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논술(이경희) (1).hwp

첨삭지도


민족구심체를 찾아서

초령목

5월 중 가장 푸르다는 어린이날에 와룡고등학교 역동에서 우리의 민족구심체를 찾는 체험활동을 가지기로 하고 신청을 접수받았다. 나도 어차피 집에서 뭐하겠냐는 생각에 냉큼 신청을 했다. 하지만 막상 아침에 일어나니 ‘남들 다 쉬는데 우린 공부라니…….’라는 불만 섞인 생각도 들었으나 이미 신청을 했으니 때는 늦었다.

답사 전 내가 찾은 민족구심체, 자아의식

신청을 왜 했을 까라는 후회도 많이 했으나 공부를 안 해오면 노래를 부르게 한다는 협박공지를 받아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결과는 이런 물음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가서 뭘 배울 수 있는가? 정답은 나 자신을 알자라는 자아의식이었다. 역사왜곡에 대한 대항의 해답을 제시해주는 근본적인 대안이자 역사유물을 통해 선조와 나 사이의 교감을 연결해주는 고리가 바로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자아의식밖에 더 있을까? 만약 선생님께서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 이렇게 대답을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회는 오지 않았다.

선사시대 우리조상들의 구심체, 암각화

언제나 달릴 줄만 알았던 버스가 멈추는 방법을 드디어 터득했나보다. 버스가 멈춰선 곳은 고령 양전동 암각화가 있는 곳이었다. 암각화하면 울산 반구대 밖에 몰랐는데 나에겐 이런 암각화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런데 막상 보니 이 암각화가 낯설지 않았다. 예전에 대가야 박물관에서 이 암각화 모형을 본 기억이 났다. 아, 그게 이거군.

주위를 둘러보니 들판이었고 저 멀리서 강의 형태를 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옛날에는 이 바위근처까지 물이 왔었다. 수십만 년에서 수백만 년 동안 퇴적되며 강이 이 바위로부터 멀어졌다는데 이 바위는 멀어지는 강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한편으로는 자연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말을 이제야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암각화는 일명 인면암각화라고 불린다. 바위에 새겨진 그림이 인간의 얼굴처럼 생겼다는데 이 암각화를 처음 보는 사람은 결코 ‘아 이건 인면암각화구나’라고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사각형에 막대 같은 것이 달린 것이 인면이고 원같이 있는 것이 동심원문양인데 4개가 있다. 이 문양이 과연 인면일까라는 의문이 들어 여러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았다. 과거에 여기까지가 강이었으니 그 문양들이 수중생물을 의미하며 당시 수렵․채집사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인면이라고 불리는 문양 옆에 막대의 수가 다 다른 것으로 보아 달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저것은 인면이라 불리는 문양은 가면을 의미하고 동심원은 태양을 의미하여 제사를 지내던 곳이 아닐까? 여러 대화가 오고갔으나 우리는 확실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것을 말할 때 마다 모순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저 암각화는 백년에 걸쳐 만들어 졌을 수도 있고 천년에 걸쳐 만들어 졌을 수도 있다. 단지 도화지 안이라는 특정한 틀 안에 있는 그림이기에 우리는 ‘저것이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구나.’ 라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암각화 위에는 별자리를 의미하는 홈이 파져있다. 아마 이 별자리를 조사해보면 이 암각화가 최소 몇 만 년 전에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보는 우주는 언제나 팽창하고 빛의 속도가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기에 과거라고 불리는 그 시절의 우주와 현재라고 불리는 지금의 우주(하지만 이것도 과거지만)를 비교하면 알아볼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사례로 은천군에 있는 고인돌에 구멍이 134개가 파여져 있었는데 여기서 발견되는 별자리는 자미원, 직녀, 구진, 북극오성, 정수(쌍둥이 자리), 삼수(오리온 자리) 등이 있는데 기원전 3200년경의 하늘로 추정할 수 있었다. 또 용덕리 10호 고인돌 별자리는 그 당시 북극점이 용자리의 알파별이 라는 것을 보여주고 이 고인돌이 만들어진지 1500년 후의 고인돌인 지석리 고인돌에서는 북극점에 해당하는 별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북극점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이런 바위에서 별자리의 발견은 천문학적,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것인데 여기서 이런 별자리가 발견됐으니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나도 이 별자리 구멍을 실제로 보고 싶었지만 바위 위를 볼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보려 노력을 했으나 실패하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다음 행적지로 가야했다.

