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는 신라인으로 성은 김(金)씨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며, 어머니는 헌안왕의 빈어(嬪御,임금의 첩)이며, 그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또는 경문왕(景文王)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하는데, 5월 5일에 외가에서 출생하였다고도 한다. 그 때(其時) 옥상에 긴 무지개(長虹)와 같은 흰 빛(素光)이 하늘에 까지 닿았다. 일관(日官)이 아뢰말하기를 이 아이가 중오일(重午日)[1]에 태어났고, 태어날때부터 이를 가지고 있으며, 또 광염(光焰)[2]이 이상하였으니, 장래에 국가에 이롭지 못할듯 하옵니다. 마땅히 기르지 말아주옵소서 하였다. 왕이 중사(中使)[3]를 불러 그 집에 가서 (아이를) 죽이도록 하였다. 사자(使者)가 아이를 포대기(襁褓)에서 빼았아 아이를 누(樓, 여기서는 마루) 아래로 던졌는데 유모(乳婢)가 몰래 받았는데, 잘못 손을 찔러 한눈이 멀게 되었다. (아이를) 안고 도망쳐 (유모가) 고생하며 양육했다. 나이가 10여살이 되자 유희(遊戱)하기만 하므로 비자(其婢,유모)가 말하기를, '너는 태어나고서 나라의 버림을 받아 내가 차마 보지 못해 몰래 길러 지금이 이르렀는데 너의 이런 미친 행동으로 다른사람이 반드시 알게될 것이다. 이러면 너와 나는 함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어찌하겠느냐'하였다. 그러자 궁예가 울며 그러면 내가 가서 어머니의 근심이 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세달사(世達寺)로 가니 지금의 흥교사(興敎寺)[4]이다. 머리를 깎고(祝髮)하고 중이 되어 스스로 호를 선종(善宗)이라고 붙였다. 자라서는 승려의 계율(僧律)에 따라 주의하지 않고(拘檢) 담기(膽氣)가 있었다. 재를 올리러 행차(行次)하는데 나가자 까마귀가 무언가를 물어다가 그가 소지(所持)한 바리때에 떨어뜨렸다. 보니 아첨(牙籤)[5]에 왕(王)자가 쓰여 있었다. (궁예가) 이를 숨기고 (남에게) 말하지 않고 자부(自負)했다. 신라가 보기에 쇠퇴한 시기(衰季)에 이르므로, 정치가 어지러워져 백성들이 흩어지고, 왕기(王畿)[6] 밖의 주현(州縣)이 반으로 나뉘어(相半) 상반(叛附)하고[7], 온 동네의 도적의 무리가 개미떼처럼 모여들어 일어났다. 선종(궁예)은 이런 어지러운 틈을 타서 무리를 모으면 뜻을 이룰수 있다고 보아 진성왕(眞聖王) 즉위(卽位) 5년, 대순 (大順) 2년, 신해(辛亥)년 (서기 891년) 죽주(竹州)[8]의 적괴(賊魁) 기훤(箕萱)에게 투항했다. 기훤이 깔보고 거만하여 (궁예에게) 예우하지 않았다. 선종이 답답하고 근심하여 스스로 불안하니, 마음을 가라앉혀 기훤의 부하인 원회(元會), 신훤(申煊)등을 친구로 삼았다. 경복(景福)원년 임자(壬子)년 (892년)에 북원(北原, 현 원주시)의 도적 양길(梁吉)에게 투항하였다. 양길이 예우하여 일을 맡곁다. 드디어 군사를 나누어 주니 동쪽으로 가서 땅을 공략하게 하였다.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에 머물며 주천(酒泉, 예천),내성(奈城,영월),울오(鬱烏, 평창), 어진(御珍, 울진)등의 현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받았다. 건녕(乾寧) 원년(894년) 명주(溟州, 강릉)로 들어갔는데, 무리(有衆)가 3500명[9]이나 되었다. 이 무리를 14대로 나누고 금대검모흔장귀평장일(金大黔毛昕長貴平張一)[10]등을 사상(舍上) [사상(舍上) 은 부장(部長)의 뜻][11]으로 삼고, 사졸(士卒,병사)과 더불어 감고(甘苦)와 노일(勞逸)[12]을 같이 하며 주고 빼앗음도 공공으로 돌리며 사적으로 하지 않으니 사람들의 마음(衆心)이 (그를) 존경하며 사랑(畏愛)하여, 그를 장군으로 추대했다. 이에 저족(猪足)[13],생천(狌川)[14],부약(夫若)[15],금성(金城)[16],철원(鐵圓, 철원군)등의 성을 격파했다. 군사들의 소리가 심하게 우렁차니, 패서(浿西)의 적구(賊寇,도적)중 항복해 오는 자가 많았다. 선종이 생각하길 무리가 많으므로 개국할수 있겠다고 생각해 왕을 칭하고, 내외의 관직(官職)을 갖추었다. 우리 태조[17]가 송악군(松岳郡)에서 투항하자, (궁예가 왕건에게) 철원군 태수의 자리를 주었다. 3년 병진(丙辰)[18]에 승령(僧嶺)[19],임강(臨江)[20]의 두 현을 공격해 빼았았다. 4년 정사(丁巳)년[21]에는, 인물현(仁物縣)[22]이 항복해왔다. 선종(궁예)은 송악군이 한강 이북의 이름난 군으로, 산수가 매우 뛰어나다(奇秀)하여 드디어 도읍으로 정하고, 공암(孔巖) [23]검포(黔浦)[24]혈구(穴口)[25]등의 성을 격파했다. 그때 양길은 그대로 북원(원주)에 머물러 있었다. 양길은 국원(國原, 충주)등 30여개의 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선종(궁예)의 땅이 넓고 백성이 많다는 것을 듣고 대로(大怒)하여 30여성의 경병(勁兵)[26]으로 습격하려 하였으나, 선종(궁예)이 이를 몰래 알아내어 먼저 공격하여 대패하였다. 광화(光化)원년 무오(戊午)년 봄 2월에 송악성(松岳城)을 고치고 우리 태조(왕건)을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楊州)[27]와 견주(見州)[28]를 쳤다. 겨울 11월에는 팔관회(八關會)를 시작하였다. (광화) 3년 경신(庚申)년[29]에는 태조에게 광주(廣州), 충주(忠州), 당성(唐城)[30], 청주(靑州) [또는 청천(靑川)이라고도 함][31] 괴양(槐壤)[32]등을 정벌할 것을 명하여 모두 평정하고, 공으로 태조(왕건)에게 아찬(阿湌)의 직을 주었다. 천복(天復)원년 신유(辛酉)년[33], 선종(궁예)이 왕을 자칭하고 사람들에게 알려말하기를 '지난날 신라가 당에 청병(請兵)하여 고구려가 무너졌기 때문에 옛 서울 평양(平壤)은 궁하여 풀이 무성하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을 것이다' 하였다. 아마도 태어나서 (신라로부터) 버려진것에 원한을 가져서 이 말을 했을 것이다. 일찍이 남쪽으로 가서 흥주(興州)[34]의 부석사(浮石寺)에서[35] 벽에 그려진 신라왕의 초상을 보고 칼을 뽑아 (그림을) 내리 쳤는데, 칼자국이 지금도 남아있다.

