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가 멸망할 때 後三國의 영웅들은 무엇을 했나? 
 

 I. 
  668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한 후 30년 뒤인 698년 고구려 유장 대조영은 
그 지역에 발해를 건국하였다. 한때 당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얻었던 발해는 926 
년 정월 거란의 야율아보기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북방의 漢族이나 북방 민족들의 한반도 
침략을 방어하는 방파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필자의 견해로는 발해가 쇠퇴하고 거란족이 발 
흥할 때가 고구려 멸망이후 한민족이 다시 북방의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최초의 好機였다 
고 판단된다. 후삼국시대를 살았던 한국인들의 고구려 古土에 대한 관심과 미련은 21세기를 
사는 우리 세대보다 훨씬 더 강열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 후백제, 통일신라가 각축을 벌 
린 후삼국시대의 분열, 대립의 현실은 훨씬 냉혹했다. 21세기에도 아직 분단을 극복하지 못 
한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후삼국의 3傑들(궁예, 왕건, 견훤)이 발해 멸망기에 무엇을 했 
는지를 재조명해 보면서 역사의 교훈을 얻어보자. 
 

II. 
  발해가 멸망하기 직전 9세기말부터 10세기 전반기의 동북아시아는 하나의 전환기라고 할 
것이다. 안사의 난 이후 쇠퇴하기 시작한 唐제국은 황소의 대난을 겪으면서 907년에 멸망하 
고 후량이 들어서면서 五代十國(907-960)의 분열시대가 시작되었다. 한편 한반도 내에서는 
후삼국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신라가 쇠퇴일로를 걷고 있었고 견훤의 후백제와 궁예의 태 
봉(고려의 왕건)이 세력다툼을 벌이던 시기이다. 발해의 서쪽에서 일어난 거란이 발해의 쇠 
퇴와 중원의 분열로 인해 갑짜기 큰 나라가 되고 있었다. 거란은 옛부터 요하 상류에 흘러 
가는 시라무렌강가에서 발흥한 東胡계통의 퉁구스와 몽고의 혼혈족으로 알려졌는데, 907년 
야율아보기가 제위에 올라 점차 세력을 확장하면서 북중국으로 진출하는 한편, 동쪽으로 발 
해를 위협하였다. 그는 임기 말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도모할 새로운 야망을 품었다. 
그래서 916年 신책(神冊)이란 연호를 사용하고 자칭 황제라 하고 임황(臨潢, 熱河省)을 皇都 
로 정하고,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이때 영역은 확대되어 발해와 상접하게 되자 발해와 본 
격적인 전쟁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한편 후삼국 중에서 가장 영토를 넓힌 궁예의 고려는 정치판도에 큰 파란이 일어나고 있 
었다. 905년 궁예는 청주에서 만난 策士 아지태의 권고를 받아들여 송악에서 다시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고려에서 마진이라 정하였다. 이는 고려 호족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강행한 일이라 결국 궁예 몰락의 신호탄이 되었다. 청주지방의 1천호를 이주시키고 궁궐을 
수축하는 동안 많은 세금과 부역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호족과 농민들의 강한 반발을 받았던 
것 같다. 궁예가 사용한 국호(901년 고려, 904년 마진, 911년 태봉)를 분석해 보면 자주적인 
성격을 강하게 풍기고 있지만, 정권의 불안정을 또한 내포한 것이었다. 913년 청주파내부에 
서 서로 참소, 모함하는 분열이 생기는 소위 "아지태 사건"이 발생했다. 왕건은 이 사건에서 
아지태를 척결하면서 호족들의 신망을 한 몸에 얻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궁예는 대외관계 
에서, 특히 거란에 대해서는 별다른 적대적 입장을 보이지 않고 있다. <요사>에 의하면, 
915년에 궁예가 거란에 보검을 바치면서 조공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아마도 궁예는 그가 추 
진한 정치숙청으로 말미암은 정치적 혼란을 외교적 관심이전을 통해 극복하려했던 것 같다. 
그리고 918년 왕건에 의해 축출되기 3,4개월 전에 두 차례에 걸쳐 거란에 사신을 파견하였 
던 것도 이런 내부 정세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결국 고려 호족들은 918년 왕권과 결탁하여 궁예를 축출하였다. 그러나 왕건은 환선길, 이 
흔암 등 장수의 반란을 겪어야 했고, 공주 이북 30여성이 다시 후백제에 귀부했다는 점에서 
왕건은 초기에 내부 분란을 정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왕건은 이듬 해 수도를 철원 
에서 송악(개성)으로 옮기고, 년호를 天授라 하였다. 
  고려의 정권교체에 따른 후유증을 지켜본 후백제 견훤은 두 번이나 실패한 대야성 정복의 
꿈을 키워갔다. 그는 920년 대야성을 공격하여 무너뜨리면서, 후백제의 통일정책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925년 12월 후백제의 견훤은 후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後唐 조정으로부터 
'백제왕'임과 食邑 2,500호의 통치자임을 인정받게 되었다. 
  한편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후삼국의 분쟁의 틈을 충분히 이용한 것 같다. 그는 神冊元年 
(916) 정월 황제 즉위 이후 바로 서방 諸國(제국) 공격을 준비하여 오다가 그해 7월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돌궐, 토혼, 당항, 소번, 沙陀諸部(사타제부)를 쳐서 곧바로 평정하고 그 개 
선하였다. 그는 궁예가 축출되었을 918년에는 생산의 요충지인 요동의 정복을 완료했다. 그 
후 발해를 도모하기 위하여 장기 관찰을 한 결과 발해국 내분소식을 접하고 바로 전면 공격 
전을 선언하였다. 야율아보기는 드디어 925년 12월 발해의 수도를 대규모 병력을 동원, 기습 
하여 발해의 부여성을 함락시키고 말았다. 高王이후 200여년동안 해동성국이란 칭호를 받았 
던 대국 발해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926년 정월 1달만에 어이없이 멸망하고 말았다. 
  발해가 거란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해 주변국의 지원을 얻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여러 곳 
에서 감지된다. 거란의 핍박을 경계하여 925년경에는 발해가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結援하 
였음이 {契丹國志}(권1)에 보이고 있다. 이보다 앞서 921년에는 발해가 고려와 외교관계를 
맺고 아울러 通婚하였던 듯한 기록이 {資治通鑑} 권285에 보이고 있다. 만일 이 기록이 신 
빙성이 있다면 발해는 거란과의 전쟁에서 신라와 고려에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양국으로부 
터 군사적 지원은 받지 못한 것 같다. 
  
III. 
  그런데 이 당시 위기에 처한 발해를 보면서 거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고려의 왕건의 숨 
은 의중이 무엇이었던가? 고려의 왕권은 과연 건국초기부터 거란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을까? 결코 아니었다. 925년 주물성(경북 안동 또는 상주 부근) 전투를 전후로 하여 고 
려는 후당과 거란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하는 등 대외정책에서 저자세의 모습을 보인다. 
그 이유는 첫째로 고려가 주도하는 통일전쟁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함이었다. 고려가 거란 
에 호감을 사기 위해 준비한 외교 선물로서는 그해 9월 발해장군 申德 등이 그들의 정치내 
분으로 고려에 내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발해내부에 관한 중요 정세를 전달한 것으 
로 추정된다. 거란으로서는 크게 환영할 것으로 그들이 발해 정벌의 시기를 결정하는데 크 
게 도움을 얻은 것이다. 실제로 거란이 발해의 정치 혼란을 이용하여 "先帝[태조]가 발해인 
들의 틈을 타서 공격하여 싸우지도 않고 이겼다"는 『요사』를 통해서도 알수 있다. 거란은 
922년에 먼저 사신을 파견하여 발해견제를 위한 고려의 협조를 요청했었고, 고려의 사신을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 
  고려가 거란과의 관계 개선에 신경을 쓴 이유는 두 번째 이유는 거란의 국제적 위치 상승 
이라는 국제역학관계의 변화였다. 거란은 고려 사신이 오기 1년 전에 이미 토혼(吐渾), 당항, 
돌궐, 등의 정벌작업을 벌였는가 하면, 大食國에서도 조공사신이 다녀갔다. 그리고 고려사신 
이 다녀갔던 925년 2월에도 대원수 요골(堯骨)이 당항을 경략하고, 北府宰相 소아고지(蕭阿 
古只)가 燕과 趙를 경략하고 돌아오는 등, 그 국력의 강성함은 주변 여러 나라들이 인정하 
고 있는 터였다. 그래서 고려도 이제는 거란의 국제적 위치를 인정하고 그들과 교섭을 원하 
는 적극외교를 펼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되는 사실은 신라가 발 
해를 돕겠다던 약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란에 조공사를 파견하였다는 사실이다. 신라 
도 거란의 국력상승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것은 거란의 발해 침략을 고려, 신라 모두가 묵인, 방조함으로써, 거란의 발해멸망 
을 도와주는 결과는 낳고 말았다. 고려는 발해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926년(2월 20일) 거란 
에 사신을 파견했다.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거란을 "無道의 나라"로 규정한 942년의 
태도와는 전혀 다르다. 발해의 멸망 전후를 영토확장의 호기로 활용하지 못한 주된 원인은 
주물성 전투에서 보았듯이 925년 이후 전개된 고려와 후백제간의 팽팽한 세력균형 때문이었 
다.

<원대신문> 

by 초령목 2013. 1. 20. 16:46

궁예는 신라인으로 성은 김(金)씨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며, 어머니는 헌안왕의 빈어(嬪御,임금의 첩)이며, 그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또는 경문왕(景文王)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하는데, 5월 5일에 외가에서 출생하였다고도 한다. 그 때(其時) 옥상에 긴 무지개(長虹)와 같은 흰 빛(素光)이 하늘에 까지 닿았다. 일관(日官)이 아뢰말하기를 이 아이가 중오일(重午日)[1]에 태어났고, 태어날때부터 이를 가지고 있으며, 또 광염(光焰)[2]이 이상하였으니, 장래에 국가에 이롭지 못할듯 하옵니다. 마땅히 기르지 말아주옵소서 하였다. 왕이 중사(中使)[3]를 불러 그 집에 가서 (아이를) 죽이도록 하였다. 사자(使者)가 아이를 포대기(襁褓)에서 빼았아 아이를 누(樓, 여기서는 마루) 아래로 던졌는데 유모(乳婢)가 몰래 받았는데, 잘못 손을 찔러 한눈이 멀게 되었다. (아이를) 안고 도망쳐 (유모가) 고생하며 양육했다. 나이가 10여살이 되자 유희(遊戱)하기만 하므로 비자(其婢,유모)가 말하기를, '너는 태어나고서 나라의 버림을 받아 내가 차마 보지 못해 몰래 길러 지금이 이르렀는데 너의 이런 미친 행동으로 다른사람이 반드시 알게될 것이다. 이러면 너와 나는 함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어찌하겠느냐'하였다. 그러자 궁예가 울며 그러면 내가 가서 어머니의 근심이 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세달사(世達寺)로 가니 지금의 흥교사(興敎寺)[4]이다. 머리를 깎고(祝髮)하고 중이 되어 스스로 호를 선종(善宗)이라고 붙였다. 자라서는 승려의 계율(僧律)에 따라 주의하지 않고(拘檢) 담기(膽氣)가 있었다. 재를 올리러 행차(行次)하는데 나가자 까마귀가 무언가를 물어다가 그가 소지(所持)한 바리때에 떨어뜨렸다. 보니 아첨(牙籤)[5]에 왕(王)자가 쓰여 있었다. (궁예가) 이를 숨기고 (남에게) 말하지 않고 자부(自負)했다. 신라가 보기에 쇠퇴한 시기(衰季)에 이르므로, 정치가 어지러워져 백성들이 흩어지고, 왕기(王畿)[6] 밖의 주현(州縣)이 반으로 나뉘어(相半) 상반(叛附)하고[7], 온 동네의 도적의 무리가 개미떼처럼 모여들어 일어났다. 선종(궁예)은 이런 어지러운 틈을 타서 무리를 모으면 뜻을 이룰수 있다고 보아 진성왕(眞聖王) 즉위(卽位) 5년, 대순 (大順) 2년, 신해(辛亥)년 (서기 891년) 죽주(竹州)[8]의 적괴(賊魁) 기훤(箕萱)에게 투항했다. 기훤이 깔보고 거만하여 (궁예에게) 예우하지 않았다. 선종이 답답하고 근심하여 스스로 불안하니, 마음을 가라앉혀 기훤의 부하인 원회(元會), 신훤(申煊)등을 친구로 삼았다. 경복(景福)원년 임자(壬子)년 (892년)에 북원(北原, 현 원주시)의 도적 양길(梁吉)에게 투항하였다. 양길이 예우하여 일을 맡곁다. 드디어 군사를 나누어 주니 동쪽으로 가서 땅을 공략하게 하였다.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에 머물며 주천(酒泉, 예천),내성(奈城,영월),울오(鬱烏, 평창), 어진(御珍, 울진)등의 현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받았다. 건녕(乾寧) 원년(894년) 명주(溟州, 강릉)로 들어갔는데, 무리(有衆)가 3500명[9]이나 되었다. 이 무리를 14대로 나누고 금대검모흔장귀평장일(金大黔毛昕長貴平張一)[10]등을 사상(舍上) [사상(舍上) 은 부장(部長)의 뜻][11]으로 삼고, 사졸(士卒,병사)과 더불어 감고(甘苦)와 노일(勞逸)[12]을 같이 하며 주고 빼앗음도 공공으로 돌리며 사적으로 하지 않으니 사람들의 마음(衆心)이 (그를) 존경하며 사랑(畏愛)하여, 그를 장군으로 추대했다. 이에 저족(猪足)[13],생천(狌川)[14],부약(夫若)[15],금성(金城)[16],철원(鐵圓, 철원군)등의 성을 격파했다. 군사들의 소리가 심하게 우렁차니, 패서(浿西)의 적구(賊寇,도적)중 항복해 오는 자가 많았다. 선종이 생각하길 무리가 많으므로 개국할수 있겠다고 생각해 왕을 칭하고, 내외의 관직(官職)을 갖추었다. 우리 태조[17]가 송악군(松岳郡)에서 투항하자, (궁예가 왕건에게) 철원군 태수의 자리를 주었다. 3년 병진(丙辰)[18]에 승령(僧嶺)[19],임강(臨江)[20]의 두 현을 공격해 빼았았다. 4년 정사(丁巳)년[21]에는, 인물현(仁物縣)[22]이 항복해왔다. 선종(궁예)은 송악군이 한강 이북의 이름난 군으로, 산수가 매우 뛰어나다(奇秀)하여 드디어 도읍으로 정하고, 공암(孔巖) [23]검포(黔浦)[24]혈구(穴口)[25]등의 성을 격파했다. 그때 양길은 그대로 북원(원주)에 머물러 있었다. 양길은 국원(國原, 충주)등 30여개의 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선종(궁예)의 땅이 넓고 백성이 많다는 것을 듣고 대로(大怒)하여 30여성의 경병(勁兵)[26]으로 습격하려 하였으나, 선종(궁예)이 이를 몰래 알아내어 먼저 공격하여 대패하였다. 광화(光化)원년 무오(戊午)년 봄 2월에 송악성(松岳城)을 고치고 우리 태조(왕건)을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楊州)[27]와 견주(見州)[28]를 쳤다. 겨울 11월에는 팔관회(八關會)를 시작하였다. (광화) 3년 경신(庚申)년[29]에는 태조에게 광주(廣州), 충주(忠州), 당성(唐城)[30], 청주(靑州) [또는 청천(靑川)이라고도 함][31] 괴양(槐壤)[32]등을 정벌할 것을 명하여 모두 평정하고, 공으로 태조(왕건)에게 아찬(阿湌)의 직을 주었다. 천복(天復)원년 신유(辛酉)년[33], 선종(궁예)이 왕을 자칭하고 사람들에게 알려말하기를 '지난날 신라가 당에 청병(請兵)하여 고구려가 무너졌기 때문에 옛 서울 평양(平壤)은 궁하여 풀이 무성하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을 것이다' 하였다. 아마도 태어나서 (신라로부터) 버려진것에 원한을 가져서 이 말을 했을 것이다. 일찍이 남쪽으로 가서 흥주(興州)[34]의 부석사(浮石寺)에서[35] 벽에 그려진 신라왕의 초상을 보고 칼을 뽑아 (그림을) 내리 쳤는데, 칼자국이 지금도 남아있다.

천우(天祐)원년 갑자(甲子)년에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摩震)로 하였다. 이때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여, 광치내(匡治奈)[지금 시중(侍中)]·서사(徐事)[지금 시랑(侍郎)]·외서(外書)[지금 원외랑(員外郞)]의 인원을 채우고,[36] 또 병부(兵部)[지금 군부(軍部)]· 대룡부(大龍部)[창부(倉部)를 일컬음]·수춘부(壽春部)[지금 예부(禮部)]·봉빈부(奉賓部)[지금 예빈성(禮賓省)]·의형대(義刑臺)[지금 형부(刑部)]·납화부(納貨部)[지금 대부시(大府寺)]·조위부(調位部)[지금 삼사(三司)]·내봉성(內奉省)[지금 都省(도성)]·금서성(禁書省)[지금 비서성(秘書省)]·남상단(南廂壇)[지금 장작감(將作監)]·수단(水壇)[지금 수부(水部)]·원봉성(元鳳省)[지금 한림원(翰林院)]·비룡성(飛龍省)[지금 태복시(太僕寺)]·물장성(物藏省)[지금 소부감(少府監)]을 설치하였다. 또 사대(史臺)[모든 역어(譯語, 외국어)의 학습을 맡음]·식화부(植貨府)[과수(果樹)의 재식(栽植)을 맡음]·장선부(障繕部)[성황(城隍)의 수리를 맡음]·주도성(珠淘省)[그릇의 제조를 맡음]을 설치하고, 또 정광(正匡), 원보(元輔), 대상(大相), 원윤(元尹) 좌윤(佐尹), 정조(正朝), 보윤(甫尹), 군윤(軍尹), 중윤(中尹)등의 품직을 만들었다.

가을 7월에 청주(靑州, 청주시와 청원군)의 1천가구를 철원군(鐵圓城)으로 옮겨 서울로 삼았다.[37] 상주(尙州)등 30여 주를 정벌해 빼았았다. 공주(公州)의 장군홍기(弘奇)가 항복해 왔다.

천우(天祐) 2년 을축년(乙丑) (905년), 새 서울로 들어와 궁궐과 누대를 매우 호사하게 고쳤다. 무태(武泰)연호를 성책(聖冊) 원년으로 고쳤다. 패서(浿西)에 13진을 나누어 설치하였다. 평양성주장군 검용(黔用), 증성(甑城)의 적의, 황의를 한 도적과 명귀(明貴)등이 항복해왔다. 선종(궁예)이 (나라가) 강성한데 자긍심을 갖고, (후백제와 신라, 특히 신라를) 병탄하려는 의욕을 품었다. 그는 국민들에게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도록하였으며, 신라에서 오는 사람은 모두 베어 죽였다.

주량(朱梁) 건화(乾化) 원년 신미년 (911년)에는 성책(聖冊)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 원년으로 고쳤으며,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고쳤다. 태조(고려 태조)로 하여금 군사를 보내 금성(錦城)등지를 쳐 금성(錦城)을 나주(羅州)로 개칭했다. 이 공을 논하여 태조를 대아찬(大阿湌)장군으로 하였다.

선종(궁예)은 미륵불(彌勒佛)을 자칭하여 머리에 금책(金幘)[38]을 쓰고 몸에 방포(方袍)[39]을 입었으며, 맏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 둘째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하였으며 외출할때는 항상 백마를 타며 그 꼬리와 말갈기를 채색 비단으로 장식하고, 소년소녀들로 하여금 번개(幡蓋)[40]와 향화(香花)[41]를 들고 앞에서 인도하고, 또 비구(比丘) 200여명에게 범패(梵唄)를 부르며 뒤에서 따라오게 하였다.

또 불경 20권을 썼는데, 그 내용이 요망(妖妄)해 모두 불경(不經)스러웠다. (궁예가) 때때로 반듯하게 앉아 강설(講說)을 했는데, 승려 석총(釋聰)이 모두 사설(邪說)[42]이고, 괴상한 이야기라며 (이러한 강설로는) 남을 가르칠 수 없다하였다. 선종(궁예)이 화를 내어 철추(鐵椎)로 때려 죽였다. 3년 계유(癸酉) (913년)에 태조(왕건)을 파진찬(波珍湌) 시중(侍中)으로 하고, 4년 갑술(甲戌) (914년)에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에서 정개(政開)원년으로 하고 태조를 백강장군(百舡將軍)[43]으로 하였다. 정명(貞明)원년(915년)에 부인 강씨가 왕이 법도에 맞지 않는 일을 많이 한다 하여 정색(正色)을 하고 간언하였다. 왕이 미워하여 말하길, 네가 다른사람과 간통하니 어찌된 일이냐 하였다. 강씨가 말하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겠냐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신통력으로 보고있다 하여 쇠방망이를 불로 가열해 음부에 절구질해 죽이고 그의 두 아이를 죽였다. 그후 의심이 많아지고 화를 잘 내니 보좌하는 관리와 장수, 관리들 부터 평민까지들이 무고하게 죽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부양(斧壤)과 철원(鐵圓)사람들이 그 독에 어찌 이길수 없었다.

이보다 전에,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당나라에서 철원 시전(市廛)으로 와서 살았다. 정명(貞明)4년 무인(戊寅)년 (918년)에 시장안에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괴위(魁偉)하였으며 머리털이 모두 희었으며, 옛날 의관(衣冠)을 입은 채 왼손에는 사기로 된 주발, 오른손에는 낡은 거울을 들고 있었다. 그가 창근에게 내거울을 사겠냐고 하니 창근이 곧 쌀과 그것을 바꾸었다. 그 사람이 쌀을 거리의 구걸하는 아이들에게 나누어준 후 어디로 갔는지 알수 없었다. 창근이 그 거울을 벽 위쪽에 걸었는데, 해가 거울면을 비추자 가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읽어보니 옛날 시와 같은 것으로 내용을 간략하게 말하면

上帝降子於辰馬: 상제가 아들을 진마(辰馬)[44]에 내려 보내니
先操鷄後搏鴨: 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때린다
於巳年中二龍見: 뱀띠해에는 두 마리 용이 나타나는데
一則藏身靑木中: 한마리는 푸른 나무에 몸을 숨기고,
一則顯形黑金東: 한마리는 몸 형체를 검은 금 동쪽에 나타낸다.

창근이 처음에는 이런 글이 써진줄을 몰랐으나, 이를 본 후에는 예사롭지 않다고 보아 이를 왕에게 고하였다. 왕이 유사(有司)에게 명해 창근과 함께 그 거울의 주인을 물색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다만 발답사(勃颯寺)불당에 진성(鎭星)[45]소상(塑像)이 있었는데, 모습이 그와 같았다. 왕이 한숨쉬며 이상히 여기다가 문인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등에게 풀이하게 했다. 함홍등이 서로 말하기를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냈다는 것은 진한과 마한을 일컬음이요, 두마리 용이 나타나 한마리는 푸른 나무에 몸을 숨기고, 한마리는 몸을 검은 쇠 동쪽에 나타낸다는 것은 푸른 나무가 소나무를 일컬으니 송악군 출신으로 용이 이름에 들어간 사람의 손자, 즉 지금의 파진찬 시중이요, 검은 금은 철이니 이는 지금의 도읍 철원을 일컫는 바이므로 왕이 여기서 처음 일어났다가 여기서 멸망한다는 말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때린다는 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나중에 압록(鴨綠)에 이른다는 뜻이다 하였다.

송함홍들이 서로 말하기를, 지금 왕이 혹독하게 나라를 다스리니, 우리들이 만약 사실대로 말하면 혼자도 아닌 우리무리가 김치와 젓갈(葅醢)이 될 뿐아니라 파진찬(波珍湌, 왕건)도 나쁜 일을 당할 것이다. 이에 듣기 좋게 꾸며 보고했다. 왕이 흉학(凶虐)한 일을 멋대로 하니 신하들이 떨며 두려워(震懼)하며 어찌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장군 홍술(白玉),삼능산(三能山)복사귀(卜沙貴). 즉, 홍유(洪儒), 배현경(裴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謙)의 청년때 이름이었는데, 이 네명이 비밀스럽게 모의해 태조의 사제(私第)로 가서 말하길, 왕이 부당한 형벌을 내려 부인과 아들을 죽이고 신하들을 모조리 죽여[46] 모든 사람이 도탄에 빠져 편안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혼(混)한 (임금)을 폐하고 명(明)한 (임금)을 세우는 것이[47]천하의 큰 뜻이니. 공이 탕(湯)(왕)과 무(武)(왕)의 일을 행하길 바란다 하였다.

태조(왕건)이 불쾌한 얼굴빛을 드러내며 거절하며, 나는 충순(忠純)[48]한 것으로 자처했으므로 지금 임금이 포악하고 어지럽지만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대체로 보아 신하가 왕으로 바꾸어 앉는 것을 혁명이라 한다. 나는 실로 덕이 적으니 감히 은(殷)과 주(周)의 일[49]을 본받겠느냐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때는 두 번다시 오지 않는 것으로 만나기는 어렵지만 놓치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데 받지 않으면 도리어 큰 허물이 될 것입니다. 지금 정사가 어지럽고 나라가 위험에 처해 백성들이 모두 왕을 원수로 보는데 오늘날 덕망이 공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습니다. 하물며 왕창근이 얻은 거울의 내용이 저러한데, 어찌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독부(獨夫)의 손에 죽임을 당하겠습니까 하였다.

부인 유씨도 장수들의 말을 듣고서 태조에게 말했다. 어진 사람이 어질지 못한 사람을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말을 듣고 첩도 화를 내게 되는데 대장부는 어떻겠습니까? 지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갑자기 변했으니, 하늘의 명령이 돌아온 것입니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받들고 문을 나서며 왕공이 이미 정의의 깃발을 들었다고 앞에서 외치도록 하였다. 이에 앞뒤로 바쁘게 따르는 자의 수가 얼마인지 알 수 없었으며, 또 먼저 궁성 문에 이르어 북을 떠들썩하게 치며 기다리는 자가 모두 1만여명이었다. 왕이 이를 듣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다가 이에 미복(微服)[50]으로 갈아입고 숲으로 들어갔다.

그는 얼마 못가 부양(斧壤)주민에게 해(害)를 입었다.

궁예는 당 대순(大順) 2년(891년)에 일어나 주량(朱梁) 정명(貞明) 4년(918년)까지 이르렀으니 28년만에 망한 것이다.

by 초령목 2012. 4. 5.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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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원 궁예도성터 ▲ 반월성에서 본 포천시
궁예(?.918)는 그 출생에 대하여 신라 헌안왕, 경문왕, 신무왕의 아들로 말해지는 왕족설과 장보고의 외손자설 등이 있다.
탄생설화에 의하면 그는 5월 5일 외가에서 출생하였는데,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단오날 태어났으며 나면서부터 이가 나고 또한 이상 한 빛까지 나타나므로 장차 국가에 해로울 것이라고 하였다. 이를 믿 은 왕이 죽일 것을 명하여, 사자가 그 집에 가 강보에 싸인 아이를 빼 앗아 다락 밑으로 던졌다. 이 때 다락 밑에 숨어 있던 유모가 아이를 받았으나, 잘못하여 손가락으로 눈을 건드리는 바람에 애꾸눈이 되었 다고 한다. 이것은 그가 신라 왕족이었으나 왕실의 내분으로 인하여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하였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 뒤 궁예는 유모 에 의하여 키워졌으며, 세달사(世達寺)에서 출가하여‘선종(善宗)’이 라 이름하였다.
그는 소년 성장기를 중도 아닌 속인도 아닌 수도승 즉 수원승도(修院僧徒)로 지내면서 절의 규율에 구애받지 않았고 건들거리며 담기가 있었다고 한다. 즉 세달사의 재가화상(在家和尙)으로 사찰 소유의 농 지에서 노동에 종사하고, 일단 유사시 전투력화 할 수 있는 비승비속 (非僧非俗)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어 궁예는 양길의 휘하에 있다가 894년 명주(강릉)를 점령하면서 장군에 추대되고 있다. 신라말 고려초 호족시대에 자의적으로 장군을 칭한 것은 궁예가 처음이었다. 여기서 궁예는 휘하 세력들과 의협집단 적인 군사체제를 형성하는데 장군과 그 집단의 결합은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일선에서 만나 자발적으로 심적 인격적으로 결합된 형태였다. 이러한 초기 궁예 세력은 고려 중기 최씨 무신정권의 정권형태와 비교 되며, 당시 당나라 말기의 절도사에 의한 반독립적인 할거형태와 견줄 수 있다. 그런데 결합체제는 일본역사에서 막부체제로 무사집단에 의 해 이루어진 제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강릉에 이어 인제ㆍ화천ㆍ김화ㆍ철원을 점령하고, 오늘날 황 해도 지역인 패서지역의 투항과 개경호족세력 왕건의 귀부를 받아들 여 오늘날 남한강과 한강유역 일대인 중부 지역을 장악하는 대 세력을 형성하고 후삼국의 패자로 등장하였다.
▲ 포천 궁예미륵 ▲ 포천 궁예성(보가산성) ▲ 궁예도성 위치도
▲ 포천 반월성
그리고 궁예는 고려(高麗) - 마진(摩震) - 태봉(泰封)으로의 국호 개 칭을 통하여 지역성을 바탕으로 출발하여 일통삼한의 웅대한 정치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자주대국의 기치를 올렸다. 여기 에 그의 정치철학을 담아 그 의미로 후고구려국에서 대동방 국(大東方國)으로, 나아가 우주질서에 순행하여 상생의 평등 세계를 펼치고자 했던 것이다. 또 무태(武泰) - 성책(聖冊) - 수덕만세(水德萬歲) -정개(政開)로의 연호를 쓰면서 자주적 이고 우주의 순행질서를 따라 혁명의 원리와 선양의 원리를 수용하여 나라를 경영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미륵신앙을 정 치이념으로 제시하여 태평성대의 이상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현실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궁예는 891년 자립하여 후고구려를 세운 뒤 918년에 이르 기까지 약 28년 동안 권좌에 있다가 멸망하였다. 궁예의 통 치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인데, 종래의 사료들은 모두 부정적 인 평가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궁예는 정사(正史)에 나타 난 정신 파탄자로서의 비참한 최후와 달리, 그에 대한 생생한 전설과 지명이 구전되고 있으며, 현존하는 순천 김씨, 광산 이씨는 그의 후손으로 되어있어 족보에 살아 계승된 궁예의 이면사가 있음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즉, 철원.연천.포 천 등지의 궁예 최후의 방어성지 즉 보가산성과 명성산성. 반달산성.운악산성을 비롯한 안성지역에까지 이르는 궁예 미륵의 구전설화와 민간신앙를 통하여 후세 승자의 역사 속 에 묻힌 패자 영웅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북통일의 민족적 과제와 평등한 경제생활을 이룩 함으로써 해결되어야 할 우리나라 내부모순과 자주국방과 외 교 등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궁예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 다고 본다. 후삼국시대라는 정치적 격변기에 있어서 치열하게 활동했던 인물이 역사의 패자가 되었다고 하여, 또 정사의 뒤 안길에 매립되어 있다고 하여, 역사의 승자와 더불어 시대모순 을 해결하고자 했던 동반자적인 활동의 실체와 역사성을 소홀 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왕건의 고려 건국의 전초적인 바탕에 는 궁예의 자주적이고 강력한 국가경영이 있었던 것이다.
정권교체는 동양적 역성혁명에 의한 평화적이고 긍정적인 선양형식 이 있는 한편, 쿠데타 형태로 부정적으로 행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 나 그 실체는 비슷하면서 포장만 달리하는 경우가 많음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나《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궁예는 후사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 자신이 부인과 청광보살ㆍ신광보살로 칭하던 아들을 무 자비하게 죽인 사실이 그것을 인정하게 한다. 그러나 궁예의 후손은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순천김씨와 광산이씨는 그들의 족보에 궁예 의 후손임을 밝혀놓고 있다.
순천김씨 세보에는 궁예가 신무왕(장보고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김우징)의 다섯째 아들로 되어 있으며, “궁예의 후손 중 하나는 순천김 씨가 되었고, 하나는 광산이씨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족보 에 수록된 시조 부분의 사실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다. 후손들이 족 보를 만들 때 대체로 자기 조상을 미화하는 경향이 있어 황당한 전설 이나 신화를 싣고 있음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순천김씨 족보 는 궁예를 선조로 실어놓고 있다. 즉, 순천김씨 철원공파의 세보에 따 르면 자신들의 시조는 청광이고, 청광의 아버지는 궁예라고 밝혀놓고 있다. 또 광산이씨 세보에도 궁예가 23세 조로 기록되어 있다. 즉 광산 이씨 세보에는 궁예는 경문왕의 서자이며, 그 아들 청광은 순천김씨의 시조, 신광은 광산이씨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더욱 흥미있는 것은 순천김씨의 중시조인 김종서와 광산이씨의 중 시조인 이선제는 궁예를 부정적으로 서술한《고려사》편찬에 밀접한 관 련이 있다는 것이다. 김종서는 조선초 정승에 오른 인물로 실제로《고 려사》편찬을 관장하였고, 이선제 역시 판서를 역임한 인물로 고려사의 한 부분을 집필하였다. 이들은《고려사》에 궁예가 어떻게 서술되는가 를 알면서도 그 궁예를 선조로 모시고 살아갔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 은 궁예가 순천김씨와 광산이씨의 선조라는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 게 하는 것이다. 이들 가계의 전통은 궁예를 정사에 전하는 탐학한 왕 이 아니라 태평성대의 이상세계를 만들고자 했던 개혁군주로서 시대 의 영웅이었음을 믿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글·사진 | 나각순_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전임연구위원, 문학박사

by 초령목 2012. 3. 28. 22:32

[폭군인가? 비운의 제왕인가? - 궁예(弓裔)] - 2

▶호족들과 갈등 속에서 몰락

911년 궁예는 다시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으로 바꾼다. 하지만 궁예는 호족들의 반발을 극복하지 못했다.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의 저자 박영규씨는 '호족들은 조직적으로 궁예에게 대응했고 이에 궁예는 '전횡'과 '독단'으로 맞섰다.고 해설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왕건'과 불화가 생겼으며 경국 '918년 6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고려사>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궁예가 왕건을 태조로 옹위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서 '왕공이 벌써 천하를 얻었으니 내일은 끝났다.'며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 변복을 하고 산골로 도망쳐 나왔다. 이틀 밤이 지난 후 배가 몹시 고파 보리이삭을 잘라 훔쳐먹다 부양(강원도 평강)의 백성들에게 살해됐다."

또 <삼국사기>에는 '도주하다가 부하에게 피살'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강원도 철원 지방에 내려오는 '전설'은 이와 아주 반대되는 궁예의 모습을 담고 있어 주목을 끈다. 육당 최남선이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철원 지방에서 채록한 전설을 기록한 '풍악기유'에 따르면 '궁예는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 설움을 견디지 못한 채 천명을 알고 이에 순응해 자결한 의군'으로 전해지고 있다. '슬픈 궁예'라는 책을 펴내 화제를 모은 '이재범 경기대 교수' 또한

"궁예의 포악함 때문에 반란이 일어난 것으로 정사엔 기록되어 있지만 실은 고구려계 호족들의 조직적은 결탁에 의해 왕좌에서 물러나게 된 것으로 반란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궁예의 포악함을 지나치게 부각시켰을 수 있다."라고 분석한다.

▶'전제적 폭군' , '비운의 제왕' 평가 엇갈려

나라를 세우고 미륵이라 스스로 칭하며 전제적 정치를 펼쳤던 궁예, 토착 세력을 규합하며 '새나라'의 건설에 이상을 꿈꿨던 궁예. 이 두개의 얼굴을 가진 궁예에 관한 사연과 지명이 아직까지도 '철원'의 산과 들에 흩어져 내려오고 있다.

궁예와 부하들이 왕건에게 쫒겨난 것이 서러워 통곡했다는 '명선산(일명 울음산)", 왕건에게 쫓기어 궁예가 한숨 돌리고 잠깐 쉬어 간 골짜기라는 '한장모탱이', 궁예의 통한을 간직한 최후의 격전지 '보개산성!'

<정말 궁예는 '외눈'으로 반쪽 세상을 살다간 반쪽 영웅이었을까? 아니면

우리가 그를 '외눈'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by 초령목 2012. 3. 28. 22:29

[폭군인가? 비운의 제왕인가? - 궁예(弓裔)] - 1

궁예(弓裔) ~918

'애꾸눈 왕' 궁예. 심각한 정신분열증에 사로잡혀 제멋대로 칼날을 휘두른 폭군인가?

더 나은 이상세계를 꿈꾸다 끝내 좌절하고만 비운의 제왕인가?

보통 사람들의 머리에는 아무래도 후자보다 전자가 더 깊숙히 각인되어 있을 것 같다.

<삼국사기> 궁예전에는 "궁예는 신라 사람이요,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47대 헌강왕 혹은 48대 경문왕이다 라고 적고 있다. 엄연한 신라의 왕족이다. 그러나 <제왕운기> 후고구려기에는 "신라 임금 경문왕이 서자를 낳았더니 이가 두겹이라 목소리도 겹쳐졌네. 얼굴이 임금에게 해롭다고 내쫓으니 중으로 행세하며 몰래 돌아다녔네" 라고 출생 비화를 밝히고 있다. 태어날 때 부터 이가 돋아난 궁예. 이는 궁예가 애꾸눈이 된 사연이기도 하다. 궁예는 태어나자마자 죽이라는 왕의 명을 받은 내시에 의해 궐 밖으로 내던져졌는데 다행히 유모가 받아 목숨은 건졌으나 바로 이 때 한쪽 눈이 손가락에 찔려 시력을 잃게 됐다고 한다.

이처럼 궁예는 출생부터 사후까지가 온통 미스터리다. '삼국사기'에는 궁예가 나이 10여세가 되어도 장난이 그치지 않으므로 유모가 '네가 태어나자 나라에서 버려 내가 차마 어쩔 수 없어 몰래 숨어 길러 오늘에 이르렀다. 네가 이렇게 장난이 심하면 다른 사람이 알게 될 터이고 그러면 나와 너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니 이를 어찌하랴?"라고 한탄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때까지만 해도 후대에 '정신분열자' '과대망상자'라는 소리를 들을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세달사를 거쳐 '기훤'과 '양길'의 휘하에 들어가 큰 공을 세운 궁예는 부하를 자신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공명정대한 지휘관으로 성장한다.

궁예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삼국사기'에서 마저 사졸과 함께 달고 쓰고 힘들고 편안함을 같이하는가 하면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엄정한 장수로 그리고 있다. 이런 덕망과 수업을 쌓은 궁예는 신라에 반대하는 호족 세력을 기반으로 삼아 장군으로 추대된 인물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면 896년 '고려'라는 나라를 세운 이래 18년 제위동안 국호를 '마진'으로, 다시 마진에서 '태봉'으로 바꿀 만큼 호족들과의 사이에서 수많은 역경과 고뇌를 치른 왕이라 할 수 있다. '마진'은 범어로 마하(크다)와 진단(중국)의 약어로 '대동방국'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궁예는 고구려라는 특정국가를 계승하기 보다는 신라와 백제는 물론 그 이상의 대륙까지 아우르는 통일 대제국을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때문에 고구려계 호족들은 반발하게 되고 점차 입지가 흔들린 궁예는 '이국이나 다름없는' '송악'을 떠나 처음 도읍을 정했던 '철원'으로 천도를 단행한다.

by 초령목 2012. 3. 28. 22:29

강정화(康靖和) 고려

후삼국, 고려초의 술사로, 도선(道詵)의 제자다. 도선으로 부터 태일옥장보법(太一玉帳步法)이란 비술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인종조 서경천도운동을 주도했던 묘청이 강정화의 제자라고 자칭했다.

 


겸신(謙信) 승려

광종조 화엄종의 승려로, 광종초 국사로 추앙받았다. 953년 광종4년 3월에 후주사신이 와서 책봉의례를 거행하려 했지만 비가 많이 내려 기일이 연기되었다. 이때 국사 겸신이 균여를 기청제(祈晴祭)를 주관할 승려로 31세의 균여대사를 천거하였다.

 

 

오현(悟賢) 승려

광종조 승려로 직계는 국사,왕사 다음인 승통(僧統)직인 철달徹達)에 이르렀다. 958년 광종9년 불일사 안에 벼락이 떨어져 균여가 재변을 막기위해 강연을 벌렸는데, 3주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강연을 하자 강연을 듣고 있던 오현이 생각하길 "강연의 주제자가 비록 명민하나 그래도 후배다. 내가 비록 재주가 없으나 그래도 선배다. 그런데 어찌하여 묻고 대답하는 데 겸양과 사양의 예를 생각지도 않는단 말인가?"하여 균여를 비방하였다. 그러자 한 거승이 중간에 나서 말하길 "시기하고 분해할 것 없습니다. 오늘의 강사는 그대 선조 의상대사의 제7 화신입니다. 큰 가르침을 널리 펴시고자 다시 인간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오현 승려가 이를 듣고 모인 사람들을 향하여 "내가 잘못 알았다"며 참회를 하였다.

 

 

김계명(金啓明) 신라왕족

신라 43대왕 희강왕(僖康王)의 왕자로 838년 희강왕이 즉위 3년만에 상대등 김명(金明), 시중 이홍(利弘)등이 반란을 맞아 자진하자 왕위를 계승치 못했다. 이후 848년 문성왕(文聖王) 2년에 파진찬(波珍飡) 벼슬에 있다가 시중에 올랐다. 이후 857년 9월에 문성왕을 등극시키는데 큰공을 세웠던 시중 겸 병부령 김양(金陽)이 죽자 문성왕의 숙부 김의정(金誼靖)과 시중 김계명이 문성왕을 협박해 결국 김의정이 왕위에 올라 헌안왕이 되었다. 문성왕은 유조를 내린후 7일만에 죽었다. 이후 861년 헌안왕(憲安王) 5년에 아찬(阿飡) 벼슬에 있다가 아들 김응렴(金膺廉)이 약관의 나이로 헌안왕의 유명을 받아 왕위에 올라 경문왕(景文王)이 되었다.

이후 866년 1월 의공대왕(義恭大王)으로 추봉되었으며, 부인 광화부인(光和夫人/신무왕(神武王)의 딸)은 광의왕태후(光懿王太后)로 추봉되었다.


 

 

계아태후(桂娥太后) 김씨 신라왕족

신라 제49대 임금 헌강왕(憲康王)의 공주로 당시 화랑이였던 김효종(金孝宗)에게 시집갔다. 남편 김효종은 902년 효공왕 6년 대아찬(大阿飡) 벼슬에서 집사성 시중(侍中)이 되었으며, 아들 김부(金傅)는 927년 11월 백제왕 견훤에 의해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에 옹립되었다. 이후 김효종은 신흥대왕(神興大王)으로, 김씨는 계아태후(桂娥太后)로 추봉되었다.

 


김계흥(金季興) 신라

신라 진골귀족 출신으로 경문왕 6년 866년 10월에 이찬(伊飡) 벼슬에 있던 형 김윤흥(金允興)과 둘째형 김숙흥(金叔興)과 더불어 모반을 획책했으나 발각되자 삼형제가 대산군(岱山郡/경북 성주)로 도주하였으나 추격병에 의해 잡혀 삼족이 처형당했다.

 

 

김윤흥(金允興) 신라

신라 진골귀족 출신으로 경문왕조 벼슬이 이찬(伊飡)에 이르렀다. 김윤흥은 문성왕조에 왕명에 의해 남원경(南原京)의 사신(仕臣)이 되어 총명한 소년 안장(安長)과 청장(淸長) 2인을 뽑아서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 있는 거문고의 대가 귀금(貴金)에게 거문고를 배우게 하였다. 허나 귀금이 거문고 기술을 다 가르쳐 주지 않자, 김윤흥이 직접 찾아가 예의와 정성을 다하여 비법을 전수해 줄것을 간청했다. 그후 귀금은 소년 안장(安長)에게 거문고의 비법을 전수하였으며, 안장은 다시 극종(克宗)에게 전수하여 곧 세상에 널리 퍼졌다. 이후 문성왕이 숙부 김의정(金誼靖)과 시중 김계명(金啓明)에게 협박당하여 김의정에게 양위하고 김의정이 헌안왕이 되고, 다시 김계명의 아들 김응렴(金膺廉)이 경문왕이 되자 불만을 품고 경문왕 6년 866년 10월에 두동생 김숙흥(金叔興), 김계흥(金季興)과 더불어 모반을 획책하다 사전에 발각되자 대산군(岱山郡/경북 성주)로 도주하였으나 추격병에 의해 잡혀 삼족이 처형당했다. 당시 신라는 43대 왕 희강왕(僖康王) 이후 헌정계(憲貞系)와 균정계(均貞系)의 대립이 심했는데, 경문왕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헌정계가 집권하자 균정계에 속한 김윤흥등이 반란을 모의한것이다.

 

 

김숙흥(金叔興) 신라
신라 진골귀족 출신으로 균정계인 문성왕(文聖王)이 즉위 반년만에 문성왕의 숙부 김의정(金誼靖)과 시중 김계명(金啓明)에 의해 강제로 퇴위되고 7일만에 죽은후 김의정이 헌안왕에, 뒤에 김계명의 아들 김응렴(金膺廉)이 경문왕에 오르자 김숙흥이 속한 헌정계에서는 불만이 극도로 높아졌다. 결국 경문왕 6년 866년 10월에 이찬 벼슬에 있던 형 김윤흥(金允興)과 동생 김계흥(金季興)과 더불어 모반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자 삼형제가 대산군(岱山郡/경북 성주)로 도주하였으나 추격병에 의해 잡혀 삼족이 처형당했다.

 


광화부인(光和夫人)/광의왕태후(光懿王太后) 박씨 신라왕족

신라 45대 임금 신무왕(神武王)의 딸이며, 46대 임금 문성왕(文聖王)과는 오누이 사이이다. 남편은 43대왕 희강왕(僖康王)의 왕자인 김계명(金啓明)이다. 오빠 문성왕은 숙부인 김의정(金誼靖/47대 임금 헌안왕)과 시중이였던 남편에 의해 퇴위당했다. 광화부인의 아들 김응렴(金膺廉)은 18세에 화랑의 우두머리 국선(國仙)이 되었다. 헌안왕은 김응렴을 총애해 두딸중 한명을 주겠노라고 말했으나 김응렴은 쉽게 결정치 못하고 부모에게 상의했다. 김계명과 광화부인 박씨는 둘째 공주가 인물이 뛰어나다며 둘째 공주를 선택하라 하였으나, 화랑를 가르치던 범교사(範敎師)는 첫째 공주를 얻으라 말하였다. 이에 첫째 공주와 혼인하였으며 3개월후 헌안왕의 유명에 의해 48대 경문왕에 올랐다.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6년후 866년 1월 남편 김계명은 의공대왕(義恭大王)으로, 광화부인(光和夫人)은 광의왕태후(光懿王太后)로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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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원랑(邀元郎) 신라

신라 경문왕조 화랑으로 동료화랑인 예흔랑(譽昕郎), 숙종랑(叔宗郎), 계원(桂元)과 더불어 전국유람을 하였는데, 당시 화랑들은 수백, 수천여명이 무리를 지어 경주를 떠나 명주(강릉), 양양, 고성을 거쳐 금강산 방면 통천의 금란굴을 유람하곤 하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화랑의 우두머리직인 국선(國仙) 요원랑은 동료 화랑들과 함께 화랑출신의 경문왕(왕위에 오르기전 김응렴(金膺廉)은 18세에 이미 국선이였다)을 찬양하며 치국(治國)의 뜻에서 가사 세 수를 지었는데 현금포곡(玄琴抱曲), 대도곡(大道曲), 문군곡(問群曲)이다. 요원랑등은 이 세수를 사지(舍知/17관등중 13위) 심필(心弼)을 시켜 당시 향가(鄕歌) 작가로 이름난 대구화상(大矩和尙)에게 보냈는데, 대구화상이 이를 다시 윤색하고 악보를 더해 경문왕에게 올리자 왕이 크게 기뻐하고 포상을 하였다고 한다.

 

 

숙종랑(叔宗郎) 신라

신라 경문왕조 화랑으로 동료화랑인 요원랑(邀元郎), 예흔랑(譽昕郎), 계원(桂元)과 더불어 전국유람을 하였는데, 당시 화랑들은 수백, 수천여명이 무리를 지어 경주를 떠나 명주(강릉), 양양, 고성을 거쳐 금강산 방면 통천의 금란굴을 유람하곤 하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화랑의 우두머리직인 국선(國仙) 숙종랑은 동료 화랑들과 함께 화랑출신의 경문왕(왕위에 오르기전 김응렴(金膺廉)은 18세에 이미 국선이였다)을 찬양하며 치국(治國)의 뜻에서 가사 세 수를 지었는데 현금포곡(玄琴抱曲), 대도곡(大道曲), 문군곡(問群曲)이다. 요원랑등은 이 세수를 사지(舍知/17관등중 13위) 심필(心弼)을 시켜 당시 향가(鄕歌) 작가로 이름난 대구화상(大矩和尙)에게 보냈는데, 대구화상이 이를 다시 윤색하고 악보를 더해 경문왕에게 올리자 왕이 크게 기뻐하고 포상을 하였다고 한다.

 

 

예흔랑(譽昕郎) 신라

신라 경문왕조 화랑으로 동료화랑인 요원랑(邀元郎), 숙종랑(叔宗郎), 계원(桂元)과 더불어 전국유람을 하였는데, 당시 화랑들은 수백, 수천여명이 무리를 지어 경주를 떠나 명주(강릉), 양양, 고성을 거쳐 금강산 방면 통천의 금란굴을 유람하곤 하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화랑의 우두머리직인 국선(國仙) 예흔랑은 동료 화랑들과 함께 화랑출신의 경문왕(왕위에 오르기전 김응렴(金膺廉)은 18세에 이미 국선이였다)을 찬양하며 치국(治國)의 뜻에서 가사 세 수를 지었는데 현금포곡(玄琴抱曲), 대도곡(大道曲), 문군곡(問群曲)이다. 요원랑등은 이 세수를 사지(舍知/17관등중 13위) 심필(心弼)을 시켜 당시 향가(鄕歌) 작가로 이름난 대구화상(大矩和尙)에게 보냈는데, 대구화상이 이를 다시 윤색하고 악보를 더해 경문왕에게 올리자 왕이 크게 기뻐하고 포상을 하였다고 한다.

 

 

계원(桂元) 신라

신라 경문왕조 화랑으로 동료화랑인 요원랑(邀元郎), 숙종랑(叔宗郎), 예흔랑(譽昕郎)과 더불어 전국유람을 하였는데, 당시 화랑들은 수백, 수천여명이 무리를 지어 경주를 떠나 명주(강릉), 양양, 고성을 거쳐 금강산 방면 통천의 금란굴을 유람하곤 하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화랑의 우두머리직인 국선(國仙) 계원은 동료 화랑들과 함께 화랑출신의 경문왕(왕위에 오르기전 김응렴(金膺廉)은 18세에 이미 국선이였다)을 찬양하며 치국(治國)의 뜻에서 가사 세 수를 지었는데 현금포곡(玄琴抱曲), 대도곡(大道曲), 문군곡(問群曲)이다. 요원랑등은 이 세수를 사지(舍知/17관등중 13위) 심필(心弼)을 시켜 당시 향가(鄕歌) 작가로 이름난 대구화상(大矩和尙)에게 보냈는데, 대구화상이 이를 다시 윤색하고 악보를 더해 경문왕에게 올리자 왕이 크게 기뻐하고 포상을 하였다고 한다.

 

 

심필(心弼) 통천

신라 경문왕조 하급 관리로 직급은 17관등중 13관등인 사지(舍知)에 이르렀다. 당시 화랑들은 무리를 이루워 전국을 돌며 심신을 수련하곤 하였는데 화랑의 우두머리인 국선 요원랑(邀元郎), 숙종랑(叔宗郎), 예흔랑(譽昕郎), 계원(桂元)등이 금강산 방면의 통천 금란굴에 이르러 노래 세수를 지었는데, 이들이 세수를 지은 서책을 심필에게 주어 당시 향가작가로 이름난 대구화상(大矩和尙)에게 보이게 하였다. 대구화상은 이를 다시 윤색하고 악보를 더해 경문왕에게 올리자 왕이 크게 기뻐하고 화랑들에게 포상을 하였다고 한다.


 

인흥(藺興)/김인흥(金藺興) 신라

신라 경문왕조 대신으로 874년(경문왕 14년) 1월 12년동안 상대등직에 있던 김정(金正)이 죽자, 시중 위진(魏珍)을 상대등으로 삼고, 이찬 벼슬에 있던 인흥을 시중으로 임명했다. 허나 이듬해 985년 경문왕이 죽고, 헌강왕이 즉위하자 이찬 위홍(魏弘)이 상대등이 되고, 대아찬(大阿飡) 예겸(乂兼)/박예겸(朴乂兼)이 시중에 임명되자 인흥은 관직에서 물러났다.

 

 

위진(魏珍)/김위진(金魏珍) 신라

신라 경문왕조 대신으로, 862년(경문왕 2년) 아찬 벼슬에서 시중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2년간 시중직을 수행하였으며 874년(경문왕 14년) 1월 같이 조정을 이끌던 상대등 김정(金正)이 죽자 위진이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한편 이찬 인흥(藺興)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875년 헌강왕이 즉위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금모(今毛) 경주

신라 경명왕조 지방 촌주로 벼슬은 17관등중 13관등인 사지(舍知)였다. 사지는 당시 지방 촌주에게 내리던 벼슬이기도 하다. 927년 황룡사탑(皇龍寺塔)의 그림자가 금모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물렀다. 이는 당시에 변괴로 여겨졌으며 망국의 전초로 여기기도 하였다.

 

 
김염(金廉) 고려

고려 혜종원년(944년) 예빈경(禮賓卿)으로 광평시랑(廣評侍郞) 한현규(韓玄珪)와 함께 후진(後晋)에 사신으로 가 고려 왕위의 계승을 알리고, 후진이 거란(契丹)을 격파한것을 하례하였다.

 

 

한현규(韓玄珪) 고려

고려 혜종원년(944년) 광평시랑(廣評侍郞)으로 예빈경(禮賓卿) 김염(金廉)과 함께 후진(後晋)에 사신으로 가 고려 왕위의 계승을 알리고, 후진이 거란(契丹)을 격파한것을 하례하였다.

 


김예(金銳) 이찬

신라 왕족으로 855년(문성왕 17년) 4월에 건립된 경주 창림사((昌林寺) 무구정탑(無垢淨塔) 원기(願記)에 의하면 김예는 웅주(熊州/공주) 기량현(祁梁縣)의 현령으로서 관직은 17관등중 13위인 사지(舍知)였다. 무구정탑은 문성왕의 명을 받은 추성군(秋城郡) 태수(太守) 김립지(金立之)가 글을 지었으며, 탑을 제작한이는 문성왕의 종제(從弟) 김예다. 한편 김예는 868년(경문왕 8년) 1월 벼슬이 이찬(伊飡/17관등중 2위)에 이르렀으나 균정계였던 김예등은 헌정계 왕인 경문왕에 불만을 품고 이찬 김현(金鉉)과 같이 모반을 획책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

 

 

계현(啓玄) 승려

신라 문성왕조 승려로 855년 문성왕 16년 4월 문성왕의 공덕을 비는 경주 창림사(昌林寺) 무구정탑(無垢淨塔)을 건립했을때 감독직인 도감(都監)을 맡았다. 승통은 대덕(大德)에 이르렀고 판정법사(判政法事)로 불리웠다.

 

 

청현(淸玄) 승려

신라 문성왕조 봉덕사(奉德寺) 상좌(上座) 승려로 855년 문성왕 16년 4월 문성왕의 공덕을 비는 경주 창림사(昌林寺) 무구정탑(無垢淨塔)을 건립했을때 불사(佛寺)의 조영을 주관하는 관호(官號)인 검교(檢校)을 맡았다.

 

 

교장(敎章) 승려

신라 문성왕조 강주(康州) 함안군(咸安郡)의 군통(郡統)을 맡은 승려였다. 군통은 승관(僧官)으로 전국에 주통9명, 군통18명이 있었으며 주통1명을 2명의 군통이 보좌했다. 855년 문성왕 16년 4월 문성왕의 공덕을 비는 경주 창림사(昌林寺) 무구정탑(無垢淨塔)을 건립했을때 혜지(專知)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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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종(金繼宗) 신라

신라 문성왕의 종숙(從叔)으로 문성왕조 무주(武州) 장사(長史)직에 있던 855년(문성왕 16년) 4월 국왕 지위에 대한 합리화와 죽은 사람들에 대한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경주 창림사(昌林寺)에 무구정탑(無垢淨塔)을 건립했을때 감수조사(監修造使)를 맡았다. 당시 감수조사에는 김계종과 형제로 추측되는 강주(康州) 사수현령(泗水縣令)을 제수받은 김훈영(金勳榮)도 참여했다.

 

 

김훈영(金勳榮) 신라

신라 문성왕의 종숙(從叔)으로 문성왕조 강주(康州) 사수현령(泗水縣令)직에 있던 855년(문성왕 16년) 4월 국왕 지위에 대한 합리화와 죽은 사람들에 대한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경주 창림사(昌林寺)에 무구정탑(無垢淨塔)을 건립했을때 감수조사(監修造使)를 맡았다. 당시 감수조사에는 김훈영과 형제로 추측되는 무주(武州) 장사(長史) 김계종(金繼宗)도 참여했다.

 

 

 

김원필(金元弼) 신라

신라 문성왕조 관리로, 집사부(執事部) 시랑(侍郞)을 거쳐 아간(阿干/17관등중 6위) 벼슬까지 오른 인물로, 당시 6두품의 최고 품계였던 아간까지 오른 것으로 보아 육두품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855년(문성왕 16년) 4월 국왕 지위에 대한 합리화와 죽은 사람들에 대한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경주 창림사(昌林寺)에 무구정탑(無垢淨塔)을 건립했을때 검교사(檢校使)를 맡았다. 당시 검교부사(檢校副使)에는 명주(溟州) 별가(別駕)인 김의령(金嶷寧)이 임명되었다.

 

 

김의령(金嶷寧) 명주

신라 문성왕조 명주(溟州) 별가(別駕)를 지냈으며, 855년(문성왕 16년) 4월 국왕 지위에 대한 합리화와 죽은 사람들에 대한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경주 창림사(昌林寺)에 무구정탑(無垢淨塔)을 건립했을때 검교사(檢校使) 김원필(金元弼)을 보좌하는 검교부사(檢校副使)를 맡았다.

 

 

김량박(金梁博) 서림(서천)

신라 문성왕조 세택(洗宅/국왕의 근시기관) 대나마(大奈末/17관등중 10위) 벼슬에 있었으며, 855년(문성왕 16년) 4월 서림군(西林郡/충남 서천) 태수(太守)로 있었는데, 국왕 지위에 대한 합리화와 죽은 사람들에 대한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경주 창림사(昌林寺)에 무구정탑(無垢淨塔)을 건립했을때 혜지(專知) 수조관(修造官)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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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언(金奇言) 신라

신라 문성왕조 창부사(倉府史) 벼슬을 지냈으며, 855년(문성왕 16년) 4월 국왕 지위에 대한 합리화와 죽은 사람들에 대한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경주 창림사(昌林寺)에 무구정탑(無垢淨塔)을 건립했을때 같은 전임 창부사였던 김박기(金朴基)와 함께 구당(勾當) 수조관(修造官)을 맡았다.

 

 

 

김박기(金朴基) 신라

신라 문성왕조 창부사(倉府史) 벼슬을 지냈으며, 855년(문성왕 16년) 4월 국왕 지위에 대한 합리화와 죽은 사람들에 대한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경주 창림사(昌林寺)에 무구정탑(無垢淨塔)을 건립했을때 같은 전임 창부사였던 김기언(金奇言)과 함께 구당(勾當) 수조관(修造官)을 맡았다.

 

 

김인훈(金忍訓) 양산

후삼국 양주(良州/경남 양산) 지역의 호족으로 903년 백제가 침공하자, 급히 후고구려에 원군을 청했다. 고구려왕 궁예는 왕건에게 군을 주어 이를 구원하게 하였다. 후에 대대로 양산호족이던 후손들이 김인훈을 기리기 위해 성황사(城隍祠)를 건립하고 주위에 성황산성을 쌓았다. 이후 김인훈은 양산지역의 성황신으로 모셔져 오늘날까지도 매년 제향이 이루워지고 있다.

 

 

김정(金正) 이찬(伊飡)

경문왕조 대신으로 862년(경문왕 2년) 1월 조정개각에서 이찬(伊飡/17관등중 2위)에서 승차하여 최고 관직인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되었다. 당시에 아찬(阿飡/17관등중 6위) 위진(魏珍)도 시중(侍中)에 임명되었는데 김정과 위진의 관직이 경문왕 14년까지 이어진것으로 미루워 보아 경문왕이 즉위전 최측근이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김정은 874년 1월 졸하였다. 후임 상대등은 시중 위진이 이어 받았다.

 

 


김칠(金七) 수주(수원)

수성(水城/현 경기 수원,화성) 호족으로 고려초 태조 왕건이 남정할때 인근호족 최승규(崔承珪), 최서천(崔徐遷)등 200여명과 함께 태조에게 귀부하였다. 태조17년(934년) 수성은 수주(水州)로 승격되었다.

 


김현(金鉉) 신라
신라 경문왕조에 벼슬이 이찬(伊飡/17관등중 2위)에 까지 이르렀으나 균정계였던 김현은 형제로 추측되는 이찬 김예(金銳)와 함께 헌정계인 경문왕에 불만을 품고 868년 1월 모반을 획책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

 


대구화상(大矩和尙) 승려

신라말의 승려로 향가의 대가로 이름을 떨쳤다. 경문왕조 화랑의 우두머리인 국선(國仙) 요원랑(遙元郞), 예흔랑(譽昕郞), 계원(桂元), 숙종랑(叔宗郞)이 금란굴(강원 통천)을 유람하면서 경문왕을 찬양하며 가사 세수를 지었는데 이를 사지(舍知/17관등중 13위) 심필(心弼)을 시켜 대구화상에게 향가로 만들어 주길 청하였다. 대구화상은 가사를 윤색하고 악보를 더해 경문왕에게 올렸고, 왕이 크게 기뻐하고 포상을 내렸다. 이 향가가 현금포곡(玄琴抱曲), 대도곡(大道曲), 문군곡(問群曲)이다. 진성여왕 2년 888년에는 여왕의 명으로 각간(角干/신라 최고 관직)  김위홍(金魏弘)과 함께 민간에 떠돌던 향가를 수집하여 삼대목(三代目)을 편찬했다.

 


덕교(德交) 목포

목포(나주) 지역 호족인 사간(沙干/17관등중 8위) 연위(連位)의 딸이며 목포호족 오방(吳昉)의 아들 오희(吳禧)와 혼인하였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세아들은 오상(吳相), 오환(吳桓), 오검(吳檢)이고 1녀는 곧 고려 태조의 제2 왕후 장화왕후다. 905년 마진국 해군장 왕건의 나주공략전 당시 나주 오씨가문은 왕건에게 협력하여 이후 백제의 견훤에게 등을 돌려 친왕건파가 된다. 왕건과 혼인한 장화왕후는 태자 왕무(王武)를 낳았으며 왕무가 곧 2대왕 혜종이다. 왕무가 정윤에 책봉되자 남편 오희는 공으로 다련군(多憐君)에 봉작되었으며, 혜종 즉위후 세아들 장남 오상(吳相)은 평장사 및 시중, 차남 오환(吳桓)는 문량공, 삼남 오검(吳檢)은 형부시랑을 역임했다.

 


몽웅역리(夢熊驛吏) 한씨(韓氏)

후삼국 시대 홍주(洪州) 정해현(貞海縣/충남 서산 해미면)의 지역 호족으로 몽웅역리(夢熊驛吏)를 지냈다.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고려 태조조에 한씨가 큰공을 세워 대광(大匡)의 호(號)를 내리고 고구현(高丘縣)의 땅을 베어 현(縣)을 두어 그 관향(貫鄕)으로 삼았다고 한다. 고려초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오른 한난(韓蘭)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예겸(乂謙/銳謙)/박예겸(朴銳謙/朴乂謙)/김예겸(金乂謙) 신라왕족

신라말의 대신으로 875년 헌강왕 1년 대아찬(大阿飡)으로 시중에 임명되어 880년 2월까지 시중직을 역임했다. 880년 2월 태백성(太白星)이 달을 침범하여 민심이 이반되자, 시중직에서 사퇴하였다. 후임 시중에는 이찬(伊飡) 민공(敏恭)이 임명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예겸이 아들 박경휘(朴景暉)가 왕위에 올라 신덕왕이 되자 912년 5월(신덕왕 1년) 선성대왕(宣聖大王)으로 추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허나 삼국유사에는 신덕왕의 생부는 이간(伊干/17관등중 2위) 박문원(朴文元)이고, 각간(角干/최고관직) 예겸은 의부(義父)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워 예겸은 김씨 성을 가진 진골귀족으로, 각간직에 있으면서 박씨 성을 가진 신덕왕을 옹립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예겸을 의부로 삼았을 가능성도 있겠다.

 

 

 

문원(文元)/박문원(朴文元) 신라왕족

신라 말의 대신으로 각간(角干/최고관직)을 지낸 박원린(朴元厸)의 아들이다. 박문원은 효공왕조 이간(伊干/17관등중 2위) 벼슬을 지냈다. 박문원은 아달라 이사금의 후손으로 신라말 왕위 계승권을 독점해왔던 김씨 진골 귀족들의 내분이 생기자 박문원의 아들 박경휘(朴景暉)가 신덕왕에 오르게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신덕왕 박경휘(朴景暉)의 부친을 예겸(乂謙)이라고 기록했으나, 삼국유사에는 예겸은 의부이고 박문원이 친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 신덕왕이 옹립 과정에 각간(角干/최고관직) 예겸의 공을 세운듯 싶다. 예겸은 박씨라고 알려져 있기도 하나, 진골 김씨일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박씨왕의 왕위 계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예겸의 양자 형식을 취해 신덕왕이 왕위에 오른듯 싶다. 박문원은 신덕왕이 옹립된후 흥렴대왕(興廉大王)으로 추봉되었다.

 

 


문자황후(文資皇后)/문의왕후(文懿王后)/영화부인(寧花夫人) 김씨 신라왕족

헌안왕의 맏딸로 860년(헌안왕 4년) 9월 임해전(臨海殿)에서 군신을 모아 향연(饗宴)을 베풀었는데, 20세의(삼국사기에는 15세, 삼국유사에는 20세로 기록) 김응렴(金膺廉)도 왕족자격으로 참석하였다. 헌안왕이 김응렴에게 여러가지를 물어보았는데, 김응렴이 재기있게 대답함으로써 헌안왕이 김응렴을 사위로 삼고자 하였다. 헌안왕에겐 딸이 둘있었는데, 김응렴에게 누구를 취하겠느냐고 묻자 김응렴은 쉽게 결정치 못하고 부모에게 자문했다. 부모는 자색이 뛰어난 둘째 공주를 취하라 하였고, 재차 흥륜사(興輪寺)의 승려화랑인 범교사(範敎師)에게 물으니 첫째 공주를 취하라 하였다. 결국 첫째 공주, 즉 영화부인이 선택되어 김응렴과 혼인을 하였다. 당시 영화부인은 20세였다. 5달후 861년(헌안왕 5년) 1월 헌안왕의 유명에 의해 김응렴이 신라 47대 왕에 오르니 곧 경문왕이다. 863년에는 영화부인의 동생 또한 경문왕과 혼인하였다. 866년 1월 왕자(王子) 김정(金晸)을 태자(太子)로 삼을때 같이 추봉되어 문의왕후에 봉해졌다. 삼국유사에는 문자황후(文資皇后)라 기록되어 있으며, 아들 김정은 곧 49대왕 헌강왕이다.

 

 

 

범교사(範敎師)/범교(範敎) 승려
신라말 흥륜사(興輪寺)의 승려화랑의 상수(上首/우두머리)직을 맡았다. 860년 헌안왕이 왕족 김응렴(金膺廉)을 사위로 삼고자 하니, 김응렴이 범교사에게 헌안왕의 두딸중 누구를 취하는게 옳느냐고 물었고, 범교사는 "형을 취하면 세 가지 이익이 있고 아우를 취하면 세 가지 손해가 있으리라"며 첫째 공주를 취하라 간하였다. 이에 김응렴은 첫째 공주, 즉 영화부인(寧花夫人) 김씨를 취하였다. 몇달후 861년 1월 헌안왕의 유명에 의해 김응렴이 신라 47대 경문왕에 즉위하였다. 863년 경문왕은 영화부인의 동생을 차비로 삼으면서 범교사에게 묻기를 "전일에 이른바 세 가지 이익이란 것은 무엇인가?"하자 범교는 "전왕과 왕비가 그 뜻대로 된 것을 기뻐하여 총애가 더욱 깊어진 것이 하나요, 이로 인하여 왕위를 계승한 것이 둘째요, 마침내 전왕의 둘째 딸을 취하게 된 것이 셋째 이익입니다."하자 경문왕이 크게 웃고 범교를 대덕(大德/승통/승려관직)으로 삼고 황금 130냥을 하사하였다.

 


부호부인(鳧好夫人) 신라
신라 51대왕인 진성여왕의 유모(乳母)로 진성여왕이 즉위하자 정치에 깊이 관여하였다. 진성여왕조 국정이 문란해지자 어느 사람이 국정을 비방하는 글을 다라니(陀羅尼)의 은어(隱語)로 작성하여 길에 뿌리고 다녔는데 내용은 각간(角干) 김위홍(金魏弘) 및 부호부인등 총신 4,5명이 국사를 독판쳐 정치가 극도로 문란해지고 결국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은어였다. 진성여왕과 측근들은 이글을 읽고 이글을 쓴자는 대야주(大耶州)에 은거하던 왕거인(王巨人)이라 판단하고 왕거인을 하옥하였다. 왕거인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하늘에 호소하자 벼락이 옥사에 내리쳤다. 이에 진성여왕은 두려움을 느끼고 왕거인을 방면하였다.

 

 

거타지(居陀知) 대야주(합천)

신라말 진성여왕때 무사로 활을 잘쏘았다. 진성여왕의 막내아들 아찬(阿飡) 양패(良貝)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후백제의 군사들이 진도(津島)에서 배길을 막고 오가는 배를 검문한다고 하자 양패는 활쏘는 무사 50명을 뽑아 배를 타고 당나라로 향했다. 이때 거타지도 뽑혀 동행했다. 배가 곡도(鵠島/백령도)에 이르렀을때 풍랑이 크게 일어나 곡도에서 10여일을 묵게 되었다. 양패는 이를 근심하여 사람을 시켜 점을 쳤는데 "섬에 신지(神池)가 있으니 거기에 제사를 지내면 좋겠습니다"했다. 제사를 지낸후 그날 밤에 양패의 꿈에 노인이 나타나 활 잘쏘는 사람 하나만 이 섬안에 남겨두면 순풍(順風)을 얻을것이다고 말하자 양패가 잠을 깼다. 양패는 섬에 남을 사람을 정하기 위해 50명의 이름을 적은 나무를 물에 띄웠는데 거타지(居陀知)의 이름이 물에 잠겨 결국 거타지가 곡도에 남게 되었다. 이후 양패 일행은 배를 띄워 당나라로 향하였고 섬에 남은 거타지는 서해의 용왕의 부탁을 받고 용왕을 괴롭히는 못된 중을 활로 쏘아 죽이고 용왕의 딸과 혼인하게 되었다. 이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양패(良貝) 신라왕족

신라 51대 왕 진성여왕의 막내아들로 벼슬은 아찬(阿飡)에 이르렀다. 왕명에 의해 양패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후백제의 군사들이 진도(津島)에서 배길을 막고 오가는 배를 검문한다고 하자 양패는 활쏘는 무사 50명을 뽑아 배를 타고 당나라로 향했다. 배가 곡도(鵠島/백령도)에 이르렀을때 풍랑이 크게 일어나 곡도에서 10여일을 묵게 되었다. 양패는 이를 근심하여 사람을 시켜 점을 쳤는데 "섬에 신지(神池)가 있으니 거기에 제사를 지내면 좋겠습니다"했다. 제사를 지낸후 그날 밤에 양패의 꿈에 노인이 나타나 활 잘쏘는 사람 하나만 이 섬안에 남겨두면 순풍(順風)을 얻을것이다고 말하자 양패가 잠을 깼다. 양패는 섬에 남을 사람을 정하기 위해 50명의 이름을 적은 나무를 물에 띄웠는데 거타지(居陀知)의 이름이 물에 잠겨 결국 거타지가 곡도에 남게 되었다. 이후 양패 일행은 배를 띄워 당나라로 향하였고 섬에 남은 거타지는 서해의 용왕의 부탁을 받고 용왕을 괴롭히는 못된 중을 활로 쏘아 죽이고 용왕의 딸과 혼인하게 되었다. 이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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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목(徐穆) 이천

이천(利川/경기 이천) 호족 서신통(徐神通)의 아들이다. 또한 이천서씨의 시조인 서신일(徐神逸)의 조카이기도 하며, 사촌이 서필(徐弼/서희 아버지)이다. 고려초 당시 이천는 한주(漢州) 소속 황무군(黃武郡)이라 불리웠는데, 왕건이 군을 이끌고 남정할 당시 이지방 복하천에 당도했는데 홍수로 강의 물이 불어나 진퇴양난에 빠졌다. 효양산 밑에 살던 서목이 이 광경을 보고 수심이 얕은 물길을 인도해 줌으로써, 무사히 왕건군이 도강할수 있었다. 왕건은 이섭대천(利涉大川/큰강을 건너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주역의 구절을 인용하며 이지역을 이천(利川)이라 이름지었다.

 


서봉(徐逢) 고려

고려 4대왕 광종조에 광평시랑(廣評侍郞)을 역임했다. 당시 중국은 당이 멸망하고 후량(後粱 907~923), 후당(後唐 923~936), 후진(後晋 936~946), 후한(後漢 947~950)이 차례로 들어서는 대혼란기였다. 951년 곽위(郭威)가 후한을 멸하고 후주(後周 951~960)를 건국했는데 이해가 광종2년이였다. 광종은 951년 12월에 비로소 후주의 연호를 쓰기 시작했으며, 다음해인 952년(광종3년)에 최초로 광평시랑 서봉을 사신으로 후주에 파견했다. 이때부터 양국은 교류를 시작했으며, 호족이나 군벌에 의해 왕권이 취약했던 광종은 대거 후주의 인사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후주와 교류했다. 이후 후주가 송태조 조광윤(趙匡胤)에게 멸망당한 960년 부터는 광종은 후주의 연호를 버리고 개경을 황도(皇都), 서경을 서도(西都)라 하는등 황제국이라 자칭하면서 이해부터 호족,왕족,군벌 숙청 작업에 돌입했다. 962년 겨울 광종은 다시 송에 광평시랑(廣評侍郞) 이흥우(李興祐)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교류를 시작했으며, 다음해 963년 12월에 최초로 송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서신통(徐神通) 이천

신라 효공왕때 아간(阿干) 벼슬을 지낸 서신일(徐神逸)의 동생으로,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지자 형과 함께 경기 이천으로 은거하였다. 효양산(孝養山)에 정착한 서신통은 아들 서목(徐穆)을 두었다. 형 서신일은 희성당(希聖堂)을 건립해 후학들을 교육하였는데, 나이 70이 넘도록 아들을 갖지 못하자 서신통은 자기 아들 서목을 입양할것을 권유하였으나 서신일은 인의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어코 서신일은 나이 80에 아들 서필을 낳았다. 또한 서신통의 아들 서목은 태조 왕건의 남정때 공을 세운다.

 

 


선당(先幢)/광당(光幢) 휴암(봉산)

황해도 휴암(봉산/鳳山) 호족으로 대대로 조상이 봉산일대 군족(郡族)이였다. 부인 박씨(朴氏)와의 사이에 아들을 두었는데, 아들이 7세에 불문에 귀의하여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사자산파의 제2조로 이름을 떨쳤는데 법명은 절중(折中)이고 시호는 징효(澄曉)이다.

 

 

 

 

 

 

송능(宋能)

고려 태조 왕건을 섬겨 종군하여 공적을 세웠다. 출생년도는 910년대 초반인것으로 추측된다. 현종4년(1013년) 9월 당시 송능은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벼슬에 있었는데, 나이가 이미 백세에 이르렀다. 현종은 송능에게 대광(大匡)을 증직하였다.

 


연위(連位)

신라말 17관등중 8등급인 사간(沙干)을 역임했으며 목포호족으로 병부시랑을 역임한 오방(吳昉)의 아들 오희(吳禧)에게 딸 덕교(德交)를 시집보냈다. 오희와 덕교의 사이에 3남1녀를 두었으며 1녀는 곧 고려 태조의 제2비 장화왕후다.

 


예방(藝方) 고려

고려의 술사(術師)로 태조 13년(925년) 왕건이 남정을 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 주둔지를 물색하였는데 이때 예방(藝方)이 전국을 둘러보고 돌아와 태조에게 지금의 천안 땅을 가리키며 "이곳이 삼국의 중심이며 오룡(五龍)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세이니 만약 대관(大官)을 두면 백제가 스스로 항복할 것입니다." 아뢰었다. 이말을 들은 태조가 친히 천안에 이르러 높은 산에 올라 두루 살펴보고 만족스러워하며 부(府)를 두기로 결정하여 이곳을 천안부로 삼고 초대 도독(都督)으로 제궁(帝弓)을, 부도독으로 엄식(嚴式)을 임명하였다. 고려군은 천안 1군 7현 지역을 수비할수 있는 왕자산성(王字山城)을 쌓고, 달북재(縣鼓山)에는 고정(鼓庭, 군사 훈련소)을 설치하여 군사 10만명을 주둔시킬수 있는 기지를 구축하였다.

 

 


오방(吳昉)/오부순(吳富純) 목포

목포(나주)호족으로 신라 지증왕 원년(500년)에 중국에서 신라로 건너온 오첨(吳瞻)의 10세손이다. 신라말 병부시랑을 역임했으며 아들 오희(吳禧)는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역임하고 목포(나주)일대에서 호족으로 이름을 떨쳤다.

일찍히 나주 오씨가문은 당나라와의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으며 이로 인해 오방은 부호란 뜻의 오부순(吳富純)이라 불리우게 된것이다. 아들 오희는 905년 태봉의 수군장 왕건이 나주를 공략할때 협력하여 딸을 왕건에게 시집보내니 훗날 장화왕후다. 오희는 다련군(多憐君)에 봉작되었다.

 

 

 

오상(吳相) 목포

목포(나주)호족 오희(吳禧)의 장남으로 905년 태봉 수군장 왕건의 나주 공략에 협력하였다. 여동생 장화왕후(莊和王后)가 고려 건국후 제2비가 되고 2대왕 왕무(혜종)가 원윤에 책봉되자 평장사(平章事) 및 시중(侍中)을 역임했고 금성백(錦城伯)에 봉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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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吳桓) 목포

목포(나주)호족 오희(吳禧)의 차남으로 905년 태봉 수군장 왕건의 나주 공략에 협력하였다. 여동생 장화왕후(莊和王后)가 고려 건국후 제2비가 되고 2대왕 왕무(혜종)가 원윤에 책봉되자 문량공(文良公) 수양백(首陽伯)에 봉작되었다.

 

 

 

오검(吳檢) 목포

목포(나주)호족 오희(吳禧)의 장남으로 905년 태봉 수군장 왕건의 나주 공략에 협력하였다. 여동생 장화왕후(莊和王后)가 고려 건국후 제2비가 되고 2대왕 왕무(혜종)가 원윤에 책봉되자 형부시랑(刑部侍郞)을 역임했고 천령백(天嶺伯)에 봉작되었다.

 

 


유손(庾孫)

고려 태조 왕건을 섬겨 종군하여 공적을 세웠다. 출생년도는 910년대 초반인것으로 추측된다. 현종4년(1013년) 9월 당시 유손은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벼슬에 있었는데, 나이가 이미 백세에 이르렀다. 현종은 유손에게 대광(大匡)을 증직하였다.

 

 


유울행(庾鬱行) 김해

김해호족 출신으로 고려초 김해부(金海府) 아간(阿干) 벼슬을 지냈다. 딸을 수주(水州/현 경기 수원) 호족 대위(大尉) 최융예(崔融乂)에게 시집보내었다. 딸 유씨(庾氏)는 훗날 아들 최사위(崔士威)의 공에 힘입어 국대부인(國大夫人)에 봉해졌다.

 


장유(張儒) 흥덕(고창)

흥성장씨(興城張氏)의 시조로 호는 청계(淸溪)이다. 고향은 흥덕(興德/현 전북 고창)으로 930년경에 중국 오월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장유가 귀국후 관직에 등용된 때는 후삼국이 통일되고 사회가 안정된 광종조였다. 광종은 호족억압책을 펴기 위해 중국인 관리들과 유학파들을 대거 등용할때 중국어에 능통한 장유도 관직에 나갈수 있었다. 고려사 절요에 따르면 광종이 장유를 여러번 객성(客省)의 관원에 임명하여 매양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장유를 시켜 접대하게 하였다. 객성(客省)의 주된 업무는 외국사신을 접대하고, 외교정책(外交政策)을 입안(立案)하던 곳이다. 객성(客省)의 관리로는 판사(判事,정3품) 2 명, 영(令,종3품) 약간 명, 부령(副令,종4품) 2 명, 승(丞), 주부(主簿) 녹사(錄事) 등이 있다. 그후 장유는 광평성(廣評省) 시랑(侍郞) 벼슬을 임명받았다. 장유의 아들 장연우(張延祐)도 행정사무에 능하여 중요한 관직을 역임하고 재간과 능력이 있다고 일컬어졌으며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했다.

 

 

 

장연우(張延祐) 흥덕(고창)

흥성장씨(興城張氏)의 시조 장유(張儒)의 아들로 광종조 950년경에 태어났다. 1011년 현종2년 거란(契丹)의 침입 때 남쪽으로 피란한 현종을 호종(扈從)하여 중추원사(中樞院使)가 되고 이어 관어사대사(判御史臺事)에 올랐다. 1014년 11월 일직원(日直員) 황보유의(皇車兪義)와 함께 왕에게 건의하여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아 관리의 부족한 녹봉으로 충당케 했다가 상장군 김훈(金訓), 최질(崔質)이 무신반란을 획책하여 황보유의와 장연우를 거의 죽을 정도로 매질하고 곧 귀양을 보냈다. 1015년 3월 서경에서 반란을 획책한 무신들을 척살하고 사면되어 호부상서(戶部尙書)에 복직되었으나 그해 11월 죽었다.

 

 

김전(金佺) 신라왕족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 김부(金傅)와 첫째부인 송희부인(松希夫人) 석씨(昔氏) 사이의 장남이다. 신라 왕족 3개성씨(김,박,석)를 다룬 삼성연원보(三姓淵源譜)에 따르면 경순왕과 송희부인 사이에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김전(金佺), 김요(金瑤), 김곤(金琨), 김영(金英), 김분(金奮)이며 김요는 완산군(完山君)에 김영은 광주군(廣州君)에 김분은 삼대군(三大君)에 봉해졌다. 부 김부가 후백제왕 견훤에 의해 옹립되어 왕위에 오른후 죽주(경기 안성)출신의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朴氏)가 왕후가 되어 소원왕후(昭元王后)에 봉해진것으로 미루워, 전왕의 일족인 박씨부인을 왕후로 삼고, 송희부인은 후비에 봉해진것으로 짐작된다. 김전은 경순왕이 935년 고려에 나라를 들어바치자 셋째 동생 김곤(金琨)과 더불어 자결하였다. 송희부인과 죽방부인의 소생들에 대한 위차는 현재도 의견이 분분한 상태이다.

 

 

김요(金瑤) 신라왕족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 김부(金傅)와 첫째부인 송희부인(松希夫人) 석씨(昔氏) 사이의 차남이다. 신라 왕족 3개성씨(김,박,석)를 다룬 삼성연원보(三姓淵源譜)에 따르면 경순왕과 송희부인 사이에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김전(金佺), 김요(金瑤), 김곤(金琨), 김영(金英), 김분(金奮)이며 김요는 완산군(完山君)에 김영은 광주군(廣州君)에 김분은 삼대군(三大君)에 봉해졌다. 부 김부가 후백제왕 견훤에 의해 옹립되어 왕위에 오른후 죽주(경기 안성)출신의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朴氏)가 왕후가 되어 소원왕후(昭元王后)에 봉해진것으로 미루워, 전왕의 일족인 박씨부인을 왕후로 삼고, 송희부인은 후비에 봉해진것으로 짐작된다. 김요가 당시 후백제 영토인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다는 것은 경순왕 당시가 아니고, 삼한 통일후에 봉작되었거나, 후대에 후손들이 완산(전북 전주)에 정착하여 관향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 하겠다. 송희부인과 죽방부인의 소생들에 대한 위차는 현재도 의견이 분분한 상태이다.

 

 

김곤(金琨) 신라왕족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 김부(金傅)와 첫째부인 송희부인(松希夫人) 석씨(昔氏) 사이의 삼남이다. 신라 왕족 3개성씨(김,박,석)를 다룬 삼성연원보(三姓淵源譜)에 따르면 경순왕과 송희부인 사이에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김전(金佺), 김요(金瑤), 김곤(金琨), 김영(金英), 김분(金奮)이며 김요는 완산군(完山君)에 김영은 광주군(廣州君)에 김분은 삼대군(三大君)에 봉해졌다. 부 김부가 후백제왕 견훤에 의해 옹립되어 왕위에 오른후 죽주(경기 안성)출신의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朴氏)가 왕후가 되어 소원왕후(昭元王后)에 봉해진것으로 미루워, 전왕의 일족인 박씨부인을 왕후로 삼고, 송희부인은 후비에 봉해진것으로 짐작된다. 김곤은 경순왕이 935년 고려에 나라를 들어바치자 큰형 김전(金佺)과 더불어 자결하였다. 송희부인과 죽방부인의 소생들에 대한 위차는 현재도 의견이 분분한 상태이다.

 

 

김영(金英) 신라왕족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 김부(金傅)와 첫째부인 송희부인(松希夫人) 석씨(昔氏) 사이의 사남이다. 신라 왕족 3개성씨(김,박,석)를 다룬 삼성연원보(三姓淵源譜)에 따르면 경순왕과 송희부인 사이에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김전(金佺), 김요(金瑤), 김곤(金琨), 김영(金英), 김분(金奮)이며 김요는 완산군(完山君)에 김영은 광주군(廣州君)에 김분은 삼대군(三大君)에 봉해졌다. 부 김부가 후백제왕 견훤에 의해 옹립되어 왕위에 오른후 죽주(경기 안성)출신의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朴氏)가 왕후가 되어 소원왕후(昭元王后)에 봉해진것으로 미루워, 전왕의 일족인 박씨부인을 왕후로 삼고, 송희부인은 후비에 봉해진것으로 짐작된다. 김요가 당시 고려 영토인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다는 것은 경순왕 당시가 아니고, 삼한 통일후에 봉작되었거나, 후대에 후손들이 광주(경기 광주)에 정착하여 관향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 하겠다. 송희부인과 죽방부인의 소생들에 대한 위차는 현재도 의견이 분분한 상태이다.

 

 

김분(金奮)/김행(金幸)/금준(今俊) 신라왕족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 김부(金傅)와 첫째부인 송희부인(松希夫人) 석씨(昔氏) 사이의 오남이다. 신라 왕족 3개성씨(김,박,석)를 다룬 삼성연원보(三姓淵源譜)에 따르면 경순왕과 송희부인 사이에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김전(金佺), 김요(金瑤), 김곤(金琨), 김영(金英), 김분(金奮)이며 김요는 완산군(完山君)에 김영은 광주군(廣州君)에 김분은 삼대군(三大君)에 봉해졌다. 부 김부가 후백제왕 견훤에 의해 옹립되어 왕위에 오른후 죽주(경기 안성)출신의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朴氏)가 왕후가 되어 소원왕후(昭元王后)에 봉해진것으로 미루워, 전왕의 일족인 박씨부인을 왕후로 삼고, 송희부인은 후비에 봉해진것으로 짐작된다. 김분(金奮)은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나라를 들어바칠 결심을 하자, 태자 김일(金鎰)과 더불어 극력 반대하였으나 경순왕의 뜻이 확고하자 어전에서 크게 목놓아 울고 김일과 더불어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일설에는 마의태자 김일과 더불어 항려, 신라부흥운동을 꾀했다고도 한다. 한편 일설에는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조상인 김행(金幸)/금준(今俊)이란 설도 있다. 고려사에 김행/금준은 평주의 승려로 기록되어 있고, 일부 학계에서는 김분이 형 김요(金瑤), 김영(金英)과 함께 여진으로 망명하자고 청했으나 두형이 거절하자 혼자 여진으로 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여러설을 모아보면 금강산에서 신라부흥운동을 꾀했던 김분은 뜻이 여의치 않자 여진으로 망명을 꾀해, 승려로 변장해 평주에 잠시 머물다 여진땅 아지고촌(阿之古村)에 들어가 여진족 여인과 혼인해 극수(克守) → 고을(古乙) → 활라(活羅) → 핵리발(劾里鉢) → 아골타(阿骨打/금태조)로 혈통이 이어졌다고 할수 있겠다. 금사(金史)에는 김행(金幸)/금준(今俊)을 함보(函普)라 기록하였다. 송희부인과 죽방부인의 소생들에 대한 위차는 현재도 의견이 분분한 상태이다.

