 야기한 특정 사건에 초점을 두고 있다. 중국의 경우 기원전 770, 견융족에 의해 주나라가 도읍을 동주로 옮기자 주 왕실이 약화되어 각각의 제후국들은 주왕실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하여 주왕조의 천도를 춘추전국시대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1467년 경제적 문제에 쇼군 계승 논란이 겹쳐져 일어난 오닌의 난 이후로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다하여 오닌의 난을 일반적으로 센고쿠 시대의 서막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후삼국시대의 개창시기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볼만한 가치가 있다. 이에 따라 본고는 889, 원종애노의 난을 후삼국시대의 시작에 기점이 되는 사건으로 보는 바이다.

신라 하대는 진골 귀족간의 왕위 쟁탈전으로 경주를 중심으로 사치와 향락의 풍습이 만연하여 지방에 대한 착취가 가혹해졌다. 이에 따라 농민들은 점차 신라의 체제에 대해 반발을 품기 시작했는데 중앙의 정치는 문란해져가고, 중앙에서 이탈한 낙향귀족들이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며 신라 사회에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진훤과 궁예가 서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을 때, 호족을 비롯한 수많은 농민들이 그것에 동조하여 그들을 왕으로 인정한 것만 봐도 신라 하대의 사회가 얼마나 문란해졌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농민 봉기는 이미 헌덕왕 대부터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이에 따른 해결책을 조정에서는 제시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근이 잇따르고 중앙의 조세 독촉이 겹쳐지자 농민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기만 했다. 원종애노의 난은 조정에 대한 납부를 거부하고, 반발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 최초의 농민 봉기였다. 또한 삼국사기와 여러 사서들에 기록 될만큼 신라 사회에 끼친 파급력은 엄청났다.

삼국사기에는 원종애노의 난을 이런 식으로 서술해놓았다.

 

3. 나라 안의 여러 주와 군에서 공물과 세금을 보내지 않아 창고가 비고 국가재정이 궁핍하였다. 임금이 사람을 파견하여 독촉하니, 이로 인하여 도처에서 도적이 봉기하였다. 이때 원종(元宗), 애노(哀奴) 등이 사벌주(沙伐州)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나마 영기(令奇)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사로잡게 하였으나, 영기가 적들의 보루를 보고 두려워하여 진군하지 못하였다. 촌주(村主) 우연(祐連)이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임금이 칙명을 내려 영기의 목을 베고, 나이가 10여 세에 불과한 우연의 아들에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촌주가 되게 하였다.

 

그 경과가 어떠하였는지는 정확히 기술되어있지는 않으나, 2년 후인 891, 양길이 신라 북쫑 땅을 습격했다는 사실에서 원종애노의 난이 완전히 진압된 것이 아니라 다른 반란군의 무리에 흡수되거나 통합되어 신라 정부에 대한 압박을 가세하는데 동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원종애노의 난이 성공적으로 진압이 되었다면, 그 잔존세력을 청산하는 기사가 존재해야했다. 그러나 오히려 892, 반란세력을 토벌하러간 진훤이 신라를 배신하여 새로이 백제를 건국하기에 이른다. 이는 신라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었음을 반증하며 원종과 애노의 난이 신라 사회에 엄청난 파급력을 전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신라 국가의 지배질서나 국가의 통치력이 원종애노의 난으로 붕괴된 것은 아니지만, 붕괴되기 시작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다. 신라말은 대규모로 조직화된 농민군이 전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봉기하여 신라가 이를 수습하는데 실패하면서 통치 기반이 와해되기에 이른다. 신라는 말기에 그 영향력이 경주 인근지역으로 축소되는데, 이는 신라의 정치체제가 중앙과 지방에서 발생된 모순을 통제하거나 회복하지 못하고, 신라의 지배질서를 부정하는 세력이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신라의 소경은 대복속민 정책의 하나로 설치되었는데 복속 지역의 거주민을 회유하는 한편 지배층들을 원거주지에서 이주 시켜 다른 지역에 정착시킴으로써 상하가 연결될 수 있는 고리를 지역적으로 분할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대복속민 정책의 일환으로 설치된 소경은 중앙의 통제가 해이해지면 언제라도 반신라적인 경향으로 바뀔 소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실제로 양길, 진훤같은 인물들은 이러한 소경을 거점으로 삼아 성장해나갔다. 농민봉기는 시작부터 정치투쟁을 목표로 하지 않았으나 제반 사회 여건과 저항세력의 의식이 변화됨에 따라 왕조체제를 부정하는 변혁 운동으로 전환하게 된다. 소규모의 산발성의 띄고 있던 진성여왕 대의 농민봉기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전개되며 야심을 가진 정략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반신라의 목적의식을 띤 집단으로 발전한다. 착취에 반발하여 발생한 원종애노의 난으로부터 진훤에 의해 후백제가 건설되기까지는 고작 3년으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농민 봉기를 수습하지 못한 신라는 당시 사회적 역사적 조건과 조응하여 삼국으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후삼국시대는 889년에 발생한 원종애노의 난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3. 후삼국시대의 시대구분

 

시대를 나누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다. 조선과 같이 사회정치적인 변화를 계기를 가져다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 짓기도 한다. 또한 고려처럼 문벌귀족(전기), 무신세력(중기), 권문세족(후기)등의 집권세력을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 지을 수도 있다. 그 기준이 무엇이든 전환을 맞은 왕조는 이전과는 다른 문화를 창조하고, 흥망성쇠의 과정을 거치며 재탄생되는 것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구분은 왕조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수백 년간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공존했던 삼국시대는 전기, 후기를 따질 명확한 기준을 잡기가 어렵기 때문에 각 왕조별로 전기, 중기, 후기를 따로 설정하고 있다. 하지만 비록 채 50년도 안되는 짧은 역사를 지닌 후삼국시대는 오히려 그 짧은 역사 때문에 비교적 시대 구분에 용이한 편이다. 본고는 여기서 후삼국시대의 개창을 889년으로 설정한 후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해보겠다.

 

1) 후삼국시대 전기

원종·애노의 반란이 일어난 후 신라 각지의 호족들은 신라와의 독립을 선언하며 자신들을 장군, 성주라 일컫기 시작했다. 후삼국시대 전기는 진훤과 궁예가 활약하기 이전, 혹은 활동 초기의 시대이다.

이 시기에는 전국적으로 반란세력과 도적떼들이 떼거지로 난립하고 있었는데 사벌의 아자개, 죽주의 기훤, 북원의 양길과 후백제를 개창한 진훤이 역사서에 실릴정도로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반란세력이 존재했으나 활발히 세력확장을 펼치고 있었던 양길, 기훤, 아자개 등과는 달리 실력이 없거나, 자신의 거점을 중심으로 조용히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중소세력들은 서로간의 상호공존과 견제를 반복하면서 세력을 통합하려는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후삼국시대 전기부터 사실상 삼국은 이미 성립되어있었다고 봐야한다. 양길이 신라 북부지역을, 후백제를 세운 진훤이 전라도일대를 일찌감치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비록 서라벌일대로 영향력이 축소되긴 했으나 신라 왕실또한 건재하고 있었다. 진성여왕의 방탕한 생활로 점점 국운은 기울어가고 있었으나 아직까지 신라에는 반란을 진압할 군사력과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둘 통제력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통제력은 점점 서라벌 주위로 축소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최강자는 북원의 양길이었다. 양길은 강원도 일대의 북원을 중심으로 성 30여개를 차지했는데 특히나 신라 중앙의 통제가 약해지면 언제라도 반신라적인 경향으로 바뀔 소지가 있는 5소경 중 2(북원, 국원)을 차지했다는 점에서 후삼국시대의 역사에서 그의 존재에 대해 짐짓 재평가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또한 892년 기훤의 밑에 있던 궁예가 그에게 투탁할 때 원회와 신훤이 함께 찾아왔는데, 특히 원회라는 인물은 5소경 중 하나인 중원에서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다. 사서에 기록될 정도로 신라에서도 경계하고 있던 실력자들이 대거 양길에게 투탁투항한 것은 신라 하대에서 그의 존재가 신라왕이상으로 높았을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훗날 남부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고 있던 진훤으로부터 비장(裨將) 벼슬을 받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진성왕 5(890)에 첫 등장하며. 헌강왕 2(898) 궁예에게 무너질 때까지 신라의 북부지역을 거의 지배하듯이 하고 있었다. 그의 몰락은 궁예를 너무 믿은 나머지 그에게 군사를 쥐어준 것으로부터 시작하며 이는 후삼국시대 중기로의 이행을 야기해왔다.

