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견훤은 상주 가은현의 농민출신이었다. 본래의 성은 이씨였는데 뒤에 견씨로 성을 삼았다고 한다. 그는 체구가 크고 유달랐으며 의기가 충만하여, 군인이 되어 서남해 방면에서 싸울 때에는 용감하게 항상 다른 군사에 앞장섰으므로 그 공로에 따라 비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진성여왕의 실정과 기근으로 백성이 유리하고 도적이 봉기하자, 견훤은 큰 뜻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남지방의 주현을 쳐서 반란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한편 궁예는 신라 헌안왕의 서자로서 성이 김씨인데 어떠한 사정에 의하여 죽게 된 것을 유모가 안고 도망가서 몰래 길렀는데, 이 사건 때에 실수로 한 눈이 멀게 되었다. 아마도 그는 정권 다툼에 희생되어 지방으로 물러난 자였던 것 같다.

왕건의 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오대조인 호경이 북쪽으로부터 와서 개성지방에 자리잡은 것으로 되어있다. 그의 선조 중에서 가장 활발한 무역활동을 전개하고 또 큰 성공을 거둔 것은 그의 조부인 작제건(作帝建)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용건과 손자인 왕건 때까지도 계속하여 개성 지방을 지배해 왔으며 또 이들은 대대로 주위의 호족들과 혼인관계를 맺어 그 세력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견훤이나 궁예는 모두 신라계통 출신이므로 두 사람이 고구려나 백제의 전통과는 관계가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견훤과 궁예는 각각 백제와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했다. 그리고 개성의 호족 출신이었던 왕건은 궁예의 수하에 있다가 일어나 결국 고려를 건국하게 된다.

2. 견훤의 재해석

① 견훤의 본래이름 및 출생설화

진훤의 이름은 지금까지 견훤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옥편을 찾아보면 '질그릇 견(甄)'에는 '견' 혹은 '진'으로 발음이 나와 있다. 그러므로 견훤이나 진훤으로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지만 사실 진훤으로 읽는 게 타당하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역사학자인 순암 안정복이 저술한 『동사강목』은 '진훤'으로 읽어야 한다고 밝혀 놓았다. 많은 전적(典籍)을 토대로 저술한 일종의 백과사전인 『문헌비고』에도 진훤의 이름 앞 글자의 음이 '진(眞)'임을 밝히고 있다. 또 고창 병산전투와 관련된 현지 전설에서 진훤이 지렁이로 변해서 숨었던 모래를 '진모래'라고 일컫고 있다. '견모래'가 아닌 '진모래'인 점에서도 당시 그를 진훤으로 불렀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보다 분명한 것은 『완산견씨세보(完山甄氏世譜)』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우리 성(姓) 글자인 '甄'의 음은 본래 '진'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후백제의 진훤왕이 나라를 잃은 이후, 고려 왕조에서 우리 진씨가 재기부흥할 것을 두려워하고 염려하여 힘으로 항상 모멸의 해를 가하고자 했다. 그런 까닭에 우리 선조들은 다시는 세력을 규합하지 못하고 끝내는 나라를 일으켜 재건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우리 가문은 점점 이름을 내는 것 없이 세상을 피하여 숨어서 삶을 도모했기에, '진'음이 변하여 '견'음으로 읽었다. 그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 후손들은 '견'음을 사용하였다. 그 '甄'음은 시종 한 글자였으나 변혁되었으니 모두 견씨 가문의 성쇠의 운(運)에 기인한 것이었다. 무릇 우리 후손들은 이에 의심없이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견훤이 아니라 진훤으로 읽는 게 백번 타당함을 알 수 있다. 최근 이름 앞의 성으로 읽을 때는 '진'으로 불러야 하기에 진훤으로 발음하는 게 옳다는 견해도 나왔다. 그렇지만 앞서 언급하였듯이 현재 소수 성씨로서 '견'씨가 있지만 진씨가 아니라 견씨로 읽기 때문에 수긍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진훤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가. 진훤은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아차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한 부잣집 딸에게 밤마다 자주색 옷을 입은 사내가 다녀가곤 했다고 한다. 그 딸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찾아온 남자의 옷자락에 바늘을 꽂았다. 이튿날 바늘에 꿰인 실을 따라 갔더니 담장 밑에 있는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춤에 바늘이 찔려 있더라는 거였다. 이 설화는 진훤이 곧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기실은 그 이름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진훤이라는 이름을 경상도에서는 '진훠이'로 읽게 된다. 이는 지렁이의 경상도 방언인 '지러이'와 서로 통하는 것이다. 요컨대 지렁이를 연상시키는 진훤이라는 이름 때문에 그 관련 출생 설화가 생겨난 게 아닐까?

