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창은 어떤 인물인가?
오늘은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은데, 능창은 지금으로부터 1,000여 년 전 10세기에 활약했던 인물입니다. 고려 건국시기 왕건이 궁예의 부하로 활약하던 당시에 서남해안을 장악하고 있던 해상세력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견훤, 왕건, 궁예 등에 빛이 가려져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장보고의 뒤를 이은 이 지역의 해상영웅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장보고의 뒤를 이었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흔히 완도 청해진을 중심으로 국제무역을 통한 해상왕국을 건설했던 장보고가 사망한 후 이 지역 해양세력의 명맥이 끊긴 것으로 이야기되는 데, 능창의 존재를 통해 해양문화, 해상세력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능창은 전시상황이 아니었을 때는 서남해안의 해상 지리적 여건을 이용한 무역선단을 이끄는 그런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능창이 활동했던 주 근거지 어디였나?
목포 북항 쪽과 마주보고 있는 현재 신안군에 속한 압해도를 중심으로 인근 해역에 해상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해양사에서 완도에 장보고가 있었다면, 압해도에는 능창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능창의 존재를 증명할 만한 어떤 역사적인 기록이 있습니까?
능창은 일명 수달이라고 불렀는데, 섬 출신으로 바다 전투 수전(水戰)을 잘하여 수달(水獺)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역사서인 고려사에 기록을 통해 남아 있는 내용입니다. 다만 역사기록에는 능창을 일컬어 도적이니 적수니 하는 표현이 되어 있는데, 이는 승리자인 왕건의 입장에서 역사기록이 서술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상무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왕건이 궁예의 부하로 들어가서 신임을 얻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나주를 비롯한 이 일대의 해상세력을 장악한 공로 때문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능창은 왕건의 최대의 라이벌이었고, 맞상대하기 어려운 존재였다는 것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왕건의 라이벌이었다고 했는데, 두 사람이 전투를 벌인 적이 있는지?
두 사람이 전면전을 벌인 적은 없습니다. 능창이 왕건의 침입에 대비해 주변 세력을 규합하는 도중에 그만 왕건의 부하에게 생포 당하고 말았는데, 고려 건국의 역사과정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것 장면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구체적으로 상황을 설명해주시죠?
이와 관련된 내용이 고려사 태조 즉위년 기사에 실려 있습니다.
[왕건이 드디어 이 일대까지 진출하였는데, 압해현(壓海縣)의 능창(能昌)이 도망친 자들을 불러모으고 인근 세력들과 결탁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왕건(태조)이 말하기를 "능창이 이미 내가 올 것을 알고 반드시 도적과 함께 변란을 꾀할 것이니 비록 소수라고 하더라도 만약에 힘을 아우르고 세력을 합하여 앞을 막고 뒤를 끊으면 승부를 알 수 없는 노릇이니 헤엄을 잘 치는 자 십 여인으로 하여금 갑옷을 입고 창을 가지고 작은 배로 밤중에 나룻가에 나아가 왕래하며 일을 꾸미는 자를 사로잡아서 그 꾀하는 일을 막아야 될 것이다"라며 지시를 내렸습니다.
여러 장수들이 다 이 말을 따랐는데, 과연 밤중에 섬 사이를 지나는 조그마한 배가 있어 이를 잡아보니 그 안에 바로 능창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왕건은 당시 자신의 상관이었던 궁예에게 능창을 잡아 보냈는데, 궁예가 크게 기뻐하여 능창의 얼굴에 침을 뱉고 말하기를 "해적(海賊)들은 모두가 너를 추대하여 괴수라고 하였으나 이제 포로가 되었으니 어찌 나의 신묘한 계책이 아니겠느냐" 하며 여러 사람 앞에서 목베었다.]({高麗史} 卷1 太祖世家1 즉위전 기사)
이 기록은 912년에 능창이 압해도를 근거로 왕건과 대립하다가 결국 왕건에게 생포되어 제거되는 과정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만약 이때 능창이 왕건에게 붙잡히지 않았다면, 고려건국의 역사는 다시 쓰여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고려 건국과정에 우리지역과 관련된 그런 일화가 숨어있었군요. 그런데 다른 섬도 많은데 능창의 근거지가 압해도였던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압해(押海 혹은 壓海)' 압해'란 '바다를 제압한다'는 의미로서, '바다를 청소한다'는 의미의 '청해(淸海)'와 비슷한 맥락의 지명입니다. 이름에서부터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는데, 고대부터 서남해역의 요충지에 해당하는 곳이었다고 보여집니다.
능창이 왕건과 대립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능창을 견훤의 부하로 보려는 견해도 있으나 능창은 견훤과도 대립한 압해도의 독자적인 해양세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압해도 해양세력과 관련된 역사적인 일화는 고려말 몽고군의 침입을 물리친 사례에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고려말에 몽고군이 압해도를 침입했던 적이 있었나요, 간단히 소개를 해주시죠.
고려말 세계를 정복했던 무적의 몽고군도 고려를 정복시키는데, 상당한 애를 먹었습니다. 고려정부가 강화도로 천도하여 바닷길을 사수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몽고가 이를 눈치채고서, 서남해 해로의 요충지인 압해도를 공략할 계획을 세웠습니다.기록에 의하면 1256년 당시 몽고의 총사령관 차라대(車羅大)는 전함 70여 척이라는 대규모 함대를 직접 동원하여 압해도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압해도 사람들은 대포 두 개를 큰 배에 장치하고 바다 위에서 몽고군가 싸울 준비를 이미 하고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결국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몽고의 장수 차라대는 압해도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高麗史節要}) 남아 있기도 합니다.
몽고군이 압해도를 공격하려 했던 것은 그만큼 압해도가 서남해 도서지역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고 있고, 당시의 압해도 주민들의 해양세력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반영한다고 하겠습니다.



재미있는 일화들을 들었는데, 압해도에 이와 관련된 유적들이 남아 있는 것이 있는지?
꼭 능창과 관련된 유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압해도에는 송공산성을 비롯해서 해안가 토성, 거대한 선돌, 고인돌 등 이 지역의 해양문화, 해상세력의 유적들이 상당 수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유적을 잘 활용하면 압해도의 해양문화를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좋은 자산이 될 수 있겠습니다.
by 초령목 2010. 10. 24. 10:53

신라 말의 정치 동향 : 고려 건국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아내까지도 무참하게 살해했던 애꾸눈의 폭군.

이 말은 '궁예'라는 역사적 인물을 대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수식어이다. 이합집산의 혼란한 후삼국 시대에 여러 호족들을 평정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궁예는 어쩌면 역사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폭군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 관한 평가를 단순히 이런 말로 결정을 내리기에는 몇 가지 미비한 점이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한 인물에 대해 평가를 할 때 반드시 검토해야 할 사항이 있다. 즉 당대의 정치적 또는 사회경제적 토대, 그리고 민중들의 의식 수준과 사회 사상(또는 종교 사상)이 어떠한 밑거름이 되었는가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만일 궁예가 일반적인 선입견대로 단순한 폭군으로만 살았다면 그가 어떻게 여러 호족들과 민중들의 호응을 받으며 국가를 세울 수 있었는가에 대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궁예에 대해 평가를 내릴 때 한 가지 잣대만을 사용한다면 온당한 역사적 실체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궁예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라 말기의 정치 현상부터 진단해보아야 한다.(여기서는 '통일신라'라는 보편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한다. 뒤에서 설명을 하겠지만 필자는 신라가 3국을 진정한 의미에서 '통일'했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사건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신라말 호족 세력인 김헌창과 동아시아 무역권을 장악했던 장보고 등을 먼저 살펴본다면 궁예의 반란이 지닌 역사적 의미에 대해 좀더 구조적인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만주와 한반도에 나타난 고대국가는 원래 여러 호족 세력들의 연합체였다. 그 연합체가 왕을 중심으로 하여 노예제 사회를 이루면서 대토지 소유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계급 분화 현상은 신라 말기에 와서 극대화되었다. 후삼국이 성립되는 시기인 9세기의 신라 귀족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토지를 더 많이 차지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뒤에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의 집안 역시 대토지를 소유한 가문이었다는 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경주를 중심으로 한 권세가들은 물론이고 각 지역의 호족들은 자연경제의 핵인 토지를 얼마나 많이 차지하느냐에 따라 정치적 지위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중소 토지소유자와 소농민들의 토지를 싼값에 사들이거나 강제로 빼앗아 자기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따라서 호족들이 사병을 키우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이른바 대농장이 형성되어 대부분의 농민(또한 당시 인구의 거의가 농민이었다.)들이 소작농이나 심할 경우 노비로 전락하는 일이 허다하게 벌어졌다. 자연히 생계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져 걸식 생활을 하거나 유랑인들끼리 모여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토지의 집중으로 정전제가 무너진 가운데 과다한 조세와 공납, 부역 등으로 농민들은 날이 갈수록 궁핍해졌다.
이러한 토지 집중화 현상은 약화된 신라 왕권 내의 정치적 암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8세기를 전후로 신라 왕실에서는 서로 다른 핏줄을 타고난 왕자를 중심으로 호족들간에 권력 싸움이 자주 벌어졌다. 즉 최고 권력인 왕위 계승 싸움이 치열했다는 뜻이다. 8세기 중엽 이후인 혜공왕 때에는 '대공의 난'을 발단으로 하여 96각간이 서로 혈투를 벌이는 극심한 혼란이 계속되었고, 이에 따라 귀족들의 세력 다툼도 치열해졌으나 선덕왕이 즉위함에 따라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흔히 선덕왕 때부터를 신라 하대라고 부른다. 선덕왕은 중앙 귀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신라 하대의 정권은 귀족간의 연립 정부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곧 불씨가 되어 신라 왕실은 걷잡을 수 없는 정권 쟁탈전에 휘말리게 된다. 통계적으로만 봐도 하대 150년 동안 스무 번이 넘게 왕이 교체되었고, 즉위한 지 몇 달도 안 되어 암살되는 경우도 많았다.
9세기에 들어 왕위 쟁탈전은 더욱 심화되어 싸움의 규모도 점점 커지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김헌창의 반란(822년)이다.

김헌창의 반란 : 지방 호족들의 봉기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웅천주(공주)의 도독 김헌창은 자기의 아버지인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이유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국호를 장안이라고 하고 건원하여 경운 원년이라고 하였다. 무진(광주), 완산(전주), 사벌(상주)의 4주 도독과 국원(충주), 서원(청주), 금관(김해)의 사신들과 여러 군현의 수령을 위협하여 자기 부하로 삼았다. (중략) 김헌창은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김헌창은 단순히 정치적 권력 싸움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를 세웠다는 것이다. 원성왕계 귀족들과 무열왕계 귀족 사이의 왕권 다툼이라는 평가가 내려져 있는 이 반란은 중앙에서 파견된 토벌군에 의하여 중요 거점인 웅진성이 함락되고 김헌창의 자살로 끝나고 말았지만 신라 말기에 있었던 여러 반란 사건 가운데 당시의 정치 동향을 해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일개 귀족이 국가를 세울 정도로 신라 말기의 정치 분화 현상은 극대화되어 있었다. 김헌창의 반란 후 견훤의 후백제, 궁에의 후고구려 건국도 이러한 맥락에서 일어났다.
김헌창의 아버지 김주원은 785년에 선덕왕이 죽자 무열왕계 왕족 중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자가 되어 측근 귀족들에 의해 왕위에 오르려 하였지만 김경신(후에 원성왕이 됨)이 정변을 일으키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그는 세력 싸움에서 밀려나 명주(강릉)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의 아들 김헌창은 반대 계파가 왕위에 있을 때에도 중앙 관직에서 계속 활동하였다. 당시의 실력자인 상대등 김언승과 쌍벽을 이룰 정도의 세력을 거머쥐게 되었다. 그러나 김언승이 원성왕 계열인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자 그는 자연히 중심 세력에서 밀려나 웅천주 도독으로 전보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주변으로 밀려난 김헌창은 자기 아버지인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하였다. 김경신의 정변으로 부당하게 왕권을 빼앗겼다고 본 김헌창은 지지세력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는 순식간에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에 거점을 마련하였다. 그가 짧은 시간에 광범위한 지역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해당 지역에 이미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존재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주목할 점은 이 지역이 옛백제의 땅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신라 정부는 옛백제 땅에 살고 있는 호족들의 불만을 무마할 만한 정통성이나 견제력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헌창은 잘 훈련된 중앙 군대를 이길 만한 군사력을 지니지 못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김헌창의 반란이 일반 민중들의 지지를 별로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애초부터 왕위 쟁탈전에 초점을 두었던 반란이었기에 병졸로 동원된 양민들이 그를 위해 적극적인 싸움에 나설 가능성은 그만큼 희박했던 것이다. 이것이 뒤에 일어난 견훤이나 궁예의 난과 구별되는 큰 차이점이다. 도탄에 빠진 농민들을 위한 정치적 구호마저 역사 자료에는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김헌창의 반란 이후 지방 호족들은 중앙정부에 대해 더욱 불만을 갖게 되어 신라는 구심점을 점차 상실해가기 시작하였다.
이 반란 사건을 볼 때 신라 말의 왕실은 민중들의 삶은 도외시한 채 계열간의 왕위 쟁탈전으로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따라 국가의 존립 자체도 큰 위기를 맞고 있었던 것이니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는 신라 정부의 정통성부터 의심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갔다. 이러한 가운데 오히려 지방 세력 가운데 중앙 왕권을 대신할 만큼 막강한 군사력과 권력을 지닌 인물들이 나올 정도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장보고이다.