천우(天祐)원년 갑자(甲子)년에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摩震)로 하였다. 이때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여, 광치내(匡治奈)[지금 시중(侍中)]·서사(徐事)[지금 시랑(侍郎)]·외서(外書)[지금 원외랑(員外郞)]의 인원을 채우고,[36] 또 병부(兵部)[지금 군부(軍部)]· 대룡부(大龍部)[창부(倉部)를 일컬음]·수춘부(壽春部)[지금 예부(禮部)]·봉빈부(奉賓部)[지금 예빈성(禮賓省)]·의형대(義刑臺)[지금 형부(刑部)]·납화부(納貨部)[지금 대부시(大府寺)]·조위부(調位部)[지금 삼사(三司)]·내봉성(內奉省)[지금 都省(도성)]·금서성(禁書省)[지금 비서성(秘書省)]·남상단(南廂壇)[지금 장작감(將作監)]·수단(水壇)[지금 수부(水部)]·원봉성(元鳳省)[지금 한림원(翰林院)]·비룡성(飛龍省)[지금 태복시(太僕寺)]·물장성(物藏省)[지금 소부감(少府監)]을 설치하였다. 또 사대(史臺)[모든 역어(譯語, 외국어)의 학습을 맡음]·식화부(植貨府)[과수(果樹)의 재식(栽植)을 맡음]·장선부(障繕部)[성황(城隍)의 수리를 맡음]·주도성(珠淘省)[그릇의 제조를 맡음]을 설치하고, 또 정광(正匡), 원보(元輔), 대상(大相), 원윤(元尹) 좌윤(佐尹), 정조(正朝), 보윤(甫尹), 군윤(軍尹), 중윤(中尹)등의 품직을 만들었다.

가을 7월에 청주(靑州, 청주시와 청원군)의 1천가구를 철원군(鐵圓城)으로 옮겨 서울로 삼았다.[37] 상주(尙州)등 30여 주를 정벌해 빼았았다. 공주(公州)의 장군홍기(弘奇)가 항복해 왔다.

천우(天祐) 2년 을축년(乙丑) (905년), 새 서울로 들어와 궁궐과 누대를 매우 호사하게 고쳤다. 무태(武泰)연호를 성책(聖冊) 원년으로 고쳤다. 패서(浿西)에 13진을 나누어 설치하였다. 평양성주장군 검용(黔用), 증성(甑城)의 적의, 황의를 한 도적과 명귀(明貴)등이 항복해왔다. 선종(궁예)이 (나라가) 강성한데 자긍심을 갖고, (후백제와 신라, 특히 신라를) 병탄하려는 의욕을 품었다. 그는 국민들에게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도록하였으며, 신라에서 오는 사람은 모두 베어 죽였다.

주량(朱梁) 건화(乾化) 원년 신미년 (911년)에는 성책(聖冊)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 원년으로 고쳤으며,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고쳤다. 태조(고려 태조)로 하여금 군사를 보내 금성(錦城)등지를 쳐 금성(錦城)을 나주(羅州)로 개칭했다. 이 공을 논하여 태조를 대아찬(大阿湌)장군으로 하였다.

선종(궁예)은 미륵불(彌勒佛)을 자칭하여 머리에 금책(金幘)[38]을 쓰고 몸에 방포(方袍)[39]을 입었으며, 맏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 둘째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하였으며 외출할때는 항상 백마를 타며 그 꼬리와 말갈기를 채색 비단으로 장식하고, 소년소녀들로 하여금 번개(幡蓋)[40]와 향화(香花)[41]를 들고 앞에서 인도하고, 또 비구(比丘) 200여명에게 범패(梵唄)를 부르며 뒤에서 따라오게 하였다.

또 불경 20권을 썼는데, 그 내용이 요망(妖妄)해 모두 불경(不經)스러웠다. (궁예가) 때때로 반듯하게 앉아 강설(講說)을 했는데, 승려 석총(釋聰)이 모두 사설(邪說)[42]이고, 괴상한 이야기라며 (이러한 강설로는) 남을 가르칠 수 없다하였다. 선종(궁예)이 화를 내어 철추(鐵椎)로 때려 죽였다. 3년 계유(癸酉) (913년)에 태조(왕건)을 파진찬(波珍湌) 시중(侍中)으로 하고, 4년 갑술(甲戌) (914년)에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에서 정개(政開)원년으로 하고 태조를 백강장군(百舡將軍)[43]으로 하였다. 정명(貞明)원년(915년)에 부인 강씨가 왕이 법도에 맞지 않는 일을 많이 한다 하여 정색(正色)을 하고 간언하였다. 왕이 미워하여 말하길, 네가 다른사람과 간통하니 어찌된 일이냐 하였다. 강씨가 말하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겠냐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신통력으로 보고있다 하여 쇠방망이를 불로 가열해 음부에 절구질해 죽이고 그의 두 아이를 죽였다. 그후 의심이 많아지고 화를 잘 내니 보좌하는 관리와 장수, 관리들 부터 평민까지들이 무고하게 죽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부양(斧壤)과 철원(鐵圓)사람들이 그 독에 어찌 이길수 없었다.

