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화(康靖和) 고려

후삼국, 고려초의 술사로, 도선(道詵)의 제자다. 도선으로 부터 태일옥장보법(太一玉帳步法)이란 비술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인종조 서경천도운동을 주도했던 묘청이 강정화의 제자라고 자칭했다.

 


겸신(謙信) 승려

광종조 화엄종의 승려로, 광종초 국사로 추앙받았다. 953년 광종4년 3월에 후주사신이 와서 책봉의례를 거행하려 했지만 비가 많이 내려 기일이 연기되었다. 이때 국사 겸신이 균여를 기청제(祈晴祭)를 주관할 승려로 31세의 균여대사를 천거하였다.

 

 

오현(悟賢) 승려

광종조 승려로 직계는 국사,왕사 다음인 승통(僧統)직인 철달徹達)에 이르렀다. 958년 광종9년 불일사 안에 벼락이 떨어져 균여가 재변을 막기위해 강연을 벌렸는데, 3주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강연을 하자 강연을 듣고 있던 오현이 생각하길 "강연의 주제자가 비록 명민하나 그래도 후배다. 내가 비록 재주가 없으나 그래도 선배다. 그런데 어찌하여 묻고 대답하는 데 겸양과 사양의 예를 생각지도 않는단 말인가?"하여 균여를 비방하였다. 그러자 한 거승이 중간에 나서 말하길 "시기하고 분해할 것 없습니다. 오늘의 강사는 그대 선조 의상대사의 제7 화신입니다. 큰 가르침을 널리 펴시고자 다시 인간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오현 승려가 이를 듣고 모인 사람들을 향하여 "내가 잘못 알았다"며 참회를 하였다.

 

 

김계명(金啓明) 신라왕족

신라 43대왕 희강왕(僖康王)의 왕자로 838년 희강왕이 즉위 3년만에 상대등 김명(金明), 시중 이홍(利弘)등이 반란을 맞아 자진하자 왕위를 계승치 못했다. 이후 848년 문성왕(文聖王) 2년에 파진찬(波珍飡) 벼슬에 있다가 시중에 올랐다. 이후 857년 9월에 문성왕을 등극시키는데 큰공을 세웠던 시중 겸 병부령 김양(金陽)이 죽자 문성왕의 숙부 김의정(金誼靖)과 시중 김계명이 문성왕을 협박해 결국 김의정이 왕위에 올라 헌안왕이 되었다. 문성왕은 유조를 내린후 7일만에 죽었다. 이후 861년 헌안왕(憲安王) 5년에 아찬(阿飡) 벼슬에 있다가 아들 김응렴(金膺廉)이 약관의 나이로 헌안왕의 유명을 받아 왕위에 올라 경문왕(景文王)이 되었다.

이후 866년 1월 의공대왕(義恭大王)으로 추봉되었으며, 부인 광화부인(光和夫人/신무왕(神武王)의 딸)은 광의왕태후(光懿王太后)로 추봉되었다.


 

 

계아태후(桂娥太后) 김씨 신라왕족

신라 제49대 임금 헌강왕(憲康王)의 공주로 당시 화랑이였던 김효종(金孝宗)에게 시집갔다. 남편 김효종은 902년 효공왕 6년 대아찬(大阿飡) 벼슬에서 집사성 시중(侍中)이 되었으며, 아들 김부(金傅)는 927년 11월 백제왕 견훤에 의해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에 옹립되었다. 이후 김효종은 신흥대왕(神興大王)으로, 김씨는 계아태후(桂娥太后)로 추봉되었다.

 


김계흥(金季興) 신라

신라 진골귀족 출신으로 경문왕 6년 866년 10월에 이찬(伊飡) 벼슬에 있던 형 김윤흥(金允興)과 둘째형 김숙흥(金叔興)과 더불어 모반을 획책했으나 발각되자 삼형제가 대산군(岱山郡/경북 성주)로 도주하였으나 추격병에 의해 잡혀 삼족이 처형당했다.

 

 

김윤흥(金允興) 신라

신라 진골귀족 출신으로 경문왕조 벼슬이 이찬(伊飡)에 이르렀다. 김윤흥은 문성왕조에 왕명에 의해 남원경(南原京)의 사신(仕臣)이 되어 총명한 소년 안장(安長)과 청장(淸長) 2인을 뽑아서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 있는 거문고의 대가 귀금(貴金)에게 거문고를 배우게 하였다. 허나 귀금이 거문고 기술을 다 가르쳐 주지 않자, 김윤흥이 직접 찾아가 예의와 정성을 다하여 비법을 전수해 줄것을 간청했다. 그후 귀금은 소년 안장(安長)에게 거문고의 비법을 전수하였으며, 안장은 다시 극종(克宗)에게 전수하여 곧 세상에 널리 퍼졌다. 이후 문성왕이 숙부 김의정(金誼靖)과 시중 김계명(金啓明)에게 협박당하여 김의정에게 양위하고 김의정이 헌안왕이 되고, 다시 김계명의 아들 김응렴(金膺廉)이 경문왕이 되자 불만을 품고 경문왕 6년 866년 10월에 두동생 김숙흥(金叔興), 김계흥(金季興)과 더불어 모반을 획책하다 사전에 발각되자 대산군(岱山郡/경북 성주)로 도주하였으나 추격병에 의해 잡혀 삼족이 처형당했다. 당시 신라는 43대 왕 희강왕(僖康王) 이후 헌정계(憲貞系)와 균정계(均貞系)의 대립이 심했는데, 경문왕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헌정계가 집권하자 균정계에 속한 김윤흥등이 반란을 모의한것이다.

 

 

김숙흥(金叔興) 신라
신라 진골귀족 출신으로 균정계인 문성왕(文聖王)이 즉위 반년만에 문성왕의 숙부 김의정(金誼靖)과 시중 김계명(金啓明)에 의해 강제로 퇴위되고 7일만에 죽은후 김의정이 헌안왕에, 뒤에 김계명의 아들 김응렴(金膺廉)이 경문왕에 오르자 김숙흥이 속한 헌정계에서는 불만이 극도로 높아졌다. 결국 경문왕 6년 866년 10월에 이찬 벼슬에 있던 형 김윤흥(金允興)과 동생 김계흥(金季興)과 더불어 모반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자 삼형제가 대산군(岱山郡/경북 성주)로 도주하였으나 추격병에 의해 잡혀 삼족이 처형당했다.

 


광화부인(光和夫人)/광의왕태후(光懿王太后) 박씨 신라왕족

신라 45대 임금 신무왕(神武王)의 딸이며, 46대 임금 문성왕(文聖王)과는 오누이 사이이다. 남편은 43대왕 희강왕(僖康王)의 왕자인 김계명(金啓明)이다. 오빠 문성왕은 숙부인 김의정(金誼靖/47대 임금 헌안왕)과 시중이였던 남편에 의해 퇴위당했다. 광화부인의 아들 김응렴(金膺廉)은 18세에 화랑의 우두머리 국선(國仙)이 되었다. 헌안왕은 김응렴을 총애해 두딸중 한명을 주겠노라고 말했으나 김응렴은 쉽게 결정치 못하고 부모에게 상의했다. 김계명과 광화부인 박씨는 둘째 공주가 인물이 뛰어나다며 둘째 공주를 선택하라 하였으나, 화랑를 가르치던 범교사(範敎師)는 첫째 공주를 얻으라 말하였다. 이에 첫째 공주와 혼인하였으며 3개월후 헌안왕의 유명에 의해 48대 경문왕에 올랐다.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6년후 866년 1월 남편 김계명은 의공대왕(義恭大王)으로, 광화부인(光和夫人)은 광의왕태후(光懿王太后)로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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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원랑(邀元郎) 신라

신라 경문왕조 화랑으로 동료화랑인 예흔랑(譽昕郎), 숙종랑(叔宗郎), 계원(桂元)과 더불어 전국유람을 하였는데, 당시 화랑들은 수백, 수천여명이 무리를 지어 경주를 떠나 명주(강릉), 양양, 고성을 거쳐 금강산 방면 통천의 금란굴을 유람하곤 하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화랑의 우두머리직인 국선(國仙) 요원랑은 동료 화랑들과 함께 화랑출신의 경문왕(왕위에 오르기전 김응렴(金膺廉)은 18세에 이미 국선이였다)을 찬양하며 치국(治國)의 뜻에서 가사 세 수를 지었는데 현금포곡(玄琴抱曲), 대도곡(大道曲), 문군곡(問群曲)이다. 요원랑등은 이 세수를 사지(舍知/17관등중 13위) 심필(心弼)을 시켜 당시 향가(鄕歌) 작가로 이름난 대구화상(大矩和尙)에게 보냈는데, 대구화상이 이를 다시 윤색하고 악보를 더해 경문왕에게 올리자 왕이 크게 기뻐하고 포상을 하였다고 한다.

 

 

숙종랑(叔宗郎) 신라

신라 경문왕조 화랑으로 동료화랑인 요원랑(邀元郎), 예흔랑(譽昕郎), 계원(桂元)과 더불어 전국유람을 하였는데, 당시 화랑들은 수백, 수천여명이 무리를 지어 경주를 떠나 명주(강릉), 양양, 고성을 거쳐 금강산 방면 통천의 금란굴을 유람하곤 하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화랑의 우두머리직인 국선(國仙) 숙종랑은 동료 화랑들과 함께 화랑출신의 경문왕(왕위에 오르기전 김응렴(金膺廉)은 18세에 이미 국선이였다)을 찬양하며 치국(治國)의 뜻에서 가사 세 수를 지었는데 현금포곡(玄琴抱曲), 대도곡(大道曲), 문군곡(問群曲)이다. 요원랑등은 이 세수를 사지(舍知/17관등중 13위) 심필(心弼)을 시켜 당시 향가(鄕歌) 작가로 이름난 대구화상(大矩和尙)에게 보냈는데, 대구화상이 이를 다시 윤색하고 악보를 더해 경문왕에게 올리자 왕이 크게 기뻐하고 포상을 하였다고 한다.

