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자, 철학자 


정조가 똑똑하고 공부하기를 좋아해 성리학 분야에 뛰어났기 때문에 신하들을 오히려 가르칠 정도였는데 
정약용과의 성리학토론에서 한 번도 이겨본적이 없다고 함. 
1000여권의 유교경전을 놓고 연구했던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였음. 

- 내강중용강의, 내강모시강의, 희정당대학강의 


*서학자 

서학에도 조예가 깊어서 성경도 공부했음. 


*역학자 

백련사의 주지스님은 스스로를 조선 최고의 역학자라고 자부했지만 
정약용을 만난 이후 정약용에게 배움을 받기 위해 매일 정약용을 찾아갔음. 

- 역학서언 


*문학가, 한문학자, 문예비평가 

이미 7살 부터 시를 지었고('산'이라는 시가 전해짐) 10살 이전에 지은 시를 모은 삼미자집이라는 책을 냄 
농민의 참상이나 사회현실을 한시로 지으면서 조선후기의 한시에 영향을 끼침. 
또한 어린시절 홍역을 치료해준 이헌길이라는 의사의 전기(몽헌집)를 집필함. 

- 다산시문집 


*역사학자 

강역고라는 역사서를 통해 역사의 해석과 비판이 무엇인지 저술함. 


*지리학자 

조선 최고의 지리서 택리지를 지은 이중환의 스승임. 
아방강역고에서 고조선에서 발해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강역의 역사를 각종의 문헌에서 기록을 뽑아 고증하고? 
자신의 견해를 첨부하여 그 내력을 자세히 밝히고 있음. 
고조선과 발해 외에 한사군, 삼한(마한, 진한, 변한)의 위치를 다루고, 
옥저, 예맥, 말갈, 발해의 순으로 북방 여러 나라의 위치와 역사도 함께 검토. 
또한 지리 고증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고조선 이래의 역대의 강역과 수도, 하천 등의 위치를 
새롭게 밝혀 잘못 기록된 지리서에 수정을 가했음. 

- 아방강역고, 대동수경 


*정치학자, 행정가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주민자치), 농민의 토지균점,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 
끊임 없는 부정부패와 공직자의 청렴, 사명감을 중요시 여겼고 이러한 제도들의 실천을 더 중요시 여김. 

- 목민심서 : 목민관의 사례모음집 
흠흠신서 : 목민심서 집필 중 형법 집행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이 부분만 따로 확대하여 지은 책 
경세유표 :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를 실제 정치와 행정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지은 책 


*경제학자 

세법, 경제 제도 개혁 주장,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상공업이 중요하다고 주장. 

- 경세유표 


*형사, 법의학자 

살인사건을 조사하여 범인을 밝혀내고 억울한 사람의 누명을 벗겨주기도 함 
흠흠신서라는 저서를 통해 자신이 맡았던 사건을 기록했음. 


*건축가, 토목공학자, 기계공학자, 과학자, 발명가 

배다리와 기중기, 수원화성 설계 제작 
과학이 인간사회의 진보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여 
서양과학기술을 배울 수 있는 이용감이라는 관청을 두자고 제안. 
자전설을 주장하며 천동설을 비판하는 근거를 마련. 
빛의 굴절에 관한 서적을 읽었고 렌즈에 대한 소개를 했으며 
근시와 원시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정도. 


*의사 

순조가 병이 들었는데 어의들이 모두 고치지 못하자 정약용을 불러 치료하게 함. 
조선 최고의 의사였음. 
홍역의 치료에 관한 마과회통 저술하고 종두법을 실험했음. 

- 마과회통, 촌병혹치(약을 구하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쉬운 처방법을 집필) 


*법학자 

형법의 체계와 법률 적용을 검토 


*국문학자 

여러 분야의 어휘를 한자와 한글로 대비해 물명고라는 사전을 편찬. 
속담과 방언을 정리함 


*번역가, 편집가 

논어, 맹자, 춘추, 대학, 중용 등의 서적을 해석, 편집함 


*문화학자 

우리나라의 예법, 상법을 정리한 상례사전등을 집필 
(왜 예송논쟁이라고 효종이 죽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 가지고 싸웠던거 있잖아요. 
그거보고 빡치셔서 집필하심. 결론적으로 송시열 디스) 


*음악학자 

우리 나라의 음악이론·성률·악기 등의 기록을 고증한 음악서 악서고존 편찬 


*교육학자 

아이들 교재인 소학주천 집필




율곡 이이

연암 박지원

정조

세종

이가환

장영실

by 초령목 2014. 4. 30. 20:23

한민족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통일 중국제국에 대규모 원정을 건 왕

발해 무왕

 



고조선부여고구려신라백제고려 등 한민족 국가가 중국을 격퇴한 적이 있으나


대부분 수성전으로 몰아내거나 청야전술을 기본으로한 우주방어전이었습니다.


중국에 대해 선제공격을 한 것은 중국 분열시기를 이용하여  단기간 치고 빠지기가 주류.


연나라와 아웅 다웅 하던 고구려도 연나라에게 영혼까지 털릴뻔하기도 하고


북위가 하북을 통일하자 얌전히 눈치 보는 형세로 굳어집니다하북통일만 해도 국력과 회전에서의 전투력의 압도적


인 열세를 인정하고 수성전우주방어전으로 대응합니다그런데


무려 전중국을 통일한 제국에 대해 선제 공격과 전쟁을 건 유일한 나라가 있으니 바로 발해입니다.


당나라 전쟁에 앞서 상황을 보자면


===========================



 



 1결집기(719~724)  엄청난 정벌사업의 시작

발해의 각 배후에 있던 동북방의 여러 유목민세력들을 치기 시작.


719년 구다족을 쳐서 복속시킴

7

20년 개마족을 격파한뒤 복속시킴.

전까지 당은 발해를 인근 부족 추장집단세력으로 치부하며 개무시했으나 개마족과 구다족을 병탄한 이후부터 좋지 않은 눈초리로 보기시작신라 또한 발해와 긴장이 고조.



발해 건국 초기 골치 아프게 했던 유구실위 기마 세력을 월희읍루불열 등지에서 모조리 제압하므로서 해결무왕은 단 5년만에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배후의 모든적을 때려부수고 있었던 것.



또한 지방행정체계를 "도독", "제사(혹 자사)", "수령"으로 두었으며조정체제와 "건민책령제"를 통하여 백성들의 생활안정을 시키고경제안정을 도모하는 것들을 골자로 하는 국력의 전반적인 결집기.

 



 2팽창기(724~731)

- 725년 발해 내부에 잔존하고 있던 무왕의 정적 세력들이 무왕을 폐위하고자 쿠데타를 일으키나 무왕은 살아남음.

오히려 이걸 계기로 무왕은 건국 초 암암리에 숨어있던 자신의 자리를 노리던 군벌이나 정적들을 일거에 제거 소탕하고 왕권을 강화하게 됨이를 바탕으로 골칫거리였던 726년 흑수말갈 정벌에 나섬


흑수말갈을 기병군단을 대파하고 흑수말갈의 대칸 예속리기의 목을 벰말갈의 군마와 양질의 기병들을 흡수.발해는 서서히 팽창기에 접어듬.




