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인터넷에 퍼진 글이 있다. 바로 등산용품 전문회사로 유명한 노스페이스 사장이 남긴 어록이었는데 그 말이 "한국 학생들은 정말로 산을 좋아하나 보다" 이 말을 한 이유는 유난히 노스페이스 점퍼가 한국 학생들에게 많이 팔려나가서 한 말이다. 하지만 실상은 "노스페이스 점퍼가 다른 점퍼보다 방한효과가 더 잘되는 것 같다"는 이유였다. 이에 한 네티즌은 이런 댓글을 달았다. "노스페이스가 한국 학생들에게 잘 팔리는 것은 우리나라 교육이 산으로 가기 때문이다. 분명 그 네티즌이 웃자고 한 말이었으나 많은 네티즌들은 그 댓글에 "감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답글을 달면서 그 네티즌의 센스에 감탄했다.

"우리 미국은 한국의 교육열을 배워야 합니다!" 미국 대통령 오버마가 한 말이다.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한국이라는 동아시아의 조그마한 나라를 배워야 한다는 것은 고맙지만 우리나라 실상을 보면 '미국이 미치려 하나보군'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건 필자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이 역시 네티즌들이 먼저 생각했다. 2010년, 한 연구 자료에 의하면 한국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느끼는 행복감이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가장 낮게 나타났단다. 학업 성취, 교육 참여, 학업 열망 등을 평가한 교육 부문에서는 벨기에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높은 점수가 나왔지만, 자신이 ‘행복하다’고 답한 학생들은 20개국 평균 84.8퍼센트에 크게 못 미치는 55.4퍼센트 수준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네티즌들이 한국의 교육을 믿지 못하는 것인가? 무엇이 학생들이 한국의 교육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세계 물리학의 천재 아인슈타인이 대학시절 수학천재였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하지만 그런 아인슈타인은 현대 한국에 태어난다면 그냥 수학만 잘하는 놈일 뿐 대학에 들어가기는 사실상 어려울 것이다. 한국에서는 전 영역 1등급이 아니라면 상위대학에 들어가기는 힘들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는 미래를 책임질 천재인재보다는 전체적인 평균보다 우수한 사람을 뽑는다. 입학사정관제로 그렇게 버리는 인재들을 뽑는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 수는 입학사정관제도가 사람들에게 광고 된 것에 비해선 뽑는 수는 상당히 미미하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 버린 천재들이 얼마나 될까?

 

 그렇다면 대학에 들어가는 그 평균 이상의 사람들은 과연 정말 인재일까? 그것도 의문이다. 사실 그들 중 대부분은 사교육으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인재가 아닌가? 누구에게나 자신이 좋아하는 과목, 잘하는 과목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고 매년 30:1의 경쟁을 뚫기 위해서는 잘하는 과목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그것을 보완하기위해서는 무엇인가가 필요로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첫 번째, 사교육이다.

서울 지역 일반고(외고·과고·예고 등 특목고 제외) 출신 합격생은 모두 686명으로, 이 가운데 강남 3구 출신이 292명이었다. 이는 서울 지역 전체 합격자의 42.5%를 차지했다. 최근 3년 동안에 가장 높은 비율이라고 한다. 강남 3구를 제외하고 합격자가 가장 많은 곳은 노원구(57명)로 송파구와 같았다. 이어 강서구(40명), 양천구(39명)와 강동구(39명) 등의 순이었다. 사교육의 영향을 많이 받는 강남 3구와 노원구 등의 합격자가 다른 곳보다 월등히 많다는 것은 결국 사교육의 영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위에서 보는 통계와 같이 서울대 신입생에는 사교육으로 유명한 강남지역 학생들이 50%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대학교가 하나의 커리어가 된지 10년이 더 흘렀다. 대학교라는 자격증이 없다면 취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만족을 못하고 있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대학이라는 자격증이 필요한데 그 자격증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결국 사교육을 이용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한국의 학생들에게 학부모들에게 사교육을 부추기고 있는 것인가?

 

 사교육의 첫 번째 이유는 부모이다. 좋게 말하면 부모가 자신의 아이가 잘되길 바라는 사랑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내 아이만 잘되면 된다는 경쟁심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현재의 고등학생의 부모님은 농업사회였다. 비교적 가난했던 그 시기 부모님들은 학교에 돌아오자마자 가방은 집어던지고 부모를 도와 일을 해야 했다. 공부를 하고 싶어 했던 사람들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연필대신 괭이를 들어야 했던 그 시절의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에게는 연필만 잡게 해주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이 너무 과열되었다. 이왕 연필 잡는거 남들한테는 지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를 학원에 보낸다. 아이가 학원에 보내자 성적이 쭉 오르니 주위에 있던 학부모들도 학원의 효과를 느끼며 자신의 아이도 학원에 보낸다. 그리고 한두 개 다니니 티도 나지 않아 여러 개를 보내 아이들이 학부모보다 더 바쁜 일상을 보내게 된다. 학부모라는 고래들의 욕심과 경쟁에 학생이라는 새우 등만 터지는 꼴이 되었다.

