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보존관리(모니터링)

 

1. 목조문화재

 

  목조문화재는 재질의 특성상 습기, 화재 및 충해에 매우 취약하다. 습기는 목재부식의 직접적인 원인이므로 건물에 습기가 차지 않도록 수시로 환기시켜 건조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비 온 직후에는 목조물 주변이 침수되지 않도록 배수시설 등을 점검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화재 역시 목조물에 치명적이다. 하지만 화재는 자연재해를 제외하고는 그 피해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상적인 관리의 각별함이 요구된다. 목조문화재에 소화기, 소화전 시설유무와 제대로 작동하는지도 점검해야 한다. 특히 낡고 노후한 불량 전기시설물이나, 규정에 정하지 않은 불법 전기 시설물 등으로 누전으로 인한 화재의 위험요소가 없는지 꼼꼼히 점검해야 한다. 담뱃불, 취사행위 등으로 인한 화재를 사전에 막기 위해서라도 목조문화재 내부와 주변에서는 반드시 금연 및 화기엄금 구역으로 정하여 이를 실천하는 것도 화재예방을 위한 필수 조치이다.

 

2. 석조문화재

 

  우리나라 석조문화재의 대부분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석조문화재는 석탑, 석등, 부도의 경우처럼 자연석을 별도의 가공과정을 거쳐 여러 부재로 조립하는 경우도 있으나, 자연암반을 이용한 마애불 같은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 종류만큼이나 보존에 있어서 매우 까다롭고 위험할 수 있다. 석조문화재는 외부환경에 직접 노출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온도, 습도의 변화는 물론 강한 햇빛과 비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대기 중 환경오염으로 인해 산성비로 인한 피해가 점차 누적되어 석조문화재에 치명적인 해를 끼치기도 한다.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적당한 일조(日照)와 산성비 피해의 최소화 등을 위해 보호각을 씌워 보호조치를 취하기도 한다. 석조문화재도 목조문화재와 마찬가지로 주변습기를 차단하고 적당한 통풍을 유지시켜 주어야 한다. 특히 겨울철 호우 직후의 강추위는 석조문화재의 틈새에 얼음을 생성시켜 석조문화재에 금이 갈 수도 있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를 요하기도 한다. 인적이 드문 산간오지나, 길가에 위치한 석조물도 각별한 관심과 지속적인 관리가 절실하다. 이들 문화재는 무단 훼손과 도난피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분별한 탁본행위도 자칫 훼손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소유자나 관계기관에 탁본의 목적을 밝히고 반드시 사전 승인을 얻은 뒤에 해야 한다.

 

3. 등록문화재

 

  등록문화재의 대부분은 대한제국 시기에서 한국전쟁 시기 전후까지의 근대건조물로 콘크리트나 벽돌구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한 등록되어 있는 근대문화유산의 대부분은 현재까지도 사용 중이고, 공공시설의 성격이 강해서 그 규모도 큰 편이다. 무엇보다 등록문화재는 외관을 크게 변화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내부를 용도나 사정에 따라 수리 및 리모델링을 가능하도록 하여 보호와 동시에 활용이 가능한 문화재라는 점에서 기존의 문화재와 가장 크게 대별되는 특징이라 하겠다. 따라서 정기적인 구조체의 안전성 점검, 외관의 노후화 및 변형여부의 점검, 내부 리모델링 등 활용에 따른 점검, 문화재 주변 환경의 변화여부 등을 점검하는 것이 주요 보존관리 요령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4. 사적

 

구분

보존관리 요령

선사유적지

건물지(폐사지 등)

가마터

입석지

노출된 유구의 보존현황 및 훼손 여부 점검

매장문화재의 도굴 등 파손 여부 점검

문화재 주변환경의 변화 여부 점검

그릇된 관람행태로 인한 훼손 및 훼손가능성 점검

고분

왕릉

병충해로 인한 수목의 피해여부 점검

산불피해로 인한 위험요소의 점검

매장문화재의 도굴 등 파손 여부 점검

문화재 주변환경의 변화 여부 점검

관리시설 미비로 인한 훼손 및 훼손가능성 점검

그릇된 관람행태로 인한 훼손 및 훼손가능성 점검

성곽

궁궐

교육유적

국방유적

성곽의 훼손 및 붕괴 등 안전성 점검

관람객 등에 대한 안전사고 예방 관련 점검

건물지시설지 등의 유구에 대한 보존현황 및 훼손 여부 점검

문화재 주변환경의 변화 여부 점검

관리시설 미비로 인한 훼손 및 훼손가능성 점검

그릇된 관람행태로 인한 훼손 및 훼손가능성 점검

천연기념물

명승천연기념물 정비복구 또는 철거 등 여부 점검

천연기념물 포획채취 및 표본박제행위 여부 점검

탐승(探勝)행위탐승객들로 인한 피해발생 여부 점검

보호구역 주변 환경의 오염에 따른 변화 여부 점검

 

5. 민속자료

 

  전통가옥, 민속마을, 민속생활용품, 신앙유적지 등은 일반의 접근으로부터 쉽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그에 따른 보존관리가 절실하다. 특히 이들 민속자료의 경우 현재까지 사람들의 생활, 또는 풍습 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특성을 잘 이해하고 가꾸는 것이 중요하다.

 

출처

《한문화재 한지킴이》, 문화재청, 2010

by 초령목 2012. 5. 29. 23:53

1월 28일~29일
나라사랑! 겨레사랑!


 1월 14일 오리엔테이션을 원화여고에서 했다. 원화여고가 주최를 했다고 하지만 생각보다 먼거리였다. 나는 우리집에서 걸릴 시간을 생각하고 1시간 일찍 도착해서 선생님을 기다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선생님이 오시지 않길래 전화를 했더니 나는 경화여고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쩐지 경비아저씨가 나를 이상하게 지켜보더라... 다행히 경화여고 옆에 원화여고가 있어서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경화여고 도서관에서 오리엔테이션을 했는데 전체 2/3이 여자였다. 역시 이런 행사에 남자가 더 많이 참여한다는 것은 드물긴 드물다. 당황스러운것은 본지도 얼마 안됬는데 조끼리 모여서 레크레이션 합동게임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내가 아는 친구도 조가 달라서 정말로 처음보는 사람들과 게임을 해야한다는게 여간 어색한 일이었다. 레크레이션 1위팀이 교사 선택권을 가질 수 있었는데 첫판부터 벌써 팀워크가 안맞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굴러오는 호박인가? 큰 점수 걸린 게임만 이겨서 1위를 해버렸다. 그덕에 안면이 있던 와룡고 역사선생님이 우리팀을 이끌어 가기로 했다.

 오늘 오리엔테이션은 곧 떠나는 캠프의 맛보기였다. 역사교사 한분이 나오셔서 친일파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고 우리에게 과제를 내주신 것으로 마쳤다. 


 1월 28일, 아침 일찍 원화여고 앞에 모여야 했지만 늦잠을 자버려 지각을 해버렸다. 부끄럽게도 내가 도착하자마자 버스가 출발을 해버렸다. 이 캠프의 목적지는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인데 먼저 이육사문학관을 관람하며 갔다. 이곳에서 이육사의 친딸이신 이옥비 여사님을 만났다. 사실 와룡고 역동이라는 동아리에서 이미 뵌적이 있지만 그때는 졸려서 집중이 안됬었는데 오늘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다. 옥비여사님께서는 육사선생님의 어린시절 기억과 어머니에게 들었던 말, 육사의 지인에게서 들었던 말 등 여러 이야기를 해주셨고 다음으로 문학관장님께서 이육사가 살던 곳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해주셨다. 모든 말씀이 끝나자 이옥비여사님의 싸인을 받으려 했으나 육사시집을 사야만 싸인을 해준다길래 내 용돈을 생각해서 포기하기로 했다. 전에도 포기했는데 뭔가 아쉽다.

 이육사문학관으로 가던 그 꼬불꼬불하며 멀미가 날것같은 길을 벗어나 드디어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버스안에서 선생님끼리 하시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은근히 재밌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중 이육사문학관에서 시간을 너무 지체해서 일정을 앞당겨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일정보다 30분가량 늦게도착을 해버려서 복잡한 상태였다. 식당에서 보이는 한때 김이 모락모락 했었을 공기밥들에게도 뜨거운 김이 보이지 않았다. 관장님의 간단한 소개를 듣고 점심을 먹은 후 바로 박물관을 돌아야했는데 모든 일정이 쉬는시간 없이 이어졌다. 박물관에서 안동의 독립운동에 대해 자세히 알게되었는데 일제에 저항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40명인데 그중 10명이 안동출신이라는 점, 6.10만세운동의 숨겨진 주역, 그리고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최근에야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었다는 사실 등 여러가지를 알아갔다. 원래 다음일정은 독립운동가 1000명앞에서 추모하는 일정이었으나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그 다음일정이 기대된다. 오늘 가장 기대하는 것인데 바로 청산리대첩 체험인 서바이벌 게임이었다. 말로만 듣던 것을 실제로 하려고 생각하니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 그곳에서 박물관장님과 한 무술 사부님이 계셨는데 서바이벌장에서 나는 말로만 듣던 무예18기를 볼 수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것이 언월도인데 그 언월도가 사부님의 대학 등록금을 털어서 샀다고 한다. 하지만 간단한 시범만 보여줘서 약간 흥이 빠졌다. 실제로 대련을 했다고 생각하면 재밌었을텐데 그러기엔 너무 위험한가?
 이 무예18기를 본 후 실망했다. 내가 생각한 서바이벌게임이랑 많이 달랐다. 내가 생각한 것은 넓은 산에서 마음껏 뛰어가면서 총을 쏘는 것이었는데 지금 내가 하고 있는것은 그냥 가만히 앉아서 선생님들만 쏘는 것이었다. 그나마도 마음껏 쏘다가 가스가 금방 닳아 총이 발사가 안됬다. 색다른 경험이었지만 무예18기를 본것만으로 만족해야겠다.

 간단히 저녁을 해결한 후 지난번 1월 14일에 오리엔테이션때 우리에게 내준 첫번째 과제인 학예사 체험을 하게되었다. 그때 시간이 많이 없어서 따로 만나서 여러 의견을 나누었는데 막상 전지를 펴보니 그때 나눴던 것과 전혀 딴판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분명 체계적으로 생각했었는데 여기와보니 어느새 전지에 사람 뇌가 그려져있었다. 분명 다른조와는 차별화가 있었다. 이 독창성을 살려 열심히 했는데 가까이서 볼때는 안그랬는데 멀리서 보니 굉장히 허술했다. 아직 준비도 안끝났는데 우리 선생님께서 사다리타기를 통한 순서뽑기에서 당당히 1번을 뽑았다. 여차저차 대충 설명을 끝냈는데 그 다음조들의 설명을 듣고 바로 '망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조에서는 그 그림의 의미만 말했을 뿐이고 다른조들은 주제에 대한 설명을 했었기 때문이다. 1주 전에 만났던 그 패기는 어디가고 이렇게 됬을까?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다. 그것은 협동심이 중요한 축제였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했던 축제들중 가장 재밌었던 것 같다. 너무 즐기며 놀다보니 원래 9시까지였던 이 축제가 MC가 자기시간을 포기하며 우리를 더 즐겁게 해주었다. 참 많은 재밌는 일들이 있는데 쓰려고 하니 표현할 방법이 없다. 축제가 끝나자 덤으로 관장님께서 치킨을 한턱 쏘셨는데 한 테이블에 닭 2마리인것은 행복하나 둘다 후라이드라는 점에서 불행했다.