진훤의 아버지인 아자개는 이미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나기 전부터 상주지역에서 난을 일으키며 성주를 자칭한 인물이었다. 아자개가 난을 일으킨 상주는 신라와 굉장히 인접한 지역이었는데 918년 고려의 왕건에게 투항할때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보아 그의 세력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진훤은 아버지의 밑에 들어서지 않고 신라 관군출신으로 서남해 지방 방위에 공을 세워 비장(裨將)이 되었는데,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진성왕 5(892) 반기를 들고 일어나 여러 성을 공략하고, 무진주(광주)를 점령하여 독자적인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섣불리 왕이라는 칭호를 쓰지는 않아 다른 이름으로 대체하다가 효공왕 4(900)에 완산주에 입성한 견훤은 백제 의자왕의 울분을 씻겠다는 뜻을 내보이며 비로소 백제왕을 칭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양길에게 비장의 관직을 제수하거나 중국 강남의 오월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관계를 맺는 등, 개국 초기부터 외교에 힘썼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후삼국시대 전기는 원종과 애노가 난을 일으킨 889년에서 시작하여 궁예가 901년에 후고구려를 건국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된다(889~900, 11). 이 시기에는 양길의 강세가 돋보이며, 신생국가 후백제 성립되고 본격적인 후삼국시대의 시작에 앞서 호족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규합하면서 새로운 시대로 이행되기 시작한다.

 

2) 후삼국시대 중기

898, 궁예의 성장을 경계하던 양길이 여러 성주들과 함께 비뇌성에서 그를 제거하려 했으나, 오히려 습격당해 패배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로 인해 양길의 휘하에 있던 많은 패권이 궁예에게 넘어가게 되면서 양길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된다. 반대로 그 패권을 물려받은 궁예는 901년 송악에서 왕건 부자를 만나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후삼국시대 중기에 들어서게되면서 신라는 이제 허물뿐인 국가가 되어버린다. 진훤과 궁예를 비롯한 많은 호족들은 신라에 대한 적개심을 적극적으로 표출해보였고,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기 전의 옛 유민들에게 부활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점차 백성들의 신망을 받게 된다. 옛 고구려 유민인 왕건 부자들과 결합하여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는 신라의 부석사에 가서 신라왕의 초상을 칼로 그어버리며 신라적 적개심을 그대로 내보였으며, 같은 시기는 아니지만 후백제의 진훤은 포석정에서 음주가무를 즐기던 경애왕을 자결케 하고 경순왕 김부를 새롭게 왕으로 삼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후고구려와 후백제의 치열한 세력다툼이 빛난 때였다. 우리에게도 꽤나 익숙한 진훤과 궁예, 그리고 왕건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면서 마치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전쟁을 펼친다. 궁예는 끊임없는 정복활동을 전개하며 후백제군을 공주 이남지역으로 철수시켰다. 공주가 백제 부흥의 중심지임을 생각할 때 궁예의 기세를 진훤이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이 시기의 육지전쟁이 해상전투보다 알려진 바가 많이 없으나 확실한 것은 궁예의 세력이 진훤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결론적으로 후삼국시대 중기의 패자(覇者)는 왕건을 등에 업은 궁예였다. 양자간의 치열했던 전투는 단 한번, 909년 왕건이 기습적으로 한반도 서남해지역을 공략하한 나주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후고구려가 한반도의 패권을 손에 쥐게 된다. 당시 서남해지역은 후백제에게 있어서 중국교류로로 중요한 거점이었지만, 이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던 별칭 수달, 능창이 끊임없이 교란을 펼치면서 서남해지역의 호족들을 완전히 규합시키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건에게 나주전투에서 패배하고, 능창조차 궁예의 손에 죽게 되면서 서남해지역의 패권이 후고구려에게로 넘어가게 되어버린 것이다. 나주는 후백제의 수도와 가까운 곳이었기에 훗날 다시 재탈환할 수 있었으나 서남해지역은 끝내 탈환하지 못하였다. 왕건은 서남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후백제의 대중통교를 차단하였다. 이를테면 왕건은 9066월 광주 염해현에서 진훤이 오월(吳越)에 보내는 선박을 나포하였다. 진훤은 후삼국의 세력경쟁에서 대외 주도권을 잡기위하여 오월과의 통교에 주력하였고 대중외교에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왕건은 진훤의 대오월 통교를 차단하여 진훤의 외교정책을 방해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과의 교통로가 끊이고 북으로는 궁예의 군대가 남진해오고, 남으로는 서남해지역의 왕건 부대가 북진해올 수 있는 위협 속에서 후백제는 결국 궁예 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다.

후삼국시대 중기는 왕건이 서남해지역을 정복함에 따라 후백제가 후고구려에게 끌려다는 모습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으며, 반대로 후고구려의 궁예정권은 한반도의 2/3을 차지하게 되면서 명실상부한 한반도의 패주로 자리잡게 된다. 이 시기는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한 901년부터 왕건에 의해 궁예가 축출되고, 고려가 건국되는 918년에 막을 내리게된다(901~918, 17).

 

3) 후삼국시대 후기

 

육월 을묘에 이르러 기장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이 몰래 모의하고 야반에 태조의 집에 가서 다 같이 추대할 뜻을 말하니 태조가 굳게 거절하여 허락하지 않는지라 부인 유씨가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입히고 제장이 부축하여 밖으로 나와서 사람을 시켜 달려가며 소리쳐 [왕공이 이미 의기를 들었다.]라고 하니 이에 분주히 달려오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먼저 궁문에 이르러 복을 치며 떠들석하게 기다리는 자가 또한 만여 명이나 되었다. 궁예가 이를 듣고 놀래어 말하기를 [왕공이 차지하였으니 나의 일은 이미 끝났구나 하며 이에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미복으로 북문을 빠져나가 도망가니 내인이 궁을 청소하고 신왕을 맞이하였다. 궁예는 암곡으로 도망하여 이틀 밤을 머물렀는데 허기가 심하여 보리 이삭을 몰래 끊어 먹다가 뒤이어 부양(강원도 평강)민의 살해한 바가 되었다.

-고려사-

고려사에 등장하는 궁예의 최후는 그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고를 낭비하고, 관심법으로 사람을 함부로 죽여 끝내 왕건에 의해 축출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궁예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많지만 결론적으로 외부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의 왕건에 의해 궁예 정권이 몰락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궁예에 이어 왕위에 오른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며 주변 호족과 신라를 포용하는 정책을 펼친다.

그러나 건국 후백제에게 밀리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중기 때는 내내 후백제를 압도하던 고려는 왕건의 쿠데타 후, 궁예를 따르던 많은 호족들에 후백제에 투항하거나 왕건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하며 고려 사회는 급속도로 불안정해졌다. 후백제와의 첫 전투인 조물성 전투에서 치열한 양상을 보였지만 927년 경애왕을 죽이고 돌아가던 후백제를 공격한 공산전투에서 고려군이 대패함에 따라 930년 고창전투 이전까지 고려는 후백제에게 압도당한다. 고창전투 이후부터는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는 형태가 고려가 통일하기 직전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후삼국의 최후 승자가 누가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왕건의 전쟁과 관련된 흔적들이 아직까지도 남아 오늘날 전국곳곳에 지명으로 굳어있다. 이처럼 후삼국시대 후기에는 후백제와 고려의 치열한 공방전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후삼국시대의 판도를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935년 천년왕국 신라가 고려에게 항복함과 동시에 경쟁자였던 후백제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진훤이 고려에 귀부해온 것이다. 이미 934년 운주성 전투에서 한번 승기를 잡았던 고려는 이러한 행운을 바탕으로 936년 일리천전투에서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삼국시대의 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다.