 사교육의 두 번째 이유는 학원이 학부모를 유혹한다. 옛날에 한 시사 프로그램에서 학원의 폐단에 대하여 조사를 해보았다. 유학을 갔다 오며 한국에 와서도 여러 영어대회에서 상을 탄 한 학생을 위장시켜 한 학원의 레벨테스트를 받게 했다. 분명 무난하게 상위레벨을 받을 거라 예상했지만 아이는 그 아이의 수준을 생각한다면 터무니없게도 낮은 레벨을 받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다른 아이들과의 경쟁에서 지게 됩니다.” 나중에 이 아이의 이력을 밝힌 뒤 학원원장에게 이런 결과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학원원장은 당황했지만 이렇게 말했다. “학생을 끌기위한 수단입니다.” 학원에서는 이런 식으로 학부모의 불안함을 이용하여 사교육을 부추기고 있다.

 사교육의 세 번째 이유는 공교육의 모순된 점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동시에 존재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게 가능하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 교육에서는 존재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사교육이고 공산주의는 바로 공교육이다. 사교육은 학생들의 이목을 끌기위해 개인 연구소 직원 전원을 문제를 만드는데 투입하고 그렇게 만든 문제의 80%를 버리면서까지 최고의 문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왜냐하면 사교육시장에서는 눈에 띠는 사람만 살아남기 때문이다. 즉 사교육은 노력한 만큼 대가가 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학생들이 사교육에 흥미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에 반해 공교육은 그 반대이다. 사교육의 강사들은 자신들의 시간을 수업준비로 투자할 시간이 있지만 우리나라 교사들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다. 내가 선생인가 일반 사무직인가 헷갈릴 정도로 서류가 많이 내려온다고 한다. 그리고 학교 선생은 오히려 열심히 노력하려고 하면 욕을 먹기도 한다. 어차피 오는 월급은 비슷비슷하고 교사경력에 달려있으니 열심히 할 필요도 없가 있냐는 것이다. '괜히 당신이 열심히 하면 내가 욕먹는다' 라며.. 학생들도 수준이 천지차별이니 누구에 맞춰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학생들은 점점 공교육에 흥미를 잃게 되고……. 이런 모순된점에 공교육에 대한 실망감을 느끼고 사교육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다.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 공교육보다 민주주의 사교육이 더 인기있는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두 번째, 대학의 전문성이 사라져 하나의 자격증으로 변했다. 과거 학부모 시절에는 농업사회라는 이유로 대학을 못 갔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 당시 대학은 정말로 ‘지식인’들만 다닐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만큼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어려웠다. 1990년까지만 하더라도 대학 진학률이 33%에 그친 것에 반해 2008년에 들어서는 83%를 찍었고 지금도 80% 내외를 유지하고 있다. 대학이 정말로 하나의 커리어가 된 것이다. 서울대학교라는 자격증은 너무나도 큰 이름값을 한다. 그래서 자신의 적성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점수에 맞는 서울대학교 과를 낸다. 나는 적성이 영문과인데 서울대학교에 맞는 점수가 국문과이다. 그러면 국문과로 간다는 것이다. 대학의 이름값이 곧 취직 성공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대학의 문제점은 대학에 신입생을 뽑았으면 전문적으로 배우게만 해도 모자랄 판에 등록금도 얼마나 비싼지 1년 대학 다니고 1년 휴학하고 1년 다니고 1년 휴학하고……. 또 이런 등록금을 어디에 쓰고 있는가? 최근 등록금반값으로 문제가 많은데 정말 깨끗하게 쓰고 있다면 사용내역을 공개하면 된다. 하지만 대학에서는 공개 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베일 속에서 겨우 벗겨진 말로는 부동산을 샀다고도 한다. 등록금을 비싸게 받아놓고 학생의 권리는 생각도 하지 않으며 대학교 배만 채우게 하는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가 인재를 키울 수 있는 것인가? 정말 교육은 우리나라 최고의 사업 중에 하나인가 보다.

