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창은 846년 장보고 사망이후 9세기말에서 10세기초까지 서남해의 해상권을 주도했던 호족 입니다.

'수달'이라는 별명이 따로 고려사에 기록될만큼 능창은 수전에도 탁월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능창은 909년 백제의 후방을 압박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나주 공략에 나선 태봉의 궁예에 의해 결국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제3차 나주 공략에 나선 왕건(고려 태조)이 능창을 생포하게 된 것입니다.

능창을 생포한 왕건은 곧바로 능창을 태봉의 수도인 철원으로 호송하게 되는데

철원에 당도한 능창은 궁예로부터 참수를 당했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태봉의 나주 공략은 모두 3차례에 걸쳐 진행됐는데 제1차 나주 공략은 염해현으로서(전남 영광) 왕건이 중국의 오월국으로 보내는 백제의 선박을 나포함으로써 이루어졌고 제2차 나주 공략은 영산강 상류지역인 나주까지 진격하여 백제 진훤(견훤)의 친정군까지 격퇴시킴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이윽고 능창과 왕건이 맞부딪히게 되는 제3차 나주공략이 반남현(나주와 영암의 경계지역)에서 이루어지는데 당시 능창은 압해현(목포앞에 있는 압해도의 고을)의 세력가로서 이섬을 중심으로 여섯 개 이상의 섬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능창은 이때에 왕건의 침공에 대비해 갈초도의 무리들과 결탁하여 반격태세를 갖추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전혀 뜻밖의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수전에 능한 능창을 상대하게 된 왕건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수영에 능한 병사 10명을 차출해서 이들을 무장시켜 밤중에 작은 배에 태워 갈초도를 오가게 하면서 태봉군에 대항하려는 자를 사로잡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걸려든 작은 배가 한 척 있었는데 거기엔 놀랍게도 능창이 있었던 것입니다.

능창이 그 작은 배에 왜 있었는지는 현재로선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왕건의 군대에 비해 숫적으로 열세였던 능창이 아마도 지리적 특성을 이용한 전술을 구사하려 했던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할 뿐입니다.

 

결국 그렇게 어이없게 사로잡힌 능창은 철원으로까지 압송되어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궁예에 의해 참수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수달이라고 기록될만큼 수전에 능수능란했던것으로 알려진 능창이지만 그가 전시가 아닌 평상시에는 당시 서남해를 기점으로 한,중,일의 해상무역을 관장했을 것으로 많은 학자들이 내다보고 있습니다. 때문에 능창이 이 지역의 세력가로 군림할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해상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물론 이는 기록이 아닌 당시의 정황상에 의한 추론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추론을 뒷받침해주는 하나의 근거는 이 일대가 장보고 사후는 물론 적어도 고려초까지 대 중국 남방 교역의 중심지로서 해상세력의 활동이 꾸준하게 전개됐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봤을 때 능창이라는 인물은 단순한 군벌이라기 보다는 이 지역의 군과 상권을 장악한 호족으로 보는게 설득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능창에 대한 한가지 흥미로운 대목은 과연 능창이 백제의 진훤(견훤)에 복속되어 그 휘하에서 활동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사실 요즘엔 많은 학자들이 서남해상의 특성을 고려할 때 오히려 능창은 백제와 연결되지 않은 독자적인 세력으로 이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 갈초도 - 갈초도는 고려시대에는 육창현으로 조선시대에는 육창향으로 개편 되었다고 합니다. 훗날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육창현이 섬이 아닌 영광군 소속의 내륙에 위치했을 것으로 표기하기도 했는데 오늘날에는 이 육창현의 위치를 현재 전남 신안군 일대의 섬으로 비정하기도 합니다.

by 초령목 2010. 10. 24. 1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