 모든 일정이 끝나자 한숨자려고 했는데 역시 남학생의 방이라 밤에서 여러 음단패설이 오갔다. 나는 그 소리에 잠을 못이루었고 결국 시끄러운 소리에 깬척하며 옆방에 가서 잤다.

 1월 29일, 아침일찍 일어났다. 어제 늦게 잔 바람에 일찍 못일어날줄 알았는데 용케 일어났다. 일정을 보니 미로체험이라 적혀있던데 미로란것이 참 궁금했다. 하지만 이 미로체험이 취소되 버리고 아침식사를 한 후 그냥 작별인사하고 떠나버렸다. 뭔가 허무했다.

 임청각에서 7층 전탑을 살펴보고 오늘의 메인이벤트인 미션게임이 시작되었다. 게임룰은 간단했다. 문제풀고 다음 목적지로 가면 되는 아주 간단한 게임이었는데 이것을 굉장히 헤맸다. 우리는 처음부터 헤맸다. 문제를 풀었는데 향암고택이라는 곳으로 가야했다. 주민들 말씀을 들으면 40분을 걸어가면 나타난다고 했는데 걷다걷다 지쳐서 택시를 타고 갔더만 40분은 무슨 물어물어 걸어갔다면 1시간 이상은 족히 걸렸을 것 같다. 문제를 해결하고 다음목적지인 안동전통문화컨텐츠박물관으로 갔는데 택시를 한번만 타야한다는 규정을 어겨버려 그곳에서 1시간이나 놀고 있어야 했다. 이것도 1시간 어찌어찌 버티고 나가니 이번에는 3층석탑이란다. 거기가 또 어딘고 하며 오랫동안 걸었는데 이미 1등은 물건너 갔고 2등도 물건너 갔고 남은 자리는 꼴찌 한자리였다. 모두가 다 왔다고 하는데도 우리는 이제겨우 문제를 풀고 있었다. 이것도 어찌저찌 겨우 끝내서 식당와서 안동찜닭 먹고 바로 집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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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체험북에 활동하면서 느낀점과 배운점 등 여러가지를 적어놨는데 집에가보니 없어졌다. 그래서 내 기억에 의존하며 적는다.

이육사 문학관에서 그의 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이옥사 여사님의 어린시절 어머니에게 들었던 아버지 이육사의 모습을 통해 어렴풋이 그를 회상했다. 우리는 단지 시인으로만 알고 있던 그를 이옥비여사님은 시로써 독립을 이루고자 했던 독립운동가라고 설명해주셨다. 내가 생각해봐도 당시 문학가들은 친일활동을 한 사람이 대부분인데 이렇게 윤동주와 더불어 일제에 저항하는 시를 남겼다는 것 자체게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이어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육사의 가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체험북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기억나는 것이 얼마 없다. 다만 이육사의 육형제들은 굉장히 우애롭다는 것이다. 경상도에서 상당히 알아주는 육형제라고 하는데 바늘가는데 실간다고 형이 있다면 그곳에 아우가 있었다고 한다. 이 육형제들은 퇴계의 정신을 이어받은 인물들로 이육사의 외가의 독립운동가이자 창의군 사령관이었던 허위의 정신을 이어받아 모두 독립운동을 했다고 한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은 전국에서 2번째로 큰 규모의 독립운동기념관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도별 독립운동가 평균이 30여명이 된다고 하는데 안동이라는 하나의 시에서만 그 평균에 약간 모자라는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고 한다. 전국민이 첨여한 3.1운동은 3월 2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경상도에서 처음시작되어 3월 8일에 안동으로 퍼졌다고 한다. 그런데 안동의 중심지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는데 그 중심이 경찰등 여러 중심업무지였다. 그래서 안동에서 사망자수가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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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청산에 대한 글  (0) 2012.01.26
by 초령목 2012. 2. 4. 23:01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로 개항된 후 일본을 통해 서양의 선진문물이 조선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를 두고 성리학에 심취해 있던 조선인 유학자들과 대신들은 개화에 찬성하는 개화파와 반대하는 위정척사파로 나뉘게 되었다. 하지만 명성왕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을 계기로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에 대한 반일감정을 가지게 되어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이 을미년의 물결이 을사년, 정미년의 파도로 이어졌다. 그리고 1910년 마침내조선이라는 바다에 나라를 빼앗기는 경술국치라는 비바람이 휘몰아 쳤다. 하지만 이 비바람을 견뎌내기 위해 의병을 통한 무력투쟁으로, 애국계몽을 통한 민중의 깨우침으로 독립 운동가들은 폭풍우속 한줄기의 햇빛이 되었으며 마침내 그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독립을 성취하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지식인들이 안창호, 김구 등과 같은 독립운동가라는 위인으로 남은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조선침략의 밑바탕이 되었던 을사늑약에서도 일제강점기 동안 독립 운동가들의 활동을 방해하는 자들 중에서도 조선출신의 일본 관리가 되어 일본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친일파들이 존재했었다. 그들이 주로 한 일은 독립을 위해 일하던 독립 운동가들을 고문하고 토벌하였으며 조선침략의 앞잡이가 된 대가로 일본에게 재물과 보호를 받았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 일제로부터 독립하여 건국된 대한민국에서는 당연히 우리의 독립을 위해 힘써주던 이들을 포상하고 대우하며 친일파들은 처벌하는 것이 당연하지 일이 아닌가? 하지만 결과는 애써 만들어 놓은 반민특위는 대한민국의 우두머리인 대통령에 의해 해산되었으며 위축되었던 친일파가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60여년이 흐른 지금 사회곳곳 많은 고위관리직에는 친일파의 후손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 친일파를 청산하겠다는 말은 그들이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권위를 빼앗는 것과 같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친일파를 비난하는 것은 빨갱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독립운동가의 대부분이 사회주의자였다는 사실을 보면 오히려 친일파들이 독립 운동가들을 단지 이념의 차이로 빨갱이로 비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친일파들은 미국이 자신들에게 우호적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투철한 자유주의자로 변신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친일을 했더라도 다방면에 민족에 끼친 공로는 많다.” 사실 이 말은 반박할 수는 없다. 일제 강점기 당시 문화, 예술 등에 활동한 사람들 대부분이 친일파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심지어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까지도 친일파였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친일문학가들은 민족을 위하기는커녕 일본을 찬양하는 문학 활동을 주로 했으며 조선인과 독립 운동가들이 고생할 때 그들은 재력을 바탕으로 편안히 제 사리사욕만 채운 사실을 보면 그런 상황에서도 수없이 많은 명작을 남긴 윤동주와 이육사가 자랑스럽다.

“그 당시 친일활동을 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이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창씨개명이다.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는데 조선인 모두가 동의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입학거부, 식량 배급 거부등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전혀 보장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을 보면 식민지 백성에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친일파들은 다르다. 어쩔 수 없이 친일파의 길을 걸어야 했던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자발적인 기회주의자였다. 이는 해방 후 미군정으로 갈아타던 친일파들을 통해 알 수 있다. 해방 후 친일파들은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지위가 유지되자 독립 운동자를 가두는 등 조선 백성과는 의지와 차이가 있었다.

현실적으로 해방직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남아 있는 친일파의 후손에게 그 죄를 뒤집어씌우기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자기 몸 희생하며 후손들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겠다는 독립 운동자들의 후손은 가난하게 살면서 자기 사리사욕을 채우겠다는 친일파의 후손들은 부유하게 누릴 것은 다 누리며 그 더러운 습성이 대물림되고 있다. 그렇기에 친일파 후손일지라도 벌은 받아야 하며 독립 운동가들의 후손에게도 도움을 주기 위한 방안을 생각해냈다.

그 방안은 친일파의 후손들에게 새로운 세금을 매겨 그 세금을 독립 운동가들의 후손들에게 주는 것이다. 물론 이는 국가에서 유공자에게 지원하는 것과는 별도여야 할 것이다. 떵떵거리며 사는 친일파 후손의 단지 몇%의 세금만 물어도 매년 모이는 후원금과 성금보다도 많을 것이다. 가난에 헐떡거리며 살고 있는 독립 운동가 후손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며 이 세금의 체납자에 대한 법도 따로 만들어 엄격히 처벌해야 할 것이다.

 

by 초령목 2012. 1. 26. 21:50
by 초령목 2011. 9. 29. 16:10



이름 주민등록정도는 가려줘야지
by 초령목 2011. 9. 16. 00:59

【제9회 전국 중․고등학생 우리역사 바로 알기 대회 조사보고서】

조선시대의 자기주도학습에 대한 조사

- 과거의 교육에서 오늘날 교육문제를 풀다 -

(제출일) 2011. 5. 30

(작성자 성명) 이 경희

(지도교사) 이 미영

대구 OO고등학교 O학년


주제 선정 이유

지난 2010년 필자는 가족과 모처럼 여행을 갔다. 전적으로 필자의 의견에 따라 이른바 ‘향교여행’을 떠났다. 대구향교를 시작으로 여러 서원을 거쳐 현풍향교로 끝을 맺는 이 여행에서 아직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곳도 많았으나 존재는 하지만 내비게이션으로 검색을 하면 전혀 다른 곳으로 안내를 하는 서원도 있었다.

이렇게 되자 이름뿐인 문화재로 방치되어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필자는 답사이후 대구의 조선시대 교육기관들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게 되었다. 우리는 대구향교라는 곳만 알뿐 나머지 서원, 서당 등은 전혀 알고 있는 것이 없지 않는가? 이에 필자는 대구시의 향교, 서원, 서당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조선시대 교육기관을 조사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외침과 내분의 상황에서도 국가를 이끌어 나간 인재들이 어떠한 교육을 받았는지 궁금하였다.

세계화라는 흐름 속에서 무한경쟁에 빠져있는 대한민국을 보며 인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다행히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전 세계와 비교를 해보아도 손색이 없고 이를 증명하듯 전국에 수많은 학교와 학원이 있다. 하지만 이 교육열과는 모순되게도 정작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인재는 부족한 듯 보인다. 조선에서는 어떻게 인재가 계속 출연할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은 이 물음에서 나왔다.

조사 진행 절차

① 향교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대구시의 향교와 서원을 답사했다.

(대구향교-칠곡향교-현풍향교로 가던 중 있던 여러 서원들)

② 대구시의 교육기관에 흥미를 느껴 대구시 조선시대 교육기관에 대해 조사를 해보게 되었다.

③ 대구시 조선시대 교육에 대해 조사를 해보니 조선 전체의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어 조선시대 여러 교육기관과 교육내용을 조사하였다.

④ 오늘날의 교육에는 인재를 보기가 힘든데 조선시대 당시에는 인재가 끊임없이 나왔다는 것에 흥미를 느껴 주제를 오늘날의 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조선시대 교육이 해결해 줄 거란 믿음으로 주제를 바꿨다.

