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향토사연구회 운영위원장 김 영 규

1. 머리말

  지난 2005년 철원군에서는 태봉국(泰封國) 철원정도 1100주년을 맞이해 국내외 역사학자들을 대거 초치하여 태봉국과 궁예(弓裔) 관련 학술 세미나를 개최하고 연구 및 저술 활동을 지원한 바 있다. 2년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집중적인 조사연구 지원으로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 과도기니 나말여초(羅末麗初)니 하여 그간 소외되었던 분야를 주목받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당시 참여했던 발표자나 연구자, 토론자 대부분이 태봉국과 궁예에 관한 문헌 사료가 절대 부족하고 극히 제한되어 있어 단기간에 다양하고 깊이 있는 연구 성과를 기대하는 것에는 회의적이었다.
  지자체가 지원한 기간이 짧아 관련 유물이나 유적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접근이 미비하고, 궁예도성을 비롯한 태봉국 관련 주요 유적이 접근이 불가능한 DMZ 안에 분포하는 관계로 더 이상의 연구진척은 무리였다.
  이는 후삼국(後三國) 정립기인 태봉국의 존립시기가 20여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과도기이자 쟁패(爭覇)의 시기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문제인 것은 기존에 존재하는 1차 사료인 三國史記, 三國遺事, 高麗史 등에 나타난 태봉국과 궁예 관련 기록이 다소 부정적으로 왜곡되고 편협한 시각으로 기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역사가 승자(勝者)의 기술(記述)이라고 하지만 반대편에 섰던 패자들의 행적과 성향을 너무 심하게 왜곡하였다.
  당시 학회 참가자들도 이런 왜곡된 1차 사료를 어느 정도나 인정해야할지 진정성 문제로 갑론을박(甲論乙駁)이 심했고 오히려 궁예를 동정(?)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강원도에서는 유일한 도읍지였던 철원군 주민들은 대동방국(大東邦國)을 지향하고 주체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엄격한 신라골품제사회에서 소외되었던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하는 새로운 세상을 연 태봉국이 18년 짧은 왕조로 끝난 점을 애석하게 생각한다.
  지금도 철원에는 부하들의 반란으로 권좌에서 쫓겨나 한탄강을 건너서 명성산(일명 울음산)에 숨어들어 항전하다가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는 궁예전설이 내려온다. 이에 미처 이루지 못한 궁예의 꿈은 무엇인지, 태봉국은 왜 단명했는지, 어떤 역사적 의의가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뒤를 이어 고려를 건국한 왕건과는 자라난 환경이나 후원 세력, 정치적 성향에서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진정한 역사의 승자는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태봉국과 궁예 관련 기술(記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삼국시대 역사 연구의 핵심 사료인 三國史記를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우리 역사학계에서도 논쟁거리였다.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 라는 투쟁론을 주창하고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를 지은 독립 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사학자인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1880-1936) 선생은 김부식 이래 내려오는 지배자 중심, 왕조 중심 사대주의 사관(史觀)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우리가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기록들이 기본적으로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특히 '古代의 一, 二 史家가 자기의 好惡대로 아무 책임감 없이 지은 것이 문제라고 하였는데 이는 고려사와 삼국사기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이 조선과 고려의 건국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편찬된 것인 이상 거기에는 일정하게 정치적 목적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궁예의 신라왕자설에 대해서 전면적. 본질적으로 의심을 표명했다. 신채호는 '高麗史官이 구태여 世達寺 一個 乞僧 궁예를 가져다가 고귀한 신라 황궁의 왕자로 만들었다고 보고, 그 이유를 정변을 통해 국왕 궁예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왕건의 혁명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함이었다고 하였다. 즉 궁예를 아버지에 대해 불효하며, 宗國에 대해 不忠하였던 인물로 묘사함으로써 그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인물로 만들었다는 것으로 이 모든 것이 김부식의 계획된 의도라는 것이다.
  신채호의 비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古來로 전통적인 역사서는 述而不作 원칙만큼은 지켜졌다고 하니 있는 사실은 그대로 기록했고 없는 것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정치적 선택으로 다소 과장된 점은 인정하되 사실과 내용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난맥상이 태봉과 궁예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겪는 어려움이기도 하다.
  본 글은 철원지역에서 향토사 조사연구 활동하며 읽었던 태봉국 및 궁예 관련 서적 3~4권의 내용과 강원대학교 대학원 도서관의 관련 도서 3권의 내용을 주제에 맞게 발췌하여 정리하였다.“태봉국의 궁예왕은 실패한 왕이다." 혹은 “고려의 왕건이 진정한 승리자다."라는 말에 다소 공감은 하나 동의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태봉국은 왕건의 고려를 탄생시키는 정치 사회적 모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태봉국이 없었다면 고려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시대적으로 환경과 역할이 서로 달랐을 뿐이다. 출신 배경과 자라난 환경이 근본적으로 달랐기에 그들 각각의 정치성향과 능력은 역시 다르게 표출되었다. 각기 자신의 강점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우고 나라를 세워 국가를 경영했지만 전체를 보고 아우르는 시각이나 장기적인 비전이 고려 왕건이 더 미래지향적이고 시의 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궁예나 왕건 둘 다 역사적으로 윈윈한 성공한 조합이며 이제 그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들을 적시해 보겠다. 사실 역사에서 승자와 패자라는 용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어쩌면 후대 역사 記述家들이나 호사가들이 입맛에 따라 붙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유독 궁예와 왕건이라는 두 인물에게 이러한 비교와 수식어가 많이 따라 붙는다. 이 글을 통해 이러한 연유를 알아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이다.