② 견훤의 정치 스타일

견훤은 신라에 대한 적대감으로 후삼국 상호간의 냉정한 국제관계수립이라는 적절한 정책을 갖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다. 특히 경애왕 4년(927) 경주를 습격하여 왕과 관료들을 무수히 죽이고 왕비와 궁녀들을 욕보이거나 약탈을 자행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고 돌아간 것은 바로 견훤의 대신라 감정과 이에 대한 정책의 한계를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라에 대한 적대가 감정적이 아닌 정책적인 것이었다면 이때 견훤으로서는 신라를 평정, 장악하고 위무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당시의 상황으로 볼때 왕건의 고려는 세력이 매우 약할 때였다. 그러나 이 일이 있고 난 이후 신라의 민심은 대신라 우호정책을 표방한 고려에 완전히 기울어져 버린다.

국가를 창건한 진훤은 관부를 설치하고 직무를 두었다. 그런데 어떤 연구자는 '그 내용을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휘하에 있던 신하들이 이찬. 파진찬. 아찬과 같은 신라의 관등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을 볼 때 신라와 크게 다른 것이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아울러 '견휜은 백제 유민들의 백제 부흥 의지를 이용만 하였을 뿐 이에 대한 대책과 배려에 힘쓰지 않았다'고 비판하였다.

특히 왕이 된 후 견훤은 자신의 한미한 세계를 신라왕실로 연결하여 윤색한 흔적도 보이는데, 그 정치적 식견과 역사적 성격이 기본적으로 궁예와 크게 다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관련 서적을 찾다보니 나온 흥미로운 내용이 있는데, 두 번째 리포트인 ‘9산 선문’ 과도 관련된 자료가 있어 여기에 함께 실어 본다.

전주로 천도한 이후 견훤은 실상사의 안봉화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실상사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적극적으로 하였는데 그것은 견훤이 신라로부터 사상적으로 자립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910년 안봉화상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견훤이 의도하였던 것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918년 왕건이 즉위하자 대안사를 주도하던 윤다가 왕건에게 갔으며 가지산문 역시 왕건의 수중하에 들어갔다. 사정이 이러한 가운데 경보가 귀국하자 그를 국사로 삼아 선종을 중심으로 한 불교계의 재편을 서둘렀다. 견훤 정권과 선종 불교와의 관계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신라말 최고의 선종 산문이라 할 수 있는 가지산문과 동리산문 그리고 실상산문을 그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그리고 성주산문이나 굴산문과 연결된 경보를 국사로 삼아 산문과 유기적인 연결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또한 상주 출신의 선승이 귀국하는 것을 도왓는데 이는 희양산문과 연계를 위한 것이었다. 이렇듯 견훤 정권은 당시 유행하던 선종 불교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선종 산문이나 선승들은 국가를 유지하는 하나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3. 궁예의 재조명