이보다 전에,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당나라에서 철원 시전(市廛)으로 와서 살았다. 정명(貞明)4년 무인(戊寅)년 (918년)에 시장안에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괴위(魁偉)하였으며 머리털이 모두 희었으며, 옛날 의관(衣冠)을 입은 채 왼손에는 사기로 된 주발, 오른손에는 낡은 거울을 들고 있었다. 그가 창근에게 내거울을 사겠냐고 하니 창근이 곧 쌀과 그것을 바꾸었다. 그 사람이 쌀을 거리의 구걸하는 아이들에게 나누어준 후 어디로 갔는지 알수 없었다. 창근이 그 거울을 벽 위쪽에 걸었는데, 해가 거울면을 비추자 가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읽어보니 옛날 시와 같은 것으로 내용을 간략하게 말하면

上帝降子於辰馬: 상제가 아들을 진마(辰馬)[44]에 내려 보내니
先操鷄後搏鴨: 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때린다
於巳年中二龍見: 뱀띠해에는 두 마리 용이 나타나는데
一則藏身靑木中: 한마리는 푸른 나무에 몸을 숨기고,
一則顯形黑金東: 한마리는 몸 형체를 검은 금 동쪽에 나타낸다.

창근이 처음에는 이런 글이 써진줄을 몰랐으나, 이를 본 후에는 예사롭지 않다고 보아 이를 왕에게 고하였다. 왕이 유사(有司)에게 명해 창근과 함께 그 거울의 주인을 물색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다만 발답사(勃颯寺)불당에 진성(鎭星)[45]소상(塑像)이 있었는데, 모습이 그와 같았다. 왕이 한숨쉬며 이상히 여기다가 문인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등에게 풀이하게 했다. 함홍등이 서로 말하기를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냈다는 것은 진한과 마한을 일컬음이요, 두마리 용이 나타나 한마리는 푸른 나무에 몸을 숨기고, 한마리는 몸을 검은 쇠 동쪽에 나타낸다는 것은 푸른 나무가 소나무를 일컬으니 송악군 출신으로 용이 이름에 들어간 사람의 손자, 즉 지금의 파진찬 시중이요, 검은 금은 철이니 이는 지금의 도읍 철원을 일컫는 바이므로 왕이 여기서 처음 일어났다가 여기서 멸망한다는 말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때린다는 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나중에 압록(鴨綠)에 이른다는 뜻이다 하였다.

송함홍들이 서로 말하기를, 지금 왕이 혹독하게 나라를 다스리니, 우리들이 만약 사실대로 말하면 혼자도 아닌 우리무리가 김치와 젓갈(葅醢)이 될 뿐아니라 파진찬(波珍湌, 왕건)도 나쁜 일을 당할 것이다. 이에 듣기 좋게 꾸며 보고했다. 왕이 흉학(凶虐)한 일을 멋대로 하니 신하들이 떨며 두려워(震懼)하며 어찌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장군 홍술(白玉),삼능산(三能山)복사귀(卜沙貴). 즉, 홍유(洪儒), 배현경(裴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謙)의 청년때 이름이었는데, 이 네명이 비밀스럽게 모의해 태조의 사제(私第)로 가서 말하길, 왕이 부당한 형벌을 내려 부인과 아들을 죽이고 신하들을 모조리 죽여[46] 모든 사람이 도탄에 빠져 편안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혼(混)한 (임금)을 폐하고 명(明)한 (임금)을 세우는 것이[47]천하의 큰 뜻이니. 공이 탕(湯)(왕)과 무(武)(왕)의 일을 행하길 바란다 하였다.

태조(왕건)이 불쾌한 얼굴빛을 드러내며 거절하며, 나는 충순(忠純)[48]한 것으로 자처했으므로 지금 임금이 포악하고 어지럽지만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대체로 보아 신하가 왕으로 바꾸어 앉는 것을 혁명이라 한다. 나는 실로 덕이 적으니 감히 은(殷)과 주(周)의 일[49]을 본받겠느냐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때는 두 번다시 오지 않는 것으로 만나기는 어렵지만 놓치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데 받지 않으면 도리어 큰 허물이 될 것입니다. 지금 정사가 어지럽고 나라가 위험에 처해 백성들이 모두 왕을 원수로 보는데 오늘날 덕망이 공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습니다. 하물며 왕창근이 얻은 거울의 내용이 저러한데, 어찌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독부(獨夫)의 손에 죽임을 당하겠습니까 하였다.

부인 유씨도 장수들의 말을 듣고서 태조에게 말했다. 어진 사람이 어질지 못한 사람을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말을 듣고 첩도 화를 내게 되는데 대장부는 어떻겠습니까? 지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갑자기 변했으니, 하늘의 명령이 돌아온 것입니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받들고 문을 나서며 왕공이 이미 정의의 깃발을 들었다고 앞에서 외치도록 하였다. 이에 앞뒤로 바쁘게 따르는 자의 수가 얼마인지 알 수 없었으며, 또 먼저 궁성 문에 이르어 북을 떠들썩하게 치며 기다리는 자가 모두 1만여명이었다. 왕이 이를 듣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다가 이에 미복(微服)[50]으로 갈아입고 숲으로 들어갔다.

그는 얼마 못가 부양(斧壤)주민에게 해(害)를 입었다.

궁예는 당 대순(大順) 2년(891년)에 일어나 주량(朱梁) 정명(貞明) 4년(918년)까지 이르렀으니 28년만에 망한 것이다.

by 초령목 2012. 4. 5. 00:35
궁예, 불교국가의 이루지 못한 꿈 [2008.09.26 제728호]
[박노자의 거꾸로 본 고대사] 
승자의 역사 속에서 잔혹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고려의 창립자… 전면적 ‘명예 회복’의 날은 올 것인가

“역사는 승자의 것.” 진부한 이야기지만, 아쉽게도 맞는 말이다. 신라에 패한 고구려·백제처럼 당대 외국 사서에 소략하게라도 기록이 남는다면 다행이지만, 승자의 기록에만 남게 된 패자라면 이는 비극 중의 비극이다. 예컨대 남한이 북한에 무력통일을 당해 남한 자체의 기록과 남한에 대한 외국 기록들이 다 없어졌다고 가정해보자. 그럴 경우 후세대에게 남을 남한의 이미지는 ‘미제의 가련한 식민지’ 정도일 것이다. 반대로 북한이 남한의 손에 넘어가 그 자체의 기록이 없어진다면 사후 역사 왜곡의 정도는 그보다 덜할까? 그 자체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동시대 외국 기록마저 극도로 소략해 끝내 승자가 된 쪽의 기록만 남을 경우 역사 왜곡이 어느 정도에 이르는지를, 고려의 실질적 창립자인 궁예에 대한 후대의 서술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왕건 쿠데타의 정당성 입증 위해