후삼국시대 후기는 우리나라 전쟁사에 있어서 짧은 기간에 수많은 전투가 다발적으로 일어난 때였다. 고려는 쿠데타 이후 후유증으로 한동안 후백제에게 열세를 보였으나, 결론적으로 신라의 항복과 후백제의 내분이라는 행운이 겹치면서 삼국통일을 이룩한다. 이 시기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918년에서 후백제가 멸망하고 삼국을 통일한 936년까지이며 또, 936년을 끝으로 후삼국시대는 막을 내리면서 고려왕조 500년의 역사가 새롭게 펼쳐지게 되었다(918~936, 18).

 

4. 맺으며

 

본고는 후삼국시대의 시기를 구분지어 보았으나 각 시기별에 해당되는 상세한 내용은 다루지 못했다. 후삼국의 역사가 비록 50년이 채 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36년의 일제강점기보다는 훨씬 긴 역사이다. 여러 사정에 따라 그 역사를 대강 훑어보기로 하자는 생각으로 이 논문을 작성하였다.

본고는 이 논문에서 후삼국시대의 개창시기에 대해서 동아시아 여려국가들과 비교하며 새롭게 제시해보았다. ‘신국가 건설에 초점이 맞춰진 우리나라와는 달리 중국과 일본의 경우 그 시대가 도래되도록 만든 특정 배경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에 그들과 같은 관점에서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난 889년을 후삼국시대의 개창시기로 주장해보았다.

또한 후삼국시대를 크게 세 시기로 구분했는데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전기시대는 수많은 반란세력들이 난립한 와중에 이미 거대한 세력을 형성한 양길과 진훤, 그리고 여전히 건재한 신라가 공존하던 때였다. 중기시대에는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와 후백제의 진훤을 중심으로 대강의 흐름에 대해서 설명해보았다. 후기시대에는 궁예를 축출한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후백제의 진훤과 치열한 공방전 끝에 후삼국시대를 통일한 때이다.

이처럼 후삼국시대는 인물을 중점으로 파악한다면 시대구분이 뚜렷하게 가능한 편이다. 지금부터는 한가지 제안을 해보고자 한다. 조금 주제를 벗어난 말이라지만 본고는 후삼국시대를 구분지으면서 단 한차례도 발해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후삼국시대는 889~936년까지 존속했다. 이 시기는 신라 말기에 해당하는데, 926년까지 북쪽에 발해가 존속해 있어 이른바 남북국시대로 불렸으므로, 926년 이전까지 포함해 후삼국시대로 보는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문제점이 있다. 발해가 삼국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서일까? 그렇지도 않다. 궁예는 발해와 외교전을 벌였고, 신라는 발해와 동맹한 사이였다. 또 발해가 멸망했을 때, 발해왕자를 비롯한 발해 유민들을 포용한 것도 후삼국시대의 고려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후삼국시대의 명칭문제에 대해서 전혀 생각해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후삼국시대를 대체할 명칭은 없을까?

슬픈 궁예의 저자이신 이재범 교수는 후삼국시대의 명칭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며 '전국시대' 혹은 '호족시대'라는 명칭을 쓰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호족시대라는 명칭에서도 역시 발해가 제외되는 느낌이 강하다. 본고는 임의로 신라 말기 반신라적인 새로운 나라가 신라에 독립하여 세워지거나 옛 고구려, 백제, 가야등의 후예들이 그들의 부활을 내세우며 부흥국을 세웠었다는 의미로 '독립부흥시대'로 지어보았다.

후삼국시대는 결코 짧은 역사를 지닌 시기가 아니다. 한국 왕조의 특성상 한 왕조가 적어도 500년동안 유지되고, 몇 번씩 침략해오던 외세를 방어하는 것이 전쟁의 전부였다. 그러나 후삼국시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한 전국시대로, 중국과 일본의 전국시대처럼 난세의 영웅들이 등장해 자웅을 겨루는 역사이다. 단순히 신라 하대의 혼란으로 빚어진 고대와 중세의 연결고리로 보기에는 역사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아쉬운 소재가 아닐 수 없다. 후삼국시대의 재평가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5. 참고자료

 

문헌자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고려사

고려사절요

 

학술자료

권영오, 신라하대와 신라말, 역사와경계 제90, 2014.3, 39-79 (41 pages)

 

도서자료

이재범, 슬픈 궁예푸른역사, 200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11.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1996

이도학, 궁예진훤왕건과 열정의 시대김영시, 2000

임용환, 한국고대전쟁사3. 부흥웅동과 후삼국혜안, 2012

강봉룡, 바다에 새겨진 한국사한일미디어, 2005

 

인터넷자료

네이버 블로그, Juwang (2014.02.17) “원종애노의 난과 진성여왕

http://blog.naver.com/hmjin80/120207755543

네이버 지식백과 - 원종·애노의 난 [元宗哀奴]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원종·애노의 난 [元宗哀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위키백과 - 견훤

네이버 블로그, 학당 (2004.06.04.) “후삼국시대

http://blog.naver.com/micro21c/20002966110

네이버카페 삼국지 도원결의, 만력대제 (2012.06.02.) “후삼국 시대 전투

http://cafe.naver.com/sam10/309004






'후삼국史보는 나무 > 소개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후삼국시대 새 이름의 필요성  (1) 2010.10.29
후삼국시대의 재조명  (0) 2010.10.29
by 초령목 2013. 1. 5. 15:05


 삼국사기 인물열전 궁예전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궁예는 5월 5일에 외가에서 출생하였다고도 한다. 그 때 옥상에 긴 무지개와 같은 흰 빛이 하늘에 까지 닿았다. 이것이 상스러운 일이라 하여 궁예는 버려졌는데 그 과정에서 평생에 잊지못할 상처를 눈에 박았다. 그 후로 유모에 의해 길러지다 출생의 비밀을 듣고 10여세에 절에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암시를 받게 된다. 전국에서 난이 일어나자 양길의 휘하로 들어가 그에게 인정을 받아 힘을 키우고 명주를 중심으로 독립을 하여 후고구려라는 새로운 왕국을 세웠다. 처음 후고구려를 다스릴 때는 왕건이라는 든든한 후원자가 그를 도와주어 백제와 신라와 비교하여 적수가 없었다. 게다가 공평무사한 그의 성격에 병사들의 믿음을 샀고 정치까지 잘하였으니 백성들이 그의 보호를 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자 난폭해지며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죽이고 관심법이라며 신하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점차 궁예의 민심은 잃어갔고 상대적으로 훨씬 인자하고 궁예가 가장 총애했던 왕건쪽으로 민심이 기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궁예가 왕건까지 의심하자 이를 보다 못한 왕건과 그의 부하들이 결국 쿠데타를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이 후고구려의 새로운 왕이되고 국호도 고려로 바꾸었다.

 그리고 바로 궁예의 죽음. 여기서 정사와 야사의 기록이 달라진다. 물론 지금 정사에 적힌 기록들도 연구를 하다보면 과장되고 궁예를 깎아내리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많이 보이나 지금은 궁예의 죽음에 대한 야사와 정사의 차이를 알아보기 위해 글을 쓰므로 생략하겠다.


궁예, 정사속의 죽음

  정사속의 궁예의 죽음은 처참하다. 고려사에는 궁예의 죽음을 이렇게 전한다.