장보고의 반란 : 해상 무역의 중심지, 청해진

장보고는 사실상 신라 중앙정부를 능가하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 국가 안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는 그의 일생과 당시 정치 상황을 연관시켜 검토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장보고가 태어난 연도는 불확실하다. 사망 연도는 846년(문성왕 8년)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는 신라 말기의 호족이며 대상인이었다는 일반적인 평가와는 달리 당시의 민중들에게는 영웅적인 존재였음이 분명하다. 부패한 왕실의 무능력함에 혐오감을 느낀 민중들은 장보고의 민족적이고 대국적인 활동에 동조하여 스스로 민병이 되기도 하였다.
장보고의 본명은 궁복 또는 궁파로서 그 뜻은 '활보' 즉 '활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사회적 출신 성분이 어떠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여러 자료를 검토해볼 때 일반 평민 출신이거나 또는 천민일 수도 있다. 뒤에서 볼 수 있듯이 직접 왕에게 청해진 설치를 건의하고 왕의 승인을 받아 청해진 책임자가 되는 것으로 봐서는 6두품 이하의 신분을 갖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 모두가 추정일 뿐이다. 어쨌든 장보고라는 이름은 중국 당나라에 건너가 활동할 때 만난 대성 장씨를 따서 쓴 것이라고 한다.
그의 성장 과정이나 이와 관련된 자료는 그리 많지 않지만 짐작하건대 어려서부터 무예에 재능을 나타내었고 바닷가에서 태어난 탓에 물에 매우 익숙하였던 것 같다. 청년기에 접어들어 풍운의 뜻을 품고 잠수에 명수라고 알려져 있는 친구 정년과 함께 당나라에 건너갔다. 그곳에서 장보고는 온갖 난관을 헤쳐나가며 생활하다가 서주에 있는 무령군에 입대하여 무술 장교가 되었다.
당과 신라는 교류가 잦아 신라인이 당나라 군사가 되는 일이 그리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장보고는 이곳에서 군 생활에 복무하면서 여러 가지를 눈여겨 보았지만 그 중에서도 당나라 군대의 특성과 조직 체제 등을 관심있게 관찰하였다. 당시 당나라에는 각지에 절도사가 할거하고 있었기에 지방에 따라 군대의 특성이 조금씩 달랐다. 장보고는 그러한 지방 군벌의 속성과 군대 양성 방법 등의 이론적인 것이나 갖가지 병법에 대해서도 실제 경험을 통하여 몸에 익히게 되었다.
당시 중국의 동해안 지역에는 남으로는 양자강 하구 주변에서 북으로는 산동성 등주에 이르는 지역에 신라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른바 신라방이라는 것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8세기 중엽을 전후해서 신라와 당 사이의 국제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장보고도 쉽게 당나라 군대에 입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에 진출한 신라인들의 수는 점차 증가하여 해안 지역은 물론이고 도심에 거주하는 신라인들도 생겨나 자치구역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구역을 신라방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단순히 구역의 명칭이 아니라 당나라 내에 거주하는 신라인들의 권리나 생활을 밑받침해주는 정치적 구실도 하였다. 신라방의 구성을 보면, 총책임자를 총관이라고 불렀고 그 밑에 전지관이라는 직책이 있어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중국어에 능통하여 신라인과 당인간의 교섭에 나서기도 했다.
반면에 시골에 자리잡은 경우에는 촌락을 총괄하는 자치 행정기관인 구당신라소를 세워 일정 지역 내에 있는 신라인들을 다스렸다.
그렇다고 당나라 지방관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런 가운데 마찰이 생기기도 하였지만 신라인들의 자치 지역은 보통 신라인들의 손에 의해 꾸려나갔다.
특히 도심에 설치된 신라방의 사람들은 상업, 운송업, 조선업, 무역업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중에는 특별히 연안 운송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도 있었고, 양주, 소주, 명주 등지에서 아라비아, 페르시아 상인들과도 교역을 넓힘은 물론이고 중국과 신라, 일본 등 동아시아를 오가면서 국제 무역을 직업으로 삼는 자들도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라인들의 왕성한 활동으로 당시 동아시아의 해상 무역은 전성기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해안 지역 출신으로 바다에 익숙하였던 장보고 역시 번창하고 있는 해상 무역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국외 신라인들의 활동은 활발한 반면 당나라는 물론이고 신라도 중앙 집권력이 극히 약화되었다. 거의 매년마다 흉년과 기근 등 자연 재해에 시달려 유랑민들이 많아졌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도적이 되어 각지에서 횡행하였다. 바다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해적은 신라 해안에 자주 나타나 주민들을 마구 잡아가 중국의 중원지방에 노예로 팔았다. 무역선 역시 언제나 해적의 위협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을 직접 체험한 장보고는 신라인이 노예로 팔려가는 극심한 현실에 분노하였다. 장보고는 여러 조사 끝에 중국과 신라, 그리고 일본을 잇는 해상권이 안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국제 무역에 대한 지식을 다져나갔다.
이렇게 장보고는 스스로 해상권을 통괄하고, 신라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세력을 가져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장보고가 이러한 결론을 내린 정치적 배경은 물론 신라 왕실의 부패와 무능에 있었다.
장보고는 마침내 828년(흥덕왕 3년) 중국 본토에서 활동하겠다는 애초의 계획을 과감히 버리고 귀국하였다. 장보고는 왕에게 남해와 동지나해상의 교통 요충지인 완도에 해군기지, 즉 진을 건설하여 서해 무역로를 감시해야 한다고 강력히 건의하였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장보고의 말을 듣고 실행할 만한 군사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진골귀족 세력간의 대립이 심화되어 선덕왕 이후 귀족연립 정권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던 중앙정부로서는 완도까지 적극적인 통치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장보고의 입장에서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었다. 남은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장보고가 직접 군대를 조직하여 해상권을 장악하는 일뿐이었다.
이러한 내용으로 왕의 승인을 받아낸 장보고는 완도를 중심으로 한 인근 지방민들을 모아 민병대를 조직해 나가기 시작하였다.(당시 진을 담당할 수 있는 자격은 6두품 이상이어야 했다. 이런 점을 볼 때 장보고가 어느 정도 왕실과 관련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장보고의 민병대는 얼마 안 가 1만여 명으로 크게 늘어나게 되었고 장보고는 이에 자신감을 갖고 완도에 '바다를 깨끗이 한다'는 뜻을 지닌 청해진을 건설하였다. 사실 진을 설치한 것은 장보고가 처음은 아니었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기 이전의 진만 보아도 658년(태종무열왕 5년) 북진, 782년(선덕왕 3년) 패강진 등이 이미 있었다. 그러나 장보고의 청해진은 앞서 세운 다른 진과는 전혀 성격이 다를 뿐 아니라 그 주체도 상이하였다.
그래서 청해진은 설치 때부터 장보고를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세력 형성의 근거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신라의 군사력은 매우 미약해서 실제로 경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 외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한 국가의 군대라기 보다는 왕의 사병과 같은 위치로 전락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귀족들이나 호족들은 저마다 사병을 양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분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중앙 군대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에게 내려진 청해진대사라는 벼슬도 신라 관직체계에서는 없는 별도의 직함이었던 점도 이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청해진을 설치한 장보고는 본격적으로 해적 소탕작전에 나섰다. 그는 뛰어난 전략으로 해적을 물리쳤고 때로는 회유를 통하여 해적 세력을 와해시켰다. 장보고는 이러한 눈부신 활동으로 동지나해 일대의 해상권을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장보고의 해적 소탕 이후 신라인들은 해적들의 피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해상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장보고는 당-신라-일본을 잇는 해상권을 평정하여 국제 무역을 주도해 나갔다.
당시 신라를 중심으로 해상 무역이 발달하게 된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신라 초기 정권이 안정됨에 따라 귀족들이 여러 호사품을 찾게 된 이유도 한몫 거들었다. 그리고 신라 등지에서 중국으로 보내는 조공이 오가는 중에 사무역도 동시에 발전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조공도 무역의 하나로 편입될 정도였고, 일본의 경우에는 753년 외교 단절 이후 교역 물품이 희귀해져 반대급부적으로 두 나라간에 사무역이 더욱 성행하였다. 또한 발해가 북쪽에 안정된 국가를 세워 서해 북쪽 연안에서 시작하여 중국의 동해 북부 연안까지 자유스러운 해상 유통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점차 해상 교통수단도 발달하여 해상 무역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8세기 중엽 이후 일본과 거래할 때 신라 무역상들이 수출했던 물품 내용을 보면, 구리거울 등 금속제품과 모직물 등의 신라산 물품은 물론이고 향료, 염료, 안료 등을 비롯한 당 및 당을 중개지로 한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 지역 특산품 등이 있다. 신라상인은 그 대가로 풀솜과 비단 등을 가져갔다.
당나라와의 교역에서도 통일기 전에는 주로 특산품이 수출되었으나 통일기 이후에 접어들어서는 고급 직물과 비단 및 금은 세공품 등 고가품이 수출되었다. 또한 당시 신라귀족들이 애용하였던 향료 등 동남아시아 및 서남아시아산 물품들도 신라상인의 중개무역으로 수입된 것이었으니 이를 통해 사무역이 얼마나 성행했는가를 알아볼 수 있다.
장보고 역시 해적을 평정한 뒤에는 직접 무역에 나선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다룬 무역선도 대체로 이러한 물품들과 피혁제품, 문방구류들을 취급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장보고는 무역 활동을 통해 재력도 갖추게 되어 당시 신라 왕실에 버금가는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장보고가 외교 교섭까지 시도하였던 것은 이러한 물질적 기반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청해진을 중심으로 지방 호족으로 자리잡은 장보고는 840년(문성왕 2년)에 이르러서는 무역선과 함께 회역사를 파견하여 일본 조정에 서신과 공물을 보내었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일본이 거부 반응을 보여 별다른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지만 무역은 계속되었다. 그만큼 양국간의 사무역은 정치적인 관계를 떠나서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당나라에 대해서는 견당매물사라는 외교관의 책임 아래 교관선을 보내어 청해진이 교역의 중심지임을 홍보하는 한편 물품 내용 등 여러 무역 실무를 체계화시켜 해상 무역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회역사와 견당매물사라고 불렀던 교역사절을 파견하였던 것은 그가 일반 무역상인과는 달리 독자적인 세력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이를 통하여 장보고는 중앙정부를 대신하여 국제 무역을 관장한다는 것을 주변 국가에게 널리 알리려 했던 것이다. 일본의 지방관과 엔닌이라는 승려가 장보고에게 서신을 보내어 안정 보장을 요청했던 것은 일본.신라.당을 잇는 장보고의 해상 교통로가 당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시사해주는 점이다.
청해진을 중심으로 세력을 안정시킨 장보고는 중국에 있는 신라인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산동성 문등현 적산촌에 법화원을 건립하고 모든 운영비를 지원하였다. 이 법화원은 상주하는 승려가 30여 명이 되었고, 연간 500석을 추수할 수 있는 장전도 갖게 되었다.
법회 때에는 한꺼번에 250여 명이 참석하였던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장보고의 세력은 중국 동해안의 신라인 사회에도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청해진에 필요한 사람을 쓸 때에는 당시 관직의 절대 기준인 골품제와 같은 기존의 신분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유능한 인재들을 발굴, 스스로 자기 능력을 적극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
장보고가 큰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또다른 배경에는 당시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하고 있던 농민 등을 받아들인 데에 있다. 자연 재해 등으로 민중들은 기본적인 터전마저 잃어버리고 사방으로 떠돌기 일쑤였다. 가령 예를 들자면, 812년(헌덕왕 7) 흉년이 들자 170여 명의 유민들이 바다 건너 중국의 저강 지역까지 들어가 먹을 것을 구할 정도였으며 이 무렵 일본에도 수백 명이 건너가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구의 대거 이동은 사회 구조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극히 약화되어 흉년 등 자연 재해가 닥쳐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황폐한 고향을 떠난 빈민들은 새 터전을 찾아 외국이나 바다로 무작정 떠났다. 따라서 빈민들의 눈에는 장보고의 청해진이 적절한 피난처로 보였을 것이다.
장보고는 이렇게 찾아온 빈민들을 규합하고 새로운 활동 무대를 얻기 위해 모여든 인재들을 포용하여 8세기 이래 왕성하였던 신라인의 해상 활동 능력을 적극 활용, 조직화함으로써 그의 세력은 급속도로 성장해 나갔다.
이제 강력한 군대와 많은 선박을 보유하고 부를 축적하여 당시 가장 큰 지방 세력으로 자리잡아감에 따라 중앙정부의 정치적 분쟁에도 자연 관여하게 되었다.
중앙정부가 분열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성덕왕 때부터이다. 선덕왕 재위 기간인 8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중앙의 왕위 쟁탈전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었다. 장보고도 이 싸움에 휩쓸려들어가게 되었으니 그때가 흥덕왕대 이후의 일이었다. 이때의 일로 인해 장보고의 운명도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836년(흥덕왕 11년, 즉위 후 마지막 해이기도 하다.) 어느 날, 경주에서 왕위계승 분쟁에서 패배한 김우징(왕족으로서 뒤에 신무왕이 된다.) 등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청해진으로 피난해왔다. 왕족이 청해진을 피난처로 삼을 정도로 이미 장보고는 중앙정부와 버금가는 세력을 갖고 있었다.
2년 뒤인 838년(희강왕 3) 수도에서 재차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터져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였다. 이 정변을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한 김우징은 날마다 온갖 감언이설로 장보고를 설득하였다. 장보고는 사실 중앙정치에 관여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는 오직 18년 동안 지켜온 청해진을 중심으로 신라가 해상 무역의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는 일만이 관심사였다. 그러나 정권욕에 사로잡혀 있던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구국의 차원에서 거사를 일으켜야 한다고 다그쳤다. 김우징은 2년간 청해진에서 지내면서 장보고의 군사력이 얼마나 막강한 것인가를 실제로 보았기 때문에 그 힘을 자기의 정치적 야심에 이용하려고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그동안 정치에는 별다른 관여를 하지 않았던 장보고이지만 신라 왕실이 얼마나 부패해 있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청해진에서는 기울어져가는 신라의 국운을 다시 일으키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도 역시 인식하고 있었다.
결국 장보고는 김우징이 제시한 '구국적 결단'이라는 명분에 걸려들고 말았다. 장보고는 김우징에게 자기 군대를 내주었다. 김우징은 장보고의 군대를 이끌고 청해진을 나와 경주를 공격하였다. 결국 김우징은 반란에 성공하여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가 바로 신라 45대 왕인 신무왕이다.
비록 장보고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경주를 치진 않았지만 사실상 장보고는 자기 군대를 동원시켜 반란을 일으킨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개입으로 인해 장보고의 운명은 크게 뒤바뀌게 되었다.
정변 이후 신무왕은 장보고의 공을 높이 사 그를 감의군사로 임명하였다. 이 관직은 신라의 군사권을 총괄하는 고위직이었다. 청해진은 그동안 생사 고락을 같이해온 정년이 맡게 되었다. 마침내 장보고는 중앙정부에서 정식으로 공직을 맡게 됨으로써 중앙에 진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막강한 군사력과 정치 권력을 모두 갖추게 된 셈이다.
그런데 장보고의 후원자인 신무왕은 즉위한 지 1년도 안 되어 죽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신라 46대 왕인 문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렇지만 문성왕은 장보고의 기세에 눌려 마음대로 군대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장보고는 직접 중앙정치에 관여하면서 신라 왕실의 정변이 왕권이 약화된 틈을 타 사병들을 갖고 있는 주변 왕족들의 농간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다. 따라서 왕실의 군대가 강해야만이 정권이 안정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장보고는 이러한 정세 판단에 따라 공식적으로 해군력을 장악하기 위해 진해장군의 자리도 차지하였다.
이에 따라 왕족과 귀족들은 장보고를 경계하고 그를 축출할 기회만 엿보게 되었다. 그래도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당과 일본 등과의 교역을 더욱 넓혀나갔다.
그렇게 6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장보고가 군사력을 장악함에 따라 정치도 안정되어 갔다. 그러나 주변 왕족과 귀족들의 정치적 공작도 만만치 않았다. 장보고는 군사력만으로는 정변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없다고 판단, 다른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자기 딸을 문성왕의 두 번째 왕비로 삼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자 다른 왕족, 귀족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만일 장보고가 왕실의 외척이 된다면 자신들의 입지가 그만큼 약화된다는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반대 세력들은 다음과 같이 왕에게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부부의 길은 매우 큰 윤리입니다. 예전을 돌아보아도 왕비를 잘못 택하여 나라까지 망한 일이 허다함을 알 수 있습니다. 나라의 존망이 여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어찌 함부로 왕비를 택할 수 있겠습니까? 궁복은 원래 섬 사람입니다. 이런 천한 신분의 딸이 어떻게 왕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시간이 갈수록 장보고와 귀족 사이의 알력은 극한 대립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금방이라도 큰 정변이 일어날 것 같은 삼엄한 분위기가 정치권을 맴돌고 있었다. 반대 세력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막강한 군대를 갖고 있는 장보고와 정치적 싸움을 벌이는 것은 불리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렇다고 무력으로 장보고를 제거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고심 끝에 장보고를 직접 살해하기로 결심하였다.
반대 세력들은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을 투항자로 위장하여 보내 장보고를 안심시킨 뒤 그를 암살하고 말았다. 파란만장했던 장보고의 생애가 어처구니 없이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장복고가 죽은 후 청해진 세력은 점점 기울기 시작하였다. 장보고가 암살된 뒤에도 그의 아들과 부장 이창진의 주도하에 청해진 세력은 얼마간 유지되었다. 이 때에도 일본에 무역선과 회역사를 보내어 교역을 계속하는 등 장보고가 이루어놓은 해상 무역권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곧이어 염장을 비롯한 귀족들의 사병 등으로 구성된 중앙연합군의 토벌 작전에 휘말려 청해진 시대는 완전히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때가 846년 경의 일이었다.
잔존 세력이 다시 봉기할 것이 두려운 중앙정부는 851년(문성왕 13년)에 청해진의 주민들을 벽골군(전라북도 김제)에 강제 이주시키고, 청해진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장보고의 해상 활동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장보고가 꿈꾸었던 것은 동지나해를 중심으로 신라를 세계 무역을 주도하는 대국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이런 연상선에서 그의 정치 개입을 이해할 때 비로소 장보고가 왜 외척이라는 정치적 전술까지 동원하게 되었는지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대체로 우리 민족의 활동 범위를 논할 때 바다를 따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기껏해야 이순신 장군의 여러 대첩을 중요시 여길 뿐이다. 그런 차원에서 봤을 때 기울어져가는 민족의 국운을 바로세우려 했던 장보고의 노력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일이었다. 결국 그의 반란이 실패로 끝남으로써 신라는 더욱 부패의 내리막길로 치닫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장보고는 김우징의 반란에 가담함으로써 일차적으로 무력 쿠데타에 동조한 결과가 되었으며 뒤에 왕권 안정을 위해 군사권을 장악하여 점진적인 정치 변혁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수구 세력의 음모에 말려 장보고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변혁은 단순히 개인의 정치적 욕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청해진으로 몰려오는
빈민들과 유민들을 보면서 신라가 얼마나 썩어 있는가를 직접 체험하였다. 그리고 왕족들이나 귀족들의 경제적 수탈 행위도 이제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극에 달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두 번에 걸친 정치 변혁 시도는 이러한 당대의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서였다. 장보고를 개인적 욕망을 채우는 정치적 야심가이며 모반자로 묘사한 {삼국사기}의 시각은
시정되어야 한다.

비록 장보고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는 신라 말기 각지에서 등장하는 호족 세력의 선구적 존재가 되었으며, 나아가 후삼국 시대를 열어준 장본인기도 하다.

궁예의 반란

이상에서 봤을 때 김헌창의 난이 왕실 찬탈전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본다면 장보고는 당시 민중들의 세력을 규합하여 부패한 중앙정부에 대항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전대의 반란을 배경으로 후삼국 시대가 열린 것이며 궁예 역시 신라 말기의 극심한 혼란 가운데 등장한 호족이었던 것이다.
후고구려의 건국자인 궁예가 태어난 해는 불분명하다. 그의 성은 김씨라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신라 제 47대 헌안왕이고, 어머니는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궁녀였다. 일설에는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헌안왕의 핏줄이라는 것이 정설로 굳어져 있지만, 어느 설을 따르더라도 그가 왕족 출신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적자가 아닌 서자로 태어났다는 데에 있었다. 서자라는 차등적인 위치에 있었기에 그의 운명은 정권 다툼의 소용돌이에 말려 왕실에서 배제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의 탄생 설화를 살펴보면, 5월 5일에 외가에서 출생하였다고 했는데 일관이 말하기를, 단오날에 태어난 데다가 나면서부터 이가 나고 또한 이상한 빛까지 나타내므로, 장차 국가에 막대한 해를 입힐 인물이라고 왕에게 고하였다. 왕은 이를 믿고 죽일 것을 명하자 사자가 그 집에 가서 강보에 싸인 아이를 빼앗아 다락 밑으로 던졌다. 이때 유모가 다락 밑에 숨어 있다가 아이를 받았는데 그만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설화는, 그가 신라 왕족이었으나 왕실의 격렬한 정권 싸움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그뒤 유모의 손에서 남의 눈을 피해 자라게 된 궁예는 후에 세달사라는 절에 출가하여 선종이라는 법명까지도 얻게 되었다. 여기서 잠시 세달사라는 절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삼국사기}에 따르면 세달사는 고려 중기에는 흥교사라고 개칭되었다. 정확한 소재지는 강원도 영월군에 있는 대화산이다.
나중에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면서 숭유억불 정책을 쓸 정도로 삼국시대 이래로 불교는 정치와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궁예가 자칭 미륵불이라고 부른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세달사 역시 여러 지방 호족들과 정치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성장기를 보낸 추방된 왕자 궁예는 후에 세력을 확장할 때 이 일대 호족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토대를 자연스럽게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 중앙 권력에서 밀려난 호족들은 궁예가 한때 왕자의 신분이었음을 알고서는 쉽게 호응했던 것이다.
당시의 신라 왕실은 극도로 쇠약해져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대두하였다.
거듭되는 흉년으로 인하여 국고가 탕진되어 889년(진성여왕 3년)에 과도하게 세금을 독촉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농민들이 유랑민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들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도적떼로 둔갑하고 말았다.
그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인로 기훤과 양길이 있었는데 성인이 된 궁예는 891년에 기훤의 부하로 들어가 뜻을 키우려 하였으나 기훤이 자신을 냉대하자, 이듬해인 892년에는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다.
양길은 궁예의 출신 성분을 알고는 그를 환대하였다. 그의 신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뒤 궁예는 양길의 군사를 나누어 받아 원주, 치악산, 석남사를 거쳐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천(예천) 내성(영월) 울오(평창) 등 여러 현과 성을 정복하고 894년에는 명주에 이르렀다. 이때 그 무리가 3,500명이나 되었다고 여러 역사 기록들이 전하고 있다.
궁예는 어느 정도 자기 세력이 확정되자 이들을 14대로 편성하여 자기 세력 기반으로 삼았고, 추종자들은 그를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장군이라는 명칭은 단순히 군사적 지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사회로 치자면 일정한 지역을 다스리는 최고 권력자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궁예는 양길의 도움을 발판으로 삼아 어느새 새로운 인물로 부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저족(인제), 생주(화천), 철원 등을 점령하자, 군세가 매우 강성해져 인근 지역의 무리들 가운데는 스스로 항복하여 궁예의 부하가 되려는 호족들도 생겨날 정도였다. 이에 궁예는 기반 세력이 다져지자 양길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어나갔다.
896년 경 임진강 연안을 공력하여 개성에 있던 왕건 부자의 투항을 받고 승령(지금의 장단 북쪽, 토산 남쪽), 임강(장단)과 지금의 개풍군 풍덕 주변 등의 여러 현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이듬해에는 공암(양평) 금포(김포) 형구(강화) 등도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 궁예의 세력권 남쪽인 국원(충주) 등 30여 성을 취한 양길이 궁예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여 오히려 패망하고 말았다.

