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8일~29일
나라사랑! 겨레사랑!


 1월 14일 오리엔테이션을 원화여고에서 했다. 원화여고가 주최를 했다고 하지만 생각보다 먼거리였다. 나는 우리집에서 걸릴 시간을 생각하고 1시간 일찍 도착해서 선생님을 기다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선생님이 오시지 않길래 전화를 했더니 나는 경화여고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쩐지 경비아저씨가 나를 이상하게 지켜보더라... 다행히 경화여고 옆에 원화여고가 있어서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경화여고 도서관에서 오리엔테이션을 했는데 전체 2/3이 여자였다. 역시 이런 행사에 남자가 더 많이 참여한다는 것은 드물긴 드물다. 당황스러운것은 본지도 얼마 안됬는데 조끼리 모여서 레크레이션 합동게임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내가 아는 친구도 조가 달라서 정말로 처음보는 사람들과 게임을 해야한다는게 여간 어색한 일이었다. 레크레이션 1위팀이 교사 선택권을 가질 수 있었는데 첫판부터 벌써 팀워크가 안맞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굴러오는 호박인가? 큰 점수 걸린 게임만 이겨서 1위를 해버렸다. 그덕에 안면이 있던 와룡고 역사선생님이 우리팀을 이끌어 가기로 했다.

 오늘 오리엔테이션은 곧 떠나는 캠프의 맛보기였다. 역사교사 한분이 나오셔서 친일파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고 우리에게 과제를 내주신 것으로 마쳤다. 


 1월 28일, 아침 일찍 원화여고 앞에 모여야 했지만 늦잠을 자버려 지각을 해버렸다. 부끄럽게도 내가 도착하자마자 버스가 출발을 해버렸다. 이 캠프의 목적지는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인데 먼저 이육사문학관을 관람하며 갔다. 이곳에서 이육사의 친딸이신 이옥비 여사님을 만났다. 사실 와룡고 역동이라는 동아리에서 이미 뵌적이 있지만 그때는 졸려서 집중이 안됬었는데 오늘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다. 옥비여사님께서는 육사선생님의 어린시절 기억과 어머니에게 들었던 말, 육사의 지인에게서 들었던 말 등 여러 이야기를 해주셨고 다음으로 문학관장님께서 이육사가 살던 곳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해주셨다. 모든 말씀이 끝나자 이옥비여사님의 싸인을 받으려 했으나 육사시집을 사야만 싸인을 해준다길래 내 용돈을 생각해서 포기하기로 했다. 전에도 포기했는데 뭔가 아쉽다.

 이육사문학관으로 가던 그 꼬불꼬불하며 멀미가 날것같은 길을 벗어나 드디어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버스안에서 선생님끼리 하시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은근히 재밌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중 이육사문학관에서 시간을 너무 지체해서 일정을 앞당겨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일정보다 30분가량 늦게도착을 해버려서 복잡한 상태였다. 식당에서 보이는 한때 김이 모락모락 했었을 공기밥들에게도 뜨거운 김이 보이지 않았다. 관장님의 간단한 소개를 듣고 점심을 먹은 후 바로 박물관을 돌아야했는데 모든 일정이 쉬는시간 없이 이어졌다. 박물관에서 안동의 독립운동에 대해 자세히 알게되었는데 일제에 저항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40명인데 그중 10명이 안동출신이라는 점, 6.10만세운동의 숨겨진 주역, 그리고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최근에야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었다는 사실 등 여러가지를 알아갔다. 원래 다음일정은 독립운동가 1000명앞에서 추모하는 일정이었으나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그 다음일정이 기대된다. 오늘 가장 기대하는 것인데 바로 청산리대첩 체험인 서바이벌 게임이었다. 말로만 듣던 것을 실제로 하려고 생각하니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 그곳에서 박물관장님과 한 무술 사부님이 계셨는데 서바이벌장에서 나는 말로만 듣던 무예18기를 볼 수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것이 언월도인데 그 언월도가 사부님의 대학 등록금을 털어서 샀다고 한다. 하지만 간단한 시범만 보여줘서 약간 흥이 빠졌다. 실제로 대련을 했다고 생각하면 재밌었을텐데 그러기엔 너무 위험한가?
 이 무예18기를 본 후 실망했다. 내가 생각한 서바이벌게임이랑 많이 달랐다. 내가 생각한 것은 넓은 산에서 마음껏 뛰어가면서 총을 쏘는 것이었는데 지금 내가 하고 있는것은 그냥 가만히 앉아서 선생님들만 쏘는 것이었다. 그나마도 마음껏 쏘다가 가스가 금방 닳아 총이 발사가 안됬다. 색다른 경험이었지만 무예18기를 본것만으로 만족해야겠다.