내용 요약

현대의 교육과 조선시대의 교육에서 목적과 내용을 살펴보고 그 차이점을 찾아 현대의 교육문제를 풀고자 한다. 현대에는 경쟁심리로 인해 자율적으로 연구하는 것보다는 타율적으로 밀려서 공부하게 되는 경우가 많으며, 정작 깊이있는 연구가 필요한 대학교 시절에는 자율성을 놓아버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공부를 하더라고 아는 즐거움보다는 불안감과 강박증에 많이 시달렸기 때문이다. 즉, 자기주도학습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율적으로 공부를 하는 자기 주도적 학습이 공부에 훨씬 도움 된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경쟁심으로 인한 타율적인 학습은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는데 방해가 되는 존재이다. 그에 반해 현대보다 훨씬 가난했던 조선시대에는 인재의 대가 끊이지 않고 계속 나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조선시대의 교육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조선시대가 양난이후에도 망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조선이 인재양성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조선 태종대에 전국에 빠짐없이 향교를 설립했고, 성균관, 사부학당 등을 설치했다. 군주들의 그 같은 관학교육 진흥책에 의해 조선왕조는 비교적 빠른 기간에 많은 인재를 확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 각지에 초급교육기관인 소규모 서당들이 설립된 것도 인재양성에 큰 기여를 했다.

조선은 ‘교육열’보다 ‘학습열’이 높았던 것이다. 조선 시대의 공부는 참된 ‘나’를 찾아가는 긴 도정이며, 공부를 통해 인간의 마음에 있는 참된 본성을 회복하고 성인의 세계에 이르고자 하는 치열한 자기극복의 과정이었다. 즉, 공부는 ‘나아감’과 ‘물러섬’에 대한 고민이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는 성균관, 향교, 서원, 서당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들은 각각 기능은 달라도 제사와 인재육성이라는 뜻에는 일맥상통이었다. 성균관은 국립중앙대학이고, 향교는 국립지방학교이며, 서원은 사립지방학교였다. 그들의 교육은 대체로 스스로 공부를 하게 만들도록 도와주었다.

그 중 서원은 경상도 지역에 밀집돼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한국 5대서원이 경북에 있고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살아남은 서원이 가장 많은 곳도 경상도였다. 대구와 경북지방은 유교적인 정신이 널리 퍼진 지역이었다. 경북지방에 널리 퍼져있었던 서원도 유교정신이 퍼져 있었다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또 주목해야 할 것은 유교적인 씨족마을 즉 종가가 경상도 지역에 2/3이나 밀집되어있다는 것이다. 유교는 충·효·예·의를 강조하는 학문이다. 또 씨족마을은 대체로 양반들이 모여 살았다. 그 당시 양반들은 향약을 통해 유학을 보급하던 중심세력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자제들에게 유교정신을 강조하고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많은 인재들이 경상도에 나올 수 있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교육에 대해서는 여러 말들이 많다. 우리는 이러한 교육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그 해답은 조선시대의 교육문화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 교육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경상도, 더 나아가 대구에 살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선조들의 뜻과 지혜를 배워 대한민국의 인재로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목 차

Ⅰ. 서론 ……………………………………………………………… 1

Ⅱ. 본론 ……………………………………………………………… 1

1. 현대의 교육 ……………………………………………………… 1

1) 현대의 교육열

(1) 한국의 교육열

(2) 대구시의 교육열2) 현대의 교육목적

3) 현대의 교육내용

2. 조선시대의 교육 ……………………………………………………… 3

1) 조선시대의 교육열

2) 조선시대의 교육목적

3) 조선시대 대구의 교육기관

(1) 꿈의 대학 성균관

(2) 글의 문리를 깨우치던 서당

(3) 정치 참여의 길을 찾던 서원

(4) 관리의 꿈을 키우던 향교

대구향교

현풍향교

4) 조선시대의 교육내용

3. 조선시대와 현대의 교육 비교 ……………………………………… 12

Ⅲ. 결론 ……………………………………………………………… 13

Ⅰ. 서론

대학(大學), 큰 교육이라는 뜻과는 무색하게도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의 의미가 달라져있다. 대학은 단지 직업을 갖기 위한 한국만의 하나의 이력, 자격증에 불과하다. 대학 진학률이 80%에 달하지만 정작 공부를 하려고 대학에 들어가면 공부를 하기보다는 아르바이트로 시간을 쪼개가며 대학 등록금을 내기에 더 바쁘다. 이런 대한민국의 교육현실에서 우리가 인재를 기대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흔히 말하는 SKY에 입학한 학생들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들은 스스로 공부하며 자기만의 공부법을 터득했다고 한다. 그들은 타율적인 교육보다는 자율적인 공부를 강조한다. 학부모들은 그들의 말을 들으며 혹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아이에게 학원이니 과외니 하며 사교육을 부추기고 있다. 학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의 경쟁과 이기기를 원하며 타율적인 공부를 하는 학원에 등록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부모를 이기지 못하고 타율적인 공부를 강제로 하고 있다. 그들의 성적은 오를지 몰라도 학부모들은 이런 공부로 자신의 아들을 국가가 원하는 인재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우리나라를 인재부족국가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생각을 해보자. 우리보다도 훨씬 가난했던 조선시대에는 적어도 세도정치 전에는 인재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끊임없이 나왔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Ⅱ. 본론

1. 현대의 교육

1) 현대 교육의 목적

얼마 전 필자는 교육과학기술부 사이트를 둘러보다가 메뉴에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다. 우리나라의 교육이념을 찾을 수 없었다. 예로부터 내려온 ‘홍익인간’의 교육이념은 세계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은 이념이지만,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그 이념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공부해서 좋은 직장을 가져야 남들만큼, 아니 남들보다 잘 살수 있다는 부모들의 교육은 과도한 경쟁을 부르고 급기야 우리나라가 교육목표를 잃은 것조차 인식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이런 시대에 정말 필요한 교육이념은 무엇일까? 나 혼자 잘 살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여 함께 잘 살기 위한 공부. 바로 ‘홍익인간’이 아닐까?

2) 오늘날 한국의 교육열

리나라의 학구열은 OECD 평균 사교육비와 한국의 사교육비를 비교하는 통계 1을 봐도 알 수 있다. OECD 평균은 0.7%인데 반해 우리나라 평균은 2.9%로 4배가량 더 높았다. 이에 반해 공교육비 지출은 GDP 대비 4.2%로 OECD 국가 평균(5.1%)에도 못 미쳐 대조를 이뤘다. 사교육비 지출이 많은 탓인지 OECD의 국제학력평가에서는 읽기(2위),수학(2위),과학(3위) 등 모든 영역에서 최상위 수준을 보였다.

사교육비에 많은 돈을 쓰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나라가 경쟁사회이기 때문에 남들에게 적어도 뒤쳐지진 않기 위해 자연스럽게 교육열이 높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를 증명하듯 통계 2을 보면 많은 학생들이 사교육에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있으며 매년 사교육 규모가 커지고 있다. 또 필자가 참고로 들고 온 통계 2에 생략된 부분을 보면 우리나라 학생은 여러 과목들을 사교육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구시의 학구열은 오늘날의 과거급제자라고 부를 수 있는 서울대 합격자 배출한 고등학교를 전국의 고등학교와 비교해본다면 알 수 있다. 1999-2008까지의 전국 고등학교 서울대학교 합격자 수 누적 통계를 보면 서울·경기 지역을 제외한 非수도권 순위를 비교해보면 1위 포항제철고등학교(209, 전국 14위)와 3명차이로 2위에 경신고등학교(206, 전국 15위)가 위치해있다. 또 전국 고등학교의 서울대 배출 100위권에 대구 고등학교가 8개나 있었다. 이는 대전(7), 부산(4), 광주(2), 인천(2), 울산(1)보다도 많은 수치였다.

대구시 교육열의 완전체를 보여주는 수성구는 대구의 강남이라 불릴 정도로 전국적에서 인정할 만큼 유명하다. 옆의 그림 1을 보면 수성구 일반계고의 졸업생 합격자 수가 지역 평균의 2배를 넘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더 눈에 띠는 것은 수성구 사교육이 대구시의 평균의 약 1.5배에 달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교육덕에 많은 학생들이 보다 좋은 학교로 진학을 할 수도 있겠지만,

학생들은 과도한 학습량 속으로 내몰리고 학습의욕을 잃게 된다. 또한 부모들은 교육비 충당을 위해 가정교육에 소홀할 수도 있다고 본다. 이것으로 국가가 원하는 인재를 얻을 수 있을까?

3) 현대 교육의 내용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걸 배워서 어디에 써 먹어?’이다. 이는 학문을 통해서 길러지는 인성보다도 학문자체의 지식을 평가하고 채점하는 부분에 중요성을 둔 잘못된 결과이다.

또한 근대의 학문은 전공분야별로 세분화되어 그 내용은 깊어졌으나 전공분야간의 통합을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숲 속의 나무를 하나씩 들여다보다가 숲을 보는 안목을 기를 수 없었다. 현대에 와서 통합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제시되고는 있지만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본다.

2. 조선시대의 교육

1) 조선시대 교육의 목적

가만히 생각하오니, 인재는 정치를 잘하게 하는 본원이요, 학교는 사람을 만드는 터전입니다. 그러므로 역대에서 모두 이것을 중하게 여겼으나, 예로부터 학교가 흥왕할 때와 퇴폐할 때가 있고, 인재가 풍성하고 쇠잔할 때가 있음은 모두 일으킴과 양성함의 여하에 달린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5년 8월 22일

선왕조가 임진왜란의 엄청난 타격을 입고도 망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조선왕조가 세계 근세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518년이라는 장구한 수명을 견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사람의 수명은 육체의 건강에 의해 좌우되고, 건강은 건전한 정신에 의해 보장되는 법이다. 병들고 썩은 정신에서 건강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나 국가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조선왕조의 기적적 현상은 건전한 정신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올바른 교육에 의해 건전한 가치관을 지닌 인재를 부단하게 양성한 것이 토대가 되었다.

조선왕조는 신왕조 개창의 명분과 이념을 유학에 뿌리를 둔 성리학(性理學)에 두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한 국가 체제 확립은 왕조의 존립을 좌우하는 시급한 과제였다. 조선왕조가 건국 초부터 이를 구현할 수 있고 폭넓게 보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재 양성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에는 고려왕조의 멸망이 지식인의 양성은 등한시한 채 소수의 문벌귀족들만 권력과 부를 세습함으로써 초래된 것이라는 인식도 작용하고 있었다.