2. 마이너리티 궁예

 궁예는 신라말기 권력다툼에서 버려진 비운의 왕자이다. 한 해에도 몇 번씩 왕이 살해되고 바뀌는 진골가문 내 피비린내 나는 왕위쟁탈전이 한창 벌어질 때 태어났다. 버려진 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하다가 세달사(世達寺, 영월 흥교사)에서 수도승으로 청년기를 맞는다.
  이에 궁예는 신라에 대해서 철저하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신라를 멸망시켜 병합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경주의 신라 왕실과 진골귀족을 멸망시켜야할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신라 골품제사회의 해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궁예가 신라에 대해서 철저하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데에는 그가 왕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의해 쫓겨나게 되어 왕자 신분으로서의 특권을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골품제사회의 규범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입장에 있었다.
  따라서 그는 골품제 사회가 해체된 후의 새로운 사회규범과 사회 정치체제를 제시하기가 어려웠다.
 궁예는 왕자 신분이라는 유리한 입장을 이용하여 몰락하거나 도태된 낙향 진골귀족을 중심으로 호족세력을 결집하였다. 그는 寧越 溟州(강릉) 淸州 公州 등지의 호족세력을 결집해 중요한 세력기반으로 삼았다.
  영월의 궁예세력으로는 승려 출신인 종간(宗?)과 평창 제천 호족 출신인 김대금(金大黔), 귀평(貴平) 등이 있다. 명주 호족 김순식(金順式)과 청주 호족 견금(堅金), 임춘길(林春吉), 진선(陳瑄), 선장(宣長) 형제, 공주의 환선길(桓宣吉), 이흔암(伊昕巖) 등은 궁예의 핵심세력들이다. 이들 지역 호족세력은 대체로 신라의 몰락한 낙향 진골귀족계 호족세력으로 정치적 사회적 성격이 궁예와 동병상련으로 동일했다.
  즉, 양자는 반 신라왕실의 입장에서 골품제사회의 해체에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골품제사회의 규범이나 신라적 전통에 익숙하여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보수적인 체질의 소유자였기에 결국 신라 정치체제 전통을 이어받아 전제왕권을 추구하였고 새로운 사회규범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실제로 궁예는 911년 전후해 미륵신앙(彌勒信仰)에 근거한 神政的 전제주의를 추구하였고 915년 무렵에는 공포정치에 의하여 전제왕권을 확립했다. 그의 전제왕권 추구는 일반 농민에게 과중한 노역과 세금이 부과되어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했고 결국 멀어졌다.
  사실 당시는 더 많은 호족세력을 끌어 모아 통일 왕조를 수립해야할 시기로서 전제왕권을 추구하기에는 이른 시기였다. 이른 전제왕권 추구는 호족세력의 반발을 초래하여 몰락으로 귀결되었다. 당시 호족세력과의 연합을 포기하고 전제정권을 추구한 것은 그의 출신에 따른 한계이기도 했다.
  이는 왕건의 호족연합정책과 뚜렷이 대비된다.
  궁예의 초창기 후원 호족세력은 寧越 溟州(강릉) 淸州 公州 등 내륙지역을 중심으로 한 小京이나 州治 출신들이었다. 이들 지역은 대체로 내륙지역으로서 농업이 주요한 경제적 기반이었는데, 이는 변경지역의 농업이나 상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적 기반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후삼국 통일전쟁에는 막대한 전쟁비용이 필요했는데 내륙지역의 호족이나 농민들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이렇게 농업경제와 陸軍力에만 의존한 호족세력으로 후삼국 쟁패전에서 주도권을 잡는 것은 무리였다. 그리하여 이들 외에 지금의 경기 북부와 황해도에 해당되는 패서(浿西)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한다.
  平山朴氏와 왕건가로 대표되는 浿西호족세력이 궁예에 귀부(歸附)하여 고려(후고구려) 건국 초기 지배영역을 확대했다. 898년 浿西道 및 漢山州 관내 30여성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어 국도를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겼다.
  궁예의 송악 천도는 패서지역 호족과의 적극적인 연결을 도모한 것이었고 北原(원주) 國原(충주)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양길의 위협도 감안한 것이다. 송악 천도 다음해인 899년 궁예는 패서호족들의 지원을 받아 양길을 물리치고 남한강 상류지역을 장악한다.
