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도성 남대문 석등(石燈) 사진은 이미 오래 전 원본이 사라졌다. 철원군지(鐵原郡誌)는 천 번도 더 찍어냈을 복사판 사진을 싣고 있었다. 어느 책에 나온 우표딱지만한 흑백사진을 잡아 늘릴 수 있는데까지 확대한 게 틀림없었다. 사진 속으론 모래바람이 불고 있었다. 피사체는 작은 구멍들이 가득 뚫려 있었다. 제주도 돌하루방 같았다. 철원도 제주도처럼 현무암 대지 위에 올라앉아 있는 '곰보돌'의 고장이다. 그 사진만으로는 석등은 조악한 그 곰보돌 조각에 불과했다. 애꾸눈 궁예왕이 지천으로 나뒹구는 '곰보 바위'하나를 들어다가 아무렇게나 쓱쓱 깎아 도성 남대문 앞에 턱 세워 놓았을것만 같았다.

그러나 석등은 일본이 1940년 7월 30일자로 국보 118호로 지정했던 키 280cm 짜리 화강암 돌조각이다. 철원의 궁예도성은 신라의 도읍지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이나 석가탑보다도 2세기 후에 축조됐다. 따라서 그 석등은 석가탑이나 다보탑보다도 더 정교하고 품위있게 다듬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석등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으며 이젠 국보도 아니다. 그 석등처럼 태봉국의 왕 궁예(弓裔. ?~918)도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모습으로 역사 속에 남아 있다.

후삼국 시대는 44년 만에 막을 내렸다. 궁예는 그 가운데 단 18년 동안 태봉을 통치했다. 그리고 그 후 역사는 더 드라마틱한 사건들을 만들며 10세기나 진행됐다. 왕의 치적을 들춰내며 그의 사상이나 철학을 들먹이기에 1천 년 전은 너무 오래 된 일다. 그러나 나는 궁예 나라의 옛 수도 철원을 갈 때마다 역사가 그를 너무 깔아 뭉갰다고 생각했다.

우선 철원평야 사람들을 '왕을 돌로 쳐 죽인 백성의 후손들'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려사는 그때 백성에게 피살되던 궁예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918년 6월) 이리하여 (궁예가) 변복을 하고 도망쳐 나가니 궁녀들이 궁 안을 깨끗이 하고 태조(왕건)를 맞아들였다. 궁예는 산골로 도망하였으나 이틀밤이 지난 후 배가 몹시 고파서 보리이삭을 잘라 훔쳐 먹다 바로 부양(평강) 백성들에게 살해됐다. 궁예는 평강 땅 삼방(三防)에서 너무 배가고파 보리이삭을 훑어 먹다 밭일을 하던 농사꾼들에게 들켰다. 농사꾼들은 그를 돌로 쳐 죽였다.」

역사는 이 사실을 기록하면서 '폭정과 괴벽의 엉터리 애꾸눈 왕을 장수나 군졸도 아닌 무지렁이들이 통쾌하게 교살했다'고 행간 곳곳에서 속삭이고 있다. 그리고 궁예가 누구냐고 묻는 이들에게 '왕은 애꾸눈의 장애인이었고, 자신을 메시아라고 여긴 미륵신앙의 광신도였으며 부인과 자식을 쳐죽인 정신분열증 환자였다. 결국 피신길에 보리이삭을 훑어 먹다가 농민에게 붙들려 돌에 맞아 죽은 인격 파탄자였다'고 세뇌시키고 있는 것이다. 고려 개국공신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그렇게 궁예를 깍아내려야만 했을 것이다. 왕건의 군사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이미 궁예는 죽었지만, 몇 번이고 다시 죽여 다시 살아나지 못하게 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미륵의 세상을 갈망하던 하층농민들이 미륵불을 돌로 쳐 죽인 무지함, 백성이 왕을 쳐 죽이 대역죄, 즉 자식이 어버이를 쳐 죽인 패륜을 고스란히 철원 사람들의 옛 조상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있었다. 그것은 강자의 횡포였다. 그리고 중대한 실수였다. 철원 사람들은 궁예가 그의 최후를 당당하게 맞았다는 전설을 따로 간직하고 있었다.

