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인가? 비운의 제왕인가? - 궁예(弓裔)] - 2

▶호족들과 갈등 속에서 몰락

911년 궁예는 다시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으로 바꾼다. 하지만 궁예는 호족들의 반발을 극복하지 못했다.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의 저자 박영규씨는 '호족들은 조직적으로 궁예에게 대응했고 이에 궁예는 '전횡'과 '독단'으로 맞섰다.고 해설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왕건'과 불화가 생겼으며 경국 '918년 6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고려사>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궁예가 왕건을 태조로 옹위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서 '왕공이 벌써 천하를 얻었으니 내일은 끝났다.'며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 변복을 하고 산골로 도망쳐 나왔다. 이틀 밤이 지난 후 배가 몹시 고파 보리이삭을 잘라 훔쳐먹다 부양(강원도 평강)의 백성들에게 살해됐다."

또 <삼국사기>에는 '도주하다가 부하에게 피살'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강원도 철원 지방에 내려오는 '전설'은 이와 아주 반대되는 궁예의 모습을 담고 있어 주목을 끈다. 육당 최남선이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철원 지방에서 채록한 전설을 기록한 '풍악기유'에 따르면 '궁예는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 설움을 견디지 못한 채 천명을 알고 이에 순응해 자결한 의군'으로 전해지고 있다. '슬픈 궁예'라는 책을 펴내 화제를 모은 '이재범 경기대 교수' 또한

"궁예의 포악함 때문에 반란이 일어난 것으로 정사엔 기록되어 있지만 실은 고구려계 호족들의 조직적은 결탁에 의해 왕좌에서 물러나게 된 것으로 반란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궁예의 포악함을 지나치게 부각시켰을 수 있다."라고 분석한다.

▶'전제적 폭군' , '비운의 제왕' 평가 엇갈려

나라를 세우고 미륵이라 스스로 칭하며 전제적 정치를 펼쳤던 궁예, 토착 세력을 규합하며 '새나라'의 건설에 이상을 꿈꿨던 궁예. 이 두개의 얼굴을 가진 궁예에 관한 사연과 지명이 아직까지도 '철원'의 산과 들에 흩어져 내려오고 있다.

궁예와 부하들이 왕건에게 쫒겨난 것이 서러워 통곡했다는 '명선산(일명 울음산)", 왕건에게 쫓기어 궁예가 한숨 돌리고 잠깐 쉬어 간 골짜기라는 '한장모탱이', 궁예의 통한을 간직한 최후의 격전지 '보개산성!'

<정말 궁예는 '외눈'으로 반쪽 세상을 살다간 반쪽 영웅이었을까? 아니면

우리가 그를 '외눈'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by 초령목 2012. 3. 28. 2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