 

 

 

소원왕후(昭元王后)/죽방왕후(竹房王后) 박씨(朴氏) 신라왕족(죽주/안성)

죽주(竹州/안성)인 예부시랑(禮部侍郎) 박광우(朴光佑)의 딸로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비가 되었다. 박광우는 경명왕의 4남으로 죽산을 식읍으로 받아 죽성대군(竹城大君)으로 불리운 박언립(朴彦立)과 일족으로 추측된다. 전왕이였던 경애왕이 박씨 인것으로 미루워 김씨 진골귀족이던 김부(金傅)와 정략 혼인을 한것으로 추측된다. 927년 경애왕이 백제왕 견훤에 의해 자살하고 남편 김부가 옹립되니 곧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이다. 이후 죽방왕후(竹房王后)라 불리웠으며, 후에 소원왕후(昭元王后)로 추봉되었다. 경순왕과의 사이에 3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 김일(金鎰), 김황(金湟/김굉金鍠), 김명종(金鳴鍾)과 덕주공주(德周公主)다. 김일은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모후 소원왕후, 태자비(김영란/金英蘭/시중 김유렴(金裕廉)의 딸), 두아들 김선웅(金善雄), 김순웅(金順雄)과 함께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김일은 이후 속세와 절연하고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마의를 입고 초식으로 연명하면서 생을 마쳐 마의태자라 불리웠다. 소원왕후는 태자비와 함께 금강산 장안사(長安寺)에 머리를 깍고 여승이 되어 일생을 마쳤다. 기록엔 계자(季子/막내아들)로 되어 있으나 둘째 아들로 추측되는 김황은 학성군(鶴城君/울산)에 봉작되었다가 부왕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심하자 가야산 법수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범공(梵空)이란 승명(僧名)을 받은후 해인사(海印寺)를 드나들면서 산승(山僧)으로 일생을 마감했다. 셋째 아들 김명종은 각간(角干/최고 관직)에 이르렀으며 망국후 경주에 남아 경순왕이 식읍으로 받은 경주를 대신 다스린 것으로 추측되며 경주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덕주공주는 월형산(月螢山/충남 제천) 월악사(月岳寺)에 기거하면서 높이 13m의 거암에 마애불(보물 406호)을 조성하고 신라의 재건을 염원하며 일생을 마쳤다. 이후로 산이름을 월악산(月岳山), 월악사의 절이름을 덕주사(德周寺)로 불리웠다. 경주김씨는 김명종외에도 김은열(金殷說/경순왕과 낙랑공주의 아들)을 시조로 보기도 한다.

 

 

 

김일(金鎰)/마의태자(麻衣太子) 신라왕족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 김부와 소원왕후(昭元王后)/죽방부인(竹房夫人) 사이의 장남으로 태자에 책봉되었다.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을 결심하자 천년사직을 어찌 남에게 넘겨줄수 있겠느냐며 극력하게 간하였으나, 경순왕의 결심을 막지 못하였다. 김일은 어전에서 통곡한후 그길로 모후 소원왕후, 태자비(김영란/金英蘭), 두아들 김선웅(金善雄), 김순웅(金順雄), 혹은 막내아들 김교(金較)까지 데리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소원왕후와 태자비는 함께 금강산 장안사(長安寺)에 머리를 깍고 여승이 되어 일생을 마쳤으며, 김일은 이후 속세와 절연하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마의를 입고 초식으로 연명하면서 생을 마쳐 마의태자라 불리웠다. 일설에는 마의태자는 신라 부흥운동을 추진했다고도 알려져 있다. 부안김씨(扶安金氏)의 시조이기도 하다.

 

 

 

김굉(金鍠)/김황(金湟) 신라왕족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 김부와 소원왕후(昭元王后)/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 사이의 차남으로 기록엔 계자(季子/막내아들)로 되어 있으나 둘째 아들로 추측된다. 동생은 김명종(金鳴鐘)이며, 누이는 덕주공주(德周公主)다.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을 결심하자 가야산 법수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범공(梵空)이란 승명(僧名)을 받은후 해인사(海印寺)를 드나들면서 산승(山僧)으로 일생을 마감했다. 울산,나주김씨 족보에는 학성군(鶴城君)으로 봉작되어 학성(경북 울산)을 식읍으로 받아 세거하다가 두아들 김운발(金雲發), 김우발(金雨發)을 두었으나 신라 패망후 처자를 버리고 승려가 되었으며 속세에 있을적 호가 덕지(德摯)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조에서 두 아들을 예우하여 장자 김운발(金雲發)은 문하시중으로 나주군(羅州君)에 봉하고, 둘째 김우발(金雨發)은 경주군(慶州君)에 봉했다.

일설에는 김덕지(金德摯)는 경순왕의 또다른 후비인 순흥안씨(順興安氏) 소생이라 하며, 신라 패망당시 경순왕, 김일, 김굉의 연배를 고려하면 김운발, 김우발은 김굉의 아들이 아닌 경순왕의 막내아들 김덕지의 아들이란 설도 있다.

 

 

 

김명종(金鳴鐘) 신라왕족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셋째 아들로 소원왕후(昭元王后)/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 소생이다. 신라말 각간(최고 관직)을 역임했으며,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부왕을 따라 송악에 갔으며 경순왕이 고려 수도에 머물자, 김명종은 경주로 내려와 아버지 김부가 식읍으로 하사받은 경주를 대신 다스렸다. 시호은 영분공(永芬公)이고 부인은 박씨이며 묘는 경주 형제산에 있다. 한편 김명종은 경주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경주김씨의 시조는 3남 김명종과 4남 김은열 두 명인데, 이처럼 경주김씨의 시조를 두명으로 한 것은 김명종이 소원왕후 박씨 소생인 데 반해, 김은열은 왕건의 장녀인 낙랑공주 소생이었기 때문이다.

 

 

덕주공주(德周公主) 신라왕족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과 소원왕후(昭元王后)/죽방왕후(竹房王后)와의 사이에 난 공주다. 경순왕이 고려에 나라를 들어 바치자 친모 소원왕후(昭元王后), 첫째 오빠 태자 김일(金鎰), 태자비 김영란(金英蘭)은 금강산으로 들어갔으며, 덕주공주는 월형산(月螢山/충남 제천) 월악사(月岳寺)에 기거하면서 높이 13m의 거암에 마애불(보물 406호)을 조성하고 신라의 재건을 염원하며 일생을 마쳤다. 이후로 산이름을 월악산(月岳山), 월악사의 절이름을 덕주사(德周寺)로 불리웠다.

 

 

 

김은열(김은설/金殷說) 구신라왕족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 김부와 고려 태조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 사이의 장남으로 937년 출생했다. 고려조에 출사하여 보국(輔國) 대안군(大安君)에 봉해졌으며 광종조 시랑(侍郞/정4품)직을 거쳐 평장사(平章事/정2품) 및 시중(侍中/종1품)을 역임했다. 몰년은 968년(광종19년), 1028년(현종19년) 3월4일 두설이 있으나 묘명에 경순왕(敬順王)의 아들이라 적혀 있는것으로 보아, 김부가 경순(敬順)이라는 시호를 받은 때는 978년 4월 경종조 임으로 1028년이 더 유력하다 하겠다. 만약 968년이라면 당시 김부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묘지명엔 태조 왕건에 의해 공작에 봉작된 정승공(正丞公) 김부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었어야 맞다 하겠다. 또한 안산김씨 족보에 의하면 982년(경종 7년) 경순왕 영정을 김부의 아들 김은열과 김심언(金審言)등이 봉은사에 봉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허나 뒷날 후손에 의해 새롭게 묘지명이 쓰여졌거나, 기록이 된 가능성도 있어 968년 몰년 가능성도 있다. 김은열은 이복형제 김명종(金鳴鐘/경순왕과 소원왕후 3남)과 더불어 경주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김석(金錫)/김중석(金重錫) 고려(구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5남으로 母가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다. 김석은 의성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의성에 정착하여 살았음으로 의성김씨(義城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김건(金鍵) 고려(구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6남으로 母가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다. 김건은 강릉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강릉김씨(後江陵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김선(金繕) 고려(구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7남으로 母가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다. 김선은 언양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언양김씨(彦陽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김추(金錘) 고려(구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8남으로 母가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다. 김추는 삼척군(三陟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삼척김씨(三陟金氏)의 선조가 되었다. 삼척김씨의 시조 김위옹(金渭翁)의 아버지다. 분파로 진주(晋州), 영월(寧越), 경산(慶山 ), 남원(南原), 길안(吉安), 옹진(甕津), 진위(振威), 춘양김씨(春陽金氏) 등 8개 분파(分派)가 있다.

 

 

 

 

 

 

김영란(金英蘭) 신라왕족

신라 경명왕조 시중(侍中)을 지낸 김유렴(金裕廉)의 딸로 김유렴의 당제인 경순왕이 왕위에 오르자 태자 김일(金鎰)의 비가 되었다. 경순왕이 고려에 나라를 들어바치자 남편 김일은 금강산에서 마의를 입고 초식으로 연명하다 생을 마친 마의태자로 불리웠으며, 김영란 또한 시어머니 소원왕후(昭元王后)와 함께 금강산 장안사(長安寺)에 머리를 깍고 여승이 되어 일생을 마쳤다.

 

 

 


김선웅(金善雄) 신라왕족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태자 김일(金鎰)과 태자비 김영란(金英蘭/김유렴의 딸)과의 사이에 난 장남으로 조부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들어 바치자 태자 김일은 모후 소원왕후, 태자비, 그리고 두아들 김선웅(金善雄), 김순웅(金順雄)을 데리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소원왕후와 태자비는 금강산 장안사(長安寺)에 머리를 깍고 여승이 되어 일생을 마쳤으며, 부 김일은 속세와 절연하고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마의를 입고 초식으로 연명하면서 생을 마쳐 마의태자라 불리웠다. 김선웅은 아들 김문강(金文康)을 두었으며 김문강의 아들이 김위영(金魏英)이다. 김위영은 고려 인종조 조정을 이끌던 김부식(金富軾)의 증조부로 알려져 있으며 일설에는 김위영이 경순왕조 경주지방의 호장(戶長)이였으며 신라 망국후 고려에 귀부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김순웅(金順雄) 신라왕족

경주김씨 족보에 의하면 김순웅은 경주김시의 파조(派祖)이며, 신라 경순왕의 태자 김일(金鎰)과 태자비 김영란(金英蘭/김유렴의 딸)의 사이에 난 차남으로 신라 망국후 조모, 부모, 형 김선웅(金善雄)과 함께 금강산에 들어간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김순웅의 아들 김인위(金因渭)가 현종도 1024년에 치사(致仕/70세 정년퇴직)한것으로 미루워 김인위는 954년 출생으로 짐작된다.

<경순왕(881출생) → 김일(金鎰) 900~910 출생 → 김선웅(920~930 출생), 김순웅(921~931 출생) 추측>

한편 김순웅의 아들 김인위는 현종 15년 1024년 그해에 현종의 장인이 되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임명되어 치사했다.

그러나 강릉김씨(江陵金氏) 족보에는 김순웅은 대상(大相) 김선환(金宣煥)의 아들이고, 조부는 김영환(金英喚), 증조부는 김자사(金紫絲)인것으로 되어 있다.

경주김씨와 강릉김씨의 내용중 고려초 대장군(大將軍). 응양위(鷹揚衛)과 용호위(龍虎衛)의 이군(二軍)을 거치고 좌우군(左右軍), 신호위(神虎衛, 흥위위(興尉衛), 금오위(金吾衛),천우위(千牛衛), 감문위(監門衛))등 육위의 장군을 거치고 대장군이되어 안주(安州) 홀성주의 병마사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군이 창설된것은 현종조 임으로 이는 사실이 아닌듯 하다.

 

 

 

김교(金較) 신라왕족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태자 김일(金鎰)의 셋째 아들로 알려져 있으며, 조부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부 김일은 조모 소원왕후와 태자비, 두형 김선웅(金善雄), 김순웅(金順雄)을 데리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김교 또한 이들을 따라 금강산으로 들어간것으로 보이며, 광종조에 통주군(通州君/강원 통천)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통주를 관향으로 삼았으며 김교는 통천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자(子)는 김욱(金昱)이고 손자는 김이청(金以淸)이다.

 

 

 

지은(知恩) 경주

삼국사기 효녀열전에 기록된 여인으로, 경주 한기부(韓歧部) 백성 연권(連權)의 딸이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홀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형편이 어려워지자 쌀10석에 부자집에 종으로 들어가 어머니를 봉양했다. 모가 말하길 "예전에는 밥이 거칠어도 맛이 좋았는데, 지금은 밥은 좋아도 맛은 전과 같지 않고 속을 칼로 에이는 것 같으니 어찌된 일이냐?" 하니 모녀가 목놓아 울었다. 이때 화랑 김효종이 길을 걷다가 이를 듣고, 사정을 알아본바 곧바로 집에 돌아가 부모에게 청하여 집의 곡식 100석과 옷가지를 실어다 주었으며 주인에게 몸값을 지불해주고 양민이 되게 하였더니 화랑 낭도 수천명이 각기 곡식 한섬씩을 내주었다. 정강왕이 이소식을 듣고 다시 벼 500석과 집한채를 하사하였는데, 곡식이 많아 도둑이 들까 염려하여 군사를 보내 지키게 하였다.

 

 

 

김운발(金雲發) 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D)

나주김씨(羅州金氏) 시조로 부는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둘째 아들 김굉이다. 경순왕이 고려로 항복하자, 마의태자와 김굉은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개골산으로 입산하였다가 중이 되었고, 김운발은 고려조정에 출사하여 시중까지 역임하고 나주군에 봉해졌다.

 

 

김우발(金雨發) 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C)모략(D)명성(D)축성(D)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아들 김굉의 둘째아들로 안로김씨(安老金氏) 시조인 김지경(金之敬)의 부다. 신라가 패망하자, 마의태자와 김굉은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개골산으로 입산하였다가 중이 되었고, 김우발은 형과 함께 고려 조정에 출사, 경주군(慶州君)에 봉해졌으나, 아들 김지경이 나주의 속현인 안로에서 살았음을 생각하면, 형과 함께 나주에서 정착한듯 싶다.

 

 

 

헌숙왕후(獻肅王后) 고려왕족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과 고려 태조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 사이의 장녀로, 모 낙랑공주는 경순왕과 함께 고려 왕궁의 신란궁(神鸞宮)에 거주했기에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으로 불리웠다. 신란궁에서 자란 헌숙왕후는 훗날 5대왕 경종의 제1왕후가 되었다. 경종과의 사이에 자식은 없었으며, 경종 사후 경종의 능에 합장되고 태묘에 부묘되었다. 1002년(목종 5) 온경(溫敬), 1014년(현종 5) 공효(恭孝), 1027년 양혜(良惠), 뒤에 다시 의목순성(懿穆順聖), 1056년(문종 10) 회안(懷安), 1253년(고종 40) 인후(仁厚)의 시호가 거듭 추증되었다.

 

 

황경(黃瓊) 장수(전북 장수)

장수황씨(長水黃氏)의 시조로, 장수군(長水君)에 봉해진 황을고(黃乙古)의 아들이다. 황경은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고 고려 태조의 딸 낙랑공주와 혼인하여 출생한 차녀 김씨와 혼인하였다. 황경의 벼슬은 시중(侍中)에 이른것으로 장수황씨 족보에는 나와있다.

 

 

황을고(黃乙古) 장수(전북 장수)

장수황씨(長水黃氏)의 시조 황경(黃瓊)의 부로, 서기28년 후한에서 건너와 경북 울진 평해에 정착한 황락(黃洛)의 후손이다. 형제는 황갑고(黃甲古), 황병고(黃丙古)이며, 형 황갑고는 평해에 남아 기성군(箕城君)에 봉해졌으며, 동생 황병고는 창원백(昌原伯)에 봉해졌다. 황을고의 아들 황경(黃瓊)이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 김부와 고려 태조의 딸 낙랑공주의 사이에 난 차녀 김씨와 혼인하였다. 황갑고, 황을고, 황병고 삼형제가 황락(黃洛)의 아들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황갑고의 아들 황온인(黃溫仁)이 고려초에 무관직에 나간것으로 보아 황락의 아들이 아닌 후손으로 짐작된다.

 

 

황갑고(黃甲古) 평해(경북 울진)

평해황씨(平海黃氏)의 시조로, 서기28년 후한에서 건너와 경북 울진 평해에 정착한 황락(黃洛)의 후손이다. 황갑고는 후삼국 당시 평해호족으로 스스로 장군을 칭하였으며 기성군(箕城君)에 봉해졌다. 형제로는 황을고(黃乙古), 황병고(黃丙古)가 있으며

황을고는 장수군(長水君)에 봉해져 장수(전북 장수)에 세거하여 장수황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황병고는 창원백(昌原伯)에 봉작되고 창원(경남 창원)에 세거하여 창원황씨(昌原黃氏)의 시조가 되었다. 황갑고, 황을고, 황병고 삼형제가 황락(黃洛)의 아들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황갑고의 아들 황온인(黃溫仁)이 고려초에 무관직에 나간것으로 보아 황락의 아들이 아닌 후손으로 짐작된다.

 

 

황병고(黃丙古) 창원(경남 창원)

창원황씨(昌原黃氏)의 시조로, 서기28년 후한에서 건너와 경북 울진 평해에 정착한 황락(黃洛)의 후손이다. 형제로는 두형 황을고(黃乙古), 황병고(黃丙古)가 있으며, 황갑고는 평해에 남아 기성군(箕城君)에 봉해져 평해황씨(平海黃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황을고는 장수군(長水君)에 봉해져 장수(전북 장수)에 세거하여 장수황씨의 시조가 되었다. 황갑고, 황을고, 황병고 삼형제가 황락(黃洛)의 아들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황갑고의 아들 황온인(黃溫仁)이 고려초에 무관직에 나간것으로 보아 황락의 아들이 아닌 후손으로 짐작된다.

 

 

황온인(黃溫仁) 평해(경북 울진)

평해황씨(平海黃氏)의 시조로 기성군(箕城君/경북 울진, 평해)에 봉해진 황갑고(黃甲古)의 아들이다. 황온인은 고려초 금오위장군, 태자검교를 역임했다.


 

 

신보(申甫)/신보락(申甫樂)/신보장(申甫臧)/신보장(申甫藏)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 신숭겸(申崇謙)의 아들로 신숭겸이 927년 대구 공산전투에서 전사하자, 태조 왕건은 신숭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으며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고, 그의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신보(申甫)를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들의 복을 빌게 하였다. 한편 신보는 평산을 부친의 뒤를 이어 평산을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이천상(李天祥) 전주

전주이씨 시조 이한(李翰)의 손자로 이한이 죽자 전주 건지산(乾止山) 조경단(肇慶壇)에 장사를 지냈다.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벼슬을 역임했다고 전주이씨 족보에 나와 있는데, 신라 조정인지 백제 조정인지 분명치는 않다.


 

 

 

이한(李翰) 전주

전주이씨(완산이씨)의 시조로, 신라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 때에 사공(司空) 벼슬을 지냈으며 태종무열왕의 10세손인 김은의(金殷義)의 사위였다.

 


 

최서천(崔徐遷) 수주(수원)

수성(水城/현 경기 수원,화성) 호족으로 고려초 태조 왕건이 남정할때 인근호족 김칠(金七), 최승규(崔承珪)등 200여명과 함께 태조에게 귀부하였다. 태조17년(934년) 수성은 수주(水州)로 승격되었다. 아들은 최한용(崔韓用)이고 손자는 최융예(崔融乂, 崔融藝, 崔融銳)이며 모두 조정에 출사하였으나 한직에 머물렀다. 증손 최사위(崔士威)가 내사령을 지내고 현종 묘정에 배향됨으로써 가문을 빛냈다. 이후 무신반란때 가문이 몰락하였다.

 

 


최승규(崔承珪) 수주(수원)

수성(水城/현 경기 수원,화성) 호족으로 고려초 태조 왕건이 남정할때 인근호족 김칠(金七), 최서천(崔徐遷)등 200여명과 함께 태조에게 귀부하였다. 태조17년(934년) 수성은 수주(水州)로 승격되었다.

 


최융예(崔融乂, 崔融藝, 崔融銳) 수주(수원)

수주(水州/현 경기 수원)호족 최한용(崔韓用)의 아들로, 삼한 통일후 고려 조정에 출사하여 대위(大尉) 벼슬을 지냈다. 김해부 아간(金海府阿干) 유울행(庾鬱行)의 딸과 혼인해 아들 최사위(崔士威)를 얻었다. 아들 최사위(崔士威)는 현종때 내사령을 지내고 현종 묘정에 배향되는 공을 세웠다.

 

 

최한용(崔韓用) 수주(수원)

수주(水州/현 경기 수원)호족 최서천(崔徐遷)의 아들로, 고려에 귀부후 개경으로 상경해 출사하여 벼슬이 검교공부시랑(檢校工部侍郞)에 이르렀다.

 

 


권인행(權仁幸)

안동권씨의 시조 권행(權幸)의 아들로 본성은 김씨였으나, 아버지 김행(金幸)이 929년 고창군 전투에서 고려군과 연합하여 백제군을 물리치자 태조 왕건이 권씨성을 하사함으로써, 대대로 권씨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권인행은 기인제도(其人制度)에 의해 고려 왕도 개경에 머물면서 벼슬이 낭중(郎中/5품)에 이르렀다. 권인행은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권책(權冊)을 낳았다.

 

 

허사문(許士文) 공암현

태인허씨(泰仁許氏)의 시조로, 공암현(孔巖縣/양천) 호족출신으로 고려초에 공을 세운 허선문(許宣文)의 일족이라 추측한다. 허사문은 고려 태조의 딸과 혼인하여 두아들 허즙(許楫)과 허도(許棹)을 두었다. 또 한편으로는 딸을 안동호족인 권행(權幸)의 아들 권인행(權仁幸)과 혼인시켰다고 한다. 허나 족보별로 여러 오차가 있다. 어떤 족보에는 허사문을 허선문의 동생이라 하였는데, 936년 일리천 전투당시 허선문의 나이가 90대임점, 태조의 부마라 함은 적어도 고려 개국후 20년 후에나 가능한 일로 938~940년에나 태조의 딸과 허사문이 결혼했을 것인데 이때 허사문의 나이는 20~30대 였을것이다. 그렇다면 절대 허선문의 동생이 될수가 없다. 게다가 안동권씨 족보에 따르면 권행의 아들 권인행과 허사문의 딸이 혼인하였다는데, 권행은 929년 고창전투에서 활약한 장수이고, 권인행은 기인제도에 의해 고려 조정에 인질로 가있던 점으로 미루워 권행 또한 940년경에 40~60대로 추정된다. 권행과 사돈지간이 된 허사문도 비슷한 연배로 보았을때 허사문 또한 태조와 비슷한 연배로 태조의 부마가 됐다는 기록은 오류일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허즙(許楫)

태인허씨(泰仁許氏)의 시조 허사문(許士文)의 아들로, 모가 태조 왕건의 딸이라 하는데 확실치 않다. 허즙은 부 허사문의 뒤를 이어 태인에 세거하며 태인허씨를 이어갔고, 동생 허도(許棹)는 이씨로 개명하여 경원이씨(慶源李氏/인주이씨,인천이씨)의 시조 이허겸(李許謙)이 되었다.


 

 

순질(荀質)

고려 광종조 6년(955년) 11월 광평시랑(廣評侍郞)직에 있던 순질은 후주(後周) 세종(世宗)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경종 원년(976년) 복수법을 시행하던 집정(執政) 왕선(王詵)이 태조의 아들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을 살해하자, 경종은 복수법을 금지하고 왕선을 외직으로 내친후 순질(荀質)을 좌집정(左執政), 신질(申質)을 우집정(右執政)으로 삼아 내사령(內史令)을 겸하게 하였다.

 

 

신질(申質)

고려 개국공신으로 추측되며, 경종 원년 976년 복수법을 시행하던 집정(執政) 왕선(王詵)이 태조의 아들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을 살해하자, 경종은 복수법을 금지하고 왕선을 외직으로 내친후 순질(荀質)을 좌집정(左執政), 신질(申質)을 우집정(右執政)으로 삼아 내사령(內史令)을 겸하게 하였다.

 

 

위수여(韋壽餘)/수여(壽餘)

강화위씨(江華韋氏)의 시조로 본시 당나라 경조(京兆) 사람으로, 광종 11년 960년 강화도에 망명하였다. 광종 때 사선(司膳) 벼슬에 오래 있었으나 고위 관직에는 임용되지 못하다, 경종 원년에 복수법을 시행하던 집정(執政) 왕선(王詵)이 태조의 아들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을 살해하자, 경종은 복수법을 금지하고 왕선을 외직으로 내친후 순질(荀質)을 좌집정(左執政), 신질(申質)을 우집정(右執政)으로 삼아 내사령(內史令)을 겸하게 하고, 위수여를 근신(近臣)으로 삼아 어주(御廚)의 일을 맡게 하였다. 목종조에도 누차 승진하였으며, 현종 원년 1009년에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를 제수받았다. 나이가 많음에 치사코자 하였으나, 현종으로부터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1012년 2월 문하시중 상주국 강화현 개국자 식읍오백호(門下侍中上柱國江華縣開國子食邑五百戶)에 제수되었으나 4월에 죽었다.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안공(安恭)이다.

 

 

왕선(王詵)

고려의 광종조 공신으로 황주(黃州) 황보씨(皇甫氏)와 연관된 왕씨성을 사성받은 호족이라 추측된다. 광종의 호족 대숙청기를 거친후, 황주 황보씨를 외가로 둔 경종이 즉위하자 왕선은 집정(執政)으로 임명받아 전권을 휘둘렀다. 왕선은 광종조에 숙청당한 호족들이 참소한 사람을 복수할수 있도록 하는 일명 복수법을 경종에게 건의하여 윤허를 받았다. 복수법이 시행되자, 광종조에 권세를 누렸던 가문들이 많은 피해를 받았다. 왕선은 태조의 아들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을 복수법에 기인해 직접 살해하였다. 이에 크게 분노한 경종은 왕선의 집정자리를 회수하고, 외직으로 내친후, 순질(荀質)을 좌집정(左執政), 신질(申質)을 우집정(右執政)으로 삼아 내사령(內史令)을 겸하게 하여 복수법을 금지시켰다.

by 초령목 2011. 11. 8. 23:38

왕건(王建) 고려 육전(A)수전(A)정치(S)모략(B)명성(SS)축성(A)(877~943) 본관 개성(開城), 자 약천(若天), 성 왕(王), 휘 건(建), 시호 신성(神聖)이다.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위숙왕후(威肅王后:追尊) 한씨(韓氏)이다.895년(진성여왕 9) 아버지를 따라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898년(효공왕 2)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고, 900년 광주(廣州)·충주(忠州) 등을 공취, 그 공으로 아찬(阿粲)의 위계를 받았다. 903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지방을 공략,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閼粲)에 승진되고 계속하여 전라도·경상도 지방에서 견훤(甄萱)의 군사를 격파하는 한편 정벌한 지방의 구휼(救恤)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913년 시중(侍中)이 되었다.918년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궁예가 민심을 잃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하였다. 이듬해 수도를 송악(松嶽)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나갔다. 즉, 지방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935년 투항해 온 신라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하고 이듬해에는 앞서 항복해 온 견훤과 함께 신검(神儉)의 후백제를 공격, 이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였다. 이 해 《정계(政誡)》 《계백료서(誡百寮書)》를 저술하여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남겼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능은 현릉(顯陵:개성)이다.

 

 

왕융(王隆)/용건(龍建)/용융(龍隆) 태봉 육전(C)수전(B)정치(B)모략(C)명성(B)축성(B)

(?~897) 고려사 세계에 따르면 작제건(作帝建/의조경강대왕懿祖景康大王)의 아들로 모(母)는 용녀(龍女/원창왕후元昌王后)이다.

초명은 용건(龍建)이라 하였다가 후에 융(隆)으로 바꿨다. 송악의 호족이었는데, 젊을때 송악 영안성(永安城)을 거닐다 한 몽부인(夢夫人)을 만나 혼인하였다. 후에 삼한의 어머니라 하여 성을 한씨로 하고 위숙 왕후(威肅王后)로 추증하였다. 개성(開城) 송악산 남쪽 기슭에서 살았는데 궁예(弓裔)가 군왕을 자칭하고 일어섰을 때 송악군의 사찬(沙粲)으로서 군졸을 이끌고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 궁예는 그를 금성태수(金城太守)로 임명하였는데, 그는 송악에 발어참성(勃禦塹城)을 수축하고 아들 왕건에게 성주(城主)를 맡겨 달라고 요청하자 궁예가 그 말대로 따랐다. 왕건이 고려 태조가 되자 세조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P.S>왕건의 가계도

<1.강효경→2.강충→3.강보육>신천강씨 → 진의(강보육의 딸)+당선종→<작제건→용건/용륭(왕륭)→왕건>개성왕씨

 

최응(崔凝) 고려 육전(C)수전(C)정치(SS)모략(S)명성(A)축성(B)898~932 본관 황주(黃州). 시호 희개(熙愷). 오경(五經)에 밝고 문장이 뛰어나 궁예(弓裔) 밑에서 한림랑(翰林郞)으로 있으면서 신임을 얻었다. 915년(신덕왕 4) 궁예가 왕건(王建)에게 모반의 누명을 씌울 때 왕건이 변명하자, 장주(掌奏)로 그 자리에 있던 최응이 붓을 일부러 뜰에 떨어뜨리고 주우러 내려가, “굽히지 않으면 위태롭다”고 왕건에게 귀띔, 굴하게 함으로써 화를 면하게 하였다. 그 후 왕건이 즉위하자 지원봉성사(知元鳳省事)를 지내고, 이어 광평낭중(廣評郞中) ·내봉경(內奉卿) ·광평시랑(廣評侍郞) 등을 지내면서 태조의 총애를 받았다. 대광 태자태부(大匡太子太傅) ·사도(司徒)에 추증,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유금필(庾黔弼) 고려 육전(SS)수전(A)정치(C)모략(C)명성(S)축성(S)

유금필은 평주 사람으로 평산유씨(平山庾氏)의 시조이기도 합니다. 아들로는 유긍(庾兢), 유관유(庾官儒), 유경(庾慶), 유방(庾方)등이 있으며, 딸은 태조의 제9비인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입니다. 이름난 후손으로는 의종때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낸 유필(庾弼), 그의 아들인 유응규(庾應圭),유자량(庾資諒), 숙종때 상서우복야를 지낸 유석(庾晳)등 모두 명신으로 손꼽혔습니다.유필은 무송유씨(茂松庾氏)의 시조이기도 합니다. 광종때에는 개국공신이 많았던 평주가 핍박을 받을때 유금필의 아들들도 피해를 보기도 하지만, 고려 중기까지 고려의 명가로써 이름을 날렸습니다.태조는 유금필의 후손들이 비록 죄를 짓더라도, 죄과를 논하지 말고 중용하라는 유시를 남겨 유금필의 후손을 보호하려 하였습니다.유금필의 손자 유공의(庾恭義)는 죄를 지었지만, 오히려 숙주방어사를 제수받았습니다. 결국은 문하성의 반대로 결국 삭탈관직당하긴 했습니다.또 후손 유중경(庾仲卿) 또한 간음하여 난 자식이라 하여 관직제수를 신하들이 반대하였으나, 유금필의 후손이란 이유로 관직을 제수하기도 하였습니다. -------------------------------------------------------------------------------------------------------유금필은 평주 출신으로 처음에는 평주 박씨가문에 소속되었던듯 싶습니다. 고려사 열전에 태조를 따라 마군장군에 이르렀다는 귀절을 보아, 평주 박지윤이 궁예에 귀부한후, 군부에 투신하여 궁예의 신임을 받아 마군장군에 오른듯 싶습니다.918년 역성혁명 직후 홍유와 함께 군사를 움직였는데, 이름이 홍유 다음에 나온것과, 역성혁명 당시 1등공신에 책록된 4대 마군장군에 비해 2등공신으로 책록된것으로 미루어 고려 초기에는 4대 마군장군(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에 비해 명성은 떨어졌을것으로 보입니다. 본격적으로 유금필의 활약상이 벌어지는 시기는 920년 골암진을 바탕으로 북쪽지역을 평정한 때부터 입니다. 적어도 920년부터 928년 까지는 북쪽에 기거하며, 북방 여진족을 휘하로 삼아 강력한 기병을 육성한듯 싶습니다. 그러던 것이 927년 공산 동수 전투에서 고려가 주력 기병 5000과 보명 1만, 게다가 호족들의 군사까지 합쳐 최대 2만의 주력군을 잃고, 김락,신숭겸,호의,전락,전이갑,전의갑,(김홍술)등 고려의 명장 8명을 잃은 충격에 고려 전체가 흔들린 직후 928년부터 유금필의 남쪽정벌이 시작된듯 합니다. 한마디로 구원투수로 나선 것이지요. 그것도 강력한 북방 기병을 이끌고 말입니다.928년부터 930년까지 고려가 가장 힘겨운 시기에 거운 승리의 대부분은 유금필이 이끈 전투였습니다.그러다 931년 참소를 입어 곡도로 귀양가게 됩니다. 참소를 한 인물들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당대의 최강의 호족 세력인 패강진의 입김이 작용했으리라는 추측을 할수 있습니다. 유금필 정도 되는 명장을 함부로 참소할수 있는 세력은 당시의 패강진 세력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패서 호족들은 북방의 기병을 보유한 유금필을 상당부분 경계했을 것이며, 이에 태조를 압박해 결국 유금필을 귀양형에 처하도록 햇을것이란 추측이 유력한듯 싶습니다.그러던 것이 932년 나주를 재점령한 백제가 수군장군 상애를 보내 고려의 심장부를 강타하게 됩니다. 고려는 급히 수군을 보내 이를 막고자 하였으나, 도저히 백제군의 상대가 되질 못해 대패를 당하게 됩니다. 이때 유금필이 귀양지에서 인근 호족들에게 명하여 군사를 소집하고, 방비태세를 갖추고 태조에게 서신을 보내 태조의 마음을 위로해주니, 태조는 크게 뉘우치며 유금필을 다시 중용하게 됩니다.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남쪽정벌군 총대장)으로 재임명된 유금필은 바로 신라와 인접한 의성부(경북 의성)에 주둔하게 됩니다.933년 신검이 이끄는 군대가 다시 신라를 침공하여 서라벌이 함락직전에 처하게 됩니다. 이때 태조는 급히 신라를 구원하라는 명을 내리게 됩니다. 이때 유금필이 이끌던 병력은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3000~5000정도 였을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때는 북쪽기병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던듯 싶습니다. 유금필이 급박한 상황에서 출전한 병력은 장사 80명이었습니다. 80명의 기병만을 대동하고 급히 신라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물론 그뒤로 부장(관무,관헌등으로 추측)들을 시켜 뒤따라 오도록 하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80명의 기병으로 신검의 군대와 사탄에서 만나게 됩니다.이때의 활약상이 유금필을 더욱더 빛나게 하지요. 자세한 글은 아래 고려사의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고려사+고려사절요+고려사열전의 모든 기록들1. 918년 7월 청주에 마군장군(馬軍將軍) 홍유(洪儒), 유금필(庾黔弼)등을 보내어 군사 1천5백 명을 거느리고 진주(鎭州 충북 진천)에 주둔하여 대비하게 하였다.2. 920년 3월 북계(北界)의 골암진(鶻巖鎭)이 자주 북방 오랑캐에게 침략을 당하므로 여러 장수를 모아 말하기를, "지금 남방의 흉도(兇徒 백제)가 멸망되지 않았고 북방 오랑캐가 걱정스러우니 짐(朕)이 자나 깨나 근심이 된다. 유금필(庾黔弼)을 보내어 방어하게 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였다. 모두 "좋습니다." 하므로 드디어 유금필에게 명하니, 그날로 개정(開定) 군대 3천 명을 인솔하고 출발하여 골암진의 동산(東山)에 큰 성을 축성하고 그곳에 거처하며 지키게 하였다.3. 923년 4월 대광(大匡) 유금필(庾黔弼)이 북번(北蕃)의 추장 3백여 명을 소집하여 성대한 주연을 베풀어 주식을 많이 먹이고 그들이 추한 때를 포착하여 위협하니 추장들이 모두 복종하였다. 곧이어 사람들을 여러 부락에 파견하여 전달하기를 "이미 너희들의 추장이 복종했으니 너희들도 와서 복종하라."고 하였더니 여러 부락에서 서로 이끌고 와서 귀부(歸附)한 자가 1천 5백명이었으며, 포로되었던 고려 사람 3천여명을 돌려 보내었다. 이때로부터 북방이 평안하게 되었으므로 태조는 그에게 특별한 표창을 주었다.4. 925년 10월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유금필(庾금弼)을 보내어 백제의 연산진(燕山鎭 충북 문의)을 쳐서 장군 길환(吉奐)을 죽이고  또 임존군(任存郡 충남 예산)을 쳐서 3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5. 925년 10월 태조가 조물군(曹物郡)에 행차하여 견훤을 만나 싸웠으나 견훤의 군사가 매우 날래어서 승부를 결단치 못하였다. 태조는 지구전을 펼쳐 견훤의 군사를 피로하게 하려고 하는데, 유금필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회전(會戰)하여 병세(兵勢)가 크게 떨치니 견훤이 두려워하여 화친하기를 청하여 외생(外甥) 진호(眞虎)를 볼모로 보내니 태조도 또한 당제(堂弟) 왕신(王信)을 볼모로 보내었다. 태조는 견훤의 나이가 10년이나 위이므로 그를 상부(尙父)라 일컬었다. 태조가 견훤을 군영(軍營)에 오게 하여 일을 의논하려고 하니 유금필이 간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알기 어렵사오니 어찌 가벼이 적(敵)과 서로 가까이 하겠습니까"하므로 태조가 그만 두었다. 신라왕이 이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견훤은 반복(反復)하여 거짓이 많으므로 화친할 수 없습니다”하니, 태조는 그 말을 옳게 여겼다. 6. 928년 7월 태조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삼년성(三年城 충남 보은)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청주(靑州)로 후퇴하였는데 백제 장수 김훤(金萱), 애식(哀式), 한장(漢丈)등이 3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쫒아와 청주(靑州)를 침공하였다. 이때 유금필(庾금弼)은 명을 받들고 탕정군(湯井郡)에 성을 쌓고 있었는데, 하루는 유금필이 탕정군 남산(南山)에 올라가 앉아서 졸고 있었는데 꿈에 한 대인(大人)이 말하기를, “내일 서원(西原)에서 변란이 있을 것이니 빨리 가라”고 하였다. 유금필은 놀라 깬 후 그 길로 청주로 가서 적군과 싸워 격파하고 독기진(禿岐鎭)까지 추격하였는데 죽이고 부상당한 포로가 3백여 명이었다. 중원부(中原府)에 달려가서 태조를 보고 전투 정형을 자세히 보고하였더니 태조가 말하기를 “동수 싸움에서 신숭겸과 김락 두 명장이 전사하였으므로 국가를 위하여 깊이 근심하였더니 지금 그대의 말을 듣고 짐의 마음이 적이 안심되었다.” 라고 하였다.7. 929년 12월 견훤이 고창군(古昌郡 경북 안동)을 포위하였으므로 태조가 가서 이를 구원하려고 예안진(禮安鎭)에 이르러 여러 장수와 의논하기를,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면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하니, 대상(大相) 공훤(公萱)과 홍유(洪儒)가 아뢰기를, “만약 우리가 이기지 못하면 죽령(竹嶺) 길로 돌아 올수 없게 될 것이니 빠져 나갈 길을 사전에 수리하여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하였다. 유금필(庾금弼)은 아뢰기를, “신(臣)이 듣자옵건대, "무기는 흉악한 도구요, 전투는 위험한 일이라 하니, 죽자는 결심을 가지고 살려는 계책을 생각하지 않은 연후에 비로소 승리할수 있다"고 하는데, 지금 적군 앞에 나아가 싸워보지도 않고 먼저 패배할 것을 염려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만약 급히 구원하지 않으면 고창군의 3천여 명을 고스란히 적에게 주는 것이니 어찌 원통하지 않습니까. 신은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태조가 그 말에 따랐다. 유금필이 이에 저수봉(猪首峰)으로부터 분격(돌격)하여 적을 크게 대파하였다. 태조가 고창군에 들어가서 유금필에게 이르기를, “오늘의 승전은 경(卿)의 힘이다”라고 하였다.8. 931년 3월 유금필(庾금弼)이 참소를 입어 곡도(鵠島)로 귀양갔다. 9. 932년 10월 백제의 해군장(海軍將) 상애(尙哀) 등이 대우도(大牛島)를 공격하여 약탈하였으므로 태조가 대광(大匡) 만세(萬歲) 등을 보내어 이를 구원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니 태조가 이를 근심하였다. 유금필(庾금弼)이 곡도(鵠島)에서 서신을 올리기를, “신이 비록 죄를 짓고 귀양 중에 있사오나 백제가 우리의 해변 고을을 침공했다는 말을 듣고 신이 이미 곡도와 포을도(包乙島)의 장정들을 선발하여 군대를 편성하고 또 전함도 수리하여 이를 막으려고 하오니 성상께서는 근심하지 마시기를 원합니다”하였다. 태조가 서신을 보고 울면서 이르기를, “참소를 믿고 어진 사람을 쫓은 것은 짐의 불찰이다.” 하고, 사자를 보내어 그를 소환하고 위로하기를, “경(卿)은 실상 죄가 없는데도 귀양간 것을 일찍이 원망하지 않고 오직 나라를 도울 것만 생각하고 있으니 짐이 매우 부끄럽고 뉘우치는 바이다. 장차 자손들에게까지 상(賞)을 미치게하여 경의 충성과 절의에 보답하겠다” 하였다.10. 933년 5월 유금필(庾금弼)이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에 임명되어 의주부(義州府)를 지키는데 태조가 사자를 보내어 이르기를, “짐은 신라가 백제에게 침략 당함을 염려하여 일찌기 대광 능장(能丈),영주(英周),열궁(烈弓),공희(公希)들을 파견하여 진수하게 하였는데, 백제 군대가 벌써 혜산성, 아불진(阿弗鎭) 등지에 이르러 사람과 재물을 약탈한다고 하니, 만약 신라의 국도(國都)에까지 침범될까 우려된다. 경이 마땅히 가서 구원하라."고 하였다. 이에 유금필은 장사(壯士) 80명을 가려 뽑아 달려갔다. 사탄에 이르렀을 때 사졸(士卒)에게 말하기를, “만약 이 곳에서 적을 만난다면 나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지 아니할 것이다. 다만 너희들이 함께 칼날에 죽을 것이 염려되니 그대들은 각자가 살 도리를 잘 강구하라” 하니, 사졸들이 말하기를, “우리 무리들이 모두 죽었으면 죽었지 어찌 장군만 홀로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게 하겠습니까” 하고, 서로 힘을 다하여 적을 치기로 맹세하였다. 사탄을 건너자 백제의 통군(統軍) 신검(神劒) 등과 맞딱뜨렸다. 유금필등이 싸우려 하였으나, 백제 군대는 유금필군의 대오가 정예로운 것을 보고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흩어져 도망쳤다. 유금필이 신라에 이르니, 늙은이나 어린이나 할 것 없이 성 밖에 나와서 맞이하여 절하고 울면서 말하기를, “오늘날에 대광(大匡)을 뵈올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대광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모두 백제군에게 죽음을 당했을 것입니다” 하였다. 유금필이 그 곳에서 머물은 지 7일만에 돌아오는 길에 신검(神劒)을 자도(子道)에서 만나 싸워서 크게 이겨, 적장 금달(今達), 환궁(奐弓) 등 7명을 생포하였으며 적을 죽이고 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승전보고가 이르니, 태조가 몹시 놀라고 기뻐하면서, “나의 장군(我將軍)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같이 이길 수 있으랴” 하였다. 유금필이 들어와서 뵈오니 태조가 궁전에서 내려와 그를 맞이하여 손을 잡고 이르기를, “경(卿)의 공로는 옛날에도 또한 드물었던 것이다. 짐(朕)의 마음에 새기고 있으니 이를 잊는다고 이르지 말라” 하였다. 유금필이 사례하여 아뢰기를, “국난을 당하여 자기 일신을 생각지 않으며 위급에 직면하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신하된 자의 직분이거늘 성상(聖上)께서 어떻게 이같이 하십니까” 하니, 태조가 더욱 그를 소중하게 여겼다. 11. 934년 9월태조가 친히 운주(運州 충남 홍성)를 정벌하려고 유금필을 우장군으로 임명하여 진군하니,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갑사(甲士) 5천 명을 선발하여 거느리고 와서 말하기를 “양군이 서로 싸우면 양편이 다 온전하지 못할 형세이니 병졸이 살상(殺傷)을 많이 당할까 염려되니 마땅히 화친을 맺어 각기 국경(國境)을 보전하는것이 마땅하겠소”라고 하였으므로 태조가 여러 장수를 모아 의논하니 유금필(庾금弼)이 아뢰기를 “오늘의 형세는 싸우지 않을 수 없사오니 원컨대 성상께서는 신들이 적군을 격파하는 것만 보시고 근심하지 마소서” 하였다. 저 편에서 미처 진을 치기 전에 강한 기병(騎兵)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적병 3천여 명의 목을 베고 , 술사(術士) 종훈(宗訓)과 의사(醫師) 훈겸(訓謙)과 용맹한 장수 상달(尙達), 최필(崔弼)을 사로잡으니 , 웅진(熊津) 이북의 30여 성(城)이 소문을 듣고 스스로 항복하였다.12. 935년 4월태조가 여러 장수에게 이르기를 , “나주(羅州)의 40여 군(郡)이 우리의 울타리가 되어 오랫동안 풍화(風化)에 복종하였다. 일찍이 대상(大相) 견서(堅書), 권직(權直), 인일(仁壹) 등을 파견하여 안무하였는데, 근자에는 백제에게 침략되어 6년 동안이나 바닷길이 통하지 않았으니 누가 능히 나를 위하여 이 곳을 진무(鎭撫)하겠는가” 하니, 홍유(洪儒),박술희(朴述熙)등이 말하기를“제가 비록 용맹하지는 못하나 장수의 한 사람으로 보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대체로 장수로 되려면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귀중하다”라고 하였다. 공훤(公萱), 대광 제궁(悌弓)등이 아뢰기를 “유금필이 적임자입니다”라고 하니 태조가 이르기를"짐도 역시 이를 생각해 보았으나 그러나 요사이 신라로 가는 길이 막혔던 것을 유금필이 이를 통하게 하였으니 그의 노고(勞苦)를 생각하니 다시 명하기가 어렵다” 고 하였다. 유금필이 아뢰기를 , “신이 비록 아니 이미 노쇠(老衰)했사오나 이것은 국가의 큰 일이오니 감히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태조가 기뻐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 “경이 만약 명을 받든다면 어찌 이보다 더 기쁨이 있으랴” 하고, 유금필을 도통대장군(都統大將軍)으로 임명하고 예성강(禮成江)까지 전송하고 어선(御船)을 주어 보내었다. 태조는 3일간 그대로 체류하면서 유금필이 바다에 나갈 때까지 기다려서 환궁하였다. 유금필이 나주(羅州)에 가서 경략(經略)하고 돌아오니, 태조가 또 예성강까지 행차하여 맞아 위로하였다. 13. 935년 6월견훤이 막내 아들 능예(能乂)와 여자 나인(內人) 애복(哀福)과 애첩 고비(姑比)등과 함께 나주(羅州)로 도망 나와서 고려에 들어와 붙어살기를 청하므로 장군 유금필과 대광(大匡) 만세(萬歲)와 원보(元甫) 향예(香乂)와 오담(吳淡),능선(能宣),충질(忠質) 등을 보내어 바닷길로 그들을 맞이하였다.14. 936년 9월일리천 전투에서 대상(大相) 유금필은 원윤(元尹) 관무(官茂),관헌(官憲)등을 부장으로 삼아 흑수(黑水),달고(達姑),철륵(鐵肋) 등 제번(諸蕃)의 강한 기병(騎兵) 9천 5백명을 거느리고 중군장(中軍將)으로 출전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15. 941년 4월대광(大匡) 유금필이 졸 하였다. 유금필은 평주(平州) 사람이다. 장수의 지략(智略)이 있어 태조를 섬겼으며 병사들에게서 신망을 얻었다. 출정할때마다 명을 받으면 즉시 출발하였으며, 집에 들려서 자고 간 적이 없었다. 매양 개선(凱旋)할 적마다 태조가 반드시 마중나가 위로하여 주었으며, 시종토록 다른 장수들은 받지 못하는 은총(恩寵)으로 대우하였다. 시호를 충절(忠節)이라 하였으며 성종 13년에 태사 벼슬을 추증하고 태조 묘정(廟廷)에 배향(配享)하였다. 아들은 유긍(庾兢), 유관유(庾官儒), 손자는 유경(庾慶)이고, 딸은 태조의 제9비인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이다.

 

 

홍유(洪儒)/홍은열(洪殷悅)  고려 육전(S)수전(C)정치(B)모략(C)명성(A)축성(B)

?∼936(태조 19). 고려의 무신. 남양부(당성) 사람으로 남양홍씨의 중시조이다. 태봉의 마군장군(馬軍將軍)으로 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배현경(裵玄慶)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弓裔)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개국1등공신이 되었다.태조 즉위 후 청주(靑州)에서 변란이 일어나므로 유금필(庾黔弼)과 함께 진주(鎭州: 鎭川)에 주둔하며 이에 대비하였다.이듬해인 919년(태조 2)에는 오산성(烏山城)을 고쳐 예산현으로 하자 대상(大相) 애선(哀宣)과 함께 유민(流民) 500여호를 옮겨 안정시키기도 하였으며, 이어 대상에서 태사 삼중대광(太師三重大匡)으로 올랐다. 그리고 그의 딸은 태조의 26번째 부인인 의성부원부인(義城府院夫人)이 되어 의성부원대군을 낳기도 할 만큼 태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936년 후백제를 쳐 후삼국을 통일할 때 일리천(一利川)의 전투에서 마군을 거느리고 우군(右軍)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994년(성종 13) 태사가 추증되었으며, 태사개국충렬공(太師開國忠烈公)으로서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의성부사람 홍술로 잘못 알려져 있다.

 

 

배현경(裵玄慶) 고려 육전(S)수전(C)정치(D)모략(C)명성(A)축성(C)?∼936(태조 19). 고려 태조 때의 무신. 경주인(慶州人)으로 초명은 백옥삼(白玉衫, 白玉三).군졸의 신분으로 담력이 있어 관위가 대광(大匡)에까지 이르렀다. 궁예 때부터 활약했던 인물이며, 특히 마군장군(馬軍將軍)으로 있을 때 신숭겸(申崇謙)·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고려 건국에 큰 역할을 하였다.그리하여 태조 즉위 후 일등공신에 녹훈되었고, 태조를 도와 후삼국 통일에 많은 활약을 하였다.918년(태조 1)에는 청주인(靑州人) 현율(玄律)을 순군낭중으로 임명하는 데 반대하여 현율을 병부낭중으로 삼게 한 적도 있다.994년(성종 13)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태조묘에 배향되었다.그뒤 마전(麻田)의 숭의전(崇義殿), 평산(平山)의 태사사(太師祠), 나주의 초동사(草洞祠) 등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왕만세(王萬歲) 고려 육전(B)수전(S)정치(C)모략(C)명성(B)축성(C)태조의 종제로 위계는 정2품 대광(大匡)에 이르렀다. 해전(海戰)에 능하였던 듯하며 932년(태조15) 후백제의 상귀(相貴)가 이끄는 수군(水軍)이 저산도(猪山島) ·대우도(大牛島)를 공략하자 이를 맞아 싸웠다. 935년 견훤(甄萱)이 고려에 귀순하기를 청하자 장군 검필(黔弼)과 함께 병선(兵船) 40척을 이끌고 가서 해로에서 그를 맞이하였다. 

 

신숭겸(申崇謙) 고려 육전(SS)수전(C)정치(C)모략(D)명성(S)축성(C)?∼927(태조 10). 고려 태조 때의 무장.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능산(能山).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본래 전라도 곡성현(谷城縣)출신으로 태조가 평산에서 사성(賜姓)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고려사》 열전에는 그를 광해주(光海州:현재 春川) 사람이라 하였다.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춘천도호부 인물조에 신숭겸의 이름이 실려 있고, 또한 그의 묘가 춘천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그는 본래 곡성출신으로 뒤에 춘천에 옮겨와서 살게 되어 그의 묘도 여기에 쓰게 된 것으로 보인다.신숭겸은 몸집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 궁예(弓裔) 말년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고려 건국 때 큰 공을 세웠으며, 이로 말미암아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봉해졌다.고려 태조가 즉위한 뒤 7, 8년 동안은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긴장관계는 소강상태에 있었으나, 견훤(甄萱)이 신라에 대하여 공세를 펴게 됨으로써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어, 마침내 큰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즉, 927년에 견훤이 고울부(高鬱府:현재 永川)를 습격한 뒤 신라 왕도로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갖은 만행과 약탈을 감행하게 되었다. 고려 태조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분개하여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조제(弔祭)하는 동시에 친히 정기(精騎) 5, 000을 거느리고 대구의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그러나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태조가 위급하게 되자, 이때 신숭겸은 대장(大將)이 되어 원보(元甫)·김락(金樂)과 같이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로써 태조는 간신히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태조는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으며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고, 그의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甫)를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들의 복을 빌게 하였다.994년(성종 13) 4월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태사 개국장절공(太師開國壯節公)으로 태묘(太廟)의 태조 사당에 배향되었다.

 

 

능길(能吉)/신길(申吉)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C)신숭겸(능산能山)의 동생으로 공산전투에서 신숭겸이 태조 대신 전사하자 태조가 애통해하며 신숭겸의 동생 능길과 신보(申甫)를 원윤으로 삼아 중용했다.

 

신보(申甫) 고려 육전(C)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B)신숭겸의 아들로 신숭겸이 공산전투에서 전사하자, 이를 애석히 여긴 태조가 신보를 원윤으로 삼고 평산에 녹읍을 주었다.

 

 

박술희(朴述熙/朴述希) 고려 육전(S)수전(C)정치(A)모략(C)명성(A)축성(C)?~945 면천박씨(沔川朴氏)의 시조. 시호 엄의(嚴毅). 대승(大丞) 득의(得宜)의 아들. 18세 때 궁예(弓裔)의 호위병이 되고, 뒤에 태조를 섬기면서 대광(大匡)이 되었다. 혜종을 태자로 책봉하는 데 공이 컸으며, 936년(태조 19) 보기(步騎) 1만으로 후백제를 쳐서 큰 공을 세웠다. 943년 태조가 죽을 때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부탁받고,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전수받았다. 혜종이 병으로 눕자 왕규(王規)가 역모를 품어 서로 사이가 나빠졌다. 신변보호를 위해 호위병 약 1백을 거느리다가, 즉위한 정종의 의심으로 갑곶(甲串: 江華)에 유배되었다. 뒤에 왕명을 사칭한 왕규에게 살해되었다. 태사삼중대광(太師三重大匡)에 추증, 혜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복지겸(卜智謙) 고려 육전(B)수전(C)정치(B)모략(A)명성(B)축성(B)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 때의 무장. 면천복씨(沔川卜氏)의 시조. 초명은 사귀(沙貴) 또는 사괴(砂#괴08).태봉의 마군장군(馬軍將軍)으로서 궁예(弓裔)가 민심을 잃자, 918년(태조 1)에 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홍유(洪儒)와 함께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고려를 개창하고 개국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그뒤 환선길(桓宣吉)이 난을 일으키자 태조에게 알려 진압하게 하였으며, 순군리(徇軍吏) 임춘길(林春吉)의 모반을 평정하는 등 공을 세웠다.994년(성종 13)에 태사(太師)에 추증되고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묘는 경기도 광주군에 있다. 시호는 무공(武恭)이다.

 

 

염상(廉湘) 고려 육전(A)수전(C)정치(C)모략(B)명성(A)축성(SS)궁예 때의 마군대장군으로 궁예의 횡포가 심해져 민심이 이탈되자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며, 태조가 마산성 통해진성 등 사방을 정복할 때 공이 커 고려 개국2등공신에 올랐다. 특히나 많은 성을 쌓았는데 고려사 절요에 따르면 안북부,안정진,영청현,마산,안수진,흥덕진,통해진등 수없이 많은 성을 쌓는 역활을 했다.또한 청주호족 경종등이 반란을 도모하다 발각되었을때, 태조가 경종이 매곡성주 공직의 매제임에 처벌하기를 꺼려하자 염상이 일벌백계하기를 청함으로 이에 처형하였다.왕규.박수문과 함께 태조의 임종시 유언을 받들었고 태사에 이르렀다.

 

 

전이갑(全以甲) 고려(정선호족) 육전(A)수전(C)정치(B)모략(B)명성(A)축성(B)( ?~927 ) 정선호족출신으로 자는 자경(子經), 호는 도원(桃源),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고려 개국 때 태사공(太師公)으로 공을 세워 개국공신에 책록되었다. 정선전씨의 중시조이며 정선군 전휘선(全諱宣)의 7세손 전우상(全禹相)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라면서부터는 용모가 빼어나고 지용이 절륜하여 문사에도 통달하였다고 한다. 동생 전의갑과 더불어 정선의 두영웅이라 불리었다. 태봉의 기랑(騎郞)일때 왕건을 만났는데 왕건이 그 임물됨을 알아보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세상의 영웅이라 삼수의 창생들이크게 구제하기를 기대한다고 하였다.그후 왕건을 왕으로 모시고 고려를 세우니 무우년(戊牛年)에 양주(楊洲)를 정벌하여 평정하고 경신년(庚申年)에 광주,청주를 정벌하여 적을 전멸하고, 병인년에 견훤을 상주에서 몰아 내고 그 땅을 개척하였으며 정묘년에 또 견훤을 나주에서 대파하여 진을 설치하고 돌아오니 그때에 태조(왕건)의 이름이 크게 떨치어 조정과 백성이 모두 그를 따르게 되었다.태조3년에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므로 신라의 사신 금율이 와서 도와줄 것을 간청하여 태조가 전이갑과 신숭겸에 명하여 구원케하니 견훤이 그 소문을 듣고 싸우지도 않고 퇴각하였다.이때 전이갑이 신숭겸에게 이르기를 견훤이 강폭해서 항상 변방의 우환꺼리가 되니 이 기회에 그를 전멸시킴이 좋겠다 하고 그를 끝까지 쫓아 추격하니 그의 군사는 거의 전멸하고 견훤만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쳤다.태조8년에 태사에 임명되었으며 태조10년에 다시 견훤과 달성 공산 오동나무 숲에서 격전하다가 드디어 패하여 궁지에 몰리었다.견훤이 포위하고 맹공을 가하므로 사태가 위급한지라 신숭겸이 태조와 옷을 바꾸어 입어 왕을 탈출시키고 전이갑은 동생 전의갑, 사촌동생 전락과 더불어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그후 태조가 크게 슬퍼하시며, 전이갑에게 정선군(旌善郡) 봉호와 시호를 충열(忠烈)이라 내리고 후손에게는 조세와 각종 국가의 부역(부역)을 면제해 주었다고 한다.

 

 

전의갑(全義甲) 고려(정선호족) 육전(A)수전(C)정치(C)모략(C)명성(A)축성(C)( ?~927 ) 정선호족 전우상(全禹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적부터 형 전이갑과 더불어 정선의 두영웅으로 불리었다. 형 전이갑(全以甲)과 더불어 공산전투에서 왕건을 호위하다 전사했다. 죽산군 봉호를 받고 시호는 충강(忠康)이다.

 

 

전락(全樂) 고려(정선호족)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927 ) 고려의 장수로 환성군 전섭의 16대손이며 천안 전씨의 시조이다. 전이갑의 사촌 동생으로 삼사 좌복야에 임명되어 공산전투에서 왕건을 호위하다 전사했다. 천안군 봉호를 받고 시호는 충달(忠達)이다.

 

 

호의(扈義)/호원보(扈元甫)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C)(?~927) 신평호씨(新平扈氏)의 시조이며, 고려 태조 1년 건국에 공을세워 개국공신에 책록되었고, 서기 927년(고려 태조 10년) 평장사(平章事)로서 공산(公山)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후백제 견훤군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태조 왕건을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역전고투(力戰苦鬪) 끝에 구출하고 전사(戰死)하여 태사(太師)로 추증되고 희개(禧開)라 시호(諡號)를 받았다. 배현경,신숭겸, 복지겸, 홍유, 유금필와 함께 6태사로 불리운다.

 

 

금강(黔剛)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고려의 문신, 한찬으로 태조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2등 공신에 책록되고, 태조원년 918년 내봉령(內奉令)으로 임명되었다. 내봉성은 황명을 시행하는 관청이다.

 

 

염장(閻萇) 고려 육전(C)수전(C)정치(C)모략(B)명성(C)축성(C)

태조 원년 한찬(韓粲) 수의형대령(守義刑臺令)직에 있었는데, 이흔암이 웅주를 버리고 황도로 올라오자, 잃은 것에 대한 처벌을 요청함과 더불어 그에게 반란의 뜻이 있음을 밀고하였다. 의형대는 나라의 법률관계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귀평(歸評) 고려 육전(D)수전(B)정치(B)모략(D)명성(D)축성(C)

태조원년 618년 6월 인사에서 한찬 도항사령(都航司令)을 제수받았다. 도항사는 수군의 함대를 건조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손형(孫逈)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D)축성(D)

본관은 밀양으로 시호는 문렬(文烈), 태조원년 618년 한찬으로 물장성령(物藏省令)을 제수받고 후에 대상(大相)을 지냈다. 물장성은 나라의 보물을 맡아 관리하는 관청이다.

 

 

진경(秦頸)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D)축성(D)

태조원년 618년 소판(蘇判)으로 6월 인사에서 내천부령(內泉部令)을 제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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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중익(魚重翼)/지중익(池重翼) 고려 육전(D)수전(B)정치(D)모략(D)명성(C)축성(D)충주 어씨(忠州魚氏)의 시조로 본성(本姓)이 충주지씨(池氏)였으나 태어날 때부터 체모(體貌)가 기이하고 겨드랑에 세개의 비늘(鱗)이 있어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어씨(魚氏)로 사성(賜姓)했다고 한다.

 

 

왕유(王裕) 고려(왕족) 육전(D)수전(C)정치(D)모략(D)명성(B)축성(D)강릉왕씨(江陵王氏)의 시조로 고려 태조의 왕자이다. 통일후 강릉에 식읍을 받고 강릉왕씨가 되었다.

 

 

양능길(梁能吉)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B)명성(C)축성(D)

고려 건국때의 무인이며 충주양씨의 시조이다. 타고난 품격이 영민하고 비범하였으며 육체적인 힘도 남보다 뛰어났으므로 장상이 될 재능이 있었다. 따라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에 태조를 도와 통합삼한대장군이 되어 국가의 대업을 이룩하여 그 공훈이 일세에 빛나므로 예성군에 봉하고 예성(충주)을 본관으로 삼게 하였다.

 

 

최영휴(崔英休)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C)

충주인으로 고려 건국시 삼한공신으로  삼한공신증태위(三韓功臣贈太尉)으로 추증되었다.

 

 

능식(能式) 고려 육전(B)수전(A)정치(C)모략(C)명성(B)축성(C)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장군.지방호족출신으로서 927년(태조 10) 해군장군(海軍將軍)으로 영창(英昌)과 함께 왕명을 받들어 후백제를 치기 위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강주(康州:지금의 晉州)의 전이산(轉伊山:지금의 南海)·노포(老浦)·평서산(平西山:지금의 南海)·돌산(突山:지금의 順天) 등 네 고을을 공격하여 많은 인원과 물자를 노획하였다.그러나 그의 가계가 후대의 토성(土姓)과 전혀 관련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국초의 왕권쟁탈과정에서 도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능식(能寔) 고려 육전(C)수전(B)정치(B)모략(C)명성(A)축성(D)생몰년 미상. 고려의 개국공신.918년 7월에 광평랑(廣平郎)에서 순군낭중(徇軍郎中)이 되었다.8월에 태조가 조서를 내리고 건국의 공훈에 따라 공신을 정할 때 2등에 녹훈되었다

 

 

능식(能植)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B)태조원년 당시 마군장군으로 청주에서 비밀리에 후백제와 서로 화호(和好)를 통하며 반역의 기미가 보인다는 도안군(道安郡=충청북도 괴산)의 보고를 받고 군을 이끌고 청주지역을 진무함으로써 청주세력이 쉽게 반역하지 못하게 하였다.

 

 

견권(堅權) 고려 육전(S)수전(B)정치(B)모략(B)명성(A)축성(C)

생몰년 미상. 고려의 장군. 왕건(王建)과 함께 궁예(弓裔)의 막하에서 활동하였으며, 918년 왕건을 도와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개국하는 데 공이 컸다. 이 공으로 태조 즉위 후의 논공행상에서 능식(能寔)·염상(廉相)·김낙(金樂) 등과 더불어 이등공신이 되었다.921년(태조 4)말갈의 별부(別部)인 달고적(達姑狄)171인이 등주(登州:지금의 安邊)를 거쳐 신라의 북변을 침입하자, 태조의 명으로 삭주(朔州)에 진주하여 기병을 이끌고 이들을 완전히 섬멸하였다.936년(태조 19)에 태조가 후백제를 칠 때, 대상(大相)으로서 견훤(甄萱)과 더불어 마군(馬軍)1만을 거느리고 본강(本綱)으로 참전, 크게 공을 세웠다.

 

권신(權愼) 고려 육전(C)수전(C)정치(A)모략(B)명성(A)축성(C)

생몰년 미상. 고려의 개국공신.918년 6월 고려 건국 후 8월에 견권(堅權)·능식(能寔)·염상(廉湘)·김락(金樂)·마난(麻煖)과 함께 이등공신으로 책록되어 금기·은기·비단 등을 상으로 받았다.

 

 

김락(金樂) 고려 육전(A)수전(C)정치(D)모략(D)명성(A)축성(C)?∼927(태조 10). 고려의 개국공신.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서경(평양) 속촌(屬村)인 중화현(中和縣) 출생으로 918년(태조 1) 고려가 건국되자 이등공신이 되었다.927년 원보(元甫) 재충(在忠)과 더불어 대량성(大良城:지금의 陜川)을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후백제의 장군 추허조(鄒許祖) 등 30여인을 사로잡았다. 같은해에 견훤(甄萱)의 군사가 신라를 쳐서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가 군사를 이끌고 견훤의 군사와 공산(公山:지금의 大邱)에서 크게 싸울 때 대장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위급해진 태조를 구하고 전사하였다.태조는 지묘사(智妙寺)를 세워 그의 명복을 빌었으며, 아우 철(鐵)을 원윤(元尹)으로 삼았다.1120년 예종은 그와 신숭겸을 추도하여 향가 〈도이장가 悼二將歌〉를 지었다.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김철(金鐵)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D)고려의 개국공신 김락의 동생으로 김락이 공산전투에서 전사하자 태조가 애통해하여 김철을 원윤(元尹)으로 삼았다. 일리천 전투에

벼슬은 대상으로 홍유, 수향(守鄕),왕순(王順),준량(俊良)과 함께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인솔하여 우익(右翼)을 맡았다.

 

 

김철(金哲) 고려 육전(C)수전(B)정치(D)모략(D)명성(C)축성(D)태조의 삼한공신중 한명이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김락과 같은 서경출신이라 하였으며, 전북대 박천식 교수의 논문에는 순천인이라 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 김락의 동생 김철(金鐵)과 김철(金哲)을 혼동했는지는 알수없다.

 

 

수향(守鄕) 고려 육전(C)수전(D)정치(B)모략(B)명성(B)축성(D)고려의 대상으로 일리천 전투시에 김철,홍유등과 우익 3만을 맡아 참전했다.

 

 

왕순(王順)/왕삼순(王三順)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B)축성(D)고려의 왕족이며, 보천군(褓天軍) 대장군 겸 원윤(元尹)으로 일리천 전투에서 수향,왕순,준량등과 우익 3만을 맡았다.

 

 

길강충(吉康忠)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고려의 6품 정조(正朝)로 일리천 전투시에 원윤 삼순(三順), 준량(俊良)의 휘하로 영유(英儒),흔계(昕繼)와 보군 1만을 이끌고 우익이 되어 참전했다.

 

영유(英儒)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D)축성(D)고려의 6품 정조(正朝)로 일리천 전투시에 우군 원윤 삼순(三順), 준량(俊良)의 휘하로 길강충(吉康忠),흔계(昕繼)등과 보군 1만을 이끌고 참전했다.

 

 

흔계(昕繼)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고려의 6품 정조(正朝)로 일리천 전투시에 길강충(吉康忠),영유(英儒)등과 보군 1만을 이끌고 우군으로 참전했다.

 

 

연주(連珠)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A)축성(C)생몰년 미상. 전주연씨(全州連氏)의 시조. 고려의 개국공신(開國功臣).918년(태조 1) 8월 고려를 건국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을 선정하여 포상할 때 견권(堅權)·능식(能寔)·권신(權愼)·염상(廉湘)·김락(金樂)·마난(麻煖)과 함께 이등공신이 되어 금·은 그릇과 비단을 받았으며, 936년에는 후백제와의 마지막 결전이었던 일리천(一利川:경상북도 선산 부근) 싸움에 원보(元甫)로서 대상(大相) 김철(金鐵)·홍유(洪儒)·박수경(朴守卿), 원윤(元尹) 훤량(萱良)과 함께 마군(馬軍) 1만명을 거느리고 3군(軍) 중 우군(右軍)에 소속되어 참전하였다.

 

 

구진(具鎭) 고려 육전(C)수전(C)정치(A)모략(C)명성(A)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의 관인. 시중(侍中)을 지냈으며, 918년(태조 1) 나주도대행대시중(羅州道大行臺侍中)에 임명되었으나 전왕(前王) 궁예(弓裔)에게 오랜 노고가 있기 때문에 이를 사양하였다. 이에 유권열(柳權說)이 징계해야 함을 주장하고, 또 태조가 노하므로 이를 두려워하여 부득이 취임하였다.

 

 

구족달(仇足達) 고려 육전(D)수전(D)정치(C)모략(C)명성(A)축성(D)

고려 태조 때의 서가(書家). 특히 구법(歐法)의 대가이다. 벼슬은 사찬(沙粲)·흥문감경(興文監卿)을 지냈다. 충주(忠州) 정토사(淨土寺)의 법경대사자등탑비(法鏡大師慈燈塔碑)와 강릉 보현사(普賢寺)의 낭원대사오진탑비(朗圓大師悟眞塔碑)는 그의 필적이며, 후자에는 북조(北朝)의 서풍이 보인다. 보현사는 낭원대사를 기리기 위해 태조 23년(940)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최언위(崔彦僞)가 짓고 글은 구법의 대가인 구족달이 썼다. 

 

유권열(劉權說) 고려 육전(D)수전(C)정치(B)모략(B)명성(B)축성(D)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 때의 문신.918년(태조 1) 구진(具鎭)이 나주도대행대시중(羅州道大行臺侍中)에 임명되었는데 부임하지 않으려 하자 왕이 불쾌히 여겨 묻기를 “예전에 내가 모든 험난한 일을 겪으면서도 일찍이 수고로웠다는 말을 아니한 것은 준엄한 왕위(王威)를 두려워함이었는데, 지금 구진이 굳이 사양하여 가지 않으니 옳다고 하겠는가.” 하므로, 시랑(侍郎)으로서 “상으로써 선을 권장하고 벌로써 악을 징계하는 것이오니, 마땅히 엄한 형벌을 가하여 여러 신하를 경계하소서.”라고 대답하여 마침내 구진으로 하여금 부임하게 하였다.922년 명주장군(溟州將軍) 김순식(金順式)이 복속하지 않으므로 왕이 근심하자 “아버지가 자식을 타이르고 형이 동생을 훈계함은 천리(天理)입니다. 김순식의 아비 허월(許越)은 지금 중이 되어 내원(內院)에 있사오니 그를 보내어 타이르도록 하소서.”라고 진언하여 마침내 김순식을 귀부하게 하였다.

 

 

왕식렴(王式廉) 고려(왕족) 육전(B)수전(C)정치(A)모략(S)명성(A)축성(SS)?∼949(정종 4). 고려 초기의 공신. 개성왕씨(開城王氏). 아버지는 삼중대광(三重大匡) 평달(平達)이며, 태조의 종제이다.처음에 군부서사(軍部書史)가 된 뒤에 여러 벼슬을 거쳤다.918년(태조 1)에 태조가 황폐한 평양에 사람들을 이주시켜 대도호부로 삼고 담당관원을 파견할 때 그 책임자로 등용되어 평양을 지키면서 안수진(安水鎭)·흥덕진(興德鎭) 등에 성을 쌓아, 그 공으로 여러 차례 승진하여 좌승(佐丞)이 되었다.태조가 죽고 혜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서경을 기반으로 한 막강한 실력자가 되어 혜종의 이복동생 요(堯:뒤의 定宗)와 제휴하였다.945년(혜종 2)에 왕규(王規)의 혜종 암살음모 등 중앙의 정정(政情)이 어수선해지자 서경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수도에 들어가 왕규와 그 무리 300여명을 제거하여 정종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으며, 광국익찬공신(匡國翊贊功臣)으로 대승(大丞)이 되어 왕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호기위 태사 삼중대광 개국공(虎騎尉太師三重大匡開國公)으로 추증, 정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위정(威靜)이다.

 

열평(列評) 고려 육전(C)수전(D)정치(A)모략(B)명성(B)축성(A)생몰년 미상. 고려시대의 관리. 태조의 역성혁명에 공을 세워 개국 2등공신에 책록되었고, 918년(태조 1) 병부경(兵部卿)으로 있다가 순필(荀弼)이 병으로 면직되자 광평시랑(廣評侍郎)이 되었다.이어 황폐해진 평양(平壞)에 황주(黃州)·봉주(鳳州)·해주(海州)·백주(白州)·염주(鹽州) 등지의 백성을 이사(移徙)시켜 대도호부(大都護府)를 설치할 때, 태조의 당제(堂弟)인 왕식렴(王式廉)과 함께 가서 다스렸다

 

 

애선(哀宣)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D)명성(C)축성(B)?∼924(태조 7). 고려의 무신.919년(태조 2) 오산성(烏山城)을 고쳐 예산현(禮山縣)으로 삼을 때 대상(大相)으로서 홍유(洪儒)와 함께 유민 500여호를 안집(安集)시켰다.924년 견훤(甄萱)이 그의 아들 수미강(須彌康)·양검(良劒) 등으로 조물군(曹物郡:지금의 경상북도 북부)을 공격해오자 장군으로서 왕충(王忠)과 함께 구하러 가서 싸우다 죽었다

 

 

혜종(惠宗)/왕무(王武) 고려(왕족) 육전(S)수전(B)정치(B)모략(C)명성(SS)축성(B)914(신덕왕 1)∼945(혜종 2). 고려 제2대 왕. 재위 943∼945. 본관은 開城(개성). 이름은 무(武). 자는 승건(承乾).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吳氏)이다.젊어서부터 도량이 넓고 지용(智勇)이 뛰어났으며, 936년(태조 19) 태조가 후백제를 칠 때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921년에 박술희(朴述熙)를 후견인으로 하여 태자에 책봉되고, 943년 태조가 죽자 왕위에 올랐으나 왕위를 노리는 강력한 적대세력 때문에 고전하였다.특히, 강력한 호족출신이며 왕실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쥐고 있던 왕규(王規)의 노골적인 암살음모를 가까스로 모면한 뒤에는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정치에 뜻을 두지 못하였다.한편, 그의 이복동생인 요(堯:뒤의 定宗)는 서경(西京:지금의 平壤)의 왕식렴(王式廉)세력과 결탁하여 은근히 왕위를 엿보고 있었으므로 혜종대의 정치정세는 더욱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그가 병석에 눕게 되자 왕위쟁탈 음모는 더욱 노골화되어, 서경의 왕식렴은 군대를 거느리고 수도에 들어와 왕규와 그 무리 300여명을 죽였다. 이무렵 혜종의 후견세력인 박술희도 갑곶(甲串:江華)에 유배된 뒤 곧이어 살해되었는데, 요 일파에 의하여 살해된 것으로 추측된다.혜종이 죽은 뒤에 요가 새 왕이 되었는데, 그 절차가 혜종의 유언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군신(群臣)의 추대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어 혜종의 죽은 원인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혜종 때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불안과 갈등은 강력한 호족세력과 미약한 왕권관계에서 빚어진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역사적 해석에는 여러 견해가 나와 있다.능은 순릉(順陵)이며, 시호는 의공(義恭)이다.

 

 

왕충(王忠)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B)명성(B)축성(C)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장군.924년(태조 7) 7월 후백제의 견훤이 아들 수미강(須彌康)과 양검(良劍) 등을 보내어 조물군(曹物郡:안동 부근)을 공격하게 하였을 때 장군 애선(哀宣)과 함께 왕의 명령을 받고 나아가 후백제군을 물리쳤으며, 928년에는 견훤이 장군 관흔(官昕)을 시켜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자, 명지성(命旨城:경기도 포천 부근)의 원보(元甫)로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물리쳤다.

 

 

영창(英昌) 고려 육전(B)수전(A)정치(D)모략(C)명성(B)축성(C)생몰년 미상. 고려의 장군.927년(태조 10) 해군장군(海軍將軍)으로 장군 능식(能式)과 함께 후백제 강주(康州:晋州) 관하의 전이산(轉伊山)·노포(老浦)·평서천(平西川)·돌산(突山) 등 네 고을을 공격하여 항복시키고, 이어 대야성(大耶城:陜川)을 정복하였다.

 

 

공훤(公萱) 고려 육전(B)수전(C)정치(B)모략(B)명성(A)축성(B)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장군.927년(태조 10)신라가 후백제의 공격으로 위급하여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자 시중(侍中)으로 군사 1만여인을 거느리고 출전하였다.그리고 929년 견훤(甄萱)이 고창군(古昌郡:지금의 安東)을 포위하자 대상으로서 태조 및 홍유(洪儒)·유금필(庾黔弼) 등과 함께 이를 구원하였고, 936년 태조가 삼군(三軍)으로 후백제를 공격할 때 대상으로 대장군이 되어 원윤 능필(能弼), 장군 왕함윤(王含允) 등과 함께 삼군의 원병을 구성하여 일리천에서 신검(神劒)을 격파하였다. 이 전투로 후백제는 멸망하였다.

 

강훤(康萱) 기주(경북 영주)호족

기주(基州, 현재의 경북 영주 풍기) 호족으로, 909년 대경대사 여엄(大鏡大師 麗嚴)이 귀국하여 소백산에 은거하자 고려 태조에게 이를 알렸다. 태조는 여엄을 지평(砥平:양평군) 보리사(菩提寺)의 주지로 임명하였다. 강훤은 기주 제군사(諸軍事) 상국(上國)에 임명되었다.

 

hihllo7(견훤)님께서 문의하신 강공훤(康公萱)과 공훤(公萱)중 강공훤은 제가 조사한 900여명 열전엔 강훤(康萱)으로 조사되었더군요. 일단 기주는 경북영주 풍기지역을 말하며, 신라말에는 기목진(基木鎭)이라 불리다가 940년 통일후 기주로 이름이 바뀌었더군요. 하여 강훤이 제수받은 기주 제군사 상국은 통일후 제수받은것으로 보입니다.제군사(諸軍事)라는 것이 중앙에서 파견된 고위 관리가 지방에 주둔하면서 유사시 인근 호족들의 군사들을 끌어모아 그군을 통솔하는 자리입니다.918년 고려가 세워졌을 당시에도 시중 김행도가 충청도 호족들의 배반을 토벌하기 위해 지아주제군사(知牙州諸軍事)가 되어 아주(牙州 현 아산)에 내려간적도 있었지요. 상국(上國)이란 나라의 재상을 뜻하구요,. 즉, 기주 제군사 상국이란 말은 기주 인근의 지방호족들의 군사들을 총괄 지휘하는, 중앙에서 임명된 재상이란 뜻이지요.

한편 공훤이 사적에 나온 바로는 927년에 시중(侍中), 929년에는 대상(大相), 935년에는 대상 겸 대장군으로, 특히나 936년 일리천 전투에서는 지방호족 연합군 1만5천을 지휘하기도 하였구요.

하여 제가 추측한바로는 일단 공훤과 강공훤, 강훤은 동일인물로 보이며 여엄이 귀국한해가 909년이고, 귀국장소가 나주였습니다. 당시에 나주를 수비하던 마진국 수군장은 바로 왕건이였지요. 공훤이 경북 영주에 있었다면 이런 사실을 왕건에게 알릴 이유가 없을듯 싶습니다. 하여 공훤 또한 이당시에는 왕건 휘하에 소속되어 나주에 있었던 듯 싶습니다.

후에 공훤은 후삼국 말기에 고려의 재상에 올랐으며 여러 전투에 참전하기도 하지요. 게다가 일리천 전투 직전에는 호족연합군을 꾸리기 위해 경북 영주에 제군사로 파견된듯 싶구요. 통일후에도 적어도 940년까지는 영주에 계속 주둔했던듯 싶습니다.^^

강훤이 고려, 특히 왕건의 휘하에 있기전에도 경북 영주 풍기의 지방호족 출신이였는지는 정확하진 않지만,

제가 추측키로는 패서호족 세력이였으며, 궁예의 왕후 강씨의 집안이고,

왕건 조부 작제건의 외가이기도 한 신주강씨가 아닐까 추측합니다.

결론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입니다.

 

 

 

색상(索湘)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C)?∼927(태조 10). 고려의 장수. 관등은 정조(正朝)였으며, 군대의 지위는 도두(都頭: 중국에서 쓰이던 고급장교의 칭호로 일명 都將이라고도 하였다.)였는데, 927년 10월 후백제의 왕 견훤(甄萱)이 부하 장수를 보내어 벽진군(碧珍郡:지금의 경상북도 성주)을 침략하고 대목군(大木郡)과 소목군(小木郡)의 농작물을 베어버릴 뿐만 아니라, 이해 11월 다시 벽진군의 도곡(稻穀)을 불사르자 색상은 고려의 군대를 이끌고 이에 대항하다가 전사하였다.이 전투가 있은 직후 견훤은 고려 태조에게 국서(國書)를 보내어 색상을 성산전투(星山戰鬪)에서 물리쳐 그의 손을 묶었노라고 자랑한 바 있다.

 

 

김상(金相)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B)축성(C)?∼928(태조 11). 고려 태조 때의 충신.928년 강주(康州:지금의 晉州)를 구하러 가다가 초팔성(草八城:지금의 합천군 초계면)의 성주 흥종(興宗)에게 크게 패하여 전사하였다.

 

 

직량(直良) 고려 육전(C)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고려의 정조(正朝) 벼슬을 하다 태조 11년 928년 강주를 구원하기 위해 출진한 원윤 김상(金相)의 휘하에서 군사 3천을 이끌고 출진했으나 초팔성의 성주 흥종에게 크게 패하였다.

 

 

홍경(洪慶) 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승려.928년(태조 11)에 후당(後唐)으로부터 대장경(大藏經) 1부를 얻어 배에 싣고 예성강(禮成江) 하구에 이르자 태조가 친히 마중 나와 환영하고, 대장경은 제석원(帝釋院)에 모셨다고 한다.《삼국유사》에는 928년에 묵화상(默和尙)이 당나라에 가서 대장경을 싣고 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 둘이 같은 연대이고 같은 곳에서 대장경을 가져온 것으로 되어있므로 홍경과 묵화상을 동일 인물로 보고 있다.

 

 

능선(能宣) 고려 육전(C)수전(B)정치(C)모략(C)명성(D)축성(D)생몰년 미상. 고려시대의 관인.935년(태조 18) 6월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나주에서 고려에 투항을 요청하자, 충질(忠質) 등과 함께 군선 40여척을 거느리고 견훤과 그의 가족들을 맞아들였다.

 

충질(忠質) 고려 육전(C)수전(B)정치(C)모략(C)명성(D)축성(D)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 때의 관리.935년(태조 18) 후백제왕 견훤(甄萱)이 왕위계승의 내분으로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었다가 고려로 탈출할 때, 태조의 명을 받아 소원보(小元甫) 향예(香乂)·오염(吳琰) 등과 해로로 견훤을 맞아 고려의 수도인 개경까지 안내하였다. 

 

 

향예(香乂) 고려 육전(C)수전(B)정치(C)모략(C)명성(D)축성(D)

935년 당시 원보(元甫)직에 있었는데, 그해 6월에 수로로 견훤이 고려로 귀부를 청하자 태조의 명을 받아 유금필, 왕만세, 오담, 능선, 충질등을 보내어 바닷길로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오염(吳琰)/오담(吳淡) 고려 육전(C)수전(B)정치(B)모략(C)명성(D)축성(D)935년 당시 원보(元甫)직에 있었는데, 그해 6월에 수로로 견훤이 고려로 귀부를 청하자 태조의 명을 받아 유금필, 왕만세, 향예, 능선, 충질등이 군선 40여척을 거느리고 견훤과 그의 가족들을 맞아들였다.

 

 

낙랑공주(樂浪公主)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C)명성(A)축성(D)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맏딸. 본관은 개성(開城). 신라 경순왕의 처이다.일명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이라고도 하며, 혼인 전에는 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라 불렸다. 어머니는 충주지방의 호족 긍달(兢達)의 딸인 신명태후 유씨(神明太后劉氏)이다.《삼국사기》와 《고려사》에 의하면 935년(태조 18) 11월에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金傅)가 백관을 이끌고 고려에 항복하자, 태조는 자신의 맏딸인 낙랑공주를 경순왕의 아내로 삼게 했다고 한다.태조에게는 9인의 공주가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낙랑공주와 성무부인 박씨(聖茂夫人朴氏)소생의 공주를 김부와 혼인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종실과 혼인시켰다.고려왕실에서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주가 타성(他姓)과 혼인한 예는 극히 드물었는데, 김부에게만은 낙랑공주 등 2인의 공주를 혼인시켰다.이는 신라를 들어 귀부(歸附)한 김부에 대한 감사의 뜻과 태조 자신이 신라왕실에서 신성태후(神成太后)를 맞아들임으로써, 이중의 혼인관계를 통하여 고려왕실의 신분을 신라왕실과 대등하게 상승시켜 통일된 한반도를 용이하게 지배할 수 있는 권위를 보장받기 위한 의도가 들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준량(俊良)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D)생몰년 미상.936년(태조 19) 9월 왕건(王建)이 견훤(甄萱)의 요구를 받아들여 일리천(一利川)에서 친히 후백제 신검(神劍)의 군사를 칠 때, 원윤(元尹) 삼순(三順) 등과 보군(步軍) 1만을 거느리고 우강(右綱:三軍, 곧 左綱·右綱·中軍의 하나)이 되어 후백제군을 대파하였다.

 

 

김극종(金克宗)  고려 육전(B)수전(C)정치(D)모략(D)명성(C)축성(D)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무신.936년(태조 19)에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후백제와 마지막 결전을 할 때 간천대장군(杆天大將軍)이 되어 원보(元甫) 조간(助杆) 등과 함께 보군(步軍) 1천인을 거느리고 중군(中軍)으로 참가하여 일선군(一善郡:지금의 경상북도 선산군)에서 후백제의 신검군(神劒軍)을 크게 무찔러 공을 세웠다.

 

 

김길(金吉) 고려 육전(C)수전(B)정치(C)모략(C)명성(C)축성(C)신라왕위 쟁탈전에서 밀려나 광산(현 전남광주)으로 은거한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시조 김흥광(신무왕의 3왕자)의 손자로 후백제 성립의 혼란기때 금산군(錦山郡/나주)으로 피신했는데, 왕건의 나주 공략시 공을 세웠으며, 금산(나주)의 왕자대(王子臺)에서 백제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후 왕건을 따라 역성혁명에 참여하였으며, 태조(太祖) 17년(934)에는 후당(後唐)에 사신(使臣)으로서 파견되기도 하였다. 삼한통일후 사공(司空)·삼중대광(三重大匡)·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임명되었다.

 

왕희순(王希順)  고려(왕족)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왕족으로 삼한통일후 삼한공신 2등에 책봉되었다. 그후 세계는 알수 없다.

 

 

최언위(崔彦僞) 고려 육전(D)수전(D)정치(S)모략(S)명성(A)축성(C)868(경문왕 8)∼944(혜종 1). 신라말 고려초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신지(愼之)·인연(仁#연24). 치원(致遠)의 종제이며, 문하평장사 항(沆)의 할아버지이다.885년(헌강왕 11) 18세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예부시랑 설정규(薛廷珪) 아래에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42세인 909년(효공왕 13)에 귀국하여 집사성시랑 서서원학사(執事省侍郎瑞書院學士)를 제수받았다.935년(태조 18)에 신라가 망하자 고려에 가서 태자사부(太子師傅)가 되고, 문한(文翰)을 위임받았으며, 벼슬이 대상 원봉대학사 한림원령 평장사(大相元鳳大學士翰林院令平章事)에 이르렀다.본래 성품이 너그럽고 글을 잘하여 태자사부로 있을 때 궁원(宮院)의 액호(額號)는 모두 그가 찬정(撰定)한 것이었으며 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최치원·최승우(崔承祐)와 함께 일대삼최(一代三崔)라 한 것으로도 그의 문명은 짐작되는 바이다.또한, 서법(書法)도 남달리 아름다워 성주사(聖住寺)의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朗慧和尙白月#보12光塔碑〉와 같은 비문을 쓰기도 하였으며, 〈낭원대사오진탑비명 朗圓大師悟眞塔碑銘〉·〈법경대사자등지탑비명 法鏡大師慈燈之塔碑銘〉 등을 찬하기도 하였다.아들로는 광윤(光胤)·행귀(行歸)·광원(光遠)·행종(行宗) 등이 있었는데, 광윤은 진(晋)에 유학을 가던 중 거란에게 붙잡혀갔으나 재주를 인정받아 오히려 관직에 등용되어 구성(龜城)에서 근무하던 중, 거란군이 고려를 침범할 것을 알고 고려에 서신으로 알려와 광군(光軍) 30만을 설치하게 하였다. 행귀도 오월국(吳越國)에 유학하여 비서랑(#비58書郎)이 되었다.정광(政匡)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영(文英)이다.