문무(文武) 두 과거(科擧)는 한 가지만 취하고 한 가지는 버릴 수 없으니 중앙에는 국학(國學)과 지방에는 향교(鄕校)에 생도(生徒)를 더 두고 강학(講學)을 힘쓰게 하여 인재를 양육하게 할 것이다. 그 과거(科擧)의 법은 본디 나라를 위하여 인재를 뽑았던 것인데, 그들이 좌주(座主)니 문생(門生)이니 일컬으면서 공적인 천거로써 사적인 은혜로 삼으니, 매우 법을 제정한 뜻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1년, 7월 28일

태조는 즉위 원년(1392) 전국의 모든 고을에 빠짐없이 향교를 건립하여 지방학생을 교육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1398년에는 성리학적 이념 강화와 고급인력 양성을 위해 개성과는 별도로 서울에 성균관을 건립했다. 태종도 각 고을에 파견되는 수령들이 학교교육에 매진하도록 하기 위해 그것을 그들의 근무성적에 반영하는 조치를 취하고, 서울에 다시 사부학당을 건립했다. 군주들의 그 같은 관학교육 진흥책에 의해 조선왕조는 비교적 빠른 기간에 많은 인재를 확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 각지에 초급교육기관인 소규모 서당들이 설립된 데다. 향교와는 별도로 사립 중등학교인 서원이 속속 건립되어 학생들은 인격 함양과 함께 과거시험을 위한 다양한 학문을 전수받을 수 있게 되었다.

2) 조선시대의 교육열

오른쪽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성균관 기숙사 앞에는 돌이 하나 있다. 이 돌은 유생이 시험을 잘못 보았을 때 올라가 스스로를 견책하는 돌이다. 성적이 잘 안 나왔을 때 이 돌에 올라가 자신의 종아리를 쳤다고 하는데 이것은 가장 수준 높은 교육인 자율 교육을 실행에 옮긴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은 교육열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사회였다. 선비 한 사람 한 사람은 치열한 구도자처럼 학문에 열중했으나, 수만 장의 고문서를 뒤져도 교육열로 지금처럼 사회적 물의가 일어난 예는 발견되지 않는다. 향교는 언제나 비어 잡초가 무성하고, 성균관은 생원들을 불러 모으기에 급급했다. 서당에서 훈장들은 아동들을 열심히 지도했으나, 치맛바람이 일어나거나 학력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길러내지도 않았다. 조선은 ‘교육열’보다 ‘학습열’이 높았던 것이다. 조선 시대의 공부는 참된 ‘나’를 찾아가는 긴 도정이며, 공부를 통해 인간의 마음에 있는 참된 본성을 회복하고 성인의 세계에 이르고자 하는 치열한 자기극복의 과정이었다. 즉, 공부는 ‘나아감’과 ‘물러섬’에 대한 고민이었다는 것이다.

퇴계 이황, 순암 안정복을 비롯해 화담 서경덕, 남명 조식, 교산 허균, 다산 정약용. 책이 다루고 있는 6인의 선인은 자기만의 방법론으로 공부를 했지만 공통점을 갖고 있다. 남명 조식이 남긴 글을 보자. “살아있는 법은 모름지기 마루 아래 수레바퀴 깎는 사람이 이해했나니, 다섯 수레 책의 의미도 무사(無邪)한 가지 속에 있었네.” 모든 공부는 삶과 함께 해야 사심이나 악의가 없다는 뜻이다. 화담 서경덕은 “멈출 곳에 멈추는 방법을 찾는 것이 공부”라고 말했다. 그의 시조 ‘술회(述懷)’에는 이런 공부철학이 잘 드러난다.

책 읽던 그 옛날엔 세상 다스리는 일에 뜻도 두었건만

달을 노래하고 바람을 읊으니 정신이 맑아지네.

공부가 의심하지 않음에 이르니 쾌활함을 알게 되고

헛되이 백 년 사는 사람만은 면하게 되었네.

화담 서경덕 “술회(述懷)”

이황은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철학담론만을 일삼았다는 오해도 받고 있지만 그의 일기와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무엇보다도 일상의 삶을 중요시했고 유혹이 많은 일상을 지키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식은 ‘목이 빳빳한 선비’라는 평가를 받으며 세상과 한 발짝 떨어져 지냈지만 세상을 향한 고민을 져버린 적이 없었다. 역사의식과 실천을 중요하게 여기며 공부가 공허해지지 않는 길은 결국 세상을 품는 마음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허균은 당대에 ‘세상과 불화한 자’라는 평가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과감히 관념에 맞서 인간을 감성과 미학적 상상력의 대상으로 바라보려 했다. 안정복은 공부를 여공(女工)의 '공(工)'자와 같고 부(夫)자는 농부(農夫)의 ‘부(夫)’자와 같아 여공이 부지런히 길쌈을 하고 농부가 농사에 힘쓰듯 공부를 해야 한다고 풀이했다. 다산 은 이론적인 앎과 실천적인 익힘이 동시에 이뤄져야 참된 앎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3) 조선시대 대구의 교육기관

“사람의 도리를 익혀 자기 몸에 젖게 한 뒤에 부드러운 모습으로 남을 가르쳐서 마치 하얀 종이에 물이 스며들듯이 상대방의 마음속에 가르침이 젖어들게 하는 사람”위의 글이 유교의 기본이념인 유(柔)·유(濡)·윤(潤)이다. 유(濡)는 스며들다·젖다의 뜻이며, 윤(潤)은 (물에 젖어) 붇다·윤택하다는 뜻이다. 세 글자 모두 '젖다'와 관련이 있는데 이것은 곧 옛 어진 이가 가르친 도(道)를 배우고 익혀서 자기 몸에 젖게 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을 유라고 했고, 유에는 '선비', '학자'라는 뜻도 들어 있다.

선시대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 중심의 사회이다. 또 유교에서는 교육이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이 매우 컸던 만큼 이를 위한 교육제도 역시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조선에서는 그런 교육기관으로 국립학교인 성균관을 시작해서 사부학당, 향교, 서원, 서당 등이 있었다. 각각 이름은 다르나 공자를 향해 제사를 지내는 석전제와 유교를 배워 역사에 남을 위인을 배출하자는 인재양성에서는 그 뜻이 일맥상통 이였을 것이다.

대구·경북의 교육기관을 예로 든다. 앞으로 나올 표는 경북으로 범위를 확대하면 문화재가 너무 많아져 대구시 문화재 현황만 나타낸다.

(1) 꿈의 대학 성균관

균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은 유생(儒生)으로 불렸으며, 이들의 생활은 엄격하고도 질서 있는 것이었다. 유생들의 하루 일과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경전을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였으며, 특히 유교를 공부하는 학생으로서의 명예를 소중히 여겼다. 책을 읽을 때에는 그 뜻을 명확하게 이해하여 그 속에 들어있는 깊은 뜻을 깨달을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하였다. 그들은 일상생활 속에서도 윤리도덕을 철저히 지키며 교수에게는 깍듯이 예의를 갖추는 등 국가의 장래를 맡아 나갈 인재로서 소홀함이 없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성균관에서는 공부하는 게 수월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외출은 잘 되지 않았던 반면 시험은 한 달에 30회 이상이었다니 수험생들의 스트레스가 대단했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나라에서 대주고 공부만 시키는데 학생들을 나태하게 내버려 둘 수 없었을 겁니다. 학생들은 그야말로 밥 먹고 공부만 한 것 같습니다”

이 글에는 우리나라의 쉬지 않는 근성과 입시 스트레스가 이미 조선시대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최고 국립대학이었던 성균관은 군역을 면제해주고 먹이고 재워주며 간간히 용돈도 주었다고 한다. 적어도 공부를 하는데 불편함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오늘날의 학생들은 대학에 가서도 생계걱정을 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시대는 뒤떨어져도 공부환경만은 지금의 대한민국보다는 좋았던 것이다.

(2) 글의 문리를 깨우치던 서당

당은 지금의 초등학교와 비슷한 입문 단계의 사설 교육기관이었다. 서당교육은 밑의 서원교육과 상호 연결되었으며, 일년 내내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하과와 같은 특별 교육 활동이 중심을 이루었다. 서당은 관료로의 진출을 위한 일종의 예비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교육 방법은 이미 배운 글을 소리 높여 읽고 그 뜻을 질의 응답하는 방법인 강(講)으로, 암송 낭독하는 배강(背講)과 책을 보고 낭독하는 면강(面講)등이 있었다. 학동의 능력에 따라 완전 학습을 지향하였으며, 글의 문리를 깨치는 방법에 주력하였다. 계절에 따라 교과 내용을 달리하고, 학동의 연령에 맞추어 놀이를 통한 학습방법을 시행하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서당교육에 관한 여러 가지 진흥책을 펼쳤으나, 조선 말기에 이르러 점차 서당의 교육 내용이 부실하고 형식에 그치게 되었다. 결국 서당은 나름대로의 교육적 기능에 앞서 문자를 해독하는 교육 수준에 그치다가 19세기 말에 이르러 근대화 정책의 흐름에 따라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대구에서는 문화재 등록된 서당은 성재서당, 독암서당, 고산서당으로 총 3개이고 경북은 도산서당 등 총 7개이다.(문화재 등록)

종목

명칭

소재지

관리

1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9호

성재서당 盛才書堂

대구 동구

인천채씨성재종중

2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2호

독암서당獨岩書堂

대구 동구

최웅태외 4명

3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5호

고산서당孤山書堂

대구 수성구

서병연

(3) 정치참여의 길을 찾던 서원

원은 사립지방학교이다. 서원에는 성균관이나 향교처럼 사당이 있는데 그 전체 구조는 향교와 같다. 공부하는 강당이 가운데에 있고 기숙사는 강당 양쪽에 위치한다. 그리고 사당은 강당 뒤에 있는데 이런 구조가 여느 향교와 같다는 것이다. 이 서원은 자기들이 표본으로 하고 싶은 스승을 모셔야 하니 이 스승의 연고지에 세우게 된다. 이 점과 관련해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그 스승이 생존 시에 자신을 모시고 있는 서원을 세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서원이 독자성을 갖고 정착하게 된 주요 계기는 퇴계 이황에 의한 서원 설립운동이었다. 그는 교화의 대상과 주체를 일반 백성과 사림으로 나누었다. 그러면서 실효를 거두기 위해 우선 도학(道學)을 천명하고 이를 밝혀야 한다고 하였다. 퇴계는 이를 담당할 주체를 사림(士林)으로 보고, 이들의 습곡을 바로 잡아 학문의 방향을 올바르게 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서원의 독자적 역할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한 셈이다. 퇴계는 이같이 향교에 의한 관학 아카데미즘의 한계를 지적하고, 이후 많은 서원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서당의 교육은 성리학적이고 도학적인 것이 중심을 이루었다. 관학과 달리 서원 교육은 사학 특유의 자율성과 특수성이 존중되었다. 교육 방법은 원규에 의한 규제와 원생 자신의 자율적인 실천 및 학습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 졌다. 교수 방법으로는 배운 글을 소리 높여 읽고 의리를 문답하는 강(講)이 기본이었다. 오늘날의 경우처럼 원생들의 출석 여부를 확인하고 학업 성적을 평가하며 독서 지침을 마련하기 위한 생활기록부도 있었다.

