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청소년기의 마지막 목표들 중 하나를 달성했다.


1. 도전 골든벨 본선진출

2. 글로벌 독도홍보대사

3.경희대 창의적체험활동전형 합격


2번 달성.

물론 3번이 가장 어려워보이지만...

3번 작년 경쟁률보니 20:1


하지만 오늘 70000:280, 즉 250:1의 경쟁률을 뚫고 홍보대사로 합격

무서울게 뭐있는가


부딪히면 되겠지.


by 초령목 2013. 4. 9. 23:13

글을 쓰면서.

 중국의 60개 왕조 평균 존속기간은 64년으로 마지막 환갑잔치를 지낸 후 단명하게 된다. 한나라 이래로 중국 역사상 가장 길게 존속했던 국가는 청나라로 그 기간은 고작 296년에 불과하다. 우리에게는 친숙한 당나라(289년), 명나라(276년)도 300년을 넘지 못했으며, 60개 왕조 중 100년동안 존속했던 왕조는 단 12개왕조(전한, 후한, 동진, 북위, 당, 북송, 요, 남송, 금, 원, 명, 청)에 불과하다.

 이것은 비단 중국왕조의 특수성이 아니었다. 유럽에서 유일하게 500년을 살았던 에스파냐 왕조를 포함하여 전세계적으로 500년 이상 존속했던 국가는 단 3개. 아니 500년이란 이름이 개이름도 아니고!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세상에서 500살이나 먹는게 가능한 일이겠냐고!

 하지만 이제 우리의 눈을 밖에서 안으로 돌려볼 필요성이 있다. 우리나라의 왕조들을 보자. 그러면 우리나라의 위대함에 감탄을 자아낼지도 모른다. 기억해보자 고려가 존속했던 중에 중국에서는 왕조가 3번이나 교체되었고, 조선이 존속하던 중에서도 중국의 왕조는 2번이나 교체되었다.

기원전 2333년 건국, 기원전 108년 멸망 (기록상) 2225살 고조선 증조 할아버지.

기원전 37년 건국, 668년 멸망 705살 고구려 큰할아버지.

기원전 18년 건국, 660년 멸망 678살 백제 작은할아버지.

기원전 57년 건국, 935년 멸망 992살 신라 장수할아버지.

918년 건국, 1392년 멸망 고려. 474살 고려 아저씨.

1392년 건국, 1910년 멸망 조선. 518살 조선 아저씨.

전세계적으로 3개에 불과했던 500살 먹은 왕조들이 우리나라에서는 평균수명이 되어버렸다! 도대체 이 나라는 어떻게 생겨먹은 나라이길래, 한 국가가 건국되면 500년 이상을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필자가 이 글을 쓰고자 하는 이유는 '어떻게 전세계적으로 드물게 500년 먹은 왕조들이 한국에 집합할 수 있을까?'가 아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이 물음의 답은 간단했다. 다른 유럽이나 아시아 국가들과는 달리 한국은 아시아 끝자락에 위치한 반도에 자리 잡아있다. 그 반도와 국경을 맞닿은 국가는 중국에 불과했고, 가끔 저 멀리서 우리보다는 미개했던 섬나라 사람들이 침입을 해오곤 했지만 그것은 전쟁이 아닌 '약탈'수준에 그쳤었다. 즉, 우리와 국경을 맞닿은 중국과 친하게 지내기만 한다면 그리 큰 위협이 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중국에 대해서 '조공외교'라고 우리가 먼저 머리를 숙이는 외교를 취했기 때문에 중국과의 관계는 좋은 편이었다. 또 중국 역시 왕조의 교체가 빈번했기 때문에 굳이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한국의 왕조들에 대해 나쁘게 대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와 조금 떨어진 일본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앞서 말했듯이 그들은 미개했고, 오히려 문화를 전파해준 것은 우리였다. 일본 섬주민들과 해적들의 잦은 약탈로 시달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고려말 해적들과 임진왜란을 제외하고) 국가의 운명을 뒤바꾸는 사건을 터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에서는 우리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직접 해적들을 퇴치하기도 했고, 제발 우리에게 문화를 전파해달라고 머리를 숙이기까지 했다.

 그렇다. 한국의 왕조들은 아시아 끝자락이라는 지리적 위치, 반도국가라는 특수성으로 여러 국가들과 칼을 맞댈 필요도 없었고, 동아시아 국가들의 상호의존적인 관계가 통해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필자가 이 글을 쓰고자 하는 진짜 이유는 '산전수전 다 겪은 500년이나 먹은 왕조들이 도대체 왜 멸망했을까?'였다. 국가의 존속을 결정짓는 큰 전쟁도 이겨냈고, 우리 주위에 우리를 괴롭히는 위헙거리는 존재하지 않는데 한국의 왕조들은 무슨 이유로 멸망했을까?

 필자는 이런 이유로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by 초령목 2013. 3. 30. 18:04



by 초령목 2013. 3. 28. 01:55

호부견자(虎父犬子)라더군요. 호랑이 아비에 개 같은 자식. 하하...... 
그럼 나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그 자리에서 제안을단호히 거절하고 잡혀 죽었야했나요? 영웅 아버지 처럼 위대하고 영광스럽게? 
사실 아버지는 재판도 받고 가시는날까지 시끌벅적 하기라도했지만, 나는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그야말로 개죽음 아니었을까요? 
내 형은 7살 나이에 자기가 왜 당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독을 먹고 죽어버렸죠. 나도 그렇게 죽으란 말입니까? 
아무도 기억 못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런 죽음을? 왜? 내가 안중근의 아들이어서? 

왜 나는 안준생으로 살 수 없었죠? 
왜 나는 내 삶을 선택할 기회도 없이 이런 운명에 던져져야 했죠? 
아버지는... 아버지는 자신이 선택한 거잖아요. 그래서 죽은 거잖아요. 
그런데 왜 나는 내 선택이 아닌 아버지의 선택 때문에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까? 
왜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아버지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통째로 망가져야 합니까? 

나라를 팔고 아비를 판 더러운 자식... 
친일파... 
번졀자... 

뭐라 욕해도 상관없어요. 내가 괴로워할 때 아무도 내게 손 내밀지 않았잖아요. 나를 욕할 자격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요. 
그렇게 버려둘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무슨 권리로... 

내 아들은 의사입니다. 미국에서 제법 성공했고, 주위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잘 살고 있죠. 
내가 사람들의 경멸을 받으며 모은 돈으로 가족을 부양한 덕분에, 내 자식들은 사람답게 살 수 있었던 겁니다. 

우습지 않나요? 
영웅의 아들은 개 같은 삶을 살고, 
그 변절자의 자식은 다시 성공하고. 

아버지는 나라의 영웅이었지만 가족에겐 재앙이었죠. 
나는 나라의 재앙이지만 내 가족에겐 영웅입니다. 

                        -소설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 中-



by 초령목 2013. 3. 16. 18:12

공무원 교수가 아니라면 굶어죽는다고? 사학과를 해부해보자

http://studymatch.co.kr/140122145125


고3에게 말해주는 사학과 진로의 현실-대학교수 편

http://blog.naver.com/sunho1007?Redirect=Log&logNo=50035441077

by 초령목 2013. 2. 25. 23:23

원자폭탄에 희생된 조선의 왕자를 아십니까?

조선의 마지막 왕조. 고종황제의 손자이자 의친왕(고종황제 아들)의 차남. 이우 왕자.

참 반듯하니 얼굴도 미남이시다. 지금시대에 영화배우 뺨칠 정도로.




1912년에 태어나 1945년 생을 마감한 이우 왕자.

그 영화같이 짧은 인생 속의 그의 업적은 고개를 숙이게 한다. 

일화를 하나 소개하자면, 

조선인을 사랑한, 조선인에게 따스했다던 이 분. 


일본군들이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에 작전 도로를 내면서 땅을 가로챈 후 보상을 해주지 않아

그 지방의 농부들이 이우 왕자에게 호소했다고. 





이 호소를 들은 이우 왕자는 그 즉시 사령부로 달려가 공사 취소를 요구. 