이렇게 불과 몇년 동안에 파죽지세로 궁예가 세력권을 형성할 수 있었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첫째는 지방 호족들의 자발적인 참여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앞에서 본 세달사가 위치한 영월에는 궁예의 외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탄생 설화가 말그대로 설화라면 그는 노비 출신의 유모의 품에서 자라났다기 보다는 몰락한 진골귀족인 그의 외가집에서 성장하였다는 주장이 더 타당성이 있다. 외가는 왕권 계승 싸움이 계속되자 궁예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는 열 살이 조금 넘은 궁예를 절에 출가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이 절을 중심으로 김헌창의 아버지인 김주원계의 세력 근거지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삼국사기} 등 여러 사료들을 검토해 볼 때 금방 알 수 있다. 또한 중앙 권력 싸움에서 밀려난 여러 호족들이 김헌창의 반란 실패 이후 영월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였다는 것도 사료에 나타나 있다. 즉 궁예가 군사를 일으키자 그동안 정부에 대해 쌓인 불만을 일시에 터뜨려 왕족 출신인 궁예를 지지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일은 명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명주는 김주원이 권력 중심부에서 밀려난 후 좌천된 곳이기도 하다. 김주원계는 이곳을 중심으로 지방 호족들을 자기 세력으로 삼았고 궁예의 등장으로 이들은 반정부 투쟁을 벌일 태세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청주에서도 궁예는 막강한 지지 세력을 갖게 되었다. 청주에서도 역시 명주나 영월 지방처럼 중앙에서 밀려난 호족들이 궁예를 중심으로 다시 군사를 정비하고 반정부 대열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층부의 호응만으로는 후고구려 건국을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김헌창의 경우와 별로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민심을 빨리 알아차렸다. 토지의 독점으로 파탄에 빠진 일반 민중들에게 자신의 정통성을 심어주기 위해서 궁예가 내세운 정치 이데올로기는 옛고구려의 강역을 수복하는 일이었다.
삼국시대의 신라는 당나라라는 외세와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애초부터 신라는 백제에 더 관심이 많았다. 게다가 당나라는 오래 전부터 넘본 고구려 땅을 정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즉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차지하고 대신 당나라에게 고구려의 대부분 지역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연합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두 나라 사이에 일종의 밀약이 오갔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종전 후 신라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쪽 고구려 땅은 당나라가, 대동강 이남은 신라가 차지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이것은 당태종과 신라 문무왕 사이의 공식적인 언약이기도 했다.
이렇게 볼 때 신라는 단순히 백제와 고구려 일부를 흡수 통합한 것에 불과했다. 통합 당시 신라는 자국만의 힘이 아닌 외세를 끌어들이는 역사적 과오를 범함으로써 두고두고 민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궁예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가 옛고구려의 강역을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내세웠을 때 민중들은 그를 지지하고 나섰다. 정통성을 상실한 국운을 다시 세우자고 민중들은 궁예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민중들은 단순히 궁예의 구호에 호응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라 왕실에 대한 전면 부정이 극대화되어 고구려 부흥 운동의 차원까지 나아갔던 것에 불과하다. 민중들이 궁예를 지지했던 이유는 중앙정부의 수탈이 심화되어 이에 저항하기 위해 궁예를 중심으로 뭉쳤던 것이다.
호족과 농민 사이에 신라 왕실에 대한 불신이 공감대를 형성한 셈이다.
899년(효공왕 3년)에 송악군 일대를 점령한 궁예는 왕건을 보내어 양주, 견주를 복속하고, 그 다음 해에도 광주, 춘주, 당성(화성군 남양 일대), 청주, 괴양(괴산) 등을 평정함으로써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 유역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그 공으로 왕건에게 아찬이라는 벼슬을 주었다. 그리고 901년에 송악(개성)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워 후고구려라고 국호를 정하였다. 또한 자신이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누차 강조하였다. 그는 실제로 대동강을 넘어 평양까지 쳐올라가 정복하였으며 공공연하게 북쪽 고구려의 옛땅을 수복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라고 하였다. 그 해 7월 청주인 1천 호를 철원으로 옮겨 그곳을 서울로 정하고 상주 등 30여 현을 차지하게 되자 공주장군 홍기가 투항하여 왔다.
905년 수도를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긴 궁예는 연호인 무태를 성책으로 고쳤다. 이즈음에 평양 성주 금용이 투항하여 옴으로써 평양 일대의 지역도 차지하게 되었다.
그 뒤 궁예는 세력이 강성해졌음을 믿고 신라를 병합하려는 뜻을 품고 신라를 멸도라 부르게 하였다. 911년에 연호를 다시 수덕만세라 고치고, 국호를 태봉이라 하였다. 이때 왕건은 해로를 타고 내려가 금성(후에 나주라 불렀다.)을 정복하였는데, 이후 서해의 해상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옛백제 지역에서 일어난 견훤을 위협하기도 했다.
913년에는 연호를 다시 정개라 고쳤다. 이 무렵 궁예는 폭군이 되었고, 그를 반대하고 왕건을 지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고 현재 남아 있는 사료들은 전하고 있다. 정사의 기록에 따르면, 918년에 궁예의 폭정에 반대하여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일어나 그를 왕위에서 축출하였다.
왕위에서 쫓겨난 궁예는 변장을 하고 도망가다가 부양(평강)에서 피살당함으써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그렇다면 궁예는 단순히 후고구려를 세운 뒤 정권 유지에 급급하여 폭군으로 변한 뒤 왕건을 지지하는 세력에 의해 축출된 것일까. 그러나 그의 활동에 대한 평가는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또한 정사를 사실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그가 폭군으로 변했다는 결정적인 근거나 계기, 그리고 그 과정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궁예에 대한 평가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통치자

후삼국이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은 호족들의 대거 등장과 더불어 농민들의 항쟁이 만연되었기 때문이다. 김헌창의 반란 등이 단순히 왕위 쟁탈전에 불과하여 민중들의 호응을 별로 받지 못했던 반면, 구조적 모순이 극대화되면서 호족과 농민들은 신라 왕조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갔다는 것은 앞에서도 살펴본 바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한 궁예는 891년에 양길의 휘하에서 자립하여 후고구려를 세운 뒤 918년에 이르기까지 약 28년 동안 통치하다가 멸망하였다. 그러나 궁예의 통치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고려사> 등 종래의 사료들은 대체로 폭군적인 면을 부각시켜 부정적인 평가로 일관하고 있다. 즉, 궁예는 원래 성격이 포악하고 의심이 많아 915년에 올바른 정치를 건의하는 부인 강씨와 그 소생의 두 아들을 죽여버린 일도 있다고 한다. 그뒤 궁예는 자기 자리에 불안감을 가져 의심이 더욱 많아지고 성급해져 남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독심술을 터득하였다는 이유로 신하들을 위협, 살해하였다는 것이다. 왕건 역시 궁예로부터 두 마음을 품고 있다는 혐의를 받아 결국 궁예와 왕건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왕건 일파는 궁예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면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원정하여 금성(나주) 등지를 정벌하였다고 한다.
고대나 중세 때 정변이 일어날 경우 사회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왕조의 변화를 예고하는 도참 설화가 떠도는 것이다. 궁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민심을 잃은 궁예에 대해 그의 멸망을 예언하는 도참 설화가 각처에 만연하게 되었다. 철원에 사는 상인 왕창근이라는 자가 한 백발 노인을 통해 거울을 사서 걸어 놓았더니, 거울에 시구가 나타났다. 그 내용을 분석해보니 궁예의 멸망과 왕건의 등장을 예언하고 있었다.
또한 궁예는 매우 미신적으로 불교를 신봉하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하고 머리에는 금책을 쓰고 방포를 입고 다녔다. 궁예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두 아들을 청광보살, 신광보살이라 불러 마치 자기 가족은 모두 해탈한 부처처럼 자처했던 것이다.
밖에 행차할 때에는 항상 백마를 타고 비단으로 말머리와 꼬리를 장식하였으며, 어린 소년과 소녀들이 깃발과 향과 꽃 등을 들고 앞에서 인도하였고 비구승 2백여 명은 범패를 부르고 염불하면서 뒤를 따랐다고 한다. 가히 교주의 모습을 상상케하는 대목이다.
또한 그는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지었는데 그 말이 요망하여 모두 불도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궁예가 지었다는 불경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고려사>에 의하면, 궁예는 어느 정도 세력 기반을 닦자 국내를 통합하기도 전에 갑자기 혹독한 폭정으로 민중을 다스렸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민중을 수탈하여 그를 따르는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국토는 황폐해졌는데도 자신이 머무는 왕궁만은 매우 웅장하게 지었다. 또 법도나 제도는 지키지 않고 노역은 끊일 사이가 없어 점차 원망과 비난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궁예에 대한 평가를 당시의 형편을 그대로 알려주는 자료로써 이해하려는 견해도 있다. 왜냐하면 도적의 무리로 편성된 궁예의 지배 세력은 그 성격을 바꿀 시간도 없이 패망하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도적이 성행한 이유는 신라 왕실의 부당한 세금 징수와 호족들의 토지 겸병으로 유랑하는 농민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예의 무리는 농민군적인 성격이 강했다.
또한 다른 지방 호족과 같이 자신의 세력 기반을 가지지 못하고 도적의 무리로서 출발한 궁예의 세력 기반에는 분명한 한계성이 있다는 지적도 앞서 본 바와 같이 잘못된 시각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초기 활동 당시부터 각 지역 호족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특히 세달사나 영월을 중심으로 궁예는 확고한 세력 기반을 갖출 수 있었다.
출생 과정부터 이미 신라 정부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궁예는 신라에 대한 강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901년 부석사에 갔을 때 신라왕의 초상화를 보고 이를 칼로 쳐서 없앴다고 한다. 이러한 반신라적 성향은 반정부적 무리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였고, 토지를 빼앗겨 유랑하다가 도적으로 몰락한 무리들이 궁예의 세력 밑으로 모여든 것은 궁예와 마찬가지로 반신라적인 성향이 강했기에 가능한 현상이었다. 즉, 궁예를 중심으로 민중 세력이 형성됨으로써 신라 고대사회가 해체되는 속도가 한층 빨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신라의 반민중성에 대항한 궁예의 등장으로 민중 세력의 결집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궁예의 국가 통치 능력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에 대한 역사 기록 가운데 일부는 사실이라고 전제했을 때, 국가를 운영하거나 질서를 회복하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이 없었으므로 토지 겸병 등 토지제도나 수취제도를 개선하지 못한 면도 있었다. 즉, 경륜 부족으로 그는 조금씩 포악한 왕으로 변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또 나라를 세운 뒤에도 연호와 국호를 자주 고쳤다고 하는 것은, 한 나라를 이끌어갈 정치 이념이 뚜렷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는 지적도 타당하다. 이러한 지적은 앞서 말한 현실 개혁을 단행하지 못한 궁예의 실정과 맞물려 있다. 따라서 점차 호족 세력을 결집해 내면서 뚜렷한 유교적 정치 이념과 선종 승려 및 6두품 지식인층까지 포섭하였던 왕건이 전면에 부상하게 된 결과를 가져왔다. 즉, 지배층은 자신들의 이익을 담보해 주면서도 일면 현실 개혁을 추진하여 민중들의 불만을 무마할 수 있는 강력한 왕을 원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궁예에게는 통치 이념이 전혀 없었던 것일까.
<고려사> 등 사료에 나타난 궁예에 대한 평가는 우선 그가 포악한 왕이었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그가 내세운 미륵불 사상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미륵불 사상은 무엇인가. 대체로 관음보살을 중시하는 불교는 해탈 등 자기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이것이 극대화되면 지배 계층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 의식을 약화시킬 수 있는 구실을 하게 된다. 그러나 미륵불 사상은 도탄에 빠진 현실을 구하기 위해 미래불인 미륵이 이 땅에 온다는, 사회 개혁적인 요소가 매우 강하다.
따라서 최고권력자가 이러한 개혁 사상을 주장했다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비록 궁예는 왕건처럼 견실한 정치적 이념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는 현실을 개혁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직까지도 그가 왜 난폭한 짓을 자행하게 되었는지 그 동기에 대해서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 또한 왕건의 고려 건국이 합리화되기 위해서는 궁예가 완전한 폭군으로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있음을 감안할 때 궁예에 대한 평가는 재검토되어야 한다.
정리하자면, 궁예는 지나치게 종교를 강조하는 등 이상주의적 이념을 내세워 왕권 강화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현실적인 개혁을 추진할 만한 지식인층을 확보하지 못했고, 또한 그의 왕권 강화에 반발한 일부 호족들이 왕건을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궁예는 축출당하고 말았다. 따라서 그가 원래부터 성격이 난폭하여 폭군이 되었다는 단순한 시각은 교정되어야 한다. 궁예가 고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근거지인 한강 유역을 먼저 차지한 정책이나 자기를 지지하는 호족들에게 관직을 주는 등 행정체제를 정비해나갔으며, 이러한 궁예의 뛰어난 통솔력에 끌린 호족들이 사방에서 그를 지지하고 나섰다는 것은 궁예의 긍정적인 면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점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궁예는 이상주의적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해 구체적인 현실 개혁을 단행하지 못하였으며, 왕권 강화 과정에서 그의 이념을 반대하는 왕건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 그룹과 대립하다가 그들의 세력에 밀려 축출당하고 만 것이다. 이러한 대립 과정에서 궁예는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폭정을 일삼았다고 이해한다면 그의 난폭한 행동에 대해 좀더 구조적인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후삼국史보는 나무 > 후삼국시대 관련 펌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달 능창  (0) 2010.10.24
수달장군 능창  (0) 2010.10.24
궁예, 진훤, 왕건의 비교  (0) 2010.10.23
궁예 전설  (0) 2010.10.23
후삼국시대의 주변국 상황  (0) 2010.10.08
by 초령목 2010. 10. 23. 22:47

1. 서론

견훤은 상주 가은현의 농민출신이었다. 본래의 성은 이씨였는데 뒤에 견씨로 성을 삼았다고 한다. 그는 체구가 크고 유달랐으며 의기가 충만하여, 군인이 되어 서남해 방면에서 싸울 때에는 용감하게 항상 다른 군사에 앞장섰으므로 그 공로에 따라 비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진성여왕의 실정과 기근으로 백성이 유리하고 도적이 봉기하자, 견훤은 큰 뜻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남지방의 주현을 쳐서 반란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한편 궁예는 신라 헌안왕의 서자로서 성이 김씨인데 어떠한 사정에 의하여 죽게 된 것을 유모가 안고 도망가서 몰래 길렀는데, 이 사건 때에 실수로 한 눈이 멀게 되었다. 아마도 그는 정권 다툼에 희생되어 지방으로 물러난 자였던 것 같다.

왕건의 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오대조인 호경이 북쪽으로부터 와서 개성지방에 자리잡은 것으로 되어있다. 그의 선조 중에서 가장 활발한 무역활동을 전개하고 또 큰 성공을 거둔 것은 그의 조부인 작제건(作帝建)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용건과 손자인 왕건 때까지도 계속하여 개성 지방을 지배해 왔으며 또 이들은 대대로 주위의 호족들과 혼인관계를 맺어 그 세력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견훤이나 궁예는 모두 신라계통 출신이므로 두 사람이 고구려나 백제의 전통과는 관계가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견훤과 궁예는 각각 백제와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했다. 그리고 개성의 호족 출신이었던 왕건은 궁예의 수하에 있다가 일어나 결국 고려를 건국하게 된다.

2. 견훤의 재해석

① 견훤의 본래이름 및 출생설화

진훤의 이름은 지금까지 견훤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옥편을 찾아보면 '질그릇 견(甄)'에는 '견' 혹은 '진'으로 발음이 나와 있다. 그러므로 견훤이나 진훤으로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지만 사실 진훤으로 읽는 게 타당하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역사학자인 순암 안정복이 저술한 『동사강목』은 '진훤'으로 읽어야 한다고 밝혀 놓았다. 많은 전적(典籍)을 토대로 저술한 일종의 백과사전인 『문헌비고』에도 진훤의 이름 앞 글자의 음이 '진(眞)'임을 밝히고 있다. 또 고창 병산전투와 관련된 현지 전설에서 진훤이 지렁이로 변해서 숨었던 모래를 '진모래'라고 일컫고 있다. '견모래'가 아닌 '진모래'인 점에서도 당시 그를 진훤으로 불렀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보다 분명한 것은 『완산견씨세보(完山甄氏世譜)』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우리 성(姓) 글자인 '甄'의 음은 본래 '진'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후백제의 진훤왕이 나라를 잃은 이후, 고려 왕조에서 우리 진씨가 재기부흥할 것을 두려워하고 염려하여 힘으로 항상 모멸의 해를 가하고자 했다. 그런 까닭에 우리 선조들은 다시는 세력을 규합하지 못하고 끝내는 나라를 일으켜 재건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우리 가문은 점점 이름을 내는 것 없이 세상을 피하여 숨어서 삶을 도모했기에, '진'음이 변하여 '견'음으로 읽었다. 그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 후손들은 '견'음을 사용하였다. 그 '甄'음은 시종 한 글자였으나 변혁되었으니 모두 견씨 가문의 성쇠의 운(運)에 기인한 것이었다. 무릇 우리 후손들은 이에 의심없이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견훤이 아니라 진훤으로 읽는 게 백번 타당함을 알 수 있다. 최근 이름 앞의 성으로 읽을 때는 '진'으로 불러야 하기에 진훤으로 발음하는 게 옳다는 견해도 나왔다. 그렇지만 앞서 언급하였듯이 현재 소수 성씨로서 '견'씨가 있지만 진씨가 아니라 견씨로 읽기 때문에 수긍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진훤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가. 진훤은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아차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한 부잣집 딸에게 밤마다 자주색 옷을 입은 사내가 다녀가곤 했다고 한다. 그 딸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찾아온 남자의 옷자락에 바늘을 꽂았다. 이튿날 바늘에 꿰인 실을 따라 갔더니 담장 밑에 있는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춤에 바늘이 찔려 있더라는 거였다. 이 설화는 진훤이 곧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기실은 그 이름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진훤이라는 이름을 경상도에서는 '진훠이'로 읽게 된다. 이는 지렁이의 경상도 방언인 '지러이'와 서로 통하는 것이다. 요컨대 지렁이를 연상시키는 진훤이라는 이름 때문에 그 관련 출생 설화가 생겨난 게 아닐까?

② 견훤의 정치 스타일

견훤은 신라에 대한 적대감으로 후삼국 상호간의 냉정한 국제관계수립이라는 적절한 정책을 갖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다. 특히 경애왕 4년(927) 경주를 습격하여 왕과 관료들을 무수히 죽이고 왕비와 궁녀들을 욕보이거나 약탈을 자행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고 돌아간 것은 바로 견훤의 대신라 감정과 이에 대한 정책의 한계를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라에 대한 적대가 감정적이 아닌 정책적인 것이었다면 이때 견훤으로서는 신라를 평정, 장악하고 위무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당시의 상황으로 볼때 왕건의 고려는 세력이 매우 약할 때였다. 그러나 이 일이 있고 난 이후 신라의 민심은 대신라 우호정책을 표방한 고려에 완전히 기울어져 버린다.

국가를 창건한 진훤은 관부를 설치하고 직무를 두었다. 그런데 어떤 연구자는 '그 내용을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휘하에 있던 신하들이 이찬. 파진찬. 아찬과 같은 신라의 관등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을 볼 때 신라와 크게 다른 것이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아울러 '견휜은 백제 유민들의 백제 부흥 의지를 이용만 하였을 뿐 이에 대한 대책과 배려에 힘쓰지 않았다'고 비판하였다.

특히 왕이 된 후 견훤은 자신의 한미한 세계를 신라왕실로 연결하여 윤색한 흔적도 보이는데, 그 정치적 식견과 역사적 성격이 기본적으로 궁예와 크게 다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관련 서적을 찾다보니 나온 흥미로운 내용이 있는데, 두 번째 리포트인 ‘9산 선문’ 과도 관련된 자료가 있어 여기에 함께 실어 본다.

전주로 천도한 이후 견훤은 실상사의 안봉화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실상사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적극적으로 하였는데 그것은 견훤이 신라로부터 사상적으로 자립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910년 안봉화상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견훤이 의도하였던 것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918년 왕건이 즉위하자 대안사를 주도하던 윤다가 왕건에게 갔으며 가지산문 역시 왕건의 수중하에 들어갔다. 사정이 이러한 가운데 경보가 귀국하자 그를 국사로 삼아 선종을 중심으로 한 불교계의 재편을 서둘렀다. 견훤 정권과 선종 불교와의 관계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신라말 최고의 선종 산문이라 할 수 있는 가지산문과 동리산문 그리고 실상산문을 그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그리고 성주산문이나 굴산문과 연결된 경보를 국사로 삼아 산문과 유기적인 연결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또한 상주 출신의 선승이 귀국하는 것을 도왓는데 이는 희양산문과 연계를 위한 것이었다. 이렇듯 견훤 정권은 당시 유행하던 선종 불교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선종 산문이나 선승들은 국가를 유지하는 하나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3. 궁예의 재조명

① 사료 분석

수십개의 군웅이 난립하던 시기, 그 혼란을 극복하고 일어선 궁예가 겨우 보리삭을 훔쳐먹다가 부양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는 치욕스러운 최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공이 이미 의기를 들었다”하니, 나라 사람으로 달려오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먼저 궁문에 이르러 북을 치고 떠들며 기다리는 자도 역시 만여 명이나 되었다.   궁예는 이 소식을 듣고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미복으로 북문을 빠져 나가서 바위 골짜기로 도망하였다가 조금후에 부양 백성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 민중들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 철원에서 아직까지 내려오는 궁예를 기리는 제사인 태봉제가 있다는 것만 보아도, 민중들은 그를 폭군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설화는 궁예의 최후도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바로 궁예가 자살했다는 것이다. 궁예와 왕건의 최후 격전지인 보개산성, 그리고 궁예와 그의 부하들이 최후에 통곡했다는 명성산. 그리고 궁예는 결국 자살하거나, 혹은 그의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궁예의 두 얼굴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는 병사들과 동거동락을 같이한 성군의 모습, 또 하나는 참소를 믿어 마구 사람들을 죽인 폭군, 그리고 부인과 두 아들을 죽인 매정한 아버지의 모습까지도 보인다. 성군과 폭군의 엇갈리는 모습. 같은 기록인데도 이렇게 상반된 두 기록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예에 관한 이야기는 고려 전기에 간행된 『삼국사기』(궁예전)에 처음 보인다. 여기에서 궁예는 부인에게 간통죄를 뒤집어씌워 그녀 소생의 두 아들과 함께 죽인 나쁜 왕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고려 후기에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에도 궁예는 '포악하고 방자'한 왕으로 기록되어 『삼국사기』의 기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이 개국된 뒤 편찬된 『고려사』는 고려의 건국과정을 서술하면서 왕건의 전사로 궁예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하다.