① 사료 분석

수십개의 군웅이 난립하던 시기, 그 혼란을 극복하고 일어선 궁예가 겨우 보리삭을 훔쳐먹다가 부양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는 치욕스러운 최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공이 이미 의기를 들었다”하니, 나라 사람으로 달려오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먼저 궁문에 이르러 북을 치고 떠들며 기다리는 자도 역시 만여 명이나 되었다.   궁예는 이 소식을 듣고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미복으로 북문을 빠져 나가서 바위 골짜기로 도망하였다가 조금후에 부양 백성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 민중들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 철원에서 아직까지 내려오는 궁예를 기리는 제사인 태봉제가 있다는 것만 보아도, 민중들은 그를 폭군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설화는 궁예의 최후도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바로 궁예가 자살했다는 것이다. 궁예와 왕건의 최후 격전지인 보개산성, 그리고 궁예와 그의 부하들이 최후에 통곡했다는 명성산. 그리고 궁예는 결국 자살하거나, 혹은 그의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궁예의 두 얼굴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는 병사들과 동거동락을 같이한 성군의 모습, 또 하나는 참소를 믿어 마구 사람들을 죽인 폭군, 그리고 부인과 두 아들을 죽인 매정한 아버지의 모습까지도 보인다. 성군과 폭군의 엇갈리는 모습. 같은 기록인데도 이렇게 상반된 두 기록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예에 관한 이야기는 고려 전기에 간행된 『삼국사기』(궁예전)에 처음 보인다. 여기에서 궁예는 부인에게 간통죄를 뒤집어씌워 그녀 소생의 두 아들과 함께 죽인 나쁜 왕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고려 후기에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에도 궁예는 '포악하고 방자'한 왕으로 기록되어 『삼국사기』의 기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이 개국된 뒤 편찬된 『고려사』는 고려의 건국과정을 서술하면서 왕건의 전사로 궁예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하다.

그때에 궁예가 반역이라는 죄명을 억지로 만들어 죽인 자가 하루에도 백여 명에 이르러 장수나 정승으로서 해를 입은 자가 십중팔구였다. 궁예는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미륵관심법을 체득하여 부녀들의 음행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 만일 나의 관심법에 걸리는 자가 있으면 곧 엄벌에 처하겠다' 라고 했다. 그는 드디어 3척이나 되는 쇠방망이를 만들어놓고 죽이고 싶은 자가 있으면 곧 그것을 달구어 여자의 음부를 찔러 연기가 입과 코로 나오게 하여 죽였다. 이리하여 부녀들이 모두 벌벌 떨었으며 원망과 분한의 날로 심하였다.

이외에 궁예에 관해 기록된 고문헌은 일부 가문의 족보에 수록된 것을 제외하면 더 이상 없다. 궁예와 동시대 인물인 견훤의 이야기는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궁예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일연은 궁예가 고려를 세웠다는 사실만 연표에 간단히 기록해두었을 뿐이다.

896년 철원에 도읍하고 국호를 고려로 정한 궁예는 임금을 칭하며 관제를 신설한다. 이후 국호를 대동방국과 통일천하를 각각 뜻하는 마진과 태봉으로 잇따라 바꾼 사실을 책은 자주와 민족단합을 모색하려는 의지의 발현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골품제 대신 능력에 따른 관직등용제도를 신설한 것이나 독자 연호 사용과 거란과의 적극적인 통교정책 등도 궁예의 혁명가적 성향을 보여주는 것으로 재조명된다. 심지어 지은이는 원주-영주-명주-간성-한계령-인제-철원-서해로 이어지는 정벌로를 `궁예의 길'이라 명명하고 국토개척자라는 별호를 주기까지 한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대부분의 기록은 궁예를 악인으로 평가하고 있고 이러한 내용은 지금까지도 궁예에 대한 인식을 지배하고 있다. 흔히 '정사'라고 불리는 국가의 공식 역사 편찬은 국가 권력의 전유물이었던 만큼 그 의지에 맞게끔 재편집되었고, 이 과정에서 세속적 권력의 패배자들은 변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진 반면 승자의 목소리만 남아 당당하게 군림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궁예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로 지목된다.