이를 들어줄리 없는 일본인. 공사 취소요구를 거절하자 이우 왕자는 

그 일본인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며 이렇게 말했다고. 

"황족이며 공작인 나는, 너 하나 죽여도 감옥에 가지 않는다. 즉시 죽여주마"

이 위협으로 이우 왕자는 결국 목적을 달성. 



일본은 황제의 자손인 이우 왕자에게 '일본여성'과 결혼할 것을 강요. 

독립운동가인 유동렬의 딸과 정혼한 상태였으나, 황족과 독립투사 가문의 결혼을 일제가 강렬히 반대.

조선인과의 결혼을 고집한 이우 왕자는 결국 친일파 대신의 손녀와 결혼하는 것으로 타협. 


 

대한 제국의 황복으로서 일제의 요주 감시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굽힘이 없었으며,

일본말이 아닌 조선말을 사용하고, 술자리에서는 당시 금지곡인 '황성옛터' 노래를 불렀다고. 

일제의 장교로 근무한 이우 왕자는 동기인 이형석에게 

"일본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 우리 군복을 입고 당당히 살 때까지 기다리라"

조선의 황족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늘 잊지 않고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고.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추진했던 이우 왕자.

직접 비밀 결사대를 조직, 일본군 정보 참모라는 직위를 통해 얻어낸 고급정보들을 

독립군들에게 전달해주며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줌과 동시에 정신적 지주로 활약. 


치밀하게 준비한 일본의 관동군과의 전투계획을 눈치 챈 일본이 

그의 보직을 교육참모로 변경, 일본 히로시마에 발령을 내게 되고. 

히로시마 전출을 거부하며 한국 배속 청원을 넣고 버텼으나, 청원을 거절당하며 히로시마 행에 오름.



히로시마에 첫 출근하던 1945년 8월 6일. 이 날, 미국의 원자폭탄이 투하. 

이에 부상을 입은 이우 왕자는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도쿄의 전문병원으로 옮겨저 상태가 호전되어가고 있었는데

옮겨진 그 날밤, 34살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 

일각에서는 일제에 의해 독살된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으나, 진실은 밝혀진바 없음. 



당시 이우 왕자를 간호하였던 한 일본인 간호사는 

"그 분은 매우 큰 분이셨다. 아마도 그분이 살아 계셨더라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라고 했다고


이우 왕자의 시신은 경기도 마석에 모셔졌고, 그의 장례식은 1945년 8월 15일. 

이우 왕자는 조국의 해방을 죽어서야 맞이하게 되었다.

by 초령목 2013. 1. 30. 21:34

 흔히 우리는 후삼국시대라 하면 후고구려, 후백제, 그리고 신라, 이 삼국만 생각하기 쉽상이다. 어찌보면 이름자체에 삼국을 강조하는 듯 하지만 후삼국시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을 주연으로 발해라는 조연이 함께 역사를 이어가던 시대다. 후삼국시대의 역사는 889년(원종·애노의 난) 또는 891년(후백제 건국)을 시작으로 고려가 삼국을 완전 통일한 936년까지 (889년 기준) 47년이다.

 기원전 57년 신라가 건국되고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를 멸망 시킨 후, 676년 당나라군을 몰아내고 마침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하지만 698년 고구려 유민출신인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게 되며 한반도는 다시 남과 북, 두개의 나라로 분열하게 된다.(물론 발해는 한반도에 거점을 뒀다기보다는 만주에 거점을 뒀지만) 발해는 약 200년간 존속하며 거란에 의하여 926년에 멸망하게된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후삼국시대와 발해의 쇠퇴시기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이다. 후삼국시대의 시작이 890년대라고 하지만 실은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한 901년이 진정한 시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 900년대에 발해는 귀족들의 탐락과 사치로 거란족을 포함한 소수민족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후삼국시대를 신라의 탐락과 쇠퇴의 산물로만 이해해왔다. 사실 후삼국의 성립 자체가 한반도 내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신라가 삼국통일 후 300년간의 평화를 유지해온 금성의 평화를 겪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고인 물은 썩게 되는 법. 신라는 300년간의 평화를 제도적 발전으로 이룩하지 못하고 그저 왕위쟁탈을 행하는데 시간을 허비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조금 더 깊이 파고 들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신라가 어떻게 300년간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발해의 변화였다. 알다시피 발해는 당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고구려의 유민들이 일으킨 난이었다. 



 
세조 29년(696) 거란의 이진충(李盡忠)이 영주(營州 - 조양시)도독을 죽이고 당(唐)에 반란을 일으켰다.

 31년 이보다 앞서 이진충이 당의 북경을 함락시키는데 왕이 태자 조영을 보내 계성(계城 -天津市)를 점령하였다.


유득공 『발해고』

여기서 나오는 세조는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 대조영은 태조로 기록.




 위의 기록과 같이 대조영은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키고 당나라가 돌궐의 힘을 빌어 1년만에 겨우 진압을 할 수 있었던 어려운 상황에서 말갈의 여러부족들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그렇기에 발해는 당나라와 항시 적대적일수밖에 없었으며,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에 대해서도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발해의 성립으로 인하여 나당전쟁으로 사이가 벌어졌던 당나라와 신라는 다시 동맹을 맺고 발해를 공격하기도 했는데 발해는 이러한 전쟁속에서 힘을 키우며 꾸준히 성장해나갔다.


 

삼국사에서 말하기를, 의봉 3년 고종 현술에 고려의 남은 세력들이 서로 모여 북쪽의 태백산 아래 의지하였다. 나라 이름을 발해라 하였다. 개원20년 경에 명황이 장수를 보내 토벌하였다. 또한 성덕왕 32년 현종 갑술, 발해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의 등주를 침범하였다. 이에 현종이 토벌하였다. 신라고기에 말하기를 고려의 옛 장수 조영은 대씨이다. 남은 병사들을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발해라 하였다.

일연 『삼국유사』



  위의 기록과 같이 당은 발해를 큰 위협세력으로 파악하여 군대를 보내 토벌하려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발해역시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에 적대심이 남아있기에 무왕대에 이르러 장문휴로 하여금 당나라의 등주(산둥지방)을 공격하라 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당의 요청으로 신라가 발해를 공격한적도 있었는데 발해는 두 적국의 위협을 막아내며 그 결과 발해 선왕때는 해동성국이라 불릴정도로 번영하며 당나라에게 위협을 주는 존재가 되었다.

 발해가 이렇게 강성할 때 신라는 왕권이 가장 강했던 신라 중대(무열왕~혜공왕)였다. 신라 중대는 신라 역사상 최초로 진골이 왕이된 시대이며, 더불어 삼국통일, 나당전쟁 이후 내외의 커다란 위협없이 많은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또한 유교를 도입하여 전제 왕권을 형성하였으며 6두품을 등용하여 다른 진골과 대립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황금의 시대를 열어가게 되는 신라의 전성기였다. 특히 경덕왕때 치세가 극에 달해 제반, 제도, 관직을 당 제도로 개편하고, 전국의 행정체제 및 행정단위의 명칭을개혁하며 행정구역을 9주 5소경으로 나누었다. 또 불교 중흥에도 노력하였는데 불국사,석굴암이 완공된 때도 이때였으며, 세계 최고의 종이라 불리는 성덕대왕신종(봉덕사 종)이 주조된때도 이때였다. 당시 경덕왕의 치세가 얼마나 대단했냐면 삼국사기에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


 

 현종이 오언십운시(五言十韻詩)를 몸소 짓고 써서 왕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신라 왕은 해마다 조공을 잘 행하고 예악과 대의명분을 잘 실천하므로 시 한 편을 지어 주노라.』 하였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우주는 해와 별[景緯]로 나뉘어 있지만, 
만물은 중심축[中樞]에 물려 있도다. 

구슬과 비단은 천하에 두루 퍼져 있어, 
산 넘고 물 건너 장안(長安)으로 몰려든다. 

생각하니 푸른 뭍은 아득히 떨어져 있으나, 
오랜 세월 중국을 부지런히 섬겼도다. 