종목

명칭

소재지

관리

1-1

보물  제350호

도동서원강당사당부장원道東書院講堂祠堂附墻垣

대구 달성군

서흥김씨종중(유림)

1-2

사적  제488호

도동서원道東書院

대구 달성군

달성군(달성군수)

3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1호

예연서원禮淵書院

대구 달성군

포산곽씨문중

4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호

귀암서원숭현사龜岩書院崇賢祠

대구 북구

달성서씨대종회

서당의 제향의 봄과 가을에 치르는 엄격한 향사는 선현을 통해 바람직한 인간상을 제시하는 행사였다. 향사에 참례하는 자격을 정하고 사람을 뽑는 절차도 사회 교육적 의미가 있었다. 제향기능은 선현을 모시는 사묘(四廟)의 역할이다. 서원에 배향하는 인물은 향촌사회를 교화하기 위해 학덕이 크게 뛰어나거나 충절과 의리로써 모범이 될 만한 경우에 한정하였다. 조선 왕조는 이에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서원의 설립을 지원하였다.

대구시의 서원은 3개이고 경북지역의 서원은 12개이다.(문화재 등록)

대구·경북에는 서원이 많았다. 명종 19년(1564) 연경서원이 처음 건립된 이래 향촌 유생들을 중심으로 서원건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후 대구에서는 1605년 김굉필을 제향한 이 도동서원이 설립된것을 비롯해 이강서원, 구암서원, 표충사, 예연서원, 낙빈서원 등 많은 서원들이 건립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나라의 5대 서원인 병산서원(안동), 도산서원(안동), 소수서원(영주), 옥산서원(경주), 도동서원(대구)이 모두 경북지방에 있다는 것이다. 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살아남은 47개의 서원 중 14개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서원이 살아남은 곳이 경상도에 위치해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경북지방이 교육을 중시하며 인재양성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4) 관리의 꿈을 키우던 향교

교는 성균관의 하급 관학(官學)으로서 유교문화 위에서 설립·운영된 교육기관으로, 국가가 유교문화이념을 수용하기 위해 중앙의 지방에 세운 국립지방학교이다.

향교의 연원은 유교문화이념이 소개되는 때부터 비롯되지만, 향교가 적극적으로 설립된 것은 숭유억불과 유교문화이념을 정치이념으로 표방한 조선시대부터이다. 조선왕조는 유교문화이념을 수용하여 지방 사회질서를 유교문화 논리에 접목시키며, 과거제 운영을 유교 교육과 연계시키려 했다. 이러한 사회문화의 기초기구로서의 기능을 담당한 것이 향교이다. 따라서 국가는 군현제(郡縣制)의 정비와 함께 지방 수령들에게 향교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보호·육성을 촉구했으며, 이를 위한 재정적 지원도 적극적으로 했다. 따라서 향교는 지방 수령의 책임 하에 그 운영이 활성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수령의 적임자조차 부족한 상황 하에서 교관까지 선임한다는 것은 여의치 않았으므로, 교관의 파견이 법제도대로 활성화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제적 조치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생원·진사 또는 경학 지식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라도 관리를 선발하여 임시로 교관직에 보임하려고 노력했다. 이처럼 조선왕조는 향교 교육을 위해 여건의 불리함을 감수하면서도 교관의 파견에 많은 노력을 했다. 이는 조선왕조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널리 보급시키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향교의 기능은 첫째 교육을 통해 백성을 문맹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큰 목적과 둘째 지역전통문화활동의 근거지로서의 선도역할과 셋째 공자님을 위시한 여러 성현군자와 큰 스승을 모셔 제례를 올림으로써 예절의식을 널리 확산하고, 도덕적 인간상 구현 및 각인의 자아성취와 바람직한 행동의 변화를 추구하는 교육 목표를 분명히 하였다.

종목

명칭

소재지

관리

1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

대구향교대성전大邱鄕校大成殿

대구 중구

대구향교재단

2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6호

칠곡향교대성전漆谷鄕校大成殿

대구 북구

칠곡향교

3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7호

현풍향교대성전玄風鄕校大成殿

대구 달성군

경북향교재단

향교는 전국적으로 설치되었던 공립학교이기에 경북을 비롯한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하고 있다.

① 대구향교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신라 이래의 불교 정책을 억제하고 일상 생활 예절의 근본이 되는 유학을 널리 펴고 백성들을 무지로부터 해방하여 단군의 개국이념인 홍익인간을 실현하고자 국민교화정책을 펼쳤다. 그래서 1398년에 전국 234개 군현에 향교를 세웠다. 대구향교도 태조의 정책으로 이때 생겨난 학교이다.

현재 중구 남산동에 자리하고 있는 대구향교는 일제시대인 1932년 이전된 것이다. 이전 당시 대성전 등 기본 건물을 갖추었으나 생도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는 건립하지 못했다. 이는 당시 대구 유림단의 항일운동이 격심하여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활용될 것을 우려한 일제의 방해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해방 후에도 서구

식 교육이 지배하는 경향으로 인해 이들 건물은 건립되지 못하다가, 1990년에서야 비로소 동재·서재가 낙육재와 함께 건립되기에 이르렀다.

② 현풍향교

현풍향교의 설립연도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던 것으로 봐서 조선전기에는 설립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諸生의 先祖와 先父도 이 誠意였으니 대대로 하나같은 誠意가 金石이라도 가히 뚫을 것이니 그런 까닭에 끝까지 옮긴 후에 말게되니 지금은 학교를 옮길 것이니 진실로 능히 학교를 옮기는 誠意를 自家의 工夫에에 옮긴다면 誠意가 이르는 곳에 어떠한 일이라도 이루지 못하리요. 낮이나 밤이나 修業하여 뜻을 돈독히 하고 행도에 힘써서 항상 前賢에 이르지 못함을 羞恥로 삼아 勉勉이하여 마지아니한다면 지금의 어지러운 것이 특별히 옛날의 鄒魯之鄕이 된 데로 변하여 곧 風習을 옮기어 學校를 옮기기를 같이 하면 자못 손바닥을 뒤엎는 것 보다 더 쉽게 이르게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을까 만약 학교를 옮기는데 정성을 쓰고 爲己에는 精誠을 쏟지 않으면 依然히 這般의 사람이 학교를 비록 옮겼다 하더라도 옮기지 않음과 같으니 舊基의 좋은 것을 그 능히 夫人으로 하여금 알게 할까 果實이 나무에 있어 따지 않으면 입에 들이지 못하는 것은 常理인 것이라 하여 諸生들이 일어나서 대답하여 왈 삼가이 命令을 듣습니다 라 하거늘 이에 記文을 지었노라.

                        己卯(서기1759 英祖35)年 초여름 하순에 태수 김광태 지음

위의 글이 현풍향교의 김광태기적비에 새겨진 내용이다. 김광태가 1749년에 향교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낡은 현풍향교를 이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4) 조선시대의 교육내용

조선시대는 성리학이라는 학문을 중심으로 발전한 나라이다. 성리학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인간 자율성이 확대해 온 철학의 자취’이다. 이것이 조선시대의 철학이며 이 철학은 인간 자신의 의지와 실행력에 초점을 맞춰진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즉 인간의 자율성이 성리학을 발전시켰다는 뜻이 된다. 또 성리학은 우주의 생성 원리와 인간의 선천적 본성을 종합적으로 탐구하는데 이는 우리 인간을 하나의 부분이 아니라 우주전체와 관련지었다는 뜻이다. 조선은 알다시피 유교의 나라였다. 유교는 충·효·예·의 정신이 강조되었을 것이고 이러한 인성교육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학생들의 정신적인 성숙을 이룩했다. 유교는 이러한 수기치인(修己治人)을 기본이념으로 하고 있는데 개인의 도덕적 수양에서 출발하여 다른 사람에게까지 그 영향을 끼쳐 결국 사회 전체가 유교적 가치에 동화되는 이상적인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그런데 유교적 소양을 갖춘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유교 경전 및 역사에 해박하고 문장을 잘 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즉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지름길이자 유일한 길이었다. 결과적으로 과거시험을 통한 입신양명(立身揚名)은 유교의 핵심적인 실천 윤리인 효(孝)를 실천하는 것이었고, 관리가 되어 임금을 보좌하여 국가를 잘 운영하는 것은 충(忠)의 구현이기도 하였다.

3. 조선시대와 현대의 교육 비교

현대와 조선시대 교육의 가장 큰 차이는 자율적으로 공부를 하는 자기주도적 학습을 하느냐이다. 현대에는 자율적인 학습보다는 타율적으로 강제로 공부를 시키며 ‘공부 하는 이유’를 이해시키지 못한다. 게다가 그 높은 교육열에도 불구하고 그 교육열을 경쟁에 이기기 위해 사교육이라는 것으로 학생들에게는 ‘강제’교육에 불과한 타율적인 학습에 쓴다는 것이다. 현대 학생들은 학문자체의 ‘지식’을 배우고 있지 그 학문이 진정으로 원하는 ‘정신’으로 길러지는 인성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또 현대에는 공부를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조선시대와 비교를 할 때 공부의 효율 면에서 떨어지게 된 이유이다.

이에 반해서 조선시대는 어릴 때부터 유교적 정신을 통해 익혀온 인성교육이 그들이 자율적인 공부를 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그 높은 교육열을 독서와 자기 성찰로 시간을 보냈다. 이것은 꽉 막힌 현대의 도시생활과 비교해서 확 트인 자연경관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런 자연경관을 보며 마음을 가라앉히며 책을 읽어 집중력도 향상 시켰을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학문을 ‘지식’으로만 보지 않고 실천을 하는 ‘정신’으로도 보았다. 그것이 그들이 존경하던 공자와 맹자가 강조하던 것이기 때문이다. 또 조선시대에는 공부를 하나의 놀이 ‘문화’였다. 당시 경쟁심은 서로에게 상호작용을 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서로에게 시를 짓고 읊으며 칭찬을 하거나 지적을 했다. 그러면서 서로의 우정과 학문의 깊이는 깊어져만 갔다.

Ⅱ. 결론

알다시피 조선시대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 국가였다. 유교는 무엇인가? 인(仁)과 예(禮)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적인 학문이다. 그런데 성리학이 무엇인가? 인간의 본성을 공부하는 존재의 의미를 알기위한 철학적인 학문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의미를 찾기 위해 항상 책을 읽고 또 읽었다. 또 교육과 인재양성을 위해 전국적으로 향교를 세웠다. 그곳에서는 공부도 했겠지만 인성교육도 했다. 조선인들은 인성교육을 통해 충·효·예·의를 배웠다. 어쩌면 이런 성리학적 이념과 인성교육을 통한 정신적인 자세가 조선을 인재의 바다로 만든 결정적인 이유가 아니었을까?

우리나라는 사교육에 의존한 타율적인 공부를 하는데 반해 조선시대는 이미 500년 전부터 자율적인 공부를 하고 있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자율적인 공부가 훨씬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이미 증명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학원이라는 사교육에 목을 매달리고 있다.