② 재평가

말년 과대 망상, 정신분열증 등에 시달렸으며 잔혹하기 이를 데 없이 백성들을 죽여나간 폭군으로서 궁예는 지금껏 평가되어 왔다. 그의 애꾸눈은 이러한 그의 성품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점지되어 있었던 것임을 증명하는 수단처럼 여겨졌었다. 하지만 이런 잔혹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가 한 때 신라, 후백제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땅을 다스렸다는 사실까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신이 이상하여 스스로 멸망을 자초했다는 그가 어떻게 그토록 폭넓은 지역에 걸쳐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었단 말인가. 비록 그 과정에서 왕건이 굉장한 능력을 발휘한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미륵으로 칭하고, 자신의 가족들을 보살로 여긴 것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았던 그 당시의 정황으로 보았을 때 그가 미쳤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수도, 연호 등을 계속해서 변경해나가는 과정은 때때로 궁예가 보여준 정신착란의 결과로 이야기되어지곤 했었다. 하지만 연호에서 느껴지는 기풍은 역사 속에서 거의 존재치 않았던 중국 사대주의로부터의 해방이었으며, 자주적 외교의 천명이었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당의 도움을 등에 업었던 것, 후백제와 고려가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중국에 의지했던 것과 달리, 궁예는 혼란스러운 중국 정세를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계, 백제계 등 복잡한 성향을 지닌 이들을 한데 어우르는 과정에서 그는 다른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고, 이는 왕권을 보다 강고히 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이 민중에게 주었던 부담감과 어우러져 실각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서술한 저서들을 찾아보긴 어려운 듯하다. 탄생에서부터 왜곡되게 묘사되었던 궁예의 생애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서술만이 남아있었다. 보리를 뜯어먹다 자신이 다스리던 주민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정권을 상실하고 자신의 생명마저도 부지하지 못하는 초라한 실패자로서의 궁예의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하지만 그가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닌, 자신의 운명이 다한 줄 알고 자결하였다는 설은 그에 대한 재조명의 필요성을 일으키고 있다.

4. 왕건

궁예의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하는 것은 왕건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왕건의 등장과 더불어 궁예는 반인륜적인 행동과 잔혹성을 드러내며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러한 몰락 과정은 왕건의 반궁예적인 행위에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지배집단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처음 태조 나이 20세 때 꿈을 꾸었는데, 9층 금탑이 바다 가운데서 그 위에 올라가보았다. 위의 기록은 왕건의 입장에서 윤색된『고려사』의 한 부분이다. 왕건이 일찍부터 제왕이 될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미화한 내용인 듯한데, 이 짧은 기록은 왕건의 인물됨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왕건이 일찍부터 치밀하게 역모를 준비했다는 구체적인 자료가 되기도 한다. 학계나 일반인들 사이에서나 궁예는 왕건이 아니라도 어느 누군가에게 반드시 쫓겨나야 할 인물로 각인되어왔다. 그러나 위의 사료는 사실 왕건이 30세때부터 왕이 되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장기간 역모를 꾀했음을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의 궁예는 도적의 무리를 이끈 우두머리이며, 백성을 괴롭히고 나라를 어지럽힌 흉인에 불과한 것으로 그려진다. 태봉을 건국한 건국주로서의 궁예는 온데간데없고, 단지 백성들을 괴롭힌 인물로 평가절하 되고 있다. 이것은 고려의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

지금까지 견훤과 궁예를 재조명하는데 중점을 둔 것은 사실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왜곡되고 폄하된 패자(敗者)들의 조명 또한 필요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왕건을 반대로 필요이상 깎아내리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개창한 왕건의 성공 요인 또한 비중있게 다뤄져야 할 것이다.

왕건은 그가 가지고 있던 세력과 공적을 바탕으로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 여러 장수의 추대형식을 거쳐 궁예를 제거하고 왕위에 올라 고려를 세웠다. 왕건은 출신지역으로나 출신기반의 성격으로 보아 견훤이나 궁예와 달리 어느정도 지역적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며, 후삼국시대의 모든 경쟁세력 가운데에서 지방호족세력이 갖추어야 할 역사성에 가장 충실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왕건은 왕위에 오른 뒤 일차적으로 표방한 것이, 백성들의 수취체계 정비였는데, 이는 적어도 왕건의 경우 당시 사회혼란의 근본적 원인이 가혹한 고대적 수취체계에서 야기된 경제모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당시의 여러 지방세력들은 외형적으로는 반신라적 또는 반골품제적 성향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지만, 그 본질은 신라사회가 가지고 있는 시대적 모순에 저항하고, 나아가 다른 역사적 성격의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즉 당대의 사회혼란의 과정이 고대적 사회의 모순으로부터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던 역사적 변동의 과정이었음을 알고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이러한 역사성을 충실히 반영해야 내외의 모든 민중과 호족 세력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고 결국 역사의 승자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후삼국시대 여러 강대세력 중에서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왕건이 자기시대의 변화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가장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또 이에 충실히 대응했기 때문이다.