멀고 멀리 땅이 다한 그 곳, 
푸르디 푸르게 이어진 바다의 구석에 있음에도 
명분과 의리의 나라로 일컬어지니, 
어찌 산과 물이 다르다 하겠는가? 

사신은 돌아가 풍속과 가르침을 전하고, 
사람들은 찾아와 법도를 익혔네. 

의관(衣冠)을 갖춘 이는 예절을 받들 줄 알고, 
충성과 신의가 있는 자는 유학(儒學)을 높일 줄 아는구나. 

성실하도다! 하늘이 이를 굽어볼 것이며 
어질도다!  덕행은 외롭지 않으리라. 

가지고 있는 깃발은 작목(作牧)과 같고, 
후한 선물은 생추(生芻)에 비할 만하다. 

푸르고 푸른 지조 더욱 소중히 하여, 
바람과 서리에도 늘 변하지 말지라!』 

황제가 촉(蜀)지방에 가 있을 때 신라는 천리 길을 멀다 않고 황제가 있는 곳[行在所]까지 찾아가 조회하였으므로, 그 지극한 정성을 가상히 여겨 시를 지어 준 것이다. 시 구절 중에 『푸르고 푸른 지조 더욱 소중히 하여, 바람과 서리에도 늘 변하지 말지라!』 한 것은 어찌 옛날 시 구절의 『모진 바람이 있은 뒤에야 굳센 풀을 알게 되고, 어지러운 세상이라야 곧은 신하를 알 수 있다.』라는 의미가 아닐까? 선화(宣和) 연간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부의(金富儀)가 시를 새긴 판본을 가지고 변경(汴京)에 가서 관반학사(舘伴學士) 이병(李邴)에게 보였다. 이병이 황제에게 올리니 황제가 양부(兩府)와 여러 학사들에게 돌려 보인 후 황제의 의견을 전하여 “진봉시랑(進奉侍郞)이 올린 시는 틀림없는 명황(明皇)의 글씨다.”라 하면서 감탄해 마지않았다. 

김부식 『삼국사기』9권 경덕왕 15년(756)



 비록 자주적인 측면에서 비판을 받을 수 있는 내용이긴 하나 당의 황제가 친히 신라에 시를 지어 보냈다는 점이 흥미롭다. 신라와 당의 돈독한 관계를 확인함과 동시에 경덕왕의 치세를 잘 보여주는 기사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신라는 발해의 개혁과 함께 추락하기 시작한다. 발해가 변화를 시작한 때는 우리나라 역사상 3번째로 긴 재위기간을 채운 임금이자 발해의 3대왕인 문왕때였다. 문왕은 문화개혁을 통해 발해의 제도를 개선해 나가기 시작했다. 무려 54년에 걸친 점진적인 개혁의 결과 당과의 화해에 성공하며 당으로부터 발해를 정식국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문왕은 당나라의 3성 6부를 기본 뼈대로 한 독자적인 중앙 통치 기구를 만들어 운용하였으며 행정조직(5성 15부 62주) 정비, 군사제도 개편, 불교 발전 등에 힘썼다. 신라와도 관계를 개선하여 신라길이라는 무역로를 통해 교류하기도 했다. 특히 문왕은 당과 친하게 지내면서도 스스로 하늘의 자손이라 칭했을정도로 자주적인 모습을 보였다. 

 문왕의 가장 큰 업적은 자주성을 지킨 와중에도 당나라와 유연한 정책을 피기하면서 관계 개선에 성공하고 문치국가로서의 변화에 큰 공헌을 끼쳤다는 점이다. 비록 문왕 다음대의 선왕때 해동성국이라 불릴정도로 왕성한 영토 확장을 했던 발해지만 문왕때의 여러 제도들을 바탕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결국은 완벽한 문치국가로 탈바꿈하는데 이르게 된다. 그리고 문왕이 이룩해놓은 당나라와의 관계개선은 후에 발해의 무역로를 통해 당나라와의 원할한 교류를 가능케 만들었으며 비록 아직 사이는 좋지 않지만 신라와도 신라길이라는 무역로를 만들어 100년만의 민족 교류가 이루어졌다.

▲ 발해 5경

 발해는 총 5번의 도읍지 천도를 했는데 698년 홀한성이라는 성을 쌓아 동모산에 거점을 뿌리박은 것이 첫번째 도읍지였다. 동모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중경쪽에 있는것으로 추측된다. 그후 48년간 도읍의 역할을 하다가 문왕대에 이르러 천도를 단행한다. 756년 상경용천부로 도읍을 옮긴 것이다. 이는 755년 당나라의 운세가 기울면서 안록산의 난이 큰 혼란을 가져오자 발해는 당나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북쪽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천도는 신라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위의 지도에서 보다시피 발해의 새로운 도읍인 상경은 중경에 비해 만주쪽으로 치우쳐있다. 즉 발해가 신라에 대한 견제와 신라의 발해에 대한 전쟁의 두려움이 소멸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신라는 급변한다. 비록 발해가 수도를 천도한 756년은 신라 왕권의 최고봉이었던 경덕왕때였으나 765년 다음왕으로 오른 혜공왕대에 이르러 전쟁의 위협과 경덕왕의 치세로 짓누르고 있었던 귀족들의 기세가 드디어 양지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혜공왕이 즉위하자 귀족들은 노골적으로 혜공왕의 자리를 노렸다. 전대 경덕왕의 치세에 눌리고 살아야 했던 귀족들이었지만 혜공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는 것이 그들을 자극해버린 것이다. 태후의 섭정 기간동안 경덕왕의 전제주의를 기반으로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귀족세력의 반발을 살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왕과 귀족들의 세력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그 결과 786년 일길찬 대공의 모반, 770년 대아찬 김융의 모반, 775년 이찬 김은거의 모반등, 귀족에 의해 왕권은 끊임없이 위협당했다. 마침내 780년 김지정의 반란 과정에서 김양상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난군에 의해 왕과 왕비가 피살당하게 된다. 그리고 김양상이 신라의 새로운 왕,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신라 중대의 종말과 동시에 신라 하대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신라하대에는 발해가 완전 문치국가로 탈바꿈됨으로써 동아시아 3국(당나라, 발해, 신라)에는 평화의 시대가 이룩된다. 하지만 이 시대는 무武력의 전쟁이 아닌 문文력의 전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발해 유학생들이 당나라의 외국인관직시험에서 신라 유학생들을 넘어서게 되자 신라가 당나라에 불만을 토한 것이 신라와 발해의 신경전이었을정도로였다. 이 시대의 가장 큰 적은 당나라도, 발해도, 신라도 아닌 해적들이었는데 장보고라는 걸출한 위인이 이를 진압하면서 일단락 되는 듯 했으나 신라의 뻘짓(?)으로 무산되었다. 


 하지만 신라하대의 시작은 신라 비극의 시작을 의미했다. 신라하대 155년동안에 왕이 20명이나 교체될 정도로 신라는 나라안팍의 안위를 걱정하기보다는 왕위쟁탈에 눈을 밝혔다. 그리고 결국 진성여왕대에 이르러서야 귀족들의 횡포를 못이긴 여러 영웅들이 난을 일으켜 후삼국시대가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후삼국시대의 시작은 신라와 발해의 쇠퇴기이자 당나라의 멸망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당나라는 200년간의 평화동안 동아시아 최강국의 자리를 유지해 나갔으나 제도의 헛점과 무능한 황제와 간신배의 등장으로 901년 멸망해버렸다. 당나라가 멸망하자 대륙에서도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여러나라로 분열되어 5대10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한반도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당시 신라가 얼마나 쇠약했던지 신라의 통치범위가 고작 금성주위로 국한되었을 정도였다. 심지어 금성과 아주 가까웠던 상주에서 아자개가 봉기를 일으켰는데 신라는 그것을 막을 힘조차 없었다. 후삼국이 시작되자 신라왕의 초상을 칼로 베었던 궁예는 노골적으로 반신라적인 성격을 보였고, 후백제왕 진훤에게는 신라왕이 살해될 정도로 쇠락하였다. 발해 역시 신라와 마찬가지로 지배세력의 내분으로 피지배층이던 소수민족에 대한 통치력이 약해지자 거란이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차례대로 발해는 거란에 의하여 926년, 신라는 고려에 의하여 935년 멸망하였다.


by 초령목 2013. 1. 20. 17:15

발해가 멸망할 때 後三國의 영웅들은 무엇을 했나? 
 

