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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발해는 되고 가야는 안되는가? |
왜 우리는 사국시대라 부르지 않는가?
알다시피 고구려, 백제, 신라가 공존했던 시기에 가야라는 작은 나라가 존재가 했다. 하지만 우리는 가야가 있었음에도 가야가 건국되었던 42년부터 멸망했던 562년까지 단 한차례도 사국시대라 부르지 않았다. 왜일까?
가야는 철의 제국이라 불릴만큼 철이 풍부했고 한동안 신라보다 국력이 컸다. 신라에 쳐들어가서 신라가 위기에 빠진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가야는 중앙집권화에 실패하고 소국연맹체로만 500여년을 이어왔다. 가야와 마찬가지로 초기의 고구려, 백제, 신라는 연맹왕국였다. 그러나 고구려, 백제, 신라는 소국 연맹체에서 탈바꿈하여 중앙 집권적 국가로 발전하는데 성공했다. 각 연맹의 맹주국들은 세력이 강해지자 자신들의 힘을 바탕으로 주변의 소국을 통합한 뒤 직접 통치를 시행했다. 그에 반해 가야는 힘이 가장 강한나라를 연맹의 대표로 삼는 '맹주국'만이 멸망할때까지 존재했을 뿐이다.
어느 한 국가가 주위 소국보다 비교할수 없을 만큼 강하거나 선진문물을 받아들였으면 그들도 중앙집권국가로의 발전을 이룩할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철로 유명한 변한의 12소국들이 발전하여 가야연맹이 되었다. 그래서 가야 소국에서도 각각의 철기문화가 발달되었다. 그덕에 딱히 통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고 무력으로 연맹의 통일을 이룰수 있었으냐? 그것도 아니였다. 연맹 중 가장 힘이 세던 맹주국에게도 맹주국(전기:금관가야, 후기:대가야)과 힘이 대등하던 나라가 존재했는데 아라가야의 존재는 통일을 방해하는 두번째 이유였다. 실제로 금관가야가 무너진 후 후기가야를 이끌던 국가는 대가야로 알고 있으나 사실 후기가야는 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과 아라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남북으로 나누어져있었다
또 삼국사기에서도 가야에 관한 기사는 많이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삼국사기는 삼대국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라 일부 불필요한 기록을 누락시켰을 가능성도 있으나 가야 500년 역사를 생각해보면 백제와 신라와의 접촉이 많았을텐데 그에 관한 기록이 터무니 없이 적었다. 그에반해 대국이었던 신라와 백제 사이의 접촉기록은 눈에 띄게 많았다. 그만큼 가야가 대국들 사이에서 소외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기에는 아에 백제의 속국처럼 되어버렸다.
가야가 신라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았다면 신라말기에 '후가야'라는 나라도 생기지 않았을까? 아니면 가야를 표방한 나라가 있었으나 너무 작아서 기록되지 않았고, 삼국시대의 가야처럼 여러 가야가 생겨 서로와 경쟁을 하다 전부 멸망했을까?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있던 1925년,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사편수화'라는 단체가 만들어진다.그런데 바로 이단체가 신라와 발해에 해당하는 시기를 '통일신라시대'라 부르기로 결정한다.즉 식민지 시절의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이후의 신라가 최초로 '통일신라'라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일본 학자들은 우리 역사를 정리하면서 당시의 사건을 '신라의 반도 통일'로 표현하였다.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한 것이 아니라 한반도만을 통일했다고 본것이다.따라서 한반도 밖의 역사는 한국의 역사가 아니게 되었다.당연히 발해사는 한국사에서 제외되었다.결국 '통일신라'는 우리의 역사를 작고 초라하게 만들려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해 만들어진 용어인 셈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인
그렇다면 발해가 작은나라인가? 그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고구려를 계승한나라가 바로 발해이다. 그것은 일본왕에게 보낸 친서를 보면 확인할수 있는데 "고려국왕"이라는 말을 썼다. 게다가 신라가 그렇게 섬기던 당나라와 전쟁을 불사하고 결국 살아남으며 당에게 해동성국이라고도 불렸다. 또 영토면에서도 고구려보다도 땅을 더 넓혔다. 또 발해는 가야와는 달리 당, 신라, 왜, 거란 등 5개의 무역길을 만들어 경제적인 여건도 좋았다. 그 무역길로 여러 문화를 수용할수도 있었다. 발해가 문치국가가 된 후에는 당나라에서 유학을 하며 신라와의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
위키사전에서 남북국시대의 명칭문제를 자세히 다루고 있어 이하 생략하겠다.