 

 

예흔랑(譽昕郎) 신라

신라 경문왕조 화랑으로 동료화랑인 요원랑(邀元郎), 숙종랑(叔宗郎), 계원(桂元)과 더불어 전국유람을 하였는데, 당시 화랑들은 수백, 수천여명이 무리를 지어 경주를 떠나 명주(강릉), 양양, 고성을 거쳐 금강산 방면 통천의 금란굴을 유람하곤 하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화랑의 우두머리직인 국선(國仙) 예흔랑은 동료 화랑들과 함께 화랑출신의 경문왕(왕위에 오르기전 김응렴(金膺廉)은 18세에 이미 국선이였다)을 찬양하며 치국(治國)의 뜻에서 가사 세 수를 지었는데 현금포곡(玄琴抱曲), 대도곡(大道曲), 문군곡(問群曲)이다. 요원랑등은 이 세수를 사지(舍知/17관등중 13위) 심필(心弼)을 시켜 당시 향가(鄕歌) 작가로 이름난 대구화상(大矩和尙)에게 보냈는데, 대구화상이 이를 다시 윤색하고 악보를 더해 경문왕에게 올리자 왕이 크게 기뻐하고 포상을 하였다고 한다.

 

 

계원(桂元) 신라

신라 경문왕조 화랑으로 동료화랑인 요원랑(邀元郎), 숙종랑(叔宗郎), 예흔랑(譽昕郎)과 더불어 전국유람을 하였는데, 당시 화랑들은 수백, 수천여명이 무리를 지어 경주를 떠나 명주(강릉), 양양, 고성을 거쳐 금강산 방면 통천의 금란굴을 유람하곤 하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화랑의 우두머리직인 국선(國仙) 계원은 동료 화랑들과 함께 화랑출신의 경문왕(왕위에 오르기전 김응렴(金膺廉)은 18세에 이미 국선이였다)을 찬양하며 치국(治國)의 뜻에서 가사 세 수를 지었는데 현금포곡(玄琴抱曲), 대도곡(大道曲), 문군곡(問群曲)이다. 요원랑등은 이 세수를 사지(舍知/17관등중 13위) 심필(心弼)을 시켜 당시 향가(鄕歌) 작가로 이름난 대구화상(大矩和尙)에게 보냈는데, 대구화상이 이를 다시 윤색하고 악보를 더해 경문왕에게 올리자 왕이 크게 기뻐하고 포상을 하였다고 한다.

 

 

심필(心弼) 통천

신라 경문왕조 하급 관리로 직급은 17관등중 13관등인 사지(舍知)에 이르렀다. 당시 화랑들은 무리를 이루워 전국을 돌며 심신을 수련하곤 하였는데 화랑의 우두머리인 국선 요원랑(邀元郎), 숙종랑(叔宗郎), 예흔랑(譽昕郎), 계원(桂元)등이 금강산 방면의 통천 금란굴에 이르러 노래 세수를 지었는데, 이들이 세수를 지은 서책을 심필에게 주어 당시 향가작가로 이름난 대구화상(大矩和尙)에게 보이게 하였다. 대구화상은 이를 다시 윤색하고 악보를 더해 경문왕에게 올리자 왕이 크게 기뻐하고 화랑들에게 포상을 하였다고 한다.


 

인흥(藺興)/김인흥(金藺興) 신라

신라 경문왕조 대신으로 874년(경문왕 14년) 1월 12년동안 상대등직에 있던 김정(金正)이 죽자, 시중 위진(魏珍)을 상대등으로 삼고, 이찬 벼슬에 있던 인흥을 시중으로 임명했다. 허나 이듬해 985년 경문왕이 죽고, 헌강왕이 즉위하자 이찬 위홍(魏弘)이 상대등이 되고, 대아찬(大阿飡) 예겸(乂兼)/박예겸(朴乂兼)이 시중에 임명되자 인흥은 관직에서 물러났다.

 

 

위진(魏珍)/김위진(金魏珍) 신라

신라 경문왕조 대신으로, 862년(경문왕 2년) 아찬 벼슬에서 시중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2년간 시중직을 수행하였으며 874년(경문왕 14년) 1월 같이 조정을 이끌던 상대등 김정(金正)이 죽자 위진이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한편 이찬 인흥(藺興)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875년 헌강왕이 즉위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금모(今毛) 경주

신라 경명왕조 지방 촌주로 벼슬은 17관등중 13관등인 사지(舍知)였다. 사지는 당시 지방 촌주에게 내리던 벼슬이기도 하다. 927년 황룡사탑(皇龍寺塔)의 그림자가 금모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물렀다. 이는 당시에 변괴로 여겨졌으며 망국의 전초로 여기기도 하였다.

 

 
김염(金廉) 고려

고려 혜종원년(944년) 예빈경(禮賓卿)으로 광평시랑(廣評侍郞) 한현규(韓玄珪)와 함께 후진(後晋)에 사신으로 가 고려 왕위의 계승을 알리고, 후진이 거란(契丹)을 격파한것을 하례하였다.

 

 

한현규(韓玄珪) 고려

고려 혜종원년(944년) 광평시랑(廣評侍郞)으로 예빈경(禮賓卿) 김염(金廉)과 함께 후진(後晋)에 사신으로 가 고려 왕위의 계승을 알리고, 후진이 거란(契丹)을 격파한것을 하례하였다.

 


김예(金銳) 이찬

신라 왕족으로 855년(문성왕 17년) 4월에 건립된 경주 창림사((昌林寺) 무구정탑(無垢淨塔) 원기(願記)에 의하면 김예는 웅주(熊州/공주) 기량현(祁梁縣)의 현령으로서 관직은 17관등중 13위인 사지(舍知)였다. 무구정탑은 문성왕의 명을 받은 추성군(秋城郡) 태수(太守) 김립지(金立之)가 글을 지었으며, 탑을 제작한이는 문성왕의 종제(從弟) 김예다. 한편 김예는 868년(경문왕 8년) 1월 벼슬이 이찬(伊飡/17관등중 2위)에 이르렀으나 균정계였던 김예등은 헌정계 왕인 경문왕에 불만을 품고 이찬 김현(金鉉)과 같이 모반을 획책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

 

 

계현(啓玄) 승려

신라 문성왕조 승려로 855년 문성왕 16년 4월 문성왕의 공덕을 비는 경주 창림사(昌林寺) 무구정탑(無垢淨塔)을 건립했을때 감독직인 도감(都監)을 맡았다. 승통은 대덕(大德)에 이르렀고 판정법사(判政法事)로 불리웠다.

 

 

청현(淸玄) 승려

신라 문성왕조 봉덕사(奉德寺) 상좌(上座) 승려로 855년 문성왕 16년 4월 문성왕의 공덕을 비는 경주 창림사(昌林寺) 무구정탑(無垢淨塔)을 건립했을때 불사(佛寺)의 조영을 주관하는 관호(官號)인 검교(檢校)을 맡았다.

 

 

교장(敎章) 승려

신라 문성왕조 강주(康州) 함안군(咸安郡)의 군통(郡統)을 맡은 승려였다. 군통은 승관(僧官)으로 전국에 주통9명, 군통18명이 있었으며 주통1명을 2명의 군통이 보좌했다. 855년 문성왕 16년 4월 문성왕의 공덕을 비는 경주 창림사(昌林寺) 무구정탑(無垢淨塔)을 건립했을때 혜지(專知)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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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종(金繼宗) 신라

신라 문성왕의 종숙(從叔)으로 문성왕조 무주(武州) 장사(長史)직에 있던 855년(문성왕 16년) 4월 국왕 지위에 대한 합리화와 죽은 사람들에 대한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경주 창림사(昌林寺)에 무구정탑(無垢淨塔)을 건립했을때 감수조사(監修造使)를 맡았다. 당시 감수조사에는 김계종과 형제로 추측되는 강주(康州) 사수현령(泗水縣令)을 제수받은 김훈영(金勳榮)도 참여했다.

 

 

김훈영(金勳榮) 신라

신라 문성왕의 종숙(從叔)으로 문성왕조 강주(康州) 사수현령(泗水縣令)직에 있던 855년(문성왕 16년) 4월 국왕 지위에 대한 합리화와 죽은 사람들에 대한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경주 창림사(昌林寺)에 무구정탑(無垢淨塔)을 건립했을때 감수조사(監修造使)를 맡았다. 당시 감수조사에는 김훈영과 형제로 추측되는 무주(武州) 장사(長史) 김계종(金繼宗)도 참여했다.

 

 

 

김원필(金元弼) 신라

신라 문성왕조 관리로, 집사부(執事部) 시랑(侍郞)을 거쳐 아간(阿干/17관등중 6위) 벼슬까지 오른 인물로, 당시 6두품의 최고 품계였던 아간까지 오른 것으로 보아 육두품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855년(문성왕 16년) 4월 국왕 지위에 대한 합리화와 죽은 사람들에 대한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경주 창림사(昌林寺)에 무구정탑(無垢淨塔)을 건립했을때 검교사(檢校使)를 맡았다. 당시 검교부사(檢校副使)에는 명주(溟州) 별가(別駕)인 김의령(金嶷寧)이 임명되었다.

 

 

김의령(金嶷寧) 명주

신라 문성왕조 명주(溟州) 별가(別駕)를 지냈으며, 855년(문성왕 16년) 4월 국왕 지위에 대한 합리화와 죽은 사람들에 대한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경주 창림사(昌林寺)에 무구정탑(無垢淨塔)을 건립했을때 검교사(檢校使) 김원필(金元弼)을 보좌하는 검교부사(檢校副使)를 맡았다.