 I. 
  668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한 후 30년 뒤인 698년 고구려 유장 대조영은 
그 지역에 발해를 건국하였다. 한때 당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얻었던 발해는 926 
년 정월 거란의 야율아보기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북방의 漢族이나 북방 민족들의 한반도 
침략을 방어하는 방파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필자의 견해로는 발해가 쇠퇴하고 거란족이 발 
흥할 때가 고구려 멸망이후 한민족이 다시 북방의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최초의 好機였다 
고 판단된다. 후삼국시대를 살았던 한국인들의 고구려 古土에 대한 관심과 미련은 21세기를 
사는 우리 세대보다 훨씬 더 강열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 후백제, 통일신라가 각축을 벌 
린 후삼국시대의 분열, 대립의 현실은 훨씬 냉혹했다. 21세기에도 아직 분단을 극복하지 못 
한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후삼국의 3傑들(궁예, 왕건, 견훤)이 발해 멸망기에 무엇을 했 
는지를 재조명해 보면서 역사의 교훈을 얻어보자. 
 

II. 
  발해가 멸망하기 직전 9세기말부터 10세기 전반기의 동북아시아는 하나의 전환기라고 할 
것이다. 안사의 난 이후 쇠퇴하기 시작한 唐제국은 황소의 대난을 겪으면서 907년에 멸망하 
고 후량이 들어서면서 五代十國(907-960)의 분열시대가 시작되었다. 한편 한반도 내에서는 
후삼국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신라가 쇠퇴일로를 걷고 있었고 견훤의 후백제와 궁예의 태 
봉(고려의 왕건)이 세력다툼을 벌이던 시기이다. 발해의 서쪽에서 일어난 거란이 발해의 쇠 
퇴와 중원의 분열로 인해 갑짜기 큰 나라가 되고 있었다. 거란은 옛부터 요하 상류에 흘러 
가는 시라무렌강가에서 발흥한 東胡계통의 퉁구스와 몽고의 혼혈족으로 알려졌는데, 907년 
야율아보기가 제위에 올라 점차 세력을 확장하면서 북중국으로 진출하는 한편, 동쪽으로 발 
해를 위협하였다. 그는 임기 말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도모할 새로운 야망을 품었다. 
그래서 916年 신책(神冊)이란 연호를 사용하고 자칭 황제라 하고 임황(臨潢, 熱河省)을 皇都 
로 정하고,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이때 영역은 확대되어 발해와 상접하게 되자 발해와 본 
격적인 전쟁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한편 후삼국 중에서 가장 영토를 넓힌 궁예의 고려는 정치판도에 큰 파란이 일어나고 있 
었다. 905년 궁예는 청주에서 만난 策士 아지태의 권고를 받아들여 송악에서 다시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고려에서 마진이라 정하였다. 이는 고려 호족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강행한 일이라 결국 궁예 몰락의 신호탄이 되었다. 청주지방의 1천호를 이주시키고 궁궐을 
수축하는 동안 많은 세금과 부역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호족과 농민들의 강한 반발을 받았던 
것 같다. 궁예가 사용한 국호(901년 고려, 904년 마진, 911년 태봉)를 분석해 보면 자주적인 
성격을 강하게 풍기고 있지만, 정권의 불안정을 또한 내포한 것이었다. 913년 청주파내부에 
서 서로 참소, 모함하는 분열이 생기는 소위 "아지태 사건"이 발생했다. 왕건은 이 사건에서 
아지태를 척결하면서 호족들의 신망을 한 몸에 얻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궁예는 대외관계 
에서, 특히 거란에 대해서는 별다른 적대적 입장을 보이지 않고 있다. <요사>에 의하면, 
915년에 궁예가 거란에 보검을 바치면서 조공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아마도 궁예는 그가 추 
진한 정치숙청으로 말미암은 정치적 혼란을 외교적 관심이전을 통해 극복하려했던 것 같다. 
그리고 918년 왕건에 의해 축출되기 3,4개월 전에 두 차례에 걸쳐 거란에 사신을 파견하였 
던 것도 이런 내부 정세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결국 고려 호족들은 918년 왕권과 결탁하여 궁예를 축출하였다. 그러나 왕건은 환선길, 이 
흔암 등 장수의 반란을 겪어야 했고, 공주 이북 30여성이 다시 후백제에 귀부했다는 점에서 
왕건은 초기에 내부 분란을 정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왕건은 이듬 해 수도를 철원 
에서 송악(개성)으로 옮기고, 년호를 天授라 하였다. 
  고려의 정권교체에 따른 후유증을 지켜본 후백제 견훤은 두 번이나 실패한 대야성 정복의 
꿈을 키워갔다. 그는 920년 대야성을 공격하여 무너뜨리면서, 후백제의 통일정책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925년 12월 후백제의 견훤은 후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後唐 조정으로부터 
'백제왕'임과 食邑 2,500호의 통치자임을 인정받게 되었다. 
  한편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후삼국의 분쟁의 틈을 충분히 이용한 것 같다. 그는 神冊元年 
(916) 정월 황제 즉위 이후 바로 서방 諸國(제국) 공격을 준비하여 오다가 그해 7월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돌궐, 토혼, 당항, 소번, 沙陀諸部(사타제부)를 쳐서 곧바로 평정하고 그 개 
선하였다. 그는 궁예가 축출되었을 918년에는 생산의 요충지인 요동의 정복을 완료했다. 그 
후 발해를 도모하기 위하여 장기 관찰을 한 결과 발해국 내분소식을 접하고 바로 전면 공격 
전을 선언하였다. 야율아보기는 드디어 925년 12월 발해의 수도를 대규모 병력을 동원, 기습 
하여 발해의 부여성을 함락시키고 말았다. 高王이후 200여년동안 해동성국이란 칭호를 받았 
던 대국 발해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926년 정월 1달만에 어이없이 멸망하고 말았다. 
  발해가 거란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해 주변국의 지원을 얻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여러 곳 
에서 감지된다. 거란의 핍박을 경계하여 925년경에는 발해가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結援하 
였음이 {契丹國志}(권1)에 보이고 있다. 이보다 앞서 921년에는 발해가 고려와 외교관계를 
맺고 아울러 通婚하였던 듯한 기록이 {資治通鑑} 권285에 보이고 있다. 만일 이 기록이 신 
빙성이 있다면 발해는 거란과의 전쟁에서 신라와 고려에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양국으로부 
터 군사적 지원은 받지 못한 것 같다. 
  
