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웅이라는 교수가 쓴 고전소설 줄거리 집성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고전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해서 정리해 놓은 책인데,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은 얼마나 될까요? 무려 856종입니다. 그리고 이 책이 나온 게 십여 년 전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도 발견한 소설, 그리고 조희웅 교수가 미처 책에 실지 못한 소설들이 더 있을 것을 생각한다면, 고전소설은 거의 천 여 종에 이릅니다.


고전소설 작가들은 우리들에게 알려진 사람이 많지 않지만, 조선 후기는 소설의 시대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조선만의 현상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많은 나라가 소설의 시대를 맞아 이야기가 풍성해졌죠.

옛날에 소설을 즐기던 방식은 몇 가지 있습니다. 필사해서 보는 것입니다. 저작권이 없던 시대라 필사하면서 내용이 마음에 안 들면 자기 마음에 들게 내용도 바꿨죠. 그래서 탄생하는 게 이본입니다. 그리고 이웃집에 책이 있으면 빌려 보는 일도 있었죠. 이웃집 아낙네에게 소설 좀 빌려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도 남아 있답니다. 또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이야기 들려주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도 있었고, 길거리로 나가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답니다. 이를 전기수라고 하죠. 조수삼의 추재기이에는 이런 증언이 있습니다.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노인은 동대문 밖에 산다. 언문(諺文)으로 쓴 이야기책을 입으로 줄줄 외우는데 <숙향전>(淑香傳), <소대성전>(蘇大成傳), <심청전>(沈淸傳), <설인귀전>(薛仁貴傳) 따위의 전기소설들이다. 매달 초하루에는 청계천 제일교(第一橋) 아래 앉아서 읽고, 초이틀에는 제이교(第二橋) 아래 앉아서 읽으며, 초사흘에는 이현(梨峴)에 앉아서 읽고, 초나흘에는 교동(校洞) 입구, 초닷새에는 대사동(大寺洞) 입구, 초엿새에는 종루(鐘樓) 앞에 앉아서 읽었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기를 마치면 초이레부터는 거꾸로 내려온다. 아래로 내려갔다가 올라가고, 올라갔다가 또 내려오면 한 달을 마친다. 달이 바뀌면 또 전과 같이 한다.

노인이 전기소설을 잘 읽었기 때문에 몰려들어 구경하는 사람들이 노인 주변을 빙 둘러 에워쌌다. 소설을 읽어가다 몹시 들을 만한, 가장 긴장되고 중요한 대목에 이르면 갑자기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다음 대목을 듣고 싶어서 앞다투어 돈을 던지면서 ‘이게 바로 돈을 긁어내는 방법이야!’라고 했다."




전기수의 절단신공을 이때는 요전법이라고 불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결정적인 순간에 이야기를 딱 끊어서 다음을 궁금하게 하는 방법은 변함이 없었던 것이죠. 조선 시대에는 지금보다 문맹자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소설책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전기수는 소설을 즐길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소설책을 읽을 수 있어도 전기수가 실감 나게 이야기를 꾸미는 것을 듣고 싶었을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건도 있었죠.



"옛날 한 남자가 있었는데 종로 거리의 담배가게에서 소설책 읽는 것을 듣다가 영웅이 크게 실의(失意)한 대목에 이르렀다. 문득 눈초리를 찢고 침을 뱉더니 담배 써는 칼을 잡아 소설책 읽는 사람(讀史人)을 쳐서 그 자리에서 죽였다. 왕왕 맹랑하게 죽는 일과 우스운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전기수가 얼마나 실감나게 이야기를 했으면, 영웅(다른 기록에는 임경업이라고 합니다)이 좌절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흥분해서 전기수를 죽이는 엽기적인 사건까지 있었을까요. 이런 극단적인 사례는 아니지만, 요즘 드라마에서 악역 하는 배우를 실제로 보면 욕하는 아줌마, 할머니들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업도 유행했습니다. 영화 음란서생에 세책업의 모습을 일부 엿볼 수 있는데, 현재의 도서대여점처럼 소설책을 빌려주면서 이익을 얻는 곳이었습니다. 채제공 같은 분은 여편네들이 살림은 안 하고, 소설책 읽느라 가산 탕진한다고 한탄할 정도로(물론 소설을 안 좋게 봤던 높으신 분들의 시각이 들어갔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세책업은 유행했습니다.

또 값싼 목판본 소설을 판매하기도 했죠. 이건 방각본이라고 불립니다. 방각본 소설은 실제 소설 내용을 압축한 일종의 다이제스트판이라고 할 수 있어요. 대체로 판매 지역은 서울, 안성, 전주였는데, 판매지역에 따라서 경판본이니 안성본이니 완판본이니 했답니다. 이것은 판매를 높이기 위해서 일부러 내용을 줄이고, 글자도 줄이고, 몇몇 방법을 동원했는데, 지역에 따라서 내용 편차가 좀 있습니다. 춘향전 같은 경우 경판본은 상당히 짧은데, 완판본은 장편 수준으로 꽤 길죠. 우리가 흔히 보는 춘향전은 완판본인 경우가 많답니다.

소설을 읽는 건 높으신 분들도 예외가 아니라서 궁중에까지 흘러들어갑니다. 현재 창덕궁 낙선재에 소설을 쌓아 놓고 읽었는데, 이 소설들이 대장편인데다가 유일본인 경우도 많아서 연구자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고 하더라고요. 완월회맹연 같은 소설은 무려 180권 180책으로 현재의 웬만한 대하소설보다 훨씬 방대한 분량입니다. 특정 가문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몇 세대에 걸쳐서 이어내는 구성의 소설이 이때 많이 유행했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고전소설들은 현존하는 고전소설들의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이것만 읽고 아, 고전소설은 이렇다 저렇다 인상비평 하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고 코끼리는 어떻게 생겼다라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닐까요? 문학이라는 것이 쉽게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기준에 맞추느냐에 따라서 작품 평가가 달라지니까요.


by 초령목 2014. 9. 4. 2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