이에 당나라는 긴장하게 됨그 이전까지 근방의 흔한 유목민 추장세력쯤으로 여겼던 발해가 거침없이 주변을 병탄하여 세력을 불리고 있었기 때문.

무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요동 정벌에 나서 전 고구려의 각 요새들을 차례차례 탈환하여 당군을 축출하고 727 730년까지 요동정벌을 완성당은 발해를 더 이상 좌시하지않고 물밑 작업에 들어가고.. 이에 드디어 발해 당의 전쟁의 서막이 오름

 

=======================

 

732
발해 무왕이 장문휴(張文休)가 이끈 수군을 보내어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공격하여 자사 위준(韋俊)을 죽임(등주 공격)
*출전 : <<구당서>>, <북적열전발해말갈

733
당나라의 요청으로 발해 공격을 위해 김사란(金思蘭)이 이끈 신라군이 출동하였으나 눈이 많이 와서 철수함.
*출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성덕왕 32 7

 

733
발해 무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 마도산(馬都山일대를 공격함(마도산 전투)
*출전 : <<신당서>>

 ----------------------------------------------------

 

 

 

발해가 대조영에 의해 건국되면서 당나라는 발해를 국가로 인정해 주다가

719년 대조영이 죽고 무왕(대무예) 2대왕에 오르면서부터

 

당나라가 발해를 돌궐,거란,흑수말갈과 동급으로 대함.

(당시 돌궐,거란,흑수말갈은 정식 국가라고 안보고 부족으로 구분했음.

쉽게말해 당나라의 흔한 유목민 추장호구)

 

 

 

무왕은 즉위하자마자 동북쪽으로 영토를 확장시켜 나갔음

(신당서에 보면 "동북의 오랑캐들이 발해를 두려워 했다"라고 나옴)

 

722년 흑수말갈 부족장이 발해 영향권 안해 있어야 하는데 당과 내통하기 시작.

당은 파죽지세의 발해를 장차 멸망시킬 계획을 가지고 말갈 부족장에게 벼슬을 내리고 당의 관을  설치하는등 . 말갈과 연합하여 장차 발해를 양쪽에서 압박하려함

 

 

 

 

 

사진에서 보이듯이 당과 흑수말갈이 친목질을 하면서 발해는 위험을 느끼게 됨

(일명 샌드위치 당할까봐..)

 

※돌궐과 거란은 발해와 우호적 관계였고 당과는 적대관계여서 괜찮음.

 

그래서 흑수말갈에게 당이랑 친목질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데도

흑수말갈은 무시하고 발해한테는 조공도 안바침

(당나라한테는 굽신굽신)

 

결국 725년 당나라는 흑수말갈에 관청을 설치하고 관료를 파견시켜 다스리기 시작했음.

사실상 당나라가 흑수말갈을 흡수하게 된거임

 

 

이에 분노한 무왕은 왕위계승자인 대도리행(무왕 아들)을 당에 보내어

흑수말갈한테 관심 꺼달라고 부탁함

 

하지만 당 현종은 걍 무시;;

 

 

무왕은 큰 그림을 그려볼 때 이 사건을 좌시하게 될 경우 장차 발해의 존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것을 알았음나라의 국운을 걸고 세계제국 당과 맞설 것을 결심하고 

가장 신뢰하는 장수 대문예(무왕 동생)에게 흑수말갈 토벌군 사령관에 임명함.

 

근데 대문예는 입장이 달랐음. (당시 대문예는 당에 9년간 있으면서 당의 국력과 저력을 알고 있었고 당의 문화에 흠뻑 빠져든 친당파)

 

 

 

 

 

무왕(대무예) "흑수말갈은 이제 당나라속국이 되었으니 당과 연합하여 발해를 공격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흑수말갈 토벌해야함니가 가서 조지고 와라"

 

 

 

 

 

 

 

 

 

대문예형님 지금 장난하십니까당나라는 발해의 몇배에 달하는 군사를 보유했다구요

아무일도 아닌데 괜히 흑수말갈 건드렸다가 발해 멸망할일 있어요??

 

(대문예는 당에서 8년동안 생활한 경험이 있어서 친당파였음)

 

 

 

 

무왕 "개소리말고,  지금 안치면 우리가 망함니가 언능 가서 토벌하고 와라"

 

 

결국 대문예는 흑수말갈 토벌군 사령관으로 강제임명되고 흑수말갈을 토벌하기위해 동북으로 향했음.

 

 

하지만 국경지대에서 싸움은 안하고 계속 무왕한테 못싸우겠다고 상소를 올림.

(상소 내용: "아무래도 이건 하극상임 나 못하겠음")

 

 

빡친 무왕은 대문예를 소환하기로 하고 

대신 사촌형 대일하를 토벌군 사령관으로 보냄.

 

 

 

근데 소환하기로 한 대문예가 발해로 안오고 당으로 망명해버림;;;

 

 

 

그리구선 당 현종 밑으로 들어감.

 

 

당 현종은 대문예를 발해 내정간섭에 써먹으려고

 

 

환대하며 벼슬까지 내림..

 

 

 

그리고 무왕한테

 

"대문예도 넘어왔는데 우리 당나라랑 너희 발해랑 임금 신하 관계로 친하게 지내지??"

 

이런내용의 국서를 보냄 

 

 

 

 

 

 

 

 

당황한 무왕은 단호한 결정을 내리고 이렇게 답문을 보냄

 

 


 

"당에 망명한 순간부로 그는 내 동생이 아니다그를 죽여라"

 

 

 

 

 

 

당 현종은 약점잡힌 무왕이 굽히고 들어올줄 알았는데

 

예상외의 단호한 답변을 보고 당황함..

 

 

 

 

그래서 "대문예를 죽이기 위해 멀리 귀양보냈다."

 

라고 구라치고 지방에 숨겨놓음.

 

 

근데 얼마못가 무왕이 구라라는것을 알아차리게 되고

 

국서에 유례없는 내용을 써 넣음 

 

"큰나라는 신의를 보여야 하거늘 어찌 속일수가 있소이까바라건데 예전의 청대로 그를 죽여주십시오"

 

 

 

생긴지 30년 갓 지난 신생국가가

동아시아를 장악한 당나라의 임금한테

구라쟁이라고 꾸짓은거임;;

 

 

 

 

당 현종도 뻘쭘해서 당분간 발해에게 아무것도 못했으나

 

 

 

728 4,

왕위 계승자였던 대도리행이 당에서 갑자기 사망하게 되면서

 

 

당나라의 태도는 180도 변해버림.

 

발해에게 협박하기 시작하게 됨

 

"내가 지금껏 참아왔으나 너희 나라가 점점 기어오르는것 같구나

왕위 계승자도 죽은마당에 대문예를 후계자로 정하도록 해라.

한그러면 무슨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발해의 왕권 자체가 흔들릴수 있는 상황

 

무왕은 결단을 내려야 했음.

 

 

이렇게 당나라의 속국이 될 것인지

 

아니면 당에 맞서야 할지..

 

 

 

결국 무왕은 압록강으로 군사를 이동시키고

 

 

박작구라는 포구에 발해군을 집결시켰다.

 

 

당나라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무왕은 장문휴장군에게 당 정벌을 명하고

 

장문휴 는 수개월동안 군선과 군사를 정비해 출격 준비를 마쳤다.