 간단히 저녁을 해결한 후 지난번 1월 14일에 오리엔테이션때 우리에게 내준 첫번째 과제인 학예사 체험을 하게되었다. 그때 시간이 많이 없어서 따로 만나서 여러 의견을 나누었는데 막상 전지를 펴보니 그때 나눴던 것과 전혀 딴판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분명 체계적으로 생각했었는데 여기와보니 어느새 전지에 사람 뇌가 그려져있었다. 분명 다른조와는 차별화가 있었다. 이 독창성을 살려 열심히 했는데 가까이서 볼때는 안그랬는데 멀리서 보니 굉장히 허술했다. 아직 준비도 안끝났는데 우리 선생님께서 사다리타기를 통한 순서뽑기에서 당당히 1번을 뽑았다. 여차저차 대충 설명을 끝냈는데 그 다음조들의 설명을 듣고 바로 '망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조에서는 그 그림의 의미만 말했을 뿐이고 다른조들은 주제에 대한 설명을 했었기 때문이다. 1주 전에 만났던 그 패기는 어디가고 이렇게 됬을까?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다. 그것은 협동심이 중요한 축제였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했던 축제들중 가장 재밌었던 것 같다. 너무 즐기며 놀다보니 원래 9시까지였던 이 축제가 MC가 자기시간을 포기하며 우리를 더 즐겁게 해주었다. 참 많은 재밌는 일들이 있는데 쓰려고 하니 표현할 방법이 없다. 축제가 끝나자 덤으로 관장님께서 치킨을 한턱 쏘셨는데 한 테이블에 닭 2마리인것은 행복하나 둘다 후라이드라는 점에서 불행했다.

 모든 일정이 끝나자 한숨자려고 했는데 역시 남학생의 방이라 밤에서 여러 음단패설이 오갔다. 나는 그 소리에 잠을 못이루었고 결국 시끄러운 소리에 깬척하며 옆방에 가서 잤다.

 1월 29일, 아침일찍 일어났다. 어제 늦게 잔 바람에 일찍 못일어날줄 알았는데 용케 일어났다. 일정을 보니 미로체험이라 적혀있던데 미로란것이 참 궁금했다. 하지만 이 미로체험이 취소되 버리고 아침식사를 한 후 그냥 작별인사하고 떠나버렸다. 뭔가 허무했다.

 임청각에서 7층 전탑을 살펴보고 오늘의 메인이벤트인 미션게임이 시작되었다. 게임룰은 간단했다. 문제풀고 다음 목적지로 가면 되는 아주 간단한 게임이었는데 이것을 굉장히 헤맸다. 우리는 처음부터 헤맸다. 문제를 풀었는데 향암고택이라는 곳으로 가야했다. 주민들 말씀을 들으면 40분을 걸어가면 나타난다고 했는데 걷다걷다 지쳐서 택시를 타고 갔더만 40분은 무슨 물어물어 걸어갔다면 1시간 이상은 족히 걸렸을 것 같다. 문제를 해결하고 다음목적지인 안동전통문화컨텐츠박물관으로 갔는데 택시를 한번만 타야한다는 규정을 어겨버려 그곳에서 1시간이나 놀고 있어야 했다. 이것도 1시간 어찌어찌 버티고 나가니 이번에는 3층석탑이란다. 거기가 또 어딘고 하며 오랫동안 걸었는데 이미 1등은 물건너 갔고 2등도 물건너 갔고 남은 자리는 꼴찌 한자리였다. 모두가 다 왔다고 하는데도 우리는 이제겨우 문제를 풀고 있었다. 이것도 어찌저찌 겨우 끝내서 식당와서 안동찜닭 먹고 바로 집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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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체험북에 활동하면서 느낀점과 배운점 등 여러가지를 적어놨는데 집에가보니 없어졌다. 그래서 내 기억에 의존하며 적는다.