 

 

능윤(能允) 고려 육전(D)수전(D)정치(C)모략(C)명성(D)축성(D)태조원년 918년 8품벼슬인 일길찬(一吉粲)이었는데, 자기집의 동산에서 상서로운 지초(芝草)한 포기를 바쳤다. 지초는 영지를 말하는데 아홉줄기에 세줄기는 아주 빼어났다. 태조가 기뻐하며 상으로 내창(內倉)의 곡식을 내려 주었다.

 

 

순필(荀弼)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B)축성(D)918년 7월 계사일에 광평시랑(廣評侍郞)이었는데 병을 얻어 면직(免職)되었다.

 

 

진경(珍景) 고려 육전(C)수전(C)정치(D)모략(D)명성(D)축성(D)928년 5월에 강주(康州)의 원보(元甫)직에 있었는데 고자군(古子郡=고성군固城郡)으로 양곡을 운반하는데, 견훤이 몰래 군사를 보내어 강주(康州)를 습격하니, 급히 돌아와 싸웠으나, 패하여 죽은 자가 3백여 명이었고, 장군 유문(有文)은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유문(有文)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C)강주성주로 928년 원보(元甫) 진경(珍景)이 고자군으로 양곡을 운반하러간 사이 견훤군이 갑자기 군을 이끌고 성을 공격함으로 백제에 항복하였다.

 

 

진경(進慶)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D)928년 졸하였때 이찬(伊餐)이었는데 대광(大匡)을 증직(贈職)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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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秦靖)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태봉국 파진찬 벼슬을 지냈는데 태조가 혁명을 이을킨 태조원년 개각때 진각성령(珍閣省令)에 제수되었다. 진각성(珍閣省)은 국가 문서와 도서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진원(陳原)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태봉국 소판(蘇判) 벼슬을 지냈는데 태조가 혁명을 이을킨 태조원년 개각때 창부령(倉部令)에 제수되었다. 창부(倉部)은 국가 재정에 관한 일을 하는 관청이다.

 

 

마란(麻煖)  고려 육전(B)수전(C)정치(B)모략(B)명성(A)축성(D)영평마씨의 시조로 태조원년 918년 견권(堅權),능식(能寔),권신(權愼),염상(廉湘),김락(金樂),연주(連珠)와 더불어 개국 2등공신으로 책봉되었다.

 

 

훤식(萱寔)  고려 육전(C)수전(C)정치(B)모략(C)명성(C)축성(D)918년 9월에 병부경(兵部卿)으로 재직하다 내봉경(內奉卿)으로 자리를 옮겼다.

 

 

유문률(楡問律)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918년 9월에 광평낭중(廣評郎中)을 제수받았는데 그달에 상주 아자개가 고려로 귀부할 뜻을 밝히자, 아자개를 맞이할 의식을 갖추기 위해서 구정(毬庭)에서 연습을 하던중 직성관(直省官) 주선길(朱瑄吉)과 자리의 높고 낮음을 다투다 태조가 이를 듣고  “사양은 예의 으뜸이 되고 공경은 곧 덕의 근본인 것인데, 지금 손님을 예절로 맞이하려고 장차 그 의식을 보려 하는데 문률과 선길이 위차를 다투니 어찌 공경하고 근신하는 것인가. 마땅히 변방으로 귀양보내어서 그 죄를 드러내라” 하여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주선길(朱瑄吉)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918년 9월 직성관(直省官)으로 상주 아자개를 맞기 위한 행사 연습중 광평낭중 유문률과 위차를 놓고 다퉈 대노한 태조에 의해 변경으로 유배되었다.

 

 

김악(金岳) 고려 육전(D)수전(D)정치(A)모략(A)명성(B)축성(D)태조7년 924년 조산대부창부시랑(朝散大夫倉部侍郎)직에 있었는데 태조의 명을 받아 후당으로 사신이 되어 갔다. 후당황제 장종(莊宗)이 김악에게 조의대부시위위경(朝議大夫試衛尉卿)을 제수하였다. 943년에는 원봉성학사(元鳳省學士)로서 태조가 죽을 때 신덕전(神德殿)에 불려가 태조의 유조(遺詔)를 기초(起草)하였으며, 얼마 뒤 상정전(詳政殿)에서 국상(國喪)이 발표되자 유조를 선포하기도 하였다.

또한 3대 황제 광종의 황권강화정책을 지지하여 손소(孫紹), 최행귀(崔行歸)와 더불어 광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965년(광종 16)에 건립된 문경 봉암사(鳳巖寺)의〈정진대사원오탑비 靜眞大師圓悟塔碑〉에 의하면, 광종 4년(953)에 관등은 태상(太相), 관직은 수병부령(守兵部令)으로서 광종의 조서를 받들어 윤제(綸制)를 선포하기도 하였다.

876년에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했던 김악(金渥)과는 연대상으로 다른인물이며, 백제의 김악(金渥)과도 역시 다른 인물이다.

백제의 김악이 고려에 사로잡힌 때는 태조 13년인데, 삼국사절요에 보면 태조 7년 고려의 사신으로 후당에 간것으로 되어 있다.

 

정악(廷#악17) 고려 육전(D)수전(D)정치(A)모략(C)명성(B)축성(D)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학자.930년(태조 13) 12월 태조가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학교를 설치할 때 서학박사(書學博士)에 임명되고, 학원(學院)을 창건하여 6부(部)의 생도들을 모아 가르쳤다.그뒤 학문을 일으킨 공로가 인정되었고 의과(醫科)·복과(卜科)가 증설되게 하였으며, 곡식 100석을 하사받아 이를 학보(學寶)로 삼아 학문진흥에 전력하였다.

 

 

왕신(王信)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B)축성(D)?∼926(태조 9). 고려 초기의 왕족. 개성왕씨(開城王氏).송악호족 왕평달의 아들이며, 왕식렴,왕육과는 형제지간이다. 925년(태조 8) 10월 왕건(王建)이 후백제 견훤(甄萱)과의 조물성(曹物城)전투 뒤에 화의를 맺을 때 왕건의 당제(堂弟)로서 후백제에 인질로 보내졌다. 다음해에 견훤의 조카 진호(眞虎)가 고려에서 죽자 견훤이 옥에 가두었다가 죽이고 고려에 쳐들어왔다. 927년 1월 시신이 고려에 보내지자 그의 동생 육(育)이 맞아들였다. 태조는 930년 원당(願堂)으로 안화선원(安和禪院:뒤의 安和寺)을 창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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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육(王育) 고려 육전(D)수전(D)정치(C)모략(D)명성(B)축성(D)송악호족 왕평달의 아들이며, 왕식렴,왕육과는 형제지간이다. 태조 10년 927년 1월 백제에서 참형당한 형 왕신의 시신을 맞이했으며,

광종때에는 정광(正匡)에 임명되었다. 황족으로써 대우를 받아 저택이 크고 아름다웠는데, 광종 12년 961년 4월에는 송악에 큰 홍수가 생겨 궁궐이 피해를 당하자, 궁궐을 수영(修營=고치는)하는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광종은 임시로 왕육(王育)의 집을 임시 궁궐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행훈(行訓)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태조3년 920년 1월 강주호족 윤웅이 고려에 항복을 청해오자, 태조의 명에 의해 윤웅의 아들 윤일강을 경(卿) 행훈(行訓)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춘양(春讓) 고려 육전(C)수전(C)정치(C)모략(B)명성(C)축성(D)태조3년 920년 정월 강주호족 윤웅이 고려에 항복을 청해오자, 춘양은 낭중(郎中)벼슬에 있었는데 태조의 명에 의해 강주로 내려가 윤웅을 만나 위유(慰諭)하였다.

 

 

찬행(撰行) 고려 육전(C)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태조4년 920년 9월에 낭중(郎中)직에 있었는데 왕건의 명에 의해 변방 고을을 순시(巡視)하고 백성을 위안하고 무마(撫摩)하였다.

 

이언(利言) 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고려 오관산(五冠山 경기장단)의 중으로 920년 10월에 서경(평양)에서 돌아온 왕건이 이언을 왕사로 삼았다.

 

함필(含弼) 고려 육전(C)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고려의 경(卿)으로 대신이었다. 경은 2품이상의 관리를 뜻한다. 922년에 진보(眞寶청송)성주 홍술(洪術)이 귀부를 원하므로 원윤(元尹) 왕유(王儒)와 함께 위유(慰諭)하였다.

 

재충(在忠)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B)명성(B)축성(D)고려의 원보로 태조 10년 7월에 태조의 명을 받아 김락과 더불어 군을 이끌고 백제와 신라의 요충지인 대량성(대야성)을 쳐서 장군 추허조(鄒許祖)등 30여 명을 사로잡고 그 성(城)을 부수고 돌아왔다.

 

 

손행(孫幸) 고려 육전(C)수전(D)정치(B)모략(B)명성(B)축성(D)고려의 대상(大相)으로 태조10년 9월 백제가 고울부를 점령하고 경주에 다다르자, 신라는 급히 연식(蓮式)을 파견하여 원군을 요청하였다.태조이 명을 받고 손행은 시중 공훤(公萱)과 더불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갔으나 때가 늦어 신라 황도는 이미 점령된 후였다. 이에 태조가 급히 기병 5천을 더해 원군으로 내려오자, 공산에 합류하여 견훤과 대결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능강(能康)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A)고려의 경(卿=2품이상 대신)으로 태조 11년 2월에 대상(大相) 염상(廉相)과 함께 안북부(安北府)의 성을 쌓았다.

 

 

박권(朴權)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C)고려의 원윤(元尹)으로 태조 11년 안북부에 새로 축성한 성에 개정(開定) 군사 7백명을 이끌고 부임했다.

 

 

양지(楊志)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C)고려의 장군으로 태조11년 11월에 오어곡성(烏於谷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견훤이 가려뽑은 강병을 몰고 쳐들어오자 치열하게 교전하여 고려군 1천명이 전사하니 장군 명식과 부장넷과 함께 백제에 항복하였다. 이례적으로 태조는 크게 분노하여 그들의 아내와 자식을 여러 군사 앞에서 조리돌리고, 저자에서 목을 베어 죽였다.

 

 

명식(明式)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고려의 장군으로 태조11년 11월에 오어곡성(烏於谷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견훤이 가려뽑은 강병을 몰고 쳐들어오자 치열하게 교전하여 고려군 1천명이 전사하니 장군 양식 및 부장넷과 함께 백제에 항복하였다. 이례적으로 태조는 크게 분노하여 그들의 아내와 자식을 여러 군사 앞에서 조리돌리고, 저자에서 목을 베어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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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인(忠仁)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B)고려의 원윤(元尹)으로 태조11년 태조가 북계(北界)에 순행하여 진국성(鎭國城 平南 肅川)을 옮겨서 쌓고, 이름을 「통덕진」(通德鎭)이라 고친후 진두(鎭頭=진의 우두머리)로 부임했다.

 

언수고(彦守考)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B)고려의 원윤(元尹)으로 태조12년 염상(廉相)이 쌓은 안정진(安定鎭 平南 順安) 성에 성주로 부임하여 북방의 변경을 지켰다.

 

장필(長弼) 고려 육전(C)수전(C)정치(B)모략(B)명성(B)축성(D)태조 12년 6월에 원보(元甫)에서 대상(大相)으로 승진했다.

 

 

흔평(昕平)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B)고려의 원윤(元尹)으로 태조12년 9월에 왕식렴이 쌓은 안수진(安水鎭)의 진두로 부임했다.

 

아차성(阿次城)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B)고려의 원윤(元尹)으로 태조12년 9월에 새로 쌓은 흥덕진(興德鎭)의 진두로 부임했다.

 

 

제선(제宣)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B)고려의 정조(正朝)로 태조 10년 8월에 새로 쌓은 배산성(拜山城)의 수비를 명받고 군사 2대(隊)를 거느리고 지켰다.

 

 

공선(公선)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B)명성(B)축성(C)고려의 대상(大相)으로 태조 12년 12월 백제군이 고창군을 포위하였음으로 태조가 구원군을 이끌고 남진했지만, 예안진(禮安鎭)에 이르러 백제의 강성함에 두려움을 느끼고 패배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신하들에게 물으니 공선이 나서서 “만약 우리가 이기지 못하면 마땅히 샛길로 갈 것이요, 죽령(竹嶺)으로 갈 수는 없읍니다”하였다. 이에 유금필이 아뢰기를, “신(臣)이 듣자옵건대, 군사는 흉한 것이요, 전쟁은 위태로운 일이라 하니, 죽을 마음만 가지고 살려는 계책이 없어야만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지금 적군 앞에 나아가 싸워보지도 않고 먼저 패배할 것을 염려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만약 급히 구원하지 않으면 고창군의 3천여 명을 그냥 적에게 주는 것이니 어찌 원통하지 않습니까. 신은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태조가 그 말에 따랐다. 유금필이 이에 저수봉(猪首峰)으로부터 힘껏 싸워서 크게 이겼다. 태조가 승전후 고창군에 들어가서 유금필에게 이르기를, “오늘의 일은 경(卿)의 힘이다”라고 하였다.

 

 

서필(徐弼) 고려 육전(C)수전(C)정치(A)모략(A)명성(B)축성(C)901(효공왕 5)∼965(광종 16). 고려의 문신. 본관은 이천(利川).출생에 있어서는 아버지 신일(神逸)이 화살 맞은 사슴을 구해준 은덕으로 80세에 낳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벼슬은 도필(刀筆)을 거쳐 내의령에 이르렀으며 아들 희(熙), 손자 눌(訥)이 모두 재상을 지냈다.가문의 배경에 대해서는 개국공신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이천지방에 상당한 세력을 지니고 있던 호족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처음 관계에 진출할 때 도필로 나아갔다는 것 등을 보면 그가 정계에 등장할 무렵에는 그리 커다란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정치적 성격에 대해서는 광종의 정치개혁에 반대한 인물로 보는 견해와 친광종계 인물로 파악하는 의견이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광종이 쌍기(雙冀)와 같은 귀화중국인들을 지나치게 우대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나섰던 것에서 보여지듯이 직언과 간쟁(諫諍)을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들을 근거로 들고 있다.즉, 훈신세력(勳臣勢力)의 입장에서 광종의 정책에 비판적이었다는 것이다.그러나 그의 건의나 직언이 광종에 의해 전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고, 내의령이라는 높은 관직에까지 오를 만큼 중용(重用)되고 있었으며, 또한 임금과 신하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뜻을 피력하여 광종이 추진해 나가던 개혁이념에 부합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이렇게 비판적이었던 만큼 임금의 개혁의지를 지지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높이 등용되고 있었던 것이다.결국 그는 개국공신이면서도 광종과 밀착되어 임금의 정치개혁을 지지해주고 있던 인물로 보여지는 것이다.죽은 뒤 삼중대광 태사 내사령(三重大匡太師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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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尹逢) 고려 육전(D)수전(D)정치(A)모략(C)명성(B)축성(C)수안현 사람으로 고려 내봉성의 최응의 동료였다. 태조가 최응을 광평시랑(廣評侍郞)에 임명하자, 최응이 사양하여 아뢰기를, "동료(同僚) 윤봉(尹逢)이 신(臣)보다 나이 십년이나 많으니, 그 사람에게 먼저 임명하기를 청합니다"하였다.이에 태조가 윤봉을 광평시랑에 임명하였다. 관직이 내사령(內史令)에 이르렀고 삼한공신으로 임명되었다. 내사령은 내사문하성의 으뜸벼슬로 종일품 벼슬이다.

 

 

최준옹(崔俊邕)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동주 최씨(東州 崔氏)/철월최씨(鐵原崔氏)[동주는 철원의 옛이름]의 시조로 신라 개국공신 소벌도리(蘇伐都利)의 25대 손이다. 태봉국 수도인 철원을 근거지로 하였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때 태봉국의 벼슬직에 있다가 역성 혁명과정에서 왕건에게 협조하여 삼한공신에 임명된것으로 본다. 태조에 의해 개국벽상공신에 책록되어 벼슬이 삼중대광, 태사에 이르렀다.

 

 

이욱(李煜) 고려 육전(D)수전(D)정치(C)모략(D)명성(D)축성(D)

태안이씨(泰安李氏)의 시조로 본시 중국 송(宋)나라 사람이다. 925년(태조8년) 난을 피해 고려(高麗) 들어와 농서공(瀧西公)에 봉해졌으며, 그의 7세손인 기(奇)는 고려 광종(光宗) 때부터 태안(泰安)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후 후손 이천(李蕆)이 태안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고 태안부원군(泰安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태안(泰安)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금용식(琴容式)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D)축성(D)봉화금씨(奉化琴氏)의 시조로 태조의 사업을 도와 고려개국삼한벽상공신(高麗開國三韓壁上功臣)에 책록되었다. 식읍으로 김포를 사적(賜籍)받았다. 후손 금우공(琴遇工)대에 경북 동북단에 위치한 봉화(奉化) 상운면(祥雲面)면으로 터를 옮겼다.

 

 

김훤술(金萱術) 고려 육전(C)수전(D)정치(A)모략(B)명성(B)축성(C)해평김씨(海平金氏)의 시조로, 본이름은 훤술이었으나, 왕건에게 김씨성을 하사받아 김훤술이 되었다. 고려개국시 공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해평군(海平君 현 경북 선산군)을 식읍으로 하사받으면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해평(海平)으로 하게 되었다. 시호는 장렬(莊烈)이다.

 

 

방계홍(房係弘)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남양 방씨(南陽房氏)의 시조로, 방계홍의 9대조는 당나라 8학사중 한명인 방준이다. 방준이 신라로와 남양에 정착하여 예학을 가르쳤다. 남양(南陽)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水原)과 화성군(華城郡) 일원을 포함한 지역의 옛 지명이고 고려초에는 당은군(唐恩郡)이라 불리었다. 방계홍은 삼한통일후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록되었다. 아들 방의강(房儀康)이 금자광록대부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며, 손자 진유(珍儒)는 추밀원 부사(樞密院府使)를 거쳐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김홍술(金弘述) 고려 육전(B)수전(C)정치(D)모략(D)명성(C)축성(D)

동국여지승람 제25권에 김홍술(金弘述)에 대해서 적혀있길 모사태조(貌似太祖)라 하여 태조와 생김새가 아주 비슷하였다고 쓰여있고 태조를 대신해 백제와 싸우다 전사했다고 적혀 있는것으로 보아 공산전투에서 전사한 팔공신중 한명이 아닐까 추측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팔공신은 전이갑,전의갑,전락,호의,김락,신숭겸등 6인이다.

진보성 성주 홍술(洪術)과 고려 마군장군 홍술(洪述/홍유(洪儒)의 초명)과는 다른 인물이며, 또한  의성김씨의 시조(김석/경순왕과 낙랑공주의 아들)로 잘못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길권(李吉卷) 고려(용구호족)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C)

용인이씨(龍仁李氏)의 시조로 용구(龍駒 용인)의 토호(土豪)였고, 태조의 역성혁명을 부터 같이 하였으며, 특히 북쪽지역 옛 동예(東濊)지역(현 강원북부~함경남도)의 고부이오환(古扶伊梧桓)등을 정복하였다. 공으로 태조의 부마가 되었다고 만력년간고적(萬曆年間古蹟)에 전해진다. 삼한통일후에는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록되고 삼중대광 태사(三重大匡 太師)에 임명되었으며, 구성백(駒城伯용인)에 봉작되었다.

 

 

조맹(趙孟)/조암(趙岩)/조바우 고려 육전(C)수전(D정치(B모략(A)명성(B)축성(C)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시조로 원명은 조암(趙岩)이다. 풍양현(현 남양주군 진건면 송능리)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으며 천마산 지맥인 독정산(獨井山)의 암굴에서 수도 생활을 하고 있었는다. 당시 경북 동해안 지역에서는 고려와 백제와의 치열한 전쟁이 계속 되었는데, 태조 왕건이 영해지방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후 휘하의 장군들을 모아놓고 중지를 모았을때 한결같은 대답은 풍양현에 숨어 사는 바우도인의 지략을 빌리자는 것이었다. 이에 왕건이 그를 찾으니 당시 나이가 70세이었다. 이때부터 백제정벌의 길에 올라 뛰어난 지략으로 고려통일을 이루자 태조 왕건이 맹으로 이름을 내리고 삼한벽상공신에 책록했다. 벼슬은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이르렀고, 지금도 천마산에는 왕건을 만났다는 암굴(巖窟)이 있으며 현성암(見聖庵)을 세워 그를 수호하여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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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금용(張金用)/(長金用) 고려 육전(B)수전(C)정치(D)모략(D)명성(B)축성(D)인동장씨(仁同張氏)의 시조로 옥산(玉山) 출신이다. 옥산은 현재의 경북 구미의 인동의 옛이름이다. 장금용은 고려 중앙군에서 활약을 하였다. 본성은 장씨(長氏)였는데 활을 잘 쏘아 태조가 친히 궁(弓)자를 더하여 장(張)씨를 하사하였다.<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삼한통일후 삼한공신에 책록되었다. 인동장씨 족보에는 신호위 상장군을 지냈다고 하나, 신호위와 상장군의 명칭은 삼한통일후 50여년후에나 등장하는 명칭임으로 잘못된것으로 추측하고, 장금용의 아들 장선(張善)이 금오위 상장군을 역임했는데 이와 연관이 있는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안동장씨 장정필의 원손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하다.

 

 

정예(鄭藝) 고려(강주호족) 육전(C)수전(C)정치(B)모략(B)명성(C)축성(C)진양정씨(晋陽鄭氏)의 시조로 호(號)는 백곡(栢谷), 시호(諡號)는 영절(英節)이다. 진양(晋陽)은 강주일대의 지역이다. 후삼국시대에는 강주(康州)였고 고려 태조 23년(940)에 진주(晋州)라 개명했다. 정예는 고려초에 문하시중을 지냈고 삼한벽상공신에 책록되었다. <고려통합벽상삼한공신 광록대부 문하시중평장사( 高麗統合壁上三韓功臣 光祿大夫 門下侍中平章事)>

 

이대평(李大平) 고려 육전(B)수전(B)정치(D)모략(D)명성(C)축성(C)

강화이씨(江華李氏)의 시조로 고려의 무장이다. 중랑장(中郞將)과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역임였으며 일리천 전투후에는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하음(河陰 강화)에 정착 세거(定著世居)하게 되자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강화(江華)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고려 최고의 문인 이규보가 후손이다.

 

 

홍규(洪規) 고려(홍주호족) 육전(B)수전(D)정치(C)모략(B)명성(B)축성(C)

홍주홍씨(洪州洪氏)의 시조로 홍주(홍성)호족이다. 태조 17년 934년 9월 운주전투에서 백제가 예상을 깨고 대패하자, 공주 이북의 30여성이 모조리 고려의 깃발을 내걸었는데, 이때 가장 큰 세력인 홍성도 고려에 귀부했다. 이때부터 백제와 고려의 세력이 역전되었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홍규의 딸을 비로 삼으니 제12비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이다. 홍규는 삼한통일후 삼한삼중대광 벽상익찬공신(森韓三重大匡壁上翊贊功臣)에 책록되었고, 해풍부원군에 봉해졌다.

 

 

홍유후(洪儒厚) 고려(홍주호족)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D)

홍주호족으로 홍규의 아들이다. 934년 고려에 귀부한이후 태사익찬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아들 홍욱(洪旭)은 문하시중 평장사까지 역임했다.

 

 

배은우(裵殷祐) 고려 육전(B)수전(C)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삼한1등공신 배현경(裵玄慶)의 아들로, 태조19년(936년) 배현경이 위독하자 태조가 친히 문병하며 "경의 자손이 있으니 그들을 잊지 않겠노라"하고 나가자 죽었다. 태조가 부음을 접하자 가마를 멈추고 통곡하였다. 이후로 배은우는 높은 벼슬을 얻고 역시 삼한공신에 책록되었다.

 

 

최지몽(崔知夢)/최총진(崔聰進) 고려 육전(D)수전(D)정치(SS)모략(S)명성(A)축성(C)

907~987, 초명은 최총진(崔聰進)이며 아버지는 영암호족 원보 최상흔(崔相昕)이며, 천성이 총명,온화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대광 현일(玄一)에게서 유학과 역사를 배웠으며 천문과 점복(占卜)에도 능하였다. 태조(太祖) 7년(924) 18세의 나이로 태조에게 불리워 태조의 꿈에 대해 장차 삼한(三韓)을 통일 하게될 징조라고 해몽하여 지몽(知夢)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후 태조의 측근에서 보좌하며 정치적 자문에 응하였다. 혜종(惠宗) 대에는 사천대 공봉(供奉)의 직으로서 혜종의 시해 음모를 예측하여 혜종으로 하여금 여러 차례 암살의 위기를 모면케 하였다. 정종(定宗), 광종(光宗)으로부터도 후대를 받았으나 왕권강화를 적극 추구하던 광종 말년에는 미움을 받아 한동안 폄출(貶黜)되기도 하였다. 경종(景宗) 5년(980) 내의령(內議令)의 직으로 복귀하고 성종(成宗) 원년 좌집정(左執政) 수내사령(守內史令)의 직위와 홍문숭화치리공신(弘文崇化致理功臣)의 호와 함께 왕의 지극한 존숭을 받았다. 성종 6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태자태부(太子太傅)를 증직하고 시호를 민휴(敏休)라 하였다. 고려 초기 지방출신의 대표적 문신 관료이며 주로 국왕의 측근에서 정치적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왕평달(王平達) 고려(왕족) 육전(C)수전(B)정치(B)모략(B)명성(A)축성(B)

개성왕씨로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作帝建 의조경강대왕懿祖景康大王)의 둘째 아들로 母 민의(旻義)/용녀(龍女)/원창왕후(元昌王后)는 왕평달을 낳다가 산고로 죽었다. 형 용건(龍建)/용륭(龍隆)/왕륭(王隆)과 더불어 송악의 호족이였으며, 이어 태봉때까지 조카 왕건을 보필했다. 아들로는 왕식렴,왕신,왕육 3형제가 있었다. 삼한통일후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임명되고 삼한벽상공신에 책록되었다.

 

 

제궁(帝弓)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C)

고려 개국 2등 공신으로 태조 13년 925년에 대상(大相) 벼슬로 조물군(曹物郡) 전투당시 고려군의 상군(上軍)을 지휘하였으나 백제군에게 패하였다. 그러나 하군(下軍)을 지휘하던 박수경의 활약으로 고려군은 승리하였다. 그해 8월엔 천안부도독(天安府 都督)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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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녕(殷寧)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B)명성(C)축성(D)

태조 13년 925년 조물군에서 백제군과 큰 전투가 벌어졌을때 박수경과 함께 하군(下軍)을 지휘했다. 제궁의 상군과 왕충의 중군은 백제군에게 무너졌으나 하군만이 독전하여 결국 승리를 하여 전공을 세웠다.

 

 

사도귀(思道貴) 고려 육전(C)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벽진군호족 이총언이 고려로 귀부할 마음을 품고 아들 이영(李永)을 고려로 보냈는데, 왕건이 크게 기뻐하며 당시 대광(大匡) 벼슬이던 사도귀의 딸과 이영을 혼인시켰다. 이영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방회(李芳淮)는 추밀원사(樞密院使)을 지냈다.

 

 

조정(趙鼎) 고려(고창군) 육전(A)수전(C)정치(D)모략(C)명성(C)축성(C)

함안조씨(咸安趙氏)의 시조로 본시 당나라 출생으로 892년 진성여왕 6년에 두 동생 조부(趙釜)와 조당(趙當) 그리고 절강성 사람인 장길(안동장씨 시조) 부자와 함께 신라로 넘어와 안동에 터를 잡았다. 931년 고창전투에서 장길의 휘하무장으로 출전하여 백제군을 대파하는 전공을 세워 고려 조정에 무관으로 출사하였으며, 대장군에 오르고 삼한공신에 책록되었다.

 

 

조부(趙釜) 고려(고창군)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

당나라 출생으로 892년 진성여와 6년에 형 조정, 동생 조당과 함께 신라로 건너와 안동에 터를 잡고 살았다. 931년 고창전투에서 공을 세워 고려 황도로 올라가 무관을 지냈다.

 

 

조당(趙當) 고려(고창군)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

당나라 출생으로 892년 진성여와 6년에 형 조정, 조부와 함께 신라로 건너와 안동에 터를 잡고 살았다. 931년 고창전투에서 공을 세워 고려 황도로 올라가 무관을 지냈다.

 

 

배운태(裵運泰)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C)

태조가 역성혁명을 성공하고 고려를 개창한 태조 원년에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배현경과 일족으로 추측한다.

 

 

엄식(嚴式)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

태조13년 당시 원보(元甫)직에 있었는데, 8월에 태조가 대목군(大木郡)을 행차하여 동서 두솔(東西兜率)을 합쳐서 천안부도독(天安府都督)에 대승(大丞) 제궁(弟弓)을 사(使)로 하고 엄식을 부사(副使)로 임명하여 백제를 정벌하기 위한 군사 전초기지로 삼았다. 사(使)는 지방관의 우두머리를 뜻한다.

 

 

흔행(昕幸)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B)

태조 13년에 정조(正朝)직에 있었는데, 8월에 태조의 명을 받은 대상(大相) 염상(廉相)이 마산(馬山)에 성을 쌓고 안수진(安水鎭)이라 이름했으며, 흔행을 진두(鎭頭)로 삼아 수비하게 하였다.

 

 

선규(善規)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D)축성(D)

태조 14년에 보윤(甫尹 8품) 벼슬에 있었는데 8월에 신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신라왕에게는 안장을 얹은 말과 능라(綾羅), 채금(綵錦)을 선사하고, 아울러 신라 백관에게는 채백(綵帛)을 내려 주며, 군인과 민간인에게는 차(茶)와 복두(복頭)를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평환(平喚)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B)명성(C)축성(B)

태조 14년 원윤(元尹)직에 있었는데 11월에 태조가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주진을 순시하고 돌아와서 명하기를 "북번(北蕃) 사람은 얼굴은 사람꼴이지만 마음은 짐승이어서 굶주리면 오고 배부르면 가버리며, 이익을 보면 부끄러움도 잊으니 지금은 비록 우리에게 복종하여 섬기고 있지마는 마음두고 배반함이 일정하지 않다. 마땅히 지나가는 주(州),진(鎭)에는 관사(館舍)를 성 밖에 지어서 그들을 접대하라"하여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명한후 안북부(安北府)와 강덕진(剛德鎭)을 설치하고 평환을 진두(鎭頭)로 삼았다.

 

왕중서(王仲瑞) 고려 육전(D)수전(C)정치(B)모략(C)명성(C)축성(D)

태조 15년에 대상벼슬에 있었는데 후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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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훤(才萱)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B)명성(C)축성(B)

태조 17년 원보(元甫) 벼슬에 있었는데 태조의 명을 받은 대상(大相) 염상(廉相)이 통해진(通海鎭 평남 평원)에 성을 쌓게 한후 재훤으로 하여금 진두(鎭頭)로 삼아 수비하게 하였다.

 

 

왕철(王鐵) 고려 육전(D)수전(D)정치(A)모략(B)명성(B)축성(D)

태조 18년에 섭시중(攝侍中)이었는데, 그해 10월 임술일에 신라왕이 시랑(侍朗) 김봉휴(金封休)를 보내어 항복할뜻을 청하였다. 이에 태조는 왕철과 시랑(侍郞) 한헌옹(韓憲邕)등을 신라로 보냈다. 11월 갑오일에 신라왕 김부(金溥)가 백관을 거느리고 경주를 출발하니, 사대부와 서민(庶民)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향거(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리에 뻗혔고, 길은 사람으로 꽉 차서 막혔으며 , 구경꾼들이 쭉 둘러 서 있었다. 길 가에 있는 주(州),현(懸)에서는 접대가 매우 성대하였고, 태조가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고 위로하였다. 계묘일에 김부가 왕철등과 함께 개경(開京)에 들어와 항복을 청하였다.

 

 

한헌옹(韓憲邕)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

태조 18년에 시랑(侍朗)직에 있었는데 10월 신라왕이 항복을 청하니, 태조가 섭시중 왕철과 시랑 한헌옹에게 명하여 신라로 회답하는 국서를 가지고 가게 하였다. 11월에 신라왕 김부와 함께 개경으로 돌아왔다.

 

 

형순(邢順)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

진주형씨(晉州邢氏)의 시조로, 태조 18년(935년)에 예빈경(禮賓卿)을 역임하고 있었는데 사신으로 후당에 파견되었다. 태조20년(937년)에는 석경당(石敬瑭)이 후당을 무너뜨리고 후진(後晋)을 세우자 왕규와 함께 축하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후에 밀직사에 추봉되었다. 석경당의 후진은 거란의 신하를 자처하고 굴종외교를 펼쳤으나 건국한지 10년만에 946년 거란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였다.

 

 

강유영(康柔英) 고려 육전(A)수전(D)정치(C)모략(B)명성(D)축성(D)

태조 19년 원윤(元尹)으로 9월 일리천(一利川) 전투에서 견훤,견권,박술희,황보금산등과 함께 마군(馬軍) 1만 명을 이끌고 좌강(左綱)에 편성되어 백제군을 물리쳤다.

 

 

기언(奇言/奇彦) 고려  육전(A)수전(C)정치(C)모략(B)명성(B)축성(C)행주기씨(幸州奇氏)로 태조19년 9월 일리천 전투에 지천군 대장군 원윤(支天軍大將軍 元胤)으로 능달,한순명,흔악과 함께 보병 1만을 지휘하여 좌강(左綱)을 맡았다.

 

 

한순명(韓順明) 고려 육전(A)수전(C)정치(B)모략(C)명성(B)축성(C)태조19년 936년 9월 백제와의 마지막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 지천군 대장군 원윤(支天軍大將軍 元胤)으로 참전하여 능달,기언,흔악과 함께 보병 1만을 지휘하여 좌강(左綱)을 맡았다.

 

 

흔악(昕岳) 고려 육전(A)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C)예천흔씨(醴泉昕氏)로 지천군(支天軍) 대장군 겸 원윤으로 태조 19년 936년 9월 일리천 전투에 능달,기언,한순명과 함께 보군 1만을 이끌고 좌군으로 참전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예천흔씨는 1198년 명종의 이름인 왕흔을 피하여 권씨로 바꿔 예천권씨(醴泉權氏)가 되었다.

 

 

영직(英直)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B)명성(C)축성(C)태조 19년 서기 936년 9월 견훤의 요청에 의해 태조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남진하였다. 영직은 지천군장군(支天軍大將軍) 겸 정조(正朝)로 능달,기언,한순명,흔악의 휘하에서 광세와 함께 좌군 1만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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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세(廣世)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B)명성(C)축성(C)

태조 19년 서기 936년 9월 견훤의 요청에 의해 태조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남진하였다. 광세(廣世)는 지천군장군(支天軍大將軍) 겸 정조(正朝)로 능달,기언,한순명,흔악의 휘하에서 영직과 함께 좌군 1만을 지휘했다.

 

훤량(萱良)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B)명성(C)축성(C)

태조19년 936년 9월 백제와의 마지막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 원윤(元尹) 겸 마군장군으로 김철,홍유,박수경,연주의 휘하에서 마군(馬軍) 1만을 지휘하여 우강(右綱)에 속해 전공을 세웠다.

 

 

인일(仁一) 고려 육전(B)수전(C)정치(B)모략(B)명성(C)축성(C)

태조 19년 서기 936년 9월 일리천 전투에서 인일은 원보(元甫)직에 있었는데 왕순신,긍준,왕렴,왕예와  더불어 마군 2만을 지휘하였다.

 

 

관무(官茂) 고려 육전(A)수전(D)정치(C)모략(C)명성(B)축성(D)

태조 19년 서기 936년 9월 일리천 전투에서 원윤(元尹)으로 대상 유금필의 휘하에서 동생으로 여겨지는 관헌(官憲)과 더불어 흑수(黑水), 달고(達姑), 철륵(鐵肋)등 제번(諸蕃)의 강한 기병(騎兵) 9천 5백명을 거느리고 중군으로 참전했다.

 

 

관헌(官憲) 고려 육전(A)수전(D)정치(C)모략(B)명성(B)축성(C)

태조 19년 서기 936년 9월 일리천 전투에서 원윤(元尹)으로 대상 유금필의 휘하에서 형으로 여겨지는 관무(官茂)와 더불어 흑수(黑水), 달고(達姑), 철륵(鐵肋)등 제번(諸蕃)의 강한 기병(騎兵) 9천 5백명을 거느리고 중군으로 참전했다.

 

 

정순(貞順)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B)명성(C)축성(D)

태조 19년 서기 936년 9월 일리천 전투에서 원윤(元尹) 겸 우천군대장군(佑天軍大將軍)으로 부장 정조 애진(哀珍)과 함께 1천명을 이끌고 참전했다.

 

 

애진(哀珍)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태조 19년 서기 936년 9월 일리천 전투에서 정조(正朝) 겸 우천군장군(佑天軍將軍)으로 정순을 보필하여 우천군 1천명을 이끌고 참전했다.

 

 

종희(宗熙)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태조 19년 서기 936년 9월 일리천 전투에서 원윤(元尹) 겸 천무군대장군(天武軍大將軍)으로 부장 정조 견훤(見萱)과 함께 1천명을 이끌고 참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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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見萱)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태조 19년 서기 936년 9월 일리천 전투에서 정조(正朝) 겸 천무군장군(天武軍將軍)으로 종희을 보필하여 천무군 1천명을 이끌고 참전했다.

 

 

조간(助杆)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B)명성(C)축성(D)태조 19년 서기 936년 9월 일리천 전투에서 원보(元甫) 겸 간천군장군 (杆天軍將軍)으로 김극종을 보필하여 간천군 1천명을 이끌고 참전했다.

 

 

왕함윤(王含允)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B)명성(B)축성(C)

태조 19년 서기 936년 9월 일리천 전투에서 장군으로 대장군 대상(大相) 공훤(公萱), 원윤(元尹) 능필(能弼)과 함께 여러 호족들의 군사 1만 5천을 이끌고 삼군(三軍)의 원병(援兵)으로 참전하였다.

 

 

익훤(萱)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태조20년 5월에 전 신라왕 김부(金傅)가 대대로 신라의 보물이던 허리띠를 바쳤다. 금으로 새기고 옥으로 장식한 허리띠는 20 길이가 10위(圍 뼘)이고, 대구(帶鉤)가 62개이었다. 신라가 보물로 간수하여 오기를 거의 4백년이나 되었으며 , 세상에서 성제대(聖帝帶)라고 일컬은 것이다. 태조가 이것을 받아 원윤(元尹) 익훤(萱)에게 명하고 창고에 간수하게 하였다.

 

 

준행(俊行)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B)축성(D)

태조 왕건의 인척으로 932년 정조(正朝)직에 있었는데, 백제 매곡성주 공직이 투항하자, 태조의 명에 의해 딸을 공직의 아들 영서에게 시집보냈다.

 

왕인적(王仁翟)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B)명성(C)축성(D)

고려 왕족으로 936년 고려가 삼한을 통일한 그해 중국에서는 후당이 무너지고 후진이 들어섰다. 태조는 거란을 견제하기 위해 후진과 친선관계를 맺기 위해 왕인적을 볼모로 보냈는데, 후진이 거란의 신하를 자처하고 940년에 왕인적(王仁翟)을 돌려보냈다. 

 

 

영주(英周)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태조 14년(931년) 고려 대광(大匡)직에 있었는데, 신라 왕도를 백제로부터 지키기 위해 태조의 명을 받아 열궁(烈弓), 총희(悤希)와 함께 고울부(경주 인근)로 파견되어, 그곳 호족 능문(能文)과 함께 수비토록 했다.

 

 

열궁(烈弓)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태조 14년(931년) 고려 대광(大匡)직에 있었는데, 신라 왕도를 백제로부터 지키기 위해 태조의 명을 받아 영주(英周), 총희(悤希)와 함께 고울부(경주 인근)로 파견되어, 그곳 호족 능문(能文)과 함께 수비토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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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희(悤希)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B)명성(C)축성(D) 

태조 14년(931년) 고려 대광(大匡)직에 있었는데, 신라 왕도를 백제로부터 지키기 위해 태조의 명을 받아 영주(英周), 열궁(烈弓)과 함께 고울부(경주 인근)로 파견되어, 그곳 호족 능문(能文)과 함께 수비토록 했다.

 

 

진평(陳評)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918년 고려 태조 왕건의 역성혁명에 공을 세워 개국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송회(宋會)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918년 고려 태조 왕건의 역성혁명에 공을 세워 개국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석담(昔淡)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918년 고려 태조 왕건의 역성혁명에 공을 세워 개국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석광(昔光)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개국2등 공신 석담과는 형제지간으로 추측되며, 918년 고려 태조 왕건의 역성혁명에 공을 세워 개국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조창(曺昌)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918년 고려 태조 왕건의 역성혁명에 공을 세워 개국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유지방(柳志防)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918년 고려 태조 왕건의 역성혁명에 공을 세워 개국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황승(黃勝)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918년 고려 태조 왕건의 역성혁명에 공을 세워 개국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홍관(洪琯)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918년 고려 태조 왕건의 역성혁명에 공을 세워 개국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임정(林程)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평택 농성호족 임팔급의 일족으로 추측하며, 918년 고려 태조 왕건의 역성혁명에 공을 세워 개국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장개(蔣凱)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아산장씨(牙山將氏)로 추측되며, 918년 고려 태조 왕건의 역성혁명에 공을 세워 개국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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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태(廉泰)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파주염씨로 추측되며 고려 최고의 공신 29명에게 책록된 삼한벽상공신에 3등으로 책록되었다. 삼한벽상공신3등 염상, 파주염씨 시조 삼한공신 염형명과는 일족으로 추측된다.

 

평견(評堅)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태조가 삼한을 통일한후, 최고의 공을 세운 29명을 추스려 공신당에 초상화를 그려넣게 했는데, 평견은 삼한벽상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왕요(王堯)/정종(定宗) 고려(왕족) 육전(B)수전(C)정치(B)모략(C)명성(S)축성(C)

923~949. 자는 의천(義天), 이름은 요(堯), 시호는 문명(文明)이다. 태조(太祖)의 둘째 아들로, 923년(태조 6)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충주 호족 유긍달(劉兢達)의 딸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이며, 비(妃)는 문공왕후(文恭王后) 박씨(朴氏)와 문성왕후(文成王后) 박씨이다. 이복형 혜종(惠宗)의 뒤를 이어 945년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 왕식렴(王式廉) 등의 도움을 받아 외척으로 세도를 부리던 왕규(王規)와 공신 박술희(朴述熙) 등의 정적을 제거하고 호족들의 발호를 억제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개경의 호족들이 호응하지 않는 등 여전히 왕권이 확립되지는 않았다. 불교를 장려할 목적으로 946년 양곡 7만 석을 내어 여러 사원(寺院)에 불명경보(佛名經寶)·광학보(廣學寶)를 설치하는 등 불교 중흥에 힘썼고, 947년에는 서경성(西京城:평양성)을 쌓고 도참설(圖讖說)에 따라 그곳으로 천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948년 9월, 동여진에서 말 700필과 토산물을 바치자, 직접 공물을 검열하던 중 갑자기 닥친 우레와 천둥 소리에 놀라 경기가 든 이후 계속 병석에 있다가 이듬해 3월에 죽었다. 기질이 강인하고 고집이 세었으며, 고구려 고토 회복에 대한 집념이 강했는데, 서경으로 천도하려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능은 개성의 안릉(安陵)이다.

 

 

왕소(王昭)/광종(光宗) 고려(왕족) 육전(C)수전(C)정치(SS)모략(SS)명성(SS)축성(A)

925~975. 자는 일화(日華), 휘는 소(昭), 시호는 대성(大成)이다. 태조 왕건(王建)의 넷째 아들이고 제3대 왕 정종(定宗)의 친동생이다. 비(妃)는 태조의 딸 대목황태후(大穆皇太后) 황보씨(皇甫氏)이다. 정종의 선위(禪位)를 받아 즉위한 뒤에 그 영명(英明)함을 바탕으로 많은 치적을 쌓았다. 먼저 권호강족(權豪强族)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훈신(勳臣)·장상(將相), 심지어 골육지친(骨肉之親)에 이르기까지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하였으며,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만들어 노주(奴主)·노비 간의 분쟁을 재판하여 많은 노비를 풀어주었다. 958년에는 중국에서 고려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려에서는 처음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 또한 백관의 복제(服制)를 제정했으며, 수도 개경(開京)을 황도(皇都)로 개칭하고 서경(西京), 즉 평양을 서도(西都)라고 하였다. 한편, 불교를 독신(篤信)하였으며, 국방에 유의하여 동북계(東北界)·서북계(西北界)에 많은 성을 쌓았다. 서북계에는 장청(長靑)·위화(威化)·무주(撫州)·안삭(安朔)·습홀(濕忽)·송성(松城)·낙릉(樂陵)·운주(雲州)·신도(信都)·안융(安戎) 등 주로 평남·북지방에 축성(築城)하였고, 동북계에는 장평(長平)·박평(博平)·고주(高州)·화주(和州) 등, 주로 지금의 함경남도 지방에 축성하였다. 왕권강화책에 편승하여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줄이어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는 폐단도 있었다. 능호(陵號)는 헌릉(憲陵)이다.

 

 

신혜왕후(神惠王后) 유(柳)씨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C)모략(B)명성(S)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1비. 성은 유씨(柳氏). 본관은 정주(貞州). 삼중대광(三重大匡) 천궁(天弓)의 딸이다.태조가 궁예(弓裔)의 휘하 장군으로 있을 때, 군사를 거느리고 정주지방을 지나다가 개천가에 서 있는 부인을 보게 되었다. 그 아름답고 덕기있는 모습과 깨끗한 몸가짐을 보고 아내로 맞았다. 궁예 말년에 정사가 포악해지자 장군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 등이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새 왕으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왕건은 이를 완강히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이것을 본 부인 유씨가 장막 뒤에서 나와 “의(義)로써 탐학함을 물리치는 것은 예로부터 해온 일입니다. 지금 여러 장군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아녀자도 분발하겠거늘 하물며 대장부께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갑옷을 입히고 의거에 참여하도록 권하였다.태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봉해지고 뒤에 신혜왕후로 추봉되었다. 태조의 현릉(顯陵)에 부장(祔葬)되었다.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C)정치(C)모략(B)명성(S)축성(D)

 

태조의 제2비 장화왕후 오씨는 나주인으로 조부는 오부돈이고 부는 오다련군이다. 대대로 나주의 목포(木浦)에 살았는데 다련군이 사간(沙干) 연위(連位)의 딸 덕교(德交)에게 장가들어 오씨를 낳았다. 오씨가가 일찍이 꿈에 포(浦)의 용(龍)이 와서 복중(腹中)에 들어가므로 놀라 깨어 부모에게 말하니 모두 기이하게 여겼는데 얼마 후에 태조가 수군 장군으로서 나주에 출진하여 목포에 배를 머무르고 시내 위를 바라보니 오색의 운기(雲氣)가 있는지라 가서 본즉 오씨가 빨래하고 있었다. 태조가 불러 오씨와 시침하였다. 이에 낳은 아들이 왕무(혜종惠宗)다. 태조가 보아하니 왕무에게 이미 임금될 덕이있음을 알고 장차 그에게 제위를 물려줄 생각을 품었으나 왕무의 세력이 패서세력에 비해미약함을 걱정하여, 921년에 옷상자에 자황포를 담아 장화왕후에게 하사하니, 곧 장화왕후가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에게 보이니, 박술희가 태조의 뜻을 알고 정윤(正胤 태자(太子))삼기를 청하였다.

 

 

 

신명순성왕후(神明順聖王后) 유씨(劉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A)명성(S)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3비. 충주유씨(忠州劉氏). 태사 내사령(太師內史令)에 추증된 긍달(兢達)의 딸이다.태조가 고려를 창건한 직후에 왕비로 맞아들였다. 비의 고향인 충주는 후백제 및 신라와 연결되는 교통상의 요충일 뿐만 아니라, 신라 5소경(小京)의 하나인 중원경(中原京)지역으로 신라 귀족이 많이 사는 곳이기도 하였다. 태조는 이러한 지역의 호족가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임으로써 주변의 호족세력을 포섭하는 데 좀더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을 것이다.태조와의 사이에 태자 태(泰)와정종·광종·문원대왕 정(文元大王貞)·증통국사(證通國師)의 다섯 왕자와 낙랑(樂浪)·흥방(興芳) 두 공주를 두었다. 그 중 정종은 고려 제3대 왕이 되었고, 광종은 제4대 왕이 되었다.그리고 장녀 낙랑공주는 귀순해온 신라의 경순왕에게 출가하였다. 사후에 신명순성왕태후로 추봉되었다. 광종은 즉위 2년(951)에 모후의 원당(願堂)으로 불일사(佛日寺)를 세웠고, 954년에는 숭선사(崇善寺)를 세워 명복을 빌기도 하였다.

 

 

신정왕후(神靜王后) 황보씨(皇甫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B)명성(A)축성(D)

?∼983(성종 2). 고려 태조의 제4비. 황주 황보씨(皇甫氏). 태위 삼중대광(太尉三重大匡)이며 충의공(忠義公)에 추증된 제공(悌恭)의 딸이다.태조 즉위 후 두번째로 왕비가 되었다. 비의 고향 황주는 신라시대 패강진(浿江鎭) 지역에 속하며 신라 국경수비의 육군이 집중되어 있던 곳이다. 태조는 이처럼 요충지 호족의 딸을 왕비로 맞이함으로써 자신의 지원세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실제로 태조 사후의 왕실간 세력다툼에서 황보씨계의 왕자·왕녀는 신명왕후(神明王后) 유씨계(劉氏系)와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왕실내의 유력한 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태조와의 사이에 왕자 대종(戴宗) 욱(旭)과 대목왕후(大穆王后)를 낳았다. 외손은 경종이며, 친손은 성종이다. 성종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인 신정왕후 밑에서 자랐다.983년(성종 2) 할머니가 죽자 크게 애도하며 신정왕태후로 추봉하고 수릉(壽陵)에 장사지냈다.1002년(목종 5)에 정헌(定憲), 1014년(현종 5)에 의경(懿敬), 1027년에 선덕(宣德), 1056년(문종 10)에 자경(慈景), 1140년(인종 18)에 유명(柔明), 1223년(고종 10)에 정평(靖平)의 시호를 거듭 추증하였다.

 

 

신성왕후(神成王后)/전대량원부인(前大良院夫人) 김씨(金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5비. 경주김씨(慶州金氏). 잡간(匝干)이었던 억렴(億廉)의 딸이다.신라가 고려에 항복하기를 청하자, 태조는 이를 환영하면서 한편으로 신라왕실과의 결혼을 청하였다. 이에 신라의 경순왕은 큰아버지 억렴의 딸이 인품과 용모가 뛰어나 태조의 배필됨에 부족함이 없다고 추천하니 왕비로 삼았다.태조는 이러한 결혼을 통하여 양 왕실이 결합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신분혈통적 고귀성을 보장받고, 또 한편으로는 친신라계 호족을 포섭하는 데 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을 것이다.그런데 신성왕후에 대하여는 신라왕족이 아니고 합주(陜州:지금의 합천)의 이씨(李氏)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태조와의 사이에 안종(安宗)  욱(郁)을 낳았고, 안종은 경종의 비 헌정왕후(獻貞王后)와 사통하여 현종을 낳았다.현종이 왕위에 오른 뒤 신성왕태후로 추봉하였으며, 능은 정릉(貞陵)이다.

 

 

정덕왕후(貞德王后) 유씨(柳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6비. 정주유씨(貞州柳氏)로, 시중 덕영(德英)의 딸이다.태조가 즉위한 뒤 세번째로 맞아들인 왕비로, 제1비 신혜왕후(神惠王后)와 성과 본향이 같다. 제1비 유씨에게 소생이 없는 점을 감안하여, 같은 집안의 딸을 다시 맞아들인 것으로 생각된다.태조와의 사이에 왕위군(王位君)·인애군(仁愛君)·원장태자(元莊太子) 등의 왕자와 문혜(文惠)·선의(宣義)와 성명미상의 공주를 두었다.이들은 태조의 제3비 신명왕후 유씨(神明王后劉氏)계 및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神靜王后皇甫氏)계와 상호 연결된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고려 초기의 정치적 변동기에 중요한 왕실세력의 하나로 남아 있었다.

 

 

헌목대부인(獻穆大夫人) 평씨(平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7비. 경주 사람으로 좌윤(佐尹)  평준(平俊)의 딸이다. 수명태자(壽命太子)의 어머니이며, 홍덕원군(弘德院君)의 할머니이다. 태조의 여러 후비들에게 준 칭호 가운데 유일하게 대부인의 칭호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 지위가 부인보다는 상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그런데 평씨 성은 신라 수도 경주의 왕경인 가운데 육두품에도 포함되는 성이 아니므로 그 신분적 위치는 그리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그런데도 태조 후비 가운데 제7위의 서열에 위치하였으며, 또 대부인의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평준이 고려 사회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음을 나타는 것으로서, 아마 신라의 귀부(歸附)를 추진한 막후인물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또한, 손자 홍덕원군은 광종의 공주이며 후일 성종과 재혼한 문덕왕후(文德王后)와 혼인하였고, 그 사이서 난 딸은 목종에게 출가하여 선정왕후(宣正王后)가 되었다.목종이 강조(康兆)의 정변으로 폐위어 살해되었기 때문에 선정왕후도 왕후위에서 쫓겨났을 것임은 확실하지만, 이후의 생사여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

 

 

정목부인(貞穆夫人) 왕씨(王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8비. 명주(溟州, 지금의 江陵)사람이며,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태사(太師) 삼중대광(三重大匡)의 증직을 받은 왕경(王景)의 딸이며, 순안왕대비(順安王大妃)의 어머니이다.태조는 고려를 세운 뒤 지방호족세력을 포섭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명주지방에 대한 관심은 상당하였다. 명주의 성주(城主)이며 장군(將軍)인 왕순식(王順式)을 포섭하기 위하여 고심하였고, 왕순식이 내투시에는 왕성(王姓)을 하사하고 관직과 전택(田宅)을 주어 우대하였다.이때 왕순식을 따라온 부관 가운데 소장(小將) 관경(官景)이 있고 그도 또한 왕씨 성을 받았으므로 이가 곧 왕경일 것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왕경과 왕순식의 관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둘 다 고려에 와서 왕씨 성을 받았다는 점, 그리고 태조가 왕경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고 있는 점에서 두사람을 밀접한 관계로 보아 좋을 것이다.태조는 귀부 호족을 포섭하는 방법의 하나로 이들과 혼인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 유씨(庾氏) 고려(왕족) 육전(C)수전(C)정치(D)모략(D)명성(A)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9비. 평주(平州:지금의 평산)사람이며 삼중대광(三重大匡) 유금필(庾黔弼)의 딸이다.유금필은 태조를 도와 여러 차례 전장에서 활약하였고 후삼국의 통일전에도 참가하는 등 많은 활약상을 보였던 대표적 휘하 무장이었다.동양원부인은 효목태자의(孝穆太子義)와 효은태자(孝隱太子)를 두었다. 효은태자는 동양군(東陽君)이라고도 불렸는데, 광종 재위연간에 군소배와 사귀면서 반란을 꾀하였다 하여 광종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그의 두 아들 임(琳)과 정(禎)은 나이가 어려 죽음을 면하고 도망하여 목숨을 부지하다가 목종이 폐위되고 현종이 즉위하는 정변을 거친 뒤 복권되어 다시 종적(宗籍)에 부적되었다.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를 시행하고 이에 반발하는 많은 호족세력을 숙청하였는데, 숙청된 인물들 가운데 평주출신 인물들이 많았다.그러므로 평주를 외가로 하는 동양군과 이 지역 호족들이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왕자와 호족이 같은 사건에 연루되어 다 함께 숙청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태조는 평주지역출신 호족들의 딸들을 후비로 맞아들였는데, 동양원 부인도 그 가운데 한사람이다.

 

 

숙목부인(肅穆夫人) 임씨(林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태조의 제 10비로 고려사 후비열전에는 성씨를 알수 없고, 진주인(鎭州人)이고  대광(大匡) 명필(名必)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진주(鎭州)호족인 임명필(林明弼)을 혼동한듯 싶다. 원녕태자(元寧太子)를 낳았으며 후에 신명왕후(神明王后)로 추존되었다.

 

 

천안부원부인(天安府院夫人) 임씨(林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11비. 경주사람으로 태수(太守) 임언(林彦)의 딸이며, 효성태자(孝成太子)·효지태자(孝祗太子)의 어머니이다.927년(태조 10) 4월 임언은 강주(康州:지금의 晋州) 장군 왕봉규(王逢規)의 사신으로 후당(後唐)에 파견되었고, 같은해 10월 다시 고려 태조를 위하여 후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는데, 이처럼 여러 차례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된 것으로 보아 유학과 한학에 조예있는 인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태조는 자신을 보필할 문사층의 지원을 얻기 위하여 이들과 혼인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천안부원부인은 출신지가 경주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 앞에 천안을 관용하고 있으며, 그 왕자들의 별칭도 천안낭군(天安郞君)이라 불리고 있어 천안과 관련을 가진 인물로, 임언이 천안지방의 태수직을 맡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려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많은 호족을 숙청하였는데, 그때 천안낭군의 지원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 광종이 죽고 경종이 즉위하자 복수의 기운이 일어나 광종대의 후생(後生)이 대거 제거되었는데 그 와중에서 천안낭군이 죽임을 당하였던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준다.광종의 외가인 충주와 천안낭군의 연고지인 천안이 서로 근접지에 위치하므로, 왕자들 간에도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가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洪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12비. 홍주(洪州 : 지금의 洪城) 사람이며 삼중대광(三重大匡) 홍규(洪規)의 딸이다.홍규의 활약상을 알 수는 없지만, 홍주지방은 934년(태조 17) 후백제 견훤(甄萱)과의 싸움에서 전취한 지점으로, 이로 인하여 공주 이북의 30여성이 고려에 자진 내항할 정도로 후백제와의 겨룸에서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이곳은 또한 충청도에서 서해로 나가는 출구로서 중국사신의 접대와 영송(迎送)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태조는 중요지점의 지방세력가의 딸을 후비로 맞아들였던 것이다. 태조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아들은 태자 왕직(王稷)인데 후손이 없었고, 공주 일후(一後)는 태조의 제 3비 신명왕후(神明王后) 소생 태자 태(泰)에게 출가하여 이복남매간의 근친혼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신명왕후의 둘째 아들인 정종, 셋째 아들인 광종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맏아들로 기록된 태자 태는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보아 아마 일찍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후대량원부인(後大良院夫人) 이씨(李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13비. 합주(陜州:지금의 陜川) 사람이며 대광(大匡)  이원(李元)의 딸이다. 부인의 이름에 붙은 대량은 신라말·고려초의 합천지방 이름 이므로 출신지 명을 따서 왕비의 이름으로 하였던 것이다.그런데 이름자 첫머리에 후(後)가 붙어 있으며, 이는 선(先)·전(前)에 대칭되어 사용되는 용어이므로 태조 후비 가운데 그에 합당한 인 물이 있어야 할 것이다.그러나 선(전)대량원부인의 이름을 가진 태조 후비는 보이지 않으므로 비록 이름은 다르더라도 대량지방과 관계있는 인물을 찾아보면, 태조 제5비 신성왕후 김씨(神聖王 后金氏)가 있다.신성왕후에 대해서는 대위(大尉)  이정언(李正言)의 딸이라는 《삼국유사》 보주와 신라 경순왕의 종매라는 《삼국사기》 설의 두 설이 있지만, 아버지 김억렴(金億廉)이 대량주 태수를 역임한 일이 있으므로 후설의 경우에도 대량지방과 관계가 있다.그러므로 대량원부인은 태조비 신성왕후와 비견되어 후대량원부인이라고 불렸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대량지방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교통상의 관문이며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해인사 승군의 도움으로 전세를 만회한 접전지였다. 이러한 전투 요충지의 지방세력가의 딸을 태조는 자신의 후비로 맞아들였던 것이다. 태조와의 사이에 자녀는 없다.

 

 

대명주원부인(大溟州院夫人) 왕씨(王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14비. 명주(溟州: 지금의 江陵)사람이며 내사령(內史令)의 증직을 받은 왕예(王乂)의 딸이다.태조는 고려를 세운 뒤 지방 호족세력을 포섭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명주지방에 대한 관심은 상당하였다. 태조는 명주의 성주(城主)이며 장군인 왕순식(王順式)을 포섭하기 위하여 내원(內院)의 승려로 있는 그의 부친 허월(許越)을 보내 귀부를 권유하였고, 왕순식의 내투시에는 왕성(王姓)을 하사하고 관직과 전택(田宅)을 주어 우대하였다.왕예와 왕순식의 관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왕예가 왕순식의 휘하에서 태조의 통일전에 참여하였으며, 둘다 신라왕족의 후예라는 점, 고려에 와서 사성되었다는 점, 그리고 태조가 왕예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는 점에서 두 사람을 근친관계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왕예는 명주지방에서 독자적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지방호족이었으며, 940년(태조 23)경 명주의 도령(都領)으로서 주진군(州鎭軍) 지휘관의 위치에 있었다. 태조는 귀부 호족을 포섭하는 방법의 하나로 이들과 혼인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광주원부인(廣州院夫人) 왕씨(王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15비. 경기도 광주(廣州) 사람으로 대광(大匡)  왕규(王規)의 딸이다.왕규는 두 딸을 태조에게, 한 딸은 혜종에게 혼인시켜 왕실과 삼중혼인을 하였다. 태조는 고려를 세운 뒤 호족세력을 통합하는 방법의 하나로 혼인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그 대상은 즉위를 도와준 무장세력, 학문적 능력을 가진 문사층, 귀부해온 지방호족 및 신라 왕족과 같은 광범한 세력이었다.그런데 왕규는 학문적 능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인물인 듯하다. 중국의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고, 태조의 유언을 한문으로 받아 적기도 하는 등 태조의 측근으로 활약하였다.그러나 태조가 죽고 혜종이 즉위하자 왕규는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廣州院君:태조 제16비 소광주원부인 소생)을 왕위에 추대하기 위하여 혜종을 시해하고자 하기도 하였고, 혜종이 죽은 뒤에는 태조의 셋째 아들 정종과 왕위다툼을 벌이다가 반역을 꾀하였다는 죄명으로 처형되었다.그 와중에서 왕규의 일당 수백명이 같이 죽음을 당하였는데, 왕규의 딸인 광주원부인이 무사하였을지는 의문이다. 살아 있었다고 하더라도 반역자의 딸은 왕실에서 축출되는 예가 많으므로 왕비의 자리에서 밀려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소광주원부인(小廣州院夫人) 왕씨(王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16비. 경기도 광주사람으로 대광(大匡) 왕규(王規)의 딸이며 광주원군(廣州院君)의 어머니이다.왕규는 2명의 딸을 태조에게 출가시키고 1명은 혜종에게 혼인시켜 3명의 딸이 모두 왕실 후비가 되었다. 태조는 고려를 세운 뒤 호족세력을 통합하는 방법의 하나로 혼인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그 대상은 즉위를 도와준 무장세력, 학문적 능력을 가진 문사층, 귀부해온 지방호족 및 신라왕족과 같은 광범한 세력이었다.그런데 왕규는 학문적 역량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인물인 듯하다. 중국의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고, 태조의 유언을 한문으로 받아 적기도 하는 등 태조의 측근으로 활약하였다.그러나 태조가 죽고 혜종이 즉위하자 왕규는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왕위에 추대하기 위하여 혜종을 시해하고자 하기도 하였고, 혜종이 죽은 뒤에는 태조의 셋째아들 정종과 왕위다툼을 벌이다가 반역죄로 처형되었다.그 와중에서 왕규의 일당 수백명이 함께 죽임을 당하였는데, 왕규의 딸인 소광주원부인이 무사하였을지는 의문이다. 생존하여 있었다 하더라도 반역자의 딸은 왕실에서 축출되는 예가 많아 왕비의 자리에서 밀려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 박씨(朴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 17 후비(后妃). 성은 박씨, 본관은 승주(昇州). 삼중대광(三重大匡) 박영규(朴英規)의 딸이다.박영규는 견훤(甄萱)의 사위로서 그의 장군이 되었다가 견훤이 고려로 망명하자 뒤에 그뒤를 따라 고려로 귀부한 승주의 호족이다. 동산원부인과 태조의 혼인은 고려건국 직후 호족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실행된 태조의 결혼정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예화부인(禮和夫人) 왕씨(王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고려 태조의 제 18비로 춘주인(春州人)이니 대광(大匡) 박유(朴柔)/왕유(王柔)의 딸이다.

 

 

대서원부인(大西院夫人) 김씨(金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19비. 동주(洞州 : 지금의 瑞興)사람이며 대광(大匡) 김행파(金行波)의 딸이다.김씨성은 태조가 내린 것이다. 태조는 고도(古都) 평양이 황폐화하여 여진인들의 수렵장이 되므로, 여기에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고 대도호부를 설치하였다가 다시 서경(西京)으로 승격시켰으며, 922년(태조 5)에는 김행파를 비롯한 양가 자제를 이주하게 하여 이곳 백성들을 지도하도록 하였다.그뒤 태조는 여러 차례 서경에 행차하였는데, 한번은 김행파가 무리를 거느리고 길에 나와 태조를 뵙고 자기 집에 가서 유숙하기를 청하여, 두 딸로써 각각 하루밤씩 태조를 모시게 하였다.이후 태조가 서경행차를 하지 않게 되자 자매는 정절을 지켜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 가 승려가 되었는데, 소식을 들은 태조는 이를 불쌍하게 생각하여 불러 위로하였으며, 서경에 명하여 성 안에 대서원과 소서원의 두 사원을 지어 전민(田民)을 두고 각각 살게 하였으므로 사원의 이름을 따서 왕비명을 부르게 된 것이다.고려 태조의 혼인이 지방세력가의 요청에 의하여 맺어지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는 대표적 사례이다.

 

 

소서원부인(小西院夫人) 김씨(金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고려 태조의 제 20비로 동주인(洞州人)이니 대광(大匡) 김행파(金行波)의 딸이다. 김행파(金行波)는 활 쏘고 말타기를 잘하였으므로 태조(太祖)가 김(金)이라 사성(賜性)하였다. 태조(太祖)가 서경(西京)에 행차(行次)하매 김행파(金行波)가 사냥하는 무리를 거느리고 길에서 배알(拜謁)하고 청하여 그 집에 이르러 이틀 밤[信宿]을 머물게 하고 두 딸로써 각각 하룻밤씩 모시게 하였다. 그 뒤에 다시 행차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두 딸이 다 출가(出家)하여 중이 되었다. 태조(太祖)가 이를 불쌍히 여겨 불러보고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미 출가(出家)하였으니 뜻을 가히 빼앗지 못하겠다."하고 서경(西京)에 명(命)하여 성중(城中)에 대소서원(大小西院) 양사(兩寺)를 지어 전민(田民)을 두고 각기 살게 하였으므로 대소서 원부인(大小西院夫人)이라 칭하였다.

 

 

서전원부인(西殿院夫人)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고려 태조의 제 21비로 사(史)에 그 씨족이 유실(遺失)되어 알수 없다.

 

 

신주원부인(信州院夫人) 강씨(康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22비. 신주(信州 지금의 信川)사람이며, 아찬(阿飧) 강기주(康起珠)의 딸이다.강기주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상 남겨진 자료가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신주는 평주(平州)·황주(黃州)와 함께 신라의 패강진(浿江鎭)이 설치되었던 곳이며, 패강진은 신라의 북방 국경을 지키는 군병력의 집결지였다.그러므로 태조는 이 지역 군사력을 자신의 지원세력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많은 후비를 이곳에서 맞아들였는데, 신주원부인도 예외가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태조와의 사이에 왕자를 출산하였으나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광종을 길러 아들로 삼았다고 한다. 광종이 황주 황보씨(皇甫氏)를 외가로 하는 태조의 공주와 혼인하였는데 신주원부인의 출신지가 황주와 접경하여 있으므로 이들의 혼인에 여러가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광종은 그 과정에서 다시 패강진지역의 군사적 후원을 얻게 되어 왕위에 즉위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월화원부인(月華院夫人)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23비. 대광(大匡) 영장(英章)의 딸이다.출신지 및 성씨에 대해서는 기록이 누락되어 알 수 없다. 태조 후비 가운데 관계기록이 거의 누락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이처럼 기록이 인멸된 이유는 고려 왕실에서 차지하는 후비의 위치가 높지 못하였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태조는 고려를 세운 뒤 호족세력을 통합하는 방법의 하나로 혼인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그 대상은 즉위를 도와준 무장세력, 학문적 능력을 가진 문사층, 귀부해온 지방호족 및 신라왕족과 같은 광범한 세력이었다. 월화원부인이 제23비의 자리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 가문이 신라왕족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기 때문에, 이를 제외한 다른 한가지 방법으로 태조를 도왔을 것이며, 이러한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태조는 월화원부인을 후비로 맞아들인 듯하다.

 

 

소황주원부인(小黃州院夫人)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고려 태조의 제 24비로 원보(元甫) 순행(順行)의 딸로 사(史)에 성씨(姓氏)를 잃었다.

 

 

성무부인(聖茂夫人) 박씨(朴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고려 태조의 제 25비로 평주인(平州人)이니 삼중대광(三重大匡) 박지윤(朴智胤)의 딸로 효제(孝悌) 효명(孝明) 두 태자(太子)와 법등(法燈) 자리(資利) 두 군(君)을 낳았다.

 

 

의성부원부인(義城府院夫人) 홍씨(洪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고려 태조의 제 26비로 홍씨(洪氏)는 의성부(義城府) 사람이니 홍술(洪術)의 딸로 의성 부원대군(義城府院大君)을 낳았다. 의성부원대군은 태조 제6비 정덕왕후 유씨(貞德王后柳氏) 소생의 공주와 혼인하여 이복남매간 혼인을 한 몇 안 되는 사례를 보여준다.

 

 

월경원부인(月鏡院夫人) 박씨(朴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27비. 평주(平州, 지금의 平山)사람이며 태위(太尉) 삼중대광(三重大匡) 박수문(朴守文)의 딸이다.평주지방은 신라의 패강진(浿江鎭)이 설치되었던 곳으로서 육군력의 집결지였다.그러므로 태조는 이 지역 군사력을 자신의 지원세력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많은 후비를 이곳에서 맞아들였는데, 특히 박씨가문에서만 3명의 후비를 맞아들이고 있다.그만큼 평주박씨 가문의 지원이 태조에게는 필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들 형제는 우의가 돈독하였는데, 동생인 수경(守卿)이 견훤의 군사와 조물군(曹勿郡)에서 싸워 승리한 공으로 승진하게 되자, 수경은 동생이 형보다 관위가 높아지는 것은 미안한 일이라 하여 이를 사양하였으므로, 이를 본 태조가 그 형인 수문을 같이 승진시키기도 하였다.동생인 수경은 주로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하여 태조를 보필하였고, 형인 수문은 전쟁에 참여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태조가 죽기 직전에 태자 무(武:혜종)에게 정사를 맡기는 유조(遺詔)를 내릴 때 옆에서 모시고 있는 인물 가운데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로 문필활동을 통하여 태조를 보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몽량원부인(夢良院夫人) 박씨(朴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28비. 평주(平州 : 지금의 平山)사람이며 삼중대광(三重大匡) 박수경(朴守卿)의 딸이다.평주지방은 신라의 패강진(浿江鎭)이 설치되었던 곳으로서 육군력의 집결지였다. 그러므로 태조는 이 지역 군사력을 자신의 지원세력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많은 후비를 이곳에서 맞아들였는데, 특히 박씨가문에서만 3명의 후비를 맞아들이고 있다.그만큼 평주박씨가문의 지원이 태조에게는 필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박수경은 지모가 뛰어나 전쟁에 나가면 매번 승리하였고, 견훤(甄萱)과의 싸움에 참전하여 태조가 후백제군에게 포위되는 고전을 치를 때 위기에서 구출해냄으로써 크게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3대에 걸쳐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책봉되었고, 태조가 신하들의 공로를 생각하여 역분전(役分田)을 지급할 때 박수경에게는 특별히 전(田) 200결을 특사하였다고 하니, 그의 군사적 지원이 태조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리고 박수경일가는 정종 즉위에도 공을 세우는 등 광종 즉위 때 까지 그 세력이 건재하였다.그러나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제도를 개편하고 호족세력을 숙청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박수경의 아들 삼형제가 투옥되었으므로 박수경은 화병이 나서 죽었다.

 

 

해량원부인(海良院夫人)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29비. 해평(海平 : 지금의 善山) 사람이며 대광(大匡)  선필(宣必)의 딸이다. 기록의 누락으로 성씨는 알 수 없다.이름의 음이 같은 사람으로는 재암성 장군 선필(善弼)이 있다. 선필은 신라의 장군으로 있으면서 태조를 도와 고려사신의 신라내왕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930년(태조 13)에 고려에 귀부하였는데, 이때 태조는 그를 상보(尙父)로 삼고 특별히 우대하였다고 한다.당시에는 동일인을 동음이자로 기록한 사례가 많았으므로 이 두 사람을 동일인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태조는 고려를 세운 뒤 호족세력을 통합하는 방법의 하나로 혼인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그 대상은 즉위를 도와준 무장세력, 학문적 능력을 가진 문사층, 귀부해온 지방호족 및 신라왕족과 같은 광범한 세력이었다.태조는 자신에게 귀순한 선필의 딸을 후비로 맞이하여 그 지방 호족세력과의 유대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의화왕후(義和王后) 임씨(林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제2대 왕 혜종의 제1비. 진주임씨(鎭州林氏)로 대광(大匡) 희(曦)의 딸이다.921년(태조 4) 10세의 혜종이 태자로 책봉될 때 태자비가 되었고, 혜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태조가 어린 혜종의 배필로 비를 간택하게 된 데에는 진천의 지역적 위치와, 비의 아버지가 장악하고 있는 막강한 군사실력자로서의 위치가 참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혜종과의 사이에 흥화군(興化君)과 경화궁부인(慶化宮夫人)·정헌공주(貞憲公主)의 두 공주를 두었다. 흥화군은 왕위에 나가지 못한 채 광종 때에 정치적 이유로 생명을 잃었고, 경화궁부인은 혜종 재위중에 광종의 부인이 되었다. 시호는 의화왕후이고, 장지는 순릉(順陵)이며, 혜종묘실에 합장되었다. 1002년(목종 5)에 성의(成懿), 1014년(현종 5)에 경신(景信), 1027년에 회선(懷宣), 1253년(고종 40)에 정순(靖順)의 시호가 거듭 추증되었다.

 

 

후광주원부인(後廣州院夫人) 왕씨(王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제2대 혜종의 제2비. 경기도 광주 사람으로 대광(大匡) 왕규(王規)의 딸이다.태조는 고려를 개창한 뒤 맏아들 무(武 : 혜종)를 태자로 책봉하였는데, 무의 외가가 미약하므로 이를 지원할 수 있는 인물인 병부령(兵部令) 임희(林曦)의 딸을 태자비로 삼았다.그리고 이미 태조 자신과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고 있는 왕규의 딸을 제2비로 삼았는데, 왕규의 학문적 능력과 군사적 지원으로 혜종의 왕위가 안정되기를 기대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왕규는 태조가 죽을 때 태자를 잘 받들어 나라의 정사를 처결하라는 태조의 유훈을 직접 받은 근신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태조가 죽고 혜종이 즉위한 뒤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왕위에 추대하기 위하여 혜종과 대립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고, 혜종이 죽은 뒤 태조의 셋째 아들 정종과 왕위다툼을 벌이다가 반역을 꾀하였다는 죄명으로 처형되었다. 그 와중에서 왕규의 일당 수백명이 같이 죽임을 당하였는데, 왕규의 딸인 후광주원부인이 무사하였을지는 의문이다. 생존하여 있었다고 하더라도 반역자의 딸은 왕실에서 축출되는 예가 많으므로 왕비의 자리에서 밀려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청주원부인(淸州院夫人) 김씨(金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제2대 혜종의 제3비. 청주사람으로 원보(元甫) 김긍률(金兢律)의 딸이며 정종의 제3비 청주남원부인(淸州南院夫人)과 자매간이다.청주는 신라 오소경 가운데 서원경(西原京)이 있던 곳으로 일찍부터 지방관부와 학교를 따로 설치, 운영할 수 있을 만큼 독자적 지방세력이 그 기반을 구축하여왔던 곳이었다.그리고 태조가 고려를 건국한 직후 청주인의 반란이 여러 차례 시도되었을 정도로 반고려적 성향을 나타내고 있었으므로, 태조는 여러 차례 청주에 행차하여 이 지역의 민심수습에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청주지방 호족의 딸이 왕실과 혼인을 맺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태조의 노력이 결실된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혜종은 왕위에 오른 뒤 자신의 처제를 동생인 요(堯:정종)와 혼인시켰는데, 이는 당시의 정국동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혜종대에는 왕권이 미약하여 왕규(王規)와 아우들이 왕위계승경쟁을 벌였는데,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혜종은 자신의 처제를 동생의 배필로 삼게 하였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애이주(哀伊主)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혜종의 비로 경주인(慶州人)이니 대간(大干) 연예(連乂)의 딸로 태자(太子) 왕제(王齊)와 명혜 부인(明惠夫人)을 낳았다.

 

 

황보능장(皇甫能長) 고려(골화현호족)→고려(영천)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영천황보씨(永川皇甫氏)의 시조로, 신라말에 영천 골화현에 금강성(金剛城)을 축조하고 장군이라 칭하였다. 고려의 세력이 강성하자, 골화현 일대의 4현을 규합하여 태조에게 귀부하였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골화현외 3현을 합쳐서 영천이라 이름짓고, 황보능장에게 영천부원군으로 임명하고 영천을 식읍으로 주어 다스리게 했다. 공산전투에도 참전하였으며, 벼슬은 좌승지에 이르렀다.

 

 

황보선장(皇甫善長) 고려(골화현))→고려(영천) 육전(C)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

골화현호족 황보능장(皇甫能長)의 동생으로 추측되며 고려 개국후 2등공신에 책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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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언규(酋彦規) 오월국 육전(D)수전(C)정치(A)모략(B)명성(A)축성(D)919년 9월 계미일에 오월국의 문사로 이름 높던 추언규가 고려에 귀순하여 삼국 가운데 고려의 주가를 올려 주었다.

 

박암(朴巖) 오월국 육전(D)수전(C)정치(B)모략(B)명성(B)축성(D)오월국의 문사로 923년 6월에 고려에 귀부하였다. 왕건은 박암을 크게 중용해 춘부소경(春部少卿)으로 삼았으며, 그해에 광평시랑(廣平侍郞) 한신일(韓申一)과 함께 후당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대광현(大光顯) 발해 육전(B)수전(C)정치(B)모략(D)명성(A)축성(C)생몰년 미상. 고려에 귀화한 발해의 왕족. 발해왕국의 마지막 왕 대인선의 세자를 자칭하고 발해가 멸망한 8년 후인 934년(태조 17) 장군 신덕(申德) 등과 더불어 그 무리 수만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하여 왔다.태조는 그에게 극진한 대접을 아끼지 않았으며 대광현에게 국성(國姓)을 붙여 왕계(王繼)라는 성명을 내려 종적에 편입하게 하고 원보(元甫)의 관직을 수여한 뒤 배천(白川)을 지키게 하여, 그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또 그 요속에게도 관작을, 군사에게는 전택을 주어 각각 안거하게 하였다.그러나 그의 귀화한 시기에 대하여는 기록마다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즉, 《고려사》 태조세가에는 934년 7월로, 《고려사》 연표와 《고려사절요》에서는 925년, 《동국통감》에는 926년으로 되어 있다. 오늘날 태씨(太氏)는 대부분 그를 시조로 하고 있다.

 

 

대화균(大和鈞) 발해 육전(B)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C)생몰년 미상. 고려에 내투(來投)한 발해유민의 우두머리.발해 마지막 왕 대인전때의 예부경(禮部卿)이었으나, 926년 발해가 망하자 동족과 무리 100여호를 이끌고 고려에 내투하였다

 

 

대복예(大福譽) 발해 육전(D)수전(D)정치(A)모략(B)명성(B)축성(D)발해의 공부경(工部卿)으로 발해 멸망후 8년이 지난 934년에 발해세자 대광현과 더불어 고려로 귀부하였다.

 

 

재웅(載雄) 발해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발해의 승려로 태조 10년 927년 3월에 공부경 오흥과 더불어 무리 60명과 함께 고려로 투항하였다.

 

 

김신(金神) 발해 육전(C)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C)발해인으로 고려 태조 11년 928년 3월 무신일에 60호를 이끌고 고려에 귀부하였다.

 

 

대유범(大儒範) 발해 육전(C)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D)발해인으로 고려 태조 11년 928년 7월 신해일에 백성을 이끌고 고려에 귀부하였다.

 

 

홍견(洪見) 발해 육전(D)수전(C)정치(D)모략(D)명성(D)축성(D)발해인으로 고려 태조 12년 929년 6월 경신일에 배 20척에 사람과 물건을 싣고 고려에 귀부하였다.

 

 

진림(陳林) 발해 육전(D)수전(D)정치(C)모략(B)명성(D)축성(D)발해의 문신으로 주로 사신으로 활동하였다. 926년 4월 후당에 사신으로 보내졌다. 태조 17년 934년 12월에 휘하 160여명과 고려로 귀부하였다.

 

 

박승(朴昇) 발해 육전(B)수전(C)정치(B)모략(C)명성(B)축성(D)발해인으로 태조 21년에 3천여호를 이끌고 고려로 귀부하였다.

 

신덕(申德) 발해 육전(A)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발해의 장군으로 발해가 멸망한지 8년후인 9134년 9월 6일에 무리 500여명을 이끌고 고려로 투항했다.

 

 

대원균(大元鈞) 발해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생몰년 미상. 고려에 내투(來投)한 발해의 유민.발해의 마지막 왕인 애왕 때 정당성(政堂省)의 사정(司政)이었다.926년 발해가 거란에게 망하자 대화균(大和鈞)과 더불어 고려에 내투하였다.

 

 

대심리(大審理) 발해 육전(A)수전(C)정치(D)모략(D)명성(B)축성(C)생몰년 미상. 고려에 내투(來投)한 발해의 유민.발해의 마지막 왕인 애왕 때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으로 있다가 926년 발해가 거란에게 망하자 대화균(大和鈞)과 더불어 고려에 내투하였다.

 

모두간(冒豆干) 발해 육전(B)수전(C)정치(D)모략(D)명성(C)축성(D)생몰년 미상. 고려에 귀화한 발해유민. 발해에서 좌수위소장(左首衛小將)으로 있었다.925년(태조 8) 12월 검교개국남(檢校開國男) 박어(朴漁) 등과 함께 백성 1천호(戶)를 데리고 고려에 귀순하였다. 귀순배경은 당시 고려로 파상적으로 밀려들어 오는 발해유민과 마찬가지로, 거란의 침입을 받아 이듬해 발해가 멸망한 동북아정세변화와 관계 있다.

 

박어(朴漁)  발해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D)축성(D)생몰년 미상. 발해가 멸망한 전후의 시기에 고려에 귀부한 발해 관리.926년 발해가 거란의 침략으로 멸망하자, 검교개국남(檢校開國男)의 관직에 있던 그는 좌수위소장(左首衛小將) 창두간(昌豆干)과 함께 발해의 유민 1, 900호를 거느리고 고려에 투항하여 태조 왕건(王建)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다.그뒤의 활동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오흥(吳興) 발해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D)축성(D)생몰년 미상. 고려에 내투(來投)한 발해의 유민.발해에서 공부경(工部卿)으로 활약하고 있다가 왕실이 붕괴되자 다음해인 927년(태조 10)에 무리 50명과 함께 고려로 투화하였다.그뒤 고려에서의 활동상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은계종(隱繼宗) 발해 육전(B)수전(B)정치(B)모략(B)명성(B)축성(B)생몰년 미상. 고려에 내투한 발해의 지배층 유민.발해가 거란에게 멸망한 뒤, 928년(태조 11) 9월에 무리들과 함께 고려에 투항하였다. 당시 천덕전(天德殿)에서 고려 태조를 배알하고 세번 절하였는데, 사람들이 이를 보고 실례라고 말하였으나, 대상(大相) 함홍(含弘)만은 “나라를 잃은 사람이 세번 절하는 것은 예로부터의 예의”라고 은계종의 처지를 대변하였다.발해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고려왕실에서 있었던 이러한 사건은 그가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지배층 유민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고자라(高子羅) 여진 육전(A)수전(D)정치(C)모략(C)명성(A)축성(D)태조3년 920년 유금필이 함경도 일대의 여진을 완전히 평정하여 1500여명의 여진족 귀순자를 받아 들이고 포로가 되었던 고려백성 3천명을 되찾아 오는 큰공을 세운 이듬해 2월 흑수말갈의 추장 고자라가 무리 170여명을 이끌고 귀순해 왔다.고자라는 함경도 일대를 주름잡던 여진족 추장으로 유금필에게 패하여 근거지를 잃어버리자, 곧 고려에 투항한 것이다. 이후 유금필은 군사 3천을 이끌고 골암성(?巖城)에 주둔하여 동북면의 여진족을 완전히 통제하게 된다. 그결과 일리천 전투에서 여진기병을 투입할수 있게 되었다.

 

아어간(阿於間) 여진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태조3년 920년 유금필이 함경도 일대의 여진을 완전히 평정하여 1500여명의 여진족 귀순자를 받아 들이고, 포로가 되었던 고려백성 3천명을 되찾아 오는 큰공을 세운 이듬해 2월 흑수말갈 추장 고자라가 고려로 귀순하자 4월 아어간도 무리 2백을 이끌고 고려에 귀순하였다.

 

 

마후라(摩羅) 천축국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천축국(天竺國 인도)의 삼장법사(三藏法師)로 태조 12년 6월에 고려를 방문했다. 태조가 의장(儀仗)을 갖추어 극진히 그를 맞이하였다.

태조는 마후라를 위해 구산사(龜山寺 황해도 개성시 소격전(昭格殿) 동쪽에 있었던 절)를 창건하여 그를 머물게 하였다.

 

 

 

 

 

 

 

태봉국[泰封國]

 

 

 

궁예 [弓裔, ?~918] 태봉(왕족) 육전(A)수전(B)정치(B)모략(B)명성(SS)축성(B)

성은 김. 몰락한 진골귀족의 후예로,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 또는 제48대 경문왕(景文王)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아마도 정권다툼에서 희생되어 지방으로 몰려난 것으로 여겨진다. 어려서 세달사(世達寺:興敎寺)의 승려(僧號는 善宗)가 되어 선종(善宗)이라 불렸다.

신라가 쇠약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891년(진성여왕 5) 죽주(竹州:현 永同)의 산적 기훤(箕萱)의 부하가 되었다가 892년에 북원(北原)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었다. 그 후 양길의 부하를 거느리고 강원·경기·황해 일대를 공략하여 많은 군사를 모으는 데 성공하자, 군도(群盜)를 배경으로 세력기반을 굳혔다. 또한 평산(平山)의 호족이던 박지윤(朴遲胤)의 귀부와 해상무역에서 우위를 점하던 왕건가(王建家)의 협조로 군사력과 경제력을 얻게된다.이러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기반으로, 898년(효공왕 2) 양길을 타도하고 송악(松岳:현 개성)을 근거로 자립하여 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하고, 다시 901년에 후고구려를 건국하여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개칭하고, 도읍을 철원(鐵圓)으로 옮기고 연호를 무태(武泰)에서 성책(聖冊)으로 고쳤다. 911년에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개칭하면서 연호도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으며, 914년에 다시 연호를 정개(政開)라 개칭하였다.

궁예는 국사를 총리하는 광평성(廣評省)을 비롯하여 병부(兵部) 등 10부와 9관 등의 관제를 정비하여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또한 강원·경기·황해의 대부분과 평안·충청 일부를 점령하고, 왕건(王建)과 제휴하여 진도(珍島)·나주(羅州)를 점령하여 남서해의 해상권도 장악하였다.그러나 궁예는 신라를 멸도(滅都)라 일컫게 하고, 투항한 신라인을 모조리 죽이는 등 전제군주로서 횡포가 심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미륵신앙을 이용하였는데, 자신은 미륵불(彌勒佛), 두 아들은 보살(菩薩:靑光菩薩·神光菩薩)이라고 칭하였다. 915년에는 부인 강(康)씨와 두 아들을 살해한 후, 반궁여 세력에 대한 정치적 숙청이 이루어졌으며, 백성을 괴롭히는 등 호탕방일한 생활을 하였다.이와 같이 폭군으로 전락한 궁예는, 결국 그의 부하인 신숭겸(申崇謙)·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배현경(裵玄慶) 등이 왕건을 추대하자 도망가다 평강(平康)에서 백성에게 피살되었다.