 

 

김량박(金梁博) 서림(서천)

신라 문성왕조 세택(洗宅/국왕의 근시기관) 대나마(大奈末/17관등중 10위) 벼슬에 있었으며, 855년(문성왕 16년) 4월 서림군(西林郡/충남 서천) 태수(太守)로 있었는데, 국왕 지위에 대한 합리화와 죽은 사람들에 대한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경주 창림사(昌林寺)에 무구정탑(無垢淨塔)을 건립했을때 혜지(專知) 수조관(修造官)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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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언(金奇言) 신라

신라 문성왕조 창부사(倉府史) 벼슬을 지냈으며, 855년(문성왕 16년) 4월 국왕 지위에 대한 합리화와 죽은 사람들에 대한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경주 창림사(昌林寺)에 무구정탑(無垢淨塔)을 건립했을때 같은 전임 창부사였던 김박기(金朴基)와 함께 구당(勾當) 수조관(修造官)을 맡았다.

 

 

 

김박기(金朴基) 신라

신라 문성왕조 창부사(倉府史) 벼슬을 지냈으며, 855년(문성왕 16년) 4월 국왕 지위에 대한 합리화와 죽은 사람들에 대한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경주 창림사(昌林寺)에 무구정탑(無垢淨塔)을 건립했을때 같은 전임 창부사였던 김기언(金奇言)과 함께 구당(勾當) 수조관(修造官)을 맡았다.

 

 

김인훈(金忍訓) 양산

후삼국 양주(良州/경남 양산) 지역의 호족으로 903년 백제가 침공하자, 급히 후고구려에 원군을 청했다. 고구려왕 궁예는 왕건에게 군을 주어 이를 구원하게 하였다. 후에 대대로 양산호족이던 후손들이 김인훈을 기리기 위해 성황사(城隍祠)를 건립하고 주위에 성황산성을 쌓았다. 이후 김인훈은 양산지역의 성황신으로 모셔져 오늘날까지도 매년 제향이 이루워지고 있다.

 

 

김정(金正) 이찬(伊飡)

경문왕조 대신으로 862년(경문왕 2년) 1월 조정개각에서 이찬(伊飡/17관등중 2위)에서 승차하여 최고 관직인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되었다. 당시에 아찬(阿飡/17관등중 6위) 위진(魏珍)도 시중(侍中)에 임명되었는데 김정과 위진의 관직이 경문왕 14년까지 이어진것으로 미루워 보아 경문왕이 즉위전 최측근이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김정은 874년 1월 졸하였다. 후임 상대등은 시중 위진이 이어 받았다.

 

 


김칠(金七) 수주(수원)

수성(水城/현 경기 수원,화성) 호족으로 고려초 태조 왕건이 남정할때 인근호족 최승규(崔承珪), 최서천(崔徐遷)등 200여명과 함께 태조에게 귀부하였다. 태조17년(934년) 수성은 수주(水州)로 승격되었다.

 


김현(金鉉) 신라
신라 경문왕조에 벼슬이 이찬(伊飡/17관등중 2위)에 까지 이르렀으나 균정계였던 김현은 형제로 추측되는 이찬 김예(金銳)와 함께 헌정계인 경문왕에 불만을 품고 868년 1월 모반을 획책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

 


대구화상(大矩和尙) 승려

신라말의 승려로 향가의 대가로 이름을 떨쳤다. 경문왕조 화랑의 우두머리인 국선(國仙) 요원랑(遙元郞), 예흔랑(譽昕郞), 계원(桂元), 숙종랑(叔宗郞)이 금란굴(강원 통천)을 유람하면서 경문왕을 찬양하며 가사 세수를 지었는데 이를 사지(舍知/17관등중 13위) 심필(心弼)을 시켜 대구화상에게 향가로 만들어 주길 청하였다. 대구화상은 가사를 윤색하고 악보를 더해 경문왕에게 올렸고, 왕이 크게 기뻐하고 포상을 내렸다. 이 향가가 현금포곡(玄琴抱曲), 대도곡(大道曲), 문군곡(問群曲)이다. 진성여왕 2년 888년에는 여왕의 명으로 각간(角干/신라 최고 관직)  김위홍(金魏弘)과 함께 민간에 떠돌던 향가를 수집하여 삼대목(三代目)을 편찬했다.

 


덕교(德交) 목포

목포(나주) 지역 호족인 사간(沙干/17관등중 8위) 연위(連位)의 딸이며 목포호족 오방(吳昉)의 아들 오희(吳禧)와 혼인하였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세아들은 오상(吳相), 오환(吳桓), 오검(吳檢)이고 1녀는 곧 고려 태조의 제2 왕후 장화왕후다. 905년 마진국 해군장 왕건의 나주공략전 당시 나주 오씨가문은 왕건에게 협력하여 이후 백제의 견훤에게 등을 돌려 친왕건파가 된다. 왕건과 혼인한 장화왕후는 태자 왕무(王武)를 낳았으며 왕무가 곧 2대왕 혜종이다. 왕무가 정윤에 책봉되자 남편 오희는 공으로 다련군(多憐君)에 봉작되었으며, 혜종 즉위후 세아들 장남 오상(吳相)은 평장사 및 시중, 차남 오환(吳桓)는 문량공, 삼남 오검(吳檢)은 형부시랑을 역임했다.

 


몽웅역리(夢熊驛吏) 한씨(韓氏)

후삼국 시대 홍주(洪州) 정해현(貞海縣/충남 서산 해미면)의 지역 호족으로 몽웅역리(夢熊驛吏)를 지냈다.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고려 태조조에 한씨가 큰공을 세워 대광(大匡)의 호(號)를 내리고 고구현(高丘縣)의 땅을 베어 현(縣)을 두어 그 관향(貫鄕)으로 삼았다고 한다. 고려초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오른 한난(韓蘭)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예겸(乂謙/銳謙)/박예겸(朴銳謙/朴乂謙)/김예겸(金乂謙) 신라왕족

신라말의 대신으로 875년 헌강왕 1년 대아찬(大阿飡)으로 시중에 임명되어 880년 2월까지 시중직을 역임했다. 880년 2월 태백성(太白星)이 달을 침범하여 민심이 이반되자, 시중직에서 사퇴하였다. 후임 시중에는 이찬(伊飡) 민공(敏恭)이 임명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예겸이 아들 박경휘(朴景暉)가 왕위에 올라 신덕왕이 되자 912년 5월(신덕왕 1년) 선성대왕(宣聖大王)으로 추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허나 삼국유사에는 신덕왕의 생부는 이간(伊干/17관등중 2위) 박문원(朴文元)이고, 각간(角干/최고관직) 예겸은 의부(義父)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워 예겸은 김씨 성을 가진 진골귀족으로, 각간직에 있으면서 박씨 성을 가진 신덕왕을 옹립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예겸을 의부로 삼았을 가능성도 있겠다.

 

 

 

문원(文元)/박문원(朴文元) 신라왕족

신라 말의 대신으로 각간(角干/최고관직)을 지낸 박원린(朴元厸)의 아들이다. 박문원은 효공왕조 이간(伊干/17관등중 2위) 벼슬을 지냈다. 박문원은 아달라 이사금의 후손으로 신라말 왕위 계승권을 독점해왔던 김씨 진골 귀족들의 내분이 생기자 박문원의 아들 박경휘(朴景暉)가 신덕왕에 오르게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신덕왕 박경휘(朴景暉)의 부친을 예겸(乂謙)이라고 기록했으나, 삼국유사에는 예겸은 의부이고 박문원이 친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 신덕왕이 옹립 과정에 각간(角干/최고관직) 예겸의 공을 세운듯 싶다. 예겸은 박씨라고 알려져 있기도 하나, 진골 김씨일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박씨왕의 왕위 계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예겸의 양자 형식을 취해 신덕왕이 왕위에 오른듯 싶다. 박문원은 신덕왕이 옹립된후 흥렴대왕(興廉大王)으로 추봉되었다.

 

 


문자황후(文資皇后)/문의왕후(文懿王后)/영화부인(寧花夫人) 김씨 신라왕족

헌안왕의 맏딸로 860년(헌안왕 4년) 9월 임해전(臨海殿)에서 군신을 모아 향연(饗宴)을 베풀었는데, 20세의(삼국사기에는 15세, 삼국유사에는 20세로 기록) 김응렴(金膺廉)도 왕족자격으로 참석하였다. 헌안왕이 김응렴에게 여러가지를 물어보았는데, 김응렴이 재기있게 대답함으로써 헌안왕이 김응렴을 사위로 삼고자 하였다. 헌안왕에겐 딸이 둘있었는데, 김응렴에게 누구를 취하겠느냐고 묻자 김응렴은 쉽게 결정치 못하고 부모에게 자문했다. 부모는 자색이 뛰어난 둘째 공주를 취하라 하였고, 재차 흥륜사(興輪寺)의 승려화랑인 범교사(範敎師)에게 물으니 첫째 공주를 취하라 하였다. 결국 첫째 공주, 즉 영화부인이 선택되어 김응렴과 혼인을 하였다. 당시 영화부인은 20세였다. 5달후 861년(헌안왕 5년) 1월 헌안왕의 유명에 의해 김응렴이 신라 47대 왕에 오르니 곧 경문왕이다. 863년에는 영화부인의 동생 또한 경문왕과 혼인하였다. 866년 1월 왕자(王子) 김정(金晸)을 태자(太子)로 삼을때 같이 추봉되어 문의왕후에 봉해졌다. 삼국유사에는 문자황후(文資皇后)라 기록되어 있으며, 아들 김정은 곧 49대왕 헌강왕이다.