잃어버린 역사 ‘가야’의 구심체

나는 가야라는 나라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중학교 때 근 2개월 동안가야라는 신비의 제국에 흥미를 느껴 여러 책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우리 역사서에 가야를 다룬 책은 삼국유사이다. 그 후에 만들어 진책들은 대부분 삼국유사의 기록을 기본으로 두고 서술했을 것이다. 500년 역사를 기록하는데 조선은 수백 수천 권의 책을 썼는데 고작 삼국유사라는 몇 권의 책만으로 가야를 알자는 것이 황당하기만 하다. 언제 유득공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삼국사가 있어야 마땅한데 고려가 이것을 지은 것은 옳다. 부여 씨가 망하고 고 씨가 망하자 김 씨는 남쪽을 차지했고, 대 씨는 그 북쪽을 차지하고서 이름을 발해라고 했는데, 이것이 남북국 이다. 그러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도 고려가 이를 쓰지 않았으니 잘못이다.” 그 이에 앞서 누군가 가야의 역사를 기록했다면 그 신비의 제국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아쉽기만 하다. 우리가 아는 철의 제국 가야는 그저 500년 역사의 일부분일 뿐이다.

성씨의 구심체, 개실마을․한개마을

꽃이 피는 아름다운 골 산 같은 나비가 날아오는 곳, 조의제문으로 유명한 김종직의 5대손이 피신하던 곳, 뒤에는 선비를 상징하는 대나무 숲이 있고 앞에는 명산이 있는 풍수적으로 명당에 위치한 그곳이 바로 선산김씨의 종가 개실마을이다.

이곳은 종가답게 효를 강조한다. 이 효를 잘 실천했기에 죽어서 3품의 관직을 얻은 사람도 이 마을에 있다고 한다. 효의 기본적인 조건 두 가지가 있는데 편찮은 부모님의 배변은 맛보며 누워 계실 때에는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나누어 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조건을 보며 과연 이것이 그들이 추구했던 진정한 효인가를 생각해본다. 부모의 소원은 예나 지금이나 자식이 잘되는 것이다. 그런 자식이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며 그들의 부모에게 준다고 하면 어느 부모가 덥석 받고 싶어 할까? 오히려 자식에게 가는 미안함으로 빨리 죽어버리기를 바라지는 않을까? 또 이 효의 기본적인 조건을 악용하여 관직에 오르려 했던 사람들도 만만치 않던 걸로 기억한다. 그들은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버려서 나라에서 효자비를 세우면 보상을 얻어내기도 했다. 두 가지가 만약 진정 저 두 가지가 효의 기본이라고 하면 나는 내 자식이 손가락을 자르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죽을지언정……. 하지만 자기를 희생하면서도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에게 보답하는 옛 효의 정신은 계승받아 마땅하다.

중국 황실의 방은 9999개, 조선 왕실의 방은 999개, 일반백성들의 최대 방은 99개……. 이곳은 무려 99개의 방이 있는 마을이다. 마을 어르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르신께서 한곳한곳 설명을 해주셨는데 그의 말에서는 큰 자부심이 느껴졌다.

1이 아닌 큰 나루 마을, 새마을 운동전까지 사람 2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작았던 길을 가진 곳이 성산이씨의 집성촌인 한 개마을이다. 이곳을 돌면서 옛사람의 정성과 지혜를 느낄 수 있었다. 물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소나무를 못 옆에 두게 하면서도 결코 시들게 하지 않는 표현 할 수없는 신비함, 자식의 공부를 쉽게 할 수 있도록 지은 집! 아니 그들의 자식사랑! 개실마을에서는 효와 같은 정신을 강조했다면 한개마을에서는 위인들이 가진 정신을 강조했다. 대표적인 예로 자신이 호위하던 사도세자를 살리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하며 영조에게 감히 말을 하던 이 석문을 들 수 있다. 그는 지금으로 치자면 감히 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중위가 별 4개 달린 분 앞에서 명령불복종을 했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자신의 목숨보다도 신의를 소중히 여긴 그의 정신! 아니 그라는 인물 자체를 우리는 알아야 하며 본받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아파트라는 위로만 뻗는 현대사회보다 마을이라는 나무의 뿌리처럼 가지처럼 뻗은 옛 선조들의 그 마을이 우리에게는 더 좋은 환경이 되지는 않을까?

답사 후 내가 찾은 민족구심체, 공동체

답사 동안 내가 돌아다니던 곳은 옛 신석기인들이 함께 사냥하고 함께 먹고 함께 자던 그 향기가 배여 있던 암석화와 함께 마을을 이루어 볼 거 안볼 거 다보고 살아가던 마을들이었다. 우리 민족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우리는 하나라는 그 정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지금 우리에게는 그런 정신이 남아있는가? 우리에게는 나만이 존재하지는 않은가?

by 초령목 2011. 5. 20.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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