  이로써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북부 지역에 걸치는 중부지역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고 901년 국호를 고려라 정하고 스스로 명실상부한 왕이 되었다.
  궁예는 904년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905년 송악에서 철원으로 환도(還都 혹은 移都)한 후 전제왕권을 추구하게 된다.
  철원환도(還都)는 송악이나 패서 호족세력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 전제왕권을 확립하기위한 조치였다. 그는 패서호족과의 연결을 포기하고 대신 청주세력을 전제왕권의 후원세력으로 활용하였다.
  궁예의 강력한 정치적 세력기반인 청주호족은 당시 강경파 온건파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중앙정치세력으로 진출한 강경파가 궁예의 전제왕권을 떠받들었는데 이들은 다른 기타 호족세력에 대해 배타적이었다.
  청주호족 중 온건파도 일정하게 궁예정권을 지지하였으나 궁예정권 말기에 강경파에 밀려서 정치적 입지가 좁아졌다. 패서지역 호족세력을 중심으로 한 많은 호족세력이 궁예의 전제왕권 추구에 반발하였고 이들의 반발은 궁예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당시 전국 각지에는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한 강력한 호족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후삼국 사이의 주도권 쟁패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족세력과의 연합을 포기하고 전제왕권을 추구하였다는 것은 사실상 무모한 정치행태였다.
  浿西豪族은 대부분 고구려의 후예다. 신라하대에 패서지방 개척은 경덕왕 7년(748)에 시작되어 헌덕왕 18년(826)에 완료되었고, 평산 곡산 해주 황주 재령 등 14군현을 설치하였다.
  신라정부는 선덕왕 3년(782) 平山에 패강진(浿江鎭)을 설치하여 북변수비(北邊守備)의 본영으로 삼았다. 패강진은 다른 군진과 같이 순수한 군단이 아니라 州, 小京 등과 동등한 하나의 독립된 행정단위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하여 패강진은 패서지방 즉 예성강 이북의 광범위한 변방지역을 관장하는 특수한 행정구역이었고 진성여왕 무렵 농민항쟁이 전국적인 내란상태로 확대되면서 중앙정부 통제를 벗어나 지방호족세력 수중으로 넘어갔다.
  당시 패강진에는 設鎭과 동시에 신라정부에서 민호를 이주시켰는데 이 민호는 軍戶的 성격을 가진 것으로서 둔전병이라고 할 수 있는 토착적 항구적 지방군이었다. 패강진의 군관 조직이 패강진 관하의 모든 군현을 분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패서지역 전역의 민호가 屯田兵적인 토착의 지방민이었다고 볼 수 있다.
  패강진 지역에서 이러한 군사적 조직을 통하여 급속히 성장한 지방 세력이 박직윤(朴直胤)으로 그는 大毛達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이 지역이 고구려의 故土이고 대모달이란 칭호를 사용한 것을 보면 신라정부 지배권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했음을 알 수 있다.
  9세기 중기 평산박씨는 상당한 군진세력으로 성장했고 그의 아들 박지윤(朴遲胤) 代에는 패서지방의 유력한 호족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평산박씨를 비롯한 패서호족들은 895년 무렵 궁예에 귀부해 궁예가 패서지역을 장악하는데 크게 협력한 것을 계기로 궁예의 중요한 지지 세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평산박씨는 궁예치하에서 자손이 번성하고 세력기반이 확대되어 그 후 왕건 대에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평산박씨는 지방관으로서 溟州 竹州 등으로 이동하여 다니다가 마침내 平州에 정착하여 패강진의 군사적 조직을 통해 패서지역의 유력한 호족으로 성장하였다.
  이런 평산박씨의 호족화는 군진세력이 호족세력으로 성장한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평산박씨는 궁예에 귀부하여 궁예가 패서지역을 장악하고 13진을 설치하여 궁예 세력기반으로 삼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어 평산박씨는 일찍부터 연관관계에 있었던 왕건가문과의 인연으로 하여 궁예 말년에 왕건과 결합하였다. 그 뒤에 평산박씨는 다른 패서호족들과 함께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집권하는데 협력하였다.

