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아래 두 개의 태양

1학년 이 경희, 장 성현, 박 영락

 우리나라에 대왕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누구인가? 열에 다섯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을 생각할 것이고 나머지 다섯은 조선의 세종대왕을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같은 대왕이지만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한명은 전쟁의 왕으로써 ‘대왕’으로 칭해졌으며 또 한명은 훈민정음 등 우리나라 과학과 문화에 영향을 준 왕으로써 ‘대왕’에 칭해졌다. 그들은 무엇이 다르기에 1600년이 지난 오늘까지, 60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대왕이라 칭송받고 있는 것일까? 하늘아래 두 태양은 없다지만 이 두명의 대왕들 앞에서는 그 말이 무색해 진다.

무武 광개토대왕(374~413) 

무(武)하면 떠오르는 대왕은 누구일까? 여러 왕들이 생각날 수도 있겠으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왕은 한명이다. 고구려의 19대왕이자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룬 광개토대왕이다.

 

‘광개토대왕’은 약칭

사실 광개토대왕이 그의 묘호로 알고있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그의 묘호는 상당히 길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을 줄여 광개토태왕 혹은 호태왕이라고 한다. 또 재위 시의 칭호는 영락대왕(永樂大王)이었는데, '영락(永樂)'은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최초의 연호로 알려져 있다. 팔방미인(八方美人) 광개토대왕 팔방으로 영토확장

장수는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야 한다- 드라마 '광개토대왕' -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하면 역시 영토 확장이라 할 수 있다. 일생동안 성64개의성과 1400개의 촌을 무너트렸으며 동으로 훈춘, 남으로 아산만에서 동으로 죽령 북서쪽으로 랴오허강(요하강) 이동의 만주지방 대부분에 해당하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한반도 내에서는 호우명그릇에서 볼 수 있듯이 신라에 고구려의 영향을 미치게 하여 보호국화 한다. 백제에 대해서는 원수라 여기며 강하게 몰아붙였다. 광개토대왕의 증조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백제의 공격에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396년에는 대대적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아리수 이북의 58개 성, 700여 개 촌락을 공략하고 위례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제 아신왕이 항복하여 노예가 되겠다고 하며 아신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명을 인질로 받았다. 400년 백제-가야-왜가 동맹을 하여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요청을 했다. 광개토대왕은 군대를 보내 왜를 격침했으며 가야의 맹주권이 금관가야에서 대가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광개토대왕이 일생동안 상대한 국가는 백제, 후연, 숙신, 가야,왜,동부여 등이었으며 이 중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격파하고 백제를 속국화 시켰으며 가야의 맹주권을 바뀌게 하였다. 그리고 숙신과 동부여는 정벌하여 고구려의 깃발을 꽂았으며 후연의 침입을 막아내며 동북아 1인자로 우뚝 서게 했다.

웅장한 광개토대왕릉비의 웅장한 기록   

  광개토 대왕이 죽은 2년 후 장수왕 3년(414년)에 세워졌으며 높이는 6.39미터, 글자는 모두 1,775자의 웅장한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은 광개토대왕의 비밀을 찾을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대국의 건설자가 백제와 후연과 싸우다 일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동북아의 제왕치고는 허무한 죽음이 아닐수 없다. 그렇기에 광개토대왕릉비의 가치는 여기서 빛난다. 예를들면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왜의 침입을 받은 신라가 고구려에 도움을 청했고 고구려군대를 본 왜군이 겁을 먹고 퇴각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또 이 광개토대왕릉비에서 고구려의 문장력 볼 수 있다.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엄은 온 세상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자 백성이 모두 생업에 힘쓰고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풍족해졌으며, 온갖 곡식이 가득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나 보다.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었다.