 

 

 

범교사(範敎師)/범교(範敎) 승려
신라말 흥륜사(興輪寺)의 승려화랑의 상수(上首/우두머리)직을 맡았다. 860년 헌안왕이 왕족 김응렴(金膺廉)을 사위로 삼고자 하니, 김응렴이 범교사에게 헌안왕의 두딸중 누구를 취하는게 옳느냐고 물었고, 범교사는 "형을 취하면 세 가지 이익이 있고 아우를 취하면 세 가지 손해가 있으리라"며 첫째 공주를 취하라 간하였다. 이에 김응렴은 첫째 공주, 즉 영화부인(寧花夫人) 김씨를 취하였다. 몇달후 861년 1월 헌안왕의 유명에 의해 김응렴이 신라 47대 경문왕에 즉위하였다. 863년 경문왕은 영화부인의 동생을 차비로 삼으면서 범교사에게 묻기를 "전일에 이른바 세 가지 이익이란 것은 무엇인가?"하자 범교는 "전왕과 왕비가 그 뜻대로 된 것을 기뻐하여 총애가 더욱 깊어진 것이 하나요, 이로 인하여 왕위를 계승한 것이 둘째요, 마침내 전왕의 둘째 딸을 취하게 된 것이 셋째 이익입니다."하자 경문왕이 크게 웃고 범교를 대덕(大德/승통/승려관직)으로 삼고 황금 130냥을 하사하였다.

 


부호부인(鳧好夫人) 신라
신라 51대왕인 진성여왕의 유모(乳母)로 진성여왕이 즉위하자 정치에 깊이 관여하였다. 진성여왕조 국정이 문란해지자 어느 사람이 국정을 비방하는 글을 다라니(陀羅尼)의 은어(隱語)로 작성하여 길에 뿌리고 다녔는데 내용은 각간(角干) 김위홍(金魏弘) 및 부호부인등 총신 4,5명이 국사를 독판쳐 정치가 극도로 문란해지고 결국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은어였다. 진성여왕과 측근들은 이글을 읽고 이글을 쓴자는 대야주(大耶州)에 은거하던 왕거인(王巨人)이라 판단하고 왕거인을 하옥하였다. 왕거인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하늘에 호소하자 벼락이 옥사에 내리쳤다. 이에 진성여왕은 두려움을 느끼고 왕거인을 방면하였다.

 

 

거타지(居陀知) 대야주(합천)

신라말 진성여왕때 무사로 활을 잘쏘았다. 진성여왕의 막내아들 아찬(阿飡) 양패(良貝)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후백제의 군사들이 진도(津島)에서 배길을 막고 오가는 배를 검문한다고 하자 양패는 활쏘는 무사 50명을 뽑아 배를 타고 당나라로 향했다. 이때 거타지도 뽑혀 동행했다. 배가 곡도(鵠島/백령도)에 이르렀을때 풍랑이 크게 일어나 곡도에서 10여일을 묵게 되었다. 양패는 이를 근심하여 사람을 시켜 점을 쳤는데 "섬에 신지(神池)가 있으니 거기에 제사를 지내면 좋겠습니다"했다. 제사를 지낸후 그날 밤에 양패의 꿈에 노인이 나타나 활 잘쏘는 사람 하나만 이 섬안에 남겨두면 순풍(順風)을 얻을것이다고 말하자 양패가 잠을 깼다. 양패는 섬에 남을 사람을 정하기 위해 50명의 이름을 적은 나무를 물에 띄웠는데 거타지(居陀知)의 이름이 물에 잠겨 결국 거타지가 곡도에 남게 되었다. 이후 양패 일행은 배를 띄워 당나라로 향하였고 섬에 남은 거타지는 서해의 용왕의 부탁을 받고 용왕을 괴롭히는 못된 중을 활로 쏘아 죽이고 용왕의 딸과 혼인하게 되었다. 이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양패(良貝) 신라왕족

신라 51대 왕 진성여왕의 막내아들로 벼슬은 아찬(阿飡)에 이르렀다. 왕명에 의해 양패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후백제의 군사들이 진도(津島)에서 배길을 막고 오가는 배를 검문한다고 하자 양패는 활쏘는 무사 50명을 뽑아 배를 타고 당나라로 향했다. 배가 곡도(鵠島/백령도)에 이르렀을때 풍랑이 크게 일어나 곡도에서 10여일을 묵게 되었다. 양패는 이를 근심하여 사람을 시켜 점을 쳤는데 "섬에 신지(神池)가 있으니 거기에 제사를 지내면 좋겠습니다"했다. 제사를 지낸후 그날 밤에 양패의 꿈에 노인이 나타나 활 잘쏘는 사람 하나만 이 섬안에 남겨두면 순풍(順風)을 얻을것이다고 말하자 양패가 잠을 깼다. 양패는 섬에 남을 사람을 정하기 위해 50명의 이름을 적은 나무를 물에 띄웠는데 거타지(居陀知)의 이름이 물에 잠겨 결국 거타지가 곡도에 남게 되었다. 이후 양패 일행은 배를 띄워 당나라로 향하였고 섬에 남은 거타지는 서해의 용왕의 부탁을 받고 용왕을 괴롭히는 못된 중을 활로 쏘아 죽이고 용왕의 딸과 혼인하게 되었다. 이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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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목(徐穆) 이천

이천(利川/경기 이천) 호족 서신통(徐神通)의 아들이다. 또한 이천서씨의 시조인 서신일(徐神逸)의 조카이기도 하며, 사촌이 서필(徐弼/서희 아버지)이다. 고려초 당시 이천는 한주(漢州) 소속 황무군(黃武郡)이라 불리웠는데, 왕건이 군을 이끌고 남정할 당시 이지방 복하천에 당도했는데 홍수로 강의 물이 불어나 진퇴양난에 빠졌다. 효양산 밑에 살던 서목이 이 광경을 보고 수심이 얕은 물길을 인도해 줌으로써, 무사히 왕건군이 도강할수 있었다. 왕건은 이섭대천(利涉大川/큰강을 건너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주역의 구절을 인용하며 이지역을 이천(利川)이라 이름지었다.

 


서봉(徐逢) 고려

고려 4대왕 광종조에 광평시랑(廣評侍郞)을 역임했다. 당시 중국은 당이 멸망하고 후량(後粱 907~923), 후당(後唐 923~936), 후진(後晋 936~946), 후한(後漢 947~950)이 차례로 들어서는 대혼란기였다. 951년 곽위(郭威)가 후한을 멸하고 후주(後周 951~960)를 건국했는데 이해가 광종2년이였다. 광종은 951년 12월에 비로소 후주의 연호를 쓰기 시작했으며, 다음해인 952년(광종3년)에 최초로 광평시랑 서봉을 사신으로 후주에 파견했다. 이때부터 양국은 교류를 시작했으며, 호족이나 군벌에 의해 왕권이 취약했던 광종은 대거 후주의 인사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후주와 교류했다. 이후 후주가 송태조 조광윤(趙匡胤)에게 멸망당한 960년 부터는 광종은 후주의 연호를 버리고 개경을 황도(皇都), 서경을 서도(西都)라 하는등 황제국이라 자칭하면서 이해부터 호족,왕족,군벌 숙청 작업에 돌입했다. 962년 겨울 광종은 다시 송에 광평시랑(廣評侍郞) 이흥우(李興祐)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교류를 시작했으며, 다음해 963년 12월에 최초로 송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서신통(徐神通) 이천

신라 효공왕때 아간(阿干) 벼슬을 지낸 서신일(徐神逸)의 동생으로,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지자 형과 함께 경기 이천으로 은거하였다. 효양산(孝養山)에 정착한 서신통은 아들 서목(徐穆)을 두었다. 형 서신일은 희성당(希聖堂)을 건립해 후학들을 교육하였는데, 나이 70이 넘도록 아들을 갖지 못하자 서신통은 자기 아들 서목을 입양할것을 권유하였으나 서신일은 인의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어코 서신일은 나이 80에 아들 서필을 낳았다. 또한 서신통의 아들 서목은 태조 왕건의 남정때 공을 세운다.

 

 


선당(先幢)/광당(光幢) 휴암(봉산)

황해도 휴암(봉산/鳳山) 호족으로 대대로 조상이 봉산일대 군족(郡族)이였다. 부인 박씨(朴氏)와의 사이에 아들을 두었는데, 아들이 7세에 불문에 귀의하여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사자산파의 제2조로 이름을 떨쳤는데 법명은 절중(折中)이고 시호는 징효(澄曉)이다.

 

 

 

 

 

 

송능(宋能)

고려 태조 왕건을 섬겨 종군하여 공적을 세웠다. 출생년도는 910년대 초반인것으로 추측된다. 현종4년(1013년) 9월 당시 송능은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벼슬에 있었는데, 나이가 이미 백세에 이르렀다. 현종은 송능에게 대광(大匡)을 증직하였다.

 


연위(連位)

신라말 17관등중 8등급인 사간(沙干)을 역임했으며 목포호족으로 병부시랑을 역임한 오방(吳昉)의 아들 오희(吳禧)에게 딸 덕교(德交)를 시집보냈다. 오희와 덕교의 사이에 3남1녀를 두었으며 1녀는 곧 고려 태조의 제2비 장화왕후다.

 


예방(藝方) 고려

고려의 술사(術師)로 태조 13년(925년) 왕건이 남정을 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 주둔지를 물색하였는데 이때 예방(藝方)이 전국을 둘러보고 돌아와 태조에게 지금의 천안 땅을 가리키며 "이곳이 삼국의 중심이며 오룡(五龍)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세이니 만약 대관(大官)을 두면 백제가 스스로 항복할 것입니다." 아뢰었다. 이말을 들은 태조가 친히 천안에 이르러 높은 산에 올라 두루 살펴보고 만족스러워하며 부(府)를 두기로 결정하여 이곳을 천안부로 삼고 초대 도독(都督)으로 제궁(帝弓)을, 부도독으로 엄식(嚴式)을 임명하였다. 고려군은 천안 1군 7현 지역을 수비할수 있는 왕자산성(王字山城)을 쌓고, 달북재(縣鼓山)에는 고정(鼓庭, 군사 훈련소)을 설치하여 군사 10만명을 주둔시킬수 있는 기지를 구축하였다.