 

 

강씨황후(康氏皇后) 태봉(왕족) 육전(D)수전(D)정치(C)모략(D)명성(S)축성(D)

패강진 신천(信川)호족 강씨가문의 딸로 부는 신천강씨(信川康氏)5대손 강연창(康衍昌)이라 추측한다. 본시 신천강씨의 시조 강효경(康虎景)은 태조 왕건의 외가측 6대 조상이기도 하다. 궁예의 정실부인이 되어 황후가 되었고, 청광,신광 두아들을 두었다. 915년 3월에 태봉주 궁예가 옳지 못한 일을 많이 한다하여 정색을 하고 간하였으나, 궁예가 그녀를 미워하여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니 웬일이냐?"고 하였다. 강씨가 말하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니, 궁예가 말하기를 "나는 신통력으로 보고 있다"고 하면서, 뜨거운 불로 쇠공이를 달구어 음부를 쑤셔 죽이고 그의 두 아이까지 죽임을 당했다. 학계에서는 패서세력과 청주세력간의 알력에서 벌어진 참극이라는 주장도 있다. 즉 궁예가 청주세력의 참소를 믿고, 혹 패서세력이 궁예를 폐하고 태자를 옹립한다고 의심해 죽였다는 설이다.

 

 

청광(靑光) 태봉(왕족) 육전(C)수전(B)정치(B)모략(D)명성(A)축성(C)태봉국주 궁예의 첫째 아들로, 강씨(康氏)부인 소생이다. 청광보살(靑光菩薩)은 관세음보살을 뜻한다. 915년 모 강씨황후와 함께 부 궁예에게 처형되었다. 일설에는 태자 청광의 아들이 순천김씨의 시조 김총이며, 백제로 투항했다는 설도 있다.

 

 

신광(神光) 태봉(왕족) 육전(C)수전(C)정치(C)모략(D)명성(A)축성(C)

태봉국주 궁예의 둘째 아들로, 강씨(康氏)부인 소생이다. 신광보살(神光菩薩)은 아미타불을 뜻한다. 915년 모 강씨황후와 함께 부 궁예에게 처형되었다. 광산이씨 족보에 의하면 신광의 아들이 광산이씨의 시조 김경(金敬)이다고 적혀있다.

 

 

궁경(弓敬)/김경(金敬) 태봉(왕족)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D)

궁예의 증손자로 광산이씨(光産李氏)의 족보에 따르면 고려태조 23년(940년) 태봉주 궁예의 증손(增孫) 경(敬)이 태조의 만류를 뿌리치고 광산군(光産郡)으로 피거(避居=피신)하였다. 궁경은 본시 궁예의 본성인 김(金)을 썼다는 설도 있다. 궁경의 아들 궁구(弓球)가 광주호장(光州戶長)을 지냈으며 광산호족인 이씨가문의 사위가 되어 광산이씨의 시조 종금(宗金)을 낳았다. 종금은 거란침입시 강감찬의 휘하로 공을 세워 현종으로 부터 이씨성을 하사받고 광산이씨를 세웠다.

 

 

종간(宗侃) 태봉 육전(C)수전(C)정치(A)모략(S)명성(B)축성(C)?∼918(태조 1). 태봉 궁예(弓裔)때의 관리. 관등은 소판(蘇判)이었다. 소판 종간은 어려서부터 중이 되어 간사한 일을 하기에 힘쓰고, 또한 궁예가 말년에 흉폭·잔인하여져 많은 사람들을 죽일 때 궁예의 신임을 믿고 내군장군(內軍將軍) 은부(狄鐵)과 더불어 간사 떨고 아첨함으로써, 어질고 착 한 사람들을 많이 참소하여 해쳤다. 이 때문에 918년 6월에 궁예가 쫓겨나고 왕건(王建)이 즉위하자 곧 죽음을 당하였다.

 

은부(狺鈇) 태봉 육전(B)수전(D)정치(B)모략(A)명성(C)축성(C)

?∼918(태조 1). 태봉 궁예(弓裔)때의 무장. 어려서부터 남의 집 하인으로서 간사한 말로 아첨을 잘 함으로써 궁예에게 총애를 받아 내군장군(內軍將軍)이 되었다. 궁예는 말년에 흉폭 잔인하여져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이때 궁예의 신임을 믿고 소판(蘇判) 종간(宗侃)과 더불어 간사하고 아첨함으로써 어질고 착한 사람들을 많이 참소하여 해쳤기 때문에, 918년 6월에 궁예가 쫓겨나고 왕건(王建)이 즉위하자 곧 죽음을 당하였다.

 

 

종희(宗希) 태봉 육전(C)수전(A)정치(C)모략(D)명성(C)축성(C)

후고구려의 알찬으로 왕건의 금성(나주)를 공략전때 부장으로 참전했다.

 

 

김언[金言, ?~?] 태봉 육전(B)수전(S)정치(C)모략(C)명성(B)축성(C)

후삼국시대 태봉(泰封)의 수군장(水軍將). 909년(효공왕13) 궁예의 명으로 종희(宗希)와 함께 왕건의 부장(副將)이 되어 수군(水軍)을 인솔하고 진도(珍島) ·고이도(皐夷島)를 점령하였다. 이어 나주 포구(羅州浦口)에서 견훤(甄萱)의 군대를 대파하여 호남지방을 거의 태봉의 판도에 넣었다. 그 공으로 왕건이 시중(侍中)이 되자 그 뒤를 이어 수군장이 되었다 

 

 

송함홍(宋含弘)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

본관은 음성(陰城)이다. 본래 궁예(弓裔) 태봉(泰封)의 신하로 있으면서 문사(文事)를 관장하였는데, 궁예가 객상(客商) 왕창근(王昌瑾)이 바친 거울에 쓰인 글자를 해독하게 하자 장차 왕건이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내용을 사실대로 알리면 왕건(王建)과 자신이 살해될까 두려워 거짓으로 꾸며서 말하였다. 뒤에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대상(大相)이 되었다.

 

 

백탁(白卓) 태봉(수원호족)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

생몰년 미상. 수원백씨로 백창직(白昌稷)의 둘째 아들이다. 자는 성지(聖之). 태봉의 문인이었는데, 918년 당나라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철원(鐵圓)의 시전(市廛)에서 살았는데, 어떤 이상한 사람으로부터 오래된 거울을 샀다고 한다. 그 거울에는 고시가 새겨져 있었다. 왕창근이 이를 궁예에게 보고하니, 궁예는 백탁 등의 문인에게 해석하게 하였다. 그 고시는 참언으로서, 당시 궁예 밑에서 파진찬(波珍飡)으로 있던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한다는 내용이었다. 백탁 등은 사실대로 보고하다가는 왕건이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적당히 꾸며서 거짓 보고하였다. 후에 고려의 병부시랑을 지내고, 아들로 백사청(白思淸), 백사렴(白思淸)이 있다.

 

 

백길(白吉) 태봉(수원호족) 육전(B)수전(C)정치(B)모략(B)명성(C)축성(D)

수원백씨로 수원(水原)호족 백창직(白昌稷)과 평택농성호족 임씨부인 사이에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태초(太初)이며, 태봉때 군에 투신하여 교위(校尉)를 지냈고, 고려 태조 때에는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광평시랑(廣評侍郞)을 역임하였고 문하시중으로 증직되었다. 혜종, 정종에 이르기까지 3대(代)를 섬겼다. 부인은 충주호족 유긍달의 딸이며 아들로 백사유(白思柔), 백사홍(白思弘)이 있다. 

 

허원(許原)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생몰년 미상. 태봉(泰封)의 문신.918년(정개 5) 태봉의 수도인 개성에 괴이한 용모의 노인이 나타나, 상인 왕창근(王昌瑾)에게 고경(古鏡)을 팔았다.그런데 왕창근의 고경을 벽위에 걸어두자 햇빛을 받아 글자가 보였으므로, 궁예(弓裔)에게 알렸다. 이에 허원은 송함홍(宋含弘)·백탁(白卓) 등과 함께 궁예의 명을 받아 고경에 쓰인 글자를 풀이하였다.그러나 그 문구는 궁예의 멸망과 왕건(王建)의 등장을 알리는 참언(讖言)이었으므로, 사실대로 고하면 화를 면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여 말을 적당히 꾸며서 거짓으로 궁예에게 알렸다.

 

 

환선길(桓宣吉) 태봉 육전(A)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918(태조 1). 고려초의 반역자.동생 향식(香寔)과 함께 고려 태조 왕건을 섬기고 추대한 공이 있었으며, 마군장군(馬軍將軍)으로서 태조의 심복이 되어 항상 정예군을 이끌고 숙위(宿衛)하였다.그의 아내가 “당신의 재력(才力)은 남보다 뛰어나서 사졸이 복종하고 또 큰 공이 있으나, 정병(政柄)은 다른 사람에게 있으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으랴!” 하니 병사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복지겸(卜智謙)이 이를 밀고하였으나 형적(形跡)이 나타나지 않자 가만 두었다.태조가 즉위한 지 4일 만에 50여명을 이끌고 내정(內庭)에 침입하였으나 태조의 태연함에 복병이 있는 줄 알고 의심하여 달아나다가 위사(衛士)에게 잡혀 죽었다.

 

 

향식(香寔) 태봉 육전(C)수전(D)정치(C)모략(C)명성(D)축성(D)

고려 마군장군 환선길의 동생으로 형 환선길과 역모를 꾀하다 참수당했다.

 

 

이흔암(伊昕巖) 태봉 육전(B)수전(C)정치(C)모략(A)명성(B)축성(C)?∼918(태조 1). 고려 태조 즉위 직후 반란을 꾀하였던 인물.일찍이 궁예를 섬겨 은밀한 일을 탐지해 바치는 것으로 신임을 얻음으로써 무관에 등용되었다. 궁예(弓裔) 말년 마군대장군(馬軍大將軍)으로써 웅주(熊州:공주)를 공격 탈취하여 그곳에 주둔하고 있었다.그러나 태조가 즉위하자 부르지도 않았는데 서울에 올라옴으로써 웅주가 후백제의 수중에 들어가 버렸다.이때 한찬(韓粲) 수의형대령(守義刑臺令) 염장이 웅주를 잃은 것에 대한 처벌을 요청함과 더불어 그에게 반란의 뜻이 있음을 밀고하였다.그러자 태조는 나인(內人)을 시켜 그의 집을 엿보게 하였다. 결국, 그의 처 환씨(桓氏)로부터 반란을 모의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그런데 이 사건은 태조원년(918) 6월의 일로 그의 처가 환씨인 점으로 미루어 앞서 일어난 환선길(桓宣吉)의 모반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또한, 이흔암·환선길의 모반사건은 궁예의 핵심적인 지지세력에 의한 것이라 추정된다.

또 일설에는 이흔암의 죽음이 웅주의 배반보다 앞서므로 이흔암의 죽음에 관한 반역열전에 실린 내용은 이흔암의 처형을 정당화 시키기 위해 조작되었다고 한다. 분명 이흔암은 918년 6월 기사일에 엽시당했고, 918년 8월 계해일에 김행도를 동남도초토사(東南道招討使)·지아주제군사(知牙州諸軍事) 삼았고, 그 이후 웅주,운주의 모반을 진압케 하였으나 실패했다. 그 이후 웅주에 관한 기록은 926년에 운주성주 긍준이 고려군에 의해 포위되어 항복하자, 웅주이북의 30여성이 항복했는데 웅주는 주위의 모든성이 고려로 항복하는데도, 항복하지 않았다. 927년 4월에는 태조가 친정하여 공격하였으나 함락되지 않았다. 이토록 강력하게 저항한것을 보면, 분명히 이흔암의 죽음과 웅주호족들과의 연관성을 부정할수가 없다.

다만 반역열전의 내용을 인정한다고 하면 <6월 을묘일에 역성혁명이 일어나고, 경신일에 환선길이 죽고, 몇일후 이흔암이 부하들하고 상경하자 웅주의 호족은 고려를 배반하고, 계사일에 이흔암이 처단당한다. 안밖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8월 계해일에 이르러서야 김행도를 초토사로 삼아 반란지역을 토벌케 한다.>는 시나리오도 성립가능하지만, 역시 웅주호족이 몇일사이에 배반한다는 것도 그렇고, 이흔암의 반역사실 또한 분명치 않음으로 전자의 가능성이 유력하다.

 

 

모흔(毛昕) 태봉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C)

생몰년 미상. 장군. 궁예(弓裔)의 부장(副長)이다.궁예가 891년 죽주(竹州)의 기훤(箕萱)에게 투탁하였다가 다음해 북원(北原)의 양길(梁吉)에게 몸을 맡겼다. 양길은 궁예를 잘 대우하여 군사를 나누어주어 동쪽을 공략하게 하니 궁예는 주천(酒泉:지금의 영월)·울오(鬱烏)·어진(御珍) 등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받았다.그 다음해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에 들어가니 군사가 3천5백여명이 되어 이를 14개의 부대로 나누어 김대금(金大黔)·모흔·장귀평(長貴平)·장일(張一) 등으로 사상(舍上), 즉 각 부대의 부장으로 삼았다고 한다.

 

장일(張一) 태봉 육전(B)수전(C)정치(B)모략(C)명성(B)축성(C)

생몰년 미상. 후삼국시대 궁예(弓裔)의 부하 장수.처음에 궁예는 북원(北原)의 적 양길(梁吉)의 휘하에 있으면서 강원도 일대를 공략하여 세력을 확대하였다.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를 근거지로 하여 주천(酒泉)·나성(奈城:지금의 경상북도 봉화) 등을 치고 명주(溟州:지금의 강릉)로 진출하여 갔을 때, 궁예의 무리가 3,500명에 이르게 되자 궁예는 이를 14개의 대(隊)로 나누었는데, 이때 김대금(金大黔)·모흔(毛昕)·장귀평(張貴平) 등과 함께 궁예에 의하여 사상(舍上:部長의 직)에 임명되어 궁예를 보좌하였다.

 

 

김대검(金大黔) 태봉 육전(B)수전(C)정치(C)모략(B)명성(C)축성(C)

생몰년 미상. 궁예(弓裔)의 부장(副長)이다. 궁예가 891년 죽주(竹州)의 기훤(箕萱)에게 투탁하였다가 다음해 북원(北原)의 양길(梁吉)에게 몸을 맡겼다. 양길은 궁예를 잘 대우하여 군사를 나누어주어 동쪽을 공략하게 하니 궁예는 주천(酒泉:지금의 영월)·울오(鬱烏)·어진(御珍) 등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받았다. 그 다음해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에 들어가니 군사가 3천5백여명이 되어 이를 14개의 부대로 나누어 김대금(金大黔)·모흔·장귀평(長貴平)·장일(張一) 등으로 사상(舍上), 즉 각 부대의 부장으로 삼았다고 한다.

 

 

장귀평(長貴平) 태봉 육전(B)수전(C)정치(B)모략(C)명성(C)축성(C)생몰년 미상. 궁예(弓裔)의 부장(副長)이다. 궁예가 891년 죽주(竹州)의 기훤(箕萱)에게 투탁하였다가 다음해 북원(北原)의 양길(梁吉)에게 몸을 맡겼다. 양길은 궁예를 잘 대우하여 군사를 나누어주어 동쪽을 공략하게 하니 궁예는 주천(酒泉:지금의 영월)·울오(鬱烏)·어진(御珍) 등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받았다. 그 다음해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에 들어가니 군사가 3천5백여명이 되어 이를 14개의 부대로 나누어 김대금(金大黔)·모흔·장귀평(長貴平)·장일(張一) 등으로 사상(舍上), 즉 각 부대의 부장으로 삼았다고 한다.

 

능률(能律) 태봉 육전(C)수전(D)정치(B)모략(B)명성(B)축성(D)태봉의 수의형대령직에 있었는데 왕건이 역성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직후 10월 경신일에 광평시랑에 임명되었다.

 

 

직예(職預)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D)태조 원년 918년 7월에 광평시랑(廣評侍郞)을 제수받고 10월에 능률(能律)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내시서기(內侍書記)을 제수받았다.

 

 

유척량(柳陟良)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B)축성(D)태봉국에서 진각성경직에 있었다. 진각성(珍閣省)은 국가 문서와 도서를 맡아보던 관아였는데, 태조가 여러 장수들의 추대를 받고 역성혁명을 일으켰을때, 여러 관료들이 모두 흩어져서 달아났으나 유척량만이 홀로 진각성의 사고창고를 지켰음으로 국가의 귀중한 문서와 도서가 하나도 상하지 않았음에 특별히 광평시랑으로 삼았다.

 

 

현율(玄律) 태봉 육전(B)수전(C)정치(B)모략(C)명성(C)축성(D)재경 청주호족으로 태조원년 918년 순군낭중(徇軍郎中)으로 있었는데 순군부의 임춘길등이 반란을 꾀하다 발각되어 죄과를 논하는 자리에서 태조에게 경종의 매부가 공직임을 말하며, 선처해줄것을 간하였는데, 염상의 반대로 결국 경종은 처형되었다. 또한 배현경의 탄핵을 받아 순군낭중에서 병부낭중으로 자리를 옮겼다. 순군부는 실질적인 병력을 움직일수 있는 관청이고 병부는 그런 권한이 없는 부서이다.

 

김행도(金行濤) 태봉 육전(B)수전(C)정치(S)모략(C)명성(A)축성(C)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재상.918년 고려의 건국 후 한찬(韓粲)으로 광평시중(廣評侍中)이 되어 백관의 수반이 되었다.이해 웅주(熊州:지금의 公州)·운주(運州:지금의 洪州) 등 12개 주현(州縣)이 후백제에 귀부(歸附)하자, 동남도초토사(東南道招討使)·지아주제군사(知牙州諸軍事)가 되어 이를 토벌하였다.

 

 

박유(朴儒)/왕유(王儒) 태봉(춘주호족) 육전(D)수전(D)정치(S)모략(A)명성(A)축성(D)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 때의 명신. 자는 문행(文行). 경사(經史)에 능통하여 처음에는 궁예(弓裔)의 휘하에서 원외(員外)를 거쳐 동궁기실(東宮記室)에 이르렀으나, 궁예의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출가하여 산곡에 은거하였다. 918년(태조1년)에 태조가 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 등의 추대를 받아 고려를 창업하자, 이 소식을 듣고 태조에게로 왔다. 이때 태조는 은나라의 고종이 부암(傅巖)에서 현상(賢相) 열(說)을 얻고, 주(周)나라의 문왕이 위수(渭水)에서 태공망(太公望: 呂尙)을 얻은 고사에 비유하여 극진히 예우하고 관대(冠帶)를 하사하였다. 이후 기밀을 관장하는 요직에 있으면서 왕씨를 사성받았다. 922년에는 진보(眞寶: 청송)의 성주 홍술(洪術)이 귀부를 원하므로 경(卿) 함필(含弼)과 함께 위유(慰諭)하였다. 932년에 대상(大相)으로 후당(後唐)에 가서 조공하고 책봉을 요청하였는데, 그 결과 태조는 고려왕에, 부인 유씨(柳氏)는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에 각각 봉해졌다. 시호는 장순(章順)이다.

춘주(춘천)호족으로 삼한 통일직후 대광(大匡)벼슬에 있었는데, 왕건의 호족 혼인정책으로 딸을 태조에게 시집보냈다. 딸은 왕후에는 책봉되지 못하고 비로써 서열 18위였고 예화부인(禮和夫人)이라 불리웠다.

 

 

능범(能梵) 태봉 육전(C)수전(D)정치(C)모략(C)명성(D)축성(C)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관인. 신라말 지방호족출신으로 궁예(弓裔)정권에 참여하였다가 다시 왕건의 고려 건국에 협조한 인물로 보인다. 건국한 그해 6월에 내봉낭중(內奉郎中)에 임명되었다가 곧 내장(內莊) 및 동궁(東宮) 식읍(食邑)의 심곡사(審穀使)가 되었다.그의 가계가 후대의 토성과 전혀 연결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국초의 왕권쟁탈전의 과정에서 도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곡긍회(曲矜會) 태봉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

후당 용천(龍川)사람으로 태봉에서 내봉사(內奉史)직에 있었는데 태조 원년 첫개각때 개국 2등공신에 책록되고 평찰(評察)에 임명되었다.

 

 

국현(國鉉)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D)축성(D)

고려 태조 원년(大祖元年)에 원외랑(員外郞)에 제수되었으며,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원외랑은 상서성의 정6품 벼슬이다.

 

 

기달(箕達) 태봉 육전(B)수전(C)정치(D)모략(C)명성(D)축성(D)

태봉의 마군(馬軍)으로 청주호족 경종과 친분이 있었다. 918년 태조가 패서지역 호족과 군부의 추대로 역성혁명을 성공한 직후 친궁예파로 분류되던 청주세력은 큰위기를 맞게 된다. 이중 청주호족 경종(景琮)은 매곡성주 공직의 매제였는데, 임춘길등과 백제로의 전향을 모의하면서 친분이 있던 기달에게 자신의 조카가 인질로 황도에 있어 애처롭다. 기회를 보아 애를 데리고 도망쳐 청주로 돌아가야겠다고 말했는데, 기달은 이 사실을 마군 대장군(馬軍大將軍) 염상(廉湘)에게 고하니, 연루된 경종 이하 재경 청주세력들이 처형을 당했다.

 

 

적의적(赤衣賊) 태봉(증성의 농민반란군)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

신라말 증성(甑城)(평남 안변)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란 농민군으로 온통 빨간옷을 입어 적의적이라 불리웠다. 우두머리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905년에 황의적 명귀와 함께 궁예에게 항복하였다.

 

 

명귀(明貴) 태봉(증성 농민반란군) 육전(B)수전(D)정치(D)모략(B)명성(C)축성(D)

신라말 증성(甑城)(평남 안변)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군 황의적(黃衣賊)의 두목으로, 온통 노란옷을 입어 황의적이라 불리웠다. 905년에 적의적과 함께 궁예에게 귀부한후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홍기(弘奇) 태봉(공주호족) 육전(B)수전(B)정치(C)모략(C)명성(C)축성(C)

공주(公州)호족으로, 904년 7월에 태봉군이 상주등 30여 주를 쳐서 빼앗자, 공주호족 홍기도 태봉에게 귀부하였다. 이로써 궁예의 세력권이 금강 유역에까지 미치었다.

 

 

박득의(朴得宜) 태봉 육전(D)수전(B)정치(B)모략(C)명성(C)축성(C)

면천박씨(沔川朴氏)의 상조로, 신라 제 5대왕 파사왕의 21세손이다. 태봉국에서 대승(大丞 정2품)을 지냈다. 아들 박술희(朴述熙)는 고려 태조의 개국공신으로 면천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면천으로 하였다.

 

 

금식(黔式)/검식(黔式) 태봉 육전(A)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태봉의 정기장군(精騎將軍)으로 906년 4월 궁예의 명을 받아 왕건과 함께 군사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견훤(甄萱)과 더불어 상주(尙州) 사화진(沙火鎭)에서 싸웠는데 여러 번 싸움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능준(能駿) 태봉 육전(B)수전(C)정치(B)모략(C)명성(C)축성(D) 

태봉국의 수순군부경(守徇軍部卿)으로 있었는데, 태조의 역성혁명 직후 조정개편에서 권식(權寔)과 함께 내봉경(內奉卿)에 임명되었다.

 

 

권식(權寔)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D)

태봉국의 창부경(倉部卿)으로 있었는데, 태조의 역성혁명 직후 조정개편에서 능준(能駿)과 함께 내봉경(內奉卿)에 임명되었다.

 

 

김인(金堙) 태봉 육전(C)수전(C)정치(B)모략(B)명성(C)축성(C)

태봉국의 알찬(閼粲)으로 있었는데, 태조의 역성혁명 직후 조정개편에서 영준(英俊)과 함께 병부경(兵部卿)에 임명되었다.

 

 

영준(英俊) 태봉 육전(C)수전(C)정치(B)모략(B)명성(C)축성(C)

태봉국의 알찬(閼粲)으로 있었는데, 태조의 역성혁명 직후 조정개편에서 김인(金堙)과 함께 병부경(兵部卿)에 임명되었다.

 

최문(崔汶)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D)

태봉국의 알찬(閼粲)으로 있었는데, 태조의 역성혁명 직후 조정개편에서 견술(堅術)과 함께 창부경(倉部卿)에 임명되었다.

 

 

견술(堅術)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D)

천령인(川寧人)으로 태봉국의 알찬(閼粲)으로 있었는데, 태조의 역성혁명 직후 조정개편에서 최문(崔汶)과 함께 창부경(倉部卿)에 임명되었다. 천령견씨의 시조 견권(堅權)이라는 설도 있다.

 

 

박인원(朴仁遠)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D)

태봉국의 일길찬(一吉飡)직에 있었는데, 태조의 역성혁명 직후 조정개편에서 김언규(金言規)와 함께 백서성경(白書省卿)에 임명되었다.

 

 

요인휘(姚仁暉)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D)

태조원년(918년) 태조의 역성혁명 직후 개각된 조정에서 향남(香南)과 함께 물장경(物藏卿)에 임명되었다.

 

 

향남(香南)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D)

태조원년(918년) 태조의 역성혁명 직후 개각된 조정에서 요인휘(姚仁暉)와 함께 물장경(物藏卿)에 임명되었다.

 

 

능혜(能惠) 태봉 육전(B)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

고려 태조가 역성혁명에 성공한 직후 벌어진 조정개각에서 희필(曦弼)과 함께 내군경(內軍卿)에 임명되었다.

 

 

희필(曦弼) 태봉 육전(B)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

고려 태조가 역성혁명에 성공한 직후 벌어진 조정개각에서 능혜(能惠)와 함께 내군경(內軍卿)에 임명되었다.

 

 

강윤행(康允珩) 태봉 육전(C)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A)태봉국의 광평낭중(廣評郞中)으로, 왕건의 역성혁명 이후 조정개각에서 내봉감(內奉監)으로 임명되었다.

태조2년 10월에는 평양성 축성을 명받아 이를 완성했다.

 

한신일(韓申一) 태봉 육전(D)수전(C)정치(B)모략(B)명성(C)축성(D)태봉국의 한찬(韓粲)으로 태조의 역성혁명후 조정개각에서 임식(林寔)과 함께 광평낭중(廣評郎中)에 임명되었다. 또 광평시랑직에 있던 923년에 오월국에서 귀부한 박암과 더불어 후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예언(倪言)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태봉국의 광평사(廣評史)로 태조의 역성혁명 직후 개각된 조정에서 내봉이결(內奉理決)에 임명되었다. 

 

 

유길권(劉吉權) 태봉 육전(B)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C)

태종국의 내봉사(內奉史)로 태조의 역성혁명 직후 개간된 조정에서 순군낭중(徇軍郎中)에 임명 되었다. 태조 14년 931년 유금필이 참소를 입었을때 순군부령으로 유금필을 압송했다.

 

 

박질영(朴質榮) 태봉 육전(D)수전(D)정치(A)모략(B)명성(B)축성(A)

태봉국의 한찬(韓粲) 및 의형대령(爲義刑臺)이었는데, 태조의 역성혁명 직후 단행된 조정개각에서 시중(侍中)에 임명되었다. 922년 11월에는 김행파와 더불어 서경(평양) 개척에 투입되어 공을 세웠으며, 말년에는 태자 왕무의 정윤 책봉을 반대했다.

 

 

윤행(尹珩)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태봉의 내봉원외랑(內奉員外郞)직에 있을 당시, 태조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고려를 개창한 원년에 내봉낭중(內奉郎中)으로 임명되었다.

 

 

이긍회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태봉의 내봉사(內奉史)직에 있을당시, 태조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고려를 개창한 원년에 내봉원외랑(內奉員外郞)으로 임명되었다.

 

 

직성(直晟)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태봉의 백서성(白書省)의 공목(孔目)직에 있을당시, 태조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고려를 개창한 원년에 백서낭중(廣評郞中)으로 임명되었다.

 

 

민강(閔剛) 태봉 육전(A)수전(D)정치(C)모략(B)명성(B)축성(D)

태봉의 순군낭중(徇軍郎中)으로 태조가 궁예를 쫒고 역성혁명을 일으켰을때 공을 세워, 고려 개국후 내군장군으로 임명되었다.

 

 

노강필(盧康弼) 태봉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교하노씨(交河盧氏)의 시조로 본시 기계(杞溪 포항)사람으로 신라말 나라가 어지러울때 본관(本貫)을 장산(章山 경북 경산)으로 옮겼다가, 태봉국이 들어서자 철원으로 옮겨 태봉조정에 출사하였다. 학문이 뛰어나 태조 왕건과 교분을 텨, 태조의 역성혁명 당시 공을 세워 개국공신에 책록되었다. 그후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역임한후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식읍으로 옛 선조가 정착했던 교하(交河 파주)를 받아 그후 후손들이 정착해 살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교하노씨다.

 

 

임춘길(林春吉) 태봉(재경청주) 육전(B)수전(D)정치(B)모략(B)명성(B)축성(D)?∼918(태조 1). 고려 태조 때의 모반자. 청주인. 순군부(徇軍部) 이직(吏職)에 있었던 자로 고려 태조가 즉위하자 모반을 한 인물이다.태조 1년 9월 같은 청주인인 배총규(裵悤規), 계천(季川:전남 장흥)사람 강길(康吉)·아차귀(阿次貴), 매곡(昧谷:충북 회인)사람 경종(景琮) 등과 반란을 일으켜 청주로 도망하고자 하였다.그러나 복지겸(卜智謙)이 이 사실을 태조에게 밀고함으로써 잡혀 죽게 되었다. 이에 청주인인 순군낭중(徇軍郎中) 현율(玄律)이 경종의 매형이 후백제와의 접경지대인 매곡성주 공직(#공40直)임을 들어 이들을 살려줄 것을 청하였다.그러나 마군대장군(馬軍大將軍) 염상(廉湘)이 이를 반대하여 결국 죽음을 당하였다.이 모반사건의 영향으로 현율은 병부낭중으로 관직이 바뀌었으며, 그해 10월 청주에서 진선(陳瑄)·선장(宣長)형제의 모반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청주인들에 의한 모반사건은 궁예(弓裔)집권시인 904년 청주인 1, 000여호를 철원으로 이주시킨 데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라 추정된다.

 

아지태 태봉(재경청주) 육전(C)수전(D)정치(B)모략(A)명성(B)축성(C)생몰년 미상. 후삼국시대 궁예(弓裔)의 부하.청주(靑州:지금의 청주) 사람으로 본래 남을 속이고 아첨하기를 좋아하였는데, 궁예가 참소를 좋아하자 아지태는 자기와 동향인 입전(笠全)•신방(辛方)•관서(寬舒) 등을 참소하였다.그래서 유사(有司)에서 몇 년간 심문하였는데도 해결을 보지 못하다가, 913년(수덕만세 3) 왕건(王建)에 의하여 진실이 가려져서 아지태는 복고(伏辜)되었다.

 

 

배총규(裵悤規) 태봉(재경청주) 육전(B)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C)태조왕건이 역성혁명으로 고려를 개국했을때 재경 청주인은 궁예파와 왕건파로 나뉘었다. 배총규는 궁예파로 혁명직후 청주출신의 순군리 임춘길등이 강질,아차귀,경종과 함께 반역의 음모를 꾸미고 청주로 돌아가려 하였는데, 이에 배총규도 가담하였다. 복지겸의 보고에 의해 태조가 이들을 체포하고 신문하자 모두 죄를 자백했다. 이때 배총규만은 음모가 누설되었음을 알고 도망하였다.

 

 

관서(寬舒) 태봉(재경청주) 육전(D)수전(D)정치(C)모략(C)명성(D)축성(D)태봉국에서 같은 고향사람 아지태로부터 참소를 당했다. 아지태는 아첨을 좋아하고 간사하였는데, 궁예에게 같은 고을 사람 관서와 입전등을 참소할 것을 청하였다. 해당관리가 이 사건을 심리하였으나 수년 동안 판결을 내리지 못하였다. 왕건이 당장 그 흑백을 분간해 판결을 내리니 여러 사람들이 그것을 유쾌하다 생각하였다고 한다.

 

 

입전(笠全) 태봉(재경청주) 육전(D)수전(D)정치(C)모략(C)명성(D)축성(D)청주사람으로 태봉때 같은 고향사람 아지태에 의하여 신방(辛方),관서(寬舒)등과 함께 참소를 당하였다. 그러나 이사건을 왕건이 심리하여 그 흑백을 분간하여 판결을 내려주어 여러 사람들이 태조를 따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신방(辛方) 태봉(재경청주) 육전(D)수전(D)정치(C)모략(C)명성(D)축성(D)청주사람으로 태봉때 같은 고향사람 아지태에 의하여 입전(笠全),관서(寬舒)등과 함께 참소를 당하였다. 이 일을 해당관리가 심리하였으나, 수년이 지나도록 판결이 나지 않았다. 이때 왕건이 사건의 흑백을 분간하여 판결을 내려주어 일이 잘 해결되었다. 이일로 인해 군문의 장교, 종실, 훈현들과 지혜있고 학식 있는 무리들이 모두 태조에게 쏠리어 그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강길(康吉) 태봉(재경청주) 육전(D)수전(D)정치(D)모략(B)명성(D)축성(D)태조 원년 918년 계천(季川, 전남장흥) 사람으로 아차귀와 함께 재경 청주세력인 임춘길,배총규,경종을 사주하여 반란을 꾀하다 복지겸의 밀고로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백제의 사주를 받았다는 설도 있다.

 

 

아차귀(阿次貴) 태봉(재경청주) 육전(D)수전(D)정치(D)모략(B)명성(D)축성(D)태조 원년 918년 계천(季川, 전남장흥) 사람으로 강길과 함께 재경 청주세력인 임춘길,배총규,경종을 사주하여 반란을 꾀하다 복지겸의 밀고로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백제의 사주를 받았다는 설도 있다.

 

 

총일(聰逸) 태봉(재경청주) 육전(D)수전(D)정치(C)모략(D)명성(D)축성(C)

청주 호족 출신으로 한찬(韓粲) 벼슬에 있었다. 918년 왕건이 청주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해 궁예가 벌을 내린 윤전,애견등을 구원하라 명하였다. 고려 개국후 2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윤전(尹全) 태봉(청주) 육전(C)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생몰년 미상. 신라 경명왕 때의 군인.청주의 군인이었는데, 궁예(弓裔)가 청주를 차지한 뒤 청주의 땅이 기름지고 호걸스러운 사람이 많아서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이들을 섬멸하고자 하였다.이로 인하여 애견(愛堅) 등 80여인과 함께 죄없이 끌려가고 있었는데, 왕건의 명을 받은 청주출신 한찬(韓粲) 총일(摠逸)에 의하여 918년(태조 1) 6월에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애견(愛堅) 태봉(청주)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C)신라 경명왕 때 청주에 파견된 군인이었는데, 궁예(弓裔)가 청주를 차지한 뒤 청주의 땅이 기름지고 호걸스러운 사람이 많아서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이들을 섬멸하고자 하였다.이로 인하여 윤전(尹全)등 80여인과 함께 죄없이 끌려가고 있었는데, 왕건의 명을 받은 청주출신 한찬(韓粲) 총일(摠逸)에 의하여 918년(태조 1) 6월에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경종(景琮) 태봉(청주호족) 육전(B)수전(D)정치(D)모략(B)명성(C)축성(C)고려전기 청주 매곡의 호족으로 태조 왕건이 정권을 잡자 청주출신의 순군리 임춘길이 반역의 음모를 하고 청주로 돌아가려 할때 경종은 그의 반역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복지겸의 보고에 의해 이들은 체포당하여 모두 다 죄를 인정하였따. 이에 모두 금고처분을 받았다. 이때 청주출신의 현율이라는 인물이 태조에게 말하기를 "경종의 누이가 매곡성주(청원군 문의면) 공직의 처인데, 성이 대단히 견고하며 백제와 인접해 있다. 만약 경종을 죽이면 공직이 반드시 배반할 것이니 용서해서 회유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태조가 이 의견을 쫒으려 하였으나 마군대장군 염상이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경종이 일찍이 마군 기달에게 말하기를 "누이의 어린 아들이 지금 황도에 있어, 모자가 떨어져 있다. 애처로워 견디지 못하겠다. 시국을 보니 어지러워서 모여 살수 있을것 같지도 않다. 기회보다 그 애를 데리고 도망쳐 돌아가겠다."고 하였는데 경종의 모반을 보니 그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태조가 크게 깨닫고 경종을 죽이게 하였다.

 

진선(陣瑄) 태봉(청주호족) 육전(C)수전(C정치(B)모략(B)명성(B)축성(C)

태봉국 청주호족의 대표격으로 파진찬 벼슬에 있었다. 재경청주세력인 임춘길등이 역성혁명 직후 제거당하자, 한달후인 918년 10월에 동생 선장(宣長)과 더불어 청주에서 모반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해 죽었다.

 

 

선장(宣長) 태봉(청주호족)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태봉 청주의 수장 파진찬 진선의 동생으로 친궁예파로 분류된다. 재경청주세력인 임춘길이 제거당하자 형 진선과 더불어 청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당해 처형당했다.

 

 

금용 (黔用) 태봉(평양호족) 육전(B)수전(C)정치(C)모략(D)명성(C)축성(D)평양지방에서 세력을 떨쳤으며, 평양성주장군(平壤城主將軍)이라는 위치에 있었다. 904년 궁예가 철원에 도읍하여 국가체제를 갖추고 이듬해 패서(浿西: 黃海·平安)를 13진(鎭)으로 확정하는 등 국가로서의 기반을 다지자, 궁예(弓裔)에게 투항하였다. 그와 공주의 장군 홍기(弘奇), 안변(安邊)의 명귀(明貴) 등이 투항함으로써 궁예는 세력의 강성함을 스스로 믿고 신라 병합을 시도하게 된다.

 

 

왕창근(王昌瑾) 당 육전(D)수전(D)정치(D)모략(C)명성(D)축성(D)

당나라 상인으로 태봉국 철원에서 교역중 918년 3월에 문득 시중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다. 얼굴 생김이 이상하고 수염과 머리가 희며, 머리에는 낡은 관을 쓰고 거사복을 하고, 왼 손에는 바리 세 개를 들고 오른 손에는 사방 1자나 되는 옛날 거울 하나를 들고 있었다.쌀 2말을 주고 사서 벽에 걸었더니 해가 거울에 비치면서 가늘게 쓰인 글자가 보여 이상히 여기고 그 거울을 궁예에게 바쳤다. 궁예는 이를 송함홍(宋含弘) 등에게 명하여 해석하게 하였더니 대략 왕건이 궁예를 쳐서 새로운 나라를 개국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송함홍등은 가짜로 해석하여 궁예에게 고함으로써 왕건이 피해를 입지 않았다. 훗날 고경참문은 혁명군에 의해 인용되기도 하였다.

 

 

 

 

 

 

 

 

 

 

 

 

범백제권

 

견훤(甄萱, 867~936) 백제 육전(SS)수전(B)정치(B)모략(C)명성(SS)축성(B)

전주견씨(全州甄氏)의 시조이고, 본성은 이(李)이며, 아자개(阿慈介)의 아들이다.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지금의 문경시 가은읍)에서 태어났다. 신라에 태어나 서남해(西南海) 지방 방위에 공을 세워 비장(裨將)이 되었는데,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892년(진성여왕 6) 반기를 들고 일어나 여러 성을 공략하고, 무진주(武珍州: 광주)를 점령하여 독자적인 기반을 닦았다.

900년(효공왕 4) 완산주(完山州:全州)에 입성하여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나라이름을 후백제라 하였다. 관제를 정비하는 한편, 중국에도 사신을 보내어 국교를 맺으면서, 궁예(弓裔)의 후고구려(後高句麗)와 자주 충돌하며 세력 확장에 힘썼다. 그 뒤 왕건(王建)이 세운 고려와도 수시로 혈전을 벌여 군사적 우위(優位)를 유지했다.

926년 신라의 수도인 금성(金城:경주)을 함락하여 친려(親麗)정책을 쓰던 경애왕(景哀王)을 살해한 후, 효종의 아들인 김부(金傅)를 왕(경순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경순왕 역시 친려(親麗)정책을 고수하였으며, 신라의 민심은 고려의 왕건에게 기울어져갔다. 929년 고창(古昌: 안동)에서 왕건의 군사에게 크게 패한 후부터 차츰 형세가 기울어 유능한 신하들이 계속 왕건에게 투항하고, 934년 웅진(熊津:공주) 이북의 30여 군현, 동해연안의 110여 성이 고려에 귀속했다.

이듬해 왕위계승문제로 맏아들 신검(神劒)이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했으나 탈출하였다. 그리고 고려 왕건에게 투항하여 상부(尙父) 칭호와 양주(楊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936년 왕건에게 신검의 토벌을 요청하여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고려의 왕건이 신검 등을 우대하는 것을 보고 분을 못이겨 앓다가 얼마 뒤 황산(黃山:충남 논산시 연산면) 불사(佛舍)에서 등창이 나서 죽었다

 

명길(明吉) 백제 육전(B)수전(C)정치(D)모략(D)명성(B)축성(C)생몰년 미상. 후백제의 장군.936년에 후백제 신검(神劍)은 고려 태조가 이끈 고려군과 일선군(一善郡:지금의 경상북도 선산) 일리천(一利川)에서 대치하고 있었는데, 후백제의 장군인 그는 고려군의 병세(兵勢)에 위압되어 싸우지도 못하고 고려 진전(陣前)으로 나와 항복하였다.이때 항복한 후백제의 장군들은 명길을 비롯하여 효봉(孝奉)·덕술(德述)·애술(哀述) 등이었다.

 

 

민극(閔筐) 백제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생몰년 미상. 후백제에서 고려에 파견되었던 사신.《고려사》에는 민합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의 민극을 잘못 기록한듯하다.

918년 6월 궁예(弓裔)가 몰락하고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하자, 견훤(甄萱)은 그해 8월 일길찬(一吉飡) 민극을 고려에 보내어 왕건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이때 고려에서는 광평시랑(廣平侍郎) 한신일(韓信一) 등이 감미현(甘彌縣)에서 민극 일행을 맞이하고 이들을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견훤이 왕건즉위 축하사신인 민극편에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에서 나는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선물하였다고 하였으나, 《고려사》에는 920년(태조 3) 9월 견훤이 아찬(阿飡) 공달(功達)을 보내어 공작선과 지리산 죽전(竹箭)을 왕건에게 바쳤다고 하여 두 책간에는 내용상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진호(眞虎) 백제 육전(D)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D)?∼926(견훤 35). 후백제가 고려에 보낸 볼모. 후백제왕 견훤(甄萱)의 외생(外甥:처의 형제 혹은 시집간 여동생이 낳은 사내아이)이다.925년 10월 견훤은 기병(騎兵) 3, 000을 이끌고 조물성(曹物城)에서 고려 왕건(王建)의 군대와 대적하였다.이때 사세가 불리함을 느낀 왕건은 후백제와 화친을 청하면서 조카 왕신(王信)을 볼모로 보냈다. 그리하여 같은해 11월 진호는 견훤의 명을 받고 고려에 볼모로 파견되었으나 이듬해 4월 갑자기 죽었다. 그의 죽음은 후백제와 고려 사이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즉, 견훤은 그의 죽음을 고려인의 고의적인 살해로 간주하여, 고려측의 볼모인 왕신을 처형하는 한편, 고려에 선물로 보냈던 총마(聰馬)를 되돌려 받았다.아울러 군사를 일으켜 지금의 공주지역을 공격하였는데, 이후 후백제와 고려는 본격적인 전쟁상황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의 죽음에 견훤이 이처럼 민감하게 반응한 이유는, 견훤과 연결된 가계(家系)의 호족적 비중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신덕(新德) 백제 육전(B)수전(D)정치(B)모략(A)명성(B)축성(B)생몰년 미상. 후백제 때의 관리. 관등은 파진찬(波珍飡)이었다.후백제의 왕 견훤(甄萱)에게는 아들이 10명이나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넷째 아들 금강(金剛)을 특히 좋아하여 왕위를 물려줄 뜻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둘째 아들 양검(良劍), 셋째아들 용검(龍劍) 및 이찬(伊飡) 능환(能奐), 파진찬 영순(英順) 등과 함께 935년(견훤 44) 3월에 첫째아들 신검(神劍)을 권하여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가두고 지키게 하였으며, 금강을 죽이고 신검이 왕위에 오르는 데 공을 세웠다.

 

 

흥달(興達) 백제(고사갈이성)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C)?∼927(태조 10). 처음 견훤(甄萱) 휘하에 들어가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지금의 聞慶)의 성주가 되었다.927년에 왕건(王建)이 강주(康州)를 순행할 때 고사갈이성을 지나자, 성주로 있으면서 그 아들을 보내어 귀순하는 뜻을 전하고 항복하였다. 그의 귀순으로 후백제에서 배치한 군졸과 관리들이 모두 고려에 항복하였다.왕건은 그 공을 높이 사서 청주(靑州)의 녹을 내려주고 맏아들 준달(俊達)에게는 진주(珍州), 둘째아들 웅달(雄達)에게는 한수(寒水:未詳), 셋째아들 옥달(玉達)에게는 장천(長淺:지금의 長湍)의 녹을 내려주고, 또 전택(田宅)을 후하게 하사하였다.이후 견훤이 고사갈이성을 공격하려 하자, 이를 막으려고 출정 준비를 하던 중 병을 얻어 10여일 만에 죽었다. 삼한통일후 삼한공신에 책록되었다.

 

준달(俊達) 백제(고사갈이성) 육전(C)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C)백제의 장수 흥달의 장남으로 고사갈이성의 성주로 있었는데 927년 왕건이 강주순행때 고려에 귀순하였다. 진주(珍州)의 녹을 받았다.

 

 

웅달(雄達) 백제(고사갈이성) 육전(C)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C)백제의 장수 흥달의 차남으로 고사갈이성의 성주로 있었는데 927년 왕건이 강주순행때 고려에 귀순하였다. 한수(寒水:未詳)의 녹을 받았다.

 

 

옥달(玉達) 백제(고사갈이성) 육전(C)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C)생몰년 미상. 신라말과 고려초의 지방호족.아버지는 강주(康州)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의 성주인 흥달(興達)이고, 형제에 준달(俊達)·웅달(雄達)이 있다.927년(태조 10) 8월 견훤(甄萱)의 부하로 있던 흥달이 태조에게 귀순하자, 태조가 이들을 후대하였는데, 이때 옥달은 장천현(長淺縣:지금의 경기도 장단군)의 녹(祿)과 전택(田宅)을 하사받았다.

 

 

관흔(官昕) 백제 육전(SS)수전(B)정치(B)모략(A)명성(A)축성(A)생몰년 미상. 후백제의 장군.928년(경순왕2) 견훤(甄萱)의 명으로 양산성(陽山城:沃川)을 쌓아 수비하다가 고려 태조가 명지성장군(命旨城將軍) 왕충(王忠)에게 명하여 양산성을 치자 대량성(大良城)으로 후퇴한 후, 다시 군비를 갖추어 대목군 화가(大木郡禾稼)를 함락하였으며, 오어곡(烏於谷:岳谷城)에 이르러 죽령(竹嶺) 지방까지 확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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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귀(相貴) 백제 육전(B)수전(S)정치(C)모략(C)명성(A)축성(D)생몰년 미상. 후백제의 장수. 관등은 일길찬(一吉飡)이었다.932년(견훤 41) 9월 후백제 견훤(甄萱)의 명령에 따라 고려를 칠 때 수군을 거느리고 예성강에 들어가 사흘간을 머무르면서 염주(鹽州:지금의 연안)·백주(白州:지금의 배천)·정주(貞州:지금의 풍덕)의 세 주에 있는 적선 100척을 빼앗아 불태우고, 다시 저산도(猪山島)의 목마(牧馬)300필을 잡아가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상애(尙哀) 백제 육전(A)수전(SS)정치(B)모략(B)명성(A)축성(B)생몰년 미상. 후백제의 해군장군. 일명 상애(常哀).932년(견훤 41) 10월 그는 고려의 영토인 대우도(大牛島)를 공격하여 노략질하였다.이때 고려태조 왕건(王建)은 대광(大匡) 만세(萬歲) 등을 보내어 이를 구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종훈(宗訓) 백제 육전(B)수전(B)정치(B)모략(S)명성(A)축성(B)생몰년 미상. 후백제 견훤(甄萱)때의 술사(術士).후백제와 고려 사이의 영토확장 싸움이 계속되던 중 934년(태조 17) 9월에 왕건(王建)이 직접 운주(運州:지금의 홍성)를 정벌하자 견훤은 갑사(甲士) 5, 000명을 보내어 싸우게 하였지만 미처 진을 치기도 전에 고려군의 공격을 받아 3, 000명이 죽고 대패하였다.이때 종훈은 의사(醫師) 훈겸(訓謙), 장수 상달(尙達)·최필(崔弼)과 함께 사로잡혔다

 

상달(尙達) 백제 육전(A)수전(B)정치(C)모략(C)명성(B)축성(C)생몰년 미상. 후백제의 장군. 일명 상봉(尙逢)이라고도 한다.934년(견훤 43) 정월 고려 태조와 후백제 견훤(甄萱)사이의 싸움이 치열해졌을 때, 태조가 운주(運州:지금의 홍성군)에 주둔하자, 견훤이 갑사(甲士) 5, 000명을 뽑아 마주 싸웠으나 미처 진(陣)을 치기도 전에 고려의 장군 유금필(庾黔弼)이 기병 수천명으로 쳐들어와 3, 000여명의 목을 베자, 웅진(熊津)이북 30여성이 소식을 듣고 자진해서 항복하였다.이때 상달은 역시 견훤의 휘하인 술사(術士) 종훈(宗訓)과 의자(醫者) 훈겸(訓謙), 용장(勇將) 최필(崔弼)과 함께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훈겸(訓謙) 백제 육전(D)수전(D)정치(C)모략(D)명성(B)축성(D)생몰년 미상. 후백제 견훤(甄萱)때의 의사(醫師)로 견훤의 주치의였다고 한다.태조17년 9월에 운주에서 5천의 병력과 함께 고려군에 대항했지만 대패하여 3천이 죽었다. 이때 종훈,상달,최필등과 함께 사로잡히었다. 지겸(之謙)이라 불리었다고도 한다.

 

 

신검(神劍) 백제 육전(B)수전(B)정치(B)모략(B)명성(S)축성(B)생몰년 미상. 후백제의 제2대왕. 재위 935∼936.후백제의 시조 견훤(甄萱)은 여러 비빈(妃嬪)들 사이에 왕자를 10여인이나 두었다 한다. 그 중에서도 넷째아들 금강(金剛)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으므로 특별히 사랑하여 장차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다.이에 불안을 느낀 신검은 935년(견훤 44) 3월에 능환(能奐)과 두 아우 양검(良劍)·용검(龍劍) 등의 권유를 받아들여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시키고 아우 금강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신검은 933년 5월에 고려의 유금필(庾黔弼) 등과 더불어 접전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싸움터에서의 실전경험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한편, 금산사에 유폐되어 있던 견훤은 이듬해 6월에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쇠복(衰福)과 애첩 고비(姑比) 등을 데리고 금성(錦城:지금의 전라남도 羅州)으로 달아나 사람을 보내어 고려 태조를 만나기를 청하였다.고려 태조는 유금필·만세(萬歲) 등을 보내어 바닷길로 가서 위로하고 데려와 후한 예로 대우하였으며, 견훤이 자기보다 나이가 10년 위라 하여 높여 상보(尙父)를 삼고 남궁(南宮)에 거처하게 하였다. 그리고 양주(楊州)를 주어 식읍(食邑)을 삼게 하였다.이러한 내분을 틈타 고려 태조는 4만30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천안부(天安府)에 이르러서 진용을 정돈한 뒤에 일선군(一善郡:지금의 善山)으로 진격하자, 후백제의 신검은 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마침내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대진하였으나 패배하여 왕위에 오른 지 1년반 만에 멸망하였다.기록에는 능환은 신하로서의 의리를 저버렸다 하여 주살(誅殺)당하였고, 신검에게는 작(爵)을 내렸으며, 양검과 용검만이 유배되어 살해되었다고 되어 있으나 신검도 함께 살해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까닭은 신검이 당시 살아 있다가 뒤에 죽었다면, 그 사망기사가 따로 나올 법한데 그 기사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이와는 달리 후백제의 국운이 기울어지자 견훤이 고려에 대하여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려 하자 신검 등은 고려에 대하여 강경책을 견지하려 한 데서 나온 내분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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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검(良劍) 백제 육전(B)수전(D)정치(D)모략(C)명성(B)축성(C)?∼936(신검 1). 후백제왕 견훤(甄萱)의 둘째아들. 형 신검(神劍)과 아우 용검(龍劍)·금강(金剛) 등이 있었다.견훤에게는 여러 비빈들의 소생으로 아들이 1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견훤은 넷째아들 금강을 편애하여 장차 왕위를 그에게 전하려 하자, 신검·양검·용검의 3형제는 불안을 느끼게 되었고, 이찬 능환(能奐)은 935년(견훤 44)3월에 양검·용검을 설득시켜 맏형 신검으로 하여금 견훤을 금산사(金山寺: 지금의 김제)에 유폐시키고 금강을 죽인 뒤 왕위에 나아가게 하였다.이때 양검은 강주도독(康州都督)으로 있었고, 용검은 무주도독(武州都督)으로 있었다.936년의 통일전쟁에서 패배하자 신검·용검과 함께 고려진영에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는 양검과 용검을 진주(眞州)에 귀양보냈다가 얼마 뒤에 모두 살해하였다.

 

용검(龍劍) 백제 육전(B)수전(D)정치(D)모략(C)명성(B)축성(D)?∼936(신검 1). 후백제의 왕족.견훤(甄萱)의 셋째아들이다. 형제로 맏형 신검(神劍)과 둘째형 양검(良劍)과 아우 금강(金剛)이 있었다. 견훤의 아들은 10여명이나 되었다고 전한다.견훤이 넷째아들 금강을 편애하여 장차 왕위를 그에게 물려주려 하자 신검·양검·용검의 3형제는 불안을 느끼게 되었고, 이찬(伊飡) 능환(能奐)의 꾐에 의하여 형 양검과 함께 신검을 달래어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시키고, 아우 금강을 죽인 뒤 신검이 왕위에 올랐다.이때 용검은 무주(武州:지금의 光州) 도독(都督)으로 재직하고 있었다.이듬해의 통일전쟁에서 후백제군은 고려군에게 패배하게 되었고, 용검은 신검·양검과 함께 고려진영에 항복하였다.고려 태조에 의하여 양검과 더불어 진주(眞州)에 귀양갔다가 얼마 뒤에 모두 살해되었다.

 

 

금강(金剛)  백제 육전(A)수전(B)정치(B)모략(B)명성(A)축성(C)

견훤의 넷째 아들로 견훤의 첩 고비 소생이다. 본시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아 견훤히 특별히 그를 사랑하여 왕위를 전하고자 하였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신검이 반란을 일으켜 결국 죽임을 당했다. 이제가기에서는 태사 총지라고 한다.

 

 

종우(宗祐)  백제 육전(C)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D)견훤에 대해 자세히 나왔다던 이제가기에는 견훤의 5남으로 벼슬은 대아간이라 한다.

 

 

수미강(須彌康) 백제 육전(A)수전(C)정치(D)모략(D)명성(B)축성(C)생몰년 미상. 후백제의 왕족. 아버지는 견훤(甄萱)이다.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서 왕위에 올랐으나 서남에는 강력한 견훤의 후백제가 세력을 펴고 있어서 만만치 않은 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특히, 견훤은 이미 쇠약해진 신라의 서부일대를 침식하기 시작하여 920년(견훤 29) 10월에는 신라의 서부 요충인 대야성(大耶城:지금의 陜川)을 공략하고 나아가서 진례성(進禮城:지금의 淸道?)에까지 진출해왔다. 이러한 위급에 처한 신라는 고려에 구원을 청해왔으므로 태조는 급거 응원군을 출동하게 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견훤은 군을 이끌고 후퇴하였다.이와같이, 고려 태조와 견훤은 경상도일대를 장악하기 위해서 겉으로는 화친을 하는체하면서도 속으로는 예리한 대립상태를 지속하고 있었다.견훤은 921년 7월 아들 수미강과 양검(良劍)을 시켜 대야(大耶)와 문소(聞韶)두 성의 군대를 동원하여 조물성(曺物城)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성 안의 사람들은 성을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수미강 등은 소득없이 물러났다. 조물성의 위치는 자세하지 않으나 지금의 금릉군 조마면 일대라고 추측된다.

 

 

위흥(位興)  백제 육전(D)수전(D)정치(C)모략(D)명성(C)축성(C)견훤에 대해 자세히 나왔다던 이제가기에는 견훤의 7남으로 벼슬은 좌승이라 한다.

 

 

청구(靑丘) 백제 육전(D)수전(D)정치(C)모략(D)명성(C)축성(C)

견훤에 대해 자세히 나왔다던 이제가기에는 견훤의 8남으로 벼슬은  태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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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광(月光)  백제 육전(A)수전(C)정치(D)모략(D)명성(B)축성(D)합천 해인사 고적에 견훤의 아들로 나오며, 신무한 용맹을 가지고 있었으나 마침내 왕건에게 항복했다 한다.

 

 

능예(能乂) 백제 육전(C)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D)생몰년 미상. 후백제왕 견훤(甄萱)의 막내아들.《삼국사기》 견훤전과 《고려사》 태조 18년조에 의하면 935년 3월에 신검(神劍)이 파진찬(波珍飡) 신덕(新德)·영순(英順) 등과 더불어 부왕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감금시키고 장사 30인으로 지키게 하였는데, 그뒤 3개월이 지난 6월에 견훤은 술을 빚어 장사 30명을 만취시키고, 막내아들인 능예와 딸 쇠복(衰福:衰는 哀의 誤字)과 첩 고비(姑比) 등과 함께 금성(錦城:지금의 羅州)으로 도망하여 나와 사람을 보내어 고려 태조를 만나보기를 청하였다. 태조는 이 말을 듣고 장군 유금필(庾黔弼) 등을 보내어 해상으로 오도록 하여 후하게 대접하고, 견훤을 상보(尙父)로 삼았다고 한다.그런데 《삼국유사》 후백제 견훤전에서는 견훤이 후궁의 연소남녀 2인과 시비(侍婢) 고비녀(古比女)와 나인(內人) 능우남(能又男, 또는 能乂男) 등과 감금되었는데, 4월에 술로써 수졸(守卒)을 취하게 한 뒤 금성으로 탈출하였다고 하였다.《삼국사기》의 능예와 쇠복이 《삼국유사》의 연소남녀 2인에 해당하며, 《삼국사기》의 첩 고비가 《삼국유사》 시비에 해당하니 《삼국사기》의 능예는 《삼국유사》의 나인 능우(예)남과는 별개의 인물인듯하다.

 

능환(能奐) 백제 육전(B)수전(C)정치(A)모략(S)명성(B)축성(C)생몰년 미상. 후백제 견훤(甄萱)의 반역신. 관등은 이찬(伊飡)이었다.견훤에게는 여러명의 부인이 있어서 아들이 10여명이나 되었다. 그 중에서 넷째아들 금강(金剛)은 몸이 크고 지혜가 많아 견훤이 특히 사랑하였고 왕위를 그에게 물려줄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에 둘째아들 양검(良劍)은 강주도독(康州都督)으로, 그리고 셋째아들 용검(龍劍)은 무주도독(武州都督)으로 가 있었고, 큰아들 신검(神劍)만이 홀로 곁에 있었다.이때 능환은 사람을 시켜 강주와 무주의 양검·용검 등과 음모하고 935년(견훤 44) 3월 파진찬 신덕(新德)·영순(英順) 등과 함께 신검에게 권하여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시키고, 사람을 보내어 금강을 죽이고 신검이 스스로 대왕을 칭하게 하였다.금산사에 유폐되어 있던 견훤은 금성(錦城:지금의 羅州)으로 도망쳐, 고려 태조에게 투항하였다.그뒤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하고 신검 이하 모두를 항복받고 곧 용서하여주었지만, 신검으로 하여금 반역하게 한 능환만은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죽음을 당하였다.

 

능예남(能乂男) 백제 육전(D)수전(D)정치(D)모략(C)명성(D)축성(D)생몰년 미상. 후백제왕 견훤(甄萱)의 나인(內人).《삼국사기》 견훤전에는 보이지 않으나 《삼국유사》 견훤전에 의하면 견훤이 후궁과 연소남녀와 나인 능우남(能又男, 또는 能乂男) 등과 함께 신검에 의하여 금산사에 구금되었다고 한다. ‘나인’은 궁중에서 대전(大殿)을 시종하는 여자를 말함이니, 능예남도 여자의 이름이라 할 것이다. 현존하는 《삼국유사》의 판본에 의하면 가운데 글자를 ‘우’ 혹은 ‘예’로 읽을 수 있으나 능예(能乂) 등의 용례로 보아 능예남이 옳은 것 같다.

고비(古比) 백제 육전(D)수전(D)정치(D)모략(C)명성(B)축성(D)생몰년 미상. 후백제의 왕 견훤(甄萱)의 첩.935년(태조 18) 3월 아들 신검(神劒)이 견훤을 금산(金山:지금의 金堤)의 절에 가두고, 그 아우 금강(金剛)을 죽였다.이때 고비는 견훤을 따라갔다가, 6월 파수를 보고 있던 파달(巴達) 등, 30여인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 견훤과 그의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애복(哀福) 등과 함께 나주로 달아나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신강(信康) 백제 육전(D)수전(D)정치(A)모략(B)명성(C)축성(D)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관인. 후백제 견훤(甄萱)의 신하로 있다가 태조에게 항복하여 왔다.935년(태조 18) 견훤과 함께 고려로 와서 아관(衙官)에 임명되었다.949년(광종 즉위년) 원윤(元尹)으로 왕명을 받아 원보(元甫)·식회(式會)와 함께 주현(州縣)의 세공(歲貢)액수를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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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필(崔弼) 백제 육전(S)수전(C)정치(B)모략(B)명성(B)축성(C)생몰년 미상. 후백제의 장수.934년(견훤 43) 운주(運州)에 주둔한 고려 군사를 공격하였다.그러나 오히려 고려군의 역습을 받아, 술사(術士) 종훈(宗訓), 의사 훈겸(訓謙), 용장 상달(尙達) 등과 함께 사로잡혀 항복하였다.

박영규(朴英規) 백제 육전(B)수전(B)정치(B)모략(B)명성(B)축성(C)생몰년 미상. 후백제의 장군. 본관은 순천. 견훤(甄萱)의 사위이다. 견훤을 좇아 후백제 건설과 발전에 공훈을 세웠다.935년(견훤 44)3월 신검(神劒)이 반역하여 그 아우 금강(金剛)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하고 이어 6월에 견훤이 금산사를 탈출해 고려에 망명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936년 9월 아내와 비밀히 상의한 뒤 고려에 사자를 보내어 친호(親好)를 통하고 왕건이 의로운 군사를 일으킨다면 내응하여 고려군을 맞이하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왕건은 크게 기뼈하여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내면서 후일을 기약하였다.9월에 왕건이 마침내 후백제를 칠 때 내응하여 후삼국 통일을 완성하게 하였다. 왕건은 박영규의 공을 높이 치하하여 좌승(左丞)을 제수하고 밭 1, 000경(頃)을 내려주었다. 이어서 역마 35필로 영규의 부인을 맞이하게 하고 그의 두 아들에게도 벼슬을 주었다.뒤에 관직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그의 두 딸은 왕건의 부인인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과 정종의 비인 문공왕후(文恭王后)이다.

 

 

효봉(孝奉)  백제 육전(A)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생몰년 미상. 후백제의 장군.936년 9월 고려 군사와 신검(神劍)이 이끄는 후백제 군사가 일선(一善:지금의 선산)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장군인 덕술(德述)·애술(哀述)·명길(明吉) 등과 함께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태조가 후백제 군대를 격파하는 데 협력하였다.

애술(哀述) 백제 육전(A)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생몰년 미상. 후백제의 장군.936년(신검 1)9월 견훤(甄萱)이 고려 태조에게 후백제를 치기를 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일선(一善)에 가서 머물렀다.이때 신검(神劍)이 항전하였는데, 지금의 경상북도 선산지역의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태조의 군대는 동남을 등에 지고 서남을 향하여 진을 쳤다.태조가 견훤과 병세(兵勢)를 살피는데 갑자기 칼과 같은 흰 기운이 이쪽 진에서 일어나 저쪽을 향하여가므로 이에 북을 치고 고함치며 쳐들어가니, 애술은 효봉(孝奉)·덕술(德述)·명길(明吉) 등과 함께 고려 태조의 병세가 크고 정연함을 보고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였다.이 전쟁에서 후백제는 멸망하였다.

 

 

최견(崔堅) 백제 육전(B)수전(B)정치(C)모략(D)명성(B)축성(C)?∼927(견훤 27). 후백제 견훤 때의 장군.927년(견훤 27)에 거란(契丹)의 사신 사고마돌(裟姑麻#돌01) 등 일행 35인이 후백제에 와서 예방하였을 때, 장군으로서 이를 반송(伴送)하기 위하여 배를 타고 북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당나라의 등주(登州:지금의 山東省蓬萊縣)에 이르렀으나 모두 잡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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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우(崔承祐) 백제 육전(C)수전(C)정치(SS)모략(SS)명성(S)축성(S)생몰년 미상. 신라 말기의 문인. 본관은 경주(慶州).890년(진성여왕 4) 중국 당나라에 건너가 국학에서 3년간 공부하고, 893년 당나라의 예부시랑 양섭(楊涉)아래에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한 뒤 관직에 있다가 귀국하였다.신라 말기의 6두품(六頭品) 출신 가운데서 새로운 지식계급으로 대두하는 가장 대표적인 가문인 경주최씨 출신으로서, 특히 경주최씨 가운데서도 최치원(崔致遠)·최인연(崔仁#연24, 彦#휘01, 愼之)과 더불어 ‘신라 말기의 3최(三崔)’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렸다.그러나 경주최씨들이 대개 뒤에 고려의 왕건(王建)에게로 가 문한직(文翰職)을 맡았던 것과는 달리, 후백제의 견훤(甄萱) 아래에서 봉사하였다. 그리하여 견훤을 대신하여 고려 태조에게 보내는 격서를 짓기도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927년(견훤 36)의 〈대견훤기고려왕서 代甄萱寄高麗王書〉로서, 지금도 《삼국사기》·《고려사》·《고려사절요》·《동문선》 등에 실려 있다.한편 《동문선》 권12에는 〈경호 鏡湖〉를 비롯한 칠언율시 10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들 작품들이 당나라 말기의 재상 위소도(韋昭度)와 중서사인(中書舍人) 이모(李某) 혹은 진사 조송(曺松)·진책(陳策) 등에게 주는 형식으로 된 점에 미루어, 당나라에 있는 동안 그의 교제범위가 최치원 못지않았던 것으로 추측되며, 그리고 아마도 절도사의 막부에서 종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특히 문장에 능하여 사륙집(四六集) 5권을 저술하여 《호본집 #호62本集》이라고 이름붙였다. 그러나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공달(功達) 백제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백제 아찬으로 920년 9월에 고려에 사신으로와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 죽전(竹箭화살)을 바쳤다.

 

 

김악(金渥) 백제 육전(B)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C)태조13년 고창군 전투에서 백제군이 크게 패하여 8천명의 전사자를 냈는데, 이때 시랑(侍郞)으로 참전했던 김악은 사로잡히게 된다. 빈공과에 합격한 김악(金渥)이나 태조의 유조를 선포한 김악(金岳)과는 다른 인물이다.

 

 

김총(金摠) 백제 육전(B)수전(B)정치(B)모략(C)명성(B)축성(C)신라왕족 김알지의 한 일파로 순천김씨의 시조이다. 순천의 대호족이자, 백제의 인가별감(引駕別監)을 지냈고, 사후 순천주민들에 의해 성황신으로 모셔졌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김총은 태봉국 황손으로 태봉국 태자 청광의 아들이며, 고려 개국후 백제로 왔다고 한다. 1887년 편찬된 신라김씨선원록서(新羅金氏璿源錄序)와 또 1988년 발간된 신라김씨이천년사(新羅金氏二千年史)에서는 <김총(金摠)은 태봉국 태자 청광보살(靑光菩薩, 관세음보살)의 아들로 궁예(弓裔)의 장손(長孫)이다>궁예는 신라왕족 김알지의 후손이며 본성은 김씨다. 또한 궁예의 왕후 강씨부인은 신천강씨 강연창의 딸로, 태조 왕건의 송악가문과는 그 뿌리가 같다. <태조 왕건의 증조모가 신천강씨로, 신천강씨 3대손 강보육의 딸이다. 왕건의 가문은 증조모부터 시작된다. 증조부는 고려사세계에는 당나라 선종이라 적혀있다. 그럼으로 강보육은 태조에 의해 제1대 선제로, 국조 원덕 대왕(國祖元德大王)으로 추존되기도 한 인물이다.> 이렇듯 강씨부인과 왕건가문은 피로 맺어진 혈족임으로 914년 왕건이 나주에서 소환되어 죽음직전까지 같던 사건하고, 915년 강씨왕후와 두태자의 죽음은 연관성이 있을것이다. 궁예가 만약 군부의 왕건이 왕후로 대표되던 패서지역과 손을 잡고 궁예를 폐하고 태자를 옹립할려고 한다는 의심을 하였다면 이 두사건은 설명이 된다. 또한 김총이 궁예 때 출생했다면, 꺼림직한 두 태자를 제거하고, 총을 후계로 삼으려 했다는 가설도 설명이 가능하게 된다. 또한 역성혁명이 성공하고 왕건은 자신의 외척인 강씨왕후,청광,신광을 동정하였을 것이며, 그 후생도 살려줬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실제로 신광태자의 아들은 살아 남아, 본성인 김씨로 돌아갔으며 김경을 낳아 광산이씨의 시조가 되기도 한다. 광산이씨는 이를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순천김씨는 김총이 궁예의 후손이란 것을 인정하는 곳과 인정하지 않는 곳이 있어, 확실치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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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술(德述) 백제 육전(B)수전(D)정치(D)모략(C)명성(B)축성(D)백제장수로 일리천 전투에서 고려군에 항복한다.

 

 

염흔(廉欣) 백제 육전(D)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D)태조10년 10월에 백제의 일길간(一吉干)으로 고려에 의탁하였다.

 

 

지훤(池萱) 백제 육전(B)수전(C)정치(B)모략(C)명성(B)축성(C)견훤의 사위로써 견훤이 전주에 도읍을 옮긴후 무주(본래는 무진주 武珍州 이나 경덕왕때 무주로 고침)성주에 임명되었다. 태봉의 정기대감 왕건이 공성을 해왔지만 잘막아내 성을 지켰다.

 

 

 

견달(見達) 백제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백제장수로 일리천 전투시 중군에 종군하다 고려군에 생포되어 처자랑 개경으로 압송되었다.

 

 

부달(富達) 백제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백제의 장수로 일리천 전투후 흔강(昕康),우봉(又奉),견달(見達)과 함께 개경으로 보내졌다.

 

 

흔강(昕康) 백제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백제의 장수로 일리천 전투후 부달(富達),우봉(又奉),견달(見達)과 함께 개경으로 보내졌다.

 

우봉(又奉) 백제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백제의 장수로 일리천 전투후 부달(富達),흔강(昕康),견달(見達)과 함께 개경으로 보내졌다.

 

 

영식(令式)/금식(今式) 백제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백제장수로 일리천 전투시 흔강(昕康), 견달(見達), 은술(殷述), 우봉(又奉)등과 함께 고려군에 사로잡히었다.

 

 

은술(殷述) 백제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백제장수로 일리천 전투시 흔강(昕康), 견달(見達), 영식(令式), 우봉(又奉)등과 함께 고려군에 사로잡히었다.

 

 

겸악(兼岳) 백제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C)담양 출신으로 유법반(柳法攀)의 사돈. 신검의 반란이 일어나자 산으로 은거하였다고 한다.

 

유법반(柳法攀) 백제 육전(B)수전(B)정치(C)모략(C)명성(C)축성(D)전주 유씨로 승화현 출신으로 백제의 우장군까지 올랐다. 손자 유방헌(柳邦憲)이 광종때 고려조정에 출사하여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단서(端舒) 백제 육전(C)수전(B)정치(D)모략(D)명성(D)축성(D)백제 장수 구도(具道)의 아들로 유금필의 나주탈환전시 나주에 생포되었다고 공직의 아들 금서와 교환되어 백제로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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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훤(金萱) 백제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C)백제의 장군으로 태조 11년 7월에 왕건이 친정하여 삼년성성(三年城)을 포위공격하였으나 패전하여 청주로 후퇴했는데, 견훤이 이를 알고 김훤(金萱)에게 명하여 애식(哀式), 한문(漢文)등과 함께 군사 3천을 이끌고 청주로 침공하여 왕건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이때 탕중군에서 성을 쌓고 있던 유금필이 급히 구원을 해와 백제군은 독기진(禿岐鎭)까지 패퇴하였다.

 

 

한문(漢文)/한장(漢丈) 백제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D)

백제의 장군으로 태조 11년 7월에 왕건이 친정하여 삼년성성(三年城)을 포위공격하였으나 패전하여 청주로 후퇴했는데, 견훤이 이를 알고 한문(漢文)에게 명하여 김훤(金萱), 애식(哀式)과 함께 군사 3천을 이끌고 청주로 침공하여 왕건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이때 탕중군에서 성을 쌓고 있던 유금필이 급히 구원을 해와 백제군은 독기진(禿岐鎭)까지 패퇴하였다.

 

 

애식(哀式) 백제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D)백제의 장군으로 태조 11년 7월에 왕건이 친정하여 삼년성성(三年城)을 포위공격하였으나 패전하여 청주로 후퇴했는데, 견훤이 이를 알고 애식(哀式)에게 명하여 김훤(金萱), 한문(漢文)등과 함께 군사 3천을 이끌고 청주로 침공하여 왕건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이때 탕중군에서 성을 쌓고 있던 유금필이 급히 구원을 해와 백제군은 독기진(禿岐鎭)까지 패퇴하였다.

 

 

파달(巴達)  백제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견훤이 금산사로 유폐되었을때 장사 30여명과 함께 금산사에 주둔하여 견훤을 감시하였다.

 

 

 

길환(吉奐) 백제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B)연산진(燕山鎭)을 수비하던 백제의 장군으로 태조8년 10월에 쳐들어온 유금필의 군사에게 패하여 전사하였다.

 

 

금달(今達) 백제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백제의 장군으로 933년 경주에 입성한 유금필을 잡기위해 신검과 함께 급히 출전하였으나 오히려 사로잡히었다.

 

 

환궁(奐弓) 백제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백제의 장군으로 933년 경주에 입성한 유금필을 잡기위해 신검,금달과 함께 급히 출전하였으나 오히려 사로잡히었다.

 

 

궁창(宮昌) 백제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D)축성(D)백제의 관리로 태조4년 12월에 고려에 투항하였다.

 

 

명권(明權) 백제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D)축성(D)백제의 관리로 태조4년 12월에 고려에 투항하였다.

 

 

상국진(尙國珍) 백제 육전(B)수전(C)정치(C)모략(B)명성(B)축성(C)목천 상씨의 시조. 후백제의 유민으로 목천장리로 있으면서 후백제의 부흥을 꾀하며 목천 상왕산(현 확성산)에서 군을 일으켜 유격전을 펼치다 고려군에게 참패하고 상왕산에서 패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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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달(小達) 백제 육전(B)수전(C)정치(D)모략(D)명성(C)축성(D)백제의 장군으로 일리천 전투후 신검,양검,용검등 왕족과 부달(富達),능환(能奐)등과 함께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수오(隨晤) 백제 육전(B)수전(C)정치(D)모략(D)명성(C)축성(C)최승우가 대필하여 왕건에게 보낸 대견훤기고려왕서의 답서에 마리성(馬利城)에서 백제장수 수오(隨晤)를 깃발아래에서 죽였다고 나온다.

 

 

영순(英順) 백제 육전(C)수전(C)정치(B)모략(A)명성(B)축성(C)백제의 파진찬직에 있었는데 태조11년 3월에 능환과 더불어 신검을 옹립하는데 공을 세웠고, 견훤을 금산사로 유폐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활을 했다.

윤빈(尹卿) 백제 육전(C)수전(B)정치(D)모략(D)명성(D)축성(C)후백제의 장수. 삼국유사에는 윤경(尹卿)으로 되어 있다. 최승우의 대견훤기고려왕서의 답서에 "윤빈을 해안에서 쫓을 때 갑옷이 산과 같이 쌓였다"고 쓰여있다.

 

 

장언징(張彦澄) 백제 육전(D)수전(D)정치(B)모략(A)명성(C)축성(D)백제의 관리로 휘암, 민극과 더불어 주로 외교를 맡았다. 일본 대마도에 통상을 요청하는 사신으로 갔다.

 

 

휘암(輝巖)/휘함(輝函) 백제 육전(D)수전(D)정치(B)모략(A)명성(C)축성(D)백제의 관리로 주로 외교사신으로 활약했다. 장언징의 뒤를 이어 대마도에 통상을 요청하러 갔다.

 

직심(直心) 백제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후백제의 장수. 최승우의 대견훤기고려왕서의 답서에 "청천현(淸川縣)을 깨칠 때에는 직심(直心) 등 4, 5 무리가 머리를 바쳤소"라고 쓰여있다.

 

추조(鄒祖)/추허조(鄒許祖) 백제 육전(A)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B)백제의 장군으로 태조10년 7월에 대량성(大良城) 장군으로 있었다.태조의 명을 받은 원보(元甫) 재충(在忠),김락(金樂)등이 군을 몰고와 결국 낙성되어 사로잡히었다. 태조11년 견훤에게 보내는 답서에 아래와 같이 적혀있다. "추조(鄒祖)를 변성(邊城)에서 잡았을 때는 엎드려 진 시체가 들판을 덮었으며" 대량성은 현 경남 합천으로 요충지인 대야주에 위치에 있으며 대야성의 다른이름이기도 하다

 

 

형적(邢積) 백제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C)백제장수로 임존성을 수비하다 전사하였다. 태조11년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답서에 아래와 같이 씌여있다. "임존성(任存城)을 빼앗던 날에는 형적(邢積)등 수백 명이 목숨을 버렸고"

 

 

김긍율(金兢律) 백제(청주호족) 육전(C)수전(D)정치(C)모략(A)명성(B)축성(C)

후삼국 말기 청주호족으로 본시 백제편이였다. 그러나 일리천 전투 직전 고려로 돌아선것으로 보이며 공으로 삼한공신에 책록되었고 원보(元甫)에 임명되었다. 김긍률은 고려초기 외척으로써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두딸을 혜종,정종에게 시집보냈다. 2대 황제 혜종의 제3비인 청주원부인(淸州院夫人), 3대 황제 정종의 제3비인 청주남원부인(淸州南院夫人) 김씨가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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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흔(崔相昕) 백제(영암호족) 육전(D)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C)

전남 영암일대를 다스리던 호족으로 원래는 백제였으나, 왕건의 금성(나주) 점령이후 고려에 귀부하여 원보직을 제수받았다. 아들 최총진(최지몽)이 어린나이에 태조의 총애를 받았다.

 

 

애복(哀福)/쇠복(衰福) 백제(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B)명성(D)축성(D)

견훤의 딸로 935년 견훤이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을때 견훤을 보양했다. 그해 6월에 고려로 가기 위해 기지를 발휘 파달들 30여명의 장사들에게 약을 탄 술을 먹임으로써 수로를 통해 안전하게 견훤을 고려로 모시는데 성공하였다. 박영규(朴英規)의 부인이라는 설이 있지만 애복이 견훤과 고려로 망명한것이 935년이고 박영규는 936년에 태조에게 항복을 청하는 서신을 보냈음으로, 정황상 맞지 않는다.

 

 

오다련군(吳多憐君) / 오희(吳禧)백제(나주호족) 육전(D)수전(B)정치(B)모략(B)명성(B)축성(C)

나주의 호족으로, 대대로 나주의 목포항을 기반으로 해상무역을 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궁예5년 서기 905년 궁예의 명을 받아 왕건이 수군을 이끌고 백제땅 나주를 침공하였을때 협조하여, 딸을 왕건에게 시집보내니, 이가 고려 제2왕후 장화 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다. 고려사 후비열전에 오씨가 신분이 미천하다, 왕건이 침석(寢席)에 사정하였는데 오씨가 곧 이를 흡입하여 혜종을 낳았다, 돗자리에 사정한후 낳은 아들이라 얼굴에 돗자리 자국이 있었다는 식의 악평이 들어 있는데, 이는 패서세력의 힘으로 제위를 물려받은 정종과 광종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꾸며낸 것에 불과하다. 어느 누가 태조의 침실 사생활을 보고 기록할수 있었겠으며, 2대 황위를 물려받은 혜종에 대해 감히 이런 말을 쓸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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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첨의 11세손으로 문성왕(文聖王) 17년(서기 855년) 병부시랑 오방(吳昉/오부순,吳富純)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성장하여 문과(文科) 이부시랑(吏部侍郞) 공자묘당(孔子廟堂) 경학박사(經學博士)의 벼슬에 올라 그의 치적(治績)이 혁혁하였으며, 공의 딸을 고려 태조 4년(921년) 태조가 왕비로 맞이함으로서, 그이가 곧 장화왕후(莊和王后)이고, 공을 다련군(多憐君)에 봉해졌으며, 장화왕후의 아들이 고려 2대왕인 혜종대왕이시다.

 

왕봉규(王逢規) 백제(강주호족) 육전(B)수전(A)정치(B)모략(B)명성(B)축성(B)

 

본시 천주(泉州 의령)호족으로 신라말 세력확장에 나서 920년 강주호족 윤웅(閏雄)이 고려에 투항하자, 윤웅을 몰아내고 강주(康州 진주)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후 왕봉규는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는데 924년엔 후당에 조공하여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로 임명받았으며, 927년 3월에는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을 제수받았다. 후당과의 외교를 통해 근접한 백제와도 화친할수 있었고 고려에는 적대적이였다. 그러나 927년 4월에 고려 해군장군(海軍將軍) 영창(英昌),능식(能式)이 이끄는 수군(水軍)의 공격을 받고 왕봉규의 세력은 몰락하고 만다. 왕봉규의 세력이 일소된 이해 8월엔 태조가 친히 강주에 순행을 오기도 했다.

 

 

능애(能哀) 백제 육전(C)수전(C)정치(C)모략(B)명성(C)축성(C)

삼국유사 이제가기에 관한 언급을 보면 아자개의 둘째 아들로 되어 있다. 셋째부터는 ~개(盖)로 끝나는 것으로 미루어 아자개의 첫째부인이자 견훤의 생모인 상원부인(上院夫人)의 아들로 추측한다. 능애에 관한 기록은 더이상 발견되지 않아 자세한것은 알수없다.

 

 

국대부인(國大夫人) 백제 육전(D)수전(D)정치(D)모략(B)명성(C)축성(D)생몰년 미상. 후백제의 왕 견훤(甄萱)의 딸. 장군 박영규(朴英規)의 부인이며, 고려 태조의 왕비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의 어머니이다.견훤이 아들 신검(神劍)에 의하여 금산사(金山寺)에 갇혀 있다가 고려 태조에게 귀순하자, 국대부인은 남편 박영규와 의논하여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하고 밀사를 보내어, 태조 왕건에게 내통한 뒤 고려에 귀순하여 견훤을 위로하였다.이에 감격한 태조는,“전쟁이 끝나면 당에 올라 박영규를 형으로, 부인을 누님으로 높여 절하겠다.”고 하였다.그 뒤 딸 동산원부인은 태조의 후비가 되었고, 다른 딸 문공왕후(文恭王后)·문성왕후(文成王后)는 정종의 비가 되었다. 후에 국대부인에 책봉되고, 다시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이 되었다.

 

 

나총례(羅聰禮) 백제(나주/금성호족) 육전(C)수전(B)정치(C)모략(B)명성(C)축성(C)금성나씨(錦城羅氏)/금천나씨(錦川羅氏)의 시조로 나씨는 고대 중국 축융(祝融)의 후예로, 기원전 759년(주나라)에 광정공이 공을세워  나국(羅國)에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이 고을 이름을 따서 성(姓)으로 삼은 것이 나씨(羅氏)의 시초가 된다. 축융의 후손 주공(珠公)이 한고조 때 나라에 공을 세우고 예장군에 봉해져서 예장나씨가 되었다가, 그의 후손 지강(至强)이 당나라 태종때 상서좌복야로 고구려 정벌을 반대하다가 미움을 받자 동래(東來)하여 백제의 땅인 발라현(지금의 나주)에 정착한 것이 금성나씨의 시원을 이루었다. 나총례는 금성(나주)의 호족으로 태조의 금성공략시 협조하여, 태조 개국후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에 임명되고, 삼한공신에 책록되었다. 아들 나은고(羅恩誥)도 대대로 금산군에 봉해져 일대를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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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李誼) 백제(금마호족) 육전(C)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금마(金馬)호족으로 익산이씨(益山李氏)의 중시조다. 본시 익산이씨의 시조는 이문진(李文眞)으로 고구려 영양왕 때 대학박사(大學博士), 문부전서(文部典書), 오경박사(五經博士)로 공신후가 되고 백제의 공주와 결혼하여 백제로부터 익주(益州. 익산의 옛 이름)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백제의 호족으로써 일리천 전투후 고려 태조에 협조하여, 고려 개국공신에 책록되고 태위(太尉)에 임명되었다. 

 

 

구족달(具足達) 백제(능성호족) 육전(D)수전(D)정치(C)모략(C)명성(B)축성(D)

능성구씨(綾城具氏)로 서예에 능했다. 법경대사를 기리기 위해 943년(고려 태조 26)에 송악에 현화사 7층 석탑을 건축했는데, 최언호(崔彦鎬)가 비문을 짓고 구족달(具足達)이 글씨를 썼으며 승려 4명이 각자(刻宇)하였다.

 

 

구존유(具存裕) 백제(능성호족) 육전(C)수전(B)정치(C)모략(B)명성(C)축성(C)

능성(綾城 현 전남 능주)호족으로 고려 태조의 금성(나주) 공략시 협조한것으로 보인다. 삼한통일후 벽상공신에 책록되었다. 아들로는 서예에 능해 송악 현화사 7층 석탑에 비문을 썻던 구족달(具足達)이 있다. 일설에는 능성구씨의 시조는 13세기 인물이라고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능창(能昌) 백제(압해현호족) 육전(B)수전(SS)정치(C)모략(D)명성(B)축성(C)?∼910(견훤 19). 압해현(壓海縣)의 적수(賊帥).910년 궁예가 막하의 장수로 있던 왕건(王建)을 보내어 나주지역을 진압하려 하였다. 왕건이 무주(武州)서남지역의 반남현(潘南縣)에 이르러 도적이 있는 곳에 첩자를 풀어 동정을 살폈다.이때 본래 해도(海島) 출신으로 수전을 잘하는 능창은 압해현(지금의 나주지역에 속함.)의 적수로서 ‘수달(水獺)’이라고도 불리었는데, 갈초도(葛草島)의 무리들과 결탁하여 왕건을 해치려 하였다.그러나 능창은 이를 먼저 감지한 왕건의 계책에 속아 사로잡혀서 궁예에게 압송되어 참수당하였다.

 

 

흥종(興宗) 초팔성 육전(A)수전(D)정치(C)모략(B)명성(B)축성(B)생몰년 미상. 신라말 고려초의 지방세력가. 초팔성(草八城)의 성주(城主)였다.

태조11년 928년 강주(康州)를 구원코자 원군으로 가던 김상,직량등의 고려군을 공격하여 김상(金相)을 전사시켰다.

 

 

공직 (龔直) 매곡성 육전(S)수전(C)정치(B)모략(A)명성(A)축성(B)생몰년 ?∼939(태조 22). 연산(燕山) 매곡(昧谷)사람이며 시호 봉의(奉義)이다.

매곡 태생으로 대를 이어 신라 조정으로부터 매곡의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어려서부터 용략이 있었으며, 신라 혼란기에는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 공직은 백제와 태봉의 중간에 위치하여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던 것으로 보이며, 매제 경종이 고려 역성혁명과정에서 제거되자 백제로 귀부하였을것으로 본다. 견훤의 휘하에서 용맹을 떨쳤으나 백제의 무도함을 보고 맏아들 직달과 함께 왕건(王建)에게 귀부할 것을 의논한 뒤 932년 아들 영서(英舒)와 같이 고려에 귀부하였다. 태조가 대상(大相)으로 삼고 백성군록(白城郡祿)과 구마(#구25馬)세필, 채백(采帛)을 주고, 아들 함서(咸舒)는 좌윤(佐尹)으로 삼고, 정조(正朝) 준행(俊行)의 딸을 영서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이때 맏아들 직달(直達), 둘째아들 금서(金舒)와 딸 하나가 견훤의 볼모로 있었는데 견훤은 공직이 태조에게 항복함을 보고 매우 노하여 직달과 금서 및 그 딸을 잡아 가두고 단근질하여 직달은 그만 죽고 말았다. 939년 좌승(佐丞)으로 죽으니 정광(政匡)을 추증하였다.시호는 봉의(奉義)이다. 함서로 후사를 삼고 다시 사공삼중대광(司空三重大匡)을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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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서(金舒) 매곡성 육전(C)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C)공직의 차남으로 완산주에 인질로 있었는데, 932년 공직이 고려에 투항하자 분노한 견훤이 다리 힘줄을 불에 지져 끊어졌으나, 살아남아 나주에 사로잡혔던 백제 장수 구도(具道)의 아들 단서(端舒)와 교환되어 고려로 귀환했다.

 

 

직달(直達) 매곡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공직의 장남으로 완산주에 인질로 있었는데, 932년 공직이 고려에 투항하자 아우 금서, 누이와 모진 고문을 받고 옥사하였다.