궁예전설은 노인들을 통해 구전되기도 하고, 철원군지에 기술돼 있기도 했다. 어떤 노인들은 전설 속의 '궁예'를 '궁예대왕'이라고 지칭했다. '궁예대왕', 그 지칭은 철원사람들의 불명예, '미륵을 죽인 무지함과 왕을 죽인 대역죄, 자식이 어버이를 죽인 패륜'에 대한 항변같기도 했으며 책에서 배운 정사(正史)를 엉터리라고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전설 속의 궁예의 최후는 절대 비굴하지 않았다. 왕건의 군사 역모가 있던 날, 왕은 자신의 나라 도읍지를 마지막으로 순방한 것 같다. 그날 밤 왕은 남문을 통해 도성을 빠져 나왔다. 숨을 가다듬고 재기를 위해 찾아갔던 첫 피신처는 도성 서남쪽의 중어성. 평원 한가운데 세운 도성의 전략적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외곽에 세웠던 12개 산성 가운데 한 요새다. 현재 위치는 철원읍 대마리. 왕은 이 요새를 버리고, 더 서쪽으로 나가 현 연천군 신서면 승양리의 역시 외곽성인 승양산선으로 들어갔다. 또 다른 외곽성 보개산성(현 포천군 관인면)은 승양산성의 동쪽에 있었다. 그러나 왕은 어느새 더 동쪽의 명성산성(현 철원군 갈말읍)으로 들어가 최후 보루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산성에서 군대를 해산한다. 그리고 통곡하는 군사들을 뒤로하고 홀로 북쪽으로 떠난다. '명성'(鳴聲)이란 말뜻을 굳이 풀이한다면 '큰 울음소리'. 훗날 사람들은 그때 군사들이 슬피 울었다고 해 그 산성을 '울음산성', 산성이 있는 그 산을 '울음산'이라고 불렀다. 명성산성에서 해산했지만 충성스러운 많은 군인들이 왕이 걸어간 길을 뒤따라 군탄리까지 왔다. 왕은 "나를 따르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한탄강을 건너가 버렸다. 훗날 사람들은 그 곳이 바로 그때 '군사들이 슬피 울며 탄식한 곳'이며 '군탄'은 거기서 유래했다고 해석했다. 갑천(甲川)은 평강 하갑리 동북쪽의 작은 내. 왕은 자신의 정예병들을 양성하던 검불랑 군사훈련장을 지나 삼방협의 깊은 골짜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결했다.

육당 최남선도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철원 지방에서 채록한 궁예 최후의 전설을 '풍악기유'에 이렇게 실었다.
「남루한 차림의 고려왕(궁예)이 발 붙일 땅을 찾기 못하고 심벽한 석을 찾아 삼방 골짜기로 들어왔다. 삼봉 최고지에 올라 은피하여 재도할 땅을 둘러 볼 즈음 문득 한 스님을 만나 혹시 용잠호장할 땅이 없겠느냐고 물으니, 스님이 말하기를 이 속에를 들어와서 살길을 찾는 것은 어리석다고 했다. 이에 크게 절망하고 그 곳에서 깊은 연못을 향해 그대로 몸을 던지니 물에는 빠지지 아니하고 우뚝 선 채로 운명했다.」

http://www.dmzline.com/tag/궁예?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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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span></strong></font></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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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운에서 금강산 들어가는 철도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 삼방역이라는 역이 하나 있다고 한다. 근데 그 역건너에 큰 돌담굴이 하나 있다고 한다. 그 돌담굴이 궁예의 무덤이라 한다. 그것이 왜 궁예의 무덤이라 하면 왕건의 군사들이 치열하게 쫓아 오면서 쏘니까는 이 궁예가 웬만한 화살은 맞으면은 그냥 쑥 뽑아서 던지는 그런 장사였다. 그런데 하도 많이 쏘아서 장사도 지치니까는 상나무 아름드리 겿에 가서 기대고 섰다. 하도 치열하게 화살을 던지니까는 궁예가 고슴도치 모양으로 몸에 꽃혔는데 안쓰러진다는 것이다. 이상해서 가서 보았더니 죽어있었다. 발길로 차도 안 넘어가고 목에다 뭘 두르고 잡아 당겨도 안넘어졌다.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장사는 역시 죽어서도 장사구나 별짓을 다해도 안넘어지니까는 그냥 선 채로 돌로 쌓아 묻어서 궁예의 무덤을 돌로 묻어서 궁예의 무덤이 그렇게 되었다. 결국 눕지도 못하고 죽은것이었다.
- 화현면 설화 광대소라는 이름이 비석에 새겨진 것을 보고 묻자 해준 이야기