 

 


오방(吳昉)/오부순(吳富純) 목포

목포(나주)호족으로 신라 지증왕 원년(500년)에 중국에서 신라로 건너온 오첨(吳瞻)의 10세손이다. 신라말 병부시랑을 역임했으며 아들 오희(吳禧)는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역임하고 목포(나주)일대에서 호족으로 이름을 떨쳤다.

일찍히 나주 오씨가문은 당나라와의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으며 이로 인해 오방은 부호란 뜻의 오부순(吳富純)이라 불리우게 된것이다. 아들 오희는 905년 태봉의 수군장 왕건이 나주를 공략할때 협력하여 딸을 왕건에게 시집보내니 훗날 장화왕후다. 오희는 다련군(多憐君)에 봉작되었다.

 

 

 

오상(吳相) 목포

목포(나주)호족 오희(吳禧)의 장남으로 905년 태봉 수군장 왕건의 나주 공략에 협력하였다. 여동생 장화왕후(莊和王后)가 고려 건국후 제2비가 되고 2대왕 왕무(혜종)가 원윤에 책봉되자 평장사(平章事) 및 시중(侍中)을 역임했고 금성백(錦城伯)에 봉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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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吳桓) 목포

목포(나주)호족 오희(吳禧)의 차남으로 905년 태봉 수군장 왕건의 나주 공략에 협력하였다. 여동생 장화왕후(莊和王后)가 고려 건국후 제2비가 되고 2대왕 왕무(혜종)가 원윤에 책봉되자 문량공(文良公) 수양백(首陽伯)에 봉작되었다.

 

 

 

오검(吳檢) 목포

목포(나주)호족 오희(吳禧)의 장남으로 905년 태봉 수군장 왕건의 나주 공략에 협력하였다. 여동생 장화왕후(莊和王后)가 고려 건국후 제2비가 되고 2대왕 왕무(혜종)가 원윤에 책봉되자 형부시랑(刑部侍郞)을 역임했고 천령백(天嶺伯)에 봉작되었다.

 

 


유손(庾孫)

고려 태조 왕건을 섬겨 종군하여 공적을 세웠다. 출생년도는 910년대 초반인것으로 추측된다. 현종4년(1013년) 9월 당시 유손은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벼슬에 있었는데, 나이가 이미 백세에 이르렀다. 현종은 유손에게 대광(大匡)을 증직하였다.

 

 


유울행(庾鬱行) 김해

김해호족 출신으로 고려초 김해부(金海府) 아간(阿干) 벼슬을 지냈다. 딸을 수주(水州/현 경기 수원) 호족 대위(大尉) 최융예(崔融乂)에게 시집보내었다. 딸 유씨(庾氏)는 훗날 아들 최사위(崔士威)의 공에 힘입어 국대부인(國大夫人)에 봉해졌다.

 


장유(張儒) 흥덕(고창)

흥성장씨(興城張氏)의 시조로 호는 청계(淸溪)이다. 고향은 흥덕(興德/현 전북 고창)으로 930년경에 중국 오월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장유가 귀국후 관직에 등용된 때는 후삼국이 통일되고 사회가 안정된 광종조였다. 광종은 호족억압책을 펴기 위해 중국인 관리들과 유학파들을 대거 등용할때 중국어에 능통한 장유도 관직에 나갈수 있었다. 고려사 절요에 따르면 광종이 장유를 여러번 객성(客省)의 관원에 임명하여 매양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장유를 시켜 접대하게 하였다. 객성(客省)의 주된 업무는 외국사신을 접대하고, 외교정책(外交政策)을 입안(立案)하던 곳이다. 객성(客省)의 관리로는 판사(判事,정3품) 2 명, 영(令,종3품) 약간 명, 부령(副令,종4품) 2 명, 승(丞), 주부(主簿) 녹사(錄事) 등이 있다. 그후 장유는 광평성(廣評省) 시랑(侍郞) 벼슬을 임명받았다. 장유의 아들 장연우(張延祐)도 행정사무에 능하여 중요한 관직을 역임하고 재간과 능력이 있다고 일컬어졌으며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했다.

 

 

 

장연우(張延祐) 흥덕(고창)

흥성장씨(興城張氏)의 시조 장유(張儒)의 아들로 광종조 950년경에 태어났다. 1011년 현종2년 거란(契丹)의 침입 때 남쪽으로 피란한 현종을 호종(扈從)하여 중추원사(中樞院使)가 되고 이어 관어사대사(判御史臺事)에 올랐다. 1014년 11월 일직원(日直員) 황보유의(皇車兪義)와 함께 왕에게 건의하여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아 관리의 부족한 녹봉으로 충당케 했다가 상장군 김훈(金訓), 최질(崔質)이 무신반란을 획책하여 황보유의와 장연우를 거의 죽을 정도로 매질하고 곧 귀양을 보냈다. 1015년 3월 서경에서 반란을 획책한 무신들을 척살하고 사면되어 호부상서(戶部尙書)에 복직되었으나 그해 11월 죽었다.

 

 

김전(金佺) 신라왕족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 김부(金傅)와 첫째부인 송희부인(松希夫人) 석씨(昔氏) 사이의 장남이다. 신라 왕족 3개성씨(김,박,석)를 다룬 삼성연원보(三姓淵源譜)에 따르면 경순왕과 송희부인 사이에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김전(金佺), 김요(金瑤), 김곤(金琨), 김영(金英), 김분(金奮)이며 김요는 완산군(完山君)에 김영은 광주군(廣州君)에 김분은 삼대군(三大君)에 봉해졌다. 부 김부가 후백제왕 견훤에 의해 옹립되어 왕위에 오른후 죽주(경기 안성)출신의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朴氏)가 왕후가 되어 소원왕후(昭元王后)에 봉해진것으로 미루워, 전왕의 일족인 박씨부인을 왕후로 삼고, 송희부인은 후비에 봉해진것으로 짐작된다. 김전은 경순왕이 935년 고려에 나라를 들어바치자 셋째 동생 김곤(金琨)과 더불어 자결하였다. 송희부인과 죽방부인의 소생들에 대한 위차는 현재도 의견이 분분한 상태이다.

 

 

김요(金瑤) 신라왕족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 김부(金傅)와 첫째부인 송희부인(松希夫人) 석씨(昔氏) 사이의 차남이다. 신라 왕족 3개성씨(김,박,석)를 다룬 삼성연원보(三姓淵源譜)에 따르면 경순왕과 송희부인 사이에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김전(金佺), 김요(金瑤), 김곤(金琨), 김영(金英), 김분(金奮)이며 김요는 완산군(完山君)에 김영은 광주군(廣州君)에 김분은 삼대군(三大君)에 봉해졌다. 부 김부가 후백제왕 견훤에 의해 옹립되어 왕위에 오른후 죽주(경기 안성)출신의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朴氏)가 왕후가 되어 소원왕후(昭元王后)에 봉해진것으로 미루워, 전왕의 일족인 박씨부인을 왕후로 삼고, 송희부인은 후비에 봉해진것으로 짐작된다. 김요가 당시 후백제 영토인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다는 것은 경순왕 당시가 아니고, 삼한 통일후에 봉작되었거나, 후대에 후손들이 완산(전북 전주)에 정착하여 관향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 하겠다. 송희부인과 죽방부인의 소생들에 대한 위차는 현재도 의견이 분분한 상태이다.

 

 

김곤(金琨) 신라왕족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 김부(金傅)와 첫째부인 송희부인(松希夫人) 석씨(昔氏) 사이의 삼남이다. 신라 왕족 3개성씨(김,박,석)를 다룬 삼성연원보(三姓淵源譜)에 따르면 경순왕과 송희부인 사이에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김전(金佺), 김요(金瑤), 김곤(金琨), 김영(金英), 김분(金奮)이며 김요는 완산군(完山君)에 김영은 광주군(廣州君)에 김분은 삼대군(三大君)에 봉해졌다. 부 김부가 후백제왕 견훤에 의해 옹립되어 왕위에 오른후 죽주(경기 안성)출신의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朴氏)가 왕후가 되어 소원왕후(昭元王后)에 봉해진것으로 미루워, 전왕의 일족인 박씨부인을 왕후로 삼고, 송희부인은 후비에 봉해진것으로 짐작된다. 김곤은 경순왕이 935년 고려에 나라를 들어바치자 큰형 김전(金佺)과 더불어 자결하였다. 송희부인과 죽방부인의 소생들에 대한 위차는 현재도 의견이 분분한 상태이다.

 

 

김영(金英) 신라왕족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 김부(金傅)와 첫째부인 송희부인(松希夫人) 석씨(昔氏) 사이의 사남이다. 신라 왕족 3개성씨(김,박,석)를 다룬 삼성연원보(三姓淵源譜)에 따르면 경순왕과 송희부인 사이에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김전(金佺), 김요(金瑤), 김곤(金琨), 김영(金英), 김분(金奮)이며 김요는 완산군(完山君)에 김영은 광주군(廣州君)에 김분은 삼대군(三大君)에 봉해졌다. 부 김부가 후백제왕 견훤에 의해 옹립되어 왕위에 오른후 죽주(경기 안성)출신의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朴氏)가 왕후가 되어 소원왕후(昭元王后)에 봉해진것으로 미루워, 전왕의 일족인 박씨부인을 왕후로 삼고, 송희부인은 후비에 봉해진것으로 짐작된다. 김요가 당시 고려 영토인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다는 것은 경순왕 당시가 아니고, 삼한 통일후에 봉작되었거나, 후대에 후손들이 광주(경기 광주)에 정착하여 관향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 하겠다. 송희부인과 죽방부인의 소생들에 대한 위차는 현재도 의견이 분분한 상태이다.