» 사극 <태조 왕건>속의 궁예. 이 드라마에서도 궁예는 폭군의 면모를 지닌 것으로 그려진다. 한겨레

자신을 발탁해준 궁예를 제거해 쿠데타로 왕권을 탈취한 태조 왕건의 왕조를 섬겼던 사가들이 그려놓은 궁예의 이미지는 ‘캐리커처’에 가깝다. 예컨대 <삼국사기>의 궁예는 ‘태생적 악인’으로 묘사된다. 신라 왕의 서자로 태어났는데, 날 때부터 이빨이 있는데다 단옷날에 태어나 흉측한 징조들을 나타내니 일관(日官·주술을 담당하는 신라 관료)의 권유로 왕실에서 죽이려 함에도 우연히 살아남아 죽임을 피하는 과정에서 애꾸눈이가 된 것이다. 어릴 때부터 ‘미친 버릇’이 있어 품행이 단정치 못해 유모에게서도 버림받아 승려가 되지만, 계율을 지키지 못해 도적 양길의 부하가 돼 신라 말기의 난세를 틈타 호족으로 몸을 일으킨다. 901년에 스스로 후고구려의 왕임을 선포하고 나서 부석사에 걸려 있는 신라 왕의 초상에 칼부림을 하고 신라 귀순자들을 모조리 죽이는 등 신라에 대한 광적인 증오심을 보인다.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하고 불교의 이상적 군주인 전륜성왕인 것처럼 보배로운 금색 왕관을 쓰고 요망한 말만 담겨 있는 경전 20여 권을 짓는데, 그의 불교론에 반대하는 승려 석총을 때려죽인다. 그 다음에 그에게 간언을 한 부인을 “당신이 간통했다는 걸 신통력으로 알았다”고 하여 음부를 찔러 잔혹하게 죽이고, ‘보살’로 칭해졌던 두 아들도 죽인다. 그에게 죽임을 당하는 이들이 평민에 이르기까지 다수가 되니 이를 더 이상 차마 보지 못한 왕건은 918년에 “어쩔 수 없이” 뭇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그를 제거하고 스스로 임금이 된다. <삼국사기> ‘궁예전’의 내용을 간추리면 대체로 이렇게 왕건 쿠데타의 ‘절대적 정당성’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골자가 될 것이다.

쿠데타로 집권한 무인치고 제거된 정적을 욕하지 않는 경우가 있겠는가? 박정희에게 장면 정권의 시대가 ‘무질서·부패·무능’의 시대였다면, 김일성은 박헌영을 ‘미제의 고용 간첩’으로 만들었다. 다행히도 장면과 박헌영 쪽의 사료가 남아 있기에 장면이 (박정희 자신과 달리) 개인적 부패를 전혀 하지 않았던 사실과 경제발전 계획을 수립하는 등 상당한 통치력을 민주적으로 발휘했다는 사실, 그리고 박헌영이 스탈린주의적 도그마에 빠져 있긴 해도 근본적으로 열성적 노동계급 혁명가였다는 사실을 확연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두 패자와 달리 궁예에게는 현존하는 자신의 기록이 없다. 그래서인지 전통 시대에는 물론 근대에 접어들어도 그에 대한 이렇다 할 ‘재평가’가 이뤄지지 않았다.

신채호는 그에게 다소 무관심했지만, 안확(1886~1946)은 “고구려에 대한 인민의 향수를 교묘히 이용하여 신라를 분열시킨 폭력적 야심가” 정도로 취급했다(<조선문명사>, 1923). 타성의 탓인지 이병도(1896~1989)와 같은 근대 강단 사학의 거목들마저도 왕건 쪽의 ‘흑선전’에 불과한 사료를 별 비판 없이 받아들여 “미륵을 자칭하고 극도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위경(僞經)이나 짓고 부녀자까지도 가혹하게 죽이는 궁예”에 대한 왕건의 쿠데타를 사실상 두둔해주었다(<한국사 고대편>, 1959). 비판정신이 강한 이기백(1924~2004) 선생은 궁예가 후고구려의 국가적 제도를 제대로 정비한 점이나 7세기 중반 이후의 신라 전제왕권을 모방하기 위해 숙청 등 폭력적 방법을 불가피하게 썼다는 점 등을 인정해주었지만 “자기 합리화를 위해 불교의 신비적 요소를 이용한” 궁예가 결국 “폭군으로 전락”해 왕건에 의해 제거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됐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한국사신론>, 1967). ‘민중’의 존재에 눈을 뜬 198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초적(草賊) 등 신라 말기 반란적 민초들에게 기댔던 궁예에 대한 긍정적 관심이 고조됐다. 그러나 7년 전에 안방을 정복하다시피 한 사극 <태조 왕건> 속의 궁예는 멋진 카리스마의 소유자였지만, 여전히 ‘폭군’의 면모를 지녔다. 그만큼 궁예를 ‘인격 말살’시킨 <삼국사기> 이후 기록들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이 기록들을 부정할 만한 궁예 쪽 기록은 현존하지 않지만, 고려시대의 궁예 관련 기술에선 역사적 맥락과의 모순과 노골적 편향 등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승려 석총·신라 귀순자들을 죽인 이유

<삼국사기>에는 궁예가 ‘신라 왕의 궁녀의 아들’이라고 돼 있는데, 헌안왕(재위 857~861)인지 경문왕(재위 861~875)인지 편찬자 본인도 잘 모른다고 털어놓는다. 실제 왕자였다면 그 계통에 대한 분명한 자료가 남았을 법한데, <삼국사기> 기록이 왔다갔다 하는 점으로 봐서는 아마도 항간에서 떠도는 소문 이상의 근거가 없었을 것이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흉측한 징조가 일어나 왕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다는 이야기는 주몽신화 등을 연상시키는 일종의 ‘전도된 영웅탄생담’이다. 주몽신화만큼이나 주인공의 ‘태생적 비범함’이 부각되지만, 주인공은 애당초부터 마땅히 당해야 할 죽임을 우연히 비켜간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궁예는 결국 승려가 될 수밖에 없는 몰락한 진골 귀족이 아니었을까 짐작하게 되는데, 그는 계율이나 어기는 속칭 ‘땡땡이’는 분명 아니었다. 사찰에서 아무것도 못 배웠다면 과연 20여 권의 불경을 지을 수 있었겠는가? 신라의 왕들 중에 불교적 저술을 직접 남겼다는 이가 없는데, 군주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불교적 저술에 정력을 쏟은 궁예는 실제로 그 시대에는 비상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 궁예가 세운 태봉국의 도읍지가 있었던 평강고원. 궁예의 불교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것이었다. 한겨레

