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전투(909)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로 굳혀진 판도는 후삼국시대로 정립된다. 후고구려와 후백제는 패권을 다투며 국지전을 펼친다. 이 와중에 왕건은 나주를 재차 공격하면서 허를 찌른다. 진도와 고이도를 공략한 왕건은 더 깊숙이 내습하며 견훤의 배후를 뒤흔든다. 그러자 견훤은 수군을 이끌고 왕건을 압박, 수적으로 불리했던 왕건군은 한때 수축되지만 왕건의 지휘 아래 움직인 수군은 화공을 펼쳐 후백제의 수군을 격파시킴으로서 백제의 배후를 계속 교란할 수 있게 되었다.


*공산전투(927.9)
견훤은 신라 급습하여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죽이는 쾌거를 이룬다. 그러자 왕건은 신라의 구원 소식을 받고 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급히 출동한다. 그리고 왕건은 견훤이 돌아가는 길목을 지키다가 견훤을 기습하는 전략을 세운다. 공산 동수를 지키고 있던 왕건은 견훤의 군대를 만나자 기습하였으나 오히려 견훤의 군대에게 전멸당했으며 장군 신숭겸은 왕건을 구하고 전사, 이외 김락 등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대승을 한 견훤은 이후 고창전투 이전까지 고려를 압도하게 된다.



*고창전투(930.1)
견훤에게 번번히 패하며 밀리고 있던 왕건은 고려의 고창성이 견훤에게 포위되자 다시한번 견훤과 일전을 맞는다. 한 달을 넘기며 계속된 전투는 왕건에게 점점 불리해졌다. 그때 고창의 호족 김선평, 권행 등이 고려를 지원하면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된다. 이로써 견훤의 군대는 참패하고 이 격전으로 8천명이 전사, 참모 김악 등이 잡히고 말았다. 이 전투 이후 다시 전세는 역전되어 왕건이 후삼국의 패권을 잡게된다.



*운주성 전투(934.9)
전세가 점점 왕건쪽으로 기울면서 왕건의 공세는 더 거세진다. 왕건이 운주성을 공격하자 진훤은 
갑사 5천을 이끌고 운주성에서 맞섰다. 견훤은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위해 휴전을 제의했으나 왕건은 거부, 오히려 유금필에게 기병을 보내 견훤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그 결과 휴전을 노렸던 견훤의 군대는 격파당했고 3천명이 전사, 견훤의 참모 종훈, 의사 훈겸, 용장 최필, 상달이 생포되었다. 이로써 왕건은 패권주도를 더욱 굳혀나갔고 더불어 통일의 승기를 잡게되었다.


*일리천 전투(936.9)
견훤을 쫓아내어 왕위를 얻은 신검은 후백제의 다수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노린 왕건은 항복한 견훤을 위시하고 국가의 총력을 다해 일리천에서 국운을 건 일전을 벌인다. 왕건의 군대가 8만명이 넘었을만큼 후삼국역사상 가장 많은 대군을 동원한 통일전투는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전투는 견훤을 내쫓은 신검에게 불만을 품은 장병들이 고려에 항복하면서 신검의 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고 결국 신검이 항복하면서 전란은 끝이 났다.

by 초령목 2013. 7. 6. 1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