 

 세 번째, 학생들에게 무한경쟁을 강요한다. 최근에 우리를 충격으로 몰았던 카이스트 영재 자살사건이 있다. 사건의 원인은 바로 새로 총장이 오면서 학생들에게 경쟁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등급별로 징벌적 등록금을 내는데 커트라인 학점이 되지 않으면 차등적으로 등록금을 추가로 내는 것이다. 카이스트가 가장 좋았던 자율학습이 이런 제도의 실시로 사라지게 되었고 활발하던 동아리 활동이 대부분의 회원들이 뒤쳐지지 않기위한 공부로 인해 제대로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또 학점에 미달한 학생들이 결국 자살로 이어진 비극적인 사건이다. 또 다른 예가 있다. 영재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시사프로그램에 나왔는데 영재원의 장점은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걸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학생들이 만족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점은 이 영재원에서도 경쟁을 한다는 것이다. 개개인의 능력을 키워주는 곳에서 학생 200여명을 다시 모아놓고 그 안에서 또다시 경쟁을 해야 한다. 경쟁이 치열해서 매학기 마다 자신이 쓴 필기노트가 사라졌다고 하는 영재원 학생들도 많다. 그들은 왜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또 경쟁을 해야 하냐며 의아해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왜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일까?

 

 네 번째, 학생들의 학습의욕이 사라지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그건 생각을 안해봐도 답은 쉽다. 유럽에 있는 학교에 대한 뉴스를 봤다. 그 학교는 수업 한번하고 쉬는 시간이 30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최근에 네덜란드의 고등학교에서 학교 수업시간을 늘리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네덜란드 고등학생들이 일어나서 시위를 했는데 얼마나 늘렸나 했더니 한국시간으로 오후 5시까지 수업시간을 늘렸다고 한다.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이 소리를 들으면 웃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전 7시쯤에 학교에 가서 빠르면 밤 10시에 집에 온다. ‘집은 잠만 자는 곳’이라는 농담이 괜히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또 학원 여는 시간을 10시로 줄이기 전까지만 해도 새벽 1~2시까지 공부하는 학생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즉 하루의 3/4를 강제로 공부하는데 보내고 있다. 웬만한 노동자 하루일과 저리가라다. 또 우리나라 학교의 수업시간과 쉬는 시간을 비교해보면 기가 막힌다. 초·중·고 수업시간은 각각 40분·45분·50분이다. 그런데 쉬는 시간은 10분으로 통일 되어있다. 그리고 몇 해 전에는 초등학교 쉬는 시간을 5분으로 줄이는 학교로 논란이 일어난 적도 있다. 과연 1시간 수업 10분 휴식으로 얼마만큼의 효율을 볼 수 있을까? 또 우리나라 과목의 예체능 비율이 너무나도 낮다. 학교에게 과목선택의 자유를 주면서 대부분의 학교들은 체육시간을 줄이고 영어나 수학시간을 늘렸다. 여자라면 체육시간이 줄었다면 좋아하겠지만 사실 체육시간은 학교에서 공부로 지치고 굳은 몸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음악이나 미술시간도 학교에서 자신의 굳은 머리와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컴퓨터로 쇠약해진 체력으로 기초체력검사에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은 한국 학생들의 체력으로 고등학교를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지 그것이 진짜 미스터리다.

 

 

 이러한 교육의 문제점들로 인해 현대우리사회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대학에 입학하지 못해 '난 인생 망쳤다 이제 막살자'라고 느끼며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며 공부를 너무 잘해서 혹은 공부를 너무 못해서 왕따를 당해 사회로부터 소외감을 받는 사람들도 생기고 있다. 교육의 의미가 변색되어 현대사회 전체의 기강이 흔들리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장 근본이 되는 인간들의 정신을 고쳐야 하며 그 정신을 고치기 위해서 교육을 개혁해야한다. 채워져 있었다. 물론 그것이 점진적 개혁이 될 것인지 급진적 개혁이 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필자는 약간의 해결책을 제안한다. 

 

 첫 번째, 진로교육을 초·중·고로 확대한다. 독일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진로를 결정하고 그에 맞춰 상급 학교 진학을 준비한다.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가 적성검사와 상담을 거쳐 진로를 결정한다. 초등학교 4학년까지만 보는 게 너무 짧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을 보면 사정이 다르다. 초·중학교는 그저 ‘워크 넷이나 커리어 넷가서 검사를 한번 해보아라.’가 끝이다. 결국 고등학교에 와서야 실질적으로 진로교육을 시작한다는 말인데 그러면 그냥 봐도 너무 이른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더 쉽게 말하자면 사회로 나가기 직전의 마지막 3년에 진로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게 독일의 진로선택보다 더 짧고 말이 안 돼 보이지 않은가? 우리나라의 진로교육계획은 말로만 초등학교부터 시작된다고 하지만 그것을 행동에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이들을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이 12년이나 된다. 그러면 아이의 성향과 적성을 파악해 수준별 교육이 아닌 적성별 교육을 실현시킬 수 있다.

