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맹주 아자개

우리는 드라마 태조왕건에서 아주 코믹한 인물로 나오는 아자개란 인물을 재미있게
보고 있다. 고려사 기록을 보면 "상주 적수 아자개가 사인을 보내서 내부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당시 그 아들인 견훤은 강력한 정부를 구축하여 대백제국 황제의 자리에 있으면서
욱일승천의 기세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데 그 아버지가 적국인 고려에 귀부했다는
사실은 상당히 미스테리한 사건이다.

드라마에서는 계모인 남원부인이 들어오고 그 불화로 아자개와 견훤의 사이가
급속히 나빠지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아자개의 귀부는 상당히 의아한
사건이다.

그래서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은 고려사의 아자개를 견훤의 아버지가 아닌
또 다른 상주 호족인 동명이인 아자개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자면 당시의 정황과 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자개의 세력권이던 상주 지역은 고려와 신라를 연결하는 요지로써 고려군의 공격이
지속되고 있었다.
여기에는 견훤군도 참여하여 방어 전쟁을 벌이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상황에서 아자개는 아들의 적인 고려에 귀부하는 미스테리한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를 설명하는 경우의 수를 살펴보자.

첫 번째 가정은 드라마에서 그리는 것처럼 부자간의 갈등으로 인해 발생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중간에 계모가 개입되서 부자간의 사이가 악화되어 차라리 적국으로 귀순해버리는
극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드라마에서 아자개의 병을 고쳐주어 생명의 은인에 대한 대가로 귀부를 한다고 그리고 있지만 이는 상당히 허구적 요소가 강하며 그다지 신빙성있는 분석은
아니다.

두 번째는 당시 접경 지역에서 주둔하고 있던 고려군의 잇따른 공격으로 상주 일대의
방어 전선이 점점 약화되었을 가능성이다.
고려군의 지속적이면서 잇따른 공격으로 인해 상주전선은 점차 약해지고 있었으며
점차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어지면서 고려측의 포섭작전도 또한 병행되었을
가능성이다.

그 지속적인 포섭활동의 주역은 드라마 상에서 박술희가 아니라 아자개와 예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허월대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 건국에서 허월의 역할을 참으로 큰데 그는 궁예 정권 시절에도 내원에서 계속
업무를 관장하였으며, 궁예를 몰아내는 정변이 있은 후 곧이어 일어난 명주성 성주
김순식의 저항에도 밀사로 파견되어 김순식을 귀부케하는데도 기여한다.
그 일로 인하여 왕건은 그 고마움을 잊지못해 허월에게 왕씨 성을 하사하여 의제가족을맺게 되는 것이다.
아자개 귀부에서도 아마 귀부를 종용하게 한데는 허월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여겨진다.

세 번째는 아자개가 연로해지면서 그 후계 문제와 상속을 둘러싼 백제 왕인 견훤외에
또 다른 아들들인 용개, 보개간의 상주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싼 상속 분쟁의 가능성이다.
당시 상주 지역은 전략적 요충지임과 동시에 비옥한 토지였으므로 상속 문제에 있어서 배다른 형제들인 견훤 형제와 용개, 보개 형제들 간의 상속 다툼이 치열했을
것이다.
그러나 힘으로야 본다면 견훤 세력이 막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상속의 가장
우선시할 수 있는 합법성의 원천은는 아버지인 아자개의 의향일 것이다.
아자개의 의도가 상주지역의 상속 문제를 결정짓는 가장 근본 요소일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견훤이라도
힘으로 대처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견훤 형제들과 용개 형제들 간의 다툼 속에서 아자개는 적잖이 후계 문제를
놓고 고민을 했을 것이며, 캐스팅보트를 쥔 사람이자 용개 형제들의 편을 들고 있는
남원부인과의 사이에서 고민과 고민을 거듭하다가 아자개는 모든게 귀찮아서 아예

고려로 귀부하였을 가능성이다.

이 가능성은 상당히 신빙성 있는 가능성으로써 그의 아들인 견훤도 훗날 똑같은
과정을 겪었다.