III. 
  그런데 이 당시 위기에 처한 발해를 보면서 거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고려의 왕건의 숨 
은 의중이 무엇이었던가? 고려의 왕권은 과연 건국초기부터 거란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을까? 결코 아니었다. 925년 주물성(경북 안동 또는 상주 부근) 전투를 전후로 하여 고 
려는 후당과 거란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하는 등 대외정책에서 저자세의 모습을 보인다. 
그 이유는 첫째로 고려가 주도하는 통일전쟁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함이었다. 고려가 거란 
에 호감을 사기 위해 준비한 외교 선물로서는 그해 9월 발해장군 申德 등이 그들의 정치내 
분으로 고려에 내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발해내부에 관한 중요 정세를 전달한 것으 
로 추정된다. 거란으로서는 크게 환영할 것으로 그들이 발해 정벌의 시기를 결정하는데 크 
게 도움을 얻은 것이다. 실제로 거란이 발해의 정치 혼란을 이용하여 "先帝[태조]가 발해인 
들의 틈을 타서 공격하여 싸우지도 않고 이겼다"는 『요사』를 통해서도 알수 있다. 거란은 
922년에 먼저 사신을 파견하여 발해견제를 위한 고려의 협조를 요청했었고, 고려의 사신을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 
  고려가 거란과의 관계 개선에 신경을 쓴 이유는 두 번째 이유는 거란의 국제적 위치 상승 
이라는 국제역학관계의 변화였다. 거란은 고려 사신이 오기 1년 전에 이미 토혼(吐渾), 당항, 
돌궐, 등의 정벌작업을 벌였는가 하면, 大食國에서도 조공사신이 다녀갔다. 그리고 고려사신 
이 다녀갔던 925년 2월에도 대원수 요골(堯骨)이 당항을 경략하고, 北府宰相 소아고지(蕭阿 
古只)가 燕과 趙를 경략하고 돌아오는 등, 그 국력의 강성함은 주변 여러 나라들이 인정하 
고 있는 터였다. 그래서 고려도 이제는 거란의 국제적 위치를 인정하고 그들과 교섭을 원하 
는 적극외교를 펼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되는 사실은 신라가 발 
해를 돕겠다던 약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란에 조공사를 파견하였다는 사실이다. 신라 
도 거란의 국력상승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것은 거란의 발해 침략을 고려, 신라 모두가 묵인, 방조함으로써, 거란의 발해멸망 
을 도와주는 결과는 낳고 말았다. 고려는 발해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926년(2월 20일) 거란 
에 사신을 파견했다.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거란을 "無道의 나라"로 규정한 942년의 
태도와는 전혀 다르다. 발해의 멸망 전후를 영토확장의 호기로 활용하지 못한 주된 원인은 
주물성 전투에서 보았듯이 925년 이후 전개된 고려와 후백제간의 팽팽한 세력균형 때문이었 
다.

<원대신문> 

by 초령목 2013. 1. 20. 16:46

후삼국시대의 시대구분 

 

목 차

 

 

 

 

1. 들어가며

2. 후삼국시대의 개창시기에 관하여

3. 후삼국시대의 시대구분

4. 맺으며

5. 참고문헌

 

1. 들어가며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전 국토가 혼돈에 휩싸이던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당연 그 시대를 상징하는 영웅들이 역사서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데. '춘추전국시대'로 대표되는 중국에게는 유비 · 조조 · 손권이라는 영웅이, '센고쿠 시대'로 대표되는 일본에게는 오다 노부나가 · 토요토미 히데요시 ·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영웅들이 있었다. 우리가 당대에 직접 살아보지 않아 그들의 위엄을 직접 느낄 수는 없지만 이들의 일대기는 오늘날까지도 영화와 소설 속 주인공으로 부활하여 우리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렇다면 같은 동아시아국가로서 중국과 일본과 같은 대격동의 시대가 과연 우리나라에서는 존재했을까?

한국에서는 후삼국시대가 바로 그것이며 '진훤 · 궁예 · 왕건'등과 같은 걸출한 위인이 등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후삼국시대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까지 후삼국시대를 표현하는 또 다른 말은, 신라 하대 혹은 나말여초였다. "50년도 안되는 이 시기를 과연 '시대'라고 불러도 되는 것일까?" 라는 생각에 그저 남북국시대와 고려시대 사이의 과부기적인 짧은 시대로 치부해왔다. 실제로 대부분의 역사개념서에서 후삼국시대는 신라와 고려라는 거대한 왕조를 사이에 두고 고대국가에서 중세국가로의 전환기에 존재했던 시대라는 내용을 담은 한 두장의 설명으로 끝내어왔다.

길게만 느껴졌던 소설 삼국지의 배경인 중국의 삼국시대는 실제로는 220~28060년이 겨우되는 역사이며. 일본의 전국시대라 불리는 센고쿠 시대는 1467년에 시작하여 1573년까지 106, 100년의 역사를 가졌다. 이처럼 동아시아의 혼란기는 100년도 안 되는 기간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한 시대와 한 시대 사이를 잇는 중요한 시대라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우리 한국은 어떠한가. 후삼국시대만큼은 박한 평가가 내려진다. 후삼국시대로 정의되는 892년부터 936년까지의 44년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의 36년보다도 더욱 긴 기간으로 결코 짧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일본의 대격동의 시기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것과 비교하여 볼 때 무관심한 대우를 받아왔다.

후삼국시대는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영웅들이 반세기에 공존했던 유일한 시기이자, 진훤, 궁예, 왕건 말고도 기훤, 양길, 능창등 수많은 영웅들이 자기의 세력을 자유롭게 과시하던 때였다. 우리는 이 시기 이후로 더이상 영웅들이 공존하던 때를 떠올릴 수가 없다.

본고는 후삼국 시대에 대한 재평가를 바라며 이 논문에서는 시기를 구분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후삼국의 시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나누어 보려고 시도한 사람은 없었다. 크게 진훤, 궁예의 시대와 진훤, 왕건의 시대로 구분 짓기도 하나, 본고는 후삼국시대의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하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후삼국시대를 전기, 중기, 후기 세 개의 시기로 구분하고자 한다.

 

2. 후삼국시대의 개창시기에 관하여

 

후삼국시대라고 정의되는 기간에 대해서는 보편적으로 진훤이 후백제를 세운 892년부터 왕건이 완전한 삼국통일을 이루어낸 936년까지로 보고 있다. 많은 역사개념서들과 교과서에서는 견훤은 892년 완산(전주)을 도읍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백제라고 칭함으로써 후삼국시대의 서막을 올렸다정도로만 간단히 후삼국시대의 개창을 서술하고 있다. 이는 한국에서는 새 시대의 개창에 대한 관점이 신국가 건설에 있기 때문에 진훤의 후백제 건국에 꽤나 높은 상징성을 부여한 것이었다.

그러나 후삼국시대의 시작을 진훤의 후백제 건설로 설정해놓으면 뭔가 애매한 구석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진훤이 공식적으로 후백제의 부활을 표방한 것은 무진주에서 완산주로 옮긴 900년으로, 892년의 건국 선언은 다른 호족들이 자칭 성주, 장군으로 부른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후고구려가 건국됨에 따라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정립된 901년부터를 진정한 의미로 후삼국시대가 열렸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지도 모른다.

달리 말하자면, 관점을 바꾸면 후삼국시대의 개창시기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다른 국가들을 참고할 수 있다. 한국과 같이 대격동의 시기를 겪은 중국과 일본은 새로운 국가에 초점을 두기 보다는, 그 혼란의 시기를 야기한 특정 사건에 초점을 두고 있다. 중국의 경우 기원전 770, 견융족에 의해 주나라가 도읍을 동주로 옮기자 주 왕실이 약화되어 각각의 제후국들은 주왕실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하여 주왕조의 천도를 춘추전국시대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1467년 경제적 문제에 쇼군 계승 논란이 겹쳐져 일어난 오닌의 난 이후로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다하여 오닌의 난을 일반적으로 센고쿠 시대의 서막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후삼국시대의 개창시기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볼만한 가치가 있다. 이에 따라 본고는 889, 원종애노의 난을 후삼국시대의 시작에 기점이 되는 사건으로 보는 바이다.

신라 하대는 진골 귀족간의 왕위 쟁탈전으로 경주를 중심으로 사치와 향락의 풍습이 만연하여 지방에 대한 착취가 가혹해졌다. 이에 따라 농민들은 점차 신라의 체제에 대해 반발을 품기 시작했는데 중앙의 정치는 문란해져가고, 중앙에서 이탈한 낙향귀족들이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며 신라 사회에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진훤과 궁예가 서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을 때, 호족을 비롯한 수많은 농민들이 그것에 동조하여 그들을 왕으로 인정한 것만 봐도 신라 하대의 사회가 얼마나 문란해졌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농민 봉기는 이미 헌덕왕 대부터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이에 따른 해결책을 조정에서는 제시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근이 잇따르고 중앙의 조세 독촉이 겹쳐지자 농민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기만 했다. 원종애노의 난은 조정에 대한 납부를 거부하고, 반발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 최초의 농민 봉기였다. 또한 삼국사기와 여러 사서들에 기록 될만큼 신라 사회에 끼친 파급력은 엄청났다.

삼국사기에는 원종애노의 난을 이런 식으로 서술해놓았다.