궁예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승려 석총은 <삼국유사>에서 유명한 진표율사(8세기)의 계승자로 언급된 석충과 동일한 인물로 추측되는데, 궁예는 진표나 석충처럼 법상종에 속했음에도 그 계통을 달리했다. 자신의 아들들에게 아미타보살과 관음보살을 의미하는 이름(신광보살·청광보살)을 준 궁예의 불교가 미륵과 아미타, 관음 중심이었다면 진표의 불교는 미륵과 지장보살 신앙을 중심으로 했다. 석총(석충)의 살해를 합리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둘 사이에 나름의 모순이 진작부터 존재해온 이상 단순히 ‘화나서 죽인’ 건 아니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또한 <삼국유사>에서 석충이 왕건과 내통했던 인물로 묘사되는 점까지 감안하면 석총(석충)의 살해에 왕건 세력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의미가 깔려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석총(석충)이 희생된 반면에, 명주(강릉) 호족 김순식의 아들인 승려 허월이나 승려 출신의 종간(宗侃) 등 수많은 불승이나 승려 출신들은 궁예를 끝까지 지켰다. 즉, 김부식은 우리가 읽을 수 없는 궁예의 불교적 저술들을 ‘요망하다’고 폄하했지만, 과연 동시대 불자들의 입장에서도 그랬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본인이 속했던 법상종과 경쟁 종파이던 화엄종의 사찰 부석사에서 궁예가 신라 왕의 초상화를 칼로 찢었다는 점이나 신라 귀순자들을 죽였다는 점 등은 얼핏 괴상해 보이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납득할 수 있는 면들도 없지 않다. 예컨대 주로 초적, 즉 신라의 극심한 세금 독촉을 참지 못해 정든 고향을 떠나 떠돌이가 된 민중으로 구성된 군대를 지지 기반으로 삼았던 궁예가 과연 민중에게 혐오스러운 존재가 된 신라 귀족들의 귀순을 받아들이기가 쉬웠겠는가? 당시에 ‘귀순자’란 일반 백성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었음을 잊지 말기 바란다. 태조 왕건이야 신라 귀족들의 귀부를 잘 받아주었지만, 그는 초적들의 도움을 받아온 반란자 궁예와 달리 ‘정통’ 지방 호족 출신이었다는 점도 기억해둬야 한다. 궁예가 부인 한 명과 아들 둘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현대의 독자에게 충격적인 ‘포악함’으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왕건 쿠데타의 쉬운 성공이 보여주었듯이 지방 호족의 영토를 직접 통제할 수 없는 궁예 왕권의 기반은 사실상 꽤 취약했다. 그만큼 궁예는 언젠가 있을지 모를 정변에 대한 경각심을 늘 늦출 수 없었던 것이고, 처가 쪽이 세력화돼 자신에게 불리하게 움직일 것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계책을 채택할 만한 이유는 있었을 것이다. “간언을 드리는 부인의 음부를 찔러 잔혹하게 죽였다”는 설정은 후대의 유교주의적인 조작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부인과 아들들의 처형을 사실로 인정한다 해도 신라 말의 혼란기라는 잔혹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일인 만큼 “폭군만이 할 수 있는 짓”이라고 보기 어렵다. 당시에는 그것도 ‘정치’였다.

측천무후를 벤치마킹?

김부식부터 이병도까지 궁예가 “미륵을 자칭했다”는 것을 “민중의 미신을 이용하는 요망한 행위”로 취급해왔다. 그런데 정치의 불교화 자체는 그 시대에 그렇게까지 특출한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궁예가 태어나기 약 1세기 전에 일본에서 궁예와 같은 법상종에 속하는, 그리고 궁예 못지않게 신비주의에 관심을 보였던 승려 도쿄(道鏡·700~772)가 효겸여황의 애인이 되어 불교에 기반하는 일련의 정책을 폈다가 결국 스스로 천황이 되려는 야심이 문제가 되어 실각당해 귀양가게 된 일이 있었다. 또한 당나라의 여황인 측천무후(則天武后·624~705)도 690년에 중국사에서 유일무이한 여황제가 됐을 때 궁예와 비슷한 모양으로 ‘전륜성왕’을 자칭하고 미륵신앙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자신이 ‘미륵불의 화신’이라는 설을 퍼뜨려 ‘일체 중생을 제도할’ 미래불인 자신의 즉위를 합리화하려 한 것이다. 아직 연구되지 않은 주제지만, 사실 궁예가 꽤나 의도적으로 측천무후를 ‘벤치마킹’해서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디자인한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측천무후의 측근 승려 중에서는 그를 위해 위경을 지어주고 아부하는 무리들도 있었지만 그의 비호하에서 법장(法藏·643~712)과 같은 화엄학의 거장들이 중국 불교를 크게 일으키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측천무후의 사례를 이용해 자신을 유교적 성인(聖人)이 아닌 미래의 부처, 고난에 빠진 중생에게 열반의 희망을 주는 미륵불로 규정한 궁예의 불교가 꼭 ‘요망’하기만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신라 말기의 실정, 진골 귀족 정권의 혹독한 가렴주구, 그리고 혼란기의 처참한 살육에 지치고 평등과 안락의 새 시대를 열망했던 민초들에게 사실 유교적인 엄숙주의·도덕주의보다는 군주가 종교적인 ‘구세’까지 약속해주는 불교적인 ‘종교 국가’가 더 가까이 와닿았을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궁예의 불교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것이었다. 물론 그가 민초들의 ‘평등과 안락에의 갈망’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도쿄도, 측천무후도, 궁예도 실패했다. 미천한 평민들의 발탁이라든가 각종의 종교적인 민심 수습책 등 꽤나 이례적인 정책을 폈던 그들에 비해 동아시아 사회의 기득권층은 차라리 ‘안정적인’ 유교적 통치를 선호했다. 정치적 실패는 역사학자들에 의한 ‘인격 말살’로 이어졌는데, 이는 ‘천황의 계통을 단절시킬 뻔한 도쿄’나 ‘폭군 궁예’의 경우에 특히 심했다. 중국에서도 최근에 와서야 측천무후의 대담한 왕권 탈취가 양성평등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일면의 긍정적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과연 한국 역사학에서도 이색적인 불교적 통치자 궁예에 대한 전면적 ‘명예 회복’의 날이 올 것인가?