3. 메이저리티 왕건

  왕건가문은 송악군(松嶽郡)에서 6,7代祖 때부터 世居하면서 상당한 在地的 기반을 쌓아서 호족으로 대두하였다. 왕건 가문이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여 유력한 호족으로 성장하였다는 것은 그 가계의 설화 즉, “왕건의 祖父 作帝建이 상선을 타고 서해를 항해하던 중에 龍王을 만나 그의 딸 龍女와 혼인하고 七寶를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에 나타난다.
  왕건이 호족출신이었기에 누구보다도 호족의 생리를 잘 알아 호족을 다루는데 현명하고 적절하게 대처했고, 이는 호족 연합정책으로 반영되었다. 왕건 가문의 친족은 한 왕조의 창업자 가문으로서는 비교적 소규모이고 미약한 편이었다.
  고려왕실의 先代는 史記가 없어서 상세하지 않다는 것이다. 高麗史에서 太祖實錄에는 고려왕실의 遠祖도 나타나 잊지 않고 다만 3代만 추존하였을 뿐이고 3代 祖考의 이름과 3代 祖考?의 성씨도 명시하지 못하였다.
  이는 왕건가문의 친족집단이 비교적 소규모였고 새롭게 대두한 신흥가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왕건가문의 신분은 골품제도 밖에 위치하고 왕경인의 지배를 받는 미천한 평민이었다.
  왕건가문은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여 호족으로 등장하였다. 왕건가문은 개성을 중심으로 한 패서지역 일부, 강화도, 한강하류지역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며 패강진의 군진 세력과도 연결을 맺고 있었다.
  왕건의 선대는 어디서 왔는지 분명치 않으나 대체로 고구려 유민의 후예로 즉 非新羅系 인물로 생각된다. 이러한 가문인 왕건은 전형적인 지방인 변경인으로서 신라의 사회체제나 정치체제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그는 폐쇄적인 골품제 사회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따라서 왕건은 견훤 궁예와 달리 신라골품제사회를 해체시키고 새로운 사회체제나 정치체제를 창출하는데 적합한 인물이었다. 더구나 왕건은 견훤 궁예보다 한 세대 뒤에 한 국가의 건국자로 등장했다.
  왕건의 선대는 개성을 중심으로 한 패서지역 일부, 강화도, 한강하류지역의 해상세력과 연결을 맺고 있었다. 그가 군사 활동을 전개한 지역은 예성강 이하의 近畿地域, 충청도 북부지역, 羅州地域 등지로 이들 지역 즉 서남해안지역 호족들과 연결을 맺을 수 있었다.
  왕건가문은 궁예의 세력이 송악지방에까지 진출해오자 더 이상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해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896년 용건 왕건 부자는 궁예에게 귀부하였다. 이에 궁예는 용건을 금성태수에 왕건을 철원태수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궁예는 왕건으로 하여금 송악에 성을 쌓게 하고 성주로 임명하는데 이는 천도를 위한 준비 작업이고 송악을 기반으로 패서지역에 진출하려는 시도였다. 898년 궁예가 송악으로 천도하면서 왕건의 비중은 더 커졌고 군사 활동이 시작된다. 900년 광주 충주 당성 청주 괴양 등을 평정하여 태봉의 영역은 현재의 경기도 남부와 충청북도 지역으로까지 확장된다.
  903년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로부터 나주를 지나 금성군(錦城郡) 일대 10여 군현을 공격한다. 906년 견훤과 싸워 여러 번 승리하여 경상북도의 상주 문경 영주 등 낙동강 이북지역까지 태봉의 영역을 확장해 이시기 궁예는 공주 상주를 남방한계선으로 하여 후삼국 영토의 거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물론 그렇게 된 데에는 왕건의 군사 활동이 크게 기여하였다. 909년부터 왕건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909년 왕건은 궁예가 날로 교만하고 잔혹하여 다시 外方에 뜻을 두었다. 마침 왕건은 궁예로부터 나주지역 진압 명령을 받고 정성을 다해 군사를 위무하고 위엄과 은혜를 베풀어 사졸들이 존경하고 따르게 되었다. 913년 나주에서의 여러 차례 전공을 인정받아 波珍粲兼侍中이 되었다.
  시중이 된 후로 국사를 平章함에 있어 오로지 情을 누르고 謹愼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궁예에게 아첨하여 신임을 얻고 있는 청주인 아지태를 왕건이 진위를 가려 처벌하니 많은 신료들이 마음으로 따랐다.