그때에 궁예가 반역이라는 죄명을 억지로 만들어 죽인 자가 하루에도 백여 명에 이르러 장수나 정승으로서 해를 입은 자가 십중팔구였다. 궁예는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미륵관심법을 체득하여 부녀들의 음행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 만일 나의 관심법에 걸리는 자가 있으면 곧 엄벌에 처하겠다' 라고 했다. 그는 드디어 3척이나 되는 쇠방망이를 만들어놓고 죽이고 싶은 자가 있으면 곧 그것을 달구어 여자의 음부를 찔러 연기가 입과 코로 나오게 하여 죽였다. 이리하여 부녀들이 모두 벌벌 떨었으며 원망과 분한의 날로 심하였다.

이외에 궁예에 관해 기록된 고문헌은 일부 가문의 족보에 수록된 것을 제외하면 더 이상 없다. 궁예와 동시대 인물인 견훤의 이야기는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궁예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일연은 궁예가 고려를 세웠다는 사실만 연표에 간단히 기록해두었을 뿐이다.

896년 철원에 도읍하고 국호를 고려로 정한 궁예는 임금을 칭하며 관제를 신설한다. 이후 국호를 대동방국과 통일천하를 각각 뜻하는 마진과 태봉으로 잇따라 바꾼 사실을 책은 자주와 민족단합을 모색하려는 의지의 발현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골품제 대신 능력에 따른 관직등용제도를 신설한 것이나 독자 연호 사용과 거란과의 적극적인 통교정책 등도 궁예의 혁명가적 성향을 보여주는 것으로 재조명된다. 심지어 지은이는 원주-영주-명주-간성-한계령-인제-철원-서해로 이어지는 정벌로를 `궁예의 길'이라 명명하고 국토개척자라는 별호를 주기까지 한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대부분의 기록은 궁예를 악인으로 평가하고 있고 이러한 내용은 지금까지도 궁예에 대한 인식을 지배하고 있다. 흔히 '정사'라고 불리는 국가의 공식 역사 편찬은 국가 권력의 전유물이었던 만큼 그 의지에 맞게끔 재편집되었고, 이 과정에서 세속적 권력의 패배자들은 변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진 반면 승자의 목소리만 남아 당당하게 군림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궁예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로 지목된다.

② 재평가

말년 과대 망상, 정신분열증 등에 시달렸으며 잔혹하기 이를 데 없이 백성들을 죽여나간 폭군으로서 궁예는 지금껏 평가되어 왔다. 그의 애꾸눈은 이러한 그의 성품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점지되어 있었던 것임을 증명하는 수단처럼 여겨졌었다. 하지만 이런 잔혹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가 한 때 신라, 후백제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땅을 다스렸다는 사실까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신이 이상하여 스스로 멸망을 자초했다는 그가 어떻게 그토록 폭넓은 지역에 걸쳐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었단 말인가. 비록 그 과정에서 왕건이 굉장한 능력을 발휘한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미륵으로 칭하고, 자신의 가족들을 보살로 여긴 것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았던 그 당시의 정황으로 보았을 때 그가 미쳤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수도, 연호 등을 계속해서 변경해나가는 과정은 때때로 궁예가 보여준 정신착란의 결과로 이야기되어지곤 했었다. 하지만 연호에서 느껴지는 기풍은 역사 속에서 거의 존재치 않았던 중국 사대주의로부터의 해방이었으며, 자주적 외교의 천명이었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당의 도움을 등에 업었던 것, 후백제와 고려가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중국에 의지했던 것과 달리, 궁예는 혼란스러운 중국 정세를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계, 백제계 등 복잡한 성향을 지닌 이들을 한데 어우르는 과정에서 그는 다른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고, 이는 왕권을 보다 강고히 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이 민중에게 주었던 부담감과 어우러져 실각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서술한 저서들을 찾아보긴 어려운 듯하다. 탄생에서부터 왜곡되게 묘사되었던 궁예의 생애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서술만이 남아있었다. 보리를 뜯어먹다 자신이 다스리던 주민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정권을 상실하고 자신의 생명마저도 부지하지 못하는 초라한 실패자로서의 궁예의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하지만 그가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닌, 자신의 운명이 다한 줄 알고 자결하였다는 설은 그에 대한 재조명의 필요성을 일으키고 있다.

4. 왕건

궁예의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하는 것은 왕건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왕건의 등장과 더불어 궁예는 반인륜적인 행동과 잔혹성을 드러내며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러한 몰락 과정은 왕건의 반궁예적인 행위에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지배집단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처음 태조 나이 20세 때 꿈을 꾸었는데, 9층 금탑이 바다 가운데서 그 위에 올라가보았다. 위의 기록은 왕건의 입장에서 윤색된『고려사』의 한 부분이다. 왕건이 일찍부터 제왕이 될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미화한 내용인 듯한데, 이 짧은 기록은 왕건의 인물됨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왕건이 일찍부터 치밀하게 역모를 준비했다는 구체적인 자료가 되기도 한다. 학계나 일반인들 사이에서나 궁예는 왕건이 아니라도 어느 누군가에게 반드시 쫓겨나야 할 인물로 각인되어왔다. 그러나 위의 사료는 사실 왕건이 30세때부터 왕이 되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장기간 역모를 꾀했음을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의 궁예는 도적의 무리를 이끈 우두머리이며, 백성을 괴롭히고 나라를 어지럽힌 흉인에 불과한 것으로 그려진다. 태봉을 건국한 건국주로서의 궁예는 온데간데없고, 단지 백성들을 괴롭힌 인물로 평가절하 되고 있다. 이것은 고려의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

지금까지 견훤과 궁예를 재조명하는데 중점을 둔 것은 사실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왜곡되고 폄하된 패자(敗者)들의 조명 또한 필요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왕건을 반대로 필요이상 깎아내리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개창한 왕건의 성공 요인 또한 비중있게 다뤄져야 할 것이다.

왕건은 그가 가지고 있던 세력과 공적을 바탕으로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 여러 장수의 추대형식을 거쳐 궁예를 제거하고 왕위에 올라 고려를 세웠다. 왕건은 출신지역으로나 출신기반의 성격으로 보아 견훤이나 궁예와 달리 어느정도 지역적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며, 후삼국시대의 모든 경쟁세력 가운데에서 지방호족세력이 갖추어야 할 역사성에 가장 충실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왕건은 왕위에 오른 뒤 일차적으로 표방한 것이, 백성들의 수취체계 정비였는데, 이는 적어도 왕건의 경우 당시 사회혼란의 근본적 원인이 가혹한 고대적 수취체계에서 야기된 경제모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당시의 여러 지방세력들은 외형적으로는 반신라적 또는 반골품제적 성향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지만, 그 본질은 신라사회가 가지고 있는 시대적 모순에 저항하고, 나아가 다른 역사적 성격의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즉 당대의 사회혼란의 과정이 고대적 사회의 모순으로부터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던 역사적 변동의 과정이었음을 알고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이러한 역사성을 충실히 반영해야 내외의 모든 민중과 호족 세력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고 결국 역사의 승자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후삼국시대 여러 강대세력 중에서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왕건이 자기시대의 변화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가장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또 이에 충실히 대응했기 때문이다.

5. 결론

용장 견훤, 덕장이자 지장인 왕건, 그리고 궁예, 이 세 사람을 동시에 비교할 만한 자료나 이들의 행적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은 형편이지만 궁예가 공평무사한 지휘관이었다면 그에 비해 견훤은 통솔보다는 지휘를 더 중시했던 인물이었고, 왕건은 지휘보다는 통솔에 더 관심을 가졌던 지휘관이었을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신라 무장 출신의 견훤, 대호족 출신의 왕건에 비해 궁예는 열악한 처지에서 몸을 일으켰으므로 무엇이든 완벽을 기하지 않고서는 자기 기반을 확보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점에서 지휘와 통솔을 구사하는데 중점을 두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상시 역사를 읽을 때 언제나 의문 나는 것은 선한 것은 지나치게 선하고 악한 것은 지나치게 악하다는 것이다. 당시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의 저작이 비록 권선징악의 좋은 뜻에서이기는 하나 오늘날 사람들은 평지상에서 간과하여 말하기를 '선한 사람은 진실로 의당히 저래야 하지만 악한 사람은 어떻게 이 정도로 악할까' 한다. 기실 선한 것 가운데도 악이 있고 악한 것 가운데도 선이 있는 것이어서 당시 사람도 실로 시비를 가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거취를 잘못하여 조소를 받고 죄악을 범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성호(星湖)는 선악의 포폄을 역사학의 목적으로 생각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을 단순히 선악의 면으로만 해석하려는 태도에 반대하였던 것이다. 역사는 승자만을 기억한다.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을지라도 말년이 성공적이지 못한 이들은 그로 인해 모든 업적이 낮추어 평가된다. 그리고 때로는 단순한 낮춤의 수준을 넘어선 의도적인 폄하에 의하여 전혀 다른 인물로 각색되기도 한다. 우리의 역사는 업적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에 우선한 옳고 그름의 시비가 존재하는 듯하다. 그에 따라 한 사람은 어떠한 단점도 지니지 않은 고결한 존재로 부각되는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너무도 추한 존재로 묘사된다. 궁예는 후자에 속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를 평가하는 역사서들의 대다수는 왕건의 고려 건국 정당성 확보라는 과업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의도적으로 그를 폄훼한 듯이 보인다. 그렇기에 역사는 그 역사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확인 하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과거 통일신라라는 명칭으로 불리던 신라가 발해의 존재에 대한 고찰로 인하여 남북국 시대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듯이, 이 견훤, 궁예, 왕건의 세력다툼이 있던 시대에 대해서도 또한 새로운 시각이 요구된다. 그와 동시에 그들에 대한 평가도 다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출판부, 1990.
박용운 외, 『한국사 12』, 국사편찬위원회, 1993.
이재범, 『슬픈 궁예』, 푸른역사, 2000.
조현설, 「궁예이야기의 전승양상과 의미」, 『우리 역사인물전승 2』, 집문당, 1997.
이도학, 『궁예, 진훤, 왕건과 열정의 시대』, 김영사, 2000.
박한설,「왕건세계의 무역활동에 대하여」,1965.

'후삼국史보는 나무 > 후삼국시대 관련 펌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달장군 능창  (0) 2010.10.24
신라 말기의 반란  (0) 2010.10.23
궁예 전설  (0) 2010.10.23
후삼국시대의 주변국 상황  (0) 2010.10.08
후 삼국시대 역사  (0) 2010.10.08
by 초령목 2010. 10. 23. 14:55

궁예도성 남대문 석등(石燈) 사진은 이미 오래 전 원본이 사라졌다. 철원군지(鐵原郡誌)는 천 번도 더 찍어냈을 복사판 사진을 싣고 있었다. 어느 책에 나온 우표딱지만한 흑백사진을 잡아 늘릴 수 있는데까지 확대한 게 틀림없었다. 사진 속으론 모래바람이 불고 있었다. 피사체는 작은 구멍들이 가득 뚫려 있었다. 제주도 돌하루방 같았다. 철원도 제주도처럼 현무암 대지 위에 올라앉아 있는 '곰보돌'의 고장이다. 그 사진만으로는 석등은 조악한 그 곰보돌 조각에 불과했다. 애꾸눈 궁예왕이 지천으로 나뒹구는 '곰보 바위'하나를 들어다가 아무렇게나 쓱쓱 깎아 도성 남대문 앞에 턱 세워 놓았을것만 같았다.

그러나 석등은 일본이 1940년 7월 30일자로 국보 118호로 지정했던 키 280cm 짜리 화강암 돌조각이다. 철원의 궁예도성은 신라의 도읍지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이나 석가탑보다도 2세기 후에 축조됐다. 따라서 그 석등은 석가탑이나 다보탑보다도 더 정교하고 품위있게 다듬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석등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으며 이젠 국보도 아니다. 그 석등처럼 태봉국의 왕 궁예(弓裔. ?~918)도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모습으로 역사 속에 남아 있다.

후삼국 시대는 44년 만에 막을 내렸다. 궁예는 그 가운데 단 18년 동안 태봉을 통치했다. 그리고 그 후 역사는 더 드라마틱한 사건들을 만들며 10세기나 진행됐다. 왕의 치적을 들춰내며 그의 사상이나 철학을 들먹이기에 1천 년 전은 너무 오래 된 일다. 그러나 나는 궁예 나라의 옛 수도 철원을 갈 때마다 역사가 그를 너무 깔아 뭉갰다고 생각했다.

우선 철원평야 사람들을 '왕을 돌로 쳐 죽인 백성의 후손들'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려사는 그때 백성에게 피살되던 궁예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918년 6월) 이리하여 (궁예가) 변복을 하고 도망쳐 나가니 궁녀들이 궁 안을 깨끗이 하고 태조(왕건)를 맞아들였다. 궁예는 산골로 도망하였으나 이틀밤이 지난 후 배가 몹시 고파서 보리이삭을 잘라 훔쳐 먹다 바로 부양(평강) 백성들에게 살해됐다. 궁예는 평강 땅 삼방(三防)에서 너무 배가고파 보리이삭을 훑어 먹다 밭일을 하던 농사꾼들에게 들켰다. 농사꾼들은 그를 돌로 쳐 죽였다.」

역사는 이 사실을 기록하면서 '폭정과 괴벽의 엉터리 애꾸눈 왕을 장수나 군졸도 아닌 무지렁이들이 통쾌하게 교살했다'고 행간 곳곳에서 속삭이고 있다. 그리고 궁예가 누구냐고 묻는 이들에게 '왕은 애꾸눈의 장애인이었고, 자신을 메시아라고 여긴 미륵신앙의 광신도였으며 부인과 자식을 쳐죽인 정신분열증 환자였다. 결국 피신길에 보리이삭을 훑어 먹다가 농민에게 붙들려 돌에 맞아 죽은 인격 파탄자였다'고 세뇌시키고 있는 것이다. 고려 개국공신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그렇게 궁예를 깍아내려야만 했을 것이다. 왕건의 군사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이미 궁예는 죽었지만, 몇 번이고 다시 죽여 다시 살아나지 못하게 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미륵의 세상을 갈망하던 하층농민들이 미륵불을 돌로 쳐 죽인 무지함, 백성이 왕을 쳐 죽이 대역죄, 즉 자식이 어버이를 쳐 죽인 패륜을 고스란히 철원 사람들의 옛 조상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있었다. 그것은 강자의 횡포였다. 그리고 중대한 실수였다. 철원 사람들은 궁예가 그의 최후를 당당하게 맞았다는 전설을 따로 간직하고 있었다.

궁예전설은 노인들을 통해 구전되기도 하고, 철원군지에 기술돼 있기도 했다. 어떤 노인들은 전설 속의 '궁예'를 '궁예대왕'이라고 지칭했다. '궁예대왕', 그 지칭은 철원사람들의 불명예, '미륵을 죽인 무지함과 왕을 죽인 대역죄, 자식이 어버이를 죽인 패륜'에 대한 항변같기도 했으며 책에서 배운 정사(正史)를 엉터리라고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전설 속의 궁예의 최후는 절대 비굴하지 않았다. 왕건의 군사 역모가 있던 날, 왕은 자신의 나라 도읍지를 마지막으로 순방한 것 같다. 그날 밤 왕은 남문을 통해 도성을 빠져 나왔다. 숨을 가다듬고 재기를 위해 찾아갔던 첫 피신처는 도성 서남쪽의 중어성. 평원 한가운데 세운 도성의 전략적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외곽에 세웠던 12개 산성 가운데 한 요새다. 현재 위치는 철원읍 대마리. 왕은 이 요새를 버리고, 더 서쪽으로 나가 현 연천군 신서면 승양리의 역시 외곽성인 승양산선으로 들어갔다. 또 다른 외곽성 보개산성(현 포천군 관인면)은 승양산성의 동쪽에 있었다. 그러나 왕은 어느새 더 동쪽의 명성산성(현 철원군 갈말읍)으로 들어가 최후 보루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산성에서 군대를 해산한다. 그리고 통곡하는 군사들을 뒤로하고 홀로 북쪽으로 떠난다. '명성'(鳴聲)이란 말뜻을 굳이 풀이한다면 '큰 울음소리'. 훗날 사람들은 그때 군사들이 슬피 울었다고 해 그 산성을 '울음산성', 산성이 있는 그 산을 '울음산'이라고 불렀다. 명성산성에서 해산했지만 충성스러운 많은 군인들이 왕이 걸어간 길을 뒤따라 군탄리까지 왔다. 왕은 "나를 따르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한탄강을 건너가 버렸다. 훗날 사람들은 그 곳이 바로 그때 '군사들이 슬피 울며 탄식한 곳'이며 '군탄'은 거기서 유래했다고 해석했다. 갑천(甲川)은 평강 하갑리 동북쪽의 작은 내. 왕은 자신의 정예병들을 양성하던 검불랑 군사훈련장을 지나 삼방협의 깊은 골짜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결했다.

육당 최남선도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철원 지방에서 채록한 궁예 최후의 전설을 '풍악기유'에 이렇게 실었다.
「남루한 차림의 고려왕(궁예)이 발 붙일 땅을 찾기 못하고 심벽한 석을 찾아 삼방 골짜기로 들어왔다. 삼봉 최고지에 올라 은피하여 재도할 땅을 둘러 볼 즈음 문득 한 스님을 만나 혹시 용잠호장할 땅이 없겠느냐고 물으니, 스님이 말하기를 이 속에를 들어와서 살길을 찾는 것은 어리석다고 했다. 이에 크게 절망하고 그 곳에서 깊은 연못을 향해 그대로 몸을 던지니 물에는 빠지지 아니하고 우뚝 선 채로 운명했다.」

http://www.dmzline.com/tag/궁예?page=1

<table style="border-collapse: collapse; width: 634px; height: 31px;" bgcolor="#ffffff" cellpadding="1" cellspacing="1">
<tbody>
<tr>
<td style="border-style: solid; border-color: rgb(48, 88, 210); border-width: 0px 0px 1px;" bgcolor="#3058d2" width="1%"><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ulim;">&nbsp;</span></span></td>
<td style="border-style: solid; border-color: rgb(48, 88, 210); border-width: 0px 0px 1px;" width="99%"><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rgb(48, 88, 210);"><span style="font-family: Gulim;">&nbsp;</span></span><font color="#c8056a"><strong><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ulim;"><span style="color: rgb(48, 88, 210);"> </span><br />

</span></span></strong></font></td>
<td style="border-style: solid; border-color: rgb(48, 88, 210) rgb(48, 88, 210) rgb(255, 70, 197); border-width: 0px 0px 1px;" width="100%"><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ulim;">&nbsp;</span></span></td>
</tr>
</tbody></table>

철운에서 금강산 들어가는 철도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 삼방역이라는 역이 하나 있다고 한다. 근데 그 역건너에 큰 돌담굴이 하나 있다고 한다. 그 돌담굴이 궁예의 무덤이라 한다. 그것이 왜 궁예의 무덤이라 하면 왕건의 군사들이 치열하게 쫓아 오면서 쏘니까는 이 궁예가 웬만한 화살은 맞으면은 그냥 쑥 뽑아서 던지는 그런 장사였다. 그런데 하도 많이 쏘아서 장사도 지치니까는 상나무 아름드리 겿에 가서 기대고 섰다. 하도 치열하게 화살을 던지니까는 궁예가 고슴도치 모양으로 몸에 꽃혔는데 안쓰러진다는 것이다. 이상해서 가서 보았더니 죽어있었다. 발길로 차도 안 넘어가고 목에다 뭘 두르고 잡아 당겨도 안넘어졌다.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장사는 역시 죽어서도 장사구나 별짓을 다해도 안넘어지니까는 그냥 선 채로 돌로 쌓아 묻어서 궁예의 무덤을 돌로 묻어서 궁예의 무덤이 그렇게 되었다. 결국 눕지도 못하고 죽은것이었다.
- 화현면 설화 광대소라는 이름이 비석에 새겨진 것을 보고 묻자 해준 이야기


펑강군 복계역 북쪽으로 하갑리, 상갑리라는 마을이 있다. 궁예가 패해 북쪽으로 도주하다 하갑리에선 아래 갑옷을 벗고 도주하다, 상갑리에선 윗 갑옷을 벗고 도주했다 해서, 하갑리, 상갑리라 했다 한다.