 

3. 나라 안의 여러 주와 군에서 공물과 세금을 보내지 않아 창고가 비고 국가재정이 궁핍하였다. 임금이 사람을 파견하여 독촉하니, 이로 인하여 도처에서 도적이 봉기하였다. 이때 원종(元宗), 애노(哀奴) 등이 사벌주(沙伐州)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나마 영기(令奇)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사로잡게 하였으나, 영기가 적들의 보루를 보고 두려워하여 진군하지 못하였다. 촌주(村主) 우연(祐連)이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임금이 칙명을 내려 영기의 목을 베고, 나이가 10여 세에 불과한 우연의 아들에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촌주가 되게 하였다.

 

그 경과가 어떠하였는지는 정확히 기술되어있지는 않으나, 2년 후인 891, 양길이 신라 북쫑 땅을 습격했다는 사실에서 원종애노의 난이 완전히 진압된 것이 아니라 다른 반란군의 무리에 흡수되거나 통합되어 신라 정부에 대한 압박을 가세하는데 동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원종애노의 난이 성공적으로 진압이 되었다면, 그 잔존세력을 청산하는 기사가 존재해야했다. 그러나 오히려 892, 반란세력을 토벌하러간 진훤이 신라를 배신하여 새로이 백제를 건국하기에 이른다. 이는 신라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었음을 반증하며 원종과 애노의 난이 신라 사회에 엄청난 파급력을 전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신라 국가의 지배질서나 국가의 통치력이 원종애노의 난으로 붕괴된 것은 아니지만, 붕괴되기 시작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다. 신라말은 대규모로 조직화된 농민군이 전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봉기하여 신라가 이를 수습하는데 실패하면서 통치 기반이 와해되기에 이른다. 신라는 말기에 그 영향력이 경주 인근지역으로 축소되는데, 이는 신라의 정치체제가 중앙과 지방에서 발생된 모순을 통제하거나 회복하지 못하고, 신라의 지배질서를 부정하는 세력이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신라의 소경은 대복속민 정책의 하나로 설치되었는데 복속 지역의 거주민을 회유하는 한편 지배층들을 원거주지에서 이주 시켜 다른 지역에 정착시킴으로써 상하가 연결될 수 있는 고리를 지역적으로 분할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대복속민 정책의 일환으로 설치된 소경은 중앙의 통제가 해이해지면 언제라도 반신라적인 경향으로 바뀔 소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실제로 양길, 진훤같은 인물들은 이러한 소경을 거점으로 삼아 성장해나갔다. 농민봉기는 시작부터 정치투쟁을 목표로 하지 않았으나 제반 사회 여건과 저항세력의 의식이 변화됨에 따라 왕조체제를 부정하는 변혁 운동으로 전환하게 된다. 소규모의 산발성의 띄고 있던 진성여왕 대의 농민봉기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전개되며 야심을 가진 정략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반신라의 목적의식을 띤 집단으로 발전한다. 착취에 반발하여 발생한 원종애노의 난으로부터 진훤에 의해 후백제가 건설되기까지는 고작 3년으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농민 봉기를 수습하지 못한 신라는 당시 사회적 역사적 조건과 조응하여 삼국으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후삼국시대는 889년에 발생한 원종애노의 난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3. 후삼국시대의 시대구분

 

시대를 나누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다. 조선과 같이 사회정치적인 변화를 계기를 가져다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 짓기도 한다. 또한 고려처럼 문벌귀족(전기), 무신세력(중기), 권문세족(후기)등의 집권세력을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 지을 수도 있다. 그 기준이 무엇이든 전환을 맞은 왕조는 이전과는 다른 문화를 창조하고, 흥망성쇠의 과정을 거치며 재탄생되는 것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구분은 왕조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수백 년간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공존했던 삼국시대는 전기, 후기를 따질 명확한 기준을 잡기가 어렵기 때문에 각 왕조별로 전기, 중기, 후기를 따로 설정하고 있다. 하지만 비록 채 50년도 안되는 짧은 역사를 지닌 후삼국시대는 오히려 그 짧은 역사 때문에 비교적 시대 구분에 용이한 편이다. 본고는 여기서 후삼국시대의 개창을 889년으로 설정한 후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해보겠다.

 

1) 후삼국시대 전기

원종·애노의 반란이 일어난 후 신라 각지의 호족들은 신라와의 독립을 선언하며 자신들을 장군, 성주라 일컫기 시작했다. 후삼국시대 전기는 진훤과 궁예가 활약하기 이전, 혹은 활동 초기의 시대이다.

이 시기에는 전국적으로 반란세력과 도적떼들이 떼거지로 난립하고 있었는데 사벌의 아자개, 죽주의 기훤, 북원의 양길과 후백제를 개창한 진훤이 역사서에 실릴정도로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반란세력이 존재했으나 활발히 세력확장을 펼치고 있었던 양길, 기훤, 아자개 등과는 달리 실력이 없거나, 자신의 거점을 중심으로 조용히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중소세력들은 서로간의 상호공존과 견제를 반복하면서 세력을 통합하려는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후삼국시대 전기부터 사실상 삼국은 이미 성립되어있었다고 봐야한다. 양길이 신라 북부지역을, 후백제를 세운 진훤이 전라도일대를 일찌감치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비록 서라벌일대로 영향력이 축소되긴 했으나 신라 왕실또한 건재하고 있었다. 진성여왕의 방탕한 생활로 점점 국운은 기울어가고 있었으나 아직까지 신라에는 반란을 진압할 군사력과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둘 통제력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통제력은 점점 서라벌 주위로 축소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최강자는 북원의 양길이었다. 양길은 강원도 일대의 북원을 중심으로 성 30여개를 차지했는데 특히나 신라 중앙의 통제가 약해지면 언제라도 반신라적인 경향으로 바뀔 소지가 있는 5소경 중 2(북원, 국원)을 차지했다는 점에서 후삼국시대의 역사에서 그의 존재에 대해 짐짓 재평가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또한 892년 기훤의 밑에 있던 궁예가 그에게 투탁할 때 원회와 신훤이 함께 찾아왔는데, 특히 원회라는 인물은 5소경 중 하나인 중원에서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다. 사서에 기록될 정도로 신라에서도 경계하고 있던 실력자들이 대거 양길에게 투탁투항한 것은 신라 하대에서 그의 존재가 신라왕이상으로 높았을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훗날 남부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고 있던 진훤으로부터 비장(裨將) 벼슬을 받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진성왕 5(890)에 첫 등장하며. 헌강왕 2(898) 궁예에게 무너질 때까지 신라의 북부지역을 거의 지배하듯이 하고 있었다. 그의 몰락은 궁예를 너무 믿은 나머지 그에게 군사를 쥐어준 것으로부터 시작하며 이는 후삼국시대 중기로의 이행을 야기해왔다.

진훤의 아버지인 아자개는 이미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나기 전부터 상주지역에서 난을 일으키며 성주를 자칭한 인물이었다. 아자개가 난을 일으킨 상주는 신라와 굉장히 인접한 지역이었는데 918년 고려의 왕건에게 투항할때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보아 그의 세력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진훤은 아버지의 밑에 들어서지 않고 신라 관군출신으로 서남해 지방 방위에 공을 세워 비장(裨將)이 되었는데,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진성왕 5(892) 반기를 들고 일어나 여러 성을 공략하고, 무진주(광주)를 점령하여 독자적인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섣불리 왕이라는 칭호를 쓰지는 않아 다른 이름으로 대체하다가 효공왕 4(900)에 완산주에 입성한 견훤은 백제 의자왕의 울분을 씻겠다는 뜻을 내보이며 비로소 백제왕을 칭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양길에게 비장의 관직을 제수하거나 중국 강남의 오월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관계를 맺는 등, 개국 초기부터 외교에 힘썼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후삼국시대 전기는 원종과 애노가 난을 일으킨 889년에서 시작하여 궁예가 901년에 후고구려를 건국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된다(889~900, 11). 이 시기에는 양길의 강세가 돋보이며, 신생국가 후백제 성립되고 본격적인 후삼국시대의 시작에 앞서 호족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규합하면서 새로운 시대로 이행되기 시작한다.