 

 

김분(金奮)/김행(金幸)/금준(今俊) 신라왕족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 김부(金傅)와 첫째부인 송희부인(松希夫人) 석씨(昔氏) 사이의 오남이다. 신라 왕족 3개성씨(김,박,석)를 다룬 삼성연원보(三姓淵源譜)에 따르면 경순왕과 송희부인 사이에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김전(金佺), 김요(金瑤), 김곤(金琨), 김영(金英), 김분(金奮)이며 김요는 완산군(完山君)에 김영은 광주군(廣州君)에 김분은 삼대군(三大君)에 봉해졌다. 부 김부가 후백제왕 견훤에 의해 옹립되어 왕위에 오른후 죽주(경기 안성)출신의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朴氏)가 왕후가 되어 소원왕후(昭元王后)에 봉해진것으로 미루워, 전왕의 일족인 박씨부인을 왕후로 삼고, 송희부인은 후비에 봉해진것으로 짐작된다. 김분(金奮)은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나라를 들어바칠 결심을 하자, 태자 김일(金鎰)과 더불어 극력 반대하였으나 경순왕의 뜻이 확고하자 어전에서 크게 목놓아 울고 김일과 더불어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일설에는 마의태자 김일과 더불어 항려, 신라부흥운동을 꾀했다고도 한다. 한편 일설에는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조상인 김행(金幸)/금준(今俊)이란 설도 있다. 고려사에 김행/금준은 평주의 승려로 기록되어 있고, 일부 학계에서는 김분이 형 김요(金瑤), 김영(金英)과 함께 여진으로 망명하자고 청했으나 두형이 거절하자 혼자 여진으로 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여러설을 모아보면 금강산에서 신라부흥운동을 꾀했던 김분은 뜻이 여의치 않자 여진으로 망명을 꾀해, 승려로 변장해 평주에 잠시 머물다 여진땅 아지고촌(阿之古村)에 들어가 여진족 여인과 혼인해 극수(克守) → 고을(古乙) → 활라(活羅) → 핵리발(劾里鉢) → 아골타(阿骨打/금태조)로 혈통이 이어졌다고 할수 있겠다. 금사(金史)에는 김행(金幸)/금준(今俊)을 함보(函普)라 기록하였다. 송희부인과 죽방부인의 소생들에 대한 위차는 현재도 의견이 분분한 상태이다.

 

 

 

소원왕후(昭元王后)/죽방왕후(竹房王后) 박씨(朴氏) 신라왕족(죽주/안성)

죽주(竹州/안성)인 예부시랑(禮部侍郎) 박광우(朴光佑)의 딸로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비가 되었다. 박광우는 경명왕의 4남으로 죽산을 식읍으로 받아 죽성대군(竹城大君)으로 불리운 박언립(朴彦立)과 일족으로 추측된다. 전왕이였던 경애왕이 박씨 인것으로 미루워 김씨 진골귀족이던 김부(金傅)와 정략 혼인을 한것으로 추측된다. 927년 경애왕이 백제왕 견훤에 의해 자살하고 남편 김부가 옹립되니 곧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이다. 이후 죽방왕후(竹房王后)라 불리웠으며, 후에 소원왕후(昭元王后)로 추봉되었다. 경순왕과의 사이에 3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 김일(金鎰), 김황(金湟/김굉金鍠), 김명종(金鳴鍾)과 덕주공주(德周公主)다. 김일은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모후 소원왕후, 태자비(김영란/金英蘭/시중 김유렴(金裕廉)의 딸), 두아들 김선웅(金善雄), 김순웅(金順雄)과 함께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김일은 이후 속세와 절연하고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마의를 입고 초식으로 연명하면서 생을 마쳐 마의태자라 불리웠다. 소원왕후는 태자비와 함께 금강산 장안사(長安寺)에 머리를 깍고 여승이 되어 일생을 마쳤다. 기록엔 계자(季子/막내아들)로 되어 있으나 둘째 아들로 추측되는 김황은 학성군(鶴城君/울산)에 봉작되었다가 부왕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심하자 가야산 법수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범공(梵空)이란 승명(僧名)을 받은후 해인사(海印寺)를 드나들면서 산승(山僧)으로 일생을 마감했다. 셋째 아들 김명종은 각간(角干/최고 관직)에 이르렀으며 망국후 경주에 남아 경순왕이 식읍으로 받은 경주를 대신 다스린 것으로 추측되며 경주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덕주공주는 월형산(月螢山/충남 제천) 월악사(月岳寺)에 기거하면서 높이 13m의 거암에 마애불(보물 406호)을 조성하고 신라의 재건을 염원하며 일생을 마쳤다. 이후로 산이름을 월악산(月岳山), 월악사의 절이름을 덕주사(德周寺)로 불리웠다. 경주김씨는 김명종외에도 김은열(金殷說/경순왕과 낙랑공주의 아들)을 시조로 보기도 한다.

 

 

 

김일(金鎰)/마의태자(麻衣太子) 신라왕족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 김부와 소원왕후(昭元王后)/죽방부인(竹房夫人) 사이의 장남으로 태자에 책봉되었다.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을 결심하자 천년사직을 어찌 남에게 넘겨줄수 있겠느냐며 극력하게 간하였으나, 경순왕의 결심을 막지 못하였다. 김일은 어전에서 통곡한후 그길로 모후 소원왕후, 태자비(김영란/金英蘭), 두아들 김선웅(金善雄), 김순웅(金順雄), 혹은 막내아들 김교(金較)까지 데리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소원왕후와 태자비는 함께 금강산 장안사(長安寺)에 머리를 깍고 여승이 되어 일생을 마쳤으며, 김일은 이후 속세와 절연하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마의를 입고 초식으로 연명하면서 생을 마쳐 마의태자라 불리웠다. 일설에는 마의태자는 신라 부흥운동을 추진했다고도 알려져 있다. 부안김씨(扶安金氏)의 시조이기도 하다.

 

 

 

김굉(金鍠)/김황(金湟) 신라왕족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 김부와 소원왕후(昭元王后)/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 사이의 차남으로 기록엔 계자(季子/막내아들)로 되어 있으나 둘째 아들로 추측된다. 동생은 김명종(金鳴鐘)이며, 누이는 덕주공주(德周公主)다.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을 결심하자 가야산 법수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범공(梵空)이란 승명(僧名)을 받은후 해인사(海印寺)를 드나들면서 산승(山僧)으로 일생을 마감했다. 울산,나주김씨 족보에는 학성군(鶴城君)으로 봉작되어 학성(경북 울산)을 식읍으로 받아 세거하다가 두아들 김운발(金雲發), 김우발(金雨發)을 두었으나 신라 패망후 처자를 버리고 승려가 되었으며 속세에 있을적 호가 덕지(德摯)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조에서 두 아들을 예우하여 장자 김운발(金雲發)은 문하시중으로 나주군(羅州君)에 봉하고, 둘째 김우발(金雨發)은 경주군(慶州君)에 봉했다.

일설에는 김덕지(金德摯)는 경순왕의 또다른 후비인 순흥안씨(順興安氏) 소생이라 하며, 신라 패망당시 경순왕, 김일, 김굉의 연배를 고려하면 김운발, 김우발은 김굉의 아들이 아닌 경순왕의 막내아들 김덕지의 아들이란 설도 있다.

 

 

 

김명종(金鳴鐘) 신라왕족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셋째 아들로 소원왕후(昭元王后)/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 소생이다. 신라말 각간(최고 관직)을 역임했으며,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부왕을 따라 송악에 갔으며 경순왕이 고려 수도에 머물자, 김명종은 경주로 내려와 아버지 김부가 식읍으로 하사받은 경주를 대신 다스렸다. 시호은 영분공(永芬公)이고 부인은 박씨이며 묘는 경주 형제산에 있다. 한편 김명종은 경주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경주김씨의 시조는 3남 김명종과 4남 김은열 두 명인데, 이처럼 경주김씨의 시조를 두명으로 한 것은 김명종이 소원왕후 박씨 소생인 데 반해, 김은열은 왕건의 장녀인 낙랑공주 소생이었기 때문이다.

 

 

덕주공주(德周公主) 신라왕족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과 소원왕후(昭元王后)/죽방왕후(竹房王后)와의 사이에 난 공주다. 경순왕이 고려에 나라를 들어 바치자 친모 소원왕후(昭元王后), 첫째 오빠 태자 김일(金鎰), 태자비 김영란(金英蘭)은 금강산으로 들어갔으며, 덕주공주는 월형산(月螢山/충남 제천) 월악사(月岳寺)에 기거하면서 높이 13m의 거암에 마애불(보물 406호)을 조성하고 신라의 재건을 염원하며 일생을 마쳤다. 이후로 산이름을 월악산(月岳山), 월악사의 절이름을 덕주사(德周寺)로 불리웠다.