 

 

 

732 9월 드디어 출격 명령이 내려졌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해외 원정이 시작된 것이다.

 

 

  

 

 

목적지는 중국 산동반도.(저기 당이라고 쓰여있는곳 바로 옆이 '장안'이라는 당나라 수도였음)

등주라는 지역이었다.

 

 

(등주의 모습 성 자체가 배를 정박하는 수성이라 전투하기 까다로움.)

 

등주는 당시 북방지역에서 가장 큰 항구로 무역의 거점이었고.

동시에 당나라 수군의 핵심 요충지였다.

 

(전국의 조선기술자들이 이곳에 집결했으며 물자를 들이고 군선을 만드는것 모두가 등주에서 이루어졌을 정도)

 

 

그런 요충지를 공격하는것은 매우 위험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큰 치명타를 줄수 있는 장소였다.


2부


장문휴의 등주 원정과 무왕의 마도산 전투



장문휴 장군은 선단과 군단을 정비 드디어 당나라 원정을 시작했다.



 

 

목적지는 중국 산동반도.(저기 당이라고 쓰여있는곳 바로 옆이 '장안'이라는 당나라 수도였음)

등주라는 지역이었다.

 

 

(등주의 모습 성 자체가 배를 정박하는 수성이라 전투하기 까다로움.)

 

등주는 당시 북방지역에서 가장 큰 항구로 무역의 거점이었고.

동시에 당나라 수군의 핵심 요충지였다.

 

(전국의 조선기술자들이 이곳에 집결했으며 물자를 들이고 군선을 만드는것 모두가 등주에서 이루어졌을 정도)

 

 

그런 요충지를 공격하는것은 매우 위험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큰 치명타를 줄수 있는 장소였다.



고구려를 멸망시킬때 출발했던 당나라의 함대 역시 이곳에서 출발했다.


 

발해군의 작전은 기습적인 상륙작전과 선제공격





732 9 5일 발해군은 마침내 등주를 침공했다.




 

 

 

 

 

 

 


 

그 결과 등주 일대의 군사와 행정을 총괄하던 등주자사 위준을 죽임

(포로로 잡은것도 아니고 그자리에서 죽여버림)

 

 

당황한 당 현종은 급하게 장수와 토벌군을 보냈지만 발해군이 다 전멸시킴;

 

 

 

 

결국 당나라는 

 



신라의 선덕왕(27대 선덕여왕과는 별개인물, 37대 왕)에게 벼슬까지 높혀주면서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발해를 공격해 달라고 부탁했고

 

 

 



 

당 현종이 직접 장수까지 지명해서 싸우게 함김유신 장군의 손자 김윤중)

 

 

 

 

 

 

신라는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발해를 공격하러 북상함.

(일명 빈집털이)

 

 

등주에 머물던 발해군은 부랴부랴 본토로 돌아오게 되고..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신라가 날씨를 핑계로 싸우지도 않고 공격을 포기함

(눈이 너무 많이와서 춥다고 고스란히 돌아감)

 

 

 

 

당은 발해를 직접 공격하기로 하고 비수를 뽑아듬.

 


 

대문예를 중심으로 발해 토벌군을 꾸려서 무왕과 맞서게 만든거임 

 

 

 

 

 

당의 장수가 된 대문예는 동족을 향해 칼을 휘둘렀고 명백한 반역자가 되버렸음

 

이에 무왕은 암살단을 조직해

대문예를 죽이도록 계획하여 당나라 낙양 한복판에서 암살을 시도함.

 

결과는 Fail..

 

하지만 당나라 도시 한복판에서 발해 자객의

암살시도가 일어난것에 빡친 당 현종은

 

발해의 자객을 모두 잡아 처형시킴

 

(이 결과 대문예는 발해 토벌에 겁을먹고 숨어버림

 

 

그리고 무왕은 다시한번 결단을 내리게 됨.

 

 

저번에는 해로를 통한 공격이었고

 

이번에는 육로를 통한  공격을 계획한거임

 

 

 

 

 

733

 

 

 

 

 

 

육로를 통한 공격바로 마도산 전투였음

 

 

이번에는 장수에게 임명하지 않고 무왕이 직접 친정, 친히 군단을 이끌고 당나라로 진격.

 

 

당나라는 마도산 일대를 지키기 위해 계속 군사를 파병했지만

 

 

파병하는 족족 왕이 직접 이끄는 막강 기병 발해군에게 발려버림


(밑빠진 독에 물 붙기)

 

 

(그것도 그냥 이긴게 아니라 한번 전투가 있을때마다 당나라군만 6000명에서 10000명씩 죽어남)


 한국역사국가중 회전에서 중국제국을 이렇게 대파하면서 학살한 경우는 유일, 고구려조차 관구검에게 회전에서 전멸당할뻔하고 수성전으로 변화

 

 

 

 

 

 

 

발해군과의 전투에 임했던 당나라 장수는 당시 전투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결국 마도산 일대의 당나라 군사는 모두 전멸했고

 

무왕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만리장성 부근까지 쾌진격한다.

 

발해군이 만리장성까지 육박한 상황에서

 

남은 당군의 생존자 수는

전면전도 할수 없을정도로 발해군보다 못 미쳤다.

 

결국 당나라 군은 발해군과의 전면전과 토벌시키려던 목적을 포기하고

 (토벌은 둘째치고 지들이 죽게 생겼는데ㅋ)

 

 

 

 

지형지물(마도산 일대는 돌이 많음)을 이용해 버티기에 들어갔다.

 

 

당나라군은 돌을 이용해

400리에 이르는 장벽을 쌓고 마도산에서 꼼짝 않고 버텼다.

 

 

 

 

 

한참동안 마도산에서 당나라군과 발해군은 대치하게 되고


회전에서는 동아시아의 패자였던 당나라군을 그야말로 학살하며 대파하던 발해였지만,

당나라가 돌성벽과 요새로 우주방어하자 고전하게 된다. (응? 뭔가 중국과 한국국가 전략이 바뀐듯한데;)


신생국 발해로서는 수십에 이르는 대군을 장기화 주둔하기 부담스러웠고,


당또한 일개 부족 추장국으로 개무시하던 발해의 막강한 군사력을 당한터라..



 

결국 당 현종은 무왕에게

발해를 개별 국가로 인정하는 것과

내정간섭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게된다.

 

 

그 결과 발해는 당의 영향을 받지 않은 발해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으며

더불어 70년 뒤 발해는 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최 전성기 당시 발해는 해동성국이라 불리게 됨)

 

 

 

그리고 등주 공격을 계기로 741년까지 흑수말갈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지 못했다.

무왕은 당시 최강대국 당나라를 상대로 전쟁도 마다치 않는 정책을 펼침으로써당나라가 발해를 결코 얕잡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마무리: 736년 무왕과 당나라는 서로 화해하게 되고 737년 무왕의 아들인 대흠무가 3대왕에 오르면서 당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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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발해 건국자 대조영이 죽으면서 당나라가 발해한테 빵셔틀 하라고 협박함

빡친 무왕이 선제공격함(한민족 역사상 최초의 해외원정이자 전쟁시기도 아닌 평화시대에 선제공격이었음)

결국 당나라가 발해 인정하고 발해는 고유의 문화를 키울수 있었음

 


 

 

 

자료참고 : 한국사 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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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령목 2014. 2. 27. 12:55

사실 수시가 1달 앞으로 다가오고, 자소서 쓰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어서 후기를 쓰기가 굉장히 귀찮았다. 