 

 

영서(英舒) 매곡성 육전(C)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C)공직의 아들로 932년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투항하였다. 태조는 귀척(貴戚)인 정조(正朝) 준행(俊行)의 딸을 영서의 아내로 삼았다.

 

함서(咸舒 ) 매곡성 육전(C)수전(C)정치(B)모략(C)명성(C)축성(C)공직의 아들로 932년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투항하였다. 태조는 함서를 좌윤(佐尹)에 임명하여  백성군(白城郡 京畿安城)의 녹(祿)을 내렸다.

 

 

긍준(兢俊) 운주성 육전(A)수전(C)정치(C)모략(B)명성(B)축성(C)운주성주(運州城主=충남홍성)로 맹장이라 소문이 자자했다. 견훤의 강성함에 백제에 복속하였는데, 태조9년 3월에 왕건이 대군을 이끌고 운주성을 포위하자 항복하여 태조의 환대를 받고, 벼슬이 대상에 이르렀다. 이 소식을 듣고 웅주(熊州 공주) 이북30여성이 고려에 한꺼번에 항복하였다. 후에 일리천 전투에서는 왕순식등과 기병 2만을 이끌었다.

 

 

전종회(田宗會) 백제(무령군호족) 육전(C)수전(B)정치(C)모략(B)명성(C)축성(C)무령군(현 영광, 995년 영광군으로 변경) 호족으로 영광 전씨(靈光田氏)로서 시조이다. 통일후 전종회가 삼한공신으로 임명되었는데, 고려와의 인연이 나주가 고려영토일때 인지, 백제 패망시인지, 패망후 서남해 일대에서 벌어진 백제부흥운동 과정인지 알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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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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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문왕(景文王) 신라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875. 신라 제48대왕. 재위 861∼875. 성은 김씨, 이름은 응렴(膺廉), 혹은 의렴(疑廉).아버지는 계명(啓明)이며, 어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이다. 할아버지는 희강왕이며, 할머니는 충공(忠恭)의 딸인 문목부인(文穆夫人)김씨이고, 왕비는 헌안왕의 큰 딸인 영화부인(寧花夫人)김씨이다.또, 뒤에 헌안왕의 작은 딸도 왕비로 삼았다. 아들은 황(晃:정강왕)·정(晸:헌강왕)·윤(胤)이고, 딸은 만(曼:진성여왕)이며, 동생으로 위홍(魏弘)이 있었다.왕위에 오르기 전에 일찍이 국선(國仙)이 되었는데, 헌안왕이 불러 나라 안을 돌아다니면서 본 일을 묻자 선행을 행한 세 사람을 말하였는데, 첫째는 남의 윗자리에 있을 만하나 겸손하여 남의 밑에 있는 사람이요, 둘째는 부호이면서 검소하게 옷을 입은 사람이요, 셋째는 고귀한 세력가이면서 그 위엄을 보이지 아니한 사람이라 하였다.이 말을 들은 헌안왕이 어짐을 알고 사위로 삼고자 하여 왕의 두 딸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하게 하였다. 이에 낭도인 범교사(範敎師:삼국사기에는 興輪寺僧이라고 함.)의 조언을 받아들여 왕의 큰 딸과 결혼하여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경문왕은 불교에 비교적 많은 관심을 나타내었으므로, 낭도 중에는 승려가 많았다.864년에 감은사에 행차하였고, 866년에는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을 구경하기도 했다. 871년에는 황룡사구층탑을 개조하였다.경문왕은 불교와 아울러 국학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었다.864년에는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로 하여금 경전의 뜻을 강론하게 하였다. 이러한 경문왕의 관심은 즉위한 직후 나라를 잘 다스려보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이때 왕의 정치를 도운 사람들 중에는 국선출신이 많았는데, 곧 요원랑(邀元郎)·예흔랑(譽昕郎) 등이다. 이들은 국토를 유람하면서 은근히 왕을 위하여 치국의 뜻을 노래로 짓고, 이를 다시 사지(舍知)인 심필(心弼)을 시켜 대구화상(大矩和尙)에게 보내어 〈현금포곡 玄琴抱曲〉·〈대도곡 大道曲〉·〈문상곡 門詳曲〉 등 3수의 노래를 짓게 하였는데, 경문왕이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칭찬하였다고 하는데 가사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즉위 초 861년에 대사면을 실시하고 862년 이찬(伊飡) 김정(金正)을 상대등으로, 아찬(阿飡) 위진(魏珍)을 시중에 임명하였으며 866년에는 아버지 계명을 의공대왕(懿恭大王), 어머니 광화부인을 광의왕태후(光懿王太后), 왕비를 문의왕비(文懿王妃)로 봉하고 왕자 정을 태자로 삼는 등, 열의를 가지고 치국에 임하였지만 진골귀족간의 오랜 분쟁은 일시에 바로잡을 수 없게 되었다.그 결과 중기 이후에는 반란사건이 계속 일어났다.866년 이찬 윤흥(允興)과 그 동생 숙흥(叔興)·계흥(季興)의 모역과, 868년 이찬 김예(金銳)·김현(金鉉) 등의 모반, 874년 근종(近宗) 등의 모역이 있었다.그러나 경문왕은 하대사회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죽었다.한편, 경문왕은 산 뱀을 가슴에 덮고 잠자는 나쁜 습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당나귀의 귀와 같은 큰 귀를 가졌다는 소문도 퍼져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역시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 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헌강왕(憲康王)/김정(金晸) 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C)모략(D)명성(S)축성(D)

신라 제49대 왕.?~886. 성명 김정(金晸). 경문왕·문의왕후(文懿王后)의 아들. 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 즉위하자 문치에 힘썼으며, 876년 황룡사(皇龍寺)에 백고좌(百高座:큰 법회)를 베풀어 불경을 강(講)하게 하였다. 878년 당나라에 조공하여 희종(僖宗)에 의해 신라왕에 책봉되었으며, 이듬해 반란을 도모한 일길찬(一吉飡) 신홍(信弘)을 처형하였다. 880년 처용무(處容舞)가 크게 유행하였으며, 서울의 민가는 모두 기와로 덮고 숯으로 밥을 짓는 등 사치와 환락의 시대가 이룩되었으나, 이때부터 신라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정강왕(定康王)/김황(金晃) 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C)모략(D)명성(S)축성(D)신라 제50대 왕.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황(晃). 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로 의공대왕(懿恭大王)으로 추봉된 계명(啓明)이고, 할머니는 광의왕태후(光義王太后)로 추봉된 광화부인(光和夫人)이다.아버지는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맏딸로 문의왕후(文懿王后)에 봉하여진 영화부인(寧花夫人)이다. 정(晸:헌강왕), 만(曼:진성여왕), 윤(胤)과 형제간이다.짧은 재위기간 동안에 887년에 정월 황룡사(皇龍寺)에서 백좌강경(百座講經)을 설치하였고, 이찬(伊飡) 김요(金#요49) 가 한주(漢州)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였다.5월에 병이 들어 시중 준흥(俊興)에게 병이 위급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아들이 없으므로 누이 만으로 왕위를 잇게 하라고 부탁하고, 7월 5일에 죽었다. 보리사(菩提寺)동남에 묻혔다.

 

진성여왕(眞聖女王)/김만(金曼) 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S)축성(D)

신라 제51대 왕. 신라 시대 3인의 여왕 중 마지막 여왕이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만(曼). 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로 의공대왕(懿恭大王)에 봉해진 김계명(金啓明)이며, 할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으로 광의왕태후(光義王太后)로 봉해졌다. 아버지는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장녀로 뒤에 문의왕후(文懿王后)에 봉해진 영화부인(寧花夫人) 김씨이다. 형제로는 정(晸:헌강왕)·황(晃:정강왕)·윤(胤) 등이 있다.진성여왕은 즉위 직후 주(州)·군(郡)에 1년간 조세를 면제하고, 황룡사(皇龍寺)에 백좌강경(百座講經)을 설치하는 등 민심수습에 노력하였다.그러나 887년(진성여왕 2) 2월 숙부(叔父)이자 남편이었던 상대등(上大等) 위홍(魏弘)이 죽자 정치기강이 갑자기 문란해지기 시작하였다.이와 함께 대야주(大耶州)에 은거하던 왕거인(王巨人)의 국왕 비판 등이 있었으며, 888년부터는 주·군으로부터 세금이 들어오지 않게 되어 국고가 비게 되었다. 이에 관리를 각지에 보내어 세금을 독촉하였고, 이를 계기로 사방에서 도적이 봉기하게 되었다.이때 원종(元宗)과 애노(哀奴)가 사벌주(沙伐州:지금의 상주)에서 난을 일으켰으나 이를 토벌하지 못하였다. 이 난을 계기로 계속해서 적당(賊黨)의 난이 일어났다.891년에 북원(北原:지금의 원주)의 적수 양길(梁吉)이 부하인 궁예(弓裔)를 시켜 동쪽으로 원정하게 하여 명주(溟州:지금의 강릉)까지 함락시켰다. 그 다음해에는 완산주(完山州:지금의 전주)에서 견훤(甄萱)이 스스로 후백제를 건국하니 무주(武州:지금의 光州)동남쪽의 군현이 모두 그에게 항복하였다.895년에는 영주를 손에 넣은 궁예가 다시 저족(猪足)·생천(生川)을 거쳐 한주(漢州)·철원(鐵圓)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 국가의 실질적인 통치영역은 경주를 중심한 그 주변지역에 그치고, 전국토는 대부분 적당이나 지방호족세력의 휘하에 들어갔다.또, 896년에는 이른바 적고적(赤袴賊)이 경주의 서부 모량리(牟梁里)까지 진출하여 민가를 약탈하는 등 수도의 안위조차 불안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최치원(崔致遠)은 894년에 시무10조(時務十條)를 제시하였다.이 제의는 받아들여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진골귀족의 반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최치원의 개혁안은 육두품 중심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강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어서 진골귀족의 이익과는 배치될 수 있었다.이 개혁이 시대적 한계성 때문에 시행되지 못함으로써 신라의 붕괴는 막을 수 없었고 후삼국이 정립하게 되었다.897년 6월 조카인 헌강왕의 아들 요(嶢:뒤의 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해 12월에 죽었다. 황산(黃山)에 장시지냈다. 한편, 진성여왕 때에는 거타지(居陀知) 설화가 알려져 있는데, 그 내용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할아버지인 작제건(作帝建)이 용녀(龍女)를 아내로 맞이하는 설화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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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공왕(孝恭王)/김요(金嶢) 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S)축성(D)

신라 제52대 왕.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요(嶢). 헌강왕의 서자이며, 어머니는 의명왕태후(義明王太后, 또는 文資王后)로 추존된 김씨부인이다. 할아버지는 경문왕이고, 할머니는 헌안왕의 장녀 영화부인(寧花夫人)이며, 비는 이찬 예겸(乂謙)의 딸이다.헌강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길에서 자색이 뛰어난 한 여자를 만났는데, 뒤에 헌강왕이 궁궐을 빠져나가 그 여자와 야합하여 태어난 아들이다. 뒤에 이 사실을 안 진성여왕에 의하여 헌강왕의 혈육이라 하여 895년에 태자로 봉하여지고, 뒤이어 왕위를 물려받았다. 재위시 신라는 왕실의 권위가 떨어져서 지방에서 일어난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이 서로 패권을 다투는 형세였다. 우선, 지금의 청주나 충주 이북지역은 완전히 궁예의 세력권에 속하게 되었다. 궁예는 901년에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고, 904년에 백관(百官)을 설치하였으며, 그 다음해에는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신라는 907년에 서남쪽에서 점점 세력을 키운 견훤에게 일선군(一善郡:지금의 善山)이남의 10여성을 빼앗겼다. 한반도에서 궁예와 견훤의 세력다툼은 점차 열기를 더하여 갔다.한편, 궁예의 부하 왕건(王建)은 903년 병선(兵船)을 이끌고 금성(錦城) 등 10여 군현을 공취하였다. 이후 서해의 해상권은 대체로 왕건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909년에 왕건은 진도군과 고이도성(皐夷島城)을 공취하였으며, 견훤이 중국 오월(吳越)에 보낸 사자를 나포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910년에 왕건은 나주를 다시 뺏기 위하여 포위공격하여 온 견훤군을 대파하였다. 서해상에서 왕건의 전승은 그가 다가올 사회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이상과 같은 정세 속에서도 신라왕실의 실정(失政)은 계속되어 911년에는 대신 은영(殷影)이 효공왕의 천첩을 죽여 왕정을 경계하기까지 하였다.죽은 뒤 사자사(師子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도 하고, 혹은 사자사 북쪽에서 화장하여 뼈는 구지제(仇智堤) 동산(東山) 기슭에 묻었다고도 한다.

 

 

신덕왕(神德王)/박경휘(朴景暉) 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C)모략(D)명성(S)축성(D)

신라 제53대 왕. 성은 박씨(朴氏), 이름은 경휘(景暉 또는 景徽), 본명은 수종(秀宗). 아달라왕의 원손으로 아버지는 정강왕 때 대아찬(大阿飡)을 지냈고 선성대왕(宣聖大王 또는 宣成大王)으로 추봉된 예겸(乂兼, 또는 銳謙)이다.일설에는 예겸은 의부이고 친아버지는 흥렴대왕(興廉大王)으로 추봉된 각간 문원(文元)이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성호대왕(成虎大王)으로 추봉된 순홍(順弘)의 딸 정화부인(貞花夫人)이며, 비는 헌강왕의 딸인 의성왕후(義成王后 또는 懿成王后)이다.슬하에 승영(昇英), 위응(魏膺)이 있었는데, 승영은 경명왕이 되었고 위응은 경애왕이 되었다. 신덕왕대의 신라는 실제로 경주지역을 다스리는 데 그쳤고, 국토의 대부분은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의 세력권 속에 들어가 있었다.궁예의 부하인 왕건(王建)이 나주를 정벌한 이후 그들의 패권다툼이 더욱 치열해가는 동안 신라의 명맥은 겨우 유지되는 형편이었다.916년에 이르러서는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을 공격하여 비록 이를 함락시키지는 못하였으나, 그것은 곧 신라의 심장부에 비수를 겨누는 격이 되었다.이때의 신라왕실은 스스로 후백제나 태봉(泰封)의 공격을 막아낼 만한 힘이 없었다. 장지는 죽성(竹城:위치 미상)이라고도 하고 혹은 화장하여 잠현(箴峴)에 묻었다고도 한다.

 

 

경명왕(景明王)/박승영(朴昇英) 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S)축성(D)

신라 제54대 왕. 성은 박씨, 이름은 승영(昇英). 아버지는 신덕왕,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의성왕후(義成王后, 또는 資成, 懿成, 孝資王后), 할아버지는 선성대왕(宣聖大王, 또는 宣成大王)으로 추봉된 예겸(乂謙, 또는 銳謙)이다.그러나 일설에 예겸은 신덕왕의 의부(義父)이고, 친할아버지는 흥렴대왕(興廉大王)으로 추봉된 각간(角干) 문원(文元)이라고 한다.경명왕 때에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실제 신라왕실은 왕경(王京)인 경주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지역을 다스리는 데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궁예(弓裔)와 견훤(甄萱) 등 지방세력에게 빼앗겼다.특히, 918년(경명왕 2)에 일어난 현승(玄昇)의 반란으로 신라는 그 운명을 더욱 재촉하게 되었다. 같은해 궁예 휘하의 인심이 돌변하여 왕건(王建)을 추대하였고, 궁예는 피살되었다.그뒤 왕건과 견훤이 패권을 다투게 되었으나, 이들의 패권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이들과 신라왕실과의 연결이었다. 따라서 안동이나 합천지역에서 이들의 패권다툼이 치열하였으나, 싸움은 결국 해상권을 장악한 왕건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또, 경명왕 때에는 여러가지 변괴가 있었다고 하는데, 919년 사천왕사(四天王寺)벽화의 개가 울었고, 927년에 황룡사탑(皇龍寺塔)의 그림자가 사지(舍知) 금모(今毛)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물렀으며,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뜰로 쫓아나왔다는 기록들이 그것이다.이러한 설화기사의 이면을 생각해볼 때, 당시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불안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재위 7년 만에 죽으니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지냈다(이곳에서 화장했다고도 한다).

 

경애왕(景哀王)/박위응(朴魏膺) 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S)축성(D)

신라 제55대 왕. 성은 박씨(朴氏), 이름은 위응(魏膺). 아버지는 신덕왕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 의성왕후(義成王后 또는 資成·懿成·孝資王后)이다. 할아버지는 선성대왕(宣聖大王 또는 宣成大王)으로 추봉된 예겸(乂謙 또는 銳謙)이다. 일설에는 예겸이 신덕왕의 의부(義父)라 하여, 친할아버지는 흥렴대왕(興廉大王)으로 추봉된 각간 문원(文元)이며, 할머니는 성호대왕(成虎大王)으로 추봉된 순홍(順弘)의 딸 정화부인(貞花夫人)이라고도 한다.경애왕 때 후삼국의 패권다툼은 이미 왕건(王建)쪽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925년 고울부장군(高鬱府將軍) 능문(能文)이 항복하였고, 927년 강주(康州: 지금의 晉州)의 왕봉규(王逢規)가 관할하는 돌산(突山) 등이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왕건과 견훤(甄萱)은 잠시 싸움을 그치고 강화하였는데, 견훤이 보낸 질자(質子)인 진호(眞虎)가 고려에서 죽자 견훤은 926년 다시 출병하여 고려를 공격하였다.927년 견훤은 신라를 공격하여 포석정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궁궐을 노략질하면서 경순왕을 세우고 돌아갔다. 한편, 경애왕 때 황룡사에 백좌경설(百座經說)을 설치하고 선승(禪僧) 300여명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는데, 이것을 백좌통설선교(百座通說禪敎)라 부르며, 대규모 선승 모임의 시초가 되었다.

 

 

경순왕(敬順王)/김부(金傅) 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S)축성(C)신라 제56대 마지막왕. 성은 김씨, 이름은 부(傅). 문성왕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신흥대왕(神興大王)으로 추봉된 효종(혹은 효종이 할아버지라는 설도 있음.)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며, 할아버지는 의흥대왕(懿興大王)으로 추봉된 관○(官○)이다. 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들이 둘 있었다. 큰아들은 마의태자(麻衣太子)이고 막내아들은 범공(梵空)이다. 고려에 항복한 뒤에 왕건의 큰딸 낙랑공주와 다시 결혼하였다.927년 포석정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살해된 후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다.그러나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931년 왕건이 경순왕을 알현하여 수십일을 머물렀다. 왕건은 부하들에게 질서와 규율을 지키도록 하니, 수도의 아녀자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늑대와 범을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고 한다.935년 그는 고려에 신라를 넘겨 줄 것을 신하들과 논의하고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왕건에게 항복하는 국서를 전하게 하였다.이때 마의태자는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범공은 머리를 깎고 화엄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그가 신하를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할 때 향거(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리에 뻗쳤다. 왕건은 그를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했는데, 그 지위는 태자의 위였다. 왕건은 또 그에게 녹(祿) 1000석을 주고 그의 시종과 원장(員將)을 모두 등용하였으며, 신라를 고쳐 경주라 하고 그의 식읍(食邑)으로 주었으며, 그를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았다.무덤은 장단에 있다.

 

 

김경렴 신라 육전(D)수전(D)정치(B)모략(A)명성(C)축성(D)

태조의 제 5비 신성왕후(神成王后) 김씨(金氏)의 오빠이며 김억렴(金億廉)의 아들이다. 54대왕 신덕왕(神德王)부터 왕통이 박씨가 되는것을 꺼려하여, 몰래 백제의 견훤과 내통하여 김씨왕인 경순왕(敬順王)을 옹립하였다.

 

박효렴(朴孝廉) 신라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생몰년 미상. 신라 하대의 왕족. 경애왕의 동생이다.927년(경애왕 4) 9월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경주를 기습하여 때마침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베풀고 있던 왕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때 재상 김영경(金英景) 등과 함께 견훤의 포로가 되어 후백제로 붙잡혀 갔다.

 

영경(英景) 신라 육전(D)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생몰년 미상. 신라 경애왕대의 재상.927년(경애왕 4)11월에 후백제 견훤(甄萱)이 경주를 급습하였을 때, 영경은 왕 및 여러 조정대신들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중 왕제 효렴(孝廉)과 함께 견훤에게 사로잡혀 끌려갔다.

 

김웅렴(金雄廉) 신라 육전(B)수전(C)정치(B)모략(A)명성(B)축성(D)생몰년 미상. 신라말의 국상(國相). 그의 관위나 관직 등은 잘 알 수 없다.927년(경순왕 1) 견훤(甄萱)이 고려 태조에게 보낸 서신 중에 그가 국상으로서 고려에 원병을 요청하러 갔다고 한다. 아마 경애왕·경순왕 무렵에 국상의 지위에 있었던 진골신분으로 대아찬(大阿飡)이상의 관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국상이란 재상(宰相)과 같은 의미의 것으로 생각되는데, 대체로 상대등이나 병부령(兵部令) 등의 관직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견훤이 경애왕을 살해한 뒤 왕의 동생 효렴(孝廉)과 재상 김영경(金英景)을 포로로 잡아갔다는 것으로 보아, 경애왕의 근친으로서 혹 김영경의 뒤를 이어 재상의 지위에 올랐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겸용(謙用) 신라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C)생몰년 미상. 신라 경순왕 때의 태수(太守).930년(경순왕 4)고려 태조와 후백제 견훤이 고창군 병산(甁山)밑에서 큰 싸움을 벌였다.2월에 태조가 경순왕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승리를 알리자 신라의 사신으로 가서 서로 만나기를 청하였다. 태조가 931년 2월에 50여기(騎)를 거느리고 경기(京畿)에 이르렀는데, 경순왕은 백관과 더불어 교외로 나가 그를 맞고 임해전(臨海殿)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

 

김유렴(金裕廉) 신라 육전(C)수전(D)정치(B)모략(D)명성(B)축성(D)생몰년 미상. 신라시대의 왕족. 경순왕의 당제(堂弟)이다.917년(경명왕 1)에 대아찬(大阿飡)으로 시중(侍中)이 되었는데, 919년 시중 언옹(彦邕)을 사찬(沙飡)으로 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해에 면직된듯하다.그뒤 930년(경순왕 4)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고창군(古昌郡)싸움에서 견훤(甄萱)을 물리치고 경순왕에게 알리자 경순왕이 태조를 만나기를 청하였다. 이에 931년 2월에 태조가 신라를 방문하여 경순왕을 위로하였는데, 귀국할 때 볼모가 되어 왕건을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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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억렴(金億廉) 신라 육전(C)수전(D)정치(C)모략(C)명성(B)축성(D)생몰년 미상. 신라 경순왕의 큰아버지. 고려 태조의 제5비 신성왕후(神成王后)의 아버지.관등은 잡간이었고, 지대야군사(知大耶郡事)를 지냈다.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태조는 대단히 기뻐하며 신라의 종실과 혼인하기를 원했다. 이에 경순왕은 그의 큰아버지인 김억렴의 딸을 천거해 왕건(王建)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가 욱(郁)으로 뒷날 그의 아들이 현종(顯宗)이 되어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로 추시(追諡)하였고 욱을 안종(安宗)으로 추봉하였다.그런데 고려 때 김관의(金寬毅)가 지은《왕대종록 王代宗錄》에는 “신성왕후 이씨는 본래 경주대위(慶州大尉) 이정언(李正言)이 협주수(俠州守)로 있을 때에 태조가 이 주에 거둥하여 비로 삼았으므로 혹은 협주군(俠州君)이라고도 하였다.”고 하여 신성왕후가 이정언의 딸인 것으로 되어 있다.그러나 협주란 지명은 현종이 즉위한 뒤에 개칭된 것으로 이전에는 대량주군(大良州郡), 또는 대야주군(大耶州郡)으로 불리었다는 점과, 왕비를 군(君)으로 책봉한 예가 고려시대에는 없었다는 것, 또한 《왕대종록》에는 태조의 후비가 25인이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29인이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왕대종록》의 기록은 따르기가 어려운 것이다.

 

 

김악(金渥) 신라 육전(D)수전(D)정치(A)모략(B)명성(B)축성(D)생몰년 미상. 신라 헌강왕 때 당나라에 간 유학생.876년(헌강왕 2) 당나라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최치원(崔致遠)의 〈신라왕여당강서고대부상장 新羅王與唐江西高大夫湘狀〉에는 고상(高湘)이 고시관이 되어 신라의 박인범(朴仁範)과 함께 두 사람을 합격시킨 데 대해 감사하는 내용의 글이 실려 있다.문성왕 때 김운경(金雲卿)이 처음으로 빈공과에 합격한 이래 당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등과한 자가 58인이고, 5대(五代)에는 32인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저명한 자로서는 최이정(崔利貞) 등 십수인이다. 그 중에서도 그는 예(禮)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신라와 후백제의 시랑(侍郎), 고려 때 학사(學士)인 김악(金渥, 金樂·金岳)과는 동명이인으로 보인다.

 

 

김위홍(金魏弘) 신라 육전(C)수전(D)정치(B)모략(B)명성(B)축성(A)?~888(진성여왕 2), 신라의 왕족대신.  상대등,각간,병부령의 관직에 있으면서 정치와 군사의 대권을 쥐고 흔들었다. 왕명을 받고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신라의 향가를 모아 〈삼대목 三代目〉이라는 향가집을 만들기도 했다.  희강왕의 손자이며, 신무왕의 외손자, 경문왕의 동생이다. 아버지는 의공대왕(義恭大王)으로 추봉된 아찬(阿飡) 계명(啓明)이고, 어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이다. 872년(경문왕 2) 상재상(上宰相) 이찬(伊飡)으로서 황룡사9층탑을 다시 짓는 총책임을 맡았다.  조카인 헌강왕 때는 상대등이 되어 정사를 도왔고, 진성여왕 때도 정권을 독차지했다. 진성여왕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왕력(王曆)과 기이(紀異)의 진성여대왕 거타지조(眞成女大王居陀知條), 〈삼국사기〉 등에 나와 있다. 책에 따라 다르게 적혀 있으나 여러 사실을 종합해보면, 위홍은 진성여왕의 유모인 부호부인(鳧好夫人)의 남편이었는데, 일찍부터 진성여왕과 좋아하다가 부인이 죽은 다음 진성여왕과 지내게 된 듯하다.  진성여왕은 위홍이 죽자 매우 슬퍼하며 그에게 혜성대왕(蕙成大王)이라는 시호를 주고, 897년 조카에게 왕위를 물려준 다음 북궁(北宮)에 원당(願堂)을 짓고 위홍의 명복을 빌다가 죽었다고 한다.

 

 

김효종(金孝宗) 신라 육전(A)수전(C)정치(B)모략(B)명성(A)축성(B)신라말기의 화랑으로 문성왕의 후손인 서발한(舒發翰) 김인경(金仁慶)의 아들이며 865년 전후에 출생한것으로 추측한다. 아명은 화달(化達)이며 효종랑(孝宗郎)이라 하여 화랑의 우두머리 역활을 했다. 삼국사기 열전에 의하면 김효종이 화랑이였을 적에 화랑 낭도들과 함께 포석정에서 수련을 하였는데, 두사람의 낭도가 포석정에 늦게 당도하였다. 두 낭도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다그치자 두 낭도는 오는길에 분황사(芬皇寺) 인근 마을에서 효녀 지은(知恩)의 딱한 사정을 듣느라 늦었다고 말한다. 이에 사정을 알아보고자 지은을 찾아간 김효종은 지은이 나이 30이 넘도록 시집을 가지 않고 홀로 늙은 어미를 모시고 살다가 살림이 어려워 지자 부자집에 종으로 들어가 어미를 어렵게 봉양하고 있다는 사정을 듣게 된다. 이에 김효종은 부모에게 청하여 조(粟) 100석과 의복을 지은에게 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화랑들이 곡식 1천석을 내어 지은를 노비에서 해방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진성여왕은 지은에게 곡식 500석과 집한채를 내려주었으며, 도적을 막기위해 군사를 보내 지은의 집을 지키게 하였다. 한편 진성여왕은 자신의 질녀 김씨(헌강왕의 딸)를 김효종과 혼인토록 하였다. 그후 902년 효공왕 6년에 대아찬(大阿飡) 벼슬에 있다가 집사성 시중(侍中)에 올랐으며, 927년 11월 백제왕 견훤에 의해 아들 김부(金傅)가 왕위에 옹립되어 경순왕이 되자 신흥대왕(神興大王)으로 추봉되었으며, 부인 김씨는 계아태후(桂娥太后)에 추봉되었다.

 

 

김일(金鎰)/마의태자(麻衣太子) 신라(왕족) 육전(B)수전(D)정치(B)모략(C)명성(A)축성(C)

부안김씨(扶安金氏)의 시조로 생몰년 미상.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태자. 경순왕은 후백제 견훤(甄萱)과 고려 왕건(王建)의 세력에 눌려 더이상 국가를 보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935년(경순왕 9) 나라를 들어 고려에 귀부(歸附)하고자 하였다. 이에 마의태자는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天命)이 있으니 힘을 다하지 않고 1천년사직을 가벼이 남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하여 반대하였다.그러나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을 더이상 죽일 수 없다 하여 시랑 김봉휴(金封休)를 시켜 국서를 보내어 고려에 항복하였다. 마의태자는 통곡하며 왕을 하직하고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초식으로 연명하며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마의태자"라는 명칭은 그가 베옷을 입고 일생을 보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생몰년 미상.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태자.경순왕은 후백제 견훤(甄萱)과 고려 왕건(王建)의 세력에 눌려 더이상 국가를 보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935년(경순왕 9) 나라를 들어 고려에 귀부(歸附)하고자 하였다. 이에 마의태자는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天命)이 있으니 힘을 다하지 않고 1천년사직을 가벼이 남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하여 반대하였다.그러나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을 더이상 죽일 수 없다 하여 시랑 김봉휴(金封休)를 시켜 국서를 보내어 고려에 항복하였다. 마의태자는 통곡하며 왕을 하직하고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초식으로 연명하며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마의태자’라는 명칭은 그가 베옷을 입고 일생을 보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후손이 금시조라는 설이 있다. 고려사 기록에는 여진의 사신이 와서 시조가 고려라 하였다.

 

 

김인윤(金仁允)  신라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신라의 왕족으로 통일후 삼한공신에 봉해졌다.

 

 

유의신(兪義臣) 신라(기계호족) 육전(C)수전(C)정치(C)모략(D)명성(C)축성(D)

기계 유씨(杞溪兪氏)로 신라가 망하자 고려조(高麗朝)에 불복하므로 태조(太祖)가 기계호장(杞溪戶長)을 삼으니 후손들이 기계(杞溪)를 본관(本貫)으로 칭관(稱貫)하게 되었다. 

 

 

이순유(李純由)/이극신(李克臣) 신라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B)축성(D)

성주이씨(星州李氏)의 시조로 신라 경순왕(敬順王 : 제 56대 왕 재위기간 924~927) 때 재상(宰相)을 지낸 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아우 이돈유(李敦由)와 더불어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충신으로 경순왕이 고려(高麗)에 항복하고 손위(遜位)하자 마의 태자(麻衣太子)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천년(千年) 사직을 보존하기 위하여 구국(救國)의 방책을 기도하였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왕 건(王建)은 이순유의 재주와 기량을 흠모하여 벼슬할 것을 권유했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고 하여 거절하고 이름까지도 극신(克臣)이라 고쳐 경산(京山 : 지금의 성주면 경산동)으로 옮겨 살았다. 그 절의에 감복한 태조 왕건은 “나의 신하는 아니지만 나의 백성임에 틀림없다”하고는 향직(鄕職)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으로 삼았다.

 

 

이돈유(李敦由) 신라 육전(D)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D)

신라의 문신으로, 성주이씨 시조 이순유의 동생이다.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이 고려에 나라를 바치자 마의태자와 신라부흥을 위해 노력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은거하던중, 형 이순유가 고려 태조에 의해 경산호장이 되자 경산에 들어가 촌을 이루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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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崔致遠) 신라 육전(D)수전(D)정치(S)모략(A)명성(S)축성(C)

자는 고운(孤雲)<또는 해운(海雲)이라고도 하였다.>이며, 서울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기록의 전함이 없어져 그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 치원은 어려서부터 정밀하고 민첩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 12세가 되어 장차 바다배를 타고 당나라에 들어가 공부를 하려 할 때 그 아버지가 말하기를 “십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니 힘써 공부하라!” 하였다. 치원이 당나라에 이르러 스승을 좇아 학문을 배우기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건부(乾符) 원년 갑오(경문왕 14: 874)에 예부시랑 배찬(裴瓚) 아래에서 한번 시험을 보아 합격하여 선주(宣州) 율수현위(水縣尉)에 임명되었고 그 치적의 평가에 따라 승무랑(承務郞) 시어사내공봉(侍御史內供奉)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그 무렵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병(高騈)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토벌하였는데, 치원을 불러 종사관을 삼고 서기의 임무를 맡겼다. 그가 지은 표·장·서·계((表狀書啓)가 지금[고려]까지 전한다. 나이 28세에 이르러 귀국할 뜻을 가지자 희종(僖宗)이 이를 알고 광계(光啓) 원년(憲康王 11: 885)에 조칙을 가지고 사신으로 보내었다. [신라 왕이] 붙들어 두려고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사(知瑞書監事)로 삼았다.치원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서학(西學)하여 얻은 바가 많아 앞으로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왕조] 말기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되지 않고 태산군(太山郡)[현재의 전북 정읍시 칠보면] 태수로 나갔다. 당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2년(진성왕 7: 893)에 납정절사(納旌節使) 병부시랑 김처회(金處誨)가 바다에서 익사하자 곧 추성군(城郡) 태수 김준(金峻)을 차출하여 고주사(告奏使)로 삼았다. 당시 치원은 부성군(富城郡)[현재의 충남 서산시] 태수로 있었는데 마침 불러 하정사(賀正使)로 삼았다. 그러나 해마다 흉년이 들어 기근에 시달렸고 그로 말미암아 도적이 횡행하여 길이 막혀 가지 못하였다. 그 후에 치원은 또한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으나 언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문집에 태사(太師) 시중에게 올린 편지가 있는 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엎드려 듣건대 동쪽 바다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 변한, 진한이었습니다.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가 되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幽州)의 연(燕)과 제(齊), 노(魯)나라를 휘어 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습니다. 수나라 황제가 통제하지 못하여 요동을 정벌하였고, 정관(貞觀) 연간에 우리 당나라 태종 황제가 몸소 6개 부대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토벌하니 고구려가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화친을 청하였으므로 문황(文皇)이 항복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이때 우리 무열대왕께서 지극한 정성으로 한 지방의 전난 평정에 도움을 청하여 당나라에 들어가 조회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후에 고구려와 백제가 이전의 악을 계속 짓자 무열왕이 입조하여 그 길잡이가 되기를 청하였습니다. 고종 황제 현경(顯慶) 5년(태종 무열왕 7: 660)에 이르어 소정방에게 명하여 10도의 강한 군사와 범선 만 척을 거느리고 백제를 대파하고 이어 그 땅에 부여도독부를 두고 유민을 불러 모아 중국 관리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는데 성향이 서로 달라 반란을 일으키므로 드디어 그 사람들을 하남(河南)으로 옮겼습니다. 총장(摠章) 원년(문무왕 원년: 668) 영공(英公) 서적(徐勣)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깨뜨리고 안동도독부를 두었다가 의봉(儀鳳) 3년(678)에 이르러 그 사람들을 하남과 농우(右) 지방으로 이주시켰습니다. 고구려의 유민이 모여 북으로 태백산 아래를 근거지로 하여 나라를 세워 발해라 하였습니다. [발해는] 개원(開元) 20년(발해 무왕 14: 732)에 중국을 원망하고 한스럽게 여겨 군사를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갑자기 습격하여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살해하였습니다. 이에 명황제(明皇帝)께서 크게 노하여 내사(內史) 고품(高品) 하행성(何行成)과 태복경(太僕卿) 김사란(金思蘭)에게 명하여 군사를 징발하여 바다를 건너 칠 때 저희 왕 김모를 태위(太尉) 지절(持節) 충영해군사(充寧海軍事)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에 임명하여 참전하게 하였으나 깊은 겨울 눈이 많이 쌓이고 양국 군대가 추위에 시달리므로 회군을 명하셨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300년 동안 일방이 무사하고 평화로우니 이는 곧 우리 무열왕의 공 때문입니다. 지금 저는 유학의 학문이 낮은 자이고 해외의 평범한 사람으로서 외람되이 표(表)를 받들고 이 좋은 나라에 와서 조회함에 무릇 극도로 간청이 있어 예에 맞게 모두 진술하고자 합니다. 엎드려 살펴보건대 원화(元和) 12년(헌덕왕 9년: 817)에 본국의 왕자 김장렴(金張廉)이 태풍을 만나 명주(明州) 해안에 다다랐을 때, 절동(浙東)의 어느 관리가 호송하여 서울에 들어갔고, 중화(中和) 2년(헌강왕 8년: 882)에 입조사(入朝使) 김직량(金直諒)은 중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도로가 통하지 않아 마침내 초주(楚州) 해안에서 배를 내려 빙돌아서 양주(楊州)에 이르러 황제가 촉(蜀) 지방에 행차하신 것을 알았는데, 고태위(高太尉)가 도두(都頭) 장검(張儉)을 보내 서천(西川)에까지 호송하였으니, 이전의 사례가 분명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태사 시중께서는 굽어 큰 은혜를 내리시어 특별히 수륙의 통행증을 내려 주시고 지방 관서로 하여금 선박과 식사 및 원거리 여행에 필요한 말과 사료를 공급하도록 하시고 아울러 장졸을 파견하여 어전에 이르도록 하여 주십시오.』이 편지 중의 태사 시중이라고 한 사람의 성명을 또한 알 수가 없다. 치원은 서쪽에서 당나라[大唐]를 섬기다가 동쪽의 고국에 돌아온 후부터 계속하여 혼란한 세상을 만나 발이 묶이고 걸핏하면 허물을 뒤집어쓰니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스스로 가슴 아파하여 다시 관직에 나갈 뜻이 없었다. 방랑하면서 스스로 위로하였고, 산 아래와 강이나 바닷가에 정자를 짓고 소나무 대나무를 심었으며, 책을 베개로 삼아 읽고 시를 읊조렸다. 예컨대 경주의 남산, 강주(剛州)의 빙산(氷山), 합주(陜州)의 청량사(淸寺), 지리산[智異山]의 쌍계사, 합포현(合浦縣)[현재의 경남 마산시]의 별장 등은 모두 그가 노닐던 곳이다. 최후에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살면서 친형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조용히 살다가 늙어 죽었다.처음 서쪽으로 유학하였을 때 강동의 시인 나은(羅隱)과 서로 알게 되었다. 나은은 재주를 믿고 자만하여 남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는데 치원에게는 자기가 지은 시 다섯 두루마리를 보여주었다. 또 같은 해에 과거에 함께 합격한 고운(顧雲)과 친하게 지냈는데, 귀국하려 하자 고운(顧雲)이 시를 지어 송별하였다. 그 시는 대략 다음과 같다.<내 들으니 바다에 금자라가 셋이 있어 금자라 머리에 이고 있는 산 높고도 높구나 산 위에는 구슬과 보배와 황금으로 장식된 궁전이 있고,산 아래에는천리만리의 큰 바다라 가에 찍힌 한 점 계림이 푸른데 자라산 수재를 잉태하여 기특한 이 낳았네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그 문장 중국을 감동시켰네! 열여덟 살에 글싸움하는 곳에 나아가 한 화살로 금문책(金門策)을 깨었네>신당서 예문지(藝文志)에 쓰기를 『최치원의 사륙집(四六集) 한 권,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 있다.』고 하고 그 주(註)에 『최치원은 고려 사람으로 빈공과에 급제하여 고병의 종사관이 되었다.』고 하였으니 그 이름이 중국에 알려짐이 이와 같았다. 또 문집 30권이 세상에 전하고 있다. 전에 우리 태조가 일어날 때 치원은 [태조가] 비상한 사람으로 반드시 천명을 받아 나라를 열 것을 알고서 편지를 보내 문안드렸는데, 그 글 중에 『계림은 누런 잎이고 곡령(鵠嶺)은 푸른 소나무라.』는 귀절이 있었다. 그 제자들이 개국 초기에 와서 높은 관직에 오른 자가 한 둘이 아니었다. 현종이 왕위에 계실 때 치원이 조상의 왕업을 몰래 도왔으니 그 공을 잊을 수 없다고 하여 명을 내려 내사령(內史令)을 추증하고 14년 태평(太平) 2년 임술(1022) 5월에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근종(近宗) 신라 육전(C)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

신라 경문왕 14년 874년 이찬벼슬에 있었는데, 신라 조정에 불만을 품고 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신라 궁궐을 포위하고 왕을 위협했지만, 궁성을 수비하던 금군(禁軍)들에 의해 결국 토벌되어 거열(車裂)에 처해졌다. 이 반란은 신라 지도층에서 벌어진 최대의 반란사건이었다. 이 반란사건을 계기로 왕의 권위는 땅으로 추락했다.

 

 

평준(平俊) 신라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

경주인으로 평준의 딸이 태조의 제7비인 헌목 대부인(獻穆大夫人) 평씨(平氏)이다. 왕후 및 왕태후에 봉해진 부인이 총 6명이고, 나머지 비는 모두 부인이라 불리웠는데, 평씨만 유독 대부인이라 불리웠다. 평준이 신라의 항복를 추진한 막후인물이었다는 가능성이 높아 그 공적을 높이샀다는 설이 있다.

 

 

계강(繼康) 신라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B)축성(D)

신라 효공왕(孝恭王) 2년 898년, 견훤 7년, 궁예 4년 1월 신라조정 개편에서 아찬(阿飡)에서 시중(侍中)으로 임명되었다.

912년 효공왕 16년에는 이찬(伊飡)직에 있었는데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되었다.

 

 

이원(李元) 신라(합주호족) 육전(B)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

합주호족으로 합주(陜州)는 지금의 합천(陜川)이고 당시에 백제,신라,고려가 치열하게 쟁탈전을 벌이던 곳이다. 태조 왕건이 대량성(대야성)을 공략한 이후로 이원의 딸과 혼인했는데, 이가 제7비인 후대량원부인(後大良院夫人) 이씨(李氏)다. 후대량원부인이라 불리운것은 태조의 제 5비인 신성왕후 김씨가 대량태수를 지낸 김억렴의 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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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긍훈(孫兢訓) 신라(추화산성호족) 육전(B)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C)밀양손씨(密陽孫氏)의 상조(上祖)로 밀성 남정촌(南亭村)에서 태어났으며 추화산성(推火山城)에 거점을 두고 백제군의 침입을 수차례 방어했다. 신라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세운 대작갑사(大鵲岬寺)에서 화랑도(花郞道)의 근본인 세속오계(世俗五戒)를 귀산(貴山)과 추항을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에게 가르쳐 전통적인 사상교육을 보위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신라가 쇄잔하고, 고려가 강성함에 따라 태조 왕건에게 귀부하여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에 오르고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지금도 손긍훈의 영정은 운문사 조영전에 봉안되어 해마다 음력 9월9일에 향사하고 있다. 또한 손긍훈의 목상인 <삼중대광사도광리군목상>은 문화재자료 제214호로 밀양시 교동에 있다.

 

 

이금서(李金書) 경주

경주이씨(慶州李氏)로 조부 이거명(李居明)은 신라 소판(蘇判), 부 이금현(李金現)은 병부령(兵部令)을 지냈다. 이금서 역시 신라조정에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신라의 고려 귀부에 혁혁한 공을 세워 낭중(郎中) 벼슬에 오르고 삼한공신에 책록되었다.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 김부와 고려 태조의 딸 낙랑공주의 장녀 김씨와 혼인하였으며 아들은 병정(兵正), 손자는 정조시랑(正朝侍郞)을 역임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거명(李居明) 경주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중시조로 신라말 소판(蘇判) 벼슬을 지냈다. 신라의 관리로써 경주에 세거하였다. 아들 이금현(李金現)은 신라의 병부령(兵部令)을 지냈으며, 손자 이금서(李金書)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고려 조정에 출사하게 된다.

 

 

 

이금현(李金現) 경주

경주이씨(慶州李氏)로 아버지 이거명(李居明)의 뒤를 이어 신라조정에 출사하였다. 관직은 병부령(兵部令),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신라 패망후 아들 이금서(李金書)가 고려조정에 출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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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겸(金禮謙) 신라(왕족) 육전(C)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

경주김씨(慶州金氏)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록되고 내중령(內中令)에 임명되었다. 경주김씨가 신라왕족 일파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가 고려에 항복할때 공을 세운듯 하다. 경순왕과 죽방부인(先妃 朴氏)의 셋째 아들로 알려진 김명종(金鳴鍾)의 아들인듯 싶지만, 경주김씨 족보엔 김명종의 6세손이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시기상으로 고려사학 양신공도(良愼公徒)를 육성한 김의진(金義珍(?~1070)이 김예겸의 손자이고, 936~940년 사이에 삼한벽상공신에 책록된것으로 미루어 보아 김명종의 아들이거나 동시대의 혈족인듯 싶다.

 

 

박욱(朴郁) 신라(왕족) 육전(B)수전(B)정치(C)모략(C)명성(B)축성(C)밀양박씨(密陽朴氏)/밀성박씨(密城朴氏) 시조 박언침(朴彦沈)의 아들로 경명왕의 손자가 된다. 신라가 고려에 귀부한후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에 책록되고 공도대장군(控都大將軍)에 임명되었다. 박욱의 목상이 문화재자료 제 213호인 삼한벽공도대장군목상(三韓壁控都大將軍木像)이며 밀양시 내일동에 있다.

 

 

박란(朴瀾) 신라(왕족) 육전(B)수전(D)정치(C)모략(D)명성(C)축성(C)

밀양박씨로 박언의 아들이다. 아버지 박언과 함께 신라의 고려항복에 공을 세워 삼한공신에 책록되었고, 요동독포사(遼東督捕使)를 역임했다.

 

 

박언침(朴彦沈) 신라(왕족) 육전(C)수전(D)정치(B)모략(D)명성(B)축성(D)

밀양박씨(密陽朴氏)/밀성박씨(密城朴氏)의 시조로 경명왕의 맏아들로 신라의 왕자였으나, 견훤에 의해 경명왕이 자결하자 폐태자되었다. 경애왕이 들어서자 경명왕의 9왕자는 각기 식읍을 받고 분적했다. 박언침은 밀성군을 식읍으로 받고 밀성대군에 봉해졌다.

 

 

박윤웅(朴允雄) 신라(계변성호족) 육전(B)수전(C)정치(B)모략(C)명성(B)축성(B)울산박씨(蔚山朴氏)시조로 신라말에 계변성(戒邊城 울산)을 거점으로 하는 호족세력이었다. 박윤웅은 본시 하곡현의 개지변이란 작은 촌락의 촌주였는데, 5개 군현을 통합시켜 계변성을 세웠다. 그후 901년 신학성 장군이라 칭하며 일대를 다스리는 호족이 되었다. 918년 태조가 역성혁명을 일으키자 휘하 최환(崔煥)을 고려로 보내 귀부를 청하였다. 태조는 이에 하곡,동진,우풍의 3현을 합쳐 흥려부로 격상하고 박윤웅에게 흥려백(興麗伯)을 봉작하고 대장군에 임명하였다. 그후 일리천 전투에서 참전하여 공을 세우고 삼한공신에 책록되었다. 시호는 장무공(莊武公) 이다.

 

김봉휴(金封休) 신라 육전(D)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

신라의 시랑(侍朗)으로 국세가 완전히 기울자, 935년 10월에 신라의 경순왕은 고려로 항복을 청하게 된다. 이때 김봉휴가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태조를 뵙고 항복을 청하는 국서를 전달하니, 태조 역시 회부하는 국서를 김봉휴편으로 보냈다. 그 다음달에 경순왕이 직접 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으로가 항복을 청하니, 태조가 승락하여 신라는 천년 사직을 내리게 된다.

 

 

김율(金律) 신라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신라의 사신으로 고려에 파견되었을때 태조가 묻길 "들으니 신라에 세 가지 큰 보물이 있는데 황룡사의 장륙금상(丈六金像)과 9층탑과 성제대(聖帝帶)라고 한다. 세 가지 보물이 없어지지 않으면 나라도 망하지 않는다 하니 , 탑과 불상(佛像)은 아직 남아 있거니와 성제대도 지금 아직 있느냐"하였다. 김율이 대답하기를, "신은 일찍이 성제대가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하니, 태조가 웃으며 이르기를, "경(卿)이 귀신(貴臣)이 되어 어찌하여 나라의 큰 보물을 모른단 말인가"하였다. 김율이 부끄러이 여기고 돌아와서 신라왕에게 고하니, 경순왕이 뭇 신하들에게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 황룡사(皇龍寺)에 나이 90세가 넘는 중이 있었는데, 말하기를, "내가 듣기는 이것은 진평대왕(眞平大王)께서 띠고 계시던 것인데 역대(歷代)에서 이를 전하여 남고(南庫)에 간수해 두었다고 합니다"하였다. 경순왕이 드디어 남고(南庫)를 열자 풍우가 갑자기 일어나고 대낮인데도 컴컴해져서 볼 수가 없었다. 이에 날을 가려 재계(齋戒)하고 , 제사지낸 후에야 이를 볼 수 있었다. 나라 사람들은 진평왕이 성골(聖骨)의 왕이므로 성제대(聖帝帶)라 일컬었다. 그후로 태조 20년 5월에 전 신라왕 김부는 고려태조에게 이 허리띠를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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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언창(朴彦昌) 신라(왕족) 육전(B)수전(B)정치(B)모략(B)명성(B)축성(B)

상주박씨(尙州朴氏)의 시조로 경명왕의 둘째 아들이다. 경명왕은 즉위초 아홉아들에게 각기 식읍을 주고 분적(分籍)시켰다. 박언창은 사벌주(沙伐州)를 식읍으로 받았는데, 사벌주는 태봉,백제 및 각 호족들의 세력 각축장이 되었는데 박언창은 종종 신라로 원군을 요청하였지만, 신라는 그럴 능력이 있질 않았다. 918년 박언창은 경명왕 2년 918년 스스로 사벌국을 세우고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929년 경순왕 3년 9월 낙동강을 도하해 급습한 후백제군을 맞아 중과부적으로 전사하였다. 사벌면 화달리에 박언창의 무덤이 있다. 

 

 

현춘(賢春) 신라해적 육전(B)수전(S)정치(D)모략(D)명성(C)축성(D)

신라말 정부의 세금 독촉으로 시작된 전국혼란중에 남해안을 기점으로 해적질을 하는 무리가 있었는데 그중 현춘의 세력이 가장 강성했다. 894년 현춘은 배100척과 2천 5백명의 병력으로 대마도를 습격하였다. 그후 현춘은 백제세력으로 흡수된것으로 추측된다.

841년 장보고 사후, 신라와 일본조정의 관계가 냉각되어 신라인의 입국 금지와 무역관계가 폐쇄되고 당과의 교역이 본격적으로 행하여지자 교역에서 소외된 신라 일부 상인들의 해적활동을 기점으로 신라구가 본격적으로 일본을 약탈하기 시작한다. 신라구의 일본 침탈은 경문왕의 14년 재위 동안에만 일본의 기록만으로도 14차례나 되었으며 해도침입과 인명살상, 공물탈취, 연안침범등 다양하였다. 이러한 신라구들의 침탈로 인하여 일본은 각지마다 신라구들을 막는 기도를 올리는가 하면 반신라적 감정이 팽배해져서 신라상인들을 탄압하고 870년 신라인 입국금지령이 내려졌으며 심지어는 신라의 일본침공을 우려하기까지 하였다.

 

왕거인(王巨仁)/은자거인(隱者巨仁) 신라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

신라말 대야주(大耶州 합천)에 은거해 있었는데, 신라 하대의 모순으로 사회가 혼란하던 888년(진성여왕 2)에 누군가 왕실을 비난하는 글을 대로에 게시한 사건이 일어나자 범인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이 괘서는 불경주어(佛經呪語)인 다라니어(陀羅尼語)로 쓰여졌는데 진성여왕이 곧 사람을 시켜 수색하였으나 잡지 못하자, 어떤 자가 나서서 그것은 뜻을 잃은 문인(文人)이 한 것이니 대야주의 은자(隱者)인 왕거인이 아닐까라고 하였다. 진성여왕이 체포하여 형벌을 가하려고 하는데 분하고 원통하여 감옥의 벽에, 우공(于公)이 통곡하니 3년 동안 날이 가물었고, 추연(鄒衍)이 슬픔을 품으니 5월에도 서리가 내렸다. 지금 이 내 근심도 예나 다름이 없는데 황천(皇天)은 아무 말도 없이 창창할 뿐이로구나”라고 썼다. 그날 저녁에 홀연히 구름과 안개가 끼고 벼락이 치고 우박이 쏟아졌으므로, 진성여왕이 두려워하여 풀어주었다고도 하고, 하늘이 감옥에 벼락을 쳐서 풀려나게 되었다고도 한다. 더 자세한 사정은 전해지지 않으나, 6두품(六頭品) 출신의 지식인으로서 당시 사회모순을 초래한 진골(眞骨)귀족들의 족벌정치(族閥政治)와 골품제도(骨品制度)를 비판하다가 탄압을 받아 축출된 인물이라고 설명된다.

출생일 사망일이 전혀 알려지지 않음, 신라말의 문인. 합천(陜川)에서 은거하며 지냈다. 제51대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른 몇해 만에 여왕의 유모인 부호부인(鳧好夫人)과 여왕의 남편인 위홍(魏弘)과 3, 4명의 총신(寵臣)이 권세를 휘둘러 정사를 마음대로 했다. 그때 누군가가 다라니(陀羅尼)의 은어인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바하"(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 干于三阿干 鳧伊娑婆詞)라는 구절을 노상에 걸어 두었다. 혹자가 왕에게 "이는 반드시 문인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한 자가 한 짓일 것입니다. 아마도 합천의 은자인 왕거인인 것 같습니다"라고 아뢰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왕거인은 옥에 갇히자 "우공(于公)이 통곡하니 3년 동안 한재가 들고/추연(鄒衍)이 슬픔을 머금으니 5월에 서리가 내렸다/지금 나의 갇혀 있는 근심도 옛일과 다름이 없는데/하늘은 말이 없이 다만 창창할 뿐이로다"라는 시를 써서 하늘에 호소했다. '삼국유사'에는 이 시를 쓰자 곧 옥에 벼락이 떨어져 왕거인이 풀려나왔다고 했으며, '삼국사기'에는 그날 밤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끼고 바람과 천둥이 쳐 우박이 쏟아지므로 왕이 크게 두려워하여 왕거인을 풀어주었다고 했다. '찰니나제'는 진성여왕을, '판니판니소판니'는 두 소판을, '부이'는 부호부인을 말한다. '삼국유사' 권2 진성여왕조와 '삼국사기' 권11 진성왕조에 기록이 전한다.

 

 

김성(金成) 신라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D)

906년 1월 신라의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919년 1월 각찬(角飡)으로 임명되었다.

 

 

언옹(彦邕) 신라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B)축성(D)

919년 1월 신라조정의 정계개편에서 국정문란의 책임을 지고 시중(侍中)에서 사찬(沙飡 17관등중 8등급)으로 강등되었다.

 

 

김문울(金文蔚) 신라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당나라 유학중 급제(及第)하여 906년 3월 책명사(冊命使)로 임명되어 신라로 왔다. 당초에 김문울은 당나라에 들어가 과거(科擧)에 등제(登第)하였고 벼슬길에 올라 벼슬을 역임하여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 기왕부 자의참군(沂王府諮議참軍)에 이르렀다.

 

 

예겸(乂謙)/예겸(銳謙) 신라 육전(D)수전(D)정치(A)모략(A)명성(B)축성(D)

875년 7월 신라의 대아찬(大阿飡)직에 있었는데 시중으로 발탁되었다. 880년에는 이찬(伊飡) 민공(敏恭)에게 시중자리를 내어주고 사퇴하였다. 그후로 이찬(伊飡) 벼슬을 임명받았으며, 899년에는 효공왕에게 딸이 시집갔다. 또한 53대 왕 신덕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민공(敏恭) 신라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

880년 이찬(伊飡) 벼슬에 있었는데 예겸이 시중에서 사퇴하자 민공이 시중에 올랐다. 그해 9월 왕이 좌우의 근신(近臣)과 더불어 월상루(月上樓)에 올라보니 서울의 민가(民家)는 즐비하게 늘어섰고 풍악(風樂)과 노래 소리는 연달아 일어났다. 왕이 시중 민공(敏恭)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들은즉 지금 민간(民間)에서는 집을 기와로 덮고 띠茅]로 덮지 않으며, 밥을 숯으로 짓고 나무를 때지 않는다 하니 그것이 사실인가?" 하니, 민공이 대답하기를, "신도 또한 그와 같이 들었습니다. 임금께서 즉위(卽位)하신 이래로 음양(陰陽)이 고르고 풍우(風雨)가 순조로워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은 유족(裕足)하며 변경(邊境)은 평안하고 시정(市井)에는 화기(和氣)가 넘치니, 이는 모두 성덕(聖德)의 소치입니다."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는 실로 경(卿) 등이 보좌(輔佐)한 힘을 의지한 것이니, 내가 무슨 공덕(功德)이 있겠는가?"하였다.

 

 

영기(令奇) 신라 육전(C)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신라의 내마(奈麻)직에 있었는데 진성여왕 3년 889년 나라 안의 여러 주군(州郡)에서 공물(貢物)과 부세(賦稅)를 바치지 아니하여 국고(國庫)가 탕갈되고 나라의 용도(用度)가 궁핍하여지자, 여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이를 독촉하니 이로 인하여 사방에서 도적이 벌떼 처럼 일어났다. 마침 사벌주에서 원종(元宗), 애노(哀奴)등이 사벌주(沙伐州)에 웅거(雄據)하여 반란을 일으키므로 진성여왕의 명에 의해 내마(奈麻) 영기(令奇)가 토포사(討捕使)로 임명되어 군을 이끌고 출진하였는데, 영기가 적(賊)의 보루(堡壘)를 바라보고 두려워하여 진격(進擊)하지 못하였다. 이때 촌주(村主) 우련(祐連)이 반란군과 힘써 싸우다가 전사(戰死)하였다. 이에 진성여왕이 명을 내려 영기의 목을 베게 하고 우련의 아들로서 촌주를 승습(承襲)하게 하였으니 나이 겨우 10여 세(歲)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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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련(祐連) 신라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신라말 889년 진성여왕의 세금독촉에 의해 발발된 전국혼란에서 대병부곡촌주(상주시 공성면) 였던 우련은 토벌군으로 온 영기와 함께 사병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이때 영기는 적의 세력이 두려워 진격하지 못하였지만 우련은 적진으로 사병을 이끌고 진격하여 끝내 전사하였다.

 

 

은영(殷影) 신라 육전(C)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신라말 대신(大臣)으로 효공왕 15년(911년) 1월 효공왕이 천첩(賤妾)에 미혹(迷惑)되어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으니 은영(殷影)이 간(諫)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은영이 그 첩(妾)을 잡아죽였다. 조선 사관(史官)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된 자는 임금에게 허물이 있으면 간(諫)하고, 간하여도 듣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떠날 뿐이다. 임금이 비록 여색(女色)에 빠져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더라도 어찌 그 총첩(寵妾)을 죽여 난(亂)을 그치게 할 수 있겠는가? 효공왕(孝恭王)이 총첩에 미혹되자 은영(殷影)이 간(諫)하였으나 듣지 않으매 그 첩을 죽였으니, 비록 그 마음은 임금을 사랑하는 데에서 나왔다 할지라도 그 자취는 임금을 협박한 것이다. 대개 이때에 신라의 국운(國運)이 쇠잔하여 권간(權奸)이 나랏일을 제멋대로 처결했으니 효공왕은 다만 임금의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다음 해에 효공왕이 훙서(薨逝)하고 그 후 22년 만에 멸망했으니 이후의 기록은 궁예와 견훤이 날뛰고 참람한 짓을 한 것뿐이었다."하였다.

 

적고적(赤袴賊) 신라도적떼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신라말 진성여왕(眞聖女王) 10년 896년 신라 왕도(경주)의 서남방면에서 일어난 도적들로, 바지를 붉게 하여 스스로 구별하였는데, 이를 당시 사람들이 적고적이라 불렀다. 적고적은 경주관내의 모량리까지 약탈을 함으로써 왕권이 심히 추락하였다. 이 일련의 사건으로 진성여왕은 스스로 왕위를 큰오빠(헌강왕)의 서자 김요(효공왕)에게 물려준다. 적고적의 우두머리는 알려져 있지 않다.

 

 

 

 

 

 

 

유력호족

 

 

 

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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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길(梁吉) 북원 육전(A)수전(B)정치(B)모략(C)명성(A)축성(B)생몰년 미상. 신라 진성여왕 때 반란을 주도한 적당(賊黨)의 괴수. 양길(良吉)이라고도 한다.가계나 출생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실정이 겹치고 재해가 잇달아 일어났다.889년(진성여왕 3)에 국고가 비게 되자, 왕은 사자(使者)를 지방에 파견하여 세금을 독촉한 것을 계기로 전국에 초적(草賊)이 벌떼처럼 일어났다.원종(元宗)과 애노(哀奴) 가 사벌주(沙伐州:지금의 상주)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킨 뒤 도적의 무리들은 공공연하게 신라 중앙정부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그러한 적당세력 중 손꼽을만한 자가 죽주(竹州:지금의 죽산)의 기훤(箕萱)과 북원(北原:지금의 원주)의 양길이었다. 북원에 웅거한 양길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고, 궁예(弓裔)가 그의 부하로 들어와 활동한 것으로 미루어 추측될 수 있다.892년 궁예는 기훤의 휘하에서 양길에게로 몸을 의탁하게 된다.이때까지만 해도 양길의 세력이 크게 떨치지는 않았다.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광주)를 습취한 뒤 스스로 왕이라 칭한 견훤(甄萱)이 양길에게 비장(碑將)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있다.견훤의 그러한 행동이 선전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겠지만 상대적으로 양길의 세력도 그렇게 강하지 못하였음을 알려준다.그러다가 궁예의 투항을 받고 난 뒤부터 양길의 세력은 점차 커졌다. 양길은 궁예를 우대하여 모든 일을 위임하였으며 군사를 나누어주어 동쪽으로 원정하게 하였다.궁예는 군사를 거느리고 치악산 석남사(石南寺)로부터 주천(酒泉:지금의 예천)·내성(奈城: 지금의 영월)·울오(鬱烏:지금의 平昌)·어진(御珍:지금의 울진) 등의 현을 습격하여 항복을 받고, 894년에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에 이르렀는데 그 무리가 모두 3, 500명이었다.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왕 8년조에는 궁예의 무리 600여명이 명주에 이른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상이한 기록에 대해 600명은 궁예가 양길로부터 빌린 군대였을 것이며, 그들이 명주에 이르렀을 때에는 3, 500명으로 불어났을 것으로 해석된다.명주에 들어온 무리가 모두 양길의 직접적인 세력기반으로 되지 않았을지라도, 그뒤 양길은 사실상 강원도일대에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이어 궁예는 저족(猪足:지금의 인제)·생천(牲川:지금의 양구)·부약(天若: 지금의 춘천)·금성(金城)·철원 등지를 점령하니, 군세(軍勢)가 심히 강하여 패서(浿西)의 적들이 항복해오는 무리가 많았다.그러나 당시 점령한 지역들이 바로 양길의 세력권내에 흡수되었다기보다는 궁예의 세력기반이 되었다.이때부터 궁예는 무리가 많고 세력이 커지자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왕이라 칭할만하다고 여겨 내외의 관직을 설정하였다. 곧 궁예는 양길의 휘하에서 벗어나 독립세력을 구축하였고 송악군(松嶽郡:지금의 개성)으로부터 왕건(王建)의 투항을 받으면서 후삼국시대의 강력한 지배자로 등장할 수 있었다.이때 양길은 북원에 있으면서 아직도 국원(國原:지금의 충주) 등 30여성을 가진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궁예의 영토가 넓고 인구가 많다는 말을 들은 양길은 그를 습격하려 하였으나, 이 사실을 알아차린 궁예에게 오히려 습격당하여 크게 패하였다.그뒤 양길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그러나 양길의 세력권이 궁예의 수중으로 완전히 들어오게 된 것은 이보다 훨씬 뒤인 900년(효공왕 4)왕건이 궁예의 명령을 받아 광주(廣州)·충주·당성(唐城:지금의 남양)·청주·괴양(槐壤:지금의 괴산) 등을 평정한 뒤이다.신라 하대가 되면서 지방호족이 대두하였다. 처음 지방호족은 중앙 왕실의 권위를 인정하여 중앙정부와도 어느 정도 연결을 가지면서 독립된 세력기반을 형성하고 있었다.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그들은 중앙왕실의 권위를 점차 인정하지 않게 되고, 초적의 발호는 이와같은 사태를 부채질하였다. 양길의 등장은 초적세력을 규합하여 신라 고대국가의 붕괴를 촉진시키는 구실을 하였다.그러나 양길은 붕괴되어가는 고대사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경륜을 가진 자는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양길은 초적 사이의 세력다툼에서도 패배하였다.그가 궁예로 하여금 철원 등의 지역을 병합하게 하였지만 실제 그곳은 궁예의 세력기반이 되었고, 나중에 궁예는 이 지방에 웅거하여 그에게 공공연한 적대행위를 자행하였다.즉, 양길은 견훤 및 신라조정과 적대관계라는 부담을 안고 북방의 궁예와 패권을 다투는 과정에서 거세될 수밖에 없었다.

 

 

청길(淸吉) 북원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신라말 북원에서 일어선 양길(梁吉)의 휘하 장수로, 양길의 동생이란 설도 있다. 899년 대패한 양길을 대신해 국원(충주),청주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궁예 6년 900년 10월 궁예의 명을 받은 왕건이 군을 이끌고 광주,충주(국원),당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곧이어 청길의 남은 영지인 청주로 공격하여 들어오자, 괴양의 우두머리 신훤(莘萱)과 상의하여 온성을 궁예에게 바치고 항복했다.

 

신훤(莘萱) 북원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D)신라말 북원에서 일어선 양길(梁吉)의 휘하 장수로, 900년 당시 괴양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10월에 궁예의 명을 받은 왕건이 군을 이끌고 남진하여 차례대로 성을 함락시키자 국원,청주의 우두머리 청길과 상의하여 온성을 궁예에게 바치고 항복하였다.

 

원회(元會) 북원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생몰년 미상. 신라 진성여왕 때의 반란자. 죽주(竹州)에 웅거한 기훤(箕萱)의 부하였다.891년(진성여왕 5) 궁예(弓裔)가 기훤에게 몸을 의탁하였으나, 기훤은 그를 예로써 대하여주지 않았다.이때 원회는 신훤(申煊)과 함께 궁예와 친구가 되어 결탁하였다.892년 울분이 쌓인 궁예는 북원(北原:지금의 원주)의 적괴 양길(梁吉)에게 투항한다.원회는 이때 궁예를 따라 양길에게 투항하여 부하가 되었다. 양길에게 몸을 의탁하고 난 뒤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신훤(申煊) 북원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생몰년 미상. 신라 하대의 반란자. 죽주(竹州)에서 기훤(箕萱)의 부하로 활동하였다. 891년(진성여왕 5)에 궁예(弓裔)가 기훤에게 몸을 의탁하였으나 기훤은 그를 예로써 대해주지 아니하므로 울분에 싸인 궁예는 892년에 북원(北原 : 지금의 강원도 原州)의 적괴 양길(梁吉)에게 투항하였다. 이때 신훤은 원회(元會) 등과 더불어 기훤에게서 이탈하고 궁예를 따라 양길에게 투항하였다.

 

 

원극유(元克猷) 북원 육전(C)수전(B)정치(B)모략(C)명성(B)축성(C)

원주원씨(原州 元氏)의 시조다. 원주의 토착호족으로 신라말 양길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궁예의 명을 받아 양길의 잔당 척결을 위해 출진한 왕건이 충주,청주,괴산에서 청길,신훤의 항복을 받아 대탑협이 이루어지자, 자연스럽게 원극유의 세력도 태봉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918년 태조의 역성혁명이후 많은 군현이 고려에게 등을 돌렸는데, 원주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원씨가문내에서도 원길견(지광국사 해린의 조부)의 경우는 크게 반발하였다고 한다. 원극유는 가문의 내분을 종결시키고 북원경을 태조에게 받침으로써 태조로부터 삼한공신에 책록되고 공신당(功臣堂)에 화상을 걸게 하였으며, 병부령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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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극부(元克富) 북원 육전(D)수전(C)정치(D)모략(D)명성(D)축성(D)

원주 토착호족이고 원주원씨의 시조 원극유와는 형제지간이다. 고려 태조가 역성혁명을 일으키자 원극유와 더불어 북원의 내분을 종결시키고 북원을 태조에게 받치는데 일조를 하였다. 호장으로 임명되었다.

 

 

원길견 북원 육전(D)수전(C)정치(C)모략(B)명성(D)축성(D)

원주의 토착호족으로 고려태조가 역성혁명을 일으키자 크게 반발하고 고려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세력을 꾸리려 하였으나 동족 원극유와 원극부에 의해 좌절되었다. 아들은 원휴(元休)이고 손자는 고려 문종때 국사 지광국사 해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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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 신라(명주자치)→태봉→자치→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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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순식(王順式)/김순식(金王順) 명주 육전(A)수전(B)정치(B)모략(C)명성(A)축성(B)생몰년 미상. 신라말 고려초의 호족출신 장군. 본성은 김씨(金氏)이며, 왕은 사성(賜姓)이다.명주(溟州)사람으로 신라말에 스스로 명주장군이라 칭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궁예와 대치하면서 오랫동안 굴복하지 않았다.고려건국 후에도 복종하지 않으므로, 왕건은 고심하다가 시랑 권열(權說)의 진언에 따라 당시 중으로 내원(內院)에 머물러 있던 왕순식의 아버지인 허월(許越)을 움직여 고려로 귀부하도록 권유하게 하였다.이에 고려에 귀순할 것을 작정하고 먼저 맏아들 수원(守元)을 보내어 귀순의 뜻을 전하였다.왕건은 수원을 맞이해서 왕씨성을 사(賜)하고 전택을 후하게 내려주었다. 뒤에 또 아들 장명(長命)을 보내어 군사 600인으로 숙위하게 하고, 이어 자제와 휘하무리를 이끌고 고려에 내조(來朝)하였다.왕건은 순식의 세력권인 명주일대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동시에 순식이 그동안 구축한 여진족에 대한 영향력을 인정하여 파격적 대우로 맞아들여 왕씨성을 하사하고 대광(大匡)을 제수하였다.아들 장명에게도 염(廉)이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원보(元甫)에 제수하였다.935년(태조 18)에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神劍)군을 토벌할 때에는 명주로부터 기병을 이끌고 고려군에 가담하여 일리천(一利川:善山 동쪽 10여리에 위치)전투에서 유금필(庾黔弼)·정순(貞順) 등과 함께 중군(中軍)에 배치되어 후백제군을 격파하여 후삼국통일에 큰 공훈을 세웠다.

 

왕렴(王廉)/김장명(金長命) 명주 육전(B)수전(C)정치(B)모략(D)명성(B)축성(C)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 때의 장수. 《삼국사기》에는 왕겸(王謙)으로도 표기되어 있다.신라말 고려초의 강릉지방 호족인 명주장군(溟州將軍) 김순식(金順式)의 아들이다. 본래의 이름은 장명(長命)이었다.순식이 고려 태조에게 귀부함에 따라 928년(태조 11) 정월에 군사 600명을 거느리고 개성에 와서 숙위하였다. 뒤에 순식이 무리를 거느리고 태조에게 조회하여 왕씨(王氏)의 성을 하사받을 때 장명은 염이라는 이름을 받고 원보(元甫)에 임명되었다.936년(태조 19) 9월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하여 후백제왕 신검(神劍)의 군대와 일리천(一利川:지금의 선산 동쪽의 내)에서 싸울 때 대상(大相)의 관직에 있던 왕렴은 긍준(兢俊)·왕예(王乂)·금필(黔弼) 등과 함께 철갑기병 2만명과 보병 3, 000명 및 흑수(黑水)·철리(鐵利)계통의 날랜 기병 9, 500명을 이끌고 중군이 되어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하였다.이 전투의 승리로 후삼국이 통일되었다.

 

 

왕관경(王官景)/관경(官景) 명주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B)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비(妃)인 정목부인(貞穆夫人)의 아버지.원래 이름은 관경(官景)이다.강릉지방의 호족 명주장군 왕순식(王順式)휘하의 장군이었는데, 927년(태조 10)에 신라의 혼란을 틈타 왕순식과 함께 태조에게 투항하여 왕씨(王氏)의 성과 대승(大丞)의 벼슬을 받았다.936년 후백제 정벌 때 자기의 군대를 거느리고 전쟁에 참가하였다. 그의 딸은 태조의 왕비가 되어 순안대왕비(順安大王妃)를 낳았다. 뒤에 삼한공신태사삼중대광(三韓功臣太師三重大匡)이 되었다.

 

 

수원(守元) 명주 육전(C)수전(C)정치(B)모략(C)명성(C)축성(D)생몰년 미상. 신라말 고려초 강릉지방의 호족. 아버지는 김순식(金順式)이다.김순식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에게 귀순할 때 맏아들인 수원을 먼저 보냈는데, 이때 수원은 왕씨(王氏)성과 함께 전택(田宅)을 하사받았다.

 

 

김극렴(金克廉) 명주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명주출신으로 김순식(왕순식)의 일족이다. 통일후 삼한공신에 임명되었다.

 

 

김예(金乂)/왕예(王乂) 고려(명주호족) 육전(B)수전(B)정치(B)모략(C)명성(B)축성(C)원래는 강릉김씨로 신라 대광 김선희(金善希)의 아들이고, 명주장군 김순식과 더불어 강릉의 호족이었다. 김예는 김순식과 더불어 명주에서 독자적인 군사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도령(都令)이란 직책을 갖고 그 휘하에 낭중(郞中)-원외랑(員外郞)-집사(執事) 등의 휘하 관직자를 거느리고 지역민들을 통치했다. 일리천 전투에서는 왕순식,긍준,왕렴,인일과 더불어 기병2만을 지휘했다. 940년에는 딸을 태조에게 바쳐, 딸은 대명주원부인(大溟州院夫人)으로 임명되었고, 김예는 왕씨를 하사받아 왕예(王乂)가 되었다. 그후 13대손 김탄지(金坦之)대에 다시 강릉김씨로 복성하였다.

 

 

최필달(崔必達) 고려(명주) 육전(B)수전(C)정치(B)모략(C)명성(B)축성(D)강릉최씨의 시조로, 궁예가 군사 3500을 이끌고 명주를 공략하고, 5년동안 강원도 십여군을 장악할때 궁예의 휘하로 들어가 공을 세웠으며,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개국에 이바지한 공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 삼한벽상(三韓壁上) 개국찬화공신(開國贊化功臣)에 올랐다. 벼슬은 영첨의좌정승(領僉議左政丞)을 지냈으며 작호(爵號)를 강릉의 고호(古號)인 경흥(慶興;강릉의 별칭)부원군에 봉해지자 그 후손들이 강릉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사후에 충무공(忠武公) 시호를 받았다. 문무를 겸비한 학자로서 고려건국에 문교(文敎)와 도의(道義)의 선양에 크게 공헌하여 해동부자(海東夫子)라 일컬었다고 한다.

 

 

최흔봉(崔欣奉) 고려(명주) 육전(C)수전(C)정치(B)모략(D)명성(C)축성(D)강릉최씨이며, 최필달의 아들이다. 고려 태조(太祖)의 딸 玉慶大主(오경대주)와 혼인하여 부마(駙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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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주 평주자치→태봉→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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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직윤(朴直胤) 평주 육전(A)수전(A)정치(S)모략(A)명성(A)축성(S)본시 박직윤의 아버지 적오(赤烏/積古)는 본시 경주박씨로 왕족출신이며 북경도위 찰산후(北京都尉察山侯)를 지냈다.박직윤대에 이르러 명주,죽주의 지방관을 역임하다가 평주(平州/평산)의 군관직에 제수되어 평주에 정착한후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평주에 십곡성(十谷城:谷山)등 13개성을 쌓아 패강진 지역의 최대 군사세력으로 성장했다.박직윤은 스스로 고구려의 장군직인 대모달읍장(大毛達邑長)을 자처하며 고구려를 계승하고 신라의 지배권에서 벗어난 독립세력임을 만방에 표했다.

 

 

박지윤(朴遲胤/朴智胤) 고려 육전(B)수전(B)정치(B)모략(A)명성(A)축성(A)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 때 문신. 지윤(智胤)으로 쓰기도 한다. 본관은 평주(平州: 平山).신라에서 북경도위 찰산후(北京都尉察山侯)를 지낸 적오(赤烏: 積古)의 손자이며, 대모달읍장(大毛達邑長) 직윤(直胤)의 아들이다.아버지 직윤이 평주에서 십곡성(十谷城:谷山) 등 13개성을 설치하고 궁예(弓裔)에게 귀부한 뒤로 이 지역의 대호족이 되었다. 이러한 재지적 기반을 바탕으로 왕건의 후삼국통일에 협력하여 벼슬은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르고, 딸이 태조에게 출가하여 성무부인(聖茂夫人)이 되었다.아들 수문(守文)과 수경(守卿)이 삼중대광에 이르렀다. 후손인 박경인(朴景仁)과 박경산(朴景山)의 묘지가 남아 있어 세계(世系)가 확인된다.

 

 

박수문(朴守文) 고려 육전(B)수전(B)정치(B)모략(C)명성(B)축성(A)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공신. 본관은 평주(平州). 대광위(大匡尉) 지윤(遲胤)의 아들이며, 태조의 제27비 월경원부인(月鏡院夫人)의 아버지이다. 또한 같은 태조공신이고 태조의 제28비 몽량원부인(夢良院夫人)의 아버지인 박수경(朴守卿)의 형이기도 하다. 그는 아우 수경의 전공(戰功)의 덕을 입어 925년에 원윤(元尹)에서 원보(元甫)가 되었으며, 936년(태조 19)에는 대상(大相)에 올랐다.947년(정종 2)에는 대광(大匡)이 되어 덕창진(德昌鎭)에 성을 쌓은 바 있고 서경왕성(西京王城) 및 철옹(鐵甕:지금의 맹산)·박릉(博陵:지금의 박천)·삼척(三陟)·통덕(通德:지금의 숙천) 등에 성을 쌓은 바 있다.뒤에 벼슬이 태위삼중대광(太尉三重大匡)에 이르렀다.

 

 

박수경(朴守卿) 고려 육전(A)수전(B)정치(C)모략(C)명성(A)축성(B)?∼964(광종 15). 고려의 공신. 본관은 평산(平山). 대광(大匡) 위지윤(尉遲胤)의 아들이며, 태조의 비 몽량원부인(夢良院夫人)의 아버지이다.용맹하고 지혜가 많았으며, 태조를 섬겨 원윤(元尹)이 되었다. 후백제가 자주 신라를 공격하자 태조의 명으로 장군이 되어 이에 대비하다가 기계(奇計)로 견훤의 군대를 무찔렀다.925년(태조 8)의 조물군전투(曹物郡戰鬪)때에 태조는 상군·중군·하군의 3군으로 나누어 싸웠는데 상군과 중군은 패하였으나, 그는 하군을 지휘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 공으로 원보(元甫)로 승진하였다. 발성(勃城)싸움에서는 태조가 포위당했으나 그의 역전(力戰)으로 무사하였다. 936년 후백제 신검(神劒)군대와의 최후 결전 때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940년 태조가 역분전(役分田)을 정할 때 특별히 전(田) 200결(結)을 하사받았다. 945년에는 정종을 도와 큰 공을 세우고 대광에 올랐다.964년(광종 15)에 아들 승위(承位)·승경(承景)·승례(承禮) 등이 참소로 옥에 갇히자 화병으로 죽었다. 뒤에 여러 차례 추증되어 사도 삼중대광(司徒三重大匡)에 이르렀다.

 

 

박승위(朴承位) 고려 육전(B)수전(C)정치(B)모략(C)명성(C)축성(C)평주호족 박수경의 맏아들로 박수경과 함께 삼한공신에 책봉되었다. 964년 호족억압정책을 펴던 4대 황제 광종때 참소를 입어 옥에 갖히였고, 부 박수경은 화병으로 졸하였다.

 

 

박승경(朴承景) 고려 육전(C)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C)평주호족 박수경의 둘째아들로 아버지와 형에 이어 조정에 출사하였으나 4대 황제 광종때 참소를 입어 옥에 갖히고, 부 박수경은 화병으로 졸하였다.

 

 

박승례(朴承禮) 고려 육전(C)수전(B)정치(C)모략(C)명성(C)축성(C)평주호족 박수경의 셋째아들로 아버지와 형에 이어 조정에 출사하였으나 4대 황제 광종때 참소를 입어 옥에 갖히고, 부 박수경은 화병으로 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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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상주자치→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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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개(阿玆蓋) 상주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B)축성(C)생몰년 미상. 신라말·고려초 상주지방의 장군. 아자개(阿慈介)·아자개(阿慈#개02)·아자개(阿字蓋) 또는 원선(元善)이라고도 한다.가계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2 후백제견훤조에 인용된 《이제가기 李#제32家記》에 의하면, 아자개는 신라 진흥왕과 사도부인(思刀夫人) 사이에서 태어난 구륜공(仇輪公)의 후손이라고 한다.그리고 부인으로는 상원부인(上院夫人)과 남원부인(南院夫人)이 있었으며, 자식은 5남1녀(혹은 아들 4형제라고도 함.)가 있었으니 장남이 바로 견훤(甄萱)이라고 한다. 《삼국사기》 권50 견훤전에서도 견훤의 아버지가 아자개로 되어 있다. 아자개는 처음에는 농업에 종사하였지만, 신라 하대의 혼란기에 전국 각지에서 농민을 포함한 지방세력이 봉기하자, 그도 885년(헌강왕 11)∼887년(진성여왕 1)에 사불성(沙弗城: 지금의 상주)을 근거지로 군대를 일으켜 장군을 자칭하였다.그뒤 그의 아들인 견훤이 892년 무진주(武珍州)를 점거하고, 900년(효공왕 4) 완산주(完山州)를 근거로 후백제를 세운 이후에도, 아자개는 계속해서 상주지방에 웅거하고 있었으며, 918년(태조 1) 7월에 마침내 고려에 항복하였다. 다만, 《고려사》 태조 1년 9월 갑오조에는 9월에 항복한 것으로 되어 있다.이와같이, 아자개가 견훤과는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바, 이 때문에 견훤은 아자개의 아들이 아니며, 양자는 출신지방만 같을 뿐 전혀 별개의 지방세력이라는 견해도 있다.

 

 

상원부인(上院夫人) 상주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상주호족 아자개의 본부인으로 견훤과 능애(能哀)를 낳았다고 알려졌다.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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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부인(南院夫人) 상주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상주호족 아자개의 둘째부인으로 3남 1녀를 두었는데, 용개(龍盖), 보개(寶盖), 장군 소개(小盖), 대주도금(大主刀金)이다.

 

 

용개(龍盖) 상주 육전(B)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C)삼국유사에 인용된 이제가기에 사불성(沙弗城)/상주성주 아자개의 셋째 아들로 장군이라 칭하였다.

 

 

보개(寶盖) 상주 육전(C)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삼국유사에 인용된 이제가기에 사불성(沙弗城)/상주성주 아자개의 넷째 아들로 장군이라 칭하였다.

 

 

소개(小盖) 상주 육전(C)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사불성(沙弗城)/상주성주 아자개의 넷째 아들로 장군이라 칭하였다.

 

 

대주도금(大主刀金) 상주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상주호족 아자개와 남원부인 사이에 난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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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 황주자치→태봉→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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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제공(皇甫悌恭) 고려(황주) 육전(B)수전(B)정치(B)모략(B)명성(A)축성(B)예성강 서북의 패서(浿西) 내륙 일대를 대표하던 호족으로 황주황보씨의 시조이다.어려서는 이엄대사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가문의 대를 이어 황주의 호족세력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었다. 궁예가 패서를 공략할때 평주,송악세력등과 함께 투항하였다. 이후 패서 13진의 한축을 이루었다. 또한 태조 즉위년쯤에 딸 황보씨(皇甫氏/훗날 왕후 서열 4위 신정 왕태후(神靜王太后))가 태조의 비로 발탁됨으로써 명실공히 외척으로써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태조 8년에는 조물군(曹物郡) 전투시 대상(大相)으로써 상군(上軍)을 지휘하였으며, 태조 18년에는 나주의 탈환 책임자로 유금필을 천거하기도 하였다. 태조가 백제와 마지막 전투를 벌이기 위해서, 천안에 도독부를 두고 왕자산(王字山)에 성을 쌓고 고정(鼓庭, 군사 훈련소)을 설치하여 후백제 정벌의 전초 기지로 삼았다. 이때 천안도독부에는 중앙군을 주둔시키고 도독으로 황보제공을 임명하였다. 충의공(忠義公)으로 봉작되었다.

 

 

황보금산(皇甫金山) 고려(황주호족) 육전(B)수전(D)정치(D)모략(C)명성(B)축성(C)황주황보씨이며 삼한공신 황보제공의 동생이다. 일리천 전투에서 대상으로 견권,박술희과 더불어 기병 1만을 이끌었다.

 

 

황보광겸(皇甫光謙) 고려(황주호족) 육전(C)수전(C)정치(A)모략(B)명성(B)축성(D)황주호족 황보제공의 아들로 누이는 태조의 제4왕후이며, 동생은 황보위광이다. 외척으로써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동생 황보위광과 더불어 광종을 보필했다. 특히 광종때에는 왕함민,서필과 더불어 3정승이라 불리웠고, 광종에게 금술잔을 하사 받기도 했다.

 

 

황보위광(皇甫魏光) 고려(황주호족) 육전(D)수전(C)정치(B)모략(C)명성(C)축성(D)황주호족 황보제광의 둘째아들로 광종10년 959년에 좌윤(佐尹) 벼슬에 있었는데 사신으로 후주에 파견되어 명마와 직성 의오와 궁검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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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태봉(농성/진주)→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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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팔급(林八及) 태봉(평택 농성호족) 육전(C)수전(C)정치(B)모략(B)명성(B)축성(D)후당의 병부상서를 지내다 탄핵되어 무리를 이끌고 고려로 도피하여, 평택 농성(農城)에 정착하였다. 신라말에 조정으로부터 이부상서 벼슬을 제수받았으며, 궁예가 강성하자 투항하였다. 아들로 임양저(林良貯), 임언(林彦), 임희(林曦), 임명필(林明弼), 임적여(林積璵) 임상난(林湘煖), 임식(林植), 임득우(林得雨), 임몽주(林夢周) 9형제를 두었다.

 

 

임양저(林良貯) 신라(평택 농성호족)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선산임씨의 시조이며 평택호족 임팔급의 첫째 아들이다. 신라조정에 투신하여 중랑장(中郎將)벼슬에 있었는데 경순왕의 손녀딸과 혼인하였다. 경순왕이 고려에 나라를 바치려 하자 극렬 반대하다가 선산에 유배되었다.

 

 

임언(林彦) 고려(평택 농성호족) 육전(D)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평택 농성(農城)을 근간으로 하는 호족 임팔급(林八及)의 둘째 아들로 태조10년에 후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임희(林曦) 고려(진주호족) 육전(B)수전(C)정치(B)모략(B)명성(B)축성(C)진주(鎭州) 호족세력이자 파진찬으로 농성성주 임팔급의 셋째아들로 태조원년 병부령(兵部令)에 임명되었다. 임희(林曦)의 딸은 2대(代) 혜종(惠宗)의 비(妃)인 의화왕후(義和王后)가 되어 흥화군(興化君), 경화궁부인(慶化宮夫人), 정혜공주(貞惠公主)를 낳았다.

 

 

임명필(林明弼) 고려(진주호족) 육전(C)수전(C)정치(B)모략(A)명성(B)축성(B)

진주(鎭州) 호족세력이자 한찬으로 농성성주 임팔급의 네번째 아들이다. 고려건국에 공을 세워 태조원년 918년 순군부령(徇軍部令)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딸은 숙부인 임씨(潚夫人 林氏)로 왕건의 비가 되어 신명왕후(神明王后)로 추존되었다. 신명왕후의 소생으로는 원녕태자(元寧太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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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적여(林積璵) 태봉(평택 농성호족)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C)

임팔급의 다섯번째 아들로 태조 원년(918년) 태조가 역성혁명을 일으킨후 조정을 개편하였을때, 사무에 통달하고 공직(公職)에 종사함에 태만함이 없으며, 처결하는데 민첩하여 진실로 여러 사람의 뜻에 흡족하였다 하여 알찬직에서 광평시랑(廣評侍郞)을 제수받았다.

 

 

임상난(林湘煖) 태봉(평택 농성호족) 육전(D)수전(B)정치(B)모략(C)명성(C)축성(C)

평택호족 임팔급의 여섯번째 아들로 태조 원년(918년) 태조가 역성혁명을 일으킨후 조정을 개편하였을때, 도항사향(都航司鄕)을 제수받았다.