이육사 문학관에서 그의 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이옥사 여사님의 어린시절 어머니에게 들었던 아버지 이육사의 모습을 통해 어렴풋이 그를 회상했다. 우리는 단지 시인으로만 알고 있던 그를 이옥비여사님은 시로써 독립을 이루고자 했던 독립운동가라고 설명해주셨다. 내가 생각해봐도 당시 문학가들은 친일활동을 한 사람이 대부분인데 이렇게 윤동주와 더불어 일제에 저항하는 시를 남겼다는 것 자체게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이어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육사의 가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체험북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기억나는 것이 얼마 없다. 다만 이육사의 육형제들은 굉장히 우애롭다는 것이다. 경상도에서 상당히 알아주는 육형제라고 하는데 바늘가는데 실간다고 형이 있다면 그곳에 아우가 있었다고 한다. 이 육형제들은 퇴계의 정신을 이어받은 인물들로 이육사의 외가의 독립운동가이자 창의군 사령관이었던 허위의 정신을 이어받아 모두 독립운동을 했다고 한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은 전국에서 2번째로 큰 규모의 독립운동기념관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도별 독립운동가 평균이 30여명이 된다고 하는데 안동이라는 하나의 시에서만 그 평균에 약간 모자라는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고 한다. 전국민이 첨여한 3.1운동은 3월 2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경상도에서 처음시작되어 3월 8일에 안동으로 퍼졌다고 한다. 그런데 안동의 중심지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는데 그 중심이 경찰등 여러 중심업무지였다. 그래서 안동에서 사망자수가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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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청산에 대한 글  (0) 2012.01.26
by 초령목 2012. 2. 4. 23:01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로 개항된 후 일본을 통해 서양의 선진문물이 조선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를 두고 성리학에 심취해 있던 조선인 유학자들과 대신들은 개화에 찬성하는 개화파와 반대하는 위정척사파로 나뉘게 되었다. 하지만 명성왕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을 계기로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에 대한 반일감정을 가지게 되어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이 을미년의 물결이 을사년, 정미년의 파도로 이어졌다. 그리고 1910년 마침내조선이라는 바다에 나라를 빼앗기는 경술국치라는 비바람이 휘몰아 쳤다. 하지만 이 비바람을 견뎌내기 위해 의병을 통한 무력투쟁으로, 애국계몽을 통한 민중의 깨우침으로 독립 운동가들은 폭풍우속 한줄기의 햇빛이 되었으며 마침내 그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독립을 성취하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지식인들이 안창호, 김구 등과 같은 독립운동가라는 위인으로 남은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조선침략의 밑바탕이 되었던 을사늑약에서도 일제강점기 동안 독립 운동가들의 활동을 방해하는 자들 중에서도 조선출신의 일본 관리가 되어 일본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친일파들이 존재했었다. 그들이 주로 한 일은 독립을 위해 일하던 독립 운동가들을 고문하고 토벌하였으며 조선침략의 앞잡이가 된 대가로 일본에게 재물과 보호를 받았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 일제로부터 독립하여 건국된 대한민국에서는 당연히 우리의 독립을 위해 힘써주던 이들을 포상하고 대우하며 친일파들은 처벌하는 것이 당연하지 일이 아닌가? 하지만 결과는 애써 만들어 놓은 반민특위는 대한민국의 우두머리인 대통령에 의해 해산되었으며 위축되었던 친일파가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60여년이 흐른 지금 사회곳곳 많은 고위관리직에는 친일파의 후손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 친일파를 청산하겠다는 말은 그들이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권위를 빼앗는 것과 같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친일파를 비난하는 것은 빨갱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독립운동가의 대부분이 사회주의자였다는 사실을 보면 오히려 친일파들이 독립 운동가들을 단지 이념의 차이로 빨갱이로 비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친일파들은 미국이 자신들에게 우호적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투철한 자유주의자로 변신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친일을 했더라도 다방면에 민족에 끼친 공로는 많다.” 사실 이 말은 반박할 수는 없다. 일제 강점기 당시 문화, 예술 등에 활동한 사람들 대부분이 친일파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심지어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까지도 친일파였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친일문학가들은 민족을 위하기는커녕 일본을 찬양하는 문학 활동을 주로 했으며 조선인과 독립 운동가들이 고생할 때 그들은 재력을 바탕으로 편안히 제 사리사욕만 채운 사실을 보면 그런 상황에서도 수없이 많은 명작을 남긴 윤동주와 이육사가 자랑스럽다.

“그 당시 친일활동을 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이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창씨개명이다.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는데 조선인 모두가 동의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입학거부, 식량 배급 거부등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전혀 보장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을 보면 식민지 백성에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친일파들은 다르다. 어쩔 수 없이 친일파의 길을 걸어야 했던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자발적인 기회주의자였다. 이는 해방 후 미군정으로 갈아타던 친일파들을 통해 알 수 있다. 해방 후 친일파들은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지위가 유지되자 독립 운동자를 가두는 등 조선 백성과는 의지와 차이가 있었다.

현실적으로 해방직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남아 있는 친일파의 후손에게 그 죄를 뒤집어씌우기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자기 몸 희생하며 후손들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겠다는 독립 운동자들의 후손은 가난하게 살면서 자기 사리사욕을 채우겠다는 친일파의 후손들은 부유하게 누릴 것은 다 누리며 그 더러운 습성이 대물림되고 있다. 그렇기에 친일파 후손일지라도 벌은 받아야 하며 독립 운동가들의 후손에게도 도움을 주기 위한 방안을 생각해냈다.

그 방안은 친일파의 후손들에게 새로운 세금을 매겨 그 세금을 독립 운동가들의 후손들에게 주는 것이다. 물론 이는 국가에서 유공자에게 지원하는 것과는 별도여야 할 것이다. 떵떵거리며 사는 친일파 후손의 단지 몇%의 세금만 물어도 매년 모이는 후원금과 성금보다도 많을 것이다. 가난에 헐떡거리며 살고 있는 독립 운동가 후손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며 이 세금의 체납자에 대한 법도 따로 만들어 엄격히 처벌해야 할 것이다.

 

by 초령목 2012. 1. 26.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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