사진도 올리기가 귀찮다.

그래서 간단하게 후기만 쓰고 마치겠다.


한반도 전국토에 발자국을 남기셨던 우리학교 지리선생님이 단 한번도 밟지 못했던 땅, 울릉도. 그리고 독도.

난 운이 좋았던지 2번씩이나 밟을 수 있었다.

게다가 천운이 따라야 들어갈 수 있다는 독도땅을 두번씩이나 밟은 것은 올 한해의 운을 다 썼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나 올해 대학붙어야 하는데. 여기에 쓰면 안되는데.

내 신조는 '유지경성', 하고자 하는 뜻이 있으면 모든지 이루어진다.이다.

그런데 내 인생은 '새옹지마'이다. 인생은 정말로 시소처럼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이 이 인간의 삶이다.

올해도 그렇다. 작년에 골든벨에서 대박터진 후로 나는 쭈우우우우우욱 운이 없었다. 

그래서 '아, 이렇게 계속 운이없으니까 대학 가는 날에는 운수 왕창 터지겠구나.'라며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독도 홍보대사 붙었다네? 독도 우수홍보대사로 레벨업  했네? 1년 50일밖에 못밟는다는 독도 땅 밟았네? 그것도 모자라 길어야 1시간, 그것도 선착장에서 머물 수 있다는 독도를 1시간 30분동안 있다가 산까지 타고 돌아왔네?

인생사 새옹지마. 하필 수시 1달전부터 이렇게 운수가 왕창 터지니 불안하다.

난 망했어. 재수할거야. 이런 재수없는 인생. 아니, 재수 없으면 대학 붙는건가.

아니, 불안하지 않다. 나는 적어도 이 운수가 2달은 지속될거라 믿는다. 그래야만 한다. ㅜㅠㅜㅠㅜ

그러하다.


경악스러운 성비에 놀라, 또 고3이라는 신분때문에 심각하게 캠프에 참여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도 했지만 고3의 마지막 추억을 만들기위해 결단을 내렸다. 

솔직히 말해서 지방에 사는 대원들보고 '아침 8시 30분까지 포항으로 모이세요'라고 간단하게 공지가 올려져있긴 했는데 처음에는 말이 되는 소리인가? 화낼뻔했다.

일단 나는 대구에 살고 있기때문에 포항까지 빠르면 1시간 이내로 갈 수 있지만, 경북권에 사는 아이들은 정말로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부지런히 걸어와야 했다.

수도권에 사는 아이들은 그래도 자정이 다되가는 시간에 미리 모여 같이 버스타고 오는거라 늦을 일 없겠지만 만약 여기서 낙오자가 발생한다면 나는 분명 그것은 영남권 아이가 될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포항에 와보니 서프라이즈. 한명도 빠짐없이 다 왔네. 한명이 지각을 하긴 했는데 알고보니 울릉도 사는 아이.

울릉도 살면서 포항까지 배타고 와서 울릉도로 다시 가야하는 불쌍한... 아이가 아니라 그냥 포항에 있는 고등학교에 유학온 아이란다. 포항에 있으면서 왜 늦었을까.


내 조는 4조였다. 미리 조원들의 블로그를 통해서 대충 어떤 분위기의 아이일까 파악은 해두었지만 실물과 모자이크가 되어있는 블로그 속 사진은 달랐다.

나 이외의 유일한 남자아이는 훤칠하게 생긴게 넌 분명 대성할거라 믿었지만 나머지 여자아이들은 이른 아침부터 생기가 넘쳐보였다. 어색해서 딱히 그 아이들과 말은 할 수도 말을 걸 수도 없었다. 여자는 참 붙임성이 좋은 포유류라는 것을 느낀 것이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텐데 벌써부터 1년은 함께 지낸 동급생처럼 친해져 있었다. 난 절대 저 속에 들어가서 어울릴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충격적인건 발대식때 영어를 쓰기에 한국어 한마디도 못할 줄 알았던 조장 글로리아 누님께서, 아니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학교 젬마선생님처럼 안녕하이쉐여~라고 발음할 줄 알았는데 완전 플로언트리하게 코리안을 스삐킹 하셨다. 어쩐지 한국말 못하면 조장이 될 수있을리가 없었겠지. 

그나마 동변상련을 느끼던 남자아이는 운좋게 야구를 좋아한다는 공통분모를 찾아 편했다. 마침 TV에서 류현진 메이저리그 선발등판 경기를 보여주고 있었기에 그 어색함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게 다행이었다.


 간단히 쓰려고 했는데 벌써부터 글이 길어질 전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도 바쁜건 매한가지인데 하루종일 자소서 쓴다고 멘탈이 붕괴된 상태라 내가 무슨말을 적는지도 모르겠다. 에라, 쓸 수 있는데 까지 써보자.


 배 안에서 나는 우리조 남자아이(건호)의 옆자리에 앉았다. 포항에서 울릉도까지 3시간. 그 3시간동안 무엇을 하란 말이오.

 우리 옆좌석에는 3조의 남녀가 앉아있었다. 그런데 이미 면식이 있어보이는 지 상당히 친해보였다. 어쩌면 조금 소란스러운 감도 있었지만 차라리  말없이 3시간을 지내는 것보다는 몰래 그 아이들의 대화내용이라도 엿들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말을 트게 된지는 모르겠는데 어느새 그 아이들과 꽤나 친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남들 다 자는데 우리끼리 떠들어 대는게 참 볼만했을거란 생각이 든다.

들어보니 둘다 영남권 아이들이란다. 참고로 건호는 전주아이인데 국사교과서에 나온다는 신흥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란다. 그리고 얘들은 나와 클래스가 다른 것이 난 정말로 평범하디 평범한 어쩌면 평균 이하일지도 모르는 고등학교에서 왔는데 왜 하나같이 명문이고, 사립들인지. 기가 빠질 지경이었다.

3시간은 길었다. 그 중 한 2시간은 그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 사용한 것 같다. 나머지 1시간은 어디에 썼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울릉도에 도착했다. 밥먹고 한일은 걷기. 걷고, 걷고, 또 걸었다. 물론 다른 것도 했다. 워킹 앤드 워킹.

독도 박물관까지 걷기만 했다. 이것은 마치 마라톤을 방불케 했다. 햇볕을 쨍쨍 모래알... 아니 콘크리트 곱게 포장된 울릉도 길거리는 반짝한 날이었다. 예전에 울릉도에 왔을 때 한번쯤은 걸어봤던 코스. 난 유경험자에 대구 촌놈이라 체력이 남아돌아서 선두그룹에서 걸었다.

어쨌든 걸었다. 딱히 적을 것도 없게 그냥 걸었다.

대충 몇분 기다리고 보니 결국은 다 도착하더라.

독도박물관은 달라진 게 없었다. 여기서는 무슨 독도박물관을 관람하고 느낀점을 적어야 할텐데 귀찮으니 생략하겠다.