이복형제들인 신검파 세력과 금강파 세력간의 갈등 속에서 급기야 유폐되고야 마는
상황에서 고려로 귀부해 버리는 이 상황이 어쩌면 아버지의 선례를 따랐을 가능성도
배제는 못하는 것이다.

네 번째로는 위의 모든 가정을 원상태로 돌리는 것으로써 고려사에 나오는 상주 괴수
아자개는 견훤의 아버지도 아니고,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는 또 다른 이름의 동명이인일 뿐이라는 것이다.

귀부하는 아자개는 상주를 다스리던 호족이고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는 이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아자개는 고려에 귀부하여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고려 태조가 이를 얼마나
반겼던지 대대적으로 연회와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반대로 견훤은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겪었을 것이다. 여기서 정치 세계의 비정함이
나타나는데 부자간의 정마저도 정치 현실에서는 등을 돌리고 마는 것이다.
훗날 아자개가 고려에 귀부한 것처럼 견훤 역시도 아들들과의 다툼 속에서 고려로
귀부하고 마는데 이 역시 부전자전이 아닌가? 무릇 큰일을 하려면 가정의 화목부터
출발하라고 하는데 견훤은 이런 면에서는 부족했나보다.

어쨌든 아자개의 귀부는
당시 후삼국의 정세를 바꿀 엄청난 사건이었다. 아자개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을 비롯해서 총 네명의 아들의 아버지로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 사람입니다. 본래는 농부이죠. 신라 말의 혼란기를 틈타서 군사를 일으키고, 사벌국고성에 웅거하였습니다. 918년, 궁예 휘하에 있던 왕건이 왕위에 그에게 오르자 항복하죠.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이제가기(記)라는 책에 따르면, 신라 진흥왕의 아내인 사도 왕후의 셋째 아들인 구륜공이고, 구륜공의 아들은 선품이며, 선품의 아들은 작진이 왕교파리를 아내로 맞이해서 낳은 아들이 아자개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제가기에 따르면, 아자개에겐 두 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첫째는 상원부인, 둘째는 남원부인이라고 합니다. 총 5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이 있었는데 장남은 견훤, 둘째는 능애, 셋째는 용개, 넷째는 보개, 다섯째는 소개이며, 딸은 대주도금이라고 합니다.

아자개(阿玆蓋)
생몰년 미상. 신라말·고려초 상주지방의 장군. 아자개(阿慈介)·아자개(阿慈个)·아자개(阿字蓋) 또는 원선(元善)이라고도 한다.
가계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2 후백제견훤조에 인용된 《이제가기 李磾家記》에 의하면, 아자개는 신라 진흥왕과 사도부인(思刀夫人) 사이에서 태어난 구륜공(仇輪公)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리고 부인으로는 상원부인(上院夫人)과 남원부인(南院夫人)이 있었으며, 자식은 5남1녀(혹은 아들 4형제라고도 함.)가 있었으니 장남이 바로 견훤(甄萱)이라고 한다. 《삼국사기》 권50 견훤전에서도 견훤의 아버지가 아자개로 되어 있다. 아자개는 처음에는 농업에 종사하였지만, 신라 하대의 혼란기에 전국 각지에서 농민을 포함한 지방세력이 봉기하자, 그도 885년(헌강왕 11)∼887년(진성여왕 1)에 사불성(沙弗城: 지금의 상주)을 근거지로 군대를 일으켜 장군을 자칭하였다.
그뒤 그의 아들인 견훤이 892년 무진주(武珍州)를 점거하고, 900년(효공왕 4) 완산주(完山州)를 근거로 후백제를 세운 이후에도, 아자개는 계속해서 상주지방에 웅거하고 있었으며, 918년(태조 1) 7월에 마침내 고려에 항복하였다. 다만, 《고려사》 태조 1년 9월 갑오조에는 9월에 항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같이, 아자개가 견훤과는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바, 이 때문에 견훤은 아자개의 아들이 아니며, 양자는 출신지방만 같을 뿐 전혀 별개의 지방세력이라는 견해도 있다





by 초령목 2011. 2. 12. 2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