한 시사프로그램에서 학원들이 학부모들을 유혹하는 실태에 대해 몰래 조사해봤다. 그런데 황당한 결과가 나왔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미국인들과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한데다 영어대회에서 여러 상을 탄 한 학생을 위장시켜서 학원 레벨테스트를 봤더니 그 아이 수준에는 터무니없이 낮은 레벨이 나왔다. 그리고는 학부모에게는 “이 정도는 부족하다. 이 상태면 다른 아이들에게 많이 밀릴 것이다.”라며 학부모님들의 걱정과 불안을 심화시키고 있었다. 이것이 요즘 학원의 폐단이라면 폐단이다. 어떻게든 돈을 벌기위해 학생들을 끌기위해 학부모의 불안 심리를 이용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그런 자율적인 공부는 인성교육에서 나왔다. 그런 인성교육은 어디서 나왔는가? 물론 조선이 유교 국가이기에 어디서든 배울 기회가 많았겠으나 대개는 가정에서부터 배웠다. 요즈음 부모들은 너무 자식들을 사랑한다는 구실로 너무 오냐오냐하며 키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정녕 자식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에게 인성교육을 접할 기회를 주어야 할 것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옛 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안다. 이것이 무엇인가? 조선시대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조선시대=옛날 것, 오래된 것,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조선시대의 것 중 뛰어난 것이 있다면 받아들이는 게 당연하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런데 오히려 현대에서 그런 실수를 하고 있다면 우리는 과거를 통해 배워야 하지 않을까?

참고자료

조선왕조실록

대구·경북역사연구회 - ‘역사속의대구, 대구사람들’

한국역사연구회 -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성균관 홈페이지 http://www.skkok.com/

대구향교 홈페이지 http://daeguhyanggyo.cafe24.com/

현풍향교 홈페이지 http://hyeonpung.skk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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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선통과 후 방학직전 7월 14일 국사편찬위원회로 먼 횡단을 했으나 본선 광탈의 슬픔 

by 초령목 2011. 9. 16. 00:49

하늘아래 두 개의 태양

1학년 이 경희, 장 성현, 박 영락

 우리나라에 대왕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누구인가? 열에 다섯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을 생각할 것이고 나머지 다섯은 조선의 세종대왕을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같은 대왕이지만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한명은 전쟁의 왕으로써 ‘대왕’으로 칭해졌으며 또 한명은 훈민정음 등 우리나라 과학과 문화에 영향을 준 왕으로써 ‘대왕’에 칭해졌다. 그들은 무엇이 다르기에 1600년이 지난 오늘까지, 60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대왕이라 칭송받고 있는 것일까? 하늘아래 두 태양은 없다지만 이 두명의 대왕들 앞에서는 그 말이 무색해 진다.

무武 광개토대왕(374~413) 

무(武)하면 떠오르는 대왕은 누구일까? 여러 왕들이 생각날 수도 있겠으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왕은 한명이다. 고구려의 19대왕이자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룬 광개토대왕이다.

 

‘광개토대왕’은 약칭

사실 광개토대왕이 그의 묘호로 알고있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그의 묘호는 상당히 길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을 줄여 광개토태왕 혹은 호태왕이라고 한다. 또 재위 시의 칭호는 영락대왕(永樂大王)이었는데, '영락(永樂)'은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최초의 연호로 알려져 있다. 팔방미인(八方美人) 광개토대왕 팔방으로 영토확장

장수는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야 한다- 드라마 '광개토대왕' -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하면 역시 영토 확장이라 할 수 있다. 일생동안 성64개의성과 1400개의 촌을 무너트렸으며 동으로 훈춘, 남으로 아산만에서 동으로 죽령 북서쪽으로 랴오허강(요하강) 이동의 만주지방 대부분에 해당하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한반도 내에서는 호우명그릇에서 볼 수 있듯이 신라에 고구려의 영향을 미치게 하여 보호국화 한다. 백제에 대해서는 원수라 여기며 강하게 몰아붙였다. 광개토대왕의 증조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백제의 공격에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396년에는 대대적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아리수 이북의 58개 성, 700여 개 촌락을 공략하고 위례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제 아신왕이 항복하여 노예가 되겠다고 하며 아신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명을 인질로 받았다. 400년 백제-가야-왜가 동맹을 하여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요청을 했다. 광개토대왕은 군대를 보내 왜를 격침했으며 가야의 맹주권이 금관가야에서 대가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광개토대왕이 일생동안 상대한 국가는 백제, 후연, 숙신, 가야,왜,동부여 등이었으며 이 중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격파하고 백제를 속국화 시켰으며 가야의 맹주권을 바뀌게 하였다. 그리고 숙신과 동부여는 정벌하여 고구려의 깃발을 꽂았으며 후연의 침입을 막아내며 동북아 1인자로 우뚝 서게 했다.

웅장한 광개토대왕릉비의 웅장한 기록   

  광개토 대왕이 죽은 2년 후 장수왕 3년(414년)에 세워졌으며 높이는 6.39미터, 글자는 모두 1,775자의 웅장한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은 광개토대왕의 비밀을 찾을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대국의 건설자가 백제와 후연과 싸우다 일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동북아의 제왕치고는 허무한 죽음이 아닐수 없다. 그렇기에 광개토대왕릉비의 가치는 여기서 빛난다. 예를들면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왜의 침입을 받은 신라가 고구려에 도움을 청했고 고구려군대를 본 왜군이 겁을 먹고 퇴각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또 이 광개토대왕릉비에서 고구려의 문장력 볼 수 있다.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엄은 온 세상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자 백성이 모두 생업에 힘쓰고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풍족해졌으며, 온갖 곡식이 가득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나 보다.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었다.

왕의 은택과 위엄, 부강하고 풍족한 나라를 이렇게 간명하게 쓰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이때는 5세기 초이다. 한문의 쓰임이 그다지 자유롭거나 널리 퍼져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 문장에서 마지막의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었다’의 원문은 ‘안가기국(晏駕棄國)’이다. 여기서 안가(晏駕)를 직역하면 ‘임금의 수레가 늦는다’고 하게 되는데, 왕의 죽음에 붙이는 무척 높은 수준의 말 꾸밈이다. 이런 문장구사력은 우연의 소산이 아니다. 당대 고구려의 문명이 국력의 신장과 함께 이렇게 올라와 있었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다만 이 웅장한 광개토대왕릉비에 논란이 되는 곳이 있다. 여러가지가 있으나 가장 논란이 되는 구절이 바로 이것이다. 중요한 글자가 훼손되었기 때문에 한일간의 의견차가 있었다. 신묘년에 왜 나라가 쳐들어오자,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가 왜를 쳐부쉈다. 그런데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로 쳐들어가) 그들의 백성으로 삼으려 했다. 6년 곧 병신년에 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토벌했다. 이 구절을 일본학자들이 임나일본부(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는 설)의 증거로서 일본 학자들은, “신묘년에 왜 나라가 쳐들어오자,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가 왜를 쳐부쉈다. 그런데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로 쳐들어가) 그들의 백성으로 삼으려 했다.”는 대목을 세 글자가 없는 상태에서, “신묘년에 왜 나라가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치고 백성으로 삼았다.”라고 번역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고구려가 신라를 돕기 위해 왜를 물리친 이야기이며 한 학자가 이 훼손된 글자를 복원하며 현재는 잘 마무리된 상태라 볼 수 있다.

그의 정복활동에 감춰진 국내통치

삼국사기에 따르면 광개토 대왕은 392년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지었는데 이는,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한 소수림왕의 정책을 계승한 것으로 국가와 백성들의 정신적 통일을 꾀하기 위한 종교정책의 일환이다. 아홉 개의 절을 평양에 창건했다는 사실은 평양의 중요성도 인식케 한다.  406년 궁궐의 중축과 수리는 커져가는 국가의 규모와 정치의 효율성을 위한 조치로 보이며, 408년 7월 나라 동쪽에 독산성 등 여섯 개의 성을 쌓고 평양 주민을 이주시킨 조치 역시 매우 의미심장한 하나 평양에 대해서도 모종의 조치가 뒤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주 정책을 실시한 바로 그 다음 달인 8월에 왕이 친히 남쪽 지방을 순행하고 있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아들 장수왕이 427년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것도 광개토대왕 때 이미 그 시초가 마련되었기에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평양의 중요성이 광개토대왕 때에 와서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도 위 짤막한 기록들에서 확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은 이러한 의미있는 국내통치와 국외정책를 통해 영토확장과 국내안정을 동시에 도모했고, 결과적으로 그 아들인 장수왕대에 고구려의 최대 전성기가 연출되었으며, 이백년간의 태평성대가 이루어진 기초가 되었다.

우리가 아직도 광개토대왕을 ‘대왕’이라 부르는 이유는 수천 년간 만주를 달렸던 옛날의 영광을 아직도 잊지 않았다는 그리움과 그 만주를 발판으로 우리나라를 ‘중국’이라는 당대 최강의 나라에 맞서 우리가 하늘이라는 자주적인 천하관을 가졌다는 자부심이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그를 광개토‘대왕’이라 부르는 것은 아닐까?


문文
세종대왕(1418∼1450)

 지금 당장 지갑을 열어 배추잎 1장을 꺼내보면 그 잎에서 온화하게 웃고있는 한명의 위대한 왕이 보일것이다. 그는 문(文)을 떠나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왕이자 조선의 위대한 성군, 조선의 4대왕 세종이다.

 
독서광 세종
"충녕은 책을 너무 읽어 눈에 진물이 다 나는구나. 눈이 다 나을때까지 충녕이 책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방안에 있는 책을 모두 치우도록 하여라." 책 안읽는 놈 치고 잘된놈 없고 잘된놈 치고 책 안읽는 놈 없다. 이 말을 증명하 듯 '잘된 놈'에 속하는 세종은 독서광이었다. 어릴적 한번 본 책을 100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던 세종의 책읽기 습관으로 왕세자였던 태종을 닮아 호전적인 성격이었던 양평대군을 밀어내고 왕위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세종은 임금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현명한 선비들을 많이 모은 집이라는 뜻의 '집현전'이라는 학술기관을 만들며 여러 학자들과 토론을 하기도 했다. 세종과 여러 말을 나누던 학자들도 세종의 학식에 감탄을 했다고 하니 세종이 선천적으로 영특한 것일수도 있겠으나 그는 후천적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책을 읽는 그의 생활에서 나온것일 것이다.


가갸거겨 훈민정음우리말이 중국말과 달라서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 뜻을 담아서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어 내놓으니, 모든 사람이 쉽게 깨우쳐 날로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함이다.-훈민정음 반포-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훈민정음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과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정신이 담겨져 있다. 법은 있으나 읽을줄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우리말로 된 글로 그들을 깨우치고 싶었던 세종의 애민과 중국, 일본은 물론 주위의 나라들이 각자 고유만의 글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민족의 글을 만들었던 애국이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게한 계기가 되었다.훈민정음은 세종이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에게 정치를 맡기고 여러 언어학 책을 읽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례적으로 '왕이 친히 만들었다"라 전한다. 여태껏 신하들과 함께 만들었다면 신하의 이름과 함께 나열을 했다. 하지만 이 훈민정음만은 달랐던 것이다. 훈민정음을 만들자 마자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던 세종이 고집했던 그 훈민정음은 현대에는 크고 밝은 글이라는 '한글'로 명칭이 바뀌며 자음과 모음을 합쳐 하나의 글자로 총 11172자를 쓸 수 있다. 이는 중국, 일본은 물론 영어조차도 불가능한 일이다.