 육월 을묘에 이르러 기장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이 몰래 모의하고 야반에 태조의 집에 가서 다 같이 추대할 뜻을 말하니 태조가 굳게 거절하여 허락하지 않는지라 부인 유씨가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입히고 제장이 부축하여 밖으로 나와서 사람을 시켜 달려가며 소리쳐 [왕공이 이미 의기를 들었다.]라고 하니 이에 분주히 달려오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먼저 궁문에 이르러 복을 치며 떠들석하게 기다리는 자가 또한 만여명이나 되었다. 궁예가 이를 듣고 놀래어 말하기를 [왕공이 차지하였으니 나의 일은 이미 끝났구나 하며 이에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미복으로 북문을 빠져나가 도망가니 내인이 궁을 청소하고 신왕을 맞이하였다. 궁예는 암곡으로 도망하여 이틀 밤을 머물렀(신숙)는데 허기가 심하여 보리 이삭을 몰래 끊어 먹다가 뒤이어 부양(강원도 평강)민의 살해한 바가 되었다.

 정사속에 그는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피산길에 보리이삭을 훑어 먹다가 농민에게 붙들려 돌에 맞아 죽은 인격 파탄자로 나오고 있다. 다른 역사서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전하는것으로 보아 아마 모두 하나의 역사서를 참고하여 썼을 것이다. 아마 부양 백성들은 자신들이 죽인 사람이 애꾸눈의 괴물로 알았을 것이다. 궁예가 죽는 순간까지도 그가 한때 자신들을 돌봐주던 왕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채....

 즉 정사속의 궁예는 대부분의 우리가 알고 있는 '폭군 궁예'의 통쾌한 최후의 모습이었다.


궁예, 야사속의 죽음


 비참하게 죽었던 정사와는 달리 야사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진행된다. 정사속에서는 그저 인격파탄자로 비참한 죽음을 당했던 그지만 야사에서는 그는 끝까지 왕건과 싸워 항전한 왕으로 그려진다.

 전설 속의 궁예의 최후는 절대 비굴하지 않았다. 왕건의 군사 역모가 있던 날, 왕은 자신의 나라 도읍지를 마지막으로 순방한 것 같다. 그날 밤 왕은 남문을 통해 도성을 빠져 나왔다. 숨을 가다듬고 재기를 위해 찾아갔던 첫 피신처는 도성 서남쪽의 중어성. 평원 한가운데 세운 도성의 전략적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세웠던 12개 산성 가운데 한 요새다. 현재 위치는 철원읍 대마리. 왕은 이 요새를 버리고 더 서쪽으로 나가 현 연천군 신서면 승양리의 역시 외곽성인 승양산성으로 들어갔다. 또다른 외곽성 보개산성(현 포천군 관인면)은 승양산성의 동쪽에 있었다. 그러나 왕은 어느새 더 동쪽의 명성산성(현 펄원군 갈말읍)으로 들어가 최후 보루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산성에서 군대를 해산한다. 그리고 통곡하는 군사들을 뒤로하고 홀로 북쪽으로 떠난다. '명성이란 말뜻을 굳이 풀이한다면 '큰 울음소리'. 훗날 사람들은 그때 군사들이 슬피 울었다고 해 그 산성을 '울음산성', 산성이 있는 그 산을 '울음산'이라고 불렀다. 명성산성에서 해산했지만 충성스러운 많은 군인들이 왕이 걸어간 길을 뒤따라 군탄리까지 왔다. 왕은 "나를 따르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궁예가 강변에서 한탄했다는 한탄강을 건너가 버렸다. 훗날 사람들은 그곳이 바로 그때 '군사들이 슬피 울며 탄식한 곳'이라며 '군탄'은 거기서 유래했다고 해석했다. 갑천은 평강 하갑리 동북쪽의 작은 내. 왕은 자신의 정예병들을 양성하던 검불량 군사훈련장을 지나 삼방협의 깊은 골짜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결했다.              www.dmzline.com/23

 남루한 차림의 고려왕(궁예)이 발 붙일 땅을 찾지 못하고 심벽한 석을 찾아 삼방 골짜기로 들어왔다. 삼봉 최고지에 올라 은피하여 재도할 땅을 둘러 볼 즈음 문득 한 스님을 만나 혹시 용잠호장할 땅이 없겠느냐고 물으니, 스님이 말하기를 이 속세를 들어와서 살길을 찾는 것은 어리석다고 했다. 이에 크게 절망하고 그 곳에서 깊은 연못을 향해 그대로 몸을 던지니 물에는 빠지지 아니하고 우뚝 선 채로 운명했다.  - 육당 최남선 '풍악기유'

 궁예가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던 철원은 화산대지이다. 따라서 철원에서 가장 흔한 돌인 현무암의 특징은 용암덩어리가 공기중에서 식으면서 빠져나간 가스의 흔적으로 인한 구멍이 숭숭뚫린 현무암 화산석이다. 이와 관련한 궁예의 일화는 어느날 왕건과 싸우고 궁으로 돌아오던 궁예가 개울을 건너던 중 우연히 이 현무암을 발견하곤 돌에 뚫린 수많은 구멍이 벌레가 돌을 파먹었다고 생각하곤 스스로의 자격지심으로 "돌을 벌레가 파먹다니 이런 해괴한 일이 있다니! 아~ 나의 운명이 다하였구나"하고 자조하였다는 일화가 전해내려온다.

 철원에서 금강산 들어가는 철도가 하나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 삼방역이라는 역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근데 그 역 건너에 큰 돌담굴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래 그 돌담굴이 궁예의 무덤이다 그래 그렇게 거기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 왜 그 돌담굴을 궁예의 무덤이라고 하느냐면은 그 왕건의 군사들이 치열하게 쫓아 오면서 쏘니까는 이 궁예가 웬만한 화살은 맞으면은 그냥 쑥 뽑아서 던지는 그런 장사였대요. 근대 하도 많이 쏘아서 장사도 지치니까는 상나무 아름드리 곁에 가서 기대고 섰더라는 거야. 그래 하도 치열하게 화살을 던지니까는 그래 궁예가 고슴도치 모양으로 몸에 꽂혔는데 안 쓰러지더래는 거야. 그래 하도 이상하다. 그래 가서 보았더니 죽었더래는 거야. 발길로 차도 안 넘어가고 그래 목에다 뭘 두르고 잡아 당겨도 안 넘어진다는거아. 그래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래 장사는 역시 죽어서도 장사구나. 그래 별짓을 다 해도 안 넘어지니까는 그냥 선 채로 돌로 싸아서 묻어서 궁예의 무덤을 돌로다 묻어서 궁예의 무덤이 그렇게 되었다. 그래 눕지도 못하고 죽은거지. 그래 쓰러지지가 않으니까는. - 화현면 설화

또 명성산에는 산정호수 옆 두개의 봉우리에 궁예가 올라 망을 보았다는 곳이있고, 등룡폭포 위 샘터이름이 궁예약수, 자인사에서 궁예가 기도를 올렸다는 전설, 정상에서 강포리쪽으로 이어지는 궁예능선은 왕건의 공격을 피해 항거하며 쌓았다는 성터와 궁예왕이 숨었었다는 궁예왕굴 등이 남아있다.

 이처럼 야사속의 궁예는 결코 비겁하지 않았다. 그는 명성산을 기점으로 왕건에 끝없이 항쟁하다 더이상 희망이 없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천명에 따르던 왕이었다. 또 울음산 등의 별칭을 통해 궁예의 리더십과 그의 포용력이 왕건에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궁예라는 영웅은 단지 왕건이라는 영웅에게 정치적으로 패배한 비운의 왕이었다. 그가 죽자 모두가 기뻐한 것이 아니라 슬퍼했다고 하니 영웅 궁예의 억울함을 알만하다. 이를 뒷받침 해주듯이 왕건의 쿠데타가 성공하자 실제로 궁예를 따르던 많은 호적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심지어 고려와 적대관계였던 후백제에 까지 항복을 하는 호족들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야사속의 이야기를 전부 믿으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승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역사라면 야사의 기록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야사속에는 민중의 소망과 정사에서는 알려져서는 안될 진실이 담겨 있기때문이다.