 

 두 번째, 공교육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쉬는시간이나 예체능 시간을 늘린다. 15시간 공부에 쉬는시간은 고작 3시간 남짓 그것도 수업시간 1시간과 1시간 사이의 10분. 이 시간으로는 학생들이 제대로 쉬기도 그렇다고 배운 내용을 복습하기에도 뭔가 부족한 시간이다. 이런 시간에서 무슨 효율성을 바라는가? 야구에서도 한 유망한 선발투수를 2~5선발 없이 5경기를 연속으로 9이닝 완투를 했다고 해봐라. 그 선수는 팔에 과부하가 걸려 야구를 접어야 할 수도 있다. 그 선발투수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1~5선발을 놓으며 적어도 1주일에 한 번씩 등판시키고 5~7이닝을 던지게 하고 마운드를 내려가게 해보아라. 그러면 팀에서도 이 유망주의 팬들은 열광하고 구단에서도 선수 건강에 무리 없이 키울 수 있고 경기에서 승리를 거둘 수도 있다. 교육에서도 똑같다. 지금 교육은 학생이라는 선발을 쉬는 날 없이 매 경기마다 9이닝 풀로 돌리고 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결국 학생은 과부하가 걸려 공부에 흥미를 잃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1주일의 선발들이 쉴수 있는 기간만큼은 아니더라도 쉬는시간은 늘려야 할것이다.

 또 체육시간은 이런 과부하 된 몸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데 너무 비율이 낮다. 컴퓨터를 할 때에도 매 시간에 10분씩은 몸을 풀라고 했다. 그런데 컴퓨터는 하루 종일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 반해 학생들은 공부를 하루 종일 해야 한다. 그런데 그 몸을 풀 시간은 너무 부족하다. 체육수업을 통해 신체적인 교육과 동시에 몸을 재생시킬 수 있다. 또 미술과 음악을 통해 정신적인 교육과 뇌를 활성화 시킬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세 번째, 대학에서는 평균보다는 그 학생의 잠재된 능력을 볼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거나 입학사정관제도를 확대한다. 우리나라에 많은 인재들은 자기들의 능력을 알든 모르든 죽어가고 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것은 현재는 입학사정관제로 신입생을 뽑는 비율이 조금씩 높아져가고 있어 현재는 신입생의 10%정도를 입학사정관제로 뽑고 있으며 신입생 절반에서 더 많게는 신입생 전체를 입학사정관제로 뽑는 학교가 생기기도 했다.

 

 네 번째, 조선시대의 공부에 대한 의지를 배워야한다. 조선시대에는 인재양성을 국가정책으로 삼았기 때문에 왕마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신하들이 많이 나왔다. 심지어 임진왜란의 수습을 못한 무능력한 왕이라 불리는 선조마저도 그의 주위에는 유성룡이라던가 이이 등의 재상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인재양성이라는 이름하에 타율성의 강제적인 공부를 하고 있기에 그토록 바라던 인재가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예전에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이 조선선비들에게는 가장 큰 꿈이었기에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공부를 했다. 조선 선비들의 삶을 보면 흡사 유럽에 있던 수도원의 생활을 방불케 할 정도로 규칙적인 삶을 살아왔다. 조선시대 최고의 대학교인 성균관에서는 유생들이 자신을 질책하는 돌 위에 서서 스스로를 때리며 공부에 집중을 하기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는 과연 스스로 의자위에 서며 자신을 때리며 공부를 할 만큼의 의지가 있을까? 조선시대에는 그런 의지가 유교적인 생각 충·효·예·의에서 나왔다. 부모를 대하는 태도를 스승을 대하는 태도처럼 스승을 대하는 태도를 왕을 대하는 태도처럼 그런 정신으로 공부를 했으니 인재가 안 나올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스승을 왕처럼 보는데 어느 학생이 집중을 하지 않을까?

 

 

 현재 한국의 교육(敎育)아닌 교육(絞戮:목매 죽다)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니 많은 원인이 나왔다. 이것 외에도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사실 요즘은 우리나라 교육에 대하여 말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학생체벌 금지로 인한 교권추락, 교권추락으로 인한 교사폭행, 등록금 반값시위 등 요즘 한국 교육에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게 보니 아직 개혁의 초기단계라 그런 것 같다. 원래 개혁의 초기에는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 불만을 하루빨리 보완·개선해서 이런 개혁의 성공이 적어도 내 밑의 후배에서부터는 성공하여 교사도 학생도 마음 편히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경희.hwp


첨삭지도

by 초령목 2012. 5. 30.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