  이러한 왕건의 세력 확보는 궁예의 견제를 받았고 신변의 위협마저 느껴졌다. 궁예는 반역죄를 꾸며서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데 왕건도 이른바 미륵관심법에 의하여 반역죄에 대한 추궁을 받고 궁지에 몰렸다가 崔凝의 도움으로 화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915년 궁예는 부인 康氏로부터 非法을 많이 행하는 것에 대한 諫함을 받고 부인 강씨와 두 아들을 죽였다.
  그 후로 의심이 많아져서 여러 보좌관과 장수, 관리 평민 등 많은 죄 없는 사람을 죽였다. 이러한 궁예의 失政은 상대적으로 왕건의 독자적 세력 형성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918년 3월 왕건과 추종세력은 궁예를 축출하기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商客 王昌瑾이 철원지역 상인들에게 왕건이 왕위에 오른다는 내용이 기록된 古鏡의 讖文을 유포하였다.
  이 고경의 참문은 洪儒 裵玄慶 申崇謙 卜智謙 4인이 宋含弘 白卓 許原 등의 文人의 협조를 얻어 조작하여 유포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왕건은 마침내 918년 6월에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축출하고 집권하였다.
  왕건이 궁예치하에서 연결을 맺고 결집하였던 세력은 浿西地域 및 近畿地域 豪族, 西南海岸地域 호족, 武將, 商人, 文人, 禪師로 구분된다. 왕건세력은 출신지역으로 구분해볼 경우 대부분 非新羅系인데, 高句麗 故土출신이 대부분이고 여기에 百濟 고토출신이 추가되었다.
  왕건세력은 대부분 고구려 고토출신들이므로 고구려 계승의식이 강하였다. 왕건세력은 골품제도 밖에서 새롭게 성장한 세력이었고 신분은 대부분 미천한 평민이었다. 이들은 해상무역이나 군사적 재능, 지적 능력에 의하여 스스로 성장한 새로운 사회세력이었다.
  이들이 中央貴族으로 성장해 지배세력이 되었다는 것은 신라에 비해 훨씬 개방적인 사회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왕건세력은 地方세력, 邊境세력이었다. 왕건세력의 핵심적 근거지인 浿西地域은 8~9세기에 이르러서야 새롭게 개발된 변경지역이었고, 西南海岸地域이나 近畿地域도 마찬가지이다.
  왕건세력에 의한 고려 건국은 중앙에 대한 지방의, 경주인에 대한 지방인의 반발과 저항이 승리한 것으로서 지방 세력에 의한 새로운 사회의 출발을 의미한다.
  그리고 왕건세력에는 海上勢力과 商人勢力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해상세력, 상인세력의 풍부한 경제력은 막대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강화할 수 있게 하여 후삼국 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는 궁예의 핵심적 지지 세력이 내륙호족세력이어서 농민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줄 수밖에 없는 것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들 해상세력의 海軍力과 海上活動 경험은 서남해안 전투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고, 특히 고려 건국과 왕권확립의 든든한 지지기반인 나주정벌에 주효했다. 또한 왕건세력에는 文人과 禪師가 포함되어 있어 문인들은 고려 초 왕권강화와 儒敎政治 구현에 큰 기여를 했고, 선사들은 왕건과 호족들을 연결시키고 후삼국 통일전쟁의 이념을 제시했다.
  왕건세력에 의한 고려 건국은 경주중심 진골중심 신라골품제사회가 해체되고 여러 지역의 지방민과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지배체제에 참여할 수 있는 보다 개방적인 사회체제를 열었다는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그러면 여기서 왕건 즉위의 핵심역할을 한 나주호족세력의 등장배경에 대하여 알아보자. 신라 말 서남해안지역인 武州地域에는 장보고가 청해진을 중심으로 서남해안지역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보고는 武州 州治인 현 光州 출신인 염장(閻長)에 의해서 암살되었다. 무주지역의 내륙토호세력은 장보고의 해상권 장악 및 중앙 진출로 인하여 그들의 기득권이 크게 위협받았다. 이후 무주지역에서는 장보고계의 해상세력과 염장계의 내부토호세력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대립 갈등 관계는 청해진 혁파 후에도 그대로 잠복하여 존속되었다. 그리하여 40여년 후 견훤이 무주에서 자립할 시기에 두 세력 사이의 대립 갈등은 다시 표출되었다. 나주호족은 견훤에게 귀부하지 않고 독자적인 지배권을 유지하면서 궁예 휘하의 왕건과 연결을 맺고 태봉에 귀부하였다.