 

 

 

김은열(김은설/金殷說) 구신라왕족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 김부와 고려 태조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 사이의 장남으로 937년 출생했다. 고려조에 출사하여 보국(輔國) 대안군(大安君)에 봉해졌으며 광종조 시랑(侍郞/정4품)직을 거쳐 평장사(平章事/정2품) 및 시중(侍中/종1품)을 역임했다. 몰년은 968년(광종19년), 1028년(현종19년) 3월4일 두설이 있으나 묘명에 경순왕(敬順王)의 아들이라 적혀 있는것으로 보아, 김부가 경순(敬順)이라는 시호를 받은 때는 978년 4월 경종조 임으로 1028년이 더 유력하다 하겠다. 만약 968년이라면 당시 김부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묘지명엔 태조 왕건에 의해 공작에 봉작된 정승공(正丞公) 김부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었어야 맞다 하겠다. 또한 안산김씨 족보에 의하면 982년(경종 7년) 경순왕 영정을 김부의 아들 김은열과 김심언(金審言)등이 봉은사에 봉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허나 뒷날 후손에 의해 새롭게 묘지명이 쓰여졌거나, 기록이 된 가능성도 있어 968년 몰년 가능성도 있다. 김은열은 이복형제 김명종(金鳴鐘/경순왕과 소원왕후 3남)과 더불어 경주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김석(金錫)/김중석(金重錫) 고려(구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5남으로 母가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다. 김석은 의성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의성에 정착하여 살았음으로 의성김씨(義城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김건(金鍵) 고려(구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6남으로 母가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다. 김건은 강릉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강릉김씨(後江陵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김선(金繕) 고려(구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7남으로 母가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다. 김선은 언양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언양김씨(彦陽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김추(金錘) 고려(구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8남으로 母가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다. 김추는 삼척군(三陟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삼척김씨(三陟金氏)의 선조가 되었다. 삼척김씨의 시조 김위옹(金渭翁)의 아버지다. 분파로 진주(晋州), 영월(寧越), 경산(慶山 ), 남원(南原), 길안(吉安), 옹진(甕津), 진위(振威), 춘양김씨(春陽金氏) 등 8개 분파(分派)가 있다.

 

 

 

 

 

 

김영란(金英蘭) 신라왕족

신라 경명왕조 시중(侍中)을 지낸 김유렴(金裕廉)의 딸로 김유렴의 당제인 경순왕이 왕위에 오르자 태자 김일(金鎰)의 비가 되었다. 경순왕이 고려에 나라를 들어바치자 남편 김일은 금강산에서 마의를 입고 초식으로 연명하다 생을 마친 마의태자로 불리웠으며, 김영란 또한 시어머니 소원왕후(昭元王后)와 함께 금강산 장안사(長安寺)에 머리를 깍고 여승이 되어 일생을 마쳤다.

 

 

 


김선웅(金善雄) 신라왕족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태자 김일(金鎰)과 태자비 김영란(金英蘭/김유렴의 딸)과의 사이에 난 장남으로 조부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들어 바치자 태자 김일은 모후 소원왕후, 태자비, 그리고 두아들 김선웅(金善雄), 김순웅(金順雄)을 데리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소원왕후와 태자비는 금강산 장안사(長安寺)에 머리를 깍고 여승이 되어 일생을 마쳤으며, 부 김일은 속세와 절연하고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마의를 입고 초식으로 연명하면서 생을 마쳐 마의태자라 불리웠다. 김선웅은 아들 김문강(金文康)을 두었으며 김문강의 아들이 김위영(金魏英)이다. 김위영은 고려 인종조 조정을 이끌던 김부식(金富軾)의 증조부로 알려져 있으며 일설에는 김위영이 경순왕조 경주지방의 호장(戶長)이였으며 신라 망국후 고려에 귀부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김순웅(金順雄) 신라왕족

경주김씨 족보에 의하면 김순웅은 경주김시의 파조(派祖)이며, 신라 경순왕의 태자 김일(金鎰)과 태자비 김영란(金英蘭/김유렴의 딸)의 사이에 난 차남으로 신라 망국후 조모, 부모, 형 김선웅(金善雄)과 함께 금강산에 들어간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김순웅의 아들 김인위(金因渭)가 현종도 1024년에 치사(致仕/70세 정년퇴직)한것으로 미루워 김인위는 954년 출생으로 짐작된다.

<경순왕(881출생) → 김일(金鎰) 900~910 출생 → 김선웅(920~930 출생), 김순웅(921~931 출생) 추측>

한편 김순웅의 아들 김인위는 현종 15년 1024년 그해에 현종의 장인이 되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임명되어 치사했다.

그러나 강릉김씨(江陵金氏) 족보에는 김순웅은 대상(大相) 김선환(金宣煥)의 아들이고, 조부는 김영환(金英喚), 증조부는 김자사(金紫絲)인것으로 되어 있다.

경주김씨와 강릉김씨의 내용중 고려초 대장군(大將軍). 응양위(鷹揚衛)과 용호위(龍虎衛)의 이군(二軍)을 거치고 좌우군(左右軍), 신호위(神虎衛, 흥위위(興尉衛), 금오위(金吾衛),천우위(千牛衛), 감문위(監門衛))등 육위의 장군을 거치고 대장군이되어 안주(安州) 홀성주의 병마사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군이 창설된것은 현종조 임으로 이는 사실이 아닌듯 하다.

 

 

 

김교(金較) 신라왕족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태자 김일(金鎰)의 셋째 아들로 알려져 있으며, 조부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부 김일은 조모 소원왕후와 태자비, 두형 김선웅(金善雄), 김순웅(金順雄)을 데리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김교 또한 이들을 따라 금강산으로 들어간것으로 보이며, 광종조에 통주군(通州君/강원 통천)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통주를 관향으로 삼았으며 김교는 통천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자(子)는 김욱(金昱)이고 손자는 김이청(金以淸)이다.

 

 

 

지은(知恩) 경주

삼국사기 효녀열전에 기록된 여인으로, 경주 한기부(韓歧部) 백성 연권(連權)의 딸이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홀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형편이 어려워지자 쌀10석에 부자집에 종으로 들어가 어머니를 봉양했다. 모가 말하길 "예전에는 밥이 거칠어도 맛이 좋았는데, 지금은 밥은 좋아도 맛은 전과 같지 않고 속을 칼로 에이는 것 같으니 어찌된 일이냐?" 하니 모녀가 목놓아 울었다. 이때 화랑 김효종이 길을 걷다가 이를 듣고, 사정을 알아본바 곧바로 집에 돌아가 부모에게 청하여 집의 곡식 100석과 옷가지를 실어다 주었으며 주인에게 몸값을 지불해주고 양민이 되게 하였더니 화랑 낭도 수천명이 각기 곡식 한섬씩을 내주었다. 정강왕이 이소식을 듣고 다시 벼 500석과 집한채를 하사하였는데, 곡식이 많아 도둑이 들까 염려하여 군사를 보내 지키게 하였다.

 

 

 

김운발(金雲發) 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D)

나주김씨(羅州金氏) 시조로 부는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둘째 아들 김굉이다. 경순왕이 고려로 항복하자, 마의태자와 김굉은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개골산으로 입산하였다가 중이 되었고, 김운발은 고려조정에 출사하여 시중까지 역임하고 나주군에 봉해졌다.

 

 

김우발(金雨發) 신라(왕족) 육전(D)수전(D)정치(C)모략(D)명성(D)축성(D)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의 아들 김굉의 둘째아들로 안로김씨(安老金氏) 시조인 김지경(金之敬)의 부다. 신라가 패망하자, 마의태자와 김굉은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개골산으로 입산하였다가 중이 되었고, 김우발은 형과 함께 고려 조정에 출사, 경주군(慶州君)에 봉해졌으나, 아들 김지경이 나주의 속현인 안로에서 살았음을 생각하면, 형과 함께 나주에서 정착한듯 싶다.

 

 

 

헌숙왕후(獻肅王后) 고려왕족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과 고려 태조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 사이의 장녀로, 모 낙랑공주는 경순왕과 함께 고려 왕궁의 신란궁(神鸞宮)에 거주했기에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으로 불리웠다. 신란궁에서 자란 헌숙왕후는 훗날 5대왕 경종의 제1왕후가 되었다. 경종과의 사이에 자식은 없었으며, 경종 사후 경종의 능에 합장되고 태묘에 부묘되었다. 1002년(목종 5) 온경(溫敬), 1014년(현종 5) 공효(恭孝), 1027년 양혜(良惠), 뒤에 다시 의목순성(懿穆順聖), 1056년(문종 10) 회안(懷安), 1253년(고종 40) 인후(仁厚)의 시호가 거듭 추증되었다.

 

 

황경(黃瓊) 장수(전북 장수)

장수황씨(長水黃氏)의 시조로, 장수군(長水君)에 봉해진 황을고(黃乙古)의 아들이다. 황경은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고 고려 태조의 딸 낙랑공주와 혼인하여 출생한 차녀 김씨와 혼인하였다. 황경의 벼슬은 시중(侍中)에 이른것으로 장수황씨 족보에는 나와있다.

 

 

황을고(黃乙古) 장수(전북 장수)

장수황씨(長水黃氏)의 시조 황경(黃瓊)의 부로, 서기28년 후한에서 건너와 경북 울진 평해에 정착한 황락(黃洛)의 후손이다. 형제는 황갑고(黃甲古), 황병고(黃丙古)이며, 형 황갑고는 평해에 남아 기성군(箕城君)에 봉해졌으며, 동생 황병고는 창원백(昌原伯)에 봉해졌다. 황을고의 아들 황경(黃瓊)이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 김부와 고려 태조의 딸 낙랑공주의 사이에 난 차녀 김씨와 혼인하였다. 황갑고, 황을고, 황병고 삼형제가 황락(黃洛)의 아들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황갑고의 아들 황온인(黃溫仁)이 고려초에 무관직에 나간것으로 보아 황락의 아들이 아닌 후손으로 짐작된다.

 

 

황갑고(黃甲古) 평해(경북 울진)

평해황씨(平海黃氏)의 시조로, 서기28년 후한에서 건너와 경북 울진 평해에 정착한 황락(黃洛)의 후손이다. 황갑고는 후삼국 당시 평해호족으로 스스로 장군을 칭하였으며 기성군(箕城君)에 봉해졌다. 형제로는 황을고(黃乙古), 황병고(黃丙古)가 있으며

황을고는 장수군(長水君)에 봉해져 장수(전북 장수)에 세거하여 장수황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황병고는 창원백(昌原伯)에 봉작되고 창원(경남 창원)에 세거하여 창원황씨(昌原黃氏)의 시조가 되었다. 황갑고, 황을고, 황병고 삼형제가 황락(黃洛)의 아들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황갑고의 아들 황온인(黃溫仁)이 고려초에 무관직에 나간것으로 보아 황락의 아들이 아닌 후손으로 짐작된다.