 






by 초령목 2012. 4. 5. 01:00

궁예는 신라인으로 성은 김(金)씨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며, 어머니는 헌안왕의 빈어(嬪御,임금의 첩)이며, 그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또는 경문왕(景文王)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하는데, 5월 5일에 외가에서 출생하였다고도 한다. 그 때(其時) 옥상에 긴 무지개(長虹)와 같은 흰 빛(素光)이 하늘에 까지 닿았다. 일관(日官)이 아뢰말하기를 이 아이가 중오일(重午日)[1]에 태어났고, 태어날때부터 이를 가지고 있으며, 또 광염(光焰)[2]이 이상하였으니, 장래에 국가에 이롭지 못할듯 하옵니다. 마땅히 기르지 말아주옵소서 하였다. 왕이 중사(中使)[3]를 불러 그 집에 가서 (아이를) 죽이도록 하였다. 사자(使者)가 아이를 포대기(襁褓)에서 빼았아 아이를 누(樓, 여기서는 마루) 아래로 던졌는데 유모(乳婢)가 몰래 받았는데, 잘못 손을 찔러 한눈이 멀게 되었다. (아이를) 안고 도망쳐 (유모가) 고생하며 양육했다. 나이가 10여살이 되자 유희(遊戱)하기만 하므로 비자(其婢,유모)가 말하기를, '너는 태어나고서 나라의 버림을 받아 내가 차마 보지 못해 몰래 길러 지금이 이르렀는데 너의 이런 미친 행동으로 다른사람이 반드시 알게될 것이다. 이러면 너와 나는 함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어찌하겠느냐'하였다. 그러자 궁예가 울며 그러면 내가 가서 어머니의 근심이 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세달사(世達寺)로 가니 지금의 흥교사(興敎寺)[4]이다. 머리를 깎고(祝髮)하고 중이 되어 스스로 호를 선종(善宗)이라고 붙였다. 자라서는 승려의 계율(僧律)에 따라 주의하지 않고(拘檢) 담기(膽氣)가 있었다. 재를 올리러 행차(行次)하는데 나가자 까마귀가 무언가를 물어다가 그가 소지(所持)한 바리때에 떨어뜨렸다. 보니 아첨(牙籤)[5]에 왕(王)자가 쓰여 있었다. (궁예가) 이를 숨기고 (남에게) 말하지 않고 자부(自負)했다. 신라가 보기에 쇠퇴한 시기(衰季)에 이르므로, 정치가 어지러워져 백성들이 흩어지고, 왕기(王畿)[6] 밖의 주현(州縣)이 반으로 나뉘어(相半) 상반(叛附)하고[7], 온 동네의 도적의 무리가 개미떼처럼 모여들어 일어났다. 선종(궁예)은 이런 어지러운 틈을 타서 무리를 모으면 뜻을 이룰수 있다고 보아 진성왕(眞聖王) 즉위(卽位) 5년, 대순 (大順) 2년, 신해(辛亥)년 (서기 891년) 죽주(竹州)[8]의 적괴(賊魁) 기훤(箕萱)에게 투항했다. 기훤이 깔보고 거만하여 (궁예에게) 예우하지 않았다. 선종이 답답하고 근심하여 스스로 불안하니, 마음을 가라앉혀 기훤의 부하인 원회(元會), 신훤(申煊)등을 친구로 삼았다. 경복(景福)원년 임자(壬子)년 (892년)에 북원(北原, 현 원주시)의 도적 양길(梁吉)에게 투항하였다. 양길이 예우하여 일을 맡곁다. 드디어 군사를 나누어 주니 동쪽으로 가서 땅을 공략하게 하였다.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에 머물며 주천(酒泉, 예천),내성(奈城,영월),울오(鬱烏, 평창), 어진(御珍, 울진)등의 현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받았다. 건녕(乾寧) 원년(894년) 명주(溟州, 강릉)로 들어갔는데, 무리(有衆)가 3500명[9]이나 되었다. 이 무리를 14대로 나누고 금대검모흔장귀평장일(金大黔毛昕長貴平張一)[10]등을 사상(舍上) [사상(舍上) 은 부장(部長)의 뜻][11]으로 삼고, 사졸(士卒,병사)과 더불어 감고(甘苦)와 노일(勞逸)[12]을 같이 하며 주고 빼앗음도 공공으로 돌리며 사적으로 하지 않으니 사람들의 마음(衆心)이 (그를) 존경하며 사랑(畏愛)하여, 그를 장군으로 추대했다. 이에 저족(猪足)[13],생천(狌川)[14],부약(夫若)[15],금성(金城)[16],철원(鐵圓, 철원군)등의 성을 격파했다. 군사들의 소리가 심하게 우렁차니, 패서(浿西)의 적구(賊寇,도적)중 항복해 오는 자가 많았다. 선종이 생각하길 무리가 많으므로 개국할수 있겠다고 생각해 왕을 칭하고, 내외의 관직(官職)을 갖추었다. 우리 태조[17]가 송악군(松岳郡)에서 투항하자, (궁예가 왕건에게) 철원군 태수의 자리를 주었다. 3년 병진(丙辰)[18]에 승령(僧嶺)[19],임강(臨江)[20]의 두 현을 공격해 빼았았다. 4년 정사(丁巳)년[21]에는, 인물현(仁物縣)[22]이 항복해왔다. 선종(궁예)은 송악군이 한강 이북의 이름난 군으로, 산수가 매우 뛰어나다(奇秀)하여 드디어 도읍으로 정하고, 공암(孔巖) [23]검포(黔浦)[24]혈구(穴口)[25]등의 성을 격파했다. 그때 양길은 그대로 북원(원주)에 머물러 있었다. 양길은 국원(國原, 충주)등 30여개의 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선종(궁예)의 땅이 넓고 백성이 많다는 것을 듣고 대로(大怒)하여 30여성의 경병(勁兵)[26]으로 습격하려 하였으나, 선종(궁예)이 이를 몰래 알아내어 먼저 공격하여 대패하였다. 광화(光化)원년 무오(戊午)년 봄 2월에 송악성(松岳城)을 고치고 우리 태조(왕건)을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楊州)[27]와 견주(見州)[28]를 쳤다. 겨울 11월에는 팔관회(八關會)를 시작하였다. (광화) 3년 경신(庚申)년[29]에는 태조에게 광주(廣州), 충주(忠州), 당성(唐城)[30], 청주(靑州) [또는 청천(靑川)이라고도 함][31] 괴양(槐壤)[32]등을 정벌할 것을 명하여 모두 평정하고, 공으로 태조(왕건)에게 아찬(阿湌)의 직을 주었다. 천복(天復)원년 신유(辛酉)년[33], 선종(궁예)이 왕을 자칭하고 사람들에게 알려말하기를 '지난날 신라가 당에 청병(請兵)하여 고구려가 무너졌기 때문에 옛 서울 평양(平壤)은 궁하여 풀이 무성하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을 것이다' 하였다. 아마도 태어나서 (신라로부터) 버려진것에 원한을 가져서 이 말을 했을 것이다. 일찍이 남쪽으로 가서 흥주(興州)[34]의 부석사(浮石寺)에서[35] 벽에 그려진 신라왕의 초상을 보고 칼을 뽑아 (그림을) 내리 쳤는데, 칼자국이 지금도 남아있다.