  당시 견훤은 신라정부의 방수군(防戍軍)으로서 나주지역 해상세력의 활동을 규제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에 나주호족은 신라정부와 내륙토착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는 견훤의 규제와 간섭에 불만이 컸다. 이에 나주호족은 견훤에게 귀부하지 않고 왕건을 통해 태봉에 귀부하였다. 태봉 귀부는 나주지역의 해상세력은 당시 해외무역 최대시장인 북중국(산동반도) 항로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 시기 태봉은 예성강으로부터 남양만, 아산만 부근까지 서해안을 장악하고 있었다. 왕건 즉위 후 나주지역은 왕실의 든든한 지지기반이 되었고 나주호족의 정치적 입지는 강화되었다.
  후일 나주호족은 혜종대 왕위계승 문제를 놓고 패서호족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세력이 약화되면서 몰락했다.
  왕건의 주무대였던 浿西, 近畿, 西南海岸 지역은 지리적으로 경주와 멀리 떨어진 변경지역으로 정치 사회적으로도 경주와 쉽게 연결되지 않는 지역이었다. 즉 이들 지역은 고구려나 백제의 故土로서 원신라지역이 아니라 비신라지역이었다.
  이런 사정으로 고구려의 풍습이 남아있었고 바다와 강의 해상교통이 발달해 해상무역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래서 이 지역에는 해상무역에서 부를 축적해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한 해상세력이 많았다. 패서지역은 패강진이 위치한 곳으로 군단적인 성격이 강한 특수한 행정구역이었고 자신의 군사적 능력에 의해서 성장한 軍鎭세력이 다수 존재하였다. 이들 지역의 호족들은 신라사회의 전통에 구속받는 바가 적었다.
  이들은 골품제도에 의한 신분적 특권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경제적 군사적 능력이나 지적능력에 의해서 성장한 새로운 사회세력이었다.
  따라서 이들 호족은 새로운 사회체제나 정치체제를 창출해낼 수 있는 조건과 역량을 갖추었다. 그리고 이들은 농업 상업 양면의 경제적 기반과 육군력 해군력을 동시에 보유하여서 후삼국 쟁패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궁예정권 말기 신정적 전제왕권 추구에 최초로 반기를 든 세력이 패서호족이다. 패서지역 호족세력이 궁예의 전제왕권에 반발한 것은 그들의 사회적 정치적 성격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들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변방에서 스스로의 능력에 의하여 성장한 신흥 세력이었고, 이미 왕조 자체를 교체할 수 있을 만큼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궁예는 이들 세력을 무시한 채 혼자만의 길을 간 것이 문제였고, 왕건은 그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 역사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이러한 사실은 몰락한 진골귀족계의 호족이 궁예의 전제왕권에 후원했고, 후일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이 되었을 때 크게 반발했던 것과 대조된다. 왕건도 궁예와 마찬가지로 신라를 멸망시켜 병합시켜야 할 대상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그는 신라를 무력으로 멸망시키지 않고 귀부를 유도했다.
  왕건의 친신라정책은 귀부를 목적으로 시도된 것으로, 견훤이나 궁예가 군사를 이끌고 경주를 침범해 신라를 완전히 역사에서 없애버리려 했던 것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그의 통일정책은 후삼국 분열을 수습하여 단지 통일신라기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부적 힘의 융화는 물론 역량을 극대화하여 적극적인 북진정책 추진으로 옛 고구려의 땅까지 되찾는 것이 목표였다.