 

 

황병고(黃丙古) 창원(경남 창원)

창원황씨(昌原黃氏)의 시조로, 서기28년 후한에서 건너와 경북 울진 평해에 정착한 황락(黃洛)의 후손이다. 형제로는 두형 황을고(黃乙古), 황병고(黃丙古)가 있으며, 황갑고는 평해에 남아 기성군(箕城君)에 봉해져 평해황씨(平海黃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황을고는 장수군(長水君)에 봉해져 장수(전북 장수)에 세거하여 장수황씨의 시조가 되었다. 황갑고, 황을고, 황병고 삼형제가 황락(黃洛)의 아들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황갑고의 아들 황온인(黃溫仁)이 고려초에 무관직에 나간것으로 보아 황락의 아들이 아닌 후손으로 짐작된다.

 

 

황온인(黃溫仁) 평해(경북 울진)

평해황씨(平海黃氏)의 시조로 기성군(箕城君/경북 울진, 평해)에 봉해진 황갑고(黃甲古)의 아들이다. 황온인은 고려초 금오위장군, 태자검교를 역임했다.


 

 

신보(申甫)/신보락(申甫樂)/신보장(申甫臧)/신보장(申甫藏)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 신숭겸(申崇謙)의 아들로 신숭겸이 927년 대구 공산전투에서 전사하자, 태조 왕건은 신숭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으며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고, 그의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신보(申甫)를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들의 복을 빌게 하였다. 한편 신보는 평산을 부친의 뒤를 이어 평산을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이천상(李天祥) 전주

전주이씨 시조 이한(李翰)의 손자로 이한이 죽자 전주 건지산(乾止山) 조경단(肇慶壇)에 장사를 지냈다.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벼슬을 역임했다고 전주이씨 족보에 나와 있는데, 신라 조정인지 백제 조정인지 분명치는 않다.


 

 

 

이한(李翰) 전주

전주이씨(완산이씨)의 시조로, 신라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 때에 사공(司空) 벼슬을 지냈으며 태종무열왕의 10세손인 김은의(金殷義)의 사위였다.

 


 

최서천(崔徐遷) 수주(수원)

수성(水城/현 경기 수원,화성) 호족으로 고려초 태조 왕건이 남정할때 인근호족 김칠(金七), 최승규(崔承珪)등 200여명과 함께 태조에게 귀부하였다. 태조17년(934년) 수성은 수주(水州)로 승격되었다. 아들은 최한용(崔韓用)이고 손자는 최융예(崔融乂, 崔融藝, 崔融銳)이며 모두 조정에 출사하였으나 한직에 머물렀다. 증손 최사위(崔士威)가 내사령을 지내고 현종 묘정에 배향됨으로써 가문을 빛냈다. 이후 무신반란때 가문이 몰락하였다.

 

 


최승규(崔承珪) 수주(수원)

수성(水城/현 경기 수원,화성) 호족으로 고려초 태조 왕건이 남정할때 인근호족 김칠(金七), 최서천(崔徐遷)등 200여명과 함께 태조에게 귀부하였다. 태조17년(934년) 수성은 수주(水州)로 승격되었다.

 


최융예(崔融乂, 崔融藝, 崔融銳) 수주(수원)

수주(水州/현 경기 수원)호족 최한용(崔韓用)의 아들로, 삼한 통일후 고려 조정에 출사하여 대위(大尉) 벼슬을 지냈다. 김해부 아간(金海府阿干) 유울행(庾鬱行)의 딸과 혼인해 아들 최사위(崔士威)를 얻었다. 아들 최사위(崔士威)는 현종때 내사령을 지내고 현종 묘정에 배향되는 공을 세웠다.

 

 

최한용(崔韓用) 수주(수원)

수주(水州/현 경기 수원)호족 최서천(崔徐遷)의 아들로, 고려에 귀부후 개경으로 상경해 출사하여 벼슬이 검교공부시랑(檢校工部侍郞)에 이르렀다.

 

 


권인행(權仁幸)

안동권씨의 시조 권행(權幸)의 아들로 본성은 김씨였으나, 아버지 김행(金幸)이 929년 고창군 전투에서 고려군과 연합하여 백제군을 물리치자 태조 왕건이 권씨성을 하사함으로써, 대대로 권씨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권인행은 기인제도(其人制度)에 의해 고려 왕도 개경에 머물면서 벼슬이 낭중(郎中/5품)에 이르렀다. 권인행은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권책(權冊)을 낳았다.

 

 

허사문(許士文) 공암현

태인허씨(泰仁許氏)의 시조로, 공암현(孔巖縣/양천) 호족출신으로 고려초에 공을 세운 허선문(許宣文)의 일족이라 추측한다. 허사문은 고려 태조의 딸과 혼인하여 두아들 허즙(許楫)과 허도(許棹)을 두었다. 또 한편으로는 딸을 안동호족인 권행(權幸)의 아들 권인행(權仁幸)과 혼인시켰다고 한다. 허나 족보별로 여러 오차가 있다. 어떤 족보에는 허사문을 허선문의 동생이라 하였는데, 936년 일리천 전투당시 허선문의 나이가 90대임점, 태조의 부마라 함은 적어도 고려 개국후 20년 후에나 가능한 일로 938~940년에나 태조의 딸과 허사문이 결혼했을 것인데 이때 허사문의 나이는 20~30대 였을것이다. 그렇다면 절대 허선문의 동생이 될수가 없다. 게다가 안동권씨 족보에 따르면 권행의 아들 권인행과 허사문의 딸이 혼인하였다는데, 권행은 929년 고창전투에서 활약한 장수이고, 권인행은 기인제도에 의해 고려 조정에 인질로 가있던 점으로 미루워 권행 또한 940년경에 40~60대로 추정된다. 권행과 사돈지간이 된 허사문도 비슷한 연배로 보았을때 허사문 또한 태조와 비슷한 연배로 태조의 부마가 됐다는 기록은 오류일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허즙(許楫)

태인허씨(泰仁許氏)의 시조 허사문(許士文)의 아들로, 모가 태조 왕건의 딸이라 하는데 확실치 않다. 허즙은 부 허사문의 뒤를 이어 태인에 세거하며 태인허씨를 이어갔고, 동생 허도(許棹)는 이씨로 개명하여 경원이씨(慶源李氏/인주이씨,인천이씨)의 시조 이허겸(李許謙)이 되었다.


 

 

순질(荀質)

고려 광종조 6년(955년) 11월 광평시랑(廣評侍郞)직에 있던 순질은 후주(後周) 세종(世宗)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경종 원년(976년) 복수법을 시행하던 집정(執政) 왕선(王詵)이 태조의 아들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을 살해하자, 경종은 복수법을 금지하고 왕선을 외직으로 내친후 순질(荀質)을 좌집정(左執政), 신질(申質)을 우집정(右執政)으로 삼아 내사령(內史令)을 겸하게 하였다.

 

 

신질(申質)

고려 개국공신으로 추측되며, 경종 원년 976년 복수법을 시행하던 집정(執政) 왕선(王詵)이 태조의 아들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을 살해하자, 경종은 복수법을 금지하고 왕선을 외직으로 내친후 순질(荀質)을 좌집정(左執政), 신질(申質)을 우집정(右執政)으로 삼아 내사령(內史令)을 겸하게 하였다.

 

 

위수여(韋壽餘)/수여(壽餘)

강화위씨(江華韋氏)의 시조로 본시 당나라 경조(京兆) 사람으로, 광종 11년 960년 강화도에 망명하였다. 광종 때 사선(司膳) 벼슬에 오래 있었으나 고위 관직에는 임용되지 못하다, 경종 원년에 복수법을 시행하던 집정(執政) 왕선(王詵)이 태조의 아들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을 살해하자, 경종은 복수법을 금지하고 왕선을 외직으로 내친후 순질(荀質)을 좌집정(左執政), 신질(申質)을 우집정(右執政)으로 삼아 내사령(內史令)을 겸하게 하고, 위수여를 근신(近臣)으로 삼아 어주(御廚)의 일을 맡게 하였다. 목종조에도 누차 승진하였으며, 현종 원년 1009년에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를 제수받았다. 나이가 많음에 치사코자 하였으나, 현종으로부터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1012년 2월 문하시중 상주국 강화현 개국자 식읍오백호(門下侍中上柱國江華縣開國子食邑五百戶)에 제수되었으나 4월에 죽었다.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안공(安恭)이다.

 

 

왕선(王詵)

고려의 광종조 공신으로 황주(黃州) 황보씨(皇甫氏)와 연관된 왕씨성을 사성받은 호족이라 추측된다. 광종의 호족 대숙청기를 거친후, 황주 황보씨를 외가로 둔 경종이 즉위하자 왕선은 집정(執政)으로 임명받아 전권을 휘둘렀다. 왕선은 광종조에 숙청당한 호족들이 참소한 사람을 복수할수 있도록 하는 일명 복수법을 경종에게 건의하여 윤허를 받았다. 복수법이 시행되자, 광종조에 권세를 누렸던 가문들이 많은 피해를 받았다. 왕선은 태조의 아들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을 복수법에 기인해 직접 살해하였다. 이에 크게 분노한 경종은 왕선의 집정자리를 회수하고, 외직으로 내친후, 순질(荀質)을 좌집정(左執政), 신질(申質)을 우집정(右執政)으로 삼아 내사령(內史令)을 겸하게 하여 복수법을 금지시켰다.

by 초령목 2011. 11. 8. 2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