왕의 은택과 위엄, 부강하고 풍족한 나라를 이렇게 간명하게 쓰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이때는 5세기 초이다. 한문의 쓰임이 그다지 자유롭거나 널리 퍼져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 문장에서 마지막의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었다’의 원문은 ‘안가기국(晏駕棄國)’이다. 여기서 안가(晏駕)를 직역하면 ‘임금의 수레가 늦는다’고 하게 되는데, 왕의 죽음에 붙이는 무척 높은 수준의 말 꾸밈이다. 이런 문장구사력은 우연의 소산이 아니다. 당대 고구려의 문명이 국력의 신장과 함께 이렇게 올라와 있었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다만 이 웅장한 광개토대왕릉비에 논란이 되는 곳이 있다. 여러가지가 있으나 가장 논란이 되는 구절이 바로 이것이다. 중요한 글자가 훼손되었기 때문에 한일간의 의견차가 있었다. 신묘년에 왜 나라가 쳐들어오자,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가 왜를 쳐부쉈다. 그런데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로 쳐들어가) 그들의 백성으로 삼으려 했다. 6년 곧 병신년에 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토벌했다. 이 구절을 일본학자들이 임나일본부(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는 설)의 증거로서 일본 학자들은, “신묘년에 왜 나라가 쳐들어오자,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가 왜를 쳐부쉈다. 그런데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로 쳐들어가) 그들의 백성으로 삼으려 했다.”는 대목을 세 글자가 없는 상태에서, “신묘년에 왜 나라가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치고 백성으로 삼았다.”라고 번역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고구려가 신라를 돕기 위해 왜를 물리친 이야기이며 한 학자가 이 훼손된 글자를 복원하며 현재는 잘 마무리된 상태라 볼 수 있다.

그의 정복활동에 감춰진 국내통치

삼국사기에 따르면 광개토 대왕은 392년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지었는데 이는,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한 소수림왕의 정책을 계승한 것으로 국가와 백성들의 정신적 통일을 꾀하기 위한 종교정책의 일환이다. 아홉 개의 절을 평양에 창건했다는 사실은 평양의 중요성도 인식케 한다.  406년 궁궐의 중축과 수리는 커져가는 국가의 규모와 정치의 효율성을 위한 조치로 보이며, 408년 7월 나라 동쪽에 독산성 등 여섯 개의 성을 쌓고 평양 주민을 이주시킨 조치 역시 매우 의미심장한 하나 평양에 대해서도 모종의 조치가 뒤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주 정책을 실시한 바로 그 다음 달인 8월에 왕이 친히 남쪽 지방을 순행하고 있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아들 장수왕이 427년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것도 광개토대왕 때 이미 그 시초가 마련되었기에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평양의 중요성이 광개토대왕 때에 와서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도 위 짤막한 기록들에서 확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은 이러한 의미있는 국내통치와 국외정책를 통해 영토확장과 국내안정을 동시에 도모했고, 결과적으로 그 아들인 장수왕대에 고구려의 최대 전성기가 연출되었으며, 이백년간의 태평성대가 이루어진 기초가 되었다.

우리가 아직도 광개토대왕을 ‘대왕’이라 부르는 이유는 수천 년간 만주를 달렸던 옛날의 영광을 아직도 잊지 않았다는 그리움과 그 만주를 발판으로 우리나라를 ‘중국’이라는 당대 최강의 나라에 맞서 우리가 하늘이라는 자주적인 천하관을 가졌다는 자부심이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그를 광개토‘대왕’이라 부르는 것은 아닐까?


문文
세종대왕(1418∼1450)

 지금 당장 지갑을 열어 배추잎 1장을 꺼내보면 그 잎에서 온화하게 웃고있는 한명의 위대한 왕이 보일것이다. 그는 문(文)을 떠나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왕이자 조선의 위대한 성군, 조선의 4대왕 세종이다.

 
독서광 세종
"충녕은 책을 너무 읽어 눈에 진물이 다 나는구나. 눈이 다 나을때까지 충녕이 책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방안에 있는 책을 모두 치우도록 하여라." 책 안읽는 놈 치고 잘된놈 없고 잘된놈 치고 책 안읽는 놈 없다. 이 말을 증명하 듯 '잘된 놈'에 속하는 세종은 독서광이었다. 어릴적 한번 본 책을 100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던 세종의 책읽기 습관으로 왕세자였던 태종을 닮아 호전적인 성격이었던 양평대군을 밀어내고 왕위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세종은 임금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현명한 선비들을 많이 모은 집이라는 뜻의 '집현전'이라는 학술기관을 만들며 여러 학자들과 토론을 하기도 했다. 세종과 여러 말을 나누던 학자들도 세종의 학식에 감탄을 했다고 하니 세종이 선천적으로 영특한 것일수도 있겠으나 그는 후천적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책을 읽는 그의 생활에서 나온것일 것이다.