안그래도 멘탈이 붕괴된 상태인데

"독도박물관에 갔다와보니 일본에 대항할 수 있는 많은 사료들이 전시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일본이 직접 그린 한국령 독도지도, 그것을 본 순간 나는 가슴이 울컥하기 보다는 오히려 짜증이 났다. 아니 이렇게 많은 증거들이 버젓이 전시되어 있는데, 도대체 일본은 어떻게 저리 뻔뻔하게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증거가 하나씩 둘씩 발견될때마다 한걸음씩 물러서는 그들이 가증스러웠다. 그들이 하는 말에는 모순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화가나는 것은 그런 일본을 등진 채 세계를 향해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는 우리의 신세가 처량해보였다.'

라고 설명하기엔 나는 너무 피곤하다.


다음에는 무엇을 했을까. 아, 케이블카를 탔다.

케이블카 선을 따라 쭈욱 올라가서, 이번엔 산을 탔다. 아니 산이라 하기엔 조금 민망한 오솔길을 타고 조그마한 정자로 들어가서 포토타임.

여기서도 관람평을 날려주자.

'울릉도의 전경은 아름다웠다. 옛날에 한번 울릉도의 땅을 밟았을 때 나는 이곳을 동해바다의 제주도라 칭한 적이 있었다. 세계적인 관광지 제주도와 비견될 절경이 눈앞에서 펼쳐있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할까. 그래, 옛사람의 말이 떠오른다. 이게 울릉도여, 그림이여? 저 먼 바다에서 거센 파도를 가르며 달려오는 배가 내 눈에 포착되었다. 그 모습이 아름다워 사진으로 남겨보았다. 저기 멋진 절경이 보인다. 그것도 사진으로 남겨보았다. 그냥 한걸음 발을 뗄때마다 사진을 찍었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 찍고 또 찍고, 마구 찍어댔다. 그정도로 울릉도의 풍경은 멋졌다.'


그리고 리조트로 와서 휴식시간.

은 개뿔 바에 짐만 놓고와서 그딴 거 없이 다음 특강을 진행했다.

전에도 한번 와본 적 있는 리조트였는데 울릉도에서 가장 좋은 리조트인가 보다. 그림같은 집들이 널려있었다.

말로만 듣던 언덕위의 하얀집들이.


특강은 길 수도 짧을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반크 단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이소라님의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동영상 한두편을 보았던 것 같다.

 이 내용을 토대로 우리는 PT발표를 해야했다. 

위안부와 독도에 관한 홍보전략, 또는 대응전략을 조원들의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보라는 것이었는데

우선 조 이름부터 정하란다.

나는 부끄러움이 많은 소년이라 말을 아꼈다.

그런데 다른 조와 비교되게 우리 조는 너무 조용했다. 오늘 아침에 보았던 그 파릇한 모습들은 어디가고 모두가 입에 재갈이라도 문듯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다못해 내가 그냥 한마디 툭 던졌는데 그게 조 이름으로 결정될 뻔했다.

에라이 부끄럼쟁이들.

내가 한번 물꼬를 틀자, 그제야 아이들도 조금이나마 말을 뱉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 이름은 'Team 4Tune'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문제는 PT발표인데.

다행이 글로리아 누님께서 우리조를 이끌어가서 몇개의 방안을 건져낼 수 있었다.

나도 그 대화에 끼고 싶었는데, 아니 나보다 어린 아이들이 나보도 경험은 더 많아서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앉아있었다

괜히 주눅들어서 안그래도 소심한 소년, 그냥 투명인간이 되고야 만것이었다.

그런데 그 대화내용을 토대로 PT자료를 만드려니 그것도 문제였다.

애들이 말을 안해.

사실 나한테 아이디어는 많았다.

옛날에 캠프 갔을 때 어떤 조에서 싸이월드형식으로 자료를 꾸미길래 저거 참 기발하구나 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페이스북이 인기니까 그런 형식으로 써보자.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냥 말을 삼켰다.

그런데 건호가 얘기해주더라. 아이고 예쁜 녀석. 넌 꼭 대성해라.

왜이렇게 우리조는 소심한 것일까. 모두가 거의 손놓고 있는 듯 했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반의 반도 완성하지 못했다. 그런데 10분을 남기고 갑자기 조원들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그걸 완성시키는 모습을 보고, 이 아이들은 참 무서운 아이들이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막상 만들고나니 내용이 생각보다 부실해보였다.

그리고 발표.

끝.

'아직은 어색한 조원들과 협력하다 보니 멀기만 했던 거리감이 조금이나마 좁아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하나의 결과를 만들고 나니 뿌듯하긴 했지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적극적이었다면 분명 우리가 1등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너무 급조하다 보니 부실했다. 그릇도, 그안에 담긴 내용물도 너무 부실했다. 물론 그날 가장 참여율이 저조했던 내가 할말은 아니었지만 아쉬운 마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슨 꿈씨앗 적는 시간이 있었는데 여기서 난 상처를 받았어. 반크 누님에게 무시당했어. 흐허어라미아ㅓㅎ

무안하고 뻘쭘했다. 저주까진 아니더라도 원망할테다. 

근데 다음날 싹 잊음. 나중에 사과를 하시길래 심술을 부렸는데 갑자기 미안해져서 별거 아니었다고 나도 사과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이거 쓸 시간에 자소서 한줄이나 더 볼걸. 퇴고는 중요하니까. 그런데 벌써 1시간이 지났다. 젠장.


다음날.

독도갔다.

자 지금부터 계산을 해본다.

독도사관학교 7만명

그 중 발대식 참여자 280명

그중 우수 활동자 45명인데 그중 고등학생 29


7만명 중에 280명 중에 29명에서


1년 365일 중 독도에 갈 수 있는 날이 50일. 그중 독도까지 가는 배가 운항하는 시기를 반타작 해서 대충 25일.

그리고 독도땅을 밟고만 나오는 경우가 다인데 서도 봉우리까지 다 오를 확률

길어봤자 1시간을 정박할 수 있는 독도에서 1시간 30분을 정박할 수 있는 확률.


정리해서 7만명 중에 280명 중에 29명이 365일 중 독도에 갈 수 있는 날 50일 중 배가 출항하는 25일 중에서 운좋게 서도 봉우리까지 다 올라 독도경비대장과 사진을 찍고 1시간 30분동안 포토타임하면소 놀 수 있는 확률은?[10점]


한마디로 나는 운이 좋았다.

독도, 한 두번쯤 와보니까 우리집 안방처럼 지낼 수 있을 정도였다.

아, 참고로 우리집 안방은 덥고 불편함.


'독도대교.

 나는 독도와 상관없는 아이일거라 생각했다. 독도의 파도는 항상 거칠다. 독도가 사람을 허락하는 시간은 고작 50일. 어쩌면 그 독도의 폐쇄성이 나를 독도에서 멀어지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TV에서 나는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말을 들었다. 사진으로 독도라는 아름다운 섬 하나를 보았다. 들리는 말로, 독도는 천연의 모습을 간직한 천해의 섬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나는 독도를 내가 갈 수 없는 이상의 섬, 유토피아로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독도의 땅을 밟았다. 독도와 상관없을 줄 알았던 이 아이가 염치없게 독도의 모래향를 맡아낸 것이었다. 독도는 작은 섬이었다. 내 의식속에서 무시당하던 그저 유토피아로 생각했던 그 섬은 거센 파도를 견뎌내던 조그마한 섬이었다. 그리고 살벌했다. 독도의 바닷바람에 털끝하나 움직이지 않는 경비대원들이 마네킹처럼 서있었다. 햇빛을 받으며 파도에 찰랑이던 독도는 생각보다 작았다. 