 

 

임식(林寔) 태봉(평택 농성호족)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C)

평택호족 임팔급의 일곱번째 아들로 태조 원년(918년) 태조가 역성혁명을 일으킨후 조정을 개편하였을때, 한신일(韓申一)과 함께 광평낭중(廣評郎中)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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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주 염주자치→패망/태봉/골암성→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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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긍순(柳矜順) 염주 육전(B)수전(B)정치(B)모략(B)명성(B)축성(C)염주호족으로 889년 신라조정에 반기를 들고 자치세력을 유지하였다. 패서지역에서 평주와 더불어 최대의 세력을 유지하였다.궁예가 태봉을 세우고 패서지역을 굴복시킬때 평양성주 금용마저 궁예에 투항해 패서 13진을 설치하였으나 유긍순은 이에 대항하여 오랫동안 자치적인 세력을 유지하였다. 태봉 말년에 궁예에 의해 드디어 패하게 되어 멸망하게 된다.

 

 

윤선(尹瑄) 고려(염주→태봉→골암성→고려) 육전(S)수전(B)정치(B)모략(B)명성(A)축성(A)생몰년 미상. 나말여초에 활동한 호족출신의 장군.염주호족 유긍순 휘하에서 태평과 더불어 활약하였다. 성격이 침착하고 용맹스러우며 병법에 밝았다고 한다. 궁예가 염주를 멸할때 항복하여 궁예의 휘하에 있었으나 궁예가 말기에 신하를 함부로 살해하자 이를 피하여 북쪽 변방 골암성에 2, 000여명을 거느리고 웅거하면서 흑수말갈(黑水靺鞨)과의 교섭을 통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궁예에 대항하였다.918년 8월에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예를 갖추어 사자를 보내 초유(招諭)하자 귀부하였다. 

 

태평(泰評) 고려(염주) 육전(B)수전(B)정치(A)모략(S)명성(B)축성(A)생몰년 미상. 신라말 고려초의 학자. 염주(鹽州)출신.서사(書史)를 널리 섭렵하였고 이무(吏務)에도 밝았다. 신라말 군웅이 할거할 때 염주의 호족 유긍순(柳矜順)의 휘하에 들어가 기실(記室)이 되었다.그뒤 궁예(弓裔)가 유긍순을 쳐서 염주를 빼앗았으나 오래도록 항복하지 않았다고 하여 졸오(卒伍)에 편입시켰다.왕건(王建)이 고려를 세울 때 공로를 인정받아 923년(태조 6)에 순군낭중(徇軍郎中)에 제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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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고려)===================================================================================================

견금(堅金) 고려(청주호족)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B)생몰년 미상. 신라말과 고려초에 활약한 청주출신의 호족으로 본주의 영군장군(領軍將軍)이 되었다.918년(태조 1)에 부장(副將) 연익(連翼)·흥현(興鉉)과 함께 개경에 가서 왕건에게 충성하는 청주인 김근겸(金勤謙)·관준(寬駿)·김언규(金言規) 등을 제거할 것을 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 도리어 김근겸 등에 의해 이심(異心)이 있는 자라는 반격을 받았다.그러나 왕건은 견금 등을 후대하면서 돌아가 민심을 안정시키도록 하였다. 이러한 왕건의 처사에 감복하여 결국 청주에서 반란을 일으키면 제어하기가 어려운 실정을 설명하고 관군의 파견을 청하였으며, 왕건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였다.왕건은 건의에 따라 마군장군(馬軍將軍) 홍유(洪儒)·유금필(庾黔弼)을 보내어 군사 1500으로 진주(鎭州:지금의 충청북도 鎭川)에 주둔하게 하여 변란에 대비케 하고, 또 마군장군 능식(能植)을 보내어 도안군(道安郡:지금의 충청북도 괴산)을 진무하자 청주세력이 쉽게 반역하지 못했으며, 뒤에 진선(陳瑄)과 그 아우 선장(宣長)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할 수 있었다. 삼한통일후에는 삼한공신에 책록되었다.

 

 

연익(連翌) 고려(청주호족) 육전(B)수전(C)정치(C)모략(B)명성(B)축성(C)청주의 영군장군 견금의 부장으로 918년 견금과 흥연과 더불어 태조에게 귀부하였다. 태조에게 말한필을 받고 녹봉을 얻었다. 이후로 공을 세워 삼한통일후에는 삼한공신에 책록되기도 하였다.

 

 

흥연(興鉉) 고려(청주호족)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C)청주의 영군장군 견금의 부장으로 918년 견금,연익과 더불어 태조에게 귀부하였다. 태조에게 말한필을 받고 녹봉을 얻었다. 이후로 공을 세워 삼한통일후에는 삼한공신에 책록되기도 하였다.

 

능달(能達) 고려(청주호족) 육전(A)수전(D)정치(B)모략(B)명성(B)축성(B)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무신. 청주 사람. 청주를 기반으로 했던 호족으로서 왕경에 초치된 자로 추정된다.궁예(弓裔)가 이곳 주민을 철원에 사민(徙民)시킨 이래, 이미 본관을 떠나 상경종사하는 세력과 아직 토착해 있는 현지세력으로 나뉘어 서로 시기, 반목하거나 지방세력 내부에서도 대립하여 왕건(王建)과의 관계에서도 충역(忠逆)이 무상하여 고려 개국 당시에 왕건이 가장 심려하던 지방이었다.그리하여 태조는 즉위와 동시에 청주출신의 명길(明吉)·문식(文植)과 함께 능달을 청주에 보내어 그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능달은 돌아와 반역의 조짐이 없다고 고한 데 반하여 문식·명길은 청주인 김근겸(金勤謙)·관준(寬駿)에게 반역의 조짐이 있다고 하였다.이때 능달은 청주의 민심을 대변하고 감싸주는 입장이었다. 925년에는 봉업사를 중창하는데 관여하였다.

936년 태조19년 일리천전투에서 지천군 대장군 원윤의 직을 맡고 있으면서 보병 1만을 거느리고 좌익을 담당했다. 

 

 

명길(明吉) 고려(청주호족) 육전(D)수전(D)정치(C)모략(B)명성(D)축성(D)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 때의 관리. 청주출신.태조 왕건(王建)이 궁예(弓裔)를 몰아내고 즉위할 때 그의 정치적 입장은 친왕건파였다.태조가 즉위한 직후에 청주지방의 호족세력이 반란을 일으킬 것에 대비하는 정책을 펼 때인 918년(태조 1)에 명길은 능달(能達)·문식(文植)과 함께 청주출신의 재경세력(在京勢力)으로서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고자 청주에 파견되었다.

태조가 혁명으로 개국할시, 청주에서 반역의 기운이 비쳐 비밀리에 청주출신 능달,문식,명길 세사람을 청주로 보내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능달은 청주호족세력을 비호하여 태조에게 반역의 조짐이 없다고 고한데 반해, 문식과 명길은 황도에 있는 청주출신 관리인 김근겸(金勤謙)과 관준(寬駿)에게 청주호족들에게 반역의 조짐이 있다고 고하여 곧 태조의 귀에 들어갔다.견금이 태조에게 충성맹세를 하기위해 황도로 올라왔을때 황도에 있는 청주출신 김근겸(金勤謙),관준(寬駿),김언규(金言規)를 미워하여 이들을 주살해 달라고 청하였으나 태조가 어찌 한고을을 얻으려고 충신을 죽이겠는가 반문하자 부끄러워 했다.

 

 

 

 

이능희(李能希) 고려(청주호족) 육전(C)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C)청주이씨(淸州李氏)의 시조로 태조를 도와 삼한통일에 공을 세워 벽상삼한삼중대광태사(壁上三韓三重大匡太師)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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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능(李希能) 고려(청주호족) 육전(C)수전(D)정치(C)모략(C)명성(D)축성(D)청주호족으로 태조때 공신에 책봉되었다. 아들 이겸의(李謙宜)와 함께 일리천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이겸의(李謙宜) 고려(청주호족)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C)생몰년 미상. 고려의 무신. 본관은 청주(淸州).의종 때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낸 공승(公升)의 5대조이다. 일리천 전투에서 부 이희능과 더불어 태조의 통일사업을 도와 공신이 되었다.984년(성종 3) 주농경(主農卿)으로 형관어사(刑官御事)가 되었다. 그해 왕명을 받아 압록강안에 성을 쌓아 북방의 관성(關城)을 삼으려 하였는데, 이것을 방해하려는 여진의 습격을 받아 그들에게 포로가 되었으며, 이로써 성을 쌓던 군사들도 흩어져 성을 쌓지 못하였다.

 

 

한란(韓蘭) 고려(청주호족) 육전(C)수전(D)정치(B)모략(B)명성(D)축성(D)청주호족으로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시조다. 태조 11년(928년) 태조가 백제를 공격하러 남진할때 한란이 방정리(方井里)에서 태조를 환영하고 군사에게 하루동안 필요한 모든 주육급식을 베풀어 훗날 삼한공신에 임명되었다.

 

 

문식(文植) 고려(재경청주) 육전(D)수전(D)정치(C)모략(B)명성(D)축성(D)태조가 혁명으로 개국할시, 청주에서 반역의 기운이 비쳐 비밀리에 청주출신 능달,문식,명길 세사람을 청주로 보내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능달은 청주호족세력을 비호하여 태조에게 반역의 조짐이 없다고 고한데 반해, 문식과 명길은 황도에 있는 청주출신 관리인 김근겸(金勤謙)과 관준(寬駿)에게 청주호족들에게 반역의 조짐이 있다고 고하여 곧 태조의 귀에 들어갔다.견금이 태조에게 충성맹세를 하기위해 황도로 올라왔을때 황도에 있는 청주출신 김근겸(金勤謙),관준(寬駿),김언규(金言規)를 미워하여 이들을 주살해 달라고 청하였으나 태조가 어찌 한고을을 얻으려고 충신을 죽이겠는가 반문하자 부끄러워 했다.

 

 

김근겸(金勤謙) 고려(재경청주)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B)축성(D)청주출신으로 본토에 있는 청주호족들과 토지를 둘러싼 알력이 있었다. 태조가 국초에 청주의 반란을 의심하여 능달,문식,명길 세사람을 파견해 동정을 살피게 하였는데, 문식,명길등 동향인들이 우두머리격인 김근겸에게 청주호족 견금에게 벼가 익으면 반란의 기미가 보인다고 고하여, 태조에게 고하였다. 삼한공신에 책록되었다.

 

 

관준(寬駿) 고려(재경청주) 육전(D)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청주출신으로 본토에 있는 청주호족들과 토지를 둘러싼 알력이 있었다. 태조가 국초에 청주의 반란을 의심하여 능달,문식,명길 세사람을 파견해 동정을 살피게 하였는데, 문식,명길등 동향인들이 우두머리격인 김근겸, 관준에게 청주호족 견금에게 벼가 익으면 반란의 기미가 보인다고 고하여, 태조에게 고하였다.

 

 

김언규(金言規) 고려(재경청주) 육전(C)수전(D)정치(A)모략(B)명성(B)축성(D)고려 전기 청주출신으로 사무에 능숙하고 청렴하였으며 조심성이 있었다. 공부에 태만하지 않고 일을 처리함에 민활하여 군중의 신임이 두터웠다. 918년 태조가 정권을 장악한 직후에 관직을 전면 재임명하였을때 일길찬으로 백서성경에 임명되었다. 재경 청주출신으로 견금등 본토 청주호족들과 마찰이 있었다. 견금등이 태조에게 충성맹세를 하기 위해 황도로 올라왔을때 견금이 김언규등을 주살해줄것을 태조에게 요청하였지만, 태조는 한고을을 얻기위해 충신을 죽일수 없다며 응하지 않았다. 아들과 손자가 시중, 시랑직을 역임하였으며, 또한 3대에 걸쳐 법상종 승려를 배출하였다. 태봉의 일길찬(一吉飡)직에 있으면서 태조의 역성혁명에 공을 세워, 태조 원년 조정 개편에서 박인원(朴仁遠)과 함께 백서성경(白書省卿)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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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파(金行波) 고려(서경호족) 육전(A)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A)동주(洞州, 지금의 황해도 서흥)호족으로 김행파는 활을 잘 쏘고 말도 잘 탔으므로 태조가 김이라는 성을 주었다. 태조의 명으로 922년 11월 대승 박질영과 더불어 모든 군현의 사람들을 이끌고 서경(평양) 개척에 투입되었다. 이후로 김행파는 서경의 토착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태조는 여러차례 서경에 행차했는데, 서경행차시에 김행파가 무리를 이끌고 왕건을 맞이하여 자기집에서 2틀을 유숙하게 하였는데, 두 딸로 하여금 하루 밤씩 그를 모시게 하였다. 그후론 태조가 서경행차를 하지 않았는데, 두딸이 절개를 지키려 모두 여승이 되었다. 태조가 이를 듣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어 불러서 만나보고 "그대들이 이미 여승이 되었으니 그 결심은 꺾을 수 없구나!"라고 말하더니 서경성안에 절을 지어주고, 대서원, 소서원 부인이라 불렀다.

 

 

염형명(廉邢明)/염나명(廉那明) 고려(봉성호족)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D)파주염씨(坡州廉氏)의 시조로 봉성현(파주)의 호족이었는데, 삼한 통일후 삼한공신에 책록되었고, 대사도(大司徒)에 임명되었다.

파주의 옛이름인 봉성염씨(峯城廉氏), 서원염씨(瑞原廉氏)라 부르기도 한다.

 

 

유긍달(劉兢達) 고려(충주호족) 육전(B)수전(C)정치(B)모략(B)명성(B)축성(D)충주유씨(忠州劉氏)로 고려 태조 제3왕태후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의 부친이다. 궁예의 명을 받은 왕건이 900년 지금의 충주, 청주, 괴산 등지를 공격하여 청길,신훤의 세력을 평정함으로써 이 지역이 궁예의 세력권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유긍달은 왕건에게 투항하여 딸을 바쳤다. 고려건국 이후 유긍달의 딸 신명순성왕후의 세력형성을 보면 왕건과의 사이에 5남 2녀를 두었는데 5남중 정종(3대)과 광종(4대) 등 두 왕을 배출하였고 충주유씨는 왕실의 외척이 되어 경종대(5대 : 975 ∼ 981)에 이르기까지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유긍달은 태조조에 태사내사령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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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신달(尹辛達)/(尹莘達) 고려(파평호족) 육전(B)수전(D)정치(B)모략(B)명성(B)축성(C)파평윤씨의 시조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용연보감(龍淵寶鑑)등의 문헌에 의하면 윤신달은 경기도 파주 파평산(坡平山) 기슭에 있는〈용연지(龍淵池)〉라고 못 가운데 있던 옥함(玉函)속에서 출생했다고 하며, 그가 옥함(玉函)에서 나올때 겨드랑이에 81개의 비늘고 발(足)에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고, 손바닥에는 윤(尹)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성(姓)을 윤(尹)으로 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어려서부터 문무가 출중하고 파평산 금강굴에서 용마를 얻은후 파평산 치마대(馳馬臺)에서 무예를 닦았다고 한다. 태봉국에 출사하여 어느해에 나라가 온통 극심한 가뭄에 시달렸는데, 궁예가 문신에게 제문을 지어 올리도록 지시했는데 윤신달이 다음과 같이 제문을 올렸다고 한다. "(하늘이시여)군신이 죄가 있으면 마땅히 재앙을 달게 받겠지만 어찌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초목을 마르고 타게 하나이까?"하여 제문으로 채택이 되어 기우제후 곧바로 비가 쏟아져 뭇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태조의 역성혁명 당시 왕건을 추대했다고 파평윤씨 족보에 적혀 있으며, 파평현에 거주함으로 거주백에 봉한 후 본관을 파평(坡平)으로 하였다. 통일후 개국통합 삼한벽상 익찬공신 2등에 봉해졌다.아래는 파평윤씨 족보의 기록이다. <태사윤신달선생은 문무를 겸전 인의지도(仁義之道)를 제창 파평사저에서 송도로 말을 타고 조정에 입궐당시 임진강 여음탄을 매일 도강하는데 강을 건널적에 물이 양쪽으로 갈라져 육지를 다니듯 하였다하며 말이 물을 마신 나루(如飮津)를 여음 또는 음진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한다. 그 후 용마가 죽자 기념하기 위하여 파평산 치마대에 철마를 만들어 세웠으나 조선조시대 철공(대장간)하는 사람들이 이를 사용하고자 훔쳐 달아나다가 직사하였다 하며 후한이 두려워 흙으로 다시 만들어 세웠다하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 

 

이배환(李盃換) 고려(단산호족)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단양 이씨(丹陽李氏)의 시조로 단산(丹山 단양)호족이다.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하는데 공(功)을 세워 삼한공신(三韓功臣)에 책록되고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이능필(李能弼)/이능(李能)/이능일(李能一) 고려(경산호족) 육전(B)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C)

성산이씨(星山李氏)의 시조로 선조(先朝)는 누대(累代)에 걸쳐 경산(京山 성주) 본피현(本彼縣) 지방(地方)에 토착 세거(土着世居)해 온 사족(士族)이었다. 초명은 이능필(李能弼)/이능(李能)으로 924년 태조에게 최언(崔彦)과 함께 사병 6백명을 이끌고 귀부하였다. 그후 일리천 전투에는 원윤(元尹)으로 공훤(公萱), 능필(能弼), 왕함윤(王含允)과 함께 1만5천의 원병을 이끌고 참전해서 공을 세워 태조(太祖)로부터 삼한통일(三韓統一)에 크게 기여했다는 뜻으로 이능일(李能一)로 사명(賜名)받았으며, 개국벽상좌명공신(開國壁上佐命功臣)에 녹훈되어 대광사공(大匡司功)에 봉해졌다. 태조왕건의 딸인 정순궁주(淨順宮州)과 결혼하여 부마가 되고 성산백에 봉해 지자 후손들이 성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이견웅(李堅雄) 고려(경산호족) 육전(D)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D)수안 이씨(遂安李氏)의 시조로 본래 경산(지금의 성주)호족으로 고려 태조(太祖)를 도와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 평장사(平章事),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올랐다. 후손 이연송(李連松)대에 이르러 수안으로 식읍을 옮겼다.

 

 

강기주(康起珠) 고려(신천호족)육전(D)수전(B)정치(C)모략(B)명성(C)축성(D)신천강씨로 신주(信州)의 강력한 호족이었다. 신천강씨는 고려 왕씨의 외가로 고려 왕가와는 피로 맺어진 사이이기도 하였으며, 또한 태봉국 왕후 강씨부인과는 남매지간이었다. 강기주의 딸은 태조의 제22비인 신주원부인(信州院夫人)이 되었다.

 

 

김선궁(金宣弓)/김선(金宣) 고려(숭선호족) 육전(A)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D)선산김씨(善山金氏)의 시조로, 신라 왕족 김체의(金體誼)의 아들로,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상해를 입힌 자의 목을 베고 처벌을 자청하여 투옥된 후 조정에 의해 효자라고 석방, 표창까지 받았다. 숭선(崇善 선산)의 호족으로 태조가 백제 원정길에 숭선에 와서 모병(募兵)을 하였는데 이때 사병들을 이끌고 종군(從軍)할 것을 희망하니 태조(太祖)가 기뻐하며 친히 활(弓)을 하사(下賜)하고 선궁(先弓)으로 사명(賜名)하였다. 이후 두아들 김봉술(金奉術), 김봉문(金奉文)과 함께 전공을 세워, 삼한 통일후에는 개국벽상공신(開國璧上功臣)에 책록되고 선주백(善州伯)에 봉해졌으며, 영문하시중(領門下侍中),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임명되었고 정종 때 대승(大丞)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순충(順忠)이다.

 

 

김봉술(金奉術) 고려(숭선호족) 육전(B)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숭선호족 김선궁의 아들로 아버지를 따라 태조를 도와 전공을 세웠다. 조정에 출사하여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김봉문(金奉文) 고려(숭선호족)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D)숭선호족 김선궁의 둘째 아들로 아버지를 따라 태조를 도와 전공을 세웠다. 조정에 출사하여 벼슬이 삼사우윤(三司右尹)에 이르렀다.

 

 

이치(李齒)/이도(李棹) 고려(공주호족) 육전(C)수전(B)정치(C)모략(C)명성(C)축성(D)전의이씨(全義李氏)의 시조로, 공주호족이다. 초명은 치(齒)며 익호는 성절(聖節)이다. 본래 공주에 세거했는데 고려태조 왕건이 견훤을 정벌하고자 남하하여 공주에 도착했을 때, 금강이 범람하자 태조를 도와 무사히 강을 건너게했다. 그래서 태조로부터 도(棹)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통합삼한개국익찬(統合三韓開國翊贊) 2등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벼슬이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고 전산(全山. 현재의 전의)후에 봉해졌다. 그후 전의 계성산 아래로 이사해 살았기 때문에 후손들이 전의를 본관으로 하고 있다.

 

 

허선문(許宣文) 고려(공암호족)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837~?.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시조다. 본시 김해김씨로 김수로왕비 보주태후(普州太后) 허씨의 30세손으로 대대로 공암현(孔巖縣 현 양천,강서)에서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호족이었다. 897년 왕건이 궁예의 명을 받아 공암,검포,혈구 등의 항구를 점령하기 위해 출진하였을때 정주의 유천궁과 더불어 왕건군에게 막대한 군량을 지원하고, 수로등의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왕건의 승전에 큰 도움을 준다. 후에 일리천 전투에 십만병력을 동원한 고려 태조가 군을 이끌고 이지역을 지나는데, 허선문이 99세의 나이로 몸을 이끌고 나와 태조를 배알하며, 막대한 양의 군량을 지원해주었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허선문을 가부(假父=양아버지)라 칭하고 공암을 식읍으로 하사하였으며, 공암촌주에 명하였다. 삼한통일후에는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책록되었다. 시호는 장경(壯景)이다. 그의 아들 허현(許玄)도 황도로 올라가 벼슬을 하였다. 조선의 명의 허준의 조상이기도 하다.

 

 

허현(許玄) 고려(공암호족)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D)축성(D)공암호족 허선문의 아들로 일리천 전투에서 고려군에 막대한 양의 군량을 헌납해 공을 세웠다. 허현은 삼한 통일후 황도 개성으로 올라가 벼슬을 하며 상서(六尙) 봉어까지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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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규(王規) 고려(광주廣州호족) 육전(C)수전(C)정치(B)모략(A)명성(B)축성(D)?∼945(혜종 2). 고려 초기의 재신(宰臣).광주(廣州)지방의 호족출신으로 태조 왕건(王建)을 받들어 대광(大匡)에 이르렀다. 두 딸은 태조의 제15비(妃) 광주원부인(廣州院夫人)과, 광주원군(廣州院君)을 낳은 제16비 소광주원부인(小廣州院夫人)이 되어 왕실의 외척으로서, 또한 광주의 강력한 지방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막강한 정치권력을 장악하였다.그리고 염상(廉相)·박수문(朴守文)과 함께 태조의 임종을 곁에서 지킨 세 재신 중의 한 사람으로서, 태조가 죽자 그 유명(遺命)을 내외에 선포하는 중책을 맡기도 하였다.이처럼 태조 때에는 태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혜종이 즉위한 뒤에는 혜종의 왕권에 도전하는 가장 강력한 적대세력의 하나가 되었다.한편, 혜종의 이복동생인 요(堯:뒤의 정종)도 서경(西京)의 왕식렴(王式廉)세력과 결탁, 몰래 도모하는 바가 있었다. 그리하여 왕규와 요 사이에 암투가 벌어졌다.이때 혜종은 왕권이 미약하여 왕위쟁탈음모에 강력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자기자신의 신변보호에 급급할 뿐이었다.왕규는 자기의 외손자 광주원군을 왕위에 앉히려고 몇 차례 혜종을 죽이고자 하였다. 한번은 혜종이 밤중에 잠든 틈을 타서 몰래 심복을 보내어 암살하려고 하였으나, 도리어 잠에서 깬 혜종의 주먹에 맞아 죽음으로써 실패하였다.또, 한번은 왕규가 직접 밤에 심복들을 거느리고 신덕전(神德殿)으로 쳐들어갔으나, 혜종이 이미 최지몽(崔知夢)의 건의에 따라 침소를 중광전(重光殿)으로 옮긴 뒤여서 역시 실패하였다.이와같이 정국이 어수선해지자, 요는 서경에 있던 왕식렴의 군대를 수도로 불러들여 왕위를 차지하였다.그리고 이어 왕규를 붙잡아 갑곶(甲串)에 귀양보냈다가 사람을 보내어 죽이고, 아울러 그의 일당 300여명도 처형하였다. 그 결과 왕규에 의한 왕위쟁탈음모는 종식되었으나, 그 사건에 대한 역사적 의미는 학자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지고 있다.

 

 

함규(咸規) 고려(광주廣州호족) 육전(C)수전(C)정치(B)모략(A)명성(B)축성(D)강릉 함씨(江陵咸氏)의 시조로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 개국(高麗開國)에 공(功)을 세워 익찬개국공신(翊贊開國功臣)으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광평 시랑(廣評侍郞)을 지냈다. 함규는 왕규라는 설이 유력한데, 왕규의 본성은 함씨로 대대로 함씨는 한강유역에 웅거한 호족가문이었다. 왕건을 도와 공으로 왕씨성을 하사받은후, 고려초 막강한 세력을 형성했는데, 그후 왕식렴에 의해 제거된후 그의 후손 함제가 강릉으로 이주하였기에 이후로 강릉함씨가 되었다고 한다.

 

 

박기오(朴奇悟)  고려(연창군호족) 육전(C)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C)죽산박씨(竹山朴氏)의 시조로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넷째아들인 죽성대군(竹城大君) 언립(彦立)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 초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 태보 삼중대광으로 계림군에 봉해졌다가 뒤에 죽주백에 개봉되고, 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그리고 죽주가 죽산으로 개칭 되었기 때문에 본관을 죽산(竹山)으로 하게 되었다.

 

 

이희목(李希穆) 고려(장제군호족) 육전(C)수전(D)정치(C)모략(C)명성(D)축성(D)부평이씨(富平李氏)의 시조로 수주(樹州)/장제군(현 부평)호족이었다. 고려 태조를 도와 삼중대광 벽상공신(三重大匡壁上功臣)에 올랐다.

 

 

유차달(柳車達)/차달(車達) 고려(유주호족) 육전(C)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C)문화유씨(文化柳氏)의 시조(연안차씨 시조 차효전의 부)로 본성은 차(車)씨이며 차무일(車無一)의 38세손이다. 유차달의 5대조상인 차승색은 신라 애장왕 때 벼슬이 좌승상이었는데 809년 (신라 애장왕 10년) 애장왕의 숙부 김언승(金彦昇, 41대 헌덕왕)이 애장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차승색은  애장왕의  복수를  위해 좌승상의 벼슬을 버리고 아들 차공숙과 함께 헌덕왕을 죽이려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령이 내려지자 차공숙을 데리고 도피하여 유주(문화의 당시 지명) 구월산 목방동에 들어가 숨어 살면서 할머니의 성인 양(楊)씨를 모방하여 유씨로 성을 바꾸고 이름도 색으로 고쳤으며, 아들 공숙도 숙으로 이름을 바꾸어 정착하여 살았다. 그후 유차달에 이르러 그 지방의 호부가 되었다. 유차달은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정벌할 때 군량보급이 어려움을 알고 재산을 털어 차 천량을 제작하고 군량을 보급해준 공으로 익찬벽상공신(翊贊壁上功臣)에 서훈되고 벼슬이 대승에 올랐다. 그의 조상에서 성을 바꾼 사실을 안 태조(太祖)가 "차씨의 공을 잊을 수 없고 유씨로 성을 바꾼지 6세가 지났으니 유씨도 없앨 수없다."하며 유차달의 첫째 아들 효전(孝全)에게 차(車)씨를 계승하게 하여 연안(연안) 차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둘째 아들인 효금(孝金)에게는 유주에 살면서 유씨를 계승하게 하였다. 뒤에 유주(儒州)가 문화현(文化縣) 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귀(本貴)를 문화(文化)로 하여 세계(世係)를 이어 왔다.

 

 

유천궁(柳天弓) 고려(정주호족) 육전(C)수전(A)정치(B)모략(B)명성(B)축성(B)

정주(貞州, 승천, 풍덕)의 대호족으로 정주항을 무대로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으며 읍인(邑人)이 유천궁을 장자(長者)라 칭하였다. 궁예의 명을 받아 897년 왕건은 공암(강서구 가양동), 검포(김포), 혈구(강화)등의 항구를 점령하기 위해 출전했는데, 왕건이 정주에 도착했을때 유천궁이 군사들을 아주 풍족하게 대접하며, 자신의 딸에게 왕건과 시침케했다. 왕건이 떠난후 딸은 지조를 지키기 위해 비구니가 되었다. 후에 왕건이 이소식을 듣고 부인으로 삼으니 바로 신혜왕후다. 유천궁은 군사뿐 아니라 해상무역을 통해 얻은 선박기술과 수로정보, 해상무역에 종사하던 주변호족(공암호족 허선문등)들까지 포섭해주며 왕건을 돕는다. 그후 정주항은 왕건이 수군대장군이 되어 금성(나주)를 정벌하기 위해, 선박을 건조하고 군사들을 훈련하던 수군 전초기지가 되었다. 고려가 건국한후에는 삼중대광에 올랐고 삼한벽상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정주유씨가문은 태조의 제1,제6 왕후를 배출함으로써 고려초 최고의 세력으로 부상했다.

 

유덕영(柳德英) 고려(정주호족) 육전(C)수전(B)정치(B)모략(B)명성(B)축성(C)

태조의 제6왕후 정덕왕후 유씨(貞德王后柳氏)의 아버지로,신혜왕후 유씨를 낳은 삼중대광 유천궁의 일족으로 정주 유씨 세력들은 서해 해상세력을 장악하여 부를 축적한 호족이었다. 중앙에 진출한 후에는 문벌귀족화했다. 숙종의 비인 명의 태후도 이들 가문 출신이었다. 아울러 문종대의 내사령 유윤부, 평장사 유소도 이들 가문의 출신으로 이른바 정주 유씨 문벌가문을 형성했다.

 

 

박연윤(朴遲胤) 고려(우죽주호족) 육전(C)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D)우죽주(又竹州) 호족으로 통일후 삼한공신에 봉해졌다.

 

 

강여청(姜餘淸) 고려(금주호족)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C)금천강씨(衿川姜氏)의 시조로, 본시 진주강씨(晉州姜氏)이다. 삼한공신 강궁진의 5대조로 알려져 있으나, 삼한벽상공신에 강여청이 책록된것으로 보아 강궁진의 부일것으로 추측한다. 강여청은 신라의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냈으며, 금주로 이주해 은거해 살았다. 삼한벽상공신에 책록되었다.

 

 

강궁진(姜弓珍) 고려(금주호족) 육전(B)수전(C)정치(B)모략(B)명성(C)축성(C)금주(衿州 현 서울 봉천동 일대,혹은 시흥,광명일대)호족으로 고구려 장군 강이식을 시조로 하는 진주강씨의 한뿌리인 금천강씨의 시조강여청의 후손이다. 본시 강궁진의 영지를 금천(衿川)이라 불리었는데, 고려 역성 혁명때 왕건을 지지함으로써 공을 세워 삼한공신에 임명되면서 금주(衿州)로 승격시켰다. 강감찬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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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봉(元奉) 고려(하지현호족)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C)생몰년 미상. 신라말·고려초의 지방호족. 일명 원봉(元逢)이라고도한다.922년(태조 5) 6월 하지현(下枝縣: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장군으로서 고려 태조에게 귀순하였다. 태조는 그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원윤(元尹)벼슬을 주고, 하지현을 승격시켜 순주(順州)로 하였다.929년 고창군(古昌郡:지금의 안동) 병산(甁山)싸움에서 참패한 후백제왕 견훤(甄萱)이 다음날 군세를 정비하여 전주로 가는 퇴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순주성(順州城)을 공격하자 성주인 그는 이를 방어하지 못하고 밤에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견훤은 이 성을 함락시켜 백성을 포로로 하여 전주로 데리고 갔다.이때 태조는 고창군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크게 노하고 순주에 행차하여 성을 수축하고, 순주를 하지현으로 강등시켰다.이때 그는 옛 공이 참작되어 강등의 처벌을 받았다.

 

성달(城達) 고려(명지성호족)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C)

생몰년 미상. 신라말 고려초의 지방호족.명지성(命旨城:지금의 경기도 抱川)장군으로 행세하였다.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923년(태조 6) 3월에 그의 동생 이달(伊達)·서림(瑞林) 등과 함께 고려에 내부(來附)하였다.

 

이달(伊達) 고려(명지성) 육전(C)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C)

명지성장군 성달의 동생으로 923년 3월에 성달,서림과 함께 고려에 귀부하였다.

 

 

서림(瑞林) 고려(명지성) 육전(C)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C)

명지성장군 성달의 동생으로 923년 3월에 성달, 이달과 함께 고려에 귀부하였다.

 

 

이총언(李悤言) 고려(벽진군호족) 육전(B)수전(D)정치(A)모략(C)명성(B)축성(C)858(헌안왕 2)∼938(태조 21). 나말여초 벽진군(碧珍郡:지금의 성주)의 호족. 세계(世系)는 알 수 없다.신라 말기 도적이 도처에서 일어나 노략질이 심하였던 시기에 그는 벽진군의 치안에 힘써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뒤에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화란(禍亂)을 평정할 것을 호소하자 매우 기뼈하며 아들 영(永)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왕건을 도와 후백제와의 전쟁에 참여하도록 하였다.왕건은 그것을 고맙게 여겨 대광(大匡) 사도귀(思道貴)의 딸을 영의 아내로 삼아주며 그를 벽진군장군에 임명하고 이웃고을의 정호(丁戶)229호를 더 내려주고, 또 충주·원주·광주(廣州)·죽주(竹州)·제주(堤州)의 창고 곡식 2, 200석과 소금 1, 785석을 주는 등 은사(恩賜)를 후하게 하였다.왕건은 또 서신을 보내어 “자손에 이르기까지 고마운 마음을 변하지 않겠다.”는 굳은 맹세까지 하였다. 그는 감격하여 군사를 훈련시키고 양식을 저축하여 고립된 성을 지키며, 신라와 후백제 간의 전쟁지역 내에 고려를 위하여 동남쪽의 큰 힘이 되어 후삼국통일에 기여하였다.

 

 

이영(李永) 고려(벽진군 호족) 육전(C)수전(C)정치(B)모략(C)명성(C)축성(C)벽진군호족 이총언의 아들로 고려로 귀부하였을때 18세였는데, 태조의 중매로 대광(大匡) 사도귀(思道貴)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조정에 출사하였다. 벼슬이 대제학(大提學)과 지경산부사(知京山府使)에 이르렀다.

 

 

양문(良文) 고려(벽진군호족)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 

생몰년 미상. 신라말·고려초 경산부(京山府:지금의 경상북도 星州) 지역의 지방호족.《삼국사기》에는 923년(경명왕 7) 7월에 “명지성(命旨城)장군 성달(城達)과 경산부 장군 양문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라고 하였으며 같은해에 해당하는 《고려사》 태조 6년 8월조에는 “벽진군(碧珍郡) 장군 양문이 그 생질 규환(圭奐)을 보내와서 항복하니 규환을 원윤(元尹)으로 제배하였다.”고 하였다. 경산부는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본래 신라의 본피현(本彼縣)으로, 경덕왕이 개명하여 신안(新安)이라 하고 경산군의 영현으로 삼았는데 뒤에 벽진군이라 고쳤고 고려 태조 23년에 다시 경산부로 고쳤다.”고 하였다.따라서, 《삼국사기》에서는 벽진군이라 하고, 《고려사》에서는 경산부로 해야 할 것을 바꿔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양문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한 달을 《삼국사기》에서는 7월이라 하고, 《고려사》에서는 8월이라 하여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양문이 생질 규환을 7월에 고려 태조에게 보내어 항복할 뜻을 전하고 8월에 항복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규환(圭奐) 고려(벽진군호족) 육전(C)수전(D)정치(C)모략(B)명성(D)축성(C) 벽진군 호족 양문의 생질로 923년 7월 태조6년에 양문이 고려로 항복할때 송악에와 그 뜻을 전했다. 태조가 기뻐하며 원윤(元尹)을 제수했다.

 

 

홍술(洪術) 고려(진보성호족) 육전(B)수전(D)정치(B)모략(B)명성(B)축성(B) (?-929)진보성 성주로 독자적인 길을 걷다가 태조5년 고려에 항복을 청하였다. 요충지 문소성(聞韶城)으로 그 식읍을 옮긴후 백제와 대립하였다. 929년(고려 태조 12년, 신라 경순왕 3년)7월에 후백제 견훤(甄萱)이 정예군사 5천명을 거느리고 의성부를 공격하여 왔을 적에 이를 맞아 힘껏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태조는 이소식을 듣고 "내가 양손을 잃었다"며 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이는 관흔에게 죽령일대를 빼앗기고 내주고 이에 문소성마저 내줌으로써 신라로의 진출로가 완전히 막혀 버린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태조는 후에 홍술의 순사(殉死)를 오래 기억하기 위해 이곳을 「의(義)로운 성(城)」곧 의성이라 명명(命名)하였다고 전해진다.

 

왕립(王立)/홍립(洪立) 고려(진보성호족)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관리. 진보(眞寶: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성주 홍술(洪術)의 아들이다.922년(태조 5)에 사신을 보내어 고려 태조에게 항복을 청한 아버지 홍술의 명을 받아 923년 갑옷鎧 30벌을 태조에게 바치고 원윤(元尹)에 제수되었다.홍술은 신라 말기 반독립적 상태에 있던 지방호족 중의 하나로, 당시 지방호족들이 고려왕조가 성립되자 고려왕조에 대하여 적대의식 또는 독립적인 태도를 버리고 고려에 귀부하는 대가로 그에 상응하는 관직을 받아 쌍방간의 호혜적인 관계를 성립시켰음을 보여주고 있다.

 

 

말로(末老)/고말로(高末老) 탐라국 육전(C)수전(A)정치(B)모략(D)명성(B)축성(D)생몰년 미상. 탐라국(耽羅國)의 태자.940년(태조 23)에 고려에 귀부(歸附)하여 조공을 바쳤다. 이로 인하여 고려 태조로부터 성주왕자(星主王子)라는 작호(爵號)를 하사받았다. 탐라국과 고려와의 이러한 관계는 1105년(숙종 10)에 탐라군으로 개칭하여 고려의 군현(郡縣)으로 편제될 때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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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필(善弼) 고려(재암성호족) 육전(B)수전(C)정치(C)모략(B)명성(C)축성(C)생몰년 미상. 신라말·고려초에 활약한 호족출신의 장군.재암성(載巖城:지금의 靑松)장군으로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이때 고려는 후백제를 견제하기 위하여 신라와 통호(通好)하려 하였으나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선필은 왕건(王建)의 인물됨과 정치수완이 뛰어난 점에 감복하여 고려에 귀부하기로 작정하고 고려와 신라로 통하는 길을 열어 양국이 결속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또한 성을 들어 귀부하니 왕건은 자기보다 나이가 많다 하여 상보(尙父)의 예로써 후히 예우하였다.

 

 

능현(能玄) 고려(매조성호족) 육전(C)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C)생몰년 미상. 신라말과 고려초의 호족. 매조성장군(買曹城將軍)이다.925년(경애왕 2) 9월 신라에 반기를 들고 고려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능문(能文)/능장(能丈) 신라(고울부호족) 육전(C)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C)생몰년 미상. 신라말·고려초의 호족(豪族).관위는 고려조의 대광(大匡). 고울부(高鬱府:지금의 영천지방)의 장군으로 925년(경애왕 2) 10월에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그러나 태조는 고울부가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 가깝다는 이유로 노고를 위로하여 되돌려보내고, 그 휘하인 시랑 배근(盃近)과 대감(大監), 명재(明才),상술(相述),궁식(弓式) 등을 체류하게 하였다.931년(태조 14)에 대광으로 태조의 명에 따라 영주(英周)·열궁(烈弓)·총희(悤希)와 더불어 후백제의 신라 침입을 방비하기 위하여 파견되었다.

 

 

배근(盃近) 신라(고울부) 육전(C)수전(D)정치(C)모략(B)명성(D)축성(D)생몰년 미상. 신라말·고려초의 지방세력가.925년(경애왕 2) 10월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영천군) 장군 능문(能文)이 신라를 배반하고 성(城)을 들어 고려 태조 왕건(王建)에게 투항할 때 휘하의 시랑(侍浪)으로 있으면서 대감(大監) 명재(明才) 등과 함게 장군을 따라 행동을 같이하였다.후삼국이 정립하던 당시의 상황에서 신라의 많은 성들이 고려에 투항해왔는데, 태조는 이 고울부성이 신라 왕도 부근에 있었으므로 외교관계를 고려해서 능문을 위로하여 신라로 돌려보냈다.그러나 배근은 고려에 남아 태조를 섬겼다.

 

 

대감(大監) 신라(고울부)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고울부(高鬱府) 호족인 능문의 부하로 태조8년 10월에 능문과 함께 고려로 와 항복을 청하였지만, 고울부가 경주와 가깝다는 이유로 능문의 항복은 받아들이지 않고 신라를 돕게 하였다. 대감등은 배근,명재,상술,궁식과 더불어 고려에 남아 벼슬을 하였다.

 

명재(明才) 신라(고울부) 육전(C)수전(D)정치(C)모략(D)명성(D)축성(C)고울부(高鬱府) 호족인 능문의 부하로 태조8년 10월에 능문과 함께 고려로 와 항복을 청하였지만, 고울부가 경주와 가깝다는 이유로 능문의 항복은 받아들이지 않고 신라를 돕게 하였다. 명재는 고려에 남아 벼슬을 얻었다.

 

상술(相述) 신라(고울부) 육전(C)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고울부(高鬱府) 호족인 능문의 부하로 태조8년 10월에 능문과 함께 고려로 와 항복을 청하였지만, 고울부가 경주와 가깝다는 이유로 능문의 항복은 받아들이지 않고 신라를 돕게 하였다. 상술은 고려에 남아 벼슬을 얻었다.

 

궁식(弓式) 신라(고울부) 육전(C)수전(D)정치(C)모략(C)명성(D)축성(D)고울부(高鬱府) 호족인 능문의 부하로 태조8년 10월에 능문과 함께 고려로 와 항복을 청하였지만, 고울부가 경주와 가깝다는 이유로 능문의 항복은 받아들이지 않고 신라를 돕게 하였다. 궁식은 고려에 남아 벼슬을 얻었다.

 

 

윤웅(閏雄) 신라(강주호족)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C)생몰년 미상. 신라 경명왕 때의 장군.920년 태봉의 궁예(弓裔)가 부하들에 의하여 쫓겨나고 왕건(王建)이 추대되어 송악(松嶽)에 도읍하자, 강주(康州:지금의 진주)의 장군으로 920년(경명왕 4) 고려 태조에게 곡물을 바치고 그의 아들 일강(一康)을 인질로 보내 투항의 뜻을 밝혔다. 이에 고려 태조 왕건은 일강을 아찬(阿粲)에 임명하고, 낭중 춘양(春讓)을 강주에 파견하여 그를 잘 위무하였다.그뒤 신라를 완전히 배반하고 고려로 귀순하였다.

 

 

윤일강(閏一康) 신라(강주호족) 육전(C)수전(D)정치(B)모략(C)명성(D)축성(C)강주호족 윤웅의 아들로 920년 송악에 사자로가 투항할 뜻을 밝히자, 왕권은 윤일강을 아찬에 임명하고 경(卿) 행훈(行訓)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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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張吉)/장정필(張貞弼) 신라(고창군호족) 육전(B)수전(D)정치(C)모략(B)명성(B)축성(C)안동장씨의 시조이며, 본시 중국 절강성 출신이다. 892년 진성왕 6년에 아버지와 함안조씨의 시조가 되는 조정(趙鼎)형제와 함께 고려로 넘어와 안동에 터를 잡고 고창군(안동)의 3호족중 한세력을 이끌었다. 고창군의 병력이 당시 3천이라고 고려사절요에 나와 있어 장길이 이끄는 병력은 1천 정도로 추산된다. 929년 백제의 견훤이 수만을 이끌고 고창군을 포위하자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과 함께 결사항전을 펼쳤다. 고려의 원군이 도착하여 협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전사한 백제군의 수가 8천이라 한다. 태조는 고창 3호족을 크게 격려하며 고창군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키고 3호족을 삼태사(三太師)라 칭하였다. 고창군 전투이후 인근 영안(永安/영천永川), 하곡(河曲/하양河陽), 직명(直明 안동), 송생(松生 청송군靑松郡)등 30여 군(郡),현(縣)이 차례로 와서 항복하여 고려의 국력이 백제를 넘어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김선평(金宣平) 신라(고창군호족) 육전(B)수전(D)정치(B)모략(C)명성(B)축성(C)

안동김씨의 시조이며 고창군(안동)의 3호족중 한세력을 이끌었다. 고창군 전투에서 고려의 원군이 올때까지 결사항전해 고려의 승리에 기여했다. 공으로 3태사라 칭해졌으며, 통일후 삼한벽상공신에 책록되고 대광(大匡)에 임명되었다. 뒤에 벼슬이 아부(亞父)에 이르렀다.

 

 

권행(權幸)/김행(金幸) 신라(고창군호족) 육전(A)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안동권씨의 시조이며 고창군(안동)의 3호족중 한세력을 이끌었다. 김선평,장길과 의형제지간이라는 설도 있다. 본시 성(姓)은 신라 종성(宗姓) 김씨(金氏)이다. 929년 백제군이 고창군을 포위했을때 고창군 병산에 영채를 치고 주둔하면서 백제와의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승전후 태조가 이르길 "공은 능히 기미(畿微)에 밝아 귀순하고 권도(權道)와 의행(宜行)을 알아 통달했으니 가히 권형(權衡)이 있다 하겠노라." 이에 권(權)으로 성(姓)을 내리고 대상(大相)을 배(拜)하였다. 통일후 삼한벽상 삼중대광 아부공신태사(三韓 壁上 三重大匡 亞父功臣 太師)에 임명되었다.

 

 

소율희(蘇律熙)/김율희(金律熙) 신라(김해호족) 육전(B)수전(D)정치(B)모략(A)명성(B)축성(B)김해호족으로 본시 김해지방의 가장 유력한 호족세력은 지김해부진례성제군사 명의장군(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明義將軍)이라는 관직을 가졌던 김인광(金仁匡)이었는데, 906년(효공왕 10)을 전후하여 소충자(蘇忠子, 일명 蘇忠至)·소율희 형제가 새로 등장하여 김인광을 몰아내고 소충자가 대신 김해부지군부사(金海府知軍府事)가 되었다. 이때 소율희는 형 밑에서 군사권을 장악하고 제2인자의 위치에 있었다.그러나 그는 곧 소충자의 대를 이어 김해부지군부사가 되었는데, 그 시기는 대략 907년부터 911년 사이로 짐작되고 있다. 그리고 그뒤 소율희는 김율희(金律熙)로 이름을 고쳤는데, 김율희는 ‘쇠유리’의 한자표기로서, 신라 말기에 와서 전래성(傳來姓)을 가지지 못하였던 지방의 피지배층 안에서 대두하던 호족세력들이 새로운 성을 가지게 되는 모습을 나타내주고 있다.그런데 소율희는 이름을 고치면서 김씨(金氏)를 칭성하게 된 단계에 와서는 그 관직명도 지진례성제군사(知進禮城諸軍事)로 개칭하고 김해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그러나 고려가 새로 건국되어 태조 왕건(王建)과 후백제 견훤(甄萱)의 양대세력이 낙동강 서쪽의 경상도지역일대에서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기 시작할 시기에 와서는 그는 점차 무력화하여 경애왕대에 이르면 완전히 몰락하였다. 선종(禪宗)을 후원하여 당시 김해는 선종의 요람지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소충자(蘇忠子)/소충지(蘇忠至) 신라(김해호족)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C)906년 효공왕 10년 김해호족이던 명의장군(明義將軍) 김인광(金仁匡)의 휘하에 있다가 동생 소율희(蘇律熙)와 함께 거병하여 김인광을 제거하고, 신라조정으로부터 김해부(金海府) 지군부사(知軍府事)로 제수받아 이지방을 통치했다. 그러나 911년 갑자기 단명하였다. 뒤를 이어 동생 소율희가 김해지역을 다스렸다.

 

 

김인광(金仁匡) 신라(김해호족) 육전(B)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S)896년 신라말 혼란기에 김인광은 군사를 일으켜 김해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여 강력한 세력으로 대두되었다. 진경대사 탑비문에 따르면 김인광은 스스로 명의장군(明義將軍)이라 칭하며 진례성(進禮城)을 근거지로 삼아 가야국의 부활을 꿈꿨다. 이에 신라 조정은 김인광에게 지김해부진례성제군사(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를 제수하여 포섭하려 하였으나, 김인광은 계속 신라와 적대적인 관계를 취하였다. 10년동안 김해지역을 통치하던 김인광은 친신라계인 휘하 소충자,소율희 형제에게 제거 되었다. 김인광이 축조한 진례성은 해발 500미터 정상부에 계곡을 아우른 형태로 돌로 축조한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현재에도 그 유적이 김해시와 창원시의 경계에 남아있다.

 

 

기훤(箕萱) 죽주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생몰년 미상. 신라 진성여왕 때 반란의 주도자. 집안이나 출생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실정이 겹치고 재해가 잇달아 일어나던 중 889년(진성여왕 3)에는 국내의 여러 주와 군에서 공물과 조세를 바치지 않으므로 국고가 비어 재정이 궁핍하였다.이에 왕이 관리를 보내어 공부(貢賦)를 독촉하자 전국에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원종(元宗)과 애노(哀奴)가 사벌주(沙伐州:지금의 상주)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계기로 일어난 초적(草賊)세력은 신라 조정에 대하여 공공연하게 반기를 들었는데, 이때 기훤은 죽주(竹州:지금의 죽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그의 세력은 궁예와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891년 궁예(弓裔)는 기훤에게 몸을 의탁하여왔는데, 기훤은 오만하여 그를 예로써 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울분에 싸인 궁예는 기훤의 부하인 원회(元會)·신훤(申煊) 등과 결탁하여 892년 북원(北原:지금의 원주)의 적괴 양길(梁吉)에게로 몸을 의탁하였다.이처럼 기록에는 궁예가 기훤을 배반하고 양길의 부하로 옮겨가게 되는 것이 기훤의 소홀한 대우로 말미암은 것처럼 되어 있으나, 그 당시 날뛰던 초적들의 상호항쟁에서 기훤이 약세를 보인 탓이라고 생각된다.특히, 기훤의 부하인 원회·신훤 등이 배반하여 떠남은 기훤의 세력이 붕괴되고 있음을 뜻한다.그뒤 죽주를 중심으로 한 기훤 세력의 몰락과정에 대하여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이때를 지나 멀지 않은 시기에 무너진 것으로 짐작된다.

 

 

백길(白吉) 우릉도 육전(D)수전(B)정치(D)모략(C)명성(D)축성(D)

우릉도(芋陵島 울룽도) 사람으로 태조 13년 8월에 우릉도주 토두의 사신으로 고려에 공물을 바쳤다. 태조가 백길을 정위(正位)로 임명했다. 정위(正位)는 지방직 7품하 벼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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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두(土豆) 우릉도주 육전(D)수전(B)정치(C)모략(C)명성(C)축성(D)

우릉도(芋陵島 울룽도)주로 토두가 이름인지는 확실치 않다. 태조 13년 8월에 고려에 백길(白吉)이란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게 하였다. 이공으로 정조(正朝)로 임명되었다. 정조(正朝)는 지방직 7품상 벼슬이다.

 

 

애노(哀奴) 상주 농민반란군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889년 진성여왕 3년에 나라의 국고가 비게되자 진성여왕은 사자(使者)를 지방에 파견하여 세금을 독촉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전국에 초적(草賊)이 벌떼처럼 일어났는데, 상주에서는 애노(哀奴)가 원종(元宗)과 더불어 농민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애노의 세력은 얼마안가 아자개등의 신진 호족들에게 흡수된것으로 보인다.

 

 

원종(元宗) 상주 농민반란군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889년 진성여왕 3년에 나라의 국고가 비게되자 진성여왕은 사자(使者)를 지방에 파견하여 세금을 독촉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전국에 초적(草賊)이 벌떼처럼 일어났는데, 상주에서는 원종(元宗)이 애노(哀奴)와 더불어 농민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원종의 세력은 얼마안가 아자개등의 신진 호족들에게 흡수된것으로 보인다.

 

  훤달(萱達) 북미질부 성주 육전(B)수전(C)정치(C)모략(B)명성(C)축성(C)

훤달은  북미질부(영일) 성주(北彌秩夫城主)였는데, 태조 13년 서기 930년 1월에 고창전투에서 백제군이 전사자만 8천이 넘는 대패를 하자, 명주(溟州)로부터 흥례부(興禮府 안동)에 이르기까지 모두 1백 십여 성(城)이 한꺼번에 고려에 항복을 하였는데, 이때 훤달은 남미질부(南彌秩夫) 성주와 함께 고려에 항복하였다. 이에 태조는 두 미질부(彌秩夫)를 합쳐서 흥해군(興海郡)을 삼았다.

 

 

사고(娑姑) 거란 육전(D)수전(C)정치(C)모략(B)명성(D)축성(D)

백제는 오월국 및 거란, 왜와 일찍부터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당시 고려는 후당 및 신라와 친선관계로 거란과는 매우 사이가 좋질 않았다.927년 거란의 사신 사고(娑姑), 마돌(麻饉)등 35인이 백제에 사신으로 왔는데, 견훤은 크게 기뻐하며 장군 최견(崔堅)을 보내 그들을 환영했다. 용무를 마치고 거란에 돌아가기 위해 배길에 나선 이들은 태풍을 만나 후당의 등주에 이르렀는데 모두 잡혀 죽었다. 백제는 925년엔 오월국, 927년엔 거란, 929년엔 왜와 외교협상을 벌렸다.

 

 

마돌(麻饉) 거란 육전(D)수전(C)정치(B)모략(C)명성(D)축성(D)

백제는 오월국 및 거란, 왜와 일찍부터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당시 고려는 후당 및 신라와 친선관계로 거란과는 매우 사이가 좋질 않았다.927년 거란의 사신 사고(娑姑), 마돌(麻饉)등 35인이 백제에 사신으로 왔는데, 견훤은 크게 기뻐하며 장군 최견(崔堅)을 보내 그들을 환영했다. 용무를 마치고 거란에 돌아가기 위해 배길에 나선 이들은 태풍을 만나 후당의 등주에 이르렀는데 모두 잡혀 죽었다. 백제는 925년엔 오월국, 927년엔 거란, 929년엔 왜와 외교협상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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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

 

도선(道詵) 승려(신라)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SS)축성(SS)

통일 신라 말기의 중. 풍수지리설의 대가(827~898). 속성은 김(金). 혜철 대사에게 무설설(無說說)·무법법(無法法)을 배워 크게 깨달았으며, 참선 삼매의 불도를 닦았다. 그의 음양지리설과 풍수 상지법(風水相地法)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저서에 《도선비기》가 있다. 827(흥덕왕 2)∼898(효공왕 2). 신라말의 승려이며 풍수설의 대가. 성은 김씨(金氏). 영암출신. 왕가의 후예라는 설도 있다.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華嚴寺)에서 승려가 되었다.그뒤 유명한 사찰을 다니면서 수행하다가, 846년(문성왕 8) 곡성 동리산(桐裏山)의 혜철(惠徹)을 찾아가서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의 법문을 듣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850년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운봉산(雲峯山)에 굴을 파고 수도하기도 하였으며, 태백산에 움막을 치고 여름 한철을 보내기도 하였다.그러다가 전라남도 광양 백계산 옥룡사(玉龍寺)에 자리를 잡고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언제나 수백명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의 명망을 들은 헌강왕은 궁궐로 초빙하여 법문을 들었다.72세의 나이로 죽자 효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제자들이 옥룡사에 징성혜등탑(澄聖慧燈塔)을 세웠다. 고려의 숙종은 대선사(大禪師)를 추증하고 왕사(王師)를 추가하였으며,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봉(追封)하였다.또한 의종은 비를 세웠다. 일설에 의하면 도선은 당나라로 유학가서 밀교승려 일행(一行)으로부터 풍수설을 배워왔다고 한다.그러나 일행은 당나라 초기의 승려이고 도선의 생몰년은 당나라 말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연대에 모순이 있고, 도선이 당나라에 유학하였다는 것도 신빙성이 없다. 도선은 승려로서보다는 음양풍수설의 대가로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역사가 신라 말기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것도 도선의 생존연대가 그때였기 때문이다.그뒤부터 도선 하면 비기(#비58記), 비기 하면 풍수지리설을 연상할 만큼 도선과 풍수지리설 사이에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맺어졌다. 그리고 언제나 도선이 풍수지리설 같은 주술적 언어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는 역사적 실재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신화적 존재로 파악되기까지 하였다.그러나 도선이 역사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고려 태조에 의해서였다.875년(헌강왕 1) 도선은 “지금부터 2년 뒤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고 하였는데, 그 예언대로 송악에서 태조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 예언 때문에 태조 이후의 고려왕들은 그를 극진히 존경하였다.태조는 도선으로부터 직접 설법을 들은 일은 없으나 사상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태조는 예로부터 전하여 내려온 민간신앙도 보호하고 육성하면서, 동시에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 있던 《도선비기》에 관해서도 대단한 관심을 쏟았다.그는 불교신앙에서 오는 가호의 힘과 함께 참위설에서 얻어지는 힘에 의지함으로써 그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달성하려 하였다. 그래서 〈훈요십조〉 가운데 제2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 사원은 모두 도선이 산수의 순역(順逆)을 점쳐서 정한 자리에 개창한 것이다. 도선은 일찍이 ‘내가 점쳐서 정한 곳 이외 함부로 사원을 세우면 지덕(地德)을 손상하여 국운이 길하지 못하리라. ’고 하였다.생각컨대, 국왕·공주·왕비·조신들이 서로 원당(願堂)이라 하여 사원을 마음대로 창건한다면 큰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 신라 말엽에 사찰을 함부로 이곳 저곳에 세웠기 때문에 지덕을 손상하여 나라가 멸망하였으니 경계하여야 한다.” 이와같이, 도선이 산천의 지세를 점쳐서 결정한 자리에 세워진 절이나 탑을 비보사탑(裨補寺塔)이라고 하였다. 도선의 저서라고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도선비기》·《송악명당기 松岳明堂記》·《도선답산가 道詵踏山歌》·《삼각산명당기 三角山明堂記》 등이 있다.

 

 

석총(釋聰) 승려(태봉)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901(효공왕 5). 신라 말기의 승려.901년에 세달사의 중으로서 선종(善宗)이라 하였던 궁예(弓裔)가 스스로 미륵불이라 자칭하면서 비구 200여명으로 하여금 범패(梵唄)를 부르면서 뒤를 따르게 하고, 20여권의 경을 지었는데 모두가 요망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이에 석총이 평하기를 모두가 사특한 이론이요 괴상한 말이라고 하자 궁예가 노하여 철추(鐵椎)로써 그를 타살하였다.

 

 

법경(法鏡大師)/이현휘(李玄暉) 승려(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법경은 신라 말 ·고려 초의 명승으로 비문에 의하면 이름 현휘(玄暉), 속성은 이씨(李氏)이다. 879년(신라 헌강왕 5) 출생, 영각산사(靈覺山寺)의 심광(深光)에게 사사하였다. 906년(효공왕 10) 당나라에 유학하고 924년 귀국하여 국사(國師)로 존경받았다. 정토사 주지가 되기를 청하여 대중교화에 힘쓰다가 941년(태조 24)에 좌멸(坐滅)하였다. 

 

낭원대사(朗圓大師)/개청(開淸) 승려(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835~930 통일신라시대 말 사굴산문의 선승(禪僧). 속성 김(金). 경주(慶州) 출생. 유차(有車)의 아들이다. 8세에 공부를 시작하여 유학(儒學)을 익히다가 화엄사(華嚴寺)의 정행(正行)에게 배우고, 강주(康州) 엄천사(嚴川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후, 금산(錦山)으로 가서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불경을 공부하고 선(禪)을 익혔다. 후에 사굴산문의 개조(開祖)인 범일(梵日)의 명성을 듣고 오대산으로 찾아가, 범일로부터 심인(心印)을 받았다. 889년 범일이 죽자 제자인 알찬(閼飡) 민규(閔規)의 청함을 받고, 보현사(普賢寺)로 가서 전(殿)과 탑(塔)을 세우고 도로를 개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였다. 경애왕은 개청의 덕이 높음을 듣고 사신을 보내 국사(國師)의 예를 표하였다. 나이 96세, 법랍 72세로 보현사에서 죽었다. 고려 태조가 낭원대사(朗圓大師)라 시호하고, 탑 이름을 오진(悟眞)이라 하였다. 940년(태조 23)에 세운 비가 강원 강릉의 개청사(開淸寺)터에 있다.

 

 

충담(忠湛) 승려(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869(경문왕 9)∼940(태조 23). 신라말 고려초의 고승. 속성은 김씨. 계림의 귀족출신.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출가하여 장순선사(長純禪師)의 제자가 되었다.889년(진성여왕 3) 무주 영신사(靈神寺)에서 구족계를 받은 뒤 법상부(法相部)를 배우고 율장(律藏)을 연구하였다.그뒤 당나라에 유학하여 운개선우(雲蓋禪宇)에서 정원(淨圓)에게 예배하고 명산의 불교유적을 살펴보았으며, 904년에서 907년 사이에 귀국하였다. 고려 태조는 왕사의 예로써 대우하였는데, 그 예우가 극진하였다.71세로 입적하였다. 시호는 진공(眞空)이다. 원주 영봉산(靈鳳山) 흥법사(興法寺)에 탑을 세우고, 고려 태조가 비문을 지어 당태종의 글씨를 모아 새긴 고진공대사비(故眞空大師碑)를 세웠다. 비는 결손이 많아 자세한 행적을 판독할 수가 없다.

 

 

경보(慶甫) 승려(백제)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S)축성(D)(868~947) 옥룡사의 승려로 도선의 제자. 자는 광종(光宗 ). 시호 동진(洞眞 ). 경주 출신. 부친의 이름은 김익량(金益良), 모친은 박씨. 백제산 도승(도선대사)화상을 찾아가 보살도를 닦고 18세 때 월유산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품수. 진성왕 6년(892) 당으로 건너가 무주의 소산으로 가 광인화상에게 사사받음 . 백제 정개 22년 - 고려 천수 4년, 고국으로 돌아와 백제산 옥룡사에 주석. 전라도 임피에 있으면서 견훤을 귀의시켰고 고려의 여러 왕들에게 존경을 받음. 80세로 가부좌를 한 채 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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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혜(觀惠) 승려(백제)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백제 남악파의 화엄종사로 북악파의 희랑(希朗)과 대립하였다. 남악파는 지리산 화엄사를 거점으로 백제의 후원을, 북악파는 태백산 부석사를 거점으로 고려의 후원을 받았다. 관혜는 견훤의 복전(福田)이 되었다. 훗날 균여에 의해 종파가 통합되었다.

 

 

편운화상(片雲和尙) 승려(백제)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남원 실상사의 개창자인 홍척대사(洪陟大師)의 제자. 실상산파의 3대조로서 실상사를 크게 중흥시켰음. 실상사 조계암터의 편운화상(片雲和尙) 부도탑 정면 <정개>라는 후백제 연호가 새겨져 있다. <창조홍척제자안봉창조편운화상부도 정개십년경오세건(創祖洪陟弟子安峯創祖片雲和尙浮屠 正開十年庚午歲建)> 백제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았다.

 

 

수철(秀澈) 승려(백제)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817∼893. 속성이 김(金)씨인데 진골 출신으로 그 증조부가 소판(蘇判; 신라 제3위 관등)이었다 한다. 편운화상의 동생으로 형과 함께 어려서 고아가 되어 출가했고 흥덕왕 10년(835)경에 실상산문의 개산조인 홍척(洪陟)선사에게 입문하여 그 법통을 이은 인물이다.경문왕 7년(867)에 경문왕의 초청으로 왕도로 가서 교(敎)와 선(禪)의 차이를 묻는 경문왕에게 명쾌한 대답을 하여 경문왕으로 하여금 선종을 이해하게 하고 왕사가 되었다 한다. 이어서 헌강왕도 왕사로 대접하여 지리산 심원사(深源寺; 실상사 부근에 있었을 듯)에 머물게 했는데 견훤이 진성여왕 6년(892)에 이 일대를 차지하고 나라를 세운다. 893년 심원사에서 77세로 열반에 들었는데 후백제는 수철(秀澈)화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능가보월탑(楞伽寶月塔)이라는 탑을 건립했는데, 최승우의 입김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허월(許越) 승려(명주) 육전(C)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C)생몰년 미상. 고려초의 승려. 나말여초의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지역 호족인 김순식(金順式·王順式)의 아버지이다. 가계는 신라의 진골 가문으로서 신라 하대 명주일원의 세력가로서 대대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후삼국의 격변기 속에 승려가 되어 고려의 수도 개경의 내원(內院)에 거처하였다.이때 고려 태조로부터 아들인 명주장군(溟州將軍)순식이 귀부하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에 922년(태조 5)에 순식으로 하여금 고려에 귀부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고려는 강원도 지역 깊숙이 세력을 미칠 수 있었고, 군사력 또한 한층 증강되었다

 

 

현준(賢俊) 승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최치원의 친형으로 강릉 사굴산문(山門)의 개산조인 통효(通曉)대사 범일(梵日, 810∼889년)의 법을 잇고 다시 당나라에 가서 청원(靑原) 행사(行思, ?∼740년)의 법현손(法玄孫)인 석상(石霜) 경저(慶諸, 807∼888년)화상의 인가를 받고 돌아와서 해인사에서 수도생활을 하였다. 최치원은 말년에 가야산에 은거하면서 해인사를 종종 찾아와 형 현준과 정현(定玄)과 더불어 시를 주고 받으며 유유자적하게 생을 보냈다.

 

 

낭공(朗空)/행적(行寂)/최경만(崔京萬) 승려(신라)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세속이름은 최경만이고 하남(河南 하동)사람이다. 사미 시절엔 해인사에서 화엄경을 배웠고, 해인사 승려였던 최치원의 친형 현준대사와의 인연으로 최치원을 만나게 되고, 최치원은 낭공에게 가르침을 받게 된다. 870년 당나라 유학을 다녀왔으며 885년에 귀국하였다. 귀국해서는 다시 범일대사의 문하에 들어가 시봉하다가 889년 범일대사가 열반에 들자 산문을 지키기 위해 삭주(朔州) 건자암(建子庵)에 머문다. 그러나 894년 궁예가 강릉을 점령하자 난을 피해 경주로 내려갔다. 이후 강릉 일대가 안정되자 산문을 지키기 위해 900년경에 다시 강릉으로 갔다가 효공왕 10년(906) 9월 초에 효공왕의 초빙으로 다시 경주로 올라와 국사의 예우를 받는다. 김해의 소율희가 선종을 외호한다는 소문을 듣고 907년에 김해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각처에서 찾아온 선지식들과 함께 지부 소율희의 각별한 외호를 받으며 8년을 보내고 신덕왕 4년(915) 봄에 왕의 초빙을 받아 다시 신라 왕경으로 올라와서 왕사가 되어 남산 실제사(實際寺)에 머무른다. 이때 여제자인 명요(明瑤)부인이 석남산사(石南山寺; 경북 영일군 장기면 방산리에 터만 남아 있음)를 기증하여 이곳을 열반처로 삼고 머물다가 신덕왕 5년(916) 2월12일에 이곳에서 85세로 열반한다. 그 다음해(917) 11월 중에 석실에 이장하고 신종(信宗)선사 등 제자 500여 명이 시호를 내리고 탑비를 세워주기를 조정에 청하니, 경명왕은 시호를 낭공(朗空)대사라 하고 탑이름을 백월서운지탑(白月栖雲之塔)이라 추증한다.

 

 

진경(眞鏡)/심희(審希) 승려(김해)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855∼923. 김해 김씨로 김유신(金庾信, 595∼673년)의 먼 후손이었다 한다. 그는 경문왕 3년(863)에 9세로 경기도 여주 혜목산(慧目山)의 원감(圓鑑)선사 현욱(玄昱, 787∼868년)에게 출가하였다. 원감선사는 일찍이 헌덕왕 16년(824)에 당나라로 건너가서 강서(江西) 도일(道一, 709∼788년)의 제자인 장경(章敬) 회휘(懷暉, 754∼829년)의 인가를 받고 희강왕 2년(837) 9월12일에 무주(武州) 회진(會津)으로 돌아와 남악(南岳; 지리산) 실상사(實相寺)에 머물러 살면서 민애왕과 신무왕·문성왕·헌강왕의 귀의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러니 수철화상보다 30년 선배이나 실상사에서는 거의 같은 시기에 함께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수철화상이 19세로 835년경에 실상사의 홍척선사에게 입문하기 때문이다. 원감선사는 실상사에서 10년을 머문 다음 문성왕 8년(846)에 여주 혜목산으로 옮겨 초막을 짓고 살기 시작하여 861년경에 고달사(高達寺)를 짓고 혜목산문(慧目山門)을 개설한다.이 직후에 진경대사 심희가 9세 동자로 출가해 왔던 것이다. 심희는 14세 때 82세로 돌아가는 원감선사로부터 임종시에 인가를 얻고 산문의 책임을 부탁받는다. 그래서 원감선사의 심인(心印)을 전수받은 자부심으로 당나라 유학을 거부하고 전남 강진 송계선원(松溪禪院)에서 주석하는 등 수행을 계속하여 30대에 벌써 명성을 크게 떨친다. 그리고 진성여왕(재위 887∼896년)이 초빙해도 응하지 않는 기개를 보이다가 김해부(金海府) 진례성(進禮城, 경남 창원) 제군사(諸軍事) 김율희(金律熙)가 선종을 보호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그의 외호를 받아 이곳 봉림사에 머물면서 봉림(鳳林)산문을 개설한다. 이때 김해부 진례성 제군사 명의장군(明義將軍) 김인광(金仁匡)도 정성으로 외호했다 하는데 이들은 모두 가야 왕손으로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토착호족이었을 것이다. 봉림산문의 개산조가 된 심희는 다시 경명왕 2년(918) 12월4일에 경명왕의 초청을 받고 신라 왕도로 올라가 왕사가 된 다음 법응대사(法膺大師) 존호를 받고 돌아오는데, 이해 6월14일에 고려 태조 왕건이 등극하였다. 신라 조정은 아마 고려 태조와 관계가 깊은 혜목산문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해두기 위해 이런 포석을 깔았을 것이다.심희는 곧 창원 봉림사로 돌아와 경명왕 7년(923) 4월24일에 70세로 봉림사 봉림선당에서 열반한다.

 

 

여엄(麗嚴)/대경(大鏡) 승려(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S)축성(D)

862∼930. 당시 해동사무외대사(海東四無畏大師)라 하여 가장 존경받던 승려중 한명이다. 해동사무외대사는 운거 문하 1500명 제자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4명의 우리나라 출신 선사를 말하며 선각대사 형미, 진철대사 이엄, 법경대사 경유, 대경대사 여엄을 지칭한다. 태봉국 왕건이 궁예의 명을 받고 나주를 정복하자, 여엄은 나주로 귀국하여 왕건과 인연을 맺는다.고려가 개창되자 왕건은 자주 대경국사에게 국정을 자문하기도 하였다. 923년엔 여엄은 제자 융천(融闡)과 함께 사나사(舍那寺)를 세우기도 하였다.

 

 

경유(慶猷) 승려(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S)축성(D)

871∼921. 당시 해동사무외대사(海東四無畏大師)라 하여 가장 존경받던 승려중 한명이다. 조동종의 선풍을 전한 신라 말 선승. 속성(俗姓)은 장(張). 탑호(塔號)는 보조 혜광(普照慧光). 남양 출생. 15세에 승려가 되어 근도사의 영종율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888년 당나라에 건너가 도응화상(道膺和尙)에게 법요를 배우고, 형미, 여엄, 이엄 등과 함께 해동사무외라는 호칭을 받고, 908년 귀국하였다. 이후 구산선문(九山禪門)중의 하나인 사자산파(獅子山派)를 이끌었다. 왕건이 나주를 정벌할 때 왕건의 요청으로 만나 연결되었고 태조 즉위 후 왕사(王師)가 되었다가 나이 50세, 법랍 36세로 일월사에서 입적하였다.

 

 

이엄대사(利嚴大師) 승려(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S)축성(D)

870∼936. 당시 해동사무외대사(海東四無畏大師)라 하여 가장 존경받던 승려중 한명이다. 선종구산(禪宗九山)가운데 수미산파(須彌山派)의 개조(開祖). 성은 김씨. 이엄은 법명(法明). 소태(蘇泰: 지금의 서산군 태안)출신. 그의 조상은 계림(鷄林)사람으로 낙향하여 충청남도 서산지방인 부성(富城)에 정착하였다.12세에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출가하여 덕량(德良)을 스승으로 득도하고, 삼장(三藏)을 두루 탐구하였으며, 886년(정강왕 1) 도견율사(道堅律師)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896년(진성여왕 10) 입절사(入浙使) 최예희(崔藝熙)를 만나 서해항로로 중국에 갔다. 조동종(曹洞宗)의 개조인 양개(良价)의 제자 도응(道膺)의 선문(禪門)에서 수도한 지 6년 만에 도응의 인가를 받았다.그뒤 중국의 여러 곳을 널리 찾아다니면서 고승들을 만나보고 911년(효공왕 15) 귀국하였다.김해부지군부사(金海府知軍府事) 소율희(蘇律熙) 가 승광산(勝光山)에 당우를 짓고 청하였으므로 4년 동안 그곳에 머무르다가, 영동군 남쪽 영각산(靈覺山)으로 옮겼다. 그때 소문을 들은 승속(僧俗)들이 찾아와서 귀의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명성을 크게 떨치자 고려 태조는 시중(侍中)을 지낸 권설(權說)과 태상(太相) 박수문(朴守文)을 보내어 개경으로 초청하여 사나내원(舍那內院)에 맞아들이고 궁중으로 청하여 사자(師資)의 예로 대우하였다.932년(태조 15) 태조는 해주(海州)의 수미산에 광조사(廣照寺)를 짓고 머무르게 하였다. 그때 이엄의 나이가 63세에 이르렀으나 선풍을 사모해 모여든 구도자(求道者)들의 수가 꾸준히 늘어나며 선풍을 진작시켜 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수미산문의 전통이 확립됐으며 이 전통은 고려 왕정을 비치는 등대로 발전했다.936년에 자신의 세상 인연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견하고 제자들을 불러 부처의 엄계(嚴誡)를 지키며 정진할 것을 당부한 뒤 법당에서 입적하였다.

 

 

형미(泂微)/선각(先覺) 승려(태봉)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S)축성(D)

864~917. 당시 해동사무외대사(海東四無畏大師)라 하여 가장 존경받던 승려중 한명이다. 광주출신으로 속성은 최씨였다. 15세에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에서 출가하여 가지산문의 사실상 개창조인 3대 조사 보조체징(普照體澄 804∼880년)의 제자가 되었다. 28세 되던 해 사신을 따라 당나라로 건너가 운거도응(雲居道膺 ?∼902년)의 법을 받고 905년(효공왕 5)에 귀국하였다. 형미는 운거 문하 1500명 제자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4명의 우리나라 출신 선사, 즉 해동사무외대사(海東四無畏大師)중 첫번째 인물이다. 무위사에서 머물던 형미는 이후 철원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궁예가 왕건을 죽이려 하자 왕건을 두둔하였는데 그것이 궁예의 분노를 사 처형되었다고도 한다. 무위사에 946년에 부도비(보물 507호 선각대사 편광탑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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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문(坦文) 승려(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900~975. 신라 말기 고려 초기 승려. 자(字)는 대오(大悟). 속성은 고(高)씨. 광주(廣州)고봉(高熢)사람. 화엄학에 밝았다. 5세에 출가할 뜻을 두었으며, 원효(元曉)가 살던 향성산(鄕聖山)의 절터에 암자를 짓고 수년간 수도한 후, 북한산 장의사(莊義寺)의 신엄(信嚴)에게 화엄경을 배우고 914년(신덕왕 3년) 15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어린 그의 명성이 사방에 떨쳐 성사미(聖沙彌)라 별호했으며, 나중에 고려 태조는 그를 별화상(別和尙)이라하여 특별한 존경을 표하였고, 왕후가 태자를 잉태하자 태조가 그의 법력을 빌어 광종을 낳으매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구룡사(구룡사)에서 화엄을 강의할 때에는 새가 날아들어 그 방을 둘러싸고, 산토끼들이 뜰에 엎드리는 일이 있었다 하여 별대덕(別大德)으로 불리웠다. 942년 염주(鹽州)와 백주(白州)에 메뚜기가 곡식을 해롭게 하므로 스님이 대반야경을 강의하니 벌레가 없어져 풍년이 들었다 한다. 혜종과 광종이 지극히 공경하고, 광종은 19년(968년) 귀법사(歸法寺) 주지를 맏겼으며, 같은 해에 홍도삼중대사(弘道三重大師)의 호를 내리고 왕사(王師)로 삼았다. 광종 25년(974) 국사(國師)가 되었는데, 노환으로 서산 보원사(普願寺)로 되돌아 갔다가 다음해 3월 19일 76세로 가부좌의 자세로 입적하였다. 시호는 법인(法印)이며, 탑호는 보승(寶乘).

 

찬유(璨幽)/원종(元宗) 승려(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869~958. 법명이 찬유(璨幽)로서 881년에 출가하여 봉림사 진경대사의 제자인 융체(融諦)에게서 배우고자 하였는데, 융체가 "해목산의 심희에게 가서 섬기라"고 하여 심희에게서 공부하다가 890년 삼각산 장의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후 892년 당나라로 들어가 석두 희천(石頭 希遷)의 법손이 되는 대동(大同)에게서 법을 얻고 921년 귀국하여 봉림사의 심희를 찾아 인사한후 고려 태조의 청으로 천왕사 주지로 있었다. 뒤에 해목산 고달사로 옮겨 대선림을 이루었다. 계보로 보아 원종대사는 선문의 9산문 중 봉림산문의 3대조인 셈이다. 958년 광종9년에 입적하자 광종이 원종대사로 시호하고 탑호를 혜진이라고 하였다. 원종대사 혜진탑비元(宗大師慧眞塔碑 보물 제6호)

 

 

긍양(兢讓)/정진(靜眞) 승려(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신라 말에서 고려 초의 중(878~956). 시호는 정진 국사(靜眞國師). 존호는 증공 대사(證空大師). 통일 신라 효공왕 때에 당나라에 가서 도연(道緣)에게 법을 배우고, 24년 만에 귀국하였다. 귀국후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曦陽)산문을 실질적으로 개창하였으며, 고려 광종은 그에게 정도(正道)를 자문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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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행(順行) 황주 육전(D)수전(C)정치(B)모략(C)명성(C)축성(D)

태조 왕건의 제24부인인 소황주원부인(小黃州院夫人)의 아버지로 황주출신이다.

 

 

강연창(康衍昌) 신천 육전(D)수전(B)정치(B)모략(C)명성(C)축성(C)

패강진 신천(信川)호족으로 태봉의 강씨왕후의 부다. 신천강씨 가문은 태봉 멸망후에도 일족인 강기주(康起珠)의 딸이 태조와 혼인해 제 22비인 신주원부인(信州院夫人)이 되었다.

 

 

전우상(全禹相) 정선 육전(C)수전(C)정치(C)모략(D)명성(C)축성(D)정선호족출신으로 정선정씨의 중시조이며, 신라 정선군 전휘선(全諱宣)의 7세손이다. 두 아들로 전이갑, 전의갑 형제가 있다.

 

 

원휴(元休) 북원 육전(D)수전(C)정치(D)모략(D)명성(D)축성(D)원주의 토착호족 원길견의 아들로 원휴의 아들이 고려 문종때 국사 지광국사 해린이다.

 

 

이방회(李芳淮) 벽진군 육전(C)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벽진군 호족 이총언의 손자이며, 이영(李永)의 아들이다. 모는 대광(大匡) 사도귀(思道貴)의 딸이다. 이방회는 고려 조정에 출사하여 추밀원사(樞密院使)을 지냈다.

 

 

최언(崔堰) 경산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C)화순최씨(和順崔氏)의 시조로 경산호족 이능필(李能弼)과 함께  924년 사병 6백명을 이끌고 고려 태조에게 귀부하였다.

 

 

정순궁주(淨順宮州) 경산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고려 태조 왕건의 딸로 본피현 호족 이능필이 924년 귀부해오자 태조는 딸인 정순궁주를 이능필과 혼인시키고 이능필을 성산백에 봉했다.

 

 

광주원군(廣州院君) 고려(왕족) 육전(C)수전(C)정치(B)모략(D)명성(A)축성(C)태조와 광주(廣州)호족 왕규(王規)의 딸인 제16비 소광주원부인(小廣州院夫人)과의 사이에 난 왕자로 혜종때 왕규가 광주원군을 왕위에 세우기 위해 음모를 꾸미다 실패하여 처형되었다.

 

 

백창직(白昌稷) 수원호족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C)수원백씨의 시조로 수원호족으로서 궁예에게 귀부하였다. 아들 백길(白吉)은 태봉의 교위(校尉)를 지냈으며 고려 태조때에는 문하시중까지 역임하였다.

 

 

백사유(白思柔) 수원호족 육전(C)수전(D)정치(A)모략(B)명성(C)축성(C)수원호족 백길(白吉)의 큰 아들이며 고려 광종 24년 왕융(王融)이 지공거(知貢擧)로 되었을 때 진사과(進士科)에 급제하였고, 성종 10년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송(宋)에 사신을 다녀왔다. 성종 10년, 14년 두 번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진사(進士)를 취득했으며 후에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낸,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문인(文人)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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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홍(白思弘) 수원호족 육전(B)수전(B)정치(D)모략(D)명성(B)축성(C)수원호족 백길(白吉)의 둘째 아들이며 고려 광종때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했다.

 

백사청(白思淸) 수원호족 육전(C)수전(C)정치(B)모략(C)명성(C)축성(C)수원호족 백탁(白卓)의 큰 아들이며 광종조에 대복경(大僕卿)을 지냈다.

 

백사렴(白思廉) 수원호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수원호족 백탁(白卓)의 둘째 아들이다.

 

 

연식(蓮式) 신라 육전(D)수전(D)정치(C)모략(B)명성(D)축성(D)신라의 관리였는데 927년 9월 백제가 고울부를 점령하고 경주에 다다르자, 고려에 원군을 청하는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원녕태자(元寧太子) 고려(왕족) 육전(C)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C)태조 왕건의 태자로 모 숙목부인(肅穆夫人)은 진주(鎭州)호족 세력인 임명필(林明弼)의 딸이다.

 

 

최환(崔煥) 계변성 육전(B)수전(C)정치(C)모략(B)명성(C)축성(D)계변성 호족 박윤웅(朴允雄)의 휘하장수로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자 박윤웅의 사자로 고려에 항복을 청하였다.

 

 

김지경(金之敬) 나주 육전(C)수전(B)정치(D)모략(C)명성(C)축성(D)안로김씨(安老金氏) 시조로 조부가 신라 경순왕의 둘째 아들 김굉이다 부는 김우발(金雨發)이다. 신라 패망후 김우발이 고려 조정에 출사한후 나주를 식읍으로 받아 나주에 뿌리를 내렸다.

 

 

구도(具道) 백제 육전(B)수전(B)정치(D)모략(C)명성(C)축성(D)백제의 장수로 나주 탈환전때 아들 단서(端舒)와 함께 출전하였는데 단서(端舒)는 고려군에 사로잡혔다. 단서(端舒)는 후에 공직의 아들 금서(金舒)와 포로교환으로 풀려났다.

 

 

서신일(徐神逸) 이천 육전(C)수전(D)정치(B)모략(C)명성(B)축성(C)이천서씨(利川徐氏)의 시조로 신라말 효공왕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내다가 국운(國運)이 다함을 개탄하여 이천 효양산록(利川孝養山) 기슭에 복성당(卜聖堂)을 짓고 은거(隱居)하면서 스스로 처사(處士)라 하고 후진 양성에 여생(餘生)을 바쳤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서신일(徐神逸)의 조상(祖上)인 서두나(徐豆羅)는 아성(阿城:이천의 옛 이름)에서 대장군(大將軍)을 지내며 살았는데, 그의 후손인 서신일대에 와서 하루는 사슴(鹿) 한 마리가 화살을 맞고 집안에 뛰어 들어왔다. 그는 사슴을 불쌍히 여겨 화살을 빼주고 간호한 다음 다시 산으로 돌려보냈는데, 그날밤 꿈 속에 백발의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감사의 말을 전하기를 "낮에 왔던 사슴은 나의 자식(自息)으로 사냥꾼의 화살을 맞아 죽게 된 것을 다행히 당신의 은덕(恩德)으로 살게 되었으니, 당신의 자손(子孫)이 세세(世世)로 경상(卿相:임금을 도와 모든 관원을 지휘 감독하는 벼슬 자리에 있는 2품 이상의 벼슬 총칭=재상) 을 지내리라"하고 사라졌다. 나이 80이 넘도록 자식이 없던 그에게 그로부터 부인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기 바로 서필(徐弼)이며, 서필(徐弼)의 아들이 고려(高麗)의 명신(名臣) 서희(徐凞)이다.

 

 

연예(連乂) 신라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D)경주출신으로 대간(大干)을 지냈다. 딸 애이주(哀伊主)는 고려 2대 왕 혜종의 비가 되어 태자(太子) 왕제(王齊)와 명혜 부인(明惠夫人)을 낳았다.

 

 

영장(英章)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고려 대광(大匡) 벼슬을 지냈고, 딸이 태조의 제23비인 월화원부인(月華院夫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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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효전(車孝全) 유주호족 육전(C)수전(C)정치(B)모략(D)명성(C)축성(C)연안차씨(延安車氏)의 시조로 부는 고려 왕건을 도와 공신에 책록된 유차달(柳車達)이다. 유차달은 문화유씨(文化柳氏)의 시조이기도 하다. 유차달의 조상은 본시 차씨였는데 809년 김언승이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자 이에 반발하여 낙향한 차승색의 5대손이다.고려태조가 이를 알고 장남 효전(孝全)에게는 상조(上祖)의 본성인 차씨(車氏)의 성을 잇게 하고 식읍을 하사하면서 대광백 연안군에 봉했다.

 

 

유효금(柳孝金) 유주호족 육전(D)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C)문화유씨(文化柳氏)의 시조 유차달의 둘째 아들로 형 효전이 태조의 명에 의해 상조의 본성인 차씨를 이어 연안차씨(延安車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효금에게는 소윤(少尹)의 벼슬을 주고 유주에 살면서 유씨를 계승하게 하였다. 뒤에 유주(儒州)가 문화현(文化縣) 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귀(本貴)를 문화(文化)로 하여 세계(世係)를 이어 왔다.

 

 

이견원 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태조가 통일후 3200여명의 관리, 호족, 휘하장수들에게 공신을 책봉했는데, 이때 3등 공신에 책록된듯 싶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안락 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태조가 통일후 3200여명의 관리, 호족, 휘하장수들에게 공신을 책봉했는데, 이때 3등 공신에 책록된듯 싶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김지 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태조가 통일후 3200여명의 관리, 호족, 휘하장수들에게 공신을 책봉했는데, 이때 3등 공신에 책록된듯 싶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김래 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태조가 통일후 3200여명의 관리, 호족, 휘하장수들에게 공신을 책봉했는데, 이때 3등 공신에 책록된듯 싶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오금길 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태조가 통일후 3200여명의 관리, 호족, 휘하장수들에게 공신을 책봉했는데, 이때 3등 공신에 책록된듯 싶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이부율 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태조가 통일후 3200여명의 관리, 호족, 휘하장수들에게 공신을 책봉했는데, 이때 3등 공신에 책록된듯 싶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윤신복 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태조가 통일후 3200여명의 관리, 호족, 휘하장수들에게 공신을 책봉했는데, 이때 3등 공신에 책록된듯 싶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궁열 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태조가 통일후 3200여명의 관리, 호족, 휘하장수들에게 공신을 책봉했는데, 이때 3등 공신에 책록된듯 싶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장원지 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태조가 통일후 3200여명의 관리, 호족, 휘하장수들에게 공신을 책봉했는데, 이때 3등 공신에 책록된듯 싶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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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헌 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태조가 통일후 3200여명의 관리, 호족, 휘하장수들에게 공신을 책봉했는데, 이때 3등 공신에 책록된듯 싶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이극인 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태조가 통일후 3200여명의 관리, 호족, 휘하장수들에게 공신을 책봉했는데, 이때 3등 공신에 책록된듯 싶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이서 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태조가 통일후 3200여명의 관리, 호족, 휘하장수들에게 공신을 책봉했는데, 이때 3등 공신에 책록된듯 싶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방수홍 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태조가 통일후 3200여명의 관리, 호족, 휘하장수들에게 공신을 책봉했는데, 이때 3등 공신에 책록된듯 싶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유덕용 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태조가 통일후 3200여명의 관리, 호족, 휘하장수들에게 공신을 책봉했는데, 이때 3등 공신에 책록된듯 싶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12월25일 완성된 추가인물

 

 

 

고자견(高自堅) 탐라

후삼국시대 탐라국주이며, 제주고씨(濟州 高氏)의 원시조 고을라(高乙那)의 45대손이고, 중시조 고말노(高末老)의 부(父)다. 후삼국시대에 백제와 고려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친듯 하며, 태조7년 11월에는 고려에 직접 사신을 파견하여 지방의 산물(産物)을 바치기도 하였다. 그후 백제가 멸망하고 고려는 사신을 보내 신라(新羅)때의 봉작을 그대로 주어 신속(臣屬)하기를 바랐으나 탐라(耽羅)는 이를 거부하였다. 938년 고려조정에서는 군사를 파견 탐라를 공격하자 12월에 고자견(高自堅)은 굴복하여 태자 고말노(高末老)를 입조(入朝)시켰다. 태조는 고말로를 성주왕자(星主王子)의 작(爵)을 내렸고, 정제군(定濟君)에 봉(封)하였다.