가갸거겨 훈민정음우리말이 중국말과 달라서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 뜻을 담아서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어 내놓으니, 모든 사람이 쉽게 깨우쳐 날로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함이다.-훈민정음 반포-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훈민정음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과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정신이 담겨져 있다. 법은 있으나 읽을줄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우리말로 된 글로 그들을 깨우치고 싶었던 세종의 애민과 중국, 일본은 물론 주위의 나라들이 각자 고유만의 글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민족의 글을 만들었던 애국이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게한 계기가 되었다.훈민정음은 세종이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에게 정치를 맡기고 여러 언어학 책을 읽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례적으로 '왕이 친히 만들었다"라 전한다. 여태껏 신하들과 함께 만들었다면 신하의 이름과 함께 나열을 했다. 하지만 이 훈민정음만은 달랐던 것이다. 훈민정음을 만들자 마자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던 세종이 고집했던 그 훈민정음은 현대에는 크고 밝은 글이라는 '한글'로 명칭이 바뀌며 자음과 모음을 합쳐 하나의 글자로 총 11172자를 쓸 수 있다. 이는 중국, 일본은 물론 영어조차도 불가능한 일이다.


조선의 르네상스 세종시대

세종대왕의 또다른 업적은 조선 과학기술에 혁명적인 발전을 가져주었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여러방면에서 천재라고 한다. 일화로는 박연이 세종 앞에서 편경을 연주할 때 세종이 한 음의 소리를 지적한다. 편경을 살펴보니, 먹줄 선이 덜 갈려 있었고, 때문에 제대로 된 소리가 나지 않았다. 편경에서 먹줄 두께는 반음 10분의 1의 차이를 가져온다. 그의 천부적인 음악감을 통해 맹사성에게 향악을 박연에게 아악을 정리하여 조선 음악의 기틀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세종도 손수 정간보라는 조선 고유의 악보를 만들었다. 그의 활동은 예술에 머물지 않았다. 훈민정음처럼 백성을 실질적으로 돕기위해 천문학 부분에서 혼천의 등을 설치하며 발전시켰으며 농사직설이라는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책을 만들었으며 또 장영실이라는 조선 최고의 발명가를 통해 자격루(물시계),암부일부(해시계)와 같은 시계, 측우기 등을 만들게 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쉽게 하였다.


전쟁왕 세종武와 文으로 나누어 세종이 文을 대표하는 왕으로 나왔다고 하여 그가 文에서만 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국방강화는 큰 임무였다. 북쪽으로는 김종서로 하여금 여진이 있는 땅에 4군 6진을 개척하게 하였다. 여담이지만 여기에도 일화가 있다. 세종대왕이 책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임금이자 백성들을 사랑하는 임금이라 그의 철학또한 달랐다. 그는 관리가 불편할수록 백성이 편해진다고 생각하여 관리들에게 부담을 주며 일을 시켰다. 그 중 김종서가 세종이 내주는 일을 버티지 못하여 자진해서 여진을 정벌하겠다고 하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찌되었든 이런 세종의 노력으로 북쪽지역을 안정시킴과 동시에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가지게 되었다. 남쪽으로는 왜구의 노략질로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자 이종무를 시켜 대마도를 정벌하게 했다. 대마도가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하였으나 왜의 노략질이 심해지고 이곳이 소굴이 되자 세종이 정벌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비록 일본에서 군사를 총동원하여 방어를 하려 노력하여 대마도 전체를 토벌할수는 없었으나 그들에게 큰 타격을 주며 회군하였다.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보였던 그를 보면 그에게는 조선이라는 우물이 너무 좁았을 것 같다. 하지만 오히려 우리에게는 세종이라는 선물을 받음으로써 우리민족이 문화민족으로 발전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세종에게 미안함과 동시에 감사함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그것을 알기에 아직까지도 그를 세종‘대왕’이라 부르는 것은 아닐까?


하늘에는 태양이 하나이며 우리에게는 광개토대왕이라는 태양과 세종대왕이라는 태양 2개가 존재한다. 하늘 아래 2개의 태양이 존재할 수는 없으나 태양은 우리에게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밤이라는 어두움을 없애주지 않는가? 그들에게는 송구스럽지만 우리에게는 하루 24시간을 낮으로 만들어주는 2개의 태양이 오히려 자랑스럽다.

우리가 10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왕들을 제치고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을 ‘대왕’이라 부르는 것은 그들처럼 특출한 새로운 ‘대왕’의 출현을 바라는 우리들의 바람 때문이지는 않을까? 우리의 소망대로 새로운 ‘대왕’이 출연하여 그들의 빈자리를 채워줬으면 좋겠다.

by 초령목 2011. 9. 8.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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