조선 전기에는 이 시기를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시대로 인식하지 않았다. 이는 신라가 정통 왕조라는 《삼국사기》의 사관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에 따라 신라 중심으로 서술된 역사에서는, 북측의 발해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졌다.그러다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한국사, 또 만주의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발해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를 통하여 역대의 사가들이 발해사를 한국사에 편입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 등장하였다. 실학자 유득공은 《발해고》(渤海考)에서 고구려가 망한 후 남쪽에 신라가 있었고 북쪽에는 발해가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이를 '남북국'이라 하였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이 시기를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시대라고 불렸으나, 1970년대 이후로 발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980년대 들어 남북국 시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또한 학계 일부에서는 최초의 통일을 신라가 아닌 고려가 이루었다고 보기도 한다.
후삼국시대의 새이름의 필요성 |
앞에서는 가야와 발해의 시대적 구분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자 그럼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발해는 926년에 멸망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후삼국시대라고 정의하는 시기인 892~936년 사이에 들어가게 된다. 거기다 발해가 가야 같은 소국이냐 그것도 아니다. 무려 200년간 존속했던 나라이자 '남북국시대'의 북국이 아닌가? 후삼국시대로 불리게 되면서 남북국시대라는 명칭으로 되찾은 발해를 후삼국시대에서 또 잃어버리게 되는 모순이 생겨버리게 되었다. 발해가 삼국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서일까? 그렇지는 않다. 궁예는 발해와 외교활동을 했으며 신라는 발해와 동맹까지 하게된다. 또 발해가 멸망하자 발해왕자를 포함하여 유민들이 모두 고려로 내려오게 된다. 그리고 그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멸시하게된다. 이것을 보면 발해와 삼국의 연관성이 많아 보인다.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후삼국시대의 명칭문제에 대해서 전혀 생각해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후삼국시대를 대체할 명칭은 없을까?
이에 '슬픈 궁예'의 저자이신 이재범 교수는 '전국시대' 혹은 '호족시대'라는 명칭을 쓰자고 제안한다. 필자는 호족시대가 마음에 들지만 그렇게 하면 발해라는 나라가 빠지게 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필자가 생각해본 것이 '독립부흥시대'이다. 독립부흥시대는 신라 말기 반신라적인 새로운 나라가 신라에 독립하여 세워지거나 옛 고구려, 백제, 가야등의 후예들이 그들의 부활을 내세우며 부흥국을 세웠었다는 점에서 이름을 지었다.
하지만 이 시대가 나타난 연도는 이재범 교수(892년)와는 다르게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난 889년부터 왕건이 통일한 936년까지를 新후삼국시대라 부르고 싶다.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난 이후로 호족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했고, 이 사건을 시작으로 전국에 장군이라 칭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충분히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난 그 해(889)를 新후삼국시대의 시작으로 한다고 해도 별 지장은 없어보인다. 이렇게 되면 후삼국시대의 역사는 889~936년으로 47년, 원래의 후삼국시대보다 3년이 더 추가된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의 혼란시기와 비교해도 될만큼의 긴 역사를 가질 수 있게되고 근 50년에 가까워져 반세기의 역사라 불러도 무방해진다.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난 889년부터 왕건이 통일한 936년까지 47년간의 新후삼국시대, 필자는 이 시대를 더 좋은 명칭이 나오기까지 부르기로 했다. 모든 사람이 통일신라시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남북국시대로 바뀌어 졌듯이, 사람들이 후삼국시대의 모순되는 점을 지적하고 새로운 명칭이 생기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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