펑강군 복계역 북쪽으로 하갑리, 상갑리라는 마을이 있다. 궁예가 패해 북쪽으로 도주하다 하갑리에선 아래 갑옷을 벗고 도주하다, 상갑리에선 윗 갑옷을 벗고 도주했다 해서, 하갑리, 상갑리라 했다 한다.


궁예(弓裔·?-918년)는 896~898년간에 철원(구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후 궁예는 901년 당나라에게 괴멸당한 고구려를 다시 일으켜 보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 일환으로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연호를 무태(武泰)로 바꾼다. 그 후 1년 뒤(905년) 구철원 북쪽 30리 거리인 풍천원 들판(지금의 철원과 평강 사이 비무장지대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리고 911년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泰封)이라 칭한다.

그러나 궁예는 풍천원 들판에다 거대한 도성을 축조하면서 강제로 노역에 끌려온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지지세력들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청주 지역을 너무 편애하게 된다. 그러자 경기 북부 호족들이 반기를 들고 궁예의 부하였던 왕건을 앞세워(877-943) 918년 궁예를 몰아낸다.   

훗날 궁예가 왕건의 군사에게 쫓겨 진을 친 곳이 명성산이다. 이 때 궁예가 이 산에서 철원쪽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겨 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하여 ‘울음산’으로 불리었고, 궁예가 강변에서 한탄했다 하여 ‘한탄강’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궁예와 명성산이 관련된 전설은 매우 많다. 산정호수 옆 두 개의 봉우리는 궁예가 올라가 망을 보았다는 곳이고, 등룡폭포 위 샘터 이름이 궁예약수, 자인사에서 궁예가 기도를 올렸다는 전설, 정상에서 강포리쪽으로 이어지는 궁예능선은 왕건의 공격을 피해 항거하며 쌓았다는 성터와 궁예왕이 숨었었다는 궁예왕굴 등 이 남아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고려사에는 ‘궁예가 평강과 안변 사이 험준한 지형인 삼방협으로 도망을  갔을 때 배가 고파 보리이삭을 끓여 먹다가 평강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이 지방 주민들로부터 전해지는 전설은 ‘궁예가 삼방협에서 우연히 만난 어느 중이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는 이런 협곡에 들어와 살아남겠다는 것이 어리석다”고 말하자 궁예는 “드디어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 높은 곳에서 의연하게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조선 말기에 제작된 지도인 청구도에는 삼방협 위치에 궁왕묘(弓王墓)가 그려져 있다. 또 1924년 최남선이 쓴 풍악기유(楓嶽記遊)에는 궁예왕 무덤흔적을 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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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span></strong></font></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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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가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던 철원은 화산대지입니다. 따라서 철원에서 가장 흔한 돌인 현무암의 특징은 용암덩어리가 공기중에서 식으면서 빠져나간 가스의 흔적으로 인한 구멍이 숭숭뚫린 현무암 화산석과 관련한 궁예의 일화는 어느날 왕건과 싸우고 궁으로 돌아오던 궁예가 개울을 건너던중 우연히 이 현무암을 발견하곤 돌에 뚫린 수많은 구멍이 벌래가 돌을 파먹었다고 생각하곤 스스로의 자격지심 으로 돌을 벌래가 파먹다니 이런 해괴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니 아~ 나의 운명이 다 하였구나라고 자조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옵니다.




 

by 초령목 2010. 10. 23. 1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