천우(天祐)원년 갑자(甲子)년에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摩震)로 하였다. 이때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여, 광치내(匡治奈)[지금 시중(侍中)]·서사(徐事)[지금 시랑(侍郎)]·외서(外書)[지금 원외랑(員外郞)]의 인원을 채우고,[36] 또 병부(兵部)[지금 군부(軍部)]· 대룡부(大龍部)[창부(倉部)를 일컬음]·수춘부(壽春部)[지금 예부(禮部)]·봉빈부(奉賓部)[지금 예빈성(禮賓省)]·의형대(義刑臺)[지금 형부(刑部)]·납화부(納貨部)[지금 대부시(大府寺)]·조위부(調位部)[지금 삼사(三司)]·내봉성(內奉省)[지금 都省(도성)]·금서성(禁書省)[지금 비서성(秘書省)]·남상단(南廂壇)[지금 장작감(將作監)]·수단(水壇)[지금 수부(水部)]·원봉성(元鳳省)[지금 한림원(翰林院)]·비룡성(飛龍省)[지금 태복시(太僕寺)]·물장성(物藏省)[지금 소부감(少府監)]을 설치하였다. 또 사대(史臺)[모든 역어(譯語, 외국어)의 학습을 맡음]·식화부(植貨府)[과수(果樹)의 재식(栽植)을 맡음]·장선부(障繕部)[성황(城隍)의 수리를 맡음]·주도성(珠淘省)[그릇의 제조를 맡음]을 설치하고, 또 정광(正匡), 원보(元輔), 대상(大相), 원윤(元尹) 좌윤(佐尹), 정조(正朝), 보윤(甫尹), 군윤(軍尹), 중윤(中尹)등의 품직을 만들었다.

가을 7월에 청주(靑州, 청주시와 청원군)의 1천가구를 철원군(鐵圓城)으로 옮겨 서울로 삼았다.[37] 상주(尙州)등 30여 주를 정벌해 빼았았다. 공주(公州)의 장군홍기(弘奇)가 항복해 왔다.

천우(天祐) 2년 을축년(乙丑) (905년), 새 서울로 들어와 궁궐과 누대를 매우 호사하게 고쳤다. 무태(武泰)연호를 성책(聖冊) 원년으로 고쳤다. 패서(浿西)에 13진을 나누어 설치하였다. 평양성주장군 검용(黔用), 증성(甑城)의 적의, 황의를 한 도적과 명귀(明貴)등이 항복해왔다. 선종(궁예)이 (나라가) 강성한데 자긍심을 갖고, (후백제와 신라, 특히 신라를) 병탄하려는 의욕을 품었다. 그는 국민들에게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도록하였으며, 신라에서 오는 사람은 모두 베어 죽였다.

주량(朱梁) 건화(乾化) 원년 신미년 (911년)에는 성책(聖冊)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 원년으로 고쳤으며,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고쳤다. 태조(고려 태조)로 하여금 군사를 보내 금성(錦城)등지를 쳐 금성(錦城)을 나주(羅州)로 개칭했다. 이 공을 논하여 태조를 대아찬(大阿湌)장군으로 하였다.

선종(궁예)은 미륵불(彌勒佛)을 자칭하여 머리에 금책(金幘)[38]을 쓰고 몸에 방포(方袍)[39]을 입었으며, 맏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 둘째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하였으며 외출할때는 항상 백마를 타며 그 꼬리와 말갈기를 채색 비단으로 장식하고, 소년소녀들로 하여금 번개(幡蓋)[40]와 향화(香花)[41]를 들고 앞에서 인도하고, 또 비구(比丘) 200여명에게 범패(梵唄)를 부르며 뒤에서 따라오게 하였다.

또 불경 20권을 썼는데, 그 내용이 요망(妖妄)해 모두 불경(不經)스러웠다. (궁예가) 때때로 반듯하게 앉아 강설(講說)을 했는데, 승려 석총(釋聰)이 모두 사설(邪說)[42]이고, 괴상한 이야기라며 (이러한 강설로는) 남을 가르칠 수 없다하였다. 선종(궁예)이 화를 내어 철추(鐵椎)로 때려 죽였다. 3년 계유(癸酉) (913년)에 태조(왕건)을 파진찬(波珍湌) 시중(侍中)으로 하고, 4년 갑술(甲戌) (914년)에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에서 정개(政開)원년으로 하고 태조를 백강장군(百舡將軍)[43]으로 하였다. 정명(貞明)원년(915년)에 부인 강씨가 왕이 법도에 맞지 않는 일을 많이 한다 하여 정색(正色)을 하고 간언하였다. 왕이 미워하여 말하길, 네가 다른사람과 간통하니 어찌된 일이냐 하였다. 강씨가 말하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겠냐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신통력으로 보고있다 하여 쇠방망이를 불로 가열해 음부에 절구질해 죽이고 그의 두 아이를 죽였다. 그후 의심이 많아지고 화를 잘 내니 보좌하는 관리와 장수, 관리들 부터 평민까지들이 무고하게 죽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부양(斧壤)과 철원(鐵圓)사람들이 그 독에 어찌 이길수 없었다.

이보다 전에,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당나라에서 철원 시전(市廛)으로 와서 살았다. 정명(貞明)4년 무인(戊寅)년 (918년)에 시장안에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괴위(魁偉)하였으며 머리털이 모두 희었으며, 옛날 의관(衣冠)을 입은 채 왼손에는 사기로 된 주발, 오른손에는 낡은 거울을 들고 있었다. 그가 창근에게 내거울을 사겠냐고 하니 창근이 곧 쌀과 그것을 바꾸었다. 그 사람이 쌀을 거리의 구걸하는 아이들에게 나누어준 후 어디로 갔는지 알수 없었다. 창근이 그 거울을 벽 위쪽에 걸었는데, 해가 거울면을 비추자 가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읽어보니 옛날 시와 같은 것으로 내용을 간략하게 말하면

上帝降子於辰馬: 상제가 아들을 진마(辰馬)[44]에 내려 보내니
先操鷄後搏鴨: 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때린다
於巳年中二龍見: 뱀띠해에는 두 마리 용이 나타나는데
一則藏身靑木中: 한마리는 푸른 나무에 몸을 숨기고,
一則顯形黑金東: 한마리는 몸 형체를 검은 금 동쪽에 나타낸다.

창근이 처음에는 이런 글이 써진줄을 몰랐으나, 이를 본 후에는 예사롭지 않다고 보아 이를 왕에게 고하였다. 왕이 유사(有司)에게 명해 창근과 함께 그 거울의 주인을 물색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다만 발답사(勃颯寺)불당에 진성(鎭星)[45]소상(塑像)이 있었는데, 모습이 그와 같았다. 왕이 한숨쉬며 이상히 여기다가 문인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등에게 풀이하게 했다. 함홍등이 서로 말하기를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냈다는 것은 진한과 마한을 일컬음이요, 두마리 용이 나타나 한마리는 푸른 나무에 몸을 숨기고, 한마리는 몸을 검은 쇠 동쪽에 나타낸다는 것은 푸른 나무가 소나무를 일컬으니 송악군 출신으로 용이 이름에 들어간 사람의 손자, 즉 지금의 파진찬 시중이요, 검은 금은 철이니 이는 지금의 도읍 철원을 일컫는 바이므로 왕이 여기서 처음 일어났다가 여기서 멸망한다는 말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때린다는 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나중에 압록(鴨綠)에 이른다는 뜻이다 하였다.

송함홍들이 서로 말하기를, 지금 왕이 혹독하게 나라를 다스리니, 우리들이 만약 사실대로 말하면 혼자도 아닌 우리무리가 김치와 젓갈(葅醢)이 될 뿐아니라 파진찬(波珍湌, 왕건)도 나쁜 일을 당할 것이다. 이에 듣기 좋게 꾸며 보고했다. 왕이 흉학(凶虐)한 일을 멋대로 하니 신하들이 떨며 두려워(震懼)하며 어찌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장군 홍술(白玉),삼능산(三能山)복사귀(卜沙貴). 즉, 홍유(洪儒), 배현경(裴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謙)의 청년때 이름이었는데, 이 네명이 비밀스럽게 모의해 태조의 사제(私第)로 가서 말하길, 왕이 부당한 형벌을 내려 부인과 아들을 죽이고 신하들을 모조리 죽여[46] 모든 사람이 도탄에 빠져 편안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혼(混)한 (임금)을 폐하고 명(明)한 (임금)을 세우는 것이[47]천하의 큰 뜻이니. 공이 탕(湯)(왕)과 무(武)(왕)의 일을 행하길 바란다 하였다.