5. 결론

용장 견훤, 덕장이자 지장인 왕건, 그리고 궁예, 이 세 사람을 동시에 비교할 만한 자료나 이들의 행적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은 형편이지만 궁예가 공평무사한 지휘관이었다면 그에 비해 견훤은 통솔보다는 지휘를 더 중시했던 인물이었고, 왕건은 지휘보다는 통솔에 더 관심을 가졌던 지휘관이었을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신라 무장 출신의 견훤, 대호족 출신의 왕건에 비해 궁예는 열악한 처지에서 몸을 일으켰으므로 무엇이든 완벽을 기하지 않고서는 자기 기반을 확보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점에서 지휘와 통솔을 구사하는데 중점을 두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상시 역사를 읽을 때 언제나 의문 나는 것은 선한 것은 지나치게 선하고 악한 것은 지나치게 악하다는 것이다. 당시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의 저작이 비록 권선징악의 좋은 뜻에서이기는 하나 오늘날 사람들은 평지상에서 간과하여 말하기를 '선한 사람은 진실로 의당히 저래야 하지만 악한 사람은 어떻게 이 정도로 악할까' 한다. 기실 선한 것 가운데도 악이 있고 악한 것 가운데도 선이 있는 것이어서 당시 사람도 실로 시비를 가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거취를 잘못하여 조소를 받고 죄악을 범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성호(星湖)는 선악의 포폄을 역사학의 목적으로 생각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을 단순히 선악의 면으로만 해석하려는 태도에 반대하였던 것이다. 역사는 승자만을 기억한다.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을지라도 말년이 성공적이지 못한 이들은 그로 인해 모든 업적이 낮추어 평가된다. 그리고 때로는 단순한 낮춤의 수준을 넘어선 의도적인 폄하에 의하여 전혀 다른 인물로 각색되기도 한다. 우리의 역사는 업적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에 우선한 옳고 그름의 시비가 존재하는 듯하다. 그에 따라 한 사람은 어떠한 단점도 지니지 않은 고결한 존재로 부각되는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너무도 추한 존재로 묘사된다. 궁예는 후자에 속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를 평가하는 역사서들의 대다수는 왕건의 고려 건국 정당성 확보라는 과업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의도적으로 그를 폄훼한 듯이 보인다. 그렇기에 역사는 그 역사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확인 하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과거 통일신라라는 명칭으로 불리던 신라가 발해의 존재에 대한 고찰로 인하여 남북국 시대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듯이, 이 견훤, 궁예, 왕건의 세력다툼이 있던 시대에 대해서도 또한 새로운 시각이 요구된다. 그와 동시에 그들에 대한 평가도 다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출판부, 1990.
박용운 외, 『한국사 12』, 국사편찬위원회, 1993.
이재범, 『슬픈 궁예』, 푸른역사, 2000.
조현설, 「궁예이야기의 전승양상과 의미」, 『우리 역사인물전승 2』, 집문당, 1997.
이도학, 『궁예, 진훤, 왕건과 열정의 시대』, 김영사, 2000.
박한설,「왕건세계의 무역활동에 대하여」,1965.

'후삼국史보는 나무 > 후삼국시대 관련 펌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달장군 능창  (0) 2010.10.24
신라 말기의 반란  (0) 2010.10.23
궁예 전설  (0) 2010.10.23
후삼국시대의 주변국 상황  (0) 2010.10.08
후 삼국시대 역사  (0) 2010.10.08
by 초령목 2010. 10. 23. 14: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