 내가 관광을 하러 온 것일까? 분명 그 순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한번 기억을 되씹어보자. 나는 독도관광이라는 빛에 묻혀 언제쳐들어올지 모르는 적을 대비하던 그들의 이면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국민적 무관심으로 방치된 독도를 미처 발견해내지 못했다. 독도경비대장과 사진을 찍었다. 사진 한장 찍어달라는 우리의 간곡한 요청에 잠깐 당황한 모습을 하던 그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서도를 한바퀴 돌다보니 이름조차 기억이 안나는 작은 등대를 만났다. 그곳에 올라 사진을 그저 아이마냥 좋아하며 사진을 찍어댔다. 그런데 경비대는 우리에게 간곡히 요청해왔다. 그것은 공개되서는 안되는 곳이니 사진을 삭제해달라. 내 독도의 추억이 담긴 사진을 지워달랬다.

 왜? 아직 독도는 전쟁중이었다.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도 일본이라는 거대한 적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왜 독도에서는 그것을 몰랐을까? 그것을 왜 독도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지금이라도 나는 그들에게 머리숙여 인사한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독도에서 멀리 떨어져있다. 독도. 홀로 독(獨)에 섬 도(島). 외로운 섬 독도. 그 이름 그대로 독도는 항상 홀로 적들과 맞서싸워왔다. 하지만 우리는 몰랐다. 독도가 수백만년을 거친 파도에 저항해 왔다는 사실도, 일본과 한국이 독도의 두 팔을 붙잡아 서로의 진영으로 끌어당기기 위해 애쓸동안 사지가 끊히는 고통으로 신음해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몰랐다. 우리는 그저 편안한 육지에 턱을 괴고 앉아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실천없는 말뿐으로 독도를 응원하고 있었다.

 독도와 울릉도, 울릉도와 한반도는 끊어져있다. 하지만 다리를 놓자. 울릉도에서 독도로 이어진 우리들의 다리를 놓자. 그 이름 독도대교. 우리의 관심으로 쌓아올린 다리를 놓자. 그 다리를 건너 오늘도 묵묵히 독도를 수비하고 있을 우리의 영웅들에게 꽃다발이라도 전해주자. 외로운 우리의 막내 섬, 독도에게 잘 지내냐고 안부인사라도 전해져보자. 그렇게 독도대교를 쌓아보자.'


와서

연극했다.

우리가 미래에 바라는 꿈을 이루었다고 가정하고 독도와 위안부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해볼지 생각을 해보란다.

오늘은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 볼테다.

오늘따라 조원들도 유난히 참여율이 높았다.

그래 우리 한편의 드라마는 못쓰더라도 적어도 삼류연극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 아니겠는가.

PT는 못하면 그냥 졸작이라 치면 되지만 연극은 못하면 평생의 혹역사가 된다.

내 오그러지는 손발을 펴기 위해서라도 나는 열심히 참여했다.

우리조의 멤버는 화려했다.

주한 외교대사, 백수 큐레이터(그건 바로 나), 국제 판사, 대기업 CEO, 역사학자, 외교관, 검사 겸 대통령 비서 겸 해설자, 그리고 대통령...!!!

내 기억으로 독도 문제를 해결하는 우리의 해결책은 이것이었다.

우연히 지도조각 발견해서 국제 제판에서 일본에게 승소함.

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결국 드라마를 써냈다.

한편의 막장 드라마.


롤링페이어 돌리고 끝났다.

사실 난 아직 이름도 못 외웠는데 사실 지금 이 글을 쓰고있는 시간에도 난 너희들 이름 다 못외웠어. 미안하다.

그때는 아직 어색해서 네들 성향을 파악하지도 못해서 좋은 말 쓰지 못해서 미안.


그렇게 둘째날의 밤도 저물었다.

아 사실 독도 감상문 쓸 때, '독도대교' 이거 쓰고 싶었는데 정리가 안되서 포기함.


마지막 밤이라 치킨이라도 시켜먹으려 했더니 그게 안되서 과자 한 1만원치 사서 건호랑 함께 밤을 지새웠다.

내가 몇번이고 말하지만 넌 대성할거야.


마지막 아침이 밝았다.

에헤야디야.

드디어 후기도 끝이 보이는구나.

근데 마지막 날은 적을게 없음.

배타고 관광함.


그렇게 울릉도에서의 2박 3일은 끝이났다. 끝나는게 못내 아쉬워 번호교환을 한 친구들도 있었다. 아마 카톡게임의 초대장이 날아오겠지. 난 참 운이 좋은 아이다. 제주도도 평생에 1번밖에 가보지 못했는데 남들 못가본 울릉도 독도의 땅은 2번씩이나 밟아보았다. 난 참 운이 좋은 아이다. 그래서 이 운이 수능때 까지 이어질것이라 믿는다. 우리의 동쪽 끝 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 독도의 기운을 받아 난 아마 대성할 거야.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고 간 울릉도여, 영원하라





by 초령목 2013. 8. 18. 02:39
by 초령목 2013. 8. 11. 20:14

*나주전투(909)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로 굳혀진 판도는 후삼국시대로 정립된다. 후고구려와 후백제는 패권을 다투며 국지전을 펼친다. 이 와중에 왕건은 나주를 재차 공격하면서 허를 찌른다. 진도와 고이도를 공략한 왕건은 더 깊숙이 내습하며 견훤의 배후를 뒤흔든다. 그러자 견훤은 수군을 이끌고 왕건을 압박, 수적으로 불리했던 왕건군은 한때 수축되지만 왕건의 지휘 아래 움직인 수군은 화공을 펼쳐 후백제의 수군을 격파시킴으로서 백제의 배후를 계속 교란할 수 있게 되었다.


*공산전투(927.9)
견훤은 신라 급습하여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죽이는 쾌거를 이룬다. 그러자 왕건은 신라의 구원 소식을 받고 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급히 출동한다. 그리고 왕건은 견훤이 돌아가는 길목을 지키다가 견훤을 기습하는 전략을 세운다. 공산 동수를 지키고 있던 왕건은 견훤의 군대를 만나자 기습하였으나 오히려 견훤의 군대에게 전멸당했으며 장군 신숭겸은 왕건을 구하고 전사, 이외 김락 등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대승을 한 견훤은 이후 고창전투 이전까지 고려를 압도하게 된다.



*고창전투(930.1)
견훤에게 번번히 패하며 밀리고 있던 왕건은 고려의 고창성이 견훤에게 포위되자 다시한번 견훤과 일전을 맞는다. 한 달을 넘기며 계속된 전투는 왕건에게 점점 불리해졌다. 그때 고창의 호족 김선평, 권행 등이 고려를 지원하면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된다. 이로써 견훤의 군대는 참패하고 이 격전으로 8천명이 전사, 참모 김악 등이 잡히고 말았다. 이 전투 이후 다시 전세는 역전되어 왕건이 후삼국의 패권을 잡게된다.