참고문헌:

1. ‘철원환도 이전의 궁예정권 연구’ 강문석, <역사와 현실> 57호, 2005년 9월, 241~273쪽

2. “궁예의 미륵세계” 김두진, <한국사 시민 강좌> 제10집, 1992, 19~37쪽

3. ‘궁예와 그 미륵사상’ 양경숙, 국민대 석사학위 논문, 1988

4. ‘태봉국형성과 궁예의 지지기반’ 오영숙, 숙명여대 석사학위 논문, 1985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3426.html 

by 초령목 2011. 11. 13. 23:15

후삼국 시대의 재조명

 중국이나 일본이나 그들에게는 전 국토가 떠들석 했던 그런 시대가 있었다. 중국은 '삼국시대'라 불리던 시대에 유비 · 조조 · 손권이라는 영웅이, 일본에게는 '센고쿠 시대'의 오다 노부나가 · 토요토미 히데요시 ·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영웅이 있다. 이렇게 동아시아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났던 시대가 우리나라에는 과연 없었을까? 

 우리나라에도 전국시대를 생각하게하는 시대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부르던 '후삼국시대'이다. 여기서는 동아시아의 영웅들과 비교할 수 있는 인물들이 나타나니 바로 '진훤 · 궁예 · 왕건'이다.

 우리는 보통 후삼국시대라 불리는 이 시기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50년도 안되는 이 시기를 과연 '시대'라는 명칭을 붙여도 될까?" 라는 생각에 그저 비교적 컸던 남북국시대와 고려시대 사이의 작은 시대로 떠올린다. 실제로 몇몇 역사책들을 보면 삼국시대가 끝나면 바로 고려시대로 넘어가고 후삼국시대는 그 중간에 한 두장 설명하는 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과연 후삼국시대는 우리가 무시해도 될만큼의 비중이 작은 시대였을까?

 길게만 느껴졌던 소설 삼국지의 배경인 중국의 삼국시대는 실제로는 220~280년 60년이 겨우되는 역사이다. 일본의 전국시대라 불리는 센고쿠 시대는 1467년에 시작하여 1573년까지 106년, 약 100년의 역사를 가졌다. 이처럼 동아시아의 혼란시기는 100년도 안되는 시간을 가지고 있지만 전부 그 나라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혼란시기인 후삼국시대만큼은 우리에게 외면을 당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후삼국시대는 892년부터 936년까지의 44년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의 36년보다도 더욱 긴 시간이다. 1945년 광복 후 지금까지도 우리가 일제의 치욕을 기억하는 것을보면 44년의 시간이 결코 짧다고 느껴서는 안된다.

 후삼국시대는 남북국시대와 고려시대 사이에 끼여있기 때문에 무시를 받아야 하는게 아니라 이 시기에 있기때문에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이다. 그래야만 신라의 멸망 원인과 고려의 성립 원인을 쉽게 이해할수가 있을 것이다. 그저 신라가 멸망했기 때문에 고려가 건국되었다라는 단순한 생각은 버려야 할것이다.44년의 역사는 짧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44년동안 후백제라는 나라와 후고구려라는 나라가 건설되었으며 궁예 18년의 태봉과 992년간 명맥을 이어오던 신라가 망했다. 그 짧은 시기에 이렇게 많은 국가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진 것은 우리나라 역사에 거의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아마 고조선이 멸망하고 난 후에도 이런 혼란시기가 있었을 수도 있다.) 후삼국시대의 중요성은 그렇게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중국의 삼국시대에 대해서는 유비,조조,손권 등의 인물을 외우면서 적벽대전 등 유명한 전투가 많으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일본의 전국시대도 정명가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같은 일본의 영웅이 임진왜란이라는 큰 사건을 일으켰기때문에 일본의 전국시대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그저 안타까운 뿐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위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태봉국의 궁예는 1000년동안의 중국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깨기위해 분열중이었던 중국과는 외교를 벌이지 않고 태봉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세우고자 했었다. 그래서 중국 대신 거란과의 외교로 여러 물건을 하사했다.(이에 대해서도 일본 칠지도같이 논란이 많음) 이와 반대로 진훤같은 경우에는 동아시아 세계의 질서에 맞춰 중국과의 수교를 통해 외교적 우위를 차지해 통일의 유리한 고지를 찾으려고 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신라말기의 혼란시대였다. 골품제의 한계를 느끼고 더이상 빛을 찾을 수 없는 6두품세력들과 세금으로 고통받던 농민들과 삼국통일이라는 허물안에 살아있던 백제와 고구려의 혼이 마침내 터진 시기이다. 사실 신라는 정신적인 통일을 이룩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지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있었다. 그리고 결국 원종애노의 난으로 반란이 일어나자 이와 동시에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신라의 통제권은 수도권으로 축소되었다.

 여기까지가 신라말기의 모습이다. 그리고 진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궁예가 태봉을 세우자 후삼국이라는 시대가 열리게된다. ...후삼국 역사에 대해서는 생략...그리고 신라가 항복을 하고 후백제가 진훤의 군사에 의해 멸망되자 마침내 고려가 민족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후삼국에 대한 언급이 짧았기에 후삼국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태까지 보던 신라말기의 사회 모순부터 고려통일까지의 시기가 바로 후삼국시대이다.

 고려와 조선의 경우를 보면 급진하게 조선을 세우다 보니 뭔가 부자연스럽게 고려왕조를 멸망시킨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신라와 고려의 경우에는 이 후삼국시대가 있었기에 한나라에서 다른나라로 왕조의 교체가 자연스러울 수 있었다. 

 후삼국시대는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영웅들이 반세기에 공존했던 유일한 시기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진훤, 궁예, 왕건 말고도 기훤, 양길, 능창등 수많은 영웅들이 자기의 세력을 과시하며 자유로웠던 시기였단 말이다. 이것이 필자가 후삼국시대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 중 하나이다. 우리는 이 시기 이후로 더이상 영웅들이 공존하던 때를 떠올릴수가 없다. 이 시기가 너무나도 짧았다는 것이 그저 아쉬울 뿐이다.