 

 

고유(高維) 탐라

탐라 성주왕자(星主王子) 고말노의 세아들중 첫째로,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의 문인이라 하며, 정종(靖宗) 때에 과거를 보아 이작정(李作挺)의 방(榜) 제삼인(第三人)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복야에 이르렀다. 고씨(高氏)가 고려 조정에 벼슬한 것이 고유(高維)로부터 시작하였다. 아들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낸 고조기(高兆基)다.

 

 

고강(高綱) 탐라탐라 성주왕자(星主王子) 고말노의 세아들중 둘째로, 문종 때 고려 조정에 출사하고, 병부상서(兵部尙書), 문하시중(門下侍中), 좌복야(左僕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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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高紹) 탐라

탐라 성주왕자(星主王子) 고말노의 세아들중 셋째로,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 ,  우복야(右僕射)에 이르렀다. 고소(高紹)이후 후손들은 주거지를 개성으로 옮겨 살았다.

 

 

김체의(金體誼) 숭선호족

신라 제46대 문성왕(文聖王) 김경응(金慶膺)의 8세손(世孫)으로 선산에 세를 이룬 호족이었다. 어느날 어떤이에 의해 상해를 입었는데, 어린 아들 김선(金宣)이 그자의 목을 베어 스스로 투옥 되었으나, 효자라고 석방되고 표창까지 받게 되었다. 아들 김선이 15세에 스스로 사병을 이끌고 고려군에 투신하여 태조로부터 김선궁(金宣弓)이란 이름을 하사받게 된다. 김선궁은 선산김씨의 시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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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정(金東靖)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의 4세손이며, 부는 김자사(金紫絲)다. 김동정은 860년 신라 조정의 집사성(執事省) 원외랑(員外郞)에 임명되었고, 태산군태수, 한림랑 태학감 대사가 되었다가 대내마 직에 올랐다. 아들은 넷 두었는데 김영진(金英珍), 김영길(金英吉), 김영견(金英堅), 김영환(金英喚)이다. 둘째 김영길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법명은 허월대사이고 김영길의 아들이 김순식이다.

 

 

김영진(金英珍) 명주호족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의 4세손인 대내마 김동정(金東靖)의 장남이다. 아들 김식희(金式希)는 고려초에 삼중대광태사를 임명받았다.

 

 

김식희(金式希) 명주호족

명주군왕의 6세손으로 대내마 김영진(金英珍)의 장자로 신라말 전국이 혼란할때 아버지 명주호족 김영진의 명으로 왕성(王城, 경주)에 파견되었다. 추화산성 호족 대장군 손긍훈과 함께 화랑의 군사훈련장인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세운 대작갑사(大鵲岬寺)에서 병사를 조련하였다. 후에 고려 조정에 귀부하여 개국부의삼사사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태사(開國府儀三事司 三韓 壁上功臣 三重大匡太師)로 봉작을 받았다. 지금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는 김식희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매년 음9월9일 제례를 행하고 있다.

 

 

김춘용(金春用) 명주호족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의 7세손으로 부는 삼중대광태사를 지낸 김식희(金式希)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명주 호장에 임명되었고 풍천 병마사겸 안집감창사(安集監倉使)를 역임하였다. 딸이 강릉최씨 시조 최필달(崔必達)공의 증손 최숭언(崔崇彦)에 출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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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길(金英吉)/허월(許越) 명주호족/승려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의 5세손이고 부는 신라 조정으로부터 대내마를 제수받은 김동정(金東靖)이고 차남이다. 법명을 받고 승려가 되었는데 선종의 기풍을 일으키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태봉국에 초빙되어 내원(內院)에 거처하였는데, 고려 태조가 역성혁명 이후 오래토록 명주가 귀부하지 않자 허월을 통해 아들 김순식을 설득하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허월이 김순식을 설득해 922년 태조5년 고려에 귀부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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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강(金善康)/김순걸(金順傑) 명주호족

명주의 유력한 호족출신으로 강릉김씨의 5대손 김영길(金英吉)의 장남이다. 이천으로 세계를 옮겨 이천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김영길(金英吉)은 세아들을 두었는데, 선강,선희,순식 형제를 두었다.

 

김선희(金善希) 명주호족강릉김씨의 시조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의 5세손인 김영길(金英吉)의 차남이다.

신라조정으로부터 대광벼슬을 제수받았으며 아들은 왕씨성을 하사받은 김예(金乂)다.

영주 부석사에 있는 원융국사비명에는 고려초에 대광대보에 임명되어 명성이 높았다고 적혀있다.

 

김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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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견(金英堅) 명주호족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의 4세손인 대내마 김동정(金東靖)의 삼남이다.

아들로 5형제를 두었는데 김견술(金堅述), 김견궁(金堅躬), 김견종(金堅宗) 김견필(金堅必), 김견웅(金堅雄)이다. 김영견(金英堅)은 한림랑을 거쳐, 헌강왕 10년(884년) 대내마와 태학감조교로 재임중 시중 민공(敏恭)의 부사가 되어 당나라에 들어가 황소(黃巢)의 난을 평정한 공을 치하하고 돌아왔다.

893년에는 궁예(弓裔)가 명주를 침공할것을 조정에 고하였다. 고려태조가 명주를 위무할때 김영견에게 태사를 임명하였으나 신라의 관리임을 내세워 거부하였다.

 

 

김견술(金堅述) 명주호족

명주호족 김영견(金英堅)의 장남으로 태봉국의 알찬(閼粲)으로 있었는데, 태조의 역성혁명 직후 조정개편에서 최문(崔汶)과 함께 창부경(倉部卿)에 임명되었다. 성종13년 994년에 박술희(朴術希)와 함계 혜종묘(惠宗廟)에 배향되고 시호는 극익(克翼)이나 후손이 전하지 않는다.

 

김견궁(金堅躬) 명주호족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의 5세손인 김영견(金英堅)의 차남이다. 명주에 기반을 둔 호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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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견종(金堅宗) 명주호족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의 5세손인 김영견(金英堅)의 삼남이다. 명주에 기반을 둔 호족이었다.

 

김견필(金堅必) 명주호족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의 5세손인 김영견(金英堅)의 사남이다. 명주에 기반을 둔 호족이었다.

 

김견웅(金堅雄) 명주호족

명주호족 김영견(金英堅)의 5남으로 고려초 태학감에서 수학하여 한림랑을 역임하고 태학감상사(太學監上舍)가 되고 고려 태조 19년(936)에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를 거처 예부상서를 거처 호부상서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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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張儒) 백제

흥성장씨(興城張氏)의 시조로 호(號)는 청계(淸溪)이며, 전라도 흥덕(興德 , 현 고창高敞)에서 태어 났다. 흥덕(興德) 지방은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과 고려(高麗)의 왕건(王建)이 다툼을 벌였던 나주(羅州)와도 가까운 지역이어서 항상 전운(戰雲)이 감돌았던 지역이다. 후삼국의 혼란한 정국에서 장유는 오월(吳越)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광종 즉위전에 귀국하였다. 광종은 중국과의 교류를 원해 수많은 유학파들을 등용했는데, 장유도 화어(華語)에 능해 중국사신들을 접대하는 객성(客省)에서 관직을 시작하였고, 벼슬은 광평성(廣評省) 시랑(侍郞)에 이르렀다.

 

 

 

김장(金章) 부성(충남 서산)호족

7세기 신라 왕족인 김인문(金仁問)의 후손으로, 대대로 웅천주(내포)로 유락(流落)해 와서 살다가

김장(金章)대에 이르러 부성(富城 충남 서산)에 터를 잡고 살았다. 경문왕 10년(870년) 소태(蘇泰 태안)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이아이가 12살에 출가하여 승려로 이름을 떨치니 시호는 진철(眞徹)이고 탑호는 보월승공(寶月乘空)이며 법명은 이엄(利嚴)이다.

 

 

권설(權說) 고려

진철대사(眞澈大師) 이엄(利嚴)이 김해 승광산(勝光山)에서 김율희(金律熙)의 비호아래 12년을 머물다 백제의 침공을 맞아 북쪽으로 올라가 황악산(黃岳山)의 토굴에서 수도하니 고려 태조가 학판(鶴版 천자의 초청문)을 보내 초청하여 태흥사(泰興寺)를 수축하여 머물게 하였다. 태조가 이듬해 2월 다시 전(前) 시중(侍中) 권설(權說)과 태상(太相) 박수문(朴守文)을 보내어 다시 사나내원(舍那內院)으로 맞이하여 주지(住持)하기를 청하였으며 예궁(蘂宮)에 처소를 꾸며 모시었다. 권설은 광평성의 시중으로 있다가 물러난듯 싶다.

 

 

상신(常信) 고려

태조 20년(937년) 군윤(軍尹 9품계중 8번째)으로 태조가 진철대사(眞澈大師) 이엄(利嚴)을 기리기 위해 황해 해주 학현동 광조사에 광조사진철대사비(廣照寺眞澈大師碑)를 건립했는데 이 비문의 각자(刻字, 글자를 새김)를 맡았다.

 

 

이척량(李陟良) 고려

태조 20년(937년) 건립된 광조사진철대사비(廣照寺眞澈大師碑)에 황보제공,박유(왕유),정승휴와 함께

진철대사 이엄의 가르침을 받은 재가제자(在家弟子, 승려가 아닌 속세제자)라고 나와 있다. 벼슬은 광평성의 시중을 역임했으며 태상(太相)에 이르렀다. 진각성경(珍閣省卿)인 류척량(柳陟良)과 동인(同人)으로 보는 학자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정승휴(鄭承休) 고려태조 20년(937년) 건립된 광조사진철대사비(廣照寺眞澈大師碑)에 좌승상(左丞相) 황보제공(皇甫悌恭)과 전왕자태상(前王子太相)인 왕유(王儒)와 전시중(前侍中) 태상(太相) 이척량(李陟良)과 함께

진철대사 이엄의 가르침을 받은 재가제자(在家弟子, 승려가 아닌 속세제자)라고 나와 있다. 벼슬은 광평시랑(廣評侍郞)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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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추(李桓樞) 고려

태조 22년 (939년) 대경대사 여엄(大鏡大師 麗嚴)을 기리기 위해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 보리사지에 태조의 명으로 보리사대경대사탑비(菩提寺大鏡大師塔碑)를 건립했는데 당시 이환추(李桓樞)는 비문에 문인(門人) 정조(正朝) 상주국 단금어대(上柱國 丹金魚袋)이라 적었다. 보리사대경대사탑비의 찬자는 최언위(崔彦撝)이며, 서자는 이환추(李桓樞)고, 각자는 대경대사의 제자 최문윤(崔文尹)이다. 이환추는 구양순체(歐陽詢體)의 대가였는데 모질고 굳세기가 구양순보다 더 뛰어났다.

 

 

이환상(李奐相) 고려

고려의 관리로 태조 20년(937년) 태조가 진철대사(眞澈大師) 이엄(利嚴)을 기리기 위해 황해 해주 학현동 광조사에 광조사진철대사비(廣照寺眞澈大師碑)를 건립했는데 이비의 찬자는 최언위(崔彦撝), 각자는 상신(常信)이며 서자는 이환상(李奐相)이다. 당시에 비문은 당시의 문인들이 주로 작업했는데, 이환상 또한 서체가 뛰어났듯 싶다.

 

 

 

유훈율(柳勳律) 고려

유훈율은 전직 신라의 관리,문사로 추정되며, 신라가 고려로 귀부할 당시 고려 조정에 투신한것으로 보인다. 고려 정종 원년 946년 선각대사 형미(逈微 864~917)를 기리기 위해 전남 강진 월출산의 무위사(無爲寺)에 건립된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의 글을 유훈율이 구양순의 해서(楷書)체로 썻다. 당시의 유훈율의 관직은 정조(正朝) 광평시랑(廣評侍郎) 상주국(上柱國)이고 단금어대(丹金魚袋) 하사받았다. 비문을 지은이는 최언위(崔彦撝)이고, 글을 새긴이는 김문윤(金文允), 최환규(崔奐規)다.

 

 

최순작(崔純爵) 전주호족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시조로 정종때 문과에 급제했다고 하나, 정종때 문과시험이 없었음을 감안하면, 전주의 호족으로 조정의 관직을 제수받은듯 싶다. 완주백(完州伯)에 임명되었다.

 

 

최윤(崔潤) 고려

944년 혜종3년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자산문파(獅子山門派)를 연 징효대사(澄曉大師)를 기리기 위해 흥녕사(興寧寺)에 징효대사보인탑비(澄曉大師寶印塔碑)를 건립햇는데, 최윤은 고려의 문신으로 이 비문에 글을 썼다(봉교서병전). 비문의 찬자는 최언위(崔彦撝), 서자는 최윤(崔潤)이고, 각자는 최환규(崔奐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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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효대사(澄曉大師) (826-900) 봉산호족/승려

황해도 봉산 호족 선당(先幢)의 아들로, 어릴적 불문에 입문해 오관산(五冠山), 부석사(浮石寺), 장곡사(長谷寺)에서 수행하다

장담사에서 철감선사(澈監禪師) 도윤(道允 798-868)의 가르침을 받고 도윤의 법맥을 이어받아 강원도 영월 흥녕사(법흥사)에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자산문파(獅子山門派)를 개창해 선종의 법문을 크게 일으켰다. 891년 징효대사는 쌍봉사에 방문해 스승인 철감선사 도윤의 탑비에 예배를 드렸다. 944년 혜종3년에는 징효대사를 기리기 위해 흥녕사(興寧寺)에 징효대사보인탑비(澄曉大師寶印塔碑)가 건립되었다. 내용은 징효대사가 평생 동안 한 일과 신라 효공왕이 징효대사라는 시호(諡號)와 보인(寶印)이라는 탑명을 내린 것을 적고 있다. 법명은 절중(折中)이고 호는 통효(通曉)다.

 

 

손소(孫紹) 청주

청주인으로 추측되며 신라 6두품 지식층 출신이다. 광종 때에는 벼슬이 태상전수(太相守) 예빈령(禮賓令) 원봉령(元鳳令) 지제고(知制誥) 상주국사(上柱國賜) 자금어대(紫金魚袋)에 이르러 최언위 사후 고려 문한을 이끌었다. 950년에는 광자대사(廣慈大師)의 비문인 대안사 광자대사비(大安寺廣慈大師碑)을 찬하기도 하였다. 청주손씨(淸州孫氏)의 중시조인 조선시대 손소(孫昭)로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하다.

 

 

손희(孫熙) 청주

청주인(淸州人)으로 광종때 시랑을 역임했다. 광종13년 962년 청주호족 김예종(金芮宗),김희일(金希一)등이 건립한 용두사(龍頭寺) 철당간기(鐵幢竿記)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에 손씨등이 청주에 집단 세거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손인겸(孫仁謙) 청주

고려 초기 청주지방을 지배하던 호족집단 중의 하나이며 청주 호족의 자제의 교육을 담당하던 인물로 여겨진다. 벼슬은 청주의 독자적인 관부였던 학원경 아래의 학원낭중(學院郎中)이다.  광종13년 962년 청주호족 김예종(金芮宗),김희일(金希一)등이 건립한 용두사(龍頭寺) 철당간기(鐵幢竿記)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에 손씨등이 청주에 집단 세거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철당기에 보이는 학원경 한명식과 함께 학원낭중 손인겸의 존재로 인해, 고려 광종 대에 청주의 지방 호족들이 건립한 학교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 청주의 호족들이 학원이라는 독자적인 관부(官府)와 관계(官階)를 가진 관반(官班)체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손석(孫錫) 청주

청주인(淸州人)으로 광종때 학사원한림학사(學士院翰林學士)를 역임했다. 광종13년 962년 건립된 국보 제41호인 청주 용두사지철당간(龍頭寺址鐵幢竿)의 각자가 손석이다. 찬자와 서자는 김원(金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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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자대사(廣慈大師) 승려

864∼945, 법휘(法諱)는 윤다(允多), 자 법신(法信). 시호 광자대사(廣慈大師).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제3조. 동리산에서 동리산파의 개산조(開山祖) 혜철(惠哲)로부터 선(禪)을 배운 뒤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동리산으로 돌아와 선을 수행, 묘지(妙旨)를 터득하고 현묘한 이치를 통달하였다. 이때부터 선문(禪門)이 크게 융성하였는데, 고려 태조는 사신을 보내 대궐로 초청하였다. 그는 태조에게 국가와 백성의 행복이 무엇인가를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고 아뢰었다. 태조가 흥왕사(興王寺) 황주원(黃州院)에 머무르게 하였으나 동리산으로 되돌아갔다. 그의 법맥(法脈)은 지장(智藏)―혜철―여선사(如禪師)로 이어졌다. 950년 광자대사를 기리기 위해 대안사 (大安寺)에 광자대사비(廣慈大師碑)을 건립했는데, 찬자는 손소(孫紹)이며 서체는 행서체이다.

 

김원(金遠) 청주

고려 광종초에 한림학생(翰林學生)을 역임했으며, 광종13년 962년에 청주호족 김예종(金芮宗),김희일(金希一)등이 건립한 용두사(龍頭寺) 철당간기(鐵幢竿記)의 찬자와 서자를 맡았다. 각자는 손석(孫錫)이다. 용두사는 충청북도 청주시 남문로 2가에 있다.

 

 

보조선사(普照禪師) 공주/승려

체징(體澄, 804-880)신라 후기의 승려로, 중국 구법승, 迦智山門의 개조, 선은 김(金)씨.웅진(충남 공주)사람임. 어려서 출가하여 화산(花山)의 권법사(勸法師)에게 의탁했음.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의 염거(廉巨,廉居)에게서 선을 닦고, 837년(희강왕 2)정육(貞育)·허회(虛會)등과 함께 당나라에 가서 5년동안 여러 곳을 두루 다니며 고승을 찾음. 그러나 그의 조사인 道義가 물려준 법 외에 더 구할것이 없다 하여 840년(문성왕2)평로사(平虜使)를 따라 귀국하고, 이어 헌강왕의 초청으로 경주에 가 있다가, 다시 가지산 보림사를 창건하고 도의의 종풍을 크게 떨침. 860년 10월 왕이 도속사(道俗使)인 영암군 僧正 연훈(蓮訓)등을 보내 가지산 보림사에 주석해 줄 것을 청해 구산선문 중의 하나인 가지산의 한선파(迦智山門)가 이루어지게 된 것인데, 그에게는 8백여 명의 제자가 있었음, 880년(헌강왕 6)4월 23일(비문에는 13일)나이 77세로 입적함. 시호는 보조(普照), 탑호(탑호는 창성(彰聖)임.

 

김언경(金彦卿) 무주

신라 말 김언경(金彦卿)은 신라조정의 병부시랑 입조사(入朝使) 전중대감(殿中大監) 자금어대(紫金魚袋)을 역임했고,

859년엔 장사현(長沙縣) 부수(副守)의 관직에 있었다. 859년 6월 왕명에 의해 무주에 있던 체징대사에게 차와 약을 드리고 경주로 모셔오는 일을 맡았다. 김언경은 이때 체징에게 제자의 예를 갖추고 문하의 빈객이 되었다. 김언경은 녹봉을 덜고 사재를 내어 철 2,500근(斤)을 사서 로사나불 1구를 주조하여 선사가 거처했던 무주(武州) 보림사(寶林寺)를 안치하였다. 망수(望水), 이남택(里南宅) 등도 금(金) 160분(分), 조(租) 2,000곡(斛)을 내놓아 공덕을 꾸미는데 도와 충당하고 가지산사는 선교성(宣敎省)에 속하게 하였다. 이때 건립된 나불이 철조비로자나불(국보 117호)이다. 체징이 입적한 4년후 884년 9월19일에 보조대사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탑비가 보조선사영탑비(普照禪師靈塔碑)이며 비문을 지은 사람은 김영(金穎)이고, 글씨를 쓴 사람은 무주 곤미현령(전남 영암군 미암면) 김원(金薳)과 전 병부시랑 김언경(金彦卿)이며, 글자를 새긴 사람은 승려 석현창(釋賢暢)이다. 비문을 두 사람이 함께 쓴 것이 특징적이며, 김원(金薳)의 필체는 구양순체의 해서, 김언경(金彦卿)의 필체는 왕희지체의 행서이다. 비문의 내용은 가지산문의 조사(祖師) 계승의식, 그것의 개창과 발전, 그리고 신라 하대 선종사상의 흐름과 성격을 이해할 때 매우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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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훈(蓮訓) 영암/승려

전남 영암의 승정(僧正=나라로부터 임명받은 승려직책)으로 860년 10월 왕명을 받은 도속사(道俗使)로 무주에 있던 보조선사(普照禪師)를 방문하여 가지산(迦智山) 보림사에 주석해 줄 것을 청하였다.

 

 

봉신(奉宸) 신라

신라말 조정의 관리로 860년 10월 왕명에 의해 보조선사를 가지산 보림사로 모시기 위해 영암승정 연훈(蓮訓)선사와 동료 관원 풍선(馮瑄)과 함께 무주에 방문했다.

 

 

풍선(馮瑄) 신라

신라말 조정의 관리로 860년 10월 왕명에 의해 보조선사를 가지산 보림사로 모시기 위해 영암승정 연훈(蓮訓)선사와 동료 관원 봉신(奉宸)과 함께 무주에 방문했다.

 

 

영혜(英惠) 전남장흥/승려

보조선사(普照禪師)가 중흥시킨 가지산선문의 제4조(第四祖)로 보조선사의 800명의 제자중 으뜸이었다.

 

 

청부(淸負) 전남장흥/승려

보조선사(普照禪師)의 800명의 제자중 한명으로 보조선사(普照禪師), 영혜(英惠)를 이어 가지산선문의 제5조(第五祖)가 되었다.

 

 

의거(義車) 전남장흥/승려

보조선사(普照禪師)의 800명의 제자중 한명으로 보조선사(普照禪師), 영혜(英惠), 청부(淸負)를 이어 가지산선문의 제6조(第六祖)가 되었다.

 

 

석현창(釋賢暢) 경주/승려

흥륜사의 승려로 체징이 입적한 4년후 884년 9월19일에 보조대사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탑비가 보조선사영탑비(普照禪師靈塔碑)의 글을 새겼다. 보조선사영탑비의 찬자는 김영(金穎)이고 서자는 김원(金薳),김언경(金彦卿)이다.

 

 

김영(金穎) 신라

신라의 문신으로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갔으며 문장이 뛰어났다. 효공왕때 청부시랑을 지냈으며 정조사가 되어 당나라에 가기도 하였다. 동문선(東文選) 권47에 실려 있는 최치원(崔致遠)의 견숙위학생수령등입조장(遣宿衛學生首領等入朝狀)에 김영에 관한 글이 나오는데 당나라에 파견된 하정사(賀正使)의 수장으로 당시 관직은 수창부시랑(守倉部侍郎) 급찬(級飡)이다. 최치원은 당나라 조정에 학생 여덟 사람(최언위(초명 최신지)포함), 대수령 여덟 사람(기탁 등), 소수령 두 사람(소은 등)을 김영에게 딸려보내 당나라 조정에 이들에 대한 의·식·주의 각별한 배려와 국자감(國子監 대학)에 학업을 계속시키도록 각별히 청하였다.

 

 

 

김곡(金鵠) 신라 생몰년 미상. 신라의 당나라 유학생. 김장(金裝)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벼슬길에 올라 해주현(海州縣) 자사(刺史)까지 지낸 뒤 신라로 귀국하였는데 당나라에 있을 때 출생하였다. 신라에서는 숙위학생(宿衛學生)의 이름으로 많은 유학생을 당나라에 파견하였는데, 885년(헌강왕 11) 하정사(賀正使) 수창부시랑(守倉部侍郎) 김영(金穎)을 따라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 이때 함께 간 유학생은 최신지(崔愼之)를 포함하여 여덟 사람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의·식·주의 각별한 배려를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 조정에 요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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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탁(祈卓) 신라

신라의 관리로 885년(헌강왕 11) 하정사(賀正使) 수창부시랑(守倉部侍郎) 김영(金穎)을 수행해 당나라에 파견되었다. 동문선(東文選) 권47에 실려 있는 최치원(崔致遠)의 견숙위학생수령등입조장(遣宿衛學生首領等入朝狀)에 의하면 기탁은 8인이 대령(大領)중 한명이라고 적혀있다. 기탁 또한 당나라 유학생 출신임이 입조장에 적혀있다.

 

 

소은(蘇恩) 신라생몰년 미상. 신라 때 당나라에 파견된 외교사절. 최치원(崔致遠)이 왕의 명령을 받들어 지은 〈견숙위학생수령등입조장 遣宿衛學生首領等入朝狀〉에 의하면, 신라 말기에 수창부시랑(守倉部侍郎) 급찬(級飡) 김영(金穎)이 하정사(賀正使)로 당나라에 갈 때 2인의 수령(首領) 중 한 사람으로 김영을 수행하였는데, 이때 기탁(祈卓) 등 8인이 대령(大領)으로서 역시 하정사를 수행하였으며, 함께 간 유학생은 최신지(崔愼之) 등 8인이었다. 그런데 입조장에 의하면 이때 수령으로 파견된 사람은 당나라에 유학한 경험이 있는 자로서 뽑았다고 하므로 소은은 중국 유학생출신임이 분명하다. 종래 소은이 수령으로서 당나라에 건너간 연대를 최신지의 경력을 역산하여 885년(헌강왕 11)일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입조장의 내용을 여러모로 분석해볼 때 진성여왕 말년, 혹은 효공왕 즉위초인 897년경이 아닐까 짐작되고 있다.

 

 

김원(金薳) 영암현령884년 유림랑(儒林郞), 수무주(守武州) 곤미현령(昆湄縣令 전남 영암 미암면)의 관직에 있었는데 왕명에 의해 884년 9월에 건립된 보조대사영탑비의 글을 썼다. 김원(金薳)의 필체는 구양순체의 해서체이고 같이 글을 쓴 전 병부시랑 김언경(金彦卿)의 필체는 왕희지체이다. 영탑비의 찬자는 김영(金穎)이고, 각자는 승려 석현창(釋賢暢)이다.

 

 

김예종(金芮宗) 청주호족

청주의 호족으로 당시 청주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호족이던 김긍률(金兢律)과 일족인 청주김씨로 추정된다. 광종 13년 962년에 청주에 건립된 용두사지철당간(龍頭寺址鐵幢竿)에 이름이 나온다. 김예종은 청주의 당대등(堂大等, 호장戶長, 호족)으로 청주 지방에서 손꼽히는 호족이었다. 병에 걸린 김예종이 부처와 하늘에 병치유를 기원하여 용담사를 장엄하고 철당간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용두사지철당간(龍頭寺址鐵幢竿)를 건립하기 전에 죽었다. 종형인 호족 김희일(金希一)이 30단의 철통을 주조하게 하고 이어 60척의 당주(幢柱)를 세웠다. 철당간에 새겨진 명문의 찬자는 김원(金遠)이고 각자는 손석(孫錫)이다.

 

 

김희일(金希一) 청주호족

청주의 호족으로 청주의 호족으로 광종 13년 962년에 청주에 건립된 용두사지철당간(龍頭寺址鐵幢竿)에 이름이 나온다.

본시 철당간을 건립할려고 계획했던 이는 김희일의 종제인 김예종(金芮宗)인데 건립전에 죽고, 김희일이 뒤를 이어 30단의 철통을 주조하게 하고 이어 60척의 당주(幢柱)를 세웠다. 철당간에 새겨진 명문의 찬자는 김원(金遠)이고 각자는 손석(孫錫)이다.

 

 

석주(釋紬) 청주호족

충북 청주 남문로의 용두사(龍頭寺)의 승려로, 후삼국,고려초에 용두사의 영(令,주지)인 것으로 광종 13년 962년에 청주에 건립된 용두사지철당간(龍頭寺址鐵幢竿)에 기록되어 있다. 본시 용두사지철당간은 청주호족 김예종(金芮宗)의 병치유를 기원해 건립된 것으로 김예종의 종형 김희일(金希一)이 30단의 철통을 주조하게 하고 60척의 당주를 세워 건립되었다. 철당간에 새겨진 명문의 찬자는 김원(金遠)이고 각자는 손석(孫錫)이다.

 

김수□(金守□) 청주호족

청주의 유력 호족이던 청주김씨의 일족이고 고려초에 정조(正朝) 벼슬을 지냈다. 광종 13년 962년에 청주에 건립된 용두사지철당간(龍頭寺址鐵幢竿) 명문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본시 용두사지철당간은 청주호족 김예종(金芮宗)의 병치유를 기원해 건립된 것으로 김예종의 종형 김희일(金希一)이 30단의 철통을 주조하게 하고 60척의 당주를 세워 건립되었다. 철당간에 새겨진 명문의 찬자는 김원(金遠)이고 각자는 손석(孫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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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희(金釋希) 청주호족

청주 호족인 당대등(堂大等 호장) 김희일(金希一)의 일족으로 용두사지철당간(龍頭寺址鐵幢竿)에 대등(大等 부호장)으로 기록된 것으로 미루워 김희일의 아들이거나 형제일것으로 추측된다. 용두사지철당간은 청주호족 김예종(金芮宗)의 병치유를 기원해 건립된 것으로 김예종의 종형 김희일(金希一)이 30단의 철통을 주조하게 하고 60척의 당주를 세워 건립되었다. 철당간에 새겨진 명문의 찬자는 김원(金遠)이고 각자는 손석(孫錫)이다.

 

 

김관겸(金寬謙) 청주호족

고려초 청주지방의 호족으로 962년에 세워진 「용두사지철당간기(龍頭寺址鐵幢竿記)」에 대등(大等)의 직을 띠고 있다. 대등은 983년(성종 2) 향리직 개편시에 부호장(副戶長)으로 칭호가 바뀌게 되는데, 부호장은 호장 다음의 위상이다. 따라서 청주의 유력 토착세력으로 볼 수 있다. 김씨(金氏)는 당시 당간의 건립을 주도한 김(金), 손(孫), 경(慶), 한(韓) 4성씨 가운데 대표적인 성씨이다.

 

 

신학(信學) 청주/승려

후삼국, 고려초 용두사의 주지승으로, 광종 13년 962년에 청주에 건립된 용두사지철당간(龍頭寺址鐵幢竿)의 감사(監司)를 맡은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같이 감사를 했던 인물은 손희(孫熙), 경주흥(慶柱洪), 한명식(韓明寔), 경기준(慶奇俊), 손인겸(孫仁謙)등이다. 용두사지철당간은 청주호족 김예종(金芮宗)의 병치유를 기원해 건립된 것으로 김예종의 종형 김희일(金希一)이 30단의 철통을 주조하게 하고 60척의 당주를 세워 건립되었다. 철당간에 새겨진 명문의 찬자는 김원(金遠)이고 각자는 손석(孫錫)이다.

 

 

경주흥(慶柱洪) 청주호족

청주의 호족으로 청주경씨의 시조 경진(慶珍)의 조상이다. 광종 13년 962년에 청주에 건립된 용두사지철당간(龍頭寺址鐵幢竿)에 경주흥이 신학(信學), 손희(孫熙), 한명식(韓明寔), 경기준(慶奇俊), 손인겸(孫仁謙)과 함께 당문을 감사(監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철당간에는 경주흥의 직책이 대등(大等 부호장), 전병부경(前兵部卿)으로 되어 있다. 당시 청주지방은 독자적인 관부조직을 갖추고 있었으며 당대등(堂大等)·대등(大等) 휘하에 병부(兵部)·창부(倉部) 등의 관부가 있었다. 청주경씨 시조 경진의 아들이 경대승(慶大升)이다.

 

 

경기준(慶奇俊) 청주호족

청주호족 경주흥(慶柱洪)의 일족으로 짐작되며, 광종 13년 962년에 청주에 건립된 용두사지철당간(龍頭寺址鐵幢竿)에 경기준이 신학(信學), 경주흥(慶柱洪), 한명식(韓明寔), 손희(孫熙), 손인겸(孫仁謙)과 함께 당문을 감사(監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벼슬은 나말(柰末, 나마奈麻), 전사창(前司倉)으로 적혀있다. 나말(柰末)은 신라 17관등중에 11관등이다.

 

 

한난(韓蘭) 청주호족

청주호족으로 본시 조상이 기자(箕子)의 후예로 상당(上黨) 한씨(韓氏)를 습성(襲姓)하였다는 한우량(韓友諒)의 32세손이며 청주 한씨(淸州韓氏)의 시조이다. 청주한씨족보(淸州韓氏族譜)에 의하면 한난은 서기 928년(태조11)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후백제(後百濟)를 공격하기 위해 군을 이끌고 청주를 지나던중 한난의 집앞을 지나갈 때 한난이 나와 맞이하여 집 앞의 우물물을 식수로 공급하고, 장검(長劍)을 들고 함께 출정하여 삼한(三韓) 통합(統合)에 공(功)을 세워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올랐다. 당시 태조가 우물이 네모난것을 보고 방정(方井)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그후로 그 지역은 방정리(方井里)가 되었다. 후손중 유명한 이는 조선 세조 때의 한명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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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식(韓明寔) 청주호족

청주의 호족 한난의 일족으로 짐작되며 고려초 청주의 4대 호족세력인 김씨,손씨,경씨와 함께 청주에 세를 이뤘다. 당문에 청주대등(淸州大等 청주 부호장), 학원경(學院卿)이라고 적혀 있는것으로 보아 청주의 독자적인 관부였던 학원의 수장인듯 싶다. 당시 청주지방은 독자적인 관부조직을 갖추고 있었으며 당대등(堂大等)·대등(大等) 휘하에 병부(兵部)·창부(倉部) 등의 관부가 있었다. 광종 13년 962년에 청주에 건립된 용두사지철당간(龍頭寺址鐵幢竿)에 한명식이 신학(信學), 경주흥(慶柱洪), 손희(孫熙), 경기준(慶奇俊), 손인겸(孫仁謙)과 함께 당문을 감사(監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최광윤(崔光胤) 고려생몰년 미상. 경주최씨로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신라 3최(新羅三崔)로 알려진 평장사 平章事) 최언위(崔彦僞)의 아들이다. 진사과에 합격한 뒤 빈공진사(賓貢進士)로 진(晉)나라에 유학가던 도중 거란의 포로가 되었으나 재주를 인정받아 관직을 받았다. 이 무렵 거란이 고려를 침략할 것을 알고 이를 고려에 보고 하여 정종이 30만의 대군으로 광군(光軍)을 창설, 서경에 주둔시켜 거란의 침략에 대비하게 하였다. 또한 940년에 건립된 흥법사진공대사탑비문을 집자하기도 하였다. 흥법사진공대사탑비는 태조가 직접 찬한 유일한 비문으로써 당태종의 글씨를 집자하여 새기었다.

 

최행귀(崔行歸) 고려경주최씨로 신라3최(최치원,최승우,최언위)중 하나인 최언위의 아들중 둘째이다.오월국에 유학을 떠나 재능을 인정받아 오월국에서 비서랑을 제수받은적이 있으며 후에 귀국하여 광종의 부름을 맞아 조정에 출사하였다.대화엄수좌원통양중대사 균여전(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에 한림학사 겸 내의승지 겸 지제고 직위에 있을때 균여스님이 지은 "보현십원가"라는 향가를 한시로 번역하였으나 얼마뒤 형사(刑死)하였다

 

 

최광원(崔光遠) 고려

경주최씨로 신라3최(최치원,최승우,최언위)중 하나인 최언위의 셋째 아들이다. 고려초에 비서소감(秘書少監)을 역임했으며, 최광윤,최행귀,최광원,최행종 4형제가 모두 문학이 뛰어났다.

 

 

최행종(崔行宗) 고려

경주최씨로 신라3최(최치원,최승우,최언위)중 하나인 최언위의 넷째 아들이다. 고려초에 4형제가 모두 문학에 능하고 관직을 제수받은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광유(崔匡裕) 고려생몰년 미상. 신라 말기의 문인. 본관은 경주(慶州). 885년(헌강왕 11) 왕이 시전중감(試殿中監) 김근(金僅)을 당나라에 경하부사(慶賀副使)로 보낼 때, 김무선(金茂先)·최환(崔渙) 등과 함께 파견되어 숙위학생(宿衛學生)으로 유학하여 당나라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 시(詩)에 능하여 당나라에서 최치원(崔致遠)·최승우(崔承祐)·박인범(朴仁範) 등과 함께 신라 10현(賢)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동문선》에 칠언율시 10수가 실려 있는데, 이것은 거의 당나라에 있을 때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간행된 《십초시 十抄詩》에도 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박인범(朴仁範) 고려

신라 후기의 학자. 효공왕 때 사람으로 당나라 의종 함통(咸通) 연간(860-873)에 당나라에 건너가 876년에 빈공과에 급제한 듯하다. 귀국한 뒤에는 한림학사(翰林學士) 수례부시랑(守禮部侍郞)을 지냈다.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898년(효공왕 2) 승려 도선(道詵)의 비문을 지었으며 《동문선(東文選)》에 그의 시 <경주 용삭사를 노래하여 운서상인에게 부침(涇州龍朔寺閣兼柬雲栖上人)>등 작품 10수가 전한다. 또한 최치원(崔致遠)의 <신라왕여당강서고대부상장 新羅王與唐江西高大夫湘狀〉에는 고상(高湘)이 고시관이 되어 신라의 박인범(朴仁範)과 함께 두 사람을 합격시킨 데 대해 감사하는 내용의 글이 실려 있다.

 

 

최원(崔元) 신라생몰년 미상. 신라 하대의 외교관.《최문창후전집 崔文昌侯全集》에 실린 〈견숙위학생수령등입조장 遣宿衛學生首領等入朝狀〉과 〈사은표 謝恩表〉 등에 의하면 최원은 최치원(崔致遠)과 거의 동시대 사람으로 891년(진성여왕 5)에 당나라 소종(昭宗)의 등극을 축하하는 사행(使行)의 판관(判官)으로 갔다가 6년간 당나라에 머문 뒤 897년(효공왕 1) 7월 5일에 돌아왔다. 당나라에 갔을 때의 관직은 다만 검교사부낭중(檢校祠部郎中)이었으나 돌아올 때는 사자금어대신(賜紫金魚袋臣)이 되어서 왔다. 한편, 돌아올 때에 효공왕의 할아버지 경문왕과 아버지 헌강왕의 증직관고(贈職官告)를 가지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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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崔霙)

신라말 당나라에 유학하던 유학생으로 당나라 관청 경조부(京兆府)에서 매달 돈을 받았고, 계절마다 의복을 받았다. 최치원의 동문선 47권에 실려있는 "숙위(宿衛)학생과 수령(首領)등을 보내어 조정에 들어가게 하는 장계(遣宿衛學生首領等入朝狀)"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최원은 891년 하등극사(賀登極使) 판관검교사부랑중(判官 檢校司部郞中) 최원(崔元)을 따라 입조한것으로 미루어 최원의 일족인듯 싶다.

 

 

홍욱(洪旭) 홍성

홍주(홍성)호족으로 홍주홍씨(洪州洪氏)의 시조 홍규(洪規)의 손자이며, 태조로부터 태사익찬공신을 제수 받은 홍유후(洪儒厚)의 아들이다. 고려초에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관직을 역임했고 안평부원군(安平府院君)에 봉해졌다.

 

 

방의강(房儀康) 수원

남양 방씨(南陽房氏)의 시조인 방계홍(房係弘)의 아들로 방계홍은 삼한통일후 공신에 책봉되었으며 방의강은 고려 조정에 출사해 금자광록대부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며, 아들 방진유(房珍儒)는 추밀원 부사(樞密院府使)를 거쳐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또다른 아들 방정유(房貞儒)는 수원방씨(水原房氏)의 시조다.

 

 

방진유(房珍儒) 수원

남양 방씨(南陽房氏)의 시조인 방계홍(房係弘)의 손자로, 부는 고려초에 평장사를 역임한 방의강(房儀康)이다. 고려 조정에 출사해 추밀원부사(樞密院府使)를 거쳐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방정유(房貞儒) 수원

수원방씨(水原房氏)의 시조로 조부가 남양 방씨(南陽房氏)의 시조인 방계홍(房係弘)이며, 부는 고려초에 평장사를 역임한 방의강(房儀康)이다. 고려 조정에 출사해 벼슬이 대광(大匡)에 이르렀다.

 

 

장선(張善) 인동

인동장씨(仁同張氏)의 시조인 장금용(張金用)의 아들로 장금용이 태조를 도와 공신에 책봉된후 장선 또한 고려 군부에 출사하여 금오위 상장군을 역임했다.

 

 

나은고(羅恩誥) 나주

금성나씨(錦城羅氏)/금천나씨(錦川羅氏)의 시조인 나총례(羅聰禮)의 아들로 삼한통일후에 금산군에 봉해져 일대를 다스렸다.

 

김유차(金有車) 경주

신라 관리이자 동명(東溟)의 관족(冠族) 김수정(金守貞)의 아들이다. 김수정은 난성(蘭省)의 낭(郞)과 백대(栢臺)의 리(吏)를 역임했다. 김유차는 강군(康郡)에서 벼슬을 지내다 혼란한 사회에 염증을 느껴 산중으로 은거하였다. 부인 복보씨(復寶氏)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으니 이가 곧 사굴산문의 선승(禪僧)인 낭원대사(朗圓大師) 개청(開淸)이다.

 

 

유긍(庾兢) 평주

후삼국 최고의 무장인 무송 유씨(茂松庾氏)의 시조 유금필(庾黔弼)의 첫째 아들이다. 유긍이 고려 조정에 출사했는지는 알수 없다.

 

 

유관유(庾官儒) 평주

무송 유씨(茂松庾氏)의 시조 유금필(庾黔弼)의 둘째 아들이다. 태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던 유금필의 명성에 비해 아들들의 조정 출사 및 관직은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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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庾慶) 평주

무송 유씨(茂松庾氏)의 시조 유금필(庾黔弼)의 셋째 아들이다. 태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던 유금필의 명성에 비해 아들들의 조정 출사 및 관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유방(庾方) 평주

무송 유씨(茂松庾氏)의 시조 유금필(庾黔弼)의 셋째 아들인 유경(庾慶)의 아들로 993년(성종 12년) 낭장의 군직에 있었는데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침입하여오자 화친사로 감찰사헌 이몽전(李蒙戩)을 보내었는데 돌아와서 아무런 회답이 없자 드디어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게 되었다. 이때 대도수(大道秀)의 휘하로 출진하여 소손녕과 싸워서 이기니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거란군은 항복하기만을 재촉하였다. 1009년(목종 12년)에는 왕의 병환이 위중하므로 친종장군으로서 중랑장 하공진(河拱辰)·탁사정(卓思政) 등과 함께 근전문(近殿門)을 수직(守直)하였다. 1020년(현종 11)에는 병부상서 겸 상장군(兵部尙書兼上將軍)을 역임했는데 조정에서 예부상서 양진(梁稹)과 형부시랑 한거화(韓去華)를 거란에 보내어 왕자를 연경군(延慶君)으로 책봉한 것을 알리려 하므로 재신으로서 그만두자고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19년 천승현개국남(千乘縣開國男)에 봉하여 졌으며 1022년(현종 13년) 문하시중으로 치사하고 1038년 6월 음유일에 졸하였다.

 

 

최문윤(崔文尹) 송악

태조 22년 (939년) 대경대사 여엄(大鏡大師 麗嚴)을 기리기 위해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 보리사지에 태조의 명으로 보리사대경대사탑비(菩提寺大鏡大師塔碑)를 건립했는데 당시 최문윤(崔文尹)은 각자로서 참여했다. 비문에 의하면 최문윤은 경내인(京內人=송악)으로 대경대사의 제자라고 적혀있다.

 

낭혜(朗慧)화상 무염(無染) 승려

신라말 선문구산(禪門九山)중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로 성은 김씨(金氏)이고 호는 무량(無量) 또는 무주(無住)라고도 한다. 제29대 태종무열왕의 8대손이며,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9세 때 해동신동(海東神童)이라는 아호를 받았다.12세에 출가하여 지금의 강원도 양양군 오읍동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법성(法性)의 제자가 되었다. 당나라에서 소승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온 법성은 무염에게 한문과 중국어를 가르쳐주었으며, 당나라 유학을 권고하였다.당시 당나라에서는 화엄학이 크게 성행하였으므로 무염은 부석사(浮石寺)의 석징(釋澄)을 찾아가서 《화엄경》을 공부한 뒤,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갔다.그러나 도중에 풍랑을 만나 배가 흑산도에 기착하여 당나라로 가지 못하였다.821년(헌덕왕 13) 다시 정조사(正朝使)를 따라 당나라로 가서 성남산(城南山) 지상사(至相寺)의 화엄강석(華嚴講席)에 참여하였다.그러나 당나라에서는 이미 화엄학보다 선종(禪宗)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그도 불광사(佛光寺)의 여만(如滿)을 찾아가서 선법(禪法)을 물었다. 여만은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나보았지만 이와같은 신라의 젊은이는 본 적이 없다. 뒷날 중국이 선풍(禪風)을 잃어버리는 날에는 중국사람들이 신라로 가서 선법을 물어야 할 것이다.”라고 칭찬하였다. 그뒤 무염은 마곡산(麻谷山) 보철(寶徹)을 찾아가서 인가를 받아 법맥(法脈)을 이어받고,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고독한 사람, 병고를 겪고 있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폈다. 20여년 동안 이와같은 보살행(菩薩行)을 실천하자 그의 이름은 중국 전역에 퍼졌고, 사람들은 그를 동방의 대보살이라고 불렀다. 847년(문성왕 7) 귀국하자 왕자 김흔(金昕)이 공주 성주사(聖住寺)에 머무르기를 간청하였다. 그는 이 절을 선문구산의 하나인 성주산문의 본산으로 삼아 40여년 동안 교화하였다.문성왕·헌안왕·경문왕·헌강왕·정강왕·진성여왕 등 여섯 왕이 모두 그를 존경하여 법을 물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도를 구하였다. 그는 한때 찾아오는 사람들을 피하여 상주 심묘사(深妙寺)로 옮겨 숨어 살기도 하였다.또한, 경문왕 때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궁중으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나를 아는 자는 성주(聖住)를 무주(無住)라 하고, 나를 모르는 자는 무염을 유염(有染)이라고 한다.”고 하면서 사양하였다.성격은 공손하고 자애로웠으며 손님을 대할 때 귀천을 가리지 않았고, 언제나 다른 승려들과 함께 보리밥을 먹었다. 절에 큰 불사(佛事)가 있을 때 앞장서서 일을 하였고, 평소에도 물을 긷고 나무를 하였다.89세로 죽었으며, 시호는 대낭혜(大朗慧), 탑호는 백월보광(白月保光)이라 하였다. 탑은 성주산 성주사에 세웠으며, 최치원(崔致遠)이 왕명을 받아 글을 짓고 최인연(崔仁渷)이 쓴 탑비는 현재 국보 제8호로 지정되어 충청남도 보령군 미산면 성주리에 있다.제자는 2천여명에 이르렀으며, 그 중 원장(圓藏)·영원(靈源)·현영(玄影)·승량(僧亮)·여엄(麗嚴)·자인(慈忍) 등이 그의 선풍을 선양하여 성주산문의 기반을 튼튼히 하였다.

 

김흔(金昕) 신라왕족(공주)

신라의 왕자로 임해공 김인문의 후손이다. 왕위 쟁탈전에서 밀려난 이후 은거한것으로 짐작되며 대대로 봉작 받아오던 토지를 처분하여 성주사(聖住寺)를 건립하였다. <수봉지소(受封之所)>. 847년(문성왕 7) 당나라에서 낭헤화상이 귀국하자, 낭혜를 찾아가 공주 성주사(聖住寺)에 머무르기를 간청하였다. 또한 890년(진성여왕 4년)에는 낭혜화상 입적후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성주사(聖住寺) 낭혜화상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寶光塔碑)를 건립했다. 비문에 김흔을 산중재상(山中宰相=산중에 은거하면서 나라에 중대한 일이 있을 때만 나와 일을 보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으로 단월(檀越=시주)했다고 적혀있다.

낭혜화상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寶光塔碑)의 찬자는 최치원이고, 서자는 최인연(崔仁渷)이다.

 

 

석단목(釋端目)/석순백(釋純白) 승려(경주)

후삼국, 고려초의 승려로 낭공대사의 법손(法孫)이다. 낭공대사가 916년 2월 12일 85세로 열반하자 917년 11월에 이장한후 신라 조정에 시호와 탑비건립을 요청하였더니, 경명왕은 시호를 낭공(朗空)대사라 하고 탑이름을 백월서운지탑(白月栖雲之塔)이라 추증한다. 허나 신라의 힘이 약해 탑비 건립을 미루다 37년후 낭공대사에게 깊은 은혜를 입었던 최언위(최인연,최신지)에 의해 954년 광종5년에 태자사에 건립되게 된다. 석단목은 태자사낭공대사비(太子寺郞空大師碑)의 집자를 맡았다. 낭공대사비는 왕명에 의해 지서서원사(知瑞書院事)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최인연(崔仁渷, 최언위)이 찬하였으며, 석단목(釋端目)이 김생(金生 711~ 신라의 명필,신품사현(神品四賢)중 1인)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글을 썻고, 외에 승려 숭태(嵩太), 수규(秀規), 청직(淸直), 혜초(惠超) 등이 각자했다. 남구만(南九萬 )의 약천집(藥泉集)에서 글 자체가 김생을  좇아 혼박광윤한데 다만 치밀함에 있어선 뒤진다고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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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수(金光遂) 영천

고려 광종조에 경북 영천 지역의 관리였다. 954년 광종의 명에 의해 낭공대사(郞空大師) 백월서운지탑(白月栖雲之塔)이 경북 봉화 태자사에 건립된후 영천(榮川)으로 옮겨졌는데, 김광수가 비문을 탁본하여 세상에 돌렸다.

 

 

숭태(嵩太) 승려(경주)

후삼국, 고려초의 석남산사(石南山寺)의 승려이자 낭공대사의 제자로 916년 2월 낭공대사(郞空大師)가 열반에 들자 대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탑비를 건립했는데 승려 숭태는 승려 수규(秀規), 청직(淸直), 혜초(惠超) 등과 함께 글을 새겼다.

찬자는 최인연(崔仁渷, 최언위)이고 서자는 승려 석단목(釋端目)이다.

 

 

수규(秀規) 승려(경주)

후삼국, 고려초의 석남산사(石南山寺)의 승려이자 낭공대사의 제자로 916년 2월 낭공대사(郞空大師)가 열반에 들자 대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탑비를 건립했는데 승려 숭태는 승려 숭태(嵩太), 청직(淸直), 혜초(惠超) 등과 함께 글을 새겼다.

찬자는 최인연(崔仁渷, 최언위)이고 서자는 승려 석단목(釋端目)이다.

 

 

청직(淸直) 승려(경주)

후삼국, 고려초의 석남산사(石南山寺)의 승려이자 낭공대사의 제자로 916년 2월 낭공대사(郞空大師)가 열반에 들자 대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탑비를 건립했는데 승려 숭태는 승려 숭태(嵩太), 수규(秀規), 혜초(惠超) 등과 함께 글을 새겼다.

찬자는 최인연(崔仁渷, 최언위)이고 서자는 승려 석단목(釋端目)이다.

 

 

혜초(惠超) 승려(경주)

후삼국, 고려초의 석남산사(石南山寺)의 승려이자 낭공대사의 제자로 916년 2월 낭공대사(郞空大師)가 열반에 들자 대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탑비를 건립했는데 승려 숭태는 승려 숭태(嵩太), 수규(秀規), 청직(淸直) 등과 함께 글을 새겼다.

찬자는 최인연(崔仁渷, 최언위)이고 서자는 승려 석단목(釋端目)이다. 경덕왕 때의 승려 혜초(慧超/惠超)와는 다른 인물이다.

 

 

명요(明瑤)부인 신라귀족

후삼국 신라말 신라 왕족출신의 최고의 으뜸 귀족부인이었다. 고승 낭공대사(郞空大師)가 915년 4월 신덕왕의 초빙을 받아 신라 경주를 방문하여 남산 실제사(實際寺)에 머물렀는데 때가 되어 다시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이때 명요부인이 석남산사(石南山寺)를 대사에게 기증하고 영원히 머물어 지켜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낭공대사가 말년을 석남산사에서 지내다 열반하였다.

 

 

행겸(行謙) 승려

954년 건립된 태자사낭공대사비(太子寺郞空大師碑)에 따르면 낭공대사가 입적할 당시 입실제자가 네명 있었는데, 행겸(行謙), 수안(邃安), 신종(信宗), 양규(讓規)다.

 

 

수안(邃安) 승려

954년 건립된 태자사낭공대사비(太子寺郞空大師碑)에 따르면 낭공대사가 입적할 당시 입실제자가 네명 있었는데, 행겸(行謙), 수안(邃安), 신종(信宗), 양규(讓規)다.

 

 

신종(信宗) 승려

954년 건립된 태자사낭공대사비(太子寺郞空大師碑)에 따르면 낭공대사가 입적할 당시 입실제자가 네명 있었는데, 행겸(行謙), 수안(邃安), 신종(信宗), 양규(讓規)다. 특히 신종은 낭공대사 입적 당시 신라 조정에 낭공대사비를 건립해줄것을 강력히 요청하기도 하였다.

 

 

양규(讓規) 승려

954년 건립된 태자사낭공대사비(太子寺郞空大師碑)에 따르면 낭공대사가 입적할 당시 입실제자가 네명 있었는데, 행겸(行謙), 수안(邃安), 신종(信宗), 양규(讓規)다.

 

 

주해(周解)선사 승려

낭공대사의 500여명의 제자중 상족(上足; 제자를 스승의 발에 비유하여 제자 중 뛰어난 이를 일컫는 말) 승려로, 916년 낭공대사가 입적하자 신종(信宗)선사, 임엄(林儼)선사 등 500여명의 제자가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에서 낭공대사의 시신을 지켰다. 또한 신라 조정에 공적비를 건립해줄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이에 경명왕은 시호를 낭공대사라 하였으며 탑을 백월서운지탑(白月栖雲之塔)이라 하였다. 탑비는 후삼국의 혼란한 상황 때문에 건립되지 못하다 954년 광종초에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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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엄(林儼)선사 승려

낭공대사의 500여명의 제자중 상족(上足; 제자를 스승의 발에 비유하여 제자 중 뛰어난 이를 일컫는 말) 승려로, 916년 낭공대사가 입적하자 신종(信宗)선사, 주해(周解)선사 등 500여명의 제자가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에서 낭공대사의 시신을 지켰다. 또한 신라 조정에 공적비를 건립해줄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이에 경명왕은 시호를 낭공대사라 하였으며 탑을 백월서운지탑(白月栖雲之塔)이라 하였다. 탑비는 후삼국의 혼란한 상황 때문에 건립되지 못하다 954년 광종초에 건립되었다.

 

 

식조(式照) 승려

916년 입적한 낭공대사의 법통을 계승한 석순백(釋純白)이 954년 건립된 백월서운지탑(白月栖雲之塔) 비문에 낭공대사의 선법을 계승한 양경(讓景)등 9명의 제자를 적었다. 이 아홉제자는 낭공대사의 입적후 유업을 계승한 진정한 제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 9제자의 이름은 식조(式照), 양경(讓景), 혜희(惠希), 윤정(允正), 선관(善觀), 현보(玄甫), 형한(逈閑), 가언(可言), 본정(本定)이다. 식조는 용담사(龍潭寺)의 승려라고 추정된다.

 

 

양경(讓景) 승려

916년 입적한 낭공대사의 법통을 계승한 석순백(釋純白)이 954년 건립된 백월서운지탑(白月栖雲之塔) 비문에 낭공대사의 선법을 계승한 양경(讓景)등 9명의 제자를 적었다. 이 아홉제자는 낭공대사의 입적후 유업을 계승한 진정한 제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 9제자의 이름은 식조(式照), 양경(讓景), 혜희(惠希), 윤정(允正), 선관(善觀), 현보(玄甫), 형한(逈閑), 가언(可言), 본정(本定)이다. 양경(讓景)은 국주사(國主寺)의 승두(僧頭)이며 ,건성원(乾聖院)의 주지승이다.

 

 

혜희(惠希) 승려

916년 입적한 낭공대사의 법통을 계승한 석순백(釋純白)이 954년 건립된 백월서운지탑(白月栖雲之塔) 비문에 낭공대사의 선법을 계승한 양경(讓景)등 9명의 제자를 적었다. 이 아홉제자는 낭공대사의 입적후 유업을 계승한 진정한 제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 9제자의 이름은 식조(式照), 양경(讓景), 혜희(惠希), 윤정(允正), 선관(善觀), 현보(玄甫), 형한(逈閑), 가언(可言), 본정(本定)이다. 혜희(惠希)는 연곡사(鷰谷寺)의 승려다.

 

 

윤정(允正) 승려

916년 입적한 낭공대사의 법통을 계승한 석순백(釋純白)이 954년 건립된 백월서운지탑(白月栖雲之塔) 비문에 낭공대사의 선법을 계승한 양경(讓景)등 9명의 제자를 적었다. 이 아홉제자는 낭공대사의 입적후 유업을 계승한 진정한 제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 9제자의 이름은 식조(式照), 양경(讓景), 혜희(惠希), 윤정(允正), 선관(善觀), 현보(玄甫), 형한(逈閑), 가언(可言), 본정(本定)이다. 윤정(允正)은 혜금사(惠襟寺)의 승려다.

 

 

선관(善觀) 승려

916년 입적한 낭공대사의 법통을 계승한 석순백(釋純白)이 954년 건립된 백월서운지탑(白月栖雲之塔) 비문에 낭공대사의 선법을 계승한 양경(讓景)등 9명의 제자를 적었다. 이 아홉제자는 낭공대사의 입적후 유업을 계승한 진정한 제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 9제자의 이름은 식조(式照), 양경(讓景), 혜희(惠希), 윤정(允正), 선관(善觀), 현보(玄甫), 형한(逈閑), 가언(可言), 본정(本定)이다. 선관(善觀)은 청룡사(淸龍寺)의 승려다.

 

 

현보(玄甫) 승려

916년 입적한 낭공대사의 법통을 계승한 석순백(釋純白)이 954년 건립된 백월서운지탑(白月栖雲之塔) 비문에 낭공대사의 선법을 계승한 양경(讓景)등 9명의 제자를 적었다. 이 아홉제자는 낭공대사의 입적후 유업을 계승한 진정한 제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 9제자의 이름은 식조(式照), 양경(讓景), 혜희(惠希), 윤정(允正), 선관(善觀), 현보(玄甫), 형한(逈閑), 가언(可言), 본정(本定)이다. 현보(玄甫)는 영장사(靈長寺)의 승려다.

 

 

형한(逈閑) 승려

916년 입적한 낭공대사의 법통을 계승한 석순백(釋純白)이 954년 건립된 백월서운지탑(白月栖雲之塔) 비문에 낭공대사의 선법을 계승한 양경(讓景)등 9명의 제자를 적었다. 이 아홉제자는 낭공대사의 입적후 유업을 계승한 진정한 제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 9제자의 이름은 식조(式照), 양경(讓景), 혜희(惠希), 윤정(允正), 선관(善觀), 현보(玄甫), 형한(逈閑), 가언(可言), 본정(本定)이다. 형한(逈閑)은 석남사(石南寺)의 승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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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언(可言) 승려

916년 입적한 낭공대사의 법통을 계승한 석순백(釋純白)이 954년 건립된 백월서운지탑(白月栖雲之塔) 비문에 낭공대사의 선법을 계승한 양경(讓景)등 9명의 제자를 적었다. 이 아홉제자는 낭공대사의 입적후 유업을 계승한 진정한 제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 9제자의 이름은 식조(式照), 양경(讓景), 혜희(惠希), 윤정(允正), 선관(善觀), 현보(玄甫), 형한(逈閑), 가언(可言), 본정(本定)이다. 가언(可言)은 숭산사(嵩山寺)의 승려다.

 

 

본정(本定)

916년 입적한 낭공대사의 법통을 계승한 석순백(釋純白)이 954년 건립된 백월서운지탑(白月栖雲之塔) 비문에 낭공대사의 선법을 계승한 양경(讓景)등 9명의 제자를 적었다. 이 아홉제자는 낭공대사의 입적후 유업을 계승한 진정한 제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 9제자의 이름은 식조(式照), 양경(讓景), 혜희(惠希), 윤정(允正), 선관(善觀), 현보(玄甫), 형한(逈閑), 가언(可言), 본정(本定)이다. 본정(本定)은 태자사(太子寺)의 승려다.

 

 

최승로(崔承老) 경주

고려 초기의 문신·학자(927~989).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을 지냈다. 왕명(王命)을 받고 시무책(時務策) 28조를 올려 고려 왕조의 기초를 다지는 데 기여하였다. 12목 설치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강화시켰으며, 후에 청하후(淸河侯)에 봉해졌다.  동문선에 한시(漢詩) 2수가 전한다.

 

 

최은함(崔殷含) 경주

경주출신으로 6두품 계열로 신라 조정에 출사해 벼슬이 원보(元甫)에 이르렀다.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할때 따라와 고려의 관리가 되었다.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 최승로(崔承老)는 938년 원봉성학사(元鳳省學士)에 속하게 되어 고려 관리가 되었다.

 

 

진경대사(眞鏡大師))/심희(審希) 승려(김해)

855∼923년, 신라 장군 김유신의 후손으로 임나 왕족 출신이다. 심희는 9세때 혜목산의 원감에게서 도를 배우고 17살인 871년에 구족계(九足戒)를 받았다 진성여왕이 심희를 초빙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명주 등 각지를 유력,뒤에 진례성제군사 소율희에게 영접받고 현재의 창원군 상남(上南)면 봉림리에 봉림사(鳳林寺)를 짓고 봉림산문을 개설하였다. 918년에는 경명왕으로부터 법응대사의 호를 받았다.

 

 

장단열(張端說) 고려

고려초에 한림원 서학박사(書學博士), 군부경(軍部卿)을 역임했다. 서예에 일가견이 있어 구양순(歐陽詢)체의 그의 서체는 당대(當代)의 명필가로 손꼽혔다. 947년(정종 2년) 문경(聞慶) 희양산(羲陽山)에 있는 봉암사(鳳岩寺) 정진대사(靜眞大師) 원오탑비(圓悟塔碑)의 비문을 썼으며, 965년(광종16년)에는 문경 봉암사(鳳巖寺)의 정진대사원오탑비(靜眞大師圓悟塔碑)를 쓰기도 하였다.

 

 

덕량(德良)법사 승려(예산)

후삼국 시대 충남 예산군(禮山郡) 덕산면(德山面) 가야갑사(伽倻岬寺)의 고승이다. 천재 승려라 일컬어지는 진철대사 이엄의 스승으로, 881년 이엄이 12살때 반년간 가르치면서 말하길 "너는 유가(儒家)의 안회(顔回)요 석문(釋門)의 아난(阿難)과 견줄만하다"고 극찬하였다.

 

 

도견(道堅)율사 승려(예산)

후삼국 시대 충남 예산군(禮山郡) 덕산면(德山面) 가야갑사(伽倻岬寺)의 승려로 수미산파(須彌山派)의 개조(開祖)인 진철대사 이엄에게 886년 구족계(具足戒)를 내렸다.

 

심광(深光) 승려(성주사)

성주사(경남 창원시 천선동) 낭혜(朗慧)화상의 제자로 성주사 사찰을 주재하는 4인중 1인이라 기록되어 있다. 876년(헌강왕 2년)에는 영각사(靈覺寺)를 창건하기도 하였으며, 법경대사의 스승이기도 하다.

 

 

원장(圓藏) 승려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성주산문(聖主山門)의 개조인 무염(無染)국사의 제자로, 순차(詢叉), 영원(靈源), 현영(玄影), 승량(僧亮), 여엄(麗嚴), 자인(慈忍) 등과 함께 성주산문을 크게 일으켰다. 무염국사의 제자는 2천여명에 이른다고 전해진다.

함안 영각사(靈覺寺), 광주(光州) 정토사, 월광사(月光寺), 양평 보리사가 성주산파의 큰 절이었다.

 

 

순차(詢叉)/순예(詢刈)  승려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성주산문(聖主山門)의 개조인 무염(無染)국사의 제자로, 원장(圓藏), 영원(靈源), 현영(玄影), 승량(僧亮), 여엄(麗嚴), 자인(慈忍) 등과 함께 성주산문을 크게 일으켰다. 무염국사의 제자는 2천여명에 이른다고 전해진다.

함안 영각사(靈覺寺), 광주(光州) 정토사, 월광사(月光寺), 양평 보리사가 성주산파의 큰 절이었다.

또한 성주사(聖住寺) 낭혜화상(郞慧和尙) 백월보광탑비(白月葆光塔碑)에 낭혜화상의 제자로 사찰을 주재하는 4인중 1인이라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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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靈源) 승려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성주산문(聖主山門)의 개조인 무염(無染)국사의 제자로, 원장(圓藏), 순차(詢叉), 현영(玄影), 승량(僧亮), 여엄(麗嚴), 자인(慈忍) 등과 함께 성주산문을 크게 일으켰다. 무염국사의 제자는 2천여명에 이른다고 전해진다.

함안 영각사(靈覺寺), 광주(光州) 정토사, 월광사(月光寺), 양평 보리사가 성주산파의 큰 절이었다.

 

 

현영(玄影) 승려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성주산문(聖主山門)의 개조인 무염(無染)국사의 제자로, 원장(圓藏), 순차(詢叉), 영원(靈源), 승량(僧亮), 여엄(麗嚴), 자인(慈忍) 등과 함께 성주산문을 크게 일으켰다. 무염국사의 제자는 2천여명에 이른다고 전해진다.

함안 영각사(靈覺寺), 광주(光州) 정토사, 월광사(月光寺), 양평 보리사가 성주산파의 큰 절이었다.

 

 

승량(僧亮) 승려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성주산문(聖主山門)의 개조인 무염(無染)국사의 제자로, 원장(圓藏), 순차(詢叉), 영원(靈源), 현영(玄影), 여엄(麗嚴), 자인(慈忍) 등과 함께 성주산문을 크게 일으켰다. 무염국사의 제자는 2천여명에 이른다고 전해진다.

함안 영각사(靈覺寺), 광주(光州) 정토사, 월광사(月光寺), 양평 보리사가 성주산파의 큰 절이었다.

또한 성주사(聖住寺) 낭혜화상(郞慧和尙) 백월보광탑비(白月葆光塔碑)에 낭혜화상의 제자로 사찰을 주재하는 4인중 1인이라 기록되어 있다.

 

 

자인(慈忍) 승려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성주산문(聖主山門)의 개조인 무염(無染)국사의 제자로, 원장(圓藏), 순차(詢叉), 영원(靈源), 현영(玄影), 여엄(麗嚴), 승량(僧亮) 등과 함께 성주산문을 크게 일으켰다. 무염국사의 제자는 2천여명에 이른다고 전해진다.

함안 영각사(靈覺寺), 광주(光州) 정토사, 월광사(月光寺), 양평 보리사가 성주산파의 큰 절이었다.

 

 

보신(普愼) 승려(성주사)

성주사(聖住寺) 낭혜화상(郞慧和尙) 백월보광탑비(白月葆光塔碑)에 낭혜화상의 제자로 사찰을 주재하는 4인중 1인이라 기록되어 있다.

 

 

융천(融闡) 승려(사나사)

후삼국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의 제자로 923년 스승인 여엄대사와 함께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에 오층석탑과 노사나부처님을 모시고 사나사(舍那寺)를 창건했다. 930년 스승 여엄대사가 입적하였으며,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939년 보리사대경대사탑비(菩提寺大鏡大師塔碑)가 건립되었는데 여기에 흔정(昕政)과 더불어 학업을 전수받은 제자라 나온다.

 

흔정(昕政) 승려(보리사)

후삼국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의 제자다. 930년 스승 여엄대사가 입적하였을 당시 보리사(菩提寺)의 지주승이었다. 여엄대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939년 보리사대경대사탑비(菩提寺大鏡大師塔碑)가 건립되었는데 여기에 융천(融闡)과 더불어 학업을 전수받은 제자라 나온다.

 

 

연육(連育) 승려(보리사)

후삼국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의 제자이고, 939년 건립된 보리사(菩提寺) 대경대사탑비(大鏡大師塔碑)가 건립되었을 당시 보리사 제일좌승좌승(第一坐僧)으로 흔정(昕政) 다음 서열로 기록되어 있다.

 

 

윤연(尹然) 승려(보리사)

후삼국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의 도제자(道弟子)로, 보리사의 승려다. 여엄대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939년 건립된 보리사(菩提寺) 대경대사탑비(大鏡大師塔碑)에 윤행((潤行)과 더불어 대덕(大德=법계의 3급직책)이라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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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행((潤行) 승려(보리사)

후삼국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의 도제자(道弟子)로, 보리사의 승려다. 여엄대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939년 건립된 보리사(菩提寺) 대경대사탑비(大鏡大師塔碑)에 윤연(尹然)과 더불어 대덕(大德=법계의 3급직책)이라 기록되어 있다.

 

 

행륜(幸倫) 승려(보리사)

후삼국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의 제자로, 여엄대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939년 건립된 보리사(菩提寺) 대경대사탑비(大鏡大師塔碑)에 도고당사승(都考當事僧) 관적(寬寂)이라 기록되어 있다.

 

 

총혜(聰惠) 경북영주

후삼국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의 제자로, 여엄대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939년 건립된 보리사(菩提寺) 대경대사탑비(大鏡大師塔碑)에 문하제자(門下弟子)로써 장초(莊超), 정잠(定岑)과 함께 각자(刻者)를 맡았다고 적혀있다.

 

 

장초(莊超) 경북영주

후삼국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의 제자로, 여엄대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939년 건립된 보리사(菩提寺) 대경대사탑비(大鏡大師塔碑)에 문하제자(門下弟子)로써 총혜(聰惠), 정잠(定岑)과 함께 각자(刻者)를 맡았다고 적혀있다.

 

 

정잠(定岑) 경북영주

후삼국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의 제자로, 여엄대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939년 건립된 보리사(菩提寺) 대경대사탑비(大鏡大師塔碑)에 문하제자(門下弟子)로써 총혜(聰惠), 장초(莊超)와 함께 각자(刻者)를 맡았다고 적혀있다.

 

 

총민聰敏 경북영주후삼국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의 제자로, 여엄대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939년 건립된 보리사(菩提寺) 대경대사탑비(大鏡大師塔碑)에 문하제자(門下弟子)로써 철장영(鐵匠令=철근공사 총책임자) 총민(聰敏)이라 기록되어 있다.

 

인혜(仁慧) 승려

후삼국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939년 건립된 보리사(菩提寺) 대경대사탑비(大鏡大師塔碑)에 계침(契琛)과 함께 지객승(持客僧)이라 나온다. 아마 보리사에 머물고 있던 다른 절의 승려인듯 싶다.

 

 

계침(契琛) 승려

후삼국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939년 건립된 보리사(菩提寺) 대경대사탑비(大鏡大師塔碑)에 인혜(仁慧)와 함께 지객승(持客僧)이라 나온다. 아마 보리사에 머물고 있던 다른 절의 승려인듯 싶다.

 

 

의전(義全) 승려(보리사)

후삼국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939년 건립된 보리사(菩提寺) 대경대사탑비(大鏡大師塔碑)에 승려직책중 삼강전(三剛典) 원주승(院主僧)이라 적혀있다.

 

 

장초(莊超) 승려(보리사)

후삼국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939년 건립된 보리사(菩提寺) 대경대사탑비(大鏡大師塔碑)에 승려직책중 삼강전(三剛典) 유나승(唯那僧)이라 적혀있다.

 

 

혜초(專昭) 승려(보리사)

후삼국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939년 건립된 보리사(菩提寺) 대경대사탑비(大鏡大師塔碑)에 승려직책중 삼강전(三剛典) 전좌승(典坐僧)이라 적혀있다.

 

 

전초(專超) 승려(보리사)후삼국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939년 건립된 보리사(菩提寺) 대경대사탑비(大鏡大師塔碑)에 승려직책중 삼강전(三剛典) 직장승(直藏僧)이라 적혀있다.

 

 

이인(里仁) 고려고려의 관리로 후삼국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939년 건립된 보리사(菩提寺) 대경대사탑비(大鏡大師塔碑)에 재가불자(在家弟子)로 원윤(元尹)의 관직이 기록되어 있다.

 

 

여일(与一) 고려고려의 관리로 후삼국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939년 건립된 보리사(菩提寺) 대경대사탑비(大鏡大師塔碑)에 재가불자(在家弟子)로 정조(正祖)의 관직이 기록되어 있다.

 

 

인봉(仁封) 고려

고려의 관리로 후삼국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939년 건립된 보리사(菩提寺) 대경대사탑비(大鏡大師塔碑)에 재가불자(在家弟子)로 정조(正祖)의 관직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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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藝言) 고려

고려의 관리로 후삼국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939년 건립된 보리사(菩提寺) 대경대사탑비(大鏡大師塔碑)에 재가불자(在家弟子)로 정위(正衛)의 관직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956년 경산부(京山府)의 속현이었던 약목(若木)에 토전 개량(改量)을 총괄하는 양전사(量田使)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선예(宣乂) 영주

보리사(경북 영주 소재) 인근의 촌주(村主)로 후삼국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939년 건립된 보리사(菩提寺) 대경대사탑비(大鏡大師塔碑)에 재가불자(在家弟子) 촌주(村主) 선예(宣乂)라 기록되어 있다.

 

 

의겸(義謙) 영주

보리사(경북 영주 소재) 인근의 지방 관리인듯 싶다. 후삼국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939년 건립된 보리사(菩提寺) 대경대사탑비(大鏡大師塔碑)에 재가불자(在家弟子)로 집사(執事) 의겸(義謙)이라 기록되어 있다.

 

 

두휴(頭休) 승려후삼국, 고려초의 승려로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939년 건립된 보리사(菩提寺) 대경대사탑비(大鏡大師塔碑)에 재가불자(在家弟子)로 행자(行者 불도를 닦는 사람) 두휴(頭休)라 기록되어 있다.

 

 

향연(香淵) 여성(충주)

후삼국, 고려초 충북충주의 귀족여성이다.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939년 건립된 보리사(菩提寺) 대경대사탑비(大鏡大師塔碑)에 재가불자(在家弟子)로 철장(鐵匠) 중원부인(仲源府人 충북충주) 향연(香淵)라 기록되어 있는것으로 보아 탑비를 건립하는데 재물을 시주한 인물로 추정된다.

 

 

최환규(崔奐規) 고려

후삼국,고려초에 많은 비문에 글을 새기는 작업을 하였다. 아마 전문 장인인듯 싶다. 그가 각자한 비문으로는 939년 비로암 진공대사 보법 탑비(毘田慮庵眞空大師 普法塔碑), 역시 939년 건립된 보리사(菩提寺) 대경대사탑비(大鏡大師塔碑), 944년 흥녕사(興寧寺)에 징효대사보인탑비(澄曉大師寶印塔碑), 946년 선각대사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등이 있다.

특히 보리사(菩提寺) 대경대사탑비(大鏡大師塔碑)에는 대경대사의 속제자(俗弟子)라 적혀있다.

 

최서원(崔棲遠) 신라

신라3최중 한명인 최치원의 사촌동생으로 최치원이 당나라 관직에 있던 884년 최서원은 신라국 입회사 녹사(新羅國 入淮使 錄事=신라국에서 회남에 들어가는 사신)라는 임시 관직으로 최치원의 귀국을 종용하는 집안의 편지(최치원 부친 최견일崔肩逸의 병환)를 가지고 당나라로 향하다 풍랑을 만나 재물을 모두 잃어버렸다. 신라조정, 부친의 부름과 때맞침 황소의 난이 진압되자 최치원은 귀국을 결심하고 당조정에 사직서를 제출한다. 이에 당나라 직속상관인 고병(高騈)이 최치원에겐 8월 녹봉과 최서원에겐 30관의 사례금을 내려줬다. 이에 최치원은 <아우 서원에게 돈 주신 것을 사례하는 장문(謝賜弟棲遠錢狀)>이란 편지를 보내게 된다. 이런 내용은 계원필경(桂苑筆耕)에 나와있다. 최서원(崔棲遠)이 최승우(崔承祐)란 설도 있다.

 

 

김인규(金仁圭) 신라생몰년 미상. 신라 시대의 문신. 출신이나 경력은 잘 알 수 없으나, 884년(헌강왕 10) 당시의 관작은 검교원외랑수한림랑사비은어대(檢校員外郞守翰林郞賜緋銀魚袋)였다. 이해 헌강왕 명령을 받아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의 막하에서 도통순관(都統巡官)으로 활약 하고 있던 최치원(崔致遠)을 귀국시키기 위하여 이른바 입회남사(入淮南使)로서 당나라에 파견되었다. 당시 사절단에는 최치원의 동생인 최서원(棲遠)이 녹사(錄事)로서 동행하였는데, 그들은 중국 양주(揚州)에 도착하였다. 최치원의 문집인 《계원필경집》을 보면 이때 김인규·최치원일행의 귀국길을 짐작할 수 있다. 즉, 그들은 양주에서 회남운하를 따라 초주(楚州) 산양현(山陽縣)으로 향하였고, 그런 다음 초주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와서 산둥반도(山東半島) 끝 등주(登州) 등모(登牟)에 이르렀다. 그들은 이곳에 있는 참산(讒山)에 올라 산신에 제사한 뒤 황해를 건너 귀국하였다.

 

최견일(崔肩逸) 신라

경주최씨의 시조이자 신라3최중 한명인 최치원(崔致遠)의 부로, 신라 6두품 출신이다. 최치원이 12살때 당나라에 유학을 보내며

10년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부자의 연을 끊겠다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16년후인 884년에는 병환이 깊어 최치원의 귀국을 종용하는 편지를 조카 최서원을 통해 보내기도 하였다. 최견일은 경주 초월산(初月山) 숭복사(崇福寺) 창건에도 공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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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처회(金處會) 신라

신라의 병부시랑(兵部侍郞)을 지내다 893년 진성여왕7년 당나라에 조공하러 가는 납정절사(納旌節使)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풍랑을 만나 김처회는 바다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에 신라 조정은 추성군(城郡) 태수 김준(金峻)을 고주사(告奏使)로 삼아 보냈다. 이때 최치원이 부성군(富城郡) 태수로 있다가 하정사(賀正使)로 김준을 보좌하여 당나라에 갈 예정이었으나 혼란한 사회 때문에 가질 못하였다.

 

 

김준(金峻) 신라관리(보령군)

신라말 추성군(보령군 保寧郡) 태수(太守)직에 있었는데, 893년 진성여왕 7년 병부시랑 김처회가 도당하다 바다에 빠져 죽자, 김준이 고주사(告奏使)로 임명되고 부성군(富城郡 서산군 瑞山郡) 태수 최치원이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당나라에 파견이 예정되었으나 흉년이 들고 전국에 도적이 들끓어 가지 못하였다.

 

 

승훈(僧訓) 승려(해인사)

신라말 해인사의 승려로 별대덕(別大德)이란 승직에 있었다. 895년 7월 최치원이 지어 건립된 석탑 "해인사묘길상탑기(海印寺 妙吉祥塔記)"에 승훈은 해인사의 승려로 전국각지에 전쟁이 벌어져 수많은 중생이 싸우다 죽고, 굶어 죽는 일을 매우 슬퍼하다 상수리 한말씩을 희사하여 3층 옥탑을 건립하고 간절하게 나라를 평안하게 해달라고 기원하고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을 달래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현석(大玄錫) 발해

발해의 13대 임금으로 12대 임금 대건황(大虔晃)의 아들이다. 재위기간은 871∼894년이며 당에 직접 들어가 국교를 강화하였으며

일본에도 양성규(楊成規)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교역을 넓혔다.

 

 

대위해(大瑋瑎) 발해

발해의 제 1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894∼906년이다. 연호와 시호·가계 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당시의 내치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당나라와 일본과의 외치에 관한 기록만이 있다. 일본에는 전대의 현석(玄錫)때도 다녀왔던 문적원감(文籍院監) 배정(裵)을 894년에 파견하였으며, 905년 당나라에 오소도(烏炤度)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한동안 대위해는 발해왕계에서 빠져 있었으나, 김육불(金毓)의 노력에 의하여 《당회요 唐會要》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되어 발해의 제14대왕으로 밝혀졌다.

 

 

대인선(大諲譔) 발해

발해의 15대 마지막 임금이다. 재위기간은 906~926년이다. 당시 국제정세는 동북아에 당의 힘이 급격히 무너지고, 거란이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에 대항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지만, 발해 내부의 권력 쟁탈전으로 인해 국력은 점차로 약해져 925년 겨울에 거란의 침공을 받고, 부여부(扶餘府)를 점령당하고 10여일만에 황도인 상경용천부 홀한성이 포위되고, 해가 바뀌어 926년 초에 103개의 성이 거란에 점령되어 발해는 멸망하였다. 대인선의 맏아들 태자 대광현은 926년 1월 고려로 귀부하였다.

 

 

배정(裵煞) 발해

발해의 관리로 882년, 894년 문적원감(文籍院監)으로 105명의 사신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하였다. 배정은 시인으로도 이름이 높아 일본의 문인 스가와라가와 친교를 맺기도 하였다.

 

 

배구(裴谷) 발해발해의 관리로 907년, 919년 사절단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부는 역시 일본을 두번 방문한적이 있는 배정(裵煞)이다. 특히나 일본의 문인이었던 스가와라가와 부자 2대에 걸쳐 친교를 맺었다. 919년의 방문이 발해 역사상 사절단으로써 마지막 일본 방문이었다.

 

 

양성규(楊成規) 발해

발해의 관리로 13대 임금 대현석(大玄錫)이 즉위하던 871년에 정당성좌윤(政堂省左允) 자수대부 정4품 위군대장군 상진장군 사자금어대 관직에 있었다. 그해 대사 자격으로 부사 이흥성(李興晟) 이하 105명의 일행을 이끌고 일본에 간 양성규 일행은 871년 12월 일본에 입국하였고, 5월에 일본국왕을 찾아가 선물을 전달하고 종3위 관직등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양성규는 일행이 가져온 물품(주로 모피)으로 사무역을 전개했는데, 이때 일본 조정에서 지불한 대금만도 40만 량에 달하였다.(상경용천부에서 발견된 일본의 화동개보에 기록되어 있음) 또한 877년에는 일본과의 교역 확대를 위해 공목관(孔目官)의 관직으로 다시한번 105명의 사신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했다.

 

 

이흥성(李興晟) 발해

발해의 관리로 871년에 발해의 사절단으로 일본을 방문할때 부사 자격으로 대사 양성규(楊成規)를 보좌했다. 상경용천부에서 발견된 일본의 화동개보에 의하면 이때 이흥성을 포함한 발해인들이 모피등의 사무역을 통해 40만냥의 재화를 발해로 가져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봉예(大封裔) 발해

발해의 왕족으로 최치원이 쓴 고운집(孤雲集)에 최치원이 당소종(昭宗)에게 보내는 편지인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에 보면 대봉예의 기록이 나온다. 897년 대봉예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보니 신라 사신이 자신보다 상석에 있는것을 보고 불쾌하여 당 소종에게 글을 올려 말하길 "발해의 국세가 신라보다 강성함으로 사신의 서열도 발해가 상석이고, 국명의 나열도 <신라발해>가 아닌 <발해신라>로 해야한다"고 요청하였으나 당 소종이 말하길 "국명의 선후는 강약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고 옛 관습대로 신라가 발해보다 상석에 있는것이 옳다"하였다. 이에 최치원이 당소종에게 감사의 편지를 쓴것이다.

 

 

오소도(烏炤度) 발해발해의 재상으로, 당나라 유학을 하던중 875년 당 빈공과(賓貢科=재당 외국인들이 응시할수 있었던 시험)에 신라 이동(李同)을 제치고 수석을 차지했다. 최치원이 평하길 "이는 신라국의 수치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하였다. 오소도는 그후 발해에 귀국해 재상을 지냈다. 906년에 아들 오광찬(烏光贊)도 당나라에 유학하여 빈공과에 급제하였는데 이때에는 신라 최언위(신지愼之)가 수석을 차지하였다. 오소도는 당 조정에 표문을 올려 자신이 신라 이동을 제치고 수석을 차지하였음으로 당연히 오광찬이 최언위보다 위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최언위의 재주와 학식이 워낙 뛰어나서 허락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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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찬(烏光贊) 발해

발해의 당 유학생으로, 부는 발해의 재상을 지닌 오소도(烏炤度)다. 906년 당 유학중 빈공과(賓貢科=재당 외국인들이 응시할수 있었던 시험)에서 신라 최언위에 이어 부수석을 차지하였다. 부 오소도(烏炤度)가 당 조정에 오광찬을 최언위 보다 위에 둘것을 요청하였으나 받아지지 않았다.

 

 

고원고(高元固) 발해

발해인으로 892년에 당나라 유학중 당 빈공과(賓貢科=재당 외국인들이 응시할수 있었던 시험)에 진사로 급제한후 발해로 귀국하였다. 고원고가 귀국길에 민중(萄中 ; 복건성 복주) 지방에서 당나라의 시인인 서인(徐寅)을 찾아갔다. 당시 서인의 시는 발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집집마다 서인의 시를 금빛 글씨로 써 병풍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고원고가 서원에게 시한편을 써줄것을 요청하자 서인이 즐겨하여 시를 지어 주었으며 시 말미에 발해빈공 고원고 선배(渤海賓貢 高元固 先輩)라고 적어서 줬다.

 

 

왕구모(王龜謀) 발해

발해의 관리로 891년 문적원(文籍院) 소감(少監)의 관직으로 105명의 일행을 이끌고 일본에 사절단으로 갔다. 892년 1월 일본국에 도착하였으나, 일본국왕을 만나지 못하고 6월 귀국했다. 귀국할 당시 발해에서 끌고온 배가 심하게 파손 되어, 일본국왕의 명으로 새로 배를 만들어 주고 식량도 지급했다고 한다.

 

 

양중원(揚中遠) 발해

발해의 관리로 877년 정당성(政堂省) 공목관(孔目官)의 관직으로 105명의 일행을 이끌고 일본에 사절단으로 갔다. 877년 12월에 일본에 도착하였으며 878년 6월 귀국하였다. 양중원은 발해왕의 국서를 일본왕에게 보냈는데, 국서의 내용은 전에 보낸 발해사신이 무사히 귀국하였다는 내용과 함께,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일본에 조난당한 조당사 문손재등이 무사히 귀국할수 있도록 도움을 준것에 감사하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한편 양중원이 개인적으로 일본국왕에게 선물하려 하였던 노리개와 대모배(玳瑁杯, 거북껍질 술잔)도 받지 않았다는데, 이것은 당나라에서도 보지 못할 정도로 진귀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밖에도 많은 진품을 가져와서 사람들에게 선물하였으니, 미야코 요시카(都良香)에게 선물한 내용이 <도씨문집>에 실려 있기도 하다

 

 

문손재 발해  발해말 관리로 벼슬은 검교관(檢校官)에 이르렀다. 발해 경왕 2년 872년 당나라에서 방훈(龐勛)의 난이 평정된것을 축하하는 사절단으로 최종좌(崔宗佐), 대진윤(大陣潤) 등 60명을 이끌고 당에 갔다.

 

 

최종좌(崔宗佐) 발해

발해의 관리로 872년 검교관(檢校官) 문손재를 보좌하여 대진윤(大陣潤)등 60명과 함께 당나라에 사절단으로 다녀왔다. 당시 국서의 내용은 당나라에서 방훈(龐勛)의 난이 평정된것을 축하하는 내용이었다.

 

 

대진윤(大陣潤) 발해

발해의 관리로 872년 검교관(檢校官) 문손재를 보좌하여 최종좌(崔宗佐)등 60명과 함께 당나라에 사절단으로 다녀왔다. 당시 국서의 내용은 당나라에서 방훈(龐勛)의 난이 평정된것을 축하하는 내용이었다.

 

 

대소순(大昭順) 발해

발해의 왕족출신으로, 907년 애왕(哀王, 대인선)이 등극하고, 그해 당나라가 멸망하자 새롭게 화북의 최강자로 떠오른 주전충(朱全忠 852 ~ 912)의 양(梁)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대성악(大誠켏) 발해

발해의 왕족출신으로, 909년 애왕(哀王, 대인선) 3년 양(梁)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대광찬(大光贊) 발해

발해의 왕족출신으로, 912년 애왕(哀王, 대인선) 6년 양(梁)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대우모(大禹謨) 발해

발해의 왕족출신으로, 924년 애왕(哀王, 대인선) 18년 대원양(大元讓)과 함께 후당(後唐)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후당은 이존욱이 이존욱(李存勖:재위 923∼926) 923년 후량을 멸하고 세운 나라로, 국호를 당(唐)이라 칭하고 낙양에 도읍하였다.

 

대원양(大元讓) 발해

발해의 왕족출신으로, 924년 애왕(哀王, 대인선) 18년 대우모(大禹謨)와 함께 후당(後唐)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후당은 이존욱이 이존욱(李存勖:재위 923∼926) 923년 후량을 멸하고 세운 나라로, 국호를 당(唐)이라 칭하고 낙양에 도읍하였다.