태조(왕건)이 불쾌한 얼굴빛을 드러내며 거절하며, 나는 충순(忠純)[48]한 것으로 자처했으므로 지금 임금이 포악하고 어지럽지만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대체로 보아 신하가 왕으로 바꾸어 앉는 것을 혁명이라 한다. 나는 실로 덕이 적으니 감히 은(殷)과 주(周)의 일[49]을 본받겠느냐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때는 두 번다시 오지 않는 것으로 만나기는 어렵지만 놓치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데 받지 않으면 도리어 큰 허물이 될 것입니다. 지금 정사가 어지럽고 나라가 위험에 처해 백성들이 모두 왕을 원수로 보는데 오늘날 덕망이 공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습니다. 하물며 왕창근이 얻은 거울의 내용이 저러한데, 어찌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독부(獨夫)의 손에 죽임을 당하겠습니까 하였다.

부인 유씨도 장수들의 말을 듣고서 태조에게 말했다. 어진 사람이 어질지 못한 사람을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말을 듣고 첩도 화를 내게 되는데 대장부는 어떻겠습니까? 지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갑자기 변했으니, 하늘의 명령이 돌아온 것입니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받들고 문을 나서며 왕공이 이미 정의의 깃발을 들었다고 앞에서 외치도록 하였다. 이에 앞뒤로 바쁘게 따르는 자의 수가 얼마인지 알 수 없었으며, 또 먼저 궁성 문에 이르어 북을 떠들썩하게 치며 기다리는 자가 모두 1만여명이었다. 왕이 이를 듣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다가 이에 미복(微服)[50]으로 갈아입고 숲으로 들어갔다.

그는 얼마 못가 부양(斧壤)주민에게 해(害)를 입었다.

궁예는 당 대순(大順) 2년(891년)에 일어나 주량(朱梁) 정명(貞明) 4년(918년)까지 이르렀으니 28년만에 망한 것이다.

by 초령목 2012. 4. 5. 00:35

HOME > 정보산책 > 역사 이야기
▲ 철원 궁예도성터 ▲ 반월성에서 본 포천시
궁예(?.918)는 그 출생에 대하여 신라 헌안왕, 경문왕, 신무왕의 아들로 말해지는 왕족설과 장보고의 외손자설 등이 있다.
탄생설화에 의하면 그는 5월 5일 외가에서 출생하였는데,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단오날 태어났으며 나면서부터 이가 나고 또한 이상 한 빛까지 나타나므로 장차 국가에 해로울 것이라고 하였다. 이를 믿 은 왕이 죽일 것을 명하여, 사자가 그 집에 가 강보에 싸인 아이를 빼 앗아 다락 밑으로 던졌다. 이 때 다락 밑에 숨어 있던 유모가 아이를 받았으나, 잘못하여 손가락으로 눈을 건드리는 바람에 애꾸눈이 되었 다고 한다. 이것은 그가 신라 왕족이었으나 왕실의 내분으로 인하여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하였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 뒤 궁예는 유모 에 의하여 키워졌으며, 세달사(世達寺)에서 출가하여‘선종(善宗)’이 라 이름하였다.
그는 소년 성장기를 중도 아닌 속인도 아닌 수도승 즉 수원승도(修院僧徒)로 지내면서 절의 규율에 구애받지 않았고 건들거리며 담기가 있었다고 한다. 즉 세달사의 재가화상(在家和尙)으로 사찰 소유의 농 지에서 노동에 종사하고, 일단 유사시 전투력화 할 수 있는 비승비속 (非僧非俗)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어 궁예는 양길의 휘하에 있다가 894년 명주(강릉)를 점령하면서 장군에 추대되고 있다. 신라말 고려초 호족시대에 자의적으로 장군을 칭한 것은 궁예가 처음이었다. 여기서 궁예는 휘하 세력들과 의협집단 적인 군사체제를 형성하는데 장군과 그 집단의 결합은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일선에서 만나 자발적으로 심적 인격적으로 결합된 형태였다. 이러한 초기 궁예 세력은 고려 중기 최씨 무신정권의 정권형태와 비교 되며, 당시 당나라 말기의 절도사에 의한 반독립적인 할거형태와 견줄 수 있다. 그런데 결합체제는 일본역사에서 막부체제로 무사집단에 의 해 이루어진 제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강릉에 이어 인제ㆍ화천ㆍ김화ㆍ철원을 점령하고, 오늘날 황 해도 지역인 패서지역의 투항과 개경호족세력 왕건의 귀부를 받아들 여 오늘날 남한강과 한강유역 일대인 중부 지역을 장악하는 대 세력을 형성하고 후삼국의 패자로 등장하였다.
▲ 포천 궁예미륵 ▲ 포천 궁예성(보가산성) ▲ 궁예도성 위치도
▲ 포천 반월성
그리고 궁예는 고려(高麗) - 마진(摩震) - 태봉(泰封)으로의 국호 개 칭을 통하여 지역성을 바탕으로 출발하여 일통삼한의 웅대한 정치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자주대국의 기치를 올렸다. 여기 에 그의 정치철학을 담아 그 의미로 후고구려국에서 대동방 국(大東方國)으로, 나아가 우주질서에 순행하여 상생의 평등 세계를 펼치고자 했던 것이다. 또 무태(武泰) - 성책(聖冊) - 수덕만세(水德萬歲) -정개(政開)로의 연호를 쓰면서 자주적 이고 우주의 순행질서를 따라 혁명의 원리와 선양의 원리를 수용하여 나라를 경영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미륵신앙을 정 치이념으로 제시하여 태평성대의 이상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현실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궁예는 891년 자립하여 후고구려를 세운 뒤 918년에 이르 기까지 약 28년 동안 권좌에 있다가 멸망하였다. 궁예의 통 치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인데, 종래의 사료들은 모두 부정적 인 평가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궁예는 정사(正史)에 나타 난 정신 파탄자로서의 비참한 최후와 달리, 그에 대한 생생한 전설과 지명이 구전되고 있으며, 현존하는 순천 김씨, 광산 이씨는 그의 후손으로 되어있어 족보에 살아 계승된 궁예의 이면사가 있음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즉, 철원.연천.포 천 등지의 궁예 최후의 방어성지 즉 보가산성과 명성산성. 반달산성.운악산성을 비롯한 안성지역에까지 이르는 궁예 미륵의 구전설화와 민간신앙를 통하여 후세 승자의 역사 속 에 묻힌 패자 영웅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북통일의 민족적 과제와 평등한 경제생활을 이룩 함으로써 해결되어야 할 우리나라 내부모순과 자주국방과 외 교 등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궁예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 다고 본다. 후삼국시대라는 정치적 격변기에 있어서 치열하게 활동했던 인물이 역사의 패자가 되었다고 하여, 또 정사의 뒤 안길에 매립되어 있다고 하여, 역사의 승자와 더불어 시대모순 을 해결하고자 했던 동반자적인 활동의 실체와 역사성을 소홀 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왕건의 고려 건국의 전초적인 바탕에 는 궁예의 자주적이고 강력한 국가경영이 있었던 것이다.
정권교체는 동양적 역성혁명에 의한 평화적이고 긍정적인 선양형식 이 있는 한편, 쿠데타 형태로 부정적으로 행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 나 그 실체는 비슷하면서 포장만 달리하는 경우가 많음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나《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궁예는 후사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 자신이 부인과 청광보살ㆍ신광보살로 칭하던 아들을 무 자비하게 죽인 사실이 그것을 인정하게 한다. 그러나 궁예의 후손은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순천김씨와 광산이씨는 그들의 족보에 궁예 의 후손임을 밝혀놓고 있다.
순천김씨 세보에는 궁예가 신무왕(장보고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김우징)의 다섯째 아들로 되어 있으며, “궁예의 후손 중 하나는 순천김 씨가 되었고, 하나는 광산이씨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족보 에 수록된 시조 부분의 사실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다. 후손들이 족 보를 만들 때 대체로 자기 조상을 미화하는 경향이 있어 황당한 전설 이나 신화를 싣고 있음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순천김씨 족보 는 궁예를 선조로 실어놓고 있다. 즉, 순천김씨 철원공파의 세보에 따 르면 자신들의 시조는 청광이고, 청광의 아버지는 궁예라고 밝혀놓고 있다. 또 광산이씨 세보에도 궁예가 23세 조로 기록되어 있다. 즉 광산 이씨 세보에는 궁예는 경문왕의 서자이며, 그 아들 청광은 순천김씨의 시조, 신광은 광산이씨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더욱 흥미있는 것은 순천김씨의 중시조인 김종서와 광산이씨의 중 시조인 이선제는 궁예를 부정적으로 서술한《고려사》편찬에 밀접한 관 련이 있다는 것이다. 김종서는 조선초 정승에 오른 인물로 실제로《고 려사》편찬을 관장하였고, 이선제 역시 판서를 역임한 인물로 고려사의 한 부분을 집필하였다. 이들은《고려사》에 궁예가 어떻게 서술되는가 를 알면서도 그 궁예를 선조로 모시고 살아갔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 은 궁예가 순천김씨와 광산이씨의 선조라는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 게 하는 것이다. 이들 가계의 전통은 궁예를 정사에 전하는 탐학한 왕 이 아니라 태평성대의 이상세계를 만들고자 했던 개혁군주로서 시대 의 영웅이었음을 믿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글·사진 | 나각순_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전임연구위원, 문학박사