궁예(弓裔·?-918년)는 896~898년간에 철원(구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후 궁예는 901년 당나라에게 괴멸당한 고구려를 다시 일으켜 보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 일환으로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연호를 무태(武泰)로 바꾼다. 그 후 1년 뒤(905년) 구철원 북쪽 30리 거리인 풍천원 들판(지금의 철원과 평강 사이 비무장지대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리고 911년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泰封)이라 칭한다.

그러나 궁예는 풍천원 들판에다 거대한 도성을 축조하면서 강제로 노역에 끌려온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지지세력들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청주 지역을 너무 편애하게 된다. 그러자 경기 북부 호족들이 반기를 들고 궁예의 부하였던 왕건을 앞세워(877-943) 918년 궁예를 몰아낸다.   

훗날 궁예가 왕건의 군사에게 쫓겨 진을 친 곳이 명성산이다. 이 때 궁예가 이 산에서 철원쪽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겨 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하여 ‘울음산’으로 불리었고, 궁예가 강변에서 한탄했다 하여 ‘한탄강’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궁예와 명성산이 관련된 전설은 매우 많다. 산정호수 옆 두 개의 봉우리는 궁예가 올라가 망을 보았다는 곳이고, 등룡폭포 위 샘터 이름이 궁예약수, 자인사에서 궁예가 기도를 올렸다는 전설, 정상에서 강포리쪽으로 이어지는 궁예능선은 왕건의 공격을 피해 항거하며 쌓았다는 성터와 궁예왕이 숨었었다는 궁예왕굴 등 이 남아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고려사에는 ‘궁예가 평강과 안변 사이 험준한 지형인 삼방협으로 도망을  갔을 때 배가 고파 보리이삭을 끓여 먹다가 평강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이 지방 주민들로부터 전해지는 전설은 ‘궁예가 삼방협에서 우연히 만난 어느 중이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는 이런 협곡에 들어와 살아남겠다는 것이 어리석다”고 말하자 궁예는 “드디어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 높은 곳에서 의연하게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조선 말기에 제작된 지도인 청구도에는 삼방협 위치에 궁왕묘(弓王墓)가 그려져 있다. 또 1924년 최남선이 쓴 풍악기유(楓嶽記遊)에는 궁예왕 무덤흔적을 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table style="border-collapse: collapse; width: 634px; height: 31px;" bgcolor="#ffffff" cellpadding="1" cellspacing="1">
<tbody>
<tr>
<td style="border-style: solid; border-color: rgb(48, 88, 210); border-width: 0px 0px 1px;" bgcolor="#3058d2" width="1%"><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ulim;">&nbsp;</span></span></td>
<td style="border-style: solid; border-color: rgb(48, 88, 210); border-width: 0px 0px 1px;" width="99%"><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rgb(48, 88, 210);"><span style="font-family: Gulim;">&nbsp;</span></span><font color="#c8056a"><strong><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ulim;"><span style="color: rgb(48, 88, 210);"> </span><br />

</span></span></strong></font></td>
<td style="border-style: solid; border-color: rgb(48, 88, 210) rgb(48, 88, 210) rgb(255, 70, 197); border-width: 0px 0px 1px;" width="100%"><span style="font-size: 10pt;"><span style="font-family: Gulim;">&nbsp;</span></span></td>
</tr>
</tbody></table>

궁예가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던 철원은 화산대지입니다. 따라서 철원에서 가장 흔한 돌인 현무암의 특징은 용암덩어리가 공기중에서 식으면서 빠져나간 가스의 흔적으로 인한 구멍이 숭숭뚫린 현무암 화산석과 관련한 궁예의 일화는 어느날 왕건과 싸우고 궁으로 돌아오던 궁예가 개울을 건너던중 우연히 이 현무암을 발견하곤 돌에 뚫린 수많은 구멍이 벌래가 돌을 파먹었다고 생각하곤 스스로의 자격지심 으로 돌을 벌래가 파먹다니 이런 해괴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니 아~ 나의 운명이 다 하였구나라고 자조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옵니다.




 

by 초령목 2010. 10. 23. 14:27

 우선 우리나라 후삼국 시대를 대략적으로나마 한정해 봅시다. 신라 말기의 혼란상황부터 시작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후백제가 건국된 892년부터 고려가 후백제, 신라를 병합한 935년까지 44년의 기간을 후삼국시대라 보겠습니다.


0. 만주 및 요동 지역: 발해멸망 및 거란 대두
 

발해는 한국사에 포함되므로, '주변국 상황' 이라 말하기는 곤란합니다. 그러나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한국사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일단 만주지역 상황도 주변국 상황에 포함시키겠습니다. 

발해는 통일신라기에 신라와 더불어 2국체제를 형성했으나, 통일신라쪽이 후삼국시대를 맞게 되자, 야율아보기의 거란과 전쟁을 벌여 10년만에 요동지방을 상실하고 923년에 수도 홀한성이 함락됨으로써 멸망하게 됩니다.

이후 만주~몽골 등 동북아 북부에서 거란은 최강의 세력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몽골, 여진 등도 거란이 지배) 이 거란이 곧 '요나라' 가 됩니다. 요나라는 중국대륙의 5대 10국시대의 한 나라인 중국북부의 후당을 멸망시키고 후진이 건국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그 대가로 요나라(거란)은 만주나 요서지방에서 중국 본토로 들어가는 요충지인 '연운 16주' 를 차지하게 되는데, 이를 기반으로 나중에 요나라는 중국 북부까지 상당부분 장악하게 됩니다.

 거란에 대해 후백제와 고려는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하는데, 고려는 거란을 '친척의 나라'(=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라 하여 '만부교 사태'(거란이 보낸 사신과 낙타를 죽인 사건)를 일으키며 거란을 적대시하지만, 후백제는 거란의 사신 사고(娑姑), 마돌 등 35인이 당도하자 견훤은 이들을 전송하기 위하여 장군 최견(崔堅)을 보냈지요. 그들은 바다를 건너 북쪽으로 가다가 태풍을 만나 후당의 등주(登州)에 이르렀으나 모두 잡혀죽었습니다. 후백제가 거란과 친하게 지내려 한 이유는 고려를 압박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1. 중국대륙: 당나라 말기부터 5대10국시대(907 ~ 979)

 후삼국이전의 통일신라시기에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신라 말기를 맞아 후삼국에 돌입하자, 중국에서도 당나라가 무너지고 이후 송나라로 재통일될 때까지 한동한 혼란기를 맞게 되는데, 이를 5대10국시대라 합니다.

5대10국이란 명칭은, 이 시기에 중국이 북부에서 상대적으로 정통왕조에 가까운 5개의 왕조(북쪽의 5대)가 존재했고, 남부에서는 10개 나라(남쪽의 10국)가 존재했기에 붙인 명칭입니다. 

5대의 4번째인 후주의 세종은 사실상 중국 재통일의 기반을 닦았으나, 통일은 신하인 조광윤이 반란을 일으켜서 세운 '송나라' 의 몫이 됩니다.

후백제는  5대 중 후당(後唐)에 들어가 번병으로 칭함으로써 ‘백제왕’이라는 칭호를 받아 중국으로부터 외교적 승인을 얻어내었습니다. 또한 10대 중 오월(吳越)과 교류하였습니다.

 

2. 일본열도: 헤이안(平安) 시대(794-1185)

세계최초의 소설은 일본의 <겐지 이야기>(겐지 모노가타리) 라고 합니다. 이 헤이안 시대는 <겐지 이야기> 의 시대배경이 됩니다. 종종 일본만화로도 나오는 원씨(미나모토씨)와 평씨(다이라씨)의 다툼 이야기도 이 시대의 이야기죠.

헤이안 시대에는 일본왕을 대신하여 신하 중 하나가 섭정(왕이 성년이 되면 관백)이 되어 다스리던 시대였습니다. 왕가의 외척이던 후지와라(藤原) 가문에서 섭정이나 관백이 되어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보원의 난(1156) 이후, 다이라(平) 가문과 미나모토(源) 가문 등 무사계급이 지배계층으로 등장하게 되고, 다이라 가문과 미나모토 가문의 대결(평치의 난, 1159)에서 다이라 가문이 승리하여 다이라 가문이 헤이안 시대 일본의 새 지배자로 떠오습니다.

그러나 미나모토 가문을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은 결과, 미나모토 가문이 부흥에 성공하여 다이라 가문을 멸망시키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열어 막부에 의한 통치시대를 펴게 됩니다.

후삼국시대는 일본의 후지와라 가문의 정권시기에 해당합니다. 후삼국 중 후백제가 특히 일본과 교역을 자주 했습니다

'후삼국史보는 나무 > 후삼국시대 관련 펌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궁예, 진훤, 왕건의 비교  (0) 2010.10.23
궁예 전설  (0) 2010.10.23
후 삼국시대 역사  (0) 2010.10.08
후 삼국의 시대적 배경  (0) 2010.10.08
후삼국시대 연표  (0) 2010.10.08
by 초령목 2010. 10. 8. 19:17


지방 성주(城主) 및 호족의 대두는 신라 중앙 정부의 지배력을 약화시켰으며, 수취체제도 점점 해이해져 갔다. 더구나 신라 말기 귀족의 사치 향락은 늘어갔고, 따라서 비용도 증가했지만, 충족시킬 만한 재원(財源)은 반대로 줄어들었다. 이러한 재정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정부는 지방의 주·군에 조세를 독촉하게 되니(889년), 농민들은 결국 이중 부담을 강요받게 되었다.

신라의 성시(盛時)로부터 무거운 조세와 역역(力役)을 부담하고 있던 농민은 유민(流民) 혹은 도적이 되어 질서를 교란하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질서는 금성(金城, 경주)을 중심으로 한 신라의 구질서에 대한 타격을 뜻한다. 조세의 독촉은 영세한 농민층을 자극하여 농민반란(農民叛亂)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리하여 진성여왕 3년(889년)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의 난을 위시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죽주(竹州, 죽산)의 기훤(箕萱), 북원(北原, 원주)의 양길(梁吉), 완산(完山, 전주)의 견훤(甄萱), 양길 부하 궁예(弓裔) 등이 두드러진 반란군의 두목이었다. 그밖에 붉은 바지를 입은 적고적(赤袴賊)이란 반란군과 초적(草賊)이라고 하는 이름 없는 농민 반란군이 수없이 일어났다.


이들 중 견훤과 궁예는 각기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을 부르짖으며 새로운 정권을 수립, 건국하여 신라와 정립(鼎立)하게 되었다. 이를 후삼국(後三國)이라 한다.

그리하여 견훤은 완산주(完山州, 全州)를 근거로 삼아 의자왕의 원한을 갚는다는 구호 아래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그러나 견훤은 왕위 계승 문제로 아들 신검(神劍)에게 유폐되면서 몰락의 길을 걸어갔다. 궁예는 효공왕 때 후고구려(後高句麗)를 건국하였다. 뒤에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고치더니 다시 태봉(泰封)으로 고치고, 국도를 송악에서 철원(鐵圓)으로 옮겨 9관등을 설정했다.


궁예의 뒤를 이어 북방의 왕조로 추대된 것은 왕건(王建)이었다. 왕건은 즉위와 함께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고 송악에 천도하니, 이것이 뒷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건국이었다.

태조 왕건은 일시 후백제와 휴전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낙동강의 서부 일대에서 쉴 새 없는 교전(交戰) 상태를 지속하였다. 이미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신라에서는 지방호족들이 독자적으로 고려나 후백제와 통하고 있었다. 중국과 통교를 하며 일종의 외교전(外交戰) 양상을 전개한 고려와 후백제의 균형은 고창(古昌, 안동)에서의 전투를 계기로 고려 측의 승리로 기울게 되었다. 고려는 이에 그 전선을 후퇴한 후백제를 정면에서 위협하였다.


한편 후백제의 국내 정세는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 견훤이 그의 아들 신검(神劍) 등에게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전열(戰列)이 분열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명목만 유지하던 신라의 경순왕(敬順王)은 935년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다. 무장(武將)이며, 동시에 정치가요 외교가인 태조는 이로써 신라의 전통과 권위의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고, 936년 견훤을 앞세워 후백제까지도 멸망시켰다.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통일 왕조를 세우는 데 성공한 태조는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여 영토를 넓히고, 신라가 지니는 전통적인 권위를 원용(援用)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에 임명하는 등 신라의 지배층을 흡수·회유하였다. 또한 통일 후 호족들과 통혼(通婚)하여 의제가족적(擬制家族的)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들과 타협 또는 연합하였다.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러 호족들의 존재는 태조 왕건의 적지 않은 우려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정계(政誡)》, 《계백료서(誡百寮書)》를 저술하고 특히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겨 후세에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한 것도 이러한 우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한편 태조 왕건은 북진책을 펴서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이고 거란을 경계하였으며, 국토 수복과 신세력의 육성을 도모하여 서경(西京, 평양) 개척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장군 유금필(庾黔弼)로 하여금 동북 지방을 수복케 하여 영토를 확장하도록 했다.



'후삼국史보는 나무 > 후삼국시대 관련 펌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궁예 전설  (0) 2010.10.23
후삼국시대의 주변국 상황  (0) 2010.10.08
후 삼국의 시대적 배경  (0) 2010.10.08
후삼국시대 연표  (0) 2010.10.08
자료  (0) 2010.10.07
by 초령목 2010. 10. 8. 19:15
9세기에서 10세기에 이르는 2세기는 골품제(骨品制)를 기반으로 하는 신라 고대 국가가 붕괴되고, 그 속에서 호족 출신인 왕건(王建)이 나타나 고려를 세웠으며, 그 고려가 점차 봉건적인 귀족 국가로 확립되는 시기였다. 동시에 중국에서도 당(唐)이 망하고 5대(五代)라는 혼란기가 송(宋)에 의해 수습·통일되면서 한(漢) 문화가 복구되어 가는 시기이며, 한편으로는 북방 민족의 재등장이 촉진되고 있어 그 세력이 커다란 압력으로 남방에 미치던 때였다.

다시 말하면 성당 문화(盛唐文化)가 밀려들어 통일 신라의 문화가 극성기에 달했던 8세기를 끝으로, 신라는 당의 쇠퇴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폐쇄적인 지배 체제의 모순이 격화되어 드디어 붕괴되었으며, 후삼국(後三國)이라는 과도기를 거쳐 10세기에 이르러 고려 왕조로 재정비되어 갔던 것이다. 특히 이 시기는 중국의 간섭이 없는 독자적인 ‘좌절과 흥기(興起)’의 반복으로써 고대 국가가 붕괴되는 역사의 일대 전환점이 되는 때였으며, 외부 도전과 압력에서가 아니라 내부적인 승화 과정이 촉진되었던 시기였다.

7세기에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무열왕(武烈王)의 전체적인 왕권과 성당 문화의 흡수로써 8세기에 고대 국가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부족적 전통이 강했던 신라는 8세기 중엽 경덕왕(景德王) 때에 일련의 관제 개혁을 시도함으로써 귀족 세력을 억제하려 했으나 이에 실패하였고, 8세기말 혜공왕(惠恭王) 때에는 원래대로 환원됨으로써 전제 왕권의 한계성이 나타났다.

9세기의 소위 하대(下代) 귀족 연립 사회의 모순은 곧 고대 국가의 붕괴 원인이 된 것으로서 골품(骨品) 제도의 붕괴에서 그 최초의 양상이 나타났다. 이것은 내물왕(奈勿王)계(系)와 무열왕(武烈王)계 간의 단순한 왕권 쟁탈전이 아니라 골품이 분화되어 친족, 나아가서는 가(家)의 분립(分立)에 따른 분열 항쟁에서 비롯된 것이며, 같은 왕족에서도 도태·갈등이 촉진되어 혈통 위주가 아닌 실력 본위로 되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골품제에 대해 예민한 반발을 한 계열은 물론 6두품(六頭品)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무열왕계인 무염(武染)이나 김유신(金庾信)계인 김암(金巖) 등 강등된 계열과 최치원(崔致遠)·최신지(崔愼之) 등 중앙의 6두품 계열 등이 대표적이어서 이들이 골품제의 모순과 한계를 자각하여 정신적·학문적 반(反)사회성을 띠는 경우가 있었고, 또 일부는 실력으로 지방 세력과 결탁하여 중앙에 도전함으로써 이들 창조적인 소수 세력이 지도력을 상실한 사회에 파탄과 균열을 강요하고 있었다.

 

둘째 양상은 지방 세력의 대두이다. 중앙 귀족의 분열 항쟁과 골품제의 해이는 자연히 중앙 통제력의 약화로 나타났기 때문에 지방 세력의 등장은 필연적이었다. 그 중에서 서해안을 통해 당과의 교역에서 경제적인 배경을 지니게 된 해상 세력과 각처에서 성주(城主)·장군·왕을 칭하고 자립한 호족(豪族)들이 대표적이었다.

 

이들은 각기 커다란 경제력·토지·사병(私兵)을 거느린 지방 세력으로 각지의 인민과 토지를 지배하고 조세와 부역을 징발하여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앙에 도전하여 무질서와 혼탁의 시대상을 연출했다. 이들은 이중적인 착취 속에서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농민을 이끌고 반란과 항쟁을 지도하였으니, 장보고(張保皐)·궁예(弓裔)·견훤(甄萱)·왕건(王建) 등이 이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며, 농민들은 초적(草賊)·군도(群盜)로서 이들에게 이끌렸다. 따라서 변방을 지키던 군진(軍鎭) 세력 역시 관병(官兵)으로서가 아니라 사병(私兵)으로서 해상 세력으로 변질되어 갔으며, 이들이 지방 세력의 군사적인 배경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셋째 양상은 사상의 변화였다. 신라 왕실의 종교는 불교, 특히 교종(敎宗:5敎)이었다. 그러나 9세기 이후 골품제의 붕괴와 사회 혼란의 가중은 복잡한 교리를 외면하게 되었고, 학구적이고 여유 있는 생활관이 아니라 불가사의한 힘으로써 요행과 현세의 정신적 위안을 바라게 되었다. 따라서 풍수도참사상(風水圖讖思想)이나 미륵불사상(彌勒佛思想)이 도입되었으며, 또한 이때를 대표하는 선종(禪宗:9山)이 유행되었다.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하여 좌선에 의해 미래상을 현세적으로 심화하려는 것이며, 이러한 교파의 대두는 정치적·사회적 혼탁기와 일치되는 바 크다. 특히 선종의 유입과 동시에 종래의 유학과 풍수도참사상 및 도교 등이 종합화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이때의 정신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 나아가서 일련의 사상적인 복합화가 다름 아닌 6두품 계열과 호족에 의해서 추진되었다는 사실이 고대 국가의 정신적 탈피 현상이라 하겠다.

 

후삼국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인 궁예와 견훤은 각기 왕족 출신, 신라 무장 출신이었으나, 전자는 사회를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파괴와 부정의 괴수에 불과하였으며, 후자는 신라 관리로서의 권능과 지위를 유지하려 했던 신라 사회의 계승자를 자칭하였으므로 골품 사회를 넘어서려는 당대에서는 광범한 사회적 호응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따라서 호족 출신인 왕건은 우선 시대성을 파악하여 호족과 당대 선가(禪家)·숙위(宿衛) 학생들의 이념을 고대적 신라 사회의 성격을 바탕으로, 그들과 공존하여 탈피하면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고대적 잔재의 완전 극복이 불가능했던 제한성 때문에 고려 사회에서는 골품제 대신 가문과 혈통이 강조되었다.

 

따라서 고려 귀족 사회의 성립 과정은 첫째, 광범한 호족의 결속과 유대 속에서 이루어졌다. 때문에 각처의 호족과 그 후 왕실 내의 근친혼의 성행, 그리고 그들을 중앙 귀족으로 흡수하는 데는 커다란 노력이 요구되었다.