 

4. 궁예 對 왕건

  이상에서 궁예와 왕건의 출생 및 가문 배경, 핵심지지 호족세력들의 정치적 성향, 국왕으로서의 정치적 비전과 행보 등을 확인해 보았다. 사실 궁예든 왕건이든 전투하고 정벌하고 지지세력 확장하고 배신자 징벌하는데 일평생을 보냈다. 그러한 정복전쟁 과정을 년도별로 소상하게 밝혀야 좀 더 확실한 역사적 사실 및 배경 파악이 가능하나 지면관계상 과감하게 생략했다.
  당시는 통일신라가 내부적인 사정으로 붕괴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하고 새롭게 지방의 유력 호족들이 등장하여 새로운 시대를 주도하는 혼란기였다. 궁예와 왕건은 전국 각지를 휘저으며 在地的 기반을 갖고 있는 유력호족들을 공격하거나 회유하여 지지세력으로 삼고 이러한 혼란기를 조금씩 정리했다.
  지배지역을 확장하고 제대로 된 국가체제를 갖추고 정치적 이상을 실현시키는 데는 상당한 시일과 인내심이 필요했다. 그러한 안목으로 인내심을 갖고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펼쳐나가는데 있어 궁예와 왕건 두 인물은 아주 판이했다. 이미 출발부터가 달랐고 귀결점도 당연히 달랐다.
  궁예와 견훤은 신라를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은 있었으나 태생적인 한계로 인해 신라를 포용하고 함께 갈 수 있는 지혜는 부족했다. 궁예는 버려진 왕자라는 것 때문에 감정적인 보복과 전제정치에 치우쳤고, 견훤은 신라군의 장수출신으로서 군신관계라는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경주를 침탈해 왕까지 살해하는 포악함만을 노정했다. 이러한 그들의 약점으로 궁예는 부하에게, 견훤은 아들에게 배신당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에 반해 왕건은 신라 골품제와는 전혀 관계없는 변방 지방 출신이고, 한세대 늦게 태어나서 신라말 정치적 혼란기를 몸소 겪지 않았기에 자유분방했다. 왕건가문이 해상무역을 통하여 스스로의 능력으로 자수성가하고 일찍 선진 문물과 접할 수 있었기에 판단이 냉철하면서도 개방적이었고 여유로웠던 듯하다. 그들을 뒷받침하는 호족세력의 양상도 당연히 리더의 성향대로 따라갔고 정치적 입지나 정책도 각기 달랐다. 때로는 정복과 복속으로, 때로는 회유와 귀부로 상대를 내 세력으로 만들곤 하였는데 견훤과 경순왕의 귀부는 왕건의 치밀한 리더쉽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궁예의 호족세력은 원신라지역의 신라계 낙향귀족 출신이 다수였다. 이에 비하여 왕건은 고구려 고토의 비신라계 호족출신이었고, 왕건의 호족세력은 고구려 백제 고토의 비신라계 지방민 출신이 다수를 차지했다. 두 세력은 그들의 사회적 성격의 차이로 말미암아 골품제체제를 대신하는 새로운 사회체제나 정치체제 구상에서 입장 차이를 보인다.
  그리하여 궁예세력은 신라골품제사회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고, 왕건세력은 새로운 사회체제 정치체제를 창출하였다.
  따라서 왕건세력이 궁예세력을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하여 집권한 것은 새로운 사회의 요구에 부응한 것이었다. 신라말 고려초 사회변동은 농민들에 의해서 촉발되어 호족들에 의해서 주도되었고 후삼국 건국자들에 의해서 마무리되었다.
  나말여초의 가장 두드러진 사회변동은 경주중심 진골귀족 중심의 골품제사회 해체와 이를 대신할 새로운 사회체제 구축이라 할 수 있다. 견훤 궁예는 새로운 사회체제의 창출보다는 골품제사회의 해체에 더 기여했고 왕건은 그 반대였다고 할 수 있다.
  고려사회는 지방세력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그런 만큼 지방세력의 사회적 진출이 제도적으로 보장된 사회였기에 중앙인과 지방인의 차별이 없는 사회였다. 고려사회는 신라사회에 비하여 훨씬 개방적인 사회였다. 새로 성립된 고려사회는 신라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로서 여러 측면에서 한 단계 더 발전된 사회였다.
  궁예와 왕건의 역사적 향배를 좌우한 세력은 패서호족과 나주호족 그리고 청주호족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궁예의 지지세력은 영월, 명주, 철원, 청주 호족으로 주로 내륙에 기반을 둔 세력이다. 농업에 바탕을 둔 원신라 내륙지역으로 후삼국통일을 수행할 경제적 기반이 취약했다. 반면 왕건을 떠받치는 핵심 지지세력은 해상세력인 패서와 나주호족으로 비신라계이면서 고구려와 백제 고토 출신들이다.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군진세력에서 성장해 군사력(해군력)도 막강한 아주 유연한 세력이었다.
  한마디로 스스로의 능력에 의해 새롭게 등장한 세력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역량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정복전쟁을 지원할 수 있는 막강한 부가 뒷받침되었고, 거기다가 대안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자생적인 자신감이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자신감과 왕건의 통찰력이 합해져 나주도 회유하고 신라도 귀부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유연하지도 않고 기복심한 성정으로 조급하게 전제정치와 공포정치를 시도한 궁예는 몰락을 자초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시도가 완전히 역사에서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시행착오는 후일 왕건의 고려를 탄탄한 반석위에 올려놓는 시금석이 되었다. 진정 누가 역사의 승자인지는 이러한 관점에서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가설이기는 하지만 태봉국 궁예가 905년 송악에서 철원으로 환도(이도)하는데 그 시기를 다소 늦추었다면 역사의 판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또 하나 896년 철원에 도읍을 정했다가, 898년 송악으로 옮기고, 다시 905년 철원으로 옮기는데 그 결정적 이유가 무엇인지도 규명되어야 한다. 새로운 국호와 연호를 선포하고 국가체제를 새롭게 정비해 대동방국의 원대한 꿈을 펼치려 신경(新京)으로 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철원환도(이도)에는 좀 더 현실적인 정치문제, 즉 정치세력 간의 갈등과 대립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궁예가 고구려의 후예 패서세력을 버린 건지, 아니면 후환이 두려워 청주세력을 끌어들여 본거지(송악)에서 뛰쳐나온 건 지 향후 연구에서 규명해볼 대목이다.
  그리고 송악으로 갈 때부터 이미 철원으로 다시 돌아올 계획을 갖고 있었던 건 지, 아니면 당시 상황이 환도할 수밖에 없었던 건지 앞으로 밝혀내야 한다.
<끝>