by 초령목 2012. 3. 28. 22:32

[폭군인가? 비운의 제왕인가? - 궁예(弓裔)] - 2

▶호족들과 갈등 속에서 몰락

911년 궁예는 다시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으로 바꾼다. 하지만 궁예는 호족들의 반발을 극복하지 못했다.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의 저자 박영규씨는 '호족들은 조직적으로 궁예에게 대응했고 이에 궁예는 '전횡'과 '독단'으로 맞섰다.고 해설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왕건'과 불화가 생겼으며 경국 '918년 6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고려사>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궁예가 왕건을 태조로 옹위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서 '왕공이 벌써 천하를 얻었으니 내일은 끝났다.'며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 변복을 하고 산골로 도망쳐 나왔다. 이틀 밤이 지난 후 배가 몹시 고파 보리이삭을 잘라 훔쳐먹다 부양(강원도 평강)의 백성들에게 살해됐다."

또 <삼국사기>에는 '도주하다가 부하에게 피살'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강원도 철원 지방에 내려오는 '전설'은 이와 아주 반대되는 궁예의 모습을 담고 있어 주목을 끈다. 육당 최남선이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철원 지방에서 채록한 전설을 기록한 '풍악기유'에 따르면 '궁예는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 설움을 견디지 못한 채 천명을 알고 이에 순응해 자결한 의군'으로 전해지고 있다. '슬픈 궁예'라는 책을 펴내 화제를 모은 '이재범 경기대 교수' 또한

"궁예의 포악함 때문에 반란이 일어난 것으로 정사엔 기록되어 있지만 실은 고구려계 호족들의 조직적은 결탁에 의해 왕좌에서 물러나게 된 것으로 반란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궁예의 포악함을 지나치게 부각시켰을 수 있다."라고 분석한다.

▶'전제적 폭군' , '비운의 제왕' 평가 엇갈려

나라를 세우고 미륵이라 스스로 칭하며 전제적 정치를 펼쳤던 궁예, 토착 세력을 규합하며 '새나라'의 건설에 이상을 꿈꿨던 궁예. 이 두개의 얼굴을 가진 궁예에 관한 사연과 지명이 아직까지도 '철원'의 산과 들에 흩어져 내려오고 있다.

궁예와 부하들이 왕건에게 쫒겨난 것이 서러워 통곡했다는 '명선산(일명 울음산)", 왕건에게 쫓기어 궁예가 한숨 돌리고 잠깐 쉬어 간 골짜기라는 '한장모탱이', 궁예의 통한을 간직한 최후의 격전지 '보개산성!'

<정말 궁예는 '외눈'으로 반쪽 세상을 살다간 반쪽 영웅이었을까? 아니면

우리가 그를 '외눈'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by 초령목 2012. 3. 28. 22:29

[폭군인가? 비운의 제왕인가? - 궁예(弓裔)] - 1

궁예(弓裔) ~918

'애꾸눈 왕' 궁예. 심각한 정신분열증에 사로잡혀 제멋대로 칼날을 휘두른 폭군인가?

더 나은 이상세계를 꿈꾸다 끝내 좌절하고만 비운의 제왕인가?

보통 사람들의 머리에는 아무래도 후자보다 전자가 더 깊숙히 각인되어 있을 것 같다.

<삼국사기> 궁예전에는 "궁예는 신라 사람이요,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47대 헌강왕 혹은 48대 경문왕이다 라고 적고 있다. 엄연한 신라의 왕족이다. 그러나 <제왕운기> 후고구려기에는 "신라 임금 경문왕이 서자를 낳았더니 이가 두겹이라 목소리도 겹쳐졌네. 얼굴이 임금에게 해롭다고 내쫓으니 중으로 행세하며 몰래 돌아다녔네" 라고 출생 비화를 밝히고 있다. 태어날 때 부터 이가 돋아난 궁예. 이는 궁예가 애꾸눈이 된 사연이기도 하다. 궁예는 태어나자마자 죽이라는 왕의 명을 받은 내시에 의해 궐 밖으로 내던져졌는데 다행히 유모가 받아 목숨은 건졌으나 바로 이 때 한쪽 눈이 손가락에 찔려 시력을 잃게 됐다고 한다.

이처럼 궁예는 출생부터 사후까지가 온통 미스터리다. '삼국사기'에는 궁예가 나이 10여세가 되어도 장난이 그치지 않으므로 유모가 '네가 태어나자 나라에서 버려 내가 차마 어쩔 수 없어 몰래 숨어 길러 오늘에 이르렀다. 네가 이렇게 장난이 심하면 다른 사람이 알게 될 터이고 그러면 나와 너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니 이를 어찌하랴?"라고 한탄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때까지만 해도 후대에 '정신분열자' '과대망상자'라는 소리를 들을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세달사를 거쳐 '기훤'과 '양길'의 휘하에 들어가 큰 공을 세운 궁예는 부하를 자신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공명정대한 지휘관으로 성장한다.

궁예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삼국사기'에서 마저 사졸과 함께 달고 쓰고 힘들고 편안함을 같이하는가 하면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엄정한 장수로 그리고 있다. 이런 덕망과 수업을 쌓은 궁예는 신라에 반대하는 호족 세력을 기반으로 삼아 장군으로 추대된 인물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면 896년 '고려'라는 나라를 세운 이래 18년 제위동안 국호를 '마진'으로, 다시 마진에서 '태봉'으로 바꿀 만큼 호족들과의 사이에서 수많은 역경과 고뇌를 치른 왕이라 할 수 있다. '마진'은 범어로 마하(크다)와 진단(중국)의 약어로 '대동방국'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궁예는 고구려라는 특정국가를 계승하기 보다는 신라와 백제는 물론 그 이상의 대륙까지 아우르는 통일 대제국을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때문에 고구려계 호족들은 반발하게 되고 점차 입지가 흔들린 궁예는 '이국이나 다름없는' '송악'을 떠나 처음 도읍을 정했던 '철원'으로 천도를 단행한다.

by 초령목 2012. 3. 28. 22:29
| 1 2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