 필자가 후삼국시대에 가장 흥미를 느낀 이유가 바로 고대와 중세의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전쟁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고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다 주지 않는 역사의 황무지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개척하지 않은 땅을 내가 개척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혹시 알수 있을까? 내가 이렇게 연구를 하다보면 언젠가는 이분야 최고의 전문가가 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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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도성 남대문 석등(石燈) 사진은 이미 오래 전 원본이 사라졌다. 철원군지(鐵原郡誌)는 천 번도 더 찍어냈을 복사판 사진을 싣고 있었다. 어느 책에 나온 우표딱지만한 흑백사진을 잡아 늘릴 수 있는데까지 확대한 게 틀림없었다. 사진 속으론 모래바람이 불고 있었다. 피사체는 작은 구멍들이 가득 뚫려 있었다. 제주도 돌하루방 같았다. 철원도 제주도처럼 현무암 대지 위에 올라앉아 있는 '곰보돌'의 고장이다. 그 사진만으로는 석등은 조악한 그 곰보돌 조각에 불과했다. 애꾸눈 궁예왕이 지천으로 나뒹구는 '곰보 바위'하나를 들어다가 아무렇게나 쓱쓱 깎아 도성 남대문 앞에 턱 세워 놓았을것만 같았다.

그러나 석등은 일본이 1940년 7월 30일자로 국보 118호로 지정했던 키 280cm 짜리 화강암 돌조각이다. 철원의 궁예도성은 신라의 도읍지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이나 석가탑보다도 2세기 후에 축조됐다. 따라서 그 석등은 석가탑이나 다보탑보다도 더 정교하고 품위있게 다듬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석등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으며 이젠 국보도 아니다. 그 석등처럼 태봉국의 왕 궁예(弓裔. ?~918)도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모습으로 역사 속에 남아 있다.

후삼국 시대는 44년 만에 막을 내렸다. 궁예는 그 가운데 단 18년 동안 태봉을 통치했다. 그리고 그 후 역사는 더 드라마틱한 사건들을 만들며 10세기나 진행됐다. 왕의 치적을 들춰내며 그의 사상이나 철학을 들먹이기에 1천 년 전은 너무 오래 된 일다. 그러나 나는 궁예 나라의 옛 수도 철원을 갈 때마다 역사가 그를 너무 깔아 뭉갰다고 생각했다.

우선 철원평야 사람들을 '왕을 돌로 쳐 죽인 백성의 후손들'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려사는 그때 백성에게 피살되던 궁예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918년 6월) 이리하여 (궁예가) 변복을 하고 도망쳐 나가니 궁녀들이 궁 안을 깨끗이 하고 태조(왕건)를 맞아들였다. 궁예는 산골로 도망하였으나 이틀밤이 지난 후 배가 몹시 고파서 보리이삭을 잘라 훔쳐 먹다 바로 부양(평강) 백성들에게 살해됐다. 궁예는 평강 땅 삼방(三防)에서 너무 배가고파 보리이삭을 훑어 먹다 밭일을 하던 농사꾼들에게 들켰다. 농사꾼들은 그를 돌로 쳐 죽였다.」

역사는 이 사실을 기록하면서 '폭정과 괴벽의 엉터리 애꾸눈 왕을 장수나 군졸도 아닌 무지렁이들이 통쾌하게 교살했다'고 행간 곳곳에서 속삭이고 있다. 그리고 궁예가 누구냐고 묻는 이들에게 '왕은 애꾸눈의 장애인이었고, 자신을 메시아라고 여긴 미륵신앙의 광신도였으며 부인과 자식을 쳐죽인 정신분열증 환자였다. 결국 피신길에 보리이삭을 훑어 먹다가 농민에게 붙들려 돌에 맞아 죽은 인격 파탄자였다'고 세뇌시키고 있는 것이다. 고려 개국공신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그렇게 궁예를 깍아내려야만 했을 것이다. 왕건의 군사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이미 궁예는 죽었지만, 몇 번이고 다시 죽여 다시 살아나지 못하게 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미륵의 세상을 갈망하던 하층농민들이 미륵불을 돌로 쳐 죽인 무지함, 백성이 왕을 쳐 죽이 대역죄, 즉 자식이 어버이를 쳐 죽인 패륜을 고스란히 철원 사람들의 옛 조상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있었다. 그것은 강자의 횡포였다. 그리고 중대한 실수였다. 철원 사람들은 궁예가 그의 최후를 당당하게 맞았다는 전설을 따로 간직하고 있었다.

궁예전설은 노인들을 통해 구전되기도 하고, 철원군지에 기술돼 있기도 했다. 어떤 노인들은 전설 속의 '궁예'를 '궁예대왕'이라고 지칭했다. '궁예대왕', 그 지칭은 철원사람들의 불명예, '미륵을 죽인 무지함과 왕을 죽인 대역죄, 자식이 어버이를 죽인 패륜'에 대한 항변같기도 했으며 책에서 배운 정사(正史)를 엉터리라고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전설 속의 궁예의 최후는 절대 비굴하지 않았다. 왕건의 군사 역모가 있던 날, 왕은 자신의 나라 도읍지를 마지막으로 순방한 것 같다. 그날 밤 왕은 남문을 통해 도성을 빠져 나왔다. 숨을 가다듬고 재기를 위해 찾아갔던 첫 피신처는 도성 서남쪽의 중어성. 평원 한가운데 세운 도성의 전략적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외곽에 세웠던 12개 산성 가운데 한 요새다. 현재 위치는 철원읍 대마리. 왕은 이 요새를 버리고, 더 서쪽으로 나가 현 연천군 신서면 승양리의 역시 외곽성인 승양산선으로 들어갔다. 또 다른 외곽성 보개산성(현 포천군 관인면)은 승양산성의 동쪽에 있었다. 그러나 왕은 어느새 더 동쪽의 명성산성(현 철원군 갈말읍)으로 들어가 최후 보루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산성에서 군대를 해산한다. 그리고 통곡하는 군사들을 뒤로하고 홀로 북쪽으로 떠난다. '명성'(鳴聲)이란 말뜻을 굳이 풀이한다면 '큰 울음소리'. 훗날 사람들은 그때 군사들이 슬피 울었다고 해 그 산성을 '울음산성', 산성이 있는 그 산을 '울음산'이라고 불렀다. 명성산성에서 해산했지만 충성스러운 많은 군인들이 왕이 걸어간 길을 뒤따라 군탄리까지 왔다. 왕은 "나를 따르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한탄강을 건너가 버렸다. 훗날 사람들은 그 곳이 바로 그때 '군사들이 슬피 울며 탄식한 곳'이며 '군탄'은 거기서 유래했다고 해석했다. 갑천(甲川)은 평강 하갑리 동북쪽의 작은 내. 왕은 자신의 정예병들을 양성하던 검불랑 군사훈련장을 지나 삼방협의 깊은 골짜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결했다.