 

<참고서적>

  한국사 권11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국사편찬위원회
  신라말 고려초 호족연구 - 정청주
  나말여초의 정치사회와 문인지식층 - 전기웅
  태봉과 철원정도 1100주년의 역사적 의미와
  재평가 - 태봉국 철원정도 기념사업회
  태봉국 역사문화유적 학술조사연구용역보고서
  - 한림대학교 산학협력단
  태봉의 궁예, 철원에 살아있다 - 이재범

<용어설명>
▷ 마이너리티 -소수자집단 [少數者集團, minority]

마이너리티는 육체적 문화적 특질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고 불평등한 차별대우를 받아서 집단적으로 차별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말한다.  
  소수자 집단이 있다는 것은 그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와 보다 큰 특전을 가진 우세한 무리가 있다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마이너리티리라는 개념 자체가 메이저리티(majority)라는 존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때 말하는 마이너리티와 메이저리티는 단순히 수적으로 다수인가, 소수인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식민지에서 인구가 많은 토착민이 인구가 적은 통치자로부터 차별대우를 받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 김영규 약력 >

→ 1981년 신철원종합고등학교 졸업
→ 1987년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졸업
→ 2009년 강원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 과정
→ 2009년 <철원향토사연구회> 운영위원장

→ 2006년 제16회 강원도 향토문화 연구발표회
          -『철원지역 고인돌사회 복원연구』발표 우수상 수상
→ 2007년 국사편찬위원회 철원군 지역사 자료 조사수집 완료
→ 2007년 제17회 강원도 향토문화 연구발표회
        -『1950년 6월 24일』(부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발표 우수상 수상
→ 2007년 국사편찬위원회 철원군 구술자료
   조사수집 완료
 -『수복지구인 철원지역주민 21명의 삶과 애환』
→ 2008년 국사편찬위원회 철원군 구술자료
   조사수집
   -『철원지역 민통선북방 마을 사람들』
→ 2008년 철원군 주관 <철원다시보기-민북마을
   이야기> 조사사업
→ 2009년 제19회 강원도 향토문화 연구발표회
  -『궁예가 철원으로 간 까닭』발표 장려상 수상
→ 2009년 철원군 주관
   <철원다시보기-다리이야기> 조사사업
→ 2009년 『철원의 변천사』
   (부제: 사진으로 보는 철원 100년) 편집발간


철원신문 펌

 
 
 

 

by 초령목 2010. 10. 22. 2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