 

2) 후삼국시대 중기

898, 궁예의 성장을 경계하던 양길이 여러 성주들과 함께 비뇌성에서 그를 제거하려 했으나, 오히려 습격당해 패배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로 인해 양길의 휘하에 있던 많은 패권이 궁예에게 넘어가게 되면서 양길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된다. 반대로 그 패권을 물려받은 궁예는 901년 송악에서 왕건 부자를 만나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후삼국시대 중기에 들어서게되면서 신라는 이제 허물뿐인 국가가 되어버린다. 진훤과 궁예를 비롯한 많은 호족들은 신라에 대한 적개심을 적극적으로 표출해보였고,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기 전의 옛 유민들에게 부활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점차 백성들의 신망을 받게 된다. 옛 고구려 유민인 왕건 부자들과 결합하여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는 신라의 부석사에 가서 신라왕의 초상을 칼로 그어버리며 신라적 적개심을 그대로 내보였으며, 같은 시기는 아니지만 후백제의 진훤은 포석정에서 음주가무를 즐기던 경애왕을 자결케 하고 경순왕 김부를 새롭게 왕으로 삼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후고구려와 후백제의 치열한 세력다툼이 빛난 때였다. 우리에게도 꽤나 익숙한 진훤과 궁예, 그리고 왕건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면서 마치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전쟁을 펼친다. 궁예는 끊임없는 정복활동을 전개하며 후백제군을 공주 이남지역으로 철수시켰다. 공주가 백제 부흥의 중심지임을 생각할 때 궁예의 기세를 진훤이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이 시기의 육지전쟁이 해상전투보다 알려진 바가 많이 없으나 확실한 것은 궁예의 세력이 진훤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결론적으로 후삼국시대 중기의 패자(覇者)는 왕건을 등에 업은 궁예였다. 양자간의 치열했던 전투는 단 한번, 909년 왕건이 기습적으로 한반도 서남해지역을 공략하한 나주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후고구려가 한반도의 패권을 손에 쥐게 된다. 당시 서남해지역은 후백제에게 있어서 중국교류로로 중요한 거점이었지만, 이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던 별칭 수달, 능창이 끊임없이 교란을 펼치면서 서남해지역의 호족들을 완전히 규합시키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건에게 나주전투에서 패배하고, 능창조차 궁예의 손에 죽게 되면서 서남해지역의 패권이 후고구려에게로 넘어가게 되어버린 것이다. 나주는 후백제의 수도와 가까운 곳이었기에 훗날 다시 재탈환할 수 있었으나 서남해지역은 끝내 탈환하지 못하였다. 왕건은 서남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후백제의 대중통교를 차단하였다. 이를테면 왕건은 9066월 광주 염해현에서 진훤이 오월(吳越)에 보내는 선박을 나포하였다. 진훤은 후삼국의 세력경쟁에서 대외 주도권을 잡기위하여 오월과의 통교에 주력하였고 대중외교에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왕건은 진훤의 대오월 통교를 차단하여 진훤의 외교정책을 방해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과의 교통로가 끊이고 북으로는 궁예의 군대가 남진해오고, 남으로는 서남해지역의 왕건 부대가 북진해올 수 있는 위협 속에서 후백제는 결국 궁예 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다.

후삼국시대 중기는 왕건이 서남해지역을 정복함에 따라 후백제가 후고구려에게 끌려다는 모습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으며, 반대로 후고구려의 궁예정권은 한반도의 2/3을 차지하게 되면서 명실상부한 한반도의 패주로 자리잡게 된다. 이 시기는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한 901년부터 왕건에 의해 궁예가 축출되고, 고려가 건국되는 918년에 막을 내리게된다(901~918, 17).

 

3) 후삼국시대 후기

 

육월 을묘에 이르러 기장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이 몰래 모의하고 야반에 태조의 집에 가서 다 같이 추대할 뜻을 말하니 태조가 굳게 거절하여 허락하지 않는지라 부인 유씨가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입히고 제장이 부축하여 밖으로 나와서 사람을 시켜 달려가며 소리쳐 [왕공이 이미 의기를 들었다.]라고 하니 이에 분주히 달려오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먼저 궁문에 이르러 복을 치며 떠들석하게 기다리는 자가 또한 만여 명이나 되었다. 궁예가 이를 듣고 놀래어 말하기를 [왕공이 차지하였으니 나의 일은 이미 끝났구나 하며 이에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미복으로 북문을 빠져나가 도망가니 내인이 궁을 청소하고 신왕을 맞이하였다. 궁예는 암곡으로 도망하여 이틀 밤을 머물렀는데 허기가 심하여 보리 이삭을 몰래 끊어 먹다가 뒤이어 부양(강원도 평강)민의 살해한 바가 되었다.

-고려사-

고려사에 등장하는 궁예의 최후는 그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고를 낭비하고, 관심법으로 사람을 함부로 죽여 끝내 왕건에 의해 축출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궁예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많지만 결론적으로 외부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의 왕건에 의해 궁예 정권이 몰락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궁예에 이어 왕위에 오른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며 주변 호족과 신라를 포용하는 정책을 펼친다.

그러나 건국 후백제에게 밀리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중기 때는 내내 후백제를 압도하던 고려는 왕건의 쿠데타 후, 궁예를 따르던 많은 호족들에 후백제에 투항하거나 왕건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하며 고려 사회는 급속도로 불안정해졌다. 후백제와의 첫 전투인 조물성 전투에서 치열한 양상을 보였지만 927년 경애왕을 죽이고 돌아가던 후백제를 공격한 공산전투에서 고려군이 대패함에 따라 930년 고창전투 이전까지 고려는 후백제에게 압도당한다. 고창전투 이후부터는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는 형태가 고려가 통일하기 직전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후삼국의 최후 승자가 누가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왕건의 전쟁과 관련된 흔적들이 아직까지도 남아 오늘날 전국곳곳에 지명으로 굳어있다. 이처럼 후삼국시대 후기에는 후백제와 고려의 치열한 공방전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후삼국시대의 판도를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935년 천년왕국 신라가 고려에게 항복함과 동시에 경쟁자였던 후백제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진훤이 고려에 귀부해온 것이다. 이미 934년 운주성 전투에서 한번 승기를 잡았던 고려는 이러한 행운을 바탕으로 936년 일리천전투에서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삼국시대의 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다.

후삼국시대 후기는 우리나라 전쟁사에 있어서 짧은 기간에 수많은 전투가 다발적으로 일어난 때였다. 고려는 쿠데타 이후 후유증으로 한동안 후백제에게 열세를 보였으나, 결론적으로 신라의 항복과 후백제의 내분이라는 행운이 겹치면서 삼국통일을 이룩한다. 이 시기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918년에서 후백제가 멸망하고 삼국을 통일한 936년까지이며 또, 936년을 끝으로 후삼국시대는 막을 내리면서 고려왕조 500년의 역사가 새롭게 펼쳐지게 되었다(918~936, 18).

 

4. 맺으며

 

본고는 후삼국시대의 시기를 구분지어 보았으나 각 시기별에 해당되는 상세한 내용은 다루지 못했다. 후삼국의 역사가 비록 50년이 채 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36년의 일제강점기보다는 훨씬 긴 역사이다. 여러 사정에 따라 그 역사를 대강 훑어보기로 하자는 생각으로 이 논문을 작성하였다.

본고는 이 논문에서 후삼국시대의 개창시기에 대해서 동아시아 여려국가들과 비교하며 새롭게 제시해보았다. ‘신국가 건설에 초점이 맞춰진 우리나라와는 달리 중국과 일본의 경우 그 시대가 도래되도록 만든 특정 배경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에 그들과 같은 관점에서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난 889년을 후삼국시대의 개창시기로 주장해보았다.

또한 후삼국시대를 크게 세 시기로 구분했는데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전기시대는 수많은 반란세력들이 난립한 와중에 이미 거대한 세력을 형성한 양길과 진훤, 그리고 여전히 건재한 신라가 공존하던 때였다. 중기시대에는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와 후백제의 진훤을 중심으로 대강의 흐름에 대해서 설명해보았다. 후기시대에는 궁예를 축출한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후백제의 진훤과 치열한 공방전 끝에 후삼국시대를 통일한 때이다.