 

둘째, 나말(羅末)의 선종과 풍수도참사상뿐 아니라 유교가 치국지본(治國之本)으로 채택되었고, 새로운 귀족 사회의 정치이념의 발달에 따라 과거제의 실시로 중앙 귀족적 관료 체제로의 전기(轉機) 속에서 이룩된 것이다. 나아가서 10세기말 성종(成宗) 때의 중앙 및 지방제도의 정비는 관료의 지위를 결정하는 고려 귀족국가 형성의 마지막 기틀을 이룩한 것이다.

 

셋째, 전시과(田柴科)의 지급이다. 이것은 귀족 관료제 형성의 경제적 기반이 되는 것으로서, 태조(太祖) 때의 역분전(役分田)이 호족들의 회유와 결속을 위한 조치였다면, 경종(景宗) 때의 전시과는 관료제와 조화를 이루는 제도적 발전이었으며, 목종(穆宗)·문종(文宗) 때의 전시과에 의해서 비로소 완성을 보아 고려 귀족사회는 그 모습이 뚜렷하게 부각되었던 것이다.


'후삼국史보는 나무 > 후삼국시대 관련 펌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궁예 전설  (0) 2010.10.23
후삼국시대의 주변국 상황  (0) 2010.10.08
후 삼국시대 역사  (0) 2010.10.08
후삼국시대 연표  (0) 2010.10.08
자료  (0) 2010.10.07
by 초령목 2010. 10. 8. 19:13

 

892년 : 견훤의 반란, 광주 점령. 궁예, 양길의 반군에 가담하다.
900년 : 후백제가 공식적으로 건국
901년 :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운다. 5년 후 다시 마진으로 국호를 바꾸고 강원도 철원군으로 수도를 옮겼다.
911년 : 마진이 태봉으로 국호를 바꾼다.
918년 : 왕건이 반란을 일으키고 고려를 세운 후, 연호를 천수라고 한다.
926년 : 거란이 발해를 침략. 발해 태자 대광현이 부하 30여 명을 데리고 고려 고려 태조에게 귀순.
928년 : 견훤이 신라를 침공해 경주을 함락시킨다. 신라 경애왕을 견훤이 사살한다.
930년 : 고창 전투 - 왕건이 견훤에게 신라 경애왕을 죽인 것을 비난하고 전쟁을 일으킨다.
934년 : 홍성 전투 - 후백제의 국력을 손상시킨다.
935년 : 견훤이 금강(후백제)을 후계자로 선정한다. 신라가 고려 태조에게 항복한다.
936년 3월 : 견훤이 아내 고비녀와 박영규를 데리고 고려로 망명한다.
936년 8월 : 견훤과 왕건이 공동으로 지휘했던 황산 전투에서 후백제를 멸망시킨다. 쿠데타의 주범인 능환과 양검을 처벌하고, 드디어 후삼국 통일을 이룬다.

 

위키 백과에서.

 

◈  후삼국 시대 년도별 역사의 상세 내역

 

▶  876년 - 도선이 왕륭의 집에 와 명년에 삼한을 통일할 인물이 태어날 것을 예언.

 

▶  877년 - 왕건 출생. (867년 견훤 상주 가은현에서 출생. 870년 궁예 출생)

 

▶  887년 7월 - 진성여왕 즉위


▶  888년 2월 - 진성여왕, 정을 통하던 위홍이 죽자 시호를 혜성대왕이라고 함. 
- 진성여왕, 미소년과 음난한 생활을 하고 이들에게 요직을 줌. 
- 대야주의 은자거인 사건 


▶  889년 - 상주에서 원종과 애노의 난이 일어남. 원종, 애노 등이 사벌주에서 반란하자 왕이 나마 영기 에게 명해 사로잡게 했는데 영기는 도망 가고, 촌주 우련은 전사. 이에 영기를 죽이고 우련의 10살 난 아들을 촌주에 임명. 
- 이후 본격적으로 전국에서 농민반란 일어남. 이런 혼란의 와중에 아자개(견훤 父)가 사불성(상주)지역을 장악하고 장군을 칭함. 

- 서남해 수군으로 있던 견훤, 예하의 병력을 이끌고 독립. 1개월 사이에 5천 명의 무리가 모임  


▶  891년 - 궁예, 죽주의 도적 우두머리 기훤에게 투신.


▶  892년 - 궁예, 북원의 양길에게 투신. 양길이 궁예에 군사를 나누어 줘서 궁예로 하여금 동쪽으로 땅을 공략하게 하였다. 이에 치악산 석남사에 나와 머물면서 酒泉(주천-영월), 奈城(나성-영월), 鬱烏(울오-평창), 御珍(울진) 등 명주 관내의 여러 군 현을 습격해 모두 항복 받았다. 
- 견훤, 나이 27살 때 무진주(광주)를 습격하여 왕이 됨.


▶  893년 - 도선이 다시 와 왕건을 가르침.

 

▶  894년 2월 - 신라, 최치원이 <시무10조>를 올림. 
10 월- 궁예, 북원(北原 현 원주)에서 명주(溟州 현 강릉)로 들어가  장군을 칭함. 그곳에서 병력을 3500명으로 불림. 

 

▶  895년 - 궁예가 저족, 성천, 부약, 금성, 철원 등 장악. (865년 철원의 도피안사의 향도들은 석가가 입적한 후  1806년이 되었음을 슬퍼하며 불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지역 하층농민들은 강한 말세 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미륵불이 하생하는 이상세계의 도래를 대망 하고 있었을 것이다.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듯 함) 
- 신라, 서남쪽에 ‘적고적’이라는 도적들이 경주의 서부 모량리까지 침략. 

- 신라, 헌강왕의 서자 요를 태자로 책봉.

 

▶  896년 - 평주(평산)의 대호족 박지윤 가문 궁예에 귀부. 
- 왕륭, 왕건 부자 궁예에 귀부. 
- 궁예, 왕륭을 金城태수로 삼고 왕건을 송악(개성) 성주로 삼음. 

- 궁예, 僧嶺, 臨江을 점령. 궁예, 스스로 왕을 칭하며 내외관직을 설치. 
 
▶  897년  5월 - 왕륭 사망.
6월 - 진성여왕, 효공왕 요에게 선위.
12월 - 진성여왕 사망.

 

▶  898년  2월 - 궁예, 송악성을 수리하고, 천도. 
3 월- 왕건을 정기대감으로 삼아 양주와 견주를 치게 함.
7 월- 道詵 죽음. 
- 후고구려 궁예, 浿西道 및 한강주내 30여 성을 취하고 송악부에 본거를 옮김. 紅巖(김포군 양주), 金浦 (김포), 穴口(강화) 등 30여성을 점령.
 
11월 - 궁예, 팔관회를 행함. 죽은 병사들에 대한 조의.

 

▶  899년  7 월- 북원의 양길, 국원(충주) 등 10여 성주를 시켜 궁예를 공격하다가 非惱城에서 대패. 
11월 - 최치원, 면직되어 해인사로 은둔.

 

▶  900년 10 - 궁예, 왕건을 보내어 광주(경기), 충주, 청주, 당성(경기 남양), 괴양(충북 괴산) 등의 지역을 평정. (경기 남부와 충북 지역 장악) 이러한 공이 인정되어 왕건을 아찬으로 삼음.  이후 이 지역에서 궁예(왕건)의 세력권에 편입된 인물로는 진천의 임명필(왕건 즉위 후 순군부령), 임희(병부령)과 청주출신의 김언규 (백서성경), 근겸, 관준, 능달 등이고, 광주의 왕규, 충주의 유긍달 은 왕건과 혼인관계 를 맺음. 

(왕건이 정벌한 지역의 호족들이 왕건의 세력으로 편입된 예이다. 물론 이때는 궁예의 부하였다.) 

- 견훤, 완산(전주)에 도읍하고 “백제(후백제)”라는 국가를 건설함.
 

▶  901년 8월 - 견훤, 금성(나주)군 남쪽의 10여개 주현 공략. 
- 견훤, 대야성을 공격하였으나 패배. 견훤은 신라의 목을 죄기 위해서 낙동강 동안에 이르는  최단 거리인 합천 루트를 이용하고자 했다. 

- 궁예, 왕을 칭하고 국호를 “후고구려”라 일컬음, 
- 궁예,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신라왕 화상을 칼로 침.
 
▶  902년  3 월- 신라, 대아찬 효종을 시중으로 삼음.

 

▶  903년  3 월 - 왕건, 錦城(현 나주) 등 10여성을 공격 점령함. 금성의 명칭을 나주로 고치고 군대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귀환. 나주는 전남의 심장부이자 경제적 요충지로 당의 선진문물을 접근키 용이하였다. 더구나 유학생, 선승들이 들어오는 길목으로서 왕건은 실제로 당에서 귀국하는 선승들과 교류했고 그 가운데 형미는 왕건이 철원으로 회군할 때 함께 돌아오기도 했다. 영산강 하구에 위치한 나주 회진은 중국 대륙으로 가는 중요한 항구였던 것이다. 
- 왕건, 安邊拓境之策을 개진. 궁예, 치하하며 閼粲(알찬)으로 임명. 

- 양주(良州 -경남양산) 장수 김인훈이 급히 구원을 요청하매 궁예가 왕건에게 명하여 구하게 함. 

- 궁예, 국도를 옮기려고 철원, 부양 등지에 가서  산수를 周覽.

 

▶  904년 - 궁예, 백관을 설치. 국호를 후 고구려에서 마진으로, 연호를 무태라 함. 
- 패서도 10여 주현이 왕건에게 투항함.
7 월- 공주장군 홍기, 궁예에게 귀부하면서 궁예의 세력권이 금강 유역까지 미치게 되었다.


▶  905년  2 - 신라에 별이 비오듯 떨어짐. 
7 월- 궁예, 국도를 철원으로 옮김. 연호를 성책으로 고침.
8 월- 궁예, 청주인 一千戶를 철원으로 이주시킴. 
- 궁예의 마진, 신라의 변경 읍락 침탈. 신라 왕은 이를 막아내기 역부족이라며 성주들은 나가 싸우지 말고 성벽을 지키라고 명함.
 

▶  906년 1월 - 신라, 파진찬 김성을 상대등으로 삼음.
4월 - 왕건(30세), 정기장군 금식 등을 인솔하여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사화진(상주)을 공격, 견훤과 여러번 싸워 이김. 이에 경북 상주(당시 상주는 루트가 교차하는 요충지), 문경, 영주 등 낙동강 이북 지역이 마진의 땅이 되었다. 
이 지역은 조령과 죽령 등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의 경주로 이어지는 길목으로 낙동강 상류 지역의 중심권이었다. 이후로 나주를 확실하게 위해 궁예의 왕건 부대와 견훤 부대는 해상전을 자주 벌리게 된다. 

- 궁예, 신라로부터 항복해 오는 자들을 다 죽임. 

 

▶  907년 - 견훤, 일선(선산)군 이남 10여성을 빼앗음. 이 전투는 낙동강 중류를 끊어 놓는 전략상의 개가였다. 
- 궁예, 왕건에게 명하여 정주(경기도 풍덕)에서 전함들을 수리.
 

▶  908년 2월- 혜성이 동방에 나타남.

 

▶  909년  - 왕건, 궁예가 나날이 포악해지자 지방 군무에 뜻을 두었는데 마침 궁예가 왕건에게 나주를 지킬 것을 명령, 관등을 높혀 한찬 해군 대장군에 임명. (이때부터 독자적 세력 형성 시작) 
- 왕건, 염해현(영광)에서 오월에 보내는 후백제 使船을 나포. 

- 왕건, 압해현 반란군 두령 능창 사로잡아 궁예에게 보냄. 궁예가 능창의 얼굴에 침을 뱉고 그를 죽임.

 

▶  910년 - 견훤이 나주에서 왕건에게 패함. 왕건은 알찬 종희, 김언 등을 부장으로 삼아 군사 2천 5백을 거느리고 진도군을 가서 치게 하여 함락시킴. 다시 진격하여 皐夷島 (고이도) 점령. 다시 나주 포구에 이르러 견훤의 함대와 격전. 풍세를 타 화공으로 격퇴. 견훤, 작은 배로 도주. 나주에 진을 둠. 
- 견훤은 금성이 궁예에게 투항한 것에 분노해 보병과 기병 3천 명으로 금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였으나 열흘이 지나도록 결말이 나지 않았다. (삼국사기) 
 

▶  911년 - 궁예는 다시 왕건을 무진주로 출정시켰다. 왕건의 선단이 뭍에 올라 나주를 경유, 광주 땅으로 진격한 것이다. 그러나 견훤의 사위 지훤이 굳건하게 방비한 성으로 잘 물리쳐 싸웠다. (세종실록 지리지) 
- 신라왕이 천첩에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대신이 천첩 죽임. 

- 궁예, 국호를 태봉으로, 연호를 수덕만세라 고침. 

- 승려 석총이 궁예를 비판하자 궁예가 쇠몽둥이로  때려죽임.
 
▶  912년 4 월- 신라, 효공왕 죽음. 신덕왕 즉위. 
- 견훤, 궁예의 군대와 덕진포에서 싸움. 
- 왕건 태자 무(혜종) 출생.

 

▶  913년 - 궁예, 왕건을 파진찬겸 시중으로 높혀 소환. 
- 아지태 사건. 

- 궁예, 왕건의 시중 벼슬을 떼고 다시 수군을 통솔하게 함.
 

▶  914년 - 왕건, 백선장군이 되어 수군을 거느리고 나주에 출진. 백제인들과 해상의 도적들이 감히 준동하지 못함. 이 해에 왕건은 후백제로부터 해상권 우위를 위해 100척의 선박을 더 건조하였다. 이 배들 중 큰 전함 십수 척은 사방이 각각 16보인데 갑판 위에는 망루를 만들고 병마가 달릴 수 있도록 했다. 
- 궁예, 왕건을 불러 역모죄 추궁하였으나 한림랑 최응이 왕건을 구해줌. 

- 왕건,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나주로 감.
 

▶  915년 2 월- 궁예, 부인 강씨와 두 아들 죽임.


▶  916년 8월 - 후백제, 신라의 대아성 침공. 그러나 이기지 못하였다.

 

▶  917년  7 월- 신라, 신덕왕 죽음, 경명왕 즉위. 

 

▶  918년  2 월- 중국 상인 왕창근이 고경참문을 궁예에게 바침.
6 월- 왕건, 궁예에 반기를 들고 고려를 건국. 궁예의 세력을 제거 하였다. 기병장군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사귀, 복지겸 등이 왕건에게 추대할 뜻을 말하려 하면서, 부인 유씨에게는 이 일을 알리지 않으려고 동산 안에 새 오이가 있을 것이니 그것을 따오라고 하였다. 
유씨가 그 뜻을 알아차리고 북쪽 문으로부터 나가서 몰래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왕건이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자, 부인 류씨가 손수 갑옷을 들어 왕건에게 입혔다. 

- 궁예, 변복을 하고 북문으로 도망, 백성들에게 살해됨. 
- 왕건,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라 함. 

- 마군장군 환선길의 역모. 환선길은 그 아우 향식과 함께 왕을 추대한 공이 있어 왕건이 심복으로써 위임하여 왕궁을 숙위케 하였었다. 

그의 아내가 ‘당신의 능력이 남보다 뛰어나 사졸이 복종하고 큰 공이 있는데 정권은 다른 남에게 있으니 부끄럽지 않냐’고 하자 선길이 마음 속으로 그 말을 옳게 여겨 틈을 엿보아 변란을 일으 키려고 하니, 복지겸이 이를 알고 비밀히 왕건에게 아뢰었다. 

왕건은 형적이 드러나지 않아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느 날 왕건이 전상에 앉아서 학사 두서너 사람과 국정을 의논하고 있는데 선길이 50명의 병사를 이끌고 내정으로 쳐들어왔다. 

왕건이 ‘짐이 비록 너희들의 힘으로써 왕이 되었지만 어찌 천명이 아니랴. 천명이 이미 정해졌는데 네가 감히 그럴 수 있느냐’고 호통을 쳤다. 

선길이 왕의 말과 얼굴빛이 평시와 같이 침착해 보이자 복병이 있는가 의심하여 달아났는데 숙위하던 군사가 쫓아가서 그를 죽였다. 향식은 뒤에 오다가 일이 실패한 것을 알고 도망가다가 역시 군사가 추격하여 죽였다. (고려사절요) 

- 왕건, 소판 종간, 내군장군 은부 처형. 
- 왕건, 관제를 신라의 제도로 고치라는 조서를 내림. 
- 고려, 조세정법을 정함. 

- 왕건, 변방의 변란을 우려해 전권 사절들을 파견하라 지시. 
- 골암성 성주 윤선 고려에 귀순. 
- 왕건, 노비 1천명 본가로 돌려보냄. 

- 왕건, 백성에게 3년간 조세와 부역을 면제, 유이민들 돌려보냄. 
- 왕건, 개국 공신 포상. 
- 견훤, 일길찬 민합을 왕건에게 보내 등극 축하. 

- 고려의 웅주, 운주 등 10여개 주현이 모반하여 백제에 붙음. 
- 왕건, 구진을 나주도대행대 시중으로 임명. 

- 마군 대장군 이흔암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단. 그는 궁예 말년에 웅주를 쳐 빼앗았으므로 그대로 그 곳을 지키게 하였는데 왕건이 즉위한 소식을 듣고 몰래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 부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떠나오니 사졸들이 많이 도망해 버렸으므로 웅주가 다시 후백제의 소유가 되어버림. 

이흔암의 이웃에 사는 수의형대령 염장이 태조에게 고변. 왕건이 “흔암이 제 마음대로 와서 변경의 땅을 잃었으니 죄는 실로 용서하기 어려우나 나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왕건과 대등한 지위?) 왕을 섬겨 그전부터 정분이 있으니 차마 죽일 수 없으며, 또 반역의 형적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저도 변명할 말이 있을 것이라” 하자, 염장이 흔암을 엿보기를 청해 왕건이 은밀히 내인을 보내 감시하던 중, 

흔암의 처 환씨가 변소에서 ‘남편의 일이 성취되지 못하면 나는 화를 받을 것이다’라고 중얼거린 것이 발각되어 드디어 하옥됨. 
 
왕건이 꾸짖기를 “법이란 것은 천하의 공정한 것이므로 사정으로써 법을 굽힐 수 없다”하니 흔암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저자에서 목베게 하고 집을 적몰하였으나 그 도당들에게는 죄를 캐묻지 않았다. (고려사절요) 
 

- 청주의 호족 세력은 이해관계에 따라 심한 내분을 겪으면서 왕건 에게 협조한 문식, 명길, 김근겸, 관준, 김언규 등의 세력과 능달, 견금 등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왕건은 청주인들의 변란에 대비하기 위해 명길, 문식, 능달을 청주에 보내어 동태를 살피고 오게 하였다. 이에 능달은 청주인들이 딴 마음이 없다고 보고하여 청주의 영군장군으로 있었던 견금 등의 재지 세력과 이해를 같이 하고 있었고, 문식과 명길은 청주인들이 모반의 뜻이 있음을 상경종사하고 있었던 청주인 김근겸, 관준, 김언규에게 말하면서 부터 두 세력은 서로 상대방을 모함하고 대립하게 되었다. 

왕건은 그들이 서로 모함하는 것을 용서하고 회유, 무마하는 한편 마군장군 홍유와 유금필로 하여금 1500명의 병사를 청주 부근의 鎭州에 보내 변란에 대비토록 하였다.
 
8 월- 웅주(공주), 운주(홍성) 등 10여개 주현이 모반하여 백제에 붙음. 
9 월-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 고려의 귀부. 
- 순군리 이춘길 등 모반. (복지겸이 고변한 사건임) 이춘길은 청주 인으로 동향의 배금규, 계천(전남 장흥)인 경길 아차, 매곡(충북 회인)인 경종과 모반함. 