*운주성 전투(934.9)
전세가 점점 왕건쪽으로 기울면서 왕건의 공세는 더 거세진다. 왕건이 운주성을 공격하자 진훤은 
갑사 5천을 이끌고 운주성에서 맞섰다. 견훤은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위해 휴전을 제의했으나 왕건은 거부, 오히려 유금필에게 기병을 보내 견훤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그 결과 휴전을 노렸던 견훤의 군대는 격파당했고 3천명이 전사, 견훤의 참모 종훈, 의사 훈겸, 용장 최필, 상달이 생포되었다. 이로써 왕건은 패권주도를 더욱 굳혀나갔고 더불어 통일의 승기를 잡게되었다.


*일리천 전투(936.9)
견훤을 쫓아내어 왕위를 얻은 신검은 후백제의 다수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노린 왕건은 항복한 견훤을 위시하고 국가의 총력을 다해 일리천에서 국운을 건 일전을 벌인다. 왕건의 군대가 8만명이 넘었을만큼 후삼국역사상 가장 많은 대군을 동원한 통일전투는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전투는 견훤을 내쫓은 신검에게 불만을 품은 장병들이 고려에 항복하면서 신검의 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고 결국 신검이 항복하면서 전란은 끝이 났다.

by 초령목 2013. 7. 6. 17:41

http://www.youtube.com/watch?v=TCL94-MsxYc#at=40

by 초령목 2013. 7. 4. 17:05

 

 

반야바라밀다심경

 

 

보이는 모든 것들이 끝없이 공하고 또 공하도다

우리가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름다운 여인이

찰나의 순간에 늙고 병든 모습의 노인으로 우리앞에 다가설 것이다

그를 뛰는 심장과 충혈된 눈빛으로 바라보는

스스로도 영원하지 않으니...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중에 수년 아니,

몇시간뒤에 존재하지 못할 것이 수없이 많으니

대체 어떤 것이 존재한다 할수 있을까

 

 

 

한시간 전에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니듯

눈앞에 보이는 것들은 진실로 존재한다 할수 없을 것이다 

대체 어느때 나를 나라고 할 것인가

 

 

 

나라는 관념도 다분히 공한 것이니

모든 것이 공하다 한들 어찌 틀리겠는가

 

 

 

내가 있다

 

네가 있다 

 

 

어떤 물건이 있고 그것이 탐이 난다 하는 것도 공한 것이다

하지만 올곧게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자가 있으니 그 또한 나이다

 

 

 

나...

내가 없다면 우주가 어디 있는가


 

 

 

 

 

들판의 파릇한 풀잎냄새를 맡을 내가 없는데

풀잎은 어디 있는가

 

 

 

나는 있으되 없고 없으되 있으니 그 까닭은 이러하니라
만물은 한순간도 그대로 있지 않고 스스로 변하니

한 순간 전에 우주가 이미 그우주가 아니다...

그때 보이는 그것이 영원하다 믿는 아집이 어리석음이다

 

 

 

 

모든 것이 찰나찰나 다투는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꽉찬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순간도 고정됨이 없었으니
내가 풀잎을 볼때 내가 없다면 그때의 풀잎도 없었듯이
세상에 진실로 나아닌 것은 하나도 없구나

 

 

 

내가 너를 느낄때 내가 없다면 어찌 네가 있는가
나없이 너없고 너없이 나없으니
진실로 세상에 나아닌것은 없어라

 

 

 

 

쥬라기 빙하기 신석기에도 나는 있었으니
모습이란 한순간도 고정됨이 없으므로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르지만
나는 있었노라

 

 

 

 

어린아이때의 나를 어찌 나라고 할수있으며
어른이 된 나는 또 뒷날의 내가 될수 있으랴
그러나 분명 그때에도 분명히 나였으니
나는 순간에 살아도 영원한 이치이다

 

 

 

 

 

 

 

나없으면 이 광활한 우주가 아무런 소용이 없듯

나와 우주는 이미 상대적이다

 

 

세상에 나 아닌 것없고 
나는 또 없으니...

 

 

 

한가지에 매인 정신으로
눈앞에 보이는 그때가 전부인 것으로 여기는 
어리석은 중생이 안타까워라

 

 

2천년전 예수 지금은 이미 다른 존재일 것인데
예수에 목매도 부처에 목매도 어떤 것에 목매도 마찬가지니라

이 모든 우주를 내 마음하나에 다 가득 담을수 있으니

 

 

 

 

우주가 나요 내가 우주요 

내가 너요 네가 나니라

 

 

 

인연따라 모든것이 마음안에서 순환되거늘
2천년전의 떡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오천명 먹인 이야기를 왜 지금 하는가

 

 

 

세상에 신기할 것이 무에 있으며 기적아닌것은 어디 있는가

오병이어가 기적이라고 찬탄할필요없이
59조 8천억톤짜리 내가 서있는 이땅이 
초속 30km의 각속도로 돌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고 
꽃이 피고 새가우는 이또한 기적이라

 

 

 

 

울며 기도하지 말고
고요히 눈감고 안으로 들여다 보라
그러면 네안에 우주가 보일 것이니

 

 

 

이천년전 오병이어의 재주가
신기하지 않으리라

 

 

 

울며 기도하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야

 

 

중생아 어찌 네가
내 말을 이해 하랴마는

네가 나와 인연있다면
언젠가 내말을 알아듣고
스스로 네안을 들여다 봄으로서
너를 찾게 되리라

 

  

깨어야할 미망이여....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우리 함께 피안으로 가자

 피안에 도달하였네. 아! 지극한 깨달음이여 영원하라.

 

by 초령목 2013. 7. 4. 14:57

5월 30일

1년 전, 같은 대회에서 우수상 타고 KBS출연한것에 힘입어 이번에도 용돈이나 벌러 나오자는 생각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1번문제에서 탈락.


1번 문제가 OX문제였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계속 상해에 있었다.'


사실 나는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임시정부의 마지막 거점이 '춘칭'이라는 것정도는 상식이었거든요


그런데 내 주위의 답들은 보니 전부 O.


물론 역사에 대해서는 나 자신을 믿었어야했는데 군중심리에 휩쓸려 탈락.


EBS 다큐프라임 중 인간의 심리편에서 남들이 전부 잘못된 답을 말하면 자신도 거기에 휩쓸리는게 인간의 심리라고 했는데


내가 그런 사람일줄이야.


패자 부활전에서 부활했는데 또 떨어졌습니다.


이건 의외의 문제라 뭐라 변명할 여지는 없었지만


그런데 다른문제들은 다 쉽더라.


아쉽다.

by 초령목 2013. 7. 2. 13:00

http://news.kbs.co.kr/news/NewsView.do?SEARCH_NEWS_CODE=2683473&ref=A


<앵커 멘트>

얼마 전이 6.25였는데요, 성인의 3분의 1이상, 청소년의 절반 이상이 6.25가 몇 년도에 일어났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삼일 운동을 삼점일 운동이라고 읽는 학생들도 있다고 하는데요,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을까요? 

어른들의 책임은 없는지도 짚어보죠, 노태영 기자와 함께 합니다. 

어떻게 보세요? 