육당 최남선도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철원 지방에서 채록한 궁예 최후의 전설을 '풍악기유'에 이렇게 실었다.
「남루한 차림의 고려왕(궁예)이 발 붙일 땅을 찾기 못하고 심벽한 석을 찾아 삼방 골짜기로 들어왔다. 삼봉 최고지에 올라 은피하여 재도할 땅을 둘러 볼 즈음 문득 한 스님을 만나 혹시 용잠호장할 땅이 없겠느냐고 물으니, 스님이 말하기를 이 속에를 들어와서 살길을 찾는 것은 어리석다고 했다. 이에 크게 절망하고 그 곳에서 깊은 연못을 향해 그대로 몸을 던지니 물에는 빠지지 아니하고 우뚝 선 채로 운명했다.」

http://www.dmzline.com/tag/궁예?page=1

<table style="border-collapse: collapse; width: 634px; height: 31px;" bgcolor="#ffffff" cellpadding="1" cellspacing="1">
<tbody>
<tr>
<td style="border-style: solid; border-color: rgb(48, 88, 210); border-width: 0px 0px 1px;" bgcolor="#3058d2" width="1%"><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ulim;">&nbsp;</span></span></td>
<td style="border-style: solid; border-color: rgb(48, 88, 210); border-width: 0px 0px 1px;" width="99%"><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rgb(48, 88, 210);"><span style="font-family: Gulim;">&nbsp;</span></span><font color="#c8056a"><strong><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ulim;"><span style="color: rgb(48, 88, 210);"> </span><br />

</span></span></strong></font></td>
<td style="border-style: solid; border-color: rgb(48, 88, 210) rgb(48, 88, 210) rgb(255, 70, 197); border-width: 0px 0px 1px;" width="100%"><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ulim;">&nbsp;</span></span></td>
</tr>
</tbody></table>

철운에서 금강산 들어가는 철도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 삼방역이라는 역이 하나 있다고 한다. 근데 그 역건너에 큰 돌담굴이 하나 있다고 한다. 그 돌담굴이 궁예의 무덤이라 한다. 그것이 왜 궁예의 무덤이라 하면 왕건의 군사들이 치열하게 쫓아 오면서 쏘니까는 이 궁예가 웬만한 화살은 맞으면은 그냥 쑥 뽑아서 던지는 그런 장사였다. 그런데 하도 많이 쏘아서 장사도 지치니까는 상나무 아름드리 겿에 가서 기대고 섰다. 하도 치열하게 화살을 던지니까는 궁예가 고슴도치 모양으로 몸에 꽃혔는데 안쓰러진다는 것이다. 이상해서 가서 보았더니 죽어있었다. 발길로 차도 안 넘어가고 목에다 뭘 두르고 잡아 당겨도 안넘어졌다.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장사는 역시 죽어서도 장사구나 별짓을 다해도 안넘어지니까는 그냥 선 채로 돌로 쌓아 묻어서 궁예의 무덤을 돌로 묻어서 궁예의 무덤이 그렇게 되었다. 결국 눕지도 못하고 죽은것이었다.
- 화현면 설화 광대소라는 이름이 비석에 새겨진 것을 보고 묻자 해준 이야기


펑강군 복계역 북쪽으로 하갑리, 상갑리라는 마을이 있다. 궁예가 패해 북쪽으로 도주하다 하갑리에선 아래 갑옷을 벗고 도주하다, 상갑리에선 윗 갑옷을 벗고 도주했다 해서, 하갑리, 상갑리라 했다 한다.


궁예(弓裔·?-918년)는 896~898년간에 철원(구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후 궁예는 901년 당나라에게 괴멸당한 고구려를 다시 일으켜 보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 일환으로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연호를 무태(武泰)로 바꾼다. 그 후 1년 뒤(905년) 구철원 북쪽 30리 거리인 풍천원 들판(지금의 철원과 평강 사이 비무장지대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리고 911년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泰封)이라 칭한다.

그러나 궁예는 풍천원 들판에다 거대한 도성을 축조하면서 강제로 노역에 끌려온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지지세력들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청주 지역을 너무 편애하게 된다. 그러자 경기 북부 호족들이 반기를 들고 궁예의 부하였던 왕건을 앞세워(877-943) 918년 궁예를 몰아낸다.   

훗날 궁예가 왕건의 군사에게 쫓겨 진을 친 곳이 명성산이다. 이 때 궁예가 이 산에서 철원쪽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겨 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하여 ‘울음산’으로 불리었고, 궁예가 강변에서 한탄했다 하여 ‘한탄강’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궁예와 명성산이 관련된 전설은 매우 많다. 산정호수 옆 두 개의 봉우리는 궁예가 올라가 망을 보았다는 곳이고, 등룡폭포 위 샘터 이름이 궁예약수, 자인사에서 궁예가 기도를 올렸다는 전설, 정상에서 강포리쪽으로 이어지는 궁예능선은 왕건의 공격을 피해 항거하며 쌓았다는 성터와 궁예왕이 숨었었다는 궁예왕굴 등 이 남아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고려사에는 ‘궁예가 평강과 안변 사이 험준한 지형인 삼방협으로 도망을  갔을 때 배가 고파 보리이삭을 끓여 먹다가 평강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이 지방 주민들로부터 전해지는 전설은 ‘궁예가 삼방협에서 우연히 만난 어느 중이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는 이런 협곡에 들어와 살아남겠다는 것이 어리석다”고 말하자 궁예는 “드디어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 높은 곳에서 의연하게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조선 말기에 제작된 지도인 청구도에는 삼방협 위치에 궁왕묘(弓王墓)가 그려져 있다. 또 1924년 최남선이 쓴 풍악기유(楓嶽記遊)에는 궁예왕 무덤흔적을 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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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가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던 철원은 화산대지입니다. 따라서 철원에서 가장 흔한 돌인 현무암의 특징은 용암덩어리가 공기중에서 식으면서 빠져나간 가스의 흔적으로 인한 구멍이 숭숭뚫린 현무암 화산석과 관련한 궁예의 일화는 어느날 왕건과 싸우고 궁으로 돌아오던 궁예가 개울을 건너던중 우연히 이 현무암을 발견하곤 돌에 뚫린 수많은 구멍이 벌래가 돌을 파먹었다고 생각하곤 스스로의 자격지심 으로 돌을 벌래가 파먹다니 이런 해괴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니 아~ 나의 운명이 다 하였구나라고 자조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옵니다.




 

by 초령목 2010. 10. 23.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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