이처럼 후삼국시대는 인물을 중점으로 파악한다면 시대구분이 뚜렷하게 가능한 편이다. 지금부터는 한가지 제안을 해보고자 한다. 조금 주제를 벗어난 말이라지만 본고는 후삼국시대를 구분지으면서 단 한차례도 발해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후삼국시대는 889~936년까지 존속했다. 이 시기는 신라 말기에 해당하는데, 926년까지 북쪽에 발해가 존속해 있어 이른바 남북국시대로 불렸으므로, 926년 이전까지 포함해 후삼국시대로 보는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문제점이 있다. 발해가 삼국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서일까? 그렇지도 않다. 궁예는 발해와 외교전을 벌였고, 신라는 발해와 동맹한 사이였다. 또 발해가 멸망했을 때, 발해왕자를 비롯한 발해 유민들을 포용한 것도 후삼국시대의 고려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후삼국시대의 명칭문제에 대해서 전혀 생각해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후삼국시대를 대체할 명칭은 없을까?

슬픈 궁예의 저자이신 이재범 교수는 후삼국시대의 명칭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며 '전국시대' 혹은 '호족시대'라는 명칭을 쓰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호족시대라는 명칭에서도 역시 발해가 제외되는 느낌이 강하다. 본고는 임의로 신라 말기 반신라적인 새로운 나라가 신라에 독립하여 세워지거나 옛 고구려, 백제, 가야등의 후예들이 그들의 부활을 내세우며 부흥국을 세웠었다는 의미로 '독립부흥시대'로 지어보았다.

후삼국시대는 결코 짧은 역사를 지닌 시기가 아니다. 한국 왕조의 특성상 한 왕조가 적어도 500년동안 유지되고, 몇 번씩 침략해오던 외세를 방어하는 것이 전쟁의 전부였다. 그러나 후삼국시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한 전국시대로, 중국과 일본의 전국시대처럼 난세의 영웅들이 등장해 자웅을 겨루는 역사이다. 단순히 신라 하대의 혼란으로 빚어진 고대와 중세의 연결고리로 보기에는 역사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아쉬운 소재가 아닐 수 없다. 후삼국시대의 재평가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5. 참고자료

 

문헌자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고려사

고려사절요

 

학술자료

권영오, 신라하대와 신라말, 역사와경계 제90, 2014.3, 39-79 (41 pages)

 

도서자료

이재범, 슬픈 궁예푸른역사, 200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11.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1996

이도학, 궁예진훤왕건과 열정의 시대김영시, 2000

임용환, 한국고대전쟁사3. 부흥웅동과 후삼국혜안, 2012

강봉룡, 바다에 새겨진 한국사한일미디어, 2005

 

인터넷자료

네이버 블로그, Juwang (2014.02.17) “원종애노의 난과 진성여왕

http://blog.naver.com/hmjin80/120207755543

네이버 지식백과 - 원종·애노의 난 [元宗哀奴]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원종·애노의 난 [元宗哀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위키백과 - 견훤

네이버 블로그, 학당 (2004.06.04.) “후삼국시대

http://blog.naver.com/micro21c/20002966110

네이버카페 삼국지 도원결의, 만력대제 (2012.06.02.) “후삼국 시대 전투

http://cafe.naver.com/sam10/309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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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령목 2013. 1. 5. 15:05

국민참여재판을 확대해야한다 찬성

안녕하십니까. 국민참여재판을 확대해야한다의 찬성측 입안 OOO입니다. 국민참여재판이란 법률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재판 또는 기소에 참여하여 사실문제에 관해 결정하는 제도입니다. 우리나라도 국민참여재판을 실현하기 위해 「국민의형사재판참여에관한법률」이라는 특별법을 제정하여 실제로 한국 고유의 국민참여재판제도를 시행하고 있으나 그 범위는 1심에 한정하여 형법의 특수강도강단등의 악질범죄에 해당하는 특수한 사건에 국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국민참여재판이 당장 확대되는 것이 아닌 철저한 수정․보완이 이루어진 후에 국민참여재판의 확대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인 사법권으로부터 우리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서 국민참여재판의 확대를 지지합니다.

첫 째, 헌법에 명시된 법안보다 상식적․도덕적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

최근 재판과 관련된 기사들을 보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재판결과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가령 60대 할머니가 환자로서 병원에서 성폭행당하고 자살했는데도 가볍게 형량을 내린다던가 어린 아이가 갈기갈기 찢기어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음에도 술에 취했다는 이유로 가벼운 형량을 내린다던가. 결국 이렇게 가벼운 형벌을 받은 범죄자는 교도소를 드나들면서도 출소해서 다시 성폭행을 하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단지 법에 적혀있지 않다는 이유로 이런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대한민국 시내를 떳떳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 오히려 국민에게 큰 위협이 됩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판사들의 이해가 안되는 판결은 결국 헌법을 참고하여 결정한 것입니다. 이런 판결에 우리 국민들은 애꿎은 판사만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국민참여재판은 살인, 강도, 강간등의 중한 범죄를 대상으로 하고있으며 특히나 이슈화되는 것이 바로 이런 중범죄에 대한 오판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헌법의 사각지대에서 이런 중범죄자들이 교묘하게 빠져나갈 여지를 막기 위해서 국민참여재판의 확대는 꼭 필요합니다.

둘 째, 사법부를 국민 스스로가 감시할 수 있는 제도다.

‘부서진 화살’이라는 영화로 앞서 말했듯이 우리나라 국민들은 사법부의 횡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국민들이 재판과정이 의심스럽고 못 미덥다면 사법부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감시하는 활동이 바로 국민참여재판입니다. 또 이와 더불어 국민참여재판의 재판 전 과정을 보고나서 실제 배심원들처럼 똑같이 결론을 도출해내는 모의배심원제도인 그림자배심원제도가 있습니다. 그림자배심원제도는 주 배심원단에 노출되지 않고 방청객을 가장하여 재판과정을 지켜보는데 차이가 있으며 평결내용이 판결에 반영되지는 않지만 평결과정이 판사에 공개됩니다. 이러한 사법부를 감시하는 제도들은 법원이 국민참여재판의 활성화와 사법부의 신뢰를 회복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입법부, 행정부 말고 국민들 스스로가 사법부를 감시할 수 있도록 국민참여재판의 확대에 찬성합니다.

셋 째, 배심원들의 판단능력은 신뢰성이 있다.

판사들은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수백분의 일의 경쟁률을 뚫고 올라온 전문가입니다. 사실 국민참여재판에서 가장 염려되는 점이 전문성이 결핍된 배심원들의 판단입니다. 이런 배심원들은 단지 감정에 따라 판결이 내려질 가능성도 없지않아 있습니다. 이러한 면만 본다면 객관적이지 못한 국민들보다는 판사가 홀로 판단해보이는게 나아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다릅니다. 2008년에 국민참여재판을 시행했던 우리나라에서 2011년말 까지 도출된 배심원의 양형 의견중 92.6%가 법리적 판단을 중시하는 법관의 판결과 일치했습니다. 서울 지역의 한 검사는 배심원들은 오히려 법관에 비해 유죄 증명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고 시사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배심원의 판단능력은 신뢰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지금 당장 국민참여재판을 확대하라고 하면 문제점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국민참여재판이 이미 성행한 미국에 비해 초기단계에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개정의 여지가 남아있습니다. 오래전부터 배심제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의 사례를 통해, 배심원들의 전문성 부족, 지역 주민으로 이루어진 배심원단의 이해관계 및 개인적인 이해관계 개입 등의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음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섣부른 배심제의 도입은 여론재판과 같은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배심제를 이미 도입해 실행하고 있는 다른 국가들의 사례와 지난 5년 동안의 시행 결과를 꼼꼼히 되짚어본다면, 지금의 한국형 국민참여재판 제도를 보완하여 우리나라의 상황에 알맞도록 성공적인 국민의 사법참여를 이끌 수 있으리라 기대해 봅니다.

by 초령목 2012. 12. 15.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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