이에 그 당을 모조리 목베려 하였는데, 청주인 현률이 아뢰기를 경종의 누이는 매곡성주 공직의 처이고 그 성이 매우 견고하고 백제에 인접해 있으므로 공직이 반드시 반할 것이니 회유하라고 하였으나 결국 처형되고 맘. 이에 매곡성주 공직이 견훤에게 투항하였다. 

- 왕건은 평양을 대도호부로 하고 당제(4촌동생) 왕식렴과 열평을 보내어 평양을 수비케 함.
 
10 월 - 견훤의 조종으로 청주의 帥 파진찬 진선이 그의 아우 선장과 함께 반역을 꾀하다가 죽음을 당함. 견훤은 파진찬 진선과 선장 형제 등 궁예 계열의 호족들 포섭하면서 왕건 정권의 전복을 원격 조종 하였다. 
- 왕건, 처음으로 팔관회를 열고 의봉루에 나가 관람.
 

▶  919년 1 월
(고려 2년) - 왕건, 송악으로 천도, 삼성 등 관제를 정함. 
3 월 - 왕건, 王輪寺, 法王寺 등 10 寺 창건, 3대조를 추존.


▶  920년  1월 - 신라, 처음으로 고려에 사신을 보내 교빙.
2 월- 康州 장군 윤응, 고려에 귀부. 
- 고려 북방 오랑캐에게 자주 침략을 당해서 유금필에게 명하여 북계의 골암진(골巖鎭)에 축성.
 
9 월- 견훤, 아찬 공달을 고려에 보내 孔雀扇, 竹箭을 선물. 이것은 신라 침공을 앞두고 고려를 무마하기 위한 목적으로 생각되어 진다.
10 월 - 후백제 견훤, 기병 1만명을 이끌고 대야성(합천), 구사성(초계- 창원)를 공취하고 신라의 진례군(김해 서북방)에 출진. 이에 신라는 아찬 김률을 보내 처음으로 고려에 원병 요청. 그 소식을 듣고 견훤이 물러감. 
견훤은 35세 나에도 함락시키지 못했고 초로인 50세 때에도 공격했다 실패했던 대야성을 노인이 되어서야 쟁취한 것이니 감회가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후로 고려와 틈이 생겼다는 것은 그간 호의를 보여왔던 왕건에게 자신의 공격의도를 보인 것이며 또한 이제까지의 단순한 국지전이 아닌 앞으로의 전면전 양상으로 바뀌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  921년  2 월 - 흑수말갈의 추장 고자라, 170명을 데리고 고려에 귀화.
10 월 - 왕건, 서경 행차.
12 월 - 왕건, 왕자 武를 세워 정윤(태자)으로 삼음.

 

▶  922년  4월 - 고려, 개경 대궐 서북쪽에 일월사 창건.
6월 - 하지현(경북 안동지방) 장군 원봉, 고려에 내부.
7 월- 견훤, 휘암을 사신으로 삼아 쓰시마에 파견.
11월 - 명주 장군 김순식이 아들을 보내 고려에 항복. 
- 진보성주 홍술이 사절을 파견하여 고려에 항복하기를 청함.


▶  923년  4 월- 고려 유금필, 북번을 초유(招諭).  귀부한 자가 1천 5백명이고, 사로 잡혀간 우리 나라 사람 3천명이 돌아왔다. 
6 월- 고려 윤질이 후량에서 五百羅漢畵像을 가져와 해주 숭산사 안치


▶  924년  1 - 신라, 사신을 후당에 보내 조공.
7 월- 견훤, 아들 수미강과 양검을 보내 경상도 북부 지역으로 출병. 견훤은 오랜 침묵을 깨고 경상도 북부 지역으로 출병을 단행, 아들 수미강과 둘째 아들 양검으로 하여금 대야성(합천)과 문소성(경북 의성) 등 두 성의 군대를 동원하여 조물성을 공격하였다. 
여기서 수미강은 견훤의 총애를 받던 금강으로 생각 되어진다. 이에 왕건이 장군 애선과 왕충을 보내 이를 구원하게 했으나 고려 장군 애선이 전사. 조물군 사람이 굳게 성을 지켜 수미강 등이 이기지 못하고 돌아감.
8 월- 거란 아보기, 발해 침공.
9 월- 견훤, 왕건에게 절영도의 옥색말 한 필을 선물. 
- 신라, 경명왕 죽음, 아우 경애왕 즉위. 
- 왕건, 신라에 사신을 보내 弔祭. 
- 신라,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 방문.

 

▶  925년  9 월 - 매조성(買曹城) 장군 능현(能玄), 고려에 내부.
10 월 - 발해 장군 신덕 등 500인, 고려에 내투. 
- 왕건(고려), 정서대장군 유금필을 파견하여 백제의 영향권에 있던 연산진(문의-청주)을 쳐 장군 길환을 죽이고, 任存郡 (임존성-예산) 을 공략해 3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음. 

- 왕건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조물군에 와서 견훤과 교전. 유금필이 군사를 이끌고 와 응원. 견훤과 인질 교환. 이 때에 견훤의 군사가 날래어 승부를 결단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에 왕건은 일시적으로 화친하여 견훤의 군사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려고 글을 보내서 화친할 것을 요구하고 종제 왕신을 인질로 보내니 견훤도 역시 진호를 보내서 교환했다. (삼국유사) 

이때 고려는 신라와의 화친을 깨고 신라와 동맹을 맺은 댓가를 톡톡히 치루었다. 이 조물성 전투에서 왕건은 크게 불리하여 견훤에게 화해를 청하여 우선 견훤을 尙父라고 칭하여 존대하고 자신의 조카인 왕신을 인질로 보냈다. 

이때 왕건이 견훤을 군영에 불러들여 일을 의논하려고 하니 유금필이 사람의 마음은 알기 어려우니 어찌 가벼이 적과 서로 가까이 하겠냐고 간해 왕건이 그만 두었다. 
11 월 - 신라, 경애왕이 이 소식을 듣고 고려에 사신을 파견해 ‘견훤은 화친할 사람이 못된다’고 함.
12 월- 탐라가 고려에 토산물 공납. 
- 견훤(후백제), 거창 등 20여성 공취. 화친으로 북군(고려군)을 묶어둔 견훤은 남군(백제군)군대를 이끌고 거창 등 20여개 성을 일거에 점령했다. 기세를 올린 견훤은 즉각 후당에 사신을 파견, 후당에서는 그에게 검교태위 겸 시중판백제군사면 도통지휘 병마판치등사 백제왕이라 하고 식읍 2,500호를 주었다 (삼국유사) 

- 발해 좌수위 소장 모두간 등이 백성 1천호와 함께 귀순.
 

▶  926년  4 월 - 갑자기 고려에 인질로 간 견훤의 外甥 진호가 병사하였다. 이에 발끈한 견훤이 고려의 인질 왕신을 죽이고 웅진으로 진군하자, 왕건이 여러 성들에게 명령하여 성을 고수하고 나와 싸우지 못하게 하였다. 그 결과 웅주, 운주 등 충남 일대 10여개 주현과 충북 일대가 후백제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7 월- 신라, 경애왕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 견훤을 비난.
12 월- 발해의 103성, 모두 거란에 점령됨. (발해 멸망) 
- 왕건, 서경에서 齋祭를 올리고 州鎭을 巡歷.


▶  927년  1월.
(고려10년)  - 왕건, 친히 후백제의 용주(경북 예천) 침공하자 신라도 지원병 보냈다. 왕건은 용주를 얻게 됨으로써 소백산맥 이남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자 견훤은 특유의 화해 제스처를 취했다. 진호의 죽음에 대한 앙갚음으로 처형했던 왕신의 시신을 정중히 돌려보낸 것이다.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북군의 공세가 심화되었다. 

한편 이 무렵 남군과 북군의 전장이 형성된 곳은 내포 지역이었는데 이곳 관련된 합덕지의 합덕방죽은 견훤이 군사와 말에 물을 먹이기기 위해 조성했다는 전설인 내려온다. 

이것은 그의 농업 경영에 대한 안목과 더불어 당시 남군의 주둔이 둔전 형식(현지에 주둔하는 군대의 식량을 자급자족하게 하고 군량미 비축을 통해 주변 호족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임으로 이탈을 막음)을 띄었음을 전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견훤이 지금의 원주시 문막에 성을 축조하였고 둔병들이 왕건의 군대를 맞아 싸웠다는 조선화여승람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3 월- 후백제 근암성을 왕건에게 빼앗김. 
- 왕건이 운주(충남 홍천)로 쳐들어가 성주 긍준을 성 밑에서 격파하였다. (긍준은 이후에 고려에 투항, 936년 왕건이 신검을 칠 때 대상 벼슬을 하고 있었다.) 

- 운주를 공격한 지 3일 후에 왕건이 직접 근암성을 함락시켰다.  
4 월- 신라 황룡사탑 북쪽으로 기울어짐. 
- 고려는 해군 장군 영창, 능식 등을 시켜 수군을 거느리고 가서 후백제의 강주(진주) 공격하였다. 원정군은 전이산(남해), 노포평 (서산), 돌산(순천) 등 4개 향을 함락시켰다. 

- 왕건이 웅주(공주)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함. 
7 월 - 고려, 애선과 원보 재충이 대야성을 공격하여 그 성의 장군 추허조를 사로잡았다. 
견훤은 당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던 문경 일원에 병력을 집중 배치하여 북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있었다. 문경은 견훤에게는 결코 빼앗길 수 없는 땅이었다. 

그러나 김락이 등이 끄는 북군이 후백제의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곧 고사갈이성의 성주인 홍달은 북군에게 속속 넘어가는 주변 정세에 편승하여 항복하였다. 홍달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파견된 후백제 관리들 마저도 일제히 투항했다. 

이로서 북군은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거대한 수운로를 확보하여 병참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후에 후삼국의 진운을 결정짓는 고창전투를 승리 왕건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도 문경 지역 장악에서 비롯된 수운 교통로 확보에 힘입었다고 볼 수 있다.
 
8 월- 고려 해군, 후백제의 4개 항을 함락시킴. 
- 왕건, 웅주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함. 

- 고려군이 배산성(문경시 호계면)에 주둔.
 
9 월- 왕건, 강주를 순행. 
- 명주 장군 순식이 아들 장명과 군사 600을 보내 고려에 숙위. 
- 견훤이 近品城과 경주에 근접한 고을부(高鬱府-영천) 공격. 신라왕이 연식을 보내어 고려에 구원 요청하였다. 왕건이 시중 공훤, 대상 손행, 정조 연주에게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홍달의 투항에 분노한 견훤은 계립령로 (문경일대) 주변의 탈환과 보복을 위해 출정했고 근암성을 공격, 불 태운 후 빠른 속도로 남하해 고울부(영천)로 진격했다. 

남군은 문경 쪽을 공격하였지만 기실은 성동격서 전략으로 전광석화 처럼 남하하여 신라의 도성에 바짝 다가선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는 남군의 신속한 이동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10 월- 후백제 견훤, 신라의 왕경에 침입. 경애왕을 자살케 하고, 경순왕을 세웠다. 또한 친고려인사들인 국상 김웅겸(왕건을 신라에 초빙하려 했던 인물), 아찬 김률, 연식 등을 제거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때 끌려간 王弟 효겸과 재상 영경도 친고려 인사들 이었을 것이다. 

* 이것은 의자왕에게 했던 행주(行酒)의 보복이다. 이후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된 신라는 잔인무도한 견훤에게 신라를 넘길 수 없다 하여 인자한 왕건에게 신라를 넘기게 되는 것이다. 결국 백제와 신라는 3백년 간격으로 망해 버리고 만다.(풀어 읽는 우리 신화에서 “행주” 견해)] 

견훤이 의자왕의 원한을 갚고 백제 부흥을 내세웠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방민들의 호응을 얻기 위한 대의명분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것은 견훤이 무진주를 점령하고도 공공연히 칭왕하지 못한 것으로도 알 수 있는데, 견훤은 한낱 신라의 지방을 통치하는 지방관 임을 내세웠고, 그것은 그가 대외적으로 후백제왕을 자칭하고 設官分職 등 정치체제를 수립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외교(중국과 일본)관계에서도 신라 지방관의 지위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왕건과 주고 받은 문서에서도 (당시 견훤정권은 막강한 군사력 -경애왕을 참하고 공산전투에서 승리했을 당시에도- 을 가지고 신라에 압력을 가하고 있던 시기) 견훤은 신라에 대해 자신들은 군신관계임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 이것은 왕건의 경우도 마찬가지 였다고 함. 결국 견훤이 경주에 침공한 목적은 신라를 병합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국상 김응렴을 통해 고려와 결합하여 견훤정권에 대항하려는 경애왕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애왕은 박씨왕으로 신라왕실 내에서 김씨 진골 왕족들의 도전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견훤은 박씨왕을 제거하고 김씨왕을 세운다는 대의 명분을 내세워 신라 내의 김씨 왕족으로부터 경주침공의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왕위계승 서열상 신덕왕보다 앞에 있던 효종의 아들 김부, 경순왕을 왕위에 옹립한 것이며 때문에 경순왕은 견훤에 의해 옹립 되었으면서도 별다른 반발없이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 견훤의 신라 침공은 역시 신라의 멸망이 아니라 친고려주의자 경애왕의 제거에 있었다. 당시 박씨왕이었던 경애왕은 김씨 진골귀족 들에게 또한 불만이었고 견훤의 침공당시 김씨 진골들에게 모종의 협조를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해 고려 구원군이 채 당도하기도 전에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술자리를 베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장면은 견훤의 군대가 포석정에까지 이르렀을 때도 유흥은 계속되었다. 

 <동사강목>에는 “경애왕은 호위군사가 없자 다급한 김에 손수 병풍으로 가리고 광대 1백여 명으로 막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황급히 이궁으로 달아나 숨었으나 곧 군사들에게 잡혀와 견훤의 강요에 의해 자결해 죽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견훤에 의해 아비규환이 되었던 신라의 궁정을 신라인들은 잊지 못하였고 결국 경애왕의 친고려정책은 고려가 한반도 통일의 승자가 되었으므로 혜안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 당시 견훤은 궁중으로 들어가 억지로 왕비를 강간했다고 하는 기록을 역사서들은 한결같이 남기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 자결을 강요했던 견훤이 과연 그와 같은 금수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었을까? 

하여간 이 일로 인해 견훤은 씻을 수 없는 오명을 입게 되는데 아마도 이것은 견훤을 악인으로 만들기 위해 조작된 사건일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본다.
 
12 월- 공산전투. 왕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제. 친히 정예한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공산 동수(대구)에서 견훤과 전투. 견훤의 군대가 왕건을 포위하여 사태가 위급해지자 신숭겸과 김락이 힘을 다해 싸우다가 희생되고 왕건은 단기로 도망하였다. 
* 견훤에게 패한 왕건이 군대를 이끌고 공산 밑의 한 조그마한 봉우리를 보존하고 있는데 이곳이 태조지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 고려 태조가 진훤과 더불어 물을 사이에 두고 대진해서 화살이 수중에 쌓였다. 그래서 이곳을 살내라 부른다. 태조는 신숭겸의 시신에 머리가 없자 목공에게 명하여 머리와 얼굴을 새겨서 만들게 하고 의복을 갖추어 입힌 후, 후하게 장례를 치뤄 주었다. (증보문헌비고) 

* 신숭겸은 용모가 왕건과 흡사하였으므로 왕건을 대신해 죽고자 했다. 그리하여 왕건으로 하여금 깊은 숲 속에 숨도록 하고는 자신이 왕인 것처럼 어차를 타고 나가 싸우다 전사했다. (대동운부군옥. 평산신씨고려태사장절공유사) 

* 신숭겸의 시신은 그의 왼쪽 발에 있는 북두칠성 모양의 검은 사마귀를 보고서야 찾았다.(동사강목) 

* 남군이 신숭겸의 머리를 베어 차에 꽂아 가져갔다.(대동운부군옥) 

- 견훤, 기세를 타 신라의 大木郡(안동지방) 침공, 곡식들을 불사름. 

- 견훤, 고려의 벽진군(성주)을 공격하여 대목, 소목(칠곡) 두개 군의 곡식을 베어감. 고려 장군 索相(색상)이 전사. 

* <증보문헌비고>에는 칠곡 조에는 왕봉이라는 지명의 유래있는데 이것은 견훤에게 쫓기던 왕건이 이곳에 숨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 견훤, 왕건에게 국서를 보냄.
 

▶  928년  1 월 - 왕건, 견훤에게 답서를 보냄. 
- 명주 장군 김순식이 조현하러 옴. (고려가 위기에 빠진 상황이었기 때문) 왕건이 왕씨의 성을 내려주고 대광을 임명. 아들 장명에게는 염이란 이름을 내려주고 원보를 임명. 小將 관경에게도 역시 왕씨 성을 내려주고 대승을 임명. 

- 후백제의 남군이 강주를 공략하자 북군의 원윤 김사과 정조 직량 등이 구원하러 병력을 이끌고 출동하였으나 후백제 남군의 성주 흥종이 초팔성(초계)을 통과하는 북군을 급습하여 고려의 김상을 전사시킨다.
 
2 월- 고려, 대상 염상과 능강을 보내 안북부에 성을 쌓고 원윤 박권으로 진두를 삼아 개정 군사 700명을 거느리고 이를 지키게 함. 
4 월- 왕건, 탕정군(온양)에 감. 
- 운주의 옥산에 성을 쌓고 지키는 군사를 둠.
 
5 월- 견훤, 강주를 기습. 강주 원보 珍景(진경) 등이 고자군(경남 고성) 에 양곡을 운반하여 강주가 빈 사이에 견훤이 강주를 기습하였다. 진경 등이 급히 돌아와 싸웠으나 패배하고 300명 전사. 장군 유문은 후백제에 귀부. 
7 월- 왕건, 몸소 삼년산성(충북 보은)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해 청주로 도망했다. 이에 견훤이 장수를 보내 청주를 침공하였다. 
이때 유금필이 명을 받들고 탕정군에 성을 쌓고 있었는데 꿈에 한 대인이 말하기를, “내일 서원에서 변란이 있을 것이니 빨리 가라” 고 하였다. 금필이 놀라 깨어 바로 청주로 달려가 후백제 장수와 싸워서 이를 패배시키고 추격하여 득기진에 이르러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300여명이었다. (절요)
 
8 월- 왕건, 충주로 물러감. 그 때 견훤이 관흔을 시켜 양산에 성을 쌓았기 때문에 왕건은 명지성(포천) 원보 왕충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양산을 쳐서 패주케 함. 관흔은 퇴각하여 대야성을 확보하고 군사를 풀어 대목운의 벼를 베었다. 또 그 다음에는 오어곡에 군사를 나누어 주둔하니 죽령 길이 막히었다. 이에 왕건이 왕충등에게 명령하여 조물성의 형세를 정찰케 함. 
* 이때 견훤의 남군이 유독 대목군 등의 벼를 베었던 것은 벽진군의 장군인 이총언이 양식을 비축하여 고립된 성에서 잘 버텼기 때문으로 전투에 임하지 않는 데에 대한 보복이자 고사책이었다. 이후로 남군은 계속 북상하여 오어곡에 주둔함으로써 죽령의 길을 막았다.
 
10 월- 견훤이 부곡성을 함락시킴.
11 월- 견훤, 대야성 확보. 
- 신라의 승려 홍경이 후당에서 대장경을 가지고 고려로 옮. 
- 후백제, 고려의 烏於谷城(오어곡성-군위)을 공격해 고려군 1천명을 죽임. 장군 陽志, 明式 등 6인이 탈출하여 항복. 왕건이 그 소식을 듣고 군사들을 구정에 모아 놓고 6명의 처자들을 그 앞에서 조리를 돌리고 저자에서 사형시킴. 

- 이 해에 고려 태조 북계에 순행하여 진국성을 옮겨서 쌓고, 통덕진 이라 고침. 원윤 충인으로 진두를 삼음. 
 

▶  929년  1 월- 후백제의 상선이 일본 쓰시마에 표착. 
- 후백제가 나주를 점령하였다. 나주는 바닷길로 통하는 길이었고 왕건의 처향(妻鄕)이기도 하였던 만큼 고려측에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로서 후백제는 서해의 재해권까지 지배해나갔다.
 