조선의 르네상스 세종시대

세종대왕의 또다른 업적은 조선 과학기술에 혁명적인 발전을 가져주었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여러방면에서 천재라고 한다. 일화로는 박연이 세종 앞에서 편경을 연주할 때 세종이 한 음의 소리를 지적한다. 편경을 살펴보니, 먹줄 선이 덜 갈려 있었고, 때문에 제대로 된 소리가 나지 않았다. 편경에서 먹줄 두께는 반음 10분의 1의 차이를 가져온다. 그의 천부적인 음악감을 통해 맹사성에게 향악을 박연에게 아악을 정리하여 조선 음악의 기틀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세종도 손수 정간보라는 조선 고유의 악보를 만들었다. 그의 활동은 예술에 머물지 않았다. 훈민정음처럼 백성을 실질적으로 돕기위해 천문학 부분에서 혼천의 등을 설치하며 발전시켰으며 농사직설이라는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책을 만들었으며 또 장영실이라는 조선 최고의 발명가를 통해 자격루(물시계),암부일부(해시계)와 같은 시계, 측우기 등을 만들게 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쉽게 하였다.


전쟁왕 세종武와 文으로 나누어 세종이 文을 대표하는 왕으로 나왔다고 하여 그가 文에서만 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국방강화는 큰 임무였다. 북쪽으로는 김종서로 하여금 여진이 있는 땅에 4군 6진을 개척하게 하였다. 여담이지만 여기에도 일화가 있다. 세종대왕이 책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임금이자 백성들을 사랑하는 임금이라 그의 철학또한 달랐다. 그는 관리가 불편할수록 백성이 편해진다고 생각하여 관리들에게 부담을 주며 일을 시켰다. 그 중 김종서가 세종이 내주는 일을 버티지 못하여 자진해서 여진을 정벌하겠다고 하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찌되었든 이런 세종의 노력으로 북쪽지역을 안정시킴과 동시에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가지게 되었다. 남쪽으로는 왜구의 노략질로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자 이종무를 시켜 대마도를 정벌하게 했다. 대마도가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하였으나 왜의 노략질이 심해지고 이곳이 소굴이 되자 세종이 정벌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비록 일본에서 군사를 총동원하여 방어를 하려 노력하여 대마도 전체를 토벌할수는 없었으나 그들에게 큰 타격을 주며 회군하였다.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보였던 그를 보면 그에게는 조선이라는 우물이 너무 좁았을 것 같다. 하지만 오히려 우리에게는 세종이라는 선물을 받음으로써 우리민족이 문화민족으로 발전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세종에게 미안함과 동시에 감사함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그것을 알기에 아직까지도 그를 세종‘대왕’이라 부르는 것은 아닐까?


하늘에는 태양이 하나이며 우리에게는 광개토대왕이라는 태양과 세종대왕이라는 태양 2개가 존재한다. 하늘 아래 2개의 태양이 존재할 수는 없으나 태양은 우리에게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밤이라는 어두움을 없애주지 않는가? 그들에게는 송구스럽지만 우리에게는 하루 24시간을 낮으로 만들어주는 2개의 태양이 오히려 자랑스럽다.

우리가 10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왕들을 제치고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을 ‘대왕’이라 부르는 것은 그들처럼 특출한 새로운 ‘대왕’의 출현을 바라는 우리들의 바람 때문이지는 않을까? 우리의 소망대로 새로운 ‘대왕’이 출연하여 그들의 빈자리를 채워줬으면 좋겠다.

by 초령목 2011. 9. 8. 14:45




물론 벼락치기로 만들어서 기대도 안했는데 설마하고 봤지만 역시 탈락

by 초령목 2011. 5. 20. 02:18

역사논술(이경희) (1).hwp

첨삭지도


민족구심체를 찾아서

초령목

5월 중 가장 푸르다는 어린이날에 와룡고등학교 역동에서 우리의 민족구심체를 찾는 체험활동을 가지기로 하고 신청을 접수받았다. 나도 어차피 집에서 뭐하겠냐는 생각에 냉큼 신청을 했다. 하지만 막상 아침에 일어나니 ‘남들 다 쉬는데 우린 공부라니…….’라는 불만 섞인 생각도 들었으나 이미 신청을 했으니 때는 늦었다.

답사 전 내가 찾은 민족구심체, 자아의식

신청을 왜 했을 까라는 후회도 많이 했으나 공부를 안 해오면 노래를 부르게 한다는 협박공지를 받아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결과는 이런 물음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가서 뭘 배울 수 있는가? 정답은 나 자신을 알자라는 자아의식이었다. 역사왜곡에 대한 대항의 해답을 제시해주는 근본적인 대안이자 역사유물을 통해 선조와 나 사이의 교감을 연결해주는 고리가 바로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자아의식밖에 더 있을까? 만약 선생님께서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 이렇게 대답을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회는 오지 않았다.

선사시대 우리조상들의 구심체, 암각화

언제나 달릴 줄만 알았던 버스가 멈추는 방법을 드디어 터득했나보다. 버스가 멈춰선 곳은 고령 양전동 암각화가 있는 곳이었다. 암각화하면 울산 반구대 밖에 몰랐는데 나에겐 이런 암각화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런데 막상 보니 이 암각화가 낯설지 않았다. 예전에 대가야 박물관에서 이 암각화 모형을 본 기억이 났다. 아, 그게 이거군.

주위를 둘러보니 들판이었고 저 멀리서 강의 형태를 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옛날에는 이 바위근처까지 물이 왔었다. 수십만 년에서 수백만 년 동안 퇴적되며 강이 이 바위로부터 멀어졌다는데 이 바위는 멀어지는 강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한편으로는 자연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말을 이제야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암각화는 일명 인면암각화라고 불린다. 바위에 새겨진 그림이 인간의 얼굴처럼 생겼다는데 이 암각화를 처음 보는 사람은 결코 ‘아 이건 인면암각화구나’라고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사각형에 막대 같은 것이 달린 것이 인면이고 원같이 있는 것이 동심원문양인데 4개가 있다. 이 문양이 과연 인면일까라는 의문이 들어 여러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았다. 과거에 여기까지가 강이었으니 그 문양들이 수중생물을 의미하며 당시 수렵․채집사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인면이라고 불리는 문양 옆에 막대의 수가 다 다른 것으로 보아 달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저것은 인면이라 불리는 문양은 가면을 의미하고 동심원은 태양을 의미하여 제사를 지내던 곳이 아닐까? 여러 대화가 오고갔으나 우리는 확실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것을 말할 때 마다 모순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저 암각화는 백년에 걸쳐 만들어 졌을 수도 있고 천년에 걸쳐 만들어 졌을 수도 있다. 단지 도화지 안이라는 특정한 틀 안에 있는 그림이기에 우리는 ‘저것이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구나.’ 라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암각화 위에는 별자리를 의미하는 홈이 파져있다. 아마 이 별자리를 조사해보면 이 암각화가 최소 몇 만 년 전에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보는 우주는 언제나 팽창하고 빛의 속도가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기에 과거라고 불리는 그 시절의 우주와 현재라고 불리는 지금의 우주(하지만 이것도 과거지만)를 비교하면 알아볼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사례로 은천군에 있는 고인돌에 구멍이 134개가 파여져 있었는데 여기서 발견되는 별자리는 자미원, 직녀, 구진, 북극오성, 정수(쌍둥이 자리), 삼수(오리온 자리) 등이 있는데 기원전 3200년경의 하늘로 추정할 수 있었다. 또 용덕리 10호 고인돌 별자리는 그 당시 북극점이 용자리의 알파별이 라는 것을 보여주고 이 고인돌이 만들어진지 1500년 후의 고인돌인 지석리 고인돌에서는 북극점에 해당하는 별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북극점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이런 바위에서 별자리의 발견은 천문학적,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것인데 여기서 이런 별자리가 발견됐으니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나도 이 별자리 구멍을 실제로 보고 싶었지만 바위 위를 볼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보려 노력을 했으나 실패하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다음 행적지로 가야했다.

잃어버린 역사 ‘가야’의 구심체

나는 가야라는 나라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중학교 때 근 2개월 동안가야라는 신비의 제국에 흥미를 느껴 여러 책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우리 역사서에 가야를 다룬 책은 삼국유사이다. 그 후에 만들어 진책들은 대부분 삼국유사의 기록을 기본으로 두고 서술했을 것이다. 500년 역사를 기록하는데 조선은 수백 수천 권의 책을 썼는데 고작 삼국유사라는 몇 권의 책만으로 가야를 알자는 것이 황당하기만 하다. 언제 유득공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삼국사가 있어야 마땅한데 고려가 이것을 지은 것은 옳다. 부여 씨가 망하고 고 씨가 망하자 김 씨는 남쪽을 차지했고, 대 씨는 그 북쪽을 차지하고서 이름을 발해라고 했는데, 이것이 남북국 이다. 그러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도 고려가 이를 쓰지 않았으니 잘못이다.” 그 이에 앞서 누군가 가야의 역사를 기록했다면 그 신비의 제국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아쉽기만 하다. 우리가 아는 철의 제국 가야는 그저 500년 역사의 일부분일 뿐이다.

성씨의 구심체, 개실마을․한개마을

꽃이 피는 아름다운 골 산 같은 나비가 날아오는 곳, 조의제문으로 유명한 김종직의 5대손이 피신하던 곳, 뒤에는 선비를 상징하는 대나무 숲이 있고 앞에는 명산이 있는 풍수적으로 명당에 위치한 그곳이 바로 선산김씨의 종가 개실마을이다.

이곳은 종가답게 효를 강조한다. 이 효를 잘 실천했기에 죽어서 3품의 관직을 얻은 사람도 이 마을에 있다고 한다. 효의 기본적인 조건 두 가지가 있는데 편찮은 부모님의 배변은 맛보며 누워 계실 때에는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나누어 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조건을 보며 과연 이것이 그들이 추구했던 진정한 효인가를 생각해본다. 부모의 소원은 예나 지금이나 자식이 잘되는 것이다. 그런 자식이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며 그들의 부모에게 준다고 하면 어느 부모가 덥석 받고 싶어 할까? 오히려 자식에게 가는 미안함으로 빨리 죽어버리기를 바라지는 않을까? 또 이 효의 기본적인 조건을 악용하여 관직에 오르려 했던 사람들도 만만치 않던 걸로 기억한다. 그들은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버려서 나라에서 효자비를 세우면 보상을 얻어내기도 했다. 두 가지가 만약 진정 저 두 가지가 효의 기본이라고 하면 나는 내 자식이 손가락을 자르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죽을지언정……. 하지만 자기를 희생하면서도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에게 보답하는 옛 효의 정신은 계승받아 마땅하다.

중국 황실의 방은 9999개, 조선 왕실의 방은 999개, 일반백성들의 최대 방은 99개……. 이곳은 무려 99개의 방이 있는 마을이다. 마을 어르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르신께서 한곳한곳 설명을 해주셨는데 그의 말에서는 큰 자부심이 느껴졌다.

