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내부에서의) 전쟁이 많았던 시대를 꼽으라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삼국시대를 꼽을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힘이 대등한 세 국가가 한반도와 만주 전역에서 600여년에 걸쳐 힘을 겨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삼국이 정립되기 이전의 수많은 국가들은 군장국가, 연맹국가의 수준에서 아직 고대국가의 반열에 들지 못했던 수준의 소(小)국이었기에 삼국시대의 역동성을 가졌다고 보기 어렵다. 신라가 대동강 이남 지역을 통일 한 후 지속되었던 남북국 시대의 경우에도, 발해가 멸망하고 신라가 분열될 때까지 큰 영토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고려, 조선 등 통일국가가 수립되어 지속되어 온 것을 본다면, 삼국시대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흥미로운 시대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실 우리 역사는 또 한 번의 분열기를 가지고 있다. 또 하나의 삼국시대, 후삼국시대이다. 멸망의 조짐이 보이던 신라에 대항해 후백제, 고려라는 이름에서도 볼 수 있듯 각각 백제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들이 한반도에 자리를 잡은 배경만 본다면 이 기간을 후삼국시대라고 부를 만하다. 그런데 이 시대가 지속되었던 기간을 본다면, ‘시대’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짧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원년(서기 0년)을 전후로 건국되었고, 이 국가들은 신라가 삼국통일 후 676년 당나라를 매소성, 기벌포 전투에서 물리칠 때까지 약 6~7세기동안 세력다툼을 하게 된다. 이에 비해 궁예와 견훤이 스스로를 왕으로 칭한 서기 900년 경부터 신겸의 항복으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936년까지, 후삼국시대는 약 40여년밖에 지속하지 못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들이 작용했겠지만, 필자는 세 가지 추측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삼국시대에 비해 후삼국시대에는 민족의 분열이라는 개념이 생소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기 다른 문화와 행정체계를 발달시켰고, 필요할 때에는 서로를 공격하기도 하며 성장했다. 물론 문화나 언어적인 측면에서 일본이나 대륙의 국가들에 비해 삼국은 많은 요소들을 공유했다. 그러나 백제가 일본과 함께 신라를 공격하거나, 삼국시대의 막바지에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관계를 수립한 점 등을 볼 때, 삼국시대에는 아직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유민들이 한 민족이라는 의식은 미약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후삼국시대는 달랐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달래기 위해 많은 정책들을 실시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행정체계이다. 신라는 전국을 9주로 나눈 후, 옛 고구려, 백제, 신라의 영토에 세 주씩 골고루 배치했고, 지방 곳곳에 다섯 개의 소경을 두어 그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도록 했다.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왕족들을 귀족 사회에 일부 포함시키면서 화합을 도모하기도 했다. 이처럼 신라의 융합정책이 실시되고, 당시 가장 작은 행정단위였던 촌은 지방관이 아닌 토착세력이 관리했음을 볼 때,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은 큰 저항 없이 신라에 융합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때부터 후삼국이 정립되기까지 이미 20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비록 궁예와 견훤이 각각 옛 고구려와 백제를 계승한다는 취지에서 건국을 했으나, 백성들이 호응했던 것은 옛 조국의 부활이 아니라,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견훤과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한 이후 뚜렷한 부흥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옛 왕조의 부활이 이들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둘째, 후삼국시대의 세 국가가 오랫동안 자웅을 겨루기에는 당시 상황이 적합하지 못했다. 후삼국시대를 고려, 후백제, 신라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신라는 무너져가는 국가였다. 신라는 고려와 후백제의 치열한 전투 속에서 중립을 지킬 수밖에 없었고, 왕이 견훤에 의해 죽는 수모를 겪고 난 뒤에는 고려에게 나라를 바치게 된다. 고려와 후백제의 세력다툼이 한반도 중남부에 국한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신라 말기 당나라가 멸망하면서 중국대륙에는 혼란이 있었고, 발해라는 방파제가 있었기에 고려는 북쪽의 방위에 신경쓰지 않고 견훤과의 대결에 집중할 수 있었다. 후백제 역시 일본과의 동맹관계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자국의 힘만으로 고려와 싸울 수밖에 없었다. 외부 세력의 개입도 없고, 신라라는 국가가 경쟁에서 제외된 상황. 한반도 중남부라는 좁은 지역에서 벌어졌던 왕건과 견훤의 세력 대결은 필연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었던 대결이었다.

 

셋째, 후백제가 아직 온전히 국가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던 것도 후백제가 일찍 멸망하게 된 원인이었다. 운명적인 고창 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이후에도, 견훤은 군사를 추슬러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내부의 왕위 계승 다툼으로 인해 결국 견훤은 스스로 자신이 세운 국가를 정벌하는 데 앞장서는 상황에까지 이르고 만다. 삼국시대에는 달랐다. 많은 전쟁을 겪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는 국가의 존망 위기에까지 이르렀던 적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고국원왕의 전사이다. 백제의 근초고왕에 의해 왕까지 전사하는 위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다시 힘을 추슬러 백제에 복수를 할 수 있었다. 특히 소수림왕은 국가적 위기를 불교 수용, 율령 반포, 태학 설립 등 국가의 체계를 다지는 계기로 삼아 이후 광개토대왕이 고구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을 만들었다. 백제 개로왕의 전사 때는 어떠했는가? 이 때 백제 역시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게 빼앗긴 후 수도를 웅진으로 천도하는 수모를 겪었으나, 무령왕과 성왕 대의 재기를 거치면서 다시 한 번 중흥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반면, 고창 전투에서 패배한 후의 후백제는 재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후백제는 아직 국가의 기반이 완벽히 다져지지 않았으며, 특히 왕위 계승의 경험이 없어 견훤이 물러난 후 왕권 약화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만약 후백제가 국가의 기틀을 완벽히 다지고 난후 위기를 맞았더라면, 고려와 후백제의 대결구도는 오랫동안 계속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by 초령목 2010. 10. 29. 16: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