<기자 멘트>

현재 고등학교 3학년 학생 대부분은 학교에서 한국사를 배우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로 수능시험에서 한국사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학업 부담을 줄여준다며 지난 2005년부터 한국사를 수능에서 필수가 아닌 선택과목으로 바꿨기 때문입니다.

이러다보니 수업이 소홀해지고 수업이 소홀해지니 재미를 느끼는 학생들도 점차 줄 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때문에 역사에 대한 기초 상식조차 사라졌다는 비판이 강하게 일고 있는데요, 그 실태를 알아봤습니다. 

<리포트> 

<녹취> “대한민국 국보 1호가 뭔지 아세요?”

젊은이들의 역사 지식을 알기 위해 기초적인 질문을 해봤습니다.

<녹취> “숭례문” 

<녹취> “숭례문 맞아? 동대문” 

<녹취> “나는 그냥 찍었어.”

<녹취> “똑같은 거 아닌가?” 

<녹취>“조선은 누가 건국을 했는지 아시나요?”

조선 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를 모르는 학생도 많습니다. 

<녹취> “갑자기 물어봐서 당황해서 기억이 안나요.”

올해로 정전 60주년을 맞는 6.25 전쟁. 

지금도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채 살고 있지만,

<녹취> “한국 전쟁이 몇 년도에 발발했는지 아세요?” 

<녹취> “1951년으로 알고 있는데요.”

제국주의 침략 야욕의 상징인 일본의 욱일승천기, 그에 짓밝혔던 처참한 역사도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녹취> “무슨 생각이 드세요?” 

<녹취> “이거 뭐지? 그냥 예쁜데요. 이 가방 파는 거예요?” 

<녹취> “세 분 중 한 분의 손입니다. 누구 손인지 아세요?” 

<녹취> “알아요. 안중근 의사.” 

<녹취> “그렇다면 안중근 의사가 뭘 했는지 아세요?” 

<녹취> “도시락 (폭탄)?”

이처럼 도를 넘어서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 젊은이들의 역사 의식.

실제 한 고등학교를 찾아 역사의식에 대한 검증을 실시해봤는데요. 

<녹취> “도전, 역사”

<녹취> “골든 벨~” 

<녹취> "우리나라는 언제 광복했을까요?"

우리 현대사의 아주 중요한 사건이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학생들이 눈에 띕니다.

<녹취> “모르겠어요. 몰라서 바로 못 적었네요.”

모른다기보다 생각이 나지 않은 학생들.

1947년, 1948년 등의 오답들이 속출합니다. 

<녹취> “뭔가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잘 모르겠어요.” 

<녹취> “신라시대 장군으로 사자인형을 만들어 우산국을 점령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난이도를 조금 높여 신라장군 이사부를 묻는 질문에는 계백 장군과 강감찬 장군 등 오답자가 속출 합니다. 

<녹취> “이사부입니다.”

이런 현실, 전적으로 학생들의 잘못만은 아닙니다.

역사 교육의 현실, 무엇이 문제인지 또 다른 고등학교를 찾아가봤는데요.

수업 중인 과목은 한국사입니다. 진지하게 수업을 받고 있지만 이런 시간도 일주일에 고작 2-3번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저학년때 한 학기 만에, 길어야 1년에 몰아서 가르칩니다.

2011년부터 시행해온 집중 이수제 때문인데요.

게다가 내년부터는 모든 대학 입시에서 한국사 필수가 사라지기까지 합니다.

현재도 한국사는 수능 필수 과목에서 제외된 상태.

선택과목에서 한국사를 선택한 학생은 몇 명이나 되는 지 알아봤습니다.

한 학급 총 38명의 학생들에게 실제 수능 때 어떤 과목을 선택할지 두 과목만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사회탐구 과목은 한국지리, 한국사, 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 등 모두 10개 과목인데요.

조사 결과를 보면 윤리와 사상이나 생활과 윤리를 선택한 학생들이 가장 많은 반면 한국사는 단 5%에 불과했습니다. 

<인터뷰> 방예림(서울 예일여고 2학년) : “어려워요. 힘들고요. 범위가 너무 많아서 이해가 안 가요.” 

<인터뷰> 손지원(서울 예일여고 2학년) : “우선 고등학생들은 대학 가는 것이 중요하니까 필수 과목이라고 하면 무척 열심히 공부할 것 같아요.” 

<인터뷰> 윤경수(서울 예일여고 한국사 교사) : “자국의 역사를 선택 과목으로 만들었던 적은 1930년대 이후(일제강점기 이후)에 처음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각 학교에서는 학교 밖 역사 공부를 통해 이를 보완하려는 노력을 펼치고 있습니다.

순국선열들의 아픈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역사 현장,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인데요.

현장 답사를 통해 교과서 안에만 있던 역사의 사실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습니다.

<인터뷰> 길보경(서울 예일여고 3학년) : “생각보다 너무 잔인해서 놀랐고 과거에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이렇게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것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실제 눈으로 보고 느끼면서 관심과 애정도 강해져 학생들이 역사를 통해 갖게 되는 자존감이 높아진다고 하는데요.

현장 체험은 심각해져가는 역사의식의 부재를 막을 좋은 교육 방법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인터뷰> 이다솜(서울 예일여고 2학년) : “교과서에서만 보다가 박물관에 와 보니까 좀 더 슬픈 감정이 느껴지고 여기 와서 좀 더 애국심이 생긴 것 같아요.”

대구의 한 학교 학생들은 올바른 역사 알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관심을 높이는 것이라며 거리에서 책자를 나눠주기도 합니다.

학생들이 현장 답사를 통해 알게된 지식들을 책으로 펴내고 이를 시민들에게 무료로 나눠주는 겁니다. 

<녹취> "대구 와룡고 역사논술동아리에서 학생들이 직접 쓰고 편집한 조선족에 관한 책이거든요. 관심 갖고 봐주세요."

<인터뷰> 류길상(대구광역시 달성군) : “알 거 알아 가는데 기특하기보다는 당연하죠. 못하는 학생들이 더 이상하죠.”

<인터뷰> 박수진(대구 와룡고 1학년) : “요즘에 사람들이 역사에 대해서 관심 많은 사람들도 있지만 아예 관심이 없고 잘 모르는 경향이 드러나기도 하잖아요. 여러 사람한테 우리나라 역사를 가르쳐 준다는 것이 정말 보람 있는 일인 것 같아요.”

<인터뷰> 권내현(고려대학교 역사교육학과 교수) : “경제 성장과 더불어서 역사에 대한 이해가 동시에 이루어져야만 이것이 우리 사회를 바르게 성장시킬 수 있는 방향이 될 수 있겠는데요. 역사 교육이나 사회적인 관심도 이런 부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

다른 어떤 나라보다 아픈 역사를 품고 사는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말인 것 같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도 나왔습니다.


역동 별명 생겼네..


역인부. 


역사인식부족부

by 초령목 2013. 7. 2. 12:56



나참 살다보니 이런일도 다 있군요


7만명 중 280명만이 독도홍보대사 발대식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고

280명중에 100명만이 독도홍보대사로 합격했고

그 100명중에서 고등학생 20여명만이 독도에 가게됬는데


그게 나에요


그런데 독도를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게 됩니다.


내가 고3이라는 것때문에


by 초령목 2013. 6. 9.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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