1이 아닌 큰 나루 마을, 새마을 운동전까지 사람 2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작았던 길을 가진 곳이 성산이씨의 집성촌인 한 개마을이다. 이곳을 돌면서 옛사람의 정성과 지혜를 느낄 수 있었다. 물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소나무를 못 옆에 두게 하면서도 결코 시들게 하지 않는 표현 할 수없는 신비함, 자식의 공부를 쉽게 할 수 있도록 지은 집! 아니 그들의 자식사랑! 개실마을에서는 효와 같은 정신을 강조했다면 한개마을에서는 위인들이 가진 정신을 강조했다. 대표적인 예로 자신이 호위하던 사도세자를 살리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하며 영조에게 감히 말을 하던 이 석문을 들 수 있다. 그는 지금으로 치자면 감히 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중위가 별 4개 달린 분 앞에서 명령불복종을 했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자신의 목숨보다도 신의를 소중히 여긴 그의 정신! 아니 그라는 인물 자체를 우리는 알아야 하며 본받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아파트라는 위로만 뻗는 현대사회보다 마을이라는 나무의 뿌리처럼 가지처럼 뻗은 옛 선조들의 그 마을이 우리에게는 더 좋은 환경이 되지는 않을까?

답사 후 내가 찾은 민족구심체, 공동체

답사 동안 내가 돌아다니던 곳은 옛 신석기인들이 함께 사냥하고 함께 먹고 함께 자던 그 향기가 배여 있던 암석화와 함께 마을을 이루어 볼 거 안볼 거 다보고 살아가던 마을들이었다. 우리 민족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우리는 하나라는 그 정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지금 우리에게는 그런 정신이 남아있는가? 우리에게는 나만이 존재하지는 않은가?

by 초령목 2011. 5. 20. 02:15


동북아시아의 역사 왜곡ing

초령목

중국과 일본은 우리나라와 상당히 인접해있다. 그래서 세계인들은 우리를 유교문화권이라고도 하고 한자문화권이라고도 하며 동북아시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그들과 우리는 닮은 점이 많으며 서로 협력해야 할 점도 많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그들과 갈라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입고 있는 옷들을 하나 둘씩 빼앗아 입고 있기 때문이다.

1860년, 녹둔도가 러시아와 청나라의 베이징조약으로 러시아의 영토가 됨

1909년, 간도를 일본이 철도부설권과 탄광 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인해서 강제로 청나라에게 넘어감

2002년,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로 만들기 위해 동북공정을 시작

2005년,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만들기 위해 다케시마의 날 제정.

우리는 기억해야한다. 녹둔도는 400년간 우리 조선의 땅이었고, 간도는 우리 민족의 발원지로서 수천 년간 점유해왔던 곳이며, 근대 조선과 청나라가 봉금지대를 설정 무인지대인 상태에서 우리 민족이 먼저 들어가 피땀 흘려 개간한 곳이며 또 고구려는 우리의 시조 고조선을 계승한 부여의 핏줄인 주몽이 세운 우리의 역사이다. 독도는 신라 지증왕때 이사부가 정복한 땅이며 현재까지도 우리나라의 영토이다.

이런 역사와 영토분쟁 속에서 동북공정과 독도 영유권 문제는 분쟁을 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순전히 자신들의 욕심으로 인한 억지이다. 남의 땅과 역사는 어떻게든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와 땅은 돌려받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역지사지를 모르는 이들의 왜곡을 이해할 수가 없지만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지켜야할 의무가 있다.

과거의 왜곡과 역사 왜곡

과거의 왜곡은 새로운 왕조에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특정 국가만 편애한다던가 특정인물의 영웅적인 면모만 보여줬다. 예를 들면 궁예를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왕건은 기록에는 모든 백성들이 환영을 하고 반겼으며 궁예를 추악한 폭군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지 얼마되지 않아 반란이 일어난 것을 보면 왕건이 부당한 방법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것, 즉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기록에는 ‘성군 왕건 납시오’만 기록하고 있다. 또 삼국사기를 기록한 김부식은 신라계 사람이고 사대주의를 믿는 사람이라 신라를 편애하며 글을 썼다. 그 덕에 신라에 불리하다거나 사대에 어긋난 것이 있다면 기록을 삭제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또 다른 예로 황희와 맹사성은 조선에서 검소하고 최고의 영의정으로만 알고‘만‘있겠지만 사실 그들은 황희의 사위가 범죄를 저질렀을 때 그 사건은 덮었을 뿐 아니라 황희는 뇌물과 비리로 24년간 탄핵을 많이 받은 인물이다. 이런 것이 과거의 왜곡이다.

역사 왜곡은 과거의 왜곡과 무척 다르다. 과거에는 특정 누군가를 부각시키기 위해 왜곡과 조작을 했지만 역사왜곡은 역사 자체를 다르게 해석한다. 중국은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고구려가 우리나라의 역사라는 것을 인정했으나 한족 특유의 新중화사상, 즉 ‘세상의 중심은 중국이다.’가 또다시 일어났다. 중국 주위에 있는 나라와 중국이 한번이라도 정벌했던 나라는 모두 자기의 역사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가 우리나라‘만’의 역사 → 장수왕의 평양 천도 전후로 천도 전은 중국의 역사로 천도 후는 한국의 역사로 인정하게하며 부분적으로 자신의 역사로 만들어가기 시작 → 현재는 고구려 자체를 자신의 역사라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현대 왜곡, 새로운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고조선 ⊃ 부여 ⊃ 고구려 ⊃ 발해, 고려) ⊂ 중국, (한반도 남부, 독도) ⊂ 일본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로 인정하게 되면 대한민국 교과서는 다시 써야한다. 고구려는 부여를 계승했고 부여는 고조선을 계승했다. 반대로 백제는 고구려계가 세웠고 고려와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했다. 그런데 우리의 시조는 단군왕검, 즉 고조선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역사는 신라와 조선으로 축소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하자면 고조선에서 내려온 이주민이 삼한을 발전․건국했으니 우리의 역사는 없는 것이다! 무섭지 않은가? 우리나라 역사 전체가 사라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가 중국의 한 지방, 소수민족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게 된다. 이미 칭키스칸의 대제국이었던 몽골과 몽고족은 중국과 전혀 상관없는 민족이지만 중국의 역사로 들어가 버렸다. 사실 중국 고유민족인 한족이 세운 나라는 별로 없다. 고조선 이후 한나라 ․ 당나라 ․ 송나라만이 한족이 세운나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저 나라들 말고 중국대륙을 차지했던 나라는 모두 중국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벌써부터 중국의 왜곡이 아무도 모르게 우리의 머릿속에 박혀있었던 것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내가 생각했던 현대 왜곡의 개념을 옛날부터 사용했다. 바로 일본서기라는 일본 최고(最古)의 역사서에 들어있다. 그 당시 기술력은 “한국 * (발톱의 때 * 새 발의 피 * 사막의 오아시스 * 로또 당첨확률 * 번개 맞을 확률 * 나와 지문이 같은 사람을 만날 확률) = 일본의 기술력” 이였는데 무려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고 한다. 물론 임나일본부가 한반도에 존재했기는 했지만 그것은 가야에 있던 일본인 사신들이 사는 곳이다. 게다가 임나일본부에 있던 사람들은 일본국왕보다 가야 왕의 말을 더 잘 들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백제가 칠지도를 무려 ‘받쳤다’고 한다. 그 당시 최최선진국에다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백제따위는 천을 걸치고 다니던 일본에게 칠지도를 ‘받치는’ 하찮은 나라라고 한다. 또 광개토대왕릉비에 있던 아주 유명한 글을 이렇게 해석했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 등을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는 훼손된 글자)).”

왜구들이 왜 저렇게 해석을 할까? 저게 왜색(倭色)인가? 이해를 못하겠다.

그리고 나오는 화제의 독도, 그들은 독도를 그토록 탐내는가? 사실 대한제국 까지도 독도를 한국 땅이라 인정했나니 러일전쟁 직후에 승리의 땅이라며 강제로 일본 땅으로 편입시켜버렸다. 그 후 2차 대전 패전 후 독도를 돌려받았지만 한번 먹으니 맛있다면서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재밌는 점은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그렇게 받고 싶어 하는 북방 4개 섬은 일본이 2차 대전 패전 후 러시아가 강제로 빼앗은 거라고 한다. 이 내용 왠지 뭔가와 비슷한데?

처음에도 말했지만 중국과 일본은 역지사지라는 단어를 모르는 듯싶다.

우리는 힘은 강하지만 결코 강하지 않다.

뭔가 말이 되면서도 말이 안 되는 듯 한 소제목이다. 말 그대로이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G20 안에 들 정도로 절대 약한 나라는 아니지만 우리주위에 있는 나라에 비해 우리는 한없이 약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리 맞고 저리 맞으며 역사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배운다고 한다. 현재는 과거에서부터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과거의 실수를 잃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보면 우리민족은 참으로 운이 없는 민족이다. 분명 우수한 민족인데 단군할어버지께서 위치를 잘못 잡으셨다. 옛날에 읽었던 책에서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다.

한국이 아프리카에 있었다면 지역의 맹주로 군림할 터인데, 하필이면 세계 4대강국(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을 뜻하는 것 같다) 주변에 위치하여 약소국의 설움을 받는다고 한다. 이는 공간적인 요인이 한 나라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중요한 요소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우리역사를 왜곡하게 되는 날이 올지 모른다.

우리가 역사 왜곡의 심각성을 모른다면 우리의 다음세대의 다음세대는 우리 고구려를 배우면서도 전 세계는 고구려를 중국역사,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세뇌될 때, 우리만이 진실을 알고 있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는 우리가 그들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일본과 중국의 교과서에 자신들의 역사라고 적어놓는다. 그리고 그 교과서로 배우는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세뇌를 당하며 당연히 ‘아, 이건 우리역사인데 저 밑에 조그마한 나라가 자꾸 자기 것이라고 우기네?’ 라며 애국심을 자극시키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배운 아이들이 자라서 진실을 알게 되도 그 진실을 부정한다. 그러면서 또다시 진실을 조작하면서 증거를 만들어 낼 것이다.

이러한 중국과 일본의 도발에 우리나라의 대응은 아직 미흡한 것 같다. 교과서에서도 고등학교는 근현대사를 중시한다. 우리나라의 특성상 중학교 때까지 실컷 놀고 본격적으로 공부하는 때는 고등학교이다. 그러면 자연히 고구려의 역사와 독도의 역사의 관심을 덜 갖게 되고 모르게 된다.

동아리 가입을 위한 과제로 시작했지만 생각만 하고 있던 역사왜곡을 글로 써보니 더 심각하게 느껴진다. 괜히 이렇게 써서 흔히 말하는 ‘뻘글’이 될까봐 걱정된다. ‘내가 너무 짧게 쓴 건가?’, ‘내가 너무 심각하게 쓴 건가?’, ‘내가 의도에 완전히 벗어나서 쓴 건가?’ 등의 온갖 생각이 떠돌고 있다. 역사 왜곡에 대한 내 생각을 중점적으로 쓰다 보니 자료가 없다고 문자가 오면 뭐라 할말이 없다.

동북아시아의 역사 왜곡ing = 동북아시아의 역사왜곡은 현재 진행형이다. 결코 현재완료형이 아니다.

by 초령목 2011. 5. 20.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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