3 월- 고려, 대상 염상을 보내 안정진에 성을 쌓고, 원윤 언수고로서 이를 지키게 하며, 또 영청현에 축성함.
4 월- 고려 태조, 서경에 행차하여 주진을 순시.
5 월- 쓰시마 수가 후백제의 표류민을 송환해줌.
6 월- 天竺國 삼장법사 마후라(摩후羅), 고려에 옴.
7 월- 왕건, 기주(경북 풍기)로 가서 각주 진들을 순행.
9 월- 견훤, 갑사 5천명을 이끌고 의성부 침공. 고려 장수 홍술 전사. 이에 태조는 나의 좌우의 손을 잃었다고 개탄하였다. 
* 후백제가 의성부를 점령하게 되면 고려와 신라의 연결통로가 봉쇄되는 동시에 고려의 영향권인 문경, 예천, 안동, 영주 일원이 그 남부의 요지인 의성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럼에 따라 이들 지역은 상호간에 횡적인 연결은 가능하지만 종적인 연결이 불가능하여 각개격파되기 십상이었다. 

- 견훤이 순주(안동시 풍산면)을 치니 장군 원봉이 도망.
 
10 월- 왕건, 剛州(경북영주)로 감. 왕식렴을 보내 안수진에 성을 쌓고 원윤 흔평으로 진두를 삼고, 또 흥덕진에 성을 쌓고 원윤 아차성으로 진두를 잡음. 
- 견훤이 장차 고사갈이성을 치려하니, 성주 흥달이 이를 듣고 나가 싸우려고 할제, 목욕하다가 갑자기 오른팔 위에 滅자가 있음을 보았는데, 그 후 10일만에 병들어 죽음. 

* 그 곳을 함락시켰는지는 기록에 없음
 
12 월- 견훤, 신라의 가은현(문경군 가은면)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함. 비록 이기지는 못하였으나 그 위세가 가히 압도적이었다. 남군은 절대 우세를 자랑하면서 북군을 연파해 왔고 이때까지 후백제 영역은 북쪽으로는 충청남도 당진에서 충북 청주, 보은, 충주로 이어지는 선이었다. 
그리고 소백산맥 이남으로는 합천을 위시해 대구, 칠곡 그리고 의성을 지배하에 두었고, 그 밖에 낙동강 서안의 진주를 비롯 경남지역을 석권하였다. 이와 더불어 대외 교섭의 걸림돌이었던 나주를 장악하여 이로써 후백제는 호남지역을 완전히 석권하게 된 것이다. 

- 견훤, 고창군(현 안동) 포위. 김선평, 권행, 장길 등 고창 제지 세력이 결사항전으로 성을 지켰다. 왕건이 예안진에 이르러 여러 장수와 의논하기를 “싸우다 이기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대상 공선과 홍유가 아뢰기를 “마땅히 샛길로 갈 것이요, 죽령으로 갈 수는 없다”고 함. 

유금필은 “죽을 마음만 가지고 살려는 계책이 없어야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인데 먼저 패배할 것을 염려함은 무슨 까닭인가. 만약 급히 구원하지 않으면 고창군 3천여명을 그냥 적에게 주는 것이니 급히 공격하기를 원한다”고 해 왕건이 그 말을 따랐다. 이에 유금필이 저수봉으로 부터 힘껏 싸워서 크게 이겼다. (절요)
 

▶  930년  1 월- 載巖城(경북 진보) 장군 선필, 고려에 귀부. 
- 안동 병산전투. 태조 왕건이 견훤과 더불어 古昌郡(고창군-안동) 병산 아래에서 싸워 크게 이겼으며, 죽이고 잡은 성과가 매우 많았다. 견훤은 고창군(안동부)을 치려고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석산에 영채를 마련하니 왕건은 백보 가량을 격해서 고을 북쪽 병산에 영채를 마련했다. 여러 번 싸웠으나 견훤이 패하여 사랑 감악이 사로 잡혔다. 

* 현지 전설에 견훤 (진훤-지렁이 설화)이 전세가 불리해지면 지렁이로 변해 모래 속으로 기어들어가 고려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이에 고려의 삼태사는 전략을 세워 물 속에 소금을 수없이 풀어 견훤은 배겨낼 수 없어 패주했다는 것이다. 

* 전투가 계속 될 무렵 이곳 호족인 성주 김선평과 권행 그리고 장길, 이 세 호족이 향군을 이끌고 북군을 지원했다. 현지 민심의 향배에 직접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지세에도 밝은 이들이 북군에게 협조했다는 것이다. 

권행은 과거 견훤이 경애왕을 시해했다는 이유로 고려에 귀순하여 치욕을 씻으려 한 것이라 한다. 그럼에 따라 견훤의 남군은 지극히 불리한 국면에 놓이게 되었고 저녁 무렵에 남군은 붕괴되어 남군의 전사자만 8천 명에 달할 정도로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한다. 오대산 상원사 동종은 북군이 승리한 사실을 청아한 소리로 알렸다 한다. 

- 병산 전투 다음 날에 견훤이 고창군에 장수를 보내 순주를 공격 함락하고 민가를 약탈해 갔다고 고하자, 왕건이 순주로 가서 그 성을 수리하고 장군 원봉에게 책벌을 줌. 

* 순주성 습격은 견훤의 상주 지역(아버지의 배신)에 대한 보복감을 엿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왕건의 경우는 첨해하게 입장을 달리한다.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가 상주 지역을 지킨 것이다.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930년 고창전투에서 패전한 견훤이 퇴각하면서 오히려 북쪽에 있는 순주를 공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납득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사실의 여부는 모른다. 

- 永安(영천), 河谷(하양), 直明(안동), 松生(청송) 등 30여 군현이 차례로 왕건에게 항복. 

* 이후 견훤의 후백제는 고려에 급격히 전세가 불리하게 바뀌어 간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견훤 정권 내의 정치적 혼란에 기인한 것이었다. 

즉 견훤왕의 후계를 둘러싼 내분이 이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이후로 호족들은 왕건에게 흡수되어 갔고 신라 정부는 새로운 질서에 순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순왕은 고려의 고창 전투 승리에 대한 축하를 보내오고 신라와 고려는 본격적으로 서로 교류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 이 때에 신라의 동쪽 연해 溟州(강릉)에서 흥례부(안동)에 이르기까지 110여성이 고려에 항복. 

- 북미질부성(경북 홍해) 성주 훤달이 남미질부성 성주와 함께 고려에 항복.
 
2 월- 永安(영천), 河谷(하양), 등 30여 군현이 차례로 왕건에게 항복. 
- 왕건,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승리를 알림. 
-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편지를 보내 서로 만나기를 청함. 
- 신라의 동쪽 연해 110여성이 고려에 항복. 
- 왕건이 니어진(경주지방)으로 감.
 
9 월- 개지변(울산)에서 최환을 보내어 고려에 항복하기를 청함.
12 월- 북미질부성과 남미질부성 성주가 함께 고려에 항복. 
- 우릉도(울릉도)에서 사신을 보내 지방의 산물을 바침. 
- 고려 태조, 서경에 행차하여 처음으로 학교를 창설.

 

▶  931년  2 월- 신라왕이 태수 겸용을 보내 다시 왕건과 만나기를 청함. 
- 왕건, 50여기를 이끌고 신라의 왕도를 방문. 이후 군사요지에 고려 장수를 주둔시켜 후백제의 침입을 대비. 
3 월- 유금필이 참소를 입어 곡도로 귀양감.
11 월- 왕건, 서경에 순행.


▶  932년  4 월- 고려, 후당에 사신을 보냄.
5 월- 왕건, 서경에 재변히 심하다며 직무를 공정하게 실행하라고 지시.
6 월- 후백제 장수 공직(매곡성 성주), 고려에 투항. 견훤은 공직의 두 아들과 딸 하나를 잡아서 다리 힘줄을 지져서 끊었다. (삼국유사) 
* 공직의 고려 귀부는 견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매곡성은 중요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또한 공직이 고려로 귀부한 것은 자신의 고을 보전이라는 현실적 이해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후에 공직이 왕건에게 “일모산군은 경계가 저의 고을과 인접해 있어 제가 귀화한 까닭으로 항시 침략을 일삼아 백성이 생업에 안정하지 못하므로 일모산성을 빼앗아.... 다스리겠습니다”하자 왕건이 허락했다고 한다.
 
7 월- 공직의 부추김으로 왕건의 북군은 일모산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 태자 무를 보내 북쪽 변경을 순찰하게 함.
 
8 월- 후백제, 일길찬 상귀를 시켜 수군을 거느리고 고려의 예성강으로 쳐들어와 염주, 백주, 정주 등 세 고을의 배 100척을 불사르고 저산도 목장에 있는 말 3백필을 약탈하였다. 
견훤은 일모산성 공격에 대한 보복전을 계획하여 염주(황해도 연안), 백주(황해도 배천), 정주(개성 풍덕)를 친 것이다.
 
10 월- 복수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견훤의 해군 장수 상애 등이 대우도 (평북 용천)을 공격하게 하였다. 곧 왕건이 대광 만세 등을 보내 대우도를 구원하려 했으나 이기지 못해 (후백제는 고려군의 해군력을 궤멸시키고 서해의 재해권을 완벽하게 장악하였다) 왕건이 근심하였다. 
이에 유금필이 곡도에서 글을 올리기를 “신이 비록 죄를 짓고 귀양 중에 있으나 후백제가 우리 해변 고을을 침공했다는 말을 듣고 신이 이미 장정을 뽑아 전함을 수리하여 이를 막으려고 하오니 임금께서는 근심하지 마시기를 원합니다”하였다. 

왕건이 이 글을 보고 울면서 “참소를 믿고 어진 사람을 쫓은 것은 내가 밝지 못한 탓이다” 하고 사자를 보내 불러와서 위로하기를 “경은 실상 죄가 없는데도 귀양간 것을 일찍이 원망하지 않고 오직 나라를 도울 것만 생각하고 있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고 뉘우치는 바이다. 후사에까지 상을 미치게 하여 경의 충성과 절의에 보답 하겠다” 고 함. (절요)
 
11 월- 고려, 내봉경 최응 죽음 

▶  933년  3 월- 후당에서 왕건 책봉. 이때부터 천수 연호 대신 후당 연호를 사용.
5 월- 후백제 신검, 혜산성과 아불진을 공략. 
- 왕건, 유금필을 보내 아불진을 구원케 함. 정남 대장군 유금필이 의주부를 지키는데, 왕건이 “후백제가 혜산성과 아불진 등을 약탈 한다고 하니, 만약 신라의 국도에까지 침공하거든 마땅히 가서 구원하라”하였다. 

이에 유금필이 장사 80명을 뽑아 달려가 사탄에 이르러 후백제 신검 등을 만났는데, 후백제 군사들이 유금필의 군사가 날래고 용맹한 것을 보고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무너졌다. 

유금필이 신라에 이르니 백성들이 울면서 절했다. 7일만에 경주에서 돌아올 때 다시 신검을 자도에서 만나 싸워서 크게 이겼다. 유금필이 돌아와 왕건을 뵈니 왕건이 궁전에서 내려와 그를 맞이하여 손을 잡고 치하했다. (절요) 
 
▶  934년  7 월- 발해 세자 대광현이 수만명을 이끌고 내부.
9 월- 고려의 선박이 후당의 등주에서 무역. 
- 노인성이 나타남. 남극성의 다른 이름으로 수성이라고도 한다. ‘사기’천관서에는 “남극성이 나타나면 평안무사하고 남극성이 출현하지 않으면 전쟁이 발생한다”라고 하였다. 

- 왕건, 운주(충남 홍주) 정벌.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갑사 5천명을 이끌고 이르러 “양편의 군사가 서로 싸우니 형세가 양편이 다 보전하지 못하겠소. 무지한 병졸이 살상을 많이 당할까 염려되니 마땅히 화친을 맺어 각기 국경을 보전합시다” 하였다. 

왕건이 여러 장수들과 의논하니 유금필이 “작금의 형세는 싸우지 않을 수 없사오니, 임금께서는 신 등이 적군을 부수는 것만 보시고 근심하지 마소서”하였다. 

견훤이 진을 치기 전에 강한 기병 수천명으로 돌격하여 3천명의 목을 베고, 술사 종훈, 의사 훈겸과 장수 상달, 최필을 사로잡았다. 이 소식을 듣고 웅진 이북 30여성이 제풀에 항복함. (절요) 

* 이 운주성 싸움은 견훤 자신이 주도했던 일생일대의 마지막 전투였다. 

- 웅진 이북의 30여개 성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  935년  3월 - 후백제 신검(양검과 용검) 형제, 아우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함. 
4 월- 왕건, 고려의 유검필이 나주를 정벌함. 이때 유검필에 의해 장악된 나주는 곧 견훤의 탈출로로 사용이 되는데, 견훤의 고려 귀부는 견훤의 의사타진과 고려에 공작에 의해 치밀하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고려는 견훤의 탈출로로 나주를 선택하고 그곳을 정벌한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6 월- 견훤이 나주로 탈출하여 고려에 투항하기를 청함. 견훤이 들어오자 왕건은 상부로 칭하고 남궁을 사관으로 지정.
10 월- 신라왕 김부가 김봉휴를 보내 고려 정부로 들어오기를 청함.
11 월- 후백제 신검, 새 왕으로 즉위함.
12 월- 신라 경순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고려에 투항. 
- 왕건이 천덕전에 나와 뜰에서 신라왕의 배례를 받음. 
- 김부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음. 
- 왕건이 경순왕 김부의 백부인 잡간 억렴의 딸과 혼례.

▶  936년2월 - 견훤의 사위 박영규, 고려에 투항하기를 청함.
6 월- 고려, 견훤의 요청에 따라 후백제 신검을 정벌하기 위해 출정. 우선 태자 무와 장군 희술을 시켜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천안부로 가게 함. 
* 왕건이 후백제를 치기 위한 전진기지로 천안을 선택한 것은 교통의 요로 임은 물론 당시 의탁했던 풍수지리설과 관련이 없지 않다. 또한 바로 전주로 직공하지 않고 천안을 거쳐 선산으로 내려간 것을 신검 군대를 기만하기 위한 양동작전으로 보는 시각도 있고 낙동강을 병참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라는 설도 있다. 

- 왕건, 삼군을 거느리고 천안부에 가 병력을 합세.
 
9 월- 후백제군 일선군(선산)의 일리천 전투에서 고려군에 참패당함. 신검이 고려에 항복. 후백제 멸망. 
고려 태조(60세), 삼군을 거느리고 천안부에 병력을 합세하여 일선군 (경북 선산)으로 나아가니 신검이 무력으로 이에 대항하였다.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북과 남군은 진을 쳤다. 왕건, 견훤과 함께 군사들을 사열하여 군사가 총 8만 5천명이었는데 당시 견훤은 박술희 등과 함께 마군, 즉 기병 1만 명을 지휘하였다. 

이외에 왕건의 북군은 능달이 지휘하는 보병 1만 명을 좌강에, 홍유 등이 지휘하는 기병 1만 명 삼순 등이 이끄는 보병 1만 명을 우강으로 삼았으며 김순식과 긍준, 왕렴, 왕예 등이 지휘하는 기병 2만 명, 유검필 등이 이끄는 흑수, 달고, 철륵 출신의 기병 9천 5백 명, 정순 등이 이끄는 보병 1천 명, 종희가 지휘하는 보병 1천 명, 김극종이 이끄는 보병 1천 명을 중군으로 삼았다. 또 공훤이 이끄는 기병 2백명 등 10만 대군이라 일컫을 만했다. 

- 군사를 정비한 후 북을 치며 진군하니 갑자기 창검 형상으로 된 흰 구름이 고려 군사가 있는 상공에서 일어나 백제 쪽으로 떠갔다고 한다. 

- 백제 좌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 등 4명이 창을 버리고 견훤이 타고 섰는 말 앞에 와서 항복함. 이에 적측의 사기가 저하되어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 왕건이 효봉 등을 위로하고 신검이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이 말하기를 신검이 중군에 있으니 좌우로 들여치면 격파할 수 있다고 하였다. 

- 왕건이 대장군 공훤에게 명령하여 고추 적측의 중군을 향하여 삼군과 함께 일제히 나가면서 맹렬하게 공격하니 적병이 크게 패함. 백제 장수 흔강, 견달, 은술, 금식, 우봉을 비롯하여 3천2백명을 사로잡고 5천 7백명을 죽였다. 

- 백제군사들은 창끝을 돌려 저희들끼리 서로 공격하였다. 

- 고려 군사, 황산군까지 이르렀다가 탄령을 넘어 마성에 주둔하였다. 

- 결국 신검이 아우들인 청주(경남진주) 성주 양검, 광주 성주 용검과 문무 관료들을 데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 견훤, 등창이 나서 수일만에 황산 불사에서 죽음.
 
12 월- 왕건이 송악으로 돌아와 문무백관과 백성들의 조하를 받음. 
- 고려 대광 배현경 죽음.

▶  937년5 월
(고려 20년) - 경순왕, 진평왕의 王帶를 태조에게 바침. 
- 왕규와 형순을 진나라에 보내어 건국을 축하.

▶  938년 12월 - 탐라국 태자 말로, 개성에 와서 조공. 
- 박승 등 3000호의 발해인 내투.

▶  939년3 월- 좌승 공직 죽음.

▶  940년  3월 - 경주에 대도독부 설치하고 주부군현의 이름을 고침.
7 월- 왕사 충담이 죽음.
12 월- 개태사 완공. 낙성화엄법회를 열고 왕건이 친히 소문을 지음. 
- 이 해에 신흥사를 중수하고 공신탑 설치. 
- 처음으로 역분전 정함.

▶  941년  4 월- 대광 유금필 죽음

▶  942년 10 월- 거란, 낙타 50필을 보내옴. 그러나 왕건은 거란과 국교단절함.

▶  943년  4 월
(고려 26년)  - 왕건, 내전에 거둥하여 대광 박술희를 불러 친히 훈요십조를 줌. 
5 월- 왕건이 편치 못하여 정무처리를 정지. 
- 재신 염상, 왕규, 박수문을 불러 내외의 기밀한 정무를 맡김. 
- 왕건의 병이 위독하여 학사 김악에게 명령하여 유조를 쓰게 함. 
- 왕건 천수를 다함

'후삼국史보는 나무 > 후삼국시대 관련 펌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궁예 전설  (0) 2010.10.23
후삼국시대의 주변국 상황  (0) 2010.10.08
후 삼국시대 역사  (0) 2010.10.08
후 삼국의 시대적 배경  (0) 2010.10.08
자료  (0) 2010.10.07
by 초령목 2010. 10. 8. 19:07

http://osmstar.com.ne.kr/goreosajelo/kframe1.htm 고려사절요
http://blog.naver.com/sup516/


 

- 삼국사기 : 네이트 한국학

 

네이트 홈페이지에 있는 한국학 코너에 가시면 삼국사기 번역 및 원문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찾기 힘드실 테니, 간략 링크를 걸어 드리죠.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 고려사절요 : 한국고전번역원

 

기전체의 <고려사> 와 사실상 내용이 대동소이한 편년체의 <고려사절요> 가 원문, 번역본 모두 서비스되는 곳입니다. 이 곳에는 그 외의 여러 서적들(예: 열하일기, 해동역사, 동사강목, 경세유표 등)도 서비스되니 한 번 살펴 보세요. 찾아 들어가기 힘드실 수도 있으니 역시 간략링크 걸어드립니다.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

 

-삼국유사 : 직지 프로젝트

 

다음 사이트로 가시면 됩니다.

 

http://html.jikji.org/samkukyusa/

 

'후삼국史보는 나무 > 후삼국시대 관련 펌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궁예 전설  (0) 2010.10.23
후삼국시대의 주변국 상황  (0) 2010.10.08
후 삼국시대 역사  (0) 2010.10.08
후 삼국의 시대적 배경  (0) 2010.10.08
후삼국시대 연표  (0) 2010.10.08
by 초령목 2010. 10. 7. 09:46
| 1 2 3 |