 

 

이동(李同) 신라

신라 출신으로 당나라 유학중 875년 당 빈공과(賓貢科=재당 외국인들이 응시할수 있었던 시험)에 발해 유학생 오소도(烏炤度)와 나란히 급제하였다. 오소도는 수석을 차지하였고, 이동은 부수석을 차지하였다. 최치원이 발해인보다 뒤쳐진것을 두고 "이는 신라국의 수치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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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효(通曉)대사/범일(梵日) 승려

810~889. 성은 김(金). 시호 통효(通曉). 품일(品日)이라고도 한다. 15세에 출가하여 829년(흥덕왕 4) 경주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김의종(金義宗)을 따라 당(唐)나라에 가 제안(濟安)에게 6년간 사사하였다. 844년(문성왕 6년) 탄압으로 승려를 도태하고 절을 파괴하는 법난(法難)을 만나 상산(商山)에 피신, 선정(禪定)하다가 847년(문성왕 9) 귀국, 백달산(白達山)에서 좌선하고 굴산사(崛山寺)에서 40년을 보내면서 경문(景文)·헌강(憲康)·정강(定康)의 3왕으로부터 왕사(王師)나 국사(國師)가 되어 주기를 권유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수도와 불경연구에만 전념하였다

 

 

징효(澄曉)대사/절중(折中) 승려

826~900. 호 통효(通曉). 시호 징효(澄曉). 탑호 보인(寶印). 휴암(鵂  喦:현 鳳山) 출생. 7세에 출가하여 오관산(五冠山) 진전(珍傳) 밑에서 승려가 되어, 15세에 부석사(浮石寺)에서 화엄학(華嚴學)을 공부하고 19세에 장곡사(長谷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 당(唐)나라에서 장기간 불법을 닦고 돌아온 도윤(道允)을 풍악(楓岳)으로 찾아가 그의 법을 이어받았다. 그 후 자인(慈忍)과 함께 16년간 불도의 오의(奧義)를 탐구하고 망언(忘言)의 경지에 다다랐는데, 882년(헌강왕 8)에는 곡산사(谷山寺)의 주지가 되었다. 이때 그의 도행(道行)을 숭배하는 사자산(獅子山) 석운(釋雲)의 간청으로 흥녕원(興寧院)에 자리를 잡자, 그의 법을 듣고자 비구들이 운집하였으며, 그 명성 때문에 헌강왕 ·정강왕의 숭앙을 받았다. 그 후 잦은 전란을 피해 평진(平津)의 은강선원(銀江禪院)에 머물렀는데, 그때 진성여왕이 국사(國師)로 삼겠다고 요청해 왔으나, 이미 혼탁해진 세상을 정화(淨化)하기에는 때가 늦었음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행기(幸期) 승려(봉림사)

봉림사의 승려로 924년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봉림사(鳳林寺)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의 서자를 맡았다. 서체는 해서(楷書)체로 안진경(顔眞卿)체와 유사하며 장중한 필체가 특징이다. 이 탑비의 찬자는 경명왕이며, 각자는 성휴(性休)다. 일설에는 진경대사를 극진하게 모셨던 김해 호족 소율희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성휴(性休) 승려(봉림사)

봉림사의 승려인듯 하며, 924년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봉림사(鳳林寺)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의 각자를 맡았다. 이 탑비의 찬자는 경명왕이며, 서자는 행기(幸期)다. 일설에는 진경대사를 극진하게 모셨던 김해 호족 소율희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영회(榮會)법사 승려

신라 조정의 소현승(昭玄僧 불교를 관리하는 관부의 승려)으로, 923년 4월 진경(眞鏡)대사 심희가 열반하자 신라조정에서 조문사로 파견되었다. 조정에서는 재차 입적한지 37일 만에 진경(眞鏡)대사 시호와 보월능공지탑(寶月凌空之塔)이라는 탑 이름을 내려 주었다.

 

 

지선(智詵) 승려824-882 호는 도헌(道憲), 시호는 지증(智證)이다. 824(헌덕왕 16)∼882(헌강왕 8). 신라 말기의 고승(高僧). 희양산문(曦陽山門)의 개산조(開山祖). 경주김씨. 호는 도헌(道憲). 아버지는 찬양(贊壤)이며, 어머니는 윤씨(尹氏)이다. 승견불(勝見佛) 때의 승려였던 자가 자주 분노하여 용이 되었는데, 이제 사람으로 태어나고자 하니 받아줄 것을 간청하는 태몽을 꾸고 400일 만인 사월초파일에 낳았다. 태어나자 며칠 동안 젖을 먹지 않고 울기만 하였는데, 도인이 찾아와 어머니가 육식과 파·마늘 등을 금할 것을 깨우쳤다. 그대로 하였더니 젖을 먹기 시작하였다. 9세에 출가하려 하였으나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으므로 몰래 부석사(浮石寺)로 가서 범휴대덕(梵休大德)의 제자가 되었다. 어느날 어머니의 병보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자 어머니의 병은 저절로 나았으나 그가 중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하였다. 어머니가 부처에게 자식의 병을 낫게 하여주면 곧 출가를 시키겠다고 맹세하자 병이 나았다.그뒤 정식으로 계를 받고 출가하였는데, 이때 맑은 구슬 한개를 얻었다고 한다. 840년(문성왕 2) 경의율사(瓊儀律師)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계람산(鷄藍山) 수석사(水石寺)에서 고행정진하여 혜은(惠隱)의 선법(禪法)을 이어받았다. 경문왕이 사신을 보내어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았고, 864년(경문왕 4) 현계산(賢溪山) 안락사(安樂寺) 주지로 있다가 심충(沈忠)의 청으로 희양산에 가서 절을 창건하고 머물렀다. 881년(헌강왕 7) 왕은 사신을 보내 주위의 땅을 사찰 소유로 정하고 사찰명을 봉암사(鳳巖寺)라 하였다. 그리고 산에서 나오게 하여 선원사(禪院寺)에 머물게 한 뒤 월지궁(月池宮)으로 초빙하여 심요(心要)를 물었다.그뒤 다시 봉암사로 돌아와서 59세로 입적(入寂)하였다. 시호는 지증(智證), 탑호는 적조(寂照)이다. 현재 봉암사에 남아 있는 적조탑은 보물 제137호, 최치원이 지은 적조탑비는 보물 제138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의 법맥은 사조(四祖)―법랑(法朗)―신행(信行)―준범(遵範)―혜은―지증으로 이어지며, 제자로는 양부(楊孚)·성견(性#견28)·계휘(繼徽) 등이 있다.

 

 

진공대사(眞空大師) 승려

비로사의 후삼국,고려초의 승려 생몰년 855~937년. 부는 신라왕족인 김확종(金確宗)이고, 모는 설씨였다. 일찍이 가야산 선융의 제자가 되었으며 874년(경문왕 14) 가야산 수도원에서 구족계를 받았는데 삼장법의 명승이었다. 937년(태조 20) 대사가 고려의 삼한 통일을 축하하고 경북 풍기의 비로사(毘盧寺)에서 죽으니 고려 태조가 '진공(眞空)'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보법탑비(普法塔碑)를 세우도록 하였다. 비문은 최언휘가 짓고 글씨는 자경 2㎝의 구양순체 해서로 이환추가 썼으며 각자(刻字)는 최환규가 맡았다. 비문 가운데 나오는 '청구(靑丘)'라는 용어는 우리나라를 뜻하는 별칭으로서, 이 비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비음(碑陰)은 구양순체의 해서로 대사의 유계(遺誡)가 새겨져 있으며 이수 가운데에는 '고진공대사비(故眞空大師碑)'라는 전액이 있는데 이환추(李桓樞)가 썼다.

 

 

현승(玄昇) 신라

후삼국시대 신라의 관리로 벼슬은 일길찬(一吉飡)에 이르렀다. 918년 2월에 모반을 획책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 이반란으로 신라는 멸망의 징조가 더욱더 가속도를 붙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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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빈(張彬) 목천

목천장씨(木川張氏)의 시조로 고려의 관리였다. 926년에는 태조의 명을 받아 후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후에 목천군에 봉해졌다. 목천(木川)은 충청남도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 대목악군인데 신라 경덕왕이 대록군으로 고쳤으며, 고려 때는 목주로 개칭하여 청주에 속하게 하였다.

 

장분(張芬) 고려

고려의 병부시랑(兵部侍郞)을 역임했다. 927년 태조의 명으로 장분(張芬)은 부사(副使)로 병부낭중(兵部郞中) 박술홍(朴述洪)과 창부원외랑(倉部員外郞) 이충식(李忠式)을 이끌고 후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후당의 명종은 장분에게 검교공부상서(檢校工部尙書 검교=임시)를, 박술홍에게는 어사중승판관(御史中丞判官)을, 이충식에게는 시어사(侍御史)의 벼슬을 내려주었다. 전해에 후당에 사신으로 파견된 장빈(張彬)과는 일족으로 짐작된다.

 

 

박술홍(朴述洪) 고려

고려의 병부낭중(兵部郞中) 벼슬에 있던 927년 태조의 명으로 대사(大使) 장분(張芬)을 수행하여 창부원외랑(倉部員外郞) 이충식(李忠式)과 부사(副使)로 후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후당의 명종에게 어사중승판관(御史中丞判官) 벼슬을 제수받았다. 면천박씨(沔川朴氏)의 시조로 박술희(朴述熙)와 일족으로 짐작된다.

 

 

이충식(李忠式) 고려

고려의 창부원외랑(倉部員外郞) 벼슬에 있던 927년 태조의 명으로 대사(大使) 장분(張芬)을 수행하여 병부낭중(兵部郞中) 박술홍(朴述洪)과 부사(副使)로 후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후당의 명종에게 시어사(侍御史) 벼슬을 제수받았다.

 

 

강선힐(康瑄詰) 태봉

태봉의 보군장군으로 914년 궁예의 명령으로 백선장군(百船將軍) 왕건의 부장이 되어 흑상(黑湘), 김재원(金材瑗)과 함께 나주 공략전에 참전하였다. 이때 동원된 함선이 110여척, 병력이 3천이었다.

 

 

흑상(黑湘) 태봉

태봉의 보군장군으로 914년 궁예의 명령으로 백선장군(百船將軍) 왕건의 부장이 되어 강선힐(康瑄詰), 김재원(金材瑗)과 함께 나주 공략전에 참전하였다. 이때 동원된 함선이 110여척, 병력이 3천이었다.

 

 

김재원(金材瑗) 태봉

청주호족 출신으로 문무를 겸전했다. 914년에는 태봉의 보군장군으로 궁예의 명을 받아 백선장군(百船將軍) 왕건의 부장이 되어 강선힐(康瑄詰), 흑상(黑湘)과 함께 나주 공략전에 참전하였다. 이때 동원된 함선이 110여척, 병력이 3천이었다. 그후로는 주로 광평성의 문신으로 활약한듯 싶다.

 

 

망수(望水) 무주

859년에 체징대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김언경(金彦卿), 김수종(金遂宗), 이남택(里南宅)과 더불어 금(金) 160분(分), 조(租) 2,000곡(斛)을 시주해 내놓아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寶林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을 주조했다.

 

 

이남택(里南宅) 무주

859년에 체징대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김언경(金彦卿), 김수종(金遂宗), 망수(望水)와 더불어 금(金) 160분(分), 조(租) 2,000곡(斛)을 시주해 내놓아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寶林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을 주조했다.

 

 

김수종(金遂宗) 무주

장사현(長沙縣) 부수(副守) 김언경(金彦卿)의 부장으로 859년에 체징대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김언경(金彦卿)과 더불어 철 2,500근(斤)을 사서 로사나불 1구를 주조하여 보림사에 안치했다.

 

박구(朴球) 신라

생몰년 미상. 신라 말기 도당유학생(渡唐留學生)출신의 문인. 당나라에 유학하여 오랫동안 체재하면서 당나라의 이름난 문인들과 널리 교유한 것으로 보아 문인으로서의 그의 능력도 상당한 경지에 도달하였던 것 같다. 특히, 최치원(崔致遠)과도 교유한 바 있고 함통(咸通) 연간(860∼873)의 소위 방림십철(芳林十哲)의 한 사람으로 지목된 장교(張喬)와는 오랫동안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박구가 귀국할 당시 장교는 그의 귀국을 애석해 하며 ‘송기대조박구귀신라(送碁待詔朴球歸新羅)’라는 시를 지었다.

 

 

박옹(朴邕) 신라생몰년 미상. 신라 헌강왕 때의 문사(文士). 성주사낭혜화상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寶光塔碑)의 비문에 그의 행적의 일단이 보이고 있다. 즉, 881년(헌강왕 7)에 문한직(文翰職)인 시독한림(侍讀翰林)으로 있으면서, 왕명을 받아 낭혜화상을 전송하는 글을 썼다는 것이다. 그런데 《계원유향 桂苑遺香》의 주(註)나 조선 후기 이덕무(李德懋)의 문집인 《청장관전서 靑莊館全書》에 의하면, 당시 그는 시독한림랑 겸 숭문대서서원직학사(侍讀翰林郎兼崇文臺瑞書院直學士)로서 살찬(薩飡)의 관등을 가지고 있었다.왕의 불교신앙이 돈독함에도 이유가 있겠으나, 당대의 왕권은 매우 취약하여 종교세력자인 선종(禪宗)의 조사(祖師)낭혜에 대하여 지극한 예우를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한때 궁궐에 들렀던 선사를 전송하게 된 헌강왕은 그 이별을 아쉬워하여 학자들로 하여금 전송의 시를 짓도록 하였다. 이에 왕손인 김억영(榮)이 먼저 시를 짓고 이어 박옹이 증행시(贈行詩)의 서문을 지었다. 그런데 이 서문이 《청장관전서》의 〈한죽당섭필상 寒竹堂涉筆上〉에 전하고 있다. 내용은 대사(大師)의 행장을 노래한 것인데, 특히 신라왕실과의 두터운 교분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덕무는 이 글을 평하여 말하기를, 영영(英英)한 정채(精彩)는 없으나 오히려 당나라 문체의 전형(典型)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평가와 통일신라시대 도당유학의 유행 등을 생각해 보면, 박옹은 최치원(崔致遠) 등 당시의 문사들처럼 당나라에 유학하여 학문을 하였던 육두품(六頭品)출신의 지식인으로 헌강왕의 측근에서 문한을 담당하며 왕을 보필하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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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태(王泰) 고려왕족

태조의 제3비인 신명순성왕후(神明順聖王后) 유씨(劉氏)의 첫째 아들이다. 동생 왕요(王堯)는 정종(定宗), 왕소(王昭)는 광종에 즉위했고, 왕정(王貞)은 후에 문원대왕(文元大王)으로 추존되었으며, 막내는 출가하여 증통국사(證通國師)가 되었다. 여동생은 두명인데 낙랑(樂浪)공주, 흥방(興芳)공주이다. 태조의 제12비인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洪氏)의 소생 일후(一後) 공주와 혼인하였으나 일찍 병사한듯 싶다.

 

 

왕정(王貞)/문원대왕(文元大王) 고려왕족

태조의 제3비인 신명순성왕후(神明順聖王后) 유씨(劉氏) 사이에서 태어난 5남2녀중 넷째 아들이다. 형 왕요와 왕소는 정종,광종의 제위에 올랐다. 왕정은 태조의 제6비인 정덕왕후(貞德王后) 유씨(柳氏)의 소생 문혜왕후 유씨(文惠王后 柳氏)와 혼인하여 장남 천추전군(千秋殿君), 차남 아지군(阿志君), 장녀 헌의왕후 유씨(獻懿王后 劉氏). 2남 1녀를 두었다. 장녀 헌의왕후 유씨는 경종에게 시집갔다. 왕정은 문원대왕(文元大王)으로 봉작되었거나, 추존되었는데, 칭제를 했던 광종때 동복아우로써 봉작되었을 가능성도 있고, 경종의 장인으로써 왕으로 추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증통국사(證通國師)

태조의 제3비인 신명순성왕후(神明順聖王后) 유씨(劉氏) 사이에서 태어난 5남2녀중 5남이다. 형 왕요와 왕소는 정종, 광종의 제위에 올랐다. 증통국사는 어릴적에 승려로 입적한듯 하며 태조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제위를 찬탈하던 918년에 법주사(法住寺)를 중건하기도 하였다.

 

 

흥방공주(興芳公主)

태조의 제3비인 신명순성왕후(神明順聖王后) 유씨(劉氏)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다. 태조의 제6비인 정덕왕후(貞德王后) 유씨(柳氏)의 소생인 원장태자(元莊太子)와 혼인하였다.

 

 

왕욱(王旭)/대종(戴宗)

태조의 제4비인 신정왕후(神靜王后) 황보씨(皇甫氏)의 1남1녀중 1남이고 태조의 7번째 아들이다. 왕욱은 태조의 제6비인 정덕왕후(貞德王后) 유씨(柳氏)의 소생 선의태후(宣義太后) 유씨(柳氏)와 혼인하였으며, 효덕태자(孝德太子), 성종(成宗) 왕치(王治), 경장태자(敬章太子), 헌애왕태후(獻哀王太后, 천추태후) 황보씨(皇甫氏), 헌정왕후(獻貞王后) 황보씨(皇甫氏)등 3남2녀를 두었다. 두딸은 모두 경종과 혼인하였으며, 훗날 차남 왕치(王治)가 성종에 등극하자 예성선경대왕(睿聖宣慶大王)으로 추존되었으며 묘호를 대종(戴宗), 능호(陵號)를 태릉(泰陵)이라 하였다.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大穆王后 皇甫氏)

태조의 제4비인 신정왕후(神靜王后) 황보씨(皇甫氏)의 소생으로 어머니의 성을 따라 황보씨(皇甫氏)라 불리었다. 이복 오빠인 광종과 혼인하였으며 아들 왕유(王由)가 5대 임금 경종이다. 경종외에 효화태자(孝和太子) 딸은 천추전부인(千秋殿夫人), 보화궁부인(寶華宮夫人), 문덕왕후(文德王后)등 2남 3녀를 두었다. 956년(광종 7) 광종이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만들어 노예제도의 폐풍(弊風)을 시정하려 할 때, 노예들이 그 주인을 멸시하고 배반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으므로, 이 법의 실시를 중지할 것을 건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왕욱(王郁)/안종(安宗)

태조의 제5비인 신성왕후(神成王后) 김씨(金氏)의 소생으로, 경종의 비인 헌정왕후(獻貞王后)가 경종 사후 왕륜사(王輪寺) 근방의 사가에 있을적에 서로 정을 통하여 아들 왕순(王詢 현종)을 가졌다. 이일이 발각돼 왕욱은 사수현(泗水縣)에 귀양을 살다 말년에 왕순과 잠시 같이 지내다 992년 7월 귀양지에서 죽었다. 헌정왕후는 왕순을 낳은뒤 산통으로 죽었다. 왕순이 왕위에 등극하자 안종 헌경효의대왕(安宗憲景孝懿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왕위군(王位君)

태조의 제6비인 정덕왕후(貞德王后) 유씨(柳氏)의 소생으로 4남3녀중 첫째다. 형제로는 인애군(仁愛君), 원장태자(元莊太子), 조이군(助伊君), 문혜왕후 유씨(文惠王后 柳氏), 선의왕후 유씨(宣義王后 柳氏), 성명 미상의 공주등이 있다. 이외에 왕위군에 대한 특별한 기록은 없다.

 

 

인애군(仁愛君)

태조의 제6비인 정덕왕후(貞德王后) 유씨(柳氏)의 소생으로 그외의 기록은 없다. 형제로는 왕위군(王位君), 원장태자(元莊太子), 조이군(助伊君), 문혜왕후 유씨(文惠王后 柳氏), 선의왕후 유씨(宣義王后 柳氏), 성명 미상의 공주등이 있다.

 

 

원장태자(元莊太子)

태조의 제6비인 정덕왕후(貞德王后) 유씨(柳氏)의 소생이다. 태조의 제3비인 신명순성왕후(神明順聖王后) 유씨(劉氏)의 딸인 흥방공주(興芳公主)와 혼인하여 흥방궁대군(興芳宮大君), 대명궁부인 유씨(大明宮夫人 柳氏) 1남1녀를 두었다. 딸 대명궁부인 유씨(大明宮夫人 柳氏)은 경종의 제5비가 되었다.원장태자의 형제로는 왕위군(王位君), 인애군(仁愛君), 조이군(助伊君), 문혜왕후 유씨(文惠王后 柳氏),선의왕후 유씨(宣義王后 柳氏), 성명 미상의 공주등이 있다.

 

 

조이군(助伊君)

태조의 제6비인 정덕왕후(貞德王后) 유씨(柳氏)의 소생으로 4남중 4남이다. 형제로는 왕위군(王位君), 인애군(仁愛君), 원장태자(元莊太子), 문혜왕후 유씨(文惠王后 柳氏), 선의왕후 유씨(宣義王后 柳氏), 성명 미상의 공주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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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혜왕후 유씨(文惠王后 柳氏)

태조의 제6비인 정덕왕후(貞德王后) 유씨(柳氏)의 첫째 딸로, 이복 오빠인 태조의 제3비인 신명순성왕후(神明順聖王后) 유씨(劉氏) 소생인 왕정(王貞)과 혼인하여, 장남 천추전군(千秋殿君), 차남 아지군(阿志君), 장녀 헌의왕후 유씨(獻懿王后 劉氏). 2남 1녀를 두었다. 헌의왕후 유씨는 경종의 제2비가 되었다. 남편 왕정(王貞)은 문원대왕(文元大王)으로 봉작되었거나, 추존되었는데, 칭제를 했던 광종때 동복 아우로써 왕으로 봉작되었을 가능성도 있고, 경종의 장인으로써 왕으로 추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선의태후 유씨(宣義太后 柳氏)

태조의 제6비인 정덕왕후(貞德王后) 유씨(柳氏)의 둘째 딸로, 이복 오빠인 태조의 제4비 신정왕후(神靜王后) 황보씨(皇甫氏)의 아들 왕욱(王旭)과 혼인하여 효덕태자(孝德太子), 성종(成宗) 왕치(王治), 경장태자(敬章太子), 헌애왕태후(獻哀王太后, 천추태후) 황보씨(皇甫氏), 헌정왕후(獻貞王后) 황보씨(皇甫氏)등 3남2녀를 두었다. 선의태후는 젊어서 죽고, 자식들은 시어머니인 신정왕후(神靜王后) 황보씨(皇甫氏)의 손에 키워졌다. 두딸은 모두 경종과 혼인하였으며, 훗날 차남 왕치(王治)가 성종에 등극하자

남편 왕욱(王旭)은 예성선경대왕(睿聖宣慶大王)으로 추존되었으며 묘호를 대종(戴宗), 능호(陵號)를 태릉(泰陵)이라 하고, 선의태후는 정숙(貞淑), 정목(靜穆), 광의(匡懿), 익자(益慈)의 시호를 추존받았다.

 

 

수명태자(壽命太子)

태조의 제7비 헌목대부인(獻穆大夫人) 평씨(平氏)의 아들이다. 수명태자는 광종의 딸 문덕왕후(文德王后) 유씨와 혼인하여 홍덕원군(弘德院君) 왕규(王圭), 선정왕후(宣正王后) 유씨(柳氏) 1남1녀를 두었으며, 선정왕후 유씨는 목종의 왕후가 된다.

 

 

순안왕대비(順安王大妃)

태조의 제8비인 정목부인(貞穆夫人) 관씨(官氏)/왕씨(王氏)의 딸이다. 어머니 정목부인은 명주호족 김순식의 부장인 관경(官景)의 딸이다. 명주가 고려에 귀부할때 관경 또한 왕씨성을 하사받았다.

 

 

왕의(王義)/효목태자(孝穆太子)

태조의 제9비인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 유씨(庾氏)의 장남이고 효목태자(孝穆太子)로 불리웠다. 외조부는 평주출신의 후삼국 제일의 명장 유금필(庾黔弼)이다. 동생 효은태자(孝隱太子)는 광종의 왕권강화을 위한 호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박수경을 대표로 하는 평주세력이 몰살당할때 소인배와 어울렸다는 죄목으로 사형당했다. 왕의는 이때 살아남은듯 하며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승려로 만들었다는 기록에서 볼때 권력과는 철저히 담을 쌓고 살아간듯 하다.

 

 

효은태자(孝隱太子)/동양군(東陽君)

태조의 제9비인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 유씨(庾氏)의 차남이고 동양군(東陽君)이라 불리웠다. 외조부는 평주출신의 후삼국 제일의 명장 유금필(庾黔弼)이다. 광종의 왕권강화을 위한 호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박수경을 대표로 하는 평주세력이 몰살당할때 소인배와 어울렸다는 죄목으로 사형당했다. 아들 왕임(王琳)과 왕정(王禎)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살아남아, 지방으로 도망가 살다가 현종의 즉위후에 다시 복권되었다.

 

 

원녕태자(元寧太子)/진주낭군(鎭州郞君)

태조의 제 10비인 숙목부인(肅穆夫人) 임씨(林氏)의 아들로, 외조부는 진주(鎭州)호족 세력인 임명필(林明弼)이다. 진주낭군(鎭州郞君)으로도 불리웠으며, 아들이 효당태자(孝當太子)이다. 광종의 왕권강화책에 호응하여 많은 호족,왕족들을 숙청하는데 일조를 했다. 그러나 975년 광종이 죽고 경종이 즉위하여 호족복수법이 허용되자, 집정(執政) 왕선(王詵)에게 효성태자(孝成太子)와 함께 살해당하였다. 이 일로 경종은 복수법을 금지시키고 왕선을 귀양 보냈다.

 

 

왕임주(王琳珠)/효성태자(孝成太子)

태조의 제11비인 천안부원부인(天安府院夫人) 임씨(林氏)의 장남이다. 외조부는 천안(天安)호족 세력인 임언(林彦)이고 동생은 효지태자(孝祗太子)다. 천안낭군(天安郞君)으로 불리웠으며, 광종의 왕권강화책에 호응하여 많은 호족,왕족들을 숙청하는데 일조를 했다. 그러나 975년 광종이 죽고 경종이 즉위하여 호족복수법이 허용되자, 집정(執政) 왕선(王詵)에게 원녕태자(元寧太子)와 함께 살해당하였다. 이 일로 경종은 복수법을 금지시키고 왕선을 귀양 보냈다.

 

 

효지태자(孝祗太子)

태조의 제11비인 천안부원부인(天安府院夫人) 임씨(林氏)의 차남이다. 외조부는 천안(天安)호족 세력인 임언(林彦)이고 형은 효성태자(孝成太子)다.

 

 

왕직(王稷)

태조의 제12비인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洪氏)의 아들이다. 외조부는 홍주(洪州)호족 세력인 홍규(洪規)이고 여동생은 일후(一後)공주다. 왕직은 태자라 불리웠으며, 일후공주는 태조의 제3비인 신명순성왕후(神明順聖王后) 유씨(劉氏)의 첫째 아들인 왕태(王泰)에게 시집갔다.

 

 

일후공주(一後公主)

태조의 제12비인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洪氏)의 딸이다. 외조부는 홍주(洪州)호족 세력인 홍규(洪規)이고 오빠는 왕직(王稷)이다. 일후공주는 태조의 제3비인 신명순성왕후(神明順聖王后) 유씨(劉氏)의 첫째 아들인 왕태(王泰)에게 시집갔지만 남편 왕태는 일찍 병사한듯 싶다.

 

 

광주원군(廣州院君)

태조의 제16비인 소광주원부인(小廣州院夫人) 왕씨(王氏)/함씨(咸氏)의 아들이다. 외조부는 광주(廣州)호족 세력인 왕규(王規)/함규(咸規)다. 사서에 의하면 왕규는 외손자 광주원군을 제위에 올리기 위해 혜종을 시해하고자 하였으며, 혜종 사후에는 정종과 왕식렴에 의해 처형당한것으로 나와있다. 광주원군도 이때 숙청당한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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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제태자(孝悌太子)

태조의 제 25비인 성무부인(聖茂夫人) 박씨(朴氏)의 소생으로 4남1녀중 장남이다. 외조부는 평주(平州)호족 세력인 박지윤(朴智胤)이다. 형제로는 효명태자(孝明太子), 법등군(法燈君), 자리군(資利君)과 이름 미상의 공주가 있다.

 

 

효명태자(孝明太子)

태조의 제 25비인 성무부인(聖茂夫人) 박씨(朴氏)의 소생으로 둘째 아들이다. 외조부는 평주(平州)호족 세력인 박지윤(朴智胤)이다. 형제로는 효제태자(孝悌太子), 법등군(法燈君), 자리군(資利君)과 이름 미상의 공주가 있다.

 

 

법등군(法燈君)

태조의 제 25비인 성무부인(聖茂夫人) 박씨(朴氏)의 소생으로 셋째 아들이다. 외조부는 평주(平州)호족 세력인 박지윤(朴智胤)이다. 형제로는 효제태자(孝悌太子), 효명태자(孝明太子), 자리군(資利君)과 이름 미상의 공주가 있다.

 

 

자리군(資利君)

태조의 제 25비인 성무부인(聖茂夫人) 박씨(朴氏)의 소생으로 넷째 아들이다. 외조부는 평주(平州)호족 세력인 박지윤(朴智胤)이다. 형제로는 효제태자(孝悌太子), 효명태자(孝明太子), 법등군(法燈君) 과 이름 미상의 공주가 있다.

 

 

의성부원대군(義城府院大君)

태조의 제 26비인 의성부원부인(義城府院夫人) 홍씨(洪氏)의 아들로, 외조부는 진보성(眞寶城/의성부義城府) 호족인 홍술(洪術)이다. 의성부원대군은 이복 동생인 태조 제6비 정덕왕후 유씨(貞德王后柳氏) 소생의 공주와 혼인하였다.

 

 

흥화궁군(興化宮君)

고려 제2대 임금 혜종의 제1비인 의화왕후(義和王后) 임씨(林氏) 소생으로 흥화궁군(興化宮君), 경화궁부인(慶化宮夫人), 정헌공주(貞憲公主)등 1남2녀중 장남이다.혜종의 장남이었지만 혜종 사후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다. 광종 때에 왕권 강화책에 의한 왕족,호족 말살정책으로 처형당했다.

 

 

경화궁부인(慶化宮夫人)

고려 제2대 임금 혜종의 제1비인 의화왕후(義和王后) 임씨(林氏) 소생으로, 혜종 재위시절 왕소(광종)와 혼인하였다.

 

 

정헌공주(貞憲公主)

고려 제2대 임금 혜종의 제1비인 의화왕후(義和王后) 임씨(林氏)의 차녀다.

 

 

태자(太子) 왕제(王齊)

고려 제2대 임금인 혜종의 아들로 모는 애이주(哀伊主)며 여동생은 명혜부인(明惠夫人)이다. 외조부는 경주인(慶州人)으로 신라 대간(大干)을 지낸 연예(連乂)다.

 

 

명혜부인(明惠夫人)

혜종의 비인 애이주(哀伊主) 소생이다. 오빠는 태자(太子) 왕제(王齊)이며, 외조부는 경주인(慶州人)으로 신라 대간(大干)을 지낸 연예(連乂)다.

 

 

문공왕후 박씨(文恭王后 朴氏) 고려 제 3대 임금 정종의 제1비로 승주(昇州)호족 삼중대광(三重大匡) 박영규(朴英規)의 딸이다. 박영규의 세딸이 모두 고려 왕실과 혼인을 맺었는데,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 박씨(朴氏)는 태조의 제17이고, 문공왕후는 자매인 문성왕후 박씨(文成王后 朴氏)와 함께 경종의 제1비가 되었다. 시호는 문공(文恭)이며, 능은 안릉(安陵)이고 정종묘에 합장되었다.

 

 

문성왕후 박씨(文成王后 朴氏)

고려 제 3대 임금 정종의 제1비로 승주(昇州)호족 삼중대광(三重大匡) 박영규(朴英規)의 딸이다. 박영규의 세딸이 모두 고려 왕실과 혼인을 맺었는데,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 박씨(朴氏)는 태조의 제17이고, 문공왕후는 자매인 문성왕후 박씨(文成王后 朴氏)와 함께 경종의 제2비가 되었다. 소생으로는 경춘원군(慶春院君)과 공주등 1남1녀를 두었다. 경춘원군은 광종때 처형당했으며, 문성왕후 소생의 공주는 태조의 제11비인 천안부원부인(天安府院夫人) 임씨(林氏)의 장남인 왕임주(王琳珠 효성태자孝成太子)와 혼인하였다.

 

 

경춘원군(慶春院君)

고려 제 3대 임금 정종의 아들로, 어린나이로 인해 정종 사후 왕위를 잇지 못하고, 작은 아버지인 광종에 의해 처형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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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환성(邊煥性)

황주(黃州) 둔대엽촌(遁臺葉村)의 호족으로 신라의 대당 외교관을 지낸것으로 전해진다. 아들 균여는 고려초 화엄교리의 거승이 되었다.

 

 

변선균(邊善均)

황주(黃州) 둔대엽촌(遁臺葉村)의 호족으로, 사촌 균여와 함께 부흥사(復興寺)에서 출가하여 승려 식현(識賢)의 제자가 되었다.

 

 

식현(識賢)

후삼국 황해도 금천군에 있는 부흥사(復興寺)의 승려로 황주에서 온 변선균(邊善均)과 변균여(邊均如)의 스승이 되었다. 자질은 그리 뛰어나지 못한듯 하여 변균여는 식현을 떠나 영통사의 의순에게 가버리고 말았다.

 

 

수명(秀明)

황주 호족 변환성(邊煥性)의 딸로 균여대사의 누나이기도 하다. 균여가 출가후 집에 온적이 있는데, 세살 위의 누이 수명(秀明)에게 보현(普賢)과 관음(觀音) 두 지식(知識)의 법문(法門)과 신중(神衆), 천수(千手)의 두 경문을 한 자도 빠짐없이 강설하였다.

 

 

의순(義順)

송악에 있던 영통사(靈通寺)의 고승으로, 화엄교리에 정통하였으며 제자로 균여대사들 두었다.

 

 

균여대사(均如大師)923~973. 황주(黃州) 둔대엽촌(遁臺葉村)의 호족 변환성(邊煥性)의 아들로, 15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5세에 사촌형 선균(善均)을 따라 부흥사(復興寺)의 식현(識賢)을 뵙고 출가하였다. 그후 식현의 자질이 뛰어나지 못함을 알고, 영통사(靈通寺) 의순(義順)에게 가서 배우며 수도생활을 하였다. 수도에 힘쓰는 한편 불교보급에 노력했고, 《보현십종원왕가(普賢十種願往歌: 약칭 普賢十願歌)》라는 11수(首)의 향가(鄕歌)를 지어 노래로 불교의 교리를 알기 쉽게 부르게 함으로써, 대중이 부처에 친근해지도록 하였다. 불교계의 종파 통합에도 힘을 기울여 관혜(觀惠)의 남악파(南岳派)와 희랑(希朗)의 북악파(北岳派)의 통합을 위해 인유(仁裕)와 함께 대찰(大刹)의 승려를 찾아가 설득하였고 민간을 방문하여 설교하여 종파 간의 분쟁을 종식시켰다. 958년(광종 9)에는 시관(試官)이 되어 유능한 승려들을 많이 선발했다. 법계(法階)는 대화엄수좌원통양중대사(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에 이르렀다. 한때 오관산(五冠山) 마하갑사(摩訶岬寺)에 있었으며, 963년(광종 14) 왕이 그를 위해 창건한 귀법사(歸法寺)에서 주지로 있다가 죽었다.

 

 

김근(金僅)

신라의 관리로써 벼슬은 시전중감(試殿中監)에 이르렀다. 885년 헌강왕 11년 당나라에 경하부사(慶賀副使)로 파견되었다. 이때 최광유(崔匡裕), 김무선(金茂先), 최환(崔渙)등도 숙위학생으로 파견되었다.

 

 

김무선(金茂先)

당나라 유학생 출신으로 885년 헌강왕11년 시전중감(試殿中監) 김근(金僅)이 당나라에 경하부사로 파견될때, 최광유(崔匡裕), 최환(崔渙)등과 함께 숙위학생으로 파견되었다.

 

 

최환(崔渙)

당나라 유학생 출신으로 885년 헌강왕11년 시전중감(試殿中監) 김근(金僅)이 당나라에 경하부사로 파견될때, 최광유(崔匡裕), 김무선(金茂先) 등과 함께 숙위학생으로 파견되었다.

 

 

박언성(朴彦成)

신라54대왕(新羅54代王)인 경명왕(景明王)의 둘째아들로 8왕자가 분봉할때 고령(高靈)을 식읍으로 받아 고령박씨(高靈朴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고양대군(高陽大君)이라 불리웠다. 본시 고령(高靈)은 고양(高陽)과 영천(靈川) 두 지명(地名)을 합쳐 고령(高靈)이라 불리웠다. 박언성의 8형제는 밀성대군(密城大君) 박언침(朴彦忱), 고양대군(高陽大君) 박언성(朴彦成), 속함대군(速咸大君) 박언신(朴彦信), 죽성대군(竹城大君) 박언립(朴彦立), 사벌대군(沙伐大君) 박언창(朴彦昌), 완산대군(完山大君) 박언화(朴彦華), 강남대군(江南大君) 박언지(朴彦智), 월성대군(月城大君) 박언의(朴彦儀)등이다.

 

 

박언신(朴彦信)

신라54대왕(新羅54代王)인 경명왕(景明王)의 셋째아들로 8왕자가 분봉할때 함양(咸陽)을 식읍으로 받아, 함양박씨(咸陽朴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속함대군(速咸大君)이라 불리웠다. 박언신의 8형제는 밀성대군(密城大君) 박언침(朴彦忱), 고양대군(高陽大君) 박언성(朴彦成), 속함대군(速咸大君) 박언신(朴彦信), 죽성대군(竹城大君) 박언립(朴彦立), 사벌대군(沙伐大君) 박언창(朴彦昌), 완산대군(完山大君) 박언화(朴彦華), 강남대군(江南大君) 박언지(朴彦智), 월성대군(月城大君) 박언의(朴彦儀)등이다.

 

 

박언립(朴彦立)

신라54대왕(新羅54代王)인 경명왕(景明王)의 4남으로 8왕자가 분봉할때 죽산(竹山)을 식읍으로 받아 죽성대군(竹城大君)으로 불리웠으며 음성박씨(陰城朴氏)의 고시조가 된다. 박언립의 8형제는 밀성대군(密城大君) 박언침(朴彦忱), 고양대군(高陽大君) 박언성(朴彦成), 속함대군(速咸大君) 박언신(朴彦信), 죽성대군(竹城大君) 박언립(朴彦立), 사벌대군(沙伐大君) 박언창(朴彦昌), 완산대군(完山大君) 박언화(朴彦華), 강남대군(江南大君) 박언지(朴彦智), 월성대군(月城大君) 박언의(朴彦儀)등이다.

 

 

박언화(朴彦華)

신라54대왕(新羅54代王)인 경명왕(景明王)의 6남으로 8왕자가 분봉할때 완산주(完山州)를 식읍으로 받아, 완산대군(完山大君)으로 불리웠으며 전주박씨(全州朴氏)의 시조가 되었다. 박언화의 8형제는 밀성대군(密城大君) 박언침(朴彦忱), 고양대군(高陽大君) 박언성(朴彦成), 속함대군(速咸大君) 박언신(朴彦信), 죽성대군(竹城大君) 박언립(朴彦立), 사벌대군(沙伐大君) 박언창(朴彦昌), 완산대군(完山大君) 박언화(朴彦華), 강남대군(江南大君) 박언지(朴彦智), 월성대군(月城大君) 박언의(朴彦儀)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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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웅(朴雄)

전주박씨(全州朴氏)의 시조 박언화(朴彦華)의 아들로 삼한 통일후 공신에 책봉되었다고 전주박씨 족보에 나와있다.

 

 

박언지(朴彦智)

신라54대왕(新羅54代王)인 경명왕(景明王)의 7남으로 8왕자가 분봉할때 순천((順天)을 식읍으로 받아, 강남대군(江南大君)이라 불리웠다. 아들은 순천박씨(順天朴氏)의 중시조 박영규(朴英規)다. 박언지의 8형제는 밀성대군(密城大君) 박언침(朴彦忱), 고양대군(高陽大君) 박언성(朴彦成), 속함대군(速咸大君) 박언신(朴彦信), 죽성대군(竹城大君) 박언립(朴彦立), 사벌대군(沙伐大君) 박언창(朴彦昌), 완산대군(完山大君) 박언화(朴彦華), 강남대군(江南大君) 박언지(朴彦智), 월성대군(月城大君) 박언의(朴彦儀)등이다.

 

 

박언의(朴彦儀)

신라54대왕(新羅54代王)인 경명왕(景明王)의 8남으로 8왕자가 분봉할때, 경주 월성(慶州 月城)을 식읍으로 받아, 월성대군(月城大君)이라 불리웠고, 월성박씨(月城朴氏)의 시조가 되었다.박언의의 8형제는 밀성대군(密城大君) 박언침(朴彦忱), 고양대군(高陽大君) 박언성(朴彦成), 속함대군(速咸大君) 박언신(朴彦信), 죽성대군(竹城大君) 박언립(朴彦立), 사벌대군(沙伐大君) 박언창(朴彦昌), 완산대군(完山大君) 박언화(朴彦華), 강남대군(江南大君) 박언지(朴彦智), 월성대군(月城大君) 박언의(朴彦儀)등이다.

 

 

김위영(金魏英)

신라의 알지(閼智)를 시조로 하는 경주김씨의 분파 호장공파로, 경주지방의 호장(戶長)이었다. 김위영은 신라가 고려에 항복할때 같이 귀부하였으며, 아들 김원충(金元冲)은 정종(靖宗), 문종(文宗)의 장인이 되어 수사도(守司徒)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했다. 손자 김근(金覲)은 5품 국자좨주(國子祭酒)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을 역임했으며, 증손자 김부식(金富軾)은 인종조 고려 조정을 이끄는 재상이 되었다. 허나 연대상으로 김원충이 정종의 장인이 된해는 1040년, 문종의 장인이 된해는 1049년, 그리고 이해에 조정의 영수인 문하시중이 된것으로 미루워 적어도 김원충은 980~1000년 출생인것으로 짐작한다. 그렇다면 김원충의 부 김위영 또한 통상적으로 940~960년생인것으로 미루워 짐작해 볼때 935년 신라 패망당시 김위영은 출생치 않았을 확률이 높다 하겠다.

한편 일설에는 김위영은 신라 마의태자의 아들 김선웅(金善雄)의 손자로 보기도 한다. 경순왕의 생몰년이 881~978년인점을 감안하면 마의태자 김일(金鎰) 900~910년 출생으로 짐작하고, 김선웅의 출생년도를 920~930년으로 본다면 김선웅의 아들 김문강(金文康)의 출생년을 940~950년, 김문강의 아들 김위영이 960~970, 김위영의 아들 김원충이 980~990년이 된다. 따라서 후자의 설이 더욱 유력하다 하겠다.

 

 

 

현양선사(玄讓禪師)

비로사 진공대사(眞空大師)의 400여 제자중 으뜸으로, 939년 비로사에 건립한, 사진공대사보법탑비(毘寺眞空大師普法塔碑)에 의하면, 법을 전해 받은 제자(弟子)인 현양선사(玄讓禪師)와 행희선사(行熙禪師) 등 4백여 인이 모두 계주(髻珠)를 얻고 함께 심인(心印)을 전해 받아서 마침내 법왕(法王)의 제자가 되었으니 길이 (결락) 단심(丹心)은 금(金)과 같고, 지극한 정성은 옥(玉)과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행희선사(行熙禪師)

비로사 진공대사(眞空大師)의 400여 제자중 으뜸으로, 939년 비로사에 건립한, 사진공대사보법탑비(毘寺眞空大師普法塔碑)에 의하면, 법을 전해 받은 제자(弟子)인 현양선사(玄讓禪師)와 행희선사(行熙禪師) 등 4백여 인이 모두 계주(髻珠)를 얻고 함께 심인(心印)을 전해 받아서 마침내 법왕(法王)의 제자가 되었으니 길이 (결락) 단심(丹心)은 금(金)과 같고, 지극한 정성은 옥(玉)과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http://cafe.naver.com/goryeosa

 

 

 

 

 

1년간의 작업이 끝이 났군요.^^

당분간은 고려사에서 손을 떼야 할듯 합니다. 에너지 보충좀 해야 겠습니다.

재밌게 읽으세요^^ -2007년 크리스마스 날 길공구-

by 초령목 2011. 11. 8. 23:37


< 후삼국의 위치 연구 >


서두에

후삼국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그러나 워낙 후삼국에 대한 자료가 없어 비교검토할 수가 없다는 문제점이 있어 언급을 못하였으며 자료가 빈약하니 자신이 없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재 있는 자료만을 가지고 검토를 한 내용을 올려봅니다 !
워낙 부족한 내용이라 소개하는 정도로만 읽어주시길 바라며,
후삼국에 대하여는 같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계속연구해 나가는 과제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내용이 너무 빈약함을 밝히고 올리는 글이니 참고사항으로만 보아주시길 바랍니다

또한 이와 다른 좋은 의견이나 자료가 있다면 꼭 연락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 후삼국의 위치 연구 >


통일신라(대륙)와 독립한신라(반도) 두 신라와 고려사이에 존재했던 후삼국은 어디에 있었을까 ?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역사서는 모두 한반도내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삼국은 단기간 존재했기 때문에 명확하게 기록된 사서는 없지만 흔적을 남긴 여러 사서를 근거로 살펴보자


< 주요검토내용 >


1. 후삼국(後三國)을 기록한 사서(史書)
2. 사서의 비교검토
3. 주도(州道) 지명에서 일치성(一致性)이 없는 부분이 있다.
4. 후삼국시대의 인물검토
5. 특이한 현상(現象)에 의한 후삼국(後三國) 위치
6. 고려(高麗)의 위치는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
                       


< 후삼국을 기록한 사서 >


1) {삼국사기} (신라본기, 궁예, 견훤열전)
2) {삼국유사} (진성여왕대왕, 김부대왕, 후백제견훤)
3) {고려사} (태조본기)
4) {구오대사(舊五代史)}{신오대사(新五代史)}
5) {송서(宋書)}


후삼국이란 궁예의 태봉국(그리고 왕건의 고려)과 견훤의 후백제 그리고 신라의 세나라로 있을 때를 말하고 있는데

이 시대를 나타내는 기록으로는 정사로써 {삼국사기}가 있고 야사인 {삼국유사}에 후백제 기록이 있고 {고려사} 태조의 기록이 있으며 {오대사} 및 {송사}에 고려초기가 기록되어 있다.


고려 초기의 역사 기록에 대한 과정을 대략 살펴보면 초기의 기록이 전화(戰禍)로 없어져서 고려 {태조실록}이 편찬된 뒤에 그것을 보고 {삼국사기}를 편찬했으므로

1차 사료는 고려 {태조실록}
2차 사료는 {삼국사기}
3차 사료는 {삼국유사}
4차 사료는 {오대사} 및 {송사}의 고려기록이 된다

그런데 1차 사료인 고려 {태조실록}은 최초 기록이 분실되어 1033년에 다시 편찬되었으므로 그것이 최초의 것과 같은가 다른가 하는 점과 어느 신라를 계승한 고려 기록인가를 분명히 가릴수 없다는 점이 사실상 문제의 촛점이다

더 어려운 점은 궁예 및 견훤에 대해서 {25사}에 전혀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국25사}가 삼국 이전에도 한반도를 기록했다고 한다면 당연히 궁예와 견훤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음직한데 전혀 없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만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왕건과 궁예와 견훤의 기록에서 한반도 상황으로 볼 수 없는 부분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며 연구과제이다.


이제 위의 사서를 비교 분석하여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

 

< 사서의 비교검토(신라말과 高麗초기의 기록을 중심으로) >


{고려사}에서 1033년 "7대 실록"이 편찬된 이후에는 자연현상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지만 그 이전은 없다. 

신라 7 ~ 8세기 일식의 관측지 연구에서도 한반도 중심의 기록임이 분명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7대실록}이 편찬되기전 100년의 기록이 문제이다. 
초기 실록이 없어져서 1033년에 새롭게 편찬되었는데 이 곳에는 자연현상에 대한 기록이 없는 등 실제와 다를 수도 있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음을 느끼게 한다.

즉,
< 1) 고려 {태조실록} 과 {삼국사기}의 신라말 관계부분 > 


(가) 고려 {태조실록} 과 {삼국사기} 관계부분은 서로 영향을 미칠수 있다

행적이 같으니 서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문제는 『태조실록』이 『삼국사기』에 영향을 미치느냐 아니면 『삼국사기』가 『태조실록』에 미칠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고려초기와 신라말은 같이 존재했던 시기이니 당연히 관계가 있는 내용은 같은 내용으로 기록될 수 밖에 없다


(나) 초기 {태조실록}은 언제 편찬되었을까?

사관(史館)과 사관(史官)이 설치된 때가 광종 이후로 보여지며 현종(1009-1031년)초 소실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사}에서)

초기 {태조실록}이 없어지고 다시 편찬된 {태조실록}에는 자연현상등 과학적으로 그 시대를 밝힐수 있던 자료가 부족하고 또한 중국에 있던 통일신라 및 한반도에 있던 신라와 후삼국에 대한 의문점을 밝혀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 1033년에 편찬된 {태조실록} 과 초기의 원(原) {태조실록}은 다를 수 있는가?

① 1013년 이전에 자연현상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니 기억을 되살리듯 쓴것이 있다.

{태조실록} 은 일식 기록 등 자연현상에 대한 기록이 적다는 것(일식 처음 1013년. 흑점 1009년)과 전쟁으로 자료가 유실된 상태에서 기록한 것이므로 다를 수 있으며 신라가 한반도에만 있다고 생각한 이후의 작품으로 보여지고 있으니 다르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② 김부식은 『예종실록』(1105-1122년사이)을 편찬하고 그후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김부식은 {예종 실록} 을 편찬하여 보고 송나라에 다녀온 이후 우리역사가 미진하므로 송나라에서 수집한 기록과 한반도에 있는 기록을 종합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라) 새로운 {태조실록} 이 {삼국사기}에 영향을 미쳤을까?

{태조실록} 이 편찬된 이후에 {삼국사기}가 편찬되었으니 당연히 영향을 미칠수 있다.
{태조실록}은  덕종 3년(1033년)에 황주량에 의해서 36권이 완성되어 편찬되고 {삼국사기}는 1145년에 편찬되었으니 후삼국관계 기록은 앞에 편찬된 기록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삼국사기}는 삼국시대를 기록한 것이나 신라말기의 기록은 1033년에 편찬된 새로운 {태조실록}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새로운 {태조실록}은 없어진 자료 때문에 1033년경의 고려상황에 맞추어 기록하였을 것이다.


(마) {고려사(高麗史)} 태조본기와 {삼국사기}의 차이점

고려 이전에 우리역사는 사, 로(泗 盧) 즉 영, 해(寧 海)지역에 있던 통일신라와 반도에 있던 신라로 구분되어 있으며 북쪽에 있던 발해와 이주(夷洲 : 지금의 대만)땅에서 왜(倭)가 일본이란 국호로 변경된 이후 시대 이므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차이점은 당연히 있었을것으로 사료된다.

 

 


{삼국사기}는 {고려사}와 서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위의 도표에서는 내용이 분명히 같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끝 내용을 밝혀줄 고려초기 {태조실록} 이 없는 상황에서 진실여부을 가릴수 없는 부분이다.

다음내용은 주의깊게 검토되어야 할것이다.

① 내용을 보면

㉠ 같은 내용이 시기가 다르게 기록된 것 : 918, 922, 923, 927년
㉡ 문자가 다른 것 : 918, 920, 927, 928년
㉢ 다른 시기가 같은 시대로 기록된 것 : 922


② 같은 달, 같은 해 같은 내용임에도 지명이 각각 대야성(大耶城)과 대량성(大良城)으로 다르다.

"삼국사기"에서 대야성(大耶城)에대한 기록

진흥16년 정월 비사벌(比斯伐)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
진흥26년  9월 완산주를 폐하고 대야주(大耶州)를 설치하였다.
선덕11년  8월 윤충이 대야성(大耶城)을 쳐 함락, 춘추의 딸도 죽고 부군 품석도 죽다.
효공 5년  8월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공격
신덕 5년  8월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공격
경명 4년 10월 견훤이 1만명으로 대야성(大耶城)을 쳐 함락하고 진예성(眞禮城)에 진군

☞ 대야성(大耶城)의 기록이 {삼국사기}에는 있으나 {고려사(高麗史)}에는 대량(大良)으로 되어 있고 현재 한국지리지에는 없으나 옛 강주(康州)가 있던 중국광동성 광주(廣州) 남쪽에 지금도 대량(大良) 즉 순덕(順德)이 있다.


☞ 비사벌-완산주(진흥16)-완산주폐지(진흥26)-대야주설치(진흥26)-완산주(신문왕)
현재 한국에는 완산(完山)이 있고 안휘성에는 완산(莞山)이 있다.


(바) {삼국사기}와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동신성모상(東神聖母像)
(김부식의 동모신선상과 {고려도경}의 동신성모지당)


김부식이 송에 다녀온 (1111-1117) 이후 {삼국사기}는 1145년에 편찬되고 {고려도경}은 김부식이 송에 다녀온 이후 고려에 왔던(1123) 서긍이 지었는데

김부식이 송에 가기전에는 몰랐던 동모신선상을 서긍이 왔을때 고려에 모셔졌다는 것은 김부식이 다녀온 이후 새로 모신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로 미루어보면 송나라에서 가져온 동이(東夷) 기록이 우리역사를 정리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왕이 정화년간(政和年間)에 우리(高麗) 조정에서 상서(尙書) 이자양(李資諒)을 송(宋)으로 파견하여 조공하게 되었는데 이때 김부식이 문한(文翰)의 임을 맡고 수행하여 우신관(祐神?)이란 곳에 가서 여선(女仙)의 상(像)을 모신 일당(一堂)을 보았는데

관반학사 왕보(?伴學士 王乷)가 말하기를 "이것은 귀국의 신인데 공 등은 아시오?"하며 말을 이어 "옛날에 어떤 제실에 여자가 있었는데 부군이 없어 아이를 배어 사람들의 의심하는바 되자 곧 배를 타고 진한에 이르러서 아들을 낳았다. 

이가 해동의 시주가 되고 제녀는 지선이 되어 오래도록 선도산(仙桃山)에 있었다고 하는 바 이것이 곧 그 상이다. 

나는 또 대송국신사 왕양(大宋國信使 王襄)이 지은 동신성모제문(東神聖母祭文)에 어진 사람을 낳아 나라를 창시하였다." 는 구절을 보았는데 이 동신이란 곧 선도산신(仙桃山神)의 성자(聖者)임을 알 수 있으나 그 아들이 왕이 되었다는 것이 어느 때의 일인지 알지 못하겠다.  지금 다만 그 고사를 생각한다.


{고려도경} 제 17권 동신사(東神祠)

선인 문안에 있다. 
동신성모지당(東神聖母之堂)이 개성에 있었다는 기록이다. 
김부식이 송나라에 가기전 있었다면 모를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동신사는 김부식이 송에 다녀온 이후에 모셔졌을 것이고 뒤에 사신으로 개성에 온 서긍이 보았을 수 있는 것이다.


< 州, 道, 지명에서 일치성이 없는 부분이 있다 >


1) 신라9주 이외의 주명이 있다

후삼국시대에 신라 9주의 주명(州名)은 명주,전주,상주,무주,강주,양주,한주,삭주,능주(溟州,全州,尙州,武州, 康州, 良州,漢州,朔州,能州)이다.

- 본기에서 신라9주 이외의 주 : 운주, 연주, 순주, 치주, 해주(運州,  州, 順州, 淄州, 海州)
- 견훤전에서 신라9주에 속한 주명 : 상주,전주,완산주,강주,무주(尙州,全州,完山州,康州,武州)
- 견훤전에서 9주이외의 주 : 진주, 염주,백주, 정주,순주, 양주,(眞州, 鹽州,白州, 貞州,順州, 楊州) 완산주,무진주
- 궁예전에서 신라의 9주에 속한 주 : 상주(尙州)
- 궁예전에서 신라 9주 이외의 주 : 광주,충주,흥주,나주,죽주,양주,공주,견주,청주(廣州,忠州,興州,羅州,竹州, 楊州,公州,見州,靑州)
- {고려사} 초기(935년 이전) 신라 9주이외의 주 : 개주, 정주, 염주,백주,광주,충주,청주, 광주,나주,동주,운주,아주,등주,해주,용주,강주,기주,양주(開州,貞州,鹽州,白州,廣州,忠州,靑州,光州,羅州,東州,運州,牙州,登州,海州,龍州,剛州,基州, 楊州)


위와 같은 신라 9주 이외의 州명칭이 현재도 있는 것

- 한국 : 광주,충주,나주,양주,공주,청주,광주,해주,전주,상주
- 중국 : 광주,충주,라주,양주,청주,광주,해주,전주,등주,치주,백주

신라의 9주는 백제와 고구려를 패망시킨 신라의 "주"이므로 이 신라의 위치는 지명, 조공일정, 특산물생산지, 홍수, 일식관측지, 인구비교 등에 의해서 현 중국의 강회(江淮)지역에 있던 신라임이 밝혀지고 있으므로 9주 이외의 주명이 있는 것이 한반도 신라의 주명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도 있다.


2) 행정기록과 실제의 주현(州縣) 명칭이 다른 것이 있다


{고려도경} 3권 군읍 항목에 이르기를 '주현의 설치는 실제와 명칭이 맞지 않는다. '

앞에서 {고려사}에 소개된 도명과 다른 도명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였는데 군읍에서 주현의 명칭이 실제와 기록이 다르다고 하였다.

이는 황해 서쪽에 있던 신라 기록과 한반도에 있던 신라 즉 두 신라 기록을 하나의 기록으로 보고 정리하고 이를 바로 고려에서 인용하다 보니 실제와 기록이 다르게 되어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3) 고려의 도명(道名)에서 이상부분이 있다


고려 초기 도명에 없는 도가 {고려도경}에 있다.
고려시대 도명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그와는 다른 도명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지리지에 문제가 있음을 뜻한다.

① {고려사} 권56에서 고려의 도(道)와 {고려도경}에서 성종(981-997)때 10도는 관내도, 중원도, 하남도, 강남도, 령남도, 령동도, 산남도, 해양도, 삭방도, 패서도이고
현종(1009-1031)후 5도 2계 즉 양광도, 경상도, 전라도, 교주도, 서해도, 동계, 북계가 있었다. 

그런데 1123년 서긍이 쓴 {고려도경}권 3에서는 봉분(封墳)에 나주도, 광주도, 연산도(羅州道, 廣州道, 燕山道)가 있었다고 기록하였고 군읍에는 주현(州縣)의 설치는 실제와 명칭이 맞지 않고 취락이 번성한 곳일뿐이라 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 (최초 선화5년)

- 1127년 서주빈(徐周賓)이 빌려갔으나 분실
- 1137년 강서성 남창현 홍주에서 해도 2권만 발견
- 1167년 건도본(乾道本)제작
- 포정박(1728-1814) - 건륭(1735-1795)때 건도(乾道)발견 - 1921년 영인발행함

☞ 건도(乾道)는 1167년 송(宋)년호이다.

건도본은 서긍의 "고려도경"을 운남성 징강현인화조씨소산당에서 40권을 판각하여 출판하였고 이를 건도본이라 칭함 위에 {고려도경}에 소개된 도명은 {고려사(高麗史)}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서긍이 잘못 기록할 수도 있고 {고려사}의 기록과 다른 도명이 있을 수도 있다.


3) 지명에서 이상 부분이 있다


(1) 고려태조 훈요 10조에 있는 차현(車峴)은 어디인가 ?

{고려사}의 태조 훈요10조에서
차현(車峴)과 공주강(公州江) 이남의 인물은 등용하지 말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차현과 공주강에 대하여 살펴보자.
차현으로 표기된 곳은 없고 현재 차현(車峴)을 차령(車嶺)으로 풀이하고 있는데 차령은 한국에는 천안과 공주 사이 차령산맥으로 보고 있고 중국에도 안휘성 함산현(含山縣)에 있다고 하였다. 

중국 함산의 북쪽에는 평원 백마하 동명 주류성 항성이 있고
서쪽으로 동성 잠산 독산 덕안 무령 광주 나주 등이 있고
남쪽에는 진해 무주 정주 광주 대량 강주 등이 있다.

웅주를 940년에 공주로 변경하였다고 하였으나 기록에는 주현의 명칭을 고치다라고만 되어 있는데 3년 후 공주강(943년 훈요10조에)으로 표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지리에는 웅주를 분주로 고쳤다고 하였으니 분주와 웅주와 공주가 같다고 볼수가 없다.

그러므로 차현과 공주강으로 왕건의 위치를 살펴보는 것도 더 자세히 연구가 되어야할 사항이라 하겠다


(2) {송사} 고려지역은 고려전(高麗傳)에서 구주속기주(九州屬冀州) 및 현도(玄 )지역으로 표기되고 있으니 고려초기 수도와의 관계는 없는가 ?


{송사(宋史)} 외국 고려전(外國 高麗傳)에 의하면 고려는 우(禹)의 구주(九州)인 기주(冀州)에서 고구려(高句麗)를 이어가는 나라로 현토(玄 )지역에 있다고 하였는데 송나라 제작 우적도에서 "기주"는 태행산맥 북쪽이고 현재의 기주는 하북성중부 석문의 동쪽에 있다.

현도는 고구려의 북평 태원 은산 신성과 옥저의 해주 사이에 있었으니 현 하북성 북쪽이 현도가 될 수 밖에 없으므로 기주와 현도의 관계에 의하면 고려의 초기 건국 위치에 의문이 있을수 있으며 의문의 주와 인구 등에 의하여 수도는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10세기 이후의 고려 수도는 개성임이 일식관측지 연구에서 확인되고 있으니 10세기 이전인 고려 초기의 수도 위치와 후삼국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3) 벽골지 축조 이후와 신라말 견훤시대 지명이 같지 않다.
(김제는 산동성 동명 남쪽에도 있고 전라북도에도 있다)


김유신 탄생지라는 진천, 흘해왕때 축조되었다는 벽골지가 있는 김제, 진흥왕때 설치되었다는 완산주와 같은 완산의 전주, 신라에서 사독지라 하여 제사 지내던 청해진이라는 완도 등이 있는 전라도 지역에는 벽골지를 축조한 320년 이후에 신라와 백제의 전투기록이 있었으므로 당연히 신라말과 같은 지명이 등장 할 수도 있으나 없다.

즉 견훤과 신라 및 고려의 전투지명과 같지 않다.
왜 일까?

김제의 벽골지가 진짜 삼국시대 벽골지이고, 전남 완도가 진짜 청해진이고, 전라도가 백제본토와 후백제 지역이라면 사서의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벽골지 축조 이후나 후삼국시대의 지명이 같은 것은 있어야 하며 전라도가 백제에게 빼앗긴 기록이 있어야 하고 다시 신라가 빼앗은 기록이 있어야 한다.

{25사} 및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등장하는 모든 기록이 일치하는 중국내의 삼국 즉 우적도 범위에 일치하는 역사를 부정할수 있는 반증을 해야 하고 한반도에서 후삼국과 일치되는 설명이 되어야 한다.


(4) 신라 수도 금성과 왕건 부친의 금성은 다른가 ?


금성은 신라 초기부터 수도로 기록되고 있다. 
궁예가 있을때는 물론 신라의 수도 명칭이 금성이 아니고 월성 및 명활성이라 하였으나 {신 구당서}에는 신라 수도는 금성으로 되어 있는데 궁예의 부하이며 왕건의 부친인 왕륭이 태수로 있던 곳이 금성이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

금성이 신라 초기의 수도였다가 신라가 망하고 경주로 변경시켰다고 하였으나 {신 구당서}에서 신라 수도는 금성으로 되어 있다. 

지금까지 중국에 사로신라가 있었음이 지명 특산물 일식등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1660년 발행 {천하고금대총편람도}에 지금의 사로(泗盧)지역인 덕안의 동쪽에 경주가 있었으나 지금은 회원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지금 경상도에는 경주가 있다. 

그렇다고 하여도 {중국25사}에 있는 신라 수도 금성을 반도로 옮겨 올수는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신라의 수도 금성이 어디이며 왕륭의 금성이 어디인가하는 점이다.

왕건의 부친 왕륭이 태수로 있던(896년) 지역인 금성은 과연 어디였을까 ?  
신라와 같은 시대에 있었으며 궁예의 부하이므로 신라 수도 금성(金城)과 같은 곳일 수는 없다.


(5) 개성과 송악과 開州는 같은 곳인가 ?
(高麗 초기 수도 위치는 어디인가?)

초판 {태조실록}도 없고 {7대실록}도 없고 {고려사}에 의한 고려역사와 신라말기에 기록을 믿을 수 밖에 없으나 사서대로 믿을 수 없는 것은 {송사}와 {고려사}와 {삼국사기}에서 차이점과 인구의 차이로 미루어 고려의 초기 수도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 송악과 개성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 >


효소왕 3년(639) 겨울 송악, 우잠(松嶽 牛岑)의 두성을 쌓다.
성덕왕 12년(713) 12월 개성(開城)을 쌓다.
헌강왕 3년(878) 고려 태조 왕건 송악군(松岳郡)에서 태어남.
효공 2년(898) 궁예가 수도를 송악군으로
효공왕 9년(905) 궁예가 도성을 철원으로 옮김.
경명왕 2년(918) 고려 태조 즉위
경명왕 3년(919) 도성(都城)을 송악군(松岳郡)으로 하다.

☞ 송악(松嶽)과 송악(松岳)은 같은가 그렇지 못한가 ?
☞ 송악과 개성(開城)은 같은가 다른가 ?
☞ 개성과 개주는 같은가 다른가 ?


(6) 고려가 사신(使臣)을 보냈는데 사신의 기록에서 지명
(고려가 보낸 사신 박암과 왕봉규시대 지명이 중국에는 있다.)


① {신오대사}에서

동광원년(923)에 오월국문사(吳越國文士) 박암(朴巖)을 고려에서 후당에 보냈다.
오월과 가까운 곳에 고려 신라 지명인 강주, 대양, 회화, 고, 울, 백, 완산, 나주(康州, 大良, 懷化, 高, 鬱, 白, 莞山,羅州), 황산등이 있다.


② 후당(後唐)역사라면 신라본기에 수록되겠는가?

☞ 경명왕 8년(924) 정월

사신을 후당으로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천주(泉州)절도사 왕봉규도 또한 사자를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다.
(遺使入後唐朝貢泉州節度使왕봉규亦遺使貢方物)


☞# 경애왕 4년(927) 3월

3월에 황룡사탑이 搖動(요동)하여 북쪽으로 기울어졌다.
고려태조는 후백제와 싸워 친히 近嶽城(근악성)을 격파하였다. 
후당 명종은 權知康州事 왕봉규(권지강주사왕봉규)를 懷化大裝軍(회화대장군)으로 삼았다.

4월에 권지강주사 왕봉규는 사신 임언을 후당으로 파견하여 조공하니, 후당 명종은 그를 중흥전에 불러대하여 물자를 하사했다. 

康州(강주) 소관인 突山(돌산)등 네 고을이 고려 태조에게 歸順(귀순)하였다.
(太祖親破近巖城唐明宗以權知康州事왕봉규爲懷化大裝軍
4월知康州事왕봉규遺使임언入後唐朝貢明宗召對中興殿賜物康州所管突山等四鄕歸於)

☞ 왕봉규는 신라인인가 아니면 당나라 사람인가 ?
☞ 왕봉규가 당인(唐人)이라면 그 사실이 신라사에 적힐 이유가 있는가 ?
☞ 왕봉규가 신라인이라면 인사권을 당에게 빼앗긴 것인가 ?
☞ 천주, 강주, 회화(泉州, 康州, 懷化)는 광동성 호남성에 있는데 그 일부가 고려 태조에게 귀순될수 있는가 ?


(우리나라 지도에는 강주, 천주, 회화의 지명이 없으나 중국에는 광동성 강주, 대량과 함께 있다.)


4. 후삼국 시대의 人物검토


1) 왕건이란 이름을 가진 인물이 중국인명사전에 있다
 

# {구오대사} 136

전촉-왕건진주항성인야 연건지유자야 건졸연습위위
(前蜀-王建陳州項城人也 衍建之幼子也 建卒衍襲僞位)

# {오대사} 63   

전촉-왕건자광도허주무양인야
(前蜀-王建字光圖許州舞陽人也)

# 중국인물사 

후위 - 광영인 관종  기청이주자사
(後魏 - 廣寧人 官終  冀靑二州刺史)
당--- 영천인자중초
(唐--- 潁川人字中初)
전촉 - 무양인 건분촉    
(前蜀 - 舞陽人 建奔蜀)    


여기서 주목되는 인물은 "촉"의 임금 왕건이 고려태조와 같은 시대 인물이라는 점이고
그의 출생지가 주(周)와 고조선의 경계인 서화가 있는 지역이고,
당(唐)과 통일신라의 경계인 항성(項城) 출신이라는 점이다. 
항성은 신라땅이다. 
그런데 촉나라 임금이 되었다. 

그가 죽은 해에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위 두사람을 한 사람으로 보고 {고려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
또한 {삼국사기} 에도 미치지 않았을까 ? 
하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다.


2) 견훤에 대한 기록도 여러가지 이다
진성6년(892)에서 936년까지 45년간


(1) 견훤의 출생에 대한 설이 많다는 것은 그의 활동 위치에 대한 의문과 함께 증폭되고 있다.  적어도 이 시대는 인간이 존재하던 시대이고 신화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견훤은

☞ {삼국사} : 견훤 이씨-견씨(李氏-甄氏) : 아자개 4남을 둠 견훤도 그 중 하나
☞ 이비가기(李碑家記) : 진흥대왕(504-578)과 백륭부인의 아들 구륜공-선품-작진과 왕파리가 원선(아자개)을 낳고 아자개는 견훤을 낳다
☞ 고기(古記) : 광주 북쪽 한부자의 딸과 지렁이에게 견훤이 출생
견훤에 대한 기록에서 차이점이 많다. 

이것은 천년전의 일이므로 더욱 의아스럽다.


(2) 신라9주와 다른 주명이 있고 견훤의 활동지명도 중국에 있으므로 그의 활동무대를 반도라고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신라의 9주와 또다른 주명이 있고 대량(大良) 즉 대야(大耶)라는 지명이 중국에는 있고 반도에는 없으며 강주(康州)도 중국 고지도에는 대량 근처에 있는데 지금은 남강이 근처에 있고 또 광주(廣州)가 근처에 있다. 

그러므로 견훤의 활동위치도 자세히 알수가 없다. 
({고려사}에는 대량(大良)이라 하고 {삼국사기}에는 대야(大耶)로 기록되어 있다.)


(3) 견훤의 아버지가 고려(高麗)에 항복했다고 하는데 아자개와 견훤의 관계 기록은 견훤과 그 아들과의 관계 기록에 못미치고 있다.

☞ 아자개는 경명왕2년(918)에 고려태조에 귀순했다(삼국사기, 고려사)고 기록하고 있는데 견훤의 아버지가 아자개라면 아버지는 항복하고 아들은 반역하고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 

그런 일이 있다면 왕건으로부터 아자개에게 아들을 설득하라는 기록이나 그와 비슷한 기록은 왜 없을까?

(4) {중국25사} 에는 궁예 견훤의 기록이 없으니 반도 기록(?)

궁예에 대하여 {중국25사}에는 기록이 없고 {삼국사기}에만 있으니 반도에서 활동한 것으로 볼수도 있으나 고려태조 왕건 기록이 분명하지 않으므로 중국에 없다는 것으로 반도 기록이라 못 박을수도 없다.


5. 특이한 현상에 의한 후삼국 위치


1) 궁예와 도적들의 복장
(진성5년(891)에서 경명2년(918)6월까지 28년간)

☞ 효공왕9년(905)赤衣賊 黃衣賊이 궁예에 항복하다.
☞ 진성10년(896) 赤袴賊이 서울 서쪽까지 침입


(1) 궁예와 관계된 의문점---도적들의 착용 의복의 색깔

어떤 형태의 유행이던 언젠가는 되풀이 되고 있다. 
도적들이 자기들의 집단표시로 일정한 복색을 하고 다녔다면 그것은 어떤 지역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땅이 좁은 곳에서는 도적이 창궐한다 하여도 일정한 복색을 하고 있을수 없다. 
일정한 복색을 하고 다녔다면 그것은 광활한 지역에서나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한족 역사에는 홍건적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한 1033년 이후에 한반도에서 복색을 같이 한 도적의 기록은 없다. 

궁예와 신라에서 도적들이 이상한 복장을 하고 다녔다면 이것으로 궁예가 있던 지역을 가늠 할수도 있을 것이다.


2) 高麗 및 조선 인구의 차이와 高麗 초기 실록과의  상관관계

인구는 전쟁과 병마로 준다하여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많아진다. 
자연세계에서 약육강식에 의해서  사라지는 종도 있지만 인간은 지금까지 번창하여 왔다.  한부족이 없어진다 하여도 그 땅에는 새로운 인간이 들어와 매우고 있는데 우리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역사에서 삼국시대 인구의 기록으로 살펴본바 조선초기의 인구 기록으로는 도저히 상상할수 없는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비교적 인구의 조사가 잦았으므로 기록에 의하면 조선초기 인구는 약 50만(북쪽양계 빼고 37만) 정도로 되어 있다. 

그런데 고려 수도 인구는 13만이고 전체 고려인구는 210만명(송사)으로 되어 있으니 조선의 강역보다는 더 넓은 지역의 고려땅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 초기 실록이 없어진 것과 어떤 관계는 없을까 ?

7대 실록이 편찬된 1033년 고려 강역의 영향을 받아서 고려 기록이 잘못 기재되고 그로 인하여 {삼국사기}가 김부식시대의 고려강역에 맞추다보니 그렇게 된것인가
우리는 두 신라와 후삼국에 대하여 보다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6. 고려의 위치는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


1) 고려 태조가 한반도에서 건국을 하였다하면 다음을 어떻게 설명 할 수 있을까 ?

☞ 중국에 있던 사로신라가 통일후 만든 행정조직 9주 명칭이 관계없는 지역에서 사용된 이유
☞ 광동성 지역인 강주(康州), 광주(廣州), 대량(大良) 등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는 기록은 어떻게 설명하며 절강성 영파에 있는 '고려사관유지'는 무엇이라 설명해야 하는가 ?
☞ 견훤은 고려 사람이 진호를 고의로 죽였다하여 백제 고도인 웅진으로 진격하였다 하였으니 웅진의 위치가 한반도에 있다고 해야 할것이지만 {25사}와 우적도 및 중국지도가 있는 한 웅진을 한반도로 옮길수는 없는데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929년)
☞ {송사}에서 우(禹)의 9주중 하나인 기주(冀州)와 현도 지역에 있었다는 고려는 어떻게 설명할까 ?
☞ 조선인구보다 많은 고려 인구가 살던 지역을 어떻게 설명 할수 있을까?


1) 고려태조가 중국에서 건국하였다면 한반도 고려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려사에 의한 1013년 이후의 고려의 일식관측지는 경기도 개성을 중심으로 한반도로 밝혀졌다.

☞ 중국에 있던 고려가 언제 무대를 옮겼다고 하겠는가?
☞ 궁예와 견훤에 대한 기록이 왜 {중국25사}에는 안보이는가?


3) 고려 태조 기록은 여러 자료가 있으므로 신라말과 고려초기 기록은 전체에 의해서 규명되야 한다.

☞ 고려의 건국지를 어디로 보아야 하는가?
또한 궁예의 태봉국과 견훤의 위치에 대한 것도 새롭게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 맺음말 >

우리역사는 의문투성이다
어찌 이 방대한 역사를 일개인이 밝힐 수 있겠는가 ?
이러한 문제점, 의구심에 대한 연구를 학자들이 깊이있게 연구하고 밝혀야 한다
이미 연구해 놓은 자료만 가지고 평생 먹고 살수는 없는 것 아닌가 ?

미흡한 내용 끝까지 읽어주시어 감사드리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 체계적인 자료, 과학적인 자료가 될수 있도록 노력할것임을 약속드리면서 이만 줄입니다

감사합니다
 


by 초령목 2011. 5. 28. 14:05

상주의 맹주 아자개

우리는 드라마 태조왕건에서 아주 코믹한 인물로 나오는 아자개란 인물을 재미있게
보고 있다. 고려사 기록을 보면 "상주 적수 아자개가 사인을 보내서 내부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당시 그 아들인 견훤은 강력한 정부를 구축하여 대백제국 황제의 자리에 있으면서
욱일승천의 기세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데 그 아버지가 적국인 고려에 귀부했다는
사실은 상당히 미스테리한 사건이다.

드라마에서는 계모인 남원부인이 들어오고 그 불화로 아자개와 견훤의 사이가
급속히 나빠지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아자개의 귀부는 상당히 의아한
사건이다.

그래서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은 고려사의 아자개를 견훤의 아버지가 아닌
또 다른 상주 호족인 동명이인 아자개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자면 당시의 정황과 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자개의 세력권이던 상주 지역은 고려와 신라를 연결하는 요지로써 고려군의 공격이
지속되고 있었다.
여기에는 견훤군도 참여하여 방어 전쟁을 벌이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상황에서 아자개는 아들의 적인 고려에 귀부하는 미스테리한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를 설명하는 경우의 수를 살펴보자.

첫 번째 가정은 드라마에서 그리는 것처럼 부자간의 갈등으로 인해 발생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중간에 계모가 개입되서 부자간의 사이가 악화되어 차라리 적국으로 귀순해버리는
극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드라마에서 아자개의 병을 고쳐주어 생명의 은인에 대한 대가로 귀부를 한다고 그리고 있지만 이는 상당히 허구적 요소가 강하며 그다지 신빙성있는 분석은
아니다.

두 번째는 당시 접경 지역에서 주둔하고 있던 고려군의 잇따른 공격으로 상주 일대의
방어 전선이 점점 약화되었을 가능성이다.
고려군의 지속적이면서 잇따른 공격으로 인해 상주전선은 점차 약해지고 있었으며
점차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어지면서 고려측의 포섭작전도 또한 병행되었을
가능성이다.

그 지속적인 포섭활동의 주역은 드라마 상에서 박술희가 아니라 아자개와 예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허월대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 건국에서 허월의 역할을 참으로 큰데 그는 궁예 정권 시절에도 내원에서 계속
업무를 관장하였으며, 궁예를 몰아내는 정변이 있은 후 곧이어 일어난 명주성 성주
김순식의 저항에도 밀사로 파견되어 김순식을 귀부케하는데도 기여한다.
그 일로 인하여 왕건은 그 고마움을 잊지못해 허월에게 왕씨 성을 하사하여 의제가족을맺게 되는 것이다.
아자개 귀부에서도 아마 귀부를 종용하게 한데는 허월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여겨진다.

세 번째는 아자개가 연로해지면서 그 후계 문제와 상속을 둘러싼 백제 왕인 견훤외에
또 다른 아들들인 용개, 보개간의 상주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싼 상속 분쟁의 가능성이다.
당시 상주 지역은 전략적 요충지임과 동시에 비옥한 토지였으므로 상속 문제에 있어서 배다른 형제들인 견훤 형제와 용개, 보개 형제들 간의 상속 다툼이 치열했을
것이다.
그러나 힘으로야 본다면 견훤 세력이 막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상속의 가장
우선시할 수 있는 합법성의 원천은는 아버지인 아자개의 의향일 것이다.
아자개의 의도가 상주지역의 상속 문제를 결정짓는 가장 근본 요소일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견훤이라도
힘으로 대처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견훤 형제들과 용개 형제들 간의 다툼 속에서 아자개는 적잖이 후계 문제를
놓고 고민을 했을 것이며, 캐스팅보트를 쥔 사람이자 용개 형제들의 편을 들고 있는
남원부인과의 사이에서 고민과 고민을 거듭하다가 아자개는 모든게 귀찮아서 아예

고려로 귀부하였을 가능성이다.

이 가능성은 상당히 신빙성 있는 가능성으로써 그의 아들인 견훤도 훗날 똑같은
과정을 겪었다.

이복형제들인 신검파 세력과 금강파 세력간의 갈등 속에서 급기야 유폐되고야 마는
상황에서 고려로 귀부해 버리는 이 상황이 어쩌면 아버지의 선례를 따랐을 가능성도
배제는 못하는 것이다.

네 번째로는 위의 모든 가정을 원상태로 돌리는 것으로써 고려사에 나오는 상주 괴수
아자개는 견훤의 아버지도 아니고,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는 또 다른 이름의 동명이인일 뿐이라는 것이다.

귀부하는 아자개는 상주를 다스리던 호족이고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는 이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아자개는 고려에 귀부하여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고려 태조가 이를 얼마나
반겼던지 대대적으로 연회와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반대로 견훤은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겪었을 것이다. 여기서 정치 세계의 비정함이
나타나는데 부자간의 정마저도 정치 현실에서는 등을 돌리고 마는 것이다.
훗날 아자개가 고려에 귀부한 것처럼 견훤 역시도 아들들과의 다툼 속에서 고려로
귀부하고 마는데 이 역시 부전자전이 아닌가? 무릇 큰일을 하려면 가정의 화목부터
출발하라고 하는데 견훤은 이런 면에서는 부족했나보다.

어쨌든 아자개의 귀부는
당시 후삼국의 정세를 바꿀 엄청난 사건이었다. 아자개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을 비롯해서 총 네명의 아들의 아버지로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 사람입니다. 본래는 농부이죠. 신라 말의 혼란기를 틈타서 군사를 일으키고, 사벌국고성에 웅거하였습니다. 918년, 궁예 휘하에 있던 왕건이 왕위에 그에게 오르자 항복하죠.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이제가기(記)라는 책에 따르면, 신라 진흥왕의 아내인 사도 왕후의 셋째 아들인 구륜공이고, 구륜공의 아들은 선품이며, 선품의 아들은 작진이 왕교파리를 아내로 맞이해서 낳은 아들이 아자개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제가기에 따르면, 아자개에겐 두 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첫째는 상원부인, 둘째는 남원부인이라고 합니다. 총 5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이 있었는데 장남은 견훤, 둘째는 능애, 셋째는 용개, 넷째는 보개, 다섯째는 소개이며, 딸은 대주도금이라고 합니다.

아자개(阿玆蓋)
생몰년 미상. 신라말·고려초 상주지방의 장군. 아자개(阿慈介)·아자개(阿慈个)·아자개(阿字蓋) 또는 원선(元善)이라고도 한다.
가계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2 후백제견훤조에 인용된 《이제가기 李磾家記》에 의하면, 아자개는 신라 진흥왕과 사도부인(思刀夫人) 사이에서 태어난 구륜공(仇輪公)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리고 부인으로는 상원부인(上院夫人)과 남원부인(南院夫人)이 있었으며, 자식은 5남1녀(혹은 아들 4형제라고도 함.)가 있었으니 장남이 바로 견훤(甄萱)이라고 한다. 《삼국사기》 권50 견훤전에서도 견훤의 아버지가 아자개로 되어 있다. 아자개는 처음에는 농업에 종사하였지만, 신라 하대의 혼란기에 전국 각지에서 농민을 포함한 지방세력이 봉기하자, 그도 885년(헌강왕 11)∼887년(진성여왕 1)에 사불성(沙弗城: 지금의 상주)을 근거지로 군대를 일으켜 장군을 자칭하였다.
그뒤 그의 아들인 견훤이 892년 무진주(武珍州)를 점거하고, 900년(효공왕 4) 완산주(完山州)를 근거로 후백제를 세운 이후에도, 아자개는 계속해서 상주지방에 웅거하고 있었으며, 918년(태조 1) 7월에 마침내 고려에 항복하였다. 다만, 《고려사》 태조 1년 9월 갑오조에는 9월에 항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같이, 아자개가 견훤과는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바, 이 때문에 견훤은 아자개의 아들이 아니며, 양자는 출신지방만 같을 뿐 전혀 별개의 지방세력이라는 견해도 있다





by 초령목 2011. 2. 12. 23:17

한국사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내부에서의) 전쟁이 많았던 시대를 꼽으라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삼국시대를 꼽을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힘이 대등한 세 국가가 한반도와 만주 전역에서 600여년에 걸쳐 힘을 겨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삼국이 정립되기 이전의 수많은 국가들은 군장국가, 연맹국가의 수준에서 아직 고대국가의 반열에 들지 못했던 수준의 소(小)국이었기에 삼국시대의 역동성을 가졌다고 보기 어렵다. 신라가 대동강 이남 지역을 통일 한 후 지속되었던 남북국 시대의 경우에도, 발해가 멸망하고 신라가 분열될 때까지 큰 영토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고려, 조선 등 통일국가가 수립되어 지속되어 온 것을 본다면, 삼국시대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흥미로운 시대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실 우리 역사는 또 한 번의 분열기를 가지고 있다. 또 하나의 삼국시대, 후삼국시대이다. 멸망의 조짐이 보이던 신라에 대항해 후백제, 고려라는 이름에서도 볼 수 있듯 각각 백제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들이 한반도에 자리를 잡은 배경만 본다면 이 기간을 후삼국시대라고 부를 만하다. 그런데 이 시대가 지속되었던 기간을 본다면, ‘시대’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짧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원년(서기 0년)을 전후로 건국되었고, 이 국가들은 신라가 삼국통일 후 676년 당나라를 매소성, 기벌포 전투에서 물리칠 때까지 약 6~7세기동안 세력다툼을 하게 된다. 이에 비해 궁예와 견훤이 스스로를 왕으로 칭한 서기 900년 경부터 신겸의 항복으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936년까지, 후삼국시대는 약 40여년밖에 지속하지 못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들이 작용했겠지만, 필자는 세 가지 추측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삼국시대에 비해 후삼국시대에는 민족의 분열이라는 개념이 생소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기 다른 문화와 행정체계를 발달시켰고, 필요할 때에는 서로를 공격하기도 하며 성장했다. 물론 문화나 언어적인 측면에서 일본이나 대륙의 국가들에 비해 삼국은 많은 요소들을 공유했다. 그러나 백제가 일본과 함께 신라를 공격하거나, 삼국시대의 막바지에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관계를 수립한 점 등을 볼 때, 삼국시대에는 아직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유민들이 한 민족이라는 의식은 미약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후삼국시대는 달랐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달래기 위해 많은 정책들을 실시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행정체계이다. 신라는 전국을 9주로 나눈 후, 옛 고구려, 백제, 신라의 영토에 세 주씩 골고루 배치했고, 지방 곳곳에 다섯 개의 소경을 두어 그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도록 했다.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왕족들을 귀족 사회에 일부 포함시키면서 화합을 도모하기도 했다. 이처럼 신라의 융합정책이 실시되고, 당시 가장 작은 행정단위였던 촌은 지방관이 아닌 토착세력이 관리했음을 볼 때,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은 큰 저항 없이 신라에 융합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때부터 후삼국이 정립되기까지 이미 20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비록 궁예와 견훤이 각각 옛 고구려와 백제를 계승한다는 취지에서 건국을 했으나, 백성들이 호응했던 것은 옛 조국의 부활이 아니라,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견훤과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한 이후 뚜렷한 부흥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옛 왕조의 부활이 이들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둘째, 후삼국시대의 세 국가가 오랫동안 자웅을 겨루기에는 당시 상황이 적합하지 못했다. 후삼국시대를 고려, 후백제, 신라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신라는 무너져가는 국가였다. 신라는 고려와 후백제의 치열한 전투 속에서 중립을 지킬 수밖에 없었고, 왕이 견훤에 의해 죽는 수모를 겪고 난 뒤에는 고려에게 나라를 바치게 된다. 고려와 후백제의 세력다툼이 한반도 중남부에 국한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신라 말기 당나라가 멸망하면서 중국대륙에는 혼란이 있었고, 발해라는 방파제가 있었기에 고려는 북쪽의 방위에 신경쓰지 않고 견훤과의 대결에 집중할 수 있었다. 후백제 역시 일본과의 동맹관계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자국의 힘만으로 고려와 싸울 수밖에 없었다. 외부 세력의 개입도 없고, 신라라는 국가가 경쟁에서 제외된 상황. 한반도 중남부라는 좁은 지역에서 벌어졌던 왕건과 견훤의 세력 대결은 필연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었던 대결이었다.

 

셋째, 후백제가 아직 온전히 국가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던 것도 후백제가 일찍 멸망하게 된 원인이었다. 운명적인 고창 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이후에도, 견훤은 군사를 추슬러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내부의 왕위 계승 다툼으로 인해 결국 견훤은 스스로 자신이 세운 국가를 정벌하는 데 앞장서는 상황에까지 이르고 만다. 삼국시대에는 달랐다. 많은 전쟁을 겪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는 국가의 존망 위기에까지 이르렀던 적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고국원왕의 전사이다. 백제의 근초고왕에 의해 왕까지 전사하는 위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다시 힘을 추슬러 백제에 복수를 할 수 있었다. 특히 소수림왕은 국가적 위기를 불교 수용, 율령 반포, 태학 설립 등 국가의 체계를 다지는 계기로 삼아 이후 광개토대왕이 고구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을 만들었다. 백제 개로왕의 전사 때는 어떠했는가? 이 때 백제 역시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게 빼앗긴 후 수도를 웅진으로 천도하는 수모를 겪었으나, 무령왕과 성왕 대의 재기를 거치면서 다시 한 번 중흥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반면, 고창 전투에서 패배한 후의 후백제는 재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후백제는 아직 국가의 기반이 완벽히 다져지지 않았으며, 특히 왕위 계승의 경험이 없어 견훤이 물러난 후 왕권 약화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만약 후백제가 국가의 기틀을 완벽히 다지고 난후 위기를 맞았더라면, 고려와 후백제의 대결구도는 오랫동안